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화된 시대의 예술작품

『학산문학』 2021년 겨울호.

1.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밈meme은 ‘문화적 유전자’를 뜻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조어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밈은 모방을 뜻하는 그리스어 어근 ‘미멤mimeme’과 유전자를 뜻하는 영어 ‘진gene’의 합성어라고 한다.1 간단히 말해 밈은 어떤 신념, 이야기, 콘텐츠, 스타일 등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 모방·확산되면서 문화 속에 전승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어떤 신념, 이야기, 콘텐츠 등이 재생산되면서 형성하는 기호의 계열이 있을 텐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장르’라고 부르려고 한다. 장르는 기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엮는 하나의 문법적 틀이다. 삶이 요약 불가능한 것이라면, 장르는 삶의 요소를 하나의 문법 아래 요약 편성한 것이다. 삶은 일의적이지 않지만, 현시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일의적이다.2 따라서 장르화된 삶은 삶보다 훨씬 쉽게, 훨씬 많이 재현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밈화된 시대’는 ‘삶의 장르화’가 일반화된 시대이다. 이 시대의 공식은 ‘예술의 삶-되기’ 즉 ‘예술의 탈장르화’를 선언했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공식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삶의 장르화란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오늘날 예술가에게 SNS는 미술관이나 잡지의 지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예술가가 SNS에서 하는 일은 단지 새 작품활동에 관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일상을 전시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삶은 그 자체로는 양도하거나 차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장르화되어 어떤 이미지와 기호의 짜임으로 재현되면 재생산되고 패러디될 수 있다. 즉 양도·차용·모방될 수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장르화된 삶, 말하자면 ‘라이프스타일’이다.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 사람은 ‘인플루언서’, 즉 말 그대로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팔로워 수가 곧 돈이 되는 것처럼, 매력이 곧 자산이라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현실, 그것도 꽤 오래된 현실이다.

우리가 물건의 쓰임새보다 기호를 소비한다는 말은 이제 상투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밈화된 시대의 특징은 우리가 기호를 소비하는 만큼 장르를 생산한다는 데에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장르화할 수 있다는 것은 문화에 통용되는 문법적 체계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문화적 요소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립하면서 자신을 문화 속에 현시한다(하지만 그러면서 밈의 물리적 숙주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장르화되지 않은 삶은 문화 속에 재현되지 않는다. 이제 기호들의 흐름을 파악하고 기호를 사유화할 능력은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기호의 경제 속에 재현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존의 문제는 아니지만, 기호의 경제 속 생존, 즉 ‘가시화될 권리’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이 사실은 인플루언서나 젊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을 이끄는 젊은 사업가, 사회 활동가, 가게 주인, 정치인, CEO, 기업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자본주의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일 것이라고 예견된 금융자본주의는 ‘노동의 가치 생산’을 ‘기호의 욕망 생산’으로 점점 더 대체하고, 따라서 육체노동은 가치 없는 것, 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것으로 절하된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은 기호 생산자의 인정 투쟁으로 대체된다. 노동과 계급을 설명하는 모델로서 유물론은 형이상학-미학적 모델로 대체된다.

세계적인 팬데믹과 양적 완화 속에서, 밈화된 시대의 전면화를 예증하는 노골적인 징후들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특히 올해 상반기에 유행했던 ‘밈 주식’은 가장 분명한 징후 중 하나다. ‘밈 주식’은 기업의 실물가치와 상관이 없는, 인터넷상의 유행에 따라 급변동하는 주식을 일컫는다.3 이 주식의 극단적인 요동은 경제에 대한 고전적인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실물에 대한 고려를 배제한 형이상학적이고 동시에 미학적인 고려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주식 커뮤니티 구성원들(‘서학 개미들’)을 단결시키는 헤지펀드 전문가들에 대한 반감, 망해가는 영화관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 영화관 운영업체 사장에 대한 대중적인 호감 등 집단적 정동의 복합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종종 말장난에 불과해 보이는 작용이 주가를 폭등시키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작년부터 화두가 되었던 ‘NFT’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의 약자이다. 이 토큰은 일반적인 가상화폐와 달리 디지털 자산에 고유한 인식 값을 부여하고 있어 상호교환이 불가능하다.4 NFT는 제각기 독특한 디자인이나 서사, 콘텐츠를 갖고 있으며, 어떤 NFT는 수십억 원에 경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올해 배수연 시인이 국내 최초로 NFT 시집을 발행하기도 했다.5) 이 가상화폐는 유명한 미술품처럼 희소하고, 그 희소성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된다. NFT가 인위적인 희소성이 부여된 ‘기호 더미’일 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향한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NFT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종교적 상징물이나 박물관의 예술품처럼―그 출처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가 아니다. 오늘날 기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아우라가 아니라 매력이다. 아우라가 사라져도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매력은 아우라와 어떻게 다를까? 아우라는 대상을 우러러보게 하지만, 매력은 대상을 갖고 싶게 하거나 대상처럼 되고 싶게 만든다. 아우라는 신의 권능이나 천재의 재능처럼 출처가 불분명한 힘의 반향이다. 반대로 매력은 그 출처가 분명하더라도 희소하다는 것 때문에 여전히 욕망의 대상이 된다. 매력은 탈신비화에 아랑곳하지 않으므로 계몽을 통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우라의 신비가 사라진 이후에 기호의 경제에 재도입되는 것이 매력의 서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벤야민의 예견대로 복제 기술의 보급은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상당 부분 사라지게 했지만, 그 후광의 빈자리를 매력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호의 경제가 세계를 둘―노동의 세계와 장르의 세계―로 나누는 이 시대에 고유한 매력의 통치가 있다. 이것은 사람의 욕망과 열등감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에 푸코가 말했던 ‘생명 통치’보다 통치받는 사람들에게 더 큰 조급함과 적극성을 부여한다. 이 기호의 경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일, 누구보다 앞서서 그것을 긍정하는 일이 곧 매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매력은 기호를 사유화私有化할 역량을 의미한다. 매력의 통치는 기호의 경제에 반대하거나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취하라고 속삭인다.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가 대표적으로 그랬듯, 기호의 경제가 (생산양식의 변화와 함께) 급변할 때 그 변화를 선취하면서 제 역량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매력이다. 따라서 매력적인 자는 엄청나게 많은 기호가 모여들고 순환하는 회로가 된다. 반대로 매력 없는 자는 이 기호의 순환 바깥에 있다. 지금 세계에 편재하는 기호를 자신의 방식으로 편성할 수단과 능력을 갖지 못하면, 이 경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존재를 현시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기호의 경제 속에서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다.6 들뢰즈의 말대로 매력을 사유화하는 자―가치를 주관화하는 자―가 예술가라면, 우리 모두 부분적으로 이런 의미의 예술가가 되지 않고서는 오늘날 기호의 경제 속에 살아갈 수 없다. 즉 통용되는 문화적 코드를 자신의 욕망에 알맞게 전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이 기업가의 크리에이터-되기, 활동가의 프로보커터-되기, 만인의 예술가-되기를 부추기고 있다. 기호의 경제 속에서만 의견이 교환되고, 의견의 교환만이 우리의 영향력을 보증해준다면,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일단 주목받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반적 경향 속에서 ‘모든 장르의 모든 장르에 대한 인정 투쟁’이 가속화된다. 돈이 실물과 절연되어 그 자체의 추상적 자동운동을 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장르들의 공허한 미학적 전쟁에 떠밀리듯 자원하게 되는 것이다.

