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에 대한 노트1)
1) 이 글을 탈고하고 나서 예소연의 소설집 『사랑과 결함』(문학동네, 2024)이 출간되었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예소연의 소설들은 최초 발표된 것을 따르며, 출처는 다음과 같다. 「분재」(『현대문학』 2021년 12월호, pp. 80~99), 「사랑과 결함」(『현대문학』 2022년 11월호, pp. 72~101), 「아주 사소한 시절」(『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6~82), 「우리는 계절마다」(『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그 개와 혁명」(《문장웹진》 2024년 1월호), 「우리 철봉하자」(『문학들』, 2024년 봄호), 「그 얼굴을 마주하고」(『릿터』 2024년 4/5월호).
이하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페이지만 밝힘.
1. 돌봄과 고독
예소연의 소설을 읽으면 상충하는 힘들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상대적으로 긴장을 해소해 주고 화해의 국면에 도달한다. 반면 어떤 소설은 완강한 충동,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도가 두드러지며, 그것이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 어떤 소설은 다정하게 헤어짐을 그리지만, 어떤 소설은 비장하게 고통스러운 공생을 그린다. 애틋한 공감을 자아내는 일상의 묘사가 있는 한편, 세속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심연도 있다. 물론 한 작가의 소설들을 두 측면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예소연의 소설을 따라 읽다 보면, 그의 소설이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이 모순이 작품들에 뜨거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이 에너지는 모순이 모순이 아니게 되는 지점까지, 양극단에 있는 듯 보였던 것이 엉키고 뒤섞여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막 주조되고 있는 작품 세계의 생명력과도 같은 이 뜨거운 불순함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의 방법으로, 이 글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돌봄과 고독이다.
돌봄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을까? 먼저 자기 배려 혹은 자기 돌봄에 대해서. 「우리 철봉하자」에서 동갑내기 친구 맹지는 ‘나’에게 자기를 돌보라고 촉구한다.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pp. 162~63). 여기서 맹지가 ‘나’에게 주문하는 것은 ‘너 자신을 알아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돌아봄, 반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 돌봄을 위한 관문이다.
왜 맹지는 ‘나’에게 자신을 돌보라고 말했을까? 맹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나’도 채팅 앱을 통해 남자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데 소설에 그려진 정황을 보면 남자들은 (완곡하게 말해서) 사랑할만한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에,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님을 알면서도 남자와의 일회적 만남을 반복해왔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섹스하며 견딜 수 없는 마음을 키워”(p. 163) 왔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로움 혹은 공허함을 자신과 닮은 동갑내기인 맹지와의 관계로 해소하려 한다. ‘나’는 맹지에게 같이 살자고 어필하는데, 그러면서 다소 무턱대고 맹지의 생활에 침투(?)한다. “너를 돌봐야 해”라는 맹지의 당부는 ‘나’의 구애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당부는 다정한 것이지만 뼈아픈 구석이 있다.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
둘째는 아픈 가족의 간병처럼 가까운 타인에 대한 돌봄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나’는 자신의 아버지 ‘태수 씨’를 돌본다. 태수 씨는 암 투병 중이다. 여기서 돌봄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이다. 그러나 돌봄이 가까운 이를 간병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그 개와 혁명」이 감동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돌봄이 누군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과 떼어놓을 수 없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할 수 없게” 되는데, 이러한 앎은 더 풍부하게 관계할 수 있게 하고 더 공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마리아 푸이그 드 라 벨라카사가 “돌봄의 문제matters of care”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돌봄은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관계를 두텁게 하는 실천이면서, 앎과 무지의 경계에 개입하고 관여하는 인식론적·정치적 실천이기도 하다.3) 소설에 그려진 정황은 태수 씨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범주화(86세대, 운동권……)를 허용하지만, 그러한 범주화가 “한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태수 씨의 장례식에서 독자적인 연극을 진행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그 역사를 이어 쓰면서 변형을 가하는 수행이다.
