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ristin Ross, Communal Luxury–The Political Imaginary of the Paris Commune, London: Verso,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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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 책에서 나는 1871년 파리 코뮌으로 알려진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또 그 사건보다 오래 살아남은 상상계imaginary―파리 코뮌 지지자들과 내가 “공동의 유복”이라고 이름 붙였던 상상계―의 요소들을 한데 모아보려고 했다. 1871년 봄의 72일 동안 벌어진 노동자 주도의 반란은 파리라는 도시를 자치권 있는 공동체로 바꾸어 놓았으며, 결속과 협력의 원칙에 따라 사회생활의 자유로운 조직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로, 그해 봄 파리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유럽 주요 도시의 서민들이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던 힘과 능력을 엘리트 지배 계급에게 행사한 것에 대한 충격에서부터, 그에 대한 국가적 보복의 야만성에 이르기까지―은 논란과 분석을 불러일으켜 왔다. 내가 여기에 스케치한 코뮌의 역사적 풍경은 지금 살아있는 것인 동시에 개념적인 것이다. “살아있는”이라는 말을 통해서 내가 의미하는 바는, 말해진 단어 자체, 채택된 태도들, 반란자들과 그들의 동료 여행객들 그리고 가까운 동시대의 지지자에 의해 수행된 물리적 행동들을 포함한 구체적인 질료들materials이다. 개념적으로, 그 단어와 행동 들이 그 자체로 많은 논리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나는 뒤따르는 페이지[이 책]에서 그것들에 따라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행동가들의 말과 창안을 집요하게 지속함으로써 우리가 코뮌의 구심적인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코뮌이 영감을 준 방대한 양의 정치적 분석 가운데, 파리 코뮌 지지자들Communard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심지어 그 사건의 기억에 정치적으로 동조하는 작가와 학자들로부터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상―반란군들이 했던 것, 자신들이 행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한 것, 그들이 자신의 행동에 부여한 중요성, 그들이 포용했거나 수입했거나 반발한 이름들과 말들―의 대부분[의 내용]은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가령 좌파 편집자 프랑수아 마스페로에 의해 (코뮌이 높은 주목을 받았던 마지막 기간인) 1960년대와 70년대에 재발행된 책들을 통해 말이다. 나는 사건 뒤에 코러스처럼 이어지는 정치적 논평이나 분석―찬양하는 것이든 비판하는 것이든―보다는 그들[행동가들]의 목소리와 행동 들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선호해 왔다. 나는 코뮌의 성패를 따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 이후에 오는 운동, 반란, 혁명을 위해 코뮌이 제공할 수 있거나 계속 제공해 온 직접적인 교훈을 알아내는 데도 관심이 없다. 과거가 실제로 교훈을 준다는 것은 내게 전혀 분명하지 않다. 발터 벤야민의 경우에서처럼, 나는 특정한 사건이나 투쟁이 현재의 형태화 역량figurability에 생생하게 개입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믿으며, 오늘날 바로 코뮌의 경우가 그렇다고 본다.
