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예소연에 대한 노트1)

1) 이 글을 탈고하고 나서 예소연의 소설집 『사랑과 결함』(문학동네, 2024)이 출간되었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예소연의 소설들은 최초 발표된 것을 따르며, 출처는 다음과 같다. 「분재」(『현대문학』 2021년 12월호, pp. 80~99), 「사랑과 결함」(『현대문학』 2022년 11월호, pp. 72~101), 「아주 사소한 시절」(『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6~82), 「우리는 계절마다」(『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그 개와 혁명」(《문장웹진》 2024년 1월호), 「우리 철봉하자」(『문학들』, 2024년 봄호), 「그 얼굴을 마주하고」(『릿터』 2024년 4/5월호).
이하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페이지만 밝힘.

1. 돌봄과 고독

예소연의 소설을 읽으면 상충하는 힘들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상대적으로 긴장을 해소해 주고 화해의 국면에 도달한다. 반면 어떤 소설은 완강한 충동,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도가 두드러지며, 그것이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 어떤 소설은 다정하게 헤어짐을 그리지만, 어떤 소설은 비장하게 고통스러운 공생을 그린다. 애틋한 공감을 자아내는 일상의 묘사가 있는 한편, 세속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심연도 있다. 물론 한 작가의 소설들을 두 측면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예소연의 소설을 따라 읽다 보면, 그의 소설이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이 모순이 작품들에 뜨거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이 에너지는 모순이 모순이 아니게 되는 지점까지, 양극단에 있는 듯 보였던 것이 엉키고 뒤섞여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막 주조되고 있는 작품 세계의 생명력과도 같은 이 뜨거운 불순함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의 방법으로, 이 글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돌봄과 고독이다.

돌봄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을까? 먼저 자기 배려 혹은 자기 돌봄에 대해서. 「우리 철봉하자」에서 동갑내기 친구 맹지는 ‘나’에게 자기를 돌보라고 촉구한다.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pp. 162~63). 여기서 맹지가 ‘나’에게 주문하는 것은 ‘너 자신을 알아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돌아봄, 반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 돌봄을 위한 관문이다.

왜 맹지는 ‘나’에게 자신을 돌보라고 말했을까? 맹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나’도 채팅 앱을 통해 남자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데 소설에 그려진 정황을 보면 남자들은 (완곡하게 말해서) 사랑할만한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에,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님을 알면서도 남자와의 일회적 만남을 반복해왔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섹스하며 견딜 수 없는 마음을 키워”(p. 163) 왔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로움 혹은 공허함을 자신과 닮은 동갑내기인 맹지와의 관계로 해소하려 한다. ‘나’는 맹지에게 같이 살자고 어필하는데, 그러면서 다소 무턱대고 맹지의 생활에 침투(?)한다. “너를 돌봐야 해”라는 맹지의 당부는 ‘나’의 구애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당부는 다정한 것이지만 뼈아픈 구석이 있다.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

둘째는 아픈 가족의 간병처럼 가까운 타인에 대한 돌봄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나’는 자신의 아버지 ‘태수 씨’를 돌본다. 태수 씨는 암 투병 중이다. 여기서 돌봄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이다. 그러나 돌봄이 가까운 이를 간병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그 개와 혁명」이 감동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돌봄이 누군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과 떼어놓을 수 없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할 수 없게” 되는데, 이러한 앎은 더 풍부하게 관계할 수 있게 하고 더 공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마리아 푸이그 드 라 벨라카사가 “돌봄의 문제matters of care”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돌봄은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관계를 두텁게 하는 실천이면서, 앎과 무지의 경계에 개입하고 관여하는 인식론적·정치적 실천이기도 하다.3) 소설에 그려진 정황은 태수 씨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범주화(86세대, 운동권……)를 허용하지만, 그러한 범주화가 “한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태수 씨의 장례식에서 독자적인 연극을 진행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그 역사를 이어 쓰면서 변형을 가하는 수행이다.

그렇다면 고독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새롭게 해볼 수 있을까? 돌봄과의 관계 속에서 고독은 특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돌봄은 관계 지향적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고독한 사람이 보살핌과 관심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하고, 고독 속으로 침잠하며 자신의 고립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고독이 해소되려면 누군가의 삶은 보일 수 있고, 이야기될 수 있고, 설명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번역-설명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손실이, 모종의 소외가 일어난다. “아빠가 그런 내 어깨를 붙잡고 얼른 설명해보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우리는 계절마다」, p. 317). 고독은 우선 ‘설명할 수 없음’으로 체험되고, 고독한 자는 설명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단념의 시간을 거친다. “친구에게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며 고작 그들이 원할 만한, 그럴듯한 비밀만 털어놓는 청소년이 되었다”(「아주 사소한 시절」, p. 80).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고독한 자의식은 ‘어차피 말해봐야 너희들은 모를 거야’ 같은 오만함과 연관되는 것도 사실이다. 설명 불가능성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특권적으로 과장하는 면도 있고, 반대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어떤 오만에 의해 보상되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독한 사람은 설명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데, 애초에 설명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을 이해해야만 해소될 수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감히 이해하지 못한다. 고독은 이러한 모순 속에 기거하는 상태이다.

보살핌과 관심을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점에서, 고독한 사람은 그야말로 어려운 “돌봄의 문제”다. 「사랑과 결함」의 화자에게 고모는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 아닐까? 고모는 연민을 자아내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위엄을 지닌 사람이다. 고모는 ‘나’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요구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힘겹게 하고 미움을 느끼게 하며 심연에 휩쓸리게 하고, 관계를 가학적인 게임으로 만든다.

그런데…… 더욱 기이한 모순은, 고독이 매혹과 관련 있으며, 때로는 그 자체 매혹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에서 화자는 말한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일 강렬하게 나를 매혹했던 주제는 그것이었다. 죽음과 은총. 완전히 생을 망각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이끌림”(p. 69). 「사랑과 결함」의 어린 화자는 고모의 향정신성 약을 한 움큼 삼킨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잃어갈 때 “몹시 충만하고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p. 94). 형언할 수 없는, 세속의 언어를 초월하는, 끔찍하면서도 황홀한 죽음의 경험. ‘죽음의 경험’이라는 말은 가장 오래된 모순을 품고 있는데,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경험, 다른 모든 경험의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론적 경험이다. 따라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경험, 소통할 수 없는 경험이다. 고독은 이러한 경험에 강박된 트라우마적 매혹과 관련이 있다.4) 일찍이 모리스 블랑쇼는 이 점을 간파하고 깊이 파고들었다. 이미지에 대한 애착인 매력은 고독에 상반되지만, 기이하게도 가장 강렬한 매혹은 고독 그 자체이다. 그러한 매혹이란 “고독한 전능과 마주하고 있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어떤 종류의 해방인데, “사실은 자신을 벗어나 빠져들게 되는 데서 오는 해방”, 즉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5) 블랑쇼가 암시하는 것은 매혹의 본체가 다름 아닌 죽음 충동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소연의 소설에서 매혹과 고독과 죽음의 묘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지니면서부터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주변을 맴도는 애타는 방황의 과정이 된다.

「사랑과 결함」의 고모가 ‘나’에게 전승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런저런 요인으로 설명되는 병(우울증)이 아니라 설명할 길 없는 고독일 것이다.

2) 이 소설에서 ‘나’와 맹지가 헬스장에서 만나 함께 운동하는 친구가 된다는 것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소설의 결말에서 말해지는 자기 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 혹은 자기계발과 어떻게 겹쳐지거나 분리되는 것일까?

3) 벨라카사가 말하는 돌봄의 문제는 브뤼노 라투르의 “관심의 문제matters of concern”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우리가 한낱 도구로, 이미 구성되었기에 다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는 자신의 복합성을 드러낼 때 관심의 문제가 된다. 벨라카사가 라투르에 제기하는 문제는, 관심의 문제 역시 이미 관계망 안에 들어와 가시화된 사물/문제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들어오지 못한 것,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관심의 문제로 만드는 적극적 실천이 돌봄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 벨라카사는 돌봄이 관심의 집중된 분배라고 주장하며, 또한 그렇기에 돌봄이 항상 잔여와 공백을 남길 수밖에 없는 실천이라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 Maria Puig de la Bellacasa, “Matters of care in technoscience: Assembling neglected things”,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41, No.1, pp. 85-106 참조. “관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참조.

4) 매혹이 근본적으로 트라우마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작품이나 풍경, 아이돌 등에 대해 느끼는 매력은 이러한 근원적 매혹의 대체물일 것이다. 하지만 재현적 매력도 극한에 이르면 근원적 매혹에 버금가게 된다.

5)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6, p. 60.

2. 나의 말이 아니면서 나의 말인 것

우리가 고독을 느끼거나 죽음에 매혹되는 이유는 우리가 ‘나’의 한계(이것은 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문학의 원동력인 것도 같다. 소설에는 일인칭을 사용하면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방법들이 있다. 먼저 간단한 방식은 복수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분재」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독자는 교차로 목소리를 들려주는 화자들을 통해 할머니와 손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도 그의 마음속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좀더 복잡한 방법도 있다. 「사랑과 결함」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나’가 말한다. 그러나 이 ‘나’는 이미 한 사람이 아니다.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사랑과 결함」의 첫 문단을 보자.

잠을 많이 자면 머리가 이상해진다. 그런데 나는 그 이상해지는 느낌이 좋다. (p. 72)

그리고 다음 문단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고모가 나에게 한 말 중 유일하게 동의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곳)

독자는 이 세 문장을 연달아 읽으며, 소설의 화자가 어쩌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리라는 것, 그리고 이 소설에서 고모가 중요한 인물이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단의 연속된 배치는 한층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 문단의 ‘나’는 고모인가 화자인가? 그러니까 저 두 문장은 고모의 말인가 나의 말인가? 물론 “고모가 나에게 한 말”이다. 분명 저 문장을 화자가 말하기 이전에 고모가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아닌 고모의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 말은 화자가 의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말”이어서 화자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 앞서 타자의 말이었지만, 이제 나의 말이기도 하다. 고모의 입에서 ‘나’의 입으로 전해지는 성찬식 빵처럼, 고모의 말이 ‘나’의 말이 될 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형을 겪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구성하는 타자를 미워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에게서 부모와 닮은 부분을 발견하고 몸서리치듯이. 하지만 그것을 도려내 없애려 한다면 ‘나’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타자가 없다면 애초에 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증보다 더 복잡한 관계 속으로 말려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타자의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하는 일, 그러면서 타자의 말이 나를 구성하도록 하는 일―거기서 오는 모든 치명적인 뒤엉킴을 감내하는 책임과 정직함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 특히 핵심적인 윤리이다. 또한 (유전자나 재산이 아니라) 의 전승, 이것은 특히 문학적인 가능성인데, 그러한 전승은 고모와 조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연작으로, ‘어둠의 성장소설’이라 불릴 만하다.6) 상승이나 화해보다 갈등과 고통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에 대해서는 가능하다면 별개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싶다. 이 글에서는 「우리는 계절마다」의 마지막 부분만을 살펴보겠다. 거기서는 독특한 ‘교육’의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이 연작소설에서 선생이나 부모는 스승의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위험하고 내밀한 스승이 존재한다.

「우리는 계절마다」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은 미정 엄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순리를 강요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희조[연작소설의 화자]의 세상에 그렇지 않은 단 한 명의 존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7) 미정 엄마는 다른 어른들과 좀 다르다.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꿰뚫어 보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른이 마땅히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체면이나 권위, 도덕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담대함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힘은 그의 삶이 정상적인 궤에서 이탈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 “딱 갖출 것만 갖춘 전형적인 젊은 엄마”(p. 318)처럼 보였으나 남편의 죽음 이후 주체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미정 엄마는 미정의 병실에서, 병문안하러 간 윤다혜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부른 건.”
미정의 엄마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네는 결코 걸레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어쩐지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미정 엄마에게서 어떤 어른다운 힘을 느꼈다.
“자, 따라 해봐. 나는, 걸레가, 아니다.”
(……)
나와 윤다혜는 뜻 모를 그 말들을 천천히 따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거리자 윤다해도 훌쩍거렸다.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은 그렇게 이상한 주문을 외며 기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미정 엄마가 침대를 빙 둘러 와서 나와 윤다혜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살아. 그렇지만 결코 그들과 같아질 필요는 없단다. 나는 남편이 죽고 나서 활력을 되찾았어. 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pp. 327)

이 대목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기묘한 (매우 치명적으로 뒤틀릴 수도 있는) 의존 관계를 보여준다. 미정 엄마는 아이들이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는 바로 그 말(“걸레”)을 과감하게 취하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준다. 이것이 그의 “위엄”이자 “어른다운 힘”일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당당함은 자기 삶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기묘한 공모 관계다. 가르치는 자는 분명 배우는 자에게 어떤 힘을 주지만, 자신이 이미 갖고 있었던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힘을 줌으로써 비로소 자신도 힘을 얻는다. 스승의 말은 아이들이 끔찍한 현실을 직면케 하지만, 동시에 말의 반복을 통해 그 현실의 지배력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말의 놀라운 힘이 아닌가? 사람을 예속하고 상처 입히는 그만큼 치유할 수도 있는 악마적인 힘. “걸레”라는 말이 ‘나’를 예속시키고, 호명이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수치스럽게 한다면, 그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할 때, 말이 갖는 예속의 힘은 경감될 뿐 아니라, 나를 강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반복을 지시하는(“따라 해봐”) 타자의 말이 필요했다. 몇 페이지 뒤에 나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치유의 현장에서 벌어진 교육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p. 328)

소설의 결말인 이 자립의 다짐은 타자와 자기의 온건한 화해와는 사뭇 다른 결론이다. 출발점에 있는 자기가 자기의 부정(타자)을 마주해 갈등과 분열을 겪고 더 높은 수준에서 통합(화해)되는 것이 가장 상투적인 도덕적 변증법이다. 예소연의 연작은 그러한 도덕적 교훈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연작에 그려진 윤리적 변화는 타자의 압도적인 우선성으로부터 ‘자기’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기원에 있는 자기란 없기에 자기는 양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되어야 하는 무언가이다. 하지만 이 창조는 철저하게 타자에 빚지고 있다.

분명 우리를 자기로 ‘만드는’ 것은 타자의 말이다(미정 엄마 같은 ‘어른’은 아니었지만, 또 어조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 철봉하자」의 맹지도 이러한 타자이다). 이렇게 자립을 명령하는 타자들을 스승이라고 한다면, 한 인간의 자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스승이 필요할까? 마치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같다. 예소연의 소설에 그려지는 전이와 전승은 다음의 역설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자립한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것이다. 자립을 돕고, 촉구하고, 명령하는 타자에 대한 의존 없이 인간은 자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립은 의존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왔고, 그만큼 (의존성을 격하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비판받기도 했다. 예소연의 소설은 자립이나 의존 중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함이란 곧 의존함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한편 예소연의 소설에 종종―사연 있을 뿐만 아니라―‘위엄 있는’ 어른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예소연 소설의 어른들은 모범적인 ‘롤모델’이나 귀인들로 이상화·낭만화되어있지 않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기득권’처럼 단순히 적대시되고 고발되는 대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은 표면적으로 애증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의 양상을 뜯어보면 ‘사랑과 미움’의 양가성보다 더 복합적이다.

6) ‘어둠의’라는 수식의 의미는 무엇보다 예소연의 연작들이 규범적인 의미의 ‘성장’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장’은 집합적 차원에서 발전과 개발, 팽창을 뜻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부정성이나 부조리와의 타협과 화해, 그로 인한 성숙을 뜻하기도 한다. 근대의 성장소설을 세계의 부정성을 마주해 방황을 겪는 근대적(부르주아적) 인간 주체가 부정성을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면서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이런 해석을 일반화해서 성장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근대화/자본주의화하는 국가와 주체를 화해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가 이런 주장을 담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이 분석은 완벽하게 설득력 있지만, 소설 장르에 대한 이런 비판적 해석―멀리서 읽기―의 결과에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이런 비판적 방식은 실증 가능한 지식으로 자신의 설득력을 보충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본주의적·국가적 논리로 실증되고 표상될 수 있는 ‘성장’만을 유일한 성장으로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 즉 실증 가능한 것과 이미 실증된 것을 재차 확증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설득력을 강화한다. 자신이 비판하는 ‘성장’의 전형적 방식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지금 성장소설에 대해 말하면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실증되는 종류의 성장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성장’이 있느냐이다.

7)「예소연·최선교 인터뷰」, 『소설보다』 2023 겨울, p. 178.

3. 말 없는 포옹

「사랑과 결함」에서 고모의 고독은 “소박맞은”(p. 80) 그의 처지라든가, “모계 유전”(p. 96)이라든가, 호르몬 이상에 대한 의학적 진단이라든가, 이런저런 사회적 이유로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설명될 수 없는데, 고독한 자는 그러한 환원과 설명 때문에 더욱 소외될 뿐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악화시킨다면, 그것은 유익하거나 좋은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명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더 잘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써야 할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는 식으로 겸허하게 물러나야 할까?

이 문제는 화자의 전 남자친구 수와의 관계에서 어떤 딜레마,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딜레마로 나타난다. 화자는 수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수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정해둔 한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너머의 문제는 회피하는 듯하다. “삶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는 도무지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p. 85). 화자는 수가 고모의 ‘금융 문제’를 도와준 일에 대해 그의 진의를 추궁한다.

“귀찮았잖아. 괜찮아. 나도 귀찮았어, 평생.”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평생 그 외로움을 책임질 수는 없잖아.”
“평생 외로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니?” (p. 95)

반대로 수는 화자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듯하다. ‘진정함’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타인에 대한 일상적 배려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 있지 않은가. 타인의 외로움을 완벽하게 책임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완전하게라도 보살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화자가 자문하듯이, 수에게는 심연이 없고 그런 것을 들여다볼 마음도 없다는 생각이 ‘나’의 독단이었을 수도 있다. 수는 자신이나 타인의 심연은 제쳐놓더라도, 어쩌면 얼마간 위선적일지라도, 불완전한 배려나마 성실히 해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태도란 건 내가 평생 시달릴 고통과 우울, 그리움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p. 95).

고독한 자는 소통을 단념하려 하지만(혹은 단념할 수 있는 척하지만) 사실 정말로 단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모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고독한 사람이 정말로 단념에 이르렀다면 그는 해탈한 상태일 것이고, 이해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야기하려는 욕망도 없을 것이고, 더 이상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간청하지 않아도 자신의 심연에 사랑하는 사람이 도착해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수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뒷걸음질 친다. 심연이 지식이나 의미의 형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삶으로 전염되고 전승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궤를 이탈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안전하고 편안한 일이 아니다. 화자는 수가 뒷걸음질 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내몰린 사람이 자신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것만큼 마땅한 일은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고 수가 벼랑 끝에서 자기보다 나를 위해주길 바랐다”(p. 99). 이렇게 ‘나’는 단념과 호소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내 안에 이식된 심연이 나를 결정하고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그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상 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것인 듯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독한 자는 자신의 고독을 어른스럽게 감추고 그럴듯한 비밀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자신이 하는 일이 허위이고 공허한 연극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진정성은 어두운 충동으로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덧붙이도록 하자. 인간의 관점에서 고독은 분명 관계에서의 이탈이지만 고독이 단순히 비(非)관계인 것은 아니다. 「사랑과 결함」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고독과 사물의 관계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인간 배우/행위자actor가 등장하는데, 바로 로봇청소기다. 처음에 로봇청소기는 꽤 ‘개연성 있는’ 사물로 보인다. 화자는 엄마에게 식기세척기를 선물하는데, 고모가 그것을 질투하는 듯하다. 그래서 화자는 고심 끝에 고모에게 로봇청소기를 선물한다. 중년 여성에게 (이를테면 태블릿이나 스마트워치 등의 전자제품이 아니라) 가사의 편리를 위한 가전제품(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을 선물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물론 여기서 있을 법함/개연성probability은 선(善)이나 합리성을 의미하지 않고, 사물이 자연적 사실에 부합함을 뜻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는 일상적 편견에 부합함을 뜻한다.8)

그러나 이렇게 매우 일상적이고 있을 법한 사물로 보였던 로봇청소기는 도구적 역할을 벗어나 괴물로 귀환한다. 고모에게서 수의 손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그것은 청소하지 않고 마치 시위하듯 벽에 ‘머리’를 힘껏 찧는다. 사물의 이러한 변신은 절묘하면서도 놀랍다.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올 때, 있을 법함/개연성 자체가 내파되어 공포로 변한다. 수는 고장 난 청소기를 두려워하는데, 이유 없는 두려움은 아니다.

“겁이 났구나?”
“겁? 그게 다가 아니야. 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 로봇청소기는 나한테 화를 내고 있었어.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던 거라고.” (p. 99)

수는 이렇게 주장하는 것 같다. 사물에 별문제가 없는데 자신이 주관적으로 과장된 감정(“겁”)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사물이 정말로, 진짜로, 이상하다고. 어떤 도구가 기능에 맞게 잘 작동할 때는 그것을 걱정하고 살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문제”처럼 주어져 있다. 사물이 고장 나 목적과 기능에서 이탈할 때, 비로소 그것은 “돌봄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물이 예측 가능한 질서에서 벗어나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위기’이다. 달리 말해 위기는 사물들이 개연성을 잃어버렸거나 초과한 상태이다.

고독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탈해 있고, 고장 난 사물은 사물의 질서에서 이탈해 있다. 그런데 정작 둘은 서로 독특하게 관계하고 얽매여 있다. 일상적 관계에서 물러나 있는 ‘심연 속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로봇청소기는 고모 삶의 심연으로부터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듯 보인다. 거기에는 어떤 고통과 외로움으로 응축된 혼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도대체 고모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로봇청소기는 어떤 고독한 시간을 통과했던 것일까? 사물은 사물에 대한 앎의 질서(과학과 기술)에서 벗어날 때 위기로 육박해온다. 그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며 직면을 요구하는 세계의 “기괴한 얼굴”이다. 반대로 인간은 관계의 질서(사회와 문화)에서 이탈할 때 고독하다. 인간의 고독한 부분은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인간(人間)이 아니다. 사물은 위태로울 때 인간이고, 인간은 고독할 때 사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사물과 사물이 된 인간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괴물이다. 그것들은 일상적 관계 바깥의 불가해한 관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심연 속에서만 가능한 말 없는 포옹이 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달려가서 끝내 전원을 끄지도 못하고 청소기를 끌어안았다”(p. 101). 예소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윤리적 태도를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을, 그저 품에 안기. 마지막 장면에서, 고모와 엄마 사이에 오가는, 화해라고도 인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통 아닌 소통도 비슷한 일이 아닐까? 죽기 전 고모는 엄마에게 “민애야”하고 이름을 부를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말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엄마는 그 부름에 응답한다. “저도요”(p. 101). 그 공백 속에서, 침묵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어떤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8) 이러한 편견은 누군가의 개인적 잘잘못을 판단하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편견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개연성’은 일상적이고 상상적이며, 동시에 실재적인 관계에 대한 집단적 감수성이다.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긴 하지만, 근대소설의 규범인 개연성이 특히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아미타브 고시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참조.

추기(追記)

이 글에서는 작가의 일부 작품만을 다뤘을 뿐 아니라 작품들에 나타난 여러 흥미로운 측면 중 극히 일부만 짚어보았다. 아쉽지만 벌써 주어진 분량을 꽤 초과했으므로, 본문에 포함하지 못한 메모들을 붙여 글을 마감하려 한다.

(1) 예소연이 그리는 관계의 양상에는 시의적인 독특성이 있다. 「도블」9) 「내가 머물던 자리」10) 「분재」같은 소설들에서는 계획에 없었던 돌연한 합석이 그려진다. 「통신광장」11) 에서 ‘나’는 대화방에서 만나 며칠 대화를 나눈 여인2에게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p. 121)다면서도 만나자고 한다. 이렇게 종종 등장하는 우발적 관계들에는 물론 시대적인 이유와 맥락이 있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들, 고립을 벗어나려는 소망, 우발성이 허용하는 어떤 솔직함, 일시적 공동체……

(2) 젊은 여성이 조직에서 혹은 가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자기 의심도 눈에 띈다. 「우리 철봉하자」에서 강의 영상들을 검수하는 일을 했던 ‘나’는 자신이 “페미 같아”(p. 152) 보이는지 검열하고, 「그 개와 혁명」에서는 “요즘 여자들”에 대한 태수 씨의 말에 분개하기도 한다.

(3) 예소연 소설의 인물들은 종종 관계에 적극적인데, 이 적극성은 잘못 비칠까 봐 미리 조심하는 점잖음이나 손익을 따지는 신중함,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는 식의 ‘쿨함’과는 사뭇 다르다.

(4) 전반적으로 ‘개인’을 넘어서는 거대한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이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이것은 작가의 최근작 「영원에 빚을 져서」12)의 제목처럼 ‘나’의 주관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자신의 관점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오해와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은 작가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개인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대한 의식은 ‘나’와 세계의 윤리적 관계에 대한 고민이고, 언어의 한계에 대한 고뇌이면서, ‘나’의 언어를 넘어서려는 소망이기도 하다. 이 소망은 관계에 대한 희구가 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립과 외로움, 소통 불가능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5) 개인을 초과하는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은 한편으로 삶의 본질적인 수동성·피동성에 대한 회의로도 연결된다. 즉 주체는 삶을 결정하지 못하고 삶에 휩쓸릴 뿐이다. “삶은 지독히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니, 내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삶은 언제나 나를 쥐고 흔들 뿐이었다”(「그 개와 혁명」).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작가가 한 말처럼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13) 이렇게 태어남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면, 피동성은 누군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가 된다. 다만 그것이 각자에게 다른 장면으로, 다른 강도로, 다른 형태의 질문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이 문제는 특히 삶에서 겪는 고통의 인과를 따지고 들 때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잘못된 건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없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뺏겼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인데. (「아주 사소한 시절」, p. 67)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그냥 적당히 돈 없고 적당히 뭘 모르고 살아온 것일 뿐인데. (「그 개와 혁명」)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지만, 그 고통에 합리적인 도덕적 인과는 없다. 즉 고통은 잘못의 대가가 아니다. 삶이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고 존엄이란 무엇인가? 예소연의 소설 저변에는 이렇게 본질적인―너무나 본질적이어서 잊어버리거나 없는 셈 치기 쉬운―문제를 “오래도록 생각”하는 사색적 집념이 있다. 이 사색적 정열이 시의적인·감각적인 구체성과 어우러져 독특한 에너지가 되는 것 같다.

(6)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는 이러한 본질적 피동성을 조건으로 윤리적 주체의 ‘발생’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발생’이 현실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덕적 화해나 교훈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그 얼굴을 마주하고」에서는 앞 소설들에서 예비된 갈등과 실망이 지속되거나 심화되고 있으며, 그것들이 ‘자기와의 관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7) 앞서 말했듯 예소연의 소설에서 돌연한 마주침·출현이 종종 그려지지만, 더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오래된 것의 낯선 회귀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진돗개 ‘유자’가 태수 씨의 장례식에 난입하는 일이나 「사랑과 결함」에서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일처럼. 갑자기 시야에 들어와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 배우/행위자들은 일상적 관계의 연극성을 극적으로 폭로하는데,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재현되지 못하는 심층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9)『현대문학』 2021년 6월호, pp. 200~16.

10) 엔솔러지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안온, 2023, pp. 79~110.

11) 『LIM: 옥구슬 민나』 2024년 봄호, pp. 112~140.

12)『현대문학』, 2024년 4월호, pp. 188~251.

13)「예소연·최선교 인터뷰」, p. 171.

거대한 바람과 접이식 지도 2부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와의 대화

기후금융 연구/기후정의행진/기후우울증

기후금융 연구

희우
이제 자연스럽게 필드워크에 대한 얘기를 하면 되겠네요. 먼저 필드워크 하면서 인상 깊게 본 장면 혹은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부터 조금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서
필드워크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여의도에서 보내게 됩니다. 여의도가 한국에서는 금융산업의 수도 같은 곳이니까요. 증권사들, 한국증권거래소, 자산운용사들이 여의도에 밀집해 있고요. 정책을 입안하는 국회의사당도 있으니… 여러모로 정치경제의 수도 같은 곳이죠.
여의도의 마천루 빌딩에 들어갔을 때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들은 굉장히 평면화돼 있는데, 그게 금융의 시선을 잘 드러내는 이미지 같아요. 사실 창밖은 아주 울퉁불퉁하고, 갈등이나 적대가 많은 세상인데, 금융의 시선에서는 투자 대상으로 평면화되는 그런 이미지가 기억에 남아요.
기후금융 쪽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나기 전에, 제가 제일 처음 생각했던 이미지는 사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에 가까웠어요. 모든 걸 경제적으로 동질화하고 계산하고, 효율적으로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금융가들에게 그런 아비투스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분들이 기후 쪽에 관심을 가지고 금융적으로 뭔가를 해나가려 할 때는 다른 면모도 있어요. 기후 문제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기후 테마가 투자처로서 매력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걸 통해 지구과학과 기후변화 담론, 그걸 둘러싼 여러 가지 맥락들을 보면서 거리 행진 같은 움직임에도 참여하게 되기도 하지요. 그런 걸 보면서 이분들을 회색 신사 같은 이미지로만 본 제 관점이 오히려 평면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건 제 연구보다 좀 더 넓은 맥락이긴 하지만, ‘기후인’이라고 불리는 범주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 포함되는 존재들로는 싱크 탱크도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환경운동 단체들도 있을 테지만, 현재 시민사회에서 아직 특정한 범주로 구획하기 힘든, 하지만 기후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연루될 수 있는 모종의 이벤트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후가 아니었더라면 금융인으로, 운동가로, 연구자로, 예술가로 따로따로 살아갔을 이들이 기후 문제를 계기로 뒤섞이는 풍경들을 여러 군데서 보게 돼요.
하나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기후금융과 관련된 컨퍼런스에서는 대기업 출신 한 발표자가 ESG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 책 이미지와 책의 한 문장을 인용하는 거예요.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식물들의 것이다, 그런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기후위기나 인류세, 생태에 대한 감수성이 문단에서도 얘기가 많이 되는 걸로 알고 있고, 비판적 사회과학이나 운동 진영에서도 많이 얘기되고 있지만, 이제 그런 담론이 금융계와 산업계를 포함한, 거의 모든 영역의 언어에 부분적으로 침투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이런 상황을 냉소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만 기후위기에 대한 감수성과 윤리적 책임 의식이 그 자체로 ‘급진성’의 표지로 통용될 수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대한 생태적 비판이라는 계기 자체가 동시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재편이 된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자본에 친화적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감수성이 피상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그게 어디로 이어질지 미리 예단하지는 않으려 해요. 이제는 ESG 투자를 비롯해 기후위기에 쏟아지고 있는 정치적 관심과 자금의 흐름이―우리가 얘기했던 투자의 정치학하고도 연관되는 부분인데―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서 어떤 정치적 동학을 만들어낼 것이냐는 부분을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동학의 최전선에 있는 행위자들이 우리가 ‘기후금융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컨설턴트, 그리고 기업과 정부에서 관련 사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인 것이죠.

희우
그래서 그쪽을 연구하고 계신 거군요. 그런데 ‘기후금융’이라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여전히 생소한데요. 기초적인 수준의 설명을 좀 해주신다면요.

민서
일단 이 연구를 하게 된 문제의식부터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제가 관심 있었던 주제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가 어떤 지점에서 촉발되는가. 그걸 둘러싼 정치적 동학이 어떻게 전개되느냐는 건데, 그 중 석사과정 때 관심을 가졌던 게 20세기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복지 자본주의, 내지는 복지 정책이라는 키워드였죠. 인간 노동력의 상품화에 한계를 그었던 복지 정치의 흐름들이 20세기 복지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면, 지금은 인류세와 기후위기 담론의 유행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생태적 위기가 도래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20세기의 자본주의에 도래했던 위기와 그 한계의 근거가 인간의 노동적 성격이라는 이른바 ‘내적 자연’에 대한 문제였다면, 지금은 행성적 한계라고 부르는 ‘외적 자연’이 투쟁의 중심에 온다는 거죠.
기후위기를 여전히 부정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만(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죠), 다른 대다수의 소위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엘리트들은 기후위기의 실재를 부정하지는 않죠. 오히려 대규모 ‘녹색 투자’를 통해 환경 문제를 어떻게 새로운 경제 성장의 계기로 삼을지 고민하죠. 한국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저탄소 녹색성장을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 틀을 짰던 분이 현 정권에서 기후 관련 문제를 총괄하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를 이끌고 있죠. 이런 걸 보면 행성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기후위기, 이상 기후,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지금까지 굴러왔던 게임의 규칙만으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되는 위기로 나타나고 있고, 여기에 대한 대응으로 ‘녹색 자본주의’라는 새판 짜기가 일어나고 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 이 새판 짜기에 참가하는 주인공들은 누굴까. 이 과정에서 전개되는 기후 정치의 문법은 뭘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희우
그러니까 ‘복지정치’에서 ‘기후정치’로의 이행은 ‘내적 자연’에서 ‘외적 자연’의 한계에 대한 관리로 이행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구체적인 환경 문제나 다른 직업군, 혹은 운동 집단이 아닌 엘리트 주도 기후위기 대응,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의 대응 쪽을 보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민서
예를 들어 한국에서 기후 정치와 관련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말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탄소 중립’이 있고요. 2022년 초 이재명, 윤석열 대선후보가 토론회에서 기후와 관련된 얘기를 딱 한 번 한 적이 있어요.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한테 원자력 에너지를 확충하면 국제사회의 경제적 흐름이랑 어긋나는 게 아니냐, 하고 질문했던 게 있는데 여기서 ‘세계적 흐름’의 예시로 들었던 게 ‘RE100’, 그다음 ‘유럽연합 택소노미’였죠. 그런데 이 제도들이 모두 금융이랑 직결된 말이에요.
RE100은 ‘Renewable Energy 100%’를 줄인 말인데, 기업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100퍼센트 재생에너지로 조달한다는 캠페인이에요. 영국의 한 비영리 시민단체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화석 연료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한테 동참을 호소해서 일종의 서명을 받은 거예요. 여기 가입하고 실제 RE100을 달성한 기업들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등 꽤 되는데, 이런 변화는 국가의 강제가 아니라 민간의 자발적인 선의에 기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러면서 금융시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이 되었고요. RE100을 이행하는지가 친환경 경영의 지표처럼 되니까요. 이 상황에서 주요 정당의 후보가 미국도 영국도 유럽도 다 하는 흐름이 있고,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도 압력을 받고 있는데 정부는 기업들의 RE100을 어떻게 지원할 거냐고 물었던 거죠.
유럽연합 택소노미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수립한 친환경 투자의 기준, 그러니까 무엇이 ‘친환경’인지를 분류하는 체계에요. 요새 사실 ESG, 그린, 탄소중립 같은 말들이 유행하다 보니까 유럽연합 입장에서는 이른바 그린워싱(greenwashing)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진짜 그린이고 무엇이 가짜 그린인지를 판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그래서 유럽연합 차원에서 분류해 주겠다, 그렇게 만든 게 택소노미죠. 여기서 질문은, 이 택소노미가 애초에 왜 필요하냐는 거죠. 공적인 권력이 자신의 역량으로 모든 저탄소 전환을 이뤄내는 게 아니라, 무엇이 ‘녹색’인지를 가려내는 ‘신호’를 개별적인 경제 행위자들에게 발신해야 되기 때문에 필요한 거거든요. 유럽연합 차원의 공적 재정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민간 자본을 어떤 식으로든 유인해서 활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생겨나는 거지요. 그 돈을 어디로 흐르게 할 거냐. 여기서 아까 얘기했던 투자의 흐름, 특히 ‘매력적인 그린 투자’를 정하는 기준 설정의 문제가 등장하는 거죠. 『피투자자의 시간』에 나오는 표현으로는 이른바 ‘신용 할당의 기준’을 만들려고 했던 게 택소노미인 거지요.
한국의 대선 정국에서 기후와 관련하여 회자되었던 RE100, 택소노미 둘 다 결국 기후와 관련된 자본의 흐름에 대한 문제인 거죠. 기후변화 대응에서 (가령 말름 같은 논자들이 급진적 전환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보는) 공적 권력이 아니라 초국적 민간 자본, 이들이 투자하는 자본이 이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현실. 이걸 어떻게 볼 거냐는 게 제 문제의식입니다. 그래서 기후금융과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컨퍼런스, 심포지움, 세미나 같은 행사들을 참관하거나,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생산하는 말과 글에 대한 분석, 경우에 따라서는 이 행위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인터뷰나 관찰을 병행하고 있어요.
이 ‘기후금융’이라는 건 기후 문제는 금융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할 수밖에 없다, 혹은 해봄직하다 같은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담론적 현실이기도 할 것이고, 기후변화에 대한 모종의 대응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상이한 행위자들이 모여드는 장(field)이기도 할 텐데요. 소위 ESG 투자 같은 걸 하는 펀드매니저들, 각종 동향을 파악하는 애널리스트들, 기업 가치와 결정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신용 평가사들, 회계법인의 컨설턴트들, 여기에 대한 공적 규제의 틀을 짜는 국가의 금융 관련 기관들 등 협의의 ‘금융계’도 있겠지만, 기후위기 대응에서 기후금융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이들과 함께 전개되는 다른 정부 기관들, 씽크탱크, 사회운동들까지… 이들을 포괄하는 기후정치와 관련된 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려고 해요. 이 모두를 학위논문에서 다 다룰 수는 없겠지만, 큰 그림을 나름대로 그려보고 있어요.

희우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지금 기후변화에 대한 지도 그리기, 혹은 대응의 방식과 수단을 주도적으로 제공하는 게 (국가나 학문이 아니라) 금융이라는 거겠지요.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딜레마와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지금 한국의 금융사들, 관계자들의 분위기는 좀 어떤가요? 그들이 기후 문제를 재현하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 이런 것들이 좀 궁금하네요.

