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3)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6. 히스테리: 디시 레드필 갤러리와 남성 되기의 공포

우리는 불만을 정치적 몸으로 ‘조직화’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사례로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을 살펴보았다. 그와 가깝지만 다른 방향에 히스테리화가 있다. 여기서 히스테리는 임상적 진단도, 여성적 성격에 대한 낡은 편견도 아니다. 이 글에서 히스테리는 타자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요구하면서도 어떤 답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담론 형식과, 그 담론 형식의 끝없는 순환을 가동하는 교착 상태의 감정을 가리킨다. 라캉의 히스테리 담론(Lacan, 2007)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욕망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분열된 주체는 자신을 규정해 줄 것으로 기대되는 주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주인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새로운 명칭과 분류, 통계와 이론을 생산하지만, 그 지식은 주체의 분열을 해소하지 못한다. 답변의 실패는 더 많은 질문과 지식 생산을 촉발한다. 이 글에서 히스테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고통에 대한 최종적 답변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어떤 답변도 충분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담론적 순환이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가?”,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가?”, “왜 나의 고통은 말해지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는 답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확인하는―동시에 주인의 결핍을 확인하는―방식에 가깝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과는 대조적으로, 디시의 몇몇 마이너 갤러리는 불만의 정치적 조직화가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못할 때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준다. 미국정치 갤러리, 부정선거 갤러리, 레드필 갤러리 같은 공간을 예로 들 수 있다. 펨코가 (실제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좌파’에 대한 맹목적 증오를 깔고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고 제도권 정치에서 통용 가능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이러한 마이너 커뮤니티에서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 대의민주주의 체제, 심지어 ‘현대 사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지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절에서는 여러 마이너 갤러리 중 레드필 갤러리에 집중할 것이다. 레드필 갤러리는 연애, 자기계발, 남성성 담론과 극심한 여성혐오,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교차하는 징후적 장소다. 잘 알려져 있듯 ‘레드필’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에서 유래했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넨 빨간약은 안락한 가상현실 뒤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진실을 보게 하는 매개체다. 영미권의 커뮤니티에도 있는 레드필 갤러리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와 남녀관계 뒤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진실을 일깨워 남성들을 각성시키는 ‘이론’을 공유하고 전파하는 공간이다(코플런드, 2025 참조).

디시 레드필 갤러리에 접속하면 게시판 맨 위에 공지 사항으로 고정된 게시글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를 볼 수 있다. 이 ‘입문서’는 몇 개의 연속적인 게시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서론편’ ‘연애편’ ‘자기계발편’이 있으며 연애편과 자기계발편은 또 각각 복수의 게시글로 나뉘어 있다(그림 6).

디시 레드필 갤러리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의 목차

이 목차는 이 갤러리의 관심사가 연애와 연애를 위한 자기계발에 집중되어 있음을, 그리고 유저들이 그 관심사를 나름의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구성하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레드필 이론의 기본적인 전제는 남성을 복수의 등급(알파남, 베타남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는 늑대처럼 무리를 이루는 동물의 상투적 이미지에서 우두머리 수컷과 추종자 수컷이 나뉘는 방식과 유사하다. 남성의 ‘급’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도, 혹은 여성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정도다. 남성들 사이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카리스마도 고려된다. 서론편의 일부를 살펴보자.

디시 레드필 갤러리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 일부

이처럼 레드필 이론은 노골적으로 ‘급’을 나누어 모든 남성과 여성을 모종의 서열 속에서 보게 한다. 온통 ‘급 나누기’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냉혹한 논리를 내면화한 뒤 더 높은 ‘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서로 ‘채찍질’하는 것이다. 여기서 친밀함이나 다정함 등 ‘현대 사회’가 권장하는 사교적 덕목은 남성들을 유약하게 만들고 옭아매기 위해 기획된 거짓 도덕으로 여겨진다. 남성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은 ‘급’을 올려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철저하고 냉혹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남성이 따라야 할 유일한 덕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급’을 올릴 수 있을까?

디시 레드필 갤러리 「순한맛 레드필 입문서」 일부

레드필 담론은 연애를 비롯한 사회관계를 게임의 논리로 이해한다. 모든 관계는 전략과 거래의 문제로 환원된다. ‘급’은 외모, 사회적 행동력(게임 능력), 돈, 지위라는 4가지 지표로 구성되는데, 그 모든 요소에서 평균 이상으로 뛰어나야 ‘알파남’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머지를 모두 갖추더라도 하나의 요소에서 실패한다면 “인생이 망”할 수 있다. 조금만 삐끗해도 알파남의 기준에서 탈락할 수 있다. 무리마다 ‘우두머리’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머지 평범한 남성들은 모두 ‘베타남’(혹은 베타남조차 아닌 무언가)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레드필 담론이 표상하는 남성성은 너무나 버겁고 환상적인 무언가이다. 평균적인 남자, 혹은 어떤 요소에서 뛰어나더라도 다른 요소가 미달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버림받거나 이용당할 것이다. 모든 여성이 자신보다 ‘급’이 높은 남성을 선택한다는 ‘하이퍼가미’ 이론에 따라 평범한 남성은 연애 시장에서 도태된다고 여겨진다. 좋았던 옛날―페미니즘과 좌파의 준동이 없었던 옛날―에 평범한 삶의 약속이었던 연애와 결혼은 이제 도달하기 극히 어려운 자격시험처럼 변했다.

레드필 갤러리는 에바 일루즈(2010, 2013)가 말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 사랑의 모순이 어두운 방식으로 극단화되어 나타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코플런드, 2025). 동시대 사회에서 낭만적 사랑은 여전히 엄청난 사회적·인격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여하한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가 붕괴하거나 약화된 시대에, 낭만적 사랑은 온갖 인격적·사회적 기능(개인의 성장, 돌봄, 위로, 안식, 즐거움, 재생산 등)을 몽땅 짊어지게 된다(일루즈, 2013). 또한 사랑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적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매력 있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사랑은 데이팅 앱이나 결혼정보회사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외모 평가, 경제력 평가, 인격 평가, 자기계발 담론 속에서 점점 더 수치화되고 시장화된다(일루즈, 2010). 사랑은 낭만적인 것으로 이상화되는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계산되어야 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이런 모순을 체화한 레드필 갤러리의 유저들은 연애에 너무 많은 소망을 의탁하면서도 연애를 한낱 거래의 문제로 상대화하며, 남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세속적인 기준을 따지는 오늘날의 여성들을 증오하고 비방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앞장서 남성과 여성을 첨예하게 등급화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자신이 세운 엄격한 기준에 언제나 자신이 미달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고, 연애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 만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실망도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절은 남성 탈락 혹은 ‘도태’의 공포와 결합하면서 히스테리적 양상을 띤다. 예컨대 많은 추천을 받은 ‘개념글’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을 보자. 이 글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을 전제한다. 그 논리는 유사과학적인 사회진화론에 의존한다. 작성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자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상정한 뒤 현대 사회가 이 자연적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는 남성을 여성화하고, 여성을 남성화한다. 그리고 이 ‘역전현상’의 가장 큰 책임은 페미니즘에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작성자가 모든 책임을 페미니즘에만 돌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남성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디시 레드필 갤러리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 일부

작성자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논리에 말려들어 스스로 ‘여성화’되었고, 심지어 여성을 부러워하며 여성처럼 되려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비방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남성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 작성자는 그 불안을 페미니즘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지만, 동시에 남성 내부의 붕괴와 배신을 문제 삼는다. 이 게시물의 요지는 영미권 인셀 커뮤니티에서 발견되는 ‘질 선망(vagina envy)’의 논리(코플런드, 2025, 129)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인셀 담론에서 일부 남성들은 여성이 성적 선택권과 사회적·성애적 관심을 더 쉽게 획득하고 누린다고 믿으며, 그 조건을 혐오하는 동시에 부러워한다. 여성은 경멸의 대상이면서 질투의 대상이고, 남성은 (자연적으로) 우월해야 하는 존재이면서 (현대 사회에는) 이미 상실과 실패에 노출된 존재로 여겨진다. 「남성성, 여성성, 그리고 역전현상」의 작성자 역시 유사한 모순 속에 있다. 그는 여성화를 저주하지만, 바로 그 여성화에 대한 강박적 상상을 멈추지 못한다. 이때 히스테리는 외부의 적을 향한 공격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남자는 무엇인가”, “왜 남성은 더 이상 남자답지 못한가”, “나는 아직 남성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불안한 담론 형식으로 나타난다.1

줄리엣 미첼(2025)이 남성 히스테리를 논하며 지적하듯 히스테리는 오랫동안 여성만의 병이나 증상으로 잘못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안정적인 상징적 위치를 상실하고 히스테리에 노출될 때 다시 한번 미묘한 전도가 일어난다. ‘히스테리는 곧 여성적인 병’이라는 여성혐오적 편견 때문에, 여성 히스테리증자는 ‘여성적인 여성’이라는 묘하게 매혹적인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반면, 남성 히스테리증자는 “부정적인 극점”에 위치하게 된다(같은 책, 37). 즉 남성이 남성성에서 탈락할 것 같다는 불안으로 히스테리적 증상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남자답지 못한 남자’라는 낙인 아래 더 매력적이지 못한 남성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레드필 갤러리에는 종종 (‘어그로’라고 할 수 있을) 조롱과 비방이 올라온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못생기고 능력이 없어 여성을 만나지 못하는 남자들이라는 도발 혹은 자조가 반복된다.