2011년 세계적인 정치적 장면은 진영 혹은 직업의 형상과 현상학이 지배하고 있었고, 직업적인 형식의 항의로의 회귀는 (내가 1980년대에 이미 썼던, 코뮌에 활기를 불어넣은 역사적인 시인들의 문제와는 다른 일련의 문제 설정과 함께) 다시 나를 파리 코뮌의 정치 문화로 돌아가도록 밀어붙였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오늘날의 정치적 의제를 지배하는 관심사들―인터네셔널주의자의 결합, 교육의 미래, 노동, 예술의 지위, 공동-형식 그리고 생태학적 이론과 실천 등을 어떻게 개조할 것이냐 하는 문제―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코뮌의 문화를 바라보는 방식(바로 그들의 생각이 이 책 속에서 스스로 구조화되도록 함으로써)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대체로, 나는 오늘날의 정치 속에 코뮌의 반향들을 확고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비록 내가 그러한 반향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말이다. 그 ‘반향들’ 중 몇몇은 농담 같은 것인데, 『뉴욕 타임즈』가 2011년 11월,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의 한 거리에서 이름을 모르는 젊은 활동가를 인터뷰하면서 ‘루이즈 미셸’이라고 소개한 경우가 그렇다.[1]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찾는 데 썼던 노동자들과 장인들이 코뮌을 결성한 19세기의 노동 환경보다 한술 더 뜨는 자본주의의 동시대적 형식―노동 시장의 붕괴, 비공식적 경제의 증가, 과도하게 개발된 세계의 사회적 연대 시스템의 약화―아래 오늘날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몇몇 미래학자가 십년 전에 주장했던, 그리고 오늘날에도 계속 주장하려고 발악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창의적인 테크노-유토피아의 실체 없는[비유물론적]immaterial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은―특히 그리스나 스페인 등지에서 사회가 와해된 이후로―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파트타임으로 일하거나, 공부와 일을 동시에 하거나, 그들이 하기 위해 훈련 받았던 전공과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해 찾은 일 사이에 걸쳐 있거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통근 혹은 이주해야 하는 머나먼 거리와 타협하는 등―은 모두 나에게,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것처럼, 우리 부모님 세대의 세계보다 코뮌 지지자들의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비디오 게임 디자인, 해지펀드 매니저, 스마트폰의 관료 체계bureaucacy에 자기 커리어의 궤적을 위임하고 있는 오늘날의 젊은 사람들, 즉 다양한 비형식적 경제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 위한 공간과 방식 들을 개척하려 애쓰고 있고, 번성하는―파국적 위험이 숨어있지만―글로벌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지금 다르게 살기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해 보는 젊은 사람들이, 1870년대 쥐라 산에서 발발한 코뮌 참여자 난민과 동료 여행객 사이에 있었던 논쟁에 관심을 기울이리란 생각은 내게는 완전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무정부주의적 코뮤니즘”이라고 불리는 것의 이론화를 이끌었던 그 논쟁은, 공동체의 세력을 탈중심화하는 문제, 어떻게 그들이 실체가 되어 번성할지의 문제, 그리고 유대 관계 속에서 그들 각자가 “연합”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코뮌의 반향을 오늘날의 정치 문화와 사건들에 더 명확한 방법으로 적용하기를 삼간다면, 현재, 특히 1989년 이후로 내가 그 사건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그 사건이 그것을 재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 정박한 두 가지 지배적인 역사학으로부터 출항하는―마치 랭보의 「취한 배」처럼, 해방되는―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지배적인 역사학이란, 한편으로는 공식적인 국가-공산주의자의 역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공화국의 국민적national인 역사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주입된 계통lineages과 서사적 구조들로부터 해방된 그것을 다른 틀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조급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국가-공산주의의 종말은 코뮌을 공식적인 공산주의 역사학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역할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그것은 1989년 이후로, 러시아혁명의 33번째 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있었다는―그다지 사실임직하지 않은―레닌의 춤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날, 새로운 혁명이 오래된 것을 실패한 혁명으로 변경시켰다는 그 혁명이 코뮌보다 하루 더 길게 지속되었다는 날로부터 말이다. 그리고 내 논쟁의 대부분은 코뮌이 한 번도 정말로 ‘프랑스 공화주의의 영웅적인 급진적 시퀀스’라는 프랑스의 국민적 허구―그것을 ‘19세기 말의 발작적인 반응’으로 치부하는―에 속했던 적이 없음을 명확하게 하는 방향을 따른다. 우리가 만약 코뮌의 잘 알려진 참여자 중 하나인 구스타브 쿠르베의 기록, 즉 코뮌이 지속되는 동안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기를 포기했다”[2]는 말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또 죽었던 그 파리의 반란자들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그랬다는 거창한 신념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파리 코뮌의 상상계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중간 계급의 국민적 공화주의자들도, 국가 주도형 집산주의도 아니다. ‘공동의 유복’은 그것을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의 유복이 아닐뿐더러, 공리주의적 국가 집산주의자들이 20세기 전반세기에 경험했던 지배적인 세력의 성취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다른 참여자들이, 몇 년 후 코뮌의 정치적 구조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평가 한가운데, 다음과 같이 주장했던 게 아닐까 한다.
