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3)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6. 히스테리: 디시 레드필 갤러리와 남성 되기의 공포

우리는 불만을 정치적 몸으로 ‘조직화’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사례로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을 살펴보았다. 그와 가깝지만 다른 방향에 히스테리화가 있다. 여기서 히스테리는 임상적 진단도, 여성적 성격에 대한 낡은 편견도 아니다. 이 글에서 히스테리는 타자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요구하면서도 어떤 답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담론 형식과, 그 담론 형식의 끝없는 순환을 가동하는 교착 상태의 감정을 가리킨다. 라캉의 히스테리 담론(Lacan, 2007)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욕망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분열된 주체는 자신을 규정해 줄 것으로 기대되는 주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주인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새로운 명칭과 분류, 통계와 이론을 생산하지만, 그 지식은 주체의 분열을 해소하지 못한다. 답변의 실패는 더 많은 질문과 지식 생산을 촉발한다. 이 글에서 히스테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고통에 대한 최종적 답변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어떤 답변도 충분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담론적 순환이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가?”,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가?”, “왜 나의 고통은 말해지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는 답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확인하는―동시에 주인의 결핍을 확인하는―방식에 가깝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과는 대조적으로, 디시의 몇몇 마이너 갤러리는 불만의 정치적 조직화가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못할 때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준다. 미국정치 갤러리, 부정선거 갤러리, 레드필 갤러리 같은 공간을 예로 들 수 있다. 펨코가 (실제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좌파’에 대한 맹목적 증오를 깔고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고 제도권 정치에서 통용 가능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이러한 마이너 커뮤니티에서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 대의민주주의 체제, 심지어 ‘현대 사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지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절에서는 여러 마이너 갤러리 중 레드필 갤러리에 집중할 것이다. 레드필 갤러리는 연애, 자기계발, 남성성 담론과 극심한 여성혐오,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교차하는 징후적 장소다. 잘 알려져 있듯 ‘레드필’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에서 유래했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넨 빨간약은 안락한 가상현실 뒤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진실을 보게 하는 매개체다. 영미권의 커뮤니티에도 있는 레드필 갤러리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와 남녀관계 뒤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진실을 일깨워 남성들을 각성시키는 ‘이론’을 공유하고 전파하는 공간이다(코플런드, 2025 참조).

디시 레드필 갤러리에 접속하면 게시판 맨 위에 공지 사항으로 고정된 게시글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를 볼 수 있다. 이 ‘입문서’는 몇 개의 연속적인 게시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서론편’ ‘연애편’ ‘자기계발편’이 있으며 연애편과 자기계발편은 또 각각 복수의 게시글로 나뉘어 있다(그림 6).

디시 레드필 갤러리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의 목차

이 목차는 이 갤러리의 관심사가 연애와 연애를 위한 자기계발에 집중되어 있음을, 그리고 유저들이 그 관심사를 나름의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구성하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레드필 이론의 기본적인 전제는 남성을 복수의 등급(알파남, 베타남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는 늑대처럼 무리를 이루는 동물의 상투적 이미지에서 우두머리 수컷과 추종자 수컷이 나뉘는 방식과 유사하다. 남성의 ‘급’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도, 혹은 여성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정도다. 남성들 사이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카리스마도 고려된다. 서론편의 일부를 살펴보자.

디시 레드필 갤러리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 일부

이처럼 레드필 이론은 노골적으로 ‘급’을 나누어 모든 남성과 여성을 모종의 서열 속에서 보게 한다. 온통 ‘급 나누기’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냉혹한 논리를 내면화한 뒤 더 높은 ‘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서로 ‘채찍질’하는 것이다. 여기서 친밀함이나 다정함 등 ‘현대 사회’가 권장하는 사교적 덕목은 남성들을 유약하게 만들고 옭아매기 위해 기획된 거짓 도덕으로 여겨진다. 남성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은 ‘급’을 올려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철저하고 냉혹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남성이 따라야 할 유일한 덕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급’을 올릴 수 있을까?

디시 레드필 갤러리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 일부

레드필 담론은 연애를 비롯한 사회관계를 게임의 논리로 이해한다. 모든 관계는 전략과 거래의 문제로 환원된다. ‘급’은 외모, 사회적 행동력(게임 능력), 돈, 지위라는 4가지 지표로 구성되는데, 그 모든 요소에서 평균 이상으로 뛰어나야 ‘알파남’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머지를 모두 갖추더라도 하나의 요소에서 실패한다면 “인생이 망”할 수 있다. 조금만 삐끗해도 알파남의 기준에서 탈락할 수 있다. 무리마다 ‘우두머리’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머지 평범한 남성들은 모두 ‘베타남’(혹은 베타남조차 아닌 무언가)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레드필 담론이 표상하는 남성성은 너무나 버겁고 환상적인 무언가이다. 평균적인 남자, 혹은 어떤 요소에서 뛰어나더라도 다른 요소가 미달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버림받거나 이용당할 것이다. 모든 여성이 자신보다 ‘급’이 높은 남성을 선택한다는 ‘하이퍼가미’ 이론에 따라 평범한 남성은 연애 시장에서 도태된다고 여겨진다. 좋았던 옛날―페미니즘과 좌파의 준동이 없었던 옛날―에 평범한 삶의 약속이었던 연애와 결혼은 이제 도달하기 극히 어려운 자격시험처럼 변했다.

레드필 갤러리는 에바 일루즈(2010, 2013)가 말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 사랑의 모순이 어두운 방식으로 극단화되어 나타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코플런드, 2025). 동시대 사회에서 낭만적 사랑은 여전히 엄청난 사회적·인격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여하한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가 붕괴하거나 약화된 시대에, 낭만적 사랑은 온갖 인격적·사회적 기능(개인의 성장, 돌봄, 위로, 안식, 즐거움, 재생산 등)을 몽땅 짊어지게 된다(일루즈, 2013). 또한 사랑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적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매력 있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사랑은 데이팅 앱이나 결혼정보회사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외모 평가, 경제력 평가, 인격 평가, 자기계발 담론 속에서 점점 더 수치화되고 시장화된다(일루즈, 2010). 사랑은 낭만적인 것으로 이상화되는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계산되어야 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이런 모순을 체화한 레드필 갤러리의 유저들은 연애에 너무 많은 소망을 의탁하면서도 연애를 한낱 거래의 문제로 상대화하며, 남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세속적인 기준을 따지는 오늘날의 여성들을 증오하고 비방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앞장서 남성과 여성을 첨예하게 등급화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자신이 세운 엄격한 기준에 언제나 자신이 미달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고, 연애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 만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실망도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절은 남성 탈락 혹은 ‘도태’의 공포와 결합하면서 히스테리적 양상을 띤다. 예컨대 많은 추천을 받은 ‘개념글’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을 보자. 이 글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을 전제한다. 그 논리는 유사과학적인 사회진화론에 의존한다. 작성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자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상정한 뒤 현대 사회가 이 자연적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는 남성을 여성화하고, 여성을 남성화한다. 그리고 이 ‘역전현상’의 가장 큰 책임은 페미니즘에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작성자가 모든 책임을 페미니즘에만 돌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남성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디시 레드필 갤러리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 일부

작성자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논리에 말려들어 스스로 ‘여성화’되었고, 심지어 여성을 부러워하며 여성처럼 되려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비방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남성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 작성자는 그 불안을 페미니즘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지만, 동시에 남성 내부의 붕괴와 배신을 문제 삼는다. 이 게시물의 요지는 영미권 인셀 커뮤니티에서 발견되는 ‘질 선망(vagina envy)’의 논리(코플런드, 2025, 129)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인셀 담론에서 일부 남성들은 여성이 성적 선택권과 사회적·성애적 관심을 더 쉽게 획득하고 누린다고 믿으며, 그 조건을 혐오하는 동시에 부러워한다. 여성은 경멸의 대상이면서 질투의 대상이고, 남성은 (자연적으로) 우월해야 하는 존재이면서 (현대 사회에는) 이미 상실과 실패에 노출된 존재로 여겨진다.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의 작성자 역시 유사한 모순 속에 있다. 그는 여성화를 저주하지만, 바로 그 여성화에 대한 강박적 상상을 멈추지 못한다. 이때 히스테리는 외부의 적을 향한 공격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남자는 무엇인가”, “왜 남성은 더 이상 남자답지 못한가”, “나는 아직 남성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불안한 담론 형식으로 나타난다.1

줄리엣 미첼(2025)이 남성 히스테리를 논하며 지적하듯 히스테리는 오랫동안 여성만의 병이나 증상으로 잘못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안정적인 상징적 위치를 상실하고 히스테리에 노출될 때 다시 한번 미묘한 전도가 일어난다. ‘히스테리는 곧 여성적인 병’이라는 여성혐오적 편견 때문에, 여성 히스테리증자는 ‘여성적인 여성’이라는 묘하게 매혹적인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반면, 남성 히스테리증자는 “부정적인 극점”에 위치하게 된다(같은 책, 37). 즉 남성이 남성성에서 탈락할 것 같다는 불안으로 히스테리적 증상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남자답지 못한 남자’라는 낙인 아래 더 매력적이지 못한 남성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레드필 갤러리에는 종종 (‘어그로’라고 할 수 있을) 조롱과 비방이 올라온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못생기고 능력이 없어 여성을 만나지 못하는 남자들이라는 도발 혹은 자조가 반복된다.

레드필 갤러리의 자기계발 담론은 ‘잔인한 낙관’(벌렌트, 2024; 코플런드, 2025)의 형식을 취한다. 운동을 해라, 돈을 벌어라, 외모를 개선해라, 말투를 바꿔라, 여성의 본성을 이해해라, 게임의 법칙을 배워라. 표면적으로 주체를 성장시키려는 조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악순환을 강화할 뿐인 명령들이다. 실패는 언제나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오고, 위로와 돌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좌절 때문에 커뮤니티에 들어온 남성들은 그곳에서 연대를 얻기보다 더 심한 자기학대와 타인학대의 언어를 배우게 될 뿐이다. 이 점에서 레드필 담론은 극도로 신자유주의적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끔찍한 파행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레드필 담론은 모든 관계의 실패를 자기관리의 실패로 환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거절하는 여성과 사회 전체에 대한 출구 없는 르상티망을 증폭시킨다. 그 때문에 히스테리적 질문은 하나의 악순환이 된다.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성들은 왜 나쁜가?”로 바뀌고, “왜 나는 바람직한 삶에 도달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사회는 왜 남성을 버렸는가?”로 바뀐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의 반복 자체가 커뮤니티를 유지한다. 부재하는 답은 더 많은 불만과 적대의 출발점이 된다. 코플런드가 지적한 것처럼 이 경로의 끝에는 극단적 허무주의와 폭력의 가능성이 있다(코플런드, 2025, 215 이하 참조). 모든 관계가 게임이고, 모든 실패가 자기 책임이며, 여성은 구조적으로 자신을 거부하도록 설계된 존재라고 믿게 될 때, 주체에게 남는 것은 냉소, 절망, 혹은 폭력적 환상뿐이다. 이 점에서 레드필 담론은 외로움과 인정 실패가 어떻게 극단적 여성혐오와 자기파괴적 정동의 악순환에 교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7. 결론: 평범함의 모순과 그 출구

이 글은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라는 세 가지 감정의 조합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아마 이 글에서 다룬 대부분의 문제는―문제마다 맥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청년 여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오늘날 여성들 역시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년 남성들이 유독 우익 포퓰리즘의 선동에 취약한 듯 보이고, 더 극심하게 우경화 혹은 ‘반민주당화’된 것처럼 보이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이 남게 된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대답은 그것이 전통적인 남성성 수행의 실패, 혹은 부담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수현(Lee, 2025)의 분석은 이러한 대답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불안정성이 곧바로 안티페미니즘을 낳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불안정해지는 노동시장과 전통적인 가족·결혼 규범의 충돌이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고, 결혼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여전히 ‘정상적인 삶’의 기준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실현할 물질적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특히 남성은 여전히 많은 경우 가족의 주된 생계 부양자가 되어야 한다고 기대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의 불안정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남성으로서의 자격과 정상적인 생애 계획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경험된다. 안정적인 취업과 결혼, 가족의 부양 등을 해내지 못하는 상황은 일부 남성에게 ‘남자구실’(안희제, 2026)을 하지 못했다는 수치와 좌절을 안겨준다. 즉 경제적 불안정성이 전통적인 남성성 규범 혹은 지위 기대와 결합하기 때문에 ‘젠더화된’ 상실로 경험된다는 것이다.2

그러나 아마도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과 전통적인 남성성 규범의 충돌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청년 남성들의 문제를 전통적 남성성의 잔존과 실패로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브리지스와 파스코(Bridges and Pascoe, 2014)가 제시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오늘날 특권적 남성성이 과거에 여성성이나 종속적 남성성과 결부되어 온 감수성, 외양, 수행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남성성과 거리를 두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3 부드러움과 친근함, 꼼꼼한 외모 관리와 풍부한 감정 표현 등은 더 이상 남성성에서의 이탈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기관리 능력, 성적 매력, 문화적 세련됨과 대중적 친밀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남성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하이브리드성을 이준석의 ‘두 가지 이미지’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레드필 담론조차 전통적 남성성으로의 단순한 복귀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 담론은 여성화된 남성을 비난하면서도 외모와 몸, 말투와 감정을 세밀하게 관리하고 자신을 연애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레드필의 ‘알파남’은 가부장적 가장인 동시에 자신의 몸과 이미지, 감정과 관계 방식을 끊임없이 최적화하는 기업가적 주체다. 전통적인 지배적 남성성이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과 자산 관리 담론과 결합하여 ‘하이브리드적’ 형태로 갱신된 것이다. 반대로 보면 이 현상은 전통적 남성성이 불가능해지거나 적어도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환경에 남성들이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년 남성들의 불안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현실이 전통적인 남성성 수행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성’ 자체가 일관된 표지를 잃고 너무 많은 요구를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오늘날 어떤 청년 남성들은 가부장적 지위와 경제적 우위를 여전히 욕망하는 동시에 매력적인 성애적 대상이 되기를 또한 욕망한다. 따라서 그들은 남성성을 점점 더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충족하기 힘든 명령으로 경험하며, 그 때문에 불만과 질투, 르상티망이 축적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혼란과 부담이 “진짜 남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남성인가?” “내가 욕망 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즉 대타자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와 같은 히스테리적 질문을 반복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큰 틀에서 보면,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를 역동적으로 흘러 다니는 이 다양한 감정과 질문의 밑바탕에는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균열이 있다. 그것이 평범 위(지도자 혹은 ‘알파남’)에 대한 선망과 평범 아래(소수자, 약자)에 대한 증오를 함께 낳는다. 일베의 “평범 내러티브”는 평범한 삶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타자에 대한 증오를 격화하고 타인의 인정 요구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레드필 담론은, 평범한 남성들은 여성에게 버림받거나 이용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대한 반응으로 모든 측면에서 뛰어난 ‘알파남’에 대한 선망을 구성한다. 이곳에서 남성의 몸은 끊임없는 단련과 가꿈을 통해 힘겹게 축성해야 하는 무엇이며, 페미니스트 여성과 여성화된 남성은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침입자 혹은 내부의 배신자로 표상된다. 이는 적어도 일부 청년 남성들에게 ‘남성성’이 안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경험되지 않고 극도로 불안정한 무엇으로 여겨짐을 반증한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의 ‘조직화’와 ‘이준석 현상’은 “성실히 살아온 평범한 남성들이 부당하게 손해를 보고 있다”는 서사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 서사적 접합의 반대편에는 페미니스트, 민주당, 86세대, 이민자처럼 평범한 청년들의 몫을 위협하거나 배신한다고 여겨지는 적이 놓인다. 이준석은 이미 존재하던 청년 남성 집단을 단순히 대변한 것이 아니다. 안티페미니즘, 공정, ‘역차별’에 대한 분노, 반민주당이라는 상이한 요구를 하나의 연쇄로 묶고, 그 연쇄를 ‘이대남’이라는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세력으로 구성된 것이다. 무주택 청년의 요구와 자산 소유자의 요구, 불안정 노동자의 요구와 능력주의적 경쟁의 수혜자가 되려는 욕망, 군복무에 대한 불만과 여성정책에 대한 적대는 처음부터 동일하지 않다. 이질적인 요구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연결되려면, 그것들이 모두 같은 적 때문에 좌절되었다는 서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펨코가 이준석으로 ‘단결’할 때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적대는 필수적이었다.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은 평범함의 안정성과 통일성―성실하고 선량한 다수 시민의, 규범적이고 안전하고 무탈한 삶―을 복구하겠다는 환상적인 약속을 통해, 어떤 타자성(소수자, 약자, 이민자)을 배척하는 한편 다양한 차이(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이)를 포섭한다. 안정된 일자리, 자기 명의의 주거, 연애와 결혼, 가족의 형성, 사회적 인정, 정치적 대표와 같은 상이한 요구들은 모두 ‘평범한 삶’이라는 말 아래 연결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도시의 아파트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정된 직장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성애적 연애와 결혼이 평범한 삶의 조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경우 평범함은 도달하기 힘든 정상적 삶의 이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평오’나 ‘베타남’, ‘5의 여자’4 같은 말들이 보여주듯이 평범함은 경멸받는 이름이기도 하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평범함은 끊임없이 새롭게 채워지고 그 경계가 다시 그어지는 정치적 기표가 된다.5 이는 거꾸로 말해 평범함이―역설적이게도―격한 정동을 생산하는 비범한 모순의 장소라는 뜻이다.

사회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호명하고 전통적인 페미니즘이 여성을 호명한 것과 달리, 포퓰리즘은 (적이나 희생물이 된 타자를 제외한) 모든 정체성에, 즉 평범함에 호소한다. ‘평범함’이 무엇이든 포괄할 수 있는 모순되고 불안정한 개념이라는 사실 자체가 포퓰리즘의 한없는 가능성이 된다. 평범함이 불안정한 것, 모순된 것, 위협받는 것으로 여겨질수록 평범함의 안정성과 통일성을 복구하겠다는 극우 포퓰리즘의 호소력은 더욱 커진다. 이는 또한 20세기의 파시즘과 오늘날의 극우 포퓰리즘 사이에 있는 차이점 하나를 설명한다. 20세기의 파시즘과 달리, 오늘날의 극우 포퓰리즘은 강렬한 반자본주의적 지향과 신화적 요소, 웅장한 미학을 동원하지 않고도, 평범한 삶을 수호하고 복구한다는 극히 ‘소시민적’인 약속만으로 추동될 수 있다(Toscano, 2023; Toscano et al., 2024).6 평범함이 모순되며 힘겨운 것으로 경험되는 데는 성장의 정체, 경제의 전반적인 금융화(서영표, 2021; 이승철, 2023; 김명수, 2024),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 등 구조적 요인이 있다. 그러나 극우 포퓰리즘은 그 복잡한 구조적 요인을 무시하고, 불안과 울분을 특정한 집단에 투사하여, 그 집단들만 배제한다면 안정적인 평범한 삶이 가능하리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균열에서 기인하는 정동적 에너지는 다른 정치적 움직임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라클라우(2026)의 논의가 보여주는 것은 포퓰리즘적 접합이 필연적으로 우익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어떤 요구도 처음부터 특정한 정치적 방향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요구들의 연결 방식과 그것을 대표하는 이름을 둘러싸고 언제나 정치적 경합이 벌어진다. 따라서 관건은 감정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게 아니라 감정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고 있는지 통찰하고,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감정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커뮤니티의 남성들을 변호하기 위해서도, 단순히 비방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이러한 통찰과 상상을 위한 시도다. 이 감정들을 어떻게 다르게 조직하거나 해소할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한,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발흥에 제대로 맞설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정책이나 방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당위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를 제안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이 ‘감정 구조’에 대한 단순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청년 남성들의 말을 이해하고 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처벌하고 온라인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온정주의와 엄벌주의라는 이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이 감정의 흐름이 이미 곳곳에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공격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무시한다. 후자는 이 감정들이 어떤 사회적 불안, 인정 실패, 탈락의 공포 속에서 생겨나는지 충분히 헤아리지 않는다. 물론 괴롭힘, 신상 털기, 테러 예고, 협박과 폭력 선동에는 명확한 금지와 제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처벌만으로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커뮤니티에서 즐거움과 소속감, 심지어 세계에 대한 설명을 얻는지에 답할 수 없다. 만약 커뮤니티를 떠나는 일이 자신이 의존하는 사회적 관계나 소속감, 세계를 설명하는 서사를 잃는 일이 된다면, 설령 혐오의 언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능한 ‘출구’는 무엇인가? 출구는 잘못된 신념의 포기가 아니라 다른 관계, 다른 연결, 다른 서사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어야 한다. 우선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남성들이 취약함과 질투, 외로움과 불안을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투사하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 관계와 모임, 상담과 교육의 공간이 필요하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 통용되는 ‘여성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은 분명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경험 없이 커뮤니티에서 ‘사회’를 경험하는 일부 청소년·청년은 그러한 생각에 공감하거나 영향받을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처방은 청소년·청년 들이 다양한 정체성이 섞인 집단과 사회적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인식하고 다르게 말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적절하게 표현된 질투는 르상티망으로 곪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것보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편이 낫다. 둘째로 정치적 차원에서는 다른 대표성과 언어를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펨코와 이준석 현상이 보여주듯, 르상티망은 적절한 상징적 대표를 만날 때 일정하게 조직화될 수 있다. 물론 이준석의 대변은 청년들의 혐오와 증오, 차별 의식을 공정과 자유를 앞세운 정치적 언어로 묶어낸 위험한 승화다. 그러나 그 사례가 보여주는 현실적 교훈이 있다. 대변하고 공감하는 아이콘이 없을 때 르상티망은 더 어둡고 공격적인 충동이나 음모론으로 흐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르상티망을 비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표성, 다른 애착의 대상, 다른 정치적 언어를 마련하는 일이다. 현실적인 관건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여성혐오나 음모론이 아닌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 ‘약간 더 나은 아이콘’과 제도적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나쁜 아이콘을 해체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은 아이콘을 생산하고 구축하는 일도 필요하다. 어쩌면 충전된 르상티망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라’는 정치적 요구로 접합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 평범함을 더 쉽게 획득하게 만드는 것과 평범함의 강제를 약화하는 일이 함께 요구된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안정된 주거와 노동의 보람, 돌봄과 사회적 관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평범한 삶의 물질적 조건은 보편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입시, 취업, 결혼, 가족 부양, 주택 소유 등으로 이루어진 특정한 생애 경로가 정상적인 삶의 기준처럼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살 만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지만, 그 조건 위에서 살아갈 삶의 형태가 좁은 기준으로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평범한 삶을 원하고, 평범한 삶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항구적인 압력 속에 있으면서도 평범함에서 이탈하거나 미달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주체들은, 결국 한편으로는 파시즘적 지도자를, 한편으로는 배제해야 할 타자를 찾게 된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정상적인·규범적인 삶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완화하고, 평범한 궤를 이탈한 삶 역시 ‘살만한 삶’(버틀러·보름스, 2024)이 되게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훨씬 타협적으로 말하자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충분히 평범한 삶’이라고 느끼고 만족할 수 있게 만들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 평범하지 않아도 이미 괜찮다고 느낄 만큼 운이 좋고 자유롭다면, 또 삶 속에서 평범함이라는 환상을 가로질러 비판할 만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면, 계속 그렇게 살기 위해 “옹고집을 부리는”(아도르노, 2005, 35)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일일 테다.

(끝)

  1. 여기서 히스테리를 설명하는 라캉의 도식(Lacan, 2007)을 이 갤러리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레드필 갤러리에서 ‘분열된 주체’는 자신이 남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불안한 이용자이고, ‘주인기표’는 알파남(혹은 진짜 남성)이다. 주인기표를 위해 생산되어 주체에게 제공되는 ‘지식’은 하이퍼가미 이론, 연애시장론, 여성과 남성의 ‘급’을 나누는 평가 기준 등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감추고 있는 ‘진실’은 인정과 친밀성의 결핍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다. 레드필 이론은 남성성의 위기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실제로는 “나는 충분히 남성적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가동할 뿐이다. 알파남과 베타남, 하이퍼가미, 연애 시장의 법칙 같은 이론은 분열된 주체의 요구에 응하여 생산된 지식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주체에게 안정적인 남성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성을 외모, 돈, 지위, 행동력이라는 여러 지표로 세분하면서 주체가 언제든 ‘남성’의 자격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을 강화한다. ↩︎
  2. 반면 여성 대학 진학률과 취업률의 증가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형식적 평등의 진전은, 여전히 실질적 차별과 유리천장이 엄존함에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전에 차단되었던 가능성이 확대되는 과정으로 청년 여성들에게 경험될 수 있다. 또한 2010년대 중후반의 대중적 페미니즘은 청년 여성들에게 불만을 개인적 실패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번역하는 언어와 집합적 실천의 기억을 제공했고, 연대의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청년 남성들에게는 그러한 연대와 변화에 대한 상상력과 의지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박권일, 2024). 청년 남성이 이용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집합적 언어는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이었다. ↩︎
  3.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단순히 전통적 지배를 갱신하는 보수적 현상만은 아니다. 브리지스와 파스코는 그것이 흔히 불평등을 은폐한다고 비판하지만, 모든 유연한 남성성의 수행이 자동으로 지배를 강화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변화의 가능성도 내포하는 개념이다. ↩︎
  4. 온라인 연애 담론에서 연애 시장 내 가치를 10점 만점의 숫자로 평가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언어는 개인의 매력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남녀 모두를 위계화하지만, 특히 여성을 등급화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된다. ↩︎
  5. 라클라우(2026)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치가 아니다. 서로 별개였던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은 채 축적되고, 그것들이 공통의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면서 등가 연쇄를 이룰 때 비로소 ‘인민(people)’이라는 집합적 주체가 구성된다. 이때 특정한 요구나 이름은 자신의 원래 의미를 부분적으로 비우고, 서로 이질적인 요구 전체를 대표하는 텅 빈 기표가 된다. 텅 빈 기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라기보다, 특정한 의미로 고정될 수 없는 공동의 결여를 대리하는 말이다. ↩︎
  6. 이는 20세기의 파시즘에는 ‘평범함에의 수호’라는 지향이 없었다거나 21세기의 파시즘에는 웅장한 미학이나 신화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21세기의 파시즘은 그러한 요소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토스카노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시대의 파시즘은 “환멸과 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장 속에서 작동하며, 온갖 종류의 슬픈 정념을 강력하게 응결시킬 수 있지만, 선대의 파시즘과 같은 방식으로 역-혁명적(counter-revolutionary) 삶의 형식들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Toscano et al, 2024, 256). 토스카노는 고전적 파시즘과 21세기의 파시즘 사이에 있는 ‘비유사성’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의 민족 국가 프로젝트나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처럼 고전적 파시즘의 정의에 가까운 사례도 있음을 지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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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2)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4. 르상티망 혹은 평범함의 깊은 균열

르상티망(ressentiment)은 다시 느끼는 감정(re-sentiment), 즉 반복적으로 곱씹어져 곪은 감정을 뜻한다. 흔히 원한으로 번역되는 르상티망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와 극우화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연구들에서 다시 중요한 개념으로 주목받고 있다(예를 들어 Tietjen et al., 2023; Beauregard and Sijstermans, 2025; 특히 코플런드, 2025).

니체는 르상티망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참조되는 철학자다. 니체(2021)는 르상티망의 주요 특징으로 몇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르상티망은 반작용적이고 반응적인 감정이다. 다시 말해 르상티망의 주체는 “나는 훌륭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들은 악하다, 따라서 우리는 선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상대적인 선함을 주장하기 위해 언제나 비방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째, 르상티망은 무력함 속에서 곪은 복수심이다. 직접 행동할 수 없는 주체는 “두고 보자”는 식의 지연된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복수는 가치전도의 형식을 취한다. 강하고 뛰어나며 아름다운 것은 악한 것으로 격하되고, 약하고 상처 입고 억압된 것은 선한 것으로 격상된다.

르상티망 관련 논의에서 마찬가지로 자주 인용되는 막스 셸러(Scheler, 1961)는 니체의 논의를 사회학적으로 확장했다. 셸러가 특히 주목한 것은 ‘자유경쟁 체제’와 민주주의 체제에서 르상티망이 악화되는 경향이다. 명목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해지는 사회에서 실제 불평등은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불평등의 간극이 클수록 르상티망은 격화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셸러는 현대 사회에서 르상티망이 평범한 자의 감정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평범한 자와 대비되는 고귀한 자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결국 르상티망은 현대 사회에 만성적인 감정이 된다.

셸러는 이러한 일반적 고찰에서 더 나아가 “중요한 사회학적 법칙”도 도출한다(Ibid., 50). 르상티망이라는 “심리적 다이너마이트”는 “한 집단의 정치적·헌법적·전통적 지위와 그 집단이 실제로 지닌 힘 사이의 불일치”가 클수록 더 강력해진다. 이 통찰은 왜 오늘날 르상티망이 (여성보다도) 청년 남성의 특징처럼 보이게 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남성은 전통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보상, 더 큰 사회적 인정을 기대하고 추구하도록 훈련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청년 남성은 노동시장, 연애, 주거, 결혼, 가족 형성 등의 영역에서 기대한 만큼의 힘을 갖지 못한다고 느낀다. 전통적 지위와 실제 힘 사이의 간극이 커지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신티아 플뢰리는 (셸러를 참조하며) 어떤 “역전 현상”을 짚어낸다. “이제 르상티망을 지닌 이가, 여성해방의 초기 성과들을 확인하는 데[…] 몰두한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 셸러의 수식어를 빌리자면 ‘평범한’ 남성들로 바뀌어가는 역전 현상이 상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플뢰리, 2026, 48–49). 셸러의 글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 르상티망은 흔히 차별받고 소외된 집단, 가령 유대인, 장애인, 노인, 특히 여성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성해방의 초기 성과들을 확인”함으로써 정치적 효능감을 느낀 여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과 하락을 경험하는 ‘평범한’ 남성들이 르상티망의 주체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요점은 남성들이 실제로 약자라거나 차별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이 자신이 누려야 한다고 여기는 지위와 실제로 경험하는 힘 사이의 간극 속에서 불안과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는 것이다.1

이 지점에서 셸러가 지적한 ‘평범함’이라는 개념을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셸러는 르상티망을 평범한 자의 감정이라 주장했는데, 고귀한 자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정립하는 것과 달리 평범한 자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치를 체험한다. 즉 평범한 자는 어떤 가치를 세우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타인보다 더 많이 갖기를 원할 뿐이다. 물론 셸러의 이러한 주장은 니체식 귀족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지금 우리의 관건은 고귀한 자와 평범한 자를 선명하게 나누는 귀족주의를 답습하지 않으면서, 평범함에 대한 셸러의 통찰을 논리학적으로 수정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어받는 통찰은 ‘평범한 자는 무능한 자’라는 편견이 아니라, 평범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떠한 실정적(positive) 특징으로도 규정될 수 없기에, 평범함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질적인 것과의 비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다.2 언제나 불안정한 것,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는 것,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평범함이다.

그 외연과 내포의 커져 가는 불일치를 고려하면, 오늘날 평범함은 대단히 모순적이고 기이한 개념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평범한 삶은 점점 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표상된다. 만약 서울의 4년제 대학을 다니는 것이 ‘평범한’ 것이라면, 평범함을 위해서는 성적이 ‘평균 이상’이어야만 한다. 만약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평범한’ 목표를 위한 조건이라면, 그 조건에 부합하는 청년은 소수일 것이다. 반대로,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평오’(국민 수능 평균은 5등급) 같은 표현은 오늘날 평균이 얼마나 쉽고 당연하게 경멸의 대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평범함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모욕의 이름이다. 이 심대한 모순은 평범함 자체가 실정적 특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평범함은 때로는 규범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일컫고, 때로는 막연하게 평균이나 다수를 지칭하며, 때로는 개성 없는 것, 권력을 결여한 것, 뛰어나지 않은 것, ‘서민적’인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누구나 평범함에 속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을 나오고,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평균 이상의 자산을 축적하며, 휴가철에는 해외여행을 다니고, 적당한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하는 ‘바람직한’ 생애 경로를 무리 없이 밟는 사람도 스스로를 ‘서민’이라고 부를 수 있다(그러면서 재벌이나 정치인 등 ‘특권층’과 자신을 대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고 복수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산을 전혀 축적하지 못하는 20대 후반 청년의 삶 역시 ‘평범한’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 이렇듯 평범함은 너무 많은 차이를 뭉뚱그려 지칭하는 헐거운 고무줄 같은 개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주체가 평범함과 맺는 관계는 항상 불안정하며, 이 불안정성은 특히 극심한 경쟁과 비교 속에서 숙성될 때 르상티망의 비옥한 양분이 된다.

한마디로 오늘날 평범함은 도달하기 힘든 것이면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응답하라〉와 같은 TV 시리즈에 소박하고도 환상적으로 그려지는,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서민’ 가장의 삶은 오늘날 많은 청년 남성에게 너무 힘겨운 꿈으로 나타난다. ‘평균적’인 삶만 살아서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거나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은 청년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 역시 경험하는 것이다.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청년들은 평범함(‘정상적인’ 삶)에서 탈락할까 봐 불안하고, 동시에 평범함(평균, 개성 없음, 뛰어날 것 없음)으로 환원될까 봐 불안하다. 그러나 탈락하거나 뒤처질 것 같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나 우울 역시 누구나 겪는 ‘평범한’ 고통이기에, 그 고통을 특별히 인정받기도 어렵다. 청년들을 이중구속으로 몰아넣는 이 모순이 만성적인 수치심, 열등감, 분노, 우울, 무기력을 낳는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거기서 오는 수치심과 열등감, 질투와 불안이 무기력한 시간 속에서 곪아 르상티망이 된다면, 자신이 평범함에 속한다고 체념하는 동시에 평범함에 미달한다고 불안해하는 것만큼 르상티망이 자라나기에 좋은 조건은 없다.

이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모순이 사회 문제이자 증상으로서 ‘일베’를 낳은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추론할 근거가 있다. 김학준은 일베에 대한 양적 연구와 질적 분석을 결합하고 있는 『보통 일베들의 시대』(2022)에서 일베 멘탈리티의 중요한 축을 “평범 내러티브”라는 말로 묘파했다. 이 내러티브에서 타인의 고통은 “누구나 그 정도는 겪는다”는 말로 환원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이 야기하는 불안이나 모멸감은 누구나 겪는 것이기에, 그 때문에 체제를 비판하거나 변화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김학준이 옳게 지적했듯 일베 유저들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평범한 순응자들이었다(같은 책, 195 이하 참조). 그들은 인정이나 변화를 요구하는 약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이 불안을 버티면서 사는데 너희는 왜 자꾸 무언가를 더 요구하냐?’ 고통을 참아낸 생존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면서 타인의 고통 호소는 과장이나 떼쓰기로 취급하는 것이다. 평범 내러티브는 이중의 규율, 즉 ‘평범함에 만족해야 한다’와 ‘내가 견뎠다면 너도 견뎌야 한다’는 규율로 요약된다. 이 내러티브는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까지 억압한다. 약자와 소수자의 인정 요구는 “왜 너만 특별 대우를 받으려 하느냐”는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 내러티브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평범함 자체가 너무나 힘겨운 것으로 체험됨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평범 내러티브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평범함’ 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되었음을 암시한다”(같은 책, 261). 평범하고 규범적인 삶에 대한 일베의 도착적 갈망, 또 ‘평범 이상’을 요구하거나 다수의 평범한 삶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증오는 평범함 자체의 불안정성과 모순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평범 네러티브”는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모순을 소화하는 일베의 방식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베에만 국한된 멘탈리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준석은 2019년 맥심에서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대중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달라요’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이 방식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 당황스러운 거다. 그들 목소리를 들어보면 ‘이렇게 안 하면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인데, 내가 봤을 때는 너무 단기적인 성과를 내려는 것 같다. 그리고 성평등 운동은 보통 ‘우린 다르지 않아’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격한 행동파 운동은 ‘우릴 봐줘’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박정훈, 2019에서 재인용)

많은 청년 남성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이준석의 페미니즘 비판에는 “평범함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규범이 강하게 깔려 있다. 또한 관심이나 인정을 요구하는 약자에 대한 반감도 선명하게 깔려 있다. 이렇듯 약자의 인정 요구는 특권 요구로 치부되고, 공정한 경쟁 질서를 교란하거나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에 대해 이준석이 “공공을 인질로 잡은 투쟁은 연대가 아니라 인질극”(한예섭, 2025에서 재인용)이라고 비방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에도 이준석은 교통권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매일 출근하는 성실한 보통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를 위협한다는 생각을 조장하거나 재생산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로 내세우는 동시에 소수자를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이다. 아마 남성들이 과거에 있었다고 가정된, 안정적인 ‘평범한 삶’이라는 환상에 여성보다 더 많은 욕망을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동에 더 취약하겠지만, 꼭 ‘이성애자 남성’만이 ‘그들만 없다면 평범한 삶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혐오의 약속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준석이 여성정책과 페미니즘, 장애인 운동을 비방하면서 ‘평범한’ 청년 남성들의 대변자를 자임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르상티망과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평범함은 어떤 실정적인 특징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을 규정할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즉 평범함이 안정화되려면 ‘평범하지 않은’ 타자가 필요하다(바타유, 2022 참조). 한편으로 평범함은 안정화되기 위해 자신을 대변하고 종합해 줄 우월한 타자(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평범함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평범의 경계를 확정해 줄 열등한 타자(소수자, 약자, 이민자 등)를 필요로 한다. 평범함은 우월성에 기대어 자신을 대변 받고, 열등성에 비추어 자신을 식별한다. 오늘날 평범함의 모순과 균열이 르상티망을 배양한다면, 이렇게 축적된 르상티망은 적을 만들어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평범함의 환상적인 통일성을 복구하려 한다. 우익 포퓰리즘 정치인은 바로 그러한 약속을 통해 세를 불리는 것이다.

5. 조직화: 펨코와 정치적 승화

질투와 르상티망은 커뮤니티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접합된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는 청년 남성의 이질적인 불만이 ‘공정’과 ‘자유’라는 기표 및 이준석이라는 정치적 대표를 통해 제도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절에서는 이러한 접합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어떤 정치적 몸을 구성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펨코는 원래 축구와 게임을 중심으로 네티즌이 모여 성장한 커뮤니티였고, 한때는 비교적 친문재인 성향이 강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9년을 전후로 급격히 ‘반민주당화’되었다(김선영, 2023). 2021년의 한 기사에서 어떤 정치 인플루언서는 이렇게 말했다. “2017년과 2018년만 하더라도 펨코에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더 많았다. 현 정부[문재인 정부]의 실적이 누적되면서 점점 더 변해갔고, 엠팍이나 펨코 그리고 대부분의 남초 커뮤니티들이 반페미 정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준석 현상이 일어나면서 대동단결했다”(정용인, 2021에서 재인용). 2019년경에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은 안티페미니즘과 반민주당 정서가 뜨겁게 결합하는(그럼으로써 친민주당 유저들을 밀어내는) 중요한 경합의 장이 되었다. 펨코의 덩치가 커지면서 정치인 이준석의 존재감 또한 급부상했다. 따라서 질문은 분명하다. 2019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여러 일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조국 사태’다. 조국 사태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정, 계급, 세대, 젠더, 진보의 위선이라는 여러 담론적 요소가 한꺼번에 응축되어 폭발한 사건이었다.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학생들이 모두 반민주당 성향인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의 불만을 단순히 진영논리로 환원할 수도 없으며, 대학생들의 ‘공정’에 대한 요구를 정당하지 않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어와 공격의 구도 속에서 ‘청년’의 정치적 얼굴이 매우 빠르게 구성되었다는 점이다.3 가령 변상욱 앵커와 페이스북에서 설전을 벌였던 백경훈은 스스로를 ‘조국 같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으나 열심히 노력한 청년’으로 소개하며 조국과 민주당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고, 여러 보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예를 들어 고성민, 2019; 고재석, 2019).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위원이 되었다. 이렇듯 청년들의 불만은 물줄기가 홈을 따라 흐르듯 ‘진보’나 민주당에 대한 분노와 반감으로 빠르게 수렴했고, 일련의 언론 매체는 청년들의 억하심정을 자극하고 조명하며 그것을 진영논리의 언어로 번역했다. 당시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이러한 번역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림 2는 〈“입으로만 부르짖는 공정·정의… 진보 꼰대들의 위선이 역겹다”〉(원선우·김영준, 2019)라는 제목의 기사에 실린 도표로, 2016년 ‘최순실 사태’와 2019년 ‘조국 사태’ 때 달라진 ‘친여 인사들’의 발언을 비교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9. 08. 26
“입으로만 부르짖는 공정·정의… 진보 꼰대들의 위선이 역겹다”

이 도표는 최순실 사태에 대해서는 “부정 입학”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한편 조국 사태에 대해서는 “‘황제 입시’ 논란”이라는 논쟁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조국을 둘러싼 당시의 논란이 검찰과 언론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려지고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부정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 그 논란의 추이가 어떤 식으로 청년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결집했느냐이다. 격한 감정을 이끌어 낸 중요한 요인은 조국의 딸 조민이라는 인물의 형상이었다. 엘리트 중년 남성 정치인의 비리는 한국 정치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환멸과 분노를 샀겠지만, ‘조국 사태’가 청년 남성들에게 이토록 강한 감정을 격발한 데에는 조민이라는 또래 여성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다. 조민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논란이 입시나 취업처럼 청년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치명적으로 건드릴 뿐만 아니라, ‘사치하는 여성’이나 ‘무임승차하는 여성’ 같은 오래된 여성혐오적 상상계를 소환하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조민은 조국 사태를 ‘젠더화’하여 수용하게 만든 중요한 형상이었다.

‘조민 포르쉐’ 가세연 명예훼손 무죄…”공적 관심사” / SBS – YouTube 썸네일

예를 들어 ‘가로세로연구소’(이하 가세연)에서 유포한 조민의 ‘빨간 포르쉐’ 같은 허위 소문이 뭇 커뮤니티에 그렇게 빠르게 유통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학교 주차장에 세워진 빨간 포르쉐의 이미지는 질투와 여성혐오를 동시에 자극한다. 그것은 사치하는 여성, 특권을 누리는 여성, 공정한 경쟁 없이 좋은 것을 취하는 여성이라는 오래된 상을 재활용한다. 조선일보 같은 ‘레거시 미디어’가 민주당이나 86세대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와 억하심정을 자극하는 동안, 가세연 같은 유튜브의 ‘황색언론’은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이 시기에 청년 남성들에게 민주당의 이미지는 ‘위선적인 기득권 세력’으로 굳어졌고, 그에 대한 증오가 조민이라는 형상을 통해 오랜 맥락을 가진 온라인 여성혐오와―그리고 부모의 애정과 지지를 독점하는 또래 여성에 대한 질투심과―결합했다. 이 점에서 2019년은 촛불에 대한 백래시가 새로운 담론적 연합을 구성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조국 사태는 86세대, 진보, 민주당, 페미니즘, 엘리트 여성에 대한 질투와 르상티망을 하나의 정치적 정동으로 묶어낸 사건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그토록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2016년 최순실과 정유라를 둘러싼 부정 입시 논란이 촉발한 이화여대 시위가 거대한 ‘촛불’로 번져 나간 것―그리고 응원가로 Kpop을 트는 등 ‘청년 여성’의 시위 문화가 광장에 일반화된 것―에 대한 백래시로서, 2019년 조국과 조민을 둘러싼 논란은 거대한 반동적 담론의 연합을 만들고 그 주축으로 ‘청년 남성’을―더 정확히 말해, 청년 남성의 한쪽 얼굴을―조명했다.

특혜를 누리는 또래 여성에 대한 질투, 위선적인 86세대와 민주당에 대한 증오, 자신을 이끌거나 대변해 주지 않는 부모 세대에 대한 실망. 홍수처럼 불어난 이 부정적 감정이 어떤 정치적 을 이루게 되었는가? 이 시기 이준석의 행보를 살펴보자. 이준석은 2018년 ‘여성할당제’를 둘러싼 토론에서 김지예 변호사와 선명하게 대립함으로써 일약 청년 남성들의 대변자로 떠올랐다. 곧이어 2019년 여름에 이준석은 본인의 인터뷰가 실린 《맥심》의 표지에 등장했는데, 《맥심》이 젊은 남성들을 타겟으로 하는 잡지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준석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남성들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이리예, 2025). 맥심의 표지에서 이준석은 헝클어진 머리에 귀여운 캐릭터 잠옷을 입은 채 등장한다(그림 2). 반면 잡지의 내지에는 번듯하게 수트를 차려 입은 사진이 실려 있다. 이 병존하는 두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듯, 이준석은 ‘평범함’과 ‘우월함’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한편에 수더분한 ‘옆집 형’의 이미지가 있고, 다른 한편에 잘 갖춰진 ‘엘리트 정치인’의 이미지가 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서 그의 저력은 바로 이 두 이미지를 오갈 수 있다는 데서 왔다.4 ‘엘리트 정치인’으로서 이준석은 대변되는 자들(청년 남성들)끼리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했고, ‘옆집 형’으로서는 자신과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남성들의 불만을 제도 정치의 언어로 대변하는 엘리트이지만, 동시에 커뮤니티의 언어를 이해하고, 가까운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으며, ‘준석이’ 혹은 ‘준스톤’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친밀한 애착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 공정 담론, 반페미니즘, 반민주당 정서를 묶어내는 이름이 되었다. 여성정책을 둘러싼 논란과 ‘인국공 사태’ 그리고 조국 사태를 거치며 거대하고 뜨거운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은 ‘공정’이라는 기표는 이준석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 되었다.

《맥심》 2018년 8월호 표지

국민의힘 탈당과 신당 창당을 앞둔 2023년 11월에, 이준석은 자신의 지지자를 결집하기 위해 ‘전국 순회 콘서트’를 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이준석의 콘서트에는 약 1,500명의 지지자가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에는 콘서트에 갔다 왔음을 ‘인증’하는 게시물과 그것을 응원하는 댓글들이 순례길의 신자들 마냥 기나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 게시물 중 하나의 인상적인 ‘인기글’을 보자(그림 3).

