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바람과 접이식 지도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와의 대화 1부

1부: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피투자자라는 형상/매력의 경제학/『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2부: 기후-금융?/기후위기의 재현/기후정의 행진/기후우울증

희우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지요?

민서
네. 연초에는 독감 때문에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한결 낫네요. 우리가 평소에 얘기를 많이 하니까 이런 자리가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희우
예, 좀 낯설고 두근두근거리는 자리네요.
민서 씨는 작년 화제의(?) 책인 『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하기도 했고 여러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 중이시지요. 제가 사회자처럼 민서 씨 경력이나 이력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도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서
이런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 희우 씨는 제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분이고, 또 우리가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재밌는 얘기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런 대화가 좀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아직 학위 과정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소개하려면 뭔가 고정되어있어야 하는데, 저는 지금도 계속 흔들리면서 바뀌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라고 소개하는 게 아직 좀 어색한 것 같아요.

희우
그럼 이 얘기부터 해주세요. 어떤 걸 공부해오셨고 어떤 연구들을 하셨는지, 하고 있는지……

민서
네. 저는 학부 때부터 사회학을 전공해왔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사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전개되면서 이 모순이 위기로 표출되는 과정, 특히 이 과정에서 인간·비인간 존재들의 안정(security)이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정치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사회보장을 둘러싼 복지정치, 그리고 생태위기 시대 기후정치 쪽에 관심이 있어요. 둘 다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어떤 ‘보장’의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치와 관련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구요. 그 교차점에서 작년에 리시올 출판사에서 미셸 페어(Michel Feher)의『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했어요.

희우
먼저 석사 논문에서의 연구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해주실래요? 복지정치 관련해서…

민서
복지정치랑 관련해서는 서울시 청년수당,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어요. 소위 국가 경제에 기여해야 하는 주체로서의 청년이, 국가로부터 어떤 ‘돈’을 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과정을 본 건데요. 이런 정책들을 형성하고 집행하는 정치인, 공무원 같은 사람들, 당사자인 청년들, 운동가들,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이 ‘돈’의 도덕적·문화적인 의미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고 논쟁되는지 봐왔습니다.

희우
한 사안에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오신 것 같아요. 기후 관련 연구도 금융 쪽을 주로 보시지만 작년 기후정의행진에서 관계자로 일을 하시기도 했지요.

민서
네. 작년 923 기후정의행진의 경우에는, 행진 참가자들, 참가 단체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기획팀에서 담당했고요. 이것도 나중에 얘기를 더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923 기후정의행진은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기후 정치와 관련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 참여했던 사람들이 행진이라는 집합행동을 어떻게 경험하고 결산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데이터를 정리한 것이죠.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

희우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들어보기로 하고, 일단 번역하신 책에 대한 얘기부터 해봐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책을 번역하게 되셨는지,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어떠셨는지 얘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서
사실 제가 번역은 완전 처음 해봐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깨달은 것도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번역이 아니었다면 알기 힘들었을 것 같은 출판의 단계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식의 유통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충만한 경험이었어요.
책을 옮기게 된 계기는… 이 책에 재밌는 포인트들이 워낙 많지만, 저한테 가장 중요했던 지점은 이 책이 동시대 자본주의의 지형을, 금융화 이전의 자본주의와 대비하면서, 그 역사적 차이를 포착하는 개념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제공해준다는 점이었어요. 책의 목차를 보면 챕터별 소제목이 전부 A & B 식으로 짜여져있는데요.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A는 산업자본주의와 여기에 대한 정치에서 중요했거나 혹은 이걸 소묘하기 위한 개념들의 계열이고, B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에 대응합니다. 저자의 진단에 당연히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A와 B를 이렇게 각각 일관된 그림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읽어낸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A가 무효화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왜 B라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한지. 특히 제가 관심이 있었던 복지국가, 복지정치처럼, 누군가는 ‘진보’와 동일시하는 어떤 정치적 유산―구체적인 제도, 정치적 상상, 전제들―에 B라는 새로운 현실 인식이 어떤 과제들을 제기하는지를 사고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희우
저도 그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에게 재미있게 읽힐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왜냐면 책이 좀 어렵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제 주변에서 재밌게 읽었다고 하고 관심을 표하는 분들도 꽤 있었어요. 그 책을 2023년 ‘올해의 책’으로 꼽는 분들도 있었고……

민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말 너무너무 기뻤어요(웃음). 희우 씨 본인이나 주변 분들은 어떤 포인트를 좀 재미있게 읽으셨던 걸까요?

희우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꼼꼼히 읽을수록 논의가 정치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어요. 특히 제가 흥미로웠던 건 ‘인적자본’에 대해서 그 책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거예요. 국가가 생산하려 하는 인적자본의 형상이 유순하고 성실한 노동자였다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가로 변했다는 게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인데, 페어는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이 ‘기업가’보다는 ‘자산관리사’ 혹은 ‘피투자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좋은 점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개탄이나 푸념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어떤 전망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책의 내용에 대해 좀 얘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먼저 책이 어렵기도 하고, 여러 가지 논의가 다층적으로 돼 있으니까 번역자로서 책 요지를 간단히 안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민서
간단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먼저 책 제목에서부터 출발해 보자면요.
제목에서 “피투자자(investee)”라는 건 투자를 당하는 자, 그러니까 투자를 받는 존재죠. 이 ‘피투자자’라는 형상을 이해하기에 앞서 부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국어 부제를 ‘금융자본주의 시대 새로운 주체성과 대항 투기’라고 옮겼어요. 금융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시대에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 주체성에 근거해서 금융자본주의에 맞서는 어떤 식의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항 투기’라 불리는 전략을 제안하는 거죠. 한국어 부제는 제가 이렇게 달았습니다만, 여기 차마 넣지 못한 프랑스어 부제도 중요합니다. 프랑스어 부제(“Essai sur la nouvelle question sociale”)는 직역하면 “새로운 사회 문제에 대한 에세이”인데요. 여기서 ‘사회 문제’라는 말을 조금 설명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사회 문제라고 생각하면 빈곤, 범죄, 고령화, 환경 문제 같이 사회적으로 problematic한 문제들, 해결을 요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이 말하는 사회 문제는 social problem이 아니라 ‘social question’이에요. question도, problem도 우리말로 ‘문제’로 옮겨질 때가 많은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게 다소 차이가 있어요. question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뚜렷한 답은 없지만 계속해서 잠정적인 해답(answer)만이 조금씩 나올 수 있을 뿐인 ‘질문’이고, problem은 1+1은 뭐냐, x+1 = 2에서 x는 뭐냐는 것처럼, 구체적인 해(solution), 어떤 ‘솔루션’을 통해 해소,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과제’에 가까운 것이죠. social question이라고 했을 때 서구권에서 많이 얘기하는 맥락은, 자본주의가 모종의 문제/질문(question)을 낸다는 거예요.
그 질문이 뭐냐면,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상정하지만, 우리는 모두 현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평등과 자유’의 의미가 얼마나 굴절되어 협애하게 나타나는지 알고 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는 결국 우리의 노동력을 거래할 자유이고, 우리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고요. 헌법이나 인권 선언 같은 텍스트에서 이야기하는 이 자유의 이념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양극화니 ‘~계급론’ 같은 말들에 담겨있듯이, 극단적인 불평등 앞에서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지지요. 곧 이런 형식적인 평등과 내용적인 불평등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게 social question, 사회 문제인 것이죠.