사건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옹호자들을 통해 [……] 코뮌은, 미래를 위한 더 우월한 이상 하나를 건립한다. [……] 그것의 탄생에 관한 전문가도 있을 수 없는, 타이틀이나 부유함도 없는, 카스트제건 봉급제건 간에 근원적으로 노예제가 없는 이상 말이다. 도처에서 “코뮌”이란 단어는 가장 거대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즉 새로운 인간성을 나타내고, 자유롭고 평등한 승리자들을 만들어내며, 낡은 범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게 하고, 다른 세계를 향해 하나의 세계가 끝난 평화 속에서 서로 돕는 것으로서 말이다.[3]
부르주아지가 분리된 상태로 남겨 놓기 위해 분투하는 사회적 지형의 영역들―도시와 시골뿐만 아니라 이론과 실행,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 등―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코뮌의 포용력으로,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역사를 전혀 다른 기초 위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그 기초와 역사는 자신의 윤곽에 따라, 정확히 “프랑스적인” 혹은 국민적인 사유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것의 윤곽은 한편으로는 그보다 작았고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다. 코뮌의 상상력은 국제주의적인 지평선 속에 있지만, 지역 자치 단위의 규모에서 우선적으로 가동된다. 그것은 국민[적 차원]에서, 혹은 마찬가지로, 시장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자신을 위한 공간을 갖지 못한다. 코뮌의 상상력이 발생시킨 맥락―그것이 대대적으로 패퇴하게 되었던, 프랑스 국가나 억압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자리잡은 시점보다, 그토록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더 나은 순간이란 무엇인가?―속에서, 코뮌은 욕망들의 극히 강력한 집합으로 드러날 것이다.
앞서 이 서문을 시작할 때, 나는 코뮌을 노동자 주도의 반란이라고 일컬었다. 72일동안 지속되었던 그 반란은, 파리를 협력과 유대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삶이 재구성되었던 코뮌의 자치 구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여러 요소를 가진 사건의 일면만 재현하는 이와 같은 단순한 묘사도 문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공동의 유복”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사건을 ‘파리 거주자들의 72일’―대포를 나포하려 시도한 3월 18일부터 5월 말 대학살의 마지막 피의 날들에 이르기까지―로 제한하는 통상적인 연대적이거나 지형학적인 틀을 넘어 확장시켜야만 한다. 알랭 달로텔과 다른 이들을 따라, 나는 그 사건을 제국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노동자 계급의 모임과 클럽에서 분출되었던 열기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본다. 또 나는 그 사건을 엘리제 레클루, 앙드레 레오, 폴 라파르그, 구스타브 르프랑세, 그리고 다른 이들을 비롯한 코뮌 참여자 난민들과 영국과 스위스의 망명자들이 그들의 지지자들과 동료 여행객들―마르크스, 크로포트킨, 윌리엄 모리스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협력했던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생산된 사유의 광범위한 탐색과 함께 끝마친 것으로 본다. 비록 지리적으로 봄의 반란으로부터 멀리 있지만, 그 사건의 동시대인들인 후자의 세 사람―덧붙이자면, 내가 다른 곳에서 그에 대해 쓴 바 있는 아루튀르 랭보의 경우처럼―은 몇 주 동안 파리에서 있었던 격변이 그들의 삶과 사고의 전환점이 된 많은 사람들에 속한다.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코뮌을 관습적인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넘어 이러한 두 개의 인접한 장면으로 흘러넘치는 것으로 변경하고자 해왔다. 확장된 시간성은 [첫째로] 나로 하여금, 내전을―그것이 흔히 그렇게 규정되는 것처럼―국제전이 야기한 상황적인 곤궁과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결과로 보지 않도록 해준다. 