펨코 정치시사게시판 2023년 11월 인기게시물

게시물의 글쓴이는 드디어 ‘우리’도 조직화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을 표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이준석을 매개로 모인 청년 남성들이다. 바로 이 ‘조직화’를 통해 르상티망은 자부심으로 전환된다. 자신이 대변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은 자신을 대변해 주는 정치인에 대한 애착으로, 정치적 무력감은 대표되고 있다는 기쁨으로 전환된다. 마치 라캉의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자신의 통일된 이미지(자아 이상)를 보고 기뻐하듯이, 펨코의 유저들은 이준석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정치적 몸으로 ‘조직화’되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이준석에 대한 펨코의 강한 애착과 충성심은 이 전환의 효과로 이해할 수 있다. 펨코가 불만을 정치적 언어로 승화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집단이라면, 그 승화의 탯줄이 바로 이준석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의 게시물은, 냉소적으로 ‘팩트’를 내세우며 감상적인 ‘좌파’를 비웃고 비방하는 펨코 유저들(‘펨붕이’들)이 얼마나 ‘감정적’인지를, 좌파와 페미니스트의 ‘선동’과 ‘떼법’을 조롱하는 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이준석의 확장 행보를 둘러싸고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정의당 의원이었던 류호정과의 ‘제 3지대’ 연합설이 불거지면서 이준석이 페미니즘에 ‘오염’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불거졌던 것이다.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추천을 받은 인기글과 거기에 달린 일련의 댓글을 보자.

펨코 정치시사게시판 2023년 11월 인기게시물
위 게시물의 댓글

게시물은 이준석이 ‘래디컬 페미니즘’과 선명하게 대립한다는 증거로 이준석이 책에 쓴 문구를 제시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다. 사진상 첫 번째 댓글은 ‘안티페미니즘’을 “좌파의 반지성주의와 자유 탄압에 대한 저항의 정신”으로 거창하게 의미화한다. 거기에 달린 대댓글은 페미니즘에 신중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유주의’라는 이념에 입각해 극단적인 안티페미니즘·여성혐오(신남성연대 등)와는 선을 긋고 있다.

이처럼 펨코 이용자들은 자신을 일베나 신남성연대 같은 ‘극단적 여성혐오’ 집단과 구분하며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유주의자’로 정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김선영(2023)은 펨코의 안티페미니즘이 일베식 여성혐오와 다르며, 그 근저에는 공정 담론과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있다고 분석한다. 즉 여성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를 무턱대고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한 신자유주의적 논리 하에 여성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선영의 분석은 일리 있지만, 한편으로는 펨코의 자기 정체화를 너무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기도 하다. 앞서 보았듯, 온라인 안티페미니즘은 공정 감각 자체에 영향을 미쳐 왔고, 반대로 공정 담론은 안티페미니즘을 정당화해 왔다. 따라서 안티페미니즘보다 능력주의가 더 근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 요소는 어느 하나가 더 근본적이라기보다 상호 구성적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엄혜진, 2021; 2024).

대신 일베와 변별되는 펨코의 특징은 일련의 감정들이 ‘공정’이나 ‘자유주의’처럼 외견상 합리적인 정치적 언어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질투와 르상티망이 깔려 있지만, 동시에 이용자들은 자신들에게 정도와 이념이 있으며,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있는, 합리적인 집단이라는 자신감을 갖는다. 바로 이 자신감이 히스테리로부터 그들을 방어해 준다. 2026년 지방선거에서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이준석은 ‘부정선거론’과 분명히 선을 그었으며, 마찬가지로 선관위와 정부의 큰 실책이지만 부정선거는 아니라는 것이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의 여론이다. 물론 부정선거 쪽으로 기우는 목소리들도 없지 않지만,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게시글에는 흔히 이준석의 발언을 참조하는 반박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이준석이라는 아이콘이 청년 남성들에게 미치는 이중적인 효과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분명 이준석은 여성·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 반민주당 정서를 대변하며 정당화하는 인물이지만, 바로 그 대변을 통해 청년 남성들을 더 어둡고 공격적인 음모론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이 ‘승화’는 불안정하다. 그것은 분열, 좌절, 폭력적인 충동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2026년 봄 지방선거를 앞두고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에서는 개혁신당에 표를 줄 것인가, 국민의힘에 표를 줄 것인가를 두고 격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는 펨코의 정치적 정체성이 긍정적 비전보다 반민주당, 반페미니즘, 반86세대 등 부정적 정서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어떤 당이나 공약을 지지하는 것보다는 ‘민주당이 잘 안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 이준석에 대한 애착이나 관심도에 비해 개혁신당에 대한 관심도나 애정은 현저히 낮다. 이준석에 대한 펨코의 애착은 그만큼 단단한 정치적 기반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대표받는다는 감각이 약해지거나 정치적 실패가 누적될 때, 조직화된 르상티망은 다시 해체되어 분산된 충동으로 붕괴할 수 있다.

(3)에서 계속

  1. 이는 마이클 키멜(Kimmel, 2013)이 말한 ‘억울한 특권의식(aggrieved entitlement)’과도 연관되는 생각이다. ↩︎
  2. 이 인식에 중요한 참조점이 되는 사상가는 조르주 바타유다. 바타유(2022)가 파시즘의 심리 구조를 분석하면서 말했듯, 동질성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질적인 것에 의존한다. 바타유는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는 “동질적 사회의 무능력”(같은 책, 38)이 파시즘이나 권위주의를 불러오게 된다고 분석한다. ↩︎
  3. 그 당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부모의 기대, 즉 당위적으로는 ‘평등’이나 ‘진보’를 말하면서도 자식에게는 경쟁의 승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부모의 이중성에 대한 청년들의 성토가 주목과 호응을 끌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조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에는 부모 혹은 부모 세대에 대한 분노가 전이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4. 『포퓰리즘 이성』의 흥미로운 대목(라클라우, 2026, 98-104)에서, 라클라우는 프로이트의 ‘집단심리학’을 참조하며 동일시의 두 가지 경우를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사령관과 병사들의 경우처럼 지도자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는 경우로, 이때 동일시는 동등한 형제들 사이에 이루어지며, 그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다. 두 번째는 지도자가 “동등한 자 중 첫째”(103) 즉 맏형인 경우인데, 이때 지도자는 전자와 같이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동시에 동일시하는 형제들에 스스로 속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지도자는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바로 그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지도자의 정체성은 아버지이면서 형제 중 한 명으로 분열된다”(104). 이는 이준석이 갖는 ‘두 가지 이미지’가 갖는 포퓰리즘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논의로 보인다. 지도자의 이중성에 대한 라클라우의 논의는 브릿지와 파스코가 말한 ‘하이브리드 남성성’(Bridges and Pascoe, 2014)과도 연관될 수 있다.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고전적인 ‘헤게모니 남성성’ 담론이 갖는 일면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즉 오늘날 특권적 남성은 단순히 전통적 남성성이 요구하는 강인한 마초적 성격만 갖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친밀하며 탈권위적인 면모를 함께 가질 수 있다. 이준석이 ‘엘리트 정치인’과 친밀한 ‘옆집 형’의 이미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하이브리드적으로’ 갱신된 포퓰리즘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1)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1. 연구 배경

한국 사회에서 청년 남성의 우경화 혹은 정치적 보수화는 이제 낯선 문제가 아니다. 온라인 안티페미니즘과 민주당 혹은 ‘좌파’에 대한 증오가 결합하는 양상 역시 새삼스럽지 않다.1

온라인 여성혐오 자체는 인터넷의 보급 이후 항상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구한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와 비평가가 분석하고 비판해 왔다. 윤보라(2013)의 연구가 보여주듯, 인터넷 공간에서 여성혐오는 특정 사건이나 세대의 돌출적 현상이라기보다 한국 온라인 문화의 형성 과정과 함께 누적되어 온 문제다. 남성이 약자라는 서사, 이른바 역차별론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수아·이예슬(2017)이 분석한 것처럼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는 남성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여성과 페미니즘을 특권적이거나 위선적인 집단으로 표상하는 담론을 생산해 왔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남성성 규범이 안티페미니즘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분석(김수아, 2022)도 있다.

그럼에도 최근 10년 사이에 지적해야 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온라인 여성혐오·안티페미니즘이 반민주당, 반진보, 반86세대 정서와 단단히 결합하여 하나의 정치적 경향으로 가시화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정치적 현상으로서 ‘이대남’이 정치권과 언론에서 광범위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8년 말엽부터이며, 그것이 선거 정치의 주요 문제로 또렷이 부상한 것은 2021~2022년경이다(김선영, 2023; 김내훈, 2022; Lee, 2025). 2018년 12월 리얼미터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눈에 띄게 하락한 집단으로 20대 남성이 지목되면서 ‘이대남’은 처음으로 언론과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리얼미터, 2018; 또한 고상민, 2018 참조). 곧이어 2019년 봄 《시사IN》의 기획 기사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는 이 집단을 페미니즘과 여성정책에 극히 적대적인 집단으로 식별했다(천관율, 2019). 그러다 2021년 보궐선거에서 20대 남성과 여성의 ‘표심’이 극명하게 갈리면서 청년 남성은 설명되어야 할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거듭 조명받게 됐다(이지혜, 2021). 그간 ‘이대남 현상’ 혹은 그 호명에 대한 많은 비판적 논의(손희정, 2021; 김내훈, 2021; 최성용, 2022)가 이어져 왔으나, 2025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37% 이상이 이준석에게, 36% 이상이 김문수에게 투표한 것으로 드러났고(박영석·김영은, 2025) 청년 남성들이 주축이 된 서부지법 사태 등이 이어지면서 젊은 남성의 보수화 또는 극우화는 부정하기 어려운 사회적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천관율 기자, 시사IN, 2019. 04. 1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44
연합뉴스 2025-06-03
[그래픽] 2025 대선 성별·연령별 출구조사 결과”
https://www.yna.co.kr/view/GYH20250603000500044

청년 남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 현상을 단순히 계급, 젠더, 지역, 세대와 같은 객관적 변수들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러한 변수들은 중요하다. 예컨대 남녀 임금 격차를 보자.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주요국 중 가장 큰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대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조금 다른 그림이 보인다. 박세현·이태(2024)의 분석에 따르면 남녀 임금 격차는 20대에서 가장 작고, 40대와 50대에서 훨씬 크게 나타나며, 60대에서는 다시 조금 줄어든다. 한마디로 평균임금이 높은 중년층일수록 성별 격차도 크게 나타난다. 20대에서 50대로 갈수록 격차가 커지는 현상은 구조적 성차별이나 유리천장의 근거로 보일 수 있다. 처음 일자리를 갖게 되는 20대에서는 남녀 간에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어떤 직군에서는 여성이 우세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이 일을 그만두거나 승진에서 누락되는 등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 통계적 사실은 20대 남성들이 “우리는 이미 거의 평등한 조건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정작 성차별이 가장 심한 40대~60대가 왜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가”라고 반문하는 논리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는 청년 남성의 반86세대 정서, 즉 ‘가장 불공정한 기성세대가 청년 남성에게 도덕적 책임을 전가한다’는 감각과도 연결된다.2 동일한 통계적 사실이 정반대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준석에게 일약 유명세를 안겨준 2018년의 여성할당제 찬반 토론에서, 김지예 변호사와 이준석은 이 지점에서 ‘사실’에 대한 해석을 놓고 충돌했다.

물론 어느 모로 보아도 ‘역차별’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설령 군복무가 청년 남성에게 불리한 제도적 조건이라고 인정하더라도, 20대에서조차 남성은 여성보다 미세하게나마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정책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이미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면 역차별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역차별론은 많은 남성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가? 왜 많은 청년 남성은 자신이 더 많은 짐을 지고 있고, 더 불리하며,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가? 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남성들이 오히려 ‘피해자’나 ‘약자’라는 서사(김수아·이예슬, 2017)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어떤 심리적 현실, 어떤 결여, 어떤 욕망,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과 경쟁에 시달리고, 규범적·정상적 삶에 대한 압력에 짓눌리며, 커뮤니티와 SNS에서 혐오와 비교, 음모론에 노출되고, 너무 크게 오른 집값 때문에 ‘내 집 마련’의 꿈이 좌절되는 등의 문제는 청년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일 테다. 그렇다면 왜 우경화 혹은 ‘반민주당화’(김연희, 2026)는 청년 남성들에게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청년 남성의 감정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복이나 삶의 만족은 학력, 경제력, 직업 안정성 같은 객관적 지표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같은 조건에 놓여 있더라도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는지, 나빠지고 있다고 느끼는지에 따라 주체의 감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또한 누구와 어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어떤 기대와 요구 속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도 삶의 감각과 감수성은 달라진다. 삶에 대한 만족은 단순한 객관적 조건들 속에서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마땅히 누리거나 도달해야 하는 삶’이라는 상상적·상징적 기준과 객관적 조건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 남성들은 ‘마땅히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규범적 기대에―그런 기대가 실체가 있건 없건 간에―부담을 느끼면서 그 기대에 부합하기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한 기대와 욕망이 남아 있고 재생산되는 사회에서 형식적 평등의 진전은 어떤 남성들에게 오히려 박탈과 상실의 경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글은 감정을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고자 하며, 이 점에서 페미니즘과 정동 연구의 문제의식을 따른다. 앤 츠베트코비치(2025)가 말하듯,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공유되며 때로는 정치적 실천의 조건이 된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감정을 “개인과 집단의 몸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아메드, 2023, 24). 특정한 몸에 특정 감정이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몸의 표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감정은 어딘가에 위치 지어진, 누군가와 결속하고 부대끼는, 누군가를 밀쳐내고 배척하는 몸의 경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대상에 역겨움이나 공포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에 맞서 소름이 돋은 피부를, 움츠러들고 경계 태세를 갖춘 몸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는 국가, 민족, 시민, 민중 등을 하나의 집합적 몸으로 상상하거나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몸 역시 어떤 대상을 밀쳐내거나 배제하려는, 감싸거나 보호하려는 감정을 통해 그 형태와 경계를 갖춘다. 아메드를 따라 이 글은 정동과 감정을 엄격히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다.3 대신 감정이 전염되고 전파되며 정치적·사회적 몸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2. 세 가지 감정: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이 글은 감정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한국의 몇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조사·분석과 결합한다. 즉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역동을 감정이라는 렌즈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동시대 청년들의 감수성과 멘털리티를 이해하는 데 커뮤니티의 맥락과 문법, 역동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청년 남성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많은 청년 남성이 커뮤니티를 이용하며 또 커뮤니티의 언어가 청년들의 문화와 감수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연구를 위해 감정에 대한 정신분석학·철학·사회학 문헌들을 살펴보는 한편으로, 커뮤니티에 대한 선행 연구 분석과 함께 일련의 커뮤니티 게시물과 댓글을 수집하고 살펴보았다.4 이 글의 목표는 한국 남초 커뮤니티의 감정 흐름을 큰 틀에서 이해하기 위해 가설적 얼개를 그리는 것으로, 선택적인 사례와 불충분한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글은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세 가지 감정의 조합으로 설명한다. 질투,5 르상티망, 히스테리다. 세 감정 모두 오래도록 낮게 평가되어 온 부정적 감정이며, 특히 여성화된 감정이기도 하다. 질투는 사소하고 비천한 감정으로(Ngai, 2005), 히스테리는 비이성적이고 병리적인 상태로(미첼, 2025), 르상티망은 약자의 음습한 복수심으로(Illouz, 2023) 간주되어 왔다. 이 감정들은 이성적 토론이나 정당한 정치적 분노와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공적 논의의 대상이라기보다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오랫동안 이 감정들에 대한 부정적 담론은 여성이나 약자의 감정을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모욕하고 병리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재생산되었다(Illouz, 2023; Ngai, 2005).

이 ‘여성화’된 감정을 남초 커뮤니티의 감수성과 역동을 이해하기 위해 호출하는 것은 모욕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남성들에게 향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대로 도덕적 비방이나 모욕의 뉘앙스를 덜어내고 감정의 사회적 형성과 변이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는 특별히 ‘여성적’인 감정도, 단지 비합리적인 감정도 아니다. 이 감정들이 언제나 반동적이거나 파괴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인정의 실패, 욕망의 좌절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될 때 나타나는 정동적 형식이다. 질투는 불평등을 감지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 르상티망은 무력감 속에서 불만과 분노가 도덕적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히스테리는 상징적 질서 안에서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다고 느끼는 주체가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담론 형식이며, 그 담론 형식을 가동하는 정동 형식이기도 하다. 질투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일 수 있고, 르상티망은 부당한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적 감각과 인정 요구(Rostbøll, 2023)로 이어질 수 있으며, 히스테리적 질문은 기존 상징질서의 결함을 폭로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들이 특정한 온라인 환경,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 남성성의 위기, 여성혐오 담론과 결합할 때 어떤 방향으로 굳어지는가에 있다. 이 글은 감정들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극우화와 안티페미니즘의 양분이 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세 감정은 각기 다른 맥락과 주요하게 연결된다. 첫째, 온라인 주목 경쟁은 특히 질투와 관련된다. 이 경쟁 속에서 “누가 더 쉽게 주목받는가”라는 질문은 곧 질투의 문제로 변한다. 온라인상에서 주목을 끄는 사람이나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갖거나 상징적·물질적 자원을 더 쉽게 점유할 수 있다―혹은 적어도 그렇게 여겨진다. 둘째, 도달할 수 없는 동시에 벗어날 수도 없는 ‘평범함’의 모순된 압력은 르상티망과 관련된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평범한 삶’은 한편으로는 모든 측면에서 ‘평균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는 힘겨운 꿈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뛰어나지 못한 것, 개성 없는 것으로서 무시되거나 경멸된다. 평범함의 이러한 모순과 균열, 불안정성이 르상티망을 격화한다. 셋째, 정치적·문화적으로 대변되거나 인정되지 못한다는 감각은 히스테리와 관련된다. 물리적 몸은 있지만 상징적 몸은 갖지 못한 주체, 즉 사회에 존재하지만 자신의 고통과 요구가 제대로 대변되거나 인정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주체가 대타자를 향해 히스테리적 질문을 반복한다.

이 세 감정은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들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실제로 온라인 소통 환경에서 복잡하게 뒤섞인다. 막스 셸러(Scheler, 1961)는 르상티망에 대한 고전적 분석에서 질투가 무력함 속에서 곪을 때 르상티망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질투와 르상티망을 하나의 연속적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르상티망은 히스테리적 질문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왜 우리만 손해 보는가?”, “왜 남성의 고통은 인정되지 않는가?”, “왜 여성과 소수자만 보호받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구가 아니라, 대답을 요구하면서도 어떤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악순환의 정동 형식이다. 히스테리적 질문이 질투와 르상티망을 새롭게 생산하고 심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세 감정은 한 방향으로 심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두 가지 경로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는 불만과 르상티망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는 경로다. 여기서는 에펨코리아(이하 펨코) 정치시사게시판과 ‘이준석 현상’을 주요 사례로 다룬다. 다른 하나는 축적된 불만의 정동이 충분히 상징계에 등록되지 못하고 더 ‘마이너’하고 음모론적인 공간에 고여 곪아가는 경로다. 여기서는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의 ‘레드필 갤러리’ 같은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경로는 서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동적 흐름이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거나 붕괴하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3. 질투 혹은 온라인 주목 경쟁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의 형성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민철(2026, 88-92)은 한국 남초 온라인 문화를 대략 세 단계로 구분한다. 1세대는 디시와 일베로 대표되는 ‘막장’ 커뮤니티 문화고, 2세대는 펨코처럼 ‘공정’ ‘자유주의’ 등 합리적인 어휘의 겉옷을 입은 커뮤니티이며, 3세대는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등 짧고 강렬한 영상과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이다. 실로 현재 청소년 사이에 음모론이나 혐오 표현이 전파되는 데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3세대’ SNS의 역할이 중대해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은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이나 SNS는 다루지 않으며 정민철이 1세대와 2세대라고 했던 커뮤니티에 주목할 것이다.6 커뮤니티는 오늘날에도 정동과 담론의 중요한 저장소이자 증폭기이고, SNS나 오프라인에서 전파되는 정치관, 세계관, 음모론, 혐오 표현의 상당 부분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여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디시는 1999년 디지털카메라 동호인 웹사이트로 출발했다. 이후 수많은 갤러리를 거느린 국내 최대의 커뮤니티 포털로 성장했고, 한국 온라인 문화의 발원지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디시에는 수만 개의 갤러리가 있고, 갤러리마다 관심사와 성격이 판이하기에 디시 전체를 어떤 정치적 성향으로 식별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는 디시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문제를 간략히 짚고, 이후에 디시의 한 마이너 갤러리를 중요하게 살펴볼 것이다.

디시는 수많은 혐오 표현과 온라인 ‘막장’ 문화의 진원지로 말해지지만, 한편으로는 반권위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한 유희의 공간으로 의미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가성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초기 연구인 이길호의 『우리는 디씨』에도 잘 나타난다. 이 책은 2000년대 디시 문화를 연구한 저자의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2012년에 출간되었다. 연구가 진행된 시점은 일베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부상하기 전이며, 청년 남성의 보수화가 지금처럼 뚜렷해지기 전이다. 디시라는 ‘남성적’ 공간에 대한 이길호의 평가는 상당히 유보적이었다. 디시의 ‘패륜’과 ‘막장’ 같은 성격 그리고 여성혐오를 비판적으로 경계하면서도, 디시를 ‘잉여’ 청년들이 스스로 가시화하는 유희의 장으로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화가 심화되면서 청년들은 경쟁과 불안정성에 더 많이 노출되었고, 점차 생산의 주체라기보다 부양과 관리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조민서, 2019). 이런 상황 속에서 ‘잉여’ 청년들은 디시에서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자유롭고 평등한 발언의 공간’을 찾고 추구했다.

이길호는 디시의 성격을 “남성적 에토스와 극단적 평등주의”(이길호, 2012, 233)라고 짚어낸다. 여기서 ‘남성적 에토스’는 당시 유저 대다수가 남성이었다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특징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 평등주의’다. 디시는 초기부터 모두에게 똑같은 발언권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 평등주의를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원칙이 아니라 강박적이고 전투적인 실천으로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초기 디시에서 발언의 평등을 위한 싸움은 격렬했다. 그 주요한 대립물은 네이버 카페였다(같은 책, 236 이하 참조). 많은 네이버 카페는 ‘계급제’로 운영되었고, 유저들 사이의 발언권은 등급, 인지도, 참여도에 따라 달라졌다. 디시는 이러한 발언권의 서열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갤러’들은 모두 똑같은 발언권을 갖는다. 어떤 유저가 인지도를 얻더라도 더 큰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니다. 많은 추천을 받아 ‘개념글’에 등극하더라도 다음 날에는 다시 처음부터 경쟁해야 했다. 매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임과 같았다.

바로 이 평등주의가 디시의 폭발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여러 카페의 ‘평민들’은 말의 평등을 좇아 디시로 유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디시 유저들은 스스로 ‘민주화’ 투사의 정체성을 부여했고, 기존 카페 질서에 맞서는 자신들의 움직임을 “전쟁”이나 “혁명”으로 의미화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등이 어떤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였다는 점이다. 구성원들은 같은 발언권을 가지고, 같은 장에서, 같은 인정의 내기물을 두고 경쟁했다. 개념글은 위로부터 주어진 ‘자격’이 아니라 동등한 구성원들이 부여한 ‘인정’의 표지였다. 이 게임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등한 발언권을 가진 모든 구성원이, 바로 그 구성원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매 순간 새롭게 경쟁한다.’

이것은 디시가 추구한 세계의 상을 보여준다. 그곳은 온갖 사회적 불평등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세계, 완전 경쟁이 가능한 세계, 경쟁의 결과가 매일 초기화되는 세계, 따라서 경쟁이 놀이가 되는 세계였다.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불안정성을 내면화한 청년들은 디시에서 그 위협과 스트레스를 놀이의 형식으로 순치했다. 디시는 살고 싶은 세계의 축소판이자, 동시에 실제 세계의 압력을 견디게 하는 가상의 훈련장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모두가 병신’이라는 기묘한 평등주의적 전제 위에서 ‘누가 더 웃기는가’를 놓고 벌이는 놀이화된 경쟁의 장으로 만들었다(김학준, 2022, 1장 참조).7 이 기묘한 평등주의와 능력주의적 경쟁 논리의 조합은 몇 가지 역설적 결과로 이어졌다.

첫째,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평등’은 사회에 엄존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구조적 차별을 괄호 안에 넣는 효과를 낳았다. 커뮤니티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김학준이 이길호의 논의를 요약하며 말했듯, “모두가 ‘좆병신’인 평등한 세상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은 인위적으로 탈각된다”(같은 책, 64). 둘째, 게임의 내기물이 동등한 구성원들의 인정이기 때문에, 유저들은 자극적이고 웃기면서도 구성원들이 공감할 만한 콘텐츠를 경쟁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는 커뮤니티 언어의 학습을 장려하는 조건이자, 커뮤니티의 정치적 편향을 강화하고 혐오의 모방과 전파를 가속화하는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효과는 ‘여성 배제적 혐오’의 형성이다.

초기 디시에서 특히 강하게 혐오된 것은 ‘친목질’이었다(이길호, 2012, 339 이하). 친목질은 공정한 경쟁을 망치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성 유저가 있으면 친목질이 일어나기 쉽다. 이 ‘남초’ 환경에서 여성은 쉽게 주목받는다. 남성 유저들은 여성이 쓴 게시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웃기거나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더라도) 관심을 주고 추천을 누른다. 그 결과 공정한 경쟁의 질서가 흐트러진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반동으로 갤러리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혹은 여성임을 티 내지 말아야 한다는―그리고 친목질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는―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고도 주목과 인정을 편취하는 존재로 표상되었다(김학준, 2022, 61-63).8 친목질에 대한 혐오는 일베에 계승되어 한층 강화된다.

물론 게임 등 온라인 환경에서 남성 이용자들이 여성 이용자에게 괜히 관심을 표하거나 과도하게 친절하게 구는 것도 여성혐오와 성역할 통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 친밀한 태도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말이 이상하지만 ‘친화적 혐오’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여성 이용자를 배제하고 억제하려는 혐오는 그와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후자는 ‘배제적 혐오’라고 구분해서 부를 수 있다. 여성 배제적 혐오는 단순히 여성 일반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룰이 여성에 의해 훼손된다는 상상에 기초한다. 반대로 완전히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려면 ‘친목질’이 철저히 배제된 채, 뿔뿔이 흩어진 순수한 개인―이 개인은 남성으로 상정된다―만이 있어야 한다. 온라인 소통환경과 커뮤니티의 ‘세팅’이 청년 세대의 공정 감각에, 그리고 그 감각이 여성혐오와 결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무리한 추론은 아닐 테다. ‘역차별론’이나 여성의 ‘무임승차론’ 등이 커뮤니티에서 쉽게 전파되고 강화된 데는, 온라인 소통 환경이 실로 그렇게 느껴지도록 조성되어 있기 때문인 면도 있다.

온라인 소통 환경에서 주목은 희소한 자원이다. 아무나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추천을 받고 많은 댓글이 달리며 ‘개념글’에 오르는 것은 커뮤니티 안에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이때 여성은 쉽게 보이는 존재, 쉽게 주목받는 존재, 따라서 공정한 경쟁을 교란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여기서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오래 전승되어 온 여성혐오적·성차별적 편향, 즉 여성을 시선의 대상으로 만드는 욕망과 권력의 구조가 마치 여성에게 유리한 조건처럼 보이게 전도되는 것이다. 시선의 권력에 대한 고전적 담론(벤담과 푸코의 ‘파놉티콘’을 떠올려보라)에서, 보이는 것은 불리하고 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온라인 주목 경쟁의 장에서는 이 관계가 얼핏 뒤집히는 듯 보인다. 보이는 것은 주목받는 것이며, 주목받는 것은 유리하다. 주목은 돈이 되고 영향력이 된다. 물론 온라인에서 여성의 높은 가시성은 성적 대상화, 괴롭힘, 신상 털기의 위험을 수반(Lewis et al., 2017 참조)하고, ‘벗방’과 같은 성 착취 산업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맥락들은 쉽게 무시되며, 가시성의 현금화 가능성과 문화적 영향력만이 여성의 특권으로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이미지가 온라인상에서 더 쉽게 주목과 관심을 끈다는―그리고 그로부터 여성이 ‘쉽게’ 이익을 얻는다는―이데올로기적 통념은 상당 부분 왜곡된 것이지만, 이 통념의 사회적 효과는 실재한다.9

이 전도 속에서 여성은 주목을 끄는 인자를 가진 존재로 상상된다. 여성 방송인, 연예인, 인플루언서, 공인 등 ‘잘 보이는 곳의 여성들’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욕망의 대상이자 질투 혹은 ‘샤덴프로이데’(김현경, 2016)의 대상이 된다.10 가령,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매노스피어 커뮤니티에는 ‘현대에 여성이 남성보다 돈을 더 쉽게 번다’는 주장이 종종 등장한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전문직 남성 혹은 남성 운동선수와 여성 방송인―특히 ‘성적인’ 맥락의 방송인―을 비교한다. 비교를 통해 도출하는 결론은 이렇다. 남성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전문성이나 특출함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성은 그저 타고난 ‘몸만으로도’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몸이 시선을 끌고, 오늘날의 온라인 소통 환경은 그 관심을 쉽게 현금화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련의 청년 남성들은 “돈 되지 않는 몸을 가진 남성-피해자들”(김주희, 2024)로 스스로를 정체화한다.11

‘돈’뿐만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일부 남성들은 여성들이 더 많은 자산을 불공정하게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 당시 청년 남성들이 정부가 “여자 편”만 든다는 이유로 정권에 분개를 드러냈던 것(이재호, 2019)도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분노 역시 여성들의 말이 더 잘 들리고 정치적·문화적으로 더 잘 수용된다는 판단을 깔고 있다. “왜 문재인/민주당은 여성들의 이야기만 들어주는가?”라는 질문은 주목과 인정의 분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한편, 당시 청년 남성들에게 ‘문재인-민주당-86세대’가 주목과 인정을 나눠줄 대타자(the Other)12로 여겨진 측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성이 더 쉽게 주목받는다’는 질투(envy)는 ‘이 사회, 혹은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여성의 말에 더 귀 기울인다’는 질투심(jealousy)과 쉽게 연동된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온라인의 대중적 페미니즘이 강하게 의견을 결집하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을 본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페미니즘의 전략을 모방하고 차용하려고 애쓰기도 했다(이우창, 2021).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역량을, 주목을 끌고 여론을 휘어잡는 능력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해, 201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청년 남성은 ‘조직화’된 페미니스트들만큼의 정치적 힘과 역량이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사실에 무력함을 경험했다. 이 무력함은 민주당과 페미니스트들이 합세하여 자신을 사회적·정치적 장에서 소외시키고 있다는 피해의식으로 곪아가기도 했다. 2021년 ‘젠더 갈등’에 대한 공개 토론에서, 이준석은 구조적·문화적 성차별이 엄존한다고 주장하는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의원님은 변호사가 되기까지 여성으로서 무슨 불합리한 차별을 겪으셨습니까?” 이 질문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정치적 수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잘 보이는’ 곳에 있는 엘리트 여성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다수 남성’을 효과적으로 대립시킨다. 그러한 대립 구도 속에서 ‘평범한’ 남성들은 구조적 성차별을 주장하는 엘리트 여성에 비추어 스스로를 약자나 소외된 자로 경험한다. 이런 왜곡된 가시성의 장이 만들어내는 대립 구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질투가 격화된다. 이 질투는 여당이나 기성세대가 여성만 편애한다는 질투심과 연동되고, 무력감이나 소외감 속에서 곪을 때 쉽게 르상티망으로 변한다.

(2)에서 계속

  1. 이러한 경향이 한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영미권의 온라인 매노스피어 및 극우화 연구에서 온라인 안티페미니즘은 청년 남성을 극우적 세계관으로 이끄는 주요한 경로 가운데 하나로 분석된다(예컨대 Mamié et al., 2021). ↩︎
  2. 『공정하지 않다』(박원익·조윤호, 2019)에 이런 논리로 청년 남성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이 있다. ↩︎
  3. 이 글에서는 정동을 ‘감정의 흐름’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감정과 정동의 구분 (불)가능성과 그에 따른 문제에 대해서는 김남이(2024)의 논의를 참조. ↩︎
  4. 연구 과정에서 현재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펨코리아 정치시사게시판에 대한 데이터 크롤링도 수행했다. 다만 이 글은 해당 자료에 대한 정량적 분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수집 자료는 논의할 사례를 찾고 게시판의 담론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만 활용했다. 자료의 수집 방법, 수집한 데이터에 기반한 시기별 어휘·의제 변화에 대한 분석, 펨코의 정치 성향 변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
  5. 이 글에서 다루는 질투는 jealousy보다는 envy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의 구분에 따르면 원초적 질투(envy)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거나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느끼는 감정인 반면, 이차적 감정인 질투심(jealousy)은 내가 소유했다고 여기거나 애착을 가진 존재를 제삼자에게 뺏길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다(Klein, 1975, 181 이하 참조). 즉 envy는 이자관계에서, jealousy는 삼각관계에서 주로 발현되는 감정이다. 이 글에서 envy는 ‘질투’로, jealousy는 ‘질투심’으로 나누어 부른다. 한편 동기간·또래 관계에 주목하는 줄리엣 미첼(2015)을 주요하게 참조하는 필자는 원초적 질투가 어머니와의 이자관계뿐 아니라 또래 관계에서도 발현될 수 있다고 본다. 또래 관계에서의 질투 문제에 대한 평론으로는 이희우, 2026 참조. ↩︎
  6. 현재 한국에서 혐오, 극우적 세계관·가치관, 음모론의 전파에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틱톡, X 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
  7. 이 기묘한 평등주의를 디시보다 더 극단적으로 밀고 간 것이 일베다. 그것은 ‘잉여의 평등주의’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디시에서 일베까지 자조적으로 자주 쓰던 말을 사용하자면) ‘좆병신의 평등주의’라고 할 수 있을 무언가다. 일베에서 이 평등주의는 단순히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도덕적 최저점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위악적 평등주의가 노무현, 민주화, 세월호, 촛불혁명 등 사회적·도덕적 의미를 부여받은 대상에 대한 일베의 대대적인 공격과 조롱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즉 만약 그러한 대상들이 정말로 도덕적으로 의미 있다면, 모든 인간이 결국 쓰레기나 ‘좆병신’일 뿐이라는 일베의 ‘평등주의적’ 전제―이 전제는 모든 위악적이고 경쟁적인 유희의 조건이다―가 훼손되므로, 일베는 그러한 대상들을 깎아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쾌락을 ‘불쾌한 긴장의 해소’라고 보는 프로이트적 관점(프로이트, 2020)에서, 노무현이나 민주화 등을 조롱하고 하찮게 만드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도덕적 부담 혹은 도덕적 질투의 해소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8. 여성에게 잘해주거나 집적대는 남성, 이른바 ‘보빨러’나 ‘스윗남’, ‘영포티’ 등에 대한 조롱 역시 이 논리의 연속선상에 있다. ↩︎
  9. ‘정치적 넷카마’의 출현을 그 효과의 예로 들 수 있다. ‘넷카마’는 온라인상에서 여성인 척하는 남성을 일컫는다. 2018년에 ‘최지혜’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활동했던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실체가 사실 30대 남성임이 밝혀지는 일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2026년 5월에 ‘윤어게인’을 외치고 참여를 고무하는 한 젊은 여성의 인스타그램 계정 주인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자백에 의해 밝혀졌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것으로, 더 많은 사람(특히 남성)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
  10. 질투와 샤덴프로이데의 관계에 대해서는 케이, 2024, 1장 참조. ↩︎
  11. 김주희(2024)의 분석이 보여주듯, 타고난 몸까지 ‘자산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 젠더화된 인식은 온라인에서의 주목 경쟁뿐 아니라 연애나 결혼, 취업, 자산 축적, 문화적 영향력 등에 영향을 미치는 ‘인적자본’ 전반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
  12. 라캉의 ‘대타자’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주체의 말과 요구를 듣고 그 의미와 정당성을 승인해 줄 것으로 상정되는 상징적 권위의 자리다(Žižek, 1997). 법, 국가, 사회, 제도 등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특정한 정치인이나 집단이 그 대리자로 경험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의 맥락에서, 주인의 관심이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한다는 데서 오는 질투심이 히스테리의 주요한 원인이자 히스테리에 동반하는 감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프로이트, 2020b). ↩︎

앙투아네트 루브루아·토마 베른스, “알고리즘적 통치성과 해방의 전망”(2013)

불일치성은 관계를 통한 개체화의 전제조건인가?

프랑스어 원전

https://pure.unamur.be/ws/portalfiles/portal/54965417/7413.pdf

영역본

https://shs.cairn.info/article/E_RES_177_0163?lang=en

[옮긴이: 지난 십여 년간 알고리즘 통치성, 자동화, 플랫폼 자본주의 관련 비판적 담론에서 자주 인용되어온 루브르아와 베른스의 논문. 옮긴이가 공부하다가 번역. 오역의 여지 있음. 옮긴이가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는 관계로 번역은 일차적으로 Liz Carey-Libbrecht의 영역본을 토대로 했고, 프랑스어 원전과 프랑스어 원전에 대한 chatGPT의 번역을 참조해 수정했다. 이 논문의 21번 각주와 23번 각주는 내용이 같은데, 저자들의 실수인지 편집상의 실수인지 알 수 없다. individuation은 맥락에 따라 ‘개인화’나 ‘개체화’로 혼용하여 옮겼고, persnalization은 ‘인격화’로 구분하여 옮겼다. 이 글에는 질베르 시몽동의 개념들이 많이 나오는데, 시몽동 역서들의 선례를 따라 transindividual individuation은 ‘관개체적 개체화’로, orders of magnitude는 ‘크기의 등급’으로, metastable은 ‘준안정성’으로 옮겼다. 본문에 있는 []는 옮긴이의 삽입구이며 인용문 속의 {}는 저자들의 삽입구이다.]

알랭 데로지에르를 추모하며, 영감을 준 대화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작업에는 그의 귀중한 제안이 남긴 흔적이 새겨져 있다.

서문

빅데이터가 열어놓은 통계적 집계·분석·상관관계correlation의 새로운 가능성은 우리를 ‘평균인’에 초점을 맞추었던 전통적인 통계적 관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제는 ‘평균’이나 ‘규범’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으면서 ‘사회적 실재’ 자체를 직접적이고 내재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듯 보인다.1 “비규범적 객관성”, 더 나아가 “원격객관성tele-objectivity”(Virilio, 2006: 4)이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디지털 진리체제는 ‘사회적 실재’를 원격으로, 동시에 실시간으로 모델링하는 수많은 새로운 자동 시스템에서 구현된다.2 이러한 시스템은 보안·보건·행정·사업 등을 둘러싼 상호작용을 맥락화하고 자동으로 인격화하는 일을 한층 강화한다.3 여기서 우리는 알고리즘적 통계 활용의 “원격객관성”이 어느 정도까지, 또 어떠한 결과를 낳으며 이 시스템들을 사회에서 가장 내재적인 규범성들을 반영하는 거울로 만드는지 검토하려 한다. 이 내재적 규범성은 규범에 관한 모든 측정과 관계, 모든 관습과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시스템은 그러한 내재적 규범성―캉길렘이라면 생명 자체에 내재한다고 말했을 규범성―을 (재)생산하고 증식하는 데 기여한다.4 그러나 그 과정에서 디지털로 번역할 수 없는 사회적 규범성은 가려지며, 가능한 한 침묵 당한다.

기성의 규범으로부터 독립한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비규범성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의 기술적 틀이 인간의 모든 의도나 기술적 ‘대본script’과 무관하게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자율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자기학습 알고리즘 시스템을 포함하는 보안·마케팅·엔터테인먼트 등의 응용프로그램이 인간 행위자들의 요구에 단순히 응답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5 알고리즘 통치성에 관한 우리의 비판은 과학기술학의 관점을 간과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기술 시스템과 인간 행위자가 서로를 공동구성하는 메커니즘과는 다른 문제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응용 분야와 무관하게 프로파일링을 위해 사용되는 데이터마이닝은 코드화[코딩]에 의해 파편화된 개별 사례들을 상관관계의 논리에 따라 재구성한다. 이때 개별 사례들은 일반적 규범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평균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러 측정값 사이의 관계 체계와만 연결된다.6 여하한 형태의 평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이러한 해방은 본질적으로 시스템의 자기학습적 성격에서 비롯되며, 동시대의 규범적 작용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알랭 데로지에르(Desrosières, 1992: 132)가 설명한 통계정보의 관습적 기원에서도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길 “통계정보는 이미 존재하는 ‘실재’를 순수하게 반영한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통계정보는, 서로 조정되지 않은 다수의 힘이 끊임없이 분화시키고 분리하려 하는 존재들 사이에 등가성을 설정하는 일련의 관습이 잠정적이고 취약하게 승인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통계정보가 이러한 관습적 기원을 갖는다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이 정보가 토론의 준거가 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언제나 이의를 받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사이의 긴장은 공론장이 가능해지는 조건을 사유하는 데 중대한 과제를 제기한다.” 데이터마이닝에서 이루어지는 통계의 특수한 활용은 더 이상 어떠한 관습에도 뿌리내리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난관을 피해 간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것이 공론장을 만들어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서비스·상품 제안을 ‘개인화’한다는 명목 아래,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시대에는 비대해진 사적 영역이 공론장을 식민화하는 일이 벌어진다. 새로운 형태의 정보 필터링이 정보적 면역을 형성하여 의견의 급진화와 공유된 경험의 소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Sunstein, 2009). 더구나 민주적 토론을 촉진하고 보편적 이익에 봉사하기보다는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가능한 인간의 모든 주의를 체계적으로 포획하려는 경향, 이른바 주의경제[관심경제]의 문제도 있다.

우리는 먼저 의사결정을 위한 통계, 곧 결정 통계dicisional statistic가 작동하는 방식을 기술할 것이다. 이를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하면, 예측이나 배제를 목적으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정보를 자동으로 추출하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소비, 위험, 고객 충성도 제고, 새로운 고객층의 설정 등이 그 사례다. 이 과정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실제로는 서로 뒤섞여 있는―이 단계들은 흐릿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통계적 실천을 세 단계로 나눈다. 각 단계에서 개별 주체가 어떻게 회피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주체와 ‘실재’ 모두의 통계적 ‘분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일 것이다. 이어서 이 통계적 분신을 검토하고, 각 단계가 모두 주체화 과정을 방해한다는 점을 밝힌 뒤, 알고리즘적 통치성이 개인도 주체도 아닌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관찰에 기초하여 관계 자체가 어떻게 변형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관계는 역설적으로 실체화되어 생성에서 떼어낸 추출물이 되며, 개체화 과정에 깊이 새겨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과정을 가로막는다. 생성과 개체화 과정에는 ‘불일치disparation’, 곧 격차나 차이를 하나의 조정된 체계 안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불일치성disparateness’의 물질/문제matter가 필요하다. 그것은 크기의 등급orders of magnitude의 이질성과 존재 양식의 복수성을 뜻하지만,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디지털) 실재를 자체 안에 폐쇄함으로써 이를 끊임없이 질식시킨다.7

1.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세 “단계”

(1) 빅데이터의 수집과 데이터 웨어하우스의 구축

첫 번째 단계는 선별되지 않은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자동으로 저장하는 것으로, 빅데이터를 구성하는 ‘데이터 감시(dataveillance)’라고 부를 수 있다. 데이터는 다양한 출처에서 막대한 양으로 제공된다. 정부는 보안·통제·자원관리·지출 최적화 등을 위해 데이터를 수집한다. 민간 기업은 마케팅과 광고, 제안의 개인화, 재고 관리나 서비스 개선, 요컨대 판매 효율성과 이윤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데이터를 모은다. 과학자들은 지식을 획득하고 개선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한다. 개인들 또한 소셜네트워크, 블로그, 메일링 리스트 등에 ‘자신의’ 데이터를 자발적으로 공유한다. 이 모든 데이터는 사실상 무제한의 저장능력을 갖춘, 세계 어디에서나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 웨어하우스’에 전자적으로 보관된다. 이 데이터는 기본적으로 가능한 한 많이 수집되고 보존되며, 수집된 정보가 다른 데이터와 상관된 뒤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 다시 말해 구체적인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측과는 분리되어 있다[예측 없이 수집된다]. 그것은 양도되었다기보다 방치된 정보이며, 전달된 데이터라기보다 남겨진 흔적이다. 그럼에도 ‘도난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지극히 범상하고 흩어진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 모든 요소는 최종 목적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가리고, 주체의 관여와 정보전달에 요구되는 동의를 최소화한다[최소한의 동의만을 요구한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형태의 의도성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 데이터는 실재의 다양한 면모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실재를 철저하지만 완전히 분절된 방식으로 분해한다는 점에서 일반화된 디지털 행동주의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Rouvroy, 2013a). 여기에는 실재를 풀어헤친다는 것 외에 어떠한 집합적 의미도 없다. 바로 이것이 가장 새로운 현상으로 보인다. 구매나 여행, 특정 단어나 언어의 사용이 남긴 흔적을 보존하는 경우를 막론하고 각각의 요소는 그것이 발생한 맥락에서 벗겨지고 ‘데이터’로 환원되어 가장 기초적인[날것의]basic 상태가 된다. 데이터 한 조각은 이제 어떠한 내재적 의미도 제거된 신호에 불과하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흔적을 남기는 일을 쉽게 용인한다. 그러나 이는 데이터가 완전한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토록 이질적이고, 의도가 없으며, 물질적이고, 주체성[주관성]에서 벗어난 데이터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성[주관성]을 벗어나는 데이터의 이러한 객관성이 기술 역량의 발전으로 더욱 강화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오늘날 소프트웨어는 감정을 인식하여 데이터로 바꾸고, 얼굴의 움직임이나 피부색을 통계 데이터로 번역할 수 있다. 예컨대 상품의 매력, 매대에 놓인 상품 배치의 (비)최적성, 또는 승객 행동의 수상함을 측정할 수 있다. 이러한 데이터의 주된 특징은 완전히 무해해 보이고, 익명으로 남을 수 있으며,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데이터와] 상관되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고, 멤버십 카드보다 [사생활을] 훨씬 덜 침해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므로 우리는 데이터를 매우 쉽게 내어준다. 다시 말해 데이터는 완전히 객관적인 것처럼 간주되곤 한다! 이러한 무해함과 객관성은 모두 주체성을 회피하는 데서 비롯된다.