희우
그렇군요. 요지를 정리해보자면 ‘사회 문제’란 일종의 자유주의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런 괴리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이죠.

민서
그렇죠. 그게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회 문제’의 통상적인 용법이에요.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오는 과정,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고, 이 과정에서 착취가 발생하고… 그런데 페어는 이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던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바라보았던 틀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회 문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제기된다고 보는 거죠.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적대는 자본과 노동, 페어의 표현대로라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적대였어요. 그렇다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적대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했을 때, 투자자랑 피투자자라는 것이죠.
피투자자가 누군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거는 투자를 받기 위해 자기를 어필해야 하는 존재들, 가령 스타트업 창업자를 떠올릴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스타트업 창업자만 그런 게 아니고, 따지고 보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우리 둘도 그렇고, 예술가와 연구자들도 끊임없이 자기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유망하고 의미가 있는지 증명해서 그걸 잠재적인 후원자들(국가가 될 수도 있고 문화재단이 될 수도 있고 학술진흥재단이 될 수도 있는)에게서 크레딧을 확보해서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과 동반되는 어떤 매력도와 평판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들인 거죠.
그래서 ‘매력도’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 신용의 흐름을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도 피투자자고, 예술가와 연구자뿐만 아니라 플랫폼에서 뭘 파는 사람들, 당근마켓이건 에어비앤비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과 주목의 흐름을 유인해야 하는 사람들도 피투자자죠. 투자를 받기 위해 주가를 관리하는 기업, 채권을 발행해서 재정을 운용하기 위해 국가 신용도를 관리하는 국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페어는 등급 평가를 당하고 투자를 당하는 존재 일반, 즉 개인과 국가, 가계, 기업을 모두 아우르는 어떤 주체성이 ‘피투자자’라는 거죠. 그게 이제 새로운 사회 문제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겠죠.

희우
네. 정리 감사합니다.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논지가 과거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있었던 사회 문제의 전선이 이제 투자자와 피투자자 사이로 옮겨온다는 것이고, 그래서 페어는 그런 과거와 현재의 ‘유비 관계’ 속에서 계속 논의를 진행하잖아요. 이 유비 관계가 좀 흥미롭습니다.
과거의 노동운동에서, 피고용인들도 자신을 ‘자유로운 노동자’로 정체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위치를 투쟁을 위해서 전유했다는 것이죠. 이중의 전략이 있었다는 거죠. 그와 똑같은 형식으로, 사실 우리가 자유롭게 투자를 하거나 받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이렇게 주어진(소여所與된) 피투자자의 조건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이 페어의 전제인 것 같습니다.

민서
네. 이걸 책에 수록된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문학과사회』작년 봄호에 페어 글에 대한 해설로 수록한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짚었는데요. 사실 그 전략, 소여 혹은 주어진 것을 전유해서 정치에 활용한다는 발상은 미셸 페어 자신의 발상이라기보다는 페어가 참조하는 미셸 푸코의 권력론에서 온다고 볼 수 있어요. 푸코에게 권력은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하고, 억압하고 금지하는 권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게끔, 주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면서 작동되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억압적인 권력의 전범으로 생각하는 게 감옥, 군대, 학교 이런 곳일 텐데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감옥, 군대, 학교 같은 권력의 장치들이 그 장치에 입장한 주체들에게 어떤 역능을 함양한다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는 제식을 훈련시키고,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는 40분 동안, 중학교 때는 45분, 고등학교 때는 50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게 훈련시키는 등.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집중하게끔 만드는 그 훈련이 억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써 우리는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특정한 과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역능을 배양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체제에 입장한 신민들이 권력에 예속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자유와 의지를―비록 권력에 의해서 내면화되는 거긴 하지만―행사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 그게 푸코가 말하는 주체론이지요. 그 함의는, 주체가 되기 위해 내면화했던 권력의 작동 양식이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의 대전제를 어떤 식으로 전유하고 활용한다는 것.
페어는 이걸 통치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인간학(moral anthropology)’이라고 표현합니다(책 본문에는 없고 제가 했던 인터뷰 부분에 나와요). 그 도덕적 인간학이 산업 자본주의하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죠. 그 자유는 물론 아주 기만적인 자유죠. 자본의 착취를 가능케 하는 어떤 형식적 전제니까요. 즉 판매할 것이 노동력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 자유란 그 자유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니까요. 가진 게 노동력밖에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대면할 때 한 가지 가능한 선택지는 이런 거죠. ‘너희가 말하는 자유는 기만이고 허구야! 말도 안 되는 거고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교설이고 협잡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노동운동가들은 그런 ‘자유’의 위선을 비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일정하게 활용했다는 거예요.
고용주들이 처음에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주려고 카르텔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노동력 상품에 대한 가격을 집단적으로 내려치기를 하죠. 거기에 맞서 노동자들은 개인의 노동을 노동력 상품으로 성립시키고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하는 어떤 인간의 조건, 즉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통치의 조건을 거부하기보다는 이게 ‘맞다고 치고’ 파업이라는 집합적 행동을 통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교섭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했다는 거지요. 우리 노동력 상품을 개별적으로 거래할 ‘자유’를 가진 모든 개인이 연합해서 특정 임금, 특정 노동 조건을 보장하지 않는 작업장에 가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집단적인 협상을 벌였죠. 여기서 이제 복지국가도 나오고, 노동계급 정당도 나오고, 일련의 ‘진보 정치’라고 부르는 세력들이 성취했던 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페어가 던지는 물음은, 이렇게 통치의 전제가 되는 인간학, 즉 ‘인간이란 이러한 존재다’라는 조건을 전유하는 전략을 지금 시대에 해본다면 어떨까, 하는 거죠. 왜냐면 이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연합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걸 기반으로 협상했던 전략이 이른바 금융화 그리고 신자유주의화 이후에는 굉장히 불안정하게 돼버렸거든요.
첫 번째로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자본이 언제든지 노동력 가격이 싼 데로 옮겨갈 수 있게 됐죠. 그리고 두 번째는 (산업자본주의 같은 경우에는 제조업 기업들이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고 그걸 팔아서 어떤 산업적인 수익을 거둔 후 다시 재투자하고 이런 식의 모델이었다면) 지금은 단기적인 측면에서 주가 관리가 굉장히 중요해져 버렸고, 이걸 위해서는 소위 노무비용 절감이라 불리는, 임금으로 나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임금 수준도 조절하고, 고용 규모도 ‘유연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거든요.