사실, 그와 정반대의 시야를 갖게 한다. 계속 진행 중이던 내전의 한 순간적인 양상으로서 국제전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4] 둘째로, 프랑스 바깥으로의 망명의 움직임을 뒤쫓고 그에 따라 발생한 이론적 생산물들을 우선시하는 것은(그것의 선도적인 사상가들, 가령 프루동주의자들이나 블랑키주의자들보다), 일종의 이후의 삶[내세적 삶]afterlife―그러나 정확히 말해 나의 관점에서는 이후에 온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의 본질적 부분인―이주, 교차, 생존자들의 기록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해준다. 프랑스 단어 survie[생존, 사후의 삶, 내세 등을 동시에 의미하는 명사]는 이것을 아주 잘 상기시켜준다. 즉 삶을 넘어선 삶. 사건의 추억이나 전통이 아니라―비록 그것들의 일부 형식이 확고하게 형성되는 중이라 할지라도―사건의 연장으로서, 도시의 거리들에서 있었던 반란의 최초 행동들까지, 사건의 논리를 위해 모든 조각을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것.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투쟁의 지속이다. 앙리 르페브르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있는 것과 개념적인 것 사이의 변증법’ 속에서, 운동에 대한 사유는 오직 운동과 함께, 동시에 오직 운동 이후에 발생한다. 즉 운동 자체의 창조적 힘과 스스로에 대한 과잉으로서 촉발된다. 행동이 꿈과 이상을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사건의 과잉된 부분과 아주 긴밀하게 결속된 사유는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내는 이론의 잘 조율된 수완을 갖고 있지 않다. 그 ‘거리’가 지리적인 것이건 연대기적인 것이건 말이다. 그 사유는 [사건의 과잉된 부분의] 순간을 인내심 있게 추적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를 그 순간의 실질적 구축의 지속되는 한 부분으로서 바라본다. 따라서 투박하지만 건설적인 사유가 된다. 그것은 소위 통상적으로 “고급 이론”이라고 말해지는 것과는 거의 닮지 않았다. 『프랑스 내전』은 『자본론』과는 다른 종류의 책이다. 그리고 예컨대 르클뤼와 모리스가 때때로 거칠고 체계 없는 사상가들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유를 맥락context―이념들이 그 순간에 생산적인 동시에 즉각 효과를 낼 수 있는 장소로서의 맥락의 창조와 구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십오 년 전 처음 엘리제 르클뤼에 대해 썼을 때, 그의 작업은 드문 몇몇 개척적인 반식민주의적 지리학자들, 가령 베아트리체 기블린과 이브 라코스테 등의 연구들을 제외하곤 사실상 알려진 바가 없었다. 오늘날 그는 막대한 양의 국제적 관심―미완의 생태학의 한 종류로서 그의 작업을 재고하려는―의 중심에 있다. 무정부주의에 대한 그의 저술들 역시, 크로포트킨의 저술들처럼, 새로운 관심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윌리엄 모리스 역시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사회주의적 생태학”의 논의를 설립한 하나의 목소리로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학술적 관점은, 나 자신의 사유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잠깐 지나치듯 언급하는 것을 제외하면, 모리스, 크로포트킨, 르클뤼의 정치적 사유에 근간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즉 모리스가 “우리가 1871년 파리 코뮌이라 부르는, 노동의 자유를 근본으로 하는 사회를 설립하려는 시도”[5]라고 불렀던 것과 더불어 역사적 관계를 사유하는 것 말이다. 그 연결성을 설립하는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단원에서 하는 작업 일부이다. 또다른 초점은, 이 세 작가의 작업 속에 있는, 르클뤼가 연대라고 불렀고, 모리스가 “동료애”라고 불렀으며, 크로포트킨이 “상호 도움”이라고 불렀던, 심오하고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사유rethinking를―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감수성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지침으로서―비교해보는 것이다.
