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그로츠, 성차의 본성―이리가레와 다윈(계속 추가)

 

The Nature of Sexual Difference

irigaray and darwin

Elizabeth Grosz(2012)

Journal of the Theoretical HumanitiesVolume 17, 2012 – Issue 2: sexual difference between psychoanalysis and vitalism

오역 있을 수 있음.

나는 이따금 다음처럼 이상한 생각을 품곤 했다. 성차―성차는 뤼스 이리가레의 입장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핵심 개념이며, 그녀의 작업을 통상적으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연관시키게 했다―의 문제에 기반한 이리가레의 작업이, 어쩌면 찰스 다윈에게서 기묘하고 예측할 수 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진화론의 아버지이며, 프로이트의 작업에 역시 주요한 영향을 준 그 다윈 말이다. 이리가레의 개념은 다윈이 그의 두 번째 주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정교화한 개념에 아마도 쉽게 연결되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성차에 관련한 이리가레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확증은 정신분석 이론이 아닌, 성 선택의 힘과 강제에 대한 다윈의 이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똑같이 아이러니하게도, 다윈의 작업은 자연적 실존을 구성하고 변형하는 힘에 대한 광범위하며 체계적인 설명일 뿐만 아니라, 생의 모든 풍요와 복잡성을 야기하는 성적 매력과 성차의 무정형한 힘에 대한 최초의 이론적 체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리가레가 성차를 문화적 삶의 동력으로 생각했다면, 다윈은 그것을 자연적 실존의 동력으로 보았다. 여성의 사회적인, 문화적인 그리고 말 그대로의 내적 종속을 명확히 논파했던 이리가레의 그 개념이 생물학적 이론과 공명할 수 있을까? 다윈의 혁명을 통해 변형된 생물학은 성차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자원을 페미니즘적 사유에 제공할 수 있는가? 성차는 사회적, 문화적 삶에 의해 규정되는 문제들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생 자체를 복잡하게 하고 증식시키는 자연적 도발의 일종으로 생물학이 전념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 않은가? 성차는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형태를 막론하고 생의 보편적 문제인가? 아니면 성차는 수많은 문화적 차이들, 말하자면 오직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삶을 특징짓는 풍요와 갈등을 구성하는 인종, 계급, 민족, 종교와 같은 차이들 중 하나일 뿐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성차가 근본적으로 문화적이며 가변적이라고 단언하기 위해 오랫동안 힘들게 분투해왔다. 그러한 개념인 성차가 생물학에 의해 근거지어지고 정교화된다면, 성차의 존재론적 지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리가레와 다윈이 서로에게 가장 급진적인 통찰의 빛을 비추도록 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 난제를 다루고 싶다. 성차는 생물학적인가? 그리고 성차가 최소한 일부분 생물학적이라고 한다면, 역사적·지리적으로 가변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열린 결말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약화되는가? 성차가 생물학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선험적 차이들의 자기-충족적인 연속이 아니며, 다른 모든 차이화의 형식에서 분리될 수 있으며, 그러나 다른 모든 차이들에 내속적이라는 것을 함의하는가? 이리가레가 사회적이고 개념적인 삶에 대한 분석에서 발전시켰던 그 개념, 성차가 자연계에서 갖는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문화계에서의 존재론적 지위는?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 이론에 매우 핵심적인, 자연과 문화 사이의 이행 속에서는? 이 기획에서 나는, 다윈주의적 해석이 페미니즘적 읽기에 개방되도록 이리가레와 다윈이 성차에 대한 서로의 개념을 마주하게끔 할 것이다. 이 읽기는 다윈과 동시대인이었던 일련의 페미니스트와 달리 두 성별의 동등함이 아니라 그들의 차이, 그들의 자율성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급진적인 통약 불가능성을 겨냥한다. 마찬가지로 문화적, 정치적, 언어적 차이들에 우선적으로 집중했던 이리가레의 작업을 자연과 동물에 관련한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에 개방할 것인데, 이 문제들은 그녀가 주안점을 두지는 않았지만 성차 개념을 더 풍요롭고 정교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윈과 이리가레의 결합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진화적 효과, 일종의 교차-돌연변이를 만들고 싶다. 여기서 나는 성차를 (자기와 타자의 관계로서) 상상계나 (사회적, 언어적, 법적 관계로서) 상징계가 아니라 라캉적 의미에서 실재계에 위치시키고 싶다. 성차는 인간 개체나 사회적 질서보다 선재하며, 그것이 상징적 질서가 반드시 마주하는 어떤 문제와 도발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질서를 초과하는 실재의 강제력에 속한다. 여기서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성차의 상상적 혹은 상징적 재현보다는 성차의 존재론, 성차의 실재이며, 생물학적이며 문화적인 확산의 양식으로서 그것의 강제력이다.