레드필 갤러리의 자기계발 담론은 ‘잔인한 낙관’(벌렌트, 2024; 코플런드, 2025)의 형식을 취한다. 운동을 해라, 돈을 벌어라, 외모를 개선해라, 말투를 바꿔라, 여성의 본성을 이해해라, 게임의 법칙을 배워라. 표면적으로 주체를 성장시키려는 조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악순환을 강화할 뿐인 명령들이다. 실패는 언제나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오고, 위로와 돌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좌절 때문에 커뮤니티에 들어온 남성들은 그곳에서 연대를 얻기보다 더 심한 자기학대와 타인학대의 언어를 배우게 될 뿐이다. 이 점에서 레드필 담론은 극도로 신자유주의적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끔찍한 파행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레드필 담론은 모든 관계의 실패를 자기관리의 실패로 환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거절하는 여성과 사회 전체에 대한 출구 없는 르상티망을 증폭시킨다. 그 때문에 히스테리적 질문은 하나의 악순환이 된다.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성들은 왜 나쁜가?”로 바뀌고, “왜 나는 바람직한 삶에 도달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사회는 왜 남성을 버렸는가?”로 바뀐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의 반복 자체가 커뮤니티를 유지한다. 부재하는 답은 더 많은 불만과 적대의 출발점이 된다. 코플런드가 지적한 것처럼 이 경로의 끝에는 극단적 허무주의와 폭력의 가능성이 있다(코플런드, 2025, 215 이하 참조). 모든 관계가 게임이고, 모든 실패가 자기 책임이며, 여성은 구조적으로 자신을 거부하도록 설계된 존재라고 믿게 될 때, 주체에게 남는 것은 냉소, 절망, 혹은 폭력적 환상뿐이다. 이 점에서 레드필 담론은 외로움과 인정 실패가 어떻게 극단적 여성혐오와 자기파괴적 정동의 악순환에 교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7. 결론: 평범함의 모순과 그 출구

이 글은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라는 세 가지 감정의 조합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아마 이 글에서 다룬 대부분의 문제는―문제마다 맥락과 정도가 다르겠지만―청년 여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오늘날 여성들 역시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년 남성들이 유독 우익 포퓰리즘의 선동에 취약한 듯 보이고, 더 극심하게 우경화 혹은 ‘반민주당화’된 것처럼 보이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이 남게 된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대답은 그것이 전통적인 남성성 수행의 실패, 혹은 부담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수현(Lee, 2025)의 분석은 이러한 대답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불안정성이 곧바로 안티페미니즘을 낳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불안정해지는 노동시장과 전통적인 가족·결혼 규범의 충돌이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고, 결혼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여전히 ‘정상적인 삶’의 기준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실현할 물질적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특히 남성은 여전히 많은 경우 가족의 주된 생계 부양자가 되어야 한다고 기대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의 불안정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남성으로서의 자격과 정상적인 생애 계획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경험된다. 안정적인 취업과 결혼, 가족의 부양 등을 해내지 못하는 상황은 일부 남성에게 ‘남자구실’(안희제, 2026)을 하지 못했다는 수치와 좌절을 안겨준다. 즉 경제적 불안정성이 전통적인 남성성 규범 혹은 지위 기대와 결합하기 때문에 ‘젠더화된’ 상실로 경험된다는 것이다.2

그러나 아마도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과 전통적인 남성성 규범의 충돌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청년 남성들의 문제를 전통적 남성성의 잔존과 실패로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브리지스와 파스코(Bridges and Pascoe, 2014)가 제시한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오늘날 특권적 남성성이 과거에 여성성이나 종속적 남성성과 결부되어 온 감수성, 외양, 수행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남성성과 거리를 두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3 부드러움과 친근함, 꼼꼼한 외모 관리와 풍부한 감정 표현 등은 더 이상 남성성에서의 이탈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기관리 능력, 성적 매력, 문화적 세련됨과 대중적 친밀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남성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하이브리드성을 이준석의 ‘두 가지 이미지’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레드필 담론조차 전통적 남성성으로의 단순한 복귀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 담론은 여성화된 남성을 비난하면서도 외모와 몸, 말투와 감정을 세밀하게 관리하고 자신을 연애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레드필의 ‘알파남’은 가부장적 가장인 동시에 자신의 몸과 이미지, 감정과 관계 방식을 끊임없이 최적화하는 기업가적 주체다. 전통적인 지배적 남성성이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과 자산 관리 담론과 결합하여 ‘하이브리드적’ 형태로 갱신된 것이다. 반대로 보면 이 현상은 전통적 남성성이 불가능해지거나 적어도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환경에 남성들이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년 남성들의 불안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현실이 전통적인 남성성 수행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성’ 자체가 일관된 표지를 잃고 너무 많은 요구를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오늘날 어떤 청년 남성들은 가부장적 지위와 경제적 우위를 여전히 욕망하는 동시에 매력적인 성애적 대상이 되기를 또한 욕망한다. 따라서 그들은 남성성을 점점 더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충족하기 힘든 명령으로 경험하며, 그 때문에 불만과 질투, 르상티망이 축적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혼란과 부담이 “진짜 남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남성인가?” “내가 욕망 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즉 대타자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와 같은 히스테리적 질문을 반복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큰 틀에서 보면,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를 역동적으로 흘러 다니는 이 다양한 감정과 질문의 밑바탕에는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균열이 있다. 그것이 평범 위(지도자 혹은 ‘알파남’)에 대한 선망과 평범 아래(소수자, 약자)에 대한 증오를 함께 낳는다. 일베의 “평범 내러티브”는 평범한 삶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타자에 대한 증오를 격화하고 타인의 인정 요구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레드필 담론은, 평범한 남성들은 여성에게 버림받거나 이용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대한 반응으로 모든 측면에서 뛰어난 ‘알파남’에 대한 선망을 구성한다. 이곳에서 남성의 몸은 끊임없는 단련과 가꿈을 통해 힘겹게 축성해야 하는 무엇이며, 페미니스트 여성과 여성화된 남성은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침입자 혹은 내부의 배신자로 표상된다. 이는 적어도 일부 청년 남성들에게 ‘남성성’이 안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경험되지 않고 극도로 불안정한 무엇으로 여겨짐을 반증한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의 ‘조직화’와 ‘이준석 현상’은 “성실히 살아온 평범한 남성들이 부당하게 손해를 보고 있다”는 서사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 서사적 접합의 반대편에는 페미니스트, 민주당, 86세대, 이민자처럼 평범한 청년들의 몫을 위협하거나 배신한다고 여겨지는 적이 놓인다. 이준석은 이미 존재하던 청년 남성 집단을 단순히 대변한 것이 아니다. 안티페미니즘, 공정, ‘역차별’에 대한 분노, 반민주당이라는 상이한 요구를 하나의 연쇄로 묶고, 그 연쇄를 ‘이대남’이라는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세력으로 구성된 것이다. 무주택 청년의 요구와 자산 소유자의 요구, 불안정 노동자의 요구와 능력주의적 경쟁의 수혜자가 되려는 욕망, 군복무에 대한 불만과 여성정책에 대한 적대는 처음부터 동일하지 않다. 이질적인 요구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연결되려면, 그것들이 모두 같은 적 때문에 좌절되었다는 서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펨코가 이준석으로 ‘단결’할 때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적대는 필수적이었다.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은 평범함의 안정성과 통일성―성실하고 선량한 다수 시민의, 규범적이고 안전하고 무탈한 삶―을 복구하겠다는 환상적인 약속을 통해, 어떤 타자성(소수자, 약자, 이민자)을 배척하는 한편 다양한 차이(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이)를 포섭한다. 안정된 일자리, 자기 명의의 주거, 연애와 결혼, 가족의 형성, 사회적 인정, 정치적 대표와 같은 상이한 요구들은 모두 ‘평범한 삶’이라는 말 아래 연결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도시의 아파트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정된 직장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성애적 연애와 결혼이 평범한 삶의 조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경우 평범함은 도달하기 힘든 정상적 삶의 이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평오’나 ‘베타남’, ‘5의 여자’4 같은 말들이 보여주듯이 평범함은 경멸받는 이름이기도 하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평범함은 끊임없이 새롭게 채워지고 그 경계가 다시 그어지는 정치적 기표가 된다.5 이는 거꾸로 말해 평범함이―역설적이게도―격한 정동을 생산하는 비범한 모순의 장소라는 뜻이다.

사회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호명하고 전통적인 페미니즘이 여성을 호명한 것과 달리, 포퓰리즘은 (적이나 희생물이 된 타자를 제외한) 모든 정체성에, 즉 평범함에 호소한다. ‘평범함’이 무엇이든 포괄할 수 있는 모순되고 불안정한 개념이라는 사실 자체가 포퓰리즘의 한없는 가능성이 된다. 평범함이 불안정한 것, 모순된 것, 위협받는 것으로 여겨질수록 평범함의 안정성과 통일성을 복구하겠다는 극우 포퓰리즘의 호소력은 더욱 커진다. 이는 또한 20세기의 파시즘과 오늘날의 극우 포퓰리즘 사이에 있는 차이점 하나를 설명한다. 20세기의 파시즘과 달리, 오늘날의 극우 포퓰리즘은 강렬한 반자본주의적 지향과 신화적 요소, 웅장한 미학을 동원하지 않고도, 평범한 삶을 수호하고 복구한다는 극히 ‘소시민적’인 약속만으로 추동될 수 있다(Toscano, 2023; Toscano et al., 2024).6 평범함이 모순되며 힘겨운 것으로 경험되는 데는 성장의 정체, 경제의 전반적인 금융화(서영표, 2021; 이승철, 2023; 김명수, 2024),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 등 구조적 요인이 있다. 그러나 극우 포퓰리즘은 그 복잡한 구조적 요인을 무시하고, 불안과 울분을 특정한 집단에 투사하여, 그 집단들만 배제한다면 안정적인 평범한 삶이 가능하리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균열에서 기인하는 정동적 에너지는 다른 정치적 움직임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라클라우(2026)의 논의가 보여주는 것은 포퓰리즘적 접합이 필연적으로 우익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어떤 요구도 처음부터 특정한 정치적 방향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요구들의 연결 방식과 그것을 대표하는 이름을 둘러싸고 언제나 정치적 경합이 벌어진다. 따라서 관건은 감정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게 아니라 감정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고 있는지 통찰하고,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감정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커뮤니티의 남성들을 변호하기 위해서도, 단순히 비방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이러한 통찰과 상상을 위한 시도다. 이 감정들을 어떻게 다르게 조직하거나 해소할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한,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발흥에 제대로 맞설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정책이나 방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당위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를 제안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선 이 ‘감정 구조’에 대한 단순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청년 남성들의 말을 이해하고 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처벌하고 온라인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온정주의와 엄벌주의라는 이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이 감정의 흐름이 이미 곳곳에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공격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무시한다. 후자는 이 감정들이 어떤 사회적 불안, 인정 실패, 탈락의 공포 속에서 생겨나는지 충분히 헤아리지 않는다. 물론 괴롭힘, 신상 털기, 테러 예고, 협박과 폭력 선동에는 명확한 금지와 제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처벌만으로는 사람들이 왜 그러한 커뮤니티에서 즐거움과 소속감, 심지어 세계에 대한 설명을 얻는지에 답할 수 없다. 만약 커뮤니티를 떠나는 일이 자신이 의존하는 사회적 관계나 소속감, 세계를 설명하는 서사를 잃는 일이 된다면, 설령 혐오의 언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능한 ‘출구’는 무엇인가? 출구는 잘못된 신념의 포기가 아니라 다른 관계, 다른 연결, 다른 서사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어야 한다. 우선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남성들이 취약함과 질투, 외로움과 불안을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투사하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 관계와 모임, 상담과 교육의 공간이 필요하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 통용되는 ‘여성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은 분명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경험 없이 커뮤니티에서 ‘사회’를 경험하는 일부 청소년·청년은 그러한 생각에 공감하거나 영향받을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처방은 청소년·청년 들이 다양한 정체성이 섞인 집단과 사회적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인식하고 다르게 말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적절하게 표현된 질투는 르상티망으로 곪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것보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편이 낫다. 둘째로 정치적 차원에서는 다른 대표성과 언어를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펨코와 이준석 현상이 보여주듯, 르상티망은 적절한 상징적 대표를 만날 때 일정하게 조직화될 수 있다. 물론 이준석의 대변은 청년들의 혐오와 증오, 차별 의식을 공정과 자유를 앞세운 정치적 언어로 묶어낸 위험한 승화다. 그러나 그 사례가 보여주는 현실적 교훈이 있다. 대변하고 공감하는 아이콘이 없을 때 르상티망은 더 어둡고 공격적인 충동이나 음모론으로 흐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르상티망을 비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표성, 다른 애착의 대상, 다른 정치적 언어를 마련하는 일이다. 현실적인 관건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여성혐오나 음모론이 아닌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 ‘약간 더 나은 아이콘’과 제도적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나쁜 아이콘을 해체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은 아이콘을 생산하고 구축하는 일도 필요하다. 어쩌면 충전된 르상티망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라’는 정치적 요구로 접합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 평범함을 더 쉽게 획득하게 만드는 것과 평범함의 강제를 약화하는 일이 함께 요구된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안정된 주거와 노동의 보람, 돌봄과 사회적 관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평범한 삶의 물질적 조건은 보편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입시, 취업, 결혼, 가족 부양, 주택 소유 등으로 이루어진 특정한 생애 경로가 정상적인 삶의 기준처럼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살 만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지만, 그 조건 위에서 살아갈 삶의 형태가 좁은 기준으로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평범한 삶을 원하고, 평범한 삶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항구적인 압력 속에 있으면서도 평범함에서 이탈하거나 미달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주체들은, 결국 한편으로는 파시즘적 지도자를, 한편으로는 배제해야 할 타자를 찾게 된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정상적인·규범적인 삶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완화하고, 평범한 궤를 이탈한 삶 역시 ‘살만한 삶’(버틀러·보름스, 2024)이 되게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훨씬 타협적으로 말하자면,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충분히 평범한 삶’이라고 느끼고 만족할 수 있게 만들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 평범하지 않아도 이미 괜찮다고 느낄 만큼 운이 좋고 자유롭다면, 또 삶 속에서 평범함이라는 환상을 가로질러 비판할 만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면, 계속 그렇게 살기 위해 “옹고집을 부리는”(아도르노, 2005, 35)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일일 테다.