민서
지금 진행 중인 관찰과 분석이라 거칠지만, 인상 깊었던 것만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우선 경영학에서 ‘시간 지평(time horizon)’이란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10년 후냐 5냐 후년 아니면 평생이냐, 우리가 투자하거나 자금을 운용할 때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게 결국 어디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거죠. 이게 투자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고, 집합적인 정치건 개인적인 경제활동이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염두에 두는 시간의 길이가 모두 해당될 텐데요. 미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 파장의 크기와 길이는 이렇게 될 것이니 거기 맞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거죠. 가령 주식시장에서 일론 머스크가 화성을 간대, 아니면 생성형 AI가 뜬대, 이런 식의 트렌드들이 소문의 형태로 금융시장을 움직이게 되면 그 소문에 따라서 자금이 움직이게 되고, 이걸 사전적으로 돋우거나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수많은 상상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느끼기로는 기후금융에 얽혀있는 행위자들이 기후변화의 시간 지평을 굉장히 길게 잡고 있어요.
제가 만난 어떤 금융업 종사자는 보통 주식시장에서 하나의 트렌드는 5년, 10년 가면 정말 길게 가는 건데, 기후변화는 그거보다 훨씬 길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불가역적이고 장기 지속적인 트렌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 여기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말을 하신 분도 계세요.
여기서 저는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데, 금융의 핵심은 결국 금융 시스템을 일부로 해서 돌아가는 인류 사회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특히 투자라는 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내가 먼저 취득해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먹고 빠지는 게 핵심인데 근데 이제 기후변화라는 거는 그렇게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됐을 때 이 금융의 시간 지평과 금융을 그 부분 집합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금융의 논리에 점점 더 휘둘리고 있는 인류 사회 전체, 그 둘의 시간 지평이 심각하게 탈구돼 있다는 거죠.
기후변화라는 건 결국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양이 증가하면서 태양에서 지구로 보낸 열이 방출되지 못해서 대기 시스템이 바뀌는 거고, 이게 기후‘위기’인 이유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왔던, 농사를 짓고 생활을 영위해 왔던 대기의 질서가 교란되고, 이 교란, 변화의 속도와 내용이 인간의 과학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불확실성을 띠고 전개되기 때문일 텐데요. 이 기후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결국 (근대 계몽주의의 후손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태도죠. 정치 혁명이 됐건 사람의 생명이 됐건 무언가를 성취해내고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의 체계가 있었고 그게 특히 20세기에는 가시적으로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이어졌고요. 발전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결과가 20세기 특히 초중반에 (소위 ‘거대한 가속’이라고 하는)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배출했던 물질적 부하의 급격한 증가이고요. 그게 인류세의 출발점인 거지요. 인류세를 초래한 에토스라고 할까요. 낙관주의, 자신감, 믿음. 가령 일론 머스크가 보여주는 그 낙관주의와 자신만만함, 과학기술과 자본력으로 뭐든지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그런 태도. 영화 《인터스텔라》 보셨나요? 그 영화의 포스터 문구 중에 “하나가 우리는 해낼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런 문구가 있잖아요.

희우
그렇죠. 기억이 나네요.

민서
근데 영화 내용을 보면 그 문구는 좀 역설적이라고 느껴져요. 그 영화가 20세기에 나왔더라면, 혹은 지금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했다면, 자신감에 가득 찬 어조로 했다면 느낌이 달랐겠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그 영화 내용을 보면 거기서 우주로 쏘아 보내는 우주선은 일종의… 몰락한 테크노토피아에서 발사된 마지막 승부수에 가깝잖아요. 그러니까 그 문구는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래야만 한다고 주문을 거는 거에 가깝잖아요. 그 영화가 나올 때도 기후변화가 심각했으니까 그런 이미지가 나왔겠지만, 이제 거기서 느껴지는 (우린 해낼 수 있다, 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워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 저는 그런 느낌이 필드워크 하면서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필드워크를 하다 보면 결국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금융이라는 장이,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상승에 대한 기대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주식시장이 만약에 우상향하지 않는다(그게 어떤 지수건 간에)면 어떤 직군이든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상승이 항상 대전제로 깔려있고 그 믿음이 붕괴하지 않을 때만 돌아갈 수 있는 게 금융이라는 장인데요. 그런데 기후 관련 금융을 하는 분들하고 얘기를 나누다보면 이 분들은, 자연스럽게 여러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고 그 위기를 타개할 만큼 변화가 빨리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금융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니까, 그 대전제가 앞으로도 성립할 거라고 (인터스텔라 포스터의 문구처럼) 뭔가 강박적으로 이럴 거야, 이래야만 해, 라고 약간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 연사 한명 한명이 그런다기보다는, 이들이 모여있는 기후금융 장 전체의 대전제가요.

희우
그렇군요. 분위기가 조금 상상이 가기도 하는데요. 민서 씨가 가끔 저에게 필드워크를 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묻어나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고 얘기해주신 적이 있잖아요. 그런 장면들을 좀 더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어요.

민서
제가 참석했던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서시는 분들은 금융인의 특성상 가장 최신의 정보를 업데이트해서 갖고 와야 하는 분들인데요. 그분들의 프레젠테이션들을 보고 있으면 발표도 잘하시고, 형식적으로 정말 몰입도가 높았어요.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 서사에 이끌리게 되는데, 그 서사 속에도 약간 진실의 순간 같은 것이 육박해 올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굉장히 유명한 컨설팅 업체가 참가한 컨퍼런스 중 하나였는데 발표자분이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제 정보를 취합해서 동향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보니 PPT들을 계속 바꾸고 업데이트하는데 몇 년째 안 바꾼 슬라이드가 하나 있다.’ 그게 뭐냐면 각국의 탄소 감축 노력이 전혀 안 바뀌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의 무게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너무나 절망적인 느낌이 들죠.
왜냐면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증언하는 데이터를 내놓고 있지만, 기후변화가 진행되는 상황은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따라가고 있어요. 각국이 언제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얼마만큼 줄이겠다, 말들만 무성한 상황이고, 한국도 물론 예외는 아니고요.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움직임에 동행하는 국가와 시장의 문제가 지적되지 않을 수 없는 건데. 산업계, 금융계의 책임이라는 쟁점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텐데.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사실 이런 컨퍼런스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이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와중에 그게 전면화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 슬라이드 바로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되니까…… 이런 식으로 말씀하면서 직업적 소임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이럴 때는 뭐랄까, 현대사회에서, 각자가 밥벌이를 위해서, 각자의 직분이 허락하고 지지하는 범위 내에서 모종의 액션을 하며 사는데, 자기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정치인들도 그 정신으로 5년 후 임기를 생각하면서 정책을 펼 것이고, 펀드매니저들은 이게 수익성이 있다고 설득해 가면서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건데, 모든 흐름이 조화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그 결과가 충분한 대응의 부재로 귀결되는 느낌이 들어서, 연구하면서 느끼는 절망이 있어요. 어쨌든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산해내는 게 우리 같은 연구자들의 일인데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게 제때 의미를 가질 수는 있을까…… 이런 회의가 들어요.

기후정의행진

희우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은 ‘기후금융가’와는 다른 중요한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민서
제가 아는 한 펀드매니저분은 2022년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여를 하셨는데 2023년에는 안 가셨거든요. 왜 안 가셨냐고 물어보니까 너무 실망했다는 거예요. 기후 얘기를 해야 할 곳에서 왜 이렇게 기후랑 무관한 얘기를 많이 하냐는 거예요. 뭐 노동 얘기, 장애 얘기, 페미니즘, 정부 비판 등. 그래서 그런 데 너무너무 실망해서 안 가게 됐다는 거예요.
근데 정반대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급진적이었다고 실망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희우
맞아요. 그분은 말하자면 탈정치화된 기후정치를 기대했던 것 같은데, 제 주변에는 정반대의 기대를 하는 분들이 많아요.

민서
혹은 더 급진적이냐 덜 급진적이냐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 애초에 기후행진을 우리가 왜 하는가, 기후행진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도 많이 나왔어요.

희우
그렇군요…… 맞아요.

민서
희우 씨는 참여하셨던 입장에서 어떠셨어요?

희우
저도 굉장히 많은 걸 느꼈지만, 그리고 가서 아는 분들도 만나고 친구들과 같이 걷는 게 참 좋았지만, 저도 이 행진의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느낌이 좀 있었어요.
관련해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는데, 전반적이고 중요한 의제로 ‘탈화석연료’가 있잖아요. 근데 행진을 이끄는 트럭들 위에 발언자들이 한 분씩 올라와서 구호를 선창하는데 그중 한 분이 원래 화력발전소에서 일하시던 노동자였어요. 그분이 일자리를 잃은 것 때문에 발언자로 올라왔던 거로 기억해요. 그분이 자기소개하고 올라온 이유를 얘기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탈화석연료, 환경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일자리를 잃는 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정부 차원에서, 제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거나 보호해 줄 거냐 이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요. 결국 집회가 내세우는, 그리고 겨냥하는 목적, 그것을 위한 정치적 언어, 아주 강력한 구호 같은 것도 필요하잖아요.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슬로건이 꼭 필요하고, 하지만 그런 구호들이 담아낼 수 없을, 굉장히 복잡한 이해관계와 실존적 문제들이 당연히 있을 거예요. 제가 집회에서 느낀 불분명함이 그 사이에서 생겨났던 것 같아요.

민서
그렇죠. 희우 씨가 보셨다는,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가 요구했던 건 결국 기후정의 운동에서는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이야기하는 건데요. 지금 자본이나 국가부터 시민사회까지 기후위기를 전기로 모종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전환이 단순히 화석 연료를 대안적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에너지 전환 혹은 녹색 전환에 그칠 것인가 하면 그게 아니라는 거죠. 녹색 전환의 의미를, 단순히 녹색은 비화석 원료고 화석 연료는 갈색이고 이 갈색을 벗어나면 만사 OK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있을 것이고, 그 쟁점들을 예를 들면 아까 말했던 기존의 화석연료와 연계된 산업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생계를 누가 책임질 것이냐도 있을 것이고, 그 이행의 비용을 누구에게 분담할 것이냐는 쟁점도 있을 것이고요.
그리고 이 녹색 전환, 곧 탈탄소 전환을 위한 기술적 해결책의 시장을 통한 확산, 가령 전기차나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서 새로운 산업 패권을 이끌자는 게 선진자본주의 세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합의인데요. IRA 법안을 포함해서 녹색 산업을 먼저 우리가 육성하고 일종의 기술적 비교 우위를 확보해서 이걸 새로운 이윤 창출의 원천으로 삼자는 거죠.
그렇지만 과연 그런 전환만으로, 기존의 경제 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에너지원을 바꾸는 것만으로 충분하냐는 의문을 제기했던 게 기후정의행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기서도 사실 요구안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 정도로 축약이 됐었는데요. 그중에 첫 번째가 주거 빈곤이죠. 가령 한국에서 이제 재작년 여름에 특히 이슈가 됐던 신림동 침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건 기후위기의 두 가지 시간성과 연관되는 쟁점이에요.
첫째로 우리가 태우고 있는 화석 연료를 감축해야 된다. 이거는 이제 미래에 더더욱 심화될 대기 중 탄소 농도의 변화와, 그게 초래할 기후변화의 속도와 밀도를 낮춘다는 것이고요, 또 이미 지금 진행되고 있고 현상으로 나타나는 변화들이 있잖아요. 이미 기존의 기상학적인 데이터만 가지고는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인 기상 사건이라고 불리는, 말 그대로 이 기후라는 구조가 심대하게 변형되면서 그 구조의 변형이 현행화되는 사건들(홍수, 폭염, 산불 등). 거기서 이제 피해를 받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죠. 폭염에 취약한 쪽방촌 주민일 수도 있고, 산불에서 도망쳐야 하는 숲속의 동물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이미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치가 하나의 요구였는데 이런 것들은 녹색 신산업 육성만큼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거든요. 그 자체로 이윤 창출의 원천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이건 사회적 보호와 보장(security)의 문제에 가깝죠.
그 외에도 이제 현재 윤석열 정부가 특히 주장하고 있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대안적 에너지원으로서 핵발전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었고요. 그다음에 이 에너지 전환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들이 지금 국가가 지원하는 민간 자본들인데 이거 말고 다른 이행과 전환의 방식을 구상해 볼 수 없을까, 이런 문제 제기도 있었고… 이렇게 여러 요구들이 모였던 집회였던 거죠.

희우
그렇죠. 그런데 제가 잘 모르고 말하는 것이지만…… 제가 느꼈던 건 그 집회를 이끄는 깃발이라 할 만한 것의 부재였어요. 아마도 그 집회가 현재로서는 좀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려는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여러 다양한 요구들, 사회적 보장에 대한 요구라든지 탈화석연료에 대한 구호라든지 탈핵에 관한 요구는 그 집회를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묶어줄 구호는 아니었던 것 같고, 우리가 많이 보고 느꼈던, 많이 읽었던 그런 필요성들의 모음이자 드러냄이었던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는 축제 분위기가 있고, 회합의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이 참여자로서 행복하고 좋지만, 정치적인 것은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그러니까 ‘모인 것들을 다시 한 번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서
기후정의행진 집행부 차원에서 5개 요구안을 만들었고 14개 세부 요구안을 또 만들었어요.
그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탈핵을 비롯해 에너지 기본권, 그다음에 주거안전, 에너지 전환을 이윤 주도 논리가 아니라 다른 공공성을 포괄하는 식으로 가자, 그 외에도 공장식 축산에 대한 반대, 개발 사업 반대 등 여러 가지 의제들이 있었는데요. 희우 씨가 말씀하는 건,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다기한 슬로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가 잡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의제로 치면 기후·환경 외에도 반빈곤, 페미니즘, 평화, 농업 등등 대단히 다양했거든요.

희우
그렇죠. 그런데 제가 말한 건 그 집회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세대는 소위 ‘운동권’이라 하는 세력이나 경향이 대학에서도 많이 약화된 시대에 대학을 다녔고, 전반적으로 그런 투쟁이나 단결의 언어가 우리 감수성이 아니게 되었잖아요. 어찌 보면 그런 언어를 많이 상실했잖아요. 그게 흔히 말하는 ‘탈정치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최근에, 특히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후로 느끼는 문제는, 우리 감수성에 맞으면서도 강한 조직화를 허용하는 정치적 언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다양성들을 억압하거나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집회의 효과가 한층 더 커질 수 있게……
이 기후 운동도 알록달록하고, 축제 같고, 음악도 신나고, 그런 감수성부터 옛날의 데모랑은 꽤 다르다는 생각도 드는데, 저는 그런 게 좋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을 위해서 우리가 한발 더 나아가야 할 때 뭔가 그것을 허용하는 언어가 부재한다는 느낌도 계속 받게 되는 것 같거든요. 강력한 정치화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옛날의 정치적 언어를 답습하자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의제들이 있을 때 이것들의 다양성을 모으는 걸 넘어 한 번 더 조직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져요.

민서
그렇죠. 이 모든 차이들을 누비는 기표가 뭐가 될지가 불분명한 상황인 거죠. 사실 이 14개 요구안의 다양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 기후정의행진이 어쨌든 2022년 2023년 그리고 2023년 4월에 있었던 기후정의 파업까지 고려한다면 세 번 정도의 대중 동원이 있었는데(그전까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 많이 갖고 올 수 있겠지만), 핵심은 빈곤, 노동, 페미니즘, 에너지, 교통 등등의 여러 가지 의제들이 기후라는 화두를 경유해서, 시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후변화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의 정치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기후가 라투르가 말하는 일종의 ‘필수 통과점’이 되면서 그 기후라는 말을 둘러싸고 상이한 정치적 지향과 의제들을 가진 이들이 어셈블리지로 결합되는 형태인 거죠. 이들이 2022년 9월 2023년 4월과 9월에 반복적으로, ‘기후정의’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행진하고 스스로를, 자신들의 정치적인 요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목소리들이 우리가 재현/대표/표상이라고 번역하는 ‘representation’에까지 이르렀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그때 거기에 함께 현전했다는 것을 넘어서, 이제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기록하고 정치적으로 의미화할 것인가가 문제죠.
제가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던 개인 참여자들 약 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게 있는데, 행진 전체에서 인상적인 게 뭐였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거기서 이제 60% 이상이 ‘기후 정의를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를 꼽았거든요. ‘정부를 향한 직접 행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가 그다음에 40% 정도 돼요. 근데 가장 낮은 응답을 받았던 게 ‘기후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와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날 모여서 서로의 에너지를 느끼고 스스로의 존재를 현시한 거는 맞는데, 이날 나왔던 많은 목소리들을 어떻게 종합할 거냐, 어떤 하나의 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밀어붙일 거냐, 이게 남겨진 과제라는 거죠.
아까 ‘운동권’을 말씀하셨지만 거기서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는 이거예요. 운동의 시대가 이제는 지나갔다는 얘기 자체가 사실 대단히 수행적인 진술인데, 왜냐하면 지금도 운동은 계속되고 있거든요. 다만 우리가 ‘운동의 시대’라고 기억하는 시대에 비해서 현재의 사회운동이, 촛불 집회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수평적인 연대나 소통을 강조하면서 위계적인 대표 자체를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경향도 있고… 이 사회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상들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지금 동시대에 맞는 운동의 문법이 무엇이냐는 건 생각해봐야 되겠죠. 그 운동의 문법, 형식의 문제는 사실 기존의 급진적 운동의 정치가 지양하고자 해왔던 체제가 무엇이었냐는 질문, 즉 내용적인 질문이랑 떨어질 수 없죠.
기후정의행진 설문 분석을 통해 도출되는 건 결국 반자본주의라는 쟁점인 것 같은데요, 제가 설문조사를 취합할 때 (객관식 설문 문항이 아니라 주관식으로 받은 응답에서) 많은 의견이 나왔던 것이 한편에는, ‘기후 얘기가 너무 적었다. 기후 말고 딴 얘기가 많았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딴 얘기라는 건 결국 ‘기후’를 필수 통과점으로 경유하는 일종의 급진적 정치들의 의제들인 것이죠. 그것들이 이제 반자본주의 정치학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요. 다른 한편에는 반대로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충분히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는 평가가 있죠. 향후 기후정의행진의 과제는 이 사이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아닐까요?

희우
네. 더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고, 합의를 위한 노력도…… 그런데 합의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적대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모이는 사람들이, 라투르와 슐츠의 용어를 빌려서 “녹색 계급” 혹은 “생태계급”(ecological class)이라면 모인 이들이 적대하는 ‘생태 기득권’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거 아닐까요? 도나 해러웨이나 말름 같은 이들이 ‘인류세’라는 말, 이제 거의 학술적이거나 정책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그 용어를 비판하면서 ‘자본세’를 주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후위기가 우리 모두가 연루된 문제는 맞지만(그걸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만),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주범은 ‘모든 인류’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민서
『녹색 계급의 출현』에 “녹색 계급은 이미 새로운 제3신분, 즉 모든 것이기를 열망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1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계급 개념이 기술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행적이라는 게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공산당 선언이라는 텍스트를 근거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노동계급 정치라는 어떤 물질성을 띠게 되었던 것처럼 녹색 계급이라는 정치적인 집합 행동의 실체도 지금 생성 중에 있는 것 같아요.
계급이라는 개념이 적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후 내지는 녹색이라는 가치에 명시적으로 이의 제기를 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결국 피/아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결국 대두될 것 같아요. 기후정의행진 참여자 설문조사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그런 내용이 있었어요. 행진 참여를 통해 기대하는 효과를 물었을 때 많이 나온 응답이 ‘기후정의를 위한 사회적 세력 형성에 기여’나 그다음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의 인식 향상’이었고, ‘기후위기에 관련된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체제 전환의 필요’ 이건 되게 낮게 나왔거든요?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보면, 희우 씨도 아까 말했지만, 첫 번째 불평등은 기후변화를 몰고 온 탄소 배출의 역사적 책임이라는 것인데 이제까지 북반구 국가들과 남반구 국가들이 누적적으로 배출해왔던 탄소 배출량의 불평등이 있는 거고요. 두 번째 불평등은 현재 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 및 기반시설이 필요한 만큼 분배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텐데 재작년 신림동 침수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전혀 평등하지 않잖아요. 이 두 가지 불평등을 어떤 식으로 문제화할 거냐, 이거는 사실 녹색이냐 아니냐 아니면 녹색으로 얼마나 빨리 갈 거냐는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인 것이죠.
기후정의행진 참여자들도 과연 우리가 불평등, 자본주의 체제 전환, 이런 방향이 가리키는 혹은 함축하는, ‘직접적으로는’ 기후와 무관해 보이는 의제에 모두 동의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기후위기와 기후정의에 대해서 어떤 집합적인 발화를 시도하는 것을 넘어서 대응을 어떤 방향으로 해나갈지에 대한 합의의 부재가 설문 결과에도 반영돼 있지 않았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우
어떻게 그런 것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저도 최근에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최근에 참석했던, 어느 경제학과에서 있었던 컨퍼런스에서도 결국 해결책을 산업적 혁신과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찾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문제의 원인인 것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제도적·학술적으로, 대중적으로 지배적인 경향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현재 지배적인 합의라면 합의일 텐데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합의보다는 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합의에 가깝겠지만…

민서
그렇죠. 제가 여러 프로그램에 구체적으로 코멘트를 하기보다는, 이런 얘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후변화의 재현이라는 문제와 연관되는 부분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 빙하가 녹아내리는 사진부터 홍수, 폭염, 산불같이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을 통해 기후위기가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기후위기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게 파리 협정이에요. 2015년에 파리에서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막자, 정말 안 되더라도 2도 안쪽으로 제한하자 이야기가 나왔고 그 1.5, 2도라는 목표치가 많이 알려져 있지요. 몇 년까지 이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이러이러한 할당량이 필요하고 각 국가에 우리가 이걸 위해서 이때까지 이만큼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겠다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산업혁명 대비,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제약한다는 말 자체는, 직관적으로 잘 안 와닿지 않나요? 사실 지구 평균 기온이라는 것도 기상학의 측정과 개념적 조작을 통해 얻어지는 무언가에 가깝고, 1.5도라는 것도 감각할 수 없고, ‘산업화 혁명 이전’이라는 기준은 더더욱 안 잡히는 개념인 거죠. 수백년의 시간 간격이 있는 거니까. 한마디로 개개인이 감각할 수 있는 시공간 지평을 넘어서 있는 거죠.
그렇지만 분명한 건 기후변화가 진행 중이고, 폭염으로 쓰러지는 노동자와 농민들, 폭우나 산불 때문에 거처를 위협받는 사람들이 이미 있잖아요. 이런 이미지들이 기후변화의 실재성을 그나마 증언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이 기후 정치의 과정에 자기도 모르게 연루되는 게 아닐까요.

희우
방금 해주신 말씀에 두 가지 쟁점이 있는 것 같아요. 기후변화는 너무 큰 시공간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상적으로, 즉각적으로 체험하거나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은 그것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큰 틀에서 거시적으로, 지적으로 파악/표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연루된다는 거,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데서 오는 그런 정동적인·정서적인 변화에 관한 이야기네요.

민서
첫 번째 것부터 얘기해 보자면 사실 제가 이제 기후금융 내지는 정책 관련된 행사들을 참가하면 그게 축사나 인사말 형태로 나올 때도 있고 아니면 PPT에 있는 이미지로 나올 때도 있는데 거의 항상 행사 초반에는 이미 이런 얘기가 나와요.
“얼마 전에 있었던 폭염에서 볼 수 있듯이”, “이번 몇 월은 역사상 가장 더운 몇 월이었는데……” 같은.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이 극단적 기상 사건들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늘상 얼마 전에 있었던 ‘사상 초유의’ 이벤트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렇게 한편에는 너무 익숙해진 이미지, 화염이나 쓰나미 같은 게 넘실대는 파국적인 스펙터클들이 있고요. 한편에서는 빈곤 포르노그래피처럼 일종의 생태 포르노그래피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호주의 코알라를 보여준다거나 북극곰을 보여준다거나… 그러니까 이런 이미지들의 질서가 지금 얼마나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효과를 주는지, 우리가 이걸 통해서 어떤 기후정치의 당사자로 변해가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결산이 필요한 것 같네요. 그 재현의 문제야말로 사실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술은 새로운 감성 체제를 만들어내고 혁신하고 비판하는 그런 영역이잖아요.

희우
민서 씨도 아시겠지만 사실 지금 기후나 생태라는 타이틀로 진행되는 전시는 많아요. 관련된 문학작품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좀 소재적으로만 사용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녹색 계급의 출현』에 녹색 계급은 이전의 계급들(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과 달리 미학을 심하게 결여하고 있다는 말이 나와요.2 여기서 제기되는 게 재현 방법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미학적으로 좀더 파고들어 얘기하면 (앞서 우리가 말했던 문제와도 연결될 텐데) 결국 이 문제가 예술에 제기하는 질문은 신체의 감성적 측면(매력)과 이성의 초감성적 측면(숭고)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것’과 ‘우리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것’의 관계 설정이요. 라투르가 말하는 ‘가이아’도 굉장히 신체적·정서적 대상이면서 인간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거대한 대상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미시적인 체험과 극히 거시적인 인식을 동시에 요구하는 대상인 거죠. 아직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저도 이 문제에 대해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그 둘의 관계에서 결국 새로운 공통감각, 새로운 교양, 새로운 주체성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텐데…… 음, 이건 좀 정리해서 다음에 더 얘기해 보면 좋겠네요.

민서
네. 그런 경험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이랑 얘기해 보면 기후 문제로 이끌리게 된 계기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거기서 공통적인 어떤 감응의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이 경험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기후우울증’을 앓는 기후 운동가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어요.

기후우울증

희우
기후우울증이란 무엇일까요?

민서
그 생각이 나네요. 영화 〈멜랑콜리아〉(2012)를 보면 주인공이 처음엔 무엇도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이잖아요. 결혼을 비롯해 자기 주변 사회, 세계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뭔가 포기했거나 수동적으로 떠밀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주체잖아요.
제가 기후를 ‘앓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생각하는 바는 이런 거예요. 능동/수동이 영어로 active/passive이고 이제 그걸 명사로 바꾸면 action/passion이고요. 보통 ‘행위’로 옮겨지는 액션(action)의 반댓말인 패션(passion)이란 말은 보통 ‘열정’, ‘정열’ 아니면 기독교적 맥락에서 ‘수난’ 이렇게 옮기는데, 사실 ‘액션’이 행동 혹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함을 뜻한다면 ‘패션’은 뭔가를 감수하거나 겪어내는 거에 가깝죠. 기후우울증 역시 정적으로 가만히 있고 무기력하게 떠밀리고 이런 걸 넘어서, 겪음을 통한 존재의 변모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그레타 툰베리의 경우에는, 툰베리는 기후우울증을 앓는 페이션트, 그러니까 환자=앓는 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치지 않고 굉장히 정열적으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해내잖아요. 페이션트이자 액티비스트인 툰베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패션이라는 건, 나도 모른 채로 내 안에서 터져 나와서 나를 휘감고 내가 어딘가에 연루되게 만드는 어떤 계기인 거죠.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이-인 액션(die-in action)’ 같은 거 했잖아요.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다 같이 드러눕고. 사실 그게 패션이 함께 경험되는 과정인 거죠.
그러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 기후우울증이라는 걸 굉장히 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후변화를, 말하자면 위기로 앓으면서, 동시에 기후 운동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어떤 임상학적 의미의 우울이라기보다는 (물론 그것 때문에 정서적으로 힘들 때도 당연히 있지만) 일론 머스크가 체현하는 그런 식의 (낙천적인) 에이전시가 아니라 행성 앞에서 좀 겸허해지고 한계를 알고, 구속돼 있고, 묶여 있음을 아는. 근데 그것을 단순히 억압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겸허하지만 냉철하게 응시하는 그런 태도를 기후우울증 페이션트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듯해요.

희우
기후우울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저한테 처음 들려주신 게 민서 씨인데, 듣고 나서 보니까 동시대 문학이나 미술에서도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는 것 같이 보이더라고요. 민서 씨한테는 이미 많이 얘기했지만요. 재작년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에 대한 짧은 글을 쓰면서 (민서 씨가 김홍중 선생님과 함께 쓰셨던) ‘페이션시’ 연구를 인용하기도 했어요. 동시대 한국 시와 관련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 주제인 듯해요.
또 하나 새로운 예를 들어보자면―앓는 자, 지구생활자 얘기가 나와서 생각이 나는데―저도 추천받아서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에요. 거기서 ‘초공감능력’이라는 가상의 초능력이 나오는데요. 초능력이지만 공감 능력이 너무 극대화되어서 고통을 겪게 되는 병이기도 해요. 타인이 아플 때 자기도 정말로 아픔, 신체적인 통증을 똑같이 느끼게 되는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민서
소설에 등장한다는 그 초능력이 임상학적인 의미를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의 페이션트의 경험과 직결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그 논문3에서 짚었던 페이션트의 용례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가 “환자”라는 명사. 두 번째가 “인내하는, 참을성 있는” 같은 형용사에요. 무언가를 견디고 감수하고 참아내고 인간의 이미지가 환자라서 아마 우리가 페이션들을 환자라고 쓰는 것일 텐데 이걸 환자가 아니라 ‘감수자’나 ‘겪는 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후 운동가도 그런 점에서 페이션트인 거고요.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를 앓는다는 건, 질병이나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종의 선각先覺의 경험이기도 하죠. 아니 선‘각’자이기 이전에 선‘감(感)’자인 거죠. 감수(感受)할 때 그 ‘감’이요. 내가 무언가를 깨달아버린 순간 혹은 알게 된 순간, 혹은 무언가를 접하는 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은데, 나를 어떤 식으로 다른 존재자가 정동/감응(affect)시키는가.
이 타자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비인간 동물일 수도 있고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어떤 추상적인 인류로 표상되는 거대한 개념적 덩어리에 작용하는 위기 그 자체일 수도 있고… 그것들을 내가 접하게 되는 순간 그게 나를 어떤 식으로든 어펙트하고, 나는 어펙트 당하는 존재로 바뀌어 가는 거죠. 이런 생성의 드라마가 climate patient-climate activist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희우
네,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네요. 많은 얘기를 했는데 개인적인 얘기는 많이 못 한 것 같아요. 사실 기후우울증도…… 연구자로서 개념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이런 것 이전에, 민서 씨 본인이 앓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이걸 글로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좀 그런 심정을 민서 씨가 토로하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되기도 했거든요.

민서
저는 사회학을 공부해 왔는데, 연구자로서 스스로 갖게 되는 연구자에 대한 특정한 상 같은 게 있잖아요.
연구자는 사회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산하는 사람이고, 이걸 위해서는 사회 세계 일부분을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하고 이제 근거로 삼아서 사회 세계는 이러이러하다라는 진술을 생산해내는 것 같은데… 이 과정에서, 사실 제가 금방 썼던 어휘들만 다시 생각해보더라도 어디론가 들어가서 무언가를 모아서 해석해서 무언가를 제시하는 사람, 이 모든 과정이 다 능동태로 돼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에는, 그리고 이걸 계속하게 되는 동기에는 어떤 ‘패션’이 있는 것 같아요.
기후우울증을 연구 주제로서 계속 봐왔지만 제 스스로의 상태를 우울이라고 명명하게 된 건 되게 최근인데요. 연구하다가 멈칫하는 순간들이 점점 많이 찾아와요. 능동적으로 계속 데이터를 모으고, 무언가 말을 보태는 흐름이 단절되는 순간들이 오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후위기라고 부르는 어떤 사태의 전개 속도랑 밀도랑 강도가 너무 높은 거예요. 기후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어떻게 진행될 지에 대한 시나리오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대로만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연구자이기 이전에 행성 거주자로서 비관적인 감정이 찾아올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이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연구라는 건, 사실은 뭐 이건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만, 사회 세계를 관찰한 결과를 성찰을 담아 공론장에 내놓고 시민들과 나누는 걸 텐데. 이게 학문이나 문학 같은 분화된 기관들의 역할일 텐데… 이게 제때, 필요한 만큼, 충분히 되고 있느냐는 의문이 들어요.
그럴 때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니까 이런 걸 하자, 하면서 힘을 얻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요. 그래도 기후변화를 진지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모종의 실천에 나서는 분들을 보면 힘이 나는 것 같아요. 그 힘이라는 게 꼭 이 연구가 유의미하고 잘 될 거야 내지는 제때 필요한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확신을 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세계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 옆에, 이 사람들이랑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가야겠다, 그럼 될 것 같다, 그런 느낌?
그 와중에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은, 기후 우울증을 앓는 사람, 자연과학자, 정책 결정자, 운동가, 펀드매니저 등등 ‘기후인’들이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거예요. 이미 객관적으로는 기후변화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어셈블리 상에 있는 이분들이, 제 연구라는 하나의 평면을 경유해서 배치됨으로써,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희우
제가 민서 씨랑 이제 만난 지 이제 10년이 됐는데, 그간 옆에서 보기에는 거의 유재석처럼 바른 사람이면서, 유능하고 스마트한 연구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런 사람이 실존하긴 하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인데요. 그런데 최근에 연구하시면서 많이 우울해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기도 했어요.
그래도 민서 씨 말대로 우울이 새로운 마주침과 주체화의 계기이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게 우리 둘에게 좋은 시간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민서
인터뷰를 하다가 당하는 입장이 오랜만에 돼 보니까 참 새롭네요(웃음).
글을 쓴다는 게, 단순히 이미 준비돼 있던 뭔가를 밖으로 꺼내는 행위가 아니고, 글을 쓰면서 저도 모르게 생성되는 게 많은 것 같은데요. 사실 글 자체가 대화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요. 누가 읽을지를 늘 생각하게 되니까요. 희우씨랑 얘기하면서 제가 겪고 있는 혼란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습니다.

(끝)

  1.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이규현 역, 이음, 2022. 73쪽. ↩︎
  2. 『녹색 계급의 출현』, 53~54쪽. ↩︎
  3. 김홍중·조민서, 「페이션시의 재발견」, 『한국사회학』, 56(1), 2021, 77-114쪽. ↩︎

매력의 두 문제

―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

매력reiz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 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1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병적인”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2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 비서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 있어〉(2012) 가사

1. 모호성과 취약함

나는 지난 몇 년간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낯선 것,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막연한 생각 속에서 이 년 전에도 ‘매력의 경제’에 대해 썼다.3 그 글에서 나는 매력의 경제가 지적(이론적) 관심, 도덕적(실천적) 관심, 미적 관심의 ‘칸트적’ 분리가 함몰된 문화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는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가 흐려지고, 지적·도덕적·미적 관심과 육체적 자극, 성적 끌림, 경제적 이해 관심, 정념 등이 마구 뒤섞인다. 반대로 말해 매력의 경제는 주목의 흐름, 휩쓸림, 끌림, 공감, 혐오감, 수치심, 열등감이 뒤섞인 정동적 흐름을 설명하려는 동학이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을 통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이른바 ‘현실 정치’는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변해온 듯 보인다. 한국의 여러 사회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또 어느 연예인의 도덕적 논란은, 즉각 그의 ‘인성’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그의 외모에 대한 조롱 혹은 성희롱과 뒤섞여버린다.4 이러한 고발과 조롱은 행위만을 겨냥하지 않고 존재를 사방에서 포획하기에, 훨씬 치명적인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줄 수 있다. 즉 발언이나 행위에 대한 처벌·판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런 종류의 공격과 모욕에 매우 민감하다. “많은 학자가 동시대의 ‘젊은 세대’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오찬호, 2013) 같은 책도 있지 않았는가. 확실히 이런 세대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가 ‘냄새’와 같은 감각적 차원의 일로 번역되면 여전히 충격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불평등이나 계급성이라는 추상적 사실보다는 감각적 번역에 가장 민감한 세대일 것이다.”5 즉 이 세계에 거대하고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훗날 내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기에. 그러나 누군가―영화 〈기생충〉(2019)에서처럼―내 몸에서 나는 냄새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내 행위나 처지에 대한 비난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모욕처럼 느껴진다.

그런 모욕을 마주해서 주체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기 혐오·수치심을 내면화하거나, 〈기생충〉의 기택처럼 돌이킬 수 없는 충동에 휩쓸리거나. 그도 아니면, 모욕을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모욕이 자신을 파괴할 수 없게 자기를 배려하거나. 이 자기 배려가 우리에게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줄 것이다.

매력의 불평등은 당연히 경제적 불평등과 뗄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 둘의 관계가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아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악뮤의 천재적인 노래 가사에서처럼, 나를 홀린 사람은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 비서’만큼 유능한 사람이 아니어도 그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게다가 매력은 외양상의 조화로운 배열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객관적인 조건들로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이 있기에 매력은 마법이나 마술처럼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신비함과 모호함 때문에 매력은 갈급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이 끌림과 욕망의 동학은 어떤 부정적 명령도 발신한다(“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이 명령은 호감과 비호감을 나누는 기준에 예민해지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열등감이나 수치심, 조급함을 주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홀리는 이 모호함을 제거할 수도 없다. 매력을 탈신비화하고 구조적으로 분석해보라. 매력에 ‘비판적 거리’를 두려고 해보라. 매력을,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와 노동을 숨기고 있는 물신fetish이라고 고발해보라. 그것은 가능하겠지만 무력한 일인데, 매력이 자본의 이차적 효과나 그 자체 ‘상징자본’일 뿐이라고, 혹은 물신이라고 파악한다고 해서 매력적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현혹이, 매력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지 무지해서 현혹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은 아우라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매력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일찍이 먼 유럽 땅의 철학자 칸트가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매력의 이러한 모호함과 변덕스러움이었다. 칸트에게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합목적적 조화이지만 매력은 대상이 주체에 행사하는 지배력이다. 매력과 감동은 대상의 영향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의 취미판단으로는 부적절한 ‘야만적’ 관심, 미성숙한 관심이다.6 그러나 매력의 불순함과 모호함, 신비로움을 축출하려는 것은 그것대로―마녀사냥처럼―탄압과 억압적 안정화, 관심들의 위계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열거한 조짐들은 마치 매력이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 특히 젊은 세대에게 중요한 기제이자 기준이 되었다는 착시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면, 주체와 대상의 완고한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라는 특이한 ‘막간극’이 끝남에 따라 매력이 다시 공공연한 경험적 힘으로 부상했고, 그에 따라 비로소 비근대적인 미학이 작성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자극에 취약하고 감정적이며, 관심사들을 엄밀하게 구분할 줄 모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문학은 이 사실을 늘 말해왔지 않은가?). 단지 영역들, 관심사들의 관념적·제도적·규범적 경계가 흐려짐에 따라 이 사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배움이 매력으로부터 촉발된다고 주장7하는 것은―칸트라면 필시 ‘야만적’이라고 했을―동시대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즉 새로운 미학을 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근대적으로 규정된 아름다움, 자유, 도덕, 계몽, 성숙, 교양의 관념을 철저하게 재고해야만 한다. 매력과 순수한 취미판단을 분리하는 문제에, 칸트가 인간적이고 문명적이라 생각한 그 모든 소중한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말했듯 매력은 대상의 영향력에 종속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조화이다. 즉 매력과 아름다움의 분리는 대상과 주체의 근대적 분리와 맞물려 있다. 마찬가지로 계몽은 대상에의 의존이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를 전제한다. 또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일치’, 즉 미적 공통감각은 지적 공통감각과 도덕적 공통감각의 근거이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8

따라서 우리의 판단력이 매력에 휘둘리고 오염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적 공통감각이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이 말은 굳건한 지적·도덕적 공통감각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배움은 대상에서 주체를 분리하는 ‘선험적 형식’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경험적인 세계의 불순한 감각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촉발’된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발적으로’ 배우려 드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가 아님을 의미한다.9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경험적 자극들에 지적·도덕적으로 거리 둘 수 없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휩쓸리고, 방황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 출발점이다.

2. 교실 알레고리

나는 배움이 ‘매력과 실망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 그 연장 선상에서, 이 글에서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인 재현 논리로서 매력의 경제를 면밀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에 의해 촉발되는 배움들을 긍정하고, 보호하고, 촉진할 수 있는가? 이 이중의 과제를 위해서는 매력을 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매력의 경제학」에서 나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 재현 논리’로서의 매력과 ‘감성적 배움을 유인하는 인력’으로서의 매력을 애매하게 혼동했다. 그 애매한 교착 때문에 소설들을 다룰 때도 좀 우왕좌왕했다.

