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도와의 대화
개인의 정신병과 사회의 정신병//시인의 위치//비트 세대와 우리 세대//소외를 해결하는 방법//김도의 시에 관하여//종말이라는 테마//사이적 존재
희우
제가 지금까지 작가들이랑 인터뷰를 몇 번 해보긴 했는데 대체로 인터뷰 대화하는 게 재미가 없었어요. 지면이 주어져서 인터뷰 같은 걸 하면 비평가가 일방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잖아요. 근데 작품이 인상적인 경우에도 저는 여러 번 작품을 보면서 내가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는 방식으로 계속 읽는 걸 좋아하지, 작가한테 직접 뭘 물어보고자 하는 동기는 안 생기거든요. 비평가가 질문하고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했을 때 작가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고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질문을 뽑아서, 대답을 준비해서 듣고 이런 것보다는 그냥 친구끼리 얘기하듯이……
김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희우
예. 제가 도 씨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만난 지도 좀 됐고 서로 글을 나눈 지도 좀 됐으니 친구끼리 얘기하듯이 한다고 해서 어색할 건 없겠죠. 사실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작가여도, 그 사람이 이미 작가와의 대화라든지 그런 행사 같은 것들을 많이 하고 있으면 굳이 제가 할 필요는 없죠. 그런데 도 씨는 그런 행사를 할 계획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둘 다 인기 있는 작가들은 아니니 공개해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읽겠죠. 이렇게 된 김에 하고 싶은 말 아무것이나 다 해보겠습니다.
김도
네.
희우
편하게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일단 시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도 씨의 인생사를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사실 띄엄띄엄 알고 있는 거고 저랑 만났을 때는 이미 좀……
김도
그런 일을 지나온 상태였죠.
희우
그렇죠. 그래서 구체적으로 모르니까, 저도 이번 기회에 좀 듣고 싶습니다.
개인의 정신병과 사회의 정신병
김도
알겠습니다. 저한테 가장 큰 테마는 ‘병’인데요.
희우
시집에서요?
김도
아니요. 제 삶에서요. 어느 시점까지 제 인생 목표는 ‘좋은 기분으로 살고 싶다’였던 것 같아요. 좀 더 거대한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고요. 어렸을 적부터 기분이 너무 안 좋았어요.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엄마랑 상담할 때 얘는 앞으로 커서 사회생활을 못할 거라고 얘기를 했었고요. 여러 이유가 있었겠죠. 초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에는 어떤 연병장을 연상케 하는 구령대가 있고 그런 상징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교육 시스템 같은 게 있고 분위기가 있잖아요. 저는 (학교와) 너무 안 맞았는데 그 안 맞음을 그냥 눈 감고 지나가는 걸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마찰이 빚어지면서 점점 더 병세가 안 좋아졌던 것 같아요. 우울증이 되게 심했었고요. 그러다가 느낌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10대 중후반 무렵부터는 조증 증세도 조금씩 있었던 것 같아요.
희우
시에도 정신병에 관련한 내용이 있잖아요. 그런 경험에서 기인한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김도
예. 어렸을 적에는 우울증이 전반적으로 심했고 대학교에서도 우울증은 계속 심했어요. 그러다가 이상하게 군대를 갔을 때는 좀 멀쩡해지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힘들어하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뭐랄까 그냥 정신없는 규율에 치이다 보니까 오히려 좀 명료해지는 면이 있었고요. 제대하고 다시 우울증이 심하다가, 그게 너무 심해서 살길을 찾다가 찾은 게 대마초였거든요. 근데 대마초 복용을 하기 전에 약간 조증 조짐이 있었고, 그러다가 조증이 터졌었고, 조증이 터진 다음 좀 시간이 지나면서 터졌던 게 조현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얘기 안 했지만 찾아보니까 의학적으로 조현병은 해당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에게서 발병하고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는 식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돼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제가 전문적으로 논문을 찾아본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의견이 그런 것 같은데, 한편으론 (병의)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한테는 이게 정말 중요한 테마였어요. 왜냐면 이상하게도 조현병에 걸렸을 때 오히려 구원 같은 것을 봤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상태라면 살 수 있겠다 싶은.
그게 어떤 기분이냐면, 나를 의식하는 정도가 거의 사라진 상태고 세상 모든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거거든요. 이를테면 이 포도송이에 가지가 이렇게 3개로 갈라져서 나오는 걸 보면 그 3이라는 숫자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면서, 이 형태도 뭔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데요. 모든 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에고가 희미해져서 그게 가능해지는 거고, 나라고 하는 것을 희미하게 느낄수록 그 빈자리에 다른 감각 대상들이 차오르는 거죠. 그게 정신병적으로 (말하자면) 무적의 상태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설령 내가 죽어도 다른 뭔가가 될 테니까요. 저는 워낙 우울증 기간이 길었고 사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이런 상태(희미한 에고)로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폐쇄 병동에 강제 입원을 당했지요. 그때 온갖 기행들도 많이 했었거든요. 환각, 환시, 환청이 심했으니까요. 망상이랑요. 그래서 (병원에) 갇히고 다시 우울증의 구렁텅이로 던져졌어요. 그 의식 상태로 돌아가거나 혹은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는 미션을 갖고 퇴원했던 것 같아요.
희우
언제 진단을 받으신 거예요?
김도
조증은 한 2016년도부터 좀 있다가 완전 심한 건 2017년도에 크게 터졌고, 조현병은 그때(조증이 심할 때) 같이 터졌어요. 호르몬적으로는 조증 때문에 도파민 분비량이 엄청 늘어나잖아요. 그게 조현병과도 연결이 되는 화학적 요인이에요.
병원에서는 약물로 정신병을 조절하려고 하고(물론 조절이 어느 정도 되지만), 병의 원인도 호르몬으로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우울증은 도파민과 세로토닌 양이 적기 때문에 발병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늘리는 약을 투여한다, 이런 식으로요. 근데 사실 호르몬이 적다는 건 원인이 아니라 결과잖아요. 그러니까 말만 바꾼 거지 같은 지점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적은 상태가 우울증인 거니까요. 이것을 저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정신병이란) 뭘까, 이게 제 탐구 주제였어요. 스피노자의 말처럼 정확하게 이해된 고통은 고통이기를 멈추니까요.
그래서 제 느낌으로는, 미쳤을 때의 경험이나 명상 수행을 통해서 얻는 경험에 의하면, 나라고 할 만한 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나 듣고 있는 이 감각인 반면, 우울증은 내가 지금 이런 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데서 되게 막 멋있는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 같고 마음의 눈은 그런 걸 보고 있는 상태인 거죠. 그렇다 보니까, 뇌는 좀 기계적이다 보니까, 지금 여기에서 쓸 만한 에너지는 덜어내고 그걸(이상적인 모습을) 보는데 에너지를 쓰게 되면서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요. 조증은 거기까지 갈 힘을 낼 수밖에 없게끔 도파민이 증가하게 되는 것 같고요.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조현병은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인 것 같아요. 내가 감각하는 모든 대상뿐만 아니라 감각할 수 없는 추상에서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면, 그러니까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어떤 포기 상태가 되면, 그 반작용으로 양성 증상이 나오는 것 같거든요.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상태가 되는 거는 또 생각해보면 당연하잖아요.
근데 조현병의 양성 증상이 환각과 환청을 동반하는 사이키델릭적인 상태라면 음성 증상도 있거든요. 그 음성 증상이 제가 방금 말한 전적인 무기력 같은 거예요.
희우
그러면 그 상태에서 입원을 하셨어요?
김도
예. 응급실로 가서 링거를 꼽는데 거기에 뭐가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 꼽을 이유가 없잖아요. 저는 기력을 전해질로 보충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바늘 뽑고 도망치다가 붙잡혀서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었죠.
그리고 이제 어느 순간부터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제가 있는데, 그 주사에 들어가는 성분이 기억을 날리더라고요. 벤조디아제핀인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한 주먹씩 항정신병제를 먹으면서 신적인 상태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려진 거예요. 그러고 나서 되게 무기력했고요. 퇴원하고 나서도 한 1~2년 동안 거의 누워만 있었어요.
희우
신적인 상태라는 건 어떤 건가요?
김도
그 신적인 상태에 단계적으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요가나 불교의 수행, 기독교에도 어떤 수행법이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카발라, 유대교 밀교처럼 그런 것들이 있듯이…… 그런 수행법들의 지향이 에고를 흐릿하게 하는 것 같거든요. 이를테면 구교의 고해 같은 걸 생각해보면, 어떤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항상 지켜봐야 하는 의식이 일상 속에 있어야 하고, 죄라는 것이 발생한 것 같으면 그것을 기억해야 하고, 그리고 신부님께 가서 고해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해결하는 어떠한 과제로서 보속 기도를 주고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어떤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지켜보는 어떤 시선이 내면에 자리하게 되는 거고, 그럼 말하자면 내 뒤편에 있는 나의 시선이 또 생기는 거잖아요.
희우
초자아라고 하는 거죠.
김도
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죄를 안 저지르는 일상으로 끊임없이 가면서 깨끗해지다 보면, 나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지고, 그리고 모든 게 신께서 만들어 주셨고 주어지는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붙이거나 거부하려고 밀어내거나 하는 액션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게 되겠죠. 그것을 불교에서는 명상으로 해내는 거고. 모든 영적인 종교들이 하는 일이 그건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그 기능을 좀 많이 잃어버린 것 같고요.