따라서 나는 성차와 관련된 이리가레의 기본적인 수칙을 개괄적으로 논하고 존재론적, 정치적, 윤리적 원칙으로서 이 개념을 설명하는 데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그리고 다윈의 성 선택에 대한 설명의 핵심 요소를 정교화할 것인데, 그럼으로써 둘의 공명을, 굴절되고, 변형되고, 우리의 해석에 열릴 수 있는 그들의 수용력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윈의 작업[성 선택]은 단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비-환원주의적인 방식으로) 문화적, 사회적 용어이기도 하다는 점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고, 이리가레의 작업[성차]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삶의 형식적 힘만큼이나 자연과 생명의 충만한 힘의 지배적 원칙이기도 하다는 점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리가레와 성차의 개념

성차 개념에 대한 이리가레의 이해는 이제 꽤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개념을 정교화한 그녀의 초기 작업 이후로 삼십 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잘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이 개념은, 동시대 페미니즘 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지식의 모든 형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연구 패러다임 전체와 사회적, 문화적, 관계적 삶의 주요한 변형들을 수반하는 정치-윤리적 프로젝트 양쪽을 정교하게 할 수 있다. 성차는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 개념이고, 우리가 자연과 문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개념이다. 이리가레는 성차가 우리 시대의 문턱에 있는 개념이자 현재를 규정하는 단독적인 철학적 주제임을 아주 설득력 있게 논했다.

성차는 우리 시대의 주요한 철학적 주제 중 하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각 시대는 사유하는 하나의 주제, 오직 하나의 주제를 가진다. 아마도 성차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사유한다면 우리를 “구원”할 우리 시대의 주제이다. [……] 성차는 몸과 살의 다산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세계의 범위를 지금까지―적어도 서구에서―알려진 어떠한 한계보다도 풍요롭게 구성할 것이다.[1]

이리가레에게 성차는 단지 여성, 페미니스트, 여성의 투쟁에 참여하는 활동가에게만 가장 흥미로운 개념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장은 그보다 더 강하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은 성차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철학적 개념, 가장 중대한 사유, 주제, 이념이라는 것, 우리 영역의 사회적, 정치적, 지적 집중을 정향할 개념이라는 것이다. 신중하게 말해,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영향을 주는 다른 모든 개념과의 얽힘―우리가 현재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형식 속에서 일반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존속하는 모든 차이와 관련 있는 모든 개념, 즉 성적 지향, 인종적 혹은 민족적 용어들, 종교적, 경제적, 지리적, 정치적 차이들―을 통과하면서, 성차는 우리 자신, 세계, 개념성 자체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문턱을 표시한다. 성차는 다른 모든 사회적, 정치적, 개인적 차이와, 인식된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단일한 주체를 제공하는 유대의 [교차적] 얽힘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축이 되는 개념이다. 이것이 성차가 그저 다른 모든 차이 중 하나인 것이 아니라 개념성 자체를 열어젖히는 개념이요 탁월하게 철학적인 개념인 이유다. 또 그리하여 성차는 삶에, 사회와 그것의 모든 구성물에, 삶보다 더 거대한 것에, 사회적인 동시에 자연적이고 또한 신적이기도 한 것에 영향을 미치는 개념이다. 이리가레에게 성차는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되어 온 것으로서, 그 개념의 정교화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세계에 대한,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변형할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20세기 철학의 구성적 개념이라고 믿는 차이 자체와 더불어, 성차는 모든 살아있는 차이의 동력이며, 그것의 정교화는 현재를 특징짓는 연구 패러다임과 개념성의 형식을 규명하는 데 기여해왔다. 소쉬르, 데리다, 들뢰즈의 대조적인 저술에서처럼 성차가 순수 차이의 정교화 혹은 국지화인가 아니면 이리가레의 주장처럼 순수 차이 자체가 성차의 결과인가 하는 문제는 내가 여기서 직접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문제는 종종 이리가레와 그의 동시대 (남성) 철학자들의 관계를 간결하게 드러낸다.[2]