(끝)

  1. 여기서 히스테리를 설명하는 라캉의 도식(Lacan, 2007)을 이 갤러리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레드필 갤러리에서 ‘분열된 주체’는 자신이 남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불안한 이용자이고, ‘주인기표’는 알파남(혹은 진짜 남성)이다. 주인기표를 위해 생산되어 주체에게 제공되는 ‘지식’은 하이퍼가미 이론, 연애시장론, 여성과 남성의 ‘급’을 나누는 평가 기준 등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감추고 있는 ‘진실’은 인정과 친밀성의 결핍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다. 레드필 이론은 남성성의 위기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실제로는 “나는 충분히 남성적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가동할 뿐이다. 알파남과 베타남, 하이퍼가미, 연애 시장의 법칙 같은 이론은 분열된 주체의 요구에 응하여 생산된 지식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주체에게 안정적인 남성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성을 외모, 돈, 지위, 행동력이라는 여러 지표로 세분하면서 주체가 언제든 ‘남성’의 자격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을 강화한다. ↩︎
  2. 반면 여성 대학 진학률과 취업률의 증가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형식적 평등의 진전은, 여전히 실질적 차별과 유리천장이 엄존함에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전에 차단되었던 가능성이 확대되는 과정으로 청년 여성들에게 경험될 수 있다. 또한 2010년대 중후반의 대중적 페미니즘은 청년 여성들에게 불만을 개인적 실패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번역하는 언어와 집합적 실천의 기억을 제공했고, 연대의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청년 남성들에게는 그러한 연대와 변화에 대한 상상력과 의지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박권일, 2024). 청년 남성이 이용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집합적 언어는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이었다. ↩︎
  3. 하이브리드 남성성이 단순히 전통적 지배를 갱신하는 보수적 현상만은 아니다. 브리지스와 파스코는 그것이 흔히 불평등을 은폐한다고 비판하지만, 모든 유연한 남성성의 수행이 자동으로 지배를 강화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변화의 가능성도 내포하는 개념이다. ↩︎
  4. 온라인 연애 담론에서 연애 시장 내 가치를 10점 만점의 숫자로 평가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언어는 개인의 매력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남녀 모두를 위계화하지만, 특히 여성을 등급화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된다. ↩︎
  5. 라클라우(2026)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치가 아니다. 서로 별개였던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은 채 축적되고, 그것들이 공통의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면서 등가 연쇄를 이룰 때 비로소 ‘인민(people)’이라는 집합적 주체가 구성된다. 이때 특정한 요구나 이름은 자신의 원래 의미를 부분적으로 비우고, 서로 이질적인 요구 전체를 대표하는 텅 빈 기표가 된다. 텅 빈 기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라기보다, 특정한 의미로 고정될 수 없는 공동의 결여를 대리하는 말이다. ↩︎
  6. 이는 20세기의 파시즘에는 ‘평범함에의 수호’라는 지향이 없었다거나 21세기의 파시즘에는 웅장한 미학이나 신화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21세기의 파시즘은 그러한 요소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토스카노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시대의 파시즘은 “환멸과 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장 속에서 작동하며, 온갖 종류의 슬픈 정념을 강력하게 응결시킬 수 있지만, 선대의 파시즘과 같은 방식으로 역-혁명적(counter-revolutionary) 삶의 형식들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Toscano et al, 2024, 256). 토스카노는 고전적 파시즘과 21세기의 파시즘 사이에 있는 ‘비유사성’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의 민족 국가 프로젝트나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처럼 고전적 파시즘의 정의에 가까운 사례도 있음을 지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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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2)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4. 르상티망 혹은 평범함의 깊은 균열

르상티망(ressentiment)은 다시 느끼는 감정(re-sentiment), 즉 반복적으로 곱씹어져 곪은 감정을 뜻한다. 흔히 원한으로 번역되는 르상티망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와 극우화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연구들에서 다시 중요한 개념으로 주목받고 있다(예를 들어 Tietjen et al., 2023; Beauregard and Sijstermans, 2025; 특히 코플런드, 2025).

니체는 르상티망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참조되는 철학자다. 니체(2021)는 르상티망의 주요 특징으로 몇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르상티망은 반작용적이고 반응적인 감정이다. 다시 말해 르상티망의 주체는 “나는 훌륭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들은 악하다, 따라서 우리는 선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상대적인 선함을 주장하기 위해 언제나 비방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째, 르상티망은 무력함 속에서 곪은 복수심이다. 직접 행동할 수 없는 주체는 “두고 보자”는 식의 지연된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복수는 가치전도의 형식을 취한다. 강하고 뛰어나며 아름다운 것은 악한 것으로 격하되고, 약하고 상처 입고 억압된 것은 선한 것으로 격상된다.

르상티망 관련 논의에서 마찬가지로 자주 인용되는 막스 셸러(Scheler, 1961)는 니체의 논의를 사회학적으로 확장했다. 셸러가 특히 주목한 것은 ‘자유경쟁 체제’와 민주주의 체제에서 르상티망이 악화되는 경향이다. 명목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해지는 사회에서 실제 불평등은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불평등의 간극이 클수록 르상티망은 격화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셸러는 현대 사회에서 르상티망이 평범한 자의 감정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평범한 자와 대비되는 고귀한 자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결국 르상티망은 현대 사회에 만성적인 감정이 된다.

셸러는 이러한 일반적 고찰에서 더 나아가 “중요한 사회학적 법칙”도 도출한다(Ibid., 50). 르상티망이라는 “심리적 다이너마이트”는 “한 집단의 정치적·헌법적·전통적 지위와 그 집단이 실제로 지닌 힘 사이의 불일치”가 클수록 더 강력해진다. 이 통찰은 왜 오늘날 르상티망이 (여성보다도) 청년 남성의 특징처럼 보이게 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남성은 전통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보상, 더 큰 사회적 인정을 기대하고 추구하도록 훈련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청년 남성은 노동시장, 연애, 주거, 결혼, 가족 형성 등의 영역에서 기대한 만큼의 힘을 갖지 못한다고 느낀다. 전통적 지위와 실제 힘 사이의 간극이 커지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신티아 플뢰리는 (셸러를 참조하며) 어떤 “역전 현상”을 짚어낸다. “이제 르상티망을 지닌 이가, 여성해방의 초기 성과들을 확인하는 데[…] 몰두한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 셸러의 수식어를 빌리자면 ‘평범한’ 남성들로 바뀌어가는 역전 현상이 상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플뢰리, 2026, 48–49). 셸러의 글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 르상티망은 흔히 차별받고 소외된 집단, 가령 유대인, 장애인, 노인, 특히 여성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성해방의 초기 성과들을 확인”함으로써 정치적 효능감을 느낀 여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과 하락을 경험하는 ‘평범한’ 남성들이 르상티망의 주체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요점은 남성들이 실제로 약자라거나 차별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이 자신이 누려야 한다고 여기는 지위와 실제로 경험하는 힘 사이의 간극 속에서 불안과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는 것이다.1

이 지점에서 셸러가 지적한 ‘평범함’이라는 개념을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셸러는 르상티망을 평범한 자의 감정이라 주장했는데, 고귀한 자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정립하는 것과 달리 평범한 자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치를 체험한다. 즉 평범한 자는 어떤 가치를 세우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타인보다 더 많이 갖기를 원할 뿐이다. 물론 셸러의 이러한 주장은 니체식 귀족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지금 우리의 관건은 고귀한 자와 평범한 자를 선명하게 나누는 귀족주의를 답습하지 않으면서, 평범함에 대한 셸러의 통찰을 논리학적으로 수정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어받는 통찰은 ‘평범한 자는 무능한 자’라는 편견이 아니라, 평범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떠한 실정적(positive) 특징으로도 규정될 수 없기에, 평범함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질적인 것과의 비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다.2 언제나 불안정한 것,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는 것,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평범함이다.

