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연구자 조민서와의 대화
기후금융 연구/기후정의행진/기후우울증
기후금융 연구
희우
이제 자연스럽게 필드워크에 대한 얘기를 하면 되겠네요. 먼저 필드워크 하면서 인상 깊게 본 장면 혹은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부터 조금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서
필드워크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여의도에서 보내게 됩니다. 여의도가 한국에서는 금융산업의 수도 같은 곳이니까요. 증권사들, 한국증권거래소, 자산운용사들이 여의도에 밀집해 있고요. 정책을 입안하는 국회의사당도 있으니… 여러모로 정치경제의 수도 같은 곳이죠.
여의도의 마천루 빌딩에 들어갔을 때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들은 굉장히 평면화돼 있는데, 그게 금융의 시선을 잘 드러내는 이미지 같아요. 사실 창밖은 아주 울퉁불퉁하고, 갈등이나 적대가 많은 세상인데, 금융의 시선에서는 투자 대상으로 평면화되는 그런 이미지가 기억에 남아요.
기후금융 쪽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나기 전에, 제가 제일 처음 생각했던 이미지는 사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에 가까웠어요. 모든 걸 경제적으로 동질화하고 계산하고, 효율적으로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금융가들에게 그런 아비투스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분들이 기후 쪽에 관심을 가지고 금융적으로 뭔가를 해나가려 할 때는 다른 면모도 있어요. 기후 문제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기후 테마가 투자처로서 매력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걸 통해 지구과학과 기후변화 담론, 그걸 둘러싼 여러 가지 맥락들을 보면서 거리 행진 같은 움직임에도 참여하게 되기도 하지요. 그런 걸 보면서 이분들을 회색 신사 같은 이미지로만 본 제 관점이 오히려 평면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건 제 연구보다 좀 더 넓은 맥락이긴 하지만, ‘기후인’이라고 불리는 범주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 포함되는 존재들로는 싱크 탱크도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환경운동 단체들도 있을 테지만, 현재 시민사회에서 아직 특정한 범주로 구획하기 힘든, 하지만 기후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연루될 수 있는 모종의 이벤트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후가 아니었더라면 금융인으로, 운동가로, 연구자로, 예술가로 따로따로 살아갔을 이들이 기후 문제를 계기로 뒤섞이는 풍경들을 여러 군데서 보게 돼요.
하나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기후금융과 관련된 컨퍼런스에서는 대기업 출신 한 발표자가 ESG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 책 이미지와 책의 한 문장을 인용하는 거예요.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식물들의 것이다, 그런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기후위기나 인류세, 생태에 대한 감수성이 문단에서도 얘기가 많이 되는 걸로 알고 있고, 비판적 사회과학이나 운동 진영에서도 많이 얘기되고 있지만, 이제 그런 담론이 금융계와 산업계를 포함한, 거의 모든 영역의 언어에 부분적으로 침투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이런 상황을 냉소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만 기후위기에 대한 감수성과 윤리적 책임 의식이 그 자체로 ‘급진성’의 표지로 통용될 수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대한 생태적 비판이라는 계기 자체가 동시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재편이 된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자본에 친화적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감수성이 피상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그게 어디로 이어질지 미리 예단하지는 않으려 해요. 이제는 ESG 투자를 비롯해 기후위기에 쏟아지고 있는 정치적 관심과 자금의 흐름이―우리가 얘기했던 투자의 정치학하고도 연관되는 부분인데―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서 어떤 정치적 동학을 만들어낼 것이냐는 부분을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동학의 최전선에 있는 행위자들이 우리가 ‘기후금융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컨설턴트, 그리고 기업과 정부에서 관련 사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인 것이죠.
희우
그래서 그쪽을 연구하고 계신 거군요. 그런데 ‘기후금융’이라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여전히 생소한데요. 기초적인 수준의 설명을 좀 해주신다면요.
민서
일단 이 연구를 하게 된 문제의식부터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제가 관심 있었던 주제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가 어떤 지점에서 촉발되는가. 그걸 둘러싼 정치적 동학이 어떻게 전개되느냐는 건데, 그 중 석사과정 때 관심을 가졌던 게 20세기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복지 자본주의, 내지는 복지 정책이라는 키워드였죠. 인간 노동력의 상품화에 한계를 그었던 복지 정치의 흐름들이 20세기 복지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면, 지금은 인류세와 기후위기 담론의 유행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생태적 위기가 도래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20세기의 자본주의에 도래했던 위기와 그 한계의 근거가 인간의 노동적 성격이라는 이른바 ‘내적 자연’에 대한 문제였다면, 지금은 행성적 한계라고 부르는 ‘외적 자연’이 투쟁의 중심에 온다는 거죠.
기후위기를 여전히 부정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만(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죠), 다른 대다수의 소위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엘리트들은 기후위기의 실재를 부정하지는 않죠. 오히려 대규모 ‘녹색 투자’를 통해 환경 문제를 어떻게 새로운 경제 성장의 계기로 삼을지 고민하죠. 한국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저탄소 녹색성장을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 틀을 짰던 분이 현 정권에서 기후 관련 문제를 총괄하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를 이끌고 있죠. 이런 걸 보면 행성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기후위기, 이상 기후,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지금까지 굴러왔던 게임의 규칙만으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되는 위기로 나타나고 있고, 여기에 대한 대응으로 ‘녹색 자본주의’라는 새판 짜기가 일어나고 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 이 새판 짜기에 참가하는 주인공들은 누굴까. 이 과정에서 전개되는 기후 정치의 문법은 뭘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희우
그러니까 ‘복지정치’에서 ‘기후정치’로의 이행은 ‘내적 자연’에서 ‘외적 자연’의 한계에 대한 관리로 이행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구체적인 환경 문제나 다른 직업군, 혹은 운동 집단이 아닌 엘리트 주도 기후위기 대응,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의 대응 쪽을 보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민서
예를 들어 한국에서 기후 정치와 관련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말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탄소 중립’이 있고요. 2022년 초 이재명, 윤석열 대선후보가 토론회에서 기후와 관련된 얘기를 딱 한 번 한 적이 있어요.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한테 원자력 에너지를 확충하면 국제사회의 경제적 흐름이랑 어긋나는 게 아니냐, 하고 질문했던 게 있는데 여기서 ‘세계적 흐름’의 예시로 들었던 게 ‘RE100’, 그다음 ‘유럽연합 택소노미’였죠. 그런데 이 제도들이 모두 금융이랑 직결된 말이에요.
