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6. 히스테리: 디시 레드필 갤러리와 남성 되기의 공포
우리는 불만을 정치적 몸으로 ‘조직화’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사례로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을 살펴보았다. 그와 가깝지만 다른 방향에 히스테리화가 있다. 여기서 히스테리는 임상적 진단도, 여성적 성격에 대한 낡은 편견도 아니다. 이 글에서 히스테리는 타자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요구하면서도 어떤 답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담론 형식과, 그 담론 형식의 끝없는 순환을 가동하는 교착 상태의 감정을 가리킨다. 라캉의 히스테리 담론(Lacan, 2007)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욕망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분열된 주체는 자신을 규정해 줄 것으로 기대되는 주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주인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새로운 명칭과 분류, 통계와 이론을 생산하지만, 그 지식은 주체의 분열을 해소하지 못한다. 답변의 실패는 더 많은 질문과 지식 생산을 촉발한다. 이 글에서 히스테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고통에 대한 최종적 답변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어떤 답변도 충분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담론적 순환이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가?”,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가?”, “왜 나의 고통은 말해지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는 답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확인하는―동시에 주인의 결핍을 확인하는―방식에 가깝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과는 대조적으로, 디시의 몇몇 마이너 갤러리는 불만의 정치적 조직화가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못할 때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준다. 미국정치 갤러리, 부정선거 갤러리, 레드필 갤러리 같은 공간을 예로 들 수 있다. 펨코가 (실제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좌파’에 대한 맹목적 증오를 깔고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고 제도권 정치에서 통용 가능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이러한 마이너 커뮤니티에서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 대의민주주의 체제, 심지어 ‘현대 사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지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절에서는 여러 마이너 갤러리 중 레드필 갤러리에 집중할 것이다. 레드필 갤러리는 연애, 자기계발, 남성성 담론과 극심한 여성혐오,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교차하는 징후적 장소다. 잘 알려져 있듯 ‘레드필’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에서 유래했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넨 빨간약은 안락한 가상현실 뒤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진실을 보게 하는 매개체다. 영미권의 커뮤니티에도 있는 레드필 갤러리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와 남녀관계 뒤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진실을 일깨워 남성들을 각성시키는 ‘이론’을 공유하고 전파하는 공간이다(코플런드, 2025 참조).
디시 레드필 갤러리에 접속하면 게시판 맨 위에 공지 사항으로 고정된 게시글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를 볼 수 있다. 이 ‘입문서’는 몇 개의 연속적인 게시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서론편’ ‘연애편’ ‘자기계발편’이 있으며 연애편과 자기계발편은 또 각각 복수의 게시글로 나뉘어 있다(그림 6).

이 목차는 이 갤러리의 관심사가 연애와 연애를 위한 자기계발에 집중되어 있음을, 그리고 유저들이 그 관심사를 나름의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구성하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레드필 이론의 기본적인 전제는 남성을 복수의 등급(알파남, 베타남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는 늑대처럼 무리를 이루는 동물의 상투적 이미지에서 우두머리 수컷과 추종자 수컷이 나뉘는 방식과 유사하다. 남성의 ‘급’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도, 혹은 여성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정도다. 남성들 사이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카리스마도 고려된다. 서론편의 일부를 살펴보자.

이처럼 레드필 이론은 노골적으로 ‘급’을 나누어 모든 남성과 여성을 모종의 서열 속에서 보게 한다. 온통 ‘급 나누기’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냉혹한 논리를 내면화한 뒤 더 높은 ‘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서로 ‘채찍질’하는 것이다. 여기서 친밀함이나 다정함 등 ‘현대 사회’가 권장하는 사교적 덕목은 남성들을 유약하게 만들고 옭아매기 위해 기획된 거짓 도덕으로 여겨진다. 남성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은 ‘급’을 올려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철저하고 냉혹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남성이 따라야 할 유일한 덕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급’을 올릴 수 있을까?