1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이상인 옮김, 을유문화사, 2018, 364쪽.

2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성찰 4 「공백: 존재의 고유명」 참조.

3 “‘밈 주식’에서 희망 찾는 20, 30대의 서글픈 생존 방식”, 〈동아일보〉, 2021.08.13. 참조.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813/108547740/1

4 네이버 지식백과 “NFT” 문서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226820&cid=43667&categoryId=43667

5“배수연 시인 국내 첫 순수문학 NFT 발행 “시장 성숙 계기됐으면””, 〈파이낸셜뉴스〉, 2021.06.03., https://www.fnnews.com/news/202106031551312391

6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14쪽.

2.

이 글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밈화된 시대’라는 조건은 우리의 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문학은 이러한 조건을 예비하거나 예견했던가? 문학 속에는 어떤 징후들이 있었던가?

오래전부터 미술이 문학보다 이러한 현상 혹은 조건과 더 유연하고, 직설적이고, 전면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쉬운 사실이다. 실제로 ‘밈’을 직접적인 화두로 삼은 미술 작품이나 전시는 지금껏 아주 많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방식으로 포괄적인 관계를 맺는 것까지 고려하면, 미술의 경우에는 너무 광범위해서 셀 수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와 밈 사이에는 미술과 밈의 관계와 유사면서도 다른, 더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관계가 있다. 미술과 문학의 사례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문학의 경우에 먼저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 우선적인 초점은 단지 분량이나 지면을 고려한 절충적인 선택은 아니다. 오늘날 온갖 문화적 산물이 밈과 관계되어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수많은 피상적이고 헐거운 얽힘 속에 숨어있는 가장 핵심적인 매듭이 시와 밈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시와 밈’으로 초점을 좁힐 때 밈이 동시대 예술과 맺는 유착 관계를 더 뚜렷하게 사고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미술이 유연하면서도 종종 피상적인 방식으로 밈과 관계하는 것에 반해, 시와 밈의 야합은 좀 더 본질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밈은 ‘이질적인 기호의 배치를 통한 유희’라는 현대 시의 본질적인 유산을 상속 혹은 강탈해가기 때문이다. 혹은 심지어, 차차 설명하겠지만, 밈은 현대 시의 본질적인 경향성과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향성”7이 결합한 결과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여러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시의 ‘본질적인’ 유산이 무엇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단순화를 무릅쓰고 그것을 포괄적으로 정의하더라도, 그 유산을 다른 장르나 분야가 아닌 ‘밈’이 강탈해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질문에 대답하면서 오늘날 예술의 모호한 조건을 부분적으로나마 규명하기 위해,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로부터 거대병렬grande parataxe이라는 단어를 빌려오자.8 ‘거대병렬’은 미술비평에서 이야기되어 온 ‘탈역사화된 미술’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거대병렬은 오늘날 예술의 근본 바탕을 의미하지만, 이때 ‘오늘’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동시대’처럼 어떤 특정 시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8세기의 연극에서도, 19세기의 소설에서도, 20세기의 영화에서도, 21세기의 전시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적인 것이다. “‘심오한 오늘’의 법, 거대병렬의 법이란 더 이상 어떤 척도도 없다는 것, 더 이상 어떤 공통의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척도를 벗어남이나 카오스라는 공통적인 것이 예술에 그 역량을 부여한다.” 유일하게 공통적인 예술의 규범은, 어떠한 공통적인 규범도 없다는 것뿐이다. 어떠한 보편적 진리도, 사물의 안정적인 근거도 없다는 것이 낭만주의가 동시대 예술에 남긴 영속적인 교훈이라면,9 거대병렬은 근거 없음을 예술의 보편적 근거로 다시 취하면서 낭만주의의 교훈을 뒤집는다.