RE100은 ‘Renewable Energy 100%’를 줄인 말인데, 기업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100퍼센트 재생에너지로 조달한다는 캠페인이에요. 영국의 한 비영리 시민단체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화석 연료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한테 동참을 호소해서 일종의 서명을 받은 거예요. 여기 가입하고 실제 RE100을 달성한 기업들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등 꽤 되는데, 이런 변화는 국가의 강제가 아니라 민간의 자발적인 선의에 기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러면서 금융시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이 되었고요. RE100을 이행하는지가 친환경 경영의 지표처럼 되니까요. 이 상황에서 주요 정당의 후보가 미국도 영국도 유럽도 다 하는 흐름이 있고,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도 압력을 받고 있는데 정부는 기업들의 RE100을 어떻게 지원할 거냐고 물었던 거죠.
유럽연합 택소노미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수립한 친환경 투자의 기준, 그러니까 무엇이 ‘친환경’인지를 분류하는 체계에요. 요새 사실 ESG, 그린, 탄소중립 같은 말들이 유행하다 보니까 유럽연합 입장에서는 이른바 그린워싱(greenwashing)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진짜 그린이고 무엇이 가짜 그린인지를 판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그래서 유럽연합 차원에서 분류해 주겠다, 그렇게 만든 게 택소노미죠. 여기서 질문은, 이 택소노미가 애초에 왜 필요하냐는 거죠. 공적인 권력이 자신의 역량으로 모든 저탄소 전환을 이뤄내는 게 아니라, 무엇이 ‘녹색’인지를 가려내는 ‘신호’를 개별적인 경제 행위자들에게 발신해야 되기 때문에 필요한 거거든요. 유럽연합 차원의 공적 재정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민간 자본을 어떤 식으로든 유인해서 활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생겨나는 거지요. 그 돈을 어디로 흐르게 할 거냐. 여기서 아까 얘기했던 투자의 흐름, 특히 ‘매력적인 그린 투자’를 정하는 기준 설정의 문제가 등장하는 거죠. 『피투자자의 시간』에 나오는 표현으로는 이른바 ‘신용 할당의 기준’을 만들려고 했던 게 택소노미인 거지요.
한국의 대선 정국에서 기후와 관련하여 회자되었던 RE100, 택소노미 둘 다 결국 기후와 관련된 자본의 흐름에 대한 문제인 거죠. 기후변화 대응에서 (가령 말름 같은 논자들이 급진적 전환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보는) 공적 권력이 아니라 초국적 민간 자본, 이들이 투자하는 자본이 이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현실. 이걸 어떻게 볼 거냐는 게 제 문제의식입니다. 그래서 기후금융과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컨퍼런스, 심포지움, 세미나 같은 행사들을 참관하거나,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생산하는 말과 글에 대한 분석, 경우에 따라서는 이 행위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인터뷰나 관찰을 병행하고 있어요.
이 ‘기후금융’이라는 건 기후 문제는 금융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할 수밖에 없다, 혹은 해봄직하다 같은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담론적 현실이기도 할 것이고, 기후변화에 대한 모종의 대응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상이한 행위자들이 모여드는 장(field)이기도 할 텐데요. 소위 ESG 투자 같은 걸 하는 펀드매니저들, 각종 동향을 파악하는 애널리스트들, 기업 가치와 결정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신용 평가사들, 회계법인의 컨설턴트들, 여기에 대한 공적 규제의 틀을 짜는 국가의 금융 관련 기관들 등 협의의 ‘금융계’도 있겠지만, 기후위기 대응에서 기후금융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이들과 함께 전개되는 다른 정부 기관들, 씽크탱크, 사회운동들까지… 이들을 포괄하는 기후정치와 관련된 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려고 해요. 이 모두를 학위논문에서 다 다룰 수는 없겠지만, 큰 그림을 나름대로 그려보고 있어요.
희우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지금 기후변화에 대한 지도 그리기, 혹은 대응의 방식과 수단을 주도적으로 제공하는 게 (국가나 학문이 아니라) 금융이라는 거겠지요.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딜레마와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지금 한국의 금융사들, 관계자들의 분위기는 좀 어떤가요? 그들이 기후 문제를 재현하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 이런 것들이 좀 궁금하네요.
민서
지금 진행 중인 관찰과 분석이라 거칠지만, 인상 깊었던 것만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우선 경영학에서 ‘시간 지평(time horizon)’이란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10년 후냐 5냐 후년 아니면 평생이냐, 우리가 투자하거나 자금을 운용할 때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게 결국 어디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거죠. 이게 투자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고, 집합적인 정치건 개인적인 경제활동이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염두에 두는 시간의 길이가 모두 해당될 텐데요. 미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 파장의 크기와 길이는 이렇게 될 것이니 거기 맞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거죠. 가령 주식시장에서 일론 머스크가 화성을 간대, 아니면 생성형 AI가 뜬대, 이런 식의 트렌드들이 소문의 형태로 금융시장을 움직이게 되면 그 소문에 따라서 자금이 움직이게 되고, 이걸 사전적으로 돋우거나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수많은 상상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느끼기로는 기후금융에 얽혀있는 행위자들이 기후변화의 시간 지평을 굉장히 길게 잡고 있어요.