(2) 데이터 처리와 지식 생산

두 번째 단계는 데이터 마이닝 자체, 곧 빅데이터를 자동으로 처리하여 데이터 사이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단계다. 여기서 핵심은 선별되지 않아 완전히 이질적인 정보에 기초하여 지식―단순한 상관관계로 이루어진 통계적 지식―을 생산한다는 점이다. 이 지식 생산은 자동화되어 있어 인간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요구하며,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전통적 통계와 달리 미리 존재하는 어떠한 가설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모든 형태의 주체성[주관성]이 회피된다. 이른바 기계학습의 궁극적인 목적은 데이터 자체에 기초하여 가설을 직접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주체적[주관적] 개입―가설의 정식화, 무엇이 관련된 정보이고 무엇이 단순한 ‘잡음’인지에 대한 선별 등―에서 벗어남으로써 절대적 객관성을 지닐 수 있다는 지식의 관념[이데아]과 다시 마주한다. 규범은 실재 자체에서 직접 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 또는 ‘지식’은 ‘오직’ 상관관계로만 이루어져 있다.8 과학적 에토스와 정치적 에토스의 조건이 의심을 보존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 자체가 반드시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상관관계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않는다면,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구분을 유지한다면, 상관관계가 지닌 자기수행적 ‘효과’와 소급적 역량을 경계할 수 있다면, 개인에게 법적 효과를 발생시키거나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결정을 자동화된 데이터 처리만을 근거로 내리지 않게 한다면, 정치―특히 위험을 공동부담하려는 관심―는 상관관계만을 근거로 행동하는 일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9 세계 자체가 점점 상관관계로 이루어진 것처럼 작동하고, 상관관계만 확립하면 세계가 원활하게 돌아갈 것처럼 보이는 경향을 고려하면 이 점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10

(3) 행동에의 작용

여기서 논의하는 알고리즘적 프로파일링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가지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파악해야 한다. 한편에는 개인 수준의 정보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당사자는 이 정보를 관찰하거나 지각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는 프로파일링을 통해 생산된 지식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지식은 개인에게 제공되지 않으며 개인은 그것을 지각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개인에게 적용되어, 그렇지 않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개인의 선호·의도·성향에 관한 지식이나 확률적 예측을 추론하게 한다(Van Otterloo, 2013).

세 번째 단계는 이러한 확률적 통계 지식을 사용하여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고, 데이터마이닝을 통해 발견된 상관관계에 기초하여 정의된 프로필과 연결하는 것이다. 규범을 개인의 행동에 적용하는 이 단계의 명백한 사례는 신용 취득, 수술 결정, 보험료 산정, 온라인 상점에서의 표적 상품 추천 등 인간 삶의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사례들이 핵심적인 논점은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세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예측의 효과는 빅데이터의 집계에서 나올수록 더 커진다. 빅데이터는 실재 자체의 다양성을 ‘단순히’ 반영할 수 있는 데이터이기 때문이다.11 둘째, 개인의 행동을 예상하여 이루어지는 작용은 앞으로 점차 개인의 환경에 대한 개입으로 한정될 수 있다. 특히 환경 자체가 반응적이고 지능적인 경우, 가령 다수의 센서를 통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공유·처리하여 구체적인 필요와 위험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경우가 그렇다. 개인들이 온라인에서 보내는 상당한 시간에서 이미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다시 한번, 개인에게 직접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제약은 회피되며, 그 대신 개인이 불복종하거나 특정한 형태로 이탈할 가능성이 환경의 수준에서 점점 더 낮아진다. 셋째, 개인의 행동과 ‘연결된’ 프로필은 사용되는 상관관계를 늘려나감으로써 완벽히 효율적으로 맞춤화될 수 있다. 그 결과 모든 차별적 범주를 회피하고, 심지어 각각의 개인에게 가장 고유한 것, 큰 수나 평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까지 고려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일반적 계급이나 범주를 전혀 참조하지 않는, 겉보기에 완전히 ‘민주적인’ 규범성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경험되는 분류―사회적·정치적·종교적·민족적·젠더적 분류 등―에 알고리즘이 눈멀어 있다는 점은 인간의 평가를 알고리즘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특히 공항 보안과 관련하여 되풀이해서 내세우는 논거다(Zarsky, 2011). 데이터 마이닝과 알고리즘적 프로파일링은 세계와 비선택적으로 관계하는 것처럼 보이며, 각각의 실재 전체를 가장 사소하고 무의미한 측면에 이르기까지 고려한다. 사업가와 청소노동자, 시크교도와 아이슬란드인을 모두 같은 수준에 놓는다. 이제 목적은 평균에 맞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일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것을 회피하고, 모든 사람이 참으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보장하는 일이다.

2. 주체 없는 통치…… 그러나 표적target까지 없는가?

앞서 말했듯 이 세 단계는 뒤섞여 있으며,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에 그 규범적 작동은 특히 강력하고 과정적인 것이 된다. 최종 목적은 더욱 가려지고, 의도성이 개입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며, 시스템은 우리의 실재에 더욱 밀착해 적응한다. 따라서 우리는 알고리즘적 통치성이라는 용어를, 가능한 행동을 모델링하고 예측하며 선제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빅데이터를 자동으로 수집·집계·분석하는 데 기초한 특정한 유형의 (비)규범적 또는 (비)정치적 합리성을 폭넓게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통계적 사유의 일반적 원리들에 비추어 보면, 통계적 통치에서 알고리즘적 통치로 이행하며 나타나는 외견상의 변화―주체화 과정의 희소화라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해지는 변화―는 다음과 같다.12 첫째, 통계가 외견상 개인화된다(이는 명백한 이율배반을 표현한다). 통계는 더 이상 평균인을 참조함으로써 전달되지 않는다고, 또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된다. 그 대신 각자가 실시간으로, 자동으로 부여되고 변화하는 프로필이 된다는 관념이 등장한다. 둘째, 통계적 대상을 가축처럼 취급할 수 있는 통계의 폭정을 피하려는 우려가 커진다. [그 위험을 피하는 방식은] 통계적 실천이 마치 우리의 동의를 미리 얻어 이루어지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알고리즘적 통치는 우리 각자가 유일하므로 각자의 프로필을 통해 개개인에게 말을 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합의나 명시적인 동의가 아니라 생명 자체만큼이나 내재적인 규범성에 기본값으로[별도의 고려나 선택 없이] 동조adhesion하는 것이다. 동시대의 통계적 실천에는 개인의 암묵적 동조가 그 자체로 표현되어있다고 주장된다. 그 결과 주체화하는 반성성[성찰성]은 쇠퇴할 수 있고, 데이터 마이닝과 프로파일링에 기초한 ‘지식’ 생산에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줄어든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어떠한 주체화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성적인 인간 주체를 우회하고 회피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개인 이하적infra-individual 데이터를 먹이로 삼아, 개인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개인 초과적supra-individual 행동 모델이나 프로필을 만든다. 개인에게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설명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반성·비판·완강한 저항의 계기는 계속해서 복잡해지거나 뒤로 미뤄지는 것처럼 보인다(Rouvroy, 2011).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실시간’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바이럴성virality’을 지니며 가소적이다. 시스템을 많이 사용할수록 알고리즘은 더욱 정교하게 개선된다. 시스템과 세계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이 디지털 데이터로 기록되고, 그에 따라 ‘통계적 기반’이 풍부해지며 알고리즘의 성능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실패misfire’라는 관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실패는 시스템을 ‘위협할’ 수 없는데, 즉각 다시 섭취되어 행동 모델이나 프로필을 한층 더 정교하게 만드는 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알고리즘 시스템의 적용 목적이 사기·범죄·테러의 예방일 경우 ‘거짓 양성’은 결코 ‘실패’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때 시스템은 진단 방식이 아니라 탐지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거짓 양성의 비율과 상관없이 진짜 양성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물론 행동을 개인화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예측하려는 기획 자체가, 그 범위가 아무리 넓더라도 놀랍거나 우려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역설은 꼭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비의도적인 ‘장치’, 곧 비기표적a-signifying 기계에 의존함으로써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야심은 폐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은 더 이상 꼭 사건으로 취급될 필요가 없다. 사건이 인간에게 사건으로 일어나고 지각되는 방식과 무관하게, 각각의 사건은 데이터의 네트워크로 분해되어 다른 데이터와 다시 집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끊임없이 ‘패를 다시 섞으며’, ‘역사적’ 또는‘계보학적’ 관점에서 멀어진다(Rouvroy, 2013b).

갈수록 ‘권력’은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주체들을 육체나 도덕적 양심―법적·담론적 형태의 권력이 전통적으로 움켜쥐었던 지점13―을 통해 붙잡지 않는다. 그 대신 존재와 일상의 이동이 남긴 디지털 흔적에 기초하여 흔히 자동으로 부여된 다수의 ‘프로필’을 통해 붙잡는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푸코가 이미 안전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염두에 두었던 것과 매우 가깝다.

“환경milieu을 조절하는 것, 그것은 경계와 국경을 설정하거나 장소를 고정하는 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순환을 가능하게 하고 보증하며 확보하는 일이었다. 사람과 상품과 공기 등의 순환 말이다.”(Foucault, 2009: 51)

권력이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디지털적으로 개인을 ‘붙잡는다’고 해서, 개인이 존재론적으로나 실존적으로 장치에 의해 재조합될 수 있는 데이터 네트워크로 환원된다거나 장치에 완전히 사로잡힌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이해능력, 의지력, 표현능력과 무관하게 권력이 더 이상 그러한 능력에 기초하여 개인에게 접근하지 않고, 잠재적 사기범·소비자·잠재적 테러리스트·잠재력이 높은 학생 등의 ‘프로필’에 기초하여 접근한다는 뜻이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개인화의 문제를 둘러싼 시대의 양가성을 더욱 심화한다. 통계적 실천이 각 개인에게 고유한 필요와 위험을 정밀하게 겨냥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서비스가 개인화된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는 흔히 개인이 승리한 시대로 여겨진다. 동시에 바로 그 실천이 개인의 친밀성, 사생활, 자율성, 자기결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개인이 위험에 빠진 시대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순수한 탈주체화의 위험까지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것의 중심에 놓인 개인이라는 가설과 탈주체화라는 가설은 우리의 견해로는 똑같이 잘못되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1) 인격화personalization는 정말 개인화/개체화individuation의 한 형태인가?

IBM은 ‘개인화된’ 마케팅, 곧 ‘스마트 마케팅’을 마케팅과 광고를 ‘소비자 지향적 서비스’로 바꾸는 혁명으로 제시한다. 기업의 관심 한가운데 놓인 고객-왕이 위대한 귀환을 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곧 명령인 고객은 이제 욕망을 생각하거나 표현할 필요조차 없다고 한다. 구글의 최고경영자 에릭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친구들과 사귀는지 대략 알고 있다{다시 말해 당신이 속한 ‘물고기 떼’를 알고 있다}. 기술은 너무나 좋아져서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에게 맞춤화되지 않은 것을 보거나 소비하기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견상 개인화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개인화는 각자에게 고유한 필요와 욕망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라기보다 상품 제안을 극도로 세분화하고 유연하게 만드는 것에 가깝다. 목적은 개인에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욕망―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에 상품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제시 방식과 가격 책정 방식 같은 판매 전략을 각자의 프로필에 맞춤으로써 욕망을 상품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특정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을 잠재 고객 각자의 ‘지불 의사’에 맞추는 ‘동적 가격 책정’ 전략은 이미 일부 항공권 판매 사이트에서 시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지 개인화가 아니라 시장 세분화다. 사소한 사례를 들어보자. 당신은 우리가 실명을 밝힐 수 없는 어느 항공사(Y사라고 하자)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사흘 뒤 브뤼셀에서 피사로 떠나는 항공편의 가격을 알아본다. 표시된 가격이 180유로라고 하자. 조금 비싸다고 생각한 당신은 더 싼 표를 찾기 위해 다른 항공사 Z의 웹사이트나 다른 온라인 사이트를 찾아본다. 그러나 더 좋은 가격을 찾지 못한다.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Y사의 웹사이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표 가격이 50유로 올라 있다. 이는 당신에게 ‘붙잡힌 여행객’이라는 프로필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웹사이트는 당신의 온라인 검색 기록과 원하는 출발일을 바탕으로 당신이 이 항공권을 정말 필요로 하며, 따라서 50유로를 더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탐지한다. 지금 서둘러 사지 않으면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인상을 받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만약 ‘논리적으로’ 반응하여 최대한 빨리 표를 사는 대신 컴퓨터와 IP 주소를 바꾸어 항공사 웹사이트를 재방문한다면, 표 가격은 230유로가 아니라 180유로일 것이다. 어째서인가? 판매자는 가격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경보’가 울리면 당신이 최대한 빨리 구매하는 반사행동을 보이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사례의 결과는 비교적 사소하지만, 이런 접근이 개별 소비자의 고유한 욕망을 세심하게 존중하기보다 특정한 구매 성향과 가격 변동에 대한 개인 수요의 탄력성 또는 비탄력성을 자동으로 탐지하여 구매를 촉진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매는 경보 자극에 대한 반사적 반응으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개인의 반성성과 고유한 욕망의 형성이 단락된다.

그러므로 [알고리즘 통치의] 목적은 개인이 욕망을 형성하거나 표현하지 않은 채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적 통치는 주체화와 개인화의 공간적·시간적·언어적 조건이 분산되는 과정의 정점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 자리는 가능한 행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조작적인 조절이 대신한다. 이 조절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 ‘원자료’에 기초하며, 원자료의 통계적 처리는 무엇보다 흐름을 가속하도록 설계된다. ‘자극’과 그에 대한 ‘반사 반응’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우회’나 주체의 ‘반성적 중지’를 피하는 것이다. 이처럼 ‘흐르는’ 것이 비기표적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14 디지털 신호는 “가능한 의미와 무관하게 양적으로 계산될 수 있기”(Eco, 1976: 20; Genosko, 2008에서 재인용) 때문이다. 모든 것은 마치 의미가 더 이상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어난다. 우주가 모든 해석과 무관하게 이미 의미로 포화되어 있고, 따라서 사람들이 의미 있는 언어나 상징적·제도적·관습적 전사를 통해 서로 연결될 필요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장치들은 기표를 기의로부터 해방하는 것―수량화와 프로필의 알고리즘적 재조합―과 기표를 기의로 대체하는 것―세계 내부에서 실재를 생산하는 것, 알고리즘적 통치성에 ‘계산되는’ 유일한 실재는 디지털 실재라는 것―을 동시에 승인한다고 할 수 있다(Rouvroy, 2013b). 인간의 행동을 전의식적 단계에 배정하는 이러한 작용은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프롤레타리아화’라고 부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역사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는 기계가 노동자의 지식을 흡수함으로써 노동자가 그 지식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화는 마케팅과 서비스를 통한 행동의 표준화이며, 지식을 시스템 속에 외재화함으로써 정신을 기계화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정신들’은 자신들이 매개변수만 설정할 뿐인 정보처리장치에 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금융 의사결정의 전자적 수학화가 이것을 잘 보여주며, 이는 고용주·의사·설계자·지식인·지도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점점 더 많은 엔지니어가 자신도 작동 방식을 알지 못하지만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기술적 과정에 참여한다.”(Stiegler, 2011)

마우리치오 랏자라또는 디지털 행동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비기표적 기호계가 주체적 소외가 아니라 기계적 예속을 어떻게 생산하는지를 훌륭하게 요약한다.

“기표적 기호계가 주체적 소외, 곧 ‘사회적 종속’의 기능을 한다면, 비기표적 기호계는 ‘기계적 예속’의 기능을 한다. 비기표적 기호계는 정동·지각·감정 같은 주체성의 전개체적이고 전언어적인 요소들이 부품처럼, 기계의 요소처럼 기능하도록 만듦으로써 그것들을 동기화하고 변조한다(기계적 예속). 우리 모두는 기호 기계의 입력/출력 요소처럼, 정보·의사소통·정동의 전달을 촉진하거나 차단하는 단순한 텔레비전 또는 인터넷 중계기처럼 기능할 수 있다. 기표적 기호계와 달리 비기표적 기호계는 인격도 역할도 주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 전자의 경우 시스템은 말하고 말하게 한다. 시스템은 재현적 기능을 우선시하며 전기표적이고 상징적인 기호계의 복수성을 언어와 언어적 연쇄 위에 지표화하고 접어 넣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시스템은 담론을 생산하지 않는다. 말하는 대신 작동하며, 신경계, 뇌, 기억 등에 직접 연결되어 운동을 일으키고, 주체·개인·자아에 귀속하기 어려운 정동적·전이적·관개체적transindividual 관계를 활성화한다.”(Lazzarato, 2006)

(2) 인격화의 역설: 주체 없는 동시대의 과잉 주체화 현상과 양립하는 알고리즘적 통치성

탈주체화, ‘개인의 위기’, 네트워크 속에서 개인이 희석된다는 가설은 아무리 ‘인상적’이라 해도 결코 자명하지 않다. 오히려 소셜네트워크 등이 ‘과잉 주체’를 생산하는 면도 있다. 아마 사용자에게 소셜네트워크가 기표적[의미작용하는] 기호계로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주체성을 생산하는 일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이유가 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현재의 변화가 친밀성과 사생활의 보루를 약화하고 자율성과 자유로운 선택의 조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탈주체화만을 생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친밀성의 약화 자체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정보사회의 일부 장치는 오히려 개인의 고립을 강화하여 타인과 상호작용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자율성과 자유로운 선택이 정확히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도 검토해야 한다. 지능형 환경이 삶의 지극히 사소한 영역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할 부담을 덜어준다면, 우리의 정신을 해방하고 더 흥미로운 지적 과업에 몰두하게 하며 더 이타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생활과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법은 개인적인, 사적인, 민감한 정보의 노출, 부적절한 공개, ‘자신의’ 프로필에 대한 통제 상실, 개인의 자율성과 자기결정 원칙의 침해라는 위험에 대응해 개인 주위에 본질적으로 방어적이고 제한적인 일련의 ‘장벽’을 세우는 데 집중해 왔다.

이러한 법적 보호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강하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알고리즘적 통치가 개인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통계적 분신’, 곧 기본값에 따라 구성되거나 수집된 빅데이터를 사용하여 자동으로 생산한 상관관계의 조합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통제할 뿐이다. 에릭 슈미트의 표현을 빌리면, ‘대략적인’ 우리란 엄밀하게는 더 이상 우리 자신, 곧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문제는 탈주체화나 개인의 위기라기보다 주체화 과정과 기회의 희소화, 즉 주체가 되기 어려워지는 데서 비롯된다. 이제 위에서 기술한 세 단계의 규범적 과정에서 주체가 어떻게 ‘회피’되는지 다시 살펴보자.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알고리즘적 주체로 이해하거나 사유하는 주체를 생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보를 전달할 때 주체의 동의는 미약하다. 데이터는 익명인 채로 사용될 수 있지만 익명성의 의미 자체가 상대화되면 더 이상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보가 ‘도난당한’ 것은 아니다. 도난이라면 주체가 그것에 맞서고 도둑질에 저항하는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대부분 사소하고 무의미하며 분절되고 탈맥락화된 정보 공개가 점점 덜 ‘의도적’이 되는 현상이다. 이 ‘흔적’이 이후 어떤 경로를 거치고 어떻게 사용될지 주체는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컴퓨터 서비스 ‘사용자’가 ‘자신의’ 데이터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기술적 도구의 개발에 상당한 연구비가 투입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째로, 정보 처리의 측면에서 생산된 ‘지식’의 주된 특징은 지식으로 이끄는 가설이 미리 존재하지 않은 채 빅데이터에서 직접 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설 자체가 데이터로부터 ‘생성’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통계적 과정에서 도출되는 규범적 작용은 개인 자신에 대한 작용이라기보다 언제나 환경에 대한, 따라서 환경에 의한 작용에 더 가깝다. 개인의 행동은 더 이상 법, 평균, 정상성의 정의 같은 외부 규범과 직접 대면하는 가운데 생겨나지 않는다. 가능성의 영역이 환경 안에서 직접 조직된다.

이 세 가지 이유로, 오늘날 일반화되는 통계적 실천의 힘과 위험은 그것이 개인적이라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개인으로부터 자율적이거나 심지어 개인에게 무관심하다는 데 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최대한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는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무언가를 빼앗기거나 사생활과 자유를 침해하는 정보를 강제로 내놓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통계적 분신이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떨어져 있고 우리가 그것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동시대의 규범적 작용은 효과를 내기 위해 바로 그 통계적 분신을 향한다. 고해는 영혼과 덕, 욕망과 내밀한 의도를 탐색하는 성찰의 주체를 구성한다. 고해의 과정에서 “말하는 자는 자신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확언한 그대로의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Foucault, 2014: 16). 법은 평등과 절차의 공정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적 주체를 생산한다. 한때 ‘평균인’은 평균에 반박할 수 있는 고유한 주체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평균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알고리즘적 통치는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일관되며 반성적인 통계적 주체를 생산하지도, 그러한 주체가 출현할 여지를 제공하지도 않는다.15 우리가 이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특히 기술적 지식을 포함한 지식을 통해, 그리고 통계적 표상과 개체화 과정에서 개인을 구성하는 것 사이의 간극과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개체화 과정에서는 자발성의 순간, 사건, 그러니까 예상된 가능성에서 비껴가는 곁걸음[이탈]sidesteps이 중요하다.

그러나 극복하기 더 어려우며 진정한 단절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어떠한 가설의 표현도 더 이상 전제하지 않는 지식의 가능성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적어도 사회공간의 일부에서 기획이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있음을 나타낸다.16 여기서 문제는 적용하거나 검증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기획을 잃는데 있다기보다 이동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기획을 잃는 데 있다. 기획은 실패를 겪고, 그 실패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다시 다듬어지고 변형됨으로써역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유기체에도, 생명에도, 규범적 활동의 장소인 유기적인 것에도 실패와 갈등, 기형적인 것, 한계와 한계의 극복이 존재하며, 이는 생명 안에 일탈과 이동을 낳는다는 것을 캉길렘은 보여주었다. 그러나 알고리즘적 통치에서는 사회적 삶을 유기적 삶으로 간주하면서도, 유기적 삶의 적응이 더 이상 이동이나 실패의 결과가 아닌 것처럼, 그리하여 어떠한 위기나 중단도 생산하지 않고 주체나 규범 자체에 책임을 묻거나 시험하지도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권력’의 작용 영역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형사제재나 민사책임이 이미 저질렀거나 (현행범의 경우) 지금 저지르고 있는 범죄, 또는 이미 야기한 손해에만 관계하는 것과 달리, 이러한 통치 형태는 본질적으로 행위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과 성향을 대상으로 한다. 알고리즘적 통치는 한층 적극적으로 현재의 순간 속에서 가능성을 지각하여 ‘증강현실’, 곧 ‘미래의 기억’을 지닌 현실성을 생산할 뿐 아니라 체계화된 세렌디피티[우연한 발견]serendipity라는 꿈을 실체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실재는 가능성의 영역이 되었다. 우리의 규범은 가능성을 올바르고 내재적으로 예측하고자 하며,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우리에게 부합하는 가능성의 영역을 제시하여 주체가 그 안으로 쉬이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적·담론적 규범성과 어떻게 다른지에 주목해야 한다. 법적·담론적 규범성은 행동에 작용하기 전에 담론적이고 공개적으로 제시되었다. 행동은 이 규범성에 의해 제약되었지만, 제재의 위험을 감수하고 불복종할 가능성은 유지되었다. 반면 통계적 규범성은 결코 미리 정의되지 않으며 모든 담론화를 거부한다. 그것은 행동 자체에 의해 끊임없이 제약되면서 역설적으로 모든 형태의 불복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17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접근에 비춰 보면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나타난다. 우리가 ‘알고리즘적 통치’라고 부르는 행동에 대한 작용은 개인적이거나 집합적인 모든 주체적 이해와 욕망의 표현에 선행하는 실재에 기초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해하고 완전히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이 실재는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을 무시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뢰할 수 있고 객관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완전히 민주적인 통치라는 꿈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꿈’ 앞에서 다음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이 오늘날처럼 통계적 기반 위에서 인간의 이해에 완전히 불투명한 해석 코드와 기준에 따라 관찰되고 기록되고 분류되고 평가된 적은 없다. 알고리즘적 통치의 무해함과 ‘수동성’은 외견에 불과하다. 알고리즘적 통치는 실재를 기록하는 만큼이나 실재를 ‘창조’한다. 소비의 ‘필요’나 욕망을 촉발하고, 특정한 장소·재화·서비스에 접근하는 기준을 탈정치화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하고 판정할 필요가 더 이상 없으며 불확실성이 선제적으로 해소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치를 평가절하한다. 제도와 공적 토론을 불필요하게 만들며, 예방을 선제적 차단으로 대체한다.18

이 운동을 장기적인 관점 속에 다시 놓고, 법적·담론적 모델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는 순수한 새로움이라는 관점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알고리즘적 통치가 통치한다는 기획 자체가 외견상 사라지게 한다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실제로는 더 심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논했듯이(Berns, 200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재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기초하여 통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술한 기술적·정치적 진화는 이러한 경향을 실현한다.19 그 결과 이제 통치받지 않는 것, 또는 통치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과 같아질 수도 있다.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2) 알고리즘적 통치성에서 ‘권력’의 표적은 관계인가?

여전히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이 진단을 넘어, 또는 진단을 더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이제 우리는 주체의 회피가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개인 자신이 아니라면 앞서 기술한 세 단계와 알고리즘적 통치성 일반의 대상 또는 표적은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주체화 과정의 가능성 자체를 방지하거나 적어도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통치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설은 주체가 되는 데 실패하는 알고리즘적 통치의 대상이 바로 관계라는 것이다. 공유되는 데이터는 관계이며 오직 관계로서만 존속한다.20 생산되는 지식은 관계들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규범적 작용은 관계들의 관계를 준거로 삼아 관계 또는 환경에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성의 영역을 조직하는 실천의 바로 그 실재 속에서 알고리즘적 통치가 관계의 통치로서 지닐 수 있는 새로움을 규명하려 한다.

이제 알고리즘 통계의 눈부신 객관성생산성에 관한 이중의 성찰을 시몽동과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로 옮겨보자. 표면적으로 볼 때 데이터마이닝과 알고리즘적 프로파일링에서 작동하는 이 생산적 원격객관성은 주체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으로써 일견 시몽동이 관개체적 개체화transindividual individuation 과정이라고 부른 것을 가능하게 할 잠재력을 지니는 듯하다. 관개체적 개체화는 ‘나’도 ‘우리’도 아니며, 사회적 실재, 곧 의미가 형성되는 연합 환경을 생산하는 ‘나’와 ‘우리’의 공동 개체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리즘적 통치성이 오히려 개체화 과정을 주체적 모나드에 제한함으로써 이러한 관개체적 개체화의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더 나아가 모든 형태의 ‘척도’와 ‘표준’과 위계를 포기하고 그것을 내재적이며 극도로 가소적인 규범성으로 대체하는 일이 새로운 삶의 형식의 출현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이고자 한다(Deleuze and Guattari, 2004).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둔 해방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조직화의 평면을 넘어서는 내재성의 평면, 정상인과 평균인이 중대한 자리를 차지했던 옛 위계의 백지화로 설명하고 찬양했던 해방이다.21

3. 관개체적 관점과 리좀적 관점

알고리즘적 통치성을 시몽동의 관점에서 연구하게 만드는 것은 이 통치 양식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항들에 선행하는 관계를 토대이자 표적으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관계는 개인을 구성하는 사회적·상호주체적 관계, 곧 각 개인이 그러한 관계들의 합으로 간주하는 경우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순하고 선형적인 개체화와 무관하게 관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 관계는 자신이 연결하는 개인들에게 귀속될 수 없으며, 연결된 개인들을 넘어서도 ‘관계성’으로 존속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시몽동과 함께 개인과 상태를 중심으로 하여 관계를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고전적 실체 존재론 또는 실체 형이상학에서 관계 존재론으로 이동해야 하는가? 관계가 자신이 통과하는 개인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존재론으로 이동해야 하는가? 또는 생성과 개체화의 운동 자체를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 발생론으로 이동해야 하는가? 이 가설은 한편으로 오직 개인만이 실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개인들로부터 보편자를 추상할 수 있다고 보는 특정한 ‘명목론적’ 개인주의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한편으로 집합적 본질·종·계급이 개인에 선행하고 개인은 집합적 본질에 완전히 포섭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특정한 전체론적 ‘실재론’에서도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요컨대 관계를 일차적이고 그 자체로 구성적인 것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방향을 막론하고 특수에서 일반으로 이동하는 수직적 운동과 결별한다는 뜻이다.

더욱이 이질적인 데이터를 자동으로 교차 참조하는 데이터마이닝을 통해 순전히 귀납적으로, 실시간으로 자동생산 되고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프로필의 과정과 들뢰즈·가타리의 리좀에 고유한 대사 과정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리좀은 하나로도 다수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둘이 되는 하나가 아니며, 곧바로 셋·넷·다섯 등이 되는 하나도 아니다. […] 점과 위치의 집합, 점들 사이의 이상적 관계와 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관계로 정의되는 구조와 달리, 리좀은 오직 선들로만 이루어진다. 그 차원을 이루는 분절성과 층화의 선들, 그리고 그것을 따라 다수체가 변형되어 본성을 바꾸게 되는 최대 차원인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이다. 이러한 선 또는 선형 요소를 점과 위치 사이에서 국소화할 수 있는 연결에 불과한 수목형 계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무와 달리 리좀은 재생산의 대상이 아니다. 이미지-나무로서의 외적 재생산도, 나무-구조로서의 내적 재생산도 아니다. 리좀은 반계보(反系譜)다. 리좀은 단기기억 또는 반기억이다. 리좀은 변이·확장·정복·포획·분지를 통해 작동한다. […] 위계적인 소통 양식과 미리 정해진 경로를 지닌 중심화된 체계―다중심적 체계까지 포함하여―와 대조적으로, 리좀은 사령관도 조직화하는 기억도 중앙 자동 장치도 없는 탈중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비기표적인 체계다. 그것은 오직 상태의 순환만으로 정의된다.”(Deleuze and Guattari, 2004: 23)

시몽동의 관계 존재론과 들뢰즈·가타리의 리좀 은유가 맺는 관계는 후자의 기술에서 리좀이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된다.

“[리좀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언제나 중간에, 사물들 사이에 있으며,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이지만 리좀은 동맹, 오직 동맹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강요하지만, 리좀의 직물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다. 이 접속사는 ‘이다’라는 동사를 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을 지닌다. […] 사물들 사이라는 말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국소화가 능한 관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 다른 하나를 함께 휩쓸어가는 수직 방향이자 횡단 운동이며, 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높이는 시작도 끝도 없는 흐름이다.”(Deleuze and Guattari, 2004: 27–28)

따라서 우리는 외견상 조화로운 사회적 도구들의 출현, 실체 형이상학을 넘어 개체화 과정에서 진행 중인 생성을 파악하라는 시몽동의 요구,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해방의 원천으로 찬양했던, 조직화의 평면을 극복하는 내재성의 평면이 실제로 해방된 삶의 형식이 출현하는 데 어느 정도로, 어떠한 조건에서, 어떠한 유보와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2223

개체화를 둘러싼 시몽동의 사유는 관계와 개인이 환경에 결합하는 방식을 사유하려는 가장 완성된 시도로 보인다.24 그것은 언제나 실체를 전제하여 관계를 엄밀히 논리적인 내용으로 환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관계 개념을 폐기하기 때문이다. 시몽동은 실체의 우위를 거부하고 상태의 형이상학에서 상태의 변형 또는 생성의 형이상학으로 이동했다. 그럼으로써 개체화 과정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관계에 존재론적 내용을 부여했다. 이는 ‘존재의 지위’를 갖는 관계가 언제나 자신이 연결하는 것을 초과하거나 넘쳐흐른다는 뜻이다. 관계는 결코 개인들 사이의 사회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관계 자체의 존재론적 우위로부터 생각되어야 한다. “관계는 이미 개체인 두 항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는 “개체화 체계의 내적 공명”이다(Simondon, 2005: 29).25 또한 이는 개체화 과정을 과정으로 사유하기 위해 그 과정이 자리 잡아야 하는 전개체적 장이, 분화 운동에 선행하는 전개체적 차원을 계속 보존하면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전개체적 장은 잠재적으로 준안정성metastable을 지녀야 한다. 즉 그 평형은 체계 내부의 아주 미세한 변화에도 흔들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전개체적 장의 이러한 비안정성non-stability은 분화를 통해 형태를 취하는 것, 곧 정보가 가능해지는 조건이다. 이로써 우리는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의 원리 자체를 미리 전제하거나 심지어 개체화해 버리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생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크기의 등급orders of magnitude 사이의 양립불가능성과 비대칭적인 실재들이 존재하는 한에서다.

이러한 작용 또는 과정에서 개인과 환경, 환경에 결합한 개인이 출현한다. 개인은 ‘준안정적 관계의 실재’이며, 이들은 모두 실재하고 동등하게 실재한다. 환경과 맺는 관계로서의 개인, 환경에 상대적인 개인은 실재한다. 다시 말해 상대적인 것은 실재하며 실재 자체다. 주체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관계와 관계로서의 개인은 결코 자신이 상대하게 되는 측정의 표현이 아니며, 그 측정에 상대적으로 됨으로써 실재성을 잃는 것도 아니다. 관계는 생성의 실재다. 개인과 결합한 환경 역시 측정, 다시 말해 개인이 출현할 확률로 환원되지 않는다.26

우리가 기술한 것처럼 관계를 통해 통치하려는 알고리즘적 통치의 새로움을 시몽동적 사유의 요구에 따라 평가할 수 있는가? 이는 동시대의 통계적 실재가 다른 형태의 실재보다 시몽동적인지를 묻는 일이 아니다. 그런 물음은 부조리하다. 목적은 잠재적인 새로움을 드러내고 측정하는 것, 무엇보다 시몽동이 관계 존재론을 세우며 제시한 극도로 엄격한 요구에 따라 개인을 관계 속에서, 나아가 관계를 통하여 파악할 가능성을 알고리즘적 통치가 제공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알고리즘적 통치는 실재 전체를 확률화한다. 그럼으로써 실재 전체는 통계적 작용의 매체가 되는듯하다. 동시에 미리 존재하는 기초 가설을 더는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확률적 관점은 외견상 탈주체화[탈주관화]된다. 요컨대 개인을 직접 고려하지 않고 행동을 통치할 가능성, 실재 자체를 대신할 수 있는 실재의 통계적 표현에 기초해서만 통치할 가능성을 만들어낸다(디지털 행동주의의 관점). 그런데 알고리즘적 통치는 계속해서 개인을 절대화(설령 개인이 관계를 통해 회피될 수 있는 것, 즉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하는 동시에 개인을 탈실재화한다. 개인은 그 자체가 실재의 역할을 하는 일련의 측정값에 상대적인 것에 불과해지고, 그 측정의 주체적 성격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적 통치가 작용하는 관계는 측정이다. 이 측정은 실재의 매개되지 않고 비주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는 능력, 곧 외견상의 객관성 덕분에 그 측정과 관계하여, 또는 그 측정을 통해 출현하는 모든 것을 더욱 상대적이며 덜 실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출현하는 것은 실재의 역할을 하는 일련의 측정값에 단순히 상대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관계와 그 측정은 모든 주체성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능력으로 인해 실재와 개인 자신을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시몽동의 사유에 비추어 보면 이는 하나의 전도에서 나온 결과다. 과거의 실체와 개인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개인의 환경에 대한 모든 파악과 측정은 지나치게 주체적[주관적]이어서 언제나 불충분한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개인의 실재를 그 개체화 에서 포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개인과 환경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를 드러내던 이 불충분성은, 개인을 모든 주체성[주관성]에서 벗어났다고 간주되는 측정들―그것들이 고작 측정들일 뿐이라 해도―자체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해소된다. 통치의 실천과 시몽동적 사유의 비교를 더 밀고 나가면,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이 실천은 관계를 ‘모나드화’ 하여 관계가 그 자체로 개체인 양 관계를 상태states, 더 나아가 지위statuses으로 바꾼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관계는 시몽동의 사유에서 핵심적인 것, 곧 준안정성을 지닌 실재에서 작동하는 생성을 잃어버린다.

빅데이터를 실재를 분할하는 관계들의 연쇄로 고려하면서,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의 모나드화다. 이런 빅데이터를 토대로 생산되는 지식은 실재 자체에 관해 어떠한 가설도 전제하지 않은 채 관계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여기에서 도출되는 규범적 작용은 관계들을 ‘관계들의 관계’에 준거시킨 뒤 그 관계들에 작용함으로써, 개체로의 생성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준안정성을 지닌 실재의 가능성을 정확히 배제한다. 시몽동의 저작이 우리에게 제안한 것은 이미 구성되어 주어진 개체적 존재에서 출발해 생성을 사유하기를 중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유하는 것은 개체화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경험 자체를 도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를 그 생성에 앞서 전제하지 않기 위해 더는 도외시해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가능한 것은 현실적인 것을 미리 포함하고 있지 않다”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그로부터 출현하는 개체는 자신의 개체화를 촉발한 가능한 것과 다르다”는 사실이다(Debaise, 2004: 20). 앞서 우리는 가능한 것으로 증강되어 가능성을 이미 포함하는 듯한 실재에서 실패나 일탈이 추방될 것을 우려했다. 또한 그러한 실패와 일탈이 구성물과 기획, 가설을 표현하는데 내재한다고 보았다. 이제 실패와 일탈은 오직 그것에서 출발할 때만 관계가 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관계는 자신이 연결하는 것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귀속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부분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곧 서로 이질적인 실재들을 연결하며, 바로 그러한 실재들로부터 새로운 실재나 의미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시몽동을 해석한 들뢰즈(2002)는 다음과 같이 썼다. “준안정적 체계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일치’의 존재, 곧 아직 상호작용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어도 두 개의 크기의 등급, 서로 이질적인 두 개의 실재의 척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패나 일탈을 회피하는 것은 바로 이 ‘불일치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일종의 총체화, 즉 통계적 ‘실재’를 자기 안에 폐쇄하는 것, 역능을 개연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 내재성의 평면 또는 일관성의 평면과 조직화의 평면 또는 초월성의 평면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세계의 디지털 표상은 순수한 현실성으로 이루어진 면역적 구체가 된다(Lagrandé, 2011). 이 구체에서는 도래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모든 ‘다른’ 차원, 모든 잠재성이 선제적으로 제거된다(Rouvroy, 2011). 가능성에 대한 디지털 모델링이 수행하는 이러한 “실패의 실패”, 곧 실패 자체의 무력화는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거나, 모든 ‘불규칙성’을 ‘모델’·‘패턴’·프로필의 정교화 과정에 자동으로 기록하고 편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후자는 특히 학습형 알고리즘 시스템의 상황에 해당한다. 그 결과 실재―여기서는 통계적 집합체가 실재를 대신한다―와 비대칭을 이루는 세계로부터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돌연 분출하여 기존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위기를 촉발할 능력을 박탈당한다.27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열분석, 미시분석, 리좀학, 지도 제작법이라고 불렀던 접근의 위상은 기술적이라기보다 ‘전략적’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를 구축하기 위한 규칙이자 일종의 유목론이었던 리좀과 내재성 개념은 논쟁적인 것들이었다(Marchal, 2006). 그것들은 사회를 ‘다르게’ 구조화하고 위계적 모델에 저항하려는 전략적 사유를 담고 있었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리좀적 전략과 마찬가지로 깊이도 수직성도, 위계화된 구조도 기획도 투사도 없는 순수한 표면의 수평적 위상공간을 자신의 공간으로 삼으며, 주체에도 개인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데이터들 사이의 관계뿐이다. 이 데이터들은 개인 이하적 파편, 곧 일상적 삶이 남긴 부분적이고 비인격적인 반영에 불과하다. 데이터마이닝은 그러한 파편들을 개인 초과적 수준에서 상관시킬 수 있게 하지만, 그것들은 개인을 넘어서는 어떠한 것도, 따라서 어떠한 민중도 그려내지 않는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시대에 리좀이라는 은유는 순전히 기술적이거나 진단적인 위상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는 오늘날 리좀의 ‘물질적’ 현실화와 마주하고 있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이 관심을 두는 ‘통계적 신체’의 대사 작용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제시한 리좀의 특징이나 원리 들을 유난히 강하게 환기한다. 이 통계적 신체는 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경험되고 살아 있는 신체들과는 공약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신체는 단순한 요소들의 집합을 넘어 고유한 존립성을 지닌다. 이러한 존립성은 신체가 하나로 결속되어 있다는 것과 동시에 사건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Rouvroy and Berns, 2009, 2010). 그렇다면 리좀 개념의 이러한 ‘체현’은 해방된 개체화의 형식들을 촉진하는가?

첫째, 더 이상 어떠한 타자성도 ‘물리적으로 거주하지’ 않는 관계성은 어떻게 되는가? 알고리즘적 통치성에서 각각의 주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다수이지만 타자성 없는 다수다. 주체는 수많은 프로필로 파편화되지만, 그 프로필들은 모두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성향과 추정된 욕망, 기회와 위험에 관계한다. 관계란―설령 주체들이 사라진 빈 무대라 하더라도―언제나 누군가로 ‘채워져’ 있어야 하지 않는가? 비록 그것이 ‘결여된 민중’(Deleuze, 1987, 1990), 하나의 기획으로서 존재하는 민중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관계는 비대칭성의 조건인 한 최소한 둘 이상의 존재로 이루어진 집합체를 함축하지 않는가?

둘째, 우리의 욕망이 우리 자신보다 앞서 존재할 때, 관개체적이거나 리좀적인 관점의 해방적 성격에 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주체가 표현하지 않은 성향에 따라 개인화된 제안이 시간상으로 앞선다는 사실은 개체화 과정을 전개체적 단계에서부터 언제나 이미 결정하고 안정화하지 않는가? 데이터마이닝과 프로파일링이라는 이러한 새로운 통계 활용은 알고리즘적 통치성이 산출하는 내재적 규범들 앞에서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지 않는가?