희우
종교들이요?
김도
네. 종교도 그렇고 사람들도요.
희우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렇게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에고가 왜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는가?
어쩌면 도 씨가, 에고가 너무 강한 사람이어서 그런 수행이 너무 중요한 거죠.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이런 얘기도 해보면 좋겠어요. 정신병은 내 기질과 더불어 시대적인 분위기, 속해 있는 집단이나 사회의 환경, 이런 것들에서 영향을 계속 받잖아요. 사실 영향을 받는다는 말도 정확한지 모르겠어요. 어디가 외부이고 내면인지 경계도 모호한 거니까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같은 대학을 나왔잖아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가 2021년에 졸업을 했으니까 사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도 그 학교 다닐 때 엄청 우울할 때가 있었어요. 진단도 받았고요. 정신증이라기보다는 좀 심한 신경증이지만. 근데 그때 저만 그랬던 게 아니고, 아시겠지만 학교 다니면서 만났던 사람 중에 정신과 상담받고 약 먹고 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았어요. 안 그런 애들보다 그런 애들이 훨씬 더 많았고요. 자살 소식도 종종 들려왔고요. 저도 학교나 군대에서 우울할 때가 많았고,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때만큼 괴로웠던 적은 없었어요. 어쨌든 그때 심리적 고통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까 도 씨가 얘기했던 종교적 수행 같은 것들은 문제를 내 안에서 찾는 거잖아요. 그런 방향에 대해 저는 불신과 회의가 있는 것 같아요.
김도
알겠습니다. 이게 왜 저한테 중요했냐 생각해보면 병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치료법으로 느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희우
어떤 게요?
김도
에고를 흐리는 거요. 말씀드렸듯이 한동안 제 인생 목표는 좋은 기분이었거든요. 그냥 좋은 기분으로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마초도 그렇게 좋아했던 거고요. 그게 사실 의학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돼요. 화학적으로도요. 근데 그걸 떠나서 에고를 흐리는 게 좋은 기분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조현병 양성 증상 속에서 느꼈던 거죠. 그걸 단계적으로 해내는 게 종교적 수행이고요. 저는 이거를 사이키델릭적인 의식 상태라고 보는데요. 그러니까 어떤 선이해나 의미가 없다 보니까 그것이 뭔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구별하는 마음이나 판단하는 마음 같은 게 되게 희박해진 거예요.
근데 병적인 상태의 문제가 뭐냐면, 뭔가가 좋다 나쁘다, 위험하다 안전하다 같은 판단이 이루어지는 마음은 어느 정도 의식의 거름망 같은 게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 거름망이 없어지고 감각이 많이 예민해지다 보니까, 어떤 감각들은 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고, 위협으로 느낄 경우엔 마음이 그걸 (물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시키더라고요. 그게 환시, 환청이고 원효대사의 해골물 같은 건데요. 해골물도 마음이 편할 때는 맛이 좋은 물이었지만 마음이 불편해지고 나면 토하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래서 이 에고를 흐리는 게 왜 정신병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냐면요. 고통은 내가 나라고 여기는 면에 붙는 건데 그런 게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면(고통이 사라지죠). 말씀하신 대로, 어떤 면에서는 문제를 나에게서 찾는 게 사회에 대해서 무책임해 보일 수 있어도, 그거는 그 사람이 뭔가 액션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 같고요. 일단 괴로운 상태를 멈추려면 이걸 분리시킬 수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희우
내면의 문제랑 외부의 문제를요?
김도
아니요. 나한테 오는 이 감각을 나로부터요. 그러니까 어떤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나쁜 기억도 이제 막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 같은 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걸 보는 거예요. 내 일이 아닌 것처럼요.
희우
그런 선택들이 당위적이고 사회적인 것 이전에 필사적인 것이었다는 얘기죠.
김도
예 맞습니다. 약도 먹고 싶지 않고 어쨌든 나는 좀 살아야겠는데, 죽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희우
네. 그런 선택들이 내가 가진 사상이나 스타일을 규정하는 것 같아요. 벼랑 끝에 몰렸다고 생각할 때 하는 필사적인 선택 같은 거요.
그런데 제가 아까 궁금했던 것은 사회적인 책임 같은 게 아니라, 병의 발발이나, 심해지거나 완화되거나 하는 경과 자체가 얼마나 사회적인 일인가예요. 한편으로는 병을 병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도 의학이라든지 법이라든지 여론,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잖아요. 국가의 관리와도 관련이 있고요.
김도
예. 그게 그렇더라고요. 제가 예비군을 가기 싫어서 (정신병을 이유로) 면제를 해버렸는데, 그러니까 운전면허가 같이 멈추더라고요. 아마 데이터상에 뭐가 있겠죠. 저도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아서.
희우
네. 그렇다고 해서 ‘미쳤다’는 게 그냥 법이나 담론이나 의학 지식이나 여론에 비추어서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진짜 미친’ 면이 또 있잖아요. 그러니까 광기 자체가 담론적 구성물은 아닌 거죠. 간단히 말해서 광기에는 실재성이 있는 거죠.
김도
그렇죠.
희우
그런데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느 집단에 있고 어떤 사회 속에 살고 있고 어느 시대를 사느냐에 따라서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든지 줄어든다든지 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관계가 저는 궁금하거든요. 저를 비롯해 그런 일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 들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신기했어요. 저는 지금은(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조현병이나 명상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과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게 여러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도
어떤 거죠?
희우
예를 들면 이런 거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좋아지는 게 있어요. 저는 최근에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꼈어요.
김도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희우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몇 년 전에 우울해서 누워 있고, 아무것도 못 하고 그럴 때에 비하면 굉장히 좋아졌다고 느껴요. 그 시기를 거치면서 두려움이나 불안 같은 것들이 좀 사라진 것 같아요. 이 느낌은 제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규칙들, 내가 사는 세계의 규범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받아들이는 것하고 관련이 있는 듯해요. 그러면서 내 존재의 쓸모나 당위를 덜 자문하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스스로 덜 괴롭히게 된 거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막 불법을 저질러야 된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없는 거죠. 굳이 애써서 불법을 저지를 필요는 없잖아요. 필요하다면 저지르겠지만요. 도 씨가 대마와 관련해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런 문제에 있어서 저는 도덕적인 판단을 할 이유나 자격이 저한테 전혀 없다고 느껴요. 하지만 어쨌든 저는 그게(대마가) 필요한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죠. 그래서 도 씨가 대마로 무슨 짓을 해도 저한테는 화가 나거나 특별한 인상을 주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저한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요.
도 씨의 개인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떤 실존적인 문제를 겪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과정에서 대마를 했거나 액티비스트로 활동을 했거나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시인으로서 혹은 활동가로서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일관성에 비추어서 이해될 수 있어요. 그러나 어쨌든 법이나 도덕 같은 거에 비춰서는 용인될 수 없는 거지요. 특히 지금 한국에서는.
시인의 위치
김도
말씀 들으면서 생각이 좀 났는데요. 아까 말씀하신 것,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자의적이다, 자의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비슷한 것처럼 굴고 있지만 사실 생각하는 건 각자 아주 다르고, 그리고 진짜 객관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이런 것들 사이에는 없다는 느낌 같은 거잖아요. 그래서 괜찮아지는 마음이 어떤 건지 좀 알 것 같아요. 좀 풀려나는 거지요, 묶여 있었는데. 제가 액티비스트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시를 쓸 때 그런 상태인 것 같은데요. 많은 사람한테 대마초가 아주 나쁜 걸로 프레이밍 돼 있고, 마약이라는 단어 안에 묶여 있고, 좀 오해되고 있는데요. 그걸 딱히 수정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고, 지금은 반드시 수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여하간 제가 액티비스트로 활동했던 이유 중엔 제가 보기에 좀 낡은 도덕관, 오해된 도덕, 잘못 만들어진 법 그리고 그것에 얽힌 역사 같은 것을 따를 이유는 저한테 하나도 없었던 거고 그걸 따르는 마음보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따르지 않아, 라고 이야기했을 때 얻게 되는 어떤 심리적인 안정감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라는 장르가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러니까 언제나 질서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어떤 틀 같은 것이 있어서 무언가 움직이더라도 그 틀 안에서 운동이 일어나게끔 해야 하는 건데, 그것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면……
이게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인데요. 모든 게 자의적으로 비칠 수는 있어도 누군가가 신념을 갖고 행동할 때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감각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희우
예. 거기서 뭔가 전도되는 것이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시의 위치에 관해서라면 할 얘기가 너무 많을 텐데요. 플라톤의 공화국, 『국가』에 보면 ‘시인 추방론’이 있잖아요. 거기서도 공동체의 어떤 기하학적인 질서를 위해서 시인이 추방돼야 하잖아요. 국가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시인이 처음부터 골칫거리죠. 플라톤이 자기 철학을 시나 연극과 분리하려고 애를 쓰는 한편으로(완전히 분리하지 못하지만), 당대 수학인 기하학과 정치 그리고 철학 이 세 가지는 그렇게 분리가 안 되어 있단 말이에요. 시는 그 지식-정치-철학의 배치에서 타자가 되는 거죠.