그 외연과 내포의 커져 가는 불일치를 고려하면, 오늘날 평범함은 대단히 모순적이고 기이한 개념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평범한 삶은 점점 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표상된다. 만약 서울의 4년제 대학을 다니는 것이 ‘평범한’ 것이라면, 평범함을 위해서는 성적이 ‘평균 이상’이어야만 한다. 만약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평범한’ 목표를 위한 조건이라면, 그 조건에 부합하는 청년은 소수일 것이다. 반대로,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평오’(국민 수능 평균은 5등급) 같은 표현은 오늘날 평균이 얼마나 쉽고 당연하게 경멸의 대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평범함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모욕의 이름이다. 이 심대한 모순은 평범함 자체가 실정적 특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평범함은 때로는 규범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일컫고, 때로는 막연하게 평균이나 다수를 지칭하며, 때로는 개성 없는 것, 권력을 결여한 것, 뛰어나지 않은 것, ‘서민적’인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누구나 평범함에 속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을 나오고,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평균 이상의 자산을 축적하며, 휴가철에는 해외여행을 다니고, 적당한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하는 ‘바람직한’ 생애 경로를 무리 없이 밟는 사람도 스스로를 ‘서민’이라고 부를 수 있다(그러면서 재벌이나 정치인 등 ‘특권층’과 자신을 대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고 복수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산을 전혀 축적하지 못하는 20대 후반 청년의 삶 역시 ‘평범한’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 이렇듯 평범함은 너무 많은 차이를 뭉뚱그려 지칭하는 헐거운 고무줄 같은 개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주체가 평범함과 맺는 관계는 항상 불안정하며, 이 불안정성은 특히 극심한 경쟁과 비교 속에서 숙성될 때 르상티망의 비옥한 양분이 된다.

한마디로 오늘날 평범함은 도달하기 힘든 것이면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응답하라〉와 같은 TV 시리즈에 소박하고도 환상적으로 그려지는,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서민’ 가장의 삶은 오늘날 많은 청년 남성에게 너무 힘겨운 꿈으로 나타난다. ‘평균적’인 삶만 살아서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거나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은 청년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 역시 경험하는 것이다.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청년들은 평범함(‘정상적인’ 삶)에서 탈락할까 봐 불안하고, 동시에 평범함(평균, 개성 없음, 뛰어날 것 없음)으로 환원될까 봐 불안하다. 그러나 탈락하거나 뒤처질 것 같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나 우울 역시 누구나 겪는 ‘평범한’ 고통이기에, 그 고통을 특별히 인정받기도 어렵다. 청년들을 이중구속으로 몰아넣는 이 모순이 만성적인 수치심, 열등감, 분노, 우울, 무기력을 낳는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거기서 오는 수치심과 열등감, 질투와 불안이 무기력한 시간 속에서 곪아 르상티망이 된다면, 자신이 평범함에 속한다고 체념하는 동시에 평범함에 미달한다고 불안해하는 것만큼 르상티망이 자라나기에 좋은 조건은 없다.

이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모순이 사회 문제이자 증상으로서 ‘일베’를 낳은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추론할 근거가 있다. 김학준은 일베에 대한 양적 연구와 질적 분석을 결합하고 있는 『보통 일베들의 시대』(2022)에서 일베 멘탈리티의 중요한 축을 “평범 내러티브”라는 말로 묘파했다. 이 내러티브에서 타인의 고통은 “누구나 그 정도는 겪는다”는 말로 환원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이 야기하는 불안이나 모멸감은 누구나 겪는 것이기에, 그 때문에 체제를 비판하거나 변화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김학준이 옳게 지적했듯 일베 유저들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평범한 순응자들이었다(같은 책, 195 이하 참조). 그들은 인정이나 변화를 요구하는 약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이 불안을 버티면서 사는데 너희는 왜 자꾸 무언가를 더 요구하냐?’ 고통을 참아낸 생존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면서 타인의 고통 호소는 과장이나 떼쓰기로 취급하는 것이다. 평범 내러티브는 이중의 규율, 즉 ‘평범함에 만족해야 한다’와 ‘내가 견뎠다면 너도 견뎌야 한다’는 규율로 요약된다. 이 내러티브는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까지 억압한다. 약자와 소수자의 인정 요구는 “왜 너만 특별 대우를 받으려 하느냐”는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 내러티브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평범함 자체가 너무나 힘겨운 것으로 체험됨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평범 내러티브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평범함’ 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되었음을 암시한다”(같은 책, 261). 평범하고 규범적인 삶에 대한 일베의 도착적 갈망, 또 ‘평범 이상’을 요구하거나 다수의 평범한 삶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증오는 평범함 자체의 불안정성과 모순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평범 네러티브”는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모순을 소화하는 일베의 방식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베에만 국한된 멘탈리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준석은 2019년 맥심에서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대중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달라요’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이 방식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 당황스러운 거다. 그들 목소리를 들어보면 ‘이렇게 안 하면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인데, 내가 봤을 때는 너무 단기적인 성과를 내려는 것 같다. 그리고 성평등 운동은 보통 ‘우린 다르지 않아’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격한 행동파 운동은 ‘우릴 봐줘’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박정훈, 2019에서 재인용)

많은 청년 남성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이준석의 페미니즘 비판에는 “평범함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규범이 강하게 깔려 있다. 또한 관심이나 인정을 요구하는 약자에 대한 반감도 선명하게 깔려 있다. 이렇듯 약자의 인정 요구는 특권 요구로 치부되고, 공정한 경쟁 질서를 교란하거나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에 대해 이준석이 “공공을 인질로 잡은 투쟁은 연대가 아니라 인질극”(한예섭, 2025에서 재인용)이라고 비방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에도 이준석은 교통권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매일 출근하는 성실한 보통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를 위협한다는 생각을 조장하거나 재생산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로 내세우는 동시에 소수자를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이다. 아마 남성들이 과거에 있었다고 가정된, 안정적인 ‘평범한 삶’이라는 환상에 여성보다 더 많은 욕망을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동에 더 취약하겠지만, 꼭 ‘이성애자 남성’만이 ‘그들만 없다면 평범한 삶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혐오의 약속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준석이 여성정책과 페미니즘, 장애인 운동을 비방하면서 ‘평범한’ 청년 남성들의 대변자를 자임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르상티망과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평범함은 어떤 실정적인 특징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을 규정할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즉 평범함이 안정화되려면 ‘평범하지 않은’ 타자가 필요하다(바타유, 2022 참조). 한편으로 평범함은 안정화되기 위해 자신을 대변하고 종합해 줄 우월한 타자(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평범함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평범의 경계를 확정해 줄 열등한 타자(소수자, 약자, 이민자 등)를 필요로 한다. 평범함은 우월성에 기대어 자신을 대변 받고, 열등성에 비추어 자신을 식별한다. 오늘날 평범함의 모순과 균열이 르상티망을 배양한다면, 이렇게 축적된 르상티망은 적을 만들어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평범함의 환상적인 통일성을 복구하려 한다. 우익 포퓰리즘 정치인은 바로 그러한 약속을 통해 세를 불리는 것이다.

5. 조직화: 펨코와 정치적 승화

질투와 르상티망은 커뮤니티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접합된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는 청년 남성의 이질적인 불만이 ‘공정’과 ‘자유’라는 기표 및 이준석이라는 정치적 대표를 통해 제도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절에서는 이러한 접합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어떤 정치적 몸을 구성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펨코는 원래 축구와 게임을 중심으로 네티즌이 모여 성장한 커뮤니티였고, 한때는 비교적 친문재인 성향이 강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9년을 전후로 급격히 ‘반민주당화’되었다(김선영, 2023). 2021년의 한 기사에서 어떤 정치 인플루언서는 이렇게 말했다. “2017년과 2018년만 하더라도 펨코에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더 많았다. 현 정부[문재인 정부]의 실적이 누적되면서 점점 더 변해갔고, 엠팍이나 펨코 그리고 대부분의 남초 커뮤니티들이 반페미 정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준석 현상이 일어나면서 대동단결했다”(정용인, 2021에서 재인용). 2019년경에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은 안티페미니즘과 반민주당 정서가 뜨겁게 결합하는(그럼으로써 친민주당 유저들을 밀어내는) 중요한 경합의 장이 되었다. 펨코의 덩치가 커지면서 정치인 이준석의 존재감 또한 급부상했다. 따라서 질문은 분명하다. 2019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여러 일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조국 사태’다. 조국 사태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정, 계급, 세대, 젠더, 진보의 위선이라는 여러 담론적 요소가 한꺼번에 응축되어 폭발한 사건이었다.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학생들이 모두 반민주당 성향인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의 불만을 단순히 진영논리로 환원할 수도 없으며, 대학생들의 ‘공정’에 대한 요구를 정당하지 않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어와 공격의 구도 속에서 ‘청년’의 정치적 얼굴이 매우 빠르게 구성되었다는 점이다.3 가령 변상욱 앵커와 페이스북에서 설전을 벌였던 백경훈은 스스로를 ‘조국 같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으나 열심히 노력한 청년’으로 소개하며 조국과 민주당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고, 여러 보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예를 들어 고성민, 2019; 고재석, 2019).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위원이 되었다. 이렇듯 청년들의 불만은 물줄기가 홈을 따라 흐르듯 ‘진보’나 민주당에 대한 분노와 반감으로 빠르게 수렴했고, 일련의 언론 매체는 청년들의 억하심정을 자극하고 조명하며 그것을 진영논리의 언어로 번역했다. 당시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이러한 번역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림 2는 〈“입으로만 부르짖는 공정·정의… 진보 꼰대들의 위선이 역겹다”〉(원선우·김영준, 2019)라는 제목의 기사에 실린 도표로, 2016년 ‘최순실 사태’와 2019년 ‘조국 사태’ 때 달라진 ‘친여 인사들’의 발언을 비교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9. 08. 26
“입으로만 부르짖는 공정·정의… 진보 꼰대들의 위선이 역겹다”

이 도표는 최순실 사태에 대해서는 “부정 입학”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한편 조국 사태에 대해서는 “‘황제 입시’ 논란”이라는 논쟁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조국을 둘러싼 당시의 논란이 검찰과 언론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려지고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부정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 그 논란의 추이가 어떤 식으로 청년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결집했느냐이다. 격한 감정을 이끌어 낸 중요한 요인은 조국의 딸 조민이라는 인물의 형상이었다. 엘리트 중년 남성 정치인의 비리는 한국 정치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환멸과 분노를 샀겠지만, ‘조국 사태’가 청년 남성들에게 이토록 강한 감정을 격발한 데에는 조민이라는 또래 여성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다. 조민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논란이 입시나 취업처럼 청년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치명적으로 건드릴 뿐만 아니라, ‘사치하는 여성’이나 ‘무임승차하는 여성’ 같은 오래된 여성혐오적 상상계를 소환하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조민은 조국 사태를 ‘젠더화’하여 수용하게 만든 중요한 형상이었다.