그렇다면 고독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새롭게 해볼 수 있을까? 돌봄과의 관계 속에서 고독은 특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돌봄은 관계 지향적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고독한 사람이 보살핌과 관심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하고, 고독 속으로 침잠하며 자신의 고립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고독이 해소되려면 누군가의 삶은 보일 수 있고, 이야기될 수 있고, 설명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번역-설명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손실이, 모종의 소외가 일어난다. “아빠가 그런 내 어깨를 붙잡고 얼른 설명해보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우리는 계절마다」, p. 317). 고독은 우선 ‘설명할 수 없음’으로 체험되고, 고독한 자는 설명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단념의 시간을 거친다. “친구에게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며 고작 그들이 원할 만한, 그럴듯한 비밀만 털어놓는 청소년이 되었다”(「아주 사소한 시절」, p. 80).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고독한 자의식은 ‘어차피 말해봐야 너희들은 모를 거야’ 같은 오만함과 연관되는 것도 사실이다. 설명 불가능성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특권적으로 과장하는 면도 있고, 반대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어떤 오만에 의해 보상되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독한 사람은 설명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데, 애초에 설명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을 이해해야만 해소될 수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감히 이해하지 못한다. 고독은 이러한 모순 속에 기거하는 상태이다.
보살핌과 관심을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점에서, 고독한 사람은 그야말로 어려운 “돌봄의 문제”다. 「사랑과 결함」의 화자에게 고모는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 아닐까? 고모는 연민을 자아내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위엄을 지닌 사람이다. 고모는 ‘나’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요구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힘겹게 하고 미움을 느끼게 하며 심연에 휩쓸리게 하고, 관계를 가학적인 게임으로 만든다.
그런데…… 더욱 기이한 모순은, 고독이 매혹과 관련 있으며, 때로는 그 자체 매혹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에서 화자는 말한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일 강렬하게 나를 매혹했던 주제는 그것이었다. 죽음과 은총. 완전히 생을 망각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이끌림”(p. 69). 「사랑과 결함」의 어린 화자는 고모의 향정신성 약을 한 움큼 삼킨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잃어갈 때 “몹시 충만하고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p. 94). 형언할 수 없는, 세속의 언어를 초월하는, 끔찍하면서도 황홀한 죽음의 경험. ‘죽음의 경험’이라는 말은 가장 오래된 모순을 품고 있는데,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경험, 다른 모든 경험의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론적 경험이다. 따라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경험, 소통할 수 없는 경험이다. 고독은 이러한 경험에 강박된 트라우마적 매혹과 관련이 있다.4) 일찍이 모리스 블랑쇼는 이 점을 간파하고 깊이 파고들었다. 이미지에 대한 애착인 매력은 고독에 상반되지만, 기이하게도 가장 강렬한 매혹은 고독 그 자체이다. 그러한 매혹이란 “고독한 전능과 마주하고 있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어떤 종류의 해방인데, “사실은 자신을 벗어나 빠져들게 되는 데서 오는 해방”, 즉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5) 블랑쇼가 암시하는 것은 매혹의 본체가 다름 아닌 죽음 충동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소연의 소설에서 매혹과 고독과 죽음의 묘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지니면서부터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주변을 맴도는 애타는 방황의 과정이 된다.
「사랑과 결함」의 고모가 ‘나’에게 전승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런저런 요인으로 설명되는 병(우울증)이 아니라 설명할 길 없는 고독일 것이다.
2) 이 소설에서 ‘나’와 맹지가 헬스장에서 만나 함께 운동하는 친구가 된다는 것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소설의 결말에서 말해지는 자기 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 혹은 자기계발과 어떻게 겹쳐지거나 분리되는 것일까?
3) 벨라카사가 말하는 돌봄의 문제는 브뤼노 라투르의 “관심의 문제matters of concern”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우리가 한낱 도구로, 이미 구성되었기에 다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는 자신의 복합성을 드러낼 때 관심의 문제가 된다. 벨라카사가 라투르에 제기하는 문제는, 관심의 문제 역시 이미 관계망 안에 들어와 가시화된 사물/문제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들어오지 못한 것,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관심의 문제로 만드는 적극적 실천이 돌봄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 벨라카사는 돌봄이 관심의 집중된 분배라고 주장하며, 또한 그렇기에 돌봄이 항상 잔여와 공백을 남길 수밖에 없는 실천이라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 Maria Puig de la Bellacasa, “Matters of care in technoscience: Assembling neglected things”,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41, No.1, pp. 85-106 참조. “관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참조.