셋째, 관계가 더는 어떠한 특정한 생성―주체-되기, 민중-되기 등―도 담지하지 않을 때, 초개체적 또는 리좀적 관점의 해방적 성격은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 관계가 더는 아무것도 관계짓지 않게 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알고리즘을 통한 이 새로운 통치 방식이 표적으로 삼아 배제하려는 것은 바로 불일치들의 산물이기에 예견되지 않았던, ‘도래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존재를, 자신을 스스로 기획하고 서로 관계 맺고, 주체가 되고, 상대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열린 궤적을 따라 개체화하는 자유로운 과정으로만 드는 불확실성과 잠재성, 근본적 가능성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은 과거의 모든 위계를 쓸어버린다는 점에서는 분명 ‘해방시키는’ 관점이다. 여기서 위계란 가장 넓은 의미의 위계이며, ‘정상인’이나 ‘평균인’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위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 관점은 어떠한 생성이나 기획의 틀 안에서도 해방을 실현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는 일종의 ‘해방’이 있지만 그것이 강한 의미의 자유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디지털 진리 체제 또는 디지털 행동주의는 비판과 기획이라는 관념, 나아가 공통적인 것이라는 관념까지 제거함으로써 해방의 토대 자체를 허물 위험이 있지 않은가?(Rouvroy, 2013)

이 질문들에 답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밝히고자 했다. 법적 데이터 보호 체계의 소유적 개인주의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개인 중심적 접근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효과도 없고 정당한 근거도 없다. 오히려 근본적인 쟁점, 곧 모든 ‘주체’와 모든 개체화에 선행하면서 개체화를 구성하는 자원으로서 보존해야 할 것은‘공통적인 것’이다. 여기서 공통적인 것이란 존재들이 온갖 비대칭성과 ‘불일치’를 지닌 채 서로에게 호명되고 자신을 서로에게 이야기하며 관계 맺는 ‘사이’, 곧 공동-출현(com-appearance)의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이 ‘공통적인 것’의 존재가 동질화나 실재의 자기 폐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크기의 등급의 이질성과 존재 양식들의 복수성, 요컨대 서로 이질적인 실재의 척도들에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달리 말하면 공통적인 것은 ‘비합치non-coincidence’를 필요로 하고 전제한다. 바로 이 비합치가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말을 걸도록 강제하며, 그로부터 개체화 과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관계의 통치는 모든 형태의 차이를 제거하는 데 기초하여 관계를 ‘모나드화’한다. 그 결과 관계는 더 이상 아무것도 관계 짓지 못하며, 어떠한 공통적인 것도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각주

  1. 케틀레가 전개한 평균인 이론은 ‘규범적’인 동시에 ‘기술적’인 ‘사회물리학’ 이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케틀레는 “주어진 시대에 평균인의 모든 특성을 자기 안에 집약한 개인은 위대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을 표상할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동일성은 거의 일어날 수 없으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 완전성의 유형을 그 차원들 가운데 더 많거나 더 적은 수에서 닮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Quételet, 1836: 289–290). 표준이자 이상인 평균인은 개인들과 다르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표상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철저히 반명목론적antinominalist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
  2. 이 점에 관해서는 IBM의 “Big Data in Action” 프레젠테이션을 참조하라: http://www-01.ibm.com/software/data/bigdata/industry.html. ↩︎
  3. 소비자의 알고리즘적 프로파일링에 기초한 개인화 마케팅인 ‘스마트 마케팅’은 마케팅과 광고를 ‘서비스’로 전환하는 혁명으로 제시된다. 그 부가가치는 판매실적을 향상하려는 기업과 개인 프로필에 기초해 상품을 제안받는 소비자에게 공정하게 분배된다고 주장된다. ↩︎
  4. 내재적 규범은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자격 부여·평가·숙고와도 무관하게 생명 자체에서, 세계 자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는 규범이다. ↩︎
  5. IBM이 특히 유비쿼터스 컴퓨팅, 자율컴퓨팅, 주변지능을 정보기술·통신·네트워크 발전의 다음 ‘자연적’ 단계이자 인류 자체의 진화에서 사실상 자연적인 요소로 선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기체적 은유가 암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는 이러한 ‘혁신’의 출현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밝힌 바 있다. 기계가 점점 더 ‘자율적’이고 ‘지능적’이 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최초의 설계와 의도, 스크립트와 시나리오에 의존한다. 기계는 설계 시점부터 이후에 취하는 형태와 무관하게 설계자의 세계관, 의식적·무의식적 기대와 투사를 전달한다(Rouvroy, 2011). ↩︎
  6. 상관관계 모델과 회귀 모델의 구분에 관해서는 Desrosières(1988)를 참조. ↩︎
  7. “질베르 시몽동은[…] 개체화가 먼저 준안정적 상태를 전제한다고, 다시 말해 잠재력들이 분포되어 있는 적어도 두 개의 크기의 등급orders of magnitude 또는 서로 이질적인 두 개의 실재 척도와 같은 ‘불일치’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개체적 상태에 특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드러진 점 또는 특이점은 잠재력의 존재와 분포에 의해 정의된다. 그리하여 서로 이질적인 두 질서 사이의 거리에 의해 규정되는 ‘객관적’ 문제의 장이 나타난다. 개체화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로, 다시 말해 잠재력의 현실화이자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소통을 수립하는 행위로 출현한다.”(Deleuze, 1968: 246) ↩︎
  8. 여기서 『와이어드』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 「이론의 종말」에서 한 말을 인용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막대한 데이터와 응용수학이 동원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도구를 대체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을 버려라. 분류학, 존재론, 심리학을 잊어라.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며, 우리가 전례 없는 충실도로 그것을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숫자는 스스로 말한다.”(Cardon, 2012에서 재인용) ↩︎
  9. 유럽연합의 개인정보 보호 지침은 자동화된 데이터 처리만을 근거로 개인에 관해 내려지는 결정으로부터 개인을 명시적으로 보호한다(지침 95/46/EC 제15조 참조). 그러나 이 지침이 제공하는 보장은 자동화된 데이터 처리가 개인정보, 곧 식별되었거나 식별 가능한 개인에 관한 데이터를 다루는 경우에만 적용된다. 그런데 알고리즘적 프로파일링은 익명 데이터만으로도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 ↩︎
  10. 가장 높은 객관성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달성하려는 경쟁은 정치적 선택을 망각한다. 보험이나 운송 산업에서 실제 발생한 위험에 끊임없이 적응하며 실시간으로 정확한 가격을 맞춤화한다는 이상은 이제 실현 가능한 것이 되었지만, 이는 위험의 순수한 탈상호화로 보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보험이라는 개념 자체나 또는 공공 서비스의 임무라는 관념 자체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
  11. 여기서 우리는 규범의 효력이 지닌 본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 효력은 오직 규범성 자체의 성공만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갈수록 유아론적인 것처럼 보인다(Berns, 2011).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로, 통계적 근거를 내세우는 ‘근거중심의학’이라는 고도로 이데올로기적이고 어쩌면 정치적이기까지 한 이상을 들 수 있다. 이 이상은 환자의 가장 고유한 특성까지 고려한다고 하면서도 환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과학적 발전의 여지[의학적 근거가 달라질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
  12. Berns(2009), Desrosières(2000, 2008, 2009), Ewald(1986), Hacking(2006) 등을 참조. ↩︎
  13. 푸코의 권력 모델에서 [법적·담론적 권력이라는 첫 번째 형태뿐 아니라, 두 번째 형태인] 규율적 권력 역시 [주체의 육체나 양심을 포획하는 전통적 형태에] 포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푸코가 분석한 세 번째 권력 모델, 곧 안전장치를 본질적으로 조절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모델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기서 기술한 변화는 이 세 번째 권력 모델 내부에 새로운 단절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안전장치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금지나 의무의 관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하는 일이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거리를 두는 일이다. […] 법은 금지하고 규율은 명령하지만, 안전의 본질적 기능은 금지하거나 명령하지 않으면서 […] 어떤 실재에 응답하되, 그 응답을 통해 자신이 응답하는 실재를 소거하는 것, 즉 그것을 무효화하거나 제한하고 억제하거나 조절하는 데 있다. […] 이처럼 실재라는 요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조절이 안전장치의 근본적 특징이다.” (Foucault, 2009: 69) ↩︎
  14. 오히려 ‘흐르는’ 것이 비기표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 ‘기계적 예속’을 가능하게 한다. “코드화 체계, 자동 체계, 주형 체계, 차용 체계 등으로 이루어진 분자적·기계적 무의식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기호적 연쇄도, 주체화 현상이나 주체/대상 관계도, 의식 현상도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기계적 예속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작동한다. 여기서는 기능과 기관이 기계 체계, 기호체계와 직접 상호작용한다. 내가 언제나 사용하는 사례는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경우다. 모든 것이 의식 밖에서 작동한다. 전부 반사작용으로 이루어지고 정신은 다른 곳에 있으며 거의 잠들어 있다. 그러다 갑자기 의식을 깨우는 기호적 신호가 나타나 우리를 의식 상태로 되돌리고 기표적 연쇄를 다시 주입한다. 그러므로 기계적 예속의 무의식이 존재한다.”(Guattari, 1980) ↩︎
  15. 우리의 분석은 규범적 실천의 장기적 역사에서 관찰되는 경향과 단절에 관해 좀 더 미묘한 입장을 취하고자 한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법적·담론적 규범이라는 관념이 일반화되기 전에 존재했던 특정한 메커니즘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긴 역사에서 법적·담론적 규범이 오히려 규칙이 아니라 예외로 나타날 것이다.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정당성을 보장하고 권력을 확립하는 규범적 작동을 문제 삼는다면, 고해하는 죄인 주체와 동시대 알고리즘적 주체의 가능성 사이에는 후자와 법이 구성한 ‘법적 주체’ 사이보다 훨씬 많은 유사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알고리즘적 주체와 기독교적 주체는 모두 정치적·영적·기술적 매개가 지원하는 자신과의 대화에서 나온 결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수량화된 자아’와 같은 아직 드문 실험에서 관찰할 수 있다(이 저널에 실린 A.-S. Pharabod, V. Nikolski, F. Granjon의 글 참조). 이런 실험의 실제 범위·가치·대표성과 무관하게, 기술적 또는 통계적 매개가 그려내는 ‘건강한’ 주체의 생산과 정교화는 분명 그 매개의 도움을 받지만, 주체가 자신을 생산한다기보다 이미 있는 자신을 정교화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는 기술적 매개의 일반적 사용을 거부하고 엄밀히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재전유를 선호하는 데 기초한다. 달리 말해 여기서 나타나는 반성성과 규범에 대한 주체의 의식은 개인이 그 단계에서 자신의 통계적 분신과 맺는 비관계와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
  16. 알고리즘적 통치성에는 기획이 전혀 없어서, 로랑테브노가 이해한 객관성에 의한 통치의 급진적 판본을 보여주는 듯하다. “객관성에 의한 통치에서 정당한 권위는 사물들 속으로 이동하고 분산된다. 그것은 실재론의 이름으로 자신을 관철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에 파악하고 문제 삼기 어려워진다”(Thévenot, 2012). ↩︎
  17. 이 점에 관해서는 Rouvroy(2011)를 참조. ↩︎
  18. 특히 Rouvroy(2012)에서 다른 방식으로 논증한 바 있다. ↩︎
  19. 보고나 평가와 같은 동시대의 다른 통치 실천도 마찬가지다. Berns(2011, 2012)를 참조. ↩︎
  20. 여기서 데이터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관계’라는 말은 가장 기초적이고 의미 부담이 가장적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연결된 항들 뒤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를 무시한 채 a와 b를 연결하는 작용이 있음을 확인하는 데 쓰일 뿐이다. 뒤에서 보이겠지만 알고리즘적 통치성의 모든 힘은 궁극적으로 이 관계를 ‘모나드화’하는 역량에 있다. 그 결과 관계는 이 관계성에 내재한 생성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
  21.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식을 리좀적으로 기술한 목적은 기술적이라기보다 ‘전략적’이었다. 즉 그것은 억압적 사회 구조의 인식론적 번역인 위계적 모델에 저항하는 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정당화되었다. ↩︎
  22. 우리가 비판하려는 것은 관개체적 개체화에 관한 시몽동의 이론도, 알고리즘적 통치성이 표면적으로 구현하는 들뢰즈·가타리의 리좀적 관점도 아니다. 우리의 비판이 정확히 겨냥하는 것은 알고리즘적 통치성과 이러한 해방적 이론·관점 사이에 있는 외견상의 양립가능성이다. [외견상의 유사함과 달리] 실제로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관개체적 개체화 과정뿐 아니라 ‘불일치하는’ 존재들의 관계가 전달하는 새로운 의미에 대한 개방성도 가로막는 경향이 있다. ↩︎
  23.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식을 리좀적으로 기술한 목적은 기술적이라기보다 ‘전략적’이었다. 즉 그것은 억압적 사회 구조의 인식론적 번역인 위계적 모델에 저항하는 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정당화되었다. ↩︎
  24. 물론 다른 시도들도 있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적 사유에서는 V. Morfino(2010)를, 마르크스적 사유에서는 E. Balibar(1993)를 찾아볼 수 있다. ↩︎
  25. M. Combes(1999)의 귀중한 분석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
  26. 시몽동은 동시대 물리학에 관한 주체주의적·확률론적 이해에 내재하는 실재 상실의 위험을 여러 차례 분석했다. M. Combes(1999: 39)를 참조. ↩︎
  27. 다시 한번 위기, 곧 불확실성 속에서 결정을 요구하는 순간이 바로 정치적인 것의 순간임을 지적해야 한다. “정당한 권위는 이동하여 사물들 속에 분산되었고, 실재론의 이름으로 자신을 강제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에 파악하고 문제 삼기 어려워졌다. 비판은 이미 추월당해 쓸모 없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비된다. 흔히 정보의 투명성이라는 주장과 결합하는 객관성에 대한 준거는 민주적 숙의의 핵심 요구와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Thévenot, 2012) ↩︎
  28. “네트워크의 위상은 순수한 표면이며, 라캉이 주체의 위상을 특징짓는 데 사용한 투사평면과 구분해야 한다. 그것 역시 분명 평면이자 표면이다(‘심층심리학’은 퇴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투사의 결과이며, 따라서 어떠한 투사도 함축하지 않는 네트워크의 ‘순수한’ 표면과는 구분된다.”(Marchal, 2006)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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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질투 혹은 글쓰기의 이유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1

뜬눈으로 뒤척이다가 사라는 인정했다. 질투가 났다. 밤이나 멜로디보다 훨씬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되고 싶었다. 곁에 누운 마크가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얇은 입술을 열어 그럴 필요 없어, 사라는 사라 자신인 걸로 충분해,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 말을 사라 자신이 믿지 않았으니까. 왜 내 환상인데 내게도 각박한 것일까. 내가 남에게 각박하기 때문인가.
―이희주, 「사과와 링고」2

1. 민주주의적인, 너무나 민주주의적인 감정

만약 내가 조선 시대의 노비라면 양반이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질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이 내 옆의 노비에게만 좋은 음식을 준다면 질투심에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열의가 있는 대학생은 교수의 해박함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수의 칭찬을 받는 동기의 똑똑함은 질투한다. 많은 직장인은 사장을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입사 동기가 먼저 승진한다면 고통스러운 질투를 느낄 것이다. 우리의 배를 아프게 하는 것은 땅을 산 사촌이다. 하지만 부동산 재벌에 대해서라면 차이가 너무 커서 질투조차 나지 않는다. 질투심을 부르는 것은 비교 가능한 차이다. 거꾸로 말해서 질투의 사정거리는 비교할 수 있는 범위를 나타낸다. 비교의 지평선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차이는 질투에서 면제된다. 재벌의 압도적인 재산, 아이돌의 압도적인 미모,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의 압도적인 폭력 같은 것들. 2300년쯤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실을 통찰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자신과 대등한 자들이 뭔가를 갖고 있거나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 시기한다. 여기에서 “대등하다”는 것은 출신이나 나이나 처지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비슷한 경우를 의미한다.3

질투에 대한 역사적·담론적·정치적 논점을 그러모은 유익한 책 『질투라는 감옥』에서 야마모토 케이도 이 문구에 주목했다. 야마모토는 상식적인 논변을 통해 “질투는 비교가 가능할 때 발생한다”고 강조한다.4 그는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통렬한 잠언도 인용했다. “대공은 대공에게, 요리사는 요리사에게 질투하고 가수는 가수를, 거지는 거지를 괴롭히는 법이다.”5

『질투라는 감옥』의 마지막 장은 질투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다룬다.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평등하다고 가정한다. 앞서 말한 비교의 지평선이 무한히 넓어질 수 있는 환경인 셈이다. 야마모토는 “질투는 민주주의의 조건이자 결과”6이며 심지어 질투가 민주주의의 “쌍둥이”7라고까지 말한다. 질투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극렬해진다는 것이다. 실로 제도화된 민주주의와 질투 사이에는 결정적인 관계가 있는 듯하다. 질투를 극대화하는 것은 ‘완전한 불평등’이 아니라 ‘불완전한 평등’이기 때문이다. 넘을 수 없는 ‘현격한 차이’가 아니라 어쩌면 넘어설 수도 있는 ‘애매한 차이’가 질투를 격발한다.

물론 민주주의가 전제하는 원칙적 평등은 질투가 양성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재산이 늘어난 어떤 사람은 이웃이나 친척의 질투를 사지 않으려고 부유함을 숨길 수 있다. 반대로 부를 과시하면 질투를 살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질투가 유발되려면 사람들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한편 항상 처지가 나쁜 사람이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을 질투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대학교수는 젊은 연구자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생활하며 많은 것을 누리는데도 연구자를 질투할 수 있다. 자신에게는 이제 없는 것 같은 열정이나 도전 정신 따위를 질투할 수 있는 것이다. 질투는 객관적으로 처지가 좋으냐 나쁘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자신을 어떻게, 얼마나 비교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질투가 극대화되는 세 가지 조건을 생각해보자. 질투는 (1) 원칙적으로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 (2) 눈에 띄는 차이가 있을 때, 그리고 (3) 사람들이 서로 비교할 때 극대화될 수 있다.

이 조건들을 고려하면, 어떤 사회에서 질투가 극대화되겠는가? 원칙적으로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한 사회. 권위·명망·평판·재산·취향 등에 있어 구별짓기가 첨예한 사회.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고 눈치를 주는 사회. 어쩌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국 사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보여주듯,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원칙적이고 제도적인 수준에서는 평등이 달성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불평등이 엄존하는 사회다.8 경쟁과 비교가 극심한 사회이고, 평등주의가 강렬한 지향으로 남아있는 동시에,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 학벌주의, 서열의식도 끊임없이 존재감을 발휘한다.9 덧붙여, 누구나 발언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듯 보이는 환경에서 질투는 관심을 향한 경쟁에 집중된다. 관심attention을 두고 경쟁하는 온라인 환경에서, 관심이 집중되는 대상은 종종 질투가 집중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질투는 지독하게 평판이 나쁘다.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 끝에서 화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마찬가지로 글 앞머리에 인용한 이희주 소설의 대목에서도 질투는 타인을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비참한 마음의 상태로 진술된다. 질투에 대한 나쁜 평가가 어제오늘 일은 아닌데,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질투심jealousy은 합당한 이유도 없이 생겨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조롱하는 흉측한 괴물에 빗대어졌다10. 질투는 감정계의 불가촉천민인 양 너무 평가절하된 감정이기 때문에 그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심을 주기도 한다.

질투가 이렇게 평판이 나쁜 탓에 화가 났음을 인정하는 것보다 질투를 느낌을 인정하기가 훨씬 어렵다. 분노는 때때로 정당성과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광장의 집회에 엄청난 인파가 모였을 때 어떤 기자가 ‘민중이 분노했다’라고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 말은 투쟁의 정당성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투쟁의 힘찬 열정을 부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민중이 질투했다’라고 말하면 투쟁의 정당성을 즉시 약화하고 모욕하는 듯 들릴 것이다. 하지만 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인 질투가 자동적으로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무엇으로 여겨지는 걸까? 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질투에 기반한다고 말하면 그 언행의 정당성을 약화하게 되는가? 그 감정에 대한 인식이 수동적이고, 음침하고, 찌질하다고 굳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예평론가 시엔 나이Sianne Ngai의 말처럼 “분노anger와 달리, 질투envy는 사회적 불평등을 공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응답하는 정당한 양식으로서의 문화적 승인을 결여한다.”11

조직화된 분노는 큰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고, 질투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과도한 반응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뿐더러, 페미니즘 비평이 가르쳐주었듯 ‘큰 불의’와 ‘사소한 차이’를 나누는 기준이야말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다. 분노의 어떤 표현이 정당하게 여겨지고 어떤 표현은 정당하지 않게 여겨지듯이, 질투의 표현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 질투를 도덕적으로 비하하거나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서, 그 감정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격화되거나 잘 전염되는지, 어떤 경로로 전이되거나 투사되는지,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되는지 사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질투를 비평적 개념으로 세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정신분석 이론들을 짧게 탐색한다. 그러고 나서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인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를 읽어볼 것이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의 질투는 특히 글쓰기의 (불)가능성을 둘러싸고 격해진다.

2. 질투의 새로운 조건: 끝없는 또래들

지난 몇 년간 평론가로서 나의 관심사는 어른이 없는, 누구도 어른이 되기 힘든, 어떤 공통감각이나 ‘보편교양’도 전제할 수 없는 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배움과 교양이 가능한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배움의 환경에서는 지식이나 도덕을 가르치는 어른보다 매혹과 폭력을 통해 서로 배우는 또래들의 역할이 압도적으로 커지고 있다고 보았다. 몇 글에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비제도적 배움을 견인하는 매력적인 또래의 역할에 주목했다.12 이제 추가할 것이 있다면, 그 또래는 애정과 욕망, 동경만큼이나 참을 수 없는 질투를 야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의 징후를 이야기해보자. 최근 몇 년간 한국 소설에서 아버지는 정말이지 비중이 없었다. 아버지가 중요하더라도,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에서처럼 애도 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 중요성을 지닐 뿐이다.13 지난겨울 안세진은 최근 한국 소설에 자주 나타나는 이모와 고모, 삼촌 등 방계의 형상에 주목했다.14 그에 따르면 방계의 증식은 오래 진행되어온 “가부장적 마스터 플롯의 해체”와 관련이 있다.15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언급한 몇 소설에서 동기/또래의 존재감도 엄청나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16에서 무경에게 고모의 애정과 선택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언니인 목경과 그것을 두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피다」17에서 화수가 선산에서 삼촌을 마주치게 된 것은 할아버지 묘소에 같이 가자는 사촌 형제 수동의 제안 때문이었다. 화수는 할머니가 장손인 수동만을 예뻐할 때 할아버지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아껴주었다고 기억한다.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18에서 엄마와 ‘나’의 중간 나이쯤인 이모는 종종 ‘나’와 자매로 혼동된다. ‘나’는 죽은 이모의 옷을 남동생을 비롯한 남자 조카들에게 물려주겠다는 큰이모의 결정에 격분해 이모의 집에 찾아가는데, 거기서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는 낯선 여자와 대면한다. 덧붙여 안세진은 언급하지 않지만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19에서도 ‘나’와 같은 방을 썼던 고모는 종종 애증으로 얽힌 ‘나’의 자매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가 동갑내기 여자아이들과 성적이면서 피/가학적인 놀이를 할 때, 이 아슬아슬한 놀이에 고모가 폭력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놀이를 중단시킬 때, 그 순간 고모는 완연히 어른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방계 친척과 동기·또래의 동시적 출현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이지만, 잠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소설의 ‘가족 로망스’에서 재생산을 축으로 하는 수직적 관계(부모-자식 관계)는 존재감을 많이 잃었으며, 그 축을 벗어나는 비스듬한 관계(방계)나 수평적 관계(동기·또래)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스듬한 관계’와 ‘수평적 관계’는 종종 겹쳐지기도 하고 미세하게 구분되면서 서로를 부각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의 렌즈를 빌려 보면 가부장제의 약화, 혹은 상징적 아버지의 약화는 방계뿐 아니라 ‘또래 문제’가 배양되고 증식되는 토양이다. 자주 인용되는 이탈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마시모 레칼카티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오늘날 청년들의 주체성을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20 오늘날 ‘선진국’의 청년들은 아버지의 금지를 경험하면서 자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준과 모델을 제시하는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들들은 권위적인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오늘날의 청년들은 오히려 아버지의 무책임 때문에 방황한다. 도덕과 삶의 지향을 가르치는 내면화된 아버지(초자아)가 약화되는 만큼 청년들의 정신에 너무 많은 지방 호족, 건달, 무법자가 범람한다. 레칼카티는 새로운 세대의 주체적 문제를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로 명명한다. 그들은 오디세이아 이야기 속 텔레마코스처럼 ‘지평선 너머에서 돌아와 질서를 바로잡아줄 아버지’를 기다린다. 아버지의 부재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또래 문화를 낳고, 다시 이 문화가 은밀하게 아버지의 귀환을 욕망하게 하는 셈이다.

나는 상징적 아버지의 부재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주체성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는 레칼카티의 선견지명에 동의한다.21 그러나 ‘좋은 아버지’를 귀환시켜야 한다는 그의 해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새로운 문제에 오래된 해법으로 대응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새로운 또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상징적 아버지의 약화를 부정적 결여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실험과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조건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 문제에서 줄리엣 미첼은 참고해야 할 중요한 정신분석 이론가다22. 미첼의 이론은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관계에 배타적으로 집중해온 정신분석학이 간과한 동기간의 수평적·측면적 관계를 조명했다고 평가받는다.23 미첼이 부모 자식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정신분석이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만 집중하면서 인간의 주체성과 사회성을 형성하는 데 못지않게 중요한 동기/또래 관계는 간과해왔다고 본다.

정신분석 전통에서 아버지가 그토록 중요했던 것은 분석가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가령 프로이트의 경우)이다. 혹은 어떤 정신분석 이론에서 어머니가 그토록 중요했던 것은 분석가가 어머니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가령 멜라니 클라인의 경우)이다. “아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물론 어른이며, 그 결과 부모-아이의 수직적 관계가 탐구 방식 안에 복제된다.”24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결정적이다. 반면 클라인은 질투에 대한 정초적 텍스트25에서 이차적 질투심jealousy과 원초적 질투envy를 구분하면서, 원초적 질투를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 국한했다. 미첼은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원초적 장면에 이미 제3의 인물, 즉 동기/또래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러한 관찰을 어머니에 대한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의 분열/투사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그렇지만 동기/또래(가령 어머니 가슴에 있는 다른 아기)가 이 과정에 기여하는 바는 결정적으로 보인다.26

질투에 대한 클라인의 분석과 달리, 유아는 어머니의 가슴에 질투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질투를 격발하는 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붙어 있는 동기(형제자매)다. 아이에게 보호자의 애정과 관심이 그토록 필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놓고 경쟁하는 동기/또래가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에 가장 고통스러운 비교 대상으로 말해지던 것이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는 동기/또래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27 동기/또래는 관심이나 사랑을 내가 독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결국 평범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존재다. 동기는 아이의 나르시시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상처 입힌다. 따라서 아이는 동기/또래를 사랑하는 동시에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 미첼에 따르면, 바로 이 사랑/증오 양가성이 아이에게 히스테리를 격발한다.28 달리 말해 인간은 사회에 노출되고 사회적 존재가 되는 만큼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신경증자가 된다. 비교적 동등한 처지인 자매와 형제, 또래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증오 양가성을 어떻게 소화하는가가 아이들의 사회화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아이들이 갖게 될 가치관과도 연결된다. “동기들(그리고 나중에는, 학교아이들) 간의 강렬한 질투, 경쟁, 선망은 [나중에] 평등과 공정에 대한 요구로 역전된다.”29

또한 “젠더는 동기(또는 동기 등가물)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30 전통적인 정신분석의 틀에서 주체는 오이디푸스 의례를 통과하여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로 고착된다. 반면 동기들의 세계는 재생산에 국한되지 않는 성적 유희와 실험으로 가득한 세계이며, 따라서 섹스가 아닌 다양한 젠더가 생성될 수 있다.

사회 분석이나 문학비평에 응용할 수 있는 틀로서 미첼의 정신분석 이론이 갖는 큰 강점은, 오이디푸스적 수직관계(부모 자식 관계, 혹은 그것이 전이된 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사회화와 신경증, 정신증, 경계선 인격의 경과를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데 사실 인구구성의 통계적 변화만 고려하면 미첼 이론의 사회정치적, 문화적 중요성은 감소해야 한다. 이른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인구는 줄어들고 많은 아이가 외동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의 이론은 통렬한 시의성을 갖는 듯하다. 어째서인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우리는 압도적으로 많은 또래를 만난다. 그곳은 셀 수 없는 또래들이 있는 세상, 영원히 또래들만 있는 세상, 만인이 동지이자 친구이며 경쟁자이자 적이 되는 세상이다. 커뮤니티와 SNS는 근본적으로 어른이 없는 동기들의 세계다. 나이가 적든 많든 또래가 됨으로써만 그 과시와 비교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31 이 세계는 질투심, 호승심, 경쟁심, ‘비교질’과 모방 심리 그리고 연극성을 격화한다.

그곳엔 종종 끔찍한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에 개입해 “그만해!”라고 명령하거나 도덕을 훈계할 어른이 없다. 이것은 아이들의 놀이가 어떤 도덕적 금지를 거쳐 사회적 형식으로 승화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사회에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금 커뮤니티, 인스타그램, 틱톡 등을 통해 혐오가 청소년에게 놀이의 형식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32

아마도 동시대 문화의 심리적 현실은 너무 약한 초자아와 너무 강한 자아 이상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초자아는 상징적 아버지의 내면화다. 반대로 자아이상은 내가 되고 싶은 언니나 형의 형상 혹은 내가 눈치를 보는 또래의 형상이다.33 주인 혹은 아버지의 귀환이라는 망상에 빠지는 대신 이 상황을 탐색과 실험의 불가역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미첼의 말처럼, 새로운 형태의 자매애와 형제애는 파시즘의 반복을 저지하기 위해 발명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남아있다.34

3. 글쓰기의 ()가능성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제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를 읽어보자. 이 소설은 불평등과 질투, 고된 생활, 비교가 야기하는 신경증이 어떻게 증오 폭력으로 치닫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희주의 여느 작품처럼 도발적이고 폭력적이지만, 이 소설에는 특히 섬뜩한 구석이 있다.

주인공 사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여동생 사야는 (사라의 생각에 따르면) 예쁜 외모를 가졌지만 생활력이 없고 사라에게 경제적으로 무책임하게 의존한다. 지금까지 사라에게 1500만 원을 빌려 가 놓고 거의 갚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라가 이십 대 초반일 때 죽었다. 사야에게 휘둘리는 어머니는 자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한다.

한편 사회학과를 졸업한 사라에게는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한때는 “미술…… 같은 걸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p. 313). 이 문장이 과거형으로 쓰였음을 주의하자. 미술은 이제 사라에게 너무 멀리 있는 “옛얘기”(같은 곳)다. 우리가 흔히 보는, 커다란 전시 공간에서 조명받는 미술을 하려면 상당한 자원과 자본이 필요하고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교육 없이 ‘고급미술’을 하는 것은 대체로 수천만 원짜리 카메라로 근사한 사진을 찍어 사진작가로 데뷔하는 의사나 갑자기 화가로 데뷔하는 아이돌 가수와 같은 특수한 경우다.

그럼에도 사라에게 예술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라가 유일하게 향유하는 사치라 할 만한 것은 〈더 라스트〉라는 뮤지컬이다. 〈더 라스트〉는 소행성 충돌로 예정된 “종말 당일”(p. 293)을 배경으로 하는데, 사라는 뮤지컬이 자신의 죽고 싶은 마음과 외로움을 오롯이 이해해준다고 느낀다. 사라는 경제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 뮤지컬을 반복해서 본다.

그런데 어느 날 고대하던 뮤지컬을 보러 갔음에도 공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연찮게도 사라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p. 313)에게 신경을 빼앗긴 탓이다. 공연이 끝난 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면서 사라는 그 여자와 자신의 동생을 비교한다.

사라는 그 여자의 쫑쫑 땋은 긴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예쁜 걸로 치면 20대의 사야가 훨씬 예뻤다. 그렇지만 옆자리 여자는 사야가 가지지 못한 것, 단어를 붙이자면 개성을 갖고 있었다. 그 여자 또한 예술을 애호하고 풍부한 취향을 가진 젊은 여자들 사이에 두면 그저 그런 클론처럼 보일지라도 어쨌든 반짝반짝했다. 그가 의복으로 드러낸 삶이, 예술에 대한 애정이 사라의 신경에 거슬렸다. (p. 313)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사라가 옆자리 여자와 자신을 직접 비교하지 않고 동생을 매개로 비교한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랬을까?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라는 ‘그 여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일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대신 기억 속 “20대의 사야”라면 비교해볼 만하다. 외모는 사야가 더 예쁘지만, ‘그 여자’는 훨씬 개성 있다. 그리고 외모와 개성 중에 사라가 더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것은 후자다. 달리 말해 사라에게 자괴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예쁜 외모보다 두드러진 개성이다. 개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이나 학력처럼 분명한 특권의 지표가 아니다. 예쁜 얼굴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 미감, 취향처럼 모호한 것이다. 그 모호함이 사라를 미치게 한다. 자산의 큰 격차나 한눈에 보이는 외모처럼 분명한 차이는 차라리 체념하기 쉽다. 반면 개성은 모호하기 때문에 단념하기 어렵다.

그런데 사라에게 취향이나 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무엇이 개성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을 테고, 그것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라는 결여해서가 아니라 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나도 안다고. 나도 너희가 아는 것을 알고, 너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아름답게 느낀다고. 감각적으로 구분 가능하다고”(p. 314). 정확히 말해, 사라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다. 그는 여느 직장인과 구분되지 않는 무난한 옷을 입고 다니는 자신의 상황을 비관한다.

이렇게 ‘개성 있는’ 여자와 비교하며 자괴감을 느낀 직후 사라는 인터넷에 〈더 라스트〉를 검색한다. 그런데 몇 편의 글이 사라의 마음을 더욱 헤집어 놓는다. 이때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도, 연출가도 아니다. 한때 되고 싶었던 미술가도 아니다. 블로그나 SNS에 리뷰를 쓰는 논평가일 뿐이다.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자괴감과 더불어, 사라의 질투는 ‘고작’ 그 논평가들에게 집중된다. 앞서 ‘그 여자’의 경우와 달리, 이제 사라는 논평가들과 자신을 직접 비교한다.

뭐가 되었든 사라의 인생에서는 〈더 라스트〉가 중요했다.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 보일 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게 된다면, 그래도 조금은 자신에게 너그러워질지 몰랐다. 자부심을 갖게 될 수도. 그런데 할말이 없고, 레퍼런스로 댈 만한 책도 모르고, 서양 예술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쏘핫처럼 영어를 잘해서 퍼온 글을 번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게, 이게 인생인가. 배우거나, 가꾸거나, 무언가를 남기려고 하거나 탐구할 마음도 없이 이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것이 삶인가. (p. 317)

사랑하는 작품에 대해 괜찮은 글을 쓸 수 있었다면, 그래도 자신을 좀더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논평가들의 글에 기가 죽어 자신은 “사람들이 관심 보일 만한”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논평가들이 자랑하는 유창함, 해박함, 영어 실력 역시 학력이나 재산처럼 명백한 차이의 표지가 아니다. 훨씬 애매한 차이들이다. 사라는 그렇게 ‘애매하게’ 잘난 논평가들에게 고통스러운 부러움을 느낀다. “밤이나 멜로디보다 훨씬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되고 싶었다”(같은 곳).

사라의 질투는 왜 이들에게 집중되는가? 그것은 사라에게 글쓰기가 ‘어쩌면 나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 여자’와 자신을 직접 비교하지 않았던 사라는 글쓴이들과는 자신을 직접 비교한다. 부자가 될 수는 없더라도, 예쁜 외모를 가질 수는 없더라도 글쓰기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개성 있게 꾸미고 다니지 못하더라도 글쓰기를 통해 개성을 표현하고 이목을 끌 수는 있지 않은가?

글쓰기는 다른 학문이나 예술보다 접근성에 있어 훨씬 평등하다. 고급미술과 달리 글쓰기에는 대단한 자원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이것이 다른 학문이나 예술보다 문학에 여성이 일찍 진출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에 관심을 받을 만한 글과 아닌 글을 나누는 차이는 미세하고도 첨예한 것이 된다.

한편 사라가 온라인에 게재된 글을 보고 질투를 느끼듯이, 글쓰기의 (불)평등이라는 모순된 조건은 동시대 문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누구나 블로그, 페이스북, 엑스 혹은 브런치에 논평을 쓸 수 있다. 질투는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더 격렬해진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모든 글이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35 이 때문에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는 질투와 불가분 연관되는 것 같다. “누구나 각자의 방법으로 〈더 라스트〉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p. 316). 내가 직접 아름다워지거나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없다면, 그 아름다움의 파편이나마 갖고 싶다. 어떤 관객은 글을 씀으로써 작품의 일부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 자신의 것과 비슷한 감상을 먼저 써버렸다면 기회를 빼앗겼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라에게 뮤지컬을 반복적으로 볼 만큼의 열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논평을 찾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정황은 그에게 글을 쓸 가능성과 역량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미약한 가능성이 사라를 괴롭힌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사라를 괴롭히는 것은 단순히 글을 쓸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아니다. 반대로 ‘어쩌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를 괴롭힌다. 즉 글쓰기는 사라에게 여전히 어떤 희망을, “잔인한 낙관”36을 갖게 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원칙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처럼 글을 쓸 수 없다. 이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교차 속에서 질투가 극대화된다.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이 (불)가능성은 배우고, 가꾸고, 탐구하는 일 전반의 불가능성으로 확대된다. 나는 그들처럼 글을 쓸 수 없다―따라서 나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가꿀 수도 탐구할 수도 없다. 물론 이 두 문장 사이에는 비약이 있다. 관심받는 글을 쓸 수 없는 것과 무언가를 탐구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하지만 사라는 논평가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여하한 탐구의 가능성까지 체념한다.

소설의 끝에 가서 사라는 어떤 끔찍한 폭력을 저지른다. 소설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인물이 그러한 상황으로 치닫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의 사실 또한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사라는 적어도 잠재적으로 파시스트다. 자신의 불행과 신경증, 열등감, 동생에 대한 원한을 항거할 수 없는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해소하려 하기 때문이다.

5. 악랄한 열정

이 글은 질투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로 시작해 일련의 정신분석 담론을 거쳐 질투와 (불)가능한 글쓰기의 관계라는 문제로 넘어왔다. 솔직히 말해 여기에는 몇 겹의 기만이 있다. 먼저 우리가 글쓰기의 (불)가능성 때문에 고통받는 인물에 대해 읽을 수 있는 것은 소설의 글쓰기 덕분이다. 게다가 인물을 파국적인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는 소설의 글쓰기에는 어떤 가학적 악취미가 있다. 동물의 숨통을 막는 주인공의 손이 갖는 폭력성은, 인물을 그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는 소설의 글쓰기가 갖는 가학성과 깨끗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온갖 ‘레퍼런스’와 ‘서양 예술사에 대한 지식’으로 훈련받은 비평가인 내가 바로 그것들에 억눌려 글을 쓰지 못하는 인물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역시 기만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소설의 인물을 이중 삼중으로 소외시키는 데 일조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기만은 회피하고 싶다고 회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기만은 문학을 둘러싼 어떤 동시대적 쟁투의 핵심을 가리킨다. 누가 쓸 수 있는가, 누가 자신의 글로 관심을 받는가? 누가 누구에 관해 쓰는가? 누가 경험과 감상을 ‘소유’하는가? 말하자면 누가 경험이라는 공동의 자원을 ‘현금화’하는가? 이 문제를 둘러싼 경쟁과 분쟁이 격렬해지고 있다. 읽는 사람은 줄어들지만 쓰는 사람은 늘어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문학이 정치적이라면, 문학이 이 마찰의 한가운데서 고열을 앓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이 마찰에 사로잡히고, 계속해서 기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파스칼적 명상』의 서문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작업이 자기를 공격하는 도구를 생산하고 동료들을 욕보이게 할 것이라고 썼다.37 『파스칼적 명상』은 지성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논파하는 책이다. 예술·문학·철학적 탐구는 여가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위에서야 가능하다. 즉 고된 노동에서 면제되는 시간이 있어야 그런 탐구를 할 수 있다. 순수한 지성은 그 조건에 대해 침묵하고 그것을 은폐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지성을 비판하는 지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성을 비판하는 지성 또한 자신이 고발하는 그 조건 위에서 가능하다. 철저하고 엄밀해질수록 자신의 정당성을 취소하게 되는 비판적 사유의 이상한 운명.

자기 작업의 기만을 정직하게 꿰뚫어 봤다는 점에서 부르디외는 여전히 옳다. 하지만 상류층과 대중의 문화를 분리하는 방식에서라면 그는 틀렸다. 대중은 문화를 ‘결여’하고 있지 않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대중의 미학을 부정으로써, 즉 칸트적 미학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38 칸트가 말한 ‘아름다움에 대한 무사심한 관조’는 부르주아적 습성으로, 노동자 계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형식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기보다는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런저런 자극들에 휩쓸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라의 독백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나도 안다고. 나도 너희가 아는 것을 알고, 너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아름답게 느낀다고. 감각적으로 구분 가능하다고.” 사라는 ‘미학’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여기서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신이 향유하지 못하는 것을 향유하는 ‘상류층’이 아니라 함께 뮤지컬을 본 ‘개성 있는’ 또래 여성이다.

대중은 자신이 갖지 못한 좋은 문화를 선망하지 않는다. 대중은 문화로 충만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만이 문화로 충만하다. 대중은 계급이나 정체성이 아니며, 당대의 충만한 문화를 향유하고, 그 문화를 구성하며, 그 문화에 의해 구성되는 다중이다. 문화를 구성하고 문화에 의해 구성될 때 누구나 대중인 것이다. 범용함에 대한 혐오는 대중의 내부에서 싹튼다. 상류층이 대중과 구별되기 위해 고급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대중이 대중 자신과 구별되기 위해 개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고급문화를 견인하는 것은 범용함에서 벗어나 상승하려는 그 개성에의 압력이다. 한마디로, 고급문화는 대중문화의 히스테리다. 사라는 똑같은 일상에서 일탈하기 위해 뮤지컬을 보고 또 본다. 마찬가지로 신경숙의 『외딴 방』에서 산업체특별학급의 급장 미서는 헤겔이 좋아서 헤겔을 읽은 것이 아니다. 또래들과 달라지고 싶어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일을 하는 무리의 일원이기 싫어서 헤겔의 책을 애지중지 들고 다녔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만 내가 너희들과 다른 거 같아. 나는 너희들이 싫어.”39 현대의 성장소설에서 소녀들이 어려운 단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구분되고 싶은 또래들이 없었다면, 또래들이 치명적으로 제기하는 평범함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누가 무엇하러 어려운 책을 읽겠는가?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2025) 2화에서 중학생 은중은 또래 여자아이들 앞에서 며칠 전 배운 어려운 단어(‘염세적’)를 과시적으로 사용한다. “난 너무 염세적인 것 같아.”

언어의 제련에 경쟁심, 호승심, 우월감과 열등감, 질투는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 왜 누군가 어려운 단어를 배우는가, 왜 게걸스럽게 지식을 먹어치우는가? 왜 어느 독학자는 밤새 미친 공부를 하는가, 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가? 기형도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왜 마음속에 그토록 많은 공장을 세우는가? 만약 또래들이 내가 평범하다는 것을 알게 하면서 그 평범함을 혐오하도록 밀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범용함을 내가 사랑하면서 증오하고, 갈망하면서 경멸하지 않는다면, 평범함을 정수리를 내리치는 도끼로 느끼지 않는다면, 그렇게 내가 둘로 쪼개지지 않았다면, 이 시대에 무엇하러 여전히 글을 쓰겠는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이 전제는 ‘이성의 공적 사용’(칸트)을, 비판의 자유를, 표현의 자유를, 한마디로 민주주의를 떠받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구절을 환기해보자. 공산주의 사회가 오면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목축을, 오후에는 사냥을, 밤에는 비평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40 이때 ‘비평’은 제도 내의 문학비평이나 미술비평처럼 전문화된 영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 낮에 보고 느낀 것에 대한 성찰적 글쓰기 일반을 뜻한다. 사람들은 낮의 생활과 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 그러나 밤의 글쓰기가 없다면 낮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스스로 알 수 없다. 따라서 낮의 노동은 어떤 종류여도 괜찮지만, 밤의 글쓰기는 대체될 수 없다.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비평을 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며, 한편으로는 만개한 인간성 그리고 실현된 자유와 평등의 증거다.

오늘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상적 희망은 종종 도착적 명령으로 전환된다. 28살쯤 된, 오늘날의 어떤 프레카리아트precariat를 생각해보자. 그는 오전에는 이런 아르바이트를, 오후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저녁에는 공부를, 밤에는 글쓰기를 한다(그리고 난해하고 날 선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그것은 가장 끔찍한 형태의 자기착취는 아닐까? 마찬가지로 사라에게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비평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유토피아적 약속이 아니라 가혹한 명령으로, “잔인한 낙관”의 유혹으로 들릴 것이다.

게다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조건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는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동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이른바 ‘관심 경제’)에서 격렬한 질투를 향해 구부러진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인터넷이 ‘집단지성’을 위한 ‘공론장’의 역할을 하여 전례 없는 민주화를 견인하리라는 낙관이 있었다. 인터넷이 공적 영역에서 소외된 하위주체들이 자신을 가시화하고 표현하는 열린 광장이 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는 기대이지만, 인터넷이 일반화된 신경증을 야기했다면, 그것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이상이 배반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질투는 민주주의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격화된다.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무언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신경증자들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문화가 너무 많은 사람을 신경증자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온갖 사람, 정체성이 자신이야말로 가장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지식과 권력을 헐뜯게 된다면, 그러면서도 은밀하게 압도적인 폭력과 지식으로 불안과 불만을 잠재워줄 주인을 기다리게 된다면? 그런 주인은 언제까지나 오지 않을 것이기에, 주인 없는 신경증자들의 힘겨운 공존은 우리의 난제로 남아있다.

  1.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
  2. 이희주, 『크리미널 러브』, 문학동네, 2025, p. 317. ↩︎
  3.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20, p. 146. ↩︎
  4. 야마모토 케이, 『질투라는 감옥』, 최주연 옮김, 북모먼트, 2024, p. 48. ↩︎
  5. 같은 곳. ↩︎
  6. 같은 책, p. 216 ↩︎
  7. 같은 책, p. 276. ↩︎
  8. 최창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2010. ↩︎
  9. 정태석, 『한국인의 에너지, 평등주의: 평등주의와 서열주의의 모순적 공존』, 피어나, 2020. ↩︎
  10.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01, p. 109, p. 133 참조. 이 글에서 내가 말하는 질투는 jealousy보다는 envy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원초적 질투envy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거나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느끼는 감정인 반면, 이차적 감정인 질투심jealous은 내가 소유했다고 여기거나 애착을 가진 존재를 제삼자에게 뺏길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다. 그런데 클라인이 지적하듯 셰익스피어는 둘을 엄밀하게 구분해서 쓰지는 않는다. Melanie Klein, “Envy and Gratitude”, The Writings of Melanie Klein Vol. Ⅲ: Envy and Gratitude and Other Works 1946-1963, The Free Press, 1975. p. 182 참조. jealousy와 envy의 구분에 대해서는 p. 181 이하 참조. ↩︎
  11. Sianne Ngai, Ugly Feeling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 128. 나이는 질투가 특히 ‘여성화’된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감정의 여성화는 그 감정 자체가 수치스럽고 모욕적으로 여겨지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여성화되고 개인화됨에 따라 질투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고 진지하게 성찰될 여지를 차단당했다. 어쩌면 질투가 촉발할 수도 있을 투쟁적·비판적 행위성도 덩달아 평가절하되고 억압되었다. 나이는 질투를 비롯한 “못난 감정ugly Feelings”을 회피하거나 모른 척 덮어두지 않고 진지하게 사고하는 것이 페미니즘 비평에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
  12. 예를 들어 이희우,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
  13.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 ↩︎
  14. 안세진, 「신(新) 가족 로망스―2020년대 한국 소설의 이모, 고모, 그리고 삼촌」, 『자음과모음』 2025 겨울호. ↩︎
  15. 같은 글, p. 42. ↩︎
  16.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
  17. 김지연, 「무덤을 보살피다」, 『자음과모음』, 2025 봄호. ↩︎
  18.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 『문학동네』 2024 겨울호. ↩︎
  19. 예소연, 「사랑과 결함」, 『사랑과 결함』 ↩︎
  20. 마시모 레칼카티,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로』, 윤병언 옮김, 책세상, 2016. ↩︎
  21. 물론 이는 권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너무 빠르게 변한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한국의 청년 세대에게는 ‘권위적 아버지’와 ‘방임하는 아버지’라는 두 형상이 더 구분할 수 없게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
  22. 나에게 줄리엣 미첼을 읽으라고 처음 권한 사람은 미술비평가 이연숙이다. 그의 제안에 감사드린다. ↩︎
  23. 이성민, 「옮긴이 서문」, 줄리엣 미첼, 『동기간』,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15 참조. ↩︎
  24. 줄리엣 미첼, 『동기간』, pp. 17-18. ↩︎
  25. Melanie Klein, “Envy and Gratitude” ↩︎
  26. 줄리엣 미첼, 『동기간』, p. 46. ↩︎
  27. 줄리엣 미첼, 『미친 남자들과 메두사들』, 반태진·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25, p.39. ↩︎
  28. 같은 곳. 미첼 이론의 또 다른 특이성은, 그가 히스테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서 히스테리를 ‘여성의 병’으로 여겨온 역사를 탈구축해 ‘남성 히스테리’를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연다는 것이다. ↩︎
  29. 줄리엣 미첼, 『동기간』, p. 42. ↩︎
  30. 같은 책, p. 338. ↩︎
  31. 15살과 45살 남자는 생물학적으로는 아들/아버지뻘이지만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순간 서로 ‘형’이 된다. 서로 무엇이라고 부르든, 남초든 여초든, 커뮤니티에서는 원칙적으로 반말을 사용한다. 혹은 SNS에서 서로 존대하며 논쟁하더라도, 대체로 거기에 어른과 아이 같은 수직적인 차이는 없다. 다만 페이스북은 예외적으로 다른 것 같은데, 실명을 기반으로 하는 그 SNS에서는 여전히 ‘선생’이나 ‘지식인’이 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
  32. 탁지영·김원진 기자, 〈거리낌 없이… 혐오·차별 ‘놀이’ 삼는 학생들〉, 경향신문, 2025. 01. 24.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240600015 ↩︎
  33. 줄리엣 미첼, 『동기간』, p. 43. ↩︎
  34. 같은 책, p. 25. ↩︎
  35. 사라가 질투를 느끼는 대상은 권위 있는 문예지나 학술지에 실린 전문 비평가·학자의 글이 아니다. 단지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글이다. 문예지나 학술지에 글을 쓸 가능성은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에 좌우된다. 반대로 온라인 환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격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이다. 사라를 괴롭히는 것은 자격의 불평등이 아니라 관심의 불평등이다―비록 이 두 가지는 현실에서 종종 겹치고 얽혀 있는 것이지만. ↩︎
  36. 로런 벌렌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
  37. 피에르 부르디외, 『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p. 13. ↩︎
  38. 피에르 부르디외, 『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p. 13. ↩︎
  39. 신경숙, 『외딴방』, 문학동네, 2014, p. 192. ↩︎
  4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옮김, 두레, p. 71. ↩︎

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2)

4. 학자의 간계

오늘날의 온라인 소통환경은 학자에게 흥미롭고 불안한 이중성을 허용한다. 대학이나 학술지를 ‘지식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SNS나 블로그 등은 ‘의견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학자와 전문가는 이 두 공간 모두에서 숨 쉴 수 있는 수륙양용 존재로 변이 중이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학자는 때로는 지식의 이름으로, 때로는 의견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래서 종종 학자의 블로그나 SNS는 완전히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고, 학자로서의 책임을 요구하기도 요구하지 않기도 애매한 회색지대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비평이 주목해야 하는 공간이 바로 지식과 의견 사이의 그 현란하고 시끌벅적한 ‘회색지대’다.1

김창환 교수 역시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그는 블로그에서 《시사IN》 인터뷰의 후일담을 들려줬는데, 그 ‘후일담’이 트위터 등의 SNS에 캡처된 사진이나 하이퍼링크의 형태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 역시 친구의 공유를 통해 사회학자의 블로그에 접속하게 되었다.

