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 대해

교육과 배움의 관계

너의 교육자는 너를 해방시키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모든 교양의 비밀이다. 교양은 인조 사지와 밀랍 코, 안경 쓴 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이 줄 수 있는 것은 사이비 교육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니체 a 395~96)

사유의 초월론적 조건들은 앎이 아니라 ‘배움’을 기초로 조성되어야 한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들뢰즈 a, 365)

니체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자신이 어떤 “어려움, 욕구와 소망 속에서” 쇼펜하우어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었는지 기술한다(물론 면대면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만난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젊은 니체의 열광―비록 훗날의 실망을 예비하는 것이지만―은 시대의 불만을 넘어서는 교육과 철학에 대한 그의 희구에서 비롯된다. “내가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 즉 시대에 내재한 불만을 넘어설 수 있고 생각과 삶 속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라고, 다시 말해 그 말의 심오한 의미에서 반시대적이 되라고 다시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철학자를 그렸다면, 정말이지 지나친 망상을 한 셈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제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져서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면 부정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니체 a, 401, 강조는 원저자).

그 글에서 니체가 고발하는 당대적 문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인습과 의견에 갇혀 살며 불만을 품으면서도 거기에 안주하는 인간들의 게으름. 둘째, 다양하고 복잡해진 환경 속에서 부정직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언행. 셋째, 국가에 복무하는, 교육의 이념을 국가에 종속시키는, 그리하여 결국 철학적 사유를 모욕하고 무력화하는 강단 철학.

그리고 셋째와 불가분 연결된 문제인 넷째는 젊은이들을 “시험 유령으로 만듦으로써 철학 공부를 겁내서 그만두게 하는”(489) 교육 제도, 교육 관행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공부와 삶은 괴리된다.

니체는 이런 문제들의 타개책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배우는 자가 취해야 하는 주체적 도야이고 둘째는 가르치는 자가 행해야 하는 제도적·사상적 개혁이다.

배우는 자에게 제안된 도야의 방법은 위험한 것이지만 스승이 없을 때도 스스로 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즉 젊은 영혼들이 직접 “자신을 파헤쳐서, 가장 가까운 길로 무리하게 자기 본질의 수직 갱도로 내려가는” 방법이다. 좀더 쉽게는 다음처럼 자문해보는 것이다. “너는 이제까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끌어당겼고 무엇이 너를 지배하는 동시에 행복하게 했는가?”(394~95) 그 자기 탐색의 과정에서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기질과 성향을 발견한다. 이것은 개인의 ‘고유하고 진정한 본질’ 같은 것이 아니다. 니체는 우리의 실존이 역사적·상황의존적·우연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스스로를 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폐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긍정하게 된다―그것이 지배적인 가치에 비추어 추하거나 악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이것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사실에서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는 윤리로의 이동을 함축한다(Lacan). 다시 말해 ‘호명된 주체’에서 ‘배움의 주체’로의 이동을 함축한다.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긍정해야 하는, 우연에 의해 형성된 기질/성향이 배움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대담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섬세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집요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배울 수 있다. 또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냉정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기타 등등. 각자에게 ‘우연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어진 실존적 문제들에 스스로 대답해보려고 골몰하면서 말이다. 배운다는 것, 배움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는 것과 엄밀하게 같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 여기에 태어나 이 모양으로 생겨 먹게 되었는데, 좀 못생긴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내가 지금 걷는 배움의 길에는 최적의 생김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배움은 역사적·국가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배움은 철저히 타자에 의존하고 타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하는 순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배움의 길에 있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 자신보다 전문가일 수 없다. 배움이 특정한 ‘앎’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있을 때 배움은 극복되어야 하는 과정, 아직 앎에 도달하지 못한 미숙한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의 운동을 앎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두면, 오히려 앎이 배움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앎은 관념적 운동이지만 배움은 감각적 운동이다. 앎의 척도는 정확성이고, 배움의 척도는 진정성이다.

이러한 배움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니체는 배움의 주체가 취할 수 있는 발화 방식의 한 범례를 보여준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증인이 되는 그런 종류의 발화이다. 그 발화는 원칙적으로 객관적 재현이나 증명, 자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발화자는 현행화된 지식/권력의 ‘공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하나의 ‘사건’이 되어, 현행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들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가 근본적으로 더 우월함을 천명한다. 이때 시련은 발화와 발화자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데서 오는 ‘광기’이다. 자신이 겪은 시련에 의해 보증되는 이 천명은 자기충족적 예언이다(주판치치). 말하자면 배움은 어떤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들에 구속되어있지 않다. 니체는 자신이 가진 것이 없지만, 심지어 병들었지만, 철학자로서 지녀야 할 ‘매력'(“사회의 모든 계층에 발산하는 완벽한 매력”)을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발화의 내용과 발화자 사이에 어떤 거리도 없어진다는 것, ‘단순하고 정직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정확히 니체 자신의 삶이 보여주듯이 ‘미친다’는 뜻이다. 세계를 둘로 나누려다가 자신이 둘로 쪼개질 수 있는 것이다. 광기는 이 첫 번째 도야의 길에 내재하는 위험이자 시련이다.