4) 매혹이 근본적으로 트라우마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작품이나 풍경, 아이돌 등에 대해 느끼는 매력은 이러한 근원적 매혹의 대체물일 것이다. 하지만 재현적 매력도 극한에 이르면 근원적 매혹에 버금가게 된다.
5)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6, p. 60.
2. 나의 말이 아니면서 나의 말인 것
우리가 고독을 느끼거나 죽음에 매혹되는 이유는 우리가 ‘나’의 한계(이것은 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문학의 원동력인 것도 같다. 소설에는 일인칭을 사용하면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방법들이 있다. 먼저 간단한 방식은 복수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분재」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독자는 교차로 목소리를 들려주는 화자들을 통해 할머니와 손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도 그의 마음속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좀더 복잡한 방법도 있다. 「사랑과 결함」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나’가 말한다. 그러나 이 ‘나’는 이미 한 사람이 아니다.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사랑과 결함」의 첫 문단을 보자.
잠을 많이 자면 머리가 이상해진다. 그런데 나는 그 이상해지는 느낌이 좋다. (p. 72)
그리고 다음 문단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고모가 나에게 한 말 중 유일하게 동의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곳)
독자는 이 세 문장을 연달아 읽으며, 소설의 화자가 어쩌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리라는 것, 그리고 이 소설에서 고모가 중요한 인물이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단의 연속된 배치는 한층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 문단의 ‘나’는 고모인가 화자인가? 그러니까 저 두 문장은 고모의 말인가 나의 말인가? 물론 “고모가 나에게 한 말”이다. 분명 저 문장을 화자가 말하기 이전에 고모가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아닌 고모의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 말은 화자가 의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말”이어서 화자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 앞서 타자의 말이었지만, 이제 나의 말이기도 하다. 고모의 입에서 ‘나’의 입으로 전해지는 성찬식 빵처럼, 고모의 말이 ‘나’의 말이 될 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형을 겪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구성하는 타자를 미워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에게서 부모와 닮은 부분을 발견하고 몸서리치듯이. 하지만 그것을 도려내 없애려 한다면 ‘나’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타자가 없다면 애초에 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증보다 더 복잡한 관계 속으로 말려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타자의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하는 일, 그러면서 타자의 말이 나를 구성하도록 하는 일―거기서 오는 모든 치명적인 뒤엉킴을 감내하는 책임과 정직함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 특히 핵심적인 윤리이다. 또한 (유전자나 재산이 아니라) 말의 전승, 이것은 특히 문학적인 가능성인데, 그러한 전승은 고모와 조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연작으로, ‘어둠의 성장소설’이라 불릴 만하다.6) 상승이나 화해보다 갈등과 고통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에 대해서는 가능하다면 별개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싶다. 이 글에서는 「우리는 계절마다」의 마지막 부분만을 살펴보겠다. 거기서는 독특한 ‘교육’의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이 연작소설에서 선생이나 부모는 스승의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위험하고 내밀한 스승이 존재한다.
「우리는 계절마다」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은 미정 엄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순리를 강요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희조[연작소설의 화자]의 세상에 그렇지 않은 단 한 명의 존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7) 미정 엄마는 다른 어른들과 좀 다르다.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꿰뚫어 보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른이 마땅히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체면이나 권위, 도덕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담대함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힘은 그의 삶이 정상적인 궤에서 이탈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 “딱 갖출 것만 갖춘 전형적인 젊은 엄마”(p. 318)처럼 보였으나 남편의 죽음 이후 주체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미정 엄마는 미정의 병실에서, 병문안하러 간 윤다혜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부른 건.”
미정의 엄마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네는 결코 걸레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어쩐지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미정 엄마에게서 어떤 어른다운 힘을 느꼈다.