레드필 담론은 연애를 비롯한 사회관계를 게임의 논리로 이해한다. 모든 관계는 전략과 거래의 문제로 환원된다. ‘급’은 외모, 사회적 행동력(게임 능력), 돈, 지위라는 4가지 지표로 구성되는데, 그 모든 요소에서 평균 이상으로 뛰어나야 ‘알파남’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머지를 모두 갖추더라도 하나의 요소에서 실패한다면 “인생이 망”할 수 있다. 조금만 삐끗해도 알파남의 기준에서 탈락할 수 있다. 무리마다 ‘우두머리’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머지 평범한 남성들은 모두 ‘베타남’(혹은 베타남조차 아닌 무언가)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레드필 담론이 표상하는 남성성은 너무나 버겁고 환상적인 무언가이다. 평균적인 남자, 혹은 어떤 요소에서 뛰어나더라도 다른 요소가 미달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버림받거나 이용당할 것이다. 모든 여성이 자신보다 ‘급’이 높은 남성을 선택한다는 ‘하이퍼가미’ 이론에 따라 평범한 남성은 연애 시장에서 도태된다고 여겨진다. 좋았던 옛날―페미니즘과 좌파의 준동이 없었던 옛날―에 평범한 삶의 약속이었던 연애와 결혼은 이제 도달하기 극히 어려운 자격시험처럼 변했다.
레드필 갤러리는 에바 일루즈(2010, 2013)가 말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 사랑의 모순이 어두운 방식으로 극단화되어 나타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코플런드, 2025). 동시대 사회에서 낭만적 사랑은 여전히 엄청난 사회적·인격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여하한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가 붕괴하거나 약화된 시대에, 낭만적 사랑은 온갖 인격적·사회적 기능(개인의 성장, 돌봄, 위로, 안식, 즐거움, 재생산 등)을 몽땅 짊어지게 된다(일루즈, 2013). 또한 사랑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적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매력 있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사랑은 데이팅 앱이나 결혼정보회사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외모 평가, 경제력 평가, 인격 평가, 자기계발 담론 속에서 점점 더 수치화되고 시장화된다(일루즈, 2010). 사랑은 낭만적인 것으로 이상화되는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계산되어야 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이런 모순을 체화한 레드필 갤러리의 유저들은 연애에 너무 많은 소망을 의탁하면서도 연애를 한낱 거래의 문제로 상대화하며, 남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세속적인 기준을 따지는 오늘날의 여성들을 증오하고 비방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앞장서 남성과 여성을 첨예하게 등급화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자신이 세운 엄격한 기준에 언제나 자신이 미달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고, 연애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 만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실망도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절은 남성 탈락 혹은 ‘도태’의 공포와 결합하면서 히스테리적 양상을 띤다. 예컨대 많은 추천을 받은 ‘개념글’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을 보자. 이 글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을 전제한다. 그 논리는 유사과학적인 사회진화론에 의존한다. 작성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자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상정한 뒤 현대 사회가 이 자연적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는 남성을 여성화하고, 여성을 남성화한다. 그리고 이 ‘역전현상’의 가장 큰 책임은 페미니즘에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작성자가 모든 책임을 페미니즘에만 돌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남성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작성자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논리에 말려들어 스스로 ‘여성화’되었고, 심지어 여성을 부러워하며 여성처럼 되려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비방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남성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 작성자는 그 불안을 페미니즘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지만, 동시에 남성 내부의 붕괴와 배신을 문제 삼는다. 이 게시물의 요지는 영미권 인셀 커뮤니티에서 발견되는 ‘질 선망(vagina envy)’의 논리(코플런드, 2025, 129)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인셀 담론에서 일부 남성들은 여성이 성적 선택권과 사회적·성애적 관심을 더 쉽게 획득하고 누린다고 믿으며, 그 조건을 혐오하는 동시에 부러워한다. 여성은 경멸의 대상이면서 질투의 대상이고, 남성은 (자연적으로) 우월해야 하는 존재이면서 (현대 사회에는) 이미 상실과 실패에 노출된 존재로 여겨진다.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의 작성자 역시 유사한 모순 속에 있다. 그는 여성화를 저주하지만, 바로 그 여성화에 대한 강박적 상상을 멈추지 못한다. 이때 히스테리는 외부의 적을 향한 공격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남자는 무엇인가”, “왜 남성은 더 이상 남자답지 못한가”, “나는 아직 남성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불안한 담론 형식으로 나타난다.1