이리가레의 가장 날카로운 독자들(화이트포드, 버크, 모텐슨, 스코르)과 더불어[3] 나는 성차에 관련한 그녀의 중심 주장―이 주장들은 이리가레의 초기 텍스트에서 면밀한 디테일을 다듬어나갔다―을 요약하면서 그 개념에 대한 이리가레의 설명을 개괄적인 형식으로만 발전시켜보려 한다.

  • (1) 성차는 성들 사이의 가장 기초적인, 약분할 수 없는, 비-상호적인 차이이고, 다른 성의 몸, 역할, 위치를 대신하지 못하는 한 성의 불능incapacity이다[성차 때문에 한 성은 다른 성의 몸, 역할, 위치를 대신할 수 없다].[4]
  • (2) 성차는 형태학적인 차이, 몸의 차이이고, 몸의 함의와 의미상의 차이이며, 몸을 통해 개발되는 세계에 대한 인지적이고 질적인 몰입이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이러한 ‘몸적bodily’ 차이를 해부학적인 혹은 주어진given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리가레는 살아있는 몸적 차이를 결코 날것의 자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통해 중개된 것으로 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결코 해부학적인 단순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의 정신-사회적 측면에서 살아간다. 성차는 그것의 본성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와 용도의 측면에서 고려된 구별되는 몸의 개념이다.[5]
  • (3) 성차는 단지 약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것으로, 측정을 위한 외부가 없고 제삼의 항이 없으며 이 관계나 구성 요소를 계량할 어떠한 객체도 없는 용어들 사이의 관계다.[6]
  • (4) 그러므로 성차는 마치 사과나 오렌지처럼 독립적으로 주어진 두 전체, 두 성 사이의 상대적인 차이가 아니다. 성차는 두 개의 자율적인 전체의 비교나 대조[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차이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두 성을 구성하는 관계다.
  • (5) 성차는 그 자체로, 혹은 그것의 개념적, 정치적 표현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된 역사가 다양한 유형의 가부장제 역사임을 고려할 때, 성차는 남성과 그의 남성화된 특성을 긍정적으로 간주하고 여성과 그녀의 여성화된 특성을 그러한 긍정적 측면에 반하는 것으로 여기는 대립의 형태로 축소되어왔다. 가령 여성적인 것을 스스로 보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적인 것을 보충하는 것으로만 간주하는 성적 상보성complementarity, 혹은 여성과 여성적인 것을 남성과 남성적인 것의 일종 아니면 공식적으로 같은 것으로 여기는 성적 동등성 등의 형태 말이다. 여성성을 남성성의 필요나 이해관계[의 대상]로 치부하는 이 모든 가부장적 환원의 형식들 속에서 성차는 대립이나 상보성 혹은 동일성으로 축소된다. 여성적인 것은 가부장적인 사회와 재현 시스템 속에서 그 형식들 아래 재현될 수밖에 없다.
  • (6) 그러므로 성차는 두 성의―한 성에 다른 성의 이해관계를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사회적 제약을 강하게 반영하는―현재하는 특질, 자질, 특징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성차는 결정 불가능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럼에도 존재할 수 있고 스스로 정교화할 수 있는 무엇이다. 성차는 그것이 제거된 형식으로만, 즉 두 성 사이의 동일성, 대립, 상보성 따위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데, 이 형식들에서 여성은 알려진 모든 것으로서의 남성과의 모종의 관계 속에서만(남성에 의해 제시된 규범에 비추어 어느 정도 동등하거나, 의존적이거나, 자율적인 것으로서) 이해된다. 성차는 결정 불가능한 차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두 존재, 생성의 과정에 있는 두 존재 사이의 차이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 차이화의 과정에 있는 차이이다.
  • (7) 성차는 차이의 형식이자 자신을 차별화하는 차이화의 방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의 형식이기도 하며, 그 강도intensity의 열린 결말이 재생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아닌, 두 몸을 특정하게 연결하는 성애적 만남의 방식이다. 몸적 차이로서 성차는 생식기의 차이로 환원할 수 없지만 그러한 차이들을 포함하며, 그 차이들이 필연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실천들을 포함한다.[7]