“자, 따라 해봐. 나는, 걸레가, 아니다.”
(……)
나와 윤다혜는 뜻 모를 그 말들을 천천히 따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거리자 윤다해도 훌쩍거렸다.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은 그렇게 이상한 주문을 외며 기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미정 엄마가 침대를 빙 둘러 와서 나와 윤다혜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살아. 그렇지만 결코 그들과 같아질 필요는 없단다. 나는 남편이 죽고 나서 활력을 되찾았어. 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pp. 327)
이 대목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기묘한 (매우 치명적으로 뒤틀릴 수도 있는) 의존 관계를 보여준다. 미정 엄마는 아이들이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는 바로 그 말(“걸레”)을 과감하게 취하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준다. 이것이 그의 “위엄”이자 “어른다운 힘”일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당당함은 자기 삶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기묘한 공모 관계다. 가르치는 자는 분명 배우는 자에게 어떤 힘을 주지만, 자신이 이미 갖고 있었던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힘을 줌으로써 비로소 자신도 힘을 얻는다. 스승의 말은 아이들이 끔찍한 현실을 직면케 하지만, 동시에 말의 반복을 통해 그 현실의 지배력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말의 놀라운 힘이 아닌가? 사람을 예속하고 상처 입히는 그만큼 치유할 수도 있는 악마적인 힘. “걸레”라는 말이 ‘나’를 예속시키고, 호명이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수치스럽게 한다면, 그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할 때, 말이 갖는 예속의 힘은 경감될 뿐 아니라, 나를 강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반복을 지시하는(“따라 해봐”) 타자의 말이 필요했다. 몇 페이지 뒤에 나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치유의 현장에서 벌어진 교육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p. 328)
소설의 결말인 이 자립의 다짐은 타자와 자기의 온건한 화해와는 사뭇 다른 결론이다. 출발점에 있는 자기가 자기의 부정(타자)을 마주해 갈등과 분열을 겪고 더 높은 수준에서 통합(화해)되는 것이 가장 상투적인 도덕적 변증법이다. 예소연의 연작은 그러한 도덕적 교훈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연작에 그려진 윤리적 변화는 타자의 압도적인 우선성으로부터 ‘자기’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기원에 있는 자기란 없기에 자기는 양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되어야 하는 무언가이다. 하지만 이 창조는 철저하게 타자에 빚지고 있다.
분명 우리를 자기로 ‘만드는’ 것은 타자의 말이다(미정 엄마 같은 ‘어른’은 아니었지만, 또 어조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 철봉하자」의 맹지도 이러한 타자이다). 이렇게 자립을 명령하는 타자들을 스승이라고 한다면, 한 인간의 자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스승이 필요할까? 마치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같다. 예소연의 소설에 그려지는 전이와 전승은 다음의 역설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자립한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것이다. 자립을 돕고, 촉구하고, 명령하는 타자에 대한 의존 없이 인간은 자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립은 의존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왔고, 그만큼 (의존성을 격하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비판받기도 했다. 예소연의 소설은 자립이나 의존 중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함이란 곧 의존함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한편 예소연의 소설에 종종―사연 있을 뿐만 아니라―‘위엄 있는’ 어른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예소연 소설의 어른들은 모범적인 ‘롤모델’이나 귀인들로 이상화·낭만화되어있지 않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기득권’처럼 단순히 적대시되고 고발되는 대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은 표면적으로 애증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의 양상을 뜯어보면 ‘사랑과 미움’의 양가성보다 더 복합적이다.
6) ‘어둠의’라는 수식의 의미는 무엇보다 예소연의 연작들이 규범적인 의미의 ‘성장’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장’은 집합적 차원에서 발전과 개발, 팽창을 뜻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부정성이나 부조리와의 타협과 화해, 그로 인한 성숙을 뜻하기도 한다. 근대의 성장소설을 세계의 부정성을 마주해 방황을 겪는 근대적(부르주아적) 인간 주체가 부정성을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면서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이런 해석을 일반화해서 성장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근대화/자본주의화하는 국가와 주체를 화해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가 이런 주장을 담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이 분석은 완벽하게 설득력 있지만, 소설 장르에 대한 이런 비판적 해석―멀리서 읽기―의 결과에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이런 비판적 방식은 실증 가능한 지식으로 자신의 설득력을 보충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본주의적·국가적 논리로 실증되고 표상될 수 있는 ‘성장’만을 유일한 성장으로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 즉 실증 가능한 것과 이미 실증된 것을 재차 확증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설득력을 강화한다. 자신이 비판하는 ‘성장’의 전형적 방식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지금 성장소설에 대해 말하면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실증되는 종류의 성장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성장’이 있느냐이다.