조금 복기해보자면, 내가 이 문제에서 늘 참조해온 손보미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주 예민하게 감지한다. 매력의 경제를 배우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매혹과 동경, 수치심과 혐오감을 느끼며, 이 감정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품행과 감수성, 젠더 규범을 학습하도록 종용한다. 교실에는 혐오와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아이가 있고, 반대로 눈길을 끌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가 있다. 이중 전자의 경우를 보자.

그 애는 목욕을 하지 않아서 언제나 머리카락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고, 얼굴에는 언제나 버짐 같은 게 피어 있었다(그게 영양실조의 결과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다). [……] 그 애의 이름은, 그래, 고장연이었는데, 내가 여전히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반의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 애를 ‘고장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무리로부터 떨어진다면, 무리에 정착하지 못한다면 나는 ‘깨끗한 버전’의 고장연이 되고 말 것이라고.11

어떤 신체(정확히 말해 신체가 발신하는 기호들signs의 특정한 조합)를 “고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신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의미화를 둘러싼 과정이 매력의 정치이고, 교실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화자가 몸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다. 이 경제는 신체적 기호들에 차별적인 의미를 할당한다.

위 소설에서 고장연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이고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인 듯하다. 아이들은 이 사실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혐오하는데, 그 사실이 신체적 기호들(기름때, 버짐, 냄새 등)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실의 무리들에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겉도는 화자는 자신도 비슷한 처지가 될까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 ‘완전히’ 본능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두려움은 사회적인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의 배움에서 본능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도덕적, 인지적, 정치적, 육체적, 성적 관심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를 온몸으로, 감각적으로 배운다. 바로 그렇기에 아이들의 배움은 강렬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종종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사춘기 시절 교실의 아이들은 교과서나 선생의 말보다 또래 집단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배운다.

이처럼, 매력의 경제는 끌림과 동경과 흥분을 낳는 한편으로 혐오감disgust과 수치심shame도 낳는다. 수치심은 죄책감guilty과 밀접하면서도 다른데, 죄책감이 행위에 대한 것인 반면 수치심은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도덕적 위반이 발생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라고 생각한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존재다’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12 혐오와 수치심은 신체적인 반응이지만,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감정(사회 질서와 도덕을 내면화시키는 감정)이기도 하다.13 혐오는 신체적 오염이나 질병을 회피하기 위해 진화된 행동 면역체계이지만, 문화적·도덕적 ‘순수성’에 집착하면서 소수자·약자를 배척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들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낄 때 도덕적으로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중 어떤 것은 농담 같은 것인데, 이를테면 방귀 냄새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타인의 품행에 대해 더 엄격한 도덕적 판단을 했다.14 이는 신체적 관심사bodily concerns와 도덕적 관심이 쉽게 호환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또 혐오감이 도덕적 엄숙주의의 형태로 표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혐오감이 행동 면역체계에서 기인한다면, 수치심은 어디서 비롯할까? 어떤 심리학자들은 ‘수치심의 기원’을 매력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찾는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매력도attractiveness는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며, 수치심은 매력도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상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15 혐오감이 오염된 것을 피하도록 진화된 심리적·신체적 반응이라면, 수치심은 자아를 오염된 것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간단히 말해 수치심은 내면에 반영된 혐오이다. 혐오가 종종 소수자와 타자를 배척하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감정이다.16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에 노출되기를 꺼리게 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매력을 낮게 평가하는데, 이 의기소침함 혹은 자기비하는 그의 매력도를 더욱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오늘날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신의 매력을 당당하게 전시하면서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17

소설과 관련해 이제 새롭게 논해보고 싶은 내용은, 손보미 소설에 그려지는 배움/성장이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배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화자는 실망을 겪고, 실망을 통해 배움의 경로가 매력의 경제에서 이탈하게 된다는 점이다.18 이때 실망은 어떤 대상이나 자신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 자체의 자의성과 허약함에 대한 것이다. 매력이 매력적인 대상의 본성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상황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작은 동네』에서 이러한 배움은 특히 고장연과의 관계에서 온다). 그런 실망을 겪고 나서 화자는 교실의 정치에 어느 정도 무관심해진다. 냉소적으로 될 위험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무관심은 화자가 ‘자기와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어 교실의 분위기에 덜 휘둘림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기와의 관계는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주체화로 해석할 수 있다.19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력의 경제에 저항하고 개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경제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삶의 재현되지 않음’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어린 화자는 작가가 된다. 즉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실망은 매력의 경제 내부에 구멍을 내고 그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배움으로 화자를 인도한다. 이렇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망한 사람은 단지 냉소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그것에 저항할 주체성을 부여하는 그 배움이 매력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중요하다.

손보미의 소설 속 교실은 아주 구체적이지만, 그 교실의 동학,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을 놓고 벌어지는 매력의 정치는 오늘날의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다. 매력의 정치는 소설 속 초등학교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애 시장에서, 금융 시장에서, 현실 정치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에게 어떤 말투, 품행, 사고방식, 가치의 서열들을 가르친다. 거꾸로 말해서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所與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전시장이나 투기投機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사춘기 아이들의 교실이기도 하다. 이 은유적 교실에는 셀 수 없이 많은―매력의 정치의 입법자이자 집행자인―‘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존재라면, 교실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바로잡을 권위주의적 선생은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러한 선생의 회귀를 욕망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매질을 통해 제대로 된 ‘자유’와 ‘합리’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화자처럼.

따라서 나는 이러한 문화적 조건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과제를 위해 이 글에서 새롭게 주장할 가설은, 앞서 말했듯 매력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20

3. 첫 번째 종류: 재현적 매력

매력의 두 종류를 잠정적으로 ‘재현적 매력representational attraction’과 ‘감각적·정동적 매력affective charm’이라고 불러보겠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관념과 정동을 구분하면서 정동을 ‘재현되지 않은 사유’라고 했다.21 관념이 고정된 격자라면 정동은 그 격자들 사이사이에 유동하는 흐름이다.

두 종류의 매력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지적으로 분별된다면 둘은 모두 재현적 매력으로 수렴될 것이다―그것이 어떤 주체화에 관여하느냐에 따라 분리된다. 즉 동일한 대상의 매력이 재현적 매력이 될 수도 있고 정동적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전자는 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회화 작품 표면에서 물감층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화가가 되려면 그 기호를 감각적으로 해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준다.22 아이돌 문화 역시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3-1. 금융적 매력도
재현적 매력이란 수치화 가능한 것, 평가·식별·계산 가능한 것으로 ‘이미 표상된 매력’을 뜻하기도 하고 (무엇이 더 많이, 더 중요하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는) 재현의 문법을 뜻하기도 한다. 오늘날 투자자들이 어떤 대상에 투자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가늠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이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페어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투자 대상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로 환원된다.23 그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생산되는 주체성은 ‘피투자자investee’이다. 국가, 기업, 스타트업 창업자, 자영업자, 대출을 받는 가계뿐만 아니라 젊은 예술가, 연구자 역시 피투자자다. 자기 프로젝트의 전시와 자신의 가치 상승24을 통해 투자(국가, 대학, 문화재단, 연구재단, 출판사, 전시기관 등의 지원)를 유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꼭 ‘돈’을 유인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주목과 관심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작업이나 자산의 가치를 상승시키려 하는 경우 우리는 피투자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피투자자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생산한다고 여겨진 ‘기업가 주체’와 다르다. 기업가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삶과 자산을 관리하지만, 피투자자는 당장의 이윤을 감축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려 한다. 실질적인 ‘이윤’은 금융적 매력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매력도는 투자받을 가능성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매력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분투하게 된다. 페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의 대항 투기 액티비즘이 ‘무엇이 매력적인가’의 결정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5

매력도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과 주목의 흐름을 견인하는 지배적 기제이다. 페어는 감정이나 정동에 대해 주요하게 논하지 않지만, 만약 그의 분석이 타당하다면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혐오나 수치심도 심각하게 가중될 것이다. 매력도의 지배적 기준은―이 기준이 다원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분류들(빈곤, 신용불량, 빈약한 포트폴리오, 나쁜 평판, 낮은 생산성, 낮은 디지털 접근성, 인기 없음 등)을 끊임없이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3-2. 기호, 장르, 메타장르
이런 관점에서 매력의 경제를 기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하는 ‘장르들’의 문법, 즉 메타장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선별·등록·재생산·유통·서열화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combination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사조가 아니다,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26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코드화될수록 그 존재는 더 많이, 더 빠르게 재현·유통·패러디·모방된다. ‘뉴진스는 하나의 장르다’와 같은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장르는 기호들을 조합하는 하나의 특별한 방식으로서 (재)생산될 수 있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

동시대의 문화는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예술의 탈장르화(예술의 삶 되기)’를 목표로 했던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과 반대되는 공식이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즉 기호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장르를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 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적 조합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취미,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냉소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대중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27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경험적 조건 속에서 시작된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 학습하며, 그 기준을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은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선 토론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영역마다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지식인, 예술가, 활동가가 고려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는 현재 지배적으로 재현되는 매력과는 다른 매력적인 것을 제시할 수 있느냐이다. 그다음 고려할 수 있는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혹은 구성적 외부), 즉 ‘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이 있느냐이다.

4. 두 번째 매력: 감각적·정동적 매력

첫 번째 매력이 장르들의 문법을 관장하는 경제적 논리라면, 두 번째 매력은 장르화되지 않은 개별적 기호들의 인력이다. 이 인력은 예측할 수 없는 배움들을 유도하고, 우리는 이런 배움들을 통해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확보할 수 있다. 즉 두 번째 매력은 첫 번째 매력에 저항할 가능성이다.

감각적·정동적 매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짧게 이야기해볼 텐데, 하나는 섹슈얼리티와의 관계이고, 그다음은 배움과의 관계이다.

4-1. 매력의 성적인 토대
젊은 시절의―‘비판’을 쓰기 전―칸트는 아직 매력을 순수한 취미판단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격하하지 않았다.28 훨씬 비체계적이고 유연한 텍스트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칸트는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rührt, das schöne reizt)”라고 썼다.29 이 짧은 텍스트에서 칸트는 수치심이라는 “본성의 비밀”이 매력과 관계있으며,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다면서 매력의 기원이 성차性差 혹은 섹슈얼리티와 불가분하다고 확언했다.30

그러나 원숙기의 칸트는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매력에 좌우되는 것은 ‘야만적’이고 ‘미성숙’한 관심이라고 규정했다. 이로부터 취미판단의 지붕 위에는 숭고가 있고 바닥 아래에는 매력이 있는 미학적 위계질서가 확립되었다.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체계적으로 분리하고, 대상에의 애착attachment과 초연함detachment을 분리할 때 미학의 저택 아래로 쫓겨난 것은 육체, 수치심, 여성적인 것, 동물적인 것, 몰입, 습관,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고이다(칸트의 몇 텍스트만 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근대미학의 형성 과정 전반을 염두에 둔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서두에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기입할 때 고려해야 하는 까다로운 함의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방황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혹은 거꾸로 말해서 우리는 상처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매혹되는 것이다. 이 취약함의 기저에는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있다. 섹슈얼리티는 장르/젠더가 아니며, 그렇게 식별·재현할 수 없는 잔여이다.31

배움의 이야기는 복잡하게 뒤섞이는 성적 계열들을 형성한다. 배움이 없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르들/젠더들/분류들만이 있을 것이다. 배움은 한 장르의 문법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앎의 축적이지 배움이 아니다). 배움의 운동은 기호들의 새로운 연결, 새로운 마주침의 공간32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장르들의 경계를 해체한다.

4-2. 감각적 매력과 배움의 관계
칸트 이후에 ‘매력’에 다시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철학자들은 니체와 들뢰즈이다. 일단 여기서는 들뢰즈의 텍스트만을 짧게 인용해보고자 한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33

일반적인 기준에서 약점인 특징도 어떤 독특하고 우연한 조합 속에서는 강점이 된다. 누군가의 억양이나 촌스러운 옷차림, 자기비하가 그런 것처럼.

이 구절은, 기호가 조합되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현재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특징들을 매력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또한 문학에서 전시되는 수치심의 윤리적 함의를 숙고하게 해준다. 진화심리학적 설명에서 수치심은 인간 주체를 위축시키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수치심의 전시 자체가 매력적인 것, 저항적인 것, 적극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매력이 한 인물을 비인격적인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면, 들뢰즈에게 배움은 상형문자처럼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 방출하는 기호를 해독하는decoding 일이다(장르가 삶을 ‘코드화’한 것이라면 배움은 장르들을 개별적, 감각적 기호들로 ‘탈코드화’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넘실대는 물결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34 이때 수영하는 신체가 파악하는 기호들, 즉 물의 리듬, 물결의 세기, 온도와 깊이 등은 감각적인 것이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물결’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전쟁 같은 분위기’처럼 은유적으로 사용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다르게 살고 말할 방법을 실천적으로 배우려면 우리를 휩쓸어가는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캐치해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35 이런 의미의 배움은 필연적으로―숭고가 아니라―매력과 관계할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면 모든 기호와의 모든 감각적 마주침이 반드시 그 기호를 해독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기호가 우리를 감각적으로, 심지어 폭력적으로 휘어잡을 때야 우리는 비로소 배우고자 한다. 캐이팝 해외 팬들이 먼저 가사나 대사를 외운 다음 의미를 이해하듯이(그러면서 순식간에 한국어를 배우듯이). 교실의 아이들이 신체적·언어적 기호들의 의미를 해독하듯이(그러면서 그 의미화의 과정에 개입하듯이). 사랑했던 사람의 차가워진 태도가 한참 나중에야 이해되듯이. 주체를 무장해제시키고 배움을 강제하는 미학적 힘/관심이 숭고가 아니라 매력인 이유는, 숭고는 이미 세계를 ‘풍경’으로 볼 수 있는―즉 대상에 거리 둘 수 있는―주체를 미리 전제하기 때문이다.36 이런 전제는 배움이 경험적 세계에 휩쓸려 있고 얽매여 있는 아무개에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한다는 (내가 들뢰즈에게서 가져온) 전제와는 어긋난다. 배움은 비자발적으로 발생하지만, 한번 발생한 배움의 선에 충실하면서, 그만두고 싶게 하는 유혹들, 한계들, 지배적인 기준들과의 마찰에 자신의 배움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배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때 주체는 인격/개인이 아니라 최소한의 일관성(충실성)을 갖는 집단적 배치이며, 앎의 선험적 형식이 아니라 배움의 운동 속에서 파악된다.

p.s. 차후의 과제

우리가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지만, 모든 상처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배움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나는 정동적 배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명문화된 교육보다 그 자체로 ‘진보적’이리라는 보장은 없다(단지 더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여기서 스승의 필요성이 나온다. 즉 스승은 특정한 앎을 전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배움이 삶을 향한 배움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배움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승이 일이 (앎을 통해) 배우는 자의 매혹을 깨뜨리는 것, 즉 계몽하고 탈신비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식한 스승은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을 잘 분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는 자는 매혹과 실망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워야 하고, 이 배움의 과정이 스승의 앎보다 중요하다. 특정한 앎의 기준에 종속되어 있을 때 배움은 아직 앎에 못 미친 것, 지양해야 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을 더 근본적인 조건으로 두면 앎이야말로 배움의 잠정적 단계들, 수단들이 된다. 가장 큰 틀에서 나의 제안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식론적 질문이지만 후자는 인식·실천·미학의 경계를 무화하는 질문이다. 앎을 통해 배움들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들을 통해 앎을 수정해야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뭍에서 수영하는 올바른 자세를 시연하는 사람은 참된 스승이 아니다. 오직 물결을 함께 해쳐 나가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많은 집회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가 울려 퍼졌는데, 집회 현장에서 듣는 그 노래는 ‘운동’의 감각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내가 중학교 때 많이 들었던―멜로디와 가사의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했다. 나는 작년 923 기후정의 행진에서 그 노래에 맞춰 친구들과 춤을 췄는데, 비록 내가 춤을 너무 못 추는 나뭇가지이긴 해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오늘날 현실 정치가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되어가고 있다면, 반대로 팬덤 문화에서 모종의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특히 북미에서 BTS의 공식 팬클럽 ‘아미’가 정치적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7 최근 아르헨티나의 BTS 팬클럽은 자국의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와 강하게 대립하면서 다른 팬덤이나 야권 정치인과 연대하기도 했는데, 이런 연대를 촉발한 것은 밀레이가 트위터에 올린 BTS 비하(인종차별적 뉘앙스가 담긴) 발언이었다.38

매력의 경제 그리고 배움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문학적 사례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문단에서 많은 비평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소설의 ‘정치성’과 ‘미학성’에 대한 논쟁을 재점화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음의 두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로, 어떤 행위자들의 어떤 말과 행동이 그 작품에 대한 대중적 주목도를 끌어올렸으며, 그 책을 둘러싸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어떤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가? 고(故) 노회찬 의원이 그 책에 대해 남긴 메시지가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레드벨벳의 아이린과 배우 서지혜가 SNS에 그 책을 읽었다고 인증했다가 심한 악플 세례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화화 후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는 ‘#82년생김지영홧팅’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 영화에 대한 응원이 쏟아지기도 했다.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둘째 문제는, 여러 계기로 그 소설을 읽게 된 수많은 독자가―한국의 정치적 지형과 성차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사회 분위기, 비평적 논쟁, 사회적 논란, 반페미니즘적 비난들과 분리할 수 없는―독서 경험 속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이다. 아직 확실히 말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첫 번째 문제는 작품을 접하거나 그것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여러 문화적 자극(홍보, 입소문, 인플루언서의 추천, SNS에서의 논란 등)과 독자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문화기술지적 접근을 허용할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그러한 문화기술지를 수용하면서도, ‘우리가 작품에서 배운 것’에 대한 비평적 탐구의 가능성을 보존할 것이다. 배움의 운동은 매력을 통해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초과한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않았다 해도 매력, 배움, 실망 등의 개념들로 읽어볼 수 있는 많은 작품이 있다. 내가 여러 번 다룬 손보미의 작품들이 그렇고, 예소연이 최근에 쓴 연작소설들39도 그러하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40 같은 작품도 그러하다. 이들을 비롯해 지금 성장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혹은 휘말릴 수 있는) 성장/도야의 방식들을 예증한다. 이런 소설들에서 우리는 니체적이라고 할만한, 약간 광적이고 ‘귀족적’인 가치전도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자기 입법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보편 이성’이 아니라 삶의 시련들―배우는 자를 광기로 몰아가는 시련들―을 통과한 자의 자기 확신이며, 이 확신이 배우는 자에게 지배적인 가치와 도덕을 괄시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들은 배움이 안온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배움의 과정은 동시에 실존적 상처의 치유와 관련된다.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를 통해 인물을 짓누르던 지배적 가치들은 무의미해지고, 무가치한 시간, 유예된 젊음, 허송세월, 외롭고 비참한 순간들, 자신을 상처 입힌 진실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치유는 고통을 억압하고 적대를 숨기는 ‘치유 이데올로기’와 반대되는 것이다. 성장소설들은 우리 자신의 실존적 상처가 얼마나 많은 타자와 연루되어있는지, 얼마나 많은 폭력과 연루되어있는지 드러내는데, 이 드러냄의 과정이 곧 치유이다. 이러한 연루됨 없이는―특정한 앎의 축적은 있을 수 있어도―배움은 있을 수 없다.

잠깐 곁길로 새자면 내가 통계적으로 속한 세대(소위 MZ)의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애매한 위로가 아니라 진정한 치유이다. 즉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남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사세요’라는 위로의 말은 이미 상처받고 분열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중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나는 왜 남의 시선을 자꾸 신경 쓸까? 나는 왜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할까?’ 이런 죄의식은 쉽게 냉소나 원한으로 전치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성인식 의례(등용, 결혼, 취업, 육아, 정치활동, 공적인 발화 기회 등)는 점점 뒤로 늦춰지거나 불가능해지고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 어른으로 정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적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상태로 유예되고, 이중화된 형상으로―한편으로는 조숙하고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로, 한편으로는 다른 이를 보살피거나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로―재현된다. 역사적으로 성장소설은 이렇게 어른도 아이도 아닌 ‘미성년 상태’41를 배움의 주체적 가능성으로 취해왔으며, 우리가 방황하거나 허송세월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정말로 중요한 배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배움이 있었음을 증언해왔다. 배움의 이론은 이러한 증언을 집단적·시대적 수준에서 보호하고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주어진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되느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단지 재현되는 대상, 통계적 분류의 대상일 것이다. 이러한 재현/대표, 통계적 분류들―이를테면 ‘이찍남’ ‘일찍녀’―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러한 재현을 통해서는 기성 권력의 재현적 틀을 공고히 하는 갈등과 반목, 분열이 끝없이 깊어질 뿐이다.

‘세대와 배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내가 다시 다뤄보고 싶은 주제는 나 자신을 비롯해 젊은 남성들의 페미니즘적 배움에 대한 것이다.42 이미 많은 사람이 다룬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논할 수 없었는데, 매력과 배움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 선행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후에 그 문제를 별개의 글로 다루겠다.

마지막으로, 실망은 매력만큼 중요하게 이야기될 가치가 있다. (그런 이론을 정말로 구성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배움의 이론의 윤리성과 정직성을 담보하는 것은 매혹보다는 실망의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실망의 공동체’가 우리를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고, 모든 갈등이나 적대가 사라진 유토피아라는 환상을 품게 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강한 정치적 조직화를 허용하는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력에 대한 충분한 고찰을 한 다음에야 실망을 논할 수 있다는, 그렇게 차례를 지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매혹되기도 전에 실망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배우는 자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이다. 매력은 우리를 휘어잡는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를 예속한다. 그러나 매력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매혹이 실망으로 끝날지라도, 매혹과 실망을 통해 우리가 얻은 배움은 허상이 아니다. 하지만 배움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쓰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지 못한다.

  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219. ↩︎
  2.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5. p. 198. ‘파토스적’이라고 번역된 pathologique를 ‘병적인’으로 수정했. ↩︎
  3.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문장웹진》, 2022년 2월호. ↩︎
  4. 안희제, 『망설이는 사랑―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오월의봄, 2023, pp. 38~40 참조. 이 책은 ‘덕질’의 경험 속에서 아이돌 팬들이 어떤 매혹과 실망을 경험하고, 윤리적 고민과 자기 배려를 하는지 알려준다. 이 책은 ‘매혹의 네트워크’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조사이기도 하다. ↩︎
  5.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
  6. 칸트, 『판단력비판』, pp. 218~19. ↩︎
  7.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년 하반기호, pp. 102~09. ↩︎
  8.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pp. 191~92. ↩︎
  9.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p. 47~50 참조. ↩︎
  10. 한편으로 이 주장이 모든 비판적 가르침/교육법pedagogy을 ‘배타적’으로 거부하면서 배움의 다양성과 수평성을 상찬하는, 듣기 좋은(기만적인) 소리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듣기 좋은 주장은 또한 비평에 어떤 급진적인 변화와 그에 따르는 대가에 대한 엄격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배움과 비판 사이에 ‘배타적 이분법’을 설정하지 않았다. 일전의 글(「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에서 나의 진단은 단순히 비판이 너무 약해져서 강해져야 한다거나, 너무 지나치므로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진단은 “‘비판이야말로 정당하고 엄정한 방법’이라는 식의 전제가 많이 약화됨에 따라 그것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게”(p. 92)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배움을 말하는 것은, 누차 강조했듯 어떤 의미에서든 비판을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침체되고 관습화되어 힘을 잃거나, 왜곡되어 범람하는 비판이 배움을 통해 적실성을 얻고 활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판은 비판을 통해 긍정될 수 없고 배움을 통해 긍정될 수 있다”(p. 107). 다만 나는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근거로 배움을 내세웠으므로 어떤 비판적 문법이 관습화되어 배움을 경색시키는 경우라면 그 비판적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
  11. 손보미, 『작은 동네』, 문학과지성사, 2020, pp. 115~16, pp. 116~17. ↩︎
  12. John Terrizzi Jr, NAtalie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Does Shame Emerge From an Evolved Disease-Avoidance Architecture?” Front. Behav. Neurosci, 14, 2020 참조. ↩︎
  13.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참조. ↩︎
  14. Simone Schnall, Jonathan Haidt, Gerald Clore and Alexander Jordan, “Disgust as embodied moral judgment”, Pers Soc Psychol Bull. 34(8), pp. 1096–1109 참조. ↩︎
  15. J. Terrizzi Jr, N.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p. 2에서 인용한 폴 길버트Paul Gilbert의 주장. 물론 매력적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진화된 ‘본능’일지라도,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다. ↩︎
  16. 따라서 소수자는 특히 수치심에 취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인상적인 글로는 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퀴어 부정성과 시각문화』, SeMA, 2023의 「들어가며: ‘젠더 문제’」(pp. 7~15)와 「슬픈 퀴어 초상」(pp. 17~43) 참조. ↩︎
  17. 이 문제에 대한 생각에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가 많은 도움을 줬다. 아마 매력의 경제는 ‘생명 정치’와 다르면서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 같다. 푸코에게 생명 정치는 국가가 보건과 건강을 이유로―발전한 근대 의학과 촘촘한 사회 기반 네트워크,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인구’ 전체를 통치 대상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심세광·전혜리 옮김, 난장, 2012 참조). 매력의 경제는 그러한 안정적 관리를 넘어―특히 발전한 인터넷망과 SNS를 통해―어떤 존재/콘텐츠가 문화에 더 많이, 더 쉽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고, 그러한 기준에 맞는 기호들의 가속화된 소비와 생산, 변덕스러운 투자를 부추긴다. 이러한 경향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전시하는 알고리즘과 그것을 활용하는 플랫폼들, 신체와 관련된 산업 복합체(성형, 피트니스, 콘텐츠, 식품 산업 등)과 체계적으로 관련된다. ↩︎
  18. 이희우,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pp. 120~38 참조. ↩︎
  19. 질 들뢰즈, 「작품으로서의 삶」, 『대담』, 신지영 옮김, 갈무리, 2023, p. 185. ↩︎
  20.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매력을 둘로 나눈다는 이 과제가 번역상의 모호함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가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미셸 페어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다.
    한국에서 “매력 자본”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이다(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이런 개념들이 지금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기묘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여러 자극과 관심이 분화되지 않은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개념 자체에 체계화될 수 없는 모호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21. 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서창현 옮김,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pp. 21~35 참조. ↩︎
  22. 하지만 두 매력 사이의 번역이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젊은 화가는 당장 감각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회화 작품을 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매력적인 투자 상품이 되려면―예술가 자신의 자기 홍보, 다른 예술가나 기관들과의 네트워크 형성, 평론가들의 평가, 전시와 경매 이력, 구매자들의 입소문 등을 거쳐야 하기에―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반드시 그렇게 번역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
  23. 미셸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페어의 논지와 ‘피투자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피투자자의 시간』의 역자이자 사회학 연구자인 조민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페어의 주장은 명쾌하고 유익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음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할지라도, 무엇이 그러한 저항을 ‘욕망’하게 하는지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우리에게 단지 투자나 자기 홍보를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하는가? 무엇이 매력의 지배적인 기준을 갈급하게 좇기보다 그 기준에 저항하기를 욕망하게 하는가? 한마디로 어떤 과정, 어떤 사건, 어떤 마주침이 우리에게 그러한 저항적 주체성을 부여하는가? ↩︎
  24. 미셸 페어,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욕망」, 조민서 옮김, 『문학과사회』, 2023년 봄호, pp. 358-81. ↩︎
  25.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p.56. ↩︎
  26.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참조). 그런데 사실 장르의 문법들을 결정하는 상위의 메타장르는 존재한다. 그것은 금융자본주의이고, 나는 매력의 경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다. ↩︎
  27.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되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이기 이전에 정동적인데, 이런 정동적 차원을 배움·교양의 동시대적 조건으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지식인에게는 그런 감정에 휩쓸린 사람들이 ‘반지성주의’에 빠진 바보들이나 괴물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바로 그 ‘야만적’인 차원 속에서 다른 배움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느냐이다. ↩︎
  28. 『판단력비판』, 백종현의 56번 역주(p. 218) 참조. ↩︎
  29.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
  30. 같은 책, p. 66, p. 67. ↩︎
  31. 알렌카 주판치치, 『왓 이즈 섹스?』, 김남이 옮김, 여이연, 2021, 특히 3장(pp. 72~143) 참조. ↩︎
  32.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73. ↩︎
  33. 질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
  34. 들뢰즈, 『차이와 반복』, p. 72. ↩︎
  35.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3, p. 50. ↩︎
  36. 칸트, 『판단력비판』, pp. 275~77 참조. ↩︎
  37. 김영화 기자, 「전 세계 풀뿌리 운동 에너지원 BTS 팬덤 ‘아미 액티비즘’」, 시사IN, 2022.08.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128 ↩︎
  38. 조성호 기자, 「BTS·테일러 스위프트 팬, ‘아르헨의 트럼프’ 집중포화」, 조선일보, 2023.10.31.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mideast-africa-latin/2023/10/31/TDUXWIPG2BCPDJMOMZ3RHK4OZ4/ ↩︎
  39. 예소연, 「아주 사소한 시절」, 『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4~80; 「우리는 계절마다」,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pp. 308~28. ↩︎
  40.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pp. 273~312. ↩︎
  41.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 대립시켰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 28 참조. ↩︎
  42. 나는 지금으로부터 칠여 년 전에「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의 진단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모순(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에서 기인한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성의 특정한 환상―즉 여성혐오―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불거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젊은 남성들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을 대안으로 주장했다. 그 글은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법을 과장되게 모방하고 있는데, 현재 나는 그런 이데올로기적·구조적 분석보다 집단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배움들에 더 관심이 있다. 이휘웅,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 《월간 틀》, 2017년 11월호. ↩︎

장르와 수동성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한 노트

*웹진 《믿미》에 발표한 「수동성과 장르의 폭발」(2022. 9)을 소폭 수정하여 옮김.
https://artsoonhwanro.com/?p=3190

1.

인도 출신의 작가이자 저술가인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근대 소설의 역사 전체를 ‘인류세’ 혹은 ‘홀로세(Holocene)’와 관련해 매우 대범하게 분석한다. 고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규범이나 개연성(있을 법함, probable)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홀로세의 기후 안정성, 자연을 예측·계량·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서구 근대적 사고방식을 전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 소설은 “인간 문명을 꽃피우게 한 시기―즉 홀로세―에 누린 기후 안정성을 토대로 구축”되었으며 “부르주아적 질서의 현실 안주와 자신감”을 동력으로 발전했고, “자연을 온건하고 질서 정연한 것으로 가정”하는 “‘근대적’ 세계관”을 전제하는 것이었다.1

고시의 글쓰기는 다채로운 맥락들을 흥미진진하게 누비면서 이리저리 비약하기도 하지만, 그 책의 1부를 꼼꼼하게 읽은 독자는 선명하게 나뉜 두 개의 계열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적이고 근대적인 ‘순수 소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인간적이고 비주류적인 ‘장르 소설’이 있다. 즉 ‘근대 소설-순수 소설-개연성-인간 중심주의-서구 중심주의-부르주아적 질서-연속성-유한성’의 계열이 있고, 반대편에 ‘장르 소설-비주류 영역-비인간-비서구-불연속성-언캐니(uncanny)의 계열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이렇게 이분화된 계열이 전제되어 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비인간을 다룬 글이 쓰이고는 있지만, 그것은 순수 소설이라는 대저택 내에서가 아니라 추방당한 공상과학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등이 기거하는 비주류 영역에서다.”2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비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외적인 작품들은 근대 소설의 대저택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물론 고시가 옹호하는 것은 후자의 계열이다.

서구 근대 소설의 역사와 인류세, 인간 중심주의를 연관 지어 사고하는 고시의 도발적인 주장은 시사점이 많다. 하지만 위의 단순한 이분법에 여러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의문은 이 구분으로 포착할 수 없는 문학작품이 많다는 데서 온다.

이를테면 이시구로의 소설은 위의 이분법적 구분을 가로지르는 예다. 이시구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근대 소설의 전통적인 규범에 충실한 작가다. 고시의 말마따나 그것은 연속성과 유한성, 예측 가능성을 전제하는 서구 근대 소설의 보수적인 규범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에서 과도한 사실성, 개연성,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들, 복제 인간이나 인공 친구(artificial friend, AF)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가장 외부자적인 인물들, 예외적인 존재들, 비인간들이 친숙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존재들이 괴이하고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너무 친숙하고 평범해서 ‘언캐니’하다.

‘언캐니’는 하이데거나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영어로 옮긴 것으로, 한국어로는 ‘친밀한 낯섦’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 기이한 감각은 너무 낯설기만 하거나 익숙하기만 한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문득 낯설게 행동할 때, 혹은 낯선 존재가 갑자기 너무 익숙하게 다가올 때 느껴지는 소름 돋는 감각이 ‘언캐니’다.

따라서 ‘언캐니’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익숙한 것이 너무 낯설어지는 방향이다. 예를 들어 인간인 화자가 벌레가 되는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방향이다. 둘째는 낯선 것이 과도하게 친밀해지는 방향으로, 『나를 보내지 마』가 복제 인간을 그리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은 비인간 존재를 인간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 자체가 폭발하는 것 같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특질과 관념 전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시구로의 소설은 장르적 요소와 설정을 ‘순수 소설’의 문법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순수 소설의 관념이 폭발하는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근대 소설’, ‘순수 소설’ 자체가 순수 혈통이 기거하고 높은 벽으로 담을 지은 대저택이 아니라 이미 장르들의 복합체와 혼종체(hybrid)로 가득한 오래된 숲이라는 것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온갖 장르적 성분들로 직조한 얼룩덜룩한 직물이다. 이 직물 속에서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의 경계는 전혀 뚜렷하지 않다. 사실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동적으로 교류하고, 경쟁하고, 명멸하는 장르들의 생태계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프레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고시의 주장에 대해 드는 두 번째 의문은 ‘근대 소설’이라는 범주 자체가 따져 보면 일관성이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가령 카프카는 서구 근대 소설사에서 기념비적인 중요성을 부여받은 작가이지만, 그의 소설은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성을 보여주고, 비약적이며, 『프랑켄슈타인』 못지않게 ‘언캐니’하다. 동시에 카프카의 스타일은 차용·모방·패러디 가능한 문법화된 장르로 자리 잡았다(이시구로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카프카적 스타일도 차용·모방·오마주 가능한 문법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복제 인간의 클리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르적 성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를 따라 말하자면, 카프카의 작품이 갖는 생성(becoming)의 힘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재현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역사적 재현은 항상 어떤 작품에 고정된 위상, 가치, 범주, 스타일을 부여하려 하지만 작품이 갖는 생성의 힘은 가능한 한 그러한 고정성을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도 그것의 위상과 이름과 역사적 분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문학 텍스트가 갖는 생성의 힘, 지금 우리에게 생생하게 말을 거는 그 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은 ‘근대 소설’이나 ‘주류 소설’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장르 소설’이나 ‘비주류 소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전복적 읽기가 둘 사이의 낡은 위계적 이분법을 역설적으로 보존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재현적 범주를 뒤집기는 해도 그 낡은 범주의 경계를 해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낡은 이분법은 동시대 독자들의 독서 경험과 이미 얼마간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장르 소설, 웹 소설, ‘순수 문학’을 가리지 않는 잡다한 독서 경험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끌리는 것을 선택해서 읽고, 작품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주류 문학과 비주류 문학을 나누는 구조적 차이들, 이데올로기들, 장치들이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을 없는 셈 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한 구분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우리의 독서 경험에 좀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표면적으로 보면 이시구로 소설의 궤적은 주인공들을 점점 더 철저하게 ‘고아’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 『우리가 고아였을 때』,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초·중기 소설에서는 평생 지켜온 가치관이 붕괴하고, 삶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는 인물들이 나온다. 어쨌든 그들은 인간이고, 인간인 만큼 부모가 존재한다. 초·중기 소설에서는 ‘부모’로 상징되는 법, 의미, 기억, 가치 등이 있었지만 산산조각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부모가 없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은 인간에게 장기 기증을 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할 운명이다.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아이를 돌보는 AF로서 한 아이를 위해 헌신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운명으로부터 불쑥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전 소설들의 주인공이 실존적으로 고아가 되어간다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이미 고아다.3 초·중기 소설의 목적지였던 곳이 최근 소설에서는 출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초·중기 소설에서 인간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충실했으나 자신의 신념에 배반당하고, 자신의 삶이 부정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파괴되고 공허해진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초·중기 소설에는 패턴처럼 반복되는 인식의 변화가 있다. 처음에 인물들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상황에 수동적으로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사실을 뼈아프게 알게 된다. 그런데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수동성을 기본값처럼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궤적을 염두에 두면 이시구로의 소설이 점점 더 소수적인 존재 혹은 체제의 외부자(outsider)에 주목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시구로는 자기 소설의 인물들이 외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수(major)’에 속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제 소설의 인물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외부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 두 번째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은 그 사회와 그 세대에서 다수에 속하는 인물이고, 이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비극입니다. 그는 전쟁 중의 그 세대와 시기에서 외부에 서 있을 만큼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조류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다소 이상한 공동체에 속해 있긴 하지만, 그 공동체의 대다수에 속하고, 공동체의 외부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주어진 일에 매우 수동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상황의 외부에 서 있지 못합니다.”4 여기서 우리는 소수와 다수에 대한 전도된 이해를 본다. 대다수 사람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자신의 계급과 처지를 받아들이고, 체제와 규범에 맞추어 살아간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극소수다. 그렇기에 극도로 수동적인 존재를 그림으로써 우리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 예외 상태가 곧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 “헐벗은 생명”(아감벤)이 모든 생명의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가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중요한 점은 그들이 반항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기[기증] 때문에 도살되는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우리 대부분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원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은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사람들이 필멸적인 존재라는 것,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죽는다는 것,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5

이시구로의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우뚝 서서 세계와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그러한 근대적 주체의 삶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평범한 삶은 ‘세계-속의-삶’, 세계의 온갖 법칙과 변화에 수동적으로 영향받는 삶이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인물들을 놓고 누군가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기도 한다.6 그러나 이시구로의 소설들이 그려온 궤적을 보면, 소설이 일관되게 천착하는 것은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조건―혹은 생명 일반의 조건―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그 가혹한 조건의 메타포가 되는 것이 ‘고아’이다. 부모 없는 존재들, 타자의 처분에 수동적으로 내맡겨진 존재들,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들, 즉 복제 인간이나 AF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보여주는 형상으로 그려지면서 인간과 비인간, 장르 소설과 순수 소설의 경계가 폭파되고 익숙한 관념들이 낯설어진다. 가장 약하고, 비인간적이고, 장르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3.

