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기호와 매력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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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할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1) 근대미학에서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매력에서 정화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있다.

(2) 그러나 동시대 문화, 경제, 정치에서 매력은 너무나 중요한 기제이자 힘이 되었다. 오늘날 문화의 재현 논리, 활력과 복잡성, 정치적 갈등, 정동의 흐름은 ‘매력의 경제’에 대한 고찰 없이 이해될 수 없다.

(3)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즉 새로운 미학이 작성되는―출발점이다.

(4) 매력의 경제는 감각적 자극, 섹슈얼리티, 지적 관심, 도덕적 관심, 미적 관심, 육체적 끌림, 충동, 수치심, 허영심, 이해관심 등이 분화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경험적’ 세계의 법칙이다. 매력은 한 인간을 신체적-담론적 기호들(피부, 표정, 비율, 머릿결, 냄새, 말투, 옷차림, 예절, 분위기, 평판, 지위 등)의 조합으로 파악하게 한다. 매력은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을 무차별적으로 뒤섞어 매력의 복합적인 서열로 환원한다.

(5) 또한 매력의 경제는 모든 ‘피투자자’의 능력·신용·사회적 책임·평판 등을 투자 가치로 환원하는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국가나 기업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모두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로 환원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셸 페어의 말처럼, 오늘날의 대안적인 정치 운동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

(6) 매력의 경제는 한편으로는 ‘금융적’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감각적’이다. 이 두 측면은 즉각적으로, 광범위하게 상호작용하지만, 이론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전자는 재현적·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나무를 말릴 때 나무가 갈라지는 미묘한 소리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목수나 조각가가 되려면 나무가 내뿜는 감각적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보여준다.

(7) 매력은 배우는 자를 대상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매력을 통해 촉발되는 배움의 운동은 배우는 자를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으로부터 빼내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실망과 상처, 수치심과 모멸감, 적대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장르, 기호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등록·재생산·유통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단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의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교차·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쟁론』에서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이것은 삶이 기호들·장르들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하거나 초월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우리 시대의 문화가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이미 여러 번 들었던 예이지만―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 등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비교적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상황을 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효과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받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만약 과거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나는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단지 영역들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제도적·위계적·영토적·관념적 경계들이 현재보다 더 견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했던 적이 없다.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지저분하게 분투하는 것, 이를 정치적·예술적 실천의 조건으로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어떤 실천이나 미적 실험이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하는데, 외견상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런 비판은 대책 없는 파국적 호소일 뿐이다.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이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적 조건 속에서이다. 아이가 거울 단계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듯이, 배우는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문화에 재현하는 한에서) 매력의 경제로 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마치 손보미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 속 아이들처럼―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거의 본능적으로’―학습한다. 이것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영역들에는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물론 매력의 경제라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광범위한 부작용이 있다. 매력의 경제는 이른바 ‘현실 정치’가 모종의 광적인 팬덤 문화처럼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에 의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종종 관심과 주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고 도발적으로 말하는 프로보커터이기도 하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 판단,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의 경계를 없애버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사회문화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고도로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거나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적대와 갈등은 결코 ‘순수’하거나 고상할 수 없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끔찍한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준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공격적/방어적으로 되며, 한편으로는 ‘부유하면서-당당하면서-아름다운’, 즉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를 갈구한다. 오늘날 Kpop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그러한 갈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유인하고 있다. 지식인, 활동가, 예술가 등이 고려해야 할 실천적 문제는 동시대 문화에 지배적인 매력적 형상과는 다른 매력적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잔여―‘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가 있느냐이다.

매력에 대한 레퍼런스 모음

(계속 추가)

화려한 필터보다 자본주의 내 매력……
―tripleS, 〈Girl’s Capitalism〉(2023) 가사 중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NCT, 〈무한적아〉(2017) 가사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비서 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 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있어〉(2012) 가사

_______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führt das schöne reizt). 숭고함으로 충만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얼굴은 진지하지만, 때때로 경직되어 있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생생한 느낌은 두 눈 속에 찬란히 빛나는 투명함에 의해서, 미소 띤 얼굴에 의해서, 그리고 종종 환한 웃음에서 생겨난다.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강조는 원저자.

_______수치심은 본성의 비밀이다. [……] 그러나 동시에 수치심은 본성의 가장 적합하고도 긴요한 목적 앞에 비밀스러운 장막을 드리우기 위해서, 그 목적에 관해 잘 알려진 지식이 혐오감을 주거나 혹은 적어도 무관심을 유발하지 않게끔 해준다. 이는 인간 본성의 가장 세련되고도 생동감 넘치는 경향성에 접목된 충동의 궁극적인 의도에 관한 한에서 그러하다. 아름다운 성[여성]에게 이런 기질은 극히 고유할뿐더러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한다. [……] 언제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듯이 우리는 지금도 비밀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으며 […]
―같은 책, 66-67

_______모든 이해관심은 취미판단을 더럽히고, 취미판단의 공평성을 앗는다. 특히 그것이, 이성의 이해관심처럼, 합목적성을 쾌의 감정에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합목적성을 이 쾌감에 근거 지을 때에는 그러하다. [……] 취미가 흡족을 위해 매력Reiz과 감동의 뒤섞임을 필요로 하고, 심지어 이것을 자기에 대한 찬동의 척도로 삼는 곳에서, 취미는 항상 아직도 야만적이다.
[……]
매력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비록 그것들이 미적인 것에서의 흡족과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이카넷, 2009, pp. 218-19. 강조는 원저자.