‘조민 포르쉐’ 가세연 명예훼손 무죄…”공적 관심사” / SBS – YouTube 썸네일

예를 들어 ‘가로세로연구소’(이하 가세연)에서 유포한 조민의 ‘빨간 포르쉐’ 같은 허위 소문이 뭇 커뮤니티에 그렇게 빠르게 유통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학교 주차장에 세워진 빨간 포르쉐의 이미지는 질투와 여성혐오를 동시에 자극한다. 그것은 사치하는 여성, 특권을 누리는 여성, 공정한 경쟁 없이 좋은 것을 취하는 여성이라는 오래된 상을 재활용한다. 조선일보 같은 ‘레거시 미디어’가 민주당이나 86세대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와 억하심정을 자극하는 동안, 가세연 같은 유튜브의 ‘황색언론’은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이 시기에 청년 남성들에게 민주당의 이미지는 ‘위선적인 기득권 세력’으로 굳어졌고, 그에 대한 증오가 조민이라는 형상을 통해 오랜 맥락을 가진 온라인 여성혐오와―그리고 부모의 애정과 지지를 독점하는 또래 여성에 대한 질투심과―결합했다. 이 점에서 2019년은 촛불에 대한 백래시가 새로운 담론적 연합을 구성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조국 사태는 86세대, 진보, 민주당, 페미니즘, 엘리트 여성에 대한 질투와 르상티망을 하나의 정치적 정동으로 묶어낸 사건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그토록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2016년 최순실과 정유라를 둘러싼 부정 입시 논란이 촉발한 이화여대 시위가 거대한 ‘촛불’로 번져 나간 것―그리고 응원가로 Kpop을 트는 등 ‘청년 여성’의 시위 문화가 광장에 일반화된 것―에 대한 백래시로서, 2019년 조국과 조민을 둘러싼 논란은 거대한 반동적 담론의 연합을 만들고 그 주축으로 ‘청년 남성’을―더 정확히 말해, 청년 남성의 한쪽 얼굴을―조명했다.

특혜를 누리는 또래 여성에 대한 질투, 위선적인 86세대와 민주당에 대한 증오, 자신을 이끌거나 대변해 주지 않는 부모 세대에 대한 실망. 홍수처럼 불어난 이 부정적 감정이 어떤 정치적 을 이루게 되었는가? 이 시기 이준석의 행보를 살펴보자. 이준석은 2018년 ‘여성할당제’를 둘러싼 토론에서 김지예 변호사와 선명하게 대립함으로써 일약 청년 남성들의 대변자로 떠올랐다. 곧이어 2019년 여름에 이준석은 본인의 인터뷰가 실린 《맥심》의 표지에 등장했는데, 《맥심》이 젊은 남성들을 타겟으로 하는 잡지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준석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남성들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이리예, 2025). 맥심의 표지에서 이준석은 헝클어진 머리에 귀여운 캐릭터 잠옷을 입은 채 등장한다(그림 2). 반면 잡지의 내지에는 번듯하게 수트를 차려 입은 사진이 실려 있다. 이 병존하는 두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듯, 이준석은 ‘평범함’과 ‘우월함’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한편에 수더분한 ‘옆집 형’의 이미지가 있고, 다른 한편에 잘 갖춰진 ‘엘리트 정치인’의 이미지가 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서 그의 저력은 바로 이 두 이미지를 오갈 수 있다는 데서 왔다.4 ‘엘리트 정치인’으로서 이준석은 대변되는 자들(청년 남성들)끼리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했고, ‘옆집 형’으로서는 자신과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남성들의 불만을 제도 정치의 언어로 대변하는 엘리트이지만, 동시에 커뮤니티의 언어를 이해하고, 가까운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으며, ‘준석이’ 혹은 ‘준스톤’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친밀한 애착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 공정 담론, 반페미니즘, 반민주당 정서를 묶어내는 이름이 되었다. 여성정책을 둘러싼 논란과 ‘인국공 사태’ 그리고 조국 사태를 거치며 거대하고 뜨거운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은 ‘공정’이라는 기표는 이준석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 되었다.

《맥심》 2018년 8월호 표지

국민의힘 탈당과 신당 창당을 앞둔 2023년 11월에, 이준석은 자신의 지지자를 결집하기 위해 ‘전국 순회 콘서트’를 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이준석의 콘서트에는 약 1,500명의 지지자가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에는 콘서트에 갔다 왔음을 ‘인증’하는 게시물과 그것을 응원하는 댓글들이 순례길의 신자들 마냥 기나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 게시물 중 하나의 인상적인 ‘인기글’을 보자(그림 3).

펨코 정치시사게시판 2023년 11월 인기게시물

게시물의 글쓴이는 드디어 ‘우리’도 조직화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을 표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이준석을 매개로 모인 청년 남성들이다. 바로 이 ‘조직화’를 통해 르상티망은 자부심으로 전환된다. 자신이 대변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은 자신을 대변해 주는 정치인에 대한 애착으로, 정치적 무력감은 대표되고 있다는 기쁨으로 전환된다. 마치 라캉의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자신의 통일된 이미지(자아 이상)를 보고 기뻐하듯이, 펨코의 유저들은 이준석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정치적 몸으로 ‘조직화’되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이준석에 대한 펨코의 강한 애착과 충성심은 이 전환의 효과로 이해할 수 있다. 펨코가 불만을 정치적 언어로 승화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집단이라면, 그 승화의 탯줄이 바로 이준석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의 게시물은, 냉소적으로 ‘팩트’를 내세우며 감상적인 ‘좌파’를 비웃고 비방하는 펨코 유저들(‘펨붕이’들)이 얼마나 ‘감정적’인지를, 좌파와 페미니스트의 ‘선동’과 ‘떼법’을 조롱하는 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이준석의 확장 행보를 둘러싸고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정의당 의원이었던 류호정과의 ‘제 3지대’ 연합설이 불거지면서 이준석이 페미니즘에 ‘오염’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불거졌던 것이다.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추천을 받은 인기글과 거기에 달린 일련의 댓글을 보자.

펨코 정치시사게시판 2023년 11월 인기게시물
위 게시물의 댓글

게시물은 이준석이 ‘래디컬 페미니즘’과 선명하게 대립한다는 증거로 이준석이 책에 쓴 문구를 제시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다. 사진상 첫 번째 댓글은 ‘안티페미니즘’을 “좌파의 반지성주의와 자유 탄압에 대한 저항의 정신”으로 거창하게 의미화한다. 거기에 달린 대댓글은 페미니즘에 신중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유주의’라는 이념에 입각해 극단적인 안티페미니즘·여성혐오(신남성연대 등)와는 선을 긋고 있다.

이처럼 펨코 이용자들은 자신을 일베나 신남성연대 같은 ‘극단적 여성혐오’ 집단과 구분하며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유주의자’로 정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김선영(2023)은 펨코의 안티페미니즘이 일베식 여성혐오와 다르며, 그 근저에는 공정 담론과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있다고 분석한다. 즉 여성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를 무턱대고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한 신자유주의적 논리 하에 여성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선영의 분석은 일리 있지만, 한편으로는 펨코의 자기 정체화를 너무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기도 하다. 앞서 보았듯, 온라인 안티페미니즘은 공정 감각 자체에 영향을 미쳐 왔고, 반대로 공정 담론은 안티페미니즘을 정당화해 왔다. 따라서 안티페미니즘보다 능력주의가 더 근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 요소는 어느 하나가 더 근본적이라기보다 상호 구성적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엄혜진, 2021; 2024).

대신 일베와 변별되는 펨코의 특징은 일련의 감정들이 ‘공정’이나 ‘자유주의’처럼 외견상 합리적인 정치적 언어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질투와 르상티망이 깔려 있지만, 동시에 이용자들은 자신들에게 정도와 이념이 있으며,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있는, 합리적인 집단이라는 자신감을 갖는다. 바로 이 자신감이 히스테리로부터 그들을 방어해 준다. 2026년 지방선거에서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이준석은 ‘부정선거론’과 분명히 선을 그었으며, 마찬가지로 선관위와 정부의 큰 실책이지만 부정선거는 아니라는 것이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의 여론이다. 물론 부정선거 쪽으로 기우는 목소리들도 없지 않지만,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게시글에는 흔히 이준석의 발언을 참조하는 반박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이준석이라는 아이콘이 청년 남성들에게 미치는 이중적인 효과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분명 이준석은 여성·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 반민주당 정서를 대변하며 정당화하는 인물이지만, 바로 그 대변을 통해 청년 남성들을 더 어둡고 공격적인 음모론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이 ‘승화’는 불안정하다. 그것은 분열, 좌절, 폭력적인 충동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2026년 봄 지방선거를 앞두고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에서는 개혁신당에 표를 줄 것인가, 국민의힘에 표를 줄 것인가를 두고 격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는 펨코의 정치적 정체성이 긍정적 비전보다 반민주당, 반페미니즘, 반86세대 등 부정적 정서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어떤 당이나 공약을 지지하는 것보다는 ‘민주당이 잘 안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 이준석에 대한 애착이나 관심도에 비해 개혁신당에 대한 관심도나 애정은 현저히 낮다. 이준석에 대한 펨코의 애착은 그만큼 단단한 정치적 기반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대표받는다는 감각이 약해지거나 정치적 실패가 누적될 때, 조직화된 르상티망은 다시 해체되어 분산된 충동으로 붕괴할 수 있다.