  • (8) 성차는 보편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문화적인 만큼이나 전적으로 자연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는 변형의 두 방식을 표시한다. 그것은 다른 자연적, 문화적 차이들이 출현하는 조건으로서 보편적으로 체험된다.[8]
  • (9) 성차가 두 성 사이의 실질적인 만큼 잠재적인 관계들을 특징짓는다면, 그 관계는 재생산으로 축소될 수 없다. 재생산은 성차의 간접적 산물이지만 결코 그것의 목적telos이나 목표가 아니다. 성차는 세 번째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존재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 세 번째 존재는 둘의 산물이긴 해도 둘에게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삼항은 언제나 이항[여성 혹은 남성] 중 하나인 아이와 동일시될 수 없다. 이 삼항은 둘의 관계에서 생산된 무언가 새로운 것, 둘 사이를 조정하거나 둘의 관계를 확증할 수 있는 어떤 사물, 자질, 관계다.[9]
  • (10) 성차는 단지 남성과 여성의 성 정체성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성차의 영향은 그것의 실재에까지 가닿는다. 성차는 단지 다른 주체의 약분할 수 없는 두 유형의 실존이 아니고, 적어도 다른 두 개의 약분할 수 없는 인격, 관점의 틀, 경험, 개념화의 방식, 지식의 형식, 존재의 기술이며, 어떠한 활동에 임하는 적어도 두 개의 다른 방식이다. 성차의 존재론은 주체, 객체, 세계 자체와 다르게 관계하는, 성적으로 차이 나는 인식론과 실용적 형식들을 수반한다.
  • (11) 성차는 그저 하나의 공유된 세계가 아니라 다수의 세계들이 존재하는 조건이다. 성차는 세계와의 형태학적인, 지각적인, 연합적인 관계를 [홀로] 점유하는 개별 주체들뿐만 아니라―주체가 즉각 이용할 수 있는 세계와는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공유하는 세계를 마주하고, 접촉하고, 공동-점유하는 역량을 통해 다른 형태학적이고 지각적이며 연합된 관계에 간접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주체들을 수반한다. 나와 성적으로 다른 누군가는 내가 점유한 것과는 다른 세계를 내게 제공할 수 있는 자,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는 누군가이다.
  • (12) 틀림없이 이리가레의 가장 논쟁적인 주장은 성차가 다른 모든 차이의 생산에 관여하는 동력이자 힘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것이 인종, 민족, 종교, 계급을 비롯한 차이들의 기저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의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 성차가 다른 모든 차이에 보편적으로 동반되는 것인 동시에 그 차이들의 전송과 전파를 위한 수단 중 하나라는 것이다. 어떤 다른 차이도 성차처럼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는 관계에 있지 않고―즉 다른 모든 차이는 [단지]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다―다른 어떤 사회적 차별의 형식도 성차와 협동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전파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개요는 이리가레의 구상을 그것의 가장 기초적인 공식으로 축약해버리는 것이지만, 눈부신 보석 같은 개념의 다채로운 요소와 측면을 요약하는 이 시도는 수많은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 곳곳에 각인된 평등주의적 프로젝트에 대한 이리가레의 적의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 인종, 계급이나 민족 사이의 동등함을 직접 겨냥하는 어떤 평등주의적 프로젝트던, 이리가레의 관점에서는, 차이를 특정화하는 프로젝트와는 적대적이었다. 평등주의적 프로젝트들은 동등함을 달성하기 위한 ‘중립적’ 수단, 언제나 지배적 위치의 가치를 반영하는 수단을 동원한다. 평등주의의 결과는 주어진[기성의] 용어, 이상, 가치가 되어가는 동등함이다. 성차에 대한 이리가레의 연구는, 통약 불가능한 차이를 특정화하는 작업에 집중한 다른 페미니스트와 반인종주의자의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동등함을 기입할 수 있는 독립적인 가변성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문제 삼고, [이미]그렇게 측정된 성별이나 인종과 독립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고 여기]는 성과 인종의 주어진 규범을 문제 삼는다. 이리가레의 독특함이자 철학에 여전히 기여하는 특징인 그녀의 반-평등주의와 반-본질주의, 그리고 현재와 실제에 미래와 가상 이상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는 성차에 대한 그녀의 이해의 핵심 요소이다.