제가 만난 어떤 금융업 종사자는 보통 주식시장에서 하나의 트렌드는 5년, 10년 가면 정말 길게 가는 건데, 기후변화는 그거보다 훨씬 길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불가역적이고 장기 지속적인 트렌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 여기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말을 하신 분도 계세요.
여기서 저는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데, 금융의 핵심은 결국 금융 시스템을 일부로 해서 돌아가는 인류 사회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특히 투자라는 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내가 먼저 취득해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먹고 빠지는 게 핵심인데 근데 이제 기후변화라는 거는 그렇게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됐을 때 이 금융의 시간 지평과 금융을 그 부분 집합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금융의 논리에 점점 더 휘둘리고 있는 인류 사회 전체, 그 둘의 시간 지평이 심각하게 탈구돼 있다는 거죠.
기후변화라는 건 결국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양이 증가하면서 태양에서 지구로 보낸 열이 방출되지 못해서 대기 시스템이 바뀌는 거고, 이게 기후‘위기’인 이유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왔던, 농사를 짓고 생활을 영위해 왔던 대기의 질서가 교란되고, 이 교란, 변화의 속도와 내용이 인간의 과학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불확실성을 띠고 전개되기 때문일 텐데요. 이 기후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결국 (근대 계몽주의의 후손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태도죠. 정치 혁명이 됐건 사람의 생명이 됐건 무언가를 성취해내고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의 체계가 있었고 그게 특히 20세기에는 가시적으로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이어졌고요. 발전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결과가 20세기 특히 초중반에 (소위 ‘거대한 가속’이라고 하는)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배출했던 물질적 부하의 급격한 증가이고요. 그게 인류세의 출발점인 거지요. 인류세를 초래한 에토스라고 할까요. 낙관주의, 자신감, 믿음. 가령 일론 머스크가 보여주는 그 낙관주의와 자신만만함, 과학기술과 자본력으로 뭐든지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그런 태도. 영화 《인터스텔라》 보셨나요? 그 영화의 포스터 문구 중에 “하나가 우리는 해낼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런 문구가 있잖아요.
희우
그렇죠. 기억이 나네요.
민서
근데 영화 내용을 보면 그 문구는 좀 역설적이라고 느껴져요. 그 영화가 20세기에 나왔더라면, 혹은 지금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했다면, 자신감에 가득 찬 어조로 했다면 느낌이 달랐겠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그 영화 내용을 보면 거기서 우주로 쏘아 보내는 우주선은 일종의… 몰락한 테크노토피아에서 발사된 마지막 승부수에 가깝잖아요. 그러니까 그 문구는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래야만 한다고 주문을 거는 거에 가깝잖아요. 그 영화가 나올 때도 기후변화가 심각했으니까 그런 이미지가 나왔겠지만, 이제 거기서 느껴지는 (우린 해낼 수 있다, 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워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 저는 그런 느낌이 필드워크 하면서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필드워크를 하다 보면 결국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금융이라는 장이,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상승에 대한 기대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주식시장이 만약에 우상향하지 않는다(그게 어떤 지수건 간에)면 어떤 직군이든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상승이 항상 대전제로 깔려있고 그 믿음이 붕괴하지 않을 때만 돌아갈 수 있는 게 금융이라는 장인데요. 그런데 기후 관련 금융을 하는 분들하고 얘기를 나누다보면 이 분들은, 자연스럽게 여러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고 그 위기를 타개할 만큼 변화가 빨리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금융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니까, 그 대전제가 앞으로도 성립할 거라고 (인터스텔라 포스터의 문구처럼) 뭔가 강박적으로 이럴 거야, 이래야만 해, 라고 약간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 연사 한명 한명이 그런다기보다는, 이들이 모여있는 기후금융 장 전체의 대전제가요.
희우
그렇군요. 분위기가 조금 상상이 가기도 하는데요. 민서 씨가 가끔 저에게 필드워크를 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묻어나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고 얘기해주신 적이 있잖아요. 그런 장면들을 좀 더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어요.
민서
제가 참석했던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서시는 분들은 금융인의 특성상 가장 최신의 정보를 업데이트해서 갖고 와야 하는 분들인데요. 그분들의 프레젠테이션들을 보고 있으면 발표도 잘하시고, 형식적으로 정말 몰입도가 높았어요.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 서사에 이끌리게 되는데, 그 서사 속에도 약간 진실의 순간 같은 것이 육박해 올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굉장히 유명한 컨설팅 업체가 참가한 컨퍼런스 중 하나였는데 발표자분이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제 정보를 취합해서 동향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보니 PPT들을 계속 바꾸고 업데이트하는데 몇 년째 안 바꾼 슬라이드가 하나 있다.’ 그게 뭐냐면 각국의 탄소 감축 노력이 전혀 안 바뀌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의 무게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너무나 절망적인 느낌이 들죠.