최근 의 주목할만한 ‘성장소설’들은 이러한 도야의 동시대적 사례를 보여준다. 손보미의 「불장난」 말미에서 어린 화자는 스스로 세계의 비밀에 도달했다고 느낀다(비록 어린 화자의 광적인 확신에 어른 화자의 회의가 덧붙여지고, 그에 따라 진술의 광기는 누그러지지만). 예소연의 「우리는 계절마다」의 끝에서 화자는 자신을 자기 삶의 입법자로 내세운다. “나는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예소연, 328). 우리는 이 소녀 화자들에게서 니체적인, 약간 광적인 오만함과 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화자들이 그런 방식의 자기 진술에 이르는 것은 상황(스승의 부재, 가정에서 받은 상처, 부모의 무감함이나 부재, 또래 집단 속의 폭력 등)이 그들에게 위험한 도야의 길을 가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성장소설들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는 스승의 부재, 혹은 선생의 영향력의 현저한 약화이다.1 물론 스승이 있든 없든 우리는 배우는 자이다. 그러나 안내자가 없는 이 배움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방황, 여러 시련을 거친다. 성장소설은 이러한 ‘비제도적’ 배움을 예증하는 데 특권적인 장르이다(그리고 이 장르가 소위 제도문학 안에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배우는 자가 미치지 않기 위해 있어야만 하는 장르이다. 배우는 자(성장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소설적 거리는 우리를 메타적으로(배움들을 배우는 자, ‘두 번 배우는’ 자로) 만들고, 메타적으로 미친다는 것은 제정신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어린 화자들이 ‘자기 입법자’가 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인 자기 통치와 얼마나 다른가? 이 성장소설들의 ‘성장’은 국가적인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이것이 가치들을 ‘둘로 나눈다’는 목적에 비추어 고찰되어야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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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스스로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우는 자인 동시에 교육자인 차라투스트라는 다음처럼 말했다. “그대들은 배운다는 것, 잘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 나로부터 배워야 한다!”(니체 b,)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잘못 배운다는 것은 죽음과 예속을 향해 치닫는다는 뜻이다. 스승이 필요하다면 어떤 특정한 앎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서다.