거대병렬은 척도의 부재라는 전제를 공유하는 모든 예술작품과 동시대적이다. 척도의 부재는 곧 기호들의 서열 없음, 달리 말해 기호들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아방가르드 시대에 이것은 예술의 탈장르화를 의미했고, 벤야민에게 이것은 아우라의 사라짐을 의미했다. ‘장르’는 예술을 다른 분야 혹은 생활 전반과 구분하는 경계였는데, 주지하다시피 아방가르드 예술의 에너지는 그 경계를 분쇄하거나 넘어서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또 장르는 가령 서사시나 모험 소설이 영웅을 서사적으로 특권화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만들듯 사물들의 고정된 서열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여성향’ 소설과 ‘남성향’ 소설이 그렇듯, 장르 속에는 남성과 여성 신체를 배치하는 고정된 틀이 있다. 반대로 거대병렬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작품에서 더 의미 있거나 의미 없는 이야기는 없다.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떤 인물이 귀족이나 영웅이어야 했던 시기는 끝났다. 회화의 중심 소재가 되기 위해 그 대상이 반드시 아름답거나 숭고한 것이라는 합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또 인물의 정체성이나 신분이 그 인물의 행위에 예측 가능한 틀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무엇이든지 예술작품의 표면에 놓일 수 있다. 배경과 주인공의 위치는 뒤바뀌거나 그 경계가 흐려지게 된다. 이처럼 민주적인 조건 속에서 기호들은 자유롭게 뒤섞이고, 나란히 놓이고, 재편성될 수 있다. 이러한 배치의 놀이가 감각적 효과를 낳는 것이다. 하지만 ‘거대병렬’은 단지 포스트모던적인 혼종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황인찬의 시 「멍하면 멍」은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고”처럼 잘 알려진 김수영의 시구와 “멍하면 멍 짖어요”라는 우스갯소리를 나란히 놓는다.10 이것은 지식인의 기념비적 이미지, 반성을 강요하는 지성의 무거움, 혹은 문학사에 대한 조롱이다. 이 가벼운 조롱이 웃음기 가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여기에는 역사적 대결 의식, 최소한 반항적인 의지 같은 것이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황인찬의 이런 시들을 여전히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징후”로 읽곤 했다.11 포스트모던은 그 혼종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에 대한 계승, 반대, 대결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선형적인 역사적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더 최근의 시에서 신은 코스트코 빵을 나눠주는 판촉 사원이 되고(문보영, 「입장모독」12) 김수영은 똑같이 생긴 여러 명의 함바집 인부가 된다(서호준, 「김수영 월드」13). 이때 ‘신’이나 ‘김수영’은 이미 아무 권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결할 역사적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이나 김수영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신’과 ‘김수영’이라는 기호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이냐이다. 배치를 통해 ‘신’이나 ‘김수영’에 대한 달라진 우리의 감각을 드러내고 또 그 감각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반항은 서열을 전제하지만, 배치는 나란함을 전제한다. 배치는 반항보다 훨씬 가볍고 날렵하며, 동시에 공허하고 위태롭다.

우리가 시를 권력과 항거의 변증법이라는 ‘역사적’ 문제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가 미술비평가들이 ‘동시대’라고 불렀던 시간성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14 하지만 이러한 시간적 모델은 예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를 수반한다. 기호와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를 통해 서열과 차이를 횡단하려는 경향이 낭만주의나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나 ‘동시대’라고 불리는 어떤 시기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다. 크게 보면, 국경이나 시기나 저자에 국한할 것 없이, 거의 모든 현대 시가 이 경향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보들레르는 ‘거리의 언어를 쓰라’는 명령을 남겼고, 마야콥스키는 ‘절대 고상하게 쓰지 마라’고 직언했지 않은가? 항상 요지는 ‘시의 언어’와 ‘거리의 언어’를 분리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언어의 결합 방식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시들은 항상 우리의 언어 구석구석에 있는 관습적인 고정관념을 비춰왔다. 언어 속에 있는 차별과 서열을 횡단하기, 이것은 현대 시에 일반적인 문제 설정이었다. 말하자면 ‘거대병렬’은 특히 언어와 관계하는 시 장르에서 ‘기호의 이질적인 배치를 통한 유희’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경향은 긴 시간 속에서 무수한 방식으로 실험되었고, 시대나 장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첨예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따져보려는 것은 작품의 숙련도나 소재의 새로움이 아니라, 작품들의 기저에 있는 사고의 모델에 관한 문제이다. 예술작품의 문법이나 소재는 업데이트되어왔지만, 예술적인 것과 예술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을 횡단하려는 경향 자체는 지속되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말과 소재를 나란히 놓으려고 하는 경향을 현대 시의 ‘민주주의적인 경향’이라고 해보자. 시인이나 시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표출해서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 지니는 횡단적인 특성에 따라 시가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에, 서열화된 의미의 해체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여기서 염두에 두는 것은 랑시에르가 말한 의미의 민주주의이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확립된 역사적·국가적·법적 체제가 아니라) 감각과 인식의 재편성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정치적 역량을 의미한다. 예술적 창안 역시 바로 그러한 정치적 역량의 행사에 다름아니다. “그에게 정치는 감성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15

그런데 랑시에르 본인이 지적하고 있듯 현대 예술의 민주주의적인 토대 혹은 ‘거대병렬’은 기호의 공허한 자동운동 혹은 자본주의적 분열증과 “거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에 의해서만 분리되어 있다.”16 자본주의 역시 기존의 가치의 서열을 해체하고, 이질적인 기호들을 뒤섞으면서 새로운 시장을 끝없이 창출하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관습적인 구분을 넘나들려고 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영토의 경계 혹은 사회적 구분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시장을 계속해서 창출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한 시인의 말대로 시는 언제나 “시 밖으로 나가려”17 하고, 그처럼 자신을 버리는 모험 속에서만 시가 된다. 시의 ‘바깥’이 없다면 시의 운동은 멈추게 되고, 그러면 시 자체가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팽창할 영토가 없어진다면 자본주의 역시 기나긴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현대 시와 자본주의는 둘 다 그 중심이 비어 있고, 다만 혁명적으로 비약하면서 넓어지는 운동 그 자체로 유지된다. 물론 이 지구상에 더는 식민화할 ‘실제’ 영토가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쇠락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장르의 교배를 통해 ‘형이상학적 시장’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는 영토의 부재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기호의 증식을 따라 인간이 사는 땅을 소외시키며 상승한다. 총체적인 장르화 경향 속에서 촌스러운 것과 세련된 것,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위계는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문화적 경계는 계속해서 흐려지게 된다. 장르의 자동운동이 펼쳐지는 세계는 중세이면서 미래다. 생존 서바이벌이면서 소꿉놀이이고, 모험물의 배경이면서 거대한 광고판이다. 자유도가 높은 연애 시뮬레이션 공간이자 일손이 몹시 부족한 물류창고이다. 장르들의 자동운동은 모세혈관처럼 구석구석 뻗어가면서 문화의 죽은 요소들에 혈류를 공급하고, 동시에 변덕스러운 유행을 뒤쫓아가야 한다는 조급함을 조장한다.