7)「예소연·최선교 인터뷰」, 『소설보다』 2023 겨울, p. 178.
3. 말 없는 포옹
「사랑과 결함」에서 고모의 고독은 “소박맞은”(p. 80) 그의 처지라든가, “모계 유전”(p. 96)이라든가, 호르몬 이상에 대한 의학적 진단이라든가, 이런저런 사회적 이유로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설명될 수 없는데, 고독한 자는 그러한 환원과 설명 때문에 더욱 소외될 뿐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악화시킨다면, 그것은 유익하거나 좋은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명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더 잘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써야 할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는 식으로 겸허하게 물러나야 할까?
이 문제는 화자의 전 남자친구 수와의 관계에서 어떤 딜레마,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딜레마로 나타난다. 화자는 수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수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정해둔 한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너머의 문제는 회피하는 듯하다. “삶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는 도무지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p. 85). 화자는 수가 고모의 ‘금융 문제’를 도와준 일에 대해 그의 진의를 추궁한다.
“귀찮았잖아. 괜찮아. 나도 귀찮았어, 평생.”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평생 그 외로움을 책임질 수는 없잖아.”
“평생 외로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니?” (p. 95)
반대로 수는 화자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듯하다. ‘진정함’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타인에 대한 일상적 배려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 있지 않은가. 타인의 외로움을 완벽하게 책임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완전하게라도 보살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화자가 자문하듯이, 수에게는 심연이 없고 그런 것을 들여다볼 마음도 없다는 생각이 ‘나’의 독단이었을 수도 있다. 수는 자신이나 타인의 심연은 제쳐놓더라도, 어쩌면 얼마간 위선적일지라도, 불완전한 배려나마 성실히 해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태도란 건 내가 평생 시달릴 고통과 우울, 그리움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p. 95).
고독한 자는 소통을 단념하려 하지만(혹은 단념할 수 있는 척하지만) 사실 정말로 단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모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고독한 사람이 정말로 단념에 이르렀다면 그는 해탈한 상태일 것이고, 이해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야기하려는 욕망도 없을 것이고, 더 이상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간청하지 않아도 자신의 심연에 사랑하는 사람이 도착해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수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뒷걸음질 친다. 심연이 지식이나 의미의 형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삶으로 전염되고 전승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궤를 이탈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안전하고 편안한 일이 아니다. 화자는 수가 뒷걸음질 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내몰린 사람이 자신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것만큼 마땅한 일은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고 수가 벼랑 끝에서 자기보다 나를 위해주길 바랐다”(p. 99). 이렇게 ‘나’는 단념과 호소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내 안에 이식된 심연이 나를 결정하고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그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상 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것인 듯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독한 자는 자신의 고독을 어른스럽게 감추고 그럴듯한 비밀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자신이 하는 일이 허위이고 공허한 연극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진정성은 어두운 충동으로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덧붙이도록 하자. 인간의 관점에서 고독은 분명 관계에서의 이탈이지만 고독이 단순히 비(非)관계인 것은 아니다. 「사랑과 결함」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고독과 사물의 관계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인간 배우/행위자actor가 등장하는데, 바로 로봇청소기다. 처음에 로봇청소기는 꽤 ‘개연성 있는’ 사물로 보인다. 화자는 엄마에게 식기세척기를 선물하는데, 고모가 그것을 질투하는 듯하다. 그래서 화자는 고심 끝에 고모에게 로봇청소기를 선물한다. 중년 여성에게 (이를테면 태블릿이나 스마트워치 등의 전자제품이 아니라) 가사의 편리를 위한 가전제품(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을 선물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물론 여기서 있을 법함/개연성probability은 선(善)이나 합리성을 의미하지 않고, 사물이 자연적 사실에 부합함을 뜻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는 일상적 편견에 부합함을 뜻한다.8)
그러나 이렇게 매우 일상적이고 있을 법한 사물로 보였던 로봇청소기는 도구적 역할을 벗어나 괴물로 귀환한다. 고모에게서 수의 손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그것은 청소하지 않고 마치 시위하듯 벽에 ‘머리’를 힘껏 찧는다. 사물의 이러한 변신은 절묘하면서도 놀랍다.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올 때, 있을 법함/개연성 자체가 내파되어 공포로 변한다. 수는 고장 난 청소기를 두려워하는데, 이유 없는 두려움은 아니다.