왜냐면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증언하는 데이터를 내놓고 있지만, 기후변화가 진행되는 상황은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따라가고 있어요. 각국이 언제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얼마만큼 줄이겠다, 말들만 무성한 상황이고, 한국도 물론 예외는 아니고요.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움직임에 동행하는 국가와 시장의 문제가 지적되지 않을 수 없는 건데. 산업계, 금융계의 책임이라는 쟁점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텐데.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사실 이런 컨퍼런스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이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와중에 그게 전면화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 슬라이드 바로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되니까…… 이런 식으로 말씀하면서 직업적 소임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이럴 때는 뭐랄까, 현대사회에서, 각자가 밥벌이를 위해서, 각자의 직분이 허락하고 지지하는 범위 내에서 모종의 액션을 하며 사는데, 자기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정치인들도 그 정신으로 5년 후 임기를 생각하면서 정책을 펼 것이고, 펀드매니저들은 이게 수익성이 있다고 설득해 가면서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건데, 모든 흐름이 조화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그 결과가 충분한 대응의 부재로 귀결되는 느낌이 들어서, 연구하면서 느끼는 절망이 있어요. 어쨌든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산해내는 게 우리 같은 연구자들의 일인데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게 제때 의미를 가질 수는 있을까…… 이런 회의가 들어요.
기후정의행진
희우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은 ‘기후금융가’와는 다른 중요한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민서
제가 아는 한 펀드매니저분은 2022년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여를 하셨는데 2023년에는 안 가셨거든요. 왜 안 가셨냐고 물어보니까 너무 실망했다는 거예요. 기후 얘기를 해야 할 곳에서 왜 이렇게 기후랑 무관한 얘기를 많이 하냐는 거예요. 뭐 노동 얘기, 장애 얘기, 페미니즘, 정부 비판 등. 그래서 그런 데 너무너무 실망해서 안 가게 됐다는 거예요.
근데 정반대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급진적이었다고 실망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희우
맞아요. 그분은 말하자면 탈정치화된 기후정치를 기대했던 것 같은데, 제 주변에는 정반대의 기대를 하는 분들이 많아요.
민서
혹은 더 급진적이냐 덜 급진적이냐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 애초에 기후행진을 우리가 왜 하는가, 기후행진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도 많이 나왔어요.
희우
그렇군요…… 맞아요.
민서
희우 씨는 참여하셨던 입장에서 어떠셨어요?
희우
저도 굉장히 많은 걸 느꼈지만, 그리고 가서 아는 분들도 만나고 친구들과 같이 걷는 게 참 좋았지만, 저도 이 행진의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느낌이 좀 있었어요.
관련해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는데, 전반적이고 중요한 의제로 ‘탈화석연료’가 있잖아요. 근데 행진을 이끄는 트럭들 위에 발언자들이 한 분씩 올라와서 구호를 선창하는데 그중 한 분이 원래 화력발전소에서 일하시던 노동자였어요. 그분이 일자리를 잃은 것 때문에 발언자로 올라왔던 거로 기억해요. 그분이 자기소개하고 올라온 이유를 얘기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탈화석연료, 환경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일자리를 잃는 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정부 차원에서, 제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거나 보호해 줄 거냐 이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요. 결국 집회가 내세우는, 그리고 겨냥하는 목적, 그것을 위한 정치적 언어, 아주 강력한 구호 같은 것도 필요하잖아요.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슬로건이 꼭 필요하고, 하지만 그런 구호들이 담아낼 수 없을, 굉장히 복잡한 이해관계와 실존적 문제들이 당연히 있을 거예요. 제가 집회에서 느낀 불분명함이 그 사이에서 생겨났던 것 같아요.
민서
그렇죠. 희우 씨가 보셨다는,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가 요구했던 건 결국 기후정의 운동에서는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이야기하는 건데요. 지금 자본이나 국가부터 시민사회까지 기후위기를 전기로 모종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전환이 단순히 화석 연료를 대안적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에너지 전환 혹은 녹색 전환에 그칠 것인가 하면 그게 아니라는 거죠. 녹색 전환의 의미를, 단순히 녹색은 비화석 원료고 화석 연료는 갈색이고 이 갈색을 벗어나면 만사 OK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있을 것이고, 그 쟁점들을 예를 들면 아까 말했던 기존의 화석연료와 연계된 산업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생계를 누가 책임질 것이냐도 있을 것이고, 그 이행의 비용을 누구에게 분담할 것이냐는 쟁점도 있을 것이고요.
그리고 이 녹색 전환, 곧 탈탄소 전환을 위한 기술적 해결책의 시장을 통한 확산, 가령 전기차나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서 새로운 산업 패권을 이끌자는 게 선진자본주의 세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합의인데요. IRA 법안을 포함해서 녹색 산업을 먼저 우리가 육성하고 일종의 기술적 비교 우위를 확보해서 이걸 새로운 이윤 창출의 원천으로 삼자는 거죠.
그렇지만 과연 그런 전환만으로, 기존의 경제 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에너지원을 바꾸는 것만으로 충분하냐는 의문을 제기했던 게 기후정의행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기서도 사실 요구안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 정도로 축약이 됐었는데요. 그중에 첫 번째가 주거 빈곤이죠. 가령 한국에서 이제 재작년 여름에 특히 이슈가 됐던 신림동 침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건 기후위기의 두 가지 시간성과 연관되는 쟁점이에요.
첫째로 우리가 태우고 있는 화석 연료를 감축해야 된다. 이거는 이제 미래에 더더욱 심화될 대기 중 탄소 농도의 변화와, 그게 초래할 기후변화의 속도와 밀도를 낮춘다는 것이고요, 또 이미 지금 진행되고 있고 현상으로 나타나는 변화들이 있잖아요. 이미 기존의 기상학적인 데이터만 가지고는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인 기상 사건이라고 불리는, 말 그대로 이 기후라는 구조가 심대하게 변형되면서 그 구조의 변형이 현행화되는 사건들(홍수, 폭염, 산불 등). 거기서 이제 피해를 받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죠. 폭염에 취약한 쪽방촌 주민일 수도 있고, 산불에서 도망쳐야 하는 숲속의 동물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이미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치가 하나의 요구였는데 이런 것들은 녹색 신산업 육성만큼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거든요. 그 자체로 이윤 창출의 원천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이건 사회적 보호와 보장(security)의 문제에 가깝죠.