7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70쪽.

8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85쪽.

9 이시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석기용 옮김, 필로소피, 2021, 220~264쪽 참조.

10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4.

11 장이지 해설 「패쇄회로의 시니시즘」, 같은 책, 131쪽.

12 『책기둥』, 민음사, 2019.

13 『소규모 팬클럽』, 파란, 2020.

14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는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동시대 미술의 핵심적인 특징이 ‘탈역사’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김광우 옮김, 미술문화, 2004, 56~57쪽 참조.

15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76쪽.

16 『이미지의 운명』, 85쪽.

17 이수명, 『표면의 시학』, 난다, 2018, 19쪽.

3.

그런데도 최근까지 한국 문학장에서 ‘장르적인 것’과 문학의 불순하면서도 유희적인 관계는 종종 새로움의 표시처럼 평가받아왔다. 가령 이광호는 이상우의 소설집 『프리즘』에 대해 “실험문학의 엘리트주의적 ‘특권 의식’을 무화시킨 자리에서 시크한 포즈로 장르적인 것들과 실컷 어울”린다고 상찬한다.18 물론 이상우의 텍스트가 장르적이면서도 시적이라는 이광호의 평은 타당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장르의 어울림이라는 모델 자체는 오늘날의 문화에 흔한 것이다. 지금 모든 장르적인 요소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교호交互하고 있다. 오늘날 장르 소설은 점점 더 ‘남성향’과 ‘여성향’의 요소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양상을 띤다. 많은 웹 소설 플랫폼에서 판타지, 무협, SF, 루프물, 로맨스, BL, GL 등의 장르가 서로 뒤섞이면서 다변화되고 있다.

가령 (실제로 성인물 웹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인데) 동물이나 반인반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르를 뜻하는 ‘퍼리물’과 소년들의 연애를 다루는 장르인 ‘BL’이 뒤섞여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서로 연애 관계에 있는 두 소년 중 한 쪽(혹은 두 명 모두)은 동물의 귀나 꼬리가 달린 모습으로, 심지어는 주둥이가 튀어나오거나 털에 뒤덮인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여기서 이 트랜스-장르의 창출은 동시에 새로운 욕망의 생산이다. 시장을 형성할 만큼 충분히 많은 사람이―BL의 상품화된 동성애 코드에 더욱 금기시되는 수간(獸姦)의 맥락을 덧입힌―‘BL-퍼리물’을 욕망했기 때문에 그런 트랜스-장르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런 장르가 플랫폼에 재현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욕망하고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르의 공급이 있어서 욕망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처럼 트랜스-장르의 자극적인 생산은 자본주의가 욕망을 견인하고 구성하는 방식이며, 사회적 금기나 정치적 불화를 상품화하는 방식이다. 상이한 장르들이 뒤섞여 제3의 장르로 진화하면, 독자들이 새로운 장르 속으로 자연스레 흘러 들어간다. 그런 방식으로 장르들은 뒤섞이면서―마치 미개척된 신대륙을 발견하듯이―새로운 시장 혹은 상품란을 끝없이 형성해 나간다.

오늘날 문학과 ‘하위문화’의 뒤섞임도 시장의 이러한 요구 혹은 경향을 반영한다. 물론 제도적으로 구분된 플랫폼 사이에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기는 한다. 잘 알려진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의 편집과 교열 수준은, 웹 소설 플랫폼에서 읽을 수 있는 장르 소설에서보다 평균적으로 높을 것이다. 또 ‘순문학’은 종이책의 형식이 여전히 더 어울리고, 웹 소설은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판형으로 읽는 것이 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도 점점 더 흐려지거나 다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점점 시를 e북으로 접하고, 종이책으로 재출간된 웹 소설을 자주 읽게 되고, 점점 더 여러 플랫폼과 잡지를 취향에 따라 선택하게 되면서 말이다.

이미 많은 독자에게 ‘순문학’ 혹은 ‘실험문학’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수많은 장르 중에서 다소 어렵고 따분한 하나의 장르를 의미할 것이다. 아니면 어렵고 모호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매력적인 하나의 장르일 수도 있다. 장르적인 것과 뒤섞이면서 문학의 외연을 넓혀가는 전략의 미학적 유효성을 긍정하려면 ‘문학’과 ‘하위문화’ 사이에 여전히 완고한 서열이 있음을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로질러야 하는 서열이 있다는 가정 자체가 이미 사라진 서열을 상상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여전히 그런 구분이 있다는 가정 자체가 보수적인 제도의 관점일 수 있는 것이다. 장르적인 것과 대범하게 어울리는 소설의 사례를 제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 소설의 평균적인 미학에 들이닥친 예기치 않은 침입자”19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밈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편재하는 ‘트랜스-장르’의 사례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팬픽이나 웹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요소가 ‘제도 문학’ 속에서 모종의 진화를 거쳐 발견되고, 그 역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흔하게 일어난다. 예술이 하위문화로부터 쓸만한 원자재를 수입한다는 식의 설명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든 긍정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든 정확하지 않다. 그보다는 경계 없는 장르들의 우주에서 기호들의 엔트로피가 끝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현실에 더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우리의 책장과 장바구니 속에 이미 모든 것이 어울려 섞여 있듯, 그런 어울림 혹은 엮임assemblage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퇴행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제 새로운 것도 아니다.