블로그에서 학자는 반박에 대한 재반박도 열심히 했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는 사실이다’라는 조사 결과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으로는 먼저 ‘내부다양성 논리’가 있다.2 사회학자는 이것을 ‘허약한 논리’라고 부른다. 청년들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뭇 당연한 이야기다. 이준석을 지지한 청년들 속에도 다양성이 있다. 다시 『리바이어던』의 표지를 보면, 리바이어던의 형상에 이미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지 않은가. 집단 내부에 다양성이 있다고 해서 큰 경향성을 파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예외 사례도 반증이 되지 못하는데, 사회학자는 자신의 조사는 어디까지나 커다란 경향성을 판별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다양성 논리를 기각했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과 반박 들이 있다. 학자는 그 의문과 반박을 다시 한번 차단하려 하면서 더 문제적인 쟁점으로 옮겨간다.3 점점 인식론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또한 윤리적인 쟁점이 대두된다. 학자는 반박하는 자들에 대한 분류를 시도한다.

다양성론이 기각되었는데도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

사회학자의 요점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가능태론은 청년 남성들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불가지론은 더 유보적인 입장인데, 청년들의 진짜 성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고 따라서 그들을 규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둘 다 근거가 빈약하지만, 불가지론은 특히 더 허약하다. 불가지론은 최근 20대 남성의 정치적 선택이 꾸준히 보수적이었다는 일관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문제는 가능태론·불가지론을 반박하는 사회학자 자신의 논리도 못지않게 이상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지론이 왜 인기를 끄는가? 불가지론에는 우리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당사자들의 외침이 들어있다. 누구나 자신을 한 가지로 규정짓기를 꺼려한다. 개인은 항상 다양하고 중첩적이니까.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능성을 가지기에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자”는 절대자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하여간 신이 누구인가를 논할 때 나오는 논리가 이거다. 트럼프도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한편으로 힘에 대한 숭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불가지론은 20대 남성 당사자들의 논리가 되기 쉽다. (같은 곳)

여기서 학자의 논리는 자신이 비판하는 불가지론 만큼이나 이상해진다. 누군가 규정짓기에 저항한다면, 그는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에서 벗어나려면 규정짓기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납득하기 힘든 논리다. 어쩌다 “힘에 대한 숭배” 이야기까지 나온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학자는 왜 이렇게까지 확고한 ‘규정짓기’를 하고 싶어 하는가? 학자가 이렇게 비약으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블로그가―학술적 발표나 논문과 달리―지식의 시험(동료 학자들의 견제와 비판)으로부터 어느 정도 면제된 의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이 보통의 의견보다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그가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라인 소통공간에서 학자가 누리는 이중성이 있다. 즉 그는 지식의 권위와 의견의 자유를 동시에 누린다.

위의 문단에 반박해보자. 첫째,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해석에 저항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고 살아있는 존재의 마땅한 권한인데, 잘 알려져 있듯 해석은 권력의지의 행사4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타자의 권력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스스로 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관심의 문제’로 여기면서 타인의 삶은 (이미 규정된) ‘사실의 문제’로 간단히 치부한다는 데 있다. 성인(聖人)이 아닌 다음에야, 아마 우리 모두에게 얼마간 그런 성향이 있을 것이다. 이 딜레마 앞에서 도덕적 당위를 주장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런 것처럼 네 삶도 규정됨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기보다는 ‘타인의 삶도 네 삶만큼이나 규정하기 힘든 것임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둘째, 이 학자가 비판을 차단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잠재적 비판자가 자기 의심(‘혹시 내가 자기애에 판단력이 흐려진 이대남 당사자일까? 내가 불가지론에 빠진 것일까? 어쩌면 나는 맹목적으로 힘을 숭배하는 트럼프 지지자일까?’)에 휘말리도록 은근히 유도함으로써 반박을 미리 차단하고 있다.

셋째, 그가 말하는 통계적 ‘규정짓기’야말로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치안장치의 핵심 부품이다. 사회학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구집단들의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을 어떻게든 식별하고 고정하려는 의지야말로 트럼프 정부의 야만적이고 파렴치한 인종차별 조치들(유학생의 구금이나 ‘불법’체류자의 추방 등)을 뒷받침한다. 반대로 다중에 대한 완전한 식별과 규정은 불가능하다는 진실이 저항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정치적 주체화는 할당된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잘못’에 의해 시작된다.5 사람들은 대의제 정치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고, 사회학적 지식이 자신을 재현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재현되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의 대표/지식의 재현에 저항한다. 바로 그 저항에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저항적 정치는 통계적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계적 사실에 ‘대해서’ 가능하다.

같은 게시물에서, 학자는 가능태론에 대해서도 허술한 비약처럼 보이는 문단을 덧붙인다.

가능태론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무한한 가능태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 이런 심정에서 벗어나 20대 남성도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어른으로 대접하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이는 20대 남성을 특별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로 한 말일 테다. 그 의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들만을 온정적으로 대우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떤 순간의 ‘결과’에 의해 규정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20대든 70대든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도 다른 이들처럼 결과로 평가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순간의 결과로 그 존재를 평가할 수는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자애로운 어머니’ 운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너무 손쉬운 도덕적 비난을 더 이어가지는 말도록 하자. 여기서는, 학자가 미리 설치해둔 두 선택지에 은근하게 괄호가 덧붙여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엄마의 심정’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일 것이다).

이처럼 학자는 자신의 조사 결과나 주장에 뒤따를 수 있는 불만에 미리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반박을 차단한다. 이렇게 교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반박은 사회학자의 심증을 오히려 강화하는 재료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화를 내면서 ‘20대 남성은 극우가 아니다!’라고 댓글을 단다면 ②로 수렴될 것이다. 누군가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에게 다른 면모나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요?’라고 쓴다면 ①로 수렴될 것이다. 어떤 감정적인 반론 혹은 경험적인 반증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이런저런 반증을 제기하는 대신, 학자가 사용하는 논리의 전제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직행해야 한다. 학자의 논리를 90°기울여 그의 방어가 어떤 분할을 전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❶ 과학적 방법과 잘못된 인식론들(가능태론, 불가지론 등)의 대립
❷ 객관적 조사와 주관적 관점들(‘당사자’나 ‘어머니’의 관점)의 대립

이것은 뭇 학자가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아닌가? 당사자와 그의 친지―바로 사회학자가 조사하는 사회의 내용인 사람들―는 자신의 상황을 거리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감정과 선입견을 배제하도록 과학적으로 훈련된 사회학자만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따라 조사한 경우에 한해, 그들의 상황과 성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는 무지한 자들과 학자의 분할을 수립하면서, 즉 의견과 지식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방어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에 ‘형식’을 부여하는 엘리트와 사회의 ‘질료’가 되는 보통 사람들의 오래된 분할을 수행적으로 정당화한다. 당사자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말하지만, 사회학자는 ‘훨씬 많은 사람’에서 뽑아낸 통계적 데이터에 기반해 말한다. 통계가 거시적으로 될수록, ‘그저 한 사람’의 이탈과 예외와 저항은 무력해진다.

물론 블로그의 주인은 학자답게 비판에 열려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의 문은 교묘한 회전문이어서 아마추어리즘과 비과학의 문을 닫는 방식으로만 열릴 것이다. ‘내 과학을 비판하려면 당신도 과학을 하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물론 이 통계 분석은 부정확할 수 있고 맹점도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통계의 한계가 아닌가. 불만이 있으면 더 날카로운 통계와 분석을 해보라.’ 지식의 이름으로 말해진 것은 다른 지식(동료 학자)의 비판만을 허용한다. 이것이 ‘누구나 아는’ 학계의 작동방식이다. 이것은 한 학자의 탓이 아니며, 대학과 학술지로 대표되는 지식생산의 구조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말하고 있는 분할은 특정한 지식인을 비판할 이유라기보다는, 달라지는 소통환경 속에서 인문사회학자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오늘날 학자는 대학이나 학술지와는 확연히 다른 소통공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 탈 많은 회색지대에서 이미 많은 학자가 자신의 지식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 ‘다른’ 공간에서 ‘같은’ 과학을 하려는 태도는 온당한가? 대학이나 학술지에서의 지식생산이 요구하는 선명한 분할―자연어와 학술어, 의견과 지식의 분할―을 이 공간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지식의 권위로 의견을 찍어누르려는 일밖에 안 된다(그러는 동시에 전문가와 학자는 의견의 공간이 허용하는 느슨함과 분방함을 누릴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오늘날 음모론과 확증 편향, 반지성주의가 큰 문제라고 해도, 전문가의 앎을 대중의 무지에 대립6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학자와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느린 과학”7을 시도함으로써 그 문제에 맞서야 한다. 학술 공간에서 생산된 지식의 열화된 찌꺼기를 갖고 와서 대중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공간에서 함께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블로그에서 학자의 ‘의견’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제시하는 통계의 결과를 (그 작동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채로) 그저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가망 없는 반박을 계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지식과 의견의 분할이 한 사회학자를 특히 비판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해도, 다음의 문제는 확실히 비판해야만 하겠다. 학자가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특정한 ‘정체성’의 함정을 설치했다는 것 말이다. ‘만약 조사 결과에 계속 반박한다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 혹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나는 권위 있는 학자가 이런 식의 발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로 느껴진다. 이 글 역시 사회학자의 위치를 묻고 있지만, 이는 사회학자의 정체성(그의 나이나 성별, 인간관계 등)에 대한 시비가 아니다. 그런 시비는 비판의 탈을 쓴 인신공격이 되기 쉽고, 비판이나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활용되는 경우에는 특히 비겁한 짓이다. 오늘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은근히든 노골적으로든 논박하는 상대의 정체성을 겨냥하고 공격하는 발화를 볼 수 있다. 당신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의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이러저러한 정치적 관점을 가졌다면,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여자를, 여자라면 남자를,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대남을 이해하거나 옹호한다면, 당신이 바로 문제의 그 이대남 당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야말로 강력한 수행적 발화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가 사회적 정체성에 각각의 감각 방식과 감수성, 사유방식 등을 할당하고 고정하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사회적 정체성들 사이의 감성적 분할이 실제로 완고해진다.

5. 사실은 실재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몇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로, 나는 지금 단지 ‘숫자 뒤에 사람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구집단에 대해 양적 통계를 하지 말고 사람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미시적’ 연구를 해달라고 사회학자에게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거시적 연구가 흔히 사실로 전제하는 ‘사회구조’가 그 자체로 해명되어야 할 문제인 것처럼 개인들에 밀착한 미시적 연구의 ‘진정성’ 역시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비판적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미시/거시의 층위를 나누는 일 자체, 그 층위가 분화하는 과정 자체다. ‘그저 한 사람’은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가, 그리고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기에 이르는가? 이 성장/분화의 과정은 무엇이 변하기 쉬운 요소이고 변하기 어려운 요소인지를 결정하고, 무엇이 그저 한 명의 개인이고 무엇이 지속적인 구조인지를 결정하며, 무엇이 망상이고 사실인지를 구분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둘째로, 나는 언론이나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가 객관적 실재와 동떨어진 담론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사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나 역시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오늘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묻고 있으며, 나아가 오늘의 사실이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고, 말 걸고,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셋째로, 나는 ‘정말로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자기계발서형 미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낙인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말의 주술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말의 수행성을 문제 삼고 있다.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는 사실이지만, 그의 조사는 사실의 바깥에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사실이 되는 과정에 내재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대해 말함으로써 어떻게든 자신이 말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필연적으로 사회학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구성하는 ‘수행적 학문’이 된다. 관측/진술되는 대상이 관측/진술하는 행위의 영향을 받는다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관측/진술 주체의 위치를 설정할 수 없다. 최선의 경우 그 관측/진술은 개연적이다.8 정치인도 사회에 대해 말하고, 사회학자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 모든 진술은 그 나름대로 사회의 수행이다. 이것은 그저 정치인·전문가와 시민·아마추어의 경계를 흐리고 그 위계를 평탄화하려는 주장은 아니다. 정치인·전문가의 말은 정확성이 아니라 강력한 수행성·견고한 개연성 때문에 보통 사람의 말과 변별된다. 사회학자의 진술은 사회에 대한 보통 사람의 진술보다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다. 사회학자는 주관적 망상과 객관적 사실, 의견과 지식이라는 층위의 차이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활용해야 하는지 아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지식’은 가장 반박하기 어렵고 견고하며, 종종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 대한 의견의 개연성 있는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거나 사실로부터 도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라투르의 지적 이력을 살펴보는 게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9 하지만 실재론과 구성주의를 둘러싼 그의 논쟁적 이력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사실’에 대한 라투르의 대원칙은 이것이라고 본다: 사실은 실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토록 많은 오해와 비판을 샀던 글10에서 라투르가 정말로 하고자 한 이야기였다. 사실은 존재를 나타내지만, 존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사실은 변이와 지속의 과정에 있는 존재의 일시적인, 잠정적인, 빈약한 대리물일 뿐이다.

사실의 완고함—“당신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것은 거기에 있다”—은 “미국을 사랑하라, 아니면 떠나라”라고 외치는 정치적 시위자들의 완고함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한 구호는 진동하고, 명료하고, 억세고, 의연하고, 장기적인 존재의 아주 빈약한 대리자substitute이다.11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여기라”12고 명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사유를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했다면, 라투르는 ‘사물을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matter of concern로 여기라’고 제언하면서 전통적이고 정석적인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을 뒤집으려 한다. 사실은 논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논의의 대상이다. 한 번 정립된 사실조차도 언제나 다시 열리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는 사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사실을 상대화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냉혹한 과학적 사실에 인문학적(인본주의적)으로 따뜻한 말 몇 마디를 장식처럼 덧대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실에서 꿈으로 도피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보자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 ‘배후’에 숨겨진 의도, 구조, 세력, 권력을 폭로하고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실을 구성할 가능성을 찾고 그 가능성을 실재화하기 위함이다. ‘오늘 사실인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만들 것인가?’ ‘오늘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되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난해한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변하기 힘든 사실이라면, 우리는 거의 모든 동료, 친구와 마찬가지로 극우화되었다는 이들과 이 땅에서 평생 함께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청년 남성 극우화’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로 들여다보라. 청년 남성들이 어여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볼 때만 변화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13 비판의 초점을 옮기자는 제안은,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말이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사물의 주름을 펼치자는 말이다.

나는 당사자로서 내가 규정되지 않고 싶다거나, 아니면 자애로운 보호자의 마음으로 젊은 남자들을 극우화에서 ‘구제’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대신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이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으로 정치적 입장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페미니즘인지를 논쟁하는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나는 북한에 대한 제제나 중국에 대한 호오(好惡)가 더 이상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는 장애인이나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정치적 선동과 결집의 도구로 활용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나는 장애인과 소수자의 권리를 정당이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한 사회가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변화를 희망한다면, 이미 특정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중요해진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 질문들이 지금처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 되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질문이 새로운 사회적 사실을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6.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김창환은―계속 부정적인 사례로 언급하여 송구하지만―현 상황에서 (거대양당 구도의) 대의제의 불가피한 성격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드러낸다.

거의 다른 모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대의제다.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유권자가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대략적인 지향성으로 대리인을 뽑으면 그들이 정책을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지 정당이다. 민주주의와 복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투표는 민정당(=전두환 정당)에 하고, 오세훈이 무상급식 없애자고 해도 뽑으면,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나?14

누군가의 정치적 입장이 ‘누구에게 표를 던졌느냐로 결정된다’는 대의제의 완고함은 응답자의 정치적 입장이 ‘설문조사에서 어떻게 응답했느냐로 식별된다’는 사회학자의 완고함과 닮아있다. 그 두 완고함은 미리 주어져 있는 질문, 주어져 있는 선택지로 사람들을 규정하려 한다. 그 완고함은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미리 주어진 선택지에 제한한다. ‘이 선택지 안에서 고르든지, 아니면―무효표가 됨으로써―셈해지지 않던지.’

하지만 우리는 최근의 대선에서 1번을 찍었으나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1번을 찍었으나 집권 정부가 자신을 전혀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현representation과 현시presentation 사이에 있는 그 ‘불일치’다. 현실에 아직 없는 질문, 아직 없는 선택지를 만들려고 분투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좌파라면 그렇게 흘러넘치는 욕망과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에 훨씬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무리 미약해 보이고 때로는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없는 것’(셈해지지 않는 것)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제도를 존중하지 않아야 한다(부정선거 음모론처럼)는 말이 아니다. 대의제 속의 중대한 절차들(토론과 선거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제도를 존중하고, 선거에 참여하여 필요하다면 ‘차악’을 고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좌파라면 제도에 의해 재현/대표되지 않는 목소리,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 흘러넘치는 목소리, 광장의 목소리를 훨씬 더 존중한다.

이는 정치적인 적을 상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자체나 리바이어던을 구성하는 신체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몸들 사이의 불일치, 즉 빈틈이다.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국지적 전략은 이준석 같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없게 억제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사회의 현실을 더 이상 ‘거시적으로’ 조직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사회에 대해 가진 상이 사실이 되거나 사실로 유지될 수 없도록―한낱 ‘주관적 망상’에 불과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방해해야 한다. 나아가 몸들 사이의 빈틈을 더 크게 벌려 그 형상에서 더 많은 몸이 이탈하도록 하고, 그 리바이어던을 결국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리바이어던 속에 있는 불일치의 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끊임없이 흘러 다니고 모이거나 갈라지는 정념들이 있다. 사회의 현 상태, 특히 거대양당 체제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의 정념을 이준석이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 정념의 방향을 바꾸고 다른 물길을 터 나가지 않는 한,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해체하더라도 유사한 리바이어던들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게다가 더 어려운 문제는 정념의 흐름이 잘 식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들뢰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념은 “재현 이하의 사태들”이다.15 그 흐름을 분명한 경향이나 형상으로 식별/재현할 수 있게 되면, 이미 모종의 리바이어던이 생겨난 후다. 그런 이후에 ‘이 경향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구축된 리바이어던의 존재를 승인하는 일밖에 안 된다. 정념의 흐름을 변화시키려면 아직 재현되지 않는 흐름 속에서 사고하고, 작업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적으로 정념들을 형상화하는 ‘덜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구성할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직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못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평등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만큼 남에게도 있다(혹은 누군가에게 있는 것만큼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저히 평등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아무것도 믿지 않기보다는 차라리―불평등을 믿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질문을 던질 능력이고, 그 능력이 이미 모두에게 있다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16 사실 글을 쓴다는 것, 익명의 다수가 읽기를 바라며 글을 발표한다는 것, 읽는 사람을 미약하게나마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는 것, 그 모든 일은 글을 읽는 아무개의 평등한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그 믿음이 없으면 글을 쓰고 발표하는 모든 일은―어떤 종류의 글이건 간에―의미가 없다. 말의 전달을 위해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정체성’도 ‘전문성’도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모국어를 배울 때 발휘한 바 있는, ‘아무개로서 아무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그 평범한 능력일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삶을 산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을 통해서다. 차이 있는 사람과 연대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능력을 통해서다. 우리가 통계에 의해 식별되는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평범한 능력을 통해서다. 문학은 그 평범한 능력의 가장 주의 깊은 사용이다. 습작생의 심오한 작품부터 거장의 평이한 작품까지, 모든 문학작품은 그 평범한 능력의 거의 무한한 변주이고 쉼 없는 실행일 뿐이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힘에 대한 숭배’라는 사회학자의 말은 틀렸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어떤 평범한 능력에 대한, 즉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1. 사실 비평이야말로 항상 ‘지식도 의견도 아닌’ 애매하고 의심스러운 말하기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 애매한 공간이 새로운 위계와 분할을 낳기도 하고 새로운 연결과 질문을 낳기도 하는, 문제적이고, 혼란스럽고, 히스테리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
  2. 20대 남성, 내부다양성이라는 허약한 논리〉, 블로그 SOVIDENCE, 게시일 2025.06.03. (마지막 접속 2025.08.05.) ↩︎
  3.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같은 블로그, 게시일 2025.06.04. (마지막 접속 2025.08.05.) ↩︎
  4.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 1988, pp. 301-02, 잠언 481 참조. ↩︎
  5. 이 글에서 드러내고 있는 나의 정치적 입장(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치안’과 대비되는 저항적 ‘정치’에 대한 관점, 실증적 지식의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회적으로 할당된 몫과 자리에서 이탈하는 ‘잘못tort’, 잘못에 의해 촉발되는 ‘탈정체화로서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서는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6 참조. ↩︎
  6. 쉽게 현혹되는 ‘무지한 대중’과 ‘전문가의 앎’이라는 잘못된 대립 구도는 대중에 대한 은근한 경멸과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재귀적으로,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이 대립 구도 자체가 반지성주의의 토양이 된다. ↩︎
  7. 이자벨 스탕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느린 과학’ 선언』, 김연화·장하원 옮김, 에디토리얼, 2025 참조. ↩︎
  8. 사회학에서 ‘개연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김정환, 「사회학의 소설적 전통」, 『사회와이론』 43집(2019년 5월), pp. 7-83을 참조했다. ↩︎
  9. 1990년대의 ‘과학 전쟁’과 자신에 가해진 ‘반실재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판도라의 희망―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장하원·홍성욱 옮김, 휴머니스트, 2018) 1장 「당신은 실재를 믿습니까?」에서 라투르가 직접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상원, 「라투르의 구성주의와 해킹의 실험적 실재론」(『과학기술학연구』 제 55권, 2024년 11월, pp. 270-94)에서도 구성주의의 ‘반실재론적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 ↩︎
  10.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pp. 291-318. ↩︎
  11. 같은 글, p. 315. ↩︎
  12.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민혜숙 옮김, 이른비, 2021, p. 79. ↩︎
  13.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
  14.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15.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200. ↩︎
  16.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16, p. 142. 강조는 원저자. ↩︎

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1)

―‘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 가을호
 

0. 문제의식

지난겨울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계엄령부터 서부지법 사태를 거쳐 탄핵과 대선까지, 충격적인 일들이 지나가고 나서 상황이 나름 온건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듯하다. 하지만 무언가 돌아왔고 ‘회복’되고 있다는 안도감에, 김형중 평론가의 말처럼 삐딱한 ‘좌파적’ 의문이 계속 달라붙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 내란 전에는 한국이 정상 국가였는가?”1 이른바 ‘정상화’된 상황도 문제투성이이지 않은가. 정상화된 정치가 대표/재현하지 않는 정치적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제도가 문제없이 작동하고, 법이 존중되고, 경제성장이 느리게나마 이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르고,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것으로 다 괜찮을 것일까?

선거운동 기간에 이재명은 ‘민주당이야말로 진짜 중도보수’라고 말해서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2 국민의힘의 극우화 때문에 갈 길을 잃은 보수 성향 유권자를 아우르고 흡수하려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극우 세력이 집권 여당과 시민사회의 보수화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책방향이 중도보수적인 것이야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지만, 뭐랄까, 불가피하고 합당한 이유라도 있는 듯 중도보수를 말하는 데 있어 한층 당당해졌달까. ‘그들’로부터 사회를, 상식을, 질서를 지켜내고 회복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보수화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극우화와 보수화는 사실상 서로를 강화하며 발맞춰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보수화는 ‘정상적’ 상태를 유지하려 하면서 극우화의 땔감이 될 불안과 분노, 소외감을 키운다. 극우가 충격적인 행각을 벌이면, 더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고 온건한 상태를 지키려고 완고하게 보수화된다. 극우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만큼 정상적이고 질서 있는 사회에 대한 보전적 성향이 강화되면서 좌파적이라고 해야 할 정치적 상상력도 덩달아 봉쇄되는 듯하다.

그래서, 최근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새삼스러운 질문을 떠올리게 됐다. ‘도대체…… 좌파란 무엇인가?’

이 커다란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정치학자도 아니고 투철한 활동가도 아니다. 지금까지 한 적극적 정치 참여라고 해봐야 여러 시위에 다소 산만하게 참여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에서 그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 온라인의 남초 커뮤니티에서 종종 ‘좌파’는 멸칭으로 사용되거나 기껏해야 놀리는 말로 사용된다. 즉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위선적이고, 가르치려 들고, 재수 없고, ‘내로남불’ 성향이 강한 사람이나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꼭 보수적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에서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2030 세대에게 좌파라는 말이 무언가 중요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좌파라는 말을 현재의 맥락에서, 새로운 감수성으로 재활성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지면의 주제인 청년 남성의 문제를 생각했다. 최근 청년 남성들에 대한 담론이 폭증하고 있다. 서부지법 난동과 대선 출구조사, 그리고 대선 불복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극우화 경향이 시민과 지식인 들을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할 말이 너무 많은 주제인 것은 틀림없다. 오래된 여성혐오와 폭력들,3 가부장주의적 가족 모델의 고장, 남성들의 히스테리적인 불안, 특정한 어법과 사고방식으로 젊은 남성들을 끌어당기는 커뮤니티 문화,4 온라인 소통환경에서 안티페미니즘 유행과 전략의 형성,5 그것들을 이용하는 정치. 그리고 지독한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 취업난, ‘비교질’ 문화, 진보 혹은 좌파라고 자임하는 정치인과 엘리트 계층의 위선,6 세대 내 불평등, ‘인셀 남성성’7과 ‘루저 남성 정서’8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문제가 교차하고 얽혀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 글에서는 일단 가까운 텍스트들을 읽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최근 나는 구독하고 있는 언론(《한겨레》, 《시사IN》)의 기사와 칼럼을 한층 주의 깊게 따라 읽게 됐는데, 청년 남성과 극우에 관한 여러 분석기사와 칼럼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지만 이내 청년 남성 극우화를 둘러싸고 생산되는 담론과 지식 일각에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됐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담론들이 어떤 순환논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순환논리가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과 정치적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지금 생산되고 있는 담론, 특히 실증적이고 통계적인 사회학적 담론을 비판하려 한다.

논의의 과정에서 한 사회학자를 다소 집요하게 비판하게 될 텐데,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 이 글의 비판은 일련의 조사나 한 학자를 괜히 흠집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말할 때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난관을 성찰하고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점검의 과정은 또한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1. 설문 조사의 수행성

〈시사IN〉의 한 기획기사는 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수행한 설문조사를 소개하고 있다.9 세대와 성별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설문조사인데 문항 설계에는 여러 정치·사회 전문가가 참여했다. 일련의 문항에 부/동의 정도를 묻는 방식이었는데, 기사에서 소개하는 문항 중 몇 가지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보복으로 인해 한국이 경제적 타격을 입더라도 중국과 거리를 두고,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장애인 의무고용제’에 대한 찬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반
―‘고위공직자 여성할당제’에 대한 찬반

기사에 따르면 이 모든 문항에서 2030 남성의 특이성이 두드러졌다. “결국 2030 남성은 안보·경제적으로 보수적이면서 각종 차별 시정 조치에 보수층 일반보다 반감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같은 곳). 이것이 조사에서 확인된, 놀랍지 않은 결과다.

전문가들은 적실한 질문을 고른 것 같다. 위 문항들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전문가들을 신뢰할 수 있다. 설문조사의 의도가 사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도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하고 적실한 질문을 던지는 설문조사는, 왜 이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졌는지 말하지 않는다.10 이 질문들은 어쩌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를 만큼 그토록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가? 이 질문들이 특히 결정적 질문이 된 주요 이유는, 젊은 남성들이 그 문제들에 격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은 어쩌다가 남성들을 화나게 하고, 한쪽으로 모이게 하고, 반동적으로 결집하는 효과를 낳는 질문들이 되었는가? 바로 여기에 현재 청년들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떤 질문이 그 사회의 결정적인 정치적 질문으로 부각되고 조성되는 과정은, 한 사회가 특정한 모습의 사회로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단적인 예로, 어떤 정당 혹은 정치인이 ‘우리 사회는 북한에 의해 심각한 안보의 위협을 받는 사회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의 말은 불안을 조장한다. 동시에 그 말은 사람들의 불안을 특정한 형식으로 번역(‘당신의 불안은 북한 때문이다’)한다.11 그 발화를 단순히 ‘사실’과 동떨어진 선동이나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번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정당/정치인의 영향력은 실제로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북한에 의한 안보의 위협이 실제로 심각해질 수 있다. 그 정치인과 정당은 자신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의 상, 즉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의 말에 무슨 마술적 힘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대로 북한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의 선동이 남북관계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변수라는 말도 아니다. 방위가 순전히 담론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아니다. 북한은 세계에 실재하며, 동해로 쏘아진 미사일도 담론과 기호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요점은, 누군가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시적 발화가 아니라 수행적 발화라는 것이다. 즉 사회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진술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며, 발화자의 영향력이 클수록 진술의 수행성 역시 강해진다(혹은 역으로, 진술의 수행성이 강해지면 발화자의 영향력이 커진다).

우리는 대선 토론이나 청문회에서 민정당 계열(현 국민의힘) 정치인이 민주당 계열(현 더불어민주당) 정치인에게 버릇처럼 묻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主敵)입니까 아닙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해 보세요!’ 그들은 이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 수행함으로써 그것이 이 나라 정치의 ‘결정적 질문’으로 유지되게끔 애를 썼다. 그것이 결정적 질문이 될수록 실제로 보수정당(민정당 계열)의 영향력은 커졌으며, 그때마다 실제로 북한은 우리의 주적 비슷한 것이 됐다. 그들의 반복된 수행이 그 질문이 중요해진 유일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 질문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이 되어왔기 때문에, 설문 참여자는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기 위한 설문지에서 비슷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택지를 두 가지(예/아니오)에서 다섯 가지로 늘린다고 해서 질문의 대립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 ‘현실’정치의 맥락 속에 있는 시민은, 그 질문을 마주했을 때 특정한 대립 구도에 휘말리지 않기 힘들다.

중국에 대한 외교나 여성·소수자 정책에 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에 비하면 중국과 페미니즘에 관한 관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특히 젊은 세대에서 결정적으로 부상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모종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수행을 거쳐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은 똑같다. 그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지는 과정이 곧 청년 남성들이 극우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질문들을 통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인식의 변화를 만들지 않는 사회학적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난민이나 장애인,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은근하거나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유튜버와 정치인의 말을 듣고,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발 소문과 담론 들에 노출되고, 그것들에 반응하면서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친구와 절교하고, 대선 토론을 보고, 정치인이 불안의 해소를 약속하거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마침내 선거장에 가서 어떤 선택지를 고른다. 그 결과로 누군가 당선되고 세대별·지역별·성별 표심이 나타난다. 설문조사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정교하게 재연함으로써 개연성 있는,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는다. 즉 한국 현실정치의 ‘현실’을 바로 그러한 현실로 구성하는 질문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현실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질문과 선택지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동일한 대립 구도의 논리에 가둔다. 민주주의를 허울 좋게 내세우는 ‘관객 참여 예술’에서 관객이 그렇게 이용되듯이, 설문조사의 응답자들은 기획자가 미리 설치해둔 틀을 따라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2. 사회학자는 무엇을 하는가

사회학자는 사람들을 어떻게 분류할지 아는 사람 같다. 사회학자 김창환은 마찬가지로 《시사IN》에서 ‘한국의 극우’를 식별하는 유용한 분류법을 제시했다.

첫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력이나 폭력 사용, 규칙 위반을 용인하는 자세다. 두 번째는 복지에 대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인식이다. 세 번째는 한국적 특수성으로 ‘대북 제재 중시’를 고려했다. 네 번째는 ‘설령 중국의 보복으로 경제에 타격을 입더라도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좀 복합적인 질문이긴 한데, 외교에서 국익에 관계없이 특정 이념을 중시하는지 측정한 질문이라고 봤다. 다섯 번째가 극우 하면 보편적으로 포함되는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다. 이 다섯 가지에 모두 동의하면 극우라고 분류했다.12

김창환은 극우의 보편적 특징으로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꼽는다. 미국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그는 동시에 한국적 특수성도 잘 알고 있어서 대북 제재, 중국과의 외교, 한미 동맹 등의 문제도 문항에 적절히 포함한다. 그가 제시한 분류법은 적실하고 한국의 현실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자가 좋은 의도로, 학자로서 책임감 있고 성실한 방식으로, 유용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애썼음을 믿을 수 있다. 조사가 부정확하거나 그 배후에 어두운 의도가 있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심 없는 정확성과 유용성에, 바로 거기에 의문을 던져야 할 문제가 있다.

“설문조사는 사회학자가 질문을 만들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을 드러낸다.”13 사회학자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질문이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인지 안다는 것은 곧 그 질문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념과 의견을 지금 이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도식화하고, 분류하고, 편 가르고, 부추기고, 추동하고, 극단화하고, 한데 묶고, 대립시켜왔는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가 유능하고 유식할수록 그는 더 적확한 질문을 고를 것이며, 그가 적확한 질문을 고를수록 설문조사는 바로 지금 이 사회를 이러한 사회로 구성하는 ‘현실’의 정교한 미니어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이번 대선을 통해서 확인한 사회적 정체성들의 상이한 정치적 입장이 조사 결과에서 거의 정확하게 재연되는 데에는 놀라울 것이 없다.

사회학자가 사회에 대해 말할 때, 종종 그 지식의 내용보다는 그 지식의 생산방식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설문조사를 통해 익명의 응답자로부터 어떤 사실을 추출하는 방식은 대의제가 선거를 통해 익명의 유권자로부터 어떤 결과를 추출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은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표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대의민주주의 선거제도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정치인은 ‘나의 말은 국민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말이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대변하는 대표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대표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사회학자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재현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설문조사의 형식은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사회학자는 ‘이 조사의 결과는 응답자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 결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의 말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재현하는 학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재현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출한 데이터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대표/재현representation이 성공적일수록, 정치인/사회학자는 다음처럼 층위를 선명하게 나누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내용이고, 나는 형식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정치인은 자기 말의 정치적 정당성을, 사회학자는 자기 말의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한다. 비록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과 사회학자 모두 완전한 정당성/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고 단지 끊임없이 관측하고, 회유하고, 유도하고, 설득하고, 협상하고, 안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학자 역시 정치인만큼이나 ‘리바이어던’이다.

[사회학자는] 여론조사, 양적·질적 탐구를 통해 행위자들의 소망과 그들의 가치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번역해 낸다. [……]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대변자로 자임하고 자칭하면서, 그들은 홉스의 주권자로부터 [다음의 아이디어를] 넘겨받았다. ‘가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들 자신의 것이다.’14

인용한 페이지에서 프랑스의 과학기술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와 미셸 칼롱은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을 이야기한다. 사회학자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자나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라투르와 칼롱 역시 사회학자다). 사회학자가 작업하는 곳이 얼마나 놀라운 정치적 요충지인지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현장이든 연구실이든 학술지든 언론기사든 간에, 사회학자가 활동하는 곳은 거시와 미시의 층위가 나뉘고, 구조와 개인이 나뉘고, 형식과 질료가 나뉘고, 어떤 틀에 의해 현실이 안정화되어 설명되는, 그렇게 중대한 일들이 벌어지는 정치적 장소다. 사회학자가 훌륭하게 설계한 설문조사의 전제와 결과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가 보지 않는 등잔 밑의 어둠에 정치의 근본문제가 있다. 바로 이 문제이다: 누가 이 사회의 질료matter가 되는가, 그리고 누가 형식form이 되는가? 다시 말해 누가 이 사회의 물질이 되고 누가 정신이 되는가? 누가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누가 규정하는 존재가 되는가? 누가 선택을 요구받게 되고 누가 선택지를 설계하는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는가? 이러한 규정은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3.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3.1 홉스의 논리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이론적 우회로가 있다. 근대적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을 먼지 쌓인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보자. “교회국가와 시민국가의 질료Matter, 형식Forme 그리고 권력Power”이라는 부제가 붙은,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 초판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다.

*프랑스 판화가 아브라함 보스가 동판화로 제작한 『리바이어던』 표지 그림 일부

마을 위로 솟은 거대한 몸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대한 몸의 형체를 작은 몸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흔히 전체주의적 괴물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지만, 홉스는 리바이어던이 인민people을 내용으로 하는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리바이어던은 인민의 투명하고 충실한 대변자일 뿐이다. 리바이어던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한 주권자로, 사람들(리바이어던에 예속된 자subject)의 이익과 생명, 안전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15

홉스가 말하길, 사회가 없는 자연상태에는 오직 평등한 개인들만이 있다. 다시 말해 사회가 발생하기 전에는 행위자들 사이에 어떠한 크기의 차이도, 권력의 차이도, 층위의 차이도 없다. 자연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단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단지 한 사람’일 때는, 다른 누구보다 특별히 크지도 강하지도 유능하지도 않다.16 이 평등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항구적인 투쟁 상태에 있다. 그 유명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다. 결국 사람들의 평등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평등이다.

홉스의 이론은 이렇다. 완전한 평등이라는 혼란과 야만―모두가 서로 죽일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즉 모든 인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주권자,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개인과 국가의 차이에 이르는 크기/권력/층위의 차이가 생겨날 것이다. 그 차이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곧 사회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리바이어던은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다수다. 그것은 하나의 의지처럼, 하나의 신체처럼 움직이는 다수의 의지이자 신체다.17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흩어져 있는 개인보다 압도적으로 더 크고, 강하고,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구조적이고, 거시적이다.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그 순간에 비로소 개인은 상대적으로 작고, 약하고, 일시적이고,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무엇이 된다. 비로소 사회에 예속된 자, 즉 사회적 주체subject가 되는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모든 행위자는 동등하며 그들의 크기/힘/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라는 핵심 아이디어를 홉스로부터 계승했다.18 물론 홉스의 신화myth는 중대한 변형 없이는 현대의 과학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이 계승은 도전적인 것이다. “역사학과 인류학, 그리고 오늘날의 동물행동학은 그러한 [홉스식의] 사회계약은 불가능함을 입증해왔다.”19 1980년대 초에 젊은 라투르와 칼롱은 사회학이 홉스의 총체적이고 일회적인 ‘계약’을 ‘번역translation’이라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홉스의 해답에 독창성을 다시 불어넣기 위해서는 단지 계약을 번역의 과정들로 대체하면” 된다.20 이것은 단일한 총체적 계약이 사회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협상과 분쟁, 설득과 안정화의 과정이 사회를 끊임없이 ‘수행한다’는 말이다. 차이는 한순간에 발생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구성되고 안정화된다.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를 끊임없이 조성하는 것, 그것을 둘러싸고 분쟁하며 차이를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곧 사회가 구성되는 과정이다.21

라투르와 칼롱은 타자의 의지를 단일한 의지로 번역하는 모든 존재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홉스의 생각과 달리 ‘국가=주권자’라는 하나의 리바이어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에 온갖 리바이어던이 있다. 너무나 크고 오래되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 알기 어려운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스타트업이나 신흥 정치인처럼 갓 만들어져 성장하려고 애쓰는 작은 리바이어던도 있다.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구글 같은 다국적 자유주의 기업 리바이어던도 있다. ‘사회학자 리바이어던’도 있는데,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은 다른 모든 리바이어던이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지, 그 논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의 장점은 거시적인 것(국가, 기업, 당[黨], 사회구조 등)과 미시적인 것(개인, 가족, 노동자, 친구 관계 등)을 미리 구분하지 않으면서 더 커지려고 애쓰는 행위자들의 분쟁, 설득과 협력, 암중모색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1987)의 엄석대도 제 나름의 리바이어던인데, 교실의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부림으로써 교실을 지배했다가, ‘단지 한 사람’으로 쪼그라듦으로써 무리 지은 아이들에게 패배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어떤 일그러진 영웅의 권력 행사는 엄석대보다 덜 폭력적이고 더 설득적일 수 있다.

3.2 이준석의 사례

이를테면, 영웅다운 구석은 전혀 없지만,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가 어떻게 나름의 ‘리바이어던’이 되었는지를. 이준석은 역사가 짧은 신흥 리바이어던이어서 그 구성 과정을 살펴보기 요긴하다.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안티페미니즘’이라는 기표로 결집한 행위자다. 그러한 번역을 통해 그는 청년 남성들을 아우르는 형식이 되려 한다. 그 과정을 단순화해보자면 이렇다: ①당신들에게는 불만이 있다―나는 그것을 느낀다(감성적 감응). ②당신들의 불만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페미니즘 때문이다(구상, 도식화, 번역). ②당신들이 나를 지지한다면, 내가 당신들을 대리해서 페미니즘과 싸우겠다(재현, 대표).

③이 가능하려면 일단 ①과 ②가 선행되어야 한다. ③은 ①과 ②의 부단한 과정이 만든 잠정적·일시적 결과일 뿐이다. 재현이 있으려면 먼저 감성이나 정동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재현을 매개하는 부단한 번역(협상과 타협을 포함한 번역)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번역 과정에서 수동성과 능동성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구분 자체가 번역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준석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안티페미니즘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이준석의 논리는 이랬다: ‘나는 단지 청년들의 대변자일 뿐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청년들의 편에 서려다 보니 의도치 않게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 뿐이다.’22 그는 마치 자신이 수동적 감응에 의해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 그는 그저 여느 청년과 똑같은 한 명의 보통 남자로 청년들에게 다가가려 하고 그들에게 감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년들의 공감을 샀다. 그가 충분히 수동적이지 않았다면 결코 능동적 행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가 ‘단지 한 남자’ 만큼 작지 않았다면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커질 수 없었을 것이다.23 이준석이 종종 거의 에펨코리아의 여론을 그대로 읊는 듯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리바이어던은 커지기 위해 공허해졌는데, 공허한 형식이 됨으로써 더 많은 몸을 자신의 내용(질료)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의 주장처럼 청년들이 정말로 안티페미니즘으로 ‘이미’ 뭉쳐 있었고 페미니즘에 맞서 싸우기를 원했으며 그는 그 의지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보면, 이준석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이준석에 의해 청년 남성들의 형체 없는 불만이 비로소 안티페미니즘이라는 형식으로 결집되었다고 하면, 청년 남성들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준석도, 청년 남성들도 순전히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지 않았다. 이준석 이전에도 이미 오랜 역사의 여성혐오가 있고, 특히 상층 계급 남성들은 자신의 유리한 지위가 유지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청년 남성들은 단지 이준석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상당한 수의 청년 남성은, 홉스의 설화에서 계약에 서명하는 사람들처럼 ‘자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준석이라는 리바이어던이 자라나게 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청년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심이 없었다면, 이준석의 번역은 실재와 동떨어진 망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 번역은 성공할 수 없다. 번역은 개연적인 한에서 성공할 수 있다.24 정치인은 정념과 의지에 ‘그럴듯한’ 형식을 부여하고, 지지자들은 정치인의 말에 ‘그럴듯한’ 내용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에펨코리아)의 유저들과 이준석은 재귀적으로 서로를 구성하며 정치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 능동적인 행위자(대변하면서 앞장서는 자)와 수동적인 행위자(지지하면서 뒤따르는 자)가 나뉜다. 정치인/지지자, 형식/질료, 능동/수동이 서로를 규정하고 뒷받침함으로써 분화한다. 이 분화의 과정은 리바이어던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다. 이준석이 충분히 크고 안정적인 리바이어던으로 자라나고 나면, 소수의 지지자가 이탈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위협하지 못한다. 리바이어던이 거시적으로 된 만큼 지지자 개인은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해왔다: ‘이 사회는 페미니즘 때문에 분열된 사회다.’ 이것은 그의 망상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나름으로 자신이 사는 사회에 대한 상을 갖는다. 그중 무엇이 주관적 망상이고 무엇이 엄연한 사실인가? 적어도 사회에 관한 한, 망상과 사실은 선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망상과 사실의 분리야말로 사회적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이며 그것을 분리하는 과정이 곧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소리높여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한다. 그가 강해지는 만큼 그 말은 사실이 된다. 그가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그저 망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역으로 그의 말이 사실과 동떨어져 있는 한, 그는 강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①사회적 플레이어가 큰 영향력을 얻는 것, ②그가 점점 더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는 것, ③동시에 타자를 상대적으로 더 ‘작게’ 만드는 것, ④그가 자신이 사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것은 동시적이다.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의 적대 역시 재귀적으로 강화됐다. 이준석은 그 분열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물론 나는 페미니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페미니즘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준석식의 음해를 물리치기에 충분치 않다. 이준석은 ‘페미니즘’을 사회를 분열시키는 기표로 부각함으로써 사회를 특정하게 분열시키고, 그렇게 특정한 구도로 ‘분열된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듦으로써 그 사회의 작은 리바이어던이 되는 데 성공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을 묻는다면, 당연히(!) 그 질문은 특히 젊은 세대 남녀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데 결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 설문조사는, 그 질문이 어째서 그렇게나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문제의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재인식/승인recognition할 뿐이다.