사실 ‘수동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시구로의 소설은 정치적 무기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고, 주체적으로 체계를 변형시키고, 체제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그러한 태도 자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로 읽힐 수 있다. 이 수동성을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적 모순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한층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생태사회주의자인 제이슨 W. 무어는 근대의 자본주의 체제가 자연, 생명, 돌봄, 노동 등을 저렴하게 착취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7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인간 문명의 저변에서 생명과 돌봄에 드는 노동력을 순순히 착취당하듯이 근대 자본주의는 ‘자연(그리고 근대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동일시한 것들: 가령 여성, 유색인종, 동식물)’을 수동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으로 외부화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동적인 존재들, 즉 ‘자연’과 동일시된 존재들은 오랫동안 역사나 담론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수백 년간 밀어붙인 ‘발전’과 ‘성장’의 폐해를 마주하고 있다. 기후재난, 환경 오염, 에너지 고갈 등의 문제 말이다. 그런데 문제의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이시구로의 말처럼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오늘날 인간 존재는, 능동적으로 상황을 개척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당황하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을 닮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한편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존재와 상태를 깊이 사고해야 함이 마땅하다. 또 우리 자신이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 즉 생명의 그물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지구적인 문제에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입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가로지르고 해체해야 하는 것은 ‘능동성’과 ‘수동성’의 이분법 자체인지 모른다. 우리는 ‘자연’과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단독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인, 사물, 자연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체이자 혼성체이며,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페이션시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의 주목할만한 논문을 읽었다.8 그 논문은 주체, 행위자, 능동성이 아니라 ‘페이션시(patiency)’, ‘감수자(感受者, patient)’, 수동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감수자’는 ‘행위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영향을 끼치기보다 영향을 받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논문의 저자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이론은 지나치게 ‘행위자 중심적’이었다. 행위자만큼이나 중요한 감수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행위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의 영향을 받는 존재도 반드시 있다는 점에서, 이 편향된 이론적 관심은 잘못된 것이다. 존재의 절반에만 이론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능동적 행위자를 주인공으로 여겨왔다. 사실 이 점은 ‘순수 소설’에서나 ‘장르 소설’에서나 거의 매한가지다. 보통 SF나 디스토피아 소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통쾌하게 성공하건, 비극적으로 실패하건, 적당히 타협하건 어쨌든 저항하려고 한다. 우리는 디스토피아적 배경에서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거나 주요한 인물로 나오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대를 배반하려는 듯이 이시구로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즉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인물들,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 인물들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인물들이 디스토피아 장르의 주인공이었던 경우가 많이 없었던 만큼 이시구로 소설의 주인공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수동성’을 무기력이나 패배주의로 읽는 것은 너무 단순한 독해일 테다. 그런 독해를 피하기 위해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타나는 ‘수동성의 주체성’을 간략히 짚어보려 한다.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이 말하듯이 수동성은 어떤 종류의 전도된 힘일 수 있다. 감수성도 하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감수성이야말로 ‘생성’과 ‘배움’, ‘접속’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고 열이 날 때 피부가 예민해지는 것처럼, 바람과 온도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는 약해질 때 동시에 강해지기도 한다. 이시구로 소설의 모든 인물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만, 그렇다고 그 인물들이 다 같은 의미를 띠는 인물들인 것은 아니다. 운명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듯, 수동성에도 여러 결이 있다. 특히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전적으로 순응적이지만,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보다 강해 보이기도 한다. 클라라는 환경을 예민하게 감응하고, 세계를 관찰하고 배운다. 자연 속에서 터전을 꾸리는 동물들처럼 목표를 설계하고, 끈질기고 기민하게 수행한다. 클라라가 세계를 배우는 방식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과정 그 자체다.

4.

“클라라,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매니저는 로사나 다른 에이에프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네.” 매니저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걸 알아야 해. 우리 매장은 아주 특별한 곳이야. 세상엔 너나 로사나 여기 다른 누구를 친구로 갖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이 아주 많아. 그 아이들은 너를 가질 수가 없어. 그래서 창으로 다가와서 너를 가졌으면 하는 꿈을 꾸는 거야. 그러다 보면 슬퍼지지.”
[……]
“그런 아이는, 에이에프가 없으니 틀림없이 외로울 거예요.”9

세계를 ‘배우는’ 클라라의 감수성 덕분에 소설 속 세계의 부조리한 전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독자는 초반부에서 극심한 빈부격차와 나빠진 날씨가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는 현재보다 더욱 완고해진 불평등이 그려진다. 아이들은 ‘향상’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로 나뉜다. 정확하게 그 과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향상’은 엄청난 비용과 부작용의 가능성을 무릅쓰는 것으로, 상류층 아이들에게만 가능한 과정인 것 같다. 또 대체로 명문대나 좋은 직장은 ‘향상’된 사람들만을 받아주고 있는 것 같다. 클라라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조시의 AF가 되어 조시와 ‘향상’되지 않은 옆집 아이 릭의 관계를 관찰한다. 릭은 향상되지 않은 상태로 대학에 진학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인다. 소꿉친구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한 조시와 릭은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 세계에 레지스탕스처럼 저항하는 세력이 있음이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암시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은 먼 배경으로 물러나―특이한 소수의 행위처럼―흐릿하게 암시될 뿐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가 사는 세계만큼이나 암울하고 냉정하다.

이렇게 암울한 세계를 클라라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기이하게도, 조시의 어머니는 클라라에게 조시를 모방하라고 명령한다. 클라라는 명령에 따라 조시를 따라한다. 이때 클라라가 지닌 뛰어난 감수성은 모방의 능력으로 변모한다.

“잘한다. 정말 잘해. 그러면 이제 움직여 보렴. 뭔가 해. 계속 조시인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 좀 보여 줘.”
나는 조시처럼 웃으며 구부정하고 편안한 자세를 했다.
“잘한다. 이제 무슨 말을 해 봐. 말 좀 들어 보자.”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아니. 그건 클라라잖아. 조시처럼.”
“안녕, 엄마. 나 조시야.”
“좋아. 더 해 봐. 어서.”
“안녕, 엄마.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맞지? 나 여기 왔는데 괜찮잖아.”10

‘어머니’가 조시를 따라 하라고 시키는 이유는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유는 나중에야 밝혀지는데, 어머니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병든 조시가 죽으면 클라라를 조시와 똑같이 생긴 장치에 옮겨 담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 조시 없이 살아갈 자신(조시를 애도할 자신)이 없기에 아이의 복제물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클라라는 조시를 훌륭하게 모방한다(이 얼마나 ‘언캐니’한 모습인가). 그러나 동시에 클라라는 이러한 수행이 결국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라라는 조시가 완쾌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시가 완쾌할 거라는 클라라의 확신은 맹신이나 광신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인다. AF는 햇빛을 양분 삼아 기동하는데, 클라라는 햇빛이 자신을 강하게 해주는 것처럼 조시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이 조시를 마음에 들어 하면 조시에게 기적을 베풀어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태양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클라라는 공해를 생산하는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태양의 마음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할 법한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태양에 말을 거는 클라라의 엉뚱한 수행 덕분인지 조시는 정말로 건강해진다.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AF의 ‘초지능’이 인간이 원리를 알지 못하는 기적 같은 일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클라라를 제외한 소설 속 인간들이 날씨가 생명과 건강에 미치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비인간 클라라만이 인간이 얼마나 주변 환경에 ‘영향받는’ 존재인지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 인과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므로, 클라라가 수행한 희생이 실질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실질적인 보상이 없는,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클라라의 헌신을 보여준다.

클라라가 조시의 건강을 위해 바치는 헌신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만큼 인과관계를 벗어난 주체적 행위처럼도 보인다. 인물들은 상황의 인과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클라라는 인과관계를 벗어나 정말로 무언가를 ‘한다’. 클라라는 조시를 위한다는 자신의 정해진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인간적인 정도의 순응성이 오히려 이상하게도 클라라를 주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클라라와 태양』은 수동과 능동의 구분 자체가 와해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클라라의 수행은 어머니와의 계약관계 속에서 수립되는 것이 아니다. AF에게 주입된,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는 원칙을 자의식 없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AF가 인간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고, 또 클라라가 매우 독특한 AF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클라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명령은 따르지 않고 거부하기도 한다. 게다가 클라라는 자신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아이 중 조시를 스스로 선택했다.

조시의 어머니가 클라라를 구매하면서 원했던 것은 클라라가 조시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조시가 죽은 후 클라라가 조시의 대리물로서 자기 옆에 있기를 바랐다. 자기 보존 욕망을 따른다면, 어머니의 바람대로 되는 편이 클라라에게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조시가 낫기를 바라고, 나을 거라고 확신하며, 조시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한다. 자신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헌신한다는 점에서 클라라의 생각과 행동은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에게 낯설다. 클라라가 수행하는 것은 누군가 알아주고 보상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희생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합리적인’ 인간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클라라와 태양』의 온갖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과 말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클라라의 확신과 희생뿐이다. 나머지 인간의 말과 행동은 상황의 인과관계 속에 붙잡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클라라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p. 442). 그러나 이것은 클라라의 겸손한 표현인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아주 특별한 무언가’로 만드는 것은 인간들―특히 부모자식 간의―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클라라 자신의 확신과 희생이다.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비인간 클라라의 삶 속에 특별함이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친밀한 낯섦을 지닌다면, 클라라는 인간과 비인간, 수동성과 능동성, 지혜와 어리석음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숭고함을 지닌다. 이 ‘숭고함’은 인간적인 것일까 비인간적인 것일까? 알 수 없다. 그것은 ‘숭고(sublime)’라는 말 그대로 낯설고 절대적이어서 상대적인 구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p. 35. ↩︎
  2. 같은 책, p. 95. ↩︎
  3. 박선주는 철저한 외부성인 동시에 인간의 근본 조건이기도 한 ‘고아’의 개념을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과 연결지어 자세히 분석한다. 다음 논문에서 박선주는 “인조인간이야말로 ‘고아’라는 정체성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온전히 전유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박선주, 「인조인간, “헐벗은 생명,” 포스트/휴머니즘: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카즈오 이시구로의 『날 보내지 말아줘』에 나타난 고아와 인간」, 《역사와 문화》, 24, 2012, pp. 129-152. ↩︎
  4. Sean Matthews “’I’m Sorry I Can’t Say More’: An Interview with Kazuo Ishiguro” Kazuo Ishiguro: Contemporary Critical Perspectives. Continuum: London and New York, 2009, p. 115. ↩︎
  5. lbid, p. 124. ↩︎
  6. 김남주 해설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2010, p. 306 참조. ↩︎
  7.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자본의 축적과 세계생태론』,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참조. ↩︎
  8. 김홍중·조민서, 「페이션시의 재발견―고프만과 부르디외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5(3), 2021, pp. 35-65. ↩︎
  9.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홍한별 옮김, 민음사, 2021, pp. 22-23. ↩︎
  10. 같은 책, pp. 159-160. ↩︎

거대한 바람과 접이식 지도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와의 대화 1부

1부: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피투자자라는 형상/매력의 경제학/『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2부: 기후-금융?/기후위기의 재현/기후정의 행진/기후우울증

희우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지요?

민서
네. 연초에는 독감 때문에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한결 낫네요. 우리가 평소에 얘기를 많이 하니까 이런 자리가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희우
예, 좀 낯설고 두근두근거리는 자리네요.
민서 씨는 작년 화제의(?) 책인 『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하기도 했고 여러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 중이시지요. 제가 사회자처럼 민서 씨 경력이나 이력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도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서
이런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 희우 씨는 제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분이고, 또 우리가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재밌는 얘기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런 대화가 좀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아직 학위 과정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소개하려면 뭔가 고정되어있어야 하는데, 저는 지금도 계속 흔들리면서 바뀌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라고 소개하는 게 아직 좀 어색한 것 같아요.

희우
그럼 이 얘기부터 해주세요. 어떤 걸 공부해오셨고 어떤 연구들을 하셨는지, 하고 있는지……

민서
네. 저는 학부 때부터 사회학을 전공해왔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사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전개되면서 이 모순이 위기로 표출되는 과정, 특히 이 과정에서 인간·비인간 존재들의 안정(security)이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정치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사회보장을 둘러싼 복지정치, 그리고 생태위기 시대 기후정치 쪽에 관심이 있어요. 둘 다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어떤 ‘보장’의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치와 관련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구요. 그 교차점에서 작년에 리시올 출판사에서 미셸 페어(Michel Feher)의『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했어요.

희우
먼저 석사 논문에서의 연구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해주실래요? 복지정치 관련해서…

민서
복지정치랑 관련해서는 서울시 청년수당,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어요. 소위 국가 경제에 기여해야 하는 주체로서의 청년이, 국가로부터 어떤 ‘돈’을 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과정을 본 건데요. 이런 정책들을 형성하고 집행하는 정치인, 공무원 같은 사람들, 당사자인 청년들, 운동가들,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이 ‘돈’의 도덕적·문화적인 의미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고 논쟁되는지 봐왔습니다.

희우
한 사안에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오신 것 같아요. 기후 관련 연구도 금융 쪽을 주로 보시지만 작년 기후정의행진에서 관계자로 일을 하시기도 했지요.

민서
네. 작년 923 기후정의행진의 경우에는, 행진 참가자들, 참가 단체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기획팀에서 담당했고요. 이것도 나중에 얘기를 더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923 기후정의행진은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기후 정치와 관련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 참여했던 사람들이 행진이라는 집합행동을 어떻게 경험하고 결산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데이터를 정리한 것이죠.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

희우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들어보기로 하고, 일단 번역하신 책에 대한 얘기부터 해봐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책을 번역하게 되셨는지,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어떠셨는지 얘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서
사실 제가 번역은 완전 처음 해봐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깨달은 것도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번역이 아니었다면 알기 힘들었을 것 같은 출판의 단계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식의 유통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충만한 경험이었어요.
책을 옮기게 된 계기는… 이 책에 재밌는 포인트들이 워낙 많지만, 저한테 가장 중요했던 지점은 이 책이 동시대 자본주의의 지형을, 금융화 이전의 자본주의와 대비하면서, 그 역사적 차이를 포착하는 개념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제공해준다는 점이었어요. 책의 목차를 보면 챕터별 소제목이 전부 A & B 식으로 짜여져있는데요.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A는 산업자본주의와 여기에 대한 정치에서 중요했거나 혹은 이걸 소묘하기 위한 개념들의 계열이고, B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에 대응합니다. 저자의 진단에 당연히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A와 B를 이렇게 각각 일관된 그림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읽어낸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A가 무효화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왜 B라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한지. 특히 제가 관심이 있었던 복지국가, 복지정치처럼, 누군가는 ‘진보’와 동일시하는 어떤 정치적 유산―구체적인 제도, 정치적 상상, 전제들―에 B라는 새로운 현실 인식이 어떤 과제들을 제기하는지를 사고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희우
저도 그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에게 재미있게 읽힐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왜냐면 책이 좀 어렵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제 주변에서 재밌게 읽었다고 하고 관심을 표하는 분들도 꽤 있었어요. 그 책을 2023년 ‘올해의 책’으로 꼽는 분들도 있었고……

민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말 너무너무 기뻤어요(웃음). 희우 씨 본인이나 주변 분들은 어떤 포인트를 좀 재미있게 읽으셨던 걸까요?

희우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꼼꼼히 읽을수록 논의가 정치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어요. 특히 제가 흥미로웠던 건 ‘인적자본’에 대해서 그 책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거예요. 국가가 생산하려 하는 인적자본의 형상이 유순하고 성실한 노동자였다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가로 변했다는 게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인데, 페어는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이 ‘기업가’보다는 ‘자산관리사’ 혹은 ‘피투자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좋은 점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개탄이나 푸념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어떤 전망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책의 내용에 대해 좀 얘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먼저 책이 어렵기도 하고, 여러 가지 논의가 다층적으로 돼 있으니까 번역자로서 책 요지를 간단히 안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민서
간단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먼저 책 제목에서부터 출발해 보자면요.
제목에서 “피투자자(investee)”라는 건 투자를 당하는 자, 그러니까 투자를 받는 존재죠. 이 ‘피투자자’라는 형상을 이해하기에 앞서 부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국어 부제를 ‘금융자본주의 시대 새로운 주체성과 대항 투기’라고 옮겼어요. 금융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시대에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 주체성에 근거해서 금융자본주의에 맞서는 어떤 식의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항 투기’라 불리는 전략을 제안하는 거죠. 한국어 부제는 제가 이렇게 달았습니다만, 여기 차마 넣지 못한 프랑스어 부제도 중요합니다. 프랑스어 부제(“Essai sur la nouvelle question sociale”)는 직역하면 “새로운 사회 문제에 대한 에세이”인데요. 여기서 ‘사회 문제’라는 말을 조금 설명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사회 문제라고 생각하면 빈곤, 범죄, 고령화, 환경 문제 같이 사회적으로 problematic한 문제들, 해결을 요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이 말하는 사회 문제는 social problem이 아니라 ‘social question’이에요. question도, problem도 우리말로 ‘문제’로 옮겨질 때가 많은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게 다소 차이가 있어요. question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뚜렷한 답은 없지만 계속해서 잠정적인 해답(answer)만이 조금씩 나올 수 있을 뿐인 ‘질문’이고, problem은 1+1은 뭐냐, x+1 = 2에서 x는 뭐냐는 것처럼, 구체적인 해(solution), 어떤 ‘솔루션’을 통해 해소,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과제’에 가까운 것이죠. social question이라고 했을 때 서구권에서 많이 얘기하는 맥락은, 자본주의가 모종의 문제/질문(question)을 낸다는 거예요.
그 질문이 뭐냐면,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상정하지만, 우리는 모두 현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평등과 자유’의 의미가 얼마나 굴절되어 협애하게 나타나는지 알고 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는 결국 우리의 노동력을 거래할 자유이고, 우리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고요. 헌법이나 인권 선언 같은 텍스트에서 이야기하는 이 자유의 이념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양극화니 ‘~계급론’ 같은 말들에 담겨있듯이, 극단적인 불평등 앞에서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지지요. 곧 이런 형식적인 평등과 내용적인 불평등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게 social question, 사회 문제인 것이죠.

희우
그렇군요. 요지를 정리해보자면 ‘사회 문제’란 일종의 자유주의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런 괴리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이죠.

민서
그렇죠. 그게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회 문제’의 통상적인 용법이에요.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오는 과정,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고, 이 과정에서 착취가 발생하고… 그런데 페어는 이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던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바라보았던 틀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회 문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제기된다고 보는 거죠.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적대는 자본과 노동, 페어의 표현대로라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적대였어요. 그렇다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적대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했을 때, 투자자랑 피투자자라는 것이죠.
피투자자가 누군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거는 투자를 받기 위해 자기를 어필해야 하는 존재들, 가령 스타트업 창업자를 떠올릴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스타트업 창업자만 그런 게 아니고, 따지고 보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우리 둘도 그렇고, 예술가와 연구자들도 끊임없이 자기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유망하고 의미가 있는지 증명해서 그걸 잠재적인 후원자들(국가가 될 수도 있고 문화재단이 될 수도 있고 학술진흥재단이 될 수도 있는)에게서 크레딧을 확보해서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과 동반되는 어떤 매력도와 평판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들인 거죠.
그래서 ‘매력도’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 신용의 흐름을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도 피투자자고, 예술가와 연구자뿐만 아니라 플랫폼에서 뭘 파는 사람들, 당근마켓이건 에어비앤비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과 주목의 흐름을 유인해야 하는 사람들도 피투자자죠. 투자를 받기 위해 주가를 관리하는 기업, 채권을 발행해서 재정을 운용하기 위해 국가 신용도를 관리하는 국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페어는 등급 평가를 당하고 투자를 당하는 존재 일반, 즉 개인과 국가, 가계, 기업을 모두 아우르는 어떤 주체성이 ‘피투자자’라는 거죠. 그게 이제 새로운 사회 문제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겠죠.

희우
네. 정리 감사합니다.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논지가 과거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있었던 사회 문제의 전선이 이제 투자자와 피투자자 사이로 옮겨온다는 것이고, 그래서 페어는 그런 과거와 현재의 ‘유비 관계’ 속에서 계속 논의를 진행하잖아요. 이 유비 관계가 좀 흥미롭습니다.
과거의 노동운동에서, 피고용인들도 자신을 ‘자유로운 노동자’로 정체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위치를 투쟁을 위해서 전유했다는 것이죠. 이중의 전략이 있었다는 거죠. 그와 똑같은 형식으로, 사실 우리가 자유롭게 투자를 하거나 받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이렇게 주어진(소여所與된) 피투자자의 조건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이 페어의 전제인 것 같습니다.

민서
네. 이걸 책에 수록된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문학과사회』작년 봄호에 페어 글에 대한 해설로 수록한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짚었는데요. 사실 그 전략, 소여 혹은 주어진 것을 전유해서 정치에 활용한다는 발상은 미셸 페어 자신의 발상이라기보다는 페어가 참조하는 미셸 푸코의 권력론에서 온다고 볼 수 있어요. 푸코에게 권력은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하고, 억압하고 금지하는 권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게끔, 주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면서 작동되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억압적인 권력의 전범으로 생각하는 게 감옥, 군대, 학교 이런 곳일 텐데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감옥, 군대, 학교 같은 권력의 장치들이 그 장치에 입장한 주체들에게 어떤 역능을 함양한다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는 제식을 훈련시키고,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는 40분 동안, 중학교 때는 45분, 고등학교 때는 50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게 훈련시키는 등.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집중하게끔 만드는 그 훈련이 억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써 우리는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특정한 과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역능을 배양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체제에 입장한 신민들이 권력에 예속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자유와 의지를―비록 권력에 의해서 내면화되는 거긴 하지만―행사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 그게 푸코가 말하는 주체론이지요. 그 함의는, 주체가 되기 위해 내면화했던 권력의 작동 양식이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의 대전제를 어떤 식으로 전유하고 활용한다는 것.
페어는 이걸 통치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인간학(moral anthropology)’이라고 표현합니다(책 본문에는 없고 제가 했던 인터뷰 부분에 나와요). 그 도덕적 인간학이 산업 자본주의하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죠. 그 자유는 물론 아주 기만적인 자유죠. 자본의 착취를 가능케 하는 어떤 형식적 전제니까요. 즉 판매할 것이 노동력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 자유란 그 자유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니까요. 가진 게 노동력밖에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대면할 때 한 가지 가능한 선택지는 이런 거죠. ‘너희가 말하는 자유는 기만이고 허구야! 말도 안 되는 거고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교설이고 협잡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노동운동가들은 그런 ‘자유’의 위선을 비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일정하게 활용했다는 거예요.
고용주들이 처음에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주려고 카르텔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노동력 상품에 대한 가격을 집단적으로 내려치기를 하죠. 거기에 맞서 노동자들은 개인의 노동을 노동력 상품으로 성립시키고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하는 어떤 인간의 조건, 즉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통치의 조건을 거부하기보다는 이게 ‘맞다고 치고’ 파업이라는 집합적 행동을 통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교섭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했다는 거지요. 우리 노동력 상품을 개별적으로 거래할 ‘자유’를 가진 모든 개인이 연합해서 특정 임금, 특정 노동 조건을 보장하지 않는 작업장에 가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집단적인 협상을 벌였죠. 여기서 이제 복지국가도 나오고, 노동계급 정당도 나오고, 일련의 ‘진보 정치’라고 부르는 세력들이 성취했던 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페어가 던지는 물음은, 이렇게 통치의 전제가 되는 인간학, 즉 ‘인간이란 이러한 존재다’라는 조건을 전유하는 전략을 지금 시대에 해본다면 어떨까, 하는 거죠. 왜냐면 이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연합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걸 기반으로 협상했던 전략이 이른바 금융화 그리고 신자유주의화 이후에는 굉장히 불안정하게 돼버렸거든요.
첫 번째로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자본이 언제든지 노동력 가격이 싼 데로 옮겨갈 수 있게 됐죠. 그리고 두 번째는 (산업자본주의 같은 경우에는 제조업 기업들이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고 그걸 팔아서 어떤 산업적인 수익을 거둔 후 다시 재투자하고 이런 식의 모델이었다면) 지금은 단기적인 측면에서 주가 관리가 굉장히 중요해져 버렸고, 이걸 위해서는 소위 노무비용 절감이라 불리는, 임금으로 나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임금 수준도 조절하고, 고용 규모도 ‘유연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거든요.

희우
그러니까 경제가 금융화·세계화되면서 주주가치를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경영 관행에 맞서서, 노동자들이 ‘전유’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고 협상력이 약해졌다는 것이지요?

민서
그렇죠. 이 모든 과정에서 결국 노동조합들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빠르게 자금 투자와 투자 철회를 통해 작동하는 금융의 권력에 대적하기 힘들어졌다는 거예요. 과거엔 고용인-피고용인이라는 양자 관계였는데, 외부에서 주주(shareholder)라는 존재, 회사의 내부자가 아니지만 몫(share)의 담지자(holder)로 여겨지는 주주의 입맛에 맞게 경영이 돌아가게 됨으로써 피고용인이 고용인에게, 노동이 자본 측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에요.
즉 이때까지 진보 정치가 상정하고 활용하고 전유했던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조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돼버렸고, 그게 아니면 뭘까, 그 답이 페어가 볼 때는 ‘피투자자라는 조건을 활용할 수 있다’ 이게 책 1장의 논지라고 할 수 있겠어요. 1장이 기업 내부의 정치, 즉 기업 거버넌스가 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권력에 의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2장은 일국적 차원의 경제 조절과 사회보장을 성취했던 국가적 수준의 복지자본주의와 같은 기획이 어떻게 채권자와 투자자라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행위자들에 의해 제약되는지를 다루고 있구요.

피투자자라는 형상

민서
희우 씨는 ‘피투자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어떤 형상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우리 주변에서 이 개념을 가지고 조명할 수 있는 대상들이 있다면……

희우
실제로 페어도 그런 예를 들지만, 제 주변에 지원금을 받기 위해 지원서를 쓰는 젊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많아서요, 저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나네요.

민서
그렇지요. 펀딩을 끌어오려는 존재들, 그러기 위해서 포트폴리오를 짜고 관리하는 사람들. 자기 작업한 것부터 세계관, 취향, 네트워크 등 자신을 구성하는 넓은 의미의 포트폴리오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책 3장에서는 이걸 하이퍼페이지라고 부르는데, 홈페이지일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 같은 걸 수도 있고. 특히 모종의 ‘작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웹페이지에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올리잖아요. 그러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미학적 능력, 취향, 세계관, 성과 등을 전시해서 주목을 끌고, 관심이 되었건 화폐가 되었건 모종의 자원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걸 어필하잖아요. 희우씨가 주요하게 밀고 있는 어휘로는 ‘매력’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거죠. 우리 말 ‘매력’에 대응하는 영단어는 charm, attraction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제가 “매력도”라고 옮긴 “attractiveness”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구요. 기업이든 예술가든 자금과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의 척도랄까요. 페어가 이 책을 쓰기 10년 전에 쓴 글이자 제가 《문학과 사회》에 번역했던 글(「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열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영어로는 이걸 “self-appreciation”이라고 부르고 한국어로는 제가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고 번역을 했어요.

희우
맞아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민서
재밌게 읽었다니 다행이네요. appreciation의 명사형이 appreciate인데 이게 고마워하다, 가치를 인정하다, 알아보다, 평가하다, 그리고 자동사로 쓰이면 ‘가치가 상승하다’라는 뜻도 있어요. 주가 상승을 stock appreciation이라고 하거든요. 여기 앞에 “self”가 붙으면 ‘자화자찬’ 이렇게 많이 번역되는데요. 이게 그러니까 우리가 SNS에서 내 작품이 이번에 나왔다, 하고 올릴 때 그것은 단순히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알리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수행적으로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거고 사람들이 내 걸 감상하게끔 주목을 집중시키고 관심과 반응을 이끌 수 있도록 게시물을 올리는 거잖아요. 플랫폼에서 자기를 마케팅하고, 자기가 맨션될 기회를 높이고 좋아요와 팔로워와 하트를 유인하는 존재들…… 책에서는 이런 존재들이 ‘평판 자본’을 축적하려 하고 그걸 축적한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획득하려고 한다고 분석하는데요. 작년에 나왔던 아이브의 <키치>라는 노래 가사가 이런 주체를 전범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SNS에 뭔가를 올리고 상대방의 알고리즘에 노출되고 평판이 올라가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전시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해서 그걸 통해 더 많은 자본과 주목을 수행적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식의 주체성을 표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희우
네. 저도 점점 그…… 광의의 ‘평판 자본’을 많이 신경 쓰게 되는 거 같은데요. 안 그러기가 힘든 것 같아요. 어쨌든 그건 확실히 제 관심사와도 연결되는 문제네요. 제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죠.
또 이 문제는, 아까 얘기했던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전제하는 ‘도덕적 인간학’과도 관련이 되는 듯해요. 페어 책에도 그런 내용이 있잖아요. 원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념적인 수준에서 목표로 했던 것은, ‘복지로 인해서 왜곡된 계몽주의의 혁명적 이상을 되살리는 것’이었다고요. 계몽은, 칸트의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타인에게 의존하는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잖아요. 칸트는 자신이 직접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의존하는 상태를 ‘미성년 상태’라고 하고 계몽을 거기에 대립시키죠. 또 칸트는 어른이 되고도 그런 미성년 상태에 안주하는 것에 개개인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신자유주의도, 적어도 이념적 수준에서는 어딘가에 의존하지 않는―권위에 의존하지 않지만 사회 부조에도 의존하지 않는―자유로운 주체들을 전제하고, 만약 우리가 계속 어딘가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나약하고 게으른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말하잖아요.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는, 이념적/이상적으로는 계몽주의의 이상과 비슷하게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자기 입법자’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자유는, 자유를 허용하는 합리적 체제에 대한 복종과 같은 의미죠. 한편으로 아이돌 가사에서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전시되는 주체는, 어떻게 보면 그런 계몽의 이상이 전도된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의존할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주체들인 것이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높게 평가하는 어떤 경제적 장에는 매여 있는……

민서
그렇죠. 자기 행동을 조직할 주권이 본인한테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결국 그 실천의 준칙은 주어진 매력의 경제라는 장 내에서 매력 상승을 담보해준다고 여겨지는 테크닉들로 국한되는 것이죠.

매력의 경제학

민서
여기서 희우 씨의 글 「매력의 경제학」과 좀 엮어서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이 책에서도 ‘매력도’ 얘기를 많이 하지만 매력은 남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잖아요.
희우 씨가 매력(魅力)의 ‘매(魅)’가 도깨비를 뜻한다고 하셨는데요. 매혹시키다, 내지는 매료시키다 할 때 그 ‘매’는 모종의 신비한 어떤 힘, 역능처럼도 보여져요.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끌려갈 때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거잖아요. 물리학에서도 attraction이 ‘끌개’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저는 이 매력이란 개념 자체가 굉장히 어떤…… 비표상적/비재현적 이론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힘, 소위 ‘정동적 전환’ 이후에 중요시되는 어떤 힘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희우 씨가 「매력의 경제학」에서 해석한 걸 보면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이라는 곳에서, 거의 처음으로 모종의 사회를 경험하는 주체들이 거기 입장했을 때 본능적으로 어떤 매력의 문법을 학습해 나가면서 그 학습을 바탕으로 매력의 기호를 학습하는 과정을 겪죠. 근데 그런 일이 교실이라는 어떤 원형적인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문인들과 예술가들도, 스타트업 창업주도, 기업들도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사실 요새 SNS에 자기의 매력을 전시하는 모든 존재가 그런 힘을 따라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비교질”이라고 사람들이 자조하는 어떤 등급 평가(rating) 문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고요. 저는 그 “매력의 경제학”에 ‘매력의 물리학’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어요. 매력은 상징적이거나 표상적이기만 한 힘이 아니니까요.

희우
맞아요. 근데 좀 부끄럽지만, 그 미숙한 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그 글을 쓰고 약 이 년이 지나는 동안 제 생각이 좀 더 정교화되고 바뀐 면이 있어요.
일단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고찰해보려면 근대미학을 좀 들여다봐야 해요. 칸트도 ‘매력Reiz’을 언급하는데, 매력은 대상이 우리한테 미치는 효과이고, 우리가 어떤 매력을 느낀다는 건 대상의 감각적 특징에 휘둘리고 좌우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칸트한테 매력은 야만적인, 미성숙한 관심인데요.1 칸트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매력(charme)이 대상에 노예처럼 종속된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관심이라고 말한 바 있어요.2
칸트 미학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조화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그건 대상의 역량이 아니라 순전히 주체의 역량이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 미학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칸트는 순수한 아름다움(주체의 역량)을 매력(대상의 역량)으로부터 정화시키고 분리하거든요. 칸트의 관심사는 인간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그리고 능력들 간의 관계니까요. 이게 결국 주체와 대상의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되는 문제죠.
아무튼 제 진단은,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같은 거는 너무 낯설고 희귀하고, 심지어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너무나 일상적이면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 상황을 칸트의 미학이나 계몽관, 교육학에 대입시켜 보면, 매력을 중요시하고 매력에 좌우되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근대적 감상자 혹은 계몽된 주체보다는 훨씬 ‘야만적’인……

민서
칸트 입장에서 보면 매력의 세계로 ‘퇴행’했다고 볼 수 있는……

희우
그렇죠. 그러니까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서 이성의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주체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칸트의 문법에 비추어보면, 동시대 문화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의 비근대적인 문화가 된다는 것이죠. 물론 저는 이 문화적 경향을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조건으로 경험하고 사고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근대 미학과 다른 미학을 써야 한다는 거죠.
문학작품의 사례로 얘기해 보자면,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교양소설 중 하나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계몽의 모순, 계몽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손보미를 포함해 최근의 젊은 작가들이 쓰고 있는 성장소설/교양소설은 ‘배움의 다면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6학년 담임은 아이들을 매질하면서 ‘너희들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촉구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불합리한 엄석대 체제에서 좀더 합리적인 선생의 체제로 옮겨가기 위해) 아이들은 일단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선생의 매질에 복종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손보미의 소설을 포함한 최근의 한국 성장소설들에서는 선생의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혹은 선생이 한 명의 어른이 아니라 수십 명의 어른아이들과 애늙은이들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 소설들에서 배움은 또래 집단 속의 수치심, 매혹, 실망, 상처, 분노 등의 정동적 경험을 거쳐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죠.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이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가를 감지하는 어떤 논리(제가 ‘매력의 경제’라 부르는 것)가 SNS에서의 전시나 피투자자로서의 가치 상승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경향을 그냥 비판하거나 분석하는 걸 넘어서 그 문화적 경향에서 어떤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보려면, 매력에 두 종류가 있음을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이게 제가 최근에 연구 중인 문제에요. 말하자면 표상적, 재현적 매력과 감각적, 정동적 매력이 있다고 할까요?
이게 또 한편으로는 번역의 모호성이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이를테면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 같은 사람이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페어가 말하는 ‘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어요. 또 한국에서 『매력 자본』3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인데요. 그 책의 논지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의 성적 매력 역시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지금 한국어에서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어요. 근데 또 이게, 어떻게 보면,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이상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앞서 얘기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감각적 자극, 성적 끌림, 도덕적 관심, 지적 관심, 미적 관심, 경제적 이해관심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잖아요.

민서
Erotic Capital이 “매력 자본”으로 옮겨진 건 ‘매력’의 원형적인 이미지가 성적인 범주로 이해되서 그런 걸까요? 여러모로 ‘매력’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생산적인 모호성이 있는 것 같네요.

희우
맞아요. 경험적 세계의, 지저분하게 얽혀 있는, 분화되지 않은 그런 힘인 거죠. 저는 매력의 경제가 정치적 관심, 지적 관심, 미학적 관심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아마도 이게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 계몽, 교양이 무력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매력을 두 종류로 나눠 보면 좀더 재밌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이 조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어요. 먼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SNS에서의 자기 전시나, 아니면 투자자들 사이의 평판 등으로 평가되는 매력은 이미 전달 가능하고 유통 가능한 방식으로 재현된 매력이지요. 그렇게, 어떤 추상적인 기호들로 전시될 수 있고 평가될 수 있는 매력이 있는 한편으로, 아까 민서 씨가 ‘매력의 물리학’이라고 말씀했듯 훨씬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의 매력이 또 있죠.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면 저는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는 힘이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자가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고 했던 그 보드리야르적 의미의 기호와 관련된다면 후자는 들뢰즈적 의미의 기호랑 관련이 있어요.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는 언어처럼 추상화된 기호뿐만 아니라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것까지 포함하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목재를 만질 때 느끼는 까칠까칠함이나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같은 것. 들뢰즈는 그런 것들도 나무가 내뿜는 기호라고 하는데요. 조각가나 목수가 되려면 그런 기호들을 해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잖아요.

민서
비언어적이고 비표상적인 그런 것들……

희우
그렇죠. 어떤 예술 작품, 특히 회화 작품 같은 것이 그 두 종류의 매력의 모호한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매력적인 회화의 표면은 한편으로는, 가령 화가 지망생들한테는 배움을 유인하는 강렬한 기호들로 가득한 것이죠. 화가 지망생은 표면에 겹겹이 쌓인 물감들의 층이라든지 뒤섞임이라든지 갈라짐 같은 것들을 지적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해독하면서 배우죠. 그런데 그렇게 매력적인 회화 작품은 많은 경우 투기 상품이 되잖아요.

민서
그렇죠. 이 그림은 뜰 거야, 하는 투기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게 매력에 대한 모종의 해석인 건지…

희우
하지만 그런 번역이 생각보다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젊은 화가는 당장 매력적인 회화를 생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되는 것은 작가의 자기 홍보(페어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 상승), 작가의 명성, 작가에 대한 평판, 경매된 이력, 비평가와 구매자, 투자자 들의 평가가 축적이 되고 난 이후니까요. 그래서 매력의 두 측면이 현실에서는 상호작용하고 변환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론적으로는 분리할 수 있고 분리하는 게 좋다는 거예요. 매력이 주체성에 미치는 효과를 사고하기 위해서 분리할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제가 「매력의 경제학」이라는 글을 쓸 때는 이런 생각들이 아직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매력이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논리, 재현 논리가 되었다는 비판과 매력이 어떤 비재현적인, 감각적인 배움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그 두 가지 논지가 섞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던 것 같아요.

민서
그렇네요.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중핵에 있는 매력과 거기서 우리가 되짚어 볼 수 있는 배움의 계기 내지는 배움의 절차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매력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느냐, 이 두 가지 문제가 섞여 있다는 얘기죠.
음, 저는 그 charm과 attractiveness의 구분이, 매력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와는 별개로 유용한 구분이라고 여겨지네요. 도식적으로 정리해보자면 attractiveness는 평판이나 어떤 고도의 상징적 기호들, 그리고 이제 그 기호들이 번역되고 유통되는 기호가치, 어떤 경제적인 재화로의 교환 가능성과 연결되는 매력이고, 또 다른 한편에는 비표상적이고 비언어적인 매력으로서 charm이 있다는 거네요. 마우리치오 랏자라또가 쓴 『기호와 기계』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보셨나요? 거기서도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를 구분하는데…

희우
맞아요! 읽어 봤습니다.

민서
그러니까 들뢰즈적 의미의 비표상적인, 상징화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육박해 오는, 그렇기 때문에 신비화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매력이 있는 거겠네요.