_______매력{자극}과 감동에 독립적인 순수한 취미만이 ‘문화화한{교화한}’ 것이라는 이러한 칸트의 생각은 초기의 것과 다르다. 『관찰』(1764)에서는 오히려 “숭고한 것은 감동을 주고, 미적인 것은 매력적이다{자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바뀐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같은 곳, 백종현의 역주 56 {}는 역자)

_______미의 감정은 스스로 보편적이고 즉각적이며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있기를 희망하는 반성적이고 개별적인 판단이다. 그것은 오직 영혼의 능력, 즉 쾌와 고통의 능력에 속하며, 형태를 계기로 발생한다. 이른바 무심한 쾌라는 그것의 운명이 걸리는 지점도 거기다.
주어진 대상의 재질이나 색채 음색 따위에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순간 미의 감각은 하나의 “즐거움agrément”으로, 일종의“성향 inclination”이 충족되는 데서 발생하는 쾌감으로 퇴행하고 말며, 이때 대상은 스스로의 현존을 통해 사람의 정신에 어떤 ‘‘매력”을 행사한 셈이라는 것이다.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적 쾌감을 대상의 향유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저 순수한 취미와 불순한 취미를 구별해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다시 말해 감각들의 취미 “Sinnengeschmack”로부터 반성적 취미 “Reflexiongescrunack”를 가려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성 일반은, 혹은 특히 미에 대한 즉각적 판단(감정)이라는 범례적 양식으로서 작용할 때의 반성은, ‘‘어떤 한정된 대상에 대한 의지의 복종’’으로정의되는 관심을 일체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성이란 어떤 정해진 기준이나 판단 규칙 없이, 따라서 어떤 쾌감을 유발할 일종의 대상 또는 유일한 대상을 예견하지 않은 체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_______순수하게 미적인 공통감각은 결국 전제되고 가정될 수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의 해결이 불충분한 해결이라는 것을 별 어려움 없이 발견한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어떻게 충분한 해결일 수 있겠는가? [……]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과연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23, pp. 191-92. 강조는 원저자.

_______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charme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 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력은 필연적으로 이기는 주사위 던지기입니다. [……]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조합으로 된 숫자입니다. 매력과 스타일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다른 말을 찾아서 대체해야 할 것입니다. 매력이 삶에 개체들보다 우월한 비개인적 역량을 부여하고, 스타일이 글쓰기에 씌어진 것을 넘어서는 외적 목적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또한 둘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입니다.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_______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apprenti은 없다.
―들뢰즈,『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 23)

_______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같은 책, p. 41)

_______이 진리들은 지성이 선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동하고 임무에 뛰어들면서, 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발견한 진리와 대립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들의 한계를 보았었다. 즉 그런 진리들은 ‘필연성’이 결핍되어 있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지성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같은 책, pp. 49-50)

_______욕망 이론에서 비판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 역시 칸트이다. 칸트는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 정의를 예시하기 위해 칸트가 미신적 신앙들, 환각들, 환상들을 원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런 식으로 욕망을 규정할 경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 대상의 현실은 심리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혁명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p. 59.; 강조는 원저자, []는 인용자.

_______마지막으로 기호가 재촉하는 응답 안에서. 응답의 운동은 기호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다. 수영하는 사람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모래사장에서 재생하는 수영 교사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개가 어떻게 배우는가를 말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거기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어떤 실천적인 친밀성familiarité, 기호들에 대한 친밀성이 존재한다. 이 친밀성을 통해 모든 교육은 애정의 성격을 띤 어떤 것이 되지만 또한 동시에 치명적인 어떤 것이 된다. 우리는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따라해야 할 몸동작을 보여주는 대신 다질적인 것 안에서 개봉해야 할 기호들을 발신하는 방법을 안다. 달리 말해서 관념적 운동성이란 없다. 오로지 감각적 운동성만이 있는 것이다. [……]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들뢰즈,『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p. 72-73.

금융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 국가 당국은 여전히 상충하는 요구의 균형자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심판관으로 행위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특히 신용 공급자의 요구와 정부를 선출한 시민의 이해 관계를 중재할 임무를 맡고 있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실제로 정부는 자국 영토는 물론이고 통화와 채권의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를 유지시키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유권자의 소망을 채권자의 신뢰에 종속시킨다.
―미셸 페어,『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대항 투기 운동가들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금융 시장에서 높은 가치가 매겨지고 있는 기업 거버넌스와 공공 행정의 기술이 터무니없이 리스크가 높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 으로는―단기적인 금융 수익보다 사회권과 생태 발자국 감소를, 지적 재산권 강화보다 지식과 건강 보험에 대한 접근권을 우선시하는 것과 같은―실현 가능한 대안들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같은 책, p.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