줄리엣 미첼(2025)이 남성 히스테리를 논하며 지적하듯 히스테리는 오랫동안 여성만의 병이나 증상으로 잘못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안정적인 상징적 위치를 상실하고 히스테리에 노출될 때 다시 한번 미묘한 전도가 일어난다. ‘히스테리는 곧 여성적인 병’이라는 여성혐오적 편견 때문에, 여성 히스테리증자는 ‘여성적인 여성’이라는 묘하게 매혹적인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반면, 남성 히스테리증자는 “부정적인 극점”에 위치하게 된다(같은 책, 37). 즉 남성이 남성성에서 탈락할 것 같다는 불안으로 히스테리적 증상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남자답지 못한 남자’라는 낙인 아래 더 매력적이지 못한 남성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레드필 갤러리에는 종종 (‘어그로’라고 할 수 있을) 조롱과 비방이 올라온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못생기고 능력이 없어 여성을 만나지 못하는 남자들이라는 도발 혹은 자조가 반복된다.
레드필 갤러리의 자기계발 담론은 ‘잔인한 낙관’(벌렌트, 2024; 코플런드, 2025)의 형식을 취한다. 운동을 해라, 돈을 벌어라, 외모를 개선해라, 말투를 바꿔라, 여성의 본성을 이해해라, 게임의 법칙을 배워라. 표면적으로 주체를 성장시키려는 조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악순환을 강화할 뿐인 명령들이다. 실패는 언제나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오고, 위로와 돌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좌절 때문에 커뮤니티에 들어온 남성들은 그곳에서 연대를 얻기보다 더 심한 자기학대와 타인학대의 언어를 배우게 될 뿐이다. 이 점에서 레드필 담론은 극도로 신자유주의적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끔찍한 파행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레드필 담론은 모든 관계의 실패를 자기관리의 실패로 환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거절하는 여성과 사회 전체에 대한 출구 없는 르상티망을 증폭시킨다. 그 때문에 히스테리적 질문은 하나의 악순환이 된다.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성들은 왜 나쁜가?”로 바뀌고, “왜 나는 바람직한 삶에 도달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사회는 왜 남성을 버렸는가?”로 바뀐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의 반복 자체가 커뮤니티를 유지한다. 부재하는 답은 더 많은 불만과 적대의 출발점이 된다. 코플런드가 지적한 것처럼 이 경로의 끝에는 극단적 허무주의와 폭력의 가능성이 있다(코플런드, 2025, 215 이하 참조). 모든 관계가 게임이고, 모든 실패가 자기 책임이며, 여성은 구조적으로 자신을 거부하도록 설계된 존재라고 믿게 될 때, 주체에게 남는 것은 냉소, 절망, 혹은 폭력적 환상뿐이다. 이 점에서 레드필 담론은 외로움과 인정 실패가 어떻게 극단적 여성혐오와 자기파괴적 정동의 악순환에 교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7. 결론: 평범함의 모순과 그 출구
이 글은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라는 세 가지 감정의 조합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아마 이 글에서 다룬 대부분의 문제는―문제마다 맥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청년 여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오늘날 여성들 역시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년 남성들이 유독 우익 포퓰리즘의 선동에 취약한 듯 보이고, 더 극심하게 우경화 혹은 ‘반민주당화’된 것처럼 보이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이 남게 된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대답은 그것이 전통적인 남성성 수행의 실패, 혹은 부담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수현(Lee, 2025)의 분석은 이러한 대답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불안정성이 곧바로 안티페미니즘을 낳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불안정해지는 노동시장과 전통적인 가족·결혼 규범의 충돌이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고, 결혼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여전히 ‘정상적인 삶’의 기준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실현할 물질적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특히 남성은 여전히 많은 경우 가족의 주된 생계 부양자가 되어야 한다고 기대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의 불안정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남성으로서의 자격과 정상적인 생애 계획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경험된다. 안정적인 취업과 결혼, 가족의 부양 등을 해내지 못하는 상황은 일부 남성에게 ‘남자구실’(안희제, 2026)을 하지 못했다는 수치와 좌절을 안겨준다. 즉 경제적 불안정성이 전통적인 남성성 규범 혹은 지위 기대와 결합하기 때문에 ‘젠더화된’ 상실로 경험된다는 것이다.2