그 외에도 이제 현재 윤석열 정부가 특히 주장하고 있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대안적 에너지원으로서 핵발전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었고요. 그다음에 이 에너지 전환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들이 지금 국가가 지원하는 민간 자본들인데 이거 말고 다른 이행과 전환의 방식을 구상해 볼 수 없을까, 이런 문제 제기도 있었고… 이렇게 여러 요구들이 모였던 집회였던 거죠.
희우
그렇죠. 그런데 제가 잘 모르고 말하는 것이지만…… 제가 느꼈던 건 그 집회를 이끄는 깃발이라 할 만한 것의 부재였어요. 아마도 그 집회가 현재로서는 좀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려는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여러 다양한 요구들, 사회적 보장에 대한 요구라든지 탈화석연료에 대한 구호라든지 탈핵에 관한 요구는 그 집회를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묶어줄 구호는 아니었던 것 같고, 우리가 많이 보고 느꼈던, 많이 읽었던 그런 필요성들의 모음이자 드러냄이었던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는 축제 분위기가 있고, 회합의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이 참여자로서 행복하고 좋지만, 정치적인 것은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그러니까 ‘모인 것들을 다시 한 번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서
기후정의행진 집행부 차원에서 5개 요구안을 만들었고 14개 세부 요구안을 또 만들었어요.
그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탈핵을 비롯해 에너지 기본권, 그다음에 주거안전, 에너지 전환을 이윤 주도 논리가 아니라 다른 공공성을 포괄하는 식으로 가자, 그 외에도 공장식 축산에 대한 반대, 개발 사업 반대 등 여러 가지 의제들이 있었는데요. 희우 씨가 말씀하는 건,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다기한 슬로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가 잡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의제로 치면 기후·환경 외에도 반빈곤, 페미니즘, 평화, 농업 등등 대단히 다양했거든요.
희우
그렇죠. 그런데 제가 말한 건 그 집회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세대는 소위 ‘운동권’이라 하는 세력이나 경향이 대학에서도 많이 약화된 시대에 대학을 다녔고, 전반적으로 그런 투쟁이나 단결의 언어가 우리 감수성이 아니게 되었잖아요. 어찌 보면 그런 언어를 많이 상실했잖아요. 그게 흔히 말하는 ‘탈정치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최근에, 특히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후로 느끼는 문제는, 우리 감수성에 맞으면서도 강한 조직화를 허용하는 정치적 언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다양성들을 억압하거나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집회의 효과가 한층 더 커질 수 있게……
이 기후 운동도 알록달록하고, 축제 같고, 음악도 신나고, 그런 감수성부터 옛날의 데모랑은 꽤 다르다는 생각도 드는데, 저는 그런 게 좋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을 위해서 우리가 한발 더 나아가야 할 때 뭔가 그것을 허용하는 언어가 부재한다는 느낌도 계속 받게 되는 것 같거든요. 강력한 정치화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옛날의 정치적 언어를 답습하자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의제들이 있을 때 이것들의 다양성을 모으는 걸 넘어 한 번 더 조직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져요.
민서
그렇죠. 이 모든 차이들을 누비는 기표가 뭐가 될지가 불분명한 상황인 거죠. 사실 이 14개 요구안의 다양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 기후정의행진이 어쨌든 2022년 2023년 그리고 2023년 4월에 있었던 기후정의 파업까지 고려한다면 세 번 정도의 대중 동원이 있었는데(그전까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 많이 갖고 올 수 있겠지만), 핵심은 빈곤, 노동, 페미니즘, 에너지, 교통 등등의 여러 가지 의제들이 기후라는 화두를 경유해서, 시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후변화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의 정치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기후가 라투르가 말하는 일종의 ‘필수 통과점’이 되면서 그 기후라는 말을 둘러싸고 상이한 정치적 지향과 의제들을 가진 이들이 어셈블리지로 결합되는 형태인 거죠. 이들이 2022년 9월 2023년 4월과 9월에 반복적으로, ‘기후정의’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행진하고 스스로를, 자신들의 정치적인 요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목소리들이 우리가 재현/대표/표상이라고 번역하는 ‘representation’에까지 이르렀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그때 거기에 함께 현전했다는 것을 넘어서, 이제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기록하고 정치적으로 의미화할 것인가가 문제죠.
제가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던 개인 참여자들 약 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게 있는데, 행진 전체에서 인상적인 게 뭐였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거기서 이제 60% 이상이 ‘기후 정의를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를 꼽았거든요. ‘정부를 향한 직접 행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가 그다음에 40% 정도 돼요. 근데 가장 낮은 응답을 받았던 게 ‘기후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와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날 모여서 서로의 에너지를 느끼고 스스로의 존재를 현시한 거는 맞는데, 이날 나왔던 많은 목소리들을 어떻게 종합할 거냐, 어떤 하나의 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밀어붙일 거냐, 이게 남겨진 과제라는 거죠.
아까 ‘운동권’을 말씀하셨지만 거기서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는 이거예요. 운동의 시대가 이제는 지나갔다는 얘기 자체가 사실 대단히 수행적인 진술인데, 왜냐하면 지금도 운동은 계속되고 있거든요. 다만 우리가 ‘운동의 시대’라고 기억하는 시대에 비해서 현재의 사회운동이, 촛불 집회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수평적인 연대나 소통을 강조하면서 위계적인 대표 자체를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경향도 있고… 이 사회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상들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지금 동시대에 맞는 운동의 문법이 무엇이냐는 건 생각해봐야 되겠죠. 그 운동의 문법, 형식의 문제는 사실 기존의 급진적 운동의 정치가 지양하고자 해왔던 체제가 무엇이었냐는 질문, 즉 내용적인 질문이랑 떨어질 수 없죠.