삶의 장르화가 우리 시대에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그리고 ‘급진적’이라는 말이 문화의 지배적인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면) 오히려 급진적인 예술은 ‘삶의 장르화’에 반대하여 ‘예술의 삶-되기’라는 공식의 업데이트를 요구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임무가 제도적 예술이나 특정한 플랫폼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문학의 탈중심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차별적으로 뒤섞이고 있는 장르들의 평면 속에서 어떻게 삶을 재발명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18 이광호, 「누가 비트를 두려워하랴―이상우와 소설의 유령들」, 《문학과 사회》, 2015년 여름호, 341쪽.

19 같은 페이지.

4.

하지만 무엇이 ‘급진적’인지를 말하기 전에, 오늘날 일반화된 밈의 논리를 단순하게나마 검토할 수 있다면 유익할 것이다. 거기에 비추어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짚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인터넷 밈은 추상적인 밈의 논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넷 밈은 삶의 구체적인 차이, 고통, 모순을 장르적 코드나 한갓 웃음 속으로 환원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인터넷 밈에는 현대 시의 사례에 필적할 만큼 심오한 면도 있다. ‘이질적인 기호들의 배치’ ‘주체와 대상의 혼동’, ‘인간과 비인간의 뒤섞임’, ‘동물-되기’, ‘기계-되기’ 등의 시론적 테마는 인터넷 밈의 단골 소재이다. 유명한 정치인, 독재자, 활동가, 연예인은 인터넷 밈에서 동물이나 사물이 된다. 독재자나 CEO는 우스갯소리를 어눌하게 되풀이하는 ‘짤’이 되어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이때 실제 인물의 권위와 ‘짤’의 우스움 사이의 격차가 클수록 더 효과적인 밈이 된다(즉 더 활발하게 패러디된다). 인터넷 밈은 혐오 발언과 편견, 스팸 이미지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실어나르지만, 동시에 사회적 권력, 젠더, 인종, 계급 등의 구분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넘나들기도 한다. 우리는 밈에서 광범위하게 실현된 ‘민주주의적 시학’을 재발견할 수 있다. 문화 속에 극히 세분된 서열을 만들어내는 장르들의 인정 투쟁은 밈화된 시대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밈’은 모든 기호의 위계를 휩쓸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예외적 역량이기도 하다. 가령 주식이나 코인을 유도하는 일론 머스크의 말과 사진은 누군가에게는 동경을,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심한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밈이 되어 이런저런 방식으로 패러디되면 점차 동경도 분노도 박탈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웃음거리로 변한다. SNS를 비롯한 오늘날의 일상이 심한 박탈감과 열등감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면, 밈은 그러한 정념을 가벼운 웃음으로 망각하게 한다. 유행하는 콘텐츠들이 뚜렷한 차이와 서열을 생산한다면, 밈은 그 차이들을 자신의 순환 속에 녹여 없애버린다.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설명했던바 자본주의는 기존의 사회체와 그 사회체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봉건적·가부장적·목가적 논리―를 해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밈의 경제는 마르크스의 예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간다. 밈의 압도적인 순환 속에는 ‘부르주아지’라는 주체도 없고, 주체가 없으니 ‘이기적 타산’도 없다. 오히려 밈의 경제에서 주체는 공허한 관념일 뿐으로, 밈을 유통시키는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거나 “유일한 주체는 욕망 그 자체이다.”20 밈을 생산한 창작자의 독특성은 그것의 끝없는 재생산 속에 서서히 용해되어 사라진다. 그런 방식으로 밈은 진정한 ‘저자의 죽음’에 도달한다. 재미있는 콘텐츠는 계속해서 복제되고 재생산되면서 원래의 내용과 형식을 잃어버리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진화가 활발하게 일어날수록 더 유리한데, 밈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콘텐츠의 이런저런 고정적 정체성이 아니라 끝없는 재생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창작자는 주체가 아니다. 말 그대로 ‘유일한 주체는 순환의 욕망 그 자체’이고, 콘텐츠를 창작하거나 패러디하는 사람들은 밈의 운반자 역할을 할 뿐이다. 밈은 (그 기원부터 유전자에 빗대어 생긴 개념으로서) 그것을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인간 주체를 장르나 콘텐츠를 전달하는 물리적 숙주에 불과한 것으로 사고하게 유도한다.

인터넷 밈의 감각적 생산물들은 끝없이 다양하다. 그래서 온종일 보고 있을 수 있지만, 다음 날이면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몸에 남는 것은 거대하고 공허한 순환의 감각뿐으로, 웃긴 이미지나 이야기의 다양성이란 일의적인 순환의 욕망이 낳은 환영들simulacres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로 그것―일의적인 존재의 다양한 메아리를 남기는 순환―이 들뢰즈가 자신의 시학에서 언제나 원했던 것이었다. “인간을 위한 것도 신을 위한 것도 아닌 빈칸, […] 인칭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닌 특이성들. 인간이 꿈꾸고 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와 자유, 효과 창출에 기반하는 순환들, 메아리들, 사건들이 이 모든 것들을 가로지른다. 빈칸을 순환시키는 것,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21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의 시학이 말하는 비인칭적인 ‘빈칸’에 대응하는 것을 두 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자본과 시이다. 자본이야말로 감각적 메아리들을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모든 분열자를 예외적으로 능가하는 잠재적 욕망 자체다. 한편 시 역시 “인칭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닌 특이성들”로서 감각과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오늘날 모든 것을 자신의 메아리로 만들어버리는 빈칸으로서, 밈은 자본의 경향성과 시의 경향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이 교차 속에서 일종의 ‘시적 물신’으로서 NFT 같은 화폐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지금 말하는 ‘시’는 하나의 장르나 매체로서의 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어떤 형식을 해체·조립하면서 감각적 효과를 산출하는 기호의 역량 자체다. 이 역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식의 시도 분쇄하고 재조립해 버린다. 지금 (장르로서의) 시는 한 연만 골라 찍은 사진, 캘리그래피, 감성적인 그림에 곁들인 문구, 스팸 광고에 함께 기재된 ‘오늘의 좋은 글귀’로 분해되어 이미지 파일로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미지 파일이 된 시를 볼 때 새삼 느끼는 것은 (장르로서의) 시가 전방위적인 밈의 유통 경제에서 대단히 불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장벽은 (이미지가 아닌, 그리고 영어가 아닌) 언어라는 불편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혐오 발언과 선정적인 이미지, 스팸 광고를 무차별적으로 실어나르는 인터넷 밈과 달리 시는 윤리적·지적으로 ‘수준 높은’ 감독을 받는다. 이것은 밈의 즉각적인 자극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를 한층 더 따분하게 느끼게 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더 자극적으로 만들고, 검열을 제거하고, 시집을 눈에 띄게 포장한다고 해서 시가 밈의 막대한 유통과 경쟁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쟁점은 글의 내용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따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22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이미지의 피상적인 자극에 홀딱 빠진 나머지 시를 즐기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에게 기호들의 이질적인 배치를 통해 유희하고, 거기서 어떤 비약적 의미를 산출하려는 ‘시적 본능’이 있다면, 동시대인은 그 본능을 포만하게 충족하고 있다. 밈이 기호와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충분한 시적 경험을 생산과 소비 양쪽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굳이 종이에 글자로 쓰인 시를 찾아볼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밈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향이 편향된, 자본이라는 단 한 명의 천재 시인이 생산하는 막대한 양의 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밈의 무한한 다양성은 동시에 지극히 일의적이다.