그러나 아마도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과 전통적인 남성성 규범의 충돌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청년 남성들의 문제를 전통적 남성성의 잔존과 실패로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브리지스와 파스코(Bridges and Pascoe, 2014)가 제시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오늘날 특권적 남성성이 과거에 여성성이나 종속적 남성성과 결부되어 온 감수성, 외양, 수행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남성성과 거리를 두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3 부드러움과 친근함, 꼼꼼한 외모 관리와 풍부한 감정 표현 등은 더 이상 남성성에서의 이탈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기관리 능력, 성적 매력, 문화적 세련됨과 대중적 친밀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남성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하이브리드성을 이준석의 ‘두 가지 이미지’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레드필 담론조차 전통적 남성성으로의 단순한 복귀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 담론은 여성화된 남성을 비난하면서도 외모와 몸, 말투와 감정을 세밀하게 관리하고 자신을 연애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레드필의 ‘알파남’은 가부장적 가장인 동시에 자신의 몸과 이미지, 감정과 관계 방식을 끊임없이 최적화하는 기업가적 주체다. 전통적인 지배적 남성성이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과 자산 관리 담론과 결합하여 ‘하이브리드적’ 형태로 갱신된 것이다. 반대로 보면 이 현상은 전통적 남성성이 불가능해지거나 적어도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환경에 남성들이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년 남성들의 불안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현실이 전통적인 남성성 수행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성’ 자체가 일관된 표지를 잃고 너무 많은 요구를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오늘날 어떤 청년 남성들은 가부장적 지위와 경제적 우위를 여전히 욕망하는 동시에 매력적인 성애적 대상이 되기를 또한 욕망한다. 따라서 그들은 남성성을 점점 더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충족하기 힘든 명령으로 경험하며, 그 때문에 불만과 질투, 르상티망이 축적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혼란과 부담이 “진짜 남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남성인가?” “내가 욕망 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즉 대타자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와 같은 히스테리적 질문을 반복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큰 틀에서 보면,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를 역동적으로 흘러 다니는 이 다양한 감정과 질문의 밑바탕에는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균열이 있다. 그것이 평범 위(지도자 혹은 ‘알파남’)에 대한 선망과 평범 아래(소수자, 약자)에 대한 증오를 함께 낳는다. 일베의 “평범 내러티브”는 평범한 삶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타자에 대한 증오를 격화하고 타인의 인정 요구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레드필 담론은, 평범한 남성들은 여성에게 버림받거나 이용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대한 반응으로 모든 측면에서 뛰어난 ‘알파남’에 대한 선망을 구성한다. 이곳에서 남성의 몸은 끊임없는 단련과 가꿈을 통해 힘겹게 축성해야 하는 무엇이며, 페미니스트 여성과 여성화된 남성은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침입자 혹은 내부의 배신자로 표상된다. 이는 적어도 일부 청년 남성들에게 ‘남성성’이 안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경험되지 않고 극도로 불안정한 무엇으로 여겨짐을 반증한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의 ‘조직화’와 ‘이준석 현상’은 “성실히 살아온 평범한 남성들이 부당하게 손해를 보고 있다”는 서사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 서사적 접합의 반대편에는 페미니스트, 민주당, 86세대, 이민자처럼 평범한 청년들의 몫을 위협하거나 배신한다고 여겨지는 적이 놓인다. 이준석은 이미 존재하던 청년 남성 집단을 단순히 대변한 것이 아니다. 안티페미니즘, 공정, ‘역차별’에 대한 분노, 반민주당이라는 상이한 요구를 하나의 연쇄로 묶고, 그 연쇄를 ‘이대남’이라는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세력으로 구성된 것이다. 