근데 이제 20세기쯤 되면, (특히 전쟁 이후에) 국가나 철학적 체계가 다 의심에 붙여지기 시작하고, 특히 하이데거를 보면 그 사람이 시인들을 많이 호명하잖아요. 하이데거 생각에는 (플라톤과) 반대로 시만이 존재의 진리를 보존하고 있고, 수학이나 형이상학이나 이런 형식들은 오히려 존재를 은폐하는 거죠. 그러니까 체계와 권력의 타자로서 시가 있다는 생각은 엄청나게 오래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매도되거나 추앙되었던 것이죠. 저는 한편으로는 이런 구도가 우리한테 안 맞는 면이 있다고 보지만, 한편으로는 적절한 보호 조치 없이 기각된 사고방식이라고도 생각하거든요.
김도
그다음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시인 추방론이 재밌는 게, 그 추방된 자리가 사실은 질서 내에 시인이 위치하는 자리인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 추방된 자리가, 오히려 시인에게 허락된 자리인 것 같더라고요. 아예 추방되었으면 사실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희우
예. 그리고 그 구도에서는, 도덕이나 법과 다른, 시인의 윤리 같은 거를 말하기가 아주 쉽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가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진척이 돼야 할 텐데요. 어쨌든 그런 구도에서 시인의 일탈이 용인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 나름대로의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지를 얘기해 봐야 해요. 안 그러면 그것도 결국 자의적인 게 되겠죠.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범법이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매도하고 비난하다가 나랑 친한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는 팔이 안으로 굽는 식으로 인간적으로 이해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안 되려면 어쨌든 이것도 나름대로 논리를 갖춰야 할 텐데요. 아까 얘기했던 플라톤적/반플라톤적인 구도에 비추어보면, 시인의 일탈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권력하고 가능한 한 상관없는 존재로 머무르는 한에서 그런 것이겠죠. 또 권력이 없는 존재를 도덕에 비추어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보수적인 행위잖아요.
김도
아 네.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어울리는 레퍼런스가 떠올랐는데 『리어왕』이에요. 그거 읽어보면 옆에서 항상 바른말을 하는 존재가 광대잖아요. 그 광대도 궁정에서 허락된 자리잖아요. 얘는 우리 밖에 있는 애라서, 왕 같이 위대한 존재에게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어떤 자리를 내어준 거잖아요.
희우
그렇죠. 그런데 누가 그런 광대의 역할을 정당하게 할 수 있을까요? 권력형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가령 권력형 성범죄는 시인으로서의 정당성을 없앤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우리가 권력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시인의 일탈이 용인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했을 때도 문제가 쉽지 않아요. 누가 권력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하는 기준도 굉장히 모호한 거잖아요. 그리고 비판적으로, 권력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정리가 필요한 거죠. 실천적인 지침이 필요하고요.
사실 이런 부분에서 진짜 필요한 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은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고, 철학자는 언어를 정화하는 사람이죠. 저도 제가 왜 이런 욕망을 갖게 됐는지 철저하게 규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삶 속에서 한 선택들을 통해, 내가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들을 통해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시인이 그냥 권력의 타자라고 말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했던 광대처럼 그런 일탈에 있어서 허용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이제 너무 순진해 보이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사실 예술가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행태나 정당화하는 일들을 많이 봤잖아요. 그런 것들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시인의 일탈을 옹호하는 논리들을 사용하는 게 어려워졌다고 보거든요. 도 씨가 시집을 내고 나서 뭔가 불법적인 일을 했다는 이유로 약간의 소란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도 그런 분위기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법과 비스듬히 있거나 대립하는 시의 윤리, 시인의 윤리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법과 제도만 남게 되고 법과 제도가 유일한 기준이자 해결책이 돼버리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권력은 지극히 상대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객관적인 무언가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김도
이게 바로 그 지점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희우 씨가 종종 말씀하신 어떤 사명감, 철학의 위치, 그리고 한국에서 철학의 필요성 같은 것을 절감할 때 느끼는, 그 순간 발생하는 마음이라는 게, 상황이 이러저러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건 사실 믿음인 것 같거든요. 근데 시인도 그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요?
희우
무엇으로부터요?
김도
본인이 믿는 것을 하는 것이요.
희우
아 그렇죠.
김도
리어왕의 광대든 아니면 어떤 추방된 시인의 자리도 어쨌든 그 사람이 그러는 건, 그걸 해야만 하는 어떤 필요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게 되는 거잖아요. 시를 쓰는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게 그것 같아요. 지금 이것이 나쁘게 보일 수 있다거나, 혹은 명예롭지 못하다거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존재에게 명예롭고 좋은 기분을 주고 반복해야 마땅한 것. 믿음이 남들과는 다른 데 있는 것이지요. 이게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시를 쓰는 사람들, 어쨌든 끊임없이 쓰는 사람들, 반복하는 사람들이 본인의 말을 얼마나 믿고 있느냐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본인이 하려는 말과 실제 행위와의 관계 말이에요. 고은처럼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시인으로서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 본인은 어떤 위대한 것을 향해 시를 썼을 텐데, 실제로 저지른 행위를 비추어보았을 때 그분들도 부끄러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저는 대마초 같은 경우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거죠. 그럴 일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자연적인 혜택 같은 거라고 믿기 때문에 (액티비스트 활동을) 한 거니까요.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는 자의적인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믿음이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가소롭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럴수록 이게 중요하더라고요.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이 일어났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나든 어떻든 간에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의 말을 믿는 것이요. 그리고 믿을 수 있게끔 계속 스스로를 통제하고요.
또 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쓴 사람도 사람들에게 정리될 수 있는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좀 없어요. 그러니까 시인에게 없다기보다, 시를 쓰는 일 자체에요. 근데 그게 (그에게는) 가장 맞는 방식이고 가장 시에 가까운 방식인 거겠죠. 시가 쓰려고 하는 어떤 대상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리고 저는 일상이나 혹은 일상에서 제가 느꼈던 감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만, 사실은 이것이 지시하고 있는 더 위대한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을 쓰고 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시 쓰기가) 가능한데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말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일 거라고요. 그래서 결국에는 어떤 실어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희우
도 씨 시에서도 그런 게 느껴져요. 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시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죠. 그 태도가 결국 시와 철학의 차이일 것 같기도 하고요. 왜냐면 저는 결국은 아무것도 밑바닥에 신비롭게 남겨두고 싶지 않거든요.
나왔던 얘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시인이 권력과 무관하게 있으려 하는 한에서 그의 일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그것은 시가 혹은 시인이 모든 권위나 권력과 무관해야 한다는 것보다는―아무 권력도 가지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니까―시가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인 자신조차도 대표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이것은 시가 인간적인 허위를 비워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궁정 속 광대의 은유로 말하자면 광대는 민중을 대표해서, 어떤 집단을 대표해서, 어떤 지적 체계를 대표해서 왕에게 간언하는 것처럼 자기 말의 정당성을 확보해서는 안 되죠. 그렇게 하면 그는 광대가 아니라 정치가이거나 학자이거나 시민단체 대표이거나 뭔가 다른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시는 확실히 철학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죠. 뭔가를 잘 대표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기가 더 어렵잖아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고, 헤아릴 수 없는 고독으로 들어가는 일이고요. 저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작업을 향해 가는 시인을 한두 명 본 적 있는데 그것이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경력이 쌓여 얼마간 권위와 명성을 가진 작가들이었고, 히스테리컬한 면도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보여주는 특이한 순수함과 단호함, 수수함과 냉정함이 있어요. 나는 그런 면모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비트 세대와 우리 세대
김도
옛날에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피카르트 책(『침묵의 세계』, 『인간과 말』)도 마음에 안 들어했었어요. 너무 기독교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당시에는 인간 의식의 이러한(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고요. 근데 제가 좀 살아야겠고,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하고 난 다음 느끼는 바는 ‘이유가 있다’라는 거예요. 약간 말도 안 돼 보이는 것도요. 심지어 저는 오르페우스교에서 콩 먹지 말라는 것도 이유가 있었을 것 같거든요. 어떤 영양분이나 아니면 그 화학적 성분이나 그런 걸 떠나서, 심지어는 그냥 문학적인 이유라도. 피라미드도 토목 사업이 아니라 사실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그런 식으로 죽은 왕과 금은보화를 넣으면 어떤 식으로든 혜택이 돌아오는 것이다. 십계명 같은 것도요. 그 내용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희우
그러면 도 씨의 입장에서 충돌이 생기지 않을까요?
김도
뭐랑 뭐가요?
희우
어떤 주체적인 믿음에 따라서 내가 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과,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법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이유를 따지지 않고 존중하는 게요.
김도
존중이 이루어지는 법들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법의 끝에 있달까요? 사실 이미 논리적으로 따질 가능성 자체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것들이잖아요. 콩을 먹지 말라는 건 사실 따질 만한 게 아니잖아요. 밤에 휘파람 불지 말아라 뱀 나온다 이런 거요.
물론 제가 지금 그런 룰을 지킨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이 다 무의미하다고 볼 수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식으로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을 때 그게 삶에 주는 혜택 같은 게 있더라고요.
희우
도 씨한테 일종의 종교적인 열정이나 끌림, 그런 게 있는 거 아닐까요?