(3)에서 계속

  1. 이는 마이클 키멜(Kimmel, 2013)이 말한 ‘억울한 특권의식(aggrieved entitlement)’과도 연관되는 생각이다. ↩︎
  2. 이 인식에 중요한 참조점이 되는 사상가는 조르주 바타유다. 바타유(2022)가 파시즘의 심리 구조를 분석하면서 말했듯, 동질성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질적인 것에 의존한다. 바타유는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는 “동질적 사회의 무능력”(같은 책, 38)이 파시즘이나 권위주의를 불러오게 된다고 분석한다. ↩︎
  3. 그 당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부모의 기대, 즉 당위적으로는 ‘평등’이나 ‘진보’를 말하면서도 자식에게는 경쟁의 승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부모의 이중성에 대한 청년들의 성토가 주목과 호응을 끌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조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에는 부모 혹은 부모 세대에 대한 분노가 전이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4. 『포퓰리즘 이성』의 흥미로운 대목(라클라우, 2026, 98-104)에서, 라클라우는 프로이트의 ‘집단심리학’을 참조하며 동일시의 두 가지 경우를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사령관과 병사들의 경우처럼 지도자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는 경우로, 이때 동일시는 동등한 형제들 사이에 이루어지며, 그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다. 두 번째는 지도자가 “동등한 자 중 첫째”(103) 즉 맏형인 경우인데, 이때 지도자는 전자와 같이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동시에 동일시하는 형제들에 스스로 속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지도자는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바로 그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지도자의 정체성은 아버지이면서 형제 중 한 명으로 분열된다”(104). 이는 이준석이 갖는 ‘두 가지 이미지’가 갖는 포퓰리즘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논의로 보인다. 지도자의 이중성에 대한 라클라우의 논의는 브릿지와 파스코가 말한 ‘하이브리드 남성성’(Bridges and Pascoe, 2014)과도 연관될 수 있다.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고전적인 ‘헤게모니 남성성’ 담론이 갖는 일면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즉 오늘날 특권적 남성은 단순히 전통적 남성성이 요구하는 강인한 마초적 성격만 갖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친밀하며 탈권위적인 면모를 함께 가질 수 있다. 이준석이 ‘엘리트 정치인’과 친밀한 ‘옆집 형’의 이미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하이브리드적으로’ 갱신된 포퓰리즘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1)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1. 연구 배경

한국 사회에서 청년 남성의 우경화 혹은 정치적 보수화는 이제 낯선 문제가 아니다. 온라인 안티페미니즘과 민주당 혹은 ‘좌파’에 대한 증오가 결합하는 양상 역시 새삼스럽지 않다.1

온라인 여성혐오 자체는 인터넷의 보급 이후 항상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구한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와 비평가가 분석하고 비판해 왔다. 윤보라(2013)의 연구가 보여주듯, 인터넷 공간에서 여성혐오는 특정 사건이나 세대의 돌출적 현상이라기보다 한국 온라인 문화의 형성 과정과 함께 누적되어 온 문제다. 남성이 약자라는 서사, 이른바 역차별론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수아·이예슬(2017)이 분석한 것처럼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는 남성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여성과 페미니즘을 특권적이거나 위선적인 집단으로 표상하는 담론을 생산해 왔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남성성 규범이 안티페미니즘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분석(김수아, 2022)도 있다.

그럼에도 최근 10년 사이에 지적해야 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온라인 여성혐오·안티페미니즘이 반민주당, 반진보, 반86세대 정서와 단단히 결합하여 하나의 정치적 경향으로 가시화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정치적 현상으로서 ‘이대남’이 정치권과 언론에서 광범위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8년 말엽부터이며, 그것이 선거 정치의 주요 문제로 또렷이 부상한 것은 2021~2022년경이다(김선영, 2023; 김내훈, 2022; Lee, 2025). 2018년 12월 리얼미터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눈에 띄게 하락한 집단으로 20대 남성이 지목되면서 ‘이대남’은 처음으로 언론과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리얼미터, 2018; 또한 고상민, 2018 참조). 곧이어 2019년 봄 《시사IN》의 기획 기사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는 이 집단을 페미니즘과 여성정책에 극히 적대적인 집단으로 식별했다(천관율, 2019). 그러다 2021년 보궐선거에서 20대 남성과 여성의 ‘표심’이 극명하게 갈리면서 청년 남성은 설명되어야 할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거듭 조명받게 됐다(이지혜, 2021). 그간 ‘이대남 현상’ 혹은 그 호명에 대한 많은 비판적 논의(손희정, 2021; 김내훈, 2021; 최성용, 2022)가 이어져 왔으나, 2025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37% 이상이 이준석에게, 36% 이상이 김문수에게 투표한 것으로 드러났고(박영석·김영은, 2025) 청년 남성들이 주축이 된 서부지법 사태 등이 이어지면서 젊은 남성의 보수화 또는 극우화는 부정하기 어려운 사회적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천관율 기자, 시사IN, 2019. 04. 1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44
연합뉴스 2025-06-03
[그래픽] 2025 대선 성별·연령별 출구조사 결과”
https://www.yna.co.kr/view/GYH20250603000500044

청년 남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 현상을 단순히 계급, 젠더, 지역, 세대와 같은 객관적 변수들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러한 변수들은 중요하다. 예컨대 남녀 임금 격차를 보자.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주요국 중 가장 큰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대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조금 다른 그림이 보인다. 박세현·이태(2024)의 분석에 따르면 남녀 임금 격차는 20대에서 가장 작고, 40대와 50대에서 훨씬 크게 나타나며, 60대에서는 다시 조금 줄어든다. 한마디로 평균임금이 높은 중년층일수록 성별 격차도 크게 나타난다. 20대에서 50대로 갈수록 격차가 커지는 현상은 구조적 성차별이나 유리천장의 근거로 보일 수 있다. 처음 일자리를 갖게 되는 20대에서는 남녀 간에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어떤 직군에서는 여성이 우세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이 일을 그만두거나 승진에서 누락되는 등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 통계적 사실은 20대 남성들이 “우리는 이미 거의 평등한 조건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정작 성차별이 가장 심한 40대~60대가 왜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가”라고 반문하는 논리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는 청년 남성의 반86세대 정서, 즉 ‘가장 불공정한 기성세대가 청년 남성에게 도덕적 책임을 전가한다’는 감각과도 연결된다.2 동일한 통계적 사실이 정반대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준석에게 일약 유명세를 안겨준 2018년의 여성할당제 찬반 토론에서, 김지예 변호사와 이준석은 이 지점에서 ‘사실’에 대한 해석을 놓고 충돌했다.

물론 어느 모로 보아도 ‘역차별’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설령 군복무가 청년 남성에게 불리한 제도적 조건이라고 인정하더라도, 20대에서조차 남성은 여성보다 미세하게나마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정책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이미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면 역차별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역차별론은 많은 남성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가? 왜 많은 청년 남성은 자신이 더 많은 짐을 지고 있고, 더 불리하며,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가? 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남성들이 오히려 ‘피해자’나 ‘약자’라는 서사(김수아·이예슬, 2017)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어떤 심리적 현실, 어떤 결여, 어떤 욕망,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과 경쟁에 시달리고, 규범적·정상적 삶에 대한 압력에 짓눌리며, 커뮤니티와 SNS에서 혐오와 비교, 음모론에 노출되고, 너무 크게 오른 집값 때문에 ‘내 집 마련’의 꿈이 좌절되는 등의 문제는 청년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일 테다. 그렇다면 왜 우경화 혹은 ‘반민주당화’(김연희, 2026)는 청년 남성들에게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청년 남성의 감정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복이나 삶의 만족은 학력, 경제력, 직업 안정성 같은 객관적 지표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같은 조건에 놓여 있더라도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는지, 나빠지고 있다고 느끼는지에 따라 주체의 감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또한 누구와 어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어떤 기대와 요구 속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도 삶의 감각과 감수성은 달라진다. 삶에 대한 만족은 단순한 객관적 조건들 속에서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마땅히 누리거나 도달해야 하는 삶’이라는 상상적·상징적 기준과 객관적 조건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 남성들은 ‘마땅히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규범적 기대에―그런 기대가 실체가 있건 없건 간에―부담을 느끼면서 그 기대에 부합하기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한 기대와 욕망이 남아 있고 재생산되는 사회에서 형식적 평등의 진전은 어떤 남성들에게 오히려 박탈과 상실의 경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글은 감정을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고자 하며, 이 점에서 페미니즘과 정동 연구의 문제의식을 따른다. 앤 츠베트코비치(2025)가 말하듯,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공유되며 때로는 정치적 실천의 조건이 된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감정을 “개인과 집단의 몸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아메드, 2023, 24). 특정한 몸에 특정 감정이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몸의 표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감정은 어딘가에 위치 지어진, 누군가와 결속하고 부대끼는, 누군가를 밀쳐내고 배척하는 몸의 경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대상에 역겨움이나 공포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에 맞서 소름이 돋은 피부를, 움츠러들고 경계 태세를 갖춘 몸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는 국가, 민족, 시민, 민중 등을 하나의 집합적 몸으로 상상하거나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몸 역시 어떤 대상을 밀쳐내거나 배제하려는, 감싸거나 보호하려는 감정을 통해 그 형태와 경계를 갖춘다. 아메드를 따라 이 글은 정동과 감정을 엄격히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다.3 대신 감정이 전염되고 전파되며 정치적·사회적 몸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2. 세 가지 감정: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이 글은 감정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한국의 몇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조사·분석과 결합한다. 즉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역동을 감정이라는 렌즈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동시대 청년들의 감수성과 멘털리티를 이해하는 데 커뮤니티의 맥락과 문법, 역동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청년 남성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많은 청년 남성이 커뮤니티를 이용하며 또 커뮤니티의 언어가 청년들의 문화와 감수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연구를 위해 감정에 대한 정신분석학·철학·사회학 문헌들을 살펴보는 한편으로, 커뮤니티에 대한 선행 연구 분석과 함께 일련의 커뮤니티 게시물과 댓글을 수집하고 살펴보았다.4 이 글의 목표는 한국 남초 커뮤니티의 감정 흐름을 큰 틀에서 이해하기 위해 가설적 얼개를 그리는 것으로, 선택적인 사례와 불충분한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글은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세 가지 감정의 조합으로 설명한다. 질투,5 르상티망, 히스테리다. 세 감정 모두 오래도록 낮게 평가되어 온 부정적 감정이며, 특히 여성화된 감정이기도 하다. 질투는 사소하고 비천한 감정으로(Ngai, 2005), 히스테리는 비이성적이고 병리적인 상태로(미첼, 2025), 르상티망은 약자의 음습한 복수심으로(Illouz, 2023) 간주되어 왔다. 이 감정들은 이성적 토론이나 정당한 정치적 분노와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공적 논의의 대상이라기보다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오랫동안 이 감정들에 대한 부정적 담론은 여성이나 약자의 감정을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모욕하고 병리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재생산되었다(Illouz, 2023; Ngai, 2005).