희우
그러니까 경제가 금융화·세계화되면서 주주가치를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경영 관행에 맞서서, 노동자들이 ‘전유’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고 협상력이 약해졌다는 것이지요?

민서
그렇죠. 이 모든 과정에서 결국 노동조합들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빠르게 자금 투자와 투자 철회를 통해 작동하는 금융의 권력에 대적하기 힘들어졌다는 거예요. 과거엔 고용인-피고용인이라는 양자 관계였는데, 외부에서 주주(shareholder)라는 존재, 회사의 내부자가 아니지만 몫(share)의 담지자(holder)로 여겨지는 주주의 입맛에 맞게 경영이 돌아가게 됨으로써 피고용인이 고용인에게, 노동이 자본 측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에요.
즉 이때까지 진보 정치가 상정하고 활용하고 전유했던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조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돼버렸고, 그게 아니면 뭘까, 그 답이 페어가 볼 때는 ‘피투자자라는 조건을 활용할 수 있다’ 이게 책 1장의 논지라고 할 수 있겠어요. 1장이 기업 내부의 정치, 즉 기업 거버넌스가 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권력에 의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2장은 일국적 차원의 경제 조절과 사회보장을 성취했던 국가적 수준의 복지자본주의와 같은 기획이 어떻게 채권자와 투자자라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행위자들에 의해 제약되는지를 다루고 있구요.

피투자자라는 형상

민서
희우 씨는 ‘피투자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어떤 형상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우리 주변에서 이 개념을 가지고 조명할 수 있는 대상들이 있다면……

희우
실제로 페어도 그런 예를 들지만, 제 주변에 지원금을 받기 위해 지원서를 쓰는 젊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많아서요, 저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나네요.

민서
그렇지요. 펀딩을 끌어오려는 존재들, 그러기 위해서 포트폴리오를 짜고 관리하는 사람들. 자기 작업한 것부터 세계관, 취향, 네트워크 등 자신을 구성하는 넓은 의미의 포트폴리오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책 3장에서는 이걸 하이퍼페이지라고 부르는데, 홈페이지일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 같은 걸 수도 있고. 특히 모종의 ‘작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웹페이지에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올리잖아요. 그러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미학적 능력, 취향, 세계관, 성과 등을 전시해서 주목을 끌고, 관심이 되었건 화폐가 되었건 모종의 자원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걸 어필하잖아요. 희우씨가 주요하게 밀고 있는 어휘로는 ‘매력’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거죠. 우리 말 ‘매력’에 대응하는 영단어는 charm, attraction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제가 “매력도”라고 옮긴 “attractiveness”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구요. 기업이든 예술가든 자금과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의 척도랄까요. 페어가 이 책을 쓰기 10년 전에 쓴 글이자 제가 《문학과 사회》에 번역했던 글(「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열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영어로는 이걸 “self-appreciation”이라고 부르고 한국어로는 제가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고 번역을 했어요.

희우
맞아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민서
재밌게 읽었다니 다행이네요. appreciation의 명사형이 appreciate인데 이게 고마워하다, 가치를 인정하다, 알아보다, 평가하다, 그리고 자동사로 쓰이면 ‘가치가 상승하다’라는 뜻도 있어요. 주가 상승을 stock appreciation이라고 하거든요. 여기 앞에 “self”가 붙으면 ‘자화자찬’ 이렇게 많이 번역되는데요. 이게 그러니까 우리가 SNS에서 내 작품이 이번에 나왔다, 하고 올릴 때 그것은 단순히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알리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수행적으로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거고 사람들이 내 걸 감상하게끔 주목을 집중시키고 관심과 반응을 이끌 수 있도록 게시물을 올리는 거잖아요. 플랫폼에서 자기를 마케팅하고, 자기가 맨션될 기회를 높이고 좋아요와 팔로워와 하트를 유인하는 존재들…… 책에서는 이런 존재들이 ‘평판 자본’을 축적하려 하고 그걸 축적한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획득하려고 한다고 분석하는데요. 작년에 나왔던 아이브의 <키치>라는 노래 가사가 이런 주체를 전범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SNS에 뭔가를 올리고 상대방의 알고리즘에 노출되고 평판이 올라가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전시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해서 그걸 통해 더 많은 자본과 주목을 수행적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식의 주체성을 표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희우
네. 저도 점점 그…… 광의의 ‘평판 자본’을 많이 신경 쓰게 되는 거 같은데요. 안 그러기가 힘든 것 같아요. 어쨌든 그건 확실히 제 관심사와도 연결되는 문제네요. 제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죠.
또 이 문제는, 아까 얘기했던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전제하는 ‘도덕적 인간학’과도 관련이 되는 듯해요. 페어 책에도 그런 내용이 있잖아요. 원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념적인 수준에서 목표로 했던 것은, ‘복지로 인해서 왜곡된 계몽주의의 혁명적 이상을 되살리는 것’이었다고요. 계몽은, 칸트의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타인에게 의존하는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잖아요. 칸트는 자신이 직접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의존하는 상태를 ‘미성년 상태’라고 하고 계몽을 거기에 대립시키죠. 또 칸트는 어른이 되고도 그런 미성년 상태에 안주하는 것에 개개인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신자유주의도, 적어도 이념적 수준에서는 어딘가에 의존하지 않는―권위에 의존하지 않지만 사회 부조에도 의존하지 않는―자유로운 주체들을 전제하고, 만약 우리가 계속 어딘가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나약하고 게으른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말하잖아요.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는, 이념적/이상적으로는 계몽주의의 이상과 비슷하게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자기 입법자’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자유는, 자유를 허용하는 합리적 체제에 대한 복종과 같은 의미죠. 한편으로 아이돌 가사에서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전시되는 주체는, 어떻게 보면 그런 계몽의 이상이 전도된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의존할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주체들인 것이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높게 평가하는 어떤 경제적 장에는 매여 있는……