그래서 아마도 동시대의 특징 하나는 다음처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과 시가 서로의 ‘수준’에 도달한 시대. 시는 교환 가능한 추상적 재료가 되고, 자본은 독자적이고 재미있는 시학을 갖게 된다. 그 교차 속에서 밈의 경제가 형성된다.

이 경제를 설명하기 위해 동시대 이미지 경제에 계급론적 틀을 부여하는 시도를 해봐야 헛된 일이다. 가령 독일의 미술가 히토 슈타이얼은 고자본 미디어의 해상도 높은 이미지에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잡다한 콘텐츠들과 ‘3세계’ 영화의 ‘빈곤한 이미지’를 대립시키고, 빈곤한 이미지의 연대를 통해 미디어에 지배적인 시각적 위계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3 하지만 오늘날 이미지의 계급적 정체성은 전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미지는 계급투쟁을 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옷을 갈아입고 치장하면서 문화 속에 살아남기 위해 인정 투쟁을 한다. 밈은 NFT의 사례들처럼 비쌀 수도 있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짤’처럼 (디지털 풍화를 겪은 나머지) 빈곤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가 밈으로 살아남기에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밈은 양극단의 계급적 성격과 이질적인 정체성을 동시에 갖는데, 이질적인 요소가 뒤섞일수록 밈으로 살아남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레트로한 밈 이미지를 활용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광고처럼, 이미지는 외양상 ‘빈곤’하더라도 기호의 경제에서는 오히려 매력적인 것, 비싼 것일 수 있다. 밈의 순환을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은 이미지의 외양에 대한 계급적 정체성 식별을 바탕으로 한 유사 유물론이 아니라, 기호들의 산만한 분산과 조립을 설명하는 형이상학-미학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양적 완화가 특이점 너머로 밀어붙인 세계의 형이상학-미학화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기관 없는 몸 위에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주체인 분열자를 온 힘을 다해 생산하는 경향성이 있다. 이 주체는 자본가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이 경향성으로 늘 더 멀리 가면, 마침내 자본주의는 자신의 모든 흐름과 더불어 달나라에 이를 것이다. 물론 아직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24

20세기의 저자들은 ‘아직은 달나라까지 가지는 않았다’라고 썼다. 그런데 올해 초 가상화폐와 ‘밈 주식’에 사활을 걸었던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 주식이나 가상화폐의 형이상학적인 치솟음을 따라 ‘달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신난 듯하면서도 자포자기한 듯 들리는 이 구호에는, 어차피 이 가속화된 자동운동을 멈출 수 없다면 누구보다 빨리 이 운동에 동참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올해 초 베스트셀러였던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 역시 이러한 경향의 가속화에 대한 한 보고서로 읽을 수 있다). 이 탈코드화 경향에 앞장서는 ‘분열자’는 삶의 모든 것을 장르적 요소로 취하는 자이다. 즉 분열자에게는 예술이나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노동, 질병, 사회적 적대, 고독, 가난 역시 장르이다.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그러한 장르들의 ‘믹스 앤 매치’로 형성된다. 마치 주식을 하는 사람에게 기업의 비리, 정치적 추문, 빈부격차, 기술적 진보, 전쟁의 위협, 전염병, 장기 불황 따위가 주식 매매를 위해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경제적 요소로 환원되는 것과 같다. 밈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심지어 나의 안위나 재산이 걸린 일이라 하더라도, 이런저런 장르적 요소의 조합으로 여기는 데 익숙해졌다.

20 『안티 오이디푸스』, p. 61, 135쪽.

21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153쪽.

22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48쪽.

23 히토 슈타이얼,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참조.

24 『안티 오이디푸스』, 70-71쪽.

5.

그렇다면 지금 예술은 어떻게 밈과 구분될 수 있는가?