김도
네. 그런 게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슬럼프라 책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과거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가들에게로 눈길이 가더라고요. 특히 시인으로는 루미나 휘트먼. 그리고 가볍게 넘어갔던 것 같아서 다시 읽은, 한국에 번역된 긴즈버그 두 권(『하울』이랑 『리얼리티 샌드위치』요).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마음산책에서 나왔던 메리 올리버의 『갈매기』, 『천 개의 아침』.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과 이러한 규칙들은 좀 일맥상통하거든요. 그리고 예이츠도 되게 흥미롭더라고요.
희우
비트 세대라고 하잖아요? 긴즈버그가 속한 세대는. 그때 히피들도 있었고, 또 영성이나 명상,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도 많았고 마약도 많이 하고 그랬잖아요.
김도
그렇죠.
희우
제가 보기에는, 도 씨가 아주 고전적인 시인으로 보이는 한편으로, 비트 세대의 정신과 감수성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탑재하고 있는 사람처럼도 보이는데요. 비평적으로는 그런 경향이 지금 한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혹은 왜 생겨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도 씨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거든요.
김도
저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아요. 이런 진단은 좀 야매긴 해요. 제가 의사도 아니고 정신분석학자도 아니니까요. 정신병을 낳는 가장 주된 마음 상태가 에고를 과잉 의식하는 상태인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는 거죠. 심지어 인스타그램이든 페이스북 같은 것들 때문에 더 많이 의식을 하게 됐잖아요.
근데 그런 것들을 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계속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문학이 이제 비트 세대의 문학인 거죠. 한국은 당시에 그런 문화를 겪을 수도 없었고, 그런 문학이 올 기회도 없었던 것이죠. 저는 이제는 그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숨구멍 같은 거죠.
희우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압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특히 우리가 속하는 이 세대를 통계적으로 봤을 때, 행복도나 자살률이나 출산율이나 아니면 우울증 정도라든지 이런 통계들을 보면 전쟁 상태에 준하잖아요. 출산율이나 자살률을 인구의 문제로 바라보는 건 국가의 관점이지만, 여기에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죠. 시대의 고통 같은 걸 얘기하면 무슨 거창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 그런 염려를 진지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엄청난 강박과 회피와 억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 씨는 비트 세대 식의 문화가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어떤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증상이 아닐까요? 우리가 마약을 필요로 한다든지 내적인 명상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종의 증상 같은 것 아닐까요?
김도
그렇죠. 전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 나타나야 할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아이를 안 낳는다든지 자살률 같은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더는 할 수 없겠다는 태도가 세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잖아요. 지속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는 거잖아요. 끊임없이 중단되는 상태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거잖아요. 저 또한 거기로 빨려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미쳤었고 괴로웠었던 것 같거든요.
희우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거군요.
김도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또 그게 에고의 문제인 것인데, 저는 (그 문제가) 스마트폰 이후로 두드러지는 것 같거든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요.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는 거요. 말하자면 몸은 여기에 있는데, 의식의 일부분 혹은 대부분의 의식을 보이지 않는, 이렇게 까맣게 둔 (스마트폰) 화면 어딘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인스타그램 피드라든지, 카카오톡이라든지, 아직 울리지도 않은 진동이지만 누군가한테 올 목소리라든지)에 두고 있는 거잖아요. 이거는 사실 괴로운 상태잖아요. 이 상태를 즐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저는 그게 좀 괴로운 상태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아까 말했던 긴즈버그 같은 경우에는, 『하울』을 읽어보면 그러한 시대적인 고통으로 출발해서 아수라장을 겪어가며 살아 돌아오는 이야기 같은 것이고 거기서 얻은 어떤 가르침과 감동이 있어요. 또 휘트먼은 시의 태도를 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을 희미하게 하면서 고통스러운 문제를 괜찮게 하는 구석이 있거든요. 실용적인 차원에서요.
뭐랄까, 그래야만 한다는 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여기가 이러니까 저기가 이래야 한다, 라는 균형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우
20세기 후반 미국의 비트 세대나 힙스터들이나 이런 사람들도 대체로 백인 중산층 젊은이들이지 않았나요?
김도
그렇죠.
희우
그들에게 뭔가 어떤 심한 공허 같은 데 있었던 거 같아요. 지금 한국에는 다른 정치적 문제도 추가적으로 있고요.
김도
좀 리얼한 걸 느끼고 싶은 것 같아요.
희우
리얼한 걸 느끼고 싶은 충동이요?
김도
충동이라기보다, ‘삶을 살고 싶다’는 느낌인 것 같아요.
희우
그런 느낌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을 해요. 과거에 ‘실제에 대한 열정’ 이런 말이 문학 비평에서 회자되었을 때가 있어요. 원래 알랭 바디우가 『세기』라는 책에서 쓴 말인데요. 20세기가 실재에의 열정이라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사회학자이면서 비평도 하셨던 김홍중 선생님이 이제 그 실재에의 열정이 끝났고, 시인들도 그거를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비평가들이 아직 그 열정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 열정을 시에 투사했다고 한 적이 있어요. 2천년대에 ‘미래파’ 같은 거 있었다잖아요. 그게 그 투사의 구성물이라는 거예요.
근데 저는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런 비평 분석들이 좀 틀린 것 같아요. 혹은 틀린 건 아니더라도 일시적인 분석인 것 같아요. 왜냐면 실재에의 열정이 사라진 적도 없고, 절대 사라질 수도 없고, 이 세대의 사람들이 표현을 하건 안 하건 간에 엄청나게 강렬한 열망이 있는 것 같거든요. 진짜 작업, 진짜 사랑, 진짜 삶…… 진짜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그 열정에서 온 온갖 일탈과 좌절이 있는 거죠.
김도
그렇죠.
희우
그런데 우리가 왜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요?
김도
그거는 저한테는 좀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얼마나 의식이 여기에 있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느냐인 것 같아요.
희우
여기에 있느냐 저기에 있느냐가 무슨 뜻이에요?
김도
SNS처럼, 우리가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서비스들을 많이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그런 것들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서, 그냥 이런 거(테이블 위의 포도송이)를 보고 있는 시간이요.
희우
그냥 눈앞에 있는 것들요?
김도
네. 그리고 그냥 지금 지나가고 있는 저 비행기 소리 같은 거요. 그냥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요. 보통 평소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겠지만 사실 대부분 화면을 보고 있고, 화면을 보고 있지 않은 시간에도 화면을 보고 있는 경우가 되게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내가 뭘 보고 듣고 있는지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지금 보고 있는 걸 더 지금 보게 되고 듣고 있는 것도 지금 더 듣게 되는 의식 상태가 되더라고요. 이건 물론 수행적인 반복이 요구되는 거지만요. 근데 제가 말하는 작가들이나 책들이 지향하는 바가 이러한 것이고요. 제 말은 어쨌든 이게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거죠.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것에 관해서 계속 생각하는 동안 힘겨운 상태를 겪는다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기술적으로 유도하는 게 주변에 너무 많고 사실 그것 자체의 인력도 되게 강하기 때문에 끌려 들어가기가 너무 쉽다는 거죠.
희우
네 그렇죠…… 하지만 저기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가 더 실재적이고 인스타그램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김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인스타그램 이미지를 그냥 인스타그램 이미지로 본다면요. 그런데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SNS를 다 그만뒀지만 노트북으로 유튜브 들어가면 가끔 빨려 들어가거든요. 근데 저는 그때 제가 뭘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다 끄고 나서도 뭘 보고 있는지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하기가 어려워요.
거기에 이미지로 올리기 위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배경이나 오브제 혹은 공간 분위기로서 보면서, 감각할 수 있는 바들을 거름망으로 계속해서 걸러서, 결과적으로 경험을 축소시키게 되는 거잖아요.
희우
저도 비평가로 데뷔하고 초기에(지금도 초기지만 어쨌든 등단하자마자) 그런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글을 쓰긴 했었는데요. SNS나 인터넷 밈 같은 거요. 하지만 더 광범위하게 생각해 봤을 때, 매체나 이런 것들이 변하는 상황에서는 항상 비슷한 비판들이 반복되었던 것 같은 거예요. 뭔가 실재적인 것들은 다른 데 있는데, 그거를 복제하거나 재현하는 이미지들에 의해서 실재성이 가려지고 훼손된다는 불안과 두려움. 그게 일종의 문화 지체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낯선 것이 일상의 편안한 부분이 되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매체 환경이 변하면서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이 바뀌는 거는 맞지만, 그걸 더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기준은 자의적이라는 거죠.
김도
사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되게 골수적인 거예요.
소외를 해결하는 방법
희우
음 그렇죠. 뭔가 하이데거적인 뉘앙스도 있고요. 나름대로 골수적인 것은 우리 둘 다 똑같죠. 여하튼 우리보다 더 어린 세대들한테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게 옷처럼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어요. 저는 제 또래 중에서도 되게 늦게 스마트폰을 갖게 됐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래서 저도 그거에 대한 어떤 낯설고 불편한 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죠.
그리고 저는, 그 실재에 대한 열정, ‘진짜 삶’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것도 굉장히 고전적인 관점입니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노동의 문제와 배움의 문제.
김도
그렇죠.