첫 번째 제안이 독특한 시련―그러나 주체성에 가해지는 엄청난 시련은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일반적인 것이다―에 노출된 배우는 자를 위한 것이라면, 보다 ‘보편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교육 사상의 개혁이다. 이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교육자들, 가르치는 자들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의 현재 교육 제도의 근본 사상을 새로운 근본 사상으로 대체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노력을 요한다. 이제 이 대립을 직시할 때가 왔다. 왜냐하면 나중 세대가 승리를 거두어야 할 투쟁을 어떤 세대는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니체 a, 465). 그렇다면 교육의 ‘근본 사상’은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니체의 텍스트는 배움과 교육의 역설적 관계를 사고하게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문제이다.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의 앞부분에서, 니체는 진정한 교육이란 (아는 척하기 위한, 사회적 지위를 위한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 각자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임을 단언한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글의 뒷부분에서 니체는 교육의 이상이 국가보다 높이 있어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국가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교육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동시에 강요하는 것, 교육을 재현의 질서에 종속시키는 것, 배움의 과정을 특정한 ‘앎’의 목적(이를테면 수능에서의 높은 점수)에 종속시키는 것은 결국 국가이기 때문이다.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가 하는 일은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잉여나 초과와 같은 교육의 이상을 담보하고 보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니체는 배움의 다원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교육의 드높은 이상/이념idea을 주장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이항대립, 이를테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나 진리와 다원성의 대립 같은 이분법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중적 주장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보편적 이성, 헤겔의 절대지 같은 교육의 최종목적은 배움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경색시키며, 교육을 국가의 목적에 종속시킨다. 하지만 니체의 비판은 그러한 이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교육의 이상이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더 강대하고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경험적·역사적으로 알듯이, 교육이 어떤 내적 이상도 진리도 없이 ‘다양성’을 가치로 내세울 때는 그 다양성조차도 결코 지켜낼 수가 없다. 한국의 공교육 제도가 다양성, 자율성 등을 기치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의 출범, 즉 김영삼 정권 때부터이다. 그로써 학생의 인권과 자율성을 보장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교육의 ‘시장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김환희). 대학 입시라는 일원화된 목적이 약화되거나 해체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학교에서의 다양한 활동은 결국 더욱 숨 가쁜 평가들로 환원되었다. 다양성이나 자율성의 기치는 학원/과외 종류의 증가와 사교육비 폭증으로 이어졌다. ‘결과 중심 평가’에서 ‘과정 중심 평가’로의 이동은 일견 앎의 목적보다 배움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그리고 그런 효과도 실제로 어느 정도는 있지만―실질적으로 그것은 수행평가 비중의 증가, 수시 비중의 증가, 그에 따른 관리관찰과 자기 관리의 미세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국가는 당연히 배우는 자 개개인을 염려하지 않는다. 국가의 목표는 (외적으로) 타국과의 경쟁에서 존속하기 위해 (내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통제·관리·육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국가에 의해 보호되고 정의되는 교육은 국가를 위한 인적자원의 육성을 목표로 한다. 권위주의적 교육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으로 옮겨오는 동안, 그 인적자원의 형상은 성실하고 근면하며 유순한 ‘노동자’에서 최대 이윤을 위해 자기 삶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기업가’로, 혹은 자신의 가치 상승을 위해 자원을 투자하는 ‘자산 관리사’(페어)로 변모해왔다. 이러한 형상의 변화는 국가의 위상과 역할 변화(산업 인력을 동원하려 하는 국가에서 자신의 ‘금융적 매력도’를 증가시키고자 하는 국가에 이르는 변화)와 상관적이다. 그러나 교육이 어떤 주체성을 생산하려고 하든, 이런 방식으로 사고된 교육의 목적이 국가의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반대로 니체가 말하는, 국가를 초과하는 교육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재현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지배적인 재현 체제로부터 셈해질 수 있는 것만이 공식적·실증적으로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증적·실용적 관점에서 이 ‘이상’은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기껏해야 낭만적인 망상이나 고집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실증적 지식/권력을 무화시켜버리는 니체의 ‘가치전도’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갖추고 있다. 재현될 수 없는 교육의 이상은, 재현될 수 없는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그 자리에서의 발화를 통해 그것의 존재를 증언하는 배우는 자에 의해 보증된다. 역으로, 재현될 수 없는 교육의 이상은 배우는 자 각각의 해방을 보증한다.2 이는 결국 인적자원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그렇기에 예측할 수 없는―사유자들의 훈육이다. 따라서 젊은 니체의 주장은, 겉보기에 상충하는 듯한 두 가지(배움의 예측 불가능한 다원성과 교육의 높은 이상)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 서로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양성과 진리―물론 니체라면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흉내 내는 말이라고 했겠지만―는 교육 안에서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러한 교육은 사실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이념적으로 존재한다. ‘조건 없는’ 교육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조건 없는 대학 같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 없는 대학은, 원칙적으로 대학이 공표한 소명과 공언한 본질에 근거해, 독단적이고 불공정한 전유를 일삼는 모든 권력에 비판적으로―그리고 비판적인 것 그 이상으로―저항하는, 최후의 장소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데리다, 16~17)

대학이 현실에 실재하는 제도/기관인 한에서, 대상적/객관적 조건들에 구속되지 않은 ‘조건 없는 대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건 없는 대학은 교육을 위해서 이념적으로 고수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념을 고수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비판가이자 ‘의심의 세 대가’ 중 하나로 칭해지는 니체의 의도는 가치들이 공허한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학자들, 그것을 위해 철학을 이용하는 학자들, 그들은 국가에 복종하는 학자들로서 니체의 최대 공격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이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비판적인 것 그 이상”인, 스스로도 “지나친 망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니체의 의도는 국가를 초과하는 교육의 급진적 이상으로부터 다양성, 창의성, 진정성 같은 가치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의 상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참조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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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론 제도적·합법적인 스승이 없다는 것이지, 잠정적으로나마 스승의 역할을 하는 어떤 인물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손보미의 「밤이 지나면」의 ‘그녀’, 예소연의 「우리는 계절마다」의 ‘미정 엄마’,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의 ‘모래 고모’ 등은 소녀의 성장기에서 ‘비제도적 스승’의 역할을 한다. ↩︎
  2. 이것이 교육과 ‘천재’의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물론 우리가 19세기의 니체처럼 천재를 예외적 개인의 기질로 정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만 천재성은 대상적/객관적 조건들의 산술로 설명될 수 없는 배움의 예측 불가능한 효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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