잘 알려진 첫 번째 대답은 ‘제도’이다. 이제 밈과 예술작품 사이에 내재적인 변별점은 없지만,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예술계’나 ‘신scene’이 있어서 무엇이 예술이고 아닌지를 분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미술에서, 가령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1962)에도 뒤따랐던 설명이다. 마트에서 무차별하게 유통되는 캠벨 수프 캔과 달리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은 미술 제도와 제도 내적 존재들(비평가, 미술관의 관객, 동료 작가 등)을 의식하고 만들어졌고, 그 점이 평범한 상품과 예술작품을 분리해주었다. 만약 그렇다면 〈캠벨 수프 캔〉처럼 도발적인 작품은 제도적인 구분을 횡단하는 동시에 바로 그 도발을 통해 제도적 권력을 보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이해하기 쉽고, 여전히 참고할 만하다. 제도 자체가 다변화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제도는 재현되는 것의 경계와 위계를 관장하는 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이 오직 제도의 인정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제도를 벗어날 수 없는 심급이라고 생각할 때 예술적 실천 또한 제도에 대한 저항 아니면 복무로 축소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역사적인 제도 비판 미술에서 종종 볼 수 있었듯이 예술작품은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 시장에 의존하고, 시장을 비판하기 위해 제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우왕좌왕하고 말 것이다. 시장이 기호를 탈영토화하고 제도가 기호를 재영토화한다는 점에서, 시장과 제도는 구조적으로는 공생 관계이지만 일시적으로는 서로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활동/작품은 재현되는 한에서 제도 아니면 시장에 반드시 의존할 수밖에 없다(상품화·제도화를 전적으로 거부한다면 결코 문화 속에 현시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두 번째 대답은 ‘진정성’이다. 밈의 순환은 모든 문화적 산물에서 진정성을 녹여 없애버리지만, 여전히 예술작품은 진정성을 담지하거나 전달하거나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런 종류의 진정성, 즉 사회의 일반적 흐름과 구분되는 예술가의 진정성은 낭만주의가 낳은 관념이다. 진정성은 속된 사회에 거리를 두고 자신의 ‘실존적인 미학’ 혹은 ‘자기 통치’를 지속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성은 엘리트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라는 혐의를 받긴 해도 속물 자본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성을 띠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논리’는 이러한 낭만적 부정성을 자본주의적 매력의 통치 아래 흡수한 결과다. 즉 동시대에는 개인주의, 다원주의, 기호들의 사유화, 가치의 주관화, 예술가-되기 등 예술의 부정성/창조성이 일반화된 문화적 논리가 되었다. 또 특히 한국 문학장에서 진정성은 1980년대 이후 거대 담론이 퇴각한 이념적 빈자리를 메꾸며 부상한 윤리적 ‘레짐regime’으로 맥락화되곤 한다.25 진정성이 진품성이나 유일성의 관념과 연결되면서 “‘나의 진정성’과 ‘타인의 비진정성’”26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되어왔다는 폭넓은 반성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밈화된 시대의 무분별함에서 모종의 문학성 혹은 글쓴이 개인을 방어하기 위해 ‘진정성’이 복권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특히 이 모종의 문학성 혹은 글쓴이의 목소리가 지금까지는 소외되어온 소수자의 것이라는 명분과 연결되면 ‘진정성’은 다시금 침략 불가능한 요새가 된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트랜스-장르’라는 밈화된 시대의 문화적 전략이 맹위를 떨치고, 반대편에는 진정성이라는 방어 진지가 재구축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존재 증명과 관련된 진정성 관념을 고수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진정한 것과 진정하지 않은 것,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자기중심적인 잣대를 계속해서 세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성의 배타적인 요새 안에 머물 때, 결국 ‘나’라는 중심 기표를 부여받은 존재의 정체성이나 성격만 교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진정성을 증명하는 개인적 사례의 전시가 아닌, 장르들을 가지고 하는 강도intensité의 놀이도 아닌, 예술에 대한 전혀 다른 보편적 비전을 찾아야 한다.

어떤 문학적 사례가 이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미 유사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던 몇몇 평자가 박솔뫼의 소설에 주목한 것은 참고할 만하다. 가령 강동호는 박솔뫼의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강조해야 할 것은 그의 픽션이 안내하는 시공간이 모종의 초현실주의적이고 탈역사적인 장소일 수 없다는 점이다. […] 박솔뫼의 픽션적 정치성은, 그러한 공간을 누구도 온전히 점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곳을 향해 자신을 포함한 더 많은 사람이 연루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과정에서 확보되는 것처럼 보인다.”27 즉 박솔뫼의 소설은 재현의 우선순위 혹은 위계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사라진 세계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세계의 풍경을 탈역사화하지 않는다. 이 글의 어휘로 말하자면 ‘거대병렬’을 토대로 하면서도 장르나 기호의 놀이로 빠져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충분히 장르화·서사화될 만큼 인상적인 것들을 소설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박솔뫼 소설의 특징이다. “이두현의 영화에서는 무척 인상적으로 찍힐 것이 분명하고 중요해 보일 법한 장면들이 프레임 밖에서 벌어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 무언가를 중요해 보이게 만들고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일을 이 영화감독은 지겨워하는 것이다”(「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28). 많은 비평가가 평했듯 박솔뫼의 소설에서는 중요한 것 혹은 중요한 이야기가 빠져나간 픽션의 평평한 공터를 익명의 형상들이 채우고 있다.