희우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사랑. 노동과 배움과 사랑이요.
그것들이 없으면 삶에서 어떤 실재성이라고 할까요, 충만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셋 중에 두 개는 있어야 해요. 어쨌든 저는, 그 열정은 공감하지만, 어떤 초월적인 것, 영성, 종교적인 거나 명상이나 신비적인 체험에서 충족하려 하는 방향에는 회의가 있죠. 어떤 측면에서 저는 세속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형이상학이나 문학을 좋아하지만요. 종교에 끌린 적은 제가 기억하기로는 단 한 번도 없고, 마약이나 명상을 통해서 신비적인 체험을 한다든지 영적인 체험을 한다든지 이런 거에도 관심이 없고요.
저는 노동하고 배우고 사랑하면서 삶을 느껴야 된다고 생각하고, 더 쉬운 길도 특별한 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관점에서, 그 세 가지에서 우리가 다 소외되는 면이 있다고 봤어요. 삼중의 소외.
김도
이것들을 중단했을 때요?
희우
아니요. 그게 막 인스타그램 때문이다 이런 건 아니고요. 그건 부분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 같고요. 또 소외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우리가 (언젠가 완전한 무언가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잃어버렸다는 오해, 그리고 어떤 소외도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는 오해 같은 것들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환상과는 상관없어요. 노동으로부터 소외됐다, 이거는 너무 오래된 얘기이지요.
노동 소외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근대적인 분업에 의해서 심화된다고 설명을 하거든요. 근대에 산업이 거대해지고 국가가 거대해지면서 우리가 점점 부분적인 일만 하게 되잖아요. 자동차를 만든다고 했을 때 나 혼자서 모든 걸 다 만드는 게 아니듯이요. 그런 식으로 고도의 분업이 일어나서 내가 내 노동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주인일 수 없고, 공정을 파악할 수도 없고, 또 생산수단을 부르주아가 독점하니까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있어서도 굉장히 부분적인 것만 받게 되죠. 배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어요. 세계는 복잡해지고, 또 통계적으로 우리가 지금 점점 학습 기간이 늘어나잖아요. 대학원 진학하는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압도적인 비율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근데 대학이라는 것도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어떤 전공 어떤 과로 갈 거냐부터 해서, 성적순으로 줄 세워지고, 또 그것이 직업의 문제랑 연결이 되어 있고, ‘문과특’, ‘이과특’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언어를 배우느냐에 따라서 감수성도 사고방식도 달라지는 것이고, 어떤 영역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배울 수 있다는 그런 감각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고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앎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죠. 저도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아주 골수적인 면이 있어요. 인문대 출신이 아닌데도(아마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문학은 한편으로 유사과학보다 못한 사이비 과학이 되고, 한편으로는 기획서나 홍보문 잘 쓰는 법, 아니면 사치스럽고 공허한 교양으로 여겨지게 된 것 같고요. 간학문이나 통섭, 문이과 통합 같은 간판이 달린 것들은 경제적이거나 정책적이거나 예산상의 이유로 만들어진 잡스러운 행사인 경우가 많고요.
김도
저도 동의합니다.
희우
그리고 사랑으로부터의 소외가 있어요. 데이트 앱이나 결혼 정보회사 같은 데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거죠. 한국 20대~60대에서 지금 20대가 성관계를 가장 안 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어요. 물론 성관계가 사랑의 표시는 아니지만요. 어쨌든 내가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해서 그 사람하고 살겠다, 이런 꿈을 꾸기가 어려운 것 같고요. 사랑을 둘러싸고 엄청난 질투와 조롱과 열등감, 혐오도 있고요. 가족에 관한 관념으로 말하자면, 오래된 것은 저물었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상태이고, 한국에서는 오래된 가족 모델의 재생산과 새롭고 다양한 가족 모델의 실험이 동시에 가능한 게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한 상태죠. 물론 (성 소수자가 결혼을 할 수 없는 것과 소위 ‘정상 가족’의 재생산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같은 종류의 불가능은 아니지만요.
우리가 욕망이 없다면 소외가 고통스럽지도 않겠지요. 욕망하는 동시에 소외되어 있는 거예요. 혹은 소외되는 동시에 대상에 대한 신비화와 혐오가 함께 생산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 직업을 갖고 싶어 하지만 또 한편으로 예술가나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재미없고 보람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정말로 나의 욕망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그 결과물을 책임지고 인정과 관심을 받는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배움에 대한 열망도 사실 엄청나게 커요. 단지 학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열망이 아니고 이 세계와 삶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요. 근데 현실적인 요구들에 맞춰서 진학을 하고, 교육은 입시나 취업을 위한 경쟁으로 환원되고, 그러니까 내가 밟아온 배움의 경로에서 이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능력을 깨우칠 수 없죠.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타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작업과 배움에 대한 신비화와 원한, 노동에 대한 경멸이 심화되는 것 같아요.
김도
그렇죠.
희우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죠. 심지어 사람들이 지금 사랑에 미쳐 있는 것 같아요. 무슨 결혼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들, 진짜 많고 엄청나게 흥행하잖아요. 그 폭발적인 ‘리얼리티’야말로 실재에의 열정의 대리보충 아닐까요? 그렇게 실재에의 열정을 해소하는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사랑(신비화된 사랑)에서 소외되는 거죠.
뻔한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이것들을 해결하는 게, 이 시대의 불행에 대한 근본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특히 배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비평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김도
그것은 최근 글에서 쓰셨던 내용이군요.
희우
그렇죠. 비평 활동에 대해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애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에요. 여전히 작가들은, 비평가들이 작품을 너무 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분석하려 든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죠.
김도
고질적인 문제죠.
희우
그런 한편으로, 제가 대학원에 와보니까 비평이 학술적인 것과도 여전히 좀 분리되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교수님들이 은근히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비평가들은 엄밀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문학적으로 대충 말만 끼워 맞춰가지고 막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비평이 그 지위나 하는 일이 애매한 거예요. 창작적인 글쓰기도 아니고 학술적인 글쓰기도 아닌 거예요. 일반화할 수 없지만, 비평가들이 느끼는 어떤 불안이나 열패감, 무력감 같은 것들이 거기서도 일정 부분 기인하는 것 같거든요.
근데 오히려 저는, 배움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복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비평이 애매하기 때문에 오히려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여요. 그 애매성이 비평의 강점이 되고 매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제가 말하는 배움은 어쨌든 학교 안에서 어떤 전공을 정해서 전문성을 축적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내 힘으로 세계와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확신과 관련된 문제에요. 또 결정적인 배움은 영역들, 분과들, 장르들, 구조적 요건들을 가로지를 때만 얻어질 수 있어요. 그런 모험을 통해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배움들을 내 방식으로 연결하고 재발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창작은 작가의 인간적 독특함이라는 환상과 너무 결부되어 있어요. 근데 비평은 그런 것들을 덜 요구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비평을 쓰기 위해서 특별한 사람이거나 특별한 재능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럴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냥 내가 지금 어떤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것만 확실히 있어도 누구나 비평을 할 수 있는 거죠.
김도
네. 근데 아까, 그 사랑 이야기할 때, 결혼 정보회사 말씀하셨잖아요. 지하철 타면 듀오 광고가 되게 많이 보이잖아요. 근데 듀오 광고 이미지마다 좀 공통적으로 보이는 재미난 특징이 있더라고요.
그게 뭐냐면 항상 남녀가 같이 있는데, 남성은 여성을 보고 있는데, 여성은 렌즈를 보고 있는 거거든요. 우리가 그 여성과 눈을 맞추게 되는 구도로 사진이 찍혀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나를 행복하게 바라보는 배우자가 있는데 배우자와 눈을 맞추는 대신 화면 쪽을 보고 있는 거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눈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건,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걸 의식하는 거잖아요. 두 인간이 사랑으로 행복한 순간이면 누가 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래도 좋을 텐데요.
그게 결혼 정보회사 광고 이미지로 찍힌다는 거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보여지는 나, 나에 대한 인식이 결혼에 침투해 있는 좀 상징적인 이미지로 읽히거든요.
희우
네.
김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결혼 정보회사 광고 이미지에서, 그는 나를 보고 있고, 나는 보여지고 있다, 보여지고 있는 나는 좋다, 행복한 내가 보여져야 한다라는 어떤 인식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는 거죠.
그게 제가 말하는 ‘필요’인 거거든요. 이런 것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건 당면한 상황이지만, 당면한 상황에 마찰감이 없다고 해서 다르게 볼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그건 이상해 보이고요. 사실 결혼은 신성한 의식이고 지켜야 할 약속 같은 것이기도 하잖아요. 가족들에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쨌든 그 사건은 일생에 한 번뿐인 것으로 오랫동안 다루어져 왔고,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암묵적인 인식이 희미하게나마 있는 거니까요.
희우
일단 인간 욕망이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고 타인에 의해 구성되는 건 어떤 면에선 당연한 거죠. 지금 한국 문화에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게 부추겨지는 면이 있고 그게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도 사실이겠지만요.