이 ‘여성화’된 감정을 남초 커뮤니티의 감수성과 역동을 이해하기 위해 호출하는 것은 모욕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남성들에게 향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대로 도덕적 비방이나 모욕의 뉘앙스를 덜어내고 감정의 사회적 형성과 변이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는 특별히 ‘여성적’인 감정도, 단지 비합리적인 감정도 아니다. 이 감정들이 언제나 반동적이거나 파괴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인정의 실패, 욕망의 좌절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될 때 나타나는 정동적 형식이다. 질투는 불평등을 감지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 르상티망은 무력감 속에서 불만과 분노가 도덕적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히스테리는 상징적 질서 안에서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다고 느끼는 주체가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담론 형식이며, 그 담론 형식을 가동하는 정동 형식이기도 하다. 질투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일 수 있고, 르상티망은 부당한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적 감각과 인정 요구(Rostbøll, 2023)로 이어질 수 있으며, 히스테리적 질문은 기존 상징질서의 결함을 폭로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들이 특정한 온라인 환경,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 남성성의 위기, 여성혐오 담론과 결합할 때 어떤 방향으로 굳어지는가에 있다. 이 글은 감정들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극우화와 안티페미니즘의 양분이 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세 감정은 각기 다른 맥락과 주요하게 연결된다. 첫째, 온라인 주목 경쟁은 특히 질투와 관련된다. 이 경쟁 속에서 “누가 더 쉽게 주목받는가”라는 질문은 곧 질투의 문제로 변한다. 온라인상에서 주목을 끄는 사람이나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갖거나 상징적·물질적 자원을 더 쉽게 점유할 수 있다―혹은 적어도 그렇게 여겨진다. 둘째, 도달할 수 없는 동시에 벗어날 수도 없는 ‘평범함’의 모순된 압력은 르상티망과 관련된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평범한 삶’은 한편으로는 모든 측면에서 ‘평균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는 힘겨운 꿈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뛰어나지 못한 것, 개성 없는 것으로서 무시되거나 경멸된다. 평범함의 이러한 모순과 균열, 불안정성이 르상티망을 격화한다. 셋째, 정치적·문화적으로 대변되거나 인정되지 못한다는 감각은 히스테리와 관련된다. 물리적 몸은 있지만 상징적 몸은 갖지 못한 주체, 즉 사회에 존재하지만 자신의 고통과 요구가 제대로 대변되거나 인정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주체가 대타자를 향해 히스테리적 질문을 반복한다.

이 세 감정은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들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실제로 온라인 소통 환경에서 복잡하게 뒤섞인다. 막스 셸러(Scheler, 1961)는 르상티망에 대한 고전적 분석에서 질투가 무력함 속에서 곪을 때 르상티망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질투와 르상티망을 하나의 연속적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르상티망은 히스테리적 질문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왜 우리만 손해 보는가?”, “왜 남성의 고통은 인정되지 않는가?”, “왜 여성과 소수자만 보호받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구가 아니라, 대답을 요구하면서도 어떤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악순환의 정동 형식이다. 히스테리적 질문이 질투와 르상티망을 새롭게 생산하고 심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세 감정은 한 방향으로 심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두 가지 경로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는 불만과 르상티망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는 경로다. 여기서는 에펨코리아(이하 펨코) 정치시사게시판과 ‘이준석 현상’을 주요 사례로 다룬다. 다른 하나는 축적된 불만의 정동이 충분히 상징계에 등록되지 못하고 더 ‘마이너’하고 음모론적인 공간에 고여 곪아가는 경로다. 여기서는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의 ‘레드필 갤러리’ 같은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경로는 서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동적 흐름이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거나 붕괴하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3. 질투 혹은 온라인 주목 경쟁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의 형성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민철(2026, 88-92)은 한국 남초 온라인 문화를 대략 세 단계로 구분한다. 1세대는 디시와 일베로 대표되는 ‘막장’ 커뮤니티 문화고, 2세대는 펨코처럼 ‘공정’ ‘자유주의’ 등 합리적인 어휘의 겉옷을 입은 커뮤니티이며, 3세대는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등 짧고 강렬한 영상과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이다. 실로 현재 청소년 사이에 음모론이나 혐오 표현이 전파되는 데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3세대’ SNS의 역할이 중대해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은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이나 SNS는 다루지 않으며 정민철이 1세대와 2세대라고 했던 커뮤니티에 주목할 것이다.6 커뮤니티는 오늘날에도 정동과 담론의 중요한 저장소이자 증폭기이고, SNS나 오프라인에서 전파되는 정치관, 세계관, 음모론, 혐오 표현의 상당 부분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여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디시는 1999년 디지털카메라 동호인 웹사이트로 출발했다. 이후 수많은 갤러리를 거느린 국내 최대의 커뮤니티 포털로 성장했고, 한국 온라인 문화의 발원지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디시에는 수만 개의 갤러리가 있고, 갤러리마다 관심사와 성격이 판이하기에 디시 전체를 어떤 정치적 성향으로 식별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는 디시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문제를 간략히 짚고, 이후에 디시의 한 마이너 갤러리를 중요하게 살펴볼 것이다.

디시는 수많은 혐오 표현과 온라인 ‘막장’ 문화의 진원지로 말해지지만, 한편으로는 반권위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한 유희의 공간으로 의미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가성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초기 연구인 이길호의 『우리는 디씨』에도 잘 나타난다. 이 책은 2000년대 디시 문화를 연구한 저자의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2012년에 출간되었다. 연구가 진행된 시점은 일베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부상하기 전이며, 청년 남성의 보수화가 지금처럼 뚜렷해지기 전이다. 디시라는 ‘남성적’ 공간에 대한 이길호의 평가는 상당히 유보적이었다. 디시의 ‘패륜’과 ‘막장’ 같은 성격 그리고 여성혐오를 비판적으로 경계하면서도, 디시를 ‘잉여’ 청년들이 스스로 가시화하는 유희의 장으로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화가 심화되면서 청년들은 경쟁과 불안정성에 더 많이 노출되었고, 점차 생산의 주체라기보다 부양과 관리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조민서, 2019). 이런 상황 속에서 ‘잉여’ 청년들은 디시에서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자유롭고 평등한 발언의 공간’을 찾고 추구했다.

이길호는 디시의 성격을 “남성적 에토스와 극단적 평등주의”(이길호, 2012, 233)라고 짚어낸다. 여기서 ‘남성적 에토스’는 당시 유저 대다수가 남성이었다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특징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 평등주의’다. 디시는 초기부터 모두에게 똑같은 발언권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 평등주의를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원칙이 아니라 강박적이고 전투적인 실천으로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초기 디시에서 발언의 평등을 위한 싸움은 격렬했다. 그 주요한 대립물은 네이버 카페였다(같은 책, 236 이하 참조). 많은 네이버 카페는 ‘계급제’로 운영되었고, 유저들 사이의 발언권은 등급, 인지도, 참여도에 따라 달라졌다. 디시는 이러한 발언권의 서열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갤러’들은 모두 똑같은 발언권을 갖는다. 어떤 유저가 인지도를 얻더라도 더 큰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니다. 많은 추천을 받아 ‘개념글’에 등극하더라도 다음 날에는 다시 처음부터 경쟁해야 했다. 매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임과 같았다.

바로 이 평등주의가 디시의 폭발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여러 카페의 ‘평민들’은 말의 평등을 좇아 디시로 유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디시 유저들은 스스로 ‘민주화’ 투사의 정체성을 부여했고, 기존 카페 질서에 맞서는 자신들의 움직임을 “전쟁”이나 “혁명”으로 의미화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등이 어떤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였다는 점이다. 구성원들은 같은 발언권을 가지고, 같은 장에서, 같은 인정의 내기물을 두고 경쟁했다. 개념글은 위로부터 주어진 ‘자격’이 아니라 동등한 구성원들이 부여한 ‘인정’의 표지였다. 이 게임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등한 발언권을 가진 모든 구성원이, 바로 그 구성원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매 순간 새롭게 경쟁한다.’

이것은 디시가 추구한 세계의 상을 보여준다. 그곳은 온갖 사회적 불평등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세계, 완전 경쟁이 가능한 세계, 경쟁의 결과가 매일 초기화되는 세계, 따라서 경쟁이 놀이가 되는 세계였다.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불안정성을 내면화한 청년들은 디시에서 그 위협과 스트레스를 놀이의 형식으로 순치했다. 디시는 살고 싶은 세계의 축소판이자, 동시에 실제 세계의 압력을 견디게 하는 가상의 훈련장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모두가 병신’이라는 기묘한 평등주의적 전제 위에서 ‘누가 더 웃기는가’를 놓고 벌이는 놀이화된 경쟁의 장으로 만들었다(김학준, 2022, 1장 참조).7 이 기묘한 평등주의와 능력주의적 경쟁 논리의 조합은 몇 가지 역설적 결과로 이어졌다.

첫째,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평등’은 사회에 엄존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구조적 차별을 괄호 안에 넣는 효과를 낳았다. 커뮤니티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김학준이 이길호의 논의를 요약하며 말했듯, “모두가 ‘좆병신’인 평등한 세상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은 인위적으로 탈각된다”(같은 책, 64). 둘째, 게임의 내기물이 동등한 구성원들의 인정이기 때문에, 유저들은 자극적이고 웃기면서도 구성원들이 공감할 만한 콘텐츠를 경쟁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는 커뮤니티 언어의 학습을 장려하는 조건이자, 커뮤니티의 정치적 편향을 강화하고 혐오의 모방과 전파를 가속화하는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효과는 ‘여성 배제적 혐오’의 형성이다.

초기 디시에서 특히 강하게 혐오된 것은 ‘친목질’이었다(이길호, 2012, 339 이하). 친목질은 공정한 경쟁을 망치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성 유저가 있으면 친목질이 일어나기 쉽다. 이 ‘남초’ 환경에서 여성은 쉽게 주목받는다. 남성 유저들은 여성이 쓴 게시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웃기거나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더라도) 관심을 주고 추천을 누른다. 그 결과 공정한 경쟁의 질서가 흐트러진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반동으로 갤러리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혹은 여성임을 티 내지 말아야 한다는―그리고 친목질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는―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고도 주목과 인정을 편취하는 존재로 표상되었다(김학준, 2022, 61-63).8 친목질에 대한 혐오는 일베에 계승되어 한층 강화된다.