민서
그렇죠. 자기 행동을 조직할 주권이 본인한테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결국 그 실천의 준칙은 주어진 매력의 경제라는 장 내에서 매력 상승을 담보해준다고 여겨지는 테크닉들로 국한되는 것이죠.

매력의 경제학

민서
여기서 희우 씨의 글 「매력의 경제학」과 좀 엮어서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이 책에서도 ‘매력도’ 얘기를 많이 하지만 매력은 남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잖아요.
희우 씨가 매력(魅力)의 ‘매(魅)’가 도깨비를 뜻한다고 하셨는데요. 매혹시키다, 내지는 매료시키다 할 때 그 ‘매’는 모종의 신비한 어떤 힘, 역능처럼도 보여져요.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끌려갈 때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거잖아요. 물리학에서도 attraction이 ‘끌개’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저는 이 매력이란 개념 자체가 굉장히 어떤…… 비표상적/비재현적 이론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힘, 소위 ‘정동적 전환’ 이후에 중요시되는 어떤 힘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희우 씨가 「매력의 경제학」에서 해석한 걸 보면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이라는 곳에서, 거의 처음으로 모종의 사회를 경험하는 주체들이 거기 입장했을 때 본능적으로 어떤 매력의 문법을 학습해 나가면서 그 학습을 바탕으로 매력의 기호를 학습하는 과정을 겪죠. 근데 그런 일이 교실이라는 어떤 원형적인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문인들과 예술가들도, 스타트업 창업주도, 기업들도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사실 요새 SNS에 자기의 매력을 전시하는 모든 존재가 그런 힘을 따라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비교질”이라고 사람들이 자조하는 어떤 등급 평가(rating) 문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고요. 저는 그 “매력의 경제학”에 ‘매력의 물리학’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어요. 매력은 상징적이거나 표상적이기만 한 힘이 아니니까요.

희우
맞아요. 근데 좀 부끄럽지만, 그 미숙한 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그 글을 쓰고 약 이 년이 지나는 동안 제 생각이 좀 더 정교화되고 바뀐 면이 있어요.
일단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고찰해보려면 근대미학을 좀 들여다봐야 해요. 칸트도 ‘매력Reiz’을 언급하는데, 매력은 대상이 우리한테 미치는 효과이고, 우리가 어떤 매력을 느낀다는 건 대상의 감각적 특징에 휘둘리고 좌우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칸트한테 매력은 야만적인, 미성숙한 관심인데요.1 칸트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매력(charme)이 대상에 노예처럼 종속된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관심이라고 말한 바 있어요.2
칸트 미학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조화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그건 대상의 역량이 아니라 순전히 주체의 역량이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 미학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칸트는 순수한 아름다움(주체의 역량)을 매력(대상의 역량)으로부터 정화시키고 분리하거든요. 칸트의 관심사는 인간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그리고 능력들 간의 관계니까요. 이게 결국 주체와 대상의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되는 문제죠.
아무튼 제 진단은,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같은 거는 너무 낯설고 희귀하고, 심지어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너무나 일상적이면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 상황을 칸트의 미학이나 계몽관, 교육학에 대입시켜 보면, 매력을 중요시하고 매력에 좌우되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근대적 감상자 혹은 계몽된 주체보다는 훨씬 ‘야만적’인……

민서
칸트 입장에서 보면 매력의 세계로 ‘퇴행’했다고 볼 수 있는……

희우
그렇죠. 그러니까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서 이성의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주체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칸트의 문법에 비추어보면, 동시대 문화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의 비근대적인 문화가 된다는 것이죠. 물론 저는 이 문화적 경향을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조건으로 경험하고 사고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근대 미학과 다른 미학을 써야 한다는 거죠.
문학작품의 사례로 얘기해 보자면,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교양소설 중 하나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계몽의 모순, 계몽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손보미를 포함해 최근의 젊은 작가들이 쓰고 있는 성장소설/교양소설은 ‘배움의 다면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6학년 담임은 아이들을 매질하면서 ‘너희들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촉구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불합리한 엄석대 체제에서 좀더 합리적인 선생의 체제로 옮겨가기 위해) 아이들은 일단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선생의 매질에 복종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손보미의 소설을 포함한 최근의 한국 성장소설들에서는 선생의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혹은 선생이 한 명의 어른이 아니라 수십 명의 어른아이들과 애늙은이들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 소설들에서 배움은 또래 집단 속의 수치심, 매혹, 실망, 상처, 분노 등의 정동적 경험을 거쳐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죠.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이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가를 감지하는 어떤 논리(제가 ‘매력의 경제’라 부르는 것)가 SNS에서의 전시나 피투자자로서의 가치 상승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경향을 그냥 비판하거나 분석하는 걸 넘어서 그 문화적 경향에서 어떤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보려면, 매력에 두 종류가 있음을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이게 제가 최근에 연구 중인 문제에요. 말하자면 표상적, 재현적 매력과 감각적, 정동적 매력이 있다고 할까요?
이게 또 한편으로는 번역의 모호성이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이를테면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 같은 사람이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페어가 말하는 ‘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어요. 또 한국에서 『매력 자본』3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인데요. 그 책의 논지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의 성적 매력 역시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지금 한국어에서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어요. 근데 또 이게, 어떻게 보면,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이상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앞서 얘기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감각적 자극, 성적 끌림, 도덕적 관심, 지적 관심, 미적 관심, 경제적 이해관심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잖아요.