희우
그렇죠. 근데 그거를 어떻게 한국어로 나눠 부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칸트도 숭고를 얘기할 때 수학적 숭고랑 역학적 승고를 구분했어요. 매력에도 어떤 수식을 달아서 구분할 수 있을까요? 랏자라또처럼 기표적 매력과 비기표적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어떤 매력이든 평가되고, 소통 가능해지고, 수치화 가능하려면 기표적인 것으로 재현이 돼야만 하는 것이긴 하죠. 그렇지만 우리 삶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변화시키거나 하는 게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민서
말씀하신 예를 들어서 비표상적인 무언가가 떠오르더라도, 그걸 결국 시장에서 유통시키고 카탈로그를 만들고 비평을 하고, 또 콘텐츠를 큐레이션하고 이런 과정에서 그게 계속 상징화되고 기표가 될 텐데, 그거는 일종의 사후적인 프로세스인 거고 그 이전에 애초에 비기표적인 어떤 것이 왜 우리의 주목을 끄는가를 해명하려면 어떡해야 할지는 좀 생각해봐야 하겠네요. 표상 이전에 존재하는, 날 것의 힘들이 경합하는 세계…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힘의 시험(trial of strength) 같은 것도 떠오르구요. 저로서는, 희우 씨가 비평했던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서는 교실이라는 현장으로 표현됐고 우리 얘기에서는 SNS와 같이 거의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학습의 장이자 동시에 자기를 전시하는 전시장, 그런 세계를 분석할 때 이런 개념의 구분이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우
정확히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이자 산업적 논리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한편으로는 전시장이나 투기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교실이기도 한 것이죠. 우리는 자신의 가치평가를 높이려고 애쓰는 피투자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야만적’인,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상태’에 유예된 사춘기 학생들이기도 하다는 거죠.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것이 동시대 문화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지금은 모호한 가설 수준인 것이고, 이제 좀 연구를 해야겠지요. 그러면서 다른 분과들, 사회학이라든지 경제학 등으로 많이 확장하고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민서
『피투자자의 시간』을 우리 논제에 맞게 좀 과감하게 재해석을 해보자면(여기서부터는 옮긴이보다는 독자로서 말해보려 하는데), 그걸 ‘투자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업 경영, 국가 정책, 사회운동까지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의 흐름을 좌우하는 평판의 흐름, 주목의 흐름, 무엇이 윤리적·미학적으로 우월하다는 거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 ESG 투자도 마찬가지고… ‘이 시대에 이럴 수는 없어’, ‘저건 정말 아니야’라는 판단을 사람들이 다 갖고 살아가잖아요. 무언가를 접할 때 어떤 윤리적·미학적기준에 따른 생래적인 거부감 같은 게 발생하고, 그걸 통해 특정한 집단, 혹은 투자 대상의 매력도는 낮아지는, 이런 식의 동학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폐어가 말하는 것은, 결국 그게 기업의 투자를 넘어서는 자금, 시간, 노력, 평판, 매력, 감정 이런 것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 흐름들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재구성할 건지가 『피투자자의 시간』이 제기하는 과제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금융에 대한, 그리고 금융과 얽혀있는 이 비금융적인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된 투자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을 번역하고 필드워크를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가치, 대의, 정치인, 집단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고 그 대상에게 돈이든 시간이든 관심이든 내가 가진 자원의 일부를 ‘투자(invest)한다는 것. 나의 일부를 그만큼 던져넣는다는 건, 그 비율에 비례해서 그 대상의 운명과 내 운명이 일정하게 묶이는 것이기도 하고, 거기서 그만큼의 유대(bond)가 발생한다는 것.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세계를 이런 방향으로 만들어나가는 흐름에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서있고 싶다. 나도 그 일부가 되어, 오롯이 함께하진 못해도 그 에너지의 흐름에 뭔가를 보태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시간이나 에너지를 쏟게 되는 것 같거든요. 어떤 단체나 개인을 후원할 때도 이런 맥락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 같구요. ‘투자(投資)’의 ‘자(資)’는 일차적으로는 자본, 재물이나 금전을 의미하지만 – 어떤 내러티브를 가지고 사회를 ‘혁신’하겠다고 천명하는 스타트업이나, 테슬라 같은 기업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 시간을 투자한다, 관심을 쏟는다는 것도 사실 같은 맥락인 것 같구요. 사회이론적으로는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의 경제학도 이런 ‘투자’의 대상이 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비경제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용례에 해당하구요.
이걸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얘기와 엮어보면, 매력의 정치경제라는 거랑 닿는 거 같아요. 무엇이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지를 둘러싼 사람들의 경합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희우
그렇죠. 실제로 페어 책에도 그런 얘기가 있죠. 대안 투자 혹은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목표는 매력도가 평가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이라는.

민서
매력도라는 게,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모종의 에너지들의 흐름을 조건 짓는 것일 텐데, 그 매력의 평가 기준은 미학적일 수도 있고 윤리적일 수도 있고요. 책에서도 언급하는 노스다코타 파이프라인 투자 철회(#DefundDAPL) 운동처럼 미국의 화석 연료 석유를 운송하는 송유관에 대한 투자가 왜 매력적이지 않은지를 그 운동가들이 끊임없이 알리는 방식으로 운동이 이루어지잖아요.
결국 그것도 매력이 평가받는 매력도에 평가 기준을 바꾸고 그걸 통해 매력 평가에 근거한 신용 할당 기준을 바꾸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신용 역시 매력이랑 마찬가지로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어떤 비경제적인, 일종의 정동적인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희우
예, 근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의문이 한 가지 있는데, 이른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입장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거예요. 페어는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를 언급하는데요.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인 평가가 의문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말했듯 ‘정동의 흐름’ 같은 것과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좌파 포퓰리즘과 페어의 주장에는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거든요.
저도 무페의 작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무페의 기본적인 전제는 제도적·법적·물리적으로 현행화된 ‘정치(politics)’와 그것의 사라지지 않는 구성적 외부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다르다는 것이고, 정치를 끊임없이 탈구축하고 재구축하는 ‘정치적인 것’―어떤 적대라든지 불만, 분노 같은 것들―이 해소될 수는 없다는 거지요. 그것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는 어떻게 적대나 갈등을 ‘해소’할 것인가가 아니라 적대와 갈등의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어디에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가 되지요. 그런 흐름의 형성이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면,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효과적으로 되기 위해 그런 정동적 흐름들을 조직하고 흐름들에 개입하는 문제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왜냐면 결국 사람들이 투자를 통해서 그냥 부자가 되고 자산을 증식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거를 욕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잖아요. 사람들이 뭔가 다른 걸 욕망한다는 것은 현 상황에 대한, 처지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분노가 있다는 뜻이고요. 욕망의 흐름을 그렇게 조직할 수 있을 때 금융자본주의 조건을 전유해서 어떤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겠다는 전략도 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지……

민서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첫째가 좌파 포퓰리즘이 이야기하는 정치적 적대라는 게 피투자자 액티비즘에서는 무엇이냐, 아니 있기는 있냐. 이건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기획 자체를 의문시하기보다는 금융시장 내부로 들어가버리는 게 아닌가. 사실 이건 꼭 좌파 포퓰리즘의 시각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둘째 측면은, 희우씨가 욕망과 정동의 문제라고 말한 부분인 것 같아요.
첫 번째 지점에 대해서는 제가 북토크를 하면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기도 한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이런 식으로 이해가 많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특정 기업이 비윤리적인 관행을 보이니 동일 업종의 다른 회사 주식을 사는 게 대항 투기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를 많이 하시는데요. 하지만 일단 페어가 말하는 대항 투기는 사회운동의 레퍼토리지, 돈을 벌 목적으로 개인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투자를 어디다가 하자, 이런 건 아니에요. 범박하게 말해 민주주의 정치는 1인 1표인 것과 다르게 금융시장의 정치는 1원 1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선각자적인 개인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금을 끌어서(상대적으로) 대안적인 기업에 투자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명확하잖아요. 페어가 얘기하는 거는 그래서 어떤 기준으로든 윤리적이고 좋은 기업, 혹은 대안적인 기업에 우리의 자금을 할당하여 돈도 많이 벌고, 이렇게 꿩 먹고 알 먹고 하자는 게 아니에요. 거대한 자산 시장의 흐름을 움직이는 잣대들과 가치들이 있잖아요. ESG처럼 ‘바람직한’ 자산 할당의 기준을 변경시키는 걸 목표로 삼자는 거죠.
어쨌든 그 오해를 해명하고 나서도 남는 두 번째 쟁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가령 트럼프 같은 우파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왜 떴을까를 이해하려면 사람들의 정서적·정동적인 흐름과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거죠. 적대의 선이 지금은 외국인 타자, 이주민 타자, 여성 타자, 장애인 타자 대(對) 우리라는 식으로 그어지고 있지만, 그 전선을 정말 이런 문제를 몰고 온 주범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했던 엘리트 세력에게로 돌리자, 이게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일 텐데요. 아까 하신 질문은 페어에게는 이런 정동의 어떤 재배치 내지는 그 흐름이 다르게 흘러갈 물길을 어떻게 터줄 거냐, 이런 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안 보인다는 말씀인 것 같아요.
저도 타당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페어의 독자로서 우리가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 고민을 전개시켜볼 수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우리 대화랑 계속 연결되는 지점인데 매력이라는 개념이 기표적이면서도 비기표적인 측면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죠. 기후금융에 관련된 필드워크를 하다보면 어떤 특정한 이미지들의 질서 같은 게 있어요. 이건 지금 제가 하는 연구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지금 인류세 시대의 어떤 파격적인 재해의 스펙터클, 이제 그것 때문에 멸종되어가는 생물종들의 얼굴, 그런 이미지들이 뿜어내는 어떤 정동적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절망적이거나 희망적인 미래상을 담은 풍경들. 이건 정말 아니다, 아니면 저렇게 가야 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 펀드매니저들도 사회운동가들도 그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모종의 추적을 강화시켜 나가는 그런 이미지 유통과 인용의 질서 같은 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여기에 어떻게 비판적으로 관여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있으면 어떨까요? 페어가 제시하는 투자의 정치경제학을, 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력도 혹은 매력이라는 키워드를 매개해서, 정동적 차원에 대한 고려와 함께 가져갈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지 않을까요?

희우
예. 그런 것들이 같이 이야기됐을 때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최근에 다시 샹탈 무페를 읽고 있는데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아주 동시대적인 저술들인 것 같아요. 저도 무페(혹은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비판하는 저술들만 많이 읽어서 사실 ‘한물 간 이론’ 정도의 막연한 상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직접 읽어보니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경우 많잖아요. 어떤 저자가 많이 비판 받을 때, 막상 직접 읽어보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는 경우. 제가 오래전부터 고민했던 것도 비슷한 문제인데, 민서 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한 7년 전에, 비평가로 등단하기 한참 전에 발표했던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2017)이라는 어설픈 글이 있어요. 전역한 이듬해에 썼던 글인데, 엉망인 글이지만…… 그 글에서 제 진단은,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을 경험하는 한국의 젊은 남성들이, 그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한 여성성의 ‘환상’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런 환상에 고착된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대두될 거라는 것이었죠. 한국 군대에서 어떤 여성혐오적인 감정이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봉합’하는 것으로서 활용이 되고 구조적으로 생산이 되고 있어요. 그런 진단 위에서, 그렇다면 그 불만이나 고통, 분노, 억울함 등의 정동을 어떻게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가 아닌, 군대 체제나 부조리, 군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었고요. 그런데 이 문제는, 제가 그 글을 썼던 때보다 지금 더, 훨씬 더 절망적으로 나빠졌잖아요.

민서
그렇죠. 그 글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 때 짚으셨던 경향이 확실히 더 짙어진 것 같아요.

희우
왜 이 지경이 된 걸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다가 무페를 다시 읽게 됐어요.
그리고 앞의 문제랑 좀 연결되는 것일 수 있는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말하자면 다소 엘리트들의, 혹은 최소한 ‘프레카리아트’라고 하는, 가난하지만 고학력이고 도시에 거주하는……
저 역시 프레카리아트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아무튼 페어의 대안은 그런 존재들이 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페어는 과거의 노동운동과의 유비 속에서 액티비즘을 얘기하는데, 페어는 아니라고 하지만,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과거의 운동을 대체하는 것인가 하는 느낌도 들죠. 어쨌든 이 유비 안에서 생각해 봤을 때, 노동자라는 경제적 조건을 통해서 단합할 수 있었던 노동운동에 비해서 피투자자 운동이 그 정도의 대중성이나 조직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부분도 좀 궁금하네요.

민서
두 가지 쟁점이네요. 하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주인공인 피투자자들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춘 사람들에 한정되는 게 아니냐 이런 쟁점이고, 두 번째는 이거랑 연결된 질문으로서 이 운동이 노동운동만큼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냐는 질문인데요. 이건 노동운동과의 관계 맺음이라는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두 번째 것부터 답변을 해볼게요.
이 책에 굉장히 여러 논지들이 있지만 사실 책의 구조 자체는 굉장히 간명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책의 소제목들이 A&B 식인데, A에 해당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의 정치와 운동을 설명하는 어휘들이고, B에 해당하는 것은 금융화 이후의 사회 문제, 새로운 사회 문제, 이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필요한 어휘들이지요. 근데 이 A와 B의 관계가, 제가 볼 때는 경우에 따라 어떤 거는 대체에 가깝고 어떤 건 대체라기보다 병존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근데 확실한 건 저자도 얘기하고 있지만 산업자본주의적 착취만으로 설명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지, 과거의 문제가 사라졌다거나 비중이 적어졌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금융자본의 위세에 주목한다 할지라도,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문제, 곧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고 여기에 대한 노동운동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요.
작년에 진행했던 북토크 중에, 플랫폼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라이더유니온에서 활동하셨던 분이 토론해주셨던 내용이 기억이 남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을 경유한다고 해서 노동운동의 레퍼토리를 배제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기성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레퍼토리를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는데요. 저는 이런 고민을 통해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지금은 낯설지만 더욱 대중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 3장에서 다루는 플랫폼 자본주의 관련 투쟁 현장은 물론이고 금융적·비금융적 가치평가가 중요한 다른 전선에서도요. 여기까지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요.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저자도 3장에서 희우 씨가 말씀하셨던 비판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3장에서 얘기하는 게 플랫폼 라이더들 혹은 배달 플랫폼에 혹은 그런 뭔가 별점 평가를 주고받고…… 페어가 플랫폼 협동조합 이런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은 디지털 리터러시가 있고, 대안적인 플랫폼을 만들 수 있고, 그걸 통해 자기를 이렇게 전시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존재들인데요. 그러면 이게 과연 ‘보편화’될 수 있는 전략이냐 이런 의구심이 당연히 저는 나올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페어가 얘기하는 것 중 하나는,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을 전유했던 주인공들이 당시로서는 극소수였다는 거죠. 그렇지만 사후적으로 볼 때 그건 일종의 부상하는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고, 앞으로 점점 커져갈, 전범적인 존재들이었던 거죠. 지금 프레카리아트-피투자자 액티비스트들도 수적으로는 작을 수 있어도 앞으로 점점 중요해질 흐름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어요. 여기까지가 옮긴이로서 할 말이라면, 독자로서 덧붙이자면 저는 앞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운동에 대한 예측이 한 사람의 이론가의 몫이라기보다는 운동과 이론이 주고받으면서 만들어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희우
그렇군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책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이 질문은 민서 씨가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오래 고민했을 문제일 거예요. 어찌 보면 너무 거창하면서도 여러모로 괴로운 질문인데요.
기후 문제의 광범위한 시급성에 비추어봤을 때, 페어의 전략이 너무 소극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지요? 사실 한국어판 뒤에 민서 씨랑 페어 인터뷰가 있잖아요. 굉장히 인상적이고 엄청난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도 페어가 이런 문제를 스스로도 좀 의식을 하는 것 같았어요.

민서
감사합니다(웃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인터뷰를) 하기 잘한 것 같아요. 그런데 희우씨는 기후 문제가 시급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시급한 것 같나요?

희우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민서 씨보다 훨씬 모를 것 같아서 자신은 없지만요, 예를 들면 ‘생태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곤 하는 입장의 책들을 봤을 때, 이를테면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저자들의 책을 읽었을 때는 지금 당장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중단되고 새로운 체제가 나타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건 그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기후 생태 문제의 전문가인 과학자들도 그렇게 얘기를 많이 하고 있잖아요.

민서
그렇죠.

희우
그런데 페어의 전략은, 이건 이 책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푸코식 ‘비판적 전유’의 일반적 문제일 수도 있는데, 지금 현존하는 체제, 이 체제에서 유용한 것으로 식별되고 재현되는 조건들 ‘내부’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이런 방식으로 세계적으로 고착화되어 있고, 어떤 투자자들과 거대 기업들이 행성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런 상황이 우리의 주체성을 조직하고 있는, 이런 조건들 내부에서 약간씩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방법인 거죠. 그러니까 어떤 엄청난 속도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러 저술에서 제기되는 대안들이, 어떤 거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그게 옳다는 건 납득이 가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고, 한편으로 페어의 책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실천이나 저항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는 좀 구체적인 상을 주지만, 이것만으로 괜찮을까 하는 의심이 남습니다……

민서
말름이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4에서서 얘기하는 게 그런 거죠. 기후위기의 시급성,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파국적 재난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속하고 급격한 단절이다. 그리고 그걸 이루어낼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주체의 형성이 시급하다. 말름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그 혁명적 시도의 합리적 핵심을 기후위기 시대에 되살려야 된다는 거고요. 그걸 ‘생태적 레닌주의’라고 표현하죠. 거기서 두드러지는 건, 지금 당장 무언가 시급히 일어나야 한다는 호소죠.
말름이 인용하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이 전개되던 와중에 동지들한테 썼던 글 중에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기다리는 건 범죄다.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의회를 기다릴 권리가 없다… 기다리는 건 형식적인 걸 따지는 유치하고 불명예스러운 게임이고, 혁명에 대한 배반이다” 등등. 지금 기다리는 와중에도 온갖 모순이 폭발하고 있고,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인페이션트(impatient)의 감정이 가득한 글입니다.
반면 페어는 지금 존재하는 통치 질서를 우리가 끝까지 한번 잘 활용해 보자는 식의 주장인데, 말씀하신 대로 그게 현실성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현실로 여기는 것들이 붕괴하고 있는 시점이라면 그 ‘현실적’인 선택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기성 체제 내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건 기성 체제가 권장하는 어떤 비판을 통한 변화의 게임에 일정한 정당성과 가치가 있다는 걸 승인하는 거기도 하구요. 맞아요. 말름과 페어의 논의는 맥락상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이걸 좀 큰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페어가 계속 갖고 가는 유비, 즉 노동조합 운동과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유비가 한계에 봉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노동조합들이 임금 단체 협상을 하고, 복지국가를 만들어내고, 좀 더 인간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를 위해서 노력해 온 건 맞지만, 그 목적이 과연 정말 ‘인간적인 자본주의’ 자체였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해석도 많단 말이죠. 이건 페어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그렇게 저항해서 끊임없이 자본의 효율을 낮추고,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이른바 ‘이윤율의 경항적 저하’를 앞당겨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격화시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그러니까 이 체제 자체를 ‘지양’한다는 계기가 노동운동에 있었다는 거죠. 체제 자체를 좀더 인간적으로 개량하는 것을 넘어서요. 페어가 기후 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지금 기후 파국을 초래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전망이 피투자자 액티비즘에 있는가? 여기에 확실하게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렵죠.
다만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가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책에서 나오는 화석 연료에 대한 투자 철회 운동이나 ESG를 활용해서 일정한 제도의 변화를 도모하는 일군의 집단들, 이전이라면 함께하기 힘들었을 집단들(투자자, 컨설턴트, 노조, 씽크탱크 연구원 등등)이 모이고 새로운 운동의 형식을 창안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걸 조명하는 데 페어의 논의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페어 논의와는 별도로, 제가 말름의 그 책을 읽고 든 생각은… 레닌주의의 ‘지금 당장 단절하고 넘어가자’는 식의 주장이, 당위적으로는 공감이 되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이게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에 대한 전망이 잘 안 보인다는 거예요. 필요성과 가능성 간에 괴리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기후금융 연구를 추동하는 물음도 이런 괴리감과 무관하지 않구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1.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p. 218-19. ↩︎
  2.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
  3.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
  4. 안드레아스 말름,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우석영·장석준 옮김, 마농지, 2021. ↩︎

장르와 기호와 매력에 대한 단상

0.

내가 주장할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1) 근대미학에서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매력에서 정화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있다.

(2) 그러나 동시대 문화, 경제, 정치에서 매력은 너무나 중요한 기제이자 힘이 되었다. 오늘날 문화의 재현 논리, 활력과 복잡성, 정치적 갈등, 정동의 흐름은 ‘매력의 경제’에 대한 고찰 없이 이해될 수 없다.

(3)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즉 새로운 미학이 작성되는―출발점이다.

(4) 매력의 경제는 감각적 자극, 섹슈얼리티, 지적 관심, 도덕적 관심, 미적 관심, 육체적 끌림, 충동, 수치심, 허영심, 이해관심 등이 분화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경험적’ 세계의 법칙이다. 매력은 한 인간을 신체적-담론적 기호들(피부, 표정, 비율, 머릿결, 냄새, 말투, 옷차림, 예절, 분위기, 평판, 지위 등)의 조합으로 파악하게 한다. 매력은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을 무차별적으로 뒤섞어 매력의 복합적인 서열로 환원한다.

(5) 또한 매력의 경제는 모든 ‘피투자자’의 능력·신용·사회적 책임·평판 등을 투자 가치로 환원하는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국가나 기업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모두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로 환원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셸 페어의 말처럼, 오늘날의 대안적인 정치 운동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

(6) 매력의 경제는 한편으로는 ‘금융적’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감각적’이다. 이 두 측면은 즉각적으로, 광범위하게 상호작용하지만, 이론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전자는 재현적·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나무를 말릴 때 나무가 갈라지는 미묘한 소리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목수나 조각가가 되려면 나무가 내뿜는 감각적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보여준다.

(7) 매력은 배우는 자를 대상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매력을 통해 촉발되는 배움의 운동은 배우는 자를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으로부터 빼내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실망과 상처, 수치심과 모멸감, 적대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장르, 기호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등록·재생산·유통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단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의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교차·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쟁론』에서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이것은 삶이 기호들·장르들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하거나 초월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우리 시대의 문화가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이미 여러 번 들었던 예이지만―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 등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비교적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상황을 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효과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받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만약 과거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나는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단지 영역들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제도적·위계적·영토적·관념적 경계들이 현재보다 더 견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했던 적이 없다.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지저분하게 분투하는 것, 이를 정치적·예술적 실천의 조건으로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어떤 실천이나 미적 실험이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하는데, 외견상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런 비판은 대책 없는 파국적 호소일 뿐이다.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이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적 조건 속에서이다. 아이가 거울 단계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듯이, 배우는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문화에 재현하는 한에서) 매력의 경제로 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마치 손보미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 속 아이들처럼―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거의 본능적으로’―학습한다. 이것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영역들에는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물론 매력의 경제라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광범위한 부작용이 있다. 매력의 경제는 이른바 ‘현실 정치’가 모종의 광적인 팬덤 문화처럼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에 의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종종 관심과 주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고 도발적으로 말하는 프로보커터이기도 하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 판단,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의 경계를 없애버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사회문화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고도로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거나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적대와 갈등은 결코 ‘순수’하거나 고상할 수 없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끔찍한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준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공격적/방어적으로 되며, 한편으로는 ‘부유하면서-당당하면서-아름다운’, 즉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를 갈구한다. 오늘날 Kpop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그러한 갈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유인하고 있다. 지식인, 활동가, 예술가 등이 고려해야 할 실천적 문제는 동시대 문화에 지배적인 매력적 형상과는 다른 매력적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잔여―‘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가 있느냐이다.

매력에 대한 레퍼런스 모음

(계속 추가)

화려한 필터보다 자본주의 내 매력……
―tripleS, 〈Girl’s Capitalism〉(2023) 가사 중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NCT, 〈무한적아〉(2017) 가사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비서 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 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있어〉(2012) 가사

_______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führt das schöne reizt). 숭고함으로 충만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얼굴은 진지하지만, 때때로 경직되어 있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생생한 느낌은 두 눈 속에 찬란히 빛나는 투명함에 의해서, 미소 띤 얼굴에 의해서, 그리고 종종 환한 웃음에서 생겨난다.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강조는 원저자.

_______수치심은 본성의 비밀이다. [……] 그러나 동시에 수치심은 본성의 가장 적합하고도 긴요한 목적 앞에 비밀스러운 장막을 드리우기 위해서, 그 목적에 관해 잘 알려진 지식이 혐오감을 주거나 혹은 적어도 무관심을 유발하지 않게끔 해준다. 이는 인간 본성의 가장 세련되고도 생동감 넘치는 경향성에 접목된 충동의 궁극적인 의도에 관한 한에서 그러하다. 아름다운 성[여성]에게 이런 기질은 극히 고유할뿐더러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한다. [……] 언제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듯이 우리는 지금도 비밀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으며 […]
―같은 책, 66-67

_______모든 이해관심은 취미판단을 더럽히고, 취미판단의 공평성을 앗는다. 특히 그것이, 이성의 이해관심처럼, 합목적성을 쾌의 감정에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합목적성을 이 쾌감에 근거 지을 때에는 그러하다. [……] 취미가 흡족을 위해 매력Reiz과 감동의 뒤섞임을 필요로 하고, 심지어 이것을 자기에 대한 찬동의 척도로 삼는 곳에서, 취미는 항상 아직도 야만적이다.
[……]
매력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비록 그것들이 미적인 것에서의 흡족과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이카넷, 2009, pp. 218-19. 강조는 원저자.

_______매력{자극}과 감동에 독립적인 순수한 취미만이 ‘문화화한{교화한}’ 것이라는 이러한 칸트의 생각은 초기의 것과 다르다. 『관찰』(1764)에서는 오히려 “숭고한 것은 감동을 주고, 미적인 것은 매력적이다{자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바뀐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같은 곳, 백종현의 역주 56 {}는 역자)

_______미의 감정은 스스로 보편적이고 즉각적이며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있기를 희망하는 반성적이고 개별적인 판단이다. 그것은 오직 영혼의 능력, 즉 쾌와 고통의 능력에 속하며, 형태를 계기로 발생한다. 이른바 무심한 쾌라는 그것의 운명이 걸리는 지점도 거기다.
주어진 대상의 재질이나 색채 음색 따위에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순간 미의 감각은 하나의 “즐거움agrément”으로, 일종의“성향 inclination”이 충족되는 데서 발생하는 쾌감으로 퇴행하고 말며, 이때 대상은 스스로의 현존을 통해 사람의 정신에 어떤 ‘‘매력”을 행사한 셈이라는 것이다.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적 쾌감을 대상의 향유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저 순수한 취미와 불순한 취미를 구별해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다시 말해 감각들의 취미 “Sinnengeschmack”로부터 반성적 취미 “Reflexiongescrunack”를 가려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성 일반은, 혹은 특히 미에 대한 즉각적 판단(감정)이라는 범례적 양식으로서 작용할 때의 반성은, ‘‘어떤 한정된 대상에 대한 의지의 복종’’으로정의되는 관심을 일체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성이란 어떤 정해진 기준이나 판단 규칙 없이, 따라서 어떤 쾌감을 유발할 일종의 대상 또는 유일한 대상을 예견하지 않은 체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_______순수하게 미적인 공통감각은 결국 전제되고 가정될 수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의 해결이 불충분한 해결이라는 것을 별 어려움 없이 발견한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어떻게 충분한 해결일 수 있겠는가? [……]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과연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23, pp. 191-92. 강조는 원저자.

_______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charme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 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력은 필연적으로 이기는 주사위 던지기입니다. [……]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조합으로 된 숫자입니다. 매력과 스타일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다른 말을 찾아서 대체해야 할 것입니다. 매력이 삶에 개체들보다 우월한 비개인적 역량을 부여하고, 스타일이 글쓰기에 씌어진 것을 넘어서는 외적 목적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또한 둘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입니다.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_______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apprenti은 없다.
―들뢰즈,『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 23)

_______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같은 책, p. 41)

_______이 진리들은 지성이 선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동하고 임무에 뛰어들면서, 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발견한 진리와 대립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들의 한계를 보았었다. 즉 그런 진리들은 ‘필연성’이 결핍되어 있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지성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같은 책, pp. 49-50)

_______욕망 이론에서 비판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 역시 칸트이다. 칸트는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 정의를 예시하기 위해 칸트가 미신적 신앙들, 환각들, 환상들을 원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런 식으로 욕망을 규정할 경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 대상의 현실은 심리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혁명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p. 59.; 강조는 원저자, []는 인용자.

_______마지막으로 기호가 재촉하는 응답 안에서. 응답의 운동은 기호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다. 수영하는 사람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모래사장에서 재생하는 수영 교사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개가 어떻게 배우는가를 말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거기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어떤 실천적인 친밀성familiarité, 기호들에 대한 친밀성이 존재한다. 이 친밀성을 통해 모든 교육은 애정의 성격을 띤 어떤 것이 되지만 또한 동시에 치명적인 어떤 것이 된다. 우리는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따라해야 할 몸동작을 보여주는 대신 다질적인 것 안에서 개봉해야 할 기호들을 발신하는 방법을 안다. 달리 말해서 관념적 운동성이란 없다. 오로지 감각적 운동성만이 있는 것이다. [……]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들뢰즈,『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p. 72-73.

금융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 국가 당국은 여전히 상충하는 요구의 균형자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심판관으로 행위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특히 신용 공급자의 요구와 정부를 선출한 시민의 이해 관계를 중재할 임무를 맡고 있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실제로 정부는 자국 영토는 물론이고 통화와 채권의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를 유지시키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유권자의 소망을 채권자의 신뢰에 종속시킨다.
―미셸 페어,『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대항 투기 운동가들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금융 시장에서 높은 가치가 매겨지고 있는 기업 거버넌스와 공공 행정의 기술이 터무니없이 리스크가 높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 으로는―단기적인 금융 수익보다 사회권과 생태 발자국 감소를, 지적 재산권 강화보다 지식과 건강 보험에 대한 접근권을 우선시하는 것과 같은―실현 가능한 대안들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같은 책, p. 56)

배움의 단계들

―손보미, 「불장난」1)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발표.

1)『사랑의 꿈』, 문학동네, 2023. 본문에서 소설을 인용할 시 괄호 안에 페이지 번호만 병기한다.

0. 지연과 성장

유명한 할아버지들이 말하길 우리가 사는 이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경제적 독립, 학교에서의 졸업, 양육되는 존재에서 양육하는 존재로의 전환 같은 생애의 단계가 점점 뒤로 늦춰지거나 불가능해지는 경향이 있다. 신체적 고행, 결혼, 등용, 참전 같은 전통적인 성인식 의례의 구속력은 약해지거나 없어지는 한편, 어른이 되는 뚜렷한 의례는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아마 인류사에 전례 없이 길어진 사춘기를 겪는지도 모른다.2) 한 몸 건사하기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인생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되기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되기도 문제가 된다. 두 가지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하거나 혹은 동시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전통적인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 이제 가능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일이라면, 결국 삶의 방식을 생성하는 것이 문제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성장소설의 화자는 어른이 되는 한편으로 아이가 되는 면이 있다. 좋은 성장소설에는 삶의 문제들에 답하기 위한 양방향의 탐색이 있다. 인물이 단지 어른의 관점에서 아이 시절을 추억하고,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서술한다면 뻔한 교훈들을 나열하는 자전 소설이 될 것이다. 반대로 생생한 배움을 주는 소설에는 언제나 양방향의 ‘-되기’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성장’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growth ideology)의 ‘성장’과 얼마나 같거나 다른 것인가? 또 소설이 주는 배움은 자기계발이나 힐링 담론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가? 역사적으로 교양소설이나 감상소설은, 특히 여성들의 품행을 교육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고발되어왔다. 성장소설 역시, 세계를 대면한 인간 주체의 일방향적인 강화와 확장을 그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성장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러라는 법도 없다.

‘성장’을 비롯해 자율성, 창의성, 자유, 능력 같은 말들이 우리가 가장 반대하고 싶은 것들에 의해 지독하게 오염되었더라도 그런 기표들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성장’은 언제나 우상향 그래프로 표시된다. 성장소설의 ‘성장’은 오히려 그런 통계적 성장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시작된다. 내 생각엔 그렇게 유형화되기 힘들고 의미를 부여받기 힘든 배움에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스스로 배움의 능력을 예증하고 촉진하는 것과 더불어 말이다.3) 손보미의 몇몇 소설을 성장소설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남성적 특권의 혐의를 받는 고전적 성장소설과는 다르다. 오히려 손보미는 그렇게 특권화된 이야기 바깥에서 “더 충만하게 역동적이 된” 성장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4) 심지어 화자가 남성인 『디어 랄프 로렌』의 경우에도 이미 그렇다. 그 소설의 화자인 종수가 물리학 대학원에서 쫓겨나면서 자기 배움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직업적이거나 학업적으로 봤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외국을 떠돌며 허송세월하는 아무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의 관점에서 그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다. 한편 시간과 기억, 가치를 헝클어놓는 이 배움의 이야기가 랄프 로렌의 “‘정말’ ‘매력적’”5)인 미소에서 출발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종수의 여정은 랄프 로렌과 같은 유명인에 대한 집중에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향하고, 한편으로는 익명의 삶들을 향한다.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합쳐지기도 하는 이 여정은 그가 작가가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 글에서 새삼스럽게 단계들을 말하는 것은 국가적·경제적 관점에서 무가치해 보이는 이런 성장/교양/배움(Bildung)에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매혹은 배움의 출발점에서 쏘아지는 신호탄이다. 손보미의 소설에서 매력의 문제는 반복적으로 다뤄진다. 많은 맥락과 뉘앙스에서 매력이 언급되기 때문에 ‘매력의 문제’라는 범주화는 소설의 다양한 맥락을 뭉뚱그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소설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의 포괄성과 복잡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낯설고 희귀한 것이 되고 반대로 매력은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은 복잡한 ‘구별짓기’(부르디외)의 기제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성적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도 이제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6) 그러나 소설에 나타나는 매력의 문제는 그러한 구조적 비판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내 귀에 도착하는 건 적당히 뭉쳐지고 굴려진 음파들의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어렴풋이 감지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를 정말로 매혹시켰던 것은 내가 금지당하는 대상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73)

여기서 “매혹”은 ‘구별짓기’나 ‘매력 자본’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대목에서 매혹은 법과 주체가 맺는 기묘한 관계, 소리에 대한 감각과 집착, 자신의 처지에 대한 느낌 등과 관련된다. 매력은 이해관심, 신체적 자극, 성적 끌림, 충동, 인식, 도덕, 미적 판단의 분리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세계의 법칙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지극히 사춘기적인 세계의 법칙이다.

배움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가진 인식, 도덕, 미적 판단이 무너져야 한다. 또 무력함이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매력은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예측할 수 없는 길로 질질 끌고 간다. 그 무방비한 배움은 학교에서 어떤 영역의 전문성을 축적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어떤 배움이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 다른 배움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순한 뒤섞임 그 자체가 배움의 내용이자 강도(强度)다. 이런 배움이 제도화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폭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뒤흔들어 그가 접속해 있던 감수성과 지식의 질서에서 이탈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면, 모든 진정한 배움은 폭력적이다. 예술은 폭력적이다. 아무 배움도 주지 않는 예술,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는 문학만이 무해하다. 하지만 어느 화가의 말처럼 회화의 폭력과 전쟁의 폭력은 다르다. 예술의 폭력은 어떤 폭력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물론 정당화도 아니다―앎과 감각의 질서에서 탈구시키는, 신체에 작용하는, 그 순간 발생하는 폭력일 뿐이다. 예술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예술작품이 폭력적인 소재를 재현한다거나 폭력적인 언사를 사용한다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예술은 우리에게 배움을 강제하지만, 지식-권력이 아니라 매력-폭력을 통해 그렇게 한다.

우리가 전례 없이 길어진 사춘기에 유예돼있다 하더라도, 배우는 자에게 이런 지연은 단순히 부정적인 조건이 아니다. 이 지연의 시기는 새로운 배움이 우리를 휘어잡고, 몸에서 성적인 쾌를 주는 다양한 기관들을 되찾거나, 사랑을 하거나, 친구와 절교하거나, 정치에 경도되거나,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거나 기타 등등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다. 그렇게나 많은 성장소설이 사춘기 시절을 불러들이는 이유는 휴머니즘 드라마의 향수(‘좋았던 그 시절……’)를 위해서가 아니라 강렬한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을 지금 가동하여 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2) 알랭 바디우, 『참된 삶』, 박성훈 옮김, 글항아리, 2018 참조.

3)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는 것들」, 『쓺』 2023년 하권 참조.

4) 백지은, 「여자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가」,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 344쪽.

5)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2017, 45쪽.

6)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매력을 무기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참조.

단계 1. 매력: 불안과 사로잡힘(귀의 모티프)

소설은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 화자의 배움은 시간을 헝클어뜨리고, 소설의 표현은 나중에야 이해된다. 가령 독자는 화자의 전남편이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여성을 화자가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떤 문제들을 따라 어른 화자는 어린 화자에게 접속한다. 즉 소설을 끌고 가는 것은 최종적인 질문(‘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에 대답하기 위해 기억을 반추하는 인물의 의지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들에 대답해나가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에 답하게 될 것이다. 문제들 앞에서 어린 화자가 했던 필사적인 탐구가 어른 화자의 언어와 뒤섞여 배움의 내용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많은 것이 불분명하다. 어린 화자의 눈은 가려지고 있다. 보이지 않음―여기에서 어떤 배움이 시작되었던 듯하다.

눈을 가린다―아버지의 커다란 두 손이 급박하게 내 눈앞에 드리워진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외국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키스를 나눌 때에도 아버지는 내 눈을 가렸다. 그런 세계―하지만 그게 어떤 세계란 말인가?―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접근 금지―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되었다면 그때 내가 그들이 술을 마시리라는 사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리라는 사실, 그들이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특별한 단어들을 내뱉으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접근 금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70-71)

아이가 볼 수 있는 것과 봐서는 안 되는 것을 판단하는 아버지는 입법자이고 집행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금지는 (당연하게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눈을 가린다고 해서 감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금지가 아무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반대로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린 화자는 아버지에 의해 시각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그만큼 청각의 세계로 들어간다. 혹은 자신의 몸으로 청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집에 손님을 초대한 아버지와 그녀는 어른들끼리의 이야기를 위해 아이를 방에 들여보낸다. ‘나’는 문 뒤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내 신체 전체가 거대한 귀가 되었다고 상상했다”(73). 어른의 지시에 따라 방에 들어갈 때 아이는 수동적이고 무력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가 ‘거대한 귀’가 되면 어른들은 청각적 기호들을 발산하는 배움의 재료가 되고 아이는 기호들을 해독하는 게걸스러운 기관이 된다.