무주택 청년의 요구와 자산 소유자의 요구, 불안정 노동자의 요구와 능력주의적 경쟁의 수혜자가 되려는 욕망, 군복무에 대한 불만과 여성정책에 대한 적대는 처음부터 동일하지 않다. 이질적인 요구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연결되려면, 그것들이 모두 같은 적 때문에 좌절되었다는 서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펨코가 이준석으로 ‘단결’할 때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적대는 필수적이었다.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은 평범함의 안정성과 통일성―성실하고 선량한 다수 시민의, 규범적이고 안전하고 무탈한 삶―을 복구하겠다는 환상적인 약속을 통해, 어떤 타자성(소수자, 약자, 이민자)을 배척하는 한편 다양한 차이(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이)를 포섭한다. 안정된 일자리, 자기 명의의 주거, 연애와 결혼, 가족의 형성, 사회적 인정, 정치적 대표와 같은 상이한 요구들은 모두 ‘평범한 삶’이라는 말 아래 연결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도시의 아파트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정된 직장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성애적 연애와 결혼이 평범한 삶의 조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경우 평범함은 도달하기 힘든 정상적 삶의 이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평오’나 ‘베타남’, ‘5의 여자’4 같은 말들이 보여주듯이 평범함은 경멸받는 이름이기도 하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평범함은 끊임없이 새롭게 채워지고 그 경계가 다시 그어지는 정치적 기표가 된다.5 이는 거꾸로 말해 평범함이―역설적이게도―격한 정동을 생산하는 비범한 모순의 장소라는 뜻이다.
사회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호명하고 전통적인 페미니즘이 여성을 호명한 것과 달리, 포퓰리즘은 (적이나 희생물이 된 타자를 제외한) 모든 정체성에, 즉 평범함에 호소한다. ‘평범함’이 무엇이든 포괄할 수 있는 모순되고 불안정한 개념이라는 사실 자체가 포퓰리즘의 한없는 가능성이 된다. 평범함이 불안정한 것, 모순된 것, 위협받는 것으로 여겨질수록 평범함의 안정성과 통일성을 복구하겠다는 극우 포퓰리즘의 호소력은 더욱 커진다. 이는 또한 20세기의 파시즘과 오늘날의 극우 포퓰리즘 사이에 있는 차이점 하나를 설명한다. 20세기의 파시즘과 달리, 오늘날의 극우 포퓰리즘은 강렬한 반자본주의적 지향과 신화적 요소, 웅장한 미학을 동원하지 않고도, 평범한 삶을 수호하고 복구한다는 극히 ‘소시민적’인 약속만으로 추동될 수 있다(Toscano, 2023; Toscano et al., 2024).6 평범함이 모순되며 힘겨운 것으로 경험되는 데는 성장의 정체, 경제의 전반적인 금융화(서영표, 2021; 이승철, 2023; 김명수, 2024),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 등 구조적 요인이 있다. 그러나 극우 포퓰리즘은 그 복잡한 구조적 요인을 무시하고, 불안과 울분을 특정한 집단에 투사하여, 그 집단들만 배제한다면 안정적인 평범한 삶이 가능하리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균열에서 기인하는 정동적 에너지는 다른 정치적 움직임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라클라우(2026)의 논의가 보여주는 것은 포퓰리즘적 접합이 필연적으로 우익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어떤 요구도 처음부터 특정한 정치적 방향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요구들의 연결 방식과 그것을 대표하는 이름을 둘러싸고 언제나 정치적 경합이 벌어진다. 따라서 관건은 감정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게 아니라 감정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고 있는지 통찰하고,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감정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커뮤니티의 남성들을 변호하기 위해서도, 단순히 비방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이러한 통찰과 상상을 위한 시도다. 이 감정들을 어떻게 다르게 조직하거나 해소할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한,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발흥에 제대로 맞설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정책이나 방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당위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를 제안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이 ‘감정 구조’에 대한 단순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청년 남성들의 말을 이해하고 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처벌하고 온라인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온정주의와 엄벌주의라는 이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이 감정의 흐름이 이미 곳곳에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공격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무시한다. 후자는 이 감정들이 어떤 사회적 불안, 인정 실패, 탈락의 공포 속에서 생겨나는지 충분히 헤아리지 않는다. 