물론 지금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박솔뫼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소설과 시의 많은 사례가 장르적인 효과를 덜어내고 가능한 ‘평평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상우의 『두 사람이 걸어가』는 『프리즘』에 있었던 장르적인 ‘고어함’을 비롯해 모든 작위적인 장치들을 벗으려고 하는 듯 보인다. 일관된 서사를 전혀 만들지 않는 산만한 요소들 사이에 한 줄의 일기가 마치 선언처럼 있다. “이들은 그냥 존재한다.”29 이 말은 일견 책에 산만하게 나열된 모든 것에 대한 긍정처럼 읽힌다. 존재를 말하는 데 있어 문학이 어떤 의미도 서사적 전략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한마디로 문학이 사물에 ‘그냥 존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문학작품의 표면에서 소외되거나 추방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가』에는 더욱 의심스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그리는 공간은 그 구체적인 말과 사물의 나열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초현실주의적이고 탈역사적인 장소”처럼 보이는데, 소설이 밝히고 있듯 이 다양한 말과 사물이 몽땅 “하나의 국가, 외국이라는 픽션의 소유”(p. 120)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퇴물들”(p. 39)과 어느새 낡은 역사적 이름들, 까다로운 유행의 감별사와 최신의 것들이 서로 경쟁하고 야합하는 이 “하나의 국가” 속에는 국경이 없다. 이 기호들의 무정부 상태는 거대병렬의 한 예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밈화된 시대의 전형적 풍경으로도 읽을 수 있다(실로 이 책 속의 초국적 공간에 아우라의 위계는 없지만, 매력의 서열은 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이 걸어가』는 오히려 과장된 장르적 장치를 소거함으로써 삶 자체의 장르화라는 동시대의 조건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외국이라는 장르, 문화적 대화라는 장르, 다국적 어울림이라는 장르, 현대 예술이라는 장르 등의 배열이 『두 사람이 걸어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사람이 걸어가』에 “이들은 그냥 존재한다”라는 탈장르적 선언과 삶 자체의 장르화라는 모순된 경향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평평하게’ 될수록, 즉 다양한 기호들과 위계 없이 뒤섞일수록 예술작품은 밈화된 시대의 일반화된 경향에 더 치명적으로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순수문학’ 혹은 ‘진정성’의 가치를 드높임으로써 장르들 혹은 기호들 사이에 위계를 재도입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중요한 문제는 밈화된 시대 속 장르들의 생존 전략인 ‘혼종성’으로부터 삶의 임의성과 다면성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삶의 제거할 수 없는 임의성과 다면성은 삶의 어떤 면을 명명할 수 없게 하고, 망각하게 하고, 체념하게 하고, 때로는 강렬한 정동으로 휘어잡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삶의 그런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문학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특한 개인’이라는 환상에 기대는 진정성 증명과는 다른 일이다.

‘제도의 인정’에도 ‘진정성 증명’에도 의존하지 않는 세 번째 길은 장르화된 세계의 공백으로부터 출발하는 길이며, 제도와는 비스듬한 관계만을 맺는다. 누군가의 마음속 진정성을 격하하지도 않지만, 진정성에 특별한 미학적·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진정성을 최종 선택지에서 제외한다면, 우리는 ‘예술과 밈이 어떻게 구분되는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독특한 작품 혹은 한 명의 예외적인 예술가만으로는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 또 제도적 측면에서 예술과 밈은 형식적으로 쉽게 구분될 수 있지만, 그러한 형식적 구분에 의존하는 것은 예술의 민주주의적 토대 즉 ‘거대병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현재 생성되고 있는 예술의 연쇄적인 창안으로부터 어떤 의미의 전선을 구축하기 전까지 예술적 사건과 밈의 순환이 어떤 측면에서, 어떤 방법으로 구분될 수 있는지 확실히 정의할 수 없다. 즉 밈과 구분된 ‘문학’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확보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혼잡한 장르들의 우주에서 순수문학의 영토를 탈환하자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장르문학’의 새로운 사례들이 오늘날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이 문제 삼은 것은 삶 자체의 장르화 경향을 어떻게 사고하고, 그 전반적인 경향 속에서 약간 다른 방향을 찾을 것이냐이다.

오늘날 점점 더 표면적으로 되어가는 수많은 문학적 사례 속에는, 그 ‘표면’을 어떤 이름으로 점유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삶의 장르화’에 저항하는 실천들이 있다. 이 실천들은 당연히 ‘순수문학’의 제도적 범위나 ‘순문학’의 본질주의적 환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그 실천들을 엮어내면서 밈과 동시대 예술의 분리 작업을 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작품 혹은 비평의 연결을 중요시할 때, 결국 다시 기성 제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제도의 울타리 속에서만 어떤 문학적·담론적 연속성이 식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제도와 달리, 거대병렬은 밈과 마찬가지로 문화 속에 분열로 현상된다. 거대병렬은 문화적인 구분 혹은 학문 분과를 가로지르면서,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거대병렬의 영속적 경향은 제도의 일관성과 다르다. 그러나 이때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는 오늘날 장르들의 생존 전략인 ‘믹스 앤 매치’와도 다른 것이다.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의 역량은 삶의 독점 불가능한 다면성과 임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장르들을 뒤섞는 문화적 전략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는 무질서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는 열역학 법칙처럼, 모든 발견과 창조는 질서보다는 무질서 쪽에, 체계보다는 혼돈 쪽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분열과 혼돈이 같은 종류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의 생활이 바쁘고 고되어 시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읽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경제’보다 더 뜬구름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경제는 우리의 노동과는 점점 더 상관없는 것이 되어간다. 그러나 이 체계의 허구성을 꿰뚫어 본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조급함과 박탈감을 심어주는 기호의 경제에 의해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기호 생산자/소비자로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이토록 공허한 기호의 경제는 우리를 실제로 부자로 만들거나 빈자로 만들고 있다. 물론 시는 이 경제를 중단시킬 강제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다른 패러다임을 건설할 수 있는 세계의 비어 있는 표면을 발견한다. 오늘날 장르화된 삶만이 재현된다면, 역으로 장르화된 것들의 ‘공백’에 재현되지 않은 삶이 있을 것이다. 밈은 장르들을 마구 뒤섞으면서 세계의 관습적·역사적·이데올로기적 형상이 해체된 혼돈을 향해 간다. 문학은 혼돈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혼돈으로서 세계가 있음’을 토대로 더 멀리 나아간다.

25 낭만주의 이후 ‘진정성의 레짐’이 근대의 다양한 지적·사회적·정치적 조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부흥하고 발현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로는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15 참조. 덧붙여 이소연은 ‘진정성이라는 환상’이 1990년대에 가속화된 문화의 상품화·제도화 경향과 문학 담론장의 ‘권력 구도 재편’ 속에서 한국 문학의 새로운 윤리적 레짐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진정성이라는 환상―1990년대 문학이 타전하는 것」, 《문학과 사회》 2017년 봄호, 183~194쪽 참조.

26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15, 36쪽.

27 강동호, 「문학의 정치―재현·잠재성·민주주의」,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1년 여름호, 30쪽.

28 『우리의 사람들』, 창비, 2021, 202쪽.

29 『두 사람이 걸어가』, 문학과 지성사, 2020, 45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페이지만 병기.

『학산문학』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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