“겁이 났구나?”
“겁? 그게 다가 아니야. 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 로봇청소기는 나한테 화를 내고 있었어.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던 거라고.” (p. 99)
수는 이렇게 주장하는 것 같다. 사물에 별문제가 없는데 자신이 주관적으로 과장된 감정(“겁”)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사물이 정말로, 진짜로, 이상하다고. 어떤 도구가 기능에 맞게 잘 작동할 때는 그것을 걱정하고 살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문제”처럼 주어져 있다. 사물이 고장 나 목적과 기능에서 이탈할 때, 비로소 그것은 “돌봄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물이 예측 가능한 질서에서 벗어나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위기’이다. 달리 말해 위기는 사물들이 개연성을 잃어버렸거나 초과한 상태이다.
고독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탈해 있고, 고장 난 사물은 사물의 질서에서 이탈해 있다. 그런데 정작 둘은 서로 독특하게 관계하고 얽매여 있다. 일상적 관계에서 물러나 있는 ‘심연 속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로봇청소기는 고모 삶의 심연으로부터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듯 보인다. 거기에는 어떤 고통과 외로움으로 응축된 혼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도대체 고모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로봇청소기는 어떤 고독한 시간을 통과했던 것일까? 사물은 사물에 대한 앎의 질서(과학과 기술)에서 벗어날 때 위기로 육박해온다. 그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며 직면을 요구하는 세계의 “기괴한 얼굴”이다. 반대로 인간은 관계의 질서(사회와 문화)에서 이탈할 때 고독하다. 인간의 고독한 부분은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인간(人間)이 아니다. 사물은 위태로울 때 인간이고, 인간은 고독할 때 사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사물과 사물이 된 인간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괴물이다. 그것들은 일상적 관계 바깥의 불가해한 관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심연 속에서만 가능한 말 없는 포옹이 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달려가서 끝내 전원을 끄지도 못하고 청소기를 끌어안았다”(p. 101). 예소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윤리적 태도를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을, 그저 품에 안기. 마지막 장면에서, 고모와 엄마 사이에 오가는, 화해라고도 인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통 아닌 소통도 비슷한 일이 아닐까? 죽기 전 고모는 엄마에게 “민애야”하고 이름을 부를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말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엄마는 그 부름에 응답한다. “저도요”(p. 101). 그 공백 속에서, 침묵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어떤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8) 이러한 편견은 누군가의 개인적 잘잘못을 판단하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편견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개연성’은 일상적이고 상상적이며, 동시에 실재적인 관계에 대한 집단적 감수성이다.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긴 하지만, 근대소설의 규범인 개연성이 특히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아미타브 고시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참조.
추기(追記)
이 글에서는 작가의 일부 작품만을 다뤘을 뿐 아니라 작품들에 나타난 여러 흥미로운 측면 중 극히 일부만 짚어보았다. 아쉽지만 벌써 주어진 분량을 꽤 초과했으므로, 본문에 포함하지 못한 메모들을 붙여 글을 마감하려 한다.