(2)에서 계속

  1. 김형중, 「좌파적 우울」,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봄호, p. 64. ↩︎
  2. 심우삼 기자, 〈이재명 “한국 정치에 보수 있나… 국힘은 범죄집단, 중도보수는 우리”〉, 한겨레, 2025.05.20. (마지막 접속 2025. 07. 28.) ↩︎
  3. 추지현, 「폭력의 연속성과 남성성‘들’」,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폭주하는 남성성』, 동녘, 2025, pp. 21-52 참조. ↩︎
  4. 김학준, 『보통 일베들의 시대―‘혐오의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오월의봄, 2022 참조. ↩︎
  5. 이우창, 「안티페미니즘 전략의 형성에서 음모론적 남성성의 등장까지」, 『폭주하는 남성성』, pp. 173-201 참조. ↩︎
  6. 박권일은 최근 연재 중인 칼럼에서 “극우의 토양이 되는 ‘어떤 진보주의’”를 이야기했다. 박권일 칼럼, 〈극우는 외계에서 오지 않았다〉, 한겨레, 2025.05.29. (마지막 접속 2025.07.28.) ↩︎
  7.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성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3 참조. ↩︎
  8. 이리예, 「짤의 시대, 안티페미니즘으로 공모하는 루저 남성 정서와 정치 언어」, 『폭주하는 남성성』, pp. 203-42 참조. 이하 인용 시 「짤의 시대」 ↩︎
  9. 진혜원 기자, 〈2030 이준석·김문수 투표자는 무엇이 달랐나[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여론조사]〉,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 08. 05) ↩︎
  10. 물론 이 조사의 목표는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 질문들이 중요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 문항에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조사의 목표이며, ‘과정적 분석’은 다른 연구의 몫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학문적 분업에 기반을 둔 조사와 연구의 설계 자체가 정치적 대안과 변화의 상상에 방해가 됨을 주장하려 한다. ↩︎
  11. 물론 이 ‘번역’은 말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일각의 여론을 정치인이 부각하고, 정치인의 말을 언론이 받아쓰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다시 전파되어 여론이 형성되는 등의 번역의 연쇄가 있다. 이 번역의 과정에 너무 많은 매개가 있어서, 번역이 항상 정치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번역의 성패 여부는 정치인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매개의 연쇄를 고려하더라도, 정치인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갖는 사회적 행위자다. ↩︎
  12. 진혜원 기자가 진행한 김창환 교수 인터뷰, 〈“서울 거주 경제적 상층일수록 극우 청년일 확률 높다”〉,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08.05.) ↩︎
  13. Jacques Rancière, The Philosopher and His Poor, edit. Andrew Parker, trans. John Drury etc., Durham&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3, p. 189. 인용한 문장은 랑시에르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비판하면서 쓴 문장이다. ↩︎
  14. Michel Callon and Bruno Latour, “Unscrewing the big Leviathan: how actors macro-structure reality and how sociologists help them to do so”, Advances in social theory and methodology―Toward an integration of micro and macro-sociologies, Routledge&Kegan paul, 1981, p. 297. 강조는 원저자. 이하 인용 혹은 언급시 UBL로 표기. ↩︎
  15.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1』, 진석용 옮김, 나남, 2008, pp. 232-33 참조. ↩︎
  16. 물론 사람들 사이에는 지능에서나 체력에서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도 머리가 좋은 사람을 치명적인 함정에 빠뜨릴 만큼은 똑똑하다. 힘이 약한 사람도 돌멩이를 쥐고 뒤에서 힘센 사람을 기습할 만큼의 힘은 있다.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 차이는 무시해도 될 만큼 미세한 것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강하다면, 그 상대적 강함은 ‘죽임당할 가능성의 평등’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 『리바이어던 1』, p. 168 참조. ↩︎
  17. 우리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정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이해하면 여전히 홉스의 이야기는 놀라운 현재성과 비판성을 갖는다. 홉스의 논리는 이렇다. 어떤 기원적 평등을 가정할 때만 사회적 불평등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혹은, 합리화될 수 있다). 만약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원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전근대 정치의 왕권신수설이 ‘신’을 가정하듯이) 인간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어떤 불평등의 기원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한 불평등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즉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화할 수 없는―불평등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그보다 앞서 있는 평등을 전제하는 것뿐이다. 평등과 불평등의 이 관계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만약 불평등이 자연적이었다면, 즉 인간들의 능력에 본성적인 차이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불평등의 형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에게 정치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월한 존재의 열등한 존재에 대한 지배가 있을 뿐, 정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불평등의 형식은 완전히 안정화되어,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사회적 역동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인간 사회에 ‘정치’가 있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선(先)정치적 전제를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평등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오늘의’ 불평등을 자연화하고 영속화하려 하는 모든 논리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치안논리다. 오늘날 한국의 상류층이 계층의 ‘세습’을 위해 그토록 많은 자원을 투여하고, 제도를 왜곡하고,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모든 인간 능력의 자연적 평등’이라는 홉스의 가설을 강하게 지지한다. 리바이어던이 되는 자는 다른 인간보다 더 뛰어난 자가 아니다. 동등한 능력을 가진 한 사람 혹은 한 집합(assembly)이 필요에 의해,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운이 좋아서 대표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
  18. UBL, pp. 278-280 참조. ↩︎
  19. Ibid., p. 279. ↩︎
  20. Ibid. ↩︎
  21. 라투르와 칼롱은 이 분화와 안정화 과정에 물질과 기호의 동원 혹은 등록enrolment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강조한다. 사회의 안정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비인간이 동원되는가―이 질문의 제기가 홉스의 정치이론에 라투르가 가한 가장 중대한 변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라투르의 이론을 참조하면서, 이 글에서 나는 비인간 물질과 매개의 역할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다만 ‘행위자들 간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있지 않고 그 분리는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라는 아이디어를 강조하려 했다. ↩︎
  22. 이준석은 잡지 『맥심』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반페미니스트의 선두 주자 비슷한 역할에 놓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리예, 「짤의 시대」, p. 234에서 재인용. ↩︎
  23. 「짤의 시대」, pp. 233-35 참조. ↩︎
  24. 그러나 번역이 개연적이라는 말은, 역으로 그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청년들에게 혐오와 불안의 정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이준석이라는 형상으로 모이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았다. 만약 그것이 필연적이었다면, 이준석은 그렇게 성실하고도 요란하게 번역의 노고를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

남자, 사람 친구가 될 수 있을까?(2)

―이연숙 평론가와의 대화 2부

1부: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악인의 서사/가시성의 경제

2부: 남성학의 부상/한국 남성성 분석/몸과 외모의 문제/실망에 관하여

남성학의 부상

희우
한편으론 최근 들어서 남성학이 부상하는 경향도 있는 듯합니다. 그런 관심사들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 같고요. 미묘한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전형적인 의미에서 약자나 소수자는 아니지만, 정체성 정치 혹은 담론에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던, 그리고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남성들에 대한 담론이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일본 비평가 스키타 슌스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안희제 님이 쓴 『증명과 변명』1도 그렇고 남성 작가가 남성을 주제로 쓴 글이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남성 서사랑은 다른 게, 어느 정도 페미니즘적인 감수성이나 인식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문제가 진단된다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당사자성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저술들이고요. 그리고 저는 문학평론가니까 발표되는 소설들을 따라 읽는데, 최근에 남성 인물,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소설들이 좀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젊은 소설가들에 의해서인데, 서장원이나 권희진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2 어쨌든 옛날의 남성 서사랑 다른 게 페미니즘적인 감수성이나 문제의식을 경유한 상태로 쓰인다는 점인 것 같아요. 소설이 꼭 페미니즘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페미니즘적 의제를 의식하고 반응한다는 의미에서요.

연숙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느꼈던 게 과거랑은 달리 페미니즘을 경유한 어떤 남성 서사, 남성 주체가 등장한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이거든요.
한국에서 남성성을 분석할 때, 주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해요. 이 연구들의 핵심은 한국 남성성이 스스로를 약자로 설정하고, 여성을 방패처럼 앞세우면서 동시에 이 여성들에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식민 제국 강대국의 이미지를 덧씌워 비난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여성에 대해 강자라는 사실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이런 자기기만적인 태도가 바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거죠.
정희진 선생님이 분석한 양공주의 사례가 있습니다.3 전쟁 이후에 한국에는 미군이 대거 유입됐고, 한국 남성들은 그 미군들에게 여성을 제공했습니다. 미군들이 지급한 돈으로 여성들이 생계를 유지했고, 그 여성들이 다시 남편이나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공주라는 여성 집단만큼 심한 낙인을 받은 사례도 없었죠.
남성들은 필요할 땐 이 여성들을 불러내 돈을 벌어 오게 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주라고 요구하면서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여성들은 더 이상 순결한 누이, 어머니,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짜 ‘한국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철저히 배제당했습니다. 이미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성들은 자신들이 이 여성들을 마치 포주처럼 이용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약자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여성을 선택하고 배제한 것이죠.
결국 이러한 남성성은 자신들이 가부장의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이라는 상징이 가져오는 모든 특권과 부산물들은 취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태도와 구조를 두고 그동안 한국에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해왔던 거죠.
근데 최근 세대의 남성성은 기존의 식민지 남성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상당히 달라졌는데, 그 중요한 계기가 바로 2015년 이후 강력하게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이거든요. 이전까지의 식민지 남성성은 주로 역사적 약자로서 여성을 방패 삼고 책임을 회피하는 형태였다면, 지금 세대의 남성성은 페미니즘과의 직접적 대결이나 갈등 속에서 형성되고 있어요. 즉, 페미니즘이 이들에게 어떤 정체성 형성의 ‘땔감’ 역할을 하게 된 거죠.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 이후 남성들은 이에 반응해 자기 성찰을 하거나, 자신을 과거의 남성성과는 다른 존재로 차별화하거나,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더 강한 집단적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죠. 오늘날 유행(?)하는 ‘이대남’, ‘인셀남’ 같은 남성성은 페미니즘이라는 맥락과 긴밀히 얽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희우
반동적으로 되는 거지요.

연숙
그렇죠. 그런 식으로 지금의 남성성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프레임하고 다른 게 있죠. 잘 아시겠지만, 요즘 래디컬 페미니스트나 인셀을 분석할 때 ‘인정 투쟁의 결과로 극우화되고 있다’는 설명이 거의 기본처럼 자리 잡았어요.4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에요.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고, 그걸 통해 자립하거나 동료 집단에게 소속감을 얻고 싶어 하니까 굳이 안 해도 될 일들을 스스로 만들어서 행동하는 거죠. 예를 들면, 어떤 운동에 참여한다든지, 아니면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와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고 느껴져요. 그런데 이런 현상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직접 접할 기회는 많지 않잖아요. 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작가들이고, 물론 그분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이런 주제를 깊게 얘기하기는 어렵죠. 또 소위 말하는 ‘이대남’이나 인셀 같은 부류는 대부분 SNS를 통해서만 보게 되니까 실제로 접촉할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관련 책들이5 꽤 많이 나오면서 이런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 같아요. 직접 만나기 어려운 세계를 텍스트를 통해서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 거죠.

한국 남성성 분석

희우
이제 한국 남성성에 대한 우리 나름의 분석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너무 큰 이야기지만 먼저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가속화되는 전통적인 상징의 붕괴……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러니까 공동체의 가치 같은 것도 상징이고, 가부장적 아버지 같은 것도 상징이고 모성애 신화의 어머니도 상징일 텐데요.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모델, 전통적인 의례나 공동체의 구속력, 이런 모든 상징적인 것들의 약화와 사라짐에 대해 말하자면, 이 문제가 여성들보다 남성들한테 훨씬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거든요.

연숙
여성들에게는 그런 전통적인 상징 자체가 이익이 된 적이 없으니까?

희우
네. 그렇기도 하죠. 어떤 공동체의 구속력이라든지 전통적인 어머니상이라든지, 이런 상징들이 약화되거나 사라진 게 오히려 여성들한테는 좋은 일이었을 수 있지요. 하지만 남성들한테는 그게 엄청난 주체성의 위기로 다가왔다는 거예요. 상징들이 사라졌다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누구를 롤 모델로 삼아서, 어떤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나 자신을 정체화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모두 미궁에 빠진다는 것인데요. 어쩌면 남성이 롤 모델 없는 삶에 여성보다 훨씬 취약한 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서 오는 주체적인 불안과 공포가 남성들의 방황이나 극우화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의 현실, 그러니까 양극화나 불평등의 심화라든지 불안정성, 이런 것들은 젊은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처한 현실이었는데, 혹은 여성들한테 더 가혹한 현실이었을 텐데 왜 남성들이 주체성에 더 큰 혼란을 느끼고, 극우화되었는가? 언급하신 칼럼에서 박권일 선생님도 이 문제를 다루셨더라고요. 짧은 칼럼이다 보니까 간명한 대답을 하셨는데, 젊은 여성들에게는 페미니즘이라는 대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종의 새로운 상징으로 작용을 했고, 젊은 여성들은 그 아래에서 모이거나 연대하거나 논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남성들한테는 그런 대의(제 표현으로 하자면 상징)가 부재했다는 진단인데요. 저는 그것도 맞지만, 박권일 선생님의 분석에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 ‘이념적인 빈곤’도 있지만, 아주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문화적·사교적 빈곤도 있어요. 이 두 가지가 물론 연동된 것이지만 동일한 건 아닌데요. 예를 들어 친구들이랑 전시를 보러 가거나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떠는 일이 꼭 무슨 대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많은 돈이나 시간이 드는 일도 아니고. 근데 그런 수준에서도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대안적 문화를 만들거나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도 잘 못 했다. 그러니까 주체적인 수준에서 이중의 빈곤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념적인 수준에서의 빈곤, 또 문화적·일상적 수준에서의 빈곤.
따라서 상징이나 가치의 모델이 없는 세계―이른바 ‘세계 없음(worldlessness)’―에 더 치명적으로, 노골적으로 직면했고, 거기에서 오는 불안과 고독과 공포를 페미니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극우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주관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 극우화는 이미 파괴된 전통적인 상징―권위주의적 통치자나 가부장적 아버지 따위―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또 주관적인/주체적인 차원에서의 상실감, 불안감 같은 게 남성들이 ‘역차별론’ 얘기할 때 강하게 작용한다고 봐요. 객관적으로는 입학이나 취업 등에서 남성들이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데도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러니까 객관적인 상황보다 불이익을 주관적으로 부풀려서 생각하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남성들이 주체적으로 공허하고, 그래서 불안이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졌다.

연숙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까 제가 식민지 남성성 얘기한 것에 이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 남성들 잘하는 게 남 탓인데요. 남 탓 천부적으로 잘하거든요. 이게 식민지 남성성의 어떤 특징이기도 해요. 내가 받은 폭력, 침해, 수탈, 고통이 분명히 있는데, 이걸 진짜 강자한테 뺏겼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데 극복이 안 되고, 패배를 인정하기도 싫으니까 옆에 있는 만만한 사람, 특히 여성에게 투사하는 방식이 되는 거죠. 즉,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 나머지 여혐을 하게 됐다는 거죠.
근데 요즈음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흥미로워요. 어떻게 보면 다들 일종의 ‘식민지 남성성’을 겪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이유를 딱 잘라 말할 순 없고, 누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지목할 수도 없어요. 각 나라, 각 사회마다 맥락이 다르니까요. 근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들의 극우화가 나타나고 있고,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고, 전반적으로 남성들이 마치 한국 남성들처럼 집단 PTSD 겪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다는 게 흥미로운 거죠. 주적을 설정하자면 결국 신자유주의고, 자본주의 체제가 (예정대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걸 인정하고 단합하려면 많은 걸 포기하고 다시 생각해야 하니까 쉽지 않겠죠.
한국 남성들 같은 경우, 기사만 봐도 지금 말씀드린 그런 ‘내가 불이익받고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두드러지게 드러나잖아요. 우리가 얼마 전에 읽은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봤듯이,6 남성들이 부모보다 못 산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그냥 경제적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자기 피해를 부풀리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현실적으로 객관적인 지표를 보면 여성이 훨씬 더 차별받고 있는 게 맞는데도 말이에요.

희우
그렇죠.

연숙
근데 주관적으로는, 나는 우리 아빠 엄마랑 비교했을 때 내가 받아야 할 만큼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왜 이렇게 됐냐고 생각하면 결국 여자들이 뭘 해서 이렇게 됐다고 결론 내리는 거죠. 자기 눈에 보이는 변수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인지 부조화에서 오는 갭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게 안타까운 거죠.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들이 이걸 잘 해결하고 있는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누군가는 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스트들도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불이익이나 고통 같은 걸 전부 남자들 탓으로 돌리잖아요. 물론 그게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세상을 하나의 축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결국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가 다 남자들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가게 되고, 남자들은 또 반대로 여자들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니까, 둘은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이대녀, 이대남들은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저 사람들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해결이 안 돼요. 한쪽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런 상황인 거죠.
근데 다만 페미니즘 같은 경우는 그래도 이념적이든 문화적이든 뭔가 정신 승리할 수 있는 방법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자기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방식들이요. 근데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은 그런 게 없어요. 디시인사이드 같은 커뮤니티 외에는 기댈 데가 없으니까, 훨씬 더 제 살을 파먹고 있는 상황인 거죠.

희우
네. 아버지처럼 살 수 없다는 거…… 그 문제가 핵심인 거 같아요. 제 생각엔 바로 그 문제에서 두 가지 새로운 유형의 남성성이 출현한 것 같아요. 식민지 남성성을 전제하지만 어쨌든 과거와는 뭔가 차별화된 두 개의 남성성이 나타난 거지요. 첫째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춘기 남성성’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요. 지금도 아주 많은 남자한테 어른 남자가 된다는 건 ‘처자식’을 갖는다는 거잖아요. 그게 삶의 목표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자기가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면 어른 남자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꼭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게 아니더라도, 그것을 비롯해 한 사회의 어른으로 거듭나는 전통적인 의례를 거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사춘기 상태에 머물게 되는 현상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 사춘기 주체성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식의 네트워크 속에서는 굉장히 무서운 괴물성을 갖게 될 수 있죠. 총 든 중학생처럼요. 서부지법 난동에서도 그런 불균형한 괴물성 같은 게 드러난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위압적인 논리로 무장하고 커다란 몸으로 폭력을 휘두를 때도 사실은 상처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일 없이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주체성, 이카리 신지 같은 주체성이 표면 아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거랑 맞물려서 나타나는 두 번째 주체성은 ‘냉소적 이성의 주체’라고 할 만한 건데요. 이건 전자(사춘기에 유예된 남성성)에 비하면 훨씬 영리한 관리자에 가까운 주체성으로, 전자의 불안과 공포를 자기 이익이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주체죠. 냉소적 이성이 그런 거잖아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거.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게 자기한테 이득이 되면 말하고, 혹은 그게 자기한테 편안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냥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 이 냉소적 이성을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게 이준석 같은 사람일 텐데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맞물려 있으면서도 다른 주체성이라는 거예요. 한 사람에게 겹쳐져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요. 서부지법에 가서 난동하는 애들하고 이준석이나 그 지지자들이 체현한 주체성은 다른 종류의 것이니까요. 또 극우 세력에 선을 그으면서 오히려 이준석의 포지션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듯한 착시가 일어나는데, 주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지자면 사실 오히려 전자가 후자(냉소적 이성의 주체)보다 훨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연숙
무척 흥미롭네요. ‘사춘기 남성성’은 어떻게 보면 퀴어 시간성 개념7과 신자유주의 아래 프레카리아트 주체8와도 연결되는 개념 같아요. 연장된 사춘기를 겪는, 몸만 커다란 ‘어른’이 어떻게 공동체를 향한, 타자를 향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부분은 남성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어른’이 못될 우리 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두 번째로 언급하신 ‘냉소적 이성의 주체’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준석 얘기하셔서 저도 이어서 말해보자면, 남초 커뮤니티에서 나온 말 중에 ‘wwe’라는 게 있어요. 사회적인 이슈가 터지고 사람들이 시위하는 걸 보면, 거기서 바로 냉소적으로 “이거 다 짜고 치는 거지”라는 식으로 댓글이 달리거든요. 그래서 “이거 다 wwe다” 이런 식으로 말해요.9
이번 계엄령 얘기 나왔을 때도 그렇고, 그 이후 시위 현장에서도 그렇고, 동덕여대 사태 때도 그렇고, 이런 일들 볼 때마다 방구석 커뮤니티 애들은 저거 다 짜고 치는 거라고 해버려요. 이게 완전 음모론적 사고죠. 근데 또 한편으로는 이준석 같은 사람들의 태도가 뭐냐면, “내가 사기 치고 있는 거 나도 다 알아. 나도 아는데, 이건 그냥 내가 정치인으로서 플레이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굴잖아요. 이 멘탈리티가 인터넷에서 흔히 만나는 20대 남성들, 그 집단의 핵심 속성인 것 같아요. 세상을 게임으로 보고, 나는 이 게임에 참여해서 내 몫만 챙기면 된다, 손해만 안 보면 된다 이런 식인 거죠.
희망 걸고 뭔가를 믿는 순간 손해 보게 되고, 도박하면 무조건 잃는다고 생각하니까 차라리 냉소하는 게 안전하다고 여기는 거죠. 냉소하면 잃을 게 없으니까요. 어차피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되니까. 이런 식으로 사고가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흥미롭게 본 텍스트가 있었는데, 김민하 평론가가 20대 남성들이 왜 시위에 안 나오냐는 질문에 대해 게임에서 그 원인을 찾더라고요.10 사실 이런 결론은 흔한 문화비평이긴 한데, 어쨌든 게임을 많이 한다는 게 상대방의 전략이나 전술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진다는 거죠. 상대방의 진심을 진심으로 안 받아들이고, 그냥 전술로 해석하고, 상대의 체력 게이지나 능력치를 보고 싸울지 말지 계산하는 식으로만 사고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치나 정의 같은 추상적인 개념보다 이길지 질지, 손해 볼지 안 볼지가 훨씬 중요한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사람들 바꾸는 게 진짜 어려워요. 왜냐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뀌지 않거든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이건 일종의 중독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거죠. 사고방식이 완전히 게임에 절여져서, 세상을 게임처럼 보고, 이런 프레임에 중독돼 있다면, 이걸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 중독을 멈추게 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희우
말씀하신 것처럼 냉소적 이성을 탑재한 사람들은 변화의 여지가 거의 없죠. 그리고 한편으로 그 냉소적 이성 때문에 남성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게 어려운 일이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어서, 군 복무의 어려움은 남자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할 때 늘 꺼내는 레토릭이잖아요. ‘남자들은 가장 꽃다운 나이에 군대 가는데 여자들은……’ 이런 이야기. 또 한국 남성성 분석할 때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군사주의인데요. 한국 사회 전체가 군사주의적 사회라는 분석도 많이 있고요. 그렇지만 미시적인 차원까지 들여다보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군대에 흔히 있을 법한 병사를 떠올려 보자면요. 여성 간부에 대해 뒤에서 성적인 농담하고, 힘 약한 선임들 무시하고, 가끔 후임들한테 욕하고, 힘든 업무에서 미꾸라지처럼 도망 다니는…… 이렇게 흔히 있을 법한 병사는 병사들 사이에 인기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어떤 매력적인 남성성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사실 이 병사가 하는 그 행위들은 군법에 의해 금지된 거잖아요. 위반인 것이죠. 또 현판에 적혀 있는 ‘국군의 이념’을 진짜 진지하게 믿는 20대 병사가 있을까요? 사실 그 군사주의 이념의 명목적인 내용을 진짜로 믿는 주체는 없고, 군대에서 여러 더러운 꼴을 보면서, 오히려 모두가 거기에 더욱 냉소적인 거리를 취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조직이 유지될 수 있는 건데, 만약 모든 병사한테―특히 신자유주의적인 자기 경영 마인드를 탑재한 20대 청년들에게―군사주의 이념과 군법을 정말로 엄격하게 지키고 내면화하라고 하면 조직이 붕괴하거나 폭발할 테니까요. 그래서 적당한 위반과 군사주의에 대한 냉소적 거리는 오히려 군대 조직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고 심지어 군대에서 함양되는 덕목이라는 거예요.
반대로, 해병대 박정훈 대령의 사례처럼, 오히려 군대 조직이 참을 수 없는 것은 ‘참군인’이죠.
그러니까, 한국 남자들이 군대에서 정말로 배우는 것은 어떤 남성성인가? 저는 군 복무가 20대 초반 남자애들 모아놓고 하는 강도 높은 남성성 훈육의 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훈육의 내용은 말 그대로의 군사주의를 내면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위반의 감각을 익히게 하는 것이죠. 필요에 따라 군사주의를 이용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하는 위반의 감각. 그 미시적 감각 속에 ‘남성성’이 있는 거죠. 어떤 법은 지켜야만 하고, 어떤 법은 위반해도 되는가? 누가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인가, 누가 무시해도 되는 이빨 빠진 호랑이인가? 어떻게 성적인 농담을 해야 하는가, 어떤 선은 넘으면 안 되는가? 기타 등등…… 이게 말씀하신 게임의 사고방식과 관련이 될 것도 같습니다.

연숙
네, 저도 너무 동의하면서 들었고요. 저희가 얼마 전에 같이 봤던 맥스 디킨즈의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도 지금 말씀하신 거랑 연결되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남자들이 사실 진심으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게, 중요한 건 진심이 아니라 농담이라는 거죠. 농담을 하면서 어디까지 상대가 받아줄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남자답게 선을 넘고, 어디까지 희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핵심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다 같이 선을 넘어보는, 일탈의 경험들이 오히려 남성들 사이의 결속을 더 강화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사실 많은 퀴어 이론가들이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도 지적했던 부분이고요. 결국 그게 남성들이 서로 얼마나 끈끈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농담의 대상이 되는 약자들, 특히 여성들은 사실 이 남성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고, 그냥 남자들끼리 농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에요. 진짜 중요한 건 그 농담을 통해 남자들끼리 얼마나 결속하고 유대를 느끼느냐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런 게 당연히 동성 사회적이라고 얘기되는 거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제가 아까 얘기한 디시인사이드라든지, 이준석에 대한 남성들의 열광도 결국 같은 결인 것 같아요. 이준석이 공중파에서 그런 농담의 감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걸 보면서 엄청난 해소감과 쾌감을 느끼는 거죠. 그리고 그걸 보고 나도 웃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자기 남성성을 확인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요.

희우
네, 그래서 저는 정면대결식의 비판, 이를테면 군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면 싸움,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식이 안 통한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면 사실 진짜로 그런 주체, 군사주의적 주체는 없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주체적인 차원에서 궁지에 몰린 남성들에게는 또 다른 측면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상황에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계산 능력이 부재하는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멍청해 보이는 주체들이 있잖아요. 서부지법에서 난동한 애들 같은. 그리고 이것은 일정 부분 페미니즘의 역설적인 효과였을 텐데, 젊은 남자들이 세계에 냉소적 거리를 취할 수 없게끔 강제했다는 거예요. 전투적으로 만들었다는 거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땔감’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이 젊은 남성들의 극우화에 큰 역할을 했지만(이 말이 오해되지 않기를), 그래서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했다는 거예요. 왜냐면 누군가 자기 세계에 냉소적 거리를 취하는 모순적 태도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되니까요. 아무튼, 오히려 그 사람들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연숙
맞아요. 결국 우리가 말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게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고 다 섞여 있을 수밖에 없죠. 말씀하신 것처럼 연약함과 안쓰러움, 동시에 냉소적이고 합리화에 능한 태도가 하나의 사람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게 현실일 거예요. 『증명과 변명』에 대해 얘기하신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 ‘인생이다’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단순히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사이 어딘가에 낀 채로 계속 머물러 있는 상태인 거죠.
저도 사실 20대 시스 헤테로 남자들이랑 직접 얘기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텍스트나 기사로 접하는 이미지들이 전부일 때가 많은데, 막상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동생 같은 경우를 보면 인터넷에 나오는 전형적인 20대 남성상하고는 또 다르잖아요. 그렇다고 그들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게, 밤에는 또 어떤 댓글을 달고 있을지 모르고, 그런 양가적인 지점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친구들이 언젠가 자기 상황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끔, 최소한 자기 경험을 이해할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뭔가 이론적인 쿠션을 마련해두는 게 진짜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그 언어가 없어서 냉소로 흘러버리고, 농담으로 넘기고, 피해의식에만 갇혀버리는 건데, 그걸 풀어낼 수 있는 틀이 있다면 조금은 다른 방향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게 쉽게 될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중요하겠죠.

몸과 외모의 문제

희우
이제 조금 시선을 옮겨서 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몸과 시선의 문제, 이건 거시적이거나 구조적인 분석에서는 흔히 말하지 않는 문제인 것 같거든요.
아까 전통적인 상징의 붕괴 얘기했는데, 사실 그 문제는 엄청나게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죠. 거슬러 올라가면 청년기 마르크스가 이미 한 얘기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목가적이고 낭만적이고 종교적이고 예술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들이 ‘이기적인 계산의 차디찬 얼음물’에 처박힌다는 것이었지요. 그 말은 ‘다른 가치들은 모르겠고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식의 태도가 지배적으로 된다는 건데요. 이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 잘 해당하는 말이지만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이념이나 상징이 붕괴하면, 돈만 남는 게 아니라 또한 몸이 남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이 돈 아니면 몸으로 환원된다는 거죠. 먼저 돈만 남는다는 거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 앞에서 자기를 분류하고 결정하게 된다는 거지요: ‘너 부자야 아니야? 너 이거 소비할 능력이 있어 없어? 소비할 능력이 있으면 여기서 놀고, 아니면 입 다물고 꺼져.’
그런데 돈의 문제뿐만 아니라 몸의 문제가 남게 되는데, 몸의 문제가 사람들에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죠: ‘너 남자야 여자야? 젊어 아니면 젊지 않아? 아름답고 멋지고 잘 가꿔진 몸을 가졌어, 아니면 그렇지 못한 몸을 가졌어?’ 남자들이 진짜 돈만 생각하고 그러는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점점 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게 잘생긴 남자, 멋진 몸을 가진 남자에 대한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자조적인, 때로는 굉장히 심각해지기도 하는) 어떤 질투심이나 선망 같은 거잖아요. 매노스피어에서 말하는 ‘알파메일’이 그냥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자가 아니라 잘생기고 잘 발달한 근육질 몸을 가진 남자인 것처럼요.

연숙
그렇죠.

희우
사실 한국 남자들이 여성들에 비해 꾸밈을 안 한다, 안 가꾼다고 말하지만요. 물론 여성들이 외모에 관해 받는 압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떤 통계를 보면 한국 남성이 전 세계 남자들 중에서 화장품 소비를 가장 많이 한다는 거예요.11 피부관리를 위해서요. 우리가 흔히 돈 없으면 ‘가진 건 몸뿐’이라고 하는데 그 몸이 어떤 몸인가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어요. 그게 젊은 몸이냐 아닌가? 멋진 몸인가 아닌가? 잘 가꿔졌는가 아닌가? 그 지점에서 우리가 같이 읽었던 서장원의 소설 「리틀 프라이드」가 흥미로운 거였죠. 선생님도 재밌게 읽으셨다고 하셨지만, 전 그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게 남자/여자, 성소수자/시스젠더 이성애자 같은 식으로 (정체성을 축으로) 나뉘거나 페미니스트/안티 페미니스트 입장의(정치적 입장을 축으로) 분열만 그려지는 게 아니고 또 다른 한 축의 나뉨이 그려진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멋진 몸을 가진 사람/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나뉨이지요.
그 소설의 화자는 트랜스젠더 남성(FTM)인데, 키가 160대 중반 정도 되고, 자기의 남성적인 매력에 전혀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퀴어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당연히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거기서 웃옷을 벗고 노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죠. “땀으로 번들거리는, 잘 다듬어진 예쁜 몸을 나는 조금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봤다.” 이런 구절이 있거든요. 화자는 그 지점에서 오스틴이라는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데, 직장 동료인 오스틴은 키가 화자보다 더 작은 남자예요. 하지만 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한테 그나마 호감을 살 수 있는지 아는 노련한 인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나중에 이 남자가 여성 혐오적인, 안티페미니즘적인 발언을 해서 화자가 확 거리를 느끼게 되거든요. 두 인물이 대립적인 관계가 되는 이유는 물론 화자는 페미니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데 오스틴은 안티페미니즘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화자가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매력적인 몸을 가진 사람들/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할에서 오스틴이 자신과 같은 편에 속한다고 느끼기 때문인 거죠.

연숙
그렇죠, 이 매력이라는 부분이, 그러니까 외모를 말씀하시는 거죠?

희우
대체로 그렇죠. 제 생각엔 단순히 외모로 환원되지 않는 매력의 복합성이나 창발성을 사고하는 게 동시대 문화를 이해하고 비평할 때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 문화 안에서 차이를 만들기 위해 꼭 검토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리틀 프라이드」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매력은 외관상의 ‘정상성’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고 이 정상성이라는 기준이 매력을 굉장히 획일적인 규범으로 만들고 있어요. 소설 속 오스틴은 외견상 멋지지 못한 남자인데 그래도 노련한 유머나 화술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으로 나와요. 당연히 누군가의 매력은 그런 문제까지 포함하는 거겠죠. 자신감, 유머, 화술, 매너, 분위기 등등. 그렇지만 결국은 오스틴이 사지연장술을 받잖아요. ‘내 삶의 문제는 그거야, 내가 키가 작은 남자라는 거’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사지연장술을 받게 되는데, 많은 경우 화술이나 유머 등의 요소도 외모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거겠지요. 특히 연애의 문제, 젊은이들의 성적 관계라는 문제에서는 그렇게 되는 거지요.

연숙
그렇죠. 이 매력이라는 게 예전부터 희우 님이 관심 갖던 주제이기도 하고요.12 좀 더 넓게 보자면 사실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매력의 종류는 정말 무수히 많잖아요. 그런데 결국 가장 지배적인 게 외모고,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이대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외모가 핵심이에요. 특히 남자로서, 여자를 상대로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외모 말이에요.
근데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제가 며칠 전에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에 다녀왔거든요.13 벌써 3회째라 3년째 이어지고 있는 행사인데, 거기서 한국 섭식장애 연구 현황을 발표하는 세션이 있었어요. 여러 발표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게 강의영 님의 「여성 섭식장애 경험과 페미니즘의 내재화」(2023)이라는 제목의 연구였어요. 당시 강의영 님이 보여주신 PPT에서 논문에 등장하는 인터뷰를 몇 문장씩 옮긴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인상 깊었거든요.
그 인터뷰들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게, 20대 여성들, 특히 페미니스트인 여성들에게도 외모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문제라는 거였어요. 사실 남성들보다 여성한테 가해지는 외모 압력이 훨씬 더 심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여성이 자기 경험을 재해석하면서 “내가 어릴 때 뚱뚱하다고 놀림당하고 상처받아서 그때부터 섭식장애가 시작된 것 같다”는 식으로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는데, 그 안에 이미 자기들도 페미니스트로서 인식하고 있는 모순이 있더라고요.
예컨대 나는 페미니스트고,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가부장제 문화에서 훈육된 결과라는 걸 아는데도, 왜 계속 외모를 신경 쓰게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는 거죠. 너무 오랫동안 외모를 차등적으로 바라보는 기준에 길들어 있어서, 다른 건 공부하면 이해가 되는데 외모만큼은 아무리 알고 있어도 극복이 잘 안 되는 거죠. 퀴어 이론을 읽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외모지상주의가 해롭다는 걸 분명히 아는데도 거기서 벗어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예요. 그래도 결국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요. 결국 이게 다 정상성의 문제잖아요.
남자들도 결국은 그냥 어떤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남자로서 매력을 갖고 싶어 하는 거고, 그러니까 남자로서 구실을 하려면 어느 정도는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여자들도 비슷하겠죠. 근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꼭 그렇게 안 살아도 되지 않나 싶어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이미 많은 인셀 분석에서도 나오잖아요. 이 남자들이 특정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라, 여자를 그냥 자원이나 재화처럼 생각하면서 인기 얻고 싶어 하는 거고, 그래서 외모를 바꾸고 싶어 하는 거고.14 근데 이런 종류의 욕망을 좀 포기할 수는 없을까, 그냥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불가능하겠지만요.15

희우
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그런 강박이 완화된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심해지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요. 물론 페미니즘에서 탈코르셋 운동도 있었고 저도 그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워낙 꾸밈에 대한 압력이 여성들한테만 엄청나게 부과되어왔던 거니까요.
하지만 지금 변화가 있다면 오히려 남성들도 점점 외모에 더 집착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물론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식에도 큰 성차가 있겠지만요.

연숙
이게 사실 답이 없는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이미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서 살고 있잖아요. 디지털 기기들이 너무 일상화돼 있고, 핸드폰만 켜도 24시간 내내 릴스나 틱톡 같은 데서 매끄럽고 완벽하게 다듬어진 몸들을 계속 보게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욕망이 그런 이미지들에 계속 피드백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욕망 자체가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재구성되는 거죠. 결국 우리의 욕망이 스스로 진화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이미지들에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벗어나기가 정말 어려운 거고요.
그런데도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은, 그냥 그런 거 그만 좀 보자는 거예요. 물론 말이 쉽지, 그만 보는 게 쉽겠느냐마는, 백날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론 읽어도 특히 20대들은 그런 데 예민할 수밖에 없고, 저도 사실 그랬거든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저도 2~3년 정도 섭식장애를 겪었고, 한참 동안 내 ‘부드럽고 말랑한, 여성적인’ 몸에 대한 생각으로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시기를 보냈어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키 크고 잘생긴 남자들 보면 부럽죠. 희우 님한테도 자주 말했지만, 저런 사람들은 태어나서 여자 만나려고 노력이라는 걸 해봤을까 싶은 생각 들 때마다 진짜 열 받거든요…….
근데 이런 열 받음은 결국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같아요. 계급 투쟁도 결국엔 질투에서 출발하는 거잖아요. 내가 못 가진 걸 남이 가졌을 때, 빼앗고 싶고 심지어 파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게 어떤 형태로든 ‘운동성’으로 나타나는 거고요. 여기서 말하는 운동은 무브먼트가 아니라 그냥 인간의 본능적인 액티비티 같은 거죠. 이런 감정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인간한테 너무 자연스러운 거니까. 다만, 이런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인정’ 받지 못하는 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그냥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이런 문제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요.

희우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

연숙
그러니까, 그 정도로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물론 한창 예민한 상태에서는 그게 정말 어렵고, 일단 그 사고에 빠져 있으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아요. 저도 그걸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단순히 남자들 얘기만이 아니라, 그냥 전반적으로 외모라는 게 일종의 정신병처럼 작동하는 것 같아요. 외모 정신병은 진짜 말 그대로 정신병이라서, 분석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냥 그만 생각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요. 제가 아까 말한 ‘이 욕망을 포기, 철회, 중단하면 안 되나’라는 게 결국 그 얘기예요.
『섹스할 권리』를 쓴 아미아 스리니바산이랑 『피메일스』를 쓴 안드레아 롱 추가 딱 이 주제로 한 번 부딪힌 적이 있어요. 『섹스할 권리』에 실린 「섹스할 권리」라는 글 보면, 남자들이 특히 백인이고 금발에 가슴 큰, 아주 전형적인 트레이시 같은 여자랑 자고 싶어 하는데, 그런 여자들이 자기한테 관심 없다고 느끼면 열 받아서 총기 난사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근데 스리니바산은 여기서 문제를 욕망 자체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이 그런 여자를 원하고, 또 그 욕망이 좌절됐다고 해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미 비틀려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욕망이라는 게 너무 성별 규범이나 정상성에 갇혀 있어서, 남자들끼리 관계 맺는 것도 어렵고, 여자들에게도 끊임없이 평가를 하고, 그 평가 기준을 자기 자신한테도 들이대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욕망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욕망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죠.
그랬더니 안드레아 롱 추가 그건 위험한 발상이라고 반박해요.16 그렇게 욕망을 바꾸라고 하면, 오히려 소수자들이 가지고 있는 ‘뻔한 욕망’,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정상성에 가까운 욕망조차도 포기하라는 말이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라든지, 트랜스 여성이나 트랜스 남성 같은 사람들에게 그 말이 더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거죠. 왜냐면 그들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상성’을 향한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바꾸라고 요구하는 게 결국 소수자들한테 더 가혹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욕망을 바꾸라거나, 양보하라거나, 욕망을 해체하라는 식의 말이 실제로는 불가능하고, 때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런 논쟁을 보면, 우리가 쉽게 ‘욕망을 포기하자’고 말하는 것도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다시 생각하게 돼요.

실망에 관하여

희우
음…… 안 그래도 안드레아 롱 추의 『피메일스』17를 최근에 재독했는데, 그 책 뒷부분에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니까 욕망을 부정하거나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내 욕망을 끝까지 따라갔을 때 어디에 부딪히게 되느냐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선생님이 그 책에 발문도 쓰셨지만, 그 책 뒷부분에 ‘실망’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나오잖아요. 저는 그 실망에 대한 논의에 무언가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봐요. 저는 사실 비평 쓰면서 몇 가지 개념 주위를 한 시기 동안 배회하는데, 한동안 매력에 대해서 많이 썼지만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실망’ 혹은 ‘실망 이후’에요.
이 주제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와 어느 정도는 느슨하게 연결이 될 것 같은데요, 그 책에서 물론 롱 추가 말하는 실망이라는 건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겪었던 경험하고 불가분한 것이겠죠. 자기는 여성이 되면, 자기가 욕망했던 그 여성의 몸을 얻으면 구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되어 보니까 아니라는 거잖아요.

연숙
‘내 새로운 보지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 글 말씀하시는 거 맞죠?

희우
네. 그리고 그 뒷부분에 실망에 대해 논의하는데…… 거기서 롱 추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상성 따위에 대한) 헛된 희망을 품는 것까지 포함해서, 우리 자신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좀 망가져 있고 못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 그런 자신과 계속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좀 신기하게도, 그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제시하는 대안하고도 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거기서 저자인 스기타가 일본 남성들에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알파메일’이 되지 못한, 약자 남성에게 제시하는 두 가지 대안인데요. 첫 번째는 좌파가 되라는 것, 이건 정치적 이념을 가지라는 말이겠지요. 자신의 불행을 더 약한 존재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지 말고, 체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라. 그러고 나서 두 번째 대안을 제시하는데, 저는 이 부분에서 그 책이 차별화된다고 느꼈고, 진짜 현실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염려한다고 느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대안은 요약하자면 ‘그냥 버티는 삶을 살아라’라는 것인데요. 남을 해치지도 말고 자기를 해치지도 말고 그냥 버티는 삶을 살아라. 첫 번째 대안, 즉 이념을 갖고 정치적 투사로 살아라는 것 자체도 일종의 명령일 수 있는데, 그 명령의 수행에도 실패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이 투사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럼 투사조차 되지 못하는 삶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에 대한 대답이 ‘버티는 삶’인 것인데요. 아까 제가 젊은 남성들이 이념적인 수준에서도 빈곤하고 일상적인 수준에서도 빈곤하다고 했잖아요. 저자가 제안한 두 가지 대안이 이 두 가지 빈곤에 각각 대응하는 거지요. 이념적인 빈곤에 대한 대답은 ‘좌파가 돼라’는 것이고 일상적인 빈곤에 대한 대답은 ‘버텨라’. 그런데 이게 진짜 빈곤한 상태 그대로 버티라는 뜻은 아니고 소소한 의미를 찾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인데……

연숙
네, 저도 계속 쭉 동의하면서 듣고 있었어요. 제가 아직 읽지 못한 책이지만 하나 떠오르는 게 있네요. 얼마 전에 하버드 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제목이 『정치적 실망(Political Disappointment)』이에요. 이 책의 저자 사라 마커스는 실망을 “시기적절하지 않은 욕망”으로 정의하고, 이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실현되지 못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이 지속되는 상태라고 설명해요. 이러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과 집단적 실천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는 거죠.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실망은 비전을 품고 있는 어떤 장소일 수 있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앤 츠베트코비치의 『우울: 공적 감정』에서도 이런 부분이 나와요. “정치적 우울에 대한 논의는 실망을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급진적 비전과 삶의 방식이 끈질기게 지속된다는 점을 스스로 상기해야 하는 필요에서 비롯한다”18, “정치적 실패 이후 실망을 견뎌낼 정동적 에너지의 필요”19……. 실망은 그 자체로 엄청 큰 마이너스 에너지인거죠. 그러나 마이너스 에너지도 분명 에너지고요. 이걸 타자를 향한 분노, 혐오로 확 돌려버리는 대신에 붙잡고 소화하는 것도 굉장히 큰 공간과 노동을 필요로 하고요.
요즘 같은 시국이라서 그런지 다들 이렇게 너무 크지 않고, 그냥 여진처럼 남아 있는 감정들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실망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도 좀 달라질 것 같고요. 어쨌든 실망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국 내가 한 번 기대를 걸었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실망이 따라오는 거고, 그 지점에서 오히려 희망적인 전망도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 내가 한 번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기대를 걸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뭔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려고 했지만, 막상 가보니 별거 없었고.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아 있다는 거, 그 자체가 의미가 될 수도 있죠. 내가 한 번은 다르게 살아보려고 했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극적으로 변하는 건 아니죠. 애초에 원래 내 인생이 그런 거니까. 결국엔 자기 인생이 그렇다는 걸 받아들이는 연습 같은 건데, 이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윗세대는 비평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우리 세대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다는 현실과도 연결돼요. 그래도 우리는 어쨌든 한 번은 비평으로 살아봤고, 불평하면서 글 쓰는 재미도 느껴봤으니까 그냥 계속 하는 거고요.
근데 이런 모습이 윗세대 눈에는 완전 패배감의 증상처럼 보일 거예요. 무력하고, 실망에 안주하는 모습으로요. 사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는데, 그걸 하려다가 실망해서 그냥 주저앉아버린 거니까요. 근데 여기서 저는 진짜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무력감과 패배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 실망 속에서도 내가 한 번 다르게 살아보려 했다는 걸 기억하는 것 사이의 차이요. 이게 구분하기 쉽진 않지만요.
예를 들어, 말씀하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제시하는 대안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너무 기대하지 말고, 인셀이 됐다고 해서 남들 몇 명 죽인다고 네 인생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냥 살아라, 이런 식의 조언이요. 얼핏 들으면 굉장히 무력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사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그냥 살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을 거예요. 오히려 그게 자기 변형의 과정일 수도 있고요. 저는 이런 걸 단순히 수동적으로 철회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양보하고, 포기하고, 물러서는 것도 하나의 운동성이라고 봐요. 겉보기엔 진보가 아니라 퇴보처럼 보여도, 사실 뒤로 가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실패하고 실망하는 것조차도 거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거고, 단순한 무력이나 패배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이 저한테는 중요해요.