그런데 제가 비판적 사고에 뇌가 절여진 사람이라 그런지, 저는 애초에 풍습에 대한 믿음이랄까 존중이 없는 것 같아요.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게 꼭 신성하고 지켜져야 될 약속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요. 결혼은 언제나 사회적인 관습이었고, 성에 대한 관념, 타인들의 판단이나 평가에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었고, 결혼식은 늘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혼을 통해 사랑을 규정하면 사랑이 그냥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문제는 그런 압력과 욕망을 이용해서 더 많은 상품란, 고급 상품부터 보급형 상품들, 특별 상품, 소수자 상품까지 생기는 상황이겠지요.
김도
맞아요. 희우 씨는 비판에 절여진 거 아닌가 스스로 성찰하셨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그거야말로 에고를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치는 건 어떤 의미에서 저한텐 좀 신비 체험 같은 거였고, 그거는 개인으로서 논리로 극복 가능한 게 아니거든요.
아우구스티누스인가요, 방탕하게 살다가 신비 체험 이후 완전히 삶의 방향이 바뀌어버리잖아요. 근데 그러한 경험이 마치 번개 맞은 것처럼 지나가고 나면 존재의 방향이 틀어져 버리더라고요. 그리고 그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요. 올해 4월쯤에 절필하고 역시 스님이 되는 것이 맞나 고민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거겠죠. 사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동떨어진 게 맞고, 어느 시대였건, 어두운 시대였건 밝은 시대였건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지요. 근데 이제 이런(비트 세대 식의) 문화에 필요성이 있다면, 저 같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죠. 제가 어쨌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있긴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것을 취소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저는 좀 골수고요.
희우
그 점에서 아무래도 우리가 차이가 있는 거겠죠. 자기를 주체로 특히 내세우게 되는 사람들이 번개 맞는 듯한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죠. 저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를 받아들이고 철학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 사람들은 항상 그 사람의 전기 자체가 너무 중요한 게 되잖아요. 반대로 저는 제 주체성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철학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말하자면 예술가보다 훨씬 재미없는 사람이죠. 설령 삶이 다사다난했더라도 저는 저를 피뢰침 같은 주체로 정체화하지 않는 거죠. 다만 비평가로서든 철학자로서든 그런 피뢰침 같은 주체를 보호하고 옹호할 의무가 있겠지요.
김도
동의합니다. 그 말씀에 완전 동의해요.
철학자라는 사람들, 그런 존재들이 항상 어느 시대에 있었든 간에 포지셔닝하는 위치는 그런 곳이었고 모든 거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물러서 있되 그렇다고 너무 멀어서 안 보일 정도로는 물러서지 않는 어떤 위치에서 봐야 하잖아요. 동물들도 그 형상이 그 동물의 성격과 성향을 보여주잖아요. 인간은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근데 그런 것처럼 좀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까지도, 발견하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요즘 있거든요.
저는 골수화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눈이 먼 것 같아요. 근데 어떤 방향에 대해서 눈이 멀면 전혀 눈 뜨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어요. 그런 색깔을 추가하는 게 제 소명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인들이 식물 중에 꽃이라면 이런 꽃도 있어야지요. 뭐 대마초라거나. 대마초도 꽃이잖아요.
김도의 시에 관하여
김도
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비평가로서 느끼는 지금의 시, 시가 가야 할 것 같은 방향 같은 것을 좀 간단하게나마 들어보고 싶습니다.
희우
일단 제가 최근에 시를 진짜 많이 못 읽었어요. 다만 막연하게 요즘 나오는 시들이 하이브리드적이라고 느껴요. 시들도 역사적으로 분별이 되잖아요. 예를 들면 모더니즘 시, 서정시, 민중시, 포스트모더니즘 시, 좀 소수적인 계열이긴 하지만 사물시 같은 것도 있고요.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도 많이 이야기되었죠. 이제 그러한 구별들이 완전히 무의미해진 느낌이에요.
김도
그런 의미에서 하이브리드군요. 이것저것이 막 뒤섞이는 느낌으로.
희우
네. 한때는 서정을 피하고 은유를 절제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오히려 이제는 하이브리드적으로 더 많이 쓰는 식 같아요. 사물시를 보면 시인의 정서 표현을 절제하잖아요. 내면적인 표현을 자제하면서 사물의 비중이 커지는 쪽으로 쓰였는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 세계’랑 ‘인간의 내면’의 분리를 전제하는 것이죠. 요즘은 동물이나 사물을 말하는 시에서도 그런 분리가 없어진 느낌이에요. 감정적이면서도 세련된 사물시가 나올 수 있죠.
김도
그렇군요. 사실 저는 시의 분류에 관해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들어보니까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희우
그리고 지금 언어적인 실험을 하는 것 같은 시인들도 언어의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보다는 시가 (언어 자체보다) 다른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사실 누군가 실험적인 시에 대해서, 현실이 없고 자기 지시적이기만 하다고 비난할 때는 (그렇게 평하는 사람이) 시가 관계하는 현실이 무슨 현실인지 모르고 말하는 경우가 많겠죠. 어쨌든 자기 지시적인 시와 현실 반영적인 시, 이런 이분법도 무의미해지는 거지요.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는 말은 제가 감히 못 하겠어요. 그래도 이런 섞임이 2020년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의 경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건 비인간적이거나 사이보그적인 소재가 나오는 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언어적 감수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도
그러면 『핵꿈』도 하이브리드의 자장 안에 있다고 보시나요?
희우
고전적인 틀로 보면 서정시에 가까울 텐데 우리가 아는 익숙한 서정시는 아닌 거겠지요.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뭘까요?
김도
무엇과 무엇의 차이요?
희우
익숙한 서정시처럼 읽히지 않게 하는 차이요.
김도
저는 리듬 때문이 아닐까 싶기는 해요.
희우
도 씨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반복인 것 같기는 합니다. 많은 시가 반복을 사용하지만, 이 시집에서 특히 느껴지는 기묘한 반복이 있잖아요. 사태가 끝나지도 않고 정리되지도 않고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반복의 형식 자체가 남게 되는.
서정시는 시인이 일반 사람들하고는 뭔가 다른 내면을 가져서, 그 사람이 세계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상 자체가 특별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만 하면 특별한 시가 된다는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쉽죠. 이 시집(『핵꿈』)도 서정시라고 묶일 수 있겠지만 반복의 형식 자체가 중요해짐으로 인해서 (시인의 자아 표현이 덜 중요해지는) 전환이 있는 것 같거든요.
리듬은 우리가 시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일반적인 요소 중 하나이지만, 여기서의 반복은 그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기능의 지연이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런 세계감과도 관련이 되고요. 예를 들자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그만해도 좋아/나는 말하지 못한다”(「단 하나의 문제만이 출제되는 시험」) 이런 구문들의 반복. 혹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서 층마다 늙지 않는 아이가 타는 식(「천국보다 낯선」)으로, 전개되지 않고 같은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기만 하는 것이 이 시집에 특색을 부여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반복의 형식이 작가의 감수성이나 사상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아무 변화가 없는 상태 그대로인 것을 수용한다고 해야 할까요?
김도
네, 그런 것 같아요.
희우
이런 거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면/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는 거겠지”(「Golden Tiger」). 이런 것도 그냥 같은 말의 반복이잖아요. 일반적으로는 무엇인가 가정되었으면(~라면) 그 뒤에 조건절(~일 것이다)이 나올 차례인데, 여기서는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인 거죠.
김도
그 문장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변한 건 없는 것 같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냥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형성되면서 오히려 변화의 느낌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요? 왠지 좀 그런 것 같아요.
희우
또 이런 것도 있어요. 첫 번째 시의 이런 문장도 참 좋은데요. “여행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여행이 시작된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 거야”(「잠수」). 이것도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어서 다르게 느껴지는 게 있어요. 결론을 향해서 가고 있는 느낌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태 자체를 수용하는 느낌이 드는 거죠. 이런 반복이 변증법적인 발전 같은 것도 아니고 나선형적으로 어떤 중심을 향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부록으로 쓴 수기에서도 잘 나타나는 건데) 개개 시편들의 반복을 관통하는, 그 자체로는 규정되거나 말해질 수 없는 시를 향한 경도가 느껴져요. 그러니까 시편들하고 구분되는 절대적 시의 개념이 있어요. 부록의 에세이를 보면 개개의 시는 그냥 시라고 되어 있고 후자는 볼드체로 시라고 적혀 있어요. 영어로 치면 소문자 시랑 대문자 시 같이요. 현행화된 시와 잠재적인 시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김도
예. 그렇죠.