민서
Erotic Capital이 “매력 자본”으로 옮겨진 건 ‘매력’의 원형적인 이미지가 성적인 범주로 이해되서 그런 걸까요? 여러모로 ‘매력’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생산적인 모호성이 있는 것 같네요.

희우
맞아요. 경험적 세계의, 지저분하게 얽혀 있는, 분화되지 않은 그런 힘인 거죠. 저는 매력의 경제가 정치적 관심, 지적 관심, 미학적 관심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아마도 이게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 계몽, 교양이 무력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매력을 두 종류로 나눠 보면 좀더 재밌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이 조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어요. 먼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SNS에서의 자기 전시나, 아니면 투자자들 사이의 평판 등으로 평가되는 매력은 이미 전달 가능하고 유통 가능한 방식으로 재현된 매력이지요. 그렇게, 어떤 추상적인 기호들로 전시될 수 있고 평가될 수 있는 매력이 있는 한편으로, 아까 민서 씨가 ‘매력의 물리학’이라고 말씀했듯 훨씬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의 매력이 또 있죠.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면 저는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는 힘이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자가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고 했던 그 보드리야르적 의미의 기호와 관련된다면 후자는 들뢰즈적 의미의 기호랑 관련이 있어요.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는 언어처럼 추상화된 기호뿐만 아니라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것까지 포함하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목재를 만질 때 느끼는 까칠까칠함이나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같은 것. 들뢰즈는 그런 것들도 나무가 내뿜는 기호라고 하는데요. 조각가나 목수가 되려면 그런 기호들을 해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잖아요.

민서
비언어적이고 비표상적인 그런 것들……

희우
그렇죠. 어떤 예술 작품, 특히 회화 작품 같은 것이 그 두 종류의 매력의 모호한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매력적인 회화의 표면은 한편으로는, 가령 화가 지망생들한테는 배움을 유인하는 강렬한 기호들로 가득한 것이죠. 화가 지망생은 표면에 겹겹이 쌓인 물감들의 층이라든지 뒤섞임이라든지 갈라짐 같은 것들을 지적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해독하면서 배우죠. 그런데 그렇게 매력적인 회화 작품은 많은 경우 투기 상품이 되잖아요.

민서
그렇죠. 이 그림은 뜰 거야, 하는 투기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게 매력에 대한 모종의 해석인 건지…

희우
하지만 그런 번역이 생각보다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젊은 화가는 당장 매력적인 회화를 생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되는 것은 작가의 자기 홍보(페어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 상승), 작가의 명성, 작가에 대한 평판, 경매된 이력, 비평가와 구매자, 투자자 들의 평가가 축적이 되고 난 이후니까요. 그래서 매력의 두 측면이 현실에서는 상호작용하고 변환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론적으로는 분리할 수 있고 분리하는 게 좋다는 거예요. 매력이 주체성에 미치는 효과를 사고하기 위해서 분리할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제가 「매력의 경제학」이라는 글을 쓸 때는 이런 생각들이 아직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매력이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논리, 재현 논리가 되었다는 비판과 매력이 어떤 비재현적인, 감각적인 배움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그 두 가지 논지가 섞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던 것 같아요.

민서
그렇네요.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중핵에 있는 매력과 거기서 우리가 되짚어 볼 수 있는 배움의 계기 내지는 배움의 절차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매력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느냐, 이 두 가지 문제가 섞여 있다는 얘기죠.
음, 저는 그 charm과 attractiveness의 구분이, 매력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와는 별개로 유용한 구분이라고 여겨지네요. 도식적으로 정리해보자면 attractiveness는 평판이나 어떤 고도의 상징적 기호들, 그리고 이제 그 기호들이 번역되고 유통되는 기호가치, 어떤 경제적인 재화로의 교환 가능성과 연결되는 매력이고, 또 다른 한편에는 비표상적이고 비언어적인 매력으로서 charm이 있다는 거네요. 마우리치오 랏자라또가 쓴 『기호와 기계』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보셨나요? 거기서도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를 구분하는데…

희우
맞아요! 읽어 봤습니다.

민서
그러니까 들뢰즈적 의미의 비표상적인, 상징화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육박해 오는, 그렇기 때문에 신비화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매력이 있는 거겠네요.