기후정의행진 설문 분석을 통해 도출되는 건 결국 반자본주의라는 쟁점인 것 같은데요, 제가 설문조사를 취합할 때 (객관식 설문 문항이 아니라 주관식으로 받은 응답에서) 많은 의견이 나왔던 것이 한편에는, ‘기후 얘기가 너무 적었다. 기후 말고 딴 얘기가 많았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딴 얘기라는 건 결국 ‘기후’를 필수 통과점으로 경유하는 일종의 급진적 정치들의 의제들인 것이죠. 그것들이 이제 반자본주의 정치학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요. 다른 한편에는 반대로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충분히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는 평가가 있죠. 향후 기후정의행진의 과제는 이 사이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아닐까요?
희우
네. 더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고, 합의를 위한 노력도…… 그런데 합의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적대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모이는 사람들이, 라투르와 슐츠의 용어를 빌려서 “녹색 계급” 혹은 “생태계급”(ecological class)이라면 모인 이들이 적대하는 ‘생태 기득권’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거 아닐까요? 도나 해러웨이나 말름 같은 이들이 ‘인류세’라는 말, 이제 거의 학술적이거나 정책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그 용어를 비판하면서 ‘자본세’를 주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후위기가 우리 모두가 연루된 문제는 맞지만(그걸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만),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주범은 ‘모든 인류’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민서
『녹색 계급의 출현』에 “녹색 계급은 이미 새로운 제3신분, 즉 모든 것이기를 열망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1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계급 개념이 기술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행적이라는 게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공산당 선언이라는 텍스트를 근거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노동계급 정치라는 어떤 물질성을 띠게 되었던 것처럼 녹색 계급이라는 정치적인 집합 행동의 실체도 지금 생성 중에 있는 것 같아요.
계급이라는 개념이 적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후 내지는 녹색이라는 가치에 명시적으로 이의 제기를 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결국 피/아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결국 대두될 것 같아요. 기후정의행진 참여자 설문조사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그런 내용이 있었어요. 행진 참여를 통해 기대하는 효과를 물었을 때 많이 나온 응답이 ‘기후정의를 위한 사회적 세력 형성에 기여’나 그다음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의 인식 향상’이었고, ‘기후위기에 관련된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체제 전환의 필요’ 이건 되게 낮게 나왔거든요?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보면, 희우 씨도 아까 말했지만, 첫 번째 불평등은 기후변화를 몰고 온 탄소 배출의 역사적 책임이라는 것인데 이제까지 북반구 국가들과 남반구 국가들이 누적적으로 배출해왔던 탄소 배출량의 불평등이 있는 거고요. 두 번째 불평등은 현재 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 및 기반시설이 필요한 만큼 분배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텐데 재작년 신림동 침수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전혀 평등하지 않잖아요. 이 두 가지 불평등을 어떤 식으로 문제화할 거냐, 이거는 사실 녹색이냐 아니냐 아니면 녹색으로 얼마나 빨리 갈 거냐는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인 것이죠.
기후정의행진 참여자들도 과연 우리가 불평등, 자본주의 체제 전환, 이런 방향이 가리키는 혹은 함축하는, ‘직접적으로는’ 기후와 무관해 보이는 의제에 모두 동의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기후위기와 기후정의에 대해서 어떤 집합적인 발화를 시도하는 것을 넘어서 대응을 어떤 방향으로 해나갈지에 대한 합의의 부재가 설문 결과에도 반영돼 있지 않았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우
어떻게 그런 것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저도 최근에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최근에 참석했던, 어느 경제학과에서 있었던 컨퍼런스에서도 결국 해결책을 산업적 혁신과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찾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문제의 원인인 것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제도적·학술적으로, 대중적으로 지배적인 경향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현재 지배적인 합의라면 합의일 텐데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합의보다는 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합의에 가깝겠지만…
민서
그렇죠. 제가 여러 프로그램에 구체적으로 코멘트를 하기보다는, 이런 얘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후변화의 재현이라는 문제와 연관되는 부분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 빙하가 녹아내리는 사진부터 홍수, 폭염, 산불같이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을 통해 기후위기가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기후위기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게 파리 협정이에요. 2015년에 파리에서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막자, 정말 안 되더라도 2도 안쪽으로 제한하자 이야기가 나왔고 그 1.5, 2도라는 목표치가 많이 알려져 있지요. 몇 년까지 이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이러이러한 할당량이 필요하고 각 국가에 우리가 이걸 위해서 이때까지 이만큼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겠다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산업혁명 대비,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제약한다는 말 자체는, 직관적으로 잘 안 와닿지 않나요? 사실 지구 평균 기온이라는 것도 기상학의 측정과 개념적 조작을 통해 얻어지는 무언가에 가깝고, 1.5도라는 것도 감각할 수 없고, ‘산업화 혁명 이전’이라는 기준은 더더욱 안 잡히는 개념인 거죠. 수백년의 시간 간격이 있는 거니까. 한마디로 개개인이 감각할 수 있는 시공간 지평을 넘어서 있는 거죠.
그렇지만 분명한 건 기후변화가 진행 중이고, 폭염으로 쓰러지는 노동자와 농민들, 폭우나 산불 때문에 거처를 위협받는 사람들이 이미 있잖아요. 이런 이미지들이 기후변화의 실재성을 그나마 증언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이 기후 정치의 과정에 자기도 모르게 연루되는 게 아닐까요.
