criticism

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1)

―‘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우리는 이민자나 장애인,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은근하거나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유튜버와 정치인의 말을 듣고,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발 소문과 담론 들에 노출되고, 그것들에 반응하면서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친구와 절교하고, 대선 토론을 보고, 정치인이 불안의 해소를 약속하거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마침내 선거장에 가서 어떤 선택지를 고른다. 그 결과로 누군가 당선되고 세대별·지역별·성별 표심이 나타난다. 설문조사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정교하게 재연함으로써 개연성 있는,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는다. 즉 한국 현실정치의 ‘현실’을 바로 그러한 현실로 구성하는 질문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현실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질문과 선택지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동일한 대립 구도의 논리에 가둔다.

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2)

―‘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오늘 사실인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만들 것인가?’ ‘오늘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되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난해한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변하기 힘든 사실이라면, 우리는 거의 모든 동료, 친구와 마찬가지로 극우화되었다는 이들과 이 땅에서 평생 함께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청년 남성 극우화’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로 들여다보라. 청년 남성들이 어여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볼 때만 변화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비판의 초점을 옮기자는 제안은,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말이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사물의 주름을 펼치자는 말이다.

죽은 건물의 축제

―황인찬, 김복희, 김선오의 사례

이 글에서는 지난 10년 한국 시의 일면을 돌아보기 위해 세 권의 시집을 살펴보려 한다.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 김선오의『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이다. 열거한 시집들에는 공통으로 어떤 건축의 불가능성, 어떤 건축물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다. 동시에 깨지거나 녹아내린 건물의 잔해를 어떻게 활용할지, 나아가 건축의 불가능성을 어떻게 타개할지 시험하는 나름의 방법이 제시된다. 그래서 세 시인의 시들을 통해 어떤 건축이 불가능해졌고 새롭게 가능해지는지를 점쳐볼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예소연에 대한 노트

막 주조되고 있는 작품 세계의 생명력과도 같은 이 뜨거운 불순함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의 방법으로, 이 글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돌봄고독이다.

누군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지니면서부터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주변을 맴도는 애타는 방황의 과정이 된다.

매력의 두 문제

―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경험적 자극들에 지적·도덕적으로 거리 둘 수 없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휩쓸리고, 방황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 출발점이다.

장르와 수동성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한 노트

이시구로 소설의 모든 인물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만, 그렇다고 그 인물들이 다 같은 의미를 지니는 인물들인 것은 아니다. 운명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듯, 수동성에도 여러 결이 있다. 특히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전적으로 순응적이지만,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보다 강해 보이기도 한다. 클라라는 환경을 예민하게 감응하고, 세계를 관찰하고 배운다. 자연 속에서 터전을 꾸리는 동물들처럼 목표를 설계하고, 끈질기고 기민하게 수행한다. 클라라가 세계를 배우는 방식은 세계를 ‘감수’하는 과정 그 자체다.

배움의 단계들

―손보미, 「불장난」 읽기

눈이 가려져 있던 사람이 세계의 뒤편에서 눈을 뜨고, 삶으로 도약하는 이러한 되찾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압도하게 되는 그 배움의 여정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과정에서 허상은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그것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그만큼 우리는 예술로부터 한없이 중요한 것을, 우리가 매달리는 삶의 그 문제를 배울 수 있다. 가르치는 것도 배움의 끝은 아니다. 오히려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 배움들을 배우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거짓되고, 고통스러웠던 배움의 단계들은 이 단계에서 복기될 때 비로소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다. 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비판 이론에 주안점을 둔 비평이 아니라 ‘배움의 이론’에 주안점을 둔 비평을 제안하고,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설득하는 데 있다.

그리고 지금 배움을 말하는 것은 비판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전방위적으로 위태로운/비판적인(critical) 지반 위에서 다르게 살고 말할 방법을 찾을 것인가? 어떻게 권위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면서, 또 ‘나는 그들보다 올바르고 똑똑하다’는 식의 자기만족으로 도피하지 않으면서 함께 변화할 것인가?

한 사람의 모국어

―민병훈, 『달력 뒤에 쓴 유서』(민음사, 2023)

중요한 것은 언어에 대한 존재의 이중성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인 다의성이다. 한 사람이 정말로 많은 영혼을 가졌듯이 상황은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다의성을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가 애도도 이해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고독이 모국어 속의 작은 외국어를 만들도록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상실, 외로움, 원망, 몰이해, 자기 정당화를 통과하여 이해받기를 단념할 때, 모든 쉬운 이해와 극복을 포기할 때,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해의 가능성이 열리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짧은 2부가 타진하는 것은 그러한 역설적인 이해의 가능성인 것처럼 보인다.