희우
그렇죠. 근데 그거를 어떻게 한국어로 나눠 부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칸트도 숭고를 얘기할 때 수학적 숭고랑 역학적 승고를 구분했어요. 매력에도 어떤 수식을 달아서 구분할 수 있을까요? 랏자라또처럼 기표적 매력과 비기표적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어떤 매력이든 평가되고, 소통 가능해지고, 수치화 가능하려면 기표적인 것으로 재현이 돼야만 하는 것이긴 하죠. 그렇지만 우리 삶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변화시키거나 하는 게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민서
말씀하신 예를 들어서 비표상적인 무언가가 떠오르더라도, 그걸 결국 시장에서 유통시키고 카탈로그를 만들고 비평을 하고, 또 콘텐츠를 큐레이션하고 이런 과정에서 그게 계속 상징화되고 기표가 될 텐데, 그거는 일종의 사후적인 프로세스인 거고 그 이전에 애초에 비기표적인 어떤 것이 왜 우리의 주목을 끄는가를 해명하려면 어떡해야 할지는 좀 생각해봐야 하겠네요. 표상 이전에 존재하는, 날 것의 힘들이 경합하는 세계…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힘의 시험(trial of strength) 같은 것도 떠오르구요. 저로서는, 희우 씨가 비평했던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서는 교실이라는 현장으로 표현됐고 우리 얘기에서는 SNS와 같이 거의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학습의 장이자 동시에 자기를 전시하는 전시장, 그런 세계를 분석할 때 이런 개념의 구분이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우
정확히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이자 산업적 논리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한편으로는 전시장이나 투기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교실이기도 한 것이죠. 우리는 자신의 가치평가를 높이려고 애쓰는 피투자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야만적’인,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상태’에 유예된 사춘기 학생들이기도 하다는 거죠.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것이 동시대 문화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지금은 모호한 가설 수준인 것이고, 이제 좀 연구를 해야겠지요. 그러면서 다른 분과들, 사회학이라든지 경제학 등으로 많이 확장하고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민서
『피투자자의 시간』을 우리 논제에 맞게 좀 과감하게 재해석을 해보자면(여기서부터는 옮긴이보다는 독자로서 말해보려 하는데), 그걸 ‘투자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업 경영, 국가 정책, 사회운동까지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의 흐름을 좌우하는 평판의 흐름, 주목의 흐름, 무엇이 윤리적·미학적으로 우월하다는 거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 ESG 투자도 마찬가지고… ‘이 시대에 이럴 수는 없어’, ‘저건 정말 아니야’라는 판단을 사람들이 다 갖고 살아가잖아요. 무언가를 접할 때 어떤 윤리적·미학적기준에 따른 생래적인 거부감 같은 게 발생하고, 그걸 통해 특정한 집단, 혹은 투자 대상의 매력도는 낮아지는, 이런 식의 동학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폐어가 말하는 것은, 결국 그게 기업의 투자를 넘어서는 자금, 시간, 노력, 평판, 매력, 감정 이런 것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 흐름들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재구성할 건지가 『피투자자의 시간』이 제기하는 과제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금융에 대한, 그리고 금융과 얽혀있는 이 비금융적인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된 투자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을 번역하고 필드워크를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가치, 대의, 정치인, 집단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고 그 대상에게 돈이든 시간이든 관심이든 내가 가진 자원의 일부를 ‘투자(invest)한다는 것. 나의 일부를 그만큼 던져넣는다는 건, 그 비율에 비례해서 그 대상의 운명과 내 운명이 일정하게 묶이는 것이기도 하고, 거기서 그만큼의 유대(bond)가 발생한다는 것.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세계를 이런 방향으로 만들어나가는 흐름에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서있고 싶다. 나도 그 일부가 되어, 오롯이 함께하진 못해도 그 에너지의 흐름에 뭔가를 보태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시간이나 에너지를 쏟게 되는 것 같거든요. 어떤 단체나 개인을 후원할 때도 이런 맥락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 같구요. ‘투자(投資)’의 ‘자(資)’는 일차적으로는 자본, 재물이나 금전을 의미하지만 – 어떤 내러티브를 가지고 사회를 ‘혁신’하겠다고 천명하는 스타트업이나, 테슬라 같은 기업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 시간을 투자한다, 관심을 쏟는다는 것도 사실 같은 맥락인 것 같구요. 사회이론적으로는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의 경제학도 이런 ‘투자’의 대상이 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비경제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용례에 해당하구요.
이걸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얘기와 엮어보면, 매력의 정치경제라는 거랑 닿는 거 같아요. 무엇이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지를 둘러싼 사람들의 경합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희우
그렇죠. 실제로 페어 책에도 그런 얘기가 있죠. 대안 투자 혹은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목표는 매력도가 평가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이라는.

민서
매력도라는 게,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모종의 에너지들의 흐름을 조건 짓는 것일 텐데, 그 매력의 평가 기준은 미학적일 수도 있고 윤리적일 수도 있고요. 책에서도 언급하는 노스다코타 파이프라인 투자 철회(#DefundDAPL) 운동처럼 미국의 화석 연료 석유를 운송하는 송유관에 대한 투자가 왜 매력적이지 않은지를 그 운동가들이 끊임없이 알리는 방식으로 운동이 이루어지잖아요.
결국 그것도 매력이 평가받는 매력도에 평가 기준을 바꾸고 그걸 통해 매력 평가에 근거한 신용 할당 기준을 바꾸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신용 역시 매력이랑 마찬가지로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어떤 비경제적인, 일종의 정동적인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희우
예, 근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의문이 한 가지 있는데, 이른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입장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거예요. 페어는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를 언급하는데요.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인 평가가 의문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말했듯 ‘정동의 흐름’ 같은 것과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좌파 포퓰리즘과 페어의 주장에는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거든요.
저도 무페의 작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무페의 기본적인 전제는 제도적·법적·물리적으로 현행화된 ‘정치(politics)’와 그것의 사라지지 않는 구성적 외부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다르다는 것이고, 정치를 끊임없이 탈구축하고 재구축하는 ‘정치적인 것’―어떤 적대라든지 불만, 분노 같은 것들―이 해소될 수는 없다는 거지요. 그것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는 어떻게 적대나 갈등을 ‘해소’할 것인가가 아니라 적대와 갈등의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어디에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가 되지요. 그런 흐름의 형성이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면,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효과적으로 되기 위해 그런 정동적 흐름들을 조직하고 흐름들에 개입하는 문제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왜냐면 결국 사람들이 투자를 통해서 그냥 부자가 되고 자산을 증식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거를 욕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잖아요. 사람들이 뭔가 다른 걸 욕망한다는 것은 현 상황에 대한, 처지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분노가 있다는 뜻이고요. 욕망의 흐름을 그렇게 조직할 수 있을 때 금융자본주의 조건을 전유해서 어떤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겠다는 전략도 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지……