희우
그래서 이 시집에서 반복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내면적인 맴돎으로 읽힐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복 자체가 더 깊은 차원에 있는 무언가의 반향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후자의 차원, 즉 절대적인 것을 향한 정신적 경도가 지난 십여 년의 ‘신서정’에서 『핵꿈』을 분별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읽었던 황인찬의 시는 메타-서정시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한국 서정시에 대한 계승이 있는 한편, 자신의 역사와 매체에 대한 반성적 자의식을 가진 모더니즘 시의 특징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미 황인찬의 시는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 것이었고, 시를 읽는 독자가 품을 법한 이중의 기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지요. 또 황인찬의 시에서도 도 씨의 시에서와 비슷한 반복을 이미 볼 수 있죠.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아침에는/아침을 먹고”(황인찬, 「무화과 숲」). 그런데 어쨌든 2010년대 황인찬의 시에서는 시에 대한 냉소적 거리와 메타적인 균형 감각을 볼 수 있잖아요. 반면 『핵꿈』을 비롯해서 최근의 많은 시에서는 몰입이나 경도, 광기 같은 것이 더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도
시 쓰는 분들은 스스로 계속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 앞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듯해요. 나는 왜 계속 시를 쓰고 있는 걸까? 특히 저는 지금도 등단을 안 했다고도 볼 수 있는 입장이고, 따라서 비등단 기간이 사실 제 삶의 대부분이었음에도 치열하게 썼거든요. 왜 그렇게 치열하게 썼는가 자문한다면,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저는 한 번 더 물어봐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내가 있고, 쓰고 있는 나는 따로 있는 거죠. 다만 실질적인 보답도 없고 정답도 없기 때문에 왜 쓰는지에 관한 질문을 떠올리고 답할 필요가 있는 나와 그리고 시를 써야만 하고 읽고 쓰는 나는 별개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를 왜 쓰는지 대답을 해본 간략한 결과가 시집 마지막의 부록인 것인데, 시가 가는 방향 끝에 있는 거(시)는 대상과의 일치라고 생각하거든요. 대상과의 언어적인 일치는 존재적 차원의 일치와 다름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상과 주체가 떨어져 있어야만 가능한 거잖아요. 반대로 시가 지향하는 방향 끝엔 대상과 주체가 분간이 안 되는 상태를 가정해야만 하고요. 시가 시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게 그것이기 때문인데, 시를 이루는 언어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분리돼 있으니까 (시의 지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통 시에 관한 정론이고요. 어쨌든 그와 같은 시의 극점은 그것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시를 생각할 때 염두에 둘 수밖에 없죠. 시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마땅하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거죠. 특히 이러한 관점은 제 병의 경험과도 연결되는데 조현병의 피아 분간이 흐릿해진 상태, 나와 사물 간의 경계가 흐릿해진 상태가 저는 대문자 시의 인지적인 상태와 흡사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시를 통해 대문자 시를 이룬 시의 완성 상태가 더 완전할 테지만요. 조현병 상태는 불안정한 상태이니까요.
그래서 대문자 시적 상태로 어떻게 갈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의 결과 중 하나로 시에서의 반복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반복이 대문자 시를 이루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쓰는 것의 너머를 알지 못하거든요. 아는 데까지만 쓰고 있는데, 거짓말하지 않고 아는 척하지 않고, 다만 아는 데까지만 진실하게 쓰고 내가 뭘 쓰고 있는지 그래도 최대한 알아차리려는 솔직한 태도랄까요. 솔직하다는 말이 적당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대문자 시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문자 시가 보인다는 착각에 속지 않고 그냥 당장 내가 쓰고 있는 것을 쓰려고 쓰다 보니까(이상한 말인데) 반복적인 형태가 나온 것 같아요.
희우
그런데 이 시집의 반복은 언어와 사물의 경계가 없어지는 분열적인 상태를 향해서 가속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한편으로 닫힌 회로처럼 폐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김도
네. 저도 동의해요. 그러니까 어…… 제 생각은 계속 벽을 부수면서 나아가는 느낌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한 편, 한 편 시를 쓸 때 나아가고 있다는 그 운동 상태의 체감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거죠. 대문자 시로요. 말하자면 한 칸의 계단은 한 칸의 계단이라는 인식으로 쓰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니까 그 계단에서 다른 계단으로 옮겨가는 발의 느낌으로서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칸의 계단은 한 칸의 계단으로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걸 인정해야 하고요. 그 계단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떤 사적인 욕망이나 아니면 미래에 대한 기대나 이런 것보다도 그저 그 한 칸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쓰는 거죠. 미신적이고 계시적인 이야기이긴 한데, 그저 이 순간 쓰고 있는 게 이 순간에 써야만 했을 그 무엇이라는 받아들임이랄까요. 그래도 말씀하신 대로 폐쇄적인 느낌 속에서 영원히 돌고 도는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달리 말하면 정지한 거고요. 제가 의도했던 느낌은 아니었지만요.
희우
「떨어지는 돌」의 화자는 약간 신적인 존재잖아요. 어떻게 보면 영화 〈트루먼쇼〉의 연출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화자이지요. 이런 시를 보면 어떤 전능한 느낌이라는 게 고전적인 연출가의 위치와 연결이 되면서,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요.
김도
네. 말씀하신 대로 전능하기 때문에 유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희우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시집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이 시집에 화자가 시 안에서 폐쇄적으로 맴돌 때가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돌」에서와 같이 전지적 관찰자로 위치가 달라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김도
「떨어지는 돌」은 약간은 캐주얼하게 쓴 건데요. 화자가 떨어지는 돌인 거고 그래서 오히려 희망적인 느낌을 내보고 싶었어요. 지구에 떨어지는 돌이 화자인데, 그 돌이 지구에 관해 모르는 게 없다면 근사하잖아요. 심지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모르는 게 없으면 정말 멋진 돌이니까 그 정도면 (지구에) 부딪쳐도 괜찮지 않나 그런 의미로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포칼립스」랑 또…… 뭐였죠? 막대한 빚으로 끝내는 시 제목이 뭐더라…… 왜 내가 제목을 기억 못 하지? 뭐였지? 아 「달콤한 인생」. 그렇게 세 편을 묶었던 거예요.
희우
그러니까 여기서 ‘떨어지는 돌’이 화자이고, 화자는 운석이군요!
김도
그렇게 쓰긴 했습니다.
희우
그런 거군요.
김도
예. 비하인드 스토리 정도로…….
희우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이 시집엔 종말에 관한 테마도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종말이라는 테마
김도
네. 확실히 그렇죠.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돌아버렸을 때 종말론적인 환각 같은 것을 봤었는데, 그게 요즘에도 기억나곤 해요. 영화에서 연출하듯이 햄버거 먹는 와중에 별안간 콜라 쏟고 그런 식으로 떠오르지는 않아요. 다만 벗어나기는 어려운 거죠. 왠지 계속 그런 종말이 발생할 것 같고 저는 그 자장 안에 있는 거죠. 그렇다 보니 그런 시들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희우
이거는 시에서 좀 벗어난 얘기인데요. 소위 ‘미친다’라고 할 때, 언어적인 질서에서 탈구되는 거긴 하지만 정신이 아무 방향으로나 가는 건 아니잖아요. 미쳤을 때 흔히 반복되는 서사나 이미지 같은 게 있잖아요. 종말의 이미지가 대표적으로 그렇고요. 그게 좀 궁금해요. 그러니까 미친 사람들이 완전히 임의적으로 다른 환상, 환각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고 거기서도 어떤 패턴이 발견된다는 게요.
김도
예. 그 얘기를 하자면…… 이상하게도 시랑 연결되는데, 바슐라르가 자의적인 메타포라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도 이 말에 동의를 하는 이유가 경험에 있거든요. 어떤 공통되는 특징이 전혀 없다면, 공통되게 하는 기반이 없다면 미치는 사람들은 진짜 막 아무런 방향으로나 튀어나갈 것이고 테이블이나 드라이기나 아니면 220볼트 콘센트 따위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근데 미쳤을 때 그런 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내가 모든 존재고 모든 존재가 나인 그 지경까지 비어버리면, 뭐랄까 본인이 좀 신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건 아주 고전적인 테마잖아요. 어쨌든 그런 압도적인 느낌이 드니 제가 예수라고 믿게 되더라고요. 계시들이 밀려오고요. 그래서 저는 「시도시도는 이렇게 쓰인다」 부록에서 말하는 그냥 시와 대문자 시, 그리고 제가 명상을 하면서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와 조현병적인 어떤 상태, 각기 다른 환자들인데도 공유하는 병증의 레퍼토리가 다 유관하다고 생각해요. 또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희우
종교적인 틀이나 신화소(Mytheme) 같은 것들이요?
김도
신화소요?
희우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요소들이 있잖아요. 신화를 신화로 만드는 최소 단위 같은 것을 신화소라고 하는데요. 언어의 밑바닥에 그런 신화소들이 있기 때문에 타아의 구분이 무너진 광인들이나 아니면 구분을 무화시켜버린 수행자들이 도달하는 인지 상태가 비슷한 것인지……
김도
맞는 말씀 같아요. 또 말씀하신 제 시집에서 나오는 특징들도 사실 이러한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저는 미치고 치료받은 뒤로는 이 방향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죠.
희우
그런데 구원이나 종말론적 이미지나 메시아 같은 것은 많은 종교에 공통된 요소를 품고 있긴 하지만 특히 기독교적인 테마이기도 하잖아요. 그게 이상한 것 같아요. 기독교는 이 나라의 국교였던 적도 없는데요. 도 씨한테 기독교적 테마가 특별히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있나요?
김도
이번 삶에서 특히 중요했다고, 특징적이었다고 말할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정도로 기독교 문화의 자장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종말론적인 테마가 기독교적인 테마인 건 틀림이 없지만, 또 동시에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종교라면) 이 세상의 이유를 밝혀야 되는데, 보통 그 이유를 밝히다 보면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고, 그리고 또다시 어떻게 시작되어야 되는지를 해명하려고 하니까요.
희우
불교에는 그런 식의 구원이나 종말의 테마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김도
불교와 힌두교의 구원이 좀 비슷하죠. 그러니까 계속 윤회하고 있고 깨달음을 얻으면 이것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요.