기울어진 시, 찢어진 세계

―21세기 생태시 비평을 위한 제안

따라서 우리의 생태시와 비평은 다음의 함정들을 피하는 좁은 길을 찾아야 한다. 1: 비인간 존재를 인간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동원할 수 있게 하는 독단적 전제들, 문화적 코드들에 의존하기. 2: 1을 비판하면서 비판적 겸손함으로 물러나기. 3: 2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편’에서 ‘사물의 편’으로 건너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매력의 경제학

매력은 몸과 깊이 연루되는데, 매력이 한 사람을 신체적 기호들(냄새, 말투, 옷차림, 제스처, 예절, 분위기 등)의 조합(assemblage)으로 파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매력의 경제는 이 기호들의 의미와 위상에 관여한다. 매력의 경제는 정동과 윤리, 미학과 정치, 재현/대표(representation)와 배움의 문제를 포괄하지만, 특히 장르와 삶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매력의 경제와 연결 지어 손보미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비교해 보려 한다. 프루스트와 손보미의 소설은 각자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매력이 문제 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밈화된 시대의 예술작품(2021)

삶의 장르화가 우리 시대에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그리고 ‘급진적’이라는 말이 문화의 지배적인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면) 오히려 급진적인 예술은 ‘삶의 장르화’에 반대하여 ‘예술의 삶-되기’라는 공식의 업데이트를 요구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임무가 제도적 예술이나 특정한 플랫폼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문학의 탈중심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차별적으로 뒤섞이고 있는 장르들의 평면 속에서 어떻게 삶을 재발명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재현의 한계를 넘어

―강동호,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문학과지성사, 2022)

책은 ‘담론 바깥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단순한 바깥과는 구분되는 의미의 ‘외부’라는 영역을 교환 내부에서 발견하려는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에서 두 개의 어조를 알아볼 수 있다. 기성의 비평들, 담론들을 집요하게 분석·비판하는 부분과, 담론화되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것 혹은 “불능의 외부”를 찾으려는 소망이 나타나는 부분은 미묘하게 다른 어조로 쓰여졌다. 어조의 차이는 책 전체에 긴 리듬을 부여하면서 하나의 글 안에 촘촘하게 겹쳐져 있기도 하다. 이 글의 질문들은 바로 책의 그 긴장과 관련 있다.

신시사이저 은하계

―신종원론

한 오페라의 폐막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에게 낯선 세계의 열림보다는 익숙한 것의 닫힘이 먼저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신종원의 소설에 회고적인 음악적 질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적 알레고리에서 빠져나가는 텍스트의 자유로운 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음악적 질서와 거기서 벗어나는 소설의 힘에 대해 차례대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다른 이야기를 조금 많이 우회해야 할 것 같다. 복잡한 유기체 같은 신종원의 소설을 잘 포착하기 위해, 주위에 먼저 넓은 그물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유다

―미학·현실·보편성

관건은 사랑에서 모든 초월성을 배제하는 것, 또 로맨스 이데올로기를 배제하는 것,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로 만드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형상으로 퇴보하지 않는 것, 초월적이지도 하찮지도 않은 매일매일의 노고로서 ‘둘’의 형상을 창안하는 것이다. 사랑이 불가능해지자 시 쓰기 자체를 집어치워 버렸던 어린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물론 주체적인 재발명인 한에서, 어떤 형상이 재발명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문학에 나타난 참된 것을 부지런히 들여다보면서, 아마도 곧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d」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었듯 말이다. 물론 사랑의 재발명은 사랑을 지속하는 모든 연인이 오늘도 하고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익명의 형상으로 무대에 올리는 것은 종종 시인들의 일이었다.

옷의 딜레마: 경쟁하는 세계들

-이수명론

‘말라르메’와 ‘힙스터’는 주체의 죽음에 대한 상이한 두 개의 테마이다. 혹은 주체의 죽음 이후에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번/튕겨 나와”(「이디야 커피」) 존속하고 있는 ‘유령-주체’와 ‘익사체-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말라르메에게 주체의 사라짐은 세계를 완성할 단 한 권의 ‘책’을 위한 이념적 정향이었다. 세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완벽하게 보편적인 ‘책’을 위해 주체는 철저한 익명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반대로 힙스터에게 주체적 공허는 이미 주어진 실존적 조건이다. 그들은 그 공허를 다른 삶의 문법과 이미지를 수집하는 텅 빈 옷장으로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