(1) 예소연이 그리는 관계의 양상에는 시의적인 독특성이 있다. 「도블」9) 「내가 머물던 자리」10) 「분재」같은 소설들에서는 계획에 없었던 돌연한 합석이 그려진다. 「통신광장」11) 에서 ‘나’는 대화방에서 만나 며칠 대화를 나눈 여인2에게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p. 121)다면서도 만나자고 한다. 이렇게 종종 등장하는 우발적 관계들에는 물론 시대적인 이유와 맥락이 있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들, 고립을 벗어나려는 소망, 우발성이 허용하는 어떤 솔직함, 일시적 공동체……
(2) 젊은 여성이 조직에서 혹은 가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자기 의심도 눈에 띈다. 「우리 철봉하자」에서 강의 영상들을 검수하는 일을 했던 ‘나’는 자신이 “페미 같아”(p. 152) 보이는지 검열하고, 「그 개와 혁명」에서는 “요즘 여자들”에 대한 태수 씨의 말에 분개하기도 한다.
(3) 예소연 소설의 인물들은 종종 관계에 적극적인데, 이 적극성은 잘못 비칠까 봐 미리 조심하는 점잖음이나 손익을 따지는 신중함,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는 식의 ‘쿨함’과는 사뭇 다르다.
(4) 전반적으로 ‘개인’을 넘어서는 거대한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이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이것은 작가의 최근작 「영원에 빚을 져서」12)의 제목처럼 ‘나’의 주관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자신의 관점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오해와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은 작가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개인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대한 의식은 ‘나’와 세계의 윤리적 관계에 대한 고민이고, 언어의 한계에 대한 고뇌이면서, ‘나’의 언어를 넘어서려는 소망이기도 하다. 이 소망은 관계에 대한 희구가 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립과 외로움, 소통 불가능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5) 개인을 초과하는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은 한편으로 삶의 본질적인 수동성·피동성에 대한 회의로도 연결된다. 즉 주체는 삶을 결정하지 못하고 삶에 휩쓸릴 뿐이다. “삶은 지독히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니, 내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삶은 언제나 나를 쥐고 흔들 뿐이었다”(「그 개와 혁명」).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작가가 한 말처럼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13) 이렇게 태어남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면, 피동성은 누군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가 된다. 다만 그것이 각자에게 다른 장면으로, 다른 강도로, 다른 형태의 질문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이 문제는 특히 삶에서 겪는 고통의 인과를 따지고 들 때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잘못된 건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없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뺏겼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인데. (「아주 사소한 시절」, p. 67)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그냥 적당히 돈 없고 적당히 뭘 모르고 살아온 것일 뿐인데. (「그 개와 혁명」)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지만, 그 고통에 합리적인 도덕적 인과는 없다. 즉 고통은 잘못의 대가가 아니다. 삶이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고 존엄이란 무엇인가? 예소연의 소설 저변에는 이렇게 본질적인―너무나 본질적이어서 잊어버리거나 없는 셈 치기 쉬운―문제를 “오래도록 생각”하는 사색적 집념이 있다. 이 사색적 정열이 시의적인·감각적인 구체성과 어우러져 독특한 에너지가 되는 것 같다.
(6)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는 이러한 본질적 피동성을 조건으로 윤리적 주체의 ‘발생’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발생’이 현실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덕적 화해나 교훈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그 얼굴을 마주하고」에서는 앞 소설들에서 예비된 갈등과 실망이 지속되거나 심화되고 있으며, 그것들이 ‘자기와의 관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7) 앞서 말했듯 예소연의 소설에서 돌연한 마주침·출현이 종종 그려지지만, 더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오래된 것의 낯선 회귀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진돗개 ‘유자’가 태수 씨의 장례식에 난입하는 일이나 「사랑과 결함」에서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일처럼. 갑자기 시야에 들어와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 배우/행위자들은 일상적 관계의 연극성을 극적으로 폭로하는데,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재현되지 못하는 심층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9)『현대문학』 2021년 6월호, pp. 200~16.
10) 엔솔러지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안온, 2023, pp. 79~110.
11) 『LIM: 옥구슬 민나』 2024년 봄호, pp. 112~140.
12)『현대문학』, 2024년 4월호, pp. 188~251.
13)「예소연·최선교 인터뷰」, p.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