시각의 세계와 청각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또 시각적 신체와 청각적 신체는? 서구 문화에서 시각과 인식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이론(theory)은 ‘보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theoreo’에서 나왔다고 한다.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말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반대로 청각은 자명하지 않음, 불순함, 속도, 과민함, 정보의 덩어리에 관련된다. 20세기의 매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동시대 문화가 청각적으로 되어가고 있고 따라서 지나치게 시각 편향적인 서구 근대인은 동시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8) 시각의 세계가 체계화된 지식의 세계라면 청각의 세계는 혼란스러운 정보의 세계다. 시각의 세계가 이원론적 틀(주체와 대상, 저자와 독자)을 전제한다면 청각의 세계에서는 주체와 대상, 발신자와 수용자, 언어와 소음의 경계가 흐려진다. 따라서 (소설에서와는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매클루언도 오래전에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근대적 지식의 틀로 포섭할 수 없는 끌림, 속도, 감각적 과민함,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이러하다. 이 청각적 세계의 법칙을 수립하는 것은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매력의 경제다. 지식-권력이 시각의 논리, 낮의 논리라면 매력의 경제는 청각의 논리, 밤의 논리이다. 매력은 물질, 감각적 자극, 육체적 끌림, 편견, 정보가 아직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현상적 차원에 관계하고, 주체의 능력 중에서는 상상력에 관계한다. 상상력은 지성이나 당위적 이성의 감독이 헐거워질수록 더 강해진다(그러나 제약이 아예 없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77).

화자에게 매력의 문제를 치명적으로 제기하는 타자는 새엄마인 ‘그녀’다. 아버지와 그녀는 사교 활동에서 효과적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매력을 발산하며 눈길을 끌고, 아버지는 내내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을 골고루 나누어준다”(69).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위한 분업인가? 젊은(아직 “비판”을 쓰기 전, 매력을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전) 칸트는 숭고함과 고상함은 남성적인 자질로, 아름다움과 매력은 여성적인 자질로 할당한 바 있다.9) 오늘날 이것을 성차별적 편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소설에서 그려지듯 오늘날의 어느 가정에서 이러한 역할 분업은 얼마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분업을 통해 아내는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남편은 가부장적 권능을 얻는다. “그녀를 숭배하는 듯한 아버지 주위로, 그전까지 마구 흩어져 있던 자신감과 권위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일렬로 줄을 서는 것 같았다”(69).

이런 과시적 분업이 가능한 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가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가 그녀에게 매혹되어 홀린 듯 군다는 사실은 그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그의 허약함을 노출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을 지시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허가를 갈급하게 구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뜻대로 아버지가 선택하게끔 유도하는 듯 보인다. 그녀의 이런 힘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평한다. “마력.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신체-마음을 조종하는 그녀의 능력을 나는 마력이라고 불렀다”(77).

마력이란 무엇인가? 마력은 매력보다 한층 강력한 힘일 것이다. 매력의 ‘매(魅)’는 도깨비를 뜻한다. 마력의 ‘마(魔)’는 마귀를 뜻한다. 매력은 도깨비의 힘이지만 마력은 마귀의 힘이다. 이매는 아직 귀신[鬼]이 못 된[未] 존재이지만 마귀는 인간의 옷[麻]을 입은 귀신이다. 즉 이매가 ‘귀신-1’이라면 마귀는 ‘귀신+1’이다. 인간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만, 귀신에 약간 못 미치거나 약간 초과하는 존재에게는 간과 쓸개를 내준다. 설화에서 나그네를 매혹했던 존재들의 모호한 정체를 떠올려보자. ‘저것의 정체는 짐승인가, 인간인가, 귀신인가?’ 이런 불확실성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가장 매력적이라 여겨지는 존재가 가장 큰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또 귀신 비슷한 것들을 축출하고 정체를 식별하고자 했던 지적 탄압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혐오는 지성의 결여뿐만 아니라 불안정성을 견디지 못하는 지성의 두려움 때문에 강화된다. 마녀사냥은 계몽주의 시기에 오히려 번창했다.10) 지식-권력의 푸닥거리…… 낮에 불안하게 유지되던 아버지의 권위는 밤의 웃음으로 무너진다.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내 아내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차린단 말이야.”
음파들의 덩어리 속에서 특정한 음절을 건져올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뭉개진 발음이긴 했지만 쩌렁쩌렁하게 집안이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과묵함을 뚫고 나오는 권위나 자신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평소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처럼 성마른 조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뒤이어 무모하게 무언가를 잔뜩 헝클어뜨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게 웃음소리(그중에서도 그녀의 웃음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74)

첫번째 단계에서 화자에게 주어진 문제는 대략 이러하다. 보이지 않음과 상상력, 그녀의 마력과 아버지의 실추. 이것들은 불안을 낳고, 이 불안이 화자의 광기를 함양해준다.

8) 마셜 매클루언, 『구텐베르크 은하계』,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참조.

9)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참조.

10) 주경철, 『마녀―서구 문명은 왜 마녀를 필요로 했는가』, 생각의힘, 2016 참조.

단계 2. 추적과 실망(문의 모티프)

배움의 이야기 그리고 매력은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불가분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도, 정신분석학적 설명과 달리 수많은 성장소설이 사춘기 시절을 불러들이고 그 시기에 (유아기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성적 주체로 만드는가? 첫번째로 어른의 호명이 있다. 유아기에 어른에게 당하는 그 호명은―어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모종의 금지인 동시에 유혹이다. 하지만 두번째로, 사춘기에 마주하는 매력적인 동성의 신체와 언행이 있다. 어쩌면 이 매력적인 동성과의 마주침은 유아기의 성욕보다 더 불온하고 모호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 동성 또래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욕정인지 질투인지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 불확실성 속에 호명된 주체와 배움의 주체를 가르는 어떤 문턱이 있다. 물론 유아기에 형성된 ‘어두운 전조’가 사춘기 시절에 반복되지만, 이것은 단순한 재발견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반복이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의 탐구를 강하게 유인하는 매력적인 동성 또래의 이름은 양우정이다. 양우정은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지녔고 고결한 분위기를 풍긴다. 양우정은 남자애들의 장난 혹은 괴롭힘에 아주 싸늘하게 반응함으로써 남자애들을 기죽게 한다. 화자는 그것이 양우정이 타고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타고나는 여자들이 있고 그들은 선택받은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94).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 읽기를 통해, 마치 타고난 것처럼 여겨지는 무언가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배움의 효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자와의 성적 관계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화자를 저항할 수 없게 잡아끄는 문제다(이 문제의 양가적인 심각성은 ‘그녀’와 연관되어 있다). “나와 친구들은 못하는데 양우정(과 그애의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었다. 성숙한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 물론 당시에는 ‘성숙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이렇게 표현했다. 중학생 오빠들”(94-95). 물론 ‘중학생 오빠들’은 실체 없는 소문이고 화자가 양우정에게 더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신기루이다. 그렇긴 해도 중학생 오빠들의 ‘성숙함’은 초등학교 5학년인 화자에게는 엄중한 사실이다.

또래 집단이라고 해도 모두가 같은 배움의 길에 같은 강도로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자의 친구들은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들을 둘러싼 소문을 떠들어대고, ‘임신’과 ‘우웩’을 연결지으면서 즐거워하지만, 어쨌든 금세 다른 관심사로 돌아간다. 화자는 그렇지 않다. 화자는 그 소문의 진상에 집착하고,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빈틈에 조급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친구들과 달리 화자는 거기에 계속 매달리는가? 단지 화자가 남다른 성욕, 호기심, 집착을 ‘타고난’ 아이여서 그렇다고 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첫 단계에서 주어졌다. 첫 단계에서 화자의 눈은 가려져 있었고(아버지의 금지/유혹), 성숙한 남자(아버지)를 유혹한 ‘그녀’의 마력은 화자의 실존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첫 단계에서는 비밀을 추적할 방법이 없었지만, 성숙한 남자(중학생 오빠들)와 관계하는 양우정을 통해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친구들과 달리 화자는 그 성적인 소문의 ‘실체’를 밝히는 데 삶을 걸고 있다. 첫번째 단계에서 비밀은 막후에 있어서 청각적-상상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었다. 두번째 단계에서, 이제 비밀은 가까이 있어서 물리적으로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따라서 화자는 친구들을 따돌리고 어린이 탐정처럼 추적을 시작한다. 그 바람에 친구들에게 절연 당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들)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학교 뒤 숙직실까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 첫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것이 부동성(不動性)이라면 두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것은 수평적 운동이다.

쓰레기를 태운 연기와 매캐한 냄새를 품고 있는 소각장을 지나 숙직실 쪽으로 갔다. [……] 그리고 문에 바짝 귀를 갖다댔다. 마치 내 몸이 거대한 귀가 된 것처럼. 문 너머, 분명하지는 않지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분간할 수 있는 소리들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팝송, 간헐적인 박수 소리, 가끔씩 내지르는 탄성. (103)

팝송, 박수 소리, 탄성…… 이 절묘한 소리들은 (어린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무엇을 예상하게 하는가? 물론 문 너머에서 성관계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화자가 집착했던 문제의 실체가 바로 문 뒤에 있다고 기대하게 한다. 화자는 용감하게도 힘껏 문을 열어젖혔으나, “눈앞에 펼쳐진 건, 숙직실 안의 그들이 아니라 또다른 낡은 목재 문이었다”(104).

비밀로 접근해가는 여정에 도달을 지연시키는 너무 많은 문이 있다. 문들은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보존하고 부풀린다. 첫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문 뒤에 있었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첫번째 문은 열었지만, 왠지 모를 박탈감과 무력함으로 두번째 문은 열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정말로 양우정이 문을 열고 나온다. 그 순간 양우정이 발산하는 기호들―흐트러진 옷, 땀, 열기―은 화자의(그리고 독자의) 불온한 기대를 잠시간 유지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문이 활짝 열리자 “중학생 오빠들은 없었다”(105). 양우정과 친구들은 어른 옷을 입고 와서 가상의 런웨이를 걷는 중이다.

이제 땀과 흐트러진 옷, 몸의 열기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이렇게 기호들의 의미를 전환하는 솜씨는 손보미의 소설을 읽을 때 감탄하게 되는 특징이다. 소설은 화자가 느끼는 긴장, 당혹감, 허망함을 단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텍스트를 따라 함께 겪을 수 있게 한다. 당연히 화자는 실망한다. 도깨비 같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뒤돌아서 나가지도 못한다. 양우정은 꼼짝 못 하고 있는 화자에게 걸으라고 반복적으로 명령하는데 그 장면의 부조리함은 거의 잔인무도하게 느껴질 정도다. 화자는 결국 도망치는데, 도망쳤다는 사실(그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겨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패배감, 수치심에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주인공은 첫번째 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손보미의 소설은 대놓고 알레고리적인 카프카의 소설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학교의 철문이나 숙직실 문은 익숙한 형태와 색깔로 떠오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많은 문, 반복되는 모티프, 부조리한 장면은 소설적으로 교묘하게 배치되고 연출된 것이다. 이 구성을 알레고리로 읽는다면 배움의 이야기로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령 문학에 매혹되어 배움을 시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번째 문을 여는 것은 쉽다. 약간의 결심만 한다면 누구나 문학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첫번째 문 뒤에 두번째 문이 있다. 그 문은 배우는 자의 힘으로 열 수 없게끔 보이지 않는 힘으로 통제되고 있는 듯하다. 두번째 문은 내부자들이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즉 두번째 문에서부터 소위 ‘계’ 나 ‘장’이라고 불리는 것(‘문학계’)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문들 사이에 갇혀 서성이면서 문 뒤에서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막상 문이 열리고 그 속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먼저 들어가 있는 이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여기는 왜 이 모양인가요?’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그애들조차 이곳의 주인이 아닌데”(105, 강조는 원저자). 두번째 문이 열리면 우리는 주인은 없고(주인이 있을 수 없는데, 주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있는 숙직실에서 우스꽝스러운 런웨이 행렬에 참여하도록 종용받는 것이다.

단계 3. 승화(불의 모티프)

실망 이전에 독단주의라는 함정이 있다면, 실망 이후에는 회의주의라는 함정이 있다. 실망을 겪은 사람은 회의적·냉소적으로 된다. 하지만 실망은 배움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마디들, 쉼표들일 뿐이다.11)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가 겪은 실망은 근본적이지만, 그렇다고 실망의 가능성이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며, 화자는 이후에도 거듭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회의주의는―독단주의와 마찬가지로―이런 상처에 대한 방어 작용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 중산층 가정의 불안한 질서 속에도 행복한 기억이 있다. 정전된 날 가족이 모인 촛불 앞에서 어머니는 행복을 고백한다. 그러나 즉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날, 그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90). 촛불은 불장난의 불 혹은 “배덕의 찌꺼기와 흉허물”(91)에 비하면 너무 연약하고 일시적이다.

가족의 허상은 이미 파괴되었다. 이것이(화자의 경험을 시간순으로 재배열한다면) 다른 실망보다 먼저 있었던 실망일 것이다. 실망은 약속, 행복, 도덕, 풍습, 기대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배우는 자는 어느 순간 이 범상한 사실에 도달하여, 마치 대단한 지혜를 얻은 것처럼 허무주의를 설파하는 사람이 되곤 한다. 하지만 실망은 한 단계의 마감을 알리는 동시에 또다른 단계가 시작될 것을 암시하고, 아직 자기 입장을 요새화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이 고된 사실을 방어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화자는 친구들을 잃고 외톨이가 되었다. 수치심은 화자를 몹시 괴롭게 하고 있다. 방학이 되어 어머니 집에 가는 것은 화자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어머니는 자신의 공부와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어린 화자는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 이 벼랑 끝에서 어떤 일탈을 시도하는데, 이 의식화된 일탈은 예술에 가깝지만, 혼자 하는 일이고 주관적인 고양감을 겨냥하기 때문에 아직 예술은 아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법적인 존재처럼 그려졌지만 중대한 일탈, 불장난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아버지이다. 처음부터 드러나는 그의 허술함을 고려할 때 이는 반전이라기보다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어머니가 행복을 고백한 밤 촛불을 켰던 라이터, 그 순간 외에는 아버지가 화자 앞에서 꺼내지 않았던 그 사물은, 아버지의 부주의 때문에 화자에게 재발견된다. 화자는 그 라이터를 가지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데, 여기서도 문의 모티프가 반복된다. 그런데 두번째 단계와는 순서가 반대다. 구 층에 있는 중간 옥상 문은 잠겨 있고, 이십오 층 옥상(‘진짜 옥상’)에 있는 문은 잠겨 있지 않다. 배움의 단계들을 문의 모티프와 관련하여 다음처럼 도식화해볼 수 있다. 배움의 단계마다 화자는 이전 단계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된다(하지만 불능도 부분적으로 계속 남아있다).

단계 1: 문을 열 수 없는 상태
단계 2: 첫번째 문은 열 수 있지만 두번째 문은 열 수 없는 상태
단계 3: 첫번째 문은 열 수 없지만 두번째 문은 열 수 있는 상태

이 세번째 단계에는 복잡한, 거의 종교적으로 보이는 의례가 수반된다. 두번째 단계에서도 단순한 의례(철문을 닫음)가 있기는 했지만, 이제 화자는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의례들을 만들어낸다. 화자는 그녀와 아버지 앞에서 화난 기색을 유지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며, 배가 고파도 아침밥은 굶는 등의 규칙을 만들어 지킨다. 처음에 이 수행적 자해는 아버지, 어머니, 그녀를 향한 시위이기도 했겠지만 점차 의도와 형식의 중요성이 전도된다. 이렇게 까다로운 의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 불장난이 일종의 정화 의식임을 말해준다.

소설에서는 적절하게도 말해지지 않지만 ‘불장난’은 불륜 행각을 뜻하는 관용어이기도 하다. 화자가 실제로 하는 불장난은 상징적인 “배덕의 찌꺼기와 흉허물”뿐 아니라 이 관용어의 상투성마저도 정화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 단계는 화자에게 수치심과 굴욕감을 심어준 경험, 특히 두번째 단계에서의 도망을 상상적으로 벌충한다. “다시 해봐, 다시 해봐, 하고 나를 부추기는 것처럼, 온 사방에서 기타와 드럼 소리가 두드러지는 팝송의 전주 부분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120). 이 명령어와 팝송은, 두번째 단계의 숙직실에서 화자가 들었던 소리의 상상적 반복이고, 이 반복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실제로 넘지 못했던 난관을 주관적 차원에서 초월하려 한다.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수치심과 굴욕감, 이물스러움과 꼴사나운 천진함 기타 등등―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120).

두번째 단계가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수평적 운동으로 특징지어졌다면, 계단을 올라 옥상에서 불을 피우는 이 단계는 상승의 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탈속(脫俗), 탈성애화의 움직임. 이 불장난은 주관적 보상인 희열을 주지만 그만큼 쉽게 사그라든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 가서 우리는 이 불장난이 마지막 난관을 넘기 위한 ‘주관적 차원에서의 예행연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11) “기호들의 영역 각각에서 대상이 우리가 기대했던 비밀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각각의 [배움의] 선에 대응하여 실망은 그 자체가 복수적이고 다양한 것이다. 처음 볼 때 실망케 하지 않는 사물들이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처음이란 미숙한 순간이고 우리에겐 아직 기호와 대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64쪽. []는 번역자.

단계 4. 글쓰기

글쓰기는 모든 의심과 혼란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도대체 지금 누가 서술하는 것인가(어린 화자인가, 어른 화자인가, 작가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글쓰기 때문에 배움을 단계화하는 게 가능하지만, 동시에 글쓰기는 단계화를 영원히 혼란에 빠뜨린다. 먼저 이 소설에는 다섯 개의 (은유적이거나 실제의) 불장난이 있는데, 이것들은 불과 폐허의 모티프를 반복하면서 각각 배움의 단계들에 상응한다.

(1) 그녀와 아버지의 불륜
(2) 양우정의 손수건을 소각장에 던짐
(3) 옥상에서의 불장난
(4) 불조심 글짓기의 소재로 쓴 불장난
(5) 동급생들 앞에서 낭독한 불장난

글쓰기는 네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소설의 내부에서 글쓰기가 마지막 단계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소설을 특히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특징이다. 글짓기 자체는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처럼 순식간에 일어났고, 다른 단계들에 비하면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중요한 배움을 주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를 이 소설 자체(혹은 소설에 대한 이 비평까지)로 확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글쓰기의 다음 단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것을 포괄하는 글쓰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글쓰기가 있는 한 어떤 ‘마지막’ 단계도 진정으로 마지막이 되지 못한다. 모든 마지막 단계의 에 글쓰기가 은근슬쩍 따라붙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쓰기에는 얼마든지 단계를 만들어내고 해체할 수 있는 자의성이 있다.12)

이 글에서 매력의 문제는 첫번째 단계에, 실망은 두번째 단계에 할당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혹과 실망의 운동이 모든 단계에 걸쳐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반복은 삶에서는 직접 알아차리기 힘든 리듬과 정조를 소설에 부여한다. 반복을 통해 화자가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나 강렬했던 배움의 단계들이 결국 모두 일시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인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128).

하지만 글쓰기가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상처일 수도 있다. 어린 화자가 정말로 매혹과 실망의 운동을 경험했던 것인가, 아니면 작가의 글쓰기가 화자의 삶 속에 반복을 기입한 것인가? (혹은 소설이 정말로 배움의 단계들을 설계한 것인가, 아니면 비평이 소설에 임의로 부여한 것인가?) 더군다나 화자가 자신의 ‘불장난 글짓기’에 번복(“이건 사실이 아니다”, 124)을 덧붙이고 있는 마당에, 이 소설의 글쓰기 자체를 믿을 수 있을까? 글쓰기의 단계에서 화자는 대상에의 집착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 것 같다(이전 단계의 주관적 고양이 글쓰기를 통해 지속성을 얻는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그해가 끝날 무렵에는 그런 것―방문에 귀를 갖다대는 것―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덧붙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타인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127)

앞선 단계에서의 실망을 통해 화자는 이제 비밀을 대상에서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화자는 내면에, ‘자기만의 방’에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역시 허상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우리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관적으로 물러날 수 있단 말인가? 한 작가의 방에도 얼마나 많은 작가의 언어가 있고,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와 사물이 있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고지서와 걱정거리, 작가를 부추기는 과제 들이 있는지? 단지 그런 것들의 연결을 더 견고하게 구성하여 마치 정신적인 방처럼 만듦으로써, 마치 스스로 운동하는 체계가 있는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우리는 주의를 뺏는 대상들과의 관계(이를테면 양우정에 대한 집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화자의 글쓰기 역시 외부에서 우연처럼 주어진 어떤 기회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교를 매개하여 시에서 개최하는 불조심 글짓기 대회 때문에 화자는 글을 쓰게 된다. 원래 화자는 대회에 관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자신의 경험과 글쓰기가 운명적으로 결속되는 것처럼 느낀다. “문득, 불장난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일, 거부할 수 없는 본분처럼 느껴졌고, 심지어는 조급증이 날 지경이었다”(121). 그렇다고 화자가 사실대로 쓴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단계에서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거짓의 역량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대상들에 기생하면서, 삶을 포착하는 동시에 파악 불가능하게 만든다.

12) 다섯 개의 ‘불장난’에 어머니와 함께했던 ‘촛불’의 기억 그리고 “불장난”이라는 제목의 소설 자체를 추가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는 소설에서 그려지는 배움 이야기의 배경이자 메타적 조건이지만, 다른 단계들을 초월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계 5. 되찾기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얻는 거짓의 역량, 그리고 글짓기를 통해 상을 받고 선생들의 관심을 받게 된 데서 오는 약간의 자신감이 마지막 단계에서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인 ‘되찾기’는 어떤 의미에서 과감한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진 적도 없고 잃어버린 적도 없는 무언가를 되찾아야 한다. 배움의 비밀은, 우리가 사실은 허상을 좇는 것일 뿐이라는 진실의 기나긴 지연 그 자체에 있다. 단계들은 어떤 원초적 전조(상실된 대상)의 재현이 아니고 그 실체에 대한 뒤늦은 탐구도 아니다. 매혹과 실망의 운동 그 자체가 배움의 내용이다. 배우는 자는 자기가 좇는 것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는다. 하지만 작가가 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배우는 자는 없는 것을 연출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방하는 자가 아니라 훔치는 자가 된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양우정의 당당함과 매력이 ‘타고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화자는 자신만의 연출 방식을 찾아낸다.

곧 나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특별히 고민을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수줍어서 입을 뗄 수 없다는 식으로 웃어 보였고, 우연찮게 아는 게 나오면 용기를 내는 척하며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선생은 내가 정답을 말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22)

화자는 매혹된 자에서 유혹하는 자로 변한다. 유혹은 없는 것을 연출하는 기술이다. 즉 유혹에는 필연적으로 거짓된 면이 있다. 모든 인간적인 것 중에서 그 실상을 낱낱이 알고 나서도 여전히 매혹될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도 넘기 쉽지 않은 마지막 문턱이 있다. 선생은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수상한 글을 읽어보라고 화자에게 종용한다. 그 순간 모든 우쭐거림이 사라지고 트라우마적인 무력감이 다시 엄습한다. 숙직실에서와 같은 명령어의 반복. “좀더 크게 읽으렴”(128).

왜 화자는 낭독을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하는가? 이 마지막 시험대에, 마치 연극의 커튼콜처럼, 화자를 괴롭게 했던 모든 불안과 패배감, 수치심과 굴욕감이 한꺼번에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형벌을 받는다고 느낀다. “무엇에 대한 형벌이란 말인가? [……] 한때의 굴욕을 손쉬운 안도와 거짓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시도에 대한 형벌”(129). 그렇다. 되찾기 위해서는 에누리 받았던 모든 고통, 주관적 보상과 거짓의 몫을 모두 갚아야만 한다. 이것이 배움의 마지막 단계이고, 예술을 넘어서는, 예술의 진실한 측면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거짓과 허상, 기만, 배덕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결산에는 어떤 오류도 에누리도 없다. “하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같은 쪽).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갑작스럽게 다시 자신감이, 약간 황당할 정도의 오만함이, 이전 단계에서 잘 함양되었던 광기가 찾아와 화자에게 마지막 난관을 넘어설 힘을 준다. 화자는 거짓으로 작성한―대회의 취지에 맞게 교훈적인―글에 즉흥적으로 더 지저분하고 구체적인 (진실에 더 가까운) 내용을 추가하여 낭독한다. 이 낭독은 글쓰기의 허위를 벌충하여 글쓰기 속에서, 그러나 글쓰기 이전에는 없었던 삶의 진실을 되찾게 한다. 그 순간 비로소 화자는, 이전 단계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배움의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130).

지금까지의 모든 기대, 매혹, 보상이 허상이었듯이 이 낭독의 도취 역시 허상일지 모른다. 아마도 허상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착각과 기만,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 될 것이다”(130-31).

눈이 가려져 있던 사람이 세계의 뒤편에서 눈을 뜨고, 삶으로 도약하는 이러한 되찾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압도하게 되는 그 배움의 여정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과정에서 허상은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문학도 허상이지만 그런 허상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아무 진실에도 도달할 수 없다. 좋은 예술작품만큼 좋은 선생은 없다. 가르치는 자는 자기도 모르는 것(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르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불투명하게 해야 한다. 예술작품만큼 불투명한 것은 없고, 그것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그만큼 우리는 예술로부터 한없이 중요한 것을, 우리가 매달리는 삶의 그 문제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도 배움의 끝은 아니다. 오히려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 배움들을 배우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거짓되고, 고통스러웠던 배움의 단계들은 이 단계에서 복기될 때 비로소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규정된 의미들은 사라지고 무의미했던 것들이 의미를 얻는다. 이것이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처럼 비평을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로 정의한다면, 이 마지막 단계에서 비평과 창작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활동이 된다(그러니까 ‘마지막’은 정말로 마지막이 되게 방치되지 않는다). 비판은 한편으로는 대상의 결여를 향하고 한편으로는 주체의 결여를 향한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서 진리가 허상임을 폭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더 어렵고 중요한 문제는 허상을 딛고 진실에 도달하는 것, 사실은 가진 적도 잃어버린 적도 없는 삶을 되찾는 데 있다. 감히 속아 넘어가려고 하라! 없는 것에 몸을 내어줄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배움의 슬로건이다.13)

13) 나는 다음의 유명한 구절을 염두하고 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편역, 도서출판 길, 2020, 28쪽.

이게 나의 손이네?

―시인 김도와의 대화

개인의 정신병과 사회의 정신병//시인의 위치//비트 세대와 우리 세대//소외를 해결하는 방법//김도의 시에 관하여//종말이라는 테마//사이적 존재

희우
제가 지금까지 작가들이랑 인터뷰를 몇 번 해보긴 했는데 대체로 인터뷰 대화하는 게 재미가 없었어요. 지면이 주어져서 인터뷰 같은 걸 하면 비평가가 일방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잖아요. 근데 작품이 인상적인 경우에도 저는 여러 번 작품을 보면서 내가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는 방식으로 계속 읽는 걸 좋아하지, 작가한테 직접 뭘 물어보고자 하는 동기는 안 생기거든요. 비평가가 질문하고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했을 때 작가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고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질문을 뽑아서, 대답을 준비해서 듣고 이런 것보다는 그냥 친구끼리 얘기하듯이……

김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희우
예. 제가 도 씨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만난 지도 좀 됐고 서로 글을 나눈 지도 좀 됐으니 친구끼리 얘기하듯이 한다고 해서 어색할 건 없겠죠. 사실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작가여도, 그 사람이 이미 작가와의 대화라든지 그런 행사 같은 것들을 많이 하고 있으면 굳이 제가 할 필요는 없죠. 그런데 도 씨는 그런 행사를 할 계획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둘 다 인기 있는 작가들은 아니니 공개해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읽겠죠. 이렇게 된 김에 하고 싶은 말 아무것이나 다 해보겠습니다.

김도
네.

희우
편하게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일단 시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도 씨의 인생사를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사실 띄엄띄엄 알고 있는 거고 저랑 만났을 때는 이미 좀……

김도
그런 일을 지나온 상태였죠.

희우
그렇죠. 그래서 구체적으로 모르니까, 저도 이번 기회에 좀 듣고 싶습니다.

개인의 정신병과 사회의 정신병

김도
알겠습니다. 저한테 가장 큰 테마는 ‘병’인데요.

희우
시집에서요?

김도
아니요. 제 삶에서요. 어느 시점까지 제 인생 목표는 ‘좋은 기분으로 살고 싶다’였던 것 같아요. 좀 더 거대한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고요. 어렸을 적부터 기분이 너무 안 좋았어요.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엄마랑 상담할 때 얘는 앞으로 커서 사회생활을 못할 거라고 얘기를 했었고요. 여러 이유가 있었겠죠. 초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에는 어떤 연병장을 연상케 하는 구령대가 있고 그런 상징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교육 시스템 같은 게 있고 분위기가 있잖아요. 저는 (학교와) 너무 안 맞았는데 그 안 맞음을 그냥 눈 감고 지나가는 걸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마찰이 빚어지면서 점점 더 병세가 안 좋아졌던 것 같아요. 우울증이 되게 심했었고요. 그러다가 느낌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10대 중후반 무렵부터는 조증 증세도 조금씩 있었던 것 같아요.

희우
시에도 정신병에 관련한 내용이 있잖아요. 그런 경험에서 기인한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김도
예. 어렸을 적에는 우울증이 전반적으로 심했고 대학교에서도 우울증은 계속 심했어요. 그러다가 이상하게 군대를 갔을 때는 좀 멀쩡해지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힘들어하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뭐랄까 그냥 정신없는 규율에 치이다 보니까 오히려 좀 명료해지는 면이 있었고요. 제대하고 다시 우울증이 심하다가, 그게 너무 심해서 살길을 찾다가 찾은 게 대마초였거든요. 근데 대마초 복용을 하기 전에 약간 조증 조짐이 있었고, 그러다가 조증이 터졌었고, 조증이 터진 다음 좀 시간이 지나면서 터졌던 게 조현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얘기 안 했지만 찾아보니까 의학적으로 조현병은 해당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에게서 발병하고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는 식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돼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제가 전문적으로 논문을 찾아본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의견이 그런 것 같은데, 한편으론 (병의)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한테는 이게 정말 중요한 테마였어요. 왜냐면 이상하게도 조현병에 걸렸을 때 오히려 구원 같은 것을 봤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상태라면 살 수 있겠다 싶은.
그게 어떤 기분이냐면, 나를 의식하는 정도가 거의 사라진 상태고 세상 모든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거거든요. 이를테면 이 포도송이에 가지가 이렇게 3개로 갈라져서 나오는 걸 보면 그 3이라는 숫자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면서, 이 형태도 뭔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데요. 모든 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에고가 희미해져서 그게 가능해지는 거고, 나라고 하는 것을 희미하게 느낄수록 그 빈자리에 다른 감각 대상들이 차오르는 거죠. 그게 정신병적으로 (말하자면) 무적의 상태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설령 내가 죽어도 다른 뭔가가 될 테니까요. 저는 워낙 우울증 기간이 길었고 사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이런 상태(희미한 에고)로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폐쇄 병동에 강제 입원을 당했지요. 그때 온갖 기행들도 많이 했었거든요. 환각, 환시, 환청이 심했으니까요. 망상이랑요. 그래서 (병원에) 갇히고 다시 우울증의 구렁텅이로 던져졌어요. 그 의식 상태로 돌아가거나 혹은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는 미션을 갖고 퇴원했던 것 같아요.

희우
언제 진단을 받으신 거예요?

김도
조증은 한 2016년도부터 좀 있다가 완전 심한 건 2017년도에 크게 터졌고, 조현병은 그때(조증이 심할 때) 같이 터졌어요. 호르몬적으로는 조증 때문에 도파민 분비량이 엄청 늘어나잖아요. 그게 조현병과도 연결이 되는 화학적 요인이에요.
병원에서는 약물로 정신병을 조절하려고 하고(물론 조절이 어느 정도 되지만), 병의 원인도 호르몬으로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우울증은 도파민과 세로토닌 양이 적기 때문에 발병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늘리는 약을 투여한다, 이런 식으로요. 근데 사실 호르몬이 적다는 건 원인이 아니라 결과잖아요. 그러니까 말만 바꾼 거지 같은 지점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적은 상태가 우울증인 거니까요. 이것을 저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정신병이란) 뭘까, 이게 제 탐구 주제였어요. 스피노자의 말처럼 정확하게 이해된 고통은 고통이기를 멈추니까요.
그래서 제 느낌으로는, 미쳤을 때의 경험이나 명상 수행을 통해서 얻는 경험에 의하면, 나라고 할 만한 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나 듣고 있는 이 감각인 반면, 우울증은 내가 지금 이런 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데서 되게 막 멋있는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 같고 마음의 눈은 그런 걸 보고 있는 상태인 거죠. 그렇다 보니까, 뇌는 좀 기계적이다 보니까, 지금 여기에서 쓸 만한 에너지는 덜어내고 그걸(이상적인 모습을) 보는데 에너지를 쓰게 되면서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요. 조증은 거기까지 갈 힘을 낼 수밖에 없게끔 도파민이 증가하게 되는 것 같고요.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조현병은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인 것 같아요. 내가 감각하는 모든 대상뿐만 아니라 감각할 수 없는 추상에서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면, 그러니까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어떤 포기 상태가 되면, 그 반작용으로 양성 증상이 나오는 것 같거든요.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상태가 되는 거는 또 생각해보면 당연하잖아요.
근데 조현병의 양성 증상이 환각과 환청을 동반하는 사이키델릭적인 상태라면 음성 증상도 있거든요. 그 음성 증상이 제가 방금 말한 전적인 무기력 같은 거예요.

희우
그러면 그 상태에서 입원을 하셨어요?

김도
예. 응급실로 가서 링거를 꼽는데 거기에 뭐가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 꼽을 이유가 없잖아요. 저는 기력을 전해질로 보충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바늘 뽑고 도망치다가 붙잡혀서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었죠.
그리고 이제 어느 순간부터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제가 있는데, 그 주사에 들어가는 성분이 기억을 날리더라고요. 벤조디아제핀인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한 주먹씩 항정신병제를 먹으면서 신적인 상태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려진 거예요. 그러고 나서 되게 무기력했고요. 퇴원하고 나서도 한 1~2년 동안 거의 누워만 있었어요.

희우
신적인 상태라는 건 어떤 건가요?

김도
그 신적인 상태에 단계적으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요가나 불교의 수행, 기독교에도 어떤 수행법이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카발라, 유대교 밀교처럼 그런 것들이 있듯이…… 그런 수행법들의 지향이 에고를 흐릿하게 하는 것 같거든요. 이를테면 구교의 고해 같은 걸 생각해보면, 어떤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항상 지켜봐야 하는 의식이 일상 속에 있어야 하고, 죄라는 것이 발생한 것 같으면 그것을 기억해야 하고, 그리고 신부님께 가서 고해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해결하는 어떠한 과제로서 보속 기도를 주고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어떤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지켜보는 어떤 시선이 내면에 자리하게 되는 거고, 그럼 말하자면 내 뒤편에 있는 나의 시선이 또 생기는 거잖아요.

희우
초자아라고 하는 거죠.

김도
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죄를 안 저지르는 일상으로 끊임없이 가면서 깨끗해지다 보면, 나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지고, 그리고 모든 게 신께서 만들어 주셨고 주어지는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붙이거나 거부하려고 밀어내거나 하는 액션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게 되겠죠. 그것을 불교에서는 명상으로 해내는 거고. 모든 영적인 종교들이 하는 일이 그건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그 기능을 좀 많이 잃어버린 것 같고요.

희우
종교들이요?

김도
네. 종교도 그렇고 사람들도요.

희우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렇게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에고가 왜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는가?
어쩌면 도 씨가, 에고가 너무 강한 사람이어서 그런 수행이 너무 중요한 거죠.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이런 얘기도 해보면 좋겠어요. 정신병은 내 기질과 더불어 시대적인 분위기, 속해 있는 집단이나 사회의 환경, 이런 것들에서 영향을 계속 받잖아요. 사실 영향을 받는다는 말도 정확한지 모르겠어요. 어디가 외부이고 내면인지 경계도 모호한 거니까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같은 대학을 나왔잖아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가 2021년에 졸업을 했으니까 사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도 그 학교 다닐 때 엄청 우울할 때가 있었어요. 진단도 받았고요. 정신증이라기보다는 좀 심한 신경증이지만. 근데 그때 저만 그랬던 게 아니고, 아시겠지만 학교 다니면서 만났던 사람 중에 정신과 상담받고 약 먹고 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았어요. 안 그런 애들보다 그런 애들이 훨씬 더 많았고요. 자살 소식도 종종 들려왔고요. 저도 학교나 군대에서 우울할 때가 많았고,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때만큼 괴로웠던 적은 없었어요. 어쨌든 그때 심리적 고통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까 도 씨가 얘기했던 종교적 수행 같은 것들은 문제를 내 안에서 찾는 거잖아요. 그런 방향에 대해 저는 불신과 회의가 있는 것 같아요.

김도
알겠습니다. 이게 왜 저한테 중요했냐 생각해보면 병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치료법으로 느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희우
어떤 게요?

김도
에고를 흐리는 거요. 말씀드렸듯이 한동안 제 인생 목표는 좋은 기분이었거든요. 그냥 좋은 기분으로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마초도 그렇게 좋아했던 거고요. 그게 사실 의학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돼요. 화학적으로도요. 근데 그걸 떠나서 에고를 흐리는 게 좋은 기분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조현병 양성 증상 속에서 느꼈던 거죠. 그걸 단계적으로 해내는 게 종교적 수행이고요. 저는 이거를 사이키델릭적인 의식 상태라고 보는데요. 그러니까 어떤 선이해나 의미가 없다 보니까 그것이 뭔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구별하는 마음이나 판단하는 마음 같은 게 되게 희박해진 거예요.
근데 병적인 상태의 문제가 뭐냐면, 뭔가가 좋다 나쁘다, 위험하다 안전하다 같은 판단이 이루어지는 마음은 어느 정도 의식의 거름망 같은 게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 거름망이 없어지고 감각이 많이 예민해지다 보니까, 어떤 감각들은 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고, 위협으로 느낄 경우엔 마음이 그걸 (물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시키더라고요. 그게 환시, 환청이고 원효대사의 해골물 같은 건데요. 해골물도 마음이 편할 때는 맛이 좋은 물이었지만 마음이 불편해지고 나면 토하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래서 이 에고를 흐리는 게 왜 정신병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냐면요. 고통은 내가 나라고 여기는 면에 붙는 건데 그런 게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면(고통이 사라지죠). 말씀하신 대로, 어떤 면에서는 문제를 나에게서 찾는 게 사회에 대해서 무책임해 보일 수 있어도, 그거는 그 사람이 뭔가 액션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 같고요. 일단 괴로운 상태를 멈추려면 이걸 분리시킬 수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희우
내면의 문제랑 외부의 문제를요?