희우
방금 해주신 말씀에 두 가지 쟁점이 있는 것 같아요. 기후변화는 너무 큰 시공간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상적으로, 즉각적으로 체험하거나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은 그것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큰 틀에서 거시적으로, 지적으로 파악/표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연루된다는 거,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데서 오는 그런 정동적인·정서적인 변화에 관한 이야기네요.
민서
첫 번째 것부터 얘기해 보자면 사실 제가 이제 기후금융 내지는 정책 관련된 행사들을 참가하면 그게 축사나 인사말 형태로 나올 때도 있고 아니면 PPT에 있는 이미지로 나올 때도 있는데 거의 항상 행사 초반에는 이미 이런 얘기가 나와요.
“얼마 전에 있었던 폭염에서 볼 수 있듯이”, “이번 몇 월은 역사상 가장 더운 몇 월이었는데……” 같은.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이 극단적 기상 사건들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늘상 얼마 전에 있었던 ‘사상 초유의’ 이벤트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렇게 한편에는 너무 익숙해진 이미지, 화염이나 쓰나미 같은 게 넘실대는 파국적인 스펙터클들이 있고요. 한편에서는 빈곤 포르노그래피처럼 일종의 생태 포르노그래피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호주의 코알라를 보여준다거나 북극곰을 보여준다거나… 그러니까 이런 이미지들의 질서가 지금 얼마나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효과를 주는지, 우리가 이걸 통해서 어떤 기후정치의 당사자로 변해가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결산이 필요한 것 같네요. 그 재현의 문제야말로 사실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술은 새로운 감성 체제를 만들어내고 혁신하고 비판하는 그런 영역이잖아요.
희우
민서 씨도 아시겠지만 사실 지금 기후나 생태라는 타이틀로 진행되는 전시는 많아요. 관련된 문학작품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좀 소재적으로만 사용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녹색 계급의 출현』에 녹색 계급은 이전의 계급들(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과 달리 미학을 심하게 결여하고 있다는 말이 나와요.2 여기서 제기되는 게 재현 방법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미학적으로 좀더 파고들어 얘기하면 (앞서 우리가 말했던 문제와도 연결될 텐데) 결국 이 문제가 예술에 제기하는 질문은 신체의 감성적 측면(매력)과 이성의 초감성적 측면(숭고)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것’과 ‘우리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것’의 관계 설정이요. 라투르가 말하는 ‘가이아’도 굉장히 신체적·정서적 대상이면서 인간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거대한 대상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미시적인 체험과 극히 거시적인 인식을 동시에 요구하는 대상인 거죠. 아직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저도 이 문제에 대해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그 둘의 관계에서 결국 새로운 공통감각, 새로운 교양, 새로운 주체성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텐데…… 음, 이건 좀 정리해서 다음에 더 얘기해 보면 좋겠네요.
민서
네. 그런 경험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이랑 얘기해 보면 기후 문제로 이끌리게 된 계기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거기서 공통적인 어떤 감응의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이 경험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기후우울증’을 앓는 기후 운동가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어요.
기후우울증
희우
기후우울증이란 무엇일까요?
민서
그 생각이 나네요. 영화 〈멜랑콜리아〉(2012)를 보면 주인공이 처음엔 무엇도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이잖아요. 결혼을 비롯해 자기 주변 사회, 세계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뭔가 포기했거나 수동적으로 떠밀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주체잖아요.
제가 기후를 ‘앓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생각하는 바는 이런 거예요. 능동/수동이 영어로 active/passive이고 이제 그걸 명사로 바꾸면 action/passion이고요. 보통 ‘행위’로 옮겨지는 액션(action)의 반댓말인 패션(passion)이란 말은 보통 ‘열정’, ‘정열’ 아니면 기독교적 맥락에서 ‘수난’ 이렇게 옮기는데, 사실 ‘액션’이 행동 혹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함을 뜻한다면 ‘패션’은 뭔가를 감수하거나 겪어내는 거에 가깝죠. 기후우울증 역시 정적으로 가만히 있고 무기력하게 떠밀리고 이런 걸 넘어서, 겪음을 통한 존재의 변모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그레타 툰베리의 경우에는, 툰베리는 기후우울증을 앓는 페이션트, 그러니까 환자=앓는 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치지 않고 굉장히 정열적으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해내잖아요. 페이션트이자 액티비스트인 툰베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패션이라는 건, 나도 모른 채로 내 안에서 터져 나와서 나를 휘감고 내가 어딘가에 연루되게 만드는 어떤 계기인 거죠.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이-인 액션(die-in action)’ 같은 거 했잖아요.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다 같이 드러눕고. 사실 그게 패션이 함께 경험되는 과정인 거죠.
그러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 기후우울증이라는 걸 굉장히 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후변화를, 말하자면 위기로 앓으면서, 동시에 기후 운동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어떤 임상학적 의미의 우울이라기보다는 (물론 그것 때문에 정서적으로 힘들 때도 당연히 있지만) 일론 머스크가 체현하는 그런 식의 (낙천적인) 에이전시가 아니라 행성 앞에서 좀 겸허해지고 한계를 알고, 구속돼 있고, 묶여 있음을 아는. 근데 그것을 단순히 억압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겸허하지만 냉철하게 응시하는 그런 태도를 기후우울증 페이션트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듯해요.
희우
기후우울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저한테 처음 들려주신 게 민서 씨인데, 듣고 나서 보니까 동시대 문학이나 미술에서도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는 것 같이 보이더라고요. 민서 씨한테는 이미 많이 얘기했지만요. 재작년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에 대한 짧은 글을 쓰면서 (민서 씨가 김홍중 선생님과 함께 쓰셨던) ‘페이션시’ 연구를 인용하기도 했어요. 동시대 한국 시와 관련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 주제인 듯해요.