2. 자연과 문화

성차는 자연계, 문화의 다중적 형식, 자연에서 문화로의 다양한 이행을 특징짓는다. 이것이 이리가레에게 성차가 구성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소여]given인 이유다. 물론 주어진 것이라 해도 그것은 역시 체험되고, 창안되고, 발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리가레의 입장은 복합적이며, 사회구성주의자라고 추측할 수 있는 이들의 많은 반대를 이미 예상하고 있다. 성차가 자연을 특징짓는, 자연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 중 하나임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을 고정되고 변함없는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성차는 문화의 모든 형식이 지닌 특성이자 모든 문화가 마주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문제다. 문화는 또한 죽음과 문화적 전파를 다룰 수밖에 없고, 이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삶의 방식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문화적 필연성이 된 생물학적 우연성이다. 이리가레는 자연 자체가 여성의 사회적, 문화적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을 생물학적 설명으로 좁게 환원하는 특정 방식이 그럴 뿐이라고 이해했다. 이리가레에게 문제는 생물학이 아니라 생물학이 남성적 사고에 지배되어온 방식이다. “여성을 착취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여성적이기보다 남성적인 용어로 해석된 생물학이다.”[11]

우리가 자연적인 동시에 문화적인 존재라면, 문화와 자연의 관계가 폐기나 극복이 아니라 공존이자 서로 관여하고 정교화하는 방식이라면, 문화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을 다루는 방식이고 자연적인 것은 문화적 창발의 조건이라면, 자연을 내던져버리거나 넘어서는 것이 아닌, 자연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역동적 개념이 필요하다. 자연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변화의 결과가 경직되거나 고정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자연이 변화의 생산 방식이라는 점(그러므로 고정되거나 경직되거나 불변하는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따라서 자연은 반-역사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역사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음을 이해해야 한다. 자연 자체가 이미 성적[有性]sexed이라는 점, 성차가 살아있는 것들(식물, 동물, 인간)의 세계를 표시한다는 점, 혹은 자연 자체가 적어도 둘이라는 점.

자연은 적어도 둘이다. 둘이란 남성과 여성이다. 보편적으로 자연을 극복하려는 모든 사변은 자연이 하나[一者]가 아니라는 점을 망각한다. 그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이 추론은 필수적이다―분절점으로서의 실재를 만들어야 한다. 자연은 이다(작음/큼, 어림/늙음 같은 이차적 차이들을 순서대로 포함하는 이다). 보편적인 것은 하나로서 사유되어왔고, 하나에 기반해 사유되어왔다. 그러나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계는 자연 자체에 내재해 있다. 자연을 뛰어넘을 필요성을 묻기 전에, 자연이 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이 둘은 자연 자체에 유한성을 기입한다. 어떤 자연도 자연 전체와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단독적 총체로서의 [대문자] “자연”은 없다.[12]