물론 괴롭힘, 신상 털기, 테러 예고, 협박과 폭력 선동에는 명확한 금지와 제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처벌만으로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커뮤니티에서 즐거움과 소속감, 심지어 세계에 대한 설명을 얻는지에 답할 수 없다. 만약 커뮤니티를 떠나는 일이 자신이 의존하는 사회적 관계나 소속감, 세계를 설명하는 서사를 잃는 일이 된다면, 설령 혐오의 언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능한 ‘출구’는 무엇인가? 출구는 잘못된 신념의 포기가 아니라 다른 관계, 다른 연결, 다른 서사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어야 한다. 우선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남성들이 취약함과 질투, 외로움과 불안을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투사하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 관계와 모임, 상담과 교육의 공간이 필요하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 통용되는 ‘여성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은 분명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경험 없이 커뮤니티에서 ‘사회’를 경험하는 일부 청소년·청년은 그러한 생각에 공감하거나 영향받을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처방은 청소년·청년 들이 다양한 정체성이 섞인 집단과 사회적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인식하고 다르게 말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적절하게 표현된 질투는 르상티망으로 곪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것보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편이 낫다. 둘째로 정치적 차원에서는 다른 대표성과 언어를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펨코와 이준석 현상이 보여주듯, 르상티망은 적절한 상징적 대표를 만날 때 일정하게 조직화될 수 있다. 물론 이준석의 대변은 청년들의 혐오와 증오, 차별 의식을 공정과 자유를 앞세운 정치적 언어로 묶어낸 위험한 승화다. 그러나 그 사례가 보여주는 현실적 교훈이 있다. 대변하고 공감하는 아이콘이 없을 때 르상티망은 더 어둡고 공격적인 충동이나 음모론으로 흐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르상티망을 비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표성, 다른 애착의 대상, 다른 정치적 언어를 마련하는 일이다. 현실적인 관건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여성혐오나 음모론이 아닌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 ‘약간 더 나은 아이콘’과 제도적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나쁜 아이콘을 해체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은 아이콘을 생산하고 구축하는 일도 필요하다. 어쩌면 충전된 르상티망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라’는 정치적 요구로 접합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 평범함을 더 쉽게 획득하게 만드는 것과 평범함의 강제를 약화하는 일이 함께 요구된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안정된 주거와 노동의 보람, 돌봄과 사회적 관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평범한 삶의 물질적 조건은 보편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입시, 취업, 결혼, 가족 부양, 주택 소유 등으로 이루어진 특정한 생애 경로가 정상적인 삶의 기준처럼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살 만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지만, 그 조건 위에서 살아갈 삶의 형태가 좁은 기준으로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평범한 삶을 원하고, 평범한 삶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항구적인 압력 속에 있으면서도 평범함에서 이탈하거나 미달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주체들은, 결국 한편으로는 파시즘적 지도자를, 한편으로는 배제해야 할 타자를 찾게 된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정상적인·규범적인 삶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완화하고, 평범한 궤를 이탈한 삶 역시 ‘살만한 삶’(버틀러·보름스, 2024)이 되게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훨씬 타협적으로 말하자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충분히 평범한 삶’이라고 느끼고 만족할 수 있게 만들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 평범하지 않아도 이미 괜찮다고 느낄 만큼 운이 좋고 자유롭다면, 또 삶 속에서 평범함이라는 환상을 가로질러 비판할 만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면, 계속 그렇게 살기 위해 “옹고집을 부리는”(아도르노, 2005, 35)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일일 테다.