또 하나 새로운 예를 들어보자면―앓는 자, 지구생활자 얘기가 나와서 생각이 나는데―저도 추천받아서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에요. 거기서 ‘초공감능력’이라는 가상의 초능력이 나오는데요. 초능력이지만 공감 능력이 너무 극대화되어서 고통을 겪게 되는 병이기도 해요. 타인이 아플 때 자기도 정말로 아픔, 신체적인 통증을 똑같이 느끼게 되는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민서
소설에 등장한다는 그 초능력이 임상학적인 의미를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의 페이션트의 경험과 직결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그 논문3에서 짚었던 페이션트의 용례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가 “환자”라는 명사. 두 번째가 “인내하는, 참을성 있는” 같은 형용사에요. 무언가를 견디고 감수하고 참아내고 인간의 이미지가 환자라서 아마 우리가 페이션들을 환자라고 쓰는 것일 텐데 이걸 환자가 아니라 ‘감수자’나 ‘겪는 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후 운동가도 그런 점에서 페이션트인 거고요.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를 앓는다는 건, 질병이나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종의 선각先覺의 경험이기도 하죠. 아니 선‘각’자이기 이전에 선‘감(感)’자인 거죠. 감수(感受)할 때 그 ‘감’이요. 내가 무언가를 깨달아버린 순간 혹은 알게 된 순간, 혹은 무언가를 접하는 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은데, 나를 어떤 식으로 다른 존재자가 정동/감응(affect)시키는가.
이 타자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비인간 동물일 수도 있고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어떤 추상적인 인류로 표상되는 거대한 개념적 덩어리에 작용하는 위기 그 자체일 수도 있고… 그것들을 내가 접하게 되는 순간 그게 나를 어떤 식으로든 어펙트하고, 나는 어펙트 당하는 존재로 바뀌어 가는 거죠. 이런 생성의 드라마가 climate patient-climate activist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희우
네,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네요. 많은 얘기를 했는데 개인적인 얘기는 많이 못 한 것 같아요. 사실 기후우울증도…… 연구자로서 개념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이런 것 이전에, 민서 씨 본인이 앓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이걸 글로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좀 그런 심정을 민서 씨가 토로하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되기도 했거든요.
민서
저는 사회학을 공부해 왔는데, 연구자로서 스스로 갖게 되는 연구자에 대한 특정한 상 같은 게 있잖아요.
연구자는 사회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산하는 사람이고, 이걸 위해서는 사회 세계 일부분을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하고 이제 근거로 삼아서 사회 세계는 이러이러하다라는 진술을 생산해내는 것 같은데… 이 과정에서, 사실 제가 금방 썼던 어휘들만 다시 생각해보더라도 어디론가 들어가서 무언가를 모아서 해석해서 무언가를 제시하는 사람, 이 모든 과정이 다 능동태로 돼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에는, 그리고 이걸 계속하게 되는 동기에는 어떤 ‘패션’이 있는 것 같아요.
기후우울증을 연구 주제로서 계속 봐왔지만 제 스스로의 상태를 우울이라고 명명하게 된 건 되게 최근인데요. 연구하다가 멈칫하는 순간들이 점점 많이 찾아와요. 능동적으로 계속 데이터를 모으고, 무언가 말을 보태는 흐름이 단절되는 순간들이 오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후위기라고 부르는 어떤 사태의 전개 속도랑 밀도랑 강도가 너무 높은 거예요. 기후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어떻게 진행될 지에 대한 시나리오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대로만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연구자이기 이전에 행성 거주자로서 비관적인 감정이 찾아올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이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연구라는 건, 사실은 뭐 이건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만, 사회 세계를 관찰한 결과를 성찰을 담아 공론장에 내놓고 시민들과 나누는 걸 텐데. 이게 학문이나 문학 같은 분화된 기관들의 역할일 텐데… 이게 제때, 필요한 만큼, 충분히 되고 있느냐는 의문이 들어요.
그럴 때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니까 이런 걸 하자, 하면서 힘을 얻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요. 그래도 기후변화를 진지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모종의 실천에 나서는 분들을 보면 힘이 나는 것 같아요. 그 힘이라는 게 꼭 이 연구가 유의미하고 잘 될 거야 내지는 제때 필요한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확신을 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세계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 옆에, 이 사람들이랑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가야겠다, 그럼 될 것 같다, 그런 느낌?
그 와중에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은, 기후 우울증을 앓는 사람, 자연과학자, 정책 결정자, 운동가, 펀드매니저 등등 ‘기후인’들이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거예요. 이미 객관적으로는 기후변화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어셈블리 상에 있는 이분들이, 제 연구라는 하나의 평면을 경유해서 배치됨으로써,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희우
제가 민서 씨랑 이제 만난 지 이제 10년이 됐는데, 그간 옆에서 보기에는 거의 유재석처럼 바른 사람이면서, 유능하고 스마트한 연구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런 사람이 실존하긴 하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인데요. 그런데 최근에 연구하시면서 많이 우울해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기도 했어요.
그래도 민서 씨 말대로 우울이 새로운 마주침과 주체화의 계기이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게 우리 둘에게 좋은 시간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민서
인터뷰를 하다가 당하는 입장이 오랜만에 돼 보니까 참 새롭네요(웃음).
글을 쓴다는 게, 단순히 이미 준비돼 있던 뭔가를 밖으로 꺼내는 행위가 아니고, 글을 쓰면서 저도 모르게 생성되는 게 많은 것 같은데요. 사실 글 자체가 대화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요. 누가 읽을지를 늘 생각하게 되니까요. 희우씨랑 얘기하면서 제가 겪고 있는 혼란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