희우
맞습니다. 실망이 단순히 무기력이나 패배감과는 다르다는 말이 참 좋네요.
실망 이후 혹은 ‘버티는 삶’은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해결책인데, 이 대안을 더 구체적으로 우리 삶으로 끌어와서 논의를 확장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버티는 삶이라는 게 뭘까? 거창한 이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물론 좋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어쨌든 오늘 하루, 이번 일주일 나름 의미 있게 보냈다, 했을 때 그 의미란 무엇일까? 이념에 따라 사는 사람도 어쨌든 일상을 작은 의미로 채울 필요가 있잖아요. 아니면 삶이 망가질 테니까.
사실 인셀 담론들도 너무, 남자들이 연애를 하느냐 섹스를 하느냐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증명과 변명』을 읽고, 또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를 읽고 든 생각은 이건데요. 오히려 집중할만한 문제는 우정 혹은 친구 만들기가 아닐까? ‘오늘 그래도 살 만했다’라고 느끼는 건 우정이나 친구 만들기에 달린 문제 아닐까? 또 친구 관계에서는 외모가 덜 중요하잖아요. 물론 사춘기 때나 20대에는 우정도 외모에 좌우될 수 있지만 그래도 연애에서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문제잖아요.
근데 어쨌든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남자들이 그런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능력도 많이 망가져 있기는 하죠. 그래서 더 이런 생각이 드는데, 지금 남자들이 주체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면 오히려 ‘친구-되기’가 답일 수도 있겠다. 서열 관계나 냉소적 농담으로만 가득한 뒤틀린 친구 관계 말고,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친구 만드는 법을 배우기. 남성들의 관계가, 이성애자 남성들끼리의 관계라고 해도 꼭 위압적인 남성연대나 ‘알탕 문화’처럼 될 이유는 없잖아요. (갑자기 선생님이 쓰신 「비우정의 우정」에서 동질성이 아니라 차이를 전제하는 우정에 대해 말씀하신 게 떠오르네요20.) 해답이 엉뚱한 곳에서 나올 때가 많잖아요. 예를 들어 나이든 친척이 태극기 집회에 너무 열심히 참여하고, 그 논리에 세뇌돼있는 듯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임영웅에 빠져서 더 이상 태극기 집회를 안 나가는 것처럼요. 우리가 그 사람이 태극기 집회에 경도되어 소리 지를 때는 답이 없다고 느끼는데, 도저히 못 바꾸겠다 싶은데 그게 엉뚱한 방식으로 해소되기도 하는 거잖아요. 왜냐면 결국 그 사람이 완고한 논리로 무장하고 경도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진짜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불안이나 외로움, 고독 같은 것을 해소하려다가 그렇게 된 거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물길을 터주면, 비가 많이 올 때 개울의 형태가 변하듯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죠.

연숙
네, 맞아요. 친구 만들기라는 게 사실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가장 일상적인 사회적 활동 중 하나인 거죠. 굳이 ‘친구’라는 이름일 필요도 없고, 꼭 깊은 관계가 아니어도 되는데, 그 기본적인 사회적 연결 자체가 어려우니까 결국 ‘친구 없음’이라는 식으로 그 결핍이 표면화되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꼭 친구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오프라인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게 최소한 인터넷에서 계속 여혐 커뮤니티 들락날락하고 댓글 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런 온라인 활동도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실망한 자기 자신을 견디기 위한 방식일 수 있겠죠. 일종의 감정 관리 같은 거니까요. 근데 그게 결국은 더 자기 파괴적이고, 실망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좀 더 회복적인 방식으로 실망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망이 꼭 파괴적일 필요는 없는데, 문제는 그걸 다르게 감당할 수 있는 루트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거죠.

희우
맞아요. 롱 추의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리를 발견했는데요. 롱 추가 말하는 바는, 실망이 두 번 일어난다는 거예요. 두 번의 실망에 대한 이 논의가 말씀하신 ‘회복적인 방식’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실망은 내가 너무 간절하게 원했고, 구원이 있을 줄 알았고, 뭔가 삶이 나아지리라고 기대를 걸었던 그 X가 실제로는 별거 아니고,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인데요. 롱 추가 드는 예는 (물론 성전환도 있지만) 가령 연인, 정치적 신념, 운동, 예술 형식, 한 벌의 옷 등이에요.21 저 옷을 가지면 삶이 더 좋아질 거야, 이런 기대나 희망을 품게 하는 X, 그것이 구원을 주지 않고 균열이 가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느끼는 첫 번째 실망.
일단 첫 번째 실망이 있고,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실망이 뒤따르는데요. 롱 추는 이 두 번째가 더 중요한 거라고 말을 해요. 두 번째 실망은 이런 거예요. 내가 실망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네. 내가 상처받았고, 마음이 꺾였는데 인생은 그대로네. 이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하네. 이게 두 번째 실망, 말하자면 실망에 대한 실망인 거죠. 한국 시에서 상징적인 시구를 가져와보자면 첫 번째 실망이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22)는 말로 표현되는 종류의 것이라면 두 번째 실망은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황인찬, 「건축」23) 같은 말로 표현되는 종류의 실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잔치는 예전에 끝났지. 하지만 나는 계속 살아 있는걸?
반동적인 폭력이나 충동 같은 것은 첫 번째 실망과 두 번째 실망 사이에 있는 반응이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 실망까지 거치고 나서야, 주체는 이 실망스러운 것들, 실망스러운 나 자신과 그냥 계속 살아야 한다는 걸 수용하게 되지요. 근데 이 실망이 말씀하신 대로 그냥 어두침침하고 무기력한 것만은 아닌데, 롱 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마 이게 책의 마지막 문장일 텐데, “실망의 다른 이름은 필시 사랑이다.” 그러니까 실망 이후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자란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매혹이나 선망과는 많이 다른 사랑인 거죠. 오히려 인내나 보살핌에 의해 지탱되는 사랑일 텐데……

연숙
맞아요. 근데 정말 어려운 일이죠.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사실 이런 걸 사랑이라고까지 부르려면 정말 큰 감정적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라서, 저도 이런 종류의 실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걸 모두에게 권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실망하고 그냥 살라고 말하는 게, 특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욕망을 변형해야 하니까 어렵죠. 그리고 이게 단순히 실망 하나에만 걸려있는 게 아니라, 사실 사랑이나 욕망이라는 게 결국 세상 전체를 포함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때, 그걸 통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게 되고,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도 결국 어떤 가치 체계 안으로 진입하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런 걸 그만 생각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집중한다는 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살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죠.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믿어왔던 걸 다 내려놓고,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그게 달성되지 않아도 여전히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자기 수양이 필요한 거고, 그래서 쉽지 않죠.
이런 사고방식이 자칫하면 영성이나 종교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그렇게라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비판적 담론에서 지배적인 메시지들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흐르고 있으니까요. 너희는 이미 망가졌고, 없어져도 된다는 식의 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소멸 외의 방식으로 견디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잖아요. 앞으로 더 그럴 거고, 왜냐하면 그렇게 비판을 외치던 사람들은 곧 사라질 테고, 우리는 결국 이 인간들이랑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우리 자신이 저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들은 필요하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단위의 이론 같은 것들이겠죠. 일상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기술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종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교리처럼 굳어져서도 안 되는 거고요. 『우울: 공적 감정』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건 뜨개질이나 일기 쓰기 같은 단순한 습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습관은 “‘지금 여기’의 유토피아”의 형식을 보여주기도 해요. 이는 “미래를 지금 이 세계를 벗어나 도피하거나 이 세계를 대체하는 페티시로 취급하지 않는” 그런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24

희우
벌써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대화가 많이 길어졌으니 이만 줄여야겠어요. 마지막 인사는 연숙 님의 「비우정의 우정」에서 가져온 문장으로 갈음하겠습니다. “비우정의 우정이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너를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25 제가 연숙 님을 좋은 대화 상대로 느끼는 것은 우리가 비슷해서라기보다는 아주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사이엔 비슷함 속에 약간의 다름이 있는 게 아니고, 큰 차이 속에 아주 미세한 같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숙 님과 대화한 몇 년의 시간 동안, 그리고 이번 대화를 통해서도 저는 이 큰 다름과 작은 같음을 가지고 친구와 놀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 대화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화를 읽어주실 분들도 감사합니다.

  1.  안희제,  『증명과 변명』, 다다서재, 2024. ↩︎
  2. e.g. 서장원, 「리틀 프라이드」(『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상어」(『문학들』 2024년 겨울호); 권희진, 「고쳐 쓰다가」(『Axt』 2024년 3/4월호), 「열다섯 가지 습관」(『Littor』 2024년 10/11월호) ↩︎
  3.  정희진,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2017, 교양인. ↩︎
  4.  박권일, “‘이대남’이 이상해진 이유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마지막 수정: 2024-02-23, 한겨레21 ↩︎
  5. 『인셀 테러: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로라 베이츠, 성원 옮김, 2023, 위즈덤하우스)가 대표적이다. ↩︎
  6. 김원진, ““부모보다 못 산다” 느끼는 남성, ‘남자가 차별받는 세상’으로 생각한다고요?”, 마지막 수정:  2025-01-24, 경향신문, ↩︎
  7. Halberstam, J. (2003). What’s that Smell? Queer Temporalities and Subcultural Lives. International Journal of Cultural Studies, 6(3), 313-333. (Original work published 2003) ↩︎
  8. 제니퍼 M. 실바, 문현아 역, 『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2020, 리시올 ↩︎
  9.  “WWE(은어)”, 나무위키,
    ↩︎
  10. [강연록] “좌파-오타쿠 정치는 가능한가?”, ↩︎
  11. 차민지 기자, <남성 스킨케어소비 세계 1위…화장품업계, ‘남성뷰티 강화한다’> 연합뉴스, 2024. 01. 07.
    https://www.yna.co.kr/view/AKR20240105130800030 ↩︎
  12.  “매력의 두 문제―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매력의 경제학”, ↩︎
  13.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인스타그램 ↩︎
  14.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2025) 참고. ↩︎
  15.  테드 창의 단편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당신 인생의 이야기』 수록) 참고. ↩︎
  16.  Andrea Long Chu and Anastasia Berg, “Wanting Bad Things: Andrea Long Chu responds to Amia Srinivasan”, July 18, 2018, The Point. 이연숙은 이 글의 한국어 번역을 ‘소스충’의 번역으로 접했다. “나쁜 것을 원하기 – 안드레아 롱 추가 에이미아 스리니바산에게 답하다 (안드레아 롱 추, 아나스타샤 버그)”, ↩︎
  17. 안드레아 롱 추, 『피메일스』, 위즈덤하우스, 2023. ↩︎
  18.  앤 츠베트코비치, 박미선, 오수원 옮김, 『우울: 공적 감정』, 2025, 마티, 25쪽. ↩︎
  19.  같은 책, 26쪽. ↩︎
  20.  이연숙,  「비우정의 우정」,  『우정』, 민음사 인문한편, 2023. ↩︎
  21.  『피메일스』, 176-77쪽. ↩︎
  22.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 1994 ↩︎
  23.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
  24.  『우울: 공적 감정』, 352쪽. ↩︎
  25.  「비우정의 우정」, 51쪽. ↩︎

남자, 사람 친구가 될 수 있을까?(1)

―이연숙 평론가와의 대화 1부

1부: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악인의 서사/가시성의 경제

2부: 남성학의 부상/한국 남성성 분석/몸과 외모의 문제/실망에 관하여

희우
우리가 만난 지 한 4년 됐나요? 생각보다 오래됐고, 사실 우리 이야기도 꽤 자주 하는 편인 것 같은데요.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니,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이 누군가, 했을 때 이연숙이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부담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연숙 님이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이미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한 시간이 꽤 되다 보니까, 이야기해볼 법한 주제가 쌓인 것 같아서 이렇게 공개하는 대화를 해보자고 제안했지요.

연숙
대화하자고 말씀해주셔서 기뻤어요. 근데 한 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생각보다 이런 대화가 품이 많이 들고 준비할 것도 많잖아요. 무슨 마감이 있는 대화가 아니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도 되고요. 언제 공개를 해야 하고, 누가 읽을 것이고 이런 문제들을 하나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 제안해주신 게 작년 4월이더라고요.

희우
1년 전이네요.

연숙
드디어 이렇게 대화할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다……(??)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

희우
간단한 소개를 해주세요.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어떤 관심사, 어떤 주제로 글을 써오셨는지.

연숙
기본적으로 미술, 영화, 만화와 같은 시각 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관심사라고 했을 때는 조금 더 구체적인 것들이어야 될 텐데, 제가 지금 딱히 말할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소개를 하는 게 더 좋을까요?

희우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을 키워드 정도……

연숙
아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관점을 담은 글을 써왔고요. 특히 지배 규범과 문화에 복종하면서도 저항하는, 모순적인 주체 양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주체 양식은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판다고 말하긴 어렵겠네요. 제가 전문 분야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만물 비평가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희우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본격적인 주제를 얘기하기 전에 비평 쓰기, 비평을 쓰는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관심사 하나를 꼽기 어렵고, 한 분야를 말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마침 저도 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비평 쓰기에 거의 필연적으로 따르는 어떤 어려움, 뭐랄까 업무적인 산만함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연구자와는 달리, 비평가로서는 새롭게 나오는 작품들이나 문화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에 계속 빠르게 반응을 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딜레당티즘 같은 게 있잖아요. 뭔가 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게 아니라, 피상적으로 이것저것 다 건드리는 그런 태도로써 딜레당티즘이요. 저 자신도 그렇고, 제 주변에 비평하는 분들이 많다 보니, 그런 태도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거든요.

연숙
저도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는 게,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전부 두꺼운 책을 쓴 사람들이에요. 한 5년, 10년씩 어떤 주제에 헌신하는 그런 분들의 연구를 존경하는데, 실제로 제가 하는 일은 보따리 장사나 보부상 같은 일이죠. 그분들의 일이 집을 짓는 일이라면, 저는 그 집 마당에서 풀을 뽑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요. 이건 제가 한 비유가 아니라, 제 친구 중 하나가 언제까지 비평 쓸 거냐고 하면서 저한테 말했던 비유예요. 너 언제까지 풀을 뽑을 거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그런데 저도 알고 있거든요. 풀 뽑는 일이 힘들다는 거. 왜냐면 늘 새로운 풀이 자라나고, 그 풀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건 늘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남들이 뽑아놓은 풀 구경하고 나도 풀 뽑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정말 자주 하죠.
근데 제가 그때 그 친구한테 뭐라고 반박했냐면, ‘풀 뽑는 사람도 있어야지’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진짜 뽑고 싶은가 질문하면 잘 모르겠네요.

희우
저도 요새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서요. 선생님이 저보다 더 오래 많은 글을 써오셨기 때문에, 그런 갈등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있는지 혹은 버티고 있는지 요령이랄까 지혜를 여쭤본 거였습니다.

연숙
못하겠는데요. 전혀 못 하겠는데. 언제부터 글 쓰셨는데요?

희우
한 4년 됐죠.

연숙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평론을 쓰신 거예요?

희우
네, 본격적으로 쓴 지 4년 됐네요.

연숙
저는 지금이 굉장히 많은 작업을 하는 시기이긴 한데, 청탁을 받아온 건 그래도 거의 10년 가까이 된 것 같네요. 햇수가 사실 뭐가 중요할까요. 염증이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생각엔, 방법이 없다, 그만두지 않는 이상에는.

희우
절망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아까 딜레당티즘을 얘기했는데, 그게 비평가를 계속 따라다니는 그림자일 것 같아요. 계속 그것과 경쟁하고 지양하려 애쓰지만,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또 그런 생각도 있어요. 딜레당티즘이라고 하면 어쨌든 폄훼하는 말로 많이 쓰이지만, 또 글을 읽어봤을 때 딜레당트적인 면이 전혀 없는 글은 재미가 없어요. 맥락에서 맥락으로 비약을 하고, 어떨 땐 좀 아무렇게나 짜깁기한 것 같은 면모가 약간은 있는 평론이 읽을 때 흥미로운 것 같아요.

연숙
그건 요즘 일하는 사람들이 다 조금씩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나 심정인 것도 같아요.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고민이 비단 비평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겠죠. 무엇이든 깊이 있게 할 수 없고 표면만 훑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광범위하게 많은 직업군에 퍼져 있지 않을까요? 다들 ADHD고, 모든 게 너무나 빠르고, 다들 포모(FOMO) 상태로 모든 정보를 다 흡수하고 싶어 하고, 놓치면 또 불안해하고. 동시에 빨리 성과 내고 성취해야 되니까 뭐든 깊이 파고드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우리 대부분은 정보를 먹어 치워서 돈을 받는 일을 하는 거나 다름 없어요. 일단 생산이 된 정보니까 누구라도 먹어서 없애야죠. 그러니까 제가 말했던 그런 종류의 두꺼운 책을 쓰는 건, 그런 연구를 하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굉장한 특권의 반증일 수 있죠.

희우
지금 비평 쓰기의 슬픔에 대해서만 좀 얘기를 했는데 기쁨이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요? 그런 순간도 있겠지요?

연숙
그냥 저는 늘 이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 건 기쁘죠. 글 쓰고, 글을 어디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건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그리고 당연히 작가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작품을 먼저 접할 기회를 가진다는 건 비밀스러운 희열을 주고요. 그게 다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희우
저는 아주 몰입해서 글을 쓸 때가 간혹 있는데, 그럴 때는 좋은데요. 그런데 그런 글이 나중에 시간 지나고 봤을 때 잘 된 글인가 하면 언제나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고요. 평론을 누가 읽는지도 모르겠고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보람을 찾아야 하니까 이렇게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연숙
최근에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현상들에 비해서 글 쓰는 일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계엄 이후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진짜 글 써서 뭐 하지, 뭐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이게 과거 세대와의 차이일 것도 같아요. 왜냐면 조금만 윗세대로 올라가면, 굳이 386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70년대생이나 80년대생들이랑 얘기를 할 때는, 그들에게 글은 어쨌든 문화 전쟁의 도구니까 이걸 잘 사용해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주 큰 관건인 것 같거든요.
근데 우리 세대는 압도적인 무력감이 일단 먼저 있죠. 글이라는 것은 일단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전제를 먼저 인정한 뒤에 겨우겨우 다른 가능성이나 희망을 더듬는 과정 자체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과 글을 쓰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마 저나 희우 님도 그럴 것 같고요. 이런 상황을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좀 막막하죠. 뭐 그래도 쓸모가 있다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합니다.
좀 다른 이야긴데 저는 일반화를 위한 세대론은 물론 반대하지만, 경험적 차원에서는 세대 간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거고, 이건 당연한 거죠. 소위 선배 세대들이 우릴 꾸짖는데 거기다 대고 ‘님들이 다 망쳐놔서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라고 대꾸하고 싶어질 때가 있기도 하고요. 물론 저는 그때마다 그레타 툰베리를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배 세대가 된다…… 아니 이미 선배 세대죠.

희우
연숙 님 말대로, 무력함에 더한 산만함이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나 심정, 삶의 양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 했다가 저 일 했다가, 또 굉장히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콘텐츠들도 따라가야 하고요. 근데 그거를 도착적인 수준으로, 너무 성실하게 해버리면, 그러니까 딜레당티즘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면 거기서 굉장히 재미있고 이상한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되네요. 그러니까 삶의 양식은 강요된 조건 같은 것이지만, 글쓰기라는 게 항상 그런 조건들을 전유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또 사실 비평이 아니면 무엇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비평의 프라이드일 수도 있겠다 싶고요. 정신없는 세계에서 정신없이 살면서 수많은 맥락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고 어떤 맥락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것이 비평의 일이 아닐까?

연숙
네, 제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그렇죠.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경우에는 이론들이나 비평들에서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용기나 희망을 얻지만, 다른 사람도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어서 그냥 계속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희우
지당한 말씀입니다.

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

연숙
그러니까 지금처럼 ‘한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대담 형식으로 하게 된 거죠.

희우
예, 우리 한국 남자 이야기하기로 했었죠. 사실 이 주제는 선생님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나 성차(性差), 그리고 ‘젠더 갈등’에 관련된 이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얘기했던 주제지요.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많은 맥락이 이미 쌓여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한 번 대화를 정리하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가 된 것이었죠.
그런데 대화를 읽으시는 분들은 안 그럴 테니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최근에 관심 두게 된 것들, 읽은 것들, 본 것들,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 한번 개괄해보면 좋겠습니다.

연숙
네. 특히 인셀 문제라든지, 아니면 극우화되는 남성들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한국의 ‘이대남’ 관련 문제라든지 이런 얘기는 특히 작년에 꽤 많이 했었던 것 같고요.
그것과 동시에 여성들이 피해자로서만 정체화를 하게 되는 문제, 그리고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 전체에서 어떤 종류의 ‘성별 분업화’가 일어나고 있는 문제, 그리고 이런저런 대세의 흐름들에 대한 어떤 불만들을 좀 공유를 했던 것 같거든요.

희우
몇 가지 구체적인 계기도 있었죠. 유튜브의 어떤 영상이라든지, 최근의 서부지법 사태라든지.

연숙
네, 그 전에는 설거지론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요. 설거지론은 레드필 이론의 한국 버전이라고 할까요. 레드필 이론은 소위 매노스피어, 남성계라고 부르는 남성 중심적 공간에서 발전한, 남성들을 계급으로 분류하는 세계관이에요. 우월한 알파메일, 열등한 베타메일 이런 식으로요. 알파일수록 우월한 여자를 만나서 유전자를 남긴다, 뭐 그런 얘기인데 사실 이게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고, 90년대에 진화심리학 유행할 때부터 계속 하던 말이잖아요. 그걸 다시 리브랜딩해서 레드필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이데올로기처럼 팔게 된 거죠.
한국에서도 2020년대 초반부터 남자들끼리 서로, 혹은 여자들을 깎아내릴 때 ‘설거지해준다’느니 ‘퐁퐁남’이니 하는 얘기들이 본격적으로 가시화가 됐어요. 이제 스스로를 인셀로 정체화하는 남자들도 흔히 찾아볼 수 있죠.
저희 예전에 그거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유튜브 채널 ‘주둥이방송’. 거기서 어떤 인셀이 사연 보냈다가 조리돌림 당했던 편이요.1 그 사람 그냥 여자들이 자기를 안 만나준다고, 여자들은 다 알파만 만나고, 데이트 비용도 안 내고, 그냥 인셀 사고방식 그대로였잖아요. 완전 뻔한 소리 막 쏟아내고. 근데 주둥이가 또 얼마나 못됐어요. 진짜 말로 그냥 깔아뭉개버렸잖아요. “너 여자 만나본 적이나 있어?”, “여자들이 너랑 섹스도 해주는데 너는 뭘 해줄 건데?” 이런 식으로. 그 클립 돌아다니면서 SNS에서 난리 났었고, 욕도 많이 먹고 또 반대로 호응도 얻고 그랬죠. 어떻게 보면 남성 인셀 문화가 가시화됐던 어느 한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희우
저는 그 방송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오늘 할 이야기랑 연결될 텐데요. 그 사연자가 잘못된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잖아요. 논리적으로 구멍도 많고,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일단 듣자마자 불쾌를 느끼게 하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문제적인 건 그 방송 진행자(주둥이)의 논리인 것 같아요. 그걸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주둥이가 완전히 신자유주의적인 논리로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비난하는데, 거기서는 사연자보다 상대적으로 주둥이의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게 되죠.
한편, 역으로 그 사연자는 신자유주의 비판, 자본주의 비판에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비판적 어휘들을 전유해서 불평등이 어떻고, 독점이 어떻고, 분배가 어떻고 이런 말을 쓰잖아요. 물론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식의 전유이기는 하죠. 불평등을 비판하는 담론들에서 그럴듯한 용어들을 가져와서 ‘여성의 분배’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요. 하지만 저는 그 방송에서 나타난 대립 구도가 매우 징후적으로 느껴졌어요. 신자유주의나 능력주의, 불평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의 어휘들은 그런 식으로 오염돼서 뒤틀려버리고, 그걸 방어하는 주둥이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커먼센스’처럼 보이는 구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숙
맞아요. 저도 똑같이 그 방송에 대한 반응으로 ‘주둥이가 맞는 말 한다’라는 반응이 많은 걸 보고 진짜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어떤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만들어서 원하는 걸 쟁취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안 되죠.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상황, 조건에 놓여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억울하면 너도 돈 벌어서 성형해, 억울하면 너도 꾸며서 여자 끼고 다녀’, 이런 이야기를 무슨 진짜 아침 먹고 저녁 먹는 이야기처럼 한다는 게 우리 모두가 능력주의에 미쳐서 단단히 망가졌다는 증거인 거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심정적으로는 그 못난 인셀한테 훨씬 공감이 가거든요.

희우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났는데요. 저도 능력주의가 우리한테 너무 깊이 침투해서 완전히 커먼센스로 자리 잡았고, 그것에 문제조차 느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떤 전문가(뇌과학자인지 정신과 의사인지)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봤어요. ‘사람들이 머리 나쁘다고, 지능이 낮다고 하면 되게 기분 나빠하고 모욕으로 받아들이는데, 너 공감 못 한다, 공감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별로 그렇게 안 받아들인다. 그런데 사실 공감을 못 하는 것도 지능이 낮은 거다.’ 그러면서 공감 능력의 결여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듣거나 볼 때 기가 차요. 사람들이 자기 말의 논리를 점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만약 그 말대로 공감 능력이 지능의 문제라고 하면, 더욱이 공감의 결여를 문제 삼거나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거잖아요.

연숙
그런 사람들은 누가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안타까워서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 나쁘라고 욕하는 거죠. 실제로 ‘지능이 낮다’라는 말이 공격과 비하의 의도로 쓰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너네는 좀 이거를 욕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잖아요. 상황을 개선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거죠. 지능이 낮고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시급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면 그게 회복될 수 없는 선천적인 어떤 결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희우
네, 그러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또 제가 불만을 느끼는 논리 중 하나는 이런 거예요. 흔히 우파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만들고 좌파들은 구조나 체계, 사회의 문제로 생각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이제 뭔가 안 통하는 논리가 돼버린 것 같아요. ‘개인의 책임’과 ‘구조의 문제’라는 구도 자체가 진짜 이상하게 뒤틀려버린 것 같거든요.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원인을 밝히려는 분석이 부지불식간에 결정론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회적으로 이런 위치니까, 이런 성별 혹은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까, 감수성이나 사고방식이나 품행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라는 식의 결정론이요. 이런 구조적 결정론이 윤리적 사고를 봉쇄하면서 윤리적인 책임에서 행위자들을 면제시켜버리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 거지요. 역설적으로 정치적 상상력도 봉쇄하고요.

연숙
지금 많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하고 있는 게 그거죠. 남성 성별 안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이들은 타고나기를 가해자이자 강간범이자 살인자로 타고 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러면 어떻게 그들에게 죄를 물어요. 그냥 본능대로 하는 건데.
오늘날 젊은 남자들, ‘이대남’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해요.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성별이나 조건, 상황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받아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문제를 이해할 수도 개선할 수도 없을 거예요.

희우
이런 사태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읽은 책도 공유를 많이 했었지요. 벨 훅스 얘기도 했던 것 같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2 등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었죠.

연숙
맞아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공유한 주제들에 뭐랄까, 나쁜 취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런 종류의 주제들이 악하기 때문에 끌리는 것도 있거든요. 좀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계속 냄새 맡고 좀 찍어 먹어보기도 하고, 저는 그런 종류의 행위에 재미를 느껴요. 그래서 여기에는 솔직히 좀 떳떳하지 못한, 조금 구린 취향도 있는 거죠.

희우
길티 플래저인가요?

연숙
네네. 그런데 동시에 얘네가 이유 없이 이러는 걸까, 진짜로 그냥 갑자기 미친 걸까? 그렇게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게 있죠. ‘이대녀’들은 멀쩡하고 ‘이대남’들은 갑자기 다 미쳤다고? 이게 가능한가? 분명 그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합리적 의심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희우
저도 비슷하지만, 한국 남성이나 ‘이대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명의 한국 남자로서 느끼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심정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사실 많은 사람이 그럴 텐데) 문제가 되는 남성성이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 같거든요. ‘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 회피하는 마음 혹은 구별하고 싶은 마음이요.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정말 아닐까?’ 반문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죠. ‘왜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제게는 너무 가까이 있는 문제, 그래서 두렵고 혐오스럽기도 한 문제에요. 저도 호기심, 알고 싶음, 당연히 그것도 있지만, 내가 사로잡혀 있는, 피할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숙
그러네요. 희우 님에 비하면 저에게 ‘이대남’은 거리가 있는 주제죠. 저는 FTM 트랜스젠더 스펙트럼에 가까운 퀴어로서 ‘이대남’에게 가끔 동일시할 때도 있고 ‘유해한 남성성’의 특성들을 때로 질투할 때도 있어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옛날엔 더 심했어요. 동일시를 하든 시기를 하든 대상과 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가 돼야 가능한 일이니, 사실은 쭉 나는 남성이 아니라고, 남성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당연히 살면서 한 번도 남성 집단에 속해본 적도 없고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희우 님 같은 방식(‘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은 아니지만 제 젠더 정체성 때문에 각종 남성성 문제를 여러 관점으로 생각해오기는 했어요. 잭 할버스탐의 『여성의 남성성』 같은 책을 읽으면서 남성성을 일종의 장르로 간주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좀 더 편하게 내가 이 분야에 말을 얹어도 되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도 했고요. 우리가 친해지는 속도가 붙을 시점에 이런 종류의 시각 차이도 많이 공유했었지요.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는 처음 겪어봐요. 그러니까 남성으로 사회화된 20대 (주로 시스 헤테로일) 남성의 행동 양식과 정체성이 우리 사회에서 크고 심각한 문제로 성큼 다가온 거죠. 물론 원래도 문제였어요. 처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면서 식민지 남성성, 헤게모니 남성성, 유해한 남성성 이러면서 온갖 남성성의 유형을 공부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 경우 주로 이런 프레임은 폭력적 가부장과 같은 여러 민족적, 국가적 비극을 겪은 아버지 세대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 같아요.3 과거에 비해서 남성들이 더 희한한 방식으로 가시화가 되고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단지 그렇게 규정될 순 없겠다, 이런 생각을 최근에 좀 비판적으로 다시 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저한테 의미 있는 주제가 된 거죠, 단순히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악인의 서사

희우
네. 말씀하신 대로 사실 이론적인 분석은 이미 많지만,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만드는 게 관건이니까요. 그런데 분석이든 변화든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누고 싶은 고민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혹은 이 주제로 글을 쓰거나 관련된 작품들을 조명할 때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있어요. 가령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먼저 얘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지금 한국의 인문학 담론장이나 저널리즘에서 남성, 특히 이대남이 폭력, 성차별, 극우화 등의 문제에 결부된 기표인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나빠 보이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짚어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나쁜 사람들,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굳이 거기에 시간을 들이고 지면을 들이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요.

연숙
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구호가 유행했죠. 아마도 트위터 같은 SNS에서 남성 범죄자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 때 페미니스트 사용자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게 계기인 걸로 알아요. 그리고 이에 관한 어떤 책도 얼마 전에 나왔었고요.4
서사라는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니까 범주를 좀 좁혀 볼게요. 저런 구호가 겨냥하는 건 남성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을 때 판결이 피해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보이는 데 반해 가해자의 불행한 과거나 창창한 미래를 강조하는 어떤 지배적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이 경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건 서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을 면피시킬 목적으로 특정한 서사가 자동적으로 부착되고 유통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인 것 같거든요. 이 구호가 페미니스트 집단의 지지를 얻게 된 건 유독 남성 가해자들에게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동시에는 가해자에게 ‘서사’가 있을 수도 있죠. 정의롭고 ‘선한’ 서사는 아니겠지만 인간이니까 자기 삶을 설명하는 서사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당연히 소위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죠. 근데 이런 판단은 단순히 기계적인 평등이나 중립의 감각일 수도 있어요. 저는 이를테면 레비나스라든지, 주디스 버틀러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작업을 통해서 ‘나’라는 주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걸 들어주는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걸 이해해 왔어요. 타자의 존재가 실제로 내 생명, 내 삶에 필수 불가결한 상호 의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작업을 제가 계속 읽어 왔기 때문에 자동 반사적으로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지,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타자 윤리가 아니라 서울권 4년제 대학을 다니며 타자 윤리를 말하는 두꺼운 책들에 반복 노출된 결과겠죠…….

희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런 이론들, 결정 불가능성…… 타자…… 윤리 어쩌고 이론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한다고,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해하는 것과 면죄하는 건 다른 일이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왜 이 둘을 계속 혼동하게 될까? 서사를 부여하면 인간적으로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연민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뭔가 단호하게 처벌을 하거나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질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이해하면서 처벌해야 한다,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해가 처벌을 어렵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잘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물론 엄청 많은 딜레마가 있겠지만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특정한 의도로 부여되는 ‘자동적인 서사’가 아닌 서사를 추구해야 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옛날에 유일신 종교들에서 성상을 금지했던 걸 생각해보면요. 신이 재현되면 안 된다는 게, 유일하고 신성해야 하는 신이 재현되어서 세속적으로 되고, 다양해지고, 인간적으로 되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안 된다’ 같은 생각은, 그런 성상 금지를 도착적으로 뒤집은 방식으로 악에 적용하는 거라고 봐요. 순수하고 추상적인 악으로만 남겨놓기 위해서요. 악이 우리한테 가까이 오고, 세속화되고, 다양한 면을 갖게 되면 정상적인 것과 악을 선명하게 구분하기가 당연히 어려워지니까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어려움이, 버틀러를 따라 말하자면 윤리적인 사고의 공간인 것이고,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의 공간일 텐데요. 그리고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그런 얘기도 했었지요.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이 구제될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윤리적인 사고의 여지를 파괴해버리는 일이 된다고.

연숙
그렇죠.

희우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처벌하거나 윤리적인 책임을 묻거나 하는 일들은, 그 사람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고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 사람이 ‘마치 선을 선택할 만큼 자유로운 것처럼’ 가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악을 처벌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페미니스트이건 안티페미니스트이건 상관없이, 점점 사람들 사이에 극도로 강화되는 엄벌주의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트위터에서든 네이버 댓글에서든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인데, 저런 애들은 갱생시킬 수 없고, 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려해야 된다, 사형시켜야 된다, 이런 말들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달라질 수 없다면, 그게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든,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든 그 사람이 악한 일을 하도록―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일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거죠. 그 사람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거라면 역으로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거잖아요. ‘당신은 생물학적인 수준에서든, 환경적인 수준에서든 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윤리적인 책임은 없지만, 이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당신을 격리하겠다 혹은 죽이겠다.’ 이런 방식은 경제적으로나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있어도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죠.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우리가 악인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됐는지, 다른 길은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는 게 따뜻하고 물렁하고 관대한 마음씨를 가져서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 처벌에 대해서든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든 사고할 여지 자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또, 『윤리적 폭력 비판』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 책에서 버틀러가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어떤 주체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의 의지를 박탈할 정도까지 되어선 안 된다.5 왜냐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일단 살고자 하는 욕망 위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 대목은 버틀러가 윤리적 비판이 어떤 한계를 가져야 하는지 말하는 부분이라서 저에게는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오해를 살 수 있고 욕을 먹을 수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사실 너무 많은 경험적인 혹은 저널리즘적인 사례들이 있잖아요.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나쁜 짓들을 많이 하는지. 데이트 폭력부터 서부지검 난동에 이르기까지. 근데 이런 역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절대 구제할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 역설적으로 그 사람들을 점점 더 도덕적인 고려에서 면제해 주는 효과가 생긴다는 거예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옳게 될 수 없고 감수성을 갖출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윤리적으로 살고 싶고 그런 감수성을 갖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한테는 계속해서 어떤 도덕적인 책임이 부과되지만, 이미 윤리적 담론이나 페미니즘이나 여하한 진보적 가치를 등진 사람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 것이죠. 어차피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요.

연숙
네. 저도 동의합니다. 굉장히 원론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인간은 특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존재 그 이상이고 그럴 수 있다는 걸 믿어야 나 자신도 이해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오해받을 수 있고 욕먹을 수 있다고 해주셨듯 특히 요즘에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어렵죠. 그럼 지금 뭐 조주빈 같은 애들도 이해하자는 말이냐? 네, 이해하자는 말이긴 해요. 그 이유는 당연하지만 인간 종이 지배 종으로서 지금 지구 하나를 같이 공유하고 있고 어떻게든 다 함께 끝까지 잘 살아 남아야 되는데(혹은 잘 죽어야 되는데) 자꾸 특정 개체, 특정 부류에만 예외 조항을 둬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특정 개체, 특정 부류가 구제 불가능한 완전한 악으로 규정된다면 답은 그들을 그냥 지구에서 없애는 수밖에 없잖아요. ‘최종 해결책’과 같은 그런 예외 조항이 누군가에게 적용 가능하다면 곧 나에게도 그렇겠죠. 모두에게 그럴 거고요.
사실 근데 참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다, 그래서 지금 한국 남자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 조심스럽다…….

희우
네. 이 대담은 주제 자체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계속 달라지는 와중에 있다는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나이브하고 낡은 휴머니즘 운운으로 받아들여질 텐데, 만약 지금 우리가 그런 가능성을 계산에 넣지 않고 생각하면, 선택지가 내전밖에 남지 않을 거예요. 저 사람이 달라질 수 없고 내가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선택지는 상대가 어떤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집회를 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을 제거하거나, 억류하거나 권리를 박탈하는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연숙
네. 자칫하면 지금 저희가 한국 남성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특별히 누구 편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편이 문제죠.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여성들도 트랜스젠더, 외국인 혐오가 심각하고 인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인터넷 바깥으로 눈을 돌리려 해도 연일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뉴스가 쏟아지고요.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봐도 그렇죠.
계속 주디스 버틀러 얘기를 하게 되는데, 버틀러가 『비폭력의 힘』에서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정신분석학자를 경유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6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사람은 대상 관계 이론의 창시자인데요. 인간이 유아 때부터 특정 관계를 통해 자신의 불안, 시기를 다룬다고 보는 이론이에요. 당연하지만 이 관계란 어머니와의 관계일 가능성이 크겠죠. 젖을 빠는 유아들한테 어머니 역할은 딱 두 가지밖에 없겠죠. 하나는 젖 주는 엄마, 다른 하나는 젖 안 주는 엄마. 젖 주는 엄마는 좋은 엄마죠. 안 준 엄마는 나쁜 엄마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유아의 머릿속에서는 이분법적으로 양분된, 극단적인 두 가지 사고에서 비롯된 분열된 어머니가 존재하는 거예요. 초기에 이러한 극단적 분리는 유아로 하여금 좋은 엄마를 나쁜 엄마로부터 분리된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게 돕고 자신의 파괴적 충동을 나쁜 엄마에게 투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멜라니 클라인은 편집 분열적 위치로 설명해요.
한편 유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에 대한 파괴적 충동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어머니가 자신과 분리된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하고 상실감을 느끼기도 해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도 느끼고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어머니를 염려하고 애도하면서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상태가 오는 거죠. 이걸 우울증적 위치라고 불러요. 근래 소소하게 국내 문학 비평가들에게 유행했던 세즈윅의 ‘회복적 읽기’가 이런 관점에서 오기도 했고요. 멜라니 클라인은 나쁜 엄마를 죽이고 좋은 엄마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편집 분열적 위치를 제대로 우울증적 위치로 바꿔내지 못하면 앞으로 사는 게 굉장히 어려워진다고 말해요. 하지만 안정적으로 어머니와 분리되면서도 그 분리를 애도할 수 있는 위치에 우리는 생애 단계 어디서든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유아 때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실 평생 우리는 두 위치를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버틀러는 클라인의 이 논의를 가지고 와서, 타인을 절멸시키거나 또는 ‘쟤는 어떤 부분은 좋지만 어떤 부분은 죽이고 싶어’라는 방식으로 타인을 분리, 절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같이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거든요. 생애 초기 단계에서 가장 강렬한 애착 관계에서 가능한 의존 방식을 전 인류에게 확대해 적용해보자는 거죠. 꼭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모두 한 번은 유아였단 말이죠. 유아 시기에 우리는 모두 최약체였고 최약체인 우리를 누가 돌봐줘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단 말이죠. 이렇게 최소 단위에서 출발해보자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생존자죠. 우리는 전부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끔찍한 생명체였어요. 그런 시기를 화해와 용서의 드라마로 다시 재구성하려는 버틀러의 노력은 놀랍고 아름답죠.
어쨌든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안다면 누가 좀 거지 같아도 참고 견디거나 그런 부분을 포함해서 그 사람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그러지 않는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뭐 전쟁이죠, 그 누구를 죽여야 하니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에 불과하지만요. 누가 나랑 똑같지 않다고 해서 죽이는 건 그냥 투사된 형태의 자살이기도 해요. 그러지 말고 그냥 우울해하는 게 낫다. 너랑 나는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게 정말 단순한 이야긴데 어렵죠. 저도 늘 어렵고요.

가시성의 경제

희우
네,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악인의 서사’ 문제에 이어서, 이 문제도 잠깐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한 건 일반적인 차원의 인문학적 논의라면, 이건 좀 더 동시대의 SNS라든지 매체와 관련된 문제인데요. ‘가시성의 경제’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노출되거나, 재현되거나,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기회 자체가 희소한 자원이고 그것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인데요. 누군가가 문화에 노출이 되고 재현되고 발언권을 얻으면, 그 상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이나 권리를 제한받거나 박탈당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당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자원 경쟁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들, 지금까지 소외돼 있었던 사람들, 혹은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을 조명하는 것만 해도 관심이나 가시성이라는 자원이 부족한데 나쁜 놈들 혹은 기득권층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까지 지면이나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죠.

연숙
지금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얼핏 드는 생각은,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들 이야기 별로 재미없어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봤자 내 삶에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알면 알수록 내 삶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피하죠. 다만 ‘인간 극장’ 같은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거는 괜찮아요. 그거는 자극을 추구하도록 세팅된 인간의 뇌에 되게 좋은 먹이를 주니까. 뭐든 포르노화하면 자극이 되고, 그래서 재밌어져요. 전통적인 재현 논의에서 가시성이라는 주제는 권력 구조와 관련이 깊었는데 오늘날 인터넷 문화 안에서 가시성은 그냥 전두엽 자극을 뜻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시성 경제 내에서 누가 더 파이를 차지하느냐는 결국 누가 더 이 경제의 논리를 잘 이용할 것인가, 이런 논의로 귀결되겠죠. 이를테면 우파 알고리즘에 맞서는 좌파 알고리즘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요. 홍진훤 작가의 작업 <DESTROY THE CODES>(2021)이 그런 예시 중 하나죠.7 이 작업은 관심 경제의 파이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하는 ‘저항’을 하자고 요청하고 있죠.
저는 이런 논의에 동의하는 동시에 어느 날은 그냥 전혀 인터넷을 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인터넷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그냥 접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2000년대 초반과 다르게 지금은 인터넷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그냥 그 안에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거지…… 문제는 그러니까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를 어떻게 좌파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할 것인가, 혹은 거꾸로 어떻게 좌파 자체를 그런 경제에 유리할 수 있도록 재교육할 것이냐는 질문이 아니라, 애당초 가시성을 화폐 삼게 만드는 인터넷이라는 환경과 우리가 맺고 있는 이 애증 어린 관계 그 자체에요. 인터넷은 환경이에요. 지저분하고, 더럽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환경이죠. 마치 난곡동과 같은 거죠……. 죄송합니다. 저희 동네[이연숙과 이희우가 사는 동네]가 난곡동이라서요. 저에게 난곡동을 받아들이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그냥 제 삶에 따라오는 조건이죠. 인터넷도 마찬가지고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런 조건을 바꾸기란 무척 어려우므로 능동적으로 조건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개발하고 협상하는 전략도 필요해요.
정리하자면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주조해 낸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 ‘조회수’ 경제가 아닌 다른 원리를 통해 인터넷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미 자극 추구에 쩔어버린 머리를 뭐 어떻게 디톡스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전략을 고안해 봐야죠. 가끔 저는 유튜브에서 어떤 아마추어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놀라운 애니메이션을 발견하곤 하는데요. 일정 시간을 들여 주목 경제의 바깥으로 밀려난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그로 인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대단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험은 여전히 짜릿하고 놀라워요. 주목이라는 화폐를 둘러싼 자원 경쟁 문제로만 보자면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자’는 주장은 당위가 있어 보이지만, 자극적이기만 하면 팔리는 인터넷 환경 안에서 악인에게 줄 주목이 자동적으로 선인에게 분배되는 건 또 아니잖아요. 파이 싸움 외에도 다른 방식의 싸움이 가능해요. 사회 1면에 실리는 걸 부러워하는 게 전부가 될 순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해주신 질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희우
어…… 그렇죠. 사실 범죄 기사나 포르노화된 재현은 좀 극단적인 사례들이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도파민이 자극되고 관심이 쏠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가시성의 경제를 언급하면서 제가 이야기하려던 건, 최근 한국소설들이 흔히 다룰 법한 인물들, 그러니까 적당히 악하고 적당히 착하기도 하고 적당히 문제적인, 그런 대부분의 사람 이야기에요. 그러한 이야기의 장에서 ‘가시성의 경제’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거죠. 노출되고 재현되고 많은 지면을 갖는 일 자체가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가령 ‘여성 서사’에 부여되는 중요성처럼, 소수자나 여성 인물을 많이 재현하고 내세우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경향에 대한 거예요. 반대로 나쁜 사람들 혹은 기득권층에게 서사나 지면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연숙
아, 네 그렇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죠.