김도
아니요. 나한테 오는 이 감각을 나로부터요. 그러니까 어떤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나쁜 기억도 이제 막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 같은 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걸 보는 거예요. 내 일이 아닌 것처럼요.

희우
그런 선택들이 당위적이고 사회적인 것 이전에 필사적인 것이었다는 얘기죠.

김도
예 맞습니다. 약도 먹고 싶지 않고 어쨌든 나는 좀 살아야겠는데, 죽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희우
네. 그런 선택들이 내가 가진 사상이나 스타일을 규정하는 것 같아요. 벼랑 끝에 몰렸다고 생각할 때 하는 필사적인 선택 같은 거요.
그런데 제가 아까 궁금했던 것은 사회적인 책임 같은 게 아니라, 병의 발발이나, 심해지거나 완화되거나 하는 경과 자체가 얼마나 사회적인 일인가예요. 한편으로는 병을 병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도 의학이라든지 법이라든지 여론,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잖아요. 국가의 관리와도 관련이 있고요.

김도
예. 그게 그렇더라고요. 제가 예비군을 가기 싫어서 (정신병을 이유로) 면제를 해버렸는데, 그러니까 운전면허가 같이 멈추더라고요. 아마 데이터상에 뭐가 있겠죠. 저도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아서.

희우
네. 그렇다고 해서 ‘미쳤다’는 게 그냥 법이나 담론이나 의학 지식이나 여론에 비추어서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진짜 미친’ 면이 또 있잖아요. 그러니까 광기 자체가 담론적 구성물은 아닌 거죠. 간단히 말해서 광기에는 실재성이 있는 거죠.

김도
그렇죠.

희우
그런데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느 집단에 있고 어떤 사회 속에 살고 있고 어느 시대를 사느냐에 따라서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든지 줄어든다든지 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관계가 저는 궁금하거든요. 저를 비롯해 그런 일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 들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신기했어요. 저는 지금은(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조현병이나 명상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과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게 여러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도
어떤 거죠?

희우
예를 들면 이런 거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좋아지는 게 있어요. 저는 최근에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꼈어요.

김도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희우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몇 년 전에 우울해서 누워 있고, 아무것도 못 하고 그럴 때에 비하면 굉장히 좋아졌다고 느껴요. 그 시기를 거치면서 두려움이나 불안 같은 것들이 좀 사라진 것 같아요. 이 느낌은 제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규칙들, 내가 사는 세계의 규범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받아들이는 것하고 관련이 있는 듯해요. 그러면서 내 존재의 쓸모나 당위를 덜 자문하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스스로 덜 괴롭히게 된 거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막 불법을 저질러야 된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없는 거죠. 굳이 애써서 불법을 저지를 필요는 없잖아요. 필요하다면 저지르겠지만요. 도 씨가 대마와 관련해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런 문제에 있어서 저는 도덕적인 판단을 할 이유나 자격이 저한테 전혀 없다고 느껴요. 하지만 어쨌든 저는 그게(대마가) 필요한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죠. 그래서 도 씨가 대마로 무슨 짓을 해도 저한테는 화가 나거나 특별한 인상을 주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저한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요.
도 씨의 개인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떤 실존적인 문제를 겪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과정에서 대마를 했거나 액티비스트로 활동을 했거나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시인으로서 혹은 활동가로서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일관성에 비추어서 이해될 수 있어요. 그러나 어쨌든 법이나 도덕 같은 거에 비춰서는 용인될 수 없는 거지요. 특히 지금 한국에서는.

시인의 위치

김도
말씀 들으면서 생각이 좀 났는데요. 아까 말씀하신 것,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자의적이다, 자의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비슷한 것처럼 굴고 있지만 사실 생각하는 건 각자 아주 다르고, 그리고 진짜 객관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이런 것들 사이에는 없다는 느낌 같은 거잖아요. 그래서 괜찮아지는 마음이 어떤 건지 좀 알 것 같아요. 좀 풀려나는 거지요, 묶여 있었는데. 제가 액티비스트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시를 쓸 때 그런 상태인 것 같은데요. 많은 사람한테 대마초가 아주 나쁜 걸로 프레이밍 돼 있고, 마약이라는 단어 안에 묶여 있고, 좀 오해되고 있는데요. 그걸 딱히 수정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고, 지금은 반드시 수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여하간 제가 액티비스트로 활동했던 이유 중엔 제가 보기에 좀 낡은 도덕관, 오해된 도덕, 잘못 만들어진 법 그리고 그것에 얽힌 역사 같은 것을 따를 이유는 저한테 하나도 없었던 거고 그걸 따르는 마음보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따르지 않아, 라고 이야기했을 때 얻게 되는 어떤 심리적인 안정감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라는 장르가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러니까 언제나 질서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어떤 틀 같은 것이 있어서 무언가 움직이더라도 그 틀 안에서 운동이 일어나게끔 해야 하는 건데, 그것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면……
이게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인데요. 모든 게 자의적으로 비칠 수는 있어도 누군가가 신념을 갖고 행동할 때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감각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희우
예. 거기서 뭔가 전도되는 것이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시의 위치에 관해서라면 할 얘기가 너무 많을 텐데요. 플라톤의 공화국, 『국가』에 보면 ‘시인 추방론’이 있잖아요. 거기서도 공동체의 어떤 기하학적인 질서를 위해서 시인이 추방돼야 하잖아요. 국가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시인이 처음부터 골칫거리죠. 플라톤이 자기 철학을 시나 연극과 분리하려고 애를 쓰는 한편으로(완전히 분리하지 못하지만), 당대 수학인 기하학과 정치 그리고 철학 이 세 가지는 그렇게 분리가 안 되어 있단 말이에요. 시는 그 지식-정치-철학의 배치에서 타자가 되는 거죠.
근데 이제 20세기쯤 되면, (특히 전쟁 이후에) 국가나 철학적 체계가 다 의심에 붙여지기 시작하고, 특히 하이데거를 보면 그 사람이 시인들을 많이 호명하잖아요. 하이데거 생각에는 (플라톤과) 반대로 시만이 존재의 진리를 보존하고 있고, 수학이나 형이상학이나 이런 형식들은 오히려 존재를 은폐하는 거죠. 그러니까 체계와 권력의 타자로서 시가 있다는 생각은 엄청나게 오래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매도되거나 추앙되었던 것이죠. 저는 한편으로는 이런 구도가 우리한테 안 맞는 면이 있다고 보지만, 한편으로는 적절한 보호 조치 없이 기각된 사고방식이라고도 생각하거든요.

김도
그다음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시인 추방론이 재밌는 게, 그 추방된 자리가 사실은 질서 내에 시인이 위치하는 자리인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 추방된 자리가, 오히려 시인에게 허락된 자리인 것 같더라고요. 아예 추방되었으면 사실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희우
예. 그리고 그 구도에서는, 도덕이나 법과 다른, 시인의 윤리 같은 거를 말하기가 아주 쉽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가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진척이 돼야 할 텐데요. 어쨌든 그런 구도에서 시인의 일탈이 용인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 나름대로의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지를 얘기해 봐야 해요. 안 그러면 그것도 결국 자의적인 게 되겠죠.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범법이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매도하고 비난하다가 나랑 친한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는 팔이 안으로 굽는 식으로 인간적으로 이해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안 되려면 어쨌든 이것도 나름대로 논리를 갖춰야 할 텐데요. 아까 얘기했던 플라톤적/반플라톤적인 구도에 비추어보면, 시인의 일탈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권력하고 가능한 한 상관없는 존재로 머무르는 한에서 그런 것이겠죠. 또 권력이 없는 존재를 도덕에 비추어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보수적인 행위잖아요.

김도
아 네.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어울리는 레퍼런스가 떠올랐는데 『리어왕』이에요. 그거 읽어보면 옆에서 항상 바른말을 하는 존재가 광대잖아요. 그 광대도 궁정에서 허락된 자리잖아요. 얘는 우리 밖에 있는 애라서, 왕 같이 위대한 존재에게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어떤 자리를 내어준 거잖아요.

희우
그렇죠. 그런데 누가 그런 광대의 역할을 정당하게 할 수 있을까요? 권력형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가령 권력형 성범죄는 시인으로서의 정당성을 없앤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우리가 권력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시인의 일탈이 용인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했을 때도 문제가 쉽지 않아요. 누가 권력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하는 기준도 굉장히 모호한 거잖아요. 그리고 비판적으로, 권력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정리가 필요한 거죠. 실천적인 지침이 필요하고요.
사실 이런 부분에서 진짜 필요한 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은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고, 철학자는 언어를 정화하는 사람이죠. 저도 제가 왜 이런 욕망을 갖게 됐는지 철저하게 규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삶 속에서 한 선택들을 통해, 내가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들을 통해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시인이 그냥 권력의 타자라고 말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했던 광대처럼 그런 일탈에 있어서 허용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이제 너무 순진해 보이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사실 예술가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행태나 정당화하는 일들을 많이 봤잖아요. 그런 것들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시인의 일탈을 옹호하는 논리들을 사용하는 게 어려워졌다고 보거든요. 도 씨가 시집을 내고 나서 뭔가 불법적인 일을 했다는 이유로 약간의 소란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도 그런 분위기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법과 비스듬히 있거나 대립하는 시의 윤리, 시인의 윤리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법과 제도만 남게 되고 법과 제도가 유일한 기준이자 해결책이 돼버리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권력은 지극히 상대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객관적인 무언가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김도
이게 바로 그 지점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희우 씨가 종종 말씀하신 어떤 사명감, 철학의 위치, 그리고 한국에서 철학의 필요성 같은 것을 절감할 때 느끼는, 그 순간 발생하는 마음이라는 게, 상황이 이러저러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건 사실 믿음인 것 같거든요. 근데 시인도 그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요?

희우
무엇으로부터요?

김도
본인이 믿는 것을 하는 것이요.

희우
아 그렇죠.

김도
리어왕의 광대든 아니면 어떤 추방된 시인의 자리도 어쨌든 그 사람이 그러는 건, 그걸 해야만 하는 어떤 필요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게 되는 거잖아요. 시를 쓰는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게 그것 같아요. 지금 이것이 나쁘게 보일 수 있다거나, 혹은 명예롭지 못하다거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존재에게 명예롭고 좋은 기분을 주고 반복해야 마땅한 것. 믿음이 남들과는 다른 데 있는 것이지요. 이게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시를 쓰는 사람들, 어쨌든 끊임없이 쓰는 사람들, 반복하는 사람들이 본인의 말을 얼마나 믿고 있느냐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본인이 하려는 말과 실제 행위와의 관계 말이에요. 고은처럼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시인으로서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 본인은 어떤 위대한 것을 향해 시를 썼을 텐데, 실제로 저지른 행위를 비추어보았을 때 그분들도 부끄러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저는 대마초 같은 경우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거죠. 그럴 일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자연적인 혜택 같은 거라고 믿기 때문에 (액티비스트 활동을) 한 거니까요.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는 자의적인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믿음이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가소롭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럴수록 이게 중요하더라고요.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이 일어났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나든 어떻든 간에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의 말을 믿는 것이요. 그리고 믿을 수 있게끔 계속 스스로를 통제하고요.
또 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쓴 사람도 사람들에게 정리될 수 있는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좀 없어요. 그러니까 시인에게 없다기보다, 시를 쓰는 일 자체에요. 근데 그게 (그에게는) 가장 맞는 방식이고 가장 시에 가까운 방식인 거겠죠. 시가 쓰려고 하는 어떤 대상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리고 저는 일상이나 혹은 일상에서 제가 느꼈던 감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만, 사실은 이것이 지시하고 있는 더 위대한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을 쓰고 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시 쓰기가) 가능한데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말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일 거라고요. 그래서 결국에는 어떤 실어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희우
도 씨 시에서도 그런 게 느껴져요. 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시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죠. 그 태도가 결국 시와 철학의 차이일 것 같기도 하고요. 왜냐면 저는 결국은 아무것도 밑바닥에 신비롭게 남겨두고 싶지 않거든요.
나왔던 얘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시인이 권력과 무관하게 있으려 하는 한에서 그의 일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그것은 시가 혹은 시인이 모든 권위나 권력과 무관해야 한다는 것보다는―아무 권력도 가지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니까―시가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인 자신조차도 대표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이것은 시가 인간적인 허위를 비워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궁정 속 광대의 은유로 말하자면 광대는 민중을 대표해서, 어떤 집단을 대표해서, 어떤 지적 체계를 대표해서 왕에게 간언하는 것처럼 자기 말의 정당성을 확보해서는 안 되죠. 그렇게 하면 그는 광대가 아니라 정치가이거나 학자이거나 시민단체 대표이거나 뭔가 다른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시는 확실히 철학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죠. 뭔가를 잘 대표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기가 더 어렵잖아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고, 헤아릴 수 없는 고독으로 들어가는 일이고요. 저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작업을 향해 가는 시인을 한두 명 본 적 있는데 그것이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경력이 쌓여 얼마간 권위와 명성을 가진 작가들이었고, 히스테리컬한 면도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보여주는 특이한 순수함과 단호함, 수수함과 냉정함이 있어요. 나는 그런 면모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비트 세대와 우리 세대

김도
옛날에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피카르트 책(『침묵의 세계』, 『인간과 말』)도 마음에 안 들어했었어요. 너무 기독교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당시에는 인간 의식의 이러한(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고요. 근데 제가 좀 살아야겠고,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하고 난 다음 느끼는 바는 ‘이유가 있다’라는 거예요. 약간 말도 안 돼 보이는 것도요. 심지어 저는 오르페우스교에서 콩 먹지 말라는 것도 이유가 있었을 것 같거든요. 어떤 영양분이나 아니면 그 화학적 성분이나 그런 걸 떠나서, 심지어는 그냥 문학적인 이유라도. 피라미드도 토목 사업이 아니라 사실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그런 식으로 죽은 왕과 금은보화를 넣으면 어떤 식으로든 혜택이 돌아오는 것이다. 십계명 같은 것도요. 그 내용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희우
그러면 도 씨의 입장에서 충돌이 생기지 않을까요?

김도
뭐랑 뭐가요?

희우
어떤 주체적인 믿음에 따라서 내가 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과,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법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이유를 따지지 않고 존중하는 게요.

김도
존중이 이루어지는 법들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법의 끝에 있달까요? 사실 이미 논리적으로 따질 가능성 자체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것들이잖아요. 콩을 먹지 말라는 건 사실 따질 만한 게 아니잖아요. 밤에 휘파람 불지 말아라 뱀 나온다 이런 거요.
물론 제가 지금 그런 룰을 지킨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이 다 무의미하다고 볼 수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식으로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을 때 그게 삶에 주는 혜택 같은 게 있더라고요.

희우
도 씨한테 일종의 종교적인 열정이나 끌림, 그런 게 있는 거 아닐까요?

김도
네. 그런 게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슬럼프라 책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과거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가들에게로 눈길이 가더라고요. 특히 시인으로는 루미나 휘트먼. 그리고 가볍게 넘어갔던 것 같아서 다시 읽은, 한국에 번역된 긴즈버그 두 권(『하울』이랑 『리얼리티 샌드위치』요).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마음산책에서 나왔던 메리 올리버의 『갈매기』, 『천 개의 아침』.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과 이러한 규칙들은 좀 일맥상통하거든요. 그리고 예이츠도 되게 흥미롭더라고요.

희우
비트 세대라고 하잖아요? 긴즈버그가 속한 세대는. 그때 히피들도 있었고, 또 영성이나 명상,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도 많았고 마약도 많이 하고 그랬잖아요.

김도
그렇죠.

희우
제가 보기에는, 도 씨가 아주 고전적인 시인으로 보이는 한편으로, 비트 세대의 정신과 감수성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탑재하고 있는 사람처럼도 보이는데요. 비평적으로는 그런 경향이 지금 한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혹은 왜 생겨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도 씨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거든요.

김도
저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아요. 이런 진단은 좀 야매긴 해요. 제가 의사도 아니고 정신분석학자도 아니니까요. 정신병을 낳는 가장 주된 마음 상태가 에고를 과잉 의식하는 상태인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는 거죠. 심지어 인스타그램이든 페이스북 같은 것들 때문에 더 많이 의식을 하게 됐잖아요.
근데 그런 것들을 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계속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문학이 이제 비트 세대의 문학인 거죠. 한국은 당시에 그런 문화를 겪을 수도 없었고, 그런 문학이 올 기회도 없었던 것이죠. 저는 이제는 그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숨구멍 같은 거죠.

희우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압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특히 우리가 속하는 이 세대를 통계적으로 봤을 때, 행복도나 자살률이나 출산율이나 아니면 우울증 정도라든지 이런 통계들을 보면 전쟁 상태에 준하잖아요. 출산율이나 자살률을 인구의 문제로 바라보는 건 국가의 관점이지만, 여기에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죠. 시대의 고통 같은 걸 얘기하면 무슨 거창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 그런 염려를 진지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엄청난 강박과 회피와 억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 씨는 비트 세대 식의 문화가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어떤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증상이 아닐까요? 우리가 마약을 필요로 한다든지 내적인 명상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종의 증상 같은 것 아닐까요?

김도
그렇죠. 전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 나타나야 할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아이를 안 낳는다든지 자살률 같은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더는 할 수 없겠다는 태도가 세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잖아요. 지속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는 거잖아요. 끊임없이 중단되는 상태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거잖아요. 저 또한 거기로 빨려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미쳤었고 괴로웠었던 것 같거든요.

희우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거군요.

김도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또 그게 에고의 문제인 것인데, 저는 (그 문제가) 스마트폰 이후로 두드러지는 것 같거든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요.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는 거요. 말하자면 몸은 여기에 있는데, 의식의 일부분 혹은 대부분의 의식을 보이지 않는, 이렇게 까맣게 둔 (스마트폰) 화면 어딘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인스타그램 피드라든지, 카카오톡이라든지, 아직 울리지도 않은 진동이지만 누군가한테 올 목소리라든지)에 두고 있는 거잖아요. 이거는 사실 괴로운 상태잖아요. 이 상태를 즐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저는 그게 좀 괴로운 상태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아까 말했던 긴즈버그 같은 경우에는, 『하울』을 읽어보면 그러한 시대적인 고통으로 출발해서 아수라장을 겪어가며 살아 돌아오는 이야기 같은 것이고 거기서 얻은 어떤 가르침과 감동이 있어요. 또 휘트먼은 시의 태도를 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을 희미하게 하면서 고통스러운 문제를 괜찮게 하는 구석이 있거든요. 실용적인 차원에서요.
뭐랄까, 그래야만 한다는 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여기가 이러니까 저기가 이래야 한다, 라는 균형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우
20세기 후반 미국의 비트 세대나 힙스터들이나 이런 사람들도 대체로 백인 중산층 젊은이들이지 않았나요?

김도
그렇죠.

희우
그들에게 뭔가 어떤 심한 공허 같은 데 있었던 거 같아요. 지금 한국에는 다른 정치적 문제도 추가적으로 있고요.

김도
좀 리얼한 걸 느끼고 싶은 것 같아요.

희우
리얼한 걸 느끼고 싶은 충동이요?

김도
충동이라기보다, ‘삶을 살고 싶다’는 느낌인 것 같아요.

희우
그런 느낌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을 해요. 과거에 ‘실제에 대한 열정’ 이런 말이 문학 비평에서 회자되었을 때가 있어요. 원래 알랭 바디우가 『세기』라는 책에서 쓴 말인데요. 20세기가 실재에의 열정이라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사회학자이면서 비평도 하셨던 김홍중 선생님이 이제 그 실재에의 열정이 끝났고, 시인들도 그거를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비평가들이 아직 그 열정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 열정을 시에 투사했다고 한 적이 있어요. 2천년대에 ‘미래파’ 같은 거 있었다잖아요. 그게 그 투사의 구성물이라는 거예요.
근데 저는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런 비평 분석들이 좀 틀린 것 같아요. 혹은 틀린 건 아니더라도 일시적인 분석인 것 같아요. 왜냐면 실재에의 열정이 사라진 적도 없고, 절대 사라질 수도 없고, 이 세대의 사람들이 표현을 하건 안 하건 간에 엄청나게 강렬한 열망이 있는 것 같거든요. 진짜 작업, 진짜 사랑, 진짜 삶…… 진짜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그 열정에서 온 온갖 일탈과 좌절이 있는 거죠.

김도
그렇죠.

희우
그런데 우리가 왜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요?

김도
그거는 저한테는 좀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얼마나 의식이 여기에 있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느냐인 것 같아요.

희우
여기에 있느냐 저기에 있느냐가 무슨 뜻이에요?

김도
SNS처럼, 우리가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서비스들을 많이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그런 것들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서, 그냥 이런 거(테이블 위의 포도송이)를 보고 있는 시간이요.

희우
그냥 눈앞에 있는 것들요?

김도
네. 그리고 그냥 지금 지나가고 있는 저 비행기 소리 같은 거요. 그냥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요. 보통 평소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겠지만 사실 대부분 화면을 보고 있고, 화면을 보고 있지 않은 시간에도 화면을 보고 있는 경우가 되게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내가 뭘 보고 듣고 있는지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지금 보고 있는 걸 더 지금 보게 되고 듣고 있는 것도 지금 더 듣게 되는 의식 상태가 되더라고요. 이건 물론 수행적인 반복이 요구되는 거지만요. 근데 제가 말하는 작가들이나 책들이 지향하는 바가 이러한 것이고요. 제 말은 어쨌든 이게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거죠.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것에 관해서 계속 생각하는 동안 힘겨운 상태를 겪는다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기술적으로 유도하는 게 주변에 너무 많고 사실 그것 자체의 인력도 되게 강하기 때문에 끌려 들어가기가 너무 쉽다는 거죠.

희우
네 그렇죠…… 하지만 저기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가 더 실재적이고 인스타그램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김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인스타그램 이미지를 그냥 인스타그램 이미지로 본다면요. 그런데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SNS를 다 그만뒀지만 노트북으로 유튜브 들어가면 가끔 빨려 들어가거든요. 근데 저는 그때 제가 뭘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다 끄고 나서도 뭘 보고 있는지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하기가 어려워요.
거기에 이미지로 올리기 위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배경이나 오브제 혹은 공간 분위기로서 보면서, 감각할 수 있는 바들을 거름망으로 계속해서 걸러서, 결과적으로 경험을 축소시키게 되는 거잖아요.

희우
저도 비평가로 데뷔하고 초기에(지금도 초기지만 어쨌든 등단하자마자) 그런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글을 쓰긴 했었는데요. SNS나 인터넷 밈 같은 거요. 하지만 더 광범위하게 생각해 봤을 때, 매체나 이런 것들이 변하는 상황에서는 항상 비슷한 비판들이 반복되었던 것 같은 거예요. 뭔가 실재적인 것들은 다른 데 있는데, 그거를 복제하거나 재현하는 이미지들에 의해서 실재성이 가려지고 훼손된다는 불안과 두려움. 그게 일종의 문화 지체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낯선 것이 일상의 편안한 부분이 되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매체 환경이 변하면서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이 바뀌는 거는 맞지만, 그걸 더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기준은 자의적이라는 거죠.

김도
사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되게 골수적인 거예요.

소외를 해결하는 방법

희우
음 그렇죠. 뭔가 하이데거적인 뉘앙스도 있고요. 나름대로 골수적인 것은 우리 둘 다 똑같죠. 여하튼 우리보다 더 어린 세대들한테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게 옷처럼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어요. 저는 제 또래 중에서도 되게 늦게 스마트폰을 갖게 됐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래서 저도 그거에 대한 어떤 낯설고 불편한 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죠.
그리고 저는, 그 실재에 대한 열정, ‘진짜 삶’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것도 굉장히 고전적인 관점입니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노동의 문제와 배움의 문제.

김도
그렇죠.

희우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사랑. 노동과 배움과 사랑이요.
그것들이 없으면 삶에서 어떤 실재성이라고 할까요, 충만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셋 중에 두 개는 있어야 해요. 어쨌든 저는, 그 열정은 공감하지만, 어떤 초월적인 것, 영성, 종교적인 거나 명상이나 신비적인 체험에서 충족하려 하는 방향에는 회의가 있죠. 어떤 측면에서 저는 세속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형이상학이나 문학을 좋아하지만요. 종교에 끌린 적은 제가 기억하기로는 단 한 번도 없고, 마약이나 명상을 통해서 신비적인 체험을 한다든지 영적인 체험을 한다든지 이런 거에도 관심이 없고요.
저는 노동하고 배우고 사랑하면서 삶을 느껴야 된다고 생각하고, 더 쉬운 길도 특별한 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관점에서, 그 세 가지에서 우리가 다 소외되는 면이 있다고 봤어요. 삼중의 소외.

김도
이것들을 중단했을 때요?

희우
아니요. 그게 막 인스타그램 때문이다 이런 건 아니고요. 그건 부분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 같고요. 또 소외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우리가 (언젠가 완전한 무언가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잃어버렸다는 오해, 그리고 어떤 소외도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는 오해 같은 것들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환상과는 상관없어요. 노동으로부터 소외됐다, 이거는 너무 오래된 얘기이지요.
노동 소외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근대적인 분업에 의해서 심화된다고 설명을 하거든요. 근대에 산업이 거대해지고 국가가 거대해지면서 우리가 점점 부분적인 일만 하게 되잖아요. 자동차를 만든다고 했을 때 나 혼자서 모든 걸 다 만드는 게 아니듯이요. 그런 식으로 고도의 분업이 일어나서 내가 내 노동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주인일 수 없고, 공정을 파악할 수도 없고, 또 생산수단을 부르주아가 독점하니까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있어서도 굉장히 부분적인 것만 받게 되죠. 배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어요. 세계는 복잡해지고, 또 통계적으로 우리가 지금 점점 학습 기간이 늘어나잖아요. 대학원 진학하는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압도적인 비율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근데 대학이라는 것도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어떤 전공 어떤 과로 갈 거냐부터 해서, 성적순으로 줄 세워지고, 또 그것이 직업의 문제랑 연결이 되어 있고, ‘문과특’, ‘이과특’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언어를 배우느냐에 따라서 감수성도 사고방식도 달라지는 것이고, 어떤 영역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배울 수 있다는 그런 감각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고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앎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죠. 저도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아주 골수적인 면이 있어요. 인문대 출신이 아닌데도(아마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문학은 한편으로 유사과학보다 못한 사이비 과학이 되고, 한편으로는 기획서나 홍보문 잘 쓰는 법, 아니면 사치스럽고 공허한 교양으로 여겨지게 된 것 같고요. 간학문이나 통섭, 문이과 통합 같은 간판이 달린 것들은 경제적이거나 정책적이거나 예산상의 이유로 만들어진 잡스러운 행사인 경우가 많고요.

김도
저도 동의합니다.

희우
그리고 사랑으로부터의 소외가 있어요. 데이트 앱이나 결혼 정보회사 같은 데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거죠. 한국 20대~60대에서 지금 20대가 성관계를 가장 안 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어요. 물론 성관계가 사랑의 표시는 아니지만요. 어쨌든 내가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해서 그 사람하고 살겠다, 이런 꿈을 꾸기가 어려운 것 같고요. 사랑을 둘러싸고 엄청난 질투와 조롱과 열등감, 혐오도 있고요. 가족에 관한 관념으로 말하자면, 오래된 것은 저물었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상태이고, 한국에서는 오래된 가족 모델의 재생산과 새롭고 다양한 가족 모델의 실험이 동시에 가능한 게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한 상태죠. 물론 (성 소수자가 결혼을 할 수 없는 것과 소위 ‘정상 가족’의 재생산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같은 종류의 불가능은 아니지만요.
우리가 욕망이 없다면 소외가 고통스럽지도 않겠지요. 욕망하는 동시에 소외되어 있는 거예요. 혹은 소외되는 동시에 대상에 대한 신비화와 혐오가 함께 생산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 직업을 갖고 싶어 하지만 또 한편으로 예술가나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재미없고 보람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정말로 나의 욕망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그 결과물을 책임지고 인정과 관심을 받는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배움에 대한 열망도 사실 엄청나게 커요. 단지 학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열망이 아니고 이 세계와 삶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요. 근데 현실적인 요구들에 맞춰서 진학을 하고, 교육은 입시나 취업을 위한 경쟁으로 환원되고, 그러니까 내가 밟아온 배움의 경로에서 이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능력을 깨우칠 수 없죠.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타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작업과 배움에 대한 신비화와 원한, 노동에 대한 경멸이 심화되는 것 같아요.

김도
그렇죠.

희우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죠. 심지어 사람들이 지금 사랑에 미쳐 있는 것 같아요. 무슨 결혼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들, 진짜 많고 엄청나게 흥행하잖아요. 그 폭발적인 ‘리얼리티’야말로 실재에의 열정의 대리보충 아닐까요? 그렇게 실재에의 열정을 해소하는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사랑(신비화된 사랑)에서 소외되는 거죠.
뻔한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이것들을 해결하는 게, 이 시대의 불행에 대한 근본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특히 배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비평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김도
그것은 최근 글에서 쓰셨던 내용이군요.

희우
그렇죠. 비평 활동에 대해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애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에요. 여전히 작가들은, 비평가들이 작품을 너무 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분석하려 든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죠.

김도
고질적인 문제죠.

희우
그런 한편으로, 제가 대학원에 와보니까 비평이 학술적인 것과도 여전히 좀 분리되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교수님들이 은근히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비평가들은 엄밀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문학적으로 대충 말만 끼워 맞춰가지고 막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비평이 그 지위나 하는 일이 애매한 거예요. 창작적인 글쓰기도 아니고 학술적인 글쓰기도 아닌 거예요. 일반화할 수 없지만, 비평가들이 느끼는 어떤 불안이나 열패감, 무력감 같은 것들이 거기서도 일정 부분 기인하는 것 같거든요.
근데 오히려 저는, 배움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복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비평이 애매하기 때문에 오히려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여요. 그 애매성이 비평의 강점이 되고 매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제가 말하는 배움은 어쨌든 학교 안에서 어떤 전공을 정해서 전문성을 축적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내 힘으로 세계와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확신과 관련된 문제에요. 또 결정적인 배움은 영역들, 분과들, 장르들, 구조적 요건들을 가로지를 때만 얻어질 수 있어요. 그런 모험을 통해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배움들을 내 방식으로 연결하고 재발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창작은 작가의 인간적 독특함이라는 환상과 너무 결부되어 있어요. 근데 비평은 그런 것들을 덜 요구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비평을 쓰기 위해서 특별한 사람이거나 특별한 재능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럴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냥 내가 지금 어떤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것만 확실히 있어도 누구나 비평을 할 수 있는 거죠.

김도
네. 근데 아까, 그 사랑 이야기할 때, 결혼 정보회사 말씀하셨잖아요. 지하철 타면 듀오 광고가 되게 많이 보이잖아요. 근데 듀오 광고 이미지마다 좀 공통적으로 보이는 재미난 특징이 있더라고요.
그게 뭐냐면 항상 남녀가 같이 있는데, 남성은 여성을 보고 있는데, 여성은 렌즈를 보고 있는 거거든요. 우리가 그 여성과 눈을 맞추게 되는 구도로 사진이 찍혀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나를 행복하게 바라보는 배우자가 있는데 배우자와 눈을 맞추는 대신 화면 쪽을 보고 있는 거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눈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건,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걸 의식하는 거잖아요. 두 인간이 사랑으로 행복한 순간이면 누가 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래도 좋을 텐데요.
그게 결혼 정보회사 광고 이미지로 찍힌다는 거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보여지는 나, 나에 대한 인식이 결혼에 침투해 있는 좀 상징적인 이미지로 읽히거든요.

희우
네.

김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결혼 정보회사 광고 이미지에서, 그는 나를 보고 있고, 나는 보여지고 있다, 보여지고 있는 나는 좋다, 행복한 내가 보여져야 한다라는 어떤 인식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는 거죠.
그게 제가 말하는 ‘필요’인 거거든요. 이런 것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건 당면한 상황이지만, 당면한 상황에 마찰감이 없다고 해서 다르게 볼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그건 이상해 보이고요. 사실 결혼은 신성한 의식이고 지켜야 할 약속 같은 것이기도 하잖아요. 가족들에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쨌든 그 사건은 일생에 한 번뿐인 것으로 오랫동안 다루어져 왔고,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암묵적인 인식이 희미하게나마 있는 거니까요.

희우
일단 인간 욕망이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고 타인에 의해 구성되는 건 어떤 면에선 당연한 거죠. 지금 한국 문화에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게 부추겨지는 면이 있고 그게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도 사실이겠지만요.
그런데 제가 비판적 사고에 뇌가 절여진 사람이라 그런지, 저는 애초에 풍습에 대한 믿음이랄까 존중이 없는 것 같아요.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게 꼭 신성하고 지켜져야 될 약속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요. 결혼은 언제나 사회적인 관습이었고, 성에 대한 관념, 타인들의 판단이나 평가에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었고, 결혼식은 늘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혼을 통해 사랑을 규정하면 사랑이 그냥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문제는 그런 압력과 욕망을 이용해서 더 많은 상품란, 고급 상품부터 보급형 상품들, 특별 상품, 소수자 상품까지 생기는 상황이겠지요.

김도
맞아요. 희우 씨는 비판에 절여진 거 아닌가 스스로 성찰하셨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그거야말로 에고를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치는 건 어떤 의미에서 저한텐 좀 신비 체험 같은 거였고, 그거는 개인으로서 논리로 극복 가능한 게 아니거든요.
아우구스티누스인가요, 방탕하게 살다가 신비 체험 이후 완전히 삶의 방향이 바뀌어버리잖아요. 근데 그러한 경험이 마치 번개 맞은 것처럼 지나가고 나면 존재의 방향이 틀어져 버리더라고요. 그리고 그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요. 올해 4월쯤에 절필하고 역시 스님이 되는 것이 맞나 고민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거겠죠. 사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동떨어진 게 맞고, 어느 시대였건, 어두운 시대였건 밝은 시대였건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지요. 근데 이제 이런(비트 세대 식의) 문화에 필요성이 있다면, 저 같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죠. 제가 어쨌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있긴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것을 취소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저는 좀 골수고요.

희우
그 점에서 아무래도 우리가 차이가 있는 거겠죠. 자기를 주체로 특히 내세우게 되는 사람들이 번개 맞는 듯한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죠. 저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를 받아들이고 철학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 사람들은 항상 그 사람의 전기 자체가 너무 중요한 게 되잖아요. 반대로 저는 제 주체성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철학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말하자면 예술가보다 훨씬 재미없는 사람이죠. 설령 삶이 다사다난했더라도 저는 저를 피뢰침 같은 주체로 정체화하지 않는 거죠. 다만 비평가로서든 철학자로서든 그런 피뢰침 같은 주체를 보호하고 옹호할 의무가 있겠지요.

김도
동의합니다. 그 말씀에 완전 동의해요.
철학자라는 사람들, 그런 존재들이 항상 어느 시대에 있었든 간에 포지셔닝하는 위치는 그런 곳이었고 모든 거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물러서 있되 그렇다고 너무 멀어서 안 보일 정도로는 물러서지 않는 어떤 위치에서 봐야 하잖아요. 동물들도 그 형상이 그 동물의 성격과 성향을 보여주잖아요. 인간은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근데 그런 것처럼 좀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까지도, 발견하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요즘 있거든요.
저는 골수화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눈이 먼 것 같아요. 근데 어떤 방향에 대해서 눈이 멀면 전혀 눈 뜨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어요. 그런 색깔을 추가하는 게 제 소명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인들이 식물 중에 꽃이라면 이런 꽃도 있어야지요. 뭐 대마초라거나. 대마초도 꽃이잖아요.

김도의 시에 관하여

김도
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비평가로서 느끼는 지금의 시, 시가 가야 할 것 같은 방향 같은 것을 좀 간단하게나마 들어보고 싶습니다.

희우
일단 제가 최근에 시를 진짜 많이 못 읽었어요. 다만 막연하게 요즘 나오는 시들이 하이브리드적이라고 느껴요. 시들도 역사적으로 분별이 되잖아요. 예를 들면 모더니즘 시, 서정시, 민중시, 포스트모더니즘 시, 좀 소수적인 계열이긴 하지만 사물시 같은 것도 있고요.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도 많이 이야기되었죠. 이제 그러한 구별들이 완전히 무의미해진 느낌이에요.

김도
그런 의미에서 하이브리드군요. 이것저것이 막 뒤섞이는 느낌으로.

희우
네. 한때는 서정을 피하고 은유를 절제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오히려 이제는 하이브리드적으로 더 많이 쓰는 식 같아요. 사물시를 보면 시인의 정서 표현을 절제하잖아요. 내면적인 표현을 자제하면서 사물의 비중이 커지는 쪽으로 쓰였는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 세계’랑 ‘인간의 내면’의 분리를 전제하는 것이죠. 요즘은 동물이나 사물을 말하는 시에서도 그런 분리가 없어진 느낌이에요. 감정적이면서도 세련된 사물시가 나올 수 있죠.

김도
그렇군요. 사실 저는 시의 분류에 관해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들어보니까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희우
그리고 지금 언어적인 실험을 하는 것 같은 시인들도 언어의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보다는 시가 (언어 자체보다) 다른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사실 누군가 실험적인 시에 대해서, 현실이 없고 자기 지시적이기만 하다고 비난할 때는 (그렇게 평하는 사람이) 시가 관계하는 현실이 무슨 현실인지 모르고 말하는 경우가 많겠죠. 어쨌든 자기 지시적인 시와 현실 반영적인 시, 이런 이분법도 무의미해지는 거지요.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는 말은 제가 감히 못 하겠어요. 그래도 이런 섞임이 2020년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의 경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건 비인간적이거나 사이보그적인 소재가 나오는 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언어적 감수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도
그러면 『핵꿈』도 하이브리드의 자장 안에 있다고 보시나요?

희우
고전적인 틀로 보면 서정시에 가까울 텐데 우리가 아는 익숙한 서정시는 아닌 거겠지요.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뭘까요?

김도
무엇과 무엇의 차이요?

희우
익숙한 서정시처럼 읽히지 않게 하는 차이요.

김도
저는 리듬 때문이 아닐까 싶기는 해요.

희우
도 씨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반복인 것 같기는 합니다. 많은 시가 반복을 사용하지만, 이 시집에서 특히 느껴지는 기묘한 반복이 있잖아요. 사태가 끝나지도 않고 정리되지도 않고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반복의 형식 자체가 남게 되는.
서정시는 시인이 일반 사람들하고는 뭔가 다른 내면을 가져서, 그 사람이 세계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상 자체가 특별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만 하면 특별한 시가 된다는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쉽죠. 이 시집(『핵꿈』)도 서정시라고 묶일 수 있겠지만 반복의 형식 자체가 중요해짐으로 인해서 (시인의 자아 표현이 덜 중요해지는) 전환이 있는 것 같거든요.
리듬은 우리가 시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일반적인 요소 중 하나이지만, 여기서의 반복은 그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기능의 지연이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런 세계감과도 관련이 되고요. 예를 들자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그만해도 좋아/나는 말하지 못한다”(「단 하나의 문제만이 출제되는 시험」) 이런 구문들의 반복. 혹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서 층마다 늙지 않는 아이가 타는 식(「천국보다 낯선」)으로, 전개되지 않고 같은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기만 하는 것이 이 시집에 특색을 부여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반복의 형식이 작가의 감수성이나 사상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아무 변화가 없는 상태 그대로인 것을 수용한다고 해야 할까요?