민서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첫째가 좌파 포퓰리즘이 이야기하는 정치적 적대라는 게 피투자자 액티비즘에서는 무엇이냐, 아니 있기는 있냐. 이건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기획 자체를 의문시하기보다는 금융시장 내부로 들어가버리는 게 아닌가. 사실 이건 꼭 좌파 포퓰리즘의 시각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둘째 측면은, 희우씨가 욕망과 정동의 문제라고 말한 부분인 것 같아요.
첫 번째 지점에 대해서는 제가 북토크를 하면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기도 한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이런 식으로 이해가 많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특정 기업이 비윤리적인 관행을 보이니 동일 업종의 다른 회사 주식을 사는 게 대항 투기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를 많이 하시는데요. 하지만 일단 페어가 말하는 대항 투기는 사회운동의 레퍼토리지, 돈을 벌 목적으로 개인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투자를 어디다가 하자, 이런 건 아니에요. 범박하게 말해 민주주의 정치는 1인 1표인 것과 다르게 금융시장의 정치는 1원 1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선각자적인 개인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금을 끌어서(상대적으로) 대안적인 기업에 투자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명확하잖아요. 페어가 얘기하는 거는 그래서 어떤 기준으로든 윤리적이고 좋은 기업, 혹은 대안적인 기업에 우리의 자금을 할당하여 돈도 많이 벌고, 이렇게 꿩 먹고 알 먹고 하자는 게 아니에요. 거대한 자산 시장의 흐름을 움직이는 잣대들과 가치들이 있잖아요. ESG처럼 ‘바람직한’ 자산 할당의 기준을 변경시키는 걸 목표로 삼자는 거죠.
어쨌든 그 오해를 해명하고 나서도 남는 두 번째 쟁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가령 트럼프 같은 우파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왜 떴을까를 이해하려면 사람들의 정서적·정동적인 흐름과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거죠. 적대의 선이 지금은 외국인 타자, 이주민 타자, 여성 타자, 장애인 타자 대(對) 우리라는 식으로 그어지고 있지만, 그 전선을 정말 이런 문제를 몰고 온 주범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했던 엘리트 세력에게로 돌리자, 이게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일 텐데요. 아까 하신 질문은 페어에게는 이런 정동의 어떤 재배치 내지는 그 흐름이 다르게 흘러갈 물길을 어떻게 터줄 거냐, 이런 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안 보인다는 말씀인 것 같아요.
저도 타당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페어의 독자로서 우리가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 고민을 전개시켜볼 수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우리 대화랑 계속 연결되는 지점인데 매력이라는 개념이 기표적이면서도 비기표적인 측면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죠. 기후금융에 관련된 필드워크를 하다보면 어떤 특정한 이미지들의 질서 같은 게 있어요. 이건 지금 제가 하는 연구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지금 인류세 시대의 어떤 파격적인 재해의 스펙터클, 이제 그것 때문에 멸종되어가는 생물종들의 얼굴, 그런 이미지들이 뿜어내는 어떤 정동적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절망적이거나 희망적인 미래상을 담은 풍경들. 이건 정말 아니다, 아니면 저렇게 가야 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 펀드매니저들도 사회운동가들도 그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모종의 추적을 강화시켜 나가는 그런 이미지 유통과 인용의 질서 같은 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여기에 어떻게 비판적으로 관여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있으면 어떨까요? 페어가 제시하는 투자의 정치경제학을, 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력도 혹은 매력이라는 키워드를 매개해서, 정동적 차원에 대한 고려와 함께 가져갈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지 않을까요?

희우
예. 그런 것들이 같이 이야기됐을 때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최근에 다시 샹탈 무페를 읽고 있는데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아주 동시대적인 저술들인 것 같아요. 저도 무페(혹은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비판하는 저술들만 많이 읽어서 사실 ‘한물 간 이론’ 정도의 막연한 상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직접 읽어보니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경우 많잖아요. 어떤 저자가 많이 비판 받을 때, 막상 직접 읽어보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는 경우. 제가 오래전부터 고민했던 것도 비슷한 문제인데, 민서 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한 7년 전에, 비평가로 등단하기 한참 전에 발표했던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2017)이라는 어설픈 글이 있어요. 전역한 이듬해에 썼던 글인데, 엉망인 글이지만…… 그 글에서 제 진단은,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을 경험하는 한국의 젊은 남성들이, 그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한 여성성의 ‘환상’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런 환상에 고착된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대두될 거라는 것이었죠. 한국 군대에서 어떤 여성혐오적인 감정이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봉합’하는 것으로서 활용이 되고 구조적으로 생산이 되고 있어요. 그런 진단 위에서, 그렇다면 그 불만이나 고통, 분노, 억울함 등의 정동을 어떻게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가 아닌, 군대 체제나 부조리, 군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었고요. 그런데 이 문제는, 제가 그 글을 썼던 때보다 지금 더, 훨씬 더 절망적으로 나빠졌잖아요.

민서
그렇죠. 그 글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 때 짚으셨던 경향이 확실히 더 짙어진 것 같아요.

희우
왜 이 지경이 된 걸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다가 무페를 다시 읽게 됐어요.
그리고 앞의 문제랑 좀 연결되는 것일 수 있는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말하자면 다소 엘리트들의, 혹은 최소한 ‘프레카리아트’라고 하는, 가난하지만 고학력이고 도시에 거주하는……
저 역시 프레카리아트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아무튼 페어의 대안은 그런 존재들이 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페어는 과거의 노동운동과의 유비 속에서 액티비즘을 얘기하는데, 페어는 아니라고 하지만,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과거의 운동을 대체하는 것인가 하는 느낌도 들죠. 어쨌든 이 유비 안에서 생각해 봤을 때, 노동자라는 경제적 조건을 통해서 단합할 수 있었던 노동운동에 비해서 피투자자 운동이 그 정도의 대중성이나 조직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부분도 좀 궁금하네요.

민서
두 가지 쟁점이네요. 하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주인공인 피투자자들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춘 사람들에 한정되는 게 아니냐 이런 쟁점이고, 두 번째는 이거랑 연결된 질문으로서 이 운동이 노동운동만큼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냐는 질문인데요. 이건 노동운동과의 관계 맺음이라는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두 번째 것부터 답변을 해볼게요.
이 책에 굉장히 여러 논지들이 있지만 사실 책의 구조 자체는 굉장히 간명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책의 소제목들이 A&B 식인데, A에 해당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의 정치와 운동을 설명하는 어휘들이고, B에 해당하는 것은 금융화 이후의 사회 문제, 새로운 사회 문제, 이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필요한 어휘들이지요. 근데 이 A와 B의 관계가, 제가 볼 때는 경우에 따라 어떤 거는 대체에 가깝고 어떤 건 대체라기보다 병존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근데 확실한 건 저자도 얘기하고 있지만 산업자본주의적 착취만으로 설명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지, 과거의 문제가 사라졌다거나 비중이 적어졌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금융자본의 위세에 주목한다 할지라도,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문제, 곧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고 여기에 대한 노동운동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요.
작년에 진행했던 북토크 중에, 플랫폼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라이더유니온에서 활동하셨던 분이 토론해주셨던 내용이 기억이 남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을 경유한다고 해서 노동운동의 레퍼토리를 배제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기성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레퍼토리를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는데요. 저는 이런 고민을 통해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지금은 낯설지만 더욱 대중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 3장에서 다루는 플랫폼 자본주의 관련 투쟁 현장은 물론이고 금융적·비금융적 가치평가가 중요한 다른 전선에서도요. 여기까지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요.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저자도 3장에서 희우 씨가 말씀하셨던 비판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3장에서 얘기하는 게 플랫폼 라이더들 혹은 배달 플랫폼에 혹은 그런 뭔가 별점 평가를 주고받고…… 페어가 플랫폼 협동조합 이런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은 디지털 리터러시가 있고, 대안적인 플랫폼을 만들 수 있고, 그걸 통해 자기를 이렇게 전시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존재들인데요. 그러면 이게 과연 ‘보편화’될 수 있는 전략이냐 이런 의구심이 당연히 저는 나올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페어가 얘기하는 것 중 하나는,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을 전유했던 주인공들이 당시로서는 극소수였다는 거죠. 그렇지만 사후적으로 볼 때 그건 일종의 부상하는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고, 앞으로 점점 커져갈, 전범적인 존재들이었던 거죠. 지금 프레카리아트-피투자자 액티비스트들도 수적으로는 작을 수 있어도 앞으로 점점 중요해질 흐름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어요. 여기까지가 옮긴이로서 할 말이라면, 독자로서 덧붙이자면 저는 앞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운동에 대한 예측이 한 사람의 이론가의 몫이라기보다는 운동과 이론이 주고받으면서 만들어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희우
그렇군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책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이 질문은 민서 씨가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오래 고민했을 문제일 거예요. 어찌 보면 너무 거창하면서도 여러모로 괴로운 질문인데요.
기후 문제의 광범위한 시급성에 비추어봤을 때, 페어의 전략이 너무 소극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지요? 사실 한국어판 뒤에 민서 씨랑 페어 인터뷰가 있잖아요. 굉장히 인상적이고 엄청난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도 페어가 이런 문제를 스스로도 좀 의식을 하는 것 같았어요.