희우
하지만 이제(바야흐로) 이 문제를 깊이 재고해 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꼭 노출되거나 재현되는 게 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인가? 혹은 어떤 재현이 정체성/동일성에 호소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여기에 ‘그렇지 않다’라고 해야 우리가 어떤 경쟁심 같은 것 없이 재현된 인물을 다룰 수 있게 되겠지요. 현재는 가시성의 경제와 관련해서 상반된 두 가지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나쁘다’는 편견이고,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좋다’는 편견인데요. 첫 번째 편견에 따르면, 보이는 대상이 되는 것은 나쁘다, 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거죠. 가령 여성이 보이는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의 생각.
이 오래된 생각은 지금 우리 관점에서 보면 너무 투박한 것인데, 많은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고 싶어 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욕망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전유하기도 하고요. 여기에서 정반대의(좀 더 최신의) 두 번째 편견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건 ‘보여지는 것은 좋다’라는 편견이죠. 그런데 가시성 자체는 희소한 자원이고, 누구나 마음껏 보여질 수는 없으니까, 보이기 위해(가시성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는 거지요. ‘보여지는 것이 곧 좋은 일이다’라는 선입견은 악인을 재현하는 것이 어떻게든 악에 이익이 된다는 생각하고도 붙어 있고, 여성을 많이 재현하는 것이 곧 여성에게 이롭다는 식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 두 가지 편견(전제)을 비판하는 논의와 비평이 존재해왔지만, 한국의 문화나 문학장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로 보여요. 짧은 강의 경력 중에, 저는 이런 생각이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요. 작품이 악인이나 문제적인 인물을 재현하기 때문에 나쁘고, 소외된 인물이나 소수자를 재현했기 때문에 진보적이라는 식의 생각. 제가 보기엔 언급한 두 가지 편견이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사고를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연숙
페미니즘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늘 어려운 상황에 처하죠.8 주류 페미니즘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놓고 봤을 때 여태까지 여성 재현이 부족했으니까 이제는 양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쭉 해왔어요. 여성 정치인을 예로 들면, 지금 여성 대표가 부족하니까 여성 의원을 더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정치에서 쿼터제를 적용하듯이, 이런 방식이 소설이나 예술 같은 장르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여성 서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여성 인물을 더 자주 재현해야 한다는 요구가 바로 그런 양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인 거죠.
그런데 방금 말씀한 것처럼 기계적 평등을 따르는 게 과연 페미니즘에 항상 긍정적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하죠. 여성 재현이 늘어야 하고 여성 권리가 확대되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보존될 필요가 있거든요. ‘여성’이라는 범주가 계속해서 약자로, 피해자로, 소수자로 남아야지 양적 평등에 대해 말할 명분이 생긴다는 거죠. 우린 약자다, 피해자다, 소수자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여태까지 너네가 부당하게 빼앗아 간 ‘파이’를 더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거죠. ‘여성’으로 남아 있는 대가로 당장의 ‘파이’를 지불받게 되는 건데요. 이게 과연 긍정적인가, 정말로 여성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가, 반드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요즈음 문학계, 더 정직하게는 문학 시장 내에서도 ‘여성 작가’를 선호하고 또 강조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물론 그 여성 작가와 여성 서사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다양성이 발견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기야 하겠지만, 또한 ‘여성 작가’로 호명되는 대가로 ‘특정한’ 여성 재현, 여성 서사만을 반복해서 생산하게 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재현이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현실을 재생산하기도 하구요.
정체성 정치와 관련해 다른 이야기를 더 이어서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가기 힘든 이유는 진짜 이게 자원이라서 그래요. 그냥 이게 정말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고 지금 우리 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 안에 살고 있으니까. 예컨대 제 지인인 30대 시스 헤테로 남자 작가는 머뭇거리며 제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퀴어나 페미니즘에 대해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요즈음 남자 작가가 너무 인기가 없어서 청탁도 잘 없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고. 저는 그 분에게 작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런 분위기는 역사적으로 다 ‘한때’에 불과하다고,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농담으로 답했지만,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다들 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죠. 요즘 이게 인기가 없다. 남자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여자 이야기가 대세다, 이런 식으로 다들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희우
말씀을 듣고 나니 더더욱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어떤 작가에게 청탁이 많이 가거나 덜 가는 건 단순히 정체성이 이유일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작가의 감수성이나 감각도 그의 정체성과 관련이 없을 수 없고, 지면이나 관심의 특정한 분배가 그 정체성-감수성을 틀 짓는 전형적인 구획들을 강화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어쨌든 가시성 자체를 경쟁하고 획득해야 하는 자원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흔들 필요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남성 인물, 특히 문제적인 남성 인물을 다루는 게 여성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반대로 여성 인물들이 인기가 많기 때문에 남성 이야기를 쓰는 남성 작가가 설 자리가 없다…… 같은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1. 주둥이방송, “[분노주의] 살면서 만나기 싫은 한심한 유형 1위”, ↩︎
  2. 스기타 슌스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명다인 옮김, 또다른우주, 2023. ↩︎
  3. 식민지 남성성에 관해서는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지음, 교양인, 2017), 『남성성과 젠더』(권김현영, 정희진, 한채윤, 루인, 엄기호, 나영정 지음, 자음과모음, 2011), 『페니스 파시즘』(강준만, 노혜경, 진중권, 이명원, 김현수, 시타, 정승화, 권김현영, 김진희 지음, 개마고원, 2001) 등 참고. ↩︎
  4. 『악인의 서사』(듀나 , 박혜진 , 전승민 , 김용언 , 강덕구 , 전자영 , 최리외 , 이융희 , 윤아랑 지음, 돌고래, 2023) “창작 서사의 이런 입체성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명령만으로 특정 작품의 재현 윤리를 온전히 가늠하기란 무리에 가깝다. 여기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악의 서사와 재현의 문제를 엄밀히 논하려면 적어도 이 한 줄짜리 문장에 멈추기보다 이로부터 상세하고 정연한 고찰을 시작해야 한다.” (출판사 책소개 중에서) ↩︎
  5.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88~89쪽. ↩︎
  6. 주디스 버틀러,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이연숙은 이 글을 박준호가 번역한 “왜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가?”으로 처음 접했다. 웹진OFF) ↩︎
  7.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홈페이지 참고, ↩︎
  8.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조앤 W. 스콧, 공임순, 최영석, 이화진 옮김, 2006, 앨피) 참고. ↩︎

죽은 건물의 축제: 한국 시의 지난 10년

―황인찬, 김복희, 김선오의 사례

*『쓺』 2025 상반기
미세하게 수정하여 옮김

집은 결코 그렇게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모리스 블랑쇼1)

건물이 죽어간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에 건물은 살아 있었다
이제 내가 안다
―김복희, 「느린 자살」2)

제가 영원히 모르겠나이다
―황유원, 「알 수 없는 아티스트Unknown Artist」3)

1)『카프카에서 카프카로』, 이달승 옮김, 2013, 그린비, p. 108.
2)『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사, 2018.
3)『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현대문학, 2019.

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과학적 정확성에 대하여」(1946)라는 짧은 소설은 아주 이상한 지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어느 대륙에 강대한 제국이 있었다. 제국 사람들이 온통 골몰한 국가적 과업은 지도 만들기였고,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데 엄청난 자원과 인력이 투여되었다. 수 세대에 걸친 노고 끝에 드디어 완벽한 지도가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딱 제국의 크기만 한 제국의 지도였다.

지도가 완성되자 제국 사람들은 지도 만들기의 과업에서 놓여났다. 할 일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지성과 재능은 점차 완성된 지도를 반성하고 의심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지도는 너무 정확하고, 크고, 위대한 나머지 아무 쓸모가 없었다. 후손들은 그 거추장스러운 사물을 사막에 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뒤틀리고 우거진 지도는 사막의 부랑자들과 동물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처로 쓰이고 있다.

이 짧은 이야기는 일견 지식(과학적 정확성)을 향한 집착을 비꼬는 듯 읽힌다. 결국, 가장 정확한 지도는 가장 쓸모없는 지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읽어볼 수도 있다. 지도의 완성은 제국에 대한 재귀적 인식,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지도가 완성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지도를 완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지도가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물의 성격과 처분을 고민하게 되었다. 지도가 완성되어야 그것을 버리고 해체하고 전혀 다른 용도로 쓰는 등의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의 완성은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데, 지도 만들기에 집중한 선조와 그 기획을 반성하는 후대로 세대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이야기 속 지도는 쓸모가 없지 않다. 그것은 만든 이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활용되어 집 없는 많은 존재에게 거처와 피난처를 마련해준다. 지도가 죽는다, 그리고 집이 태어난다.

자연과 문화의 어느 영역에서나 선형적인 진보는 허구이겠지만, 특히 문학이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이후에 쓰인 시가 이전에 쓰인 시보다 더 낫거나 앞선 것은 아니고, 과거에 쓰인 시가 지금 쓰이는 시보다 꼭 못하거나 뒤처진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기의 시가 스스로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경우가 있고, 덕분에 시의 역사에 나름의 주기와 마디를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지도가 완성되는 순간처럼, 어느 시기의 시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완료되었고, 나는 끝났다. 또한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시들을 연결해보면 한 시기의 시와 이후의 시를 나누는 능선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나의 주장은, 한국 시의 역사에서 2010년대 중후반이 바로 그러한 결정적 순간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2010년대 시에서 두드러지는 재귀성과 반성성, 세련됨, 경제성은 2010년대가 성숙과 완료의 시기임을 표시한다. 괄목할만한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의 2010년대는 창안의 시대가 아니었다. 창조적인 시기의 예술에는 유치한 불순물들, 과도한 표현들, 선언들, 실험들, 감각적 찌꺼기들이 우글거리기 마련이다. 2010년대는 전반적으로 그러한 과도함이 소거되고 절약된 시기였다. 창안의 시기라기보다는 반성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약과 한계 속에서 많은 엄밀한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지난 10년 한국 시의 일면을 돌아보기 위해 세 권의 시집을 살펴보려 한다.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 김선오의『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이다.

지난 10년의 시를 돌아보기 위해 세 시인을 선택한 것은 단지 이들이 독특한 문체와 주요한 경향을 보여준 시인들이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물론 많은 비평적 주목을 받은 시인들이지만,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니다. 열거한 시집들에는 공통으로 어떤 건축의 불가능성, 어떤 건축물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다. 동시에 깨지거나 녹아내린 건물의 잔해를 어떻게 활용할지, 나아가 건축의 불가능성을 어떻게 타개할지 시험하는 나름의 방법이 제시된다. 그래서 세 시인의 시들을 통해 어떤 건축이 불가능해졌고 새롭게 가능해지는지를 점쳐볼 수 있다.

1. 두 번의 실망: 황인찬, 건축

1.1 “건축이 깨지는 순간

황인찬의 시들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운 시 중 하나인 「건축」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기하학에 대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건축」 부분(이하 동일)

황인찬의 시가 거의 언제나 그렇듯, 이 시도 지난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단지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만을 의뭉스럽게 암시할 뿐이다. 사연 있어 보이는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황인찬의 시에서 레퍼토리 같은 것이다. 이 시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어떤 기하학≒마음이 죽는 일≒건축이 깨지는 순간’이라는 묘한 공식이다. 세 항은 어떤 관계이길래 나란히 말해지는가?

어떤 기하학에 대해”: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에 거주하는 방식은 시적으로 헤아려질 수 있을 뿐 기하학으로 측량될 수 없다.4) 기하학은 거주의 형식에 대한 공허한 앎을 표상할 뿐이다. 황인찬의 「건축」은 이러한 횔덜린-하이데거식의 시적 공식을 비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적 거주’는 불가능하고 “어떤 기하학”만 가능한 세상이다. 꿀벌은 사라지고 텅 빈 벌집만이 남은 것처럼, 거주의 공허하고 규칙적인 형식만이 남아 있는 세상.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세상에 대한 기하학적 파악은, 주체가 돌이킬 수 없는 실망을 겪는 것과 동시적이다. 첫사랑의 정열이든 예술적 열정이든 정치적 신념이든, 세상에 충만한 의미와 동기를 부여했던 마음이 부서진 이후에야 주체는 세상을 측량 가능한 텅 빈 도형들의 연속으로 보게 될 것이다.

다만 나는 여름에 시작된 마음이 여름과 함께 끝났을 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마음은 뜨거웠던 만큼 빠르게 식는다. 한여름날의 사랑은 금세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핵심은 마음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후에 오는 깨달음, 즉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가 더 중요하다. 사랑이 끝나면 무의미한 생활의 시간이 남는데, 이 시간은 이별 직후의 격하고 낭만적인 통증보다 훨씬 길고 지난하다. 말들의 피상적인 반복·연쇄를 가능케 하는 기하학적 패턴은 이러한 시간을 배경으로 출현한다.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전통적인 서정시는 모든 현상, 사물, 풍경을 시적 자아의 ‘마음’으로 회수한다. 즉 주체의 마음은 세계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의미의 중심이고, 시적 건축의 중추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더라도, 임을 향한 마음이 끝나지 않는 한 이 통일성은 유지된다. 반대로 말해서, 마음이 죽었다면 서정적인 건축술은 불가능해진다―중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깨진 건축만이 가능할 것이다.

4) 마르틴 하이데거,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강연과 논문』,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pp 254-56 참조.

1-2. 실패하는 탈주술화

하지만 마음이 죽고, 냉정하면서도 공허한 인식이 출현하는 구도 자체는 새롭거나 흥미롭지 않다. 서정적인 건축술에 대한 서정적인 부정도 마찬가지다. 황인찬의 시는 이러한 실망―혹은 ‘탈주술화’―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황인찬의 시에서, 시적 주체가 순진한 열정에서 벗어나면서 다소 씁쓸한 앎(기하학)을 획득하는 것 자체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새롭지 않게 진술된다. 그러고 나서 기하학은 다시 한번 꿈에 의해, 어떤 끈질긴 주술성에 의해, 희극적 어리석음에 의해 비틀어지고 훼손된다.

분신사바가 끝나고
우리는 집으로 갔다

잘 모르는 선생님도 함께다

비가 올 때는 조심하세요 시야가 좁아서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쉬우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

이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이해한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
우리는 구분할 수 있고

왜 새가 날아오를까 왜 갑자기 선반에 있던 물건이 떨어질까

대답할 수도 있다

밖에서는 비가 자꾸 내린다

잘 모르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채널링」 부분

비가 와서 시야가 좁아지는 상투적인 복선은 (적절하게도) 다음 행에서 즉시 취소된다. 앎은 비가 내리거나 새가 날아오르거나 갑자기 물건이 떨어지는 등의 일에서 서정적 의미부여나 신비화의 여지를 없앤다. 심지어 이제 주체는 옳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진선미’―을 분별할 줄도 안다. 즉 그는 “어떤 기하학”을 확보한 주체로 자신을 소개한다. 거의 모든 것이 알려졌기에, 이제 새로운 것도, 놀랄 일도 없다. 이처럼 이 시의 주체는 ‘계몽된 근대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술(분신사바)이 시시한 놀이의 형식으로나마 유지되고 있고, 시의 마지막에는 마치 주술에 의해 소환된 귀신인 듯 “잘 모르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과학적 계몽이 세계를 “탈주술화(disenchantment)”했다는 것은 옛 학자의 순진한 진단이었다.5) 주체가 자신의 앎을 확언할 때조차 주술성/현혹(enchantment)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끈질긴 주술성은 앎 자체를 더 깊고 근본적인 어리석음에 말려들게 한다. 그토록 많은 것을 ‘안다’고 말하는 주체는, 정작 자기 앞에 있는 선생님의 정체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황인찬의 시에서 거듭 읽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의 레퍼토리이다. ‘나는 이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계속 그것을 합니다. 나는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습니다.’6)

5) 막스 베버,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전성우 옮김, 나남, 2002.
6) 이러한 태도를 ‘냉소적 이성’(페터 슬로터다이크)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손쉬운 해석을 하기보다는 안드레아 롱 추의 “실망의 로맨스”와 연결지어보려 했다. 롱 추의 통찰은 냉소적 이성처럼 ‘이성의 모순’에 의한 설명보다 욕망이나 정서에 의한 설명을 제공한다.

1-3. “실망의 로맨스

이제 황인찬의 이러한 시적 태도를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책의 중요한 통찰과 연결지어보고 싶다. 미국의 트랜스젠더 저술가 안드레아 롱 추의 『피메일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이년쯤 전에 이 책을 친구에게 추천받아 읽게 되었는데, 책의 말미에 나오는 다음 문단이 황인찬의 시를 강하게 환기했다.

이것을 실망의 로맨스라 불러보기로 하자. 당신은 무언가를 원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어떤 대상을 찾아냈다. 특정한 사람일 수도, 정치학일 수도, 예술 형식일 수도, 딱 맞는 블라우스일 수도 있다. 당신은 그 대상에 애착을 가지고서 따라다니고 들고 다니고 TV에서 본다. 어느 날에는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어느 날에는 그렇지 않다. 어느덧 어쩌면 그 대상이 결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덮쳐온다. 하지만 진짜 실망스러운 일은 이것이 아니다. 그다음 국면이야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실망스럽다. 당신은 그 대상을 간직한다. 계속 따라다니고 서랍에 넣어두고 물을 주고 말을 붙인다. 그것은 여전히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도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는 것. 잘 알게 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 이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실망이 그 모든 욕망을 구조 짓고 가능케 한다.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원한다면, 결국은 아무것도 원하지 못할 것이다.7)

여기서 롱 추가 말하는 실망은 트랜스젠더 여성[male to female]으로서의 경험과 불가분하다. 롱 추는 “실망의 로맨스”를 말하기까지 대단히 논쟁적인 화두들을 거치는데, 그것들을 생략하고 이 대목만 발췌하여 시와 연결짓는 것은 병렬독서의 나쁜 버릇(‘탈맥락화’)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롱 추가 들고 있는 다양한 예들―사람, 정치학, 예술 형식, 블라우스―은 실망과 관련한 논의를 저자의 논점보다 넓게 확장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위의 구절에 나타난 롱 추의 가슴 아픈 통찰은 실망이 반드시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정도로 근본적이라면, 실망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 첫 번째 실망은 우리가 호들갑스럽게 기대하고 소망하고 원했던 무언가가 환상이었음을, 실상은 별 것 아니었음을, 구원을 주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그러나 더 중요한 두 번째 실망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시는 대단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은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실재하지 않다는 것을,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돌보고, 그것을 한다. 이것이 황인찬의 시가 ‘두 번의 실망’을 그리는 희극적인 방식이다. ‘제 마음이 죽었는데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죽었다’는 진술은 소박한 실망, 첫 번째 실망을 나타낸다. 반면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라는 진술은 근본적인 실망, 두 번째 실망을 나타낸다. 왜냐면, 정말로 실망스러운 것은, 무언가 끝장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끝장나버렸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실망은 분명히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이 상처는 여전히 낭만적으로 채색될 수 있고 다른 대체물로 봉합될 수도 있다. 두 번째 실망은 마침내 상처 자체를 진부하고 평범한 것으로 만들고, 이미 한 번 뒤집힌 세계를 다시 반 바퀴 돌려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실망 이전에는 믿음, 거창한 기치와 보편적인 가치, 대의와 확신, 애착과 열정이 있다. 실망 이후에는 냉소, 과장된 상처, 불평과 자기연민, 방황과 무기력, 벗어나려는 충동과 폭력적인 반동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실망을 통해서만 주체는 실망스러운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황인찬의 시에서 ‘이중 실망’ 혹은 ‘두 번째 실망’을 공식화할 수 있다는 것은 시사(詩史)적인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많은 평자가 말한 대로, 한국 시의 1990년대가 대의(가령 민중을 대변한다는 대의)를 상실한 시기, 정치적 결집력을 잃어버린 시기, 내면에 침잠한 시기, 내 표현대로 하자면 첫 번째 실망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 중반이 두 번째 실망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까?8) 1990년대와 2010년대 시를 이런 방식으로 대질시킨 결과를 지금 자세히 논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비교가 많은 흥미로운 논의를 가능케 해줄 것이다.

7) 안드레아 롱 추, 『피메일스』, 위즈덤하우스, 2023, pp 176-77. 강조는 인용자.
8) 이것은 물론 한국 시의 역사 전체에서 1990년대가 최초로 ‘실망’을 드러낸 시기라는 뜻은 아니다. 1990년대와 2010년대가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위치 지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 공든 탑이 무너지다: 김복희, 느린 자살

2-1. 높이의 포기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은 거듭 읽어도 놀라운 시집이다.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정념과 인식 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힘겨루기를 한다. 자신이 취소한 것을 재개하고, 추락시킨 것을 날아오르게 하며, 또한 날아가는 것을 봉쇄한다. 이 충돌과 힘겨루기 때문에, 언어는 시집의 뒤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진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시집의 앞쪽에 실린 시들이 구상적이라면 뒤쪽에 실린 시들은 추상화에 가깝다.

이 글에서는 시집의 전반부에 실린 시들만을 언급할 것이다. 먼저 「느린 자살」을 읽어보자. 시는 건물의 무너져내림을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 건물은 더 이상 우편물을 받지 않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벽돌이라고, 유리라고, 나무 창틀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을 만든 장인들, 그 모든 것을 설계한 자, 대금을 지불한 자, 그들은 건물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건물이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느린 자살」 부분(이하 동일)

이 시의 건물이 낭독이나 책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건물을 시 혹은 문학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9) 화자는 건물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안다. 애초에 몰랐다면 슬프거나 아쉬울 일도 없겠지만, 건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건물의 무너짐을 어찌 단순하게 반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화자는 건물이 수많은 이의 노고로 지어졌다는 것 또한 안다. 건물을 짓는 데 일조했던 이들 모두 “건물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예술가뿐만 아니라 독자,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 등등이 기꺼이 모두 시라는 건물의 일부가 된 것이다. 블랑쇼의 말처럼, 집은 결코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건물은 죽어 마땅하다. 그것은 너무 높아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너무 빛나서 많은 고통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건물은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었을까.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건물이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건물이 꾸는 꿈속에
살아 있었다 건물이 종종 상상하는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아서 건물의 애를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건물이 가장 아끼지만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 인물은 누구일까? 심지어 건물을 애태우게 하는 인물이란. 아마도 천재일 것이다. 건물은 천재를 편애했다. 그 높이와 아름다움이 결정적으로 천재에 의존한 까닭이다. 건물을 높이는 것은 천재의 몫이었다(그리고 아마 다음 시대의 천재가 나올 때까지 건물을 유지보수 하는 것은 교양의 몫이었다).

높이는 높낮이의 분별을 부른다. 높은 것이 만들어지면 낮은 곳이 생기고, 빛나는 곳이 있으면 필시 그늘도 있다. 건물은 많은 고통을, 비참함을, 어둠을 낳았다.

실로
한낮 건물 앞에서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건물의 정수리에서 건물의 손바닥으로 뛰어내린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건물도 악몽을 꾸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
왼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오른쪽을 어둡게 하는 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 동시에 내리쬐는 빛을 보려고
느리게 죽어갔을 것이다

건물 앞에서 죽는 사람이 있었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건물은 자신을 의심한다. ‘내가 뭐라고 나에게 목숨까지 건단 말인가?’ 이 건물의 슬프고 간악한 특성은, 자신의 빛나는 높이가 야기하는 부작용을 건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이 빛나는 만큼 다른 쪽은 어둠에 잠기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건물은 높이 자체를 포기한다.

높기 때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물
그림자를 없애려고
높이를 포기한 건물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던 사람들은 건물 주변에 비극적인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무릎 높이의 건물에서 죽겠다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여기에 무서운 반비례 공식이, 이 시의 섬뜩한 통찰이 있다. 건물이 살아 있을 때는 그 건물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 반대로 건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면 건물 자체가 죽게 된다. 그리고 건물이 죽었다면, 이제 그것에 목숨을 걸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 시를 거듭해서 읽으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고통스러운 정념과 통찰이 느껴지는 것 같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을 보자.

건물이 죽어간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에 건물은 살아 있었다
이제 내가 안다

이렇게 절제된 문체 속에 어떤 애환이, 심지어 거의 악에 받친 분노가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내 감정을 투사해서 시를 과장되게 읽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화자가 건물의 죽음을 반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이 시의 주체는 높이의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화자가 건물의 죽음을 “안다”고 말하기 전에 실제로 건물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화자의 진술을 유추해보면, 사람들이 건물의 죽음을 모른다면 건물은 계속 연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죽음은 소박한 의미의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안다”는 화자의 진술이 죽음을 사실로 못 박는 것이다.

이 시에서 사실과 진술의 관계는 위의 두 모델 중 후자에 속한다. 진술과 사실은 재귀적으로 서로를 참조하며 강화한다: 건물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건물은 죽는다.

9) “건물의 앞마당에서 아름다운 책이 불타게 두었다/한 글자 한 글자 낱낱이 암송하거나 하지 않으면서”(같은 시).

2-2. 자살의 의미: 두 죽음의 일치

자살이라는 말은 중립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죽음’보다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최근까지 뉴스나 신문에서는 자살을 ‘극단적 선택’ 따위로 바꿔 말하곤 했는데, 마치 그 말이 ‘수행적으로’ 우리를 해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굳이 시의 제목을 ‘느린 죽음’이 아니라 “느린 자살”로 했을까?

상징의 숲에 사는 동물인 인간에게는 두 번의 죽음이 있다. 그것을 ‘외적 죽음’과 ‘내적 죽음’이라고 해보자. 의사의 사망 판정이 확정하는 것은 외적 죽음이다. 그 죽음은 심장이나 뇌 기능의 정지로 확인될 수 있다. 반면 내적 죽음은 살아갈 의미나 의지, 살아 있다는 느낌의 상실처럼 주관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람은 내적으로 죽었는데 외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고, 내적으로 살아 있는데 외적으로 죽을 수도 있다. 가령 앞서 살펴본 황인찬의 화자는, 내적으로 죽었지만 외적으로는 살아 있는 상태였다(“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자살은 거의 언제나 불일치하는 두 죽음을 일치시키려는 시도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내적으로 죽을 때 외적으로도 죽으려는 사람이다. 자살=내적 죽음+외적 죽음.

「느린 자살」에서 자살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건물이므로, 이 공식을 건물에 적용해보자.

화자의 “안다”는 진술이 이 두 죽음을 하나로 묶는다.

수많은 현대시에서 버릇처럼 되풀이되어온 시의 죽음은 내적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죽음은 비극적이다. 말하자면 존경받는 추락, 드높은 추락이었다. 시가 외적으로 살아 있었기에 내적 죽음을 거듭 상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시가 외적으로 죽어가더라도―팔리지 않고 무관심이나 무시 속에 처하더라도―발명과 창안으로 충만하다면 내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다. 2010년대 시에서 말해진 죽음은 내적 죽음이나 외적 죽음이 아니라 두 죽음의 일치다. 시는 자신의 소진을 반성적으로 인식했는데, 동시에 외적으로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2010년대의 시에 그려진 죽음은 종종 희극적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존경받지 않는 추락이었다. 이중적인 실망의 공식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나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2-3. 타개책: 비약도 자살도 아닌 새 인간의 길

한국 시의 2010년대는 반성과 소거의 시기였고, 시의 반성은 자기 자신을 취소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10) 「느린 자살」은 분명한 하나의 사례이다.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마 2010년대 후반부터, 사뭇 다른 시들이 쏟아져 왔다. 강렬한 표현 충동, 두꺼운 시집들, 자기도취, 말뭉치(corpus), 선언적인 문체, 장르적 혼종들이 돌아왔다.11) 일종의 ‘양적완화’가 일어났다. 아마도 몇 년 전 한국 시에서, 어떤 최소주의와 최대주의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교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정적인 교차점에 김복희의 「새 인간」을 놓을 수 있다. 말하자면, 사후적이고 결과적인 논평이지만, 「새 인간」이 이후의 어떤 시적 경향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새는 현대시에서 엄청난 비중을 가진 동물이다. 시가 새를 그토록 애호한 이유는, 무엇보다 새가 높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시가 사랑한 새는 보이지 않게 날고 있든, 안쓰럽게 추락했든, 인간사를 날카롭게 내려다보든 간에 높이와 관련된 존재였다. 보들레르의 시에서는 명백하게 그랬고, 김혜순의 시에서도 종종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야 느낀다/새가 날지 않으면 세상이 거울처럼 납작해진다는 것”(김혜순, 「안새와 밖새」12)). 새가 날기 때문에 세상에 높이와 깊이가 생긴다. 세상을 납작한 거울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시는 새처럼 높이 비상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의 새는 잠들어서도 날아간다는 것”(같은 시).

그런데 우리는 앞서「느린 자살」을 읽으면서 시가 높이를 포기했고 더 이상 높지 않다는 인식을 보았다. 「새 인간」의 놀라운 타개책은 이러한 인식과 연동되어 있다. 「새 인간」은 높이 비상하지 않으면서, 지상에 밀착한 산문의 수평적 펼침을 통해 새와 만남을 재개했다.13) 화자는 새에게 닿기 위해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을 부지런히 걸어 동묘 앞 시장으로 간다. 지금은 시인이 높이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시라는 건물 자체가 높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새를 만나려면, 새가 내려와 줘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새 인간”은 ‘나’를 위해 지상에 살기로 한 새, 높이를 양보한 새다. “이 조끼 가득히 날 수 있지만 나를 위해서 날지 않기로 마음먹고 죽고 싶지만 죽지 않기로 결심한 나의 새 인간”(김복희, 「새 인간」).

날아가지 않고 내 옆에 있어 준다니, ‘나’의 관점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새 인간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그는 날지 못하는 지상의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높이를 단념한다. 사랑은 새 인간에게 살 이유를 주지만, 동시에 날아가는 일을 억제하기를 요구한다. 살게 하는 동시에 구속하는 것―이것이 새 인간이 겪는 사랑의 양가성이고, 그가 날 줄 모르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이다. 「새 인간」의 산문적 수평성은 「느린 자살」의 절망적인 수직성을 해소한다. 이 시는 가로막힌 상승의 충동을 보살핌의 다정한 구속 속으로 구부렸던 것 같다.14) 하지만 낮 동안 내 옆에 머무르던 새 인간은 내가 잠들었을 때는 다시 날아오를 채비를 한다. “내가 잠든 동안에만 날개를 펼쳐 보이는”. 김혜순의 시에서 “나의 새”는 내가 잠들었을 때도 날아가는 반면, 김복희의 시에서 “나의 새 인간”은 내가 잠들었을 때만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아마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화자가 ‘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서, 깨어 있는 동안은 날아오름을 의식적으로 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날아오름에의 열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의 꿈속에, 무의식에 물러난 채 남아 있다.

10)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 또 한 명의 시인으로 송승언을 꼽을 수 있다.
11)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시인들로 박지일, 신이인, 조시현 등을 꼽을 수 있다.
12) 『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19.
13) 따라서 이 시는 언어의 폭을 활달하게 넓히면서 겨드랑이 땀 냄새처럼 시시콜콜하고 구체적인 지상(생활세계)의 요소를 수용한다.
14) 혹은 반대로 「느린 자살」이 「새 인간」의 배면에 있는 회한이나 좌절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시집상의 순서는 「새 인간」이 「느린 자살」보다 먼저다.

3. 남겨진 시인의 손: 김선오, 부드러운 반복

3-1. 유령 건축술

아마도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잇는 기념비적인 시로 평가받아야 할 김언의 「유령-되기」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중이고, 얼굴을 잃어가는 중이며 익명의 군중에 동화되는 중이다. 「유령-되기」의 화자는 강조해서 말한다.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김언, 「유령-되기」15)).

그런데 김언의 「유령-되기」와 달리 김선오의 시에 나오는 유령들은 이미 유령인 것이 퍽 자연스러운 유령들이다. 그러니까 새삼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해서 말할 필요도, 회한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인간의 눈에 유령은 그저 투명하거나 희미해 보일 뿐이지만, 유령들 자신은 서로의 미묘한 빛깔 차이를, 변화의 스펙트럼을 알아본다(김선오, 「농담과 명령」).16)

김선오의 유령들이 신선하다면, 죽어가는 느린 과정을 겪기보다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김선오의 시는 폐허를 “세트장”으로 취한다. 유령들은 죽은 세계를 거주지로, 놀이터로, 학교로 취한다. 이미 죽은 존재들에게는 죽은 세계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버려진 지도를 집으로 전환하는 존재들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사막의 부랑자, 동물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세트장은 때로는 “폐교”(「세트장」)이고 때로는 “폐장한 놀이공원”(「범세계종」)이며 때로는 “연쇄되는 무덤”(「풀의 밀폐」)이다. 시가 전개되는 배경인 이 세트장을 깨져버린, 무너져 내린, 시효가 끝난 ‘현대시’의 폐허로 읽어도 어색할 것은 없다.

김선오의 시는 시의 죽음 이후를 조건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전의 시와 날카롭게 단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죽은 것을 세트장 속으로, 유령의 모습으로 불러들여 부드럽게 반복한다는 의미에서다. 김선오의 시에서 낱말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버려진 지도에서 오려 붙인 기호들이고, 김선오의 시는 그 기호들로 구성된 회전하는 세트들이다.17) 이것은 시의 한 시기가 마감되고 완료된 이후에 가능해지는 독특한 건축술, 말하자면 ‘유령적 건축술’이다.

15) 김언, 『거인』, 문예중앙, 2011(개정판).
16) 황사랑이 김선오 시의 유령성에 주목한 바 있다. 황사랑,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문장웹진》, 2024년 3월호.
17) 김선오의 시를 최다영이 말한 ‘가속류 시’와 연결지어보면 흥미로울 듯하다. 최다영에 따르면 가속류 시는 어떤 작법을 구축한 후 기계적 효율성에 따라 언어를 복제·반복하는 시이다(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문학동네』 2024 여름호 참조). 하지만 이 글에서 분석하는 것처럼, 기호의 육체 없는 연쇄와 반복은 ‘시인의 손’이라는 잔여를, 혹은 공백을 남긴다. 따라서 김선오의 시는 가속류 시로 읽히는 특징이 있으면서도, 또한 그런 시의 조건으로 포섭되지 않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3-2. 손의 위치에 대한 물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선오의 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유령적 세계를 맴돌고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유령적 세계로의 대대적인 이전은 어떤 날카로운 질문을 세계 뒤편에 남긴다. 바로 ‘시인의 손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시를 짓고 건물을 짓는 시인의 손에 대한 물음은 건축이라는 주제에 비추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이 물음은 특정한 건축물/건축술이 아니라 시적 건축 자체의 조건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적기 위해 한 획을 그었다. 더는 글자를 쓰지 않고 손을 멈추었다. 종이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서랍을 열자 선은 녹슬어 있었다. 선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텐데. 왜 이토록 많은 세월을 지나온 것처럼 보이는 거지.

[……]

선 위로 수없이 많은 선을 긋고 났을 때 종이 위에 학교가 지어져 있었다. 선들이 학교를 이루고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곳의 선생이 되었다. 선으로 된 학생들이 나를 찾아왔다.
―「부드러운 반복」 부분(이하 동일)

처음 작업을 시작한 것은 “내 이름을 적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심심풀이였을 수도 있다. 의아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다음이다. 내가 긋고 잊어버렸던 선들이 그 자체로 살아 활동하며, 어떤 세월을 건너온 듯 보인다. 작업물이 ‘나’와는 별개의 생명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선 긋기를 훨씬 진지한 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선들이 하나의 건축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수없이 많은 선을” 그었다. 종이 속 학교를 지은 것은 ‘나’의 손이다. 그러나 곧이어 “얼떨결에 나는 그곳의 선생이 되었다.” 모르는 새 자신이 지은 세계에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수업을 했다. 나는 그에게 삼차원을 가르쳤다. 공이나 나무, 심장처럼 부피가 있는 것들, 그 속에 담기는 사랑이나 감기, 졸음 같은 것도 가르쳤다. 선으로 된 학생은 몸의 이곳저곳이 끊어질 듯했지만 언제나 열심이었다. 총명한 선이었다.

그는 종이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방법은 없었다.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선을 데리고 종이 밖으로 나갈 수는 없을까.

‘나’는 종이 속에 현실을 불어넣고 싶은 듯이 “선으로 된 학생”에게 삼차원을, 그 속에 담기는 마음을 가르친다. 하지만 어쩌면 너무 높은 차원을 가르친 것일 텐데, “선으로 된 학생”은 이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자 때문에 종이 밖 삼차원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종이 밖 세계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시 속 세계와 바깥 세계는 통행할 수 없이 막혀 있는 것일까. 시와 현실은 서로를 배울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차원을 나눈 시인의 손은 차원들을 잇는 유일한 통로일 것이다. 하지만 시를/학교를 지은 자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유령적 세상에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러면서 작업하는/노동하는 손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어느 날 선으로 된 학생이 쓰러졌다. 그는 숱한 점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점을 주워 담으며 울었다. 학교가 새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

울다 보니 나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흩날리는 지우개 가루 속을 걷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거대한 지우개의 형상이 나를 가르쳤다. 주먹 속을 보라고. 그러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고.

그러나 나의 주먹은 종이 밖에서 무언가 쉴 새 없이 적어대고 있었다.

팔 끝이 텅 빈 채로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마도 무자비한 지우개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은 “숱한 점으로 찢어지고” 학교는 “새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물론 학교를 지은 것이 나의 손이었던 것처럼, 그것을 지우고 해체해버린 것도 나의 손일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에 ‘나’는 작업하는/노동하는 손을 떠나 자신이 만든 종이 속 세상에 들어갔고, 그 세상의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나’와 ‘나의 손’이 따로 놀게 된 것이다. ‘나’가 슬퍼하든 말든, 늙어가든 말든 종이 밖의 주먹은 “쉴 새 없이” 작업 중이다. 짓고 부수고,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김선오의 시에서 종종 손(때로는 손바닥, 때로는 주먹)은 액자의 뒤편에, 무덤 밖에, 종이 밖에, 꿈 밖에, 단춧구멍 밖에, 세계의 배후에, 시의 마지막에 남겨져 있다.18) 판도라의 희망처럼. 이것은 인간적 세계가 남긴 유령적 잔여가 아니라, 반대로 유령적 세계가 남긴 인간적 잔여로 보인다.

이처럼 탈구된 손이 의미하는 바는 먼저 시를 쓰는 세계(손이 있는 세계)와 시 세계(화자가 접속한 세계)의 현격한 격리이다. 그것은 삼차원과 이차원처럼, 시인의 육체와 육체 없는 언어처럼, 인간의 세계와 유령의 세계처럼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차원은 서로 의존적이고, 원격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마치 게임 속 세계와 게임 밖 세계처럼. VR 게임에 접속해서 가상의 세계에 몰입할 때도, 그 몰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게임 밖의 손이 컨트롤러를 끊임없이 조작해야만 한다. 손의 존재는 게임의 몰입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인 동시에, 게임에의 완전한 몰입―게임 밖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망각―을 방해하고 저지한다. 때때로 유령들은 자신의 세계 배후에서 이루어지는 손의 작업을 감지한다. “어디선가 붓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 소리의 메아리 같은”(「농담과 명령」). 반대편에서 보면, 유령의 세계는 손에 쥘 수 있는 동전만큼이나 작아지기도 한다. 마치 시의 역사 전체가 한 편의 시 속에 응축될 수 있는 것처럼. 현기증 나는 프랙털 도형처럼. “놀이터가 사람만 해진다. 주먹만 해진다. [……] 이미 많은 동전이 그 속에 있다”(「투어」).

18)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① “그러면 나는 나의 두 손을/등 뒤로 감춘다.//손바닥을 위로 보이게/둔다” (「루시드 서머」); ② “색이 묻어나지 않는 붓의 머리 쥐고 손은 백지를 긋고 있었다”(「침묵의 푸가」); ③ “내장들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나지만 두리번거려도 손 모양 태양 두 개를 빼면 온통 캄캄한 어둠 속이라 한다”(「커피나 마실까」). ④ “거미줄을 떼어낸다. 손이 끈끈하다. 그러나 거미줄 여전히 눈앞에서 흔들린다. 비가 오려는 건가. 나는 주먹 속의 거미와 함께 돌아간다”(「나무에 기대어」). 위의 예들은 모두 시의 마지막 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때로는 손이 아니라 팔다리인 경우도 있다. ⑤ “나는 꿈속에 남겨졌다.//팔다리가 나 대신 무덤 주변을 뛰고 있었다”(「풀의 밀폐」).

3-3. 재귀성과 우연성19)

김선오의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떠오른 그림이 있는데, 네덜란드 판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우스 에셔의 〈손을 그리는 손〉(1948)이다.

‘재귀성’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언급되는 이 판화 작품에서, 손이 그리는 것은 자신을 그리는 손이다. 예술에서 이와 같은 재귀성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가 그림의 내용이 되는 순간으로, 한 시퀀스의 예술이 자신을 돌아볼 만큼 충분히 성숙했음을, 혹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음을, 혹은 공허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상태(성숙, 포화, 공허해짐)는 종종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재귀성의 선제조건은 그리는 나(주체)와 그려지는 나(대상)의 분할이다. 그다음 조건은 대상과 주체가 꼬리를 물듯 교차하며 다시 분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어떤 손도 단순히 주체나 대상인 채로 머무르지 않으며, 서로에게 대상이자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손들은 서로를 만들어내면서 서로를 반성한다.

이러한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예술이 자신의 조건을 의식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내용으로 삼게 되는 것은 ‘모더니즘 예술’의 식상한 특징이 아니냐고. “지구를본떠만든지구의를본떠만든지구”(이상, 「건축무한육각면체」)처럼 되는 것은 머리 아픈 모더니즘 예술의 고질적인 특징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20세기의 모더니즘 예술은 (에셔의 판화처럼) 재귀성의 가장 명료한 형식을 제시했을 뿐이다. 재귀성의 출현은 근대예술/현대예술만의 배타적인 특징이 아니라, 근대와 비근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다. 성숙과 반성의 시기마다 예술은 자신을 돌아보지만, 매번 전혀 다르게 돌아본다.

시의 역사에서는 우연성과 재귀성이, 창안의 시기와 성숙의 시기가 교차한다. 이 교차가 어떤 시퀀스를 이룬다. 김선오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 시퀀스들의 단절이 아니라 “부드러운 반복”이고, 반복되는 시퀀스들에 대한 의식이다. “계속되는 B, 타진되는 A”(김선오, 「시퀀스」). A는 구조이고, B는 운동이다. A는 재귀성이고, B는 우연성이다. A는 건축이고, B는 반(反)건축이다. B는 A에 반영되어 A를 풍요롭게 하고, A는 B에 침투하여 B를 견고하게 한다. 그리고 시퀀스들의 반복은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다: ‘어떤 죽음도 마지막 죽음이 아니고, 어떤 탄생도 최초의 탄생이 아니다.’

19) 허욱(육휘), 『재귀성과 우연성』,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23.

4. 결론…… 혹은 이어지는 질문들

살펴본 세 시집은 공통적으로 어떤 건축의 불가능성, 어떤 건물의 죽음에 대한 ‘앎’을 자신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인식은 ‘앎에도 불구하고’라는 제약 위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건축술, 타개책 들을 풍요롭게 시험하는 역설적인 동인이자 가능성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2010년대 중후반의 시가 무언가 닫히는 동시에 열리는 중요한 결절점에 위치한다는 내 생각은, 이 시인들뿐만은 아니지만 특히 이 시인들의 시를 따라 읽은 경험에서 나왔다.

다음의 두 질문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2010년대 중후반에 정확히 어떤 시퀀스가 완결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때 어떤 또 다른 시퀀스가 시작되었는가?

이에 대답하려면 또 다른 글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고 시 안팎을 넘나드는 많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한국 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었던 데에는 두말할 것 없이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기후위기와 생태적 재난에 대한 의식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또 2010년대 중후반에 문학계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의 반성을 가열하게 강제하기도 했을 것이다. 변화한 미디어 환경과 ‘인간’의 조건이 시의 작법을 변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런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요인들을 짚어보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자신이 속한 시간/시대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면서 그 시대를 수행적으로 구성하기도 한 소수의 시를 꼼꼼히 읽어봤을 따름이다.20)

이어질 작업을 기약하기로 하고, 하나의 전망을 제안하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만약 내 주장대로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이 동시대 한국 시의 중요한 교차점에 위치한다면, 그 교차점에서 죽음들의 관계 또한 전환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현대시에서 반복된 상징적 죽음: 외적 삶+내적 죽음
“느린 자살”: 외적 죽음+내적 죽음
이후의 삶(afterlife): 외적 죽음+내적 삶

실제로, 외적으로 죽은 것으로 보이는 시가 ‘내적 삶’을 획득하는 조짐이 나타나는 중이다.

발밑에 있는 것

땅 밑에 있는 것

죽은 것

죽은 줄 알았던 것

태어나기 직전인 것

우글우글한 것
―윤지양, 「입덧」 전문21)

무언가 땅밑에서 우글거린다. 땅 위에서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다는 신호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에게 어떤 메스꺼움이나 현기증으로 먼저 감지될 뿐이다. 따라서 ‘이후의 삶’은 정신승리라는 오명을 짊어질 수 있을 텐데, 외적으로 죽은 듯 보이는 것을 단지 몇몇 주체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감지하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주관적 믿음으로 미리 지탱되는 삶일 것이다.

죽음을 선포하는 것(신의 죽음, 인간의 죽음, 예술의 죽음, 주체의 죽음……)은 ‘현대’가 자신을 현대로 내세우기 위해 반복하는 고질적인 버릇이다. 물론 이 죽음들은 과장된 것이었다. 첫 번째 실망은 죽음을 공표하지만, 두 번째 실망은 죽음의 습관 자체를 사소하고 진부한 것으로 만든다. 버려진 지도를 집으로 취하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정말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어떤 죽음도 최후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도, 인간도, 예술도 유령 공동체의 실망스러운 일원인 탓에. 그들의 모든 찌꺼기가 높고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라 넓고 지저분한 집을 이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앎이 시를 수행적으로 죽일 수 있다면, 아무것도 죽지 않았다는 믿음은 시를 살릴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적어도 시의 생사에 관한 한 앎과 믿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20) 한편 다음과 같은 가설을 생각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1990년대에 시작된 한국 시의 어떤 시퀀스는 2010년대 중후반에 완결되었다. 그사이 시는 세계와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웅대한 자아에서 독립해 내면의 복잡성을 발견하고, 폭발하는 전집의 나날과 전투적인 “사춘기”(김행숙)를 지났다. 이 ‘개인’은 “간결한 배치”(신해욱)를 시험하고 투명한 유령이 되어갔으며(김언) 마침내 자신의 소진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가설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려면 훨씬 많은 시인의 많은 시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21)『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