김도
네, 그런 것 같아요.

희우
이런 거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면/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는 거겠지”(「Golden Tiger」). 이런 것도 그냥 같은 말의 반복이잖아요. 일반적으로는 무엇인가 가정되었으면(~라면) 그 뒤에 조건절(~일 것이다)이 나올 차례인데, 여기서는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인 거죠.

김도
그 문장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변한 건 없는 것 같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냥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형성되면서 오히려 변화의 느낌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요? 왠지 좀 그런 것 같아요.

희우
또 이런 것도 있어요. 첫 번째 시의 이런 문장도 참 좋은데요. “여행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여행이 시작된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 거야”(「잠수」). 이것도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어서 다르게 느껴지는 게 있어요. 결론을 향해서 가고 있는 느낌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태 자체를 수용하는 느낌이 드는 거죠. 이런 반복이 변증법적인 발전 같은 것도 아니고 나선형적으로 어떤 중심을 향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부록으로 쓴 수기에서도 잘 나타나는 건데) 개개 시편들의 반복을 관통하는, 그 자체로는 규정되거나 말해질 수 없는 를 향한 경도가 느껴져요. 그러니까 시편들하고 구분되는 절대적 의 개념이 있어요. 부록의 에세이를 보면 개개의 시는 그냥 시라고 되어 있고 후자는 볼드체로 라고 적혀 있어요. 영어로 치면 소문자 시랑 대문자 시 같이요. 현행화된 시와 잠재적인 시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김도
예. 그렇죠.

희우
그래서 이 시집에서 반복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내면적인 맴돎으로 읽힐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복 자체가 더 깊은 차원에 있는 무언가의 반향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후자의 차원, 즉 절대적인 것을 향한 정신적 경도가 지난 십여 년의 ‘신서정’에서 『핵꿈』을 분별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읽었던 황인찬의 시는 메타-서정시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한국 서정시에 대한 계승이 있는 한편, 자신의 역사와 매체에 대한 반성적 자의식을 가진 모더니즘 시의 특징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미 황인찬의 시는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 것이었고, 시를 읽는 독자가 품을 법한 이중의 기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지요. 또 황인찬의 시에서도 도 씨의 시에서와 비슷한 반복을 이미 볼 수 있죠.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아침에는/아침을 먹고”(황인찬, 「무화과 숲」). 그런데 어쨌든 2010년대 황인찬의 시에서는 시에 대한 냉소적 거리와 메타적인 균형 감각을 볼 수 있잖아요. 반면 『핵꿈』을 비롯해서 최근의 많은 시에서는 몰입이나 경도, 광기 같은 것이 더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도
시 쓰는 분들은 스스로 계속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 앞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듯해요. 나는 왜 계속 시를 쓰고 있는 걸까? 특히 저는 지금도 등단을 안 했다고도 볼 수 있는 입장이고, 따라서 비등단 기간이 사실 제 삶의 대부분이었음에도 치열하게 썼거든요. 왜 그렇게 치열하게 썼는가 자문한다면,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저는 한 번 더 물어봐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내가 있고, 쓰고 있는 나는 따로 있는 거죠. 다만 실질적인 보답도 없고 정답도 없기 때문에 왜 쓰는지에 관한 질문을 떠올리고 답할 필요가 있는 나와 그리고 시를 써야만 하고 읽고 쓰는 나는 별개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를 왜 쓰는지 대답을 해본 간략한 결과가 시집 마지막의 부록인 것인데, 시가 가는 방향 끝에 있는 거()는 대상과의 일치라고 생각하거든요. 대상과의 언어적인 일치는 존재적 차원의 일치와 다름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상과 주체가 떨어져 있어야만 가능한 거잖아요. 반대로 시가 지향하는 방향 끝엔 대상과 주체가 분간이 안 되는 상태를 가정해야만 하고요. 시가 시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게 그것이기 때문인데, 시를 이루는 언어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분리돼 있으니까 (시의 지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통 시에 관한 정론이고요. 어쨌든 그와 같은 시의 극점은 그것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시를 생각할 때 염두에 둘 수밖에 없죠. 시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마땅하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거죠. 특히 이러한 관점은 제 병의 경험과도 연결되는데 조현병의 피아 분간이 흐릿해진 상태, 나와 사물 간의 경계가 흐릿해진 상태가 저는 대문자 의 인지적인 상태와 흡사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시를 통해 대문자 를 이룬 시의 완성 상태가 더 완전할 테지만요. 조현병 상태는 불안정한 상태이니까요.
그래서 대문자 적 상태로 어떻게 갈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의 결과 중 하나로 시에서의 반복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반복이 대문자 를 이루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쓰는 것의 너머를 알지 못하거든요. 아는 데까지만 쓰고 있는데, 거짓말하지 않고 아는 척하지 않고, 다만 아는 데까지만 진실하게 쓰고 내가 뭘 쓰고 있는지 그래도 최대한 알아차리려는 솔직한 태도랄까요. 솔직하다는 말이 적당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대문자 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문자 가 보인다는 착각에 속지 않고 그냥 당장 내가 쓰고 있는 것을 쓰려고 쓰다 보니까(이상한 말인데) 반복적인 형태가 나온 것 같아요.

희우
그런데 이 시집의 반복은 언어와 사물의 경계가 없어지는 분열적인 상태를 향해서 가속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한편으로 닫힌 회로처럼 폐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김도
네. 저도 동의해요. 그러니까 어…… 제 생각은 계속 벽을 부수면서 나아가는 느낌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한 편, 한 편 시를 쓸 때 나아가고 있다는 그 운동 상태의 체감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거죠. 대문자 로요. 말하자면 한 칸의 계단은 한 칸의 계단이라는 인식으로 쓰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니까 그 계단에서 다른 계단으로 옮겨가는 발의 느낌으로서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칸의 계단은 한 칸의 계단으로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걸 인정해야 하고요. 그 계단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떤 사적인 욕망이나 아니면 미래에 대한 기대나 이런 것보다도 그저 그 한 칸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쓰는 거죠. 미신적이고 계시적인 이야기이긴 한데, 그저 이 순간 쓰고 있는 게 이 순간에 써야만 했을 그 무엇이라는 받아들임이랄까요. 그래도 말씀하신 대로 폐쇄적인 느낌 속에서 영원히 돌고 도는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달리 말하면 정지한 거고요. 제가 의도했던 느낌은 아니었지만요.

희우
「떨어지는 돌」의 화자는 약간 신적인 존재잖아요. 어떻게 보면 영화 〈트루먼쇼〉의 연출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화자이지요. 이런 시를 보면 어떤 전능한 느낌이라는 게 고전적인 연출가의 위치와 연결이 되면서,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요.

김도
네. 말씀하신 대로 전능하기 때문에 유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희우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시집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이 시집에 화자가 시 안에서 폐쇄적으로 맴돌 때가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돌」에서와 같이 전지적 관찰자로 위치가 달라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김도
「떨어지는 돌」은 약간은 캐주얼하게 쓴 건데요. 화자가 떨어지는 돌인 거고 그래서 오히려 희망적인 느낌을 내보고 싶었어요. 지구에 떨어지는 돌이 화자인데, 그 돌이 지구에 관해 모르는 게 없다면 근사하잖아요. 심지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모르는 게 없으면 정말 멋진 돌이니까 그 정도면 (지구에) 부딪쳐도 괜찮지 않나 그런 의미로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포칼립스」랑 또…… 뭐였죠? 막대한 빚으로 끝내는 시 제목이 뭐더라…… 왜 내가 제목을 기억 못 하지? 뭐였지? 아 「달콤한 인생」. 그렇게 세 편을 묶었던 거예요.

희우
그러니까 여기서 ‘떨어지는 돌’이 화자이고, 화자는 운석이군요!

김도
그렇게 쓰긴 했습니다.

희우
그런 거군요.

김도
예. 비하인드 스토리 정도로…….

희우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이 시집엔 종말에 관한 테마도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종말이라는 테마

김도
네. 확실히 그렇죠.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돌아버렸을 때 종말론적인 환각 같은 것을 봤었는데, 그게 요즘에도 기억나곤 해요. 영화에서 연출하듯이 햄버거 먹는 와중에 별안간 콜라 쏟고 그런 식으로 떠오르지는 않아요. 다만 벗어나기는 어려운 거죠. 왠지 계속 그런 종말이 발생할 것 같고 저는 그 자장 안에 있는 거죠. 그렇다 보니 그런 시들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희우
이거는 시에서 좀 벗어난 얘기인데요. 소위 ‘미친다’라고 할 때, 언어적인 질서에서 탈구되는 거긴 하지만 정신이 아무 방향으로나 가는 건 아니잖아요. 미쳤을 때 흔히 반복되는 서사나 이미지 같은 게 있잖아요. 종말의 이미지가 대표적으로 그렇고요. 그게 좀 궁금해요. 그러니까 미친 사람들이 완전히 임의적으로 다른 환상, 환각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고 거기서도 어떤 패턴이 발견된다는 게요.

김도
예. 그 얘기를 하자면…… 이상하게도 시랑 연결되는데, 바슐라르가 자의적인 메타포라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도 이 말에 동의를 하는 이유가 경험에 있거든요. 어떤 공통되는 특징이 전혀 없다면, 공통되게 하는 기반이 없다면 미치는 사람들은 진짜 막 아무런 방향으로나 튀어나갈 것이고 테이블이나 드라이기나 아니면 220볼트 콘센트 따위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근데 미쳤을 때 그런 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내가 모든 존재고 모든 존재가 나인 그 지경까지 비어버리면, 뭐랄까 본인이 좀 신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건 아주 고전적인 테마잖아요. 어쨌든 그런 압도적인 느낌이 드니 제가 예수라고 믿게 되더라고요. 계시들이 밀려오고요. 그래서 저는 「시도시도는 이렇게 쓰인다」 부록에서 말하는 그냥 시와 대문자 , 그리고 제가 명상을 하면서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와 조현병적인 어떤 상태, 각기 다른 환자들인데도 공유하는 병증의 레퍼토리가 다 유관하다고 생각해요. 또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희우
종교적인 틀이나 신화소(Mytheme) 같은 것들이요?

김도
신화소요?

희우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요소들이 있잖아요. 신화를 신화로 만드는 최소 단위 같은 것을 신화소라고 하는데요. 언어의 밑바닥에 그런 신화소들이 있기 때문에 타아의 구분이 무너진 광인들이나 아니면 구분을 무화시켜버린 수행자들이 도달하는 인지 상태가 비슷한 것인지……

김도
맞는 말씀 같아요. 또 말씀하신 제 시집에서 나오는 특징들도 사실 이러한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저는 미치고 치료받은 뒤로는 이 방향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죠.

희우
그런데 구원이나 종말론적 이미지나 메시아 같은 것은 많은 종교에 공통된 요소를 품고 있긴 하지만 특히 기독교적인 테마이기도 하잖아요. 그게 이상한 것 같아요. 기독교는 이 나라의 국교였던 적도 없는데요. 도 씨한테 기독교적 테마가 특별히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있나요?

김도
이번 삶에서 특히 중요했다고, 특징적이었다고 말할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정도로 기독교 문화의 자장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종말론적인 테마가 기독교적인 테마인 건 틀림이 없지만, 또 동시에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종교라면) 이 세상의 이유를 밝혀야 되는데, 보통 그 이유를 밝히다 보면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고, 그리고 또다시 어떻게 시작되어야 되는지를 해명하려고 하니까요.

희우
불교에는 그런 식의 구원이나 종말의 테마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김도
불교와 힌두교의 구원이 좀 비슷하죠. 그러니까 계속 윤회하고 있고 깨달음을 얻으면 이것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요.

희우
네.

김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본인이 예수가 되었다거나 신이 되었다거나 같은 망상은 조현병이나 조증적으로 흔한 증상이지만, 막 판문점에 유엔 본부를 설치해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거나 하는 망상도 대한민국에서는 좀 흔한 레퍼토리거든요.

희우
그런 사례들이 있나요?

김도
네. 근데 제가 겪은 이 구세주 레퍼토리가 가장 흔한 것이에요. 시중에 나와 있는 책에서도 쉽게 접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같은 걸 읽어봐도 그 아들이 예수가 되거든요. 제가 그랬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예수가 가장 유명한 신이라서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어쩌면 종말을 감지했던 이유는, 이상한 얘기인데, 당시 어떤 생명들이 끝장나고 있다는 그런 이상한 촉감 속에 있었거든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사과를 먹을 때도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닌 거예요. 포도 한 알을 씹을 때도요. 보면 안에 되게 뭐가 많잖아요. 사실 굳이 미치지 않은 눈으로도 자세히 보면 되게 복잡하잖아요. 이게 막 움직이고 있고요. 그런데 그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무방비하게 열려있다 보니까, 특히 그걸 제어하는 힘이 언어 같은데 그것이 와해되어 있다 보니까 온갖 이상한 감각들이 밀려오는데요. 그중 저한테 강하게 왔던 것이 생명들이 끝장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얘기하면 추상적이지만 막상 몸으로 오는 느낌은 구체적이었던 거죠.
그때 저는 보기에 너무 안 좋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먹는 그런 환각을 봤거든요. 그게 어떠한 이유로 왔는지는 저도 모르죠. 맥카시의 『더 로드』의 교육 효과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좀비 영화나 온갖 영상물들의 영향일 수도 있죠. 근데 중요한 건 그런 소재적인 이미지들보다도 그걸 일으키는 힘 같아요. 사실 그건 제정신이 아닌 거잖아요. 눈이 여기에 있는데 웬 이상한 걸 보고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되면 왜 압도당하게 되느냐가 관건인데, 그걸 다룰 수 없어서인 것 같아요. 그 상태를 컨트롤 할 능력이 없으니까. 무서운 마음이 들면 그 무서운 마음을 의식이 구체화시켜버리는 거죠. 그리고 거기에 다시 당해버리면서 악순환에 빠지고요. 환각의 원리가 그렇더라고요. 내 기분이 좋으면 유니콘 같은 게 무지개 타고 날아올 것 같고 그런데, 기분이 안 좋으면 마치 얇은 필름 하나가 벗겨지는 것처럼 서울이 지옥으로 보이는 거죠.

희우
그게 궁금한 점인데요. 그런 식으로 미치면 주체와 대상, 언어와 사물의 경계가 없어진다고들 하지만, 조현병이 환각이나 환영하고 연관되는 만큼 그 경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도의 착각 속에, 더 주관적인 차원에 갇혀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상상적인 차원에요.

김도
네.

희우
다시 말해 실제로 구분이 없어진 게 아니라 구분이 없어졌다는 착각 속에 있는 것일 수 있는데, 그거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주체와 대상의 일치라는 시의 고전적 테마도 그렇죠. 생각해보면 절대지는 주관에서 객관으로 갔다가 그걸 다시 주관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적인 운동을 통해 대상과 주체의 일치에 이르는 것인데, 시의 엑스터시는 그런 변증법적 발전을 반대로 뒤집은 것일 수 있지요. 근대철학적 절대지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주관적인 만큼 광기도 주관적인 것일 수 있죠. 그러니까 그저 주관 안에서 분열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사물과 접속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김도
날카로운 말이네요. 실제로도 그렇게 양분되는 것 같아요. 자폐적으로, 껌껌한 곳에 본인이 무엇을 감각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갇혀서 누구와도 소통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과 차단된 상태. 그런 상태와 제가 말하는 ‘만물이 나고 내가 곧 만물이 돼버린 상태’는 어쩌면 밖에서 보기에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그 둘을 객관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면 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체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것에 관해서 시도 조금 썼고 블로그에도 조금씩 끄적이고 있긴 한데, 제가 겪은 병적인 상태는 병적이었기 때문에 불안정했고 깊이로 따져도 그렇게 깊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아요. 말하고자 해도 이 정도밖에는 말할 수가 없거든요. 이거는 말해줄 수 없는 종류의 사건이자 감각인 것 같아요. 겪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상태를 겪는 방법으로 동시대에 잘 알려진 게 버섯이나 LSD 같은 것이겠죠. 강제로, 화학적으로 그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에고가 흐려진 상태가 무엇인지 좀 알게 되죠. 다만 제가 말씀드렸던 문제도 같이 나타나겠죠. 그러니까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상태에서, 열려버린 상태에서 두려운 마음이나 안 좋은 생각 같은 것에 사로잡히면 엄청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거죠. 제가 광증에서 겪은 환각들처럼요.

희우
거기서 그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 종말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들이 그냥 개인적인 두려움 때문일까요? 예를 들면 아까 서울이 지옥으로 보였다고 하셨잖아요. 서울에 실제로 어떤 지옥 같은 특성이 있어서 그 실재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김도
둘 다일 것 같아요. 서울에 지옥 같은 속성이 있어서 지옥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정도 지옥 같은 면이 없는 곳은 이 별에 엄밀히 말해서 없잖아요. 숲에만 가도 뭐가 뭐를 끊임없이 먹고 있으니까요. 작은 이빨로 오독오독 씹으면서요. 서울에도 당연히 그러한 면은 있을 거고요. 인간적인 면에서요. 근데 그런 것을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쁘고 두려운 식으로 안 보일 거라는 거죠. 미쳐도요. 오히려 근사하게만 보일 수도 있을 거고, 몹시 흉하거나 마음 아픈 장면을 보면서도 거기서 희망이나 오히려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상태라면요. 하지만 불안정하고 연약한 마음이면 온갖 지옥도에 사로잡히는 거죠. 조현병 환자들이 불행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상태, 에고가 흐려진 상태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왜냐면 마음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기절했기 때문에 강제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고 그러면 휘둘리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폐쇄병동에서 봤던 사람들도 그랬고요. 그리고 저도 거기 있었던 모습이 되게 안 좋아 보였겠죠.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겠죠.

사이적 존재

희우
버섯 얘기해서 생각나는데 『돈 후안의 가르침』 읽으셨어요? 그 책의 저자는 원래 미국에서 근대적인 인류학 교육을 받은 학생이고 그 사람이 멕시코의 선주민, 일종의 구루한테 견습을 받는 내용이잖아요. 근데 사실상 배우는 게 마약 복용법이란 말이죠. 이런 장면이 나와요. 스승이 가르쳐주는 천연 마약을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고 나서 새로 변하는데……

김도
스모크였어요.

희우
네. 새로 변하는 경험을 하고 나서 정신을 차렸을 때, 스승이 “너는 새가 되었어”라고 단언하는데 서술자가 계속 그거를 못 믿거든요. 그러면서 계속 질문하지요. 내가 그냥 새가 됐다고 느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새가 된 것인가요? 그러니까 만약에 남이 그때 당시 나를 봤어도 내가 새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겠냐고 계속 질문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 해소할 수 없는 관점의 차이가 있어요. 아주 거칠게 말해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근데 그 스승한테는 그런 사고방식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서술자가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는지조차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반대로 우리가 근대적인 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물에 접속하거나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형되거나 세계로 확장되는 기분이, 그냥 미치거나 마약에 취했거나 미몽에 빠져서 자기 혼자 착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게 근대적인 틀로 보면 사고방식에 위계가 생기고요. ‘물아일체’는 전근대적인, 말하자면 의심(데카르트)이나 비판(칸트)을 할 줄 모르는 상태인 거죠. 분열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여 종합한 상태가 아니라 아직 분열조차 겪지 못한 상태…… 헤겔이 동방의 예술(특히 이집트 예술)에 대해 했던 평가가 정확히 이런 것이었어요. 거기서는 자연과 인간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거든요.

김도
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게, 저는 좀 사이에 있는 것 같거든요. 말씀하신 대로 근대적으로 교육받았고 그런 교육으로 나름대로 자신을 단련한 것 같은데, 일단 신비로운 체험을 지나고 나서는 그런 교육도 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상태, 에고가 흐려진 상태에 제 존재의 구원이 있다고 믿고, 명상 수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명상을 하면서 인지 상태나 감각의 변화 이런 건 좀 사소한 거고요. 예를 들어 열차에 앉아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제 손을 보면요. 보통 평소에는 제가 손을 딱히 보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돼요. 또 손이 제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당연한 거라서 굳이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잖아요. 근데 이상하게 보이는 거죠. 이게 나의 손이네? 감각 자체만 바라보는 훈련을 계속하다 보니까 그냥 물이 휴지에 스미듯이 의식이 변화하더라고요. 그게 제겐 흥미로운 지점이었고, 예전에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일상이 된 것 같고요. 하지만 저도 무슨 변신 이야기처럼 사람이 막 갑자기 깃털이 나면서 할리우드 영화처럼 날아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근데 ‘스모크’라고 하는 무언가를 통해서 어쨌든 비행을 하고 새가 되긴 되잖아요. 어떻게 그게 되는 건지 모르겠고 뭘 한 건지도 모르겠는데 날긴 난 거죠. 그럼 난 거예요. 그 책을 읽어보면 처음에 페요테부터 시작을 하잖아요. 그 유명한 선인장 열매. 사이키델릭으로 말해지는 자연물 중 유명한 것인데요. (그런 걸 복용하면) 에고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과의 교류가 감각되는 상태가 오는 건데, 그게 객관적인 진실이냐, 그것이 과학적인 진실이냐, 정말 나무의 정령이 있어서 나무와 대화를 하는 것이냐, 그냥 자의적인 것 아니냐, 그거야말로 주관에 사로잡힌 거 아니냐고 반문은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명상을 통해 과거에 비하면 약간은 기묘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데, 과거에는 포도가 내가 생각하던 나고 사과가 내가 생각하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그사이의 어디라 말하기 어려운 허공에서 지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고정된 좌표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모든 게 움직이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그거라고 부르는 건 그저 언어적인 편의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진실은 나무가 뿌리내린 그 자리와 돌이 위치한 그 자리, 고정된 자리들이 아니고, 김모 씨와 한모 씨 같은 이름들의 좌표값이 아니고, 그 사이들만 있는 거고, 그렇게 치면 사실 그 무엇도 없는 게 돼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이’로서만 있는 거죠. 어느 개체든지 다 사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지거든요. 그저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여져요. 그렇다고 지금 이상하게 세상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도요. 새가 된다거나,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들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그 사이적인 상태로 의식을 변화시키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보았을 땐 사이가 아닌 고정된 자리가 있다는 게 착각인 것이고, 사이만이 있다는 게 진실이라는 거죠.

희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 그러한 인식에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나 광기나 마약을 빌리지 않고서도 주체/대상과 같은 구분을 넘어설 합리적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김도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 같아요. 전자를 쐈는데 그것은 관측되기 전까지는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있다가 관측되는 순간 그곳에 있는 것으로 되잖아요. 아주 작은 미시 세계에서의 법칙이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에서 자주 말해지는 ‘위에서도 그러하듯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아주 작은 것들이 아주 많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이고, 불교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알아내는 건 미시 세계까지 감각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 같아요. 근데 말씀하신 대로 그것을 합리적인 언어로 이룬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일 것 같아요. 어떻게 그게 될지도 잘 모르겠어요.

희우
그것은 이미 동시대 철학의 명시적인 과제예요. 캐런 버라드(Karen Barad)라는 동시대 철학자, 원래 물리학자였다가 지금은 철학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마침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말씀하셨잖아요. 버라드가 그 중첩된 상태랑 존재론과 퀴어 이론을 연결해서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 말하는 “내부-작용(intra-action)”은 말씀했던 그 ‘사이 존재’랑 비슷한 거예요. 아마도요.
그런데 근대철학을 비판하면서 그런 상태에 ‘합리적’으로 도달한다는 말은, 제가 독학한 맥락에서는 하이데거식 해석학적 낭만주의나 들뢰즈의 무정부주의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요. 하이데거가 근대철학 혹은 서구 철학에서 망각된 존재에 가닿기 위해서 특권을 부여했던 것이 시의 언어이고,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작업했던 후기에 정신분열증에 의미를 많이 부여했거든요. 주객의 (재현적)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서요. 그들도 ‘사이 존재’를 말했지만,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철학자들하고는 달라지는 거죠. 더 멀리 가려는 것이지요.

김도
그렇네요.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것 같아요. <라스트 샤먼>이라는 다큐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미국인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을 것 같고 실제로 죽을 뻔도 했으니까 페루에 가서 아야와스카 리추얼에 정통한 샤먼을 만나서 아야와스카를 복용하고, 의식을 치른 다음에 병을 치유하는 다큐멘터리거든요. 아아와스카가 그 지방의 전통적인 사이키델릭 물질인데 화학적 성분으로는 DMT라고 하는 거거든요. 근데 DMT는 뇌에서도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거고, 그게 가장 많이 분비되는 시기가 죽을 때입니다. 그래서 주마등이라는 말이 있는 거고요. DMT가 분비되는 부위가 송과체인 거고 제3의 눈이라는 것과도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수행을 하면서 제3의 눈과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게 감지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수행할수록 점점 느낌이 강해지더니 이마와 코뿌리 안쪽에 어떤 공 같은 것이 온몸으로 떨림을 퍼뜨리면서 회전하고 있거든요. 물론 이건 수행을 통한 것이지만 사이키델릭을 통해 경험을 해보시는 것도 가능성으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철학적 과제를 위해서요.
자연에 섭취하면 그런 효과가 일어나는 것들이 있다는 건,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건 먹어보라는 뜻으로 보이거든요. 저한테는요. 대마초도 사실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식물의 암꽃을 수정시키지 않은 상태로 잘 키워서 말려서 피우는 거고 뭔가 거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것을 섭취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섭취를 안 하셔도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경험하는 가장 좋고 쉬운 방법은 명상입니다. 물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많은 집중을 필요로 하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근데 그건 사람마다 달라요. 불교적 관점으로 따지면 희우님이 저와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이런 세계와 인연이 닿아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고요.

희우
계속 말했지만 명상이나 약물은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 대화를 통해 인연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다시 한번 시집 발간 축하드리고요. 앞으로도 계속 쓰시길 기원합니다.

김도
예. 계속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요.
정말 긴 이야기를 나누었네요. 이 대담이 어떻게 정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읽는 분들이 재밌게 읽으시면 좋겠네요. 담소 나누는 동안 저는 재밌었거든요.

희우
저도요.

한 사람의 모국어

―민병훈, 『달력 뒤에 쓴 유서』(민음사, 2023)

가끔 내게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자유롭다. (107쪽)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던질 법한 첫 번째 질문: 어떻게 위의 두 문장이 나란히 있을 수 있을까? 첫 문장은 제약의 느낌을 말하고, 다음 문장은 자유의 느낌을 말한다. 두 문장 사이에서 글쓰기의 억압, 글쓰기의 제약과 글쓰기의 해방, 글쓰기의 치유가 끝나지 않을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밤낮없는 논쟁은 ‘제약 속에 자유가 있다’는 식의 상투어로 타결될 수는 없다. 그 명제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둔탁한 말로 이해하는 순간 이 문장 조합의 무거움과 가벼움, 답답함과 해방감, 현기증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사라지고 말 어떤 언어 고유의 감각이고 사유의 리듬이다.

번역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두 번째 질문: 『달력 뒤에 쓴 유서』를 비평할 수 있을까? 소설이 쉽고 거창하든, 어렵고 사소하든 상관없이 모든 규정을 거부하고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평가와 수식들로 소설을 환원하지 않으면서 비평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칫하다가는 감탄의 단말마나 울먹임으로 끝날 수도 있을 만큼 아주 짧은 분량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감탄을 자아내는 스펙터클한 소설이 아니고, 슬픈 소설도 아니다. 슬프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슬픔을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는 아니며, 슬픈 소설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심지어 『달력 뒤에 쓴 유서』는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평할 내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소설을 규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설명을 요구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무엇을 왜 쓰는가?’를 자문하는 이 소설을 비평하려 하는 즉시 ‘나는 왜 비평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평가로서의 세 번째 질문: 도대체 나는 왜 비평을 쓰는가?

어려운 세 질문에 답하기에 너무 부족한 이 리뷰의 지면이 안타까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소설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따금 너무 많이 말함으로써 너무 적게 말하게 되었다고 후회하는 때가 있다. 이 소설을 비평하기가 어렵다면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격적인 사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어려움은 사건을 의미화하지 않으면서 계속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를 반복하는 이 소설의 태도와 관련 있다. 소설에서 친한 동료 작가는 작가-서술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당신 소설 같네요”(87쪽)라고 한마디 한다. 서술자는 소설에 대한 그러한 사소한 규정조차도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또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삶을 생략하지만 삶을 환원하지 않으려 한다. 삶이 규정을 거부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소설도 규정하지 않고 규정되지 않으려 한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은 이 소설이 아버지의 자살을 둘러싼 기억을 다루기 때문에 흐려진다기보다는 더 예리해진다. 단순화하지 않고 의미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실존에 가시처럼 박힌 그 기억에 접근하고, 또 마치 외국인처럼 “아들의 문장을 읽을 수 없다”(140쪽)고 말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1) 어떻게 사전도 통역사도 번역기도 없는 두 언어 사용자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소통이 시작될까? 사건 당시 어머니는 왜인지 집을 나가 있었으며, 음독 후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의 작가-서술자이다. 둘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열심히 살아왔다. 낭만적인 해결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삶 자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각자의 상처를 안고.

서술자의 이름은 ‘병훈’이고, 소설가이다. 많은 장치가 이 소설이 실화에 바탕하고 있음을 믿게 하지만, 이중의 연출일 가능성을 적어도 원리상 배제할 수 없다. 한편으로 중간중간에 비현실적인, 소설적으로 연출된 듯한 장면들이 있는데, 그런 장면들이 꼭 이 소설이 허구임을 표시한다고도 볼 수 없다. 사람들 말대로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수필이 아니라 소설임을 형식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대부분인 1부와 부록처럼 추가된 짧은 2부의 분리이다. 1부의 어머니는 2부의 ‘그녀’가 되고, 1부의 ‘나’는 2부의 ‘아들’이 된다. 즉 시점이 바뀌어, 서술자는 어머니(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어머니는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작가-서술자의 첫 책을 읽다 말았으며, 두 번째 책은 아예 보지도 못했다. 작가-서술자의 문장은 어머니에게 가닿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책이 왜 안 팔리는지 묻고, 잘 팔리는 그런 책을 왜 쓸 수 없는지 서술자에게 묻는다. 서술자의 친구들 역시 소설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신기해하고, 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작가-서술자가 놀라울 것 없는 이러한 몰이해에 무슨 거창한 기치를 내걸고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서술자는 무언가에 반대하기 위해 깃발을 들고 있지 않다. 깃발이란 뒤따르는 여럿을 하나의 의지로 환원하고, 여럿을 대표함으로써 힘을 얻는 것이 아닌가. 이 소설에서는 사건도, 상처도, 진정성도, 대의도 글쓰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부끼고 있지는 않다.

물론 문학이 깃발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현실의 능력 있는 활동가들이 깃발 혹은 언어의 권력을 활용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종종 강력한 깃발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의 저항은 깃발을 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깃발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데, 이 작업을 진행하는 어떤 순간에는 너무 힘든 나머지, 다른 방식의 문장을 바란 적도 있었다. 사명감, 책임감, 정치, 의욕이 담긴 것들.
(76쪽, 강조는 원저자)

예술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미학주의’가 현실로부터의 도피임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언술이나 당위를 내세우는 일이 문학으로부터의 도피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이 어려울 때 우리는 꿈으로 도피할 수 있지만, 꿈이 고통스러운 진실에 접근할 때는 결정적인 장면 직전에 벌떡 일어나며 꿈에서 현실로 도피하곤 한다. 글쓰기를 지속하는 일은 이러한 양방향의 도피에의 거절이지만, 민병훈의 완고한 글쓰기가 자기충족적이거나 자기 만족적인 글쓰기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 사람은 자연어 속의 외국어를,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모국어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환이 아니라 변환이다. 이러한 변환이 없으면 타인의 언어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 속에 왜 작은 외국어가 생겨날까? 확실히 파격을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동정받기 위해서는 아니다. “전통적인 소설과의 결별? 혹은 반감? 아니다. 불행한 사건을 겪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 아니다. 평단과 대중에 의한 인정? 더더욱 아니다. 하나씩 거둬 내고 보니, 욕구만 남았다”(p. 118). 서술자의 이 대답은 진실이겠지만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서술자는 어느 순간 “문장으로 무언가를 이해하고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152쪽)고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글쓰기는 ‘이해’라는 목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구가 자신의 모든 목적을 초과할 수 있음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 욕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욕구는 ‘코기토’처럼 그 자체로 의심 불가능한 기원적 확실성이 아니고, 명석판명한 단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대답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질문이 다시 남게 된다: 이런 욕구는 왜 생기는가? 다음 내용은 소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소설이 남긴 질문에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하는 대답이다.

욕망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위의 진술(“욕구만 남았다”)은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그보다는 (소설에 상담하는 상황이 짧게 그려졌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상담실의 상황을 상상해보고 싶다. 이를테면 상담사가 “그렇게나 힘든데 글을 왜 쓰시나요?”라고 질문하는 상황. 이런저런 대답을 하자 상담사가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으시군요?”라고 대답한다(나는 어릴 적 타의로 갔던 어떤 상담 센터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은 그다지 억압적인 규정이 아닌데도 “아니, 그게 아니고요……”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도대체 그렇게 대답하고 싶게 만드는 ‘욕구’는 무엇일까? 물론 이해받고자 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이 욕구에 따라 “그게 아니고요”라고 대답했다면 동시에 “사실 맞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욕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이중성을 가졌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사태의 진실은 욕망의 이중성이 아니다. 규정을 거부하는,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분명한 서사를 만들지 않는 소설의 욕구가 이중성에 대한 것이라면, 소설은 언어가 주체를 둘로 분열시킨다는 정신분석학적 명제에 대한 불가결한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달력 뒤에 쓴 유서』는 그러한 확인과는 별 상관이 없다). 존재가 이중적이라면, 존재를 규정하는 언어에 대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가령 누군가 “넌 너무 감상적이야”라고 규정하는 말을 한다면, 거기에 “내게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어”라고 대응하는 것으로는 그 규정을 충분히 물리칠 수 없다. 감상적인 것과 감상적이지 않은 것의 분할 자체가 그러한 언어에 의해서만 도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언어에 대한 존재의 이중성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인 다의성이다. 한 사람이 정말로 많은 영혼을 가졌듯이 상황은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다의성을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가 애도도 이해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고독이 모국어 속의 작은 외국어를 만들도록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상실, 외로움, 원망, 몰이해, 자기 정당화를 통과하여 이해받기를 단념할 때, 모든 쉬운 이해와 극복을 포기할 때,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해의 가능성이 열리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짧은 2부가 타진하는 것은 그러한 역설적인 이해의 가능성인 것처럼 보인다.

1) 아버지의 죽음이, 나선형처럼 기억을 풀어놓는 이 소설의 비어있는 중심축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억하고, 기리고, 애도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글을 쓰는 서술자와 그의 어머니 사이의 불가능한 이해가 소설의 구성 전체를 고려했을 때 더 핵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구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애도의 작업에서 정말로 어렵고, 더디고, 중요한 것은 같은 존재의 상실을 마음에 새긴 사람들, 그러나 사건을 전혀 다르게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그래서 원망과 몰이해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2)또 규정된 사람은 규정하는 사람에게 규정의 언어를 돌려줌으로써 관계를 치명적으로 얽히게 만들 수 있다. 너의 언어 역시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다고 응수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존경스러울 만큼 천착한 사람들과 로맨스물의 클리셰를 통해, 언어의 권력을 가진 사람과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전쟁 같은 사랑이 벌어지거나 사랑 같은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주인이나 노예에 대한 사랑, 분석가와 히스테리증자, 로고스와 로고스의 권력을 사랑하는 반(反)로고스중심주의 기타 등등.

P.S.

아마도 비평은 ‘무엇을 왜 쓰는가?’와 같은 답이 없는 질문에 직면하지 않기 더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달력 뒤에 쓴 유서』에 대한 리뷰를 써 달라고 청탁받았기 때문에 이 글을 썼다. 하지만 사명은 아니라도 최소한 긍지 비슷한 것이라도 느끼려면―그런 것도 없다면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글쓰기는 내적인 논리를 가져야만 하는 것 같다. 비평이 문학 시간 수행평가나 문예지 혹은 ‘문학계’의 구색을 위한 회전 초밥3)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쓴 글이 어딘가 발표된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흥분과 신기함의 구름이 걷히면서 이 문제가 부상하는 경험을 했다. 소설에 담긴 고민의 무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 문학비평을 왜 쓰는지 진지하게 대답하려 한다면 소설가보다 상황이 아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읽고 싶어 한다는 데서 즉각 글쓰기의 당위와 열의가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글을 가족도 읽지 않고 친구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나고 유쾌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내가 잡지에 글을 발표하고 있음을 조금 늦게 아신 할머니가 당신에게도 글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끼어들어 읽지 않는 게 좋으리라는 말을 다음과 같은 짧은 평으로 갈음하셨다. “한국어가 아닙니다.” 그 후 낙담해 있던 어느 날 정체 모를 사람에게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쓴 글이 불특정 다수에게 한국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많은 사람과 책은 때때로 상반된 이야기를 했다. 한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과 위치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게 좋다고, 특히 어떤 주장을 할 때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셨다. 반대로 다른 선생님은 (내가 첫 번째 비평을 발표하기 직전에) 글에서 ‘나’를 지우는 게 좋다고, 꼭 써야 한다면 ‘필자’라고 쓰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필자라는 말이 너무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이 들어가는 문장의 구성을 아예 다 바꿔 버렸다. 나는 그러한 수정이 글을 보다 엄밀한 논의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글을 발표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두 가르침의 의미와 그것들을 대립으로 생각하게 하는(물론 두 선생님은 이러한 ‘대립’에 직접적 책임이 없다) 사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둘 다 따를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여기의 글쓰기의 조건은 그러한 대립을 구성하는 사유의 조건을 넘어서 있다. 우리는 마치 세상에서 최고로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기라도 한 양 세계와 인류 혹은 존재자 일반을 말하는 글이 ‘나’ 혹은 ‘우리’를 숨기고 있음을 아는 만큼, 세상에는 어떠한 보편성도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오직 나’ 혹은 ‘오직 우리’를 말하는 글이 세계와 인류 혹은 존재자 일반을 숨기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3)회전 초밥은 예전에 리뷰를 쓰다가 떠오른 이미지이다. 넓은 행사장에는 여전히 손님이 있긴 하지만 행사의 중심(심지어 복수화된 중심이라 해도)은 다른 곳이며, 다만 행사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공감각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행사장 구석에서 돌고 있는 회전 초밥. 손님들은 ‘저기에 초밥이 돌고 있네’하고 인지하기는 하지만 차갑게 식어 맛없어진 초밥을 웬만하면 먹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리뷰를 쓰면서 내가 그러한 회전 초밥 접시 위에 올라갈 초밥을 열심히 요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