물론 게임 등 온라인 환경에서 남성 이용자들이 여성 이용자에게 괜히 관심을 표하거나 과도하게 친절하게 구는 것도 여성혐오와 성역할 통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 친밀한 태도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말이 이상하지만 ‘친화적 혐오’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여성 이용자를 배제하고 억제하려는 혐오는 그와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후자는 ‘배제적 혐오’라고 구분해서 부를 수 있다. 여성 배제적 혐오는 단순히 여성 일반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룰이 여성에 의해 훼손된다는 상상에 기초한다. 반대로 완전히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려면 ‘친목질’이 철저히 배제된 채, 뿔뿔이 흩어진 순수한 개인―이 개인은 남성으로 상정된다―만이 있어야 한다. 온라인 소통환경과 커뮤니티의 ‘세팅’이 청년 세대의 공정 감각에, 그리고 그 감각이 여성혐오와 결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무리한 추론은 아닐 테다. ‘역차별론’이나 여성의 ‘무임승차론’ 등이 커뮤니티에서 쉽게 전파되고 강화된 데는, 온라인 소통 환경이 실로 그렇게 느껴지도록 조성되어 있기 때문인 면도 있다.

온라인 소통 환경에서 주목은 희소한 자원이다. 아무나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추천을 받고 많은 댓글이 달리며 ‘개념글’에 오르는 것은 커뮤니티 안에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이때 여성은 쉽게 보이는 존재, 쉽게 주목받는 존재, 따라서 공정한 경쟁을 교란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여기서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오래 전승되어 온 여성혐오적·성차별적 편향, 즉 여성을 시선의 대상으로 만드는 욕망과 권력의 구조가 마치 여성에게 유리한 조건처럼 보이게 전도되는 것이다. 시선의 권력에 대한 고전적 담론(벤담과 푸코의 ‘파놉티콘’을 떠올려보라)에서, 보이는 것은 불리하고 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온라인 주목 경쟁의 장에서는 이 관계가 얼핏 뒤집히는 듯 보인다. 보이는 것은 주목받는 것이며, 주목받는 것은 유리하다. 주목은 돈이 되고 영향력이 된다. 물론 온라인에서 여성의 높은 가시성은 성적 대상화, 괴롭힘, 신상 털기의 위험을 수반(Lewis et al., 2017 참조)하고, ‘벗방’과 같은 성 착취 산업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맥락들은 쉽게 무시되며, 가시성의 현금화 가능성과 문화적 영향력만이 여성의 특권으로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이미지가 온라인상에서 더 쉽게 주목과 관심을 끈다는―그리고 그로부터 여성이 ‘쉽게’ 이익을 얻는다는―이데올로기적 통념은 상당 부분 왜곡된 것이지만, 이 통념의 사회적 효과는 실재한다.9

이 전도 속에서 여성은 주목을 끄는 인자를 가진 존재로 상상된다. 여성 방송인, 연예인, 인플루언서, 공인 등 ‘잘 보이는 곳의 여성들’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욕망의 대상이자 질투 혹은 ‘샤덴프로이데’(김현경, 2016)의 대상이 된다.10 가령,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매노스피어 커뮤니티에는 ‘현대에 여성이 남성보다 돈을 더 쉽게 번다’는 주장이 종종 등장한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전문직 남성 혹은 남성 운동선수와 여성 방송인―특히 ‘성적인’ 맥락의 방송인―을 비교한다. 비교를 통해 도출하는 결론은 이렇다. 남성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전문성이나 특출함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성은 그저 타고난 ‘몸만으로도’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몸이 시선을 끌고, 오늘날의 온라인 소통 환경은 그 관심을 쉽게 현금화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련의 청년 남성들은 “돈 되지 않는 몸을 가진 남성-피해자들”(김주희, 2024)로 스스로를 정체화한다.11

‘돈’뿐만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일부 남성들은 여성들이 더 많은 자산을 불공정하게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 당시 청년 남성들이 정부가 “여자 편”만 든다는 이유로 정권에 분개를 드러냈던 것(이재호, 2019)도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분노 역시 여성들의 말이 더 잘 들리고 정치적·문화적으로 더 잘 수용된다는 판단을 깔고 있다. “왜 문재인/민주당은 여성들의 이야기만 들어주는가?”라는 질문은 주목과 인정의 분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한편, 당시 청년 남성들에게 ‘문재인-민주당-86세대’가 주목과 인정을 나눠줄 대타자(the Other)12로 여겨진 측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성이 더 쉽게 주목받는다’는 질투(envy)는 ‘이 사회, 혹은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여성의 말에 더 귀 기울인다’는 질투심(jealousy)과 쉽게 연동된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온라인의 대중적 페미니즘이 강하게 의견을 결집하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을 본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페미니즘의 전략을 모방하고 차용하려고 애쓰기도 했다(이우창, 2021).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역량을, 주목을 끌고 여론을 휘어잡는 능력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해, 201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청년 남성은 ‘조직화’된 페미니스트들만큼의 정치적 힘과 역량이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사실에 무력함을 경험했다. 이 무력함은 민주당과 페미니스트들이 합세하여 자신을 사회적·정치적 장에서 소외시키고 있다는 피해의식으로 곪아가기도 했다. 2021년 ‘젠더 갈등’에 대한 공개 토론에서, 이준석은 구조적·문화적 성차별이 엄존한다고 주장하는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의원님은 변호사가 되기까지 여성으로서 무슨 불합리한 차별을 겪으셨습니까?” 이 질문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정치적 수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잘 보이는’ 곳에 있는 엘리트 여성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다수 남성’을 효과적으로 대립시킨다. 그러한 대립 구도 속에서 ‘평범한’ 남성들은 구조적 성차별을 주장하는 엘리트 여성에 비추어 스스로를 약자나 소외된 자로 경험한다. 이런 왜곡된 가시성의 장이 만들어내는 대립 구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질투가 격화된다. 이 질투는 여당이나 기성세대가 여성만 편애한다는 질투심과 연동되고, 무력감이나 소외감 속에서 곪을 때 쉽게 르상티망으로 변한다.

(2)에서 계속

  1. 이러한 경향이 한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영미권의 온라인 매노스피어 및 극우화 연구에서 온라인 안티페미니즘은 청년 남성을 극우적 세계관으로 이끄는 주요한 경로 가운데 하나로 분석된다(예컨대 Mamié et al., 2021). ↩︎
  2. 『공정하지 않다』(박원익·조윤호, 2019)에 이런 논리로 청년 남성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이 있다. ↩︎
  3. 이 글에서는 정동을 ‘감정의 흐름’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감정과 정동의 구분 (불)가능성과 그에 따른 문제에 대해서는 김남이(2024)의 논의를 참조. ↩︎
  4. 연구 과정에서 현재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펨코리아 정치시사게시판에 대한 데이터 크롤링도 수행했다. 다만 이 글은 해당 자료에 대한 정량적 분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수집 자료는 논의할 사례를 찾고 게시판의 담론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만 활용했다. 자료의 수집 방법, 수집한 데이터에 기반한 시기별 어휘·의제 변화에 대한 분석, 펨코의 정치 성향 변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
  5. 이 글에서 다루는 질투는 jealousy보다는 envy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의 구분에 따르면 원초적 질투(envy)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거나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느끼는 감정인 반면, 이차적 감정인 질투심(jealousy)은 내가 소유했다고 여기거나 애착을 가진 존재를 제삼자에게 뺏길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다(Klein, 1975, 181 이하 참조). 즉 envy는 이자관계에서, jealousy는 삼각관계에서 주로 발현되는 감정이다. 이 글에서 envy는 ‘질투’로, jealousy는 ‘질투심’으로 나누어 부른다. 한편 동기간·또래 관계에 주목하는 줄리엣 미첼(2015)을 주요하게 참조하는 필자는 원초적 질투가 어머니와의 이자관계뿐 아니라 또래 관계에서도 발현될 수 있다고 본다. 또래 관계에서의 질투 문제에 대한 평론으로는 이희우, 2026 참조. ↩︎
  6. 현재 한국에서 혐오, 극우적 세계관·가치관, 음모론의 전파에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틱톡, X 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
  7. 이 기묘한 평등주의를 디시보다 더 극단적으로 밀고 간 것이 일베다. 그것은 ‘잉여의 평등주의’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디시에서 일베까지 자조적으로 자주 쓰던 말을 사용하자면) ‘좆병신의 평등주의’라고 할 수 있을 무언가다. 일베에서 이 평등주의는 단순히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도덕적 최저점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위악적 평등주의가 노무현, 민주화, 세월호, 촛불혁명 등 사회적·도덕적 의미를 부여받은 대상에 대한 일베의 대대적인 공격과 조롱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즉 만약 그러한 대상들이 정말로 도덕적으로 의미 있다면, 모든 인간이 결국 쓰레기나 ‘좆병신’일 뿐이라는 일베의 ‘평등주의적’ 전제―이 전제는 모든 위악적이고 경쟁적인 유희의 조건이다―가 훼손되므로, 일베는 그러한 대상들을 깎아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쾌락을 ‘불쾌한 긴장의 해소’라고 보는 프로이트적 관점(프로이트, 2020)에서, 노무현이나 민주화 등을 조롱하고 하찮게 만드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도덕적 부담 혹은 도덕적 질투의 해소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8. 여성에게 잘해주거나 집적대는 남성, 이른바 ‘보빨러’나 ‘스윗남’, ‘영포티’ 등에 대한 조롱 역시 이 논리의 연속선상에 있다. ↩︎
  9. ‘정치적 넷카마’의 출현을 그 효과의 예로 들 수 있다. ‘넷카마’는 온라인상에서 여성인 척하는 남성을 일컫는다. 2018년에 ‘최지혜’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활동했던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실체가 사실 30대 남성임이 밝혀지는 일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2026년 5월에 ‘윤어게인’을 외치고 참여를 고무하는 한 젊은 여성의 인스타그램 계정 주인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자백에 의해 밝혀졌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것으로, 더 많은 사람(특히 남성)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
  10. 질투와 샤덴프로이데의 관계에 대해서는 케이, 2024, 1장 참조. ↩︎
  11. 김주희(2024)의 분석이 보여주듯, 타고난 몸까지 ‘자산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 젠더화된 인식은 온라인에서의 주목 경쟁뿐 아니라 연애나 결혼, 취업, 자산 축적, 문화적 영향력 등에 영향을 미치는 ‘인적자본’ 전반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
  12. 라캉의 ‘대타자’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주체의 말과 요구를 듣고 그 의미와 정당성을 승인해 줄 것으로 상정되는 상징적 권위의 자리다(Žižek, 1997). 법, 국가, 사회, 제도 등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특정한 정치인이나 집단이 그 대리자로 경험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의 맥락에서, 주인의 관심이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한다는 데서 오는 질투심이 히스테리의 주요한 원인이자 히스테리에 동반하는 감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프로이트, 2020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