이리가레는 자연의 새로운 개념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서구 철학사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 자연에서 사회의 기원이나 출발점을 찾는 대신 자연 자체를 생산의 현장으로 보는 것이다. 만약 자연이 결코 하나가 아니라 항상 적어도 둘이라면, 그리고 자연이 존재의 형식이기보다는 되기의 방식이고, 고정성이나 불변성의 형식이기보다는 시간적 변화의 방식이라면, 지배적인 서구 사상사에 비춰봤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새로운 사고의 논리, 개념성 자체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열린 결말의 역동적인 자연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문화가 다룰 보편적 질문을 제기하면서도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교화와 발전의 방식만을 제공할 것이다. 이리가레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다듬어나가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남성적 과학, 테크놀로지, 경제에 의해 취해진 지배, 억제, 통제의 폭력적 힘과는 매우 다른, 자연에서 문화로 이동하는 새로운 모델의 창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유를 되찾기 위해 출발해야 하는 곳은 바로 자연이다. [……] 그것이 출현하는 방식이나 그것의 다양한 현현을 차치하더라도, 자연은 적어도 이다. 둘이란 남성과 여성이다. 이 분할은 이차적인 것도, 인간종에 특유한 것도 아니다. 둘의 분할은, 그것 없이는 존재하지 않을 모든 살아있는 것의 영역을 가로지른다. 성차가 없다면, 지구상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성차는 생의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조건의 현현manifestation이다.[13]

이리가레에게, 성차의 정치적, 문화적 과업은 나 자신이 되는 것, 자연적으로 주어지지만 문화적으로 개발되고 다듬어지는 존재를 사회적, 개념적으로 배양하는 것, 나이면서 내가 될 수 있는 그 자연을 개방하고 개발하는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이었다. 문화는 자연을 극복하거나 다시 쓰는 것rewriting이 아니라 자연을 경작하고, 증대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문화는 자연을 (죽은) 상품으로 환원하는 것 이상일 수 있고, 이상이어야만 한다. 성차에 대한 더 적절한 인식을 통해 보면, 문화는 자연에 대한 억제, 지배, 통제보다는 자연을 개방하는 것이다. “나의 기획은 내 자연적 정체성의 기반에 의해 제약된다. 그 목적은 내가 있는 그대로가 될 수 있도록 그것의 함양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타자와 함께 창안하기 위해 나의 본성을 정신화하는spritualize 것이다.”[14]

성별 간 새로운 종류의 관계는 자연이 고정된 원형들의 집합으로 축소된 것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재인식될 때에만 가능하다.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관계들―대인 관계, 생산과 창조의 관계―은 그 자체로 오인식된 자연, 그것의 개방성이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자연에 근거하고 있다. 성차를 보다 적절하게 인식하는 새로운 일련의 사회적 관계는 자연에 대한, 자연과 문화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포함한다.

여성들이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의 인정을 획득하는 데 있어 겪는 어려움은 생물학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불충분한 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물학이 여성을 착취하는 데 역설적으로 사용되어왔다는 이유로 생물학적 종류의 모든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착취를 해석하는 열쇠를 거부하는 것이다. [15]

이리가레는 자연의 새로우면서도 다른 개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음을 인지했다. 그 개념은 협소한 과학적 특성화를 통해 인간의 자원,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나 (일시적으로) 유용한 상품 따위로 환원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연결과 자연을 경작할 우리의 문화적 의무를 이해한 개념이다. 자연은 이리가레게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작되는 곳, 선사시대의 장소, 문화의 갱신과 변화의 원천을 제공한다. 문화의 타자로서 자연은, 문화와 인간이 스스로를 갱신하고 변형하는 시공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자연은 재탄생의 장소이다. 자연은 제 2의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성별화된 우주이기도 하다. 자연은 인간의 세계, 가공된 세계 속의 삶과 공유를 위한 대안적 장소를 제공한다. 나는 그것을 이용하거나 잊어버리기보다는, 그것을 찬양하고 노래하려고 노력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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