(끝)
- 여기서 히스테리를 설명하는 라캉의 도식(Lacan, 2007)을 이 갤러리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레드필 갤러리에서 ‘분열된 주체’는 자신이 남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불안한 이용자이고, ‘주인기표’는 알파남(혹은 진짜 남성)이다. 주인기표를 위해 생산되어 주체에게 제공되는 ‘지식’은 하이퍼가미 이론, 연애시장론, 여성과 남성의 ‘급’을 나누는 평가 기준 등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감추고 있는 ‘진실’은 인정과 친밀성의 결핍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다. 레드필 이론은 남성성의 위기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실제로는 “나는 충분히 남성적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가동할 뿐이다. 알파남과 베타남, 하이퍼가미, 연애 시장의 법칙 같은 이론은 분열된 주체의 요구에 응하여 생산된 지식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주체에게 안정적인 남성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성을 외모, 돈, 지위, 행동력이라는 여러 지표로 세분하면서 주체가 언제든 ‘남성’의 자격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을 강화한다. ↩︎
- 반면 여성 대학 진학률과 취업률의 증가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형식적 평등의 진전은, 여전히 실질적 차별과 유리천장이 엄존함에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전에 차단되었던 가능성이 확대되는 과정으로 청년 여성들에게 경험될 수 있다. 또한 2010년대 중후반의 대중적 페미니즘은 청년 여성들에게 불만을 개인적 실패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번역하는 언어와 집합적 실천의 기억을 제공했고, 연대의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청년 남성들에게는 그러한 연대와 변화에 대한 상상력과 의지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박권일, 2024). 청년 남성이 이용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집합적 언어는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이었다. ↩︎
-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단순히 전통적 지배를 갱신하는 보수적 현상만은 아니다. 브리지스와 파스코는 그것이 흔히 불평등을 은폐한다고 비판하지만, 모든 유연한 남성성의 수행이 자동으로 지배를 강화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변화의 가능성도 내포하는 개념이다. ↩︎
- 온라인 연애 담론에서 연애 시장 내 가치를 10점 만점의 숫자로 평가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언어는 개인의 매력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남녀 모두를 위계화하지만, 특히 여성을 등급화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된다. ↩︎
- 라클라우(2026)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치가 아니다. 서로 별개였던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은 채 축적되고, 그것들이 공통의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면서 등가 연쇄를 이룰 때 비로소 ‘인민(people)’이라는 집합적 주체가 구성된다. 이때 특정한 요구나 이름은 자신의 원래 의미를 부분적으로 비우고, 서로 이질적인 요구 전체를 대표하는 텅 빈 기표가 된다. 텅 빈 기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라기보다, 특정한 의미로 고정될 수 없는 공동의 결여를 대리하는 말이다. ↩︎
- 이는 20세기의 파시즘에는 ‘평범함에의 수호’라는 지향이 없었다거나 21세기의 파시즘에는 웅장한 미학이나 신화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21세기의 파시즘은 그러한 요소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토스카노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시대의 파시즘은 “환멸과 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장 속에서 작동하며, 온갖 종류의 슬픈 정념을 강력하게 응결시킬 수 있지만, 선대의 파시즘과 같은 방식으로 역-혁명적(counter-revolutionary) 삶의 형식들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Toscano et al, 2024, 256). 토스카노는 고전적 파시즘과 21세기의 파시즘 사이에 있는 ‘비유사성’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의 민족 국가 프로젝트나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처럼 고전적 파시즘의 정의에 가까운 사례도 있음을 지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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