운동의 즉각적인 사후적 삶survie―참여자들의 일생 동안 있었던 일―을 추적하면서, 나는 르클뤼가 자신이 쓴 책 중 가장 좋아했던 책 『시냇물의 역사L’Histoire d’un ruisseau』에서 빌려온 이미지 하나를 상기하곤 한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 쓰였고 종종 교내의 상으로 주어지기도 하는 그 작은 책에서, 그는 “바다의 파도가 물러난 뒤 모래에 나타나는 물길의 작은 체계”[6]의 구불구불한 형태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목적에 따라 ‘파도’가 코뮌의 막대한 열정과 업적, 그리고 그것들을 파괴했던 대학살의 폭력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작은 물길은 거대한 힘으로 상충하는 두 운동 한가운데서, 공기가 통하는 작은 체계가,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가, 예측하기도 전에, 모래 위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급격한 변화와 교차와 협력을 포함한, 드물고 종종 수명이 짧은 동료들의 연대의 상징적 형태인 그 체계는, 아마도 일시적momentary이겠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무언가의 계기가 되는] 하나의 순간momentum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전하고자 노력한 내용이다. 또 『시냇물의 역사』는 다른 면에서도 우리에게 유익한데, 그것이 코뮌의 불균형한 역사적 힘을, 그 사건의 비교적 미시적인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책은 피에르줄 헤셀, 쥘 베른, 프루동, 투르게네프로부터 의뢰받은 시리즈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전형적으로 19세기 중반의 백과사전적 야망(흔히 역사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물들과 성분들의 역사, 즉 “역사들의 문학”을 청소년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그 시리즈를 고안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유명한 천문학자는 하늘의 역사를 써 달라고 요청받았고, 비올레 르 뒤크는 브뤼셀 시청사와 대성당에 대해 저술했다.[7] 개울과 시냇물에 관해 쓰겠다는 르클뤼의 선택은, 일종의 병적이지 않은non-pathological 지리학적 규모, 예를 들면 들판이나 마을 혹은 지역 등에 대한 그의 선호를 반영한다. 아마 코뮌은, 르클뤼가 그의 책에서 산개울에 대해 갖춘 태도와 자질을 통해 가장 잘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태도의 규모와 지리학은 살아가기에 적합한livable 것이지만, 거창한 것은 아니다. 르클뤼의 관점에서 개울은, 그것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강보다 더 나았다. 강물의 급류는 무수한 흐름에 의해 미리 조성된 깊은 고랑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반면 개울은 자신의 길을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어떤 산개울의 물줄기의 강도는 아마존의 강과 비교했을 때 비례적으로 더 커진다.
[1]Malia Wollan, “Occupy Okland Reground, Calling for a strike,”, New York Times, November 1, 2011. [루이즈 미셸(1830~1905)은 대표적인 코뮌 참여자 중 한명으로서, 시인, 교육자,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역주]
[2]Gustave Courbet, letter to his parents, April 30, 1871, in Petra Ten- Doesschate chu, ed., Correspondance de Courbet (Paris: Flammarion, 1996), p. 266.
[3]Elisée Reclus, in La Revue blanche, 1871: Enquête sur la Commune[1897](Paris: Editions de l’amteur, 2011) pp. 81-2. Here and elsewhere, translations from French are mine.
[4]여기서 ‘국제전’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을 말한다. 저자는 코뮌의 반란이 프로이센의 침략에 대항한 것이었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관점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역주.
[5]William Morris, “The Hope of Civilization,” in A. L Moton, ed., the political writing of Willam Morris (London: Wishart, 1973) p.175.
[6]Elisée Reclus, Histoire d’un ruisseau (Paris: Actes sud, 1995), p.93.
[7]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 르 뒤크(1814~1979)는 프랑스의 건축가, 중세 미술사가이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