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에 대한 레퍼런스 모음

(계속 추가)

화려한 필터보다 자본주의 내 매력……
―tripleS, 〈Girl’s Capitalism〉(2023) 가사 중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NCT, 〈무한적아〉(2017) 가사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비서 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 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있어〉(2012) 가사

_______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führt das schöne reizt). 숭고함으로 충만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얼굴은 진지하지만, 때때로 경직되어 있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생생한 느낌은 두 눈 속에 찬란히 빛나는 투명함에 의해서, 미소 띤 얼굴에 의해서, 그리고 종종 환한 웃음에서 생겨난다.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강조는 원저자.

_______수치심은 본성의 비밀이다. [……] 그러나 동시에 수치심은 본성의 가장 적합하고도 긴요한 목적 앞에 비밀스러운 장막을 드리우기 위해서, 그 목적에 관해 잘 알려진 지식이 혐오감을 주거나 혹은 적어도 무관심을 유발하지 않게끔 해준다. 이는 인간 본성의 가장 세련되고도 생동감 넘치는 경향성에 접목된 충동의 궁극적인 의도에 관한 한에서 그러하다. 아름다운 성[여성]에게 이런 기질은 극히 고유할뿐더러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한다. [……] 언제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듯이 우리는 지금도 비밀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으며 […]
―같은 책, 66-67

_______모든 이해관심은 취미판단을 더럽히고, 취미판단의 공평성을 앗는다. 특히 그것이, 이성의 이해관심처럼, 합목적성을 쾌의 감정에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합목적성을 이 쾌감에 근거 지을 때에는 그러하다. [……] 취미가 흡족을 위해 매력Reiz과 감동의 뒤섞임을 필요로 하고, 심지어 이것을 자기에 대한 찬동의 척도로 삼는 곳에서, 취미는 항상 아직도 야만적이다.
[……]
매력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비록 그것들이 미적인 것에서의 흡족과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이카넷, 2009, pp. 218-19. 강조는 원저자.

_______매력{자극}과 감동에 독립적인 순수한 취미만이 ‘문화화한{교화한}’ 것이라는 이러한 칸트의 생각은 초기의 것과 다르다. 『관찰』(1764)에서는 오히려 “숭고한 것은 감동을 주고, 미적인 것은 매력적이다{자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바뀐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같은 곳, 백종현의 역주 56 {}는 역자)

_______미의 감정은 스스로 보편적이고 즉각적이며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있기를 희망하는 반성적이고 개별적인 판단이다. 그것은 오직 영혼의 능력, 즉 쾌와 고통의 능력에 속하며, 형태를 계기로 발생한다. 이른바 무심한 쾌라는 그것의 운명이 걸리는 지점도 거기다.
주어진 대상의 재질이나 색채 음색 따위에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순간 미의 감각은 하나의 “즐거움agrément”으로, 일종의“성향 inclination”이 충족되는 데서 발생하는 쾌감으로 퇴행하고 말며, 이때 대상은 스스로의 현존을 통해 사람의 정신에 어떤 ‘‘매력”을 행사한 셈이라는 것이다.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적 쾌감을 대상의 향유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저 순수한 취미와 불순한 취미를 구별해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다시 말해 감각들의 취미 “Sinnengeschmack”로부터 반성적 취미 “Reflexiongescrunack”를 가려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성 일반은, 혹은 특히 미에 대한 즉각적 판단(감정)이라는 범례적 양식으로서 작용할 때의 반성은, ‘‘어떤 한정된 대상에 대한 의지의 복종’’으로정의되는 관심을 일체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성이란 어떤 정해진 기준이나 판단 규칙 없이, 따라서 어떤 쾌감을 유발할 일종의 대상 또는 유일한 대상을 예견하지 않은 체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_______순수하게 미적인 공통감각은 결국 전제되고 가정될 수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의 해결이 불충분한 해결이라는 것을 별 어려움 없이 발견한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어떻게 충분한 해결일 수 있겠는가? [……]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과연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23, pp. 191-92. 강조는 원저자.

_______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charme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 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력은 필연적으로 이기는 주사위 던지기입니다. [……]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조합으로 된 숫자입니다. 매력과 스타일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다른 말을 찾아서 대체해야 할 것입니다. 매력이 삶에 개체들보다 우월한 비개인적 역량을 부여하고, 스타일이 글쓰기에 씌어진 것을 넘어서는 외적 목적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또한 둘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입니다.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_______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apprenti은 없다.
―들뢰즈,『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 23)

_______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같은 책, p. 41)

_______이 진리들은 지성이 선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동하고 임무에 뛰어들면서, 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발견한 진리와 대립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들의 한계를 보았었다. 즉 그런 진리들은 ‘필연성’이 결핍되어 있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지성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같은 책, pp. 49-50)

_______욕망 이론에서 비판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 역시 칸트이다. 칸트는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 정의를 예시하기 위해 칸트가 미신적 신앙들, 환각들, 환상들을 원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런 식으로 욕망을 규정할 경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 대상의 현실은 심리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혁명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p. 59.; 강조는 원저자, []는 인용자.

_______마지막으로 기호가 재촉하는 응답 안에서. 응답의 운동은 기호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다. 수영하는 사람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모래사장에서 재생하는 수영 교사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개가 어떻게 배우는가를 말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거기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어떤 실천적인 친밀성familiarité, 기호들에 대한 친밀성이 존재한다. 이 친밀성을 통해 모든 교육은 애정의 성격을 띤 어떤 것이 되지만 또한 동시에 치명적인 어떤 것이 된다. 우리는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따라해야 할 몸동작을 보여주는 대신 다질적인 것 안에서 개봉해야 할 기호들을 발신하는 방법을 안다. 달리 말해서 관념적 운동성이란 없다. 오로지 감각적 운동성만이 있는 것이다. [……]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들뢰즈,『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p. 72-73.

금융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 국가 당국은 여전히 상충하는 요구의 균형자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심판관으로 행위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특히 신용 공급자의 요구와 정부를 선출한 시민의 이해 관계를 중재할 임무를 맡고 있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실제로 정부는 자국 영토는 물론이고 통화와 채권의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를 유지시키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유권자의 소망을 채권자의 신뢰에 종속시킨다.
―미셸 페어,『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대항 투기 운동가들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금융 시장에서 높은 가치가 매겨지고 있는 기업 거버넌스와 공공 행정의 기술이 터무니없이 리스크가 높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 으로는―단기적인 금융 수익보다 사회권과 생태 발자국 감소를, 지적 재산권 강화보다 지식과 건강 보험에 대한 접근권을 우선시하는 것과 같은―실현 가능한 대안들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같은 책, p. 56)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