민서
감사합니다(웃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인터뷰를) 하기 잘한 것 같아요. 그런데 희우씨는 기후 문제가 시급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시급한 것 같나요?

희우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민서 씨보다 훨씬 모를 것 같아서 자신은 없지만요, 예를 들면 ‘생태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곤 하는 입장의 책들을 봤을 때, 이를테면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저자들의 책을 읽었을 때는 지금 당장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중단되고 새로운 체제가 나타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건 그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기후 생태 문제의 전문가인 과학자들도 그렇게 얘기를 많이 하고 있잖아요.

민서
그렇죠.

희우
그런데 페어의 전략은, 이건 이 책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푸코식 ‘비판적 전유’의 일반적 문제일 수도 있는데, 지금 현존하는 체제, 이 체제에서 유용한 것으로 식별되고 재현되는 조건들 ‘내부’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이런 방식으로 세계적으로 고착화되어 있고, 어떤 투자자들과 거대 기업들이 행성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런 상황이 우리의 주체성을 조직하고 있는, 이런 조건들 내부에서 약간씩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방법인 거죠. 그러니까 어떤 엄청난 속도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러 저술에서 제기되는 대안들이, 어떤 거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그게 옳다는 건 납득이 가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고, 한편으로 페어의 책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실천이나 저항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는 좀 구체적인 상을 주지만, 이것만으로 괜찮을까 하는 의심이 남습니다……

민서
말름이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4에서서 얘기하는 게 그런 거죠. 기후위기의 시급성,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파국적 재난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속하고 급격한 단절이다. 그리고 그걸 이루어낼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주체의 형성이 시급하다. 말름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그 혁명적 시도의 합리적 핵심을 기후위기 시대에 되살려야 된다는 거고요. 그걸 ‘생태적 레닌주의’라고 표현하죠. 거기서 두드러지는 건, 지금 당장 무언가 시급히 일어나야 한다는 호소죠.
말름이 인용하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이 전개되던 와중에 동지들한테 썼던 글 중에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기다리는 건 범죄다.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의회를 기다릴 권리가 없다… 기다리는 건 형식적인 걸 따지는 유치하고 불명예스러운 게임이고, 혁명에 대한 배반이다” 등등. 지금 기다리는 와중에도 온갖 모순이 폭발하고 있고,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인페이션트(impatient)의 감정이 가득한 글입니다.
반면 페어는 지금 존재하는 통치 질서를 우리가 끝까지 한번 잘 활용해 보자는 식의 주장인데, 말씀하신 대로 그게 현실성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현실로 여기는 것들이 붕괴하고 있는 시점이라면 그 ‘현실적’인 선택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기성 체제 내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건 기성 체제가 권장하는 어떤 비판을 통한 변화의 게임에 일정한 정당성과 가치가 있다는 걸 승인하는 거기도 하구요. 맞아요. 말름과 페어의 논의는 맥락상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이걸 좀 큰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페어가 계속 갖고 가는 유비, 즉 노동조합 운동과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유비가 한계에 봉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노동조합들이 임금 단체 협상을 하고, 복지국가를 만들어내고, 좀 더 인간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를 위해서 노력해 온 건 맞지만, 그 목적이 과연 정말 ‘인간적인 자본주의’ 자체였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해석도 많단 말이죠. 이건 페어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그렇게 저항해서 끊임없이 자본의 효율을 낮추고,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이른바 ‘이윤율의 경항적 저하’를 앞당겨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격화시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그러니까 이 체제 자체를 ‘지양’한다는 계기가 노동운동에 있었다는 거죠. 체제 자체를 좀더 인간적으로 개량하는 것을 넘어서요. 페어가 기후 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지금 기후 파국을 초래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전망이 피투자자 액티비즘에 있는가? 여기에 확실하게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렵죠.
다만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가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책에서 나오는 화석 연료에 대한 투자 철회 운동이나 ESG를 활용해서 일정한 제도의 변화를 도모하는 일군의 집단들, 이전이라면 함께하기 힘들었을 집단들(투자자, 컨설턴트, 노조, 씽크탱크 연구원 등등)이 모이고 새로운 운동의 형식을 창안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걸 조명하는 데 페어의 논의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페어 논의와는 별도로, 제가 말름의 그 책을 읽고 든 생각은… 레닌주의의 ‘지금 당장 단절하고 넘어가자’는 식의 주장이, 당위적으로는 공감이 되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이게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에 대한 전망이 잘 안 보인다는 거예요. 필요성과 가능성 간에 괴리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기후금융 연구를 추동하는 물음도 이런 괴리감과 무관하지 않구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1.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p. 218-19. ↩︎
  2.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
  3.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
  4. 안드레아스 말름,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우석영·장석준 옮김, 마농지,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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