희우
네.
김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본인이 예수가 되었다거나 신이 되었다거나 같은 망상은 조현병이나 조증적으로 흔한 증상이지만, 막 판문점에 유엔 본부를 설치해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거나 하는 망상도 대한민국에서는 좀 흔한 레퍼토리거든요.
희우
그런 사례들이 있나요?
김도
네. 근데 제가 겪은 이 구세주 레퍼토리가 가장 흔한 것이에요. 시중에 나와 있는 책에서도 쉽게 접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같은 걸 읽어봐도 그 아들이 예수가 되거든요. 제가 그랬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예수가 가장 유명한 신이라서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어쩌면 종말을 감지했던 이유는, 이상한 얘기인데, 당시 어떤 생명들이 끝장나고 있다는 그런 이상한 촉감 속에 있었거든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사과를 먹을 때도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닌 거예요. 포도 한 알을 씹을 때도요. 보면 안에 되게 뭐가 많잖아요. 사실 굳이 미치지 않은 눈으로도 자세히 보면 되게 복잡하잖아요. 이게 막 움직이고 있고요. 그런데 그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무방비하게 열려있다 보니까, 특히 그걸 제어하는 힘이 언어 같은데 그것이 와해되어 있다 보니까 온갖 이상한 감각들이 밀려오는데요. 그중 저한테 강하게 왔던 것이 생명들이 끝장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얘기하면 추상적이지만 막상 몸으로 오는 느낌은 구체적이었던 거죠.
그때 저는 보기에 너무 안 좋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먹는 그런 환각을 봤거든요. 그게 어떠한 이유로 왔는지는 저도 모르죠. 맥카시의 『더 로드』의 교육 효과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좀비 영화나 온갖 영상물들의 영향일 수도 있죠. 근데 중요한 건 그런 소재적인 이미지들보다도 그걸 일으키는 힘 같아요. 사실 그건 제정신이 아닌 거잖아요. 눈이 여기에 있는데 웬 이상한 걸 보고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되면 왜 압도당하게 되느냐가 관건인데, 그걸 다룰 수 없어서인 것 같아요. 그 상태를 컨트롤 할 능력이 없으니까. 무서운 마음이 들면 그 무서운 마음을 의식이 구체화시켜버리는 거죠. 그리고 거기에 다시 당해버리면서 악순환에 빠지고요. 환각의 원리가 그렇더라고요. 내 기분이 좋으면 유니콘 같은 게 무지개 타고 날아올 것 같고 그런데, 기분이 안 좋으면 마치 얇은 필름 하나가 벗겨지는 것처럼 서울이 지옥으로 보이는 거죠.
희우
그게 궁금한 점인데요. 그런 식으로 미치면 주체와 대상, 언어와 사물의 경계가 없어진다고들 하지만, 조현병이 환각이나 환영하고 연관되는 만큼 그 경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도의 착각 속에, 더 주관적인 차원에 갇혀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상상적인 차원에요.
김도
네.
희우
다시 말해 실제로 구분이 없어진 게 아니라 구분이 없어졌다는 착각 속에 있는 것일 수 있는데, 그거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주체와 대상의 일치라는 시의 고전적 테마도 그렇죠. 생각해보면 절대지는 주관에서 객관으로 갔다가 그걸 다시 주관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적인 운동을 통해 대상과 주체의 일치에 이르는 것인데, 시의 엑스터시는 그런 변증법적 발전을 반대로 뒤집은 것일 수 있지요. 근대철학적 절대지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주관적인 만큼 광기도 주관적인 것일 수 있죠. 그러니까 그저 주관 안에서 분열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사물과 접속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김도
날카로운 말이네요. 실제로도 그렇게 양분되는 것 같아요. 자폐적으로, 껌껌한 곳에 본인이 무엇을 감각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갇혀서 누구와도 소통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과 차단된 상태. 그런 상태와 제가 말하는 ‘만물이 나고 내가 곧 만물이 돼버린 상태’는 어쩌면 밖에서 보기에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그 둘을 객관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면 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체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것에 관해서 시도 조금 썼고 블로그에도 조금씩 끄적이고 있긴 한데, 제가 겪은 병적인 상태는 병적이었기 때문에 불안정했고 깊이로 따져도 그렇게 깊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아요. 말하고자 해도 이 정도밖에는 말할 수가 없거든요. 이거는 말해줄 수 없는 종류의 사건이자 감각인 것 같아요. 겪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상태를 겪는 방법으로 동시대에 잘 알려진 게 버섯이나 LSD 같은 것이겠죠. 강제로, 화학적으로 그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에고가 흐려진 상태가 무엇인지 좀 알게 되죠. 다만 제가 말씀드렸던 문제도 같이 나타나겠죠. 그러니까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상태에서, 열려버린 상태에서 두려운 마음이나 안 좋은 생각 같은 것에 사로잡히면 엄청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거죠. 제가 광증에서 겪은 환각들처럼요.
희우
거기서 그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 종말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들이 그냥 개인적인 두려움 때문일까요? 예를 들면 아까 서울이 지옥으로 보였다고 하셨잖아요. 서울에 실제로 어떤 지옥 같은 특성이 있어서 그 실재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김도
둘 다일 것 같아요. 서울에 지옥 같은 속성이 있어서 지옥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정도 지옥 같은 면이 없는 곳은 이 별에 엄밀히 말해서 없잖아요. 숲에만 가도 뭐가 뭐를 끊임없이 먹고 있으니까요. 작은 이빨로 오독오독 씹으면서요. 서울에도 당연히 그러한 면은 있을 거고요. 인간적인 면에서요. 근데 그런 것을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쁘고 두려운 식으로 안 보일 거라는 거죠. 미쳐도요. 오히려 근사하게만 보일 수도 있을 거고, 몹시 흉하거나 마음 아픈 장면을 보면서도 거기서 희망이나 오히려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상태라면요. 하지만 불안정하고 연약한 마음이면 온갖 지옥도에 사로잡히는 거죠. 조현병 환자들이 불행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상태, 에고가 흐려진 상태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왜냐면 마음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기절했기 때문에 강제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고 그러면 휘둘리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폐쇄병동에서 봤던 사람들도 그랬고요. 그리고 저도 거기 있었던 모습이 되게 안 좋아 보였겠죠.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겠죠.
사이적 존재
희우
버섯 얘기해서 생각나는데 『돈 후안의 가르침』 읽으셨어요? 그 책의 저자는 원래 미국에서 근대적인 인류학 교육을 받은 학생이고 그 사람이 멕시코의 선주민, 일종의 구루한테 견습을 받는 내용이잖아요. 근데 사실상 배우는 게 마약 복용법이란 말이죠. 이런 장면이 나와요. 스승이 가르쳐주는 천연 마약을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고 나서 새로 변하는데……
김도
스모크였어요.
희우
네. 새로 변하는 경험을 하고 나서 정신을 차렸을 때, 스승이 “너는 새가 되었어”라고 단언하는데 서술자가 계속 그거를 못 믿거든요. 그러면서 계속 질문하지요. 내가 그냥 새가 됐다고 느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새가 된 것인가요? 그러니까 만약에 남이 그때 당시 나를 봤어도 내가 새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겠냐고 계속 질문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 해소할 수 없는 관점의 차이가 있어요. 아주 거칠게 말해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근데 그 스승한테는 그런 사고방식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서술자가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는지조차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반대로 우리가 근대적인 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물에 접속하거나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형되거나 세계로 확장되는 기분이, 그냥 미치거나 마약에 취했거나 미몽에 빠져서 자기 혼자 착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게 근대적인 틀로 보면 사고방식에 위계가 생기고요. ‘물아일체’는 전근대적인, 말하자면 의심(데카르트)이나 비판(칸트)을 할 줄 모르는 상태인 거죠. 분열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여 종합한 상태가 아니라 아직 분열조차 겪지 못한 상태…… 헤겔이 동방의 예술(특히 이집트 예술)에 대해 했던 평가가 정확히 이런 것이었어요. 거기서는 자연과 인간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거든요.
김도
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게, 저는 좀 사이에 있는 것 같거든요. 말씀하신 대로 근대적으로 교육받았고 그런 교육으로 나름대로 자신을 단련한 것 같은데, 일단 신비로운 체험을 지나고 나서는 그런 교육도 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상태, 에고가 흐려진 상태에 제 존재의 구원이 있다고 믿고, 명상 수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명상을 하면서 인지 상태나 감각의 변화 이런 건 좀 사소한 거고요. 예를 들어 열차에 앉아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제 손을 보면요. 보통 평소에는 제가 손을 딱히 보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돼요. 또 손이 제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당연한 거라서 굳이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잖아요. 근데 이상하게 보이는 거죠. 이게 나의 손이네? 감각 자체만 바라보는 훈련을 계속하다 보니까 그냥 물이 휴지에 스미듯이 의식이 변화하더라고요. 그게 제겐 흥미로운 지점이었고, 예전에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일상이 된 것 같고요. 하지만 저도 무슨 변신 이야기처럼 사람이 막 갑자기 깃털이 나면서 할리우드 영화처럼 날아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근데 ‘스모크’라고 하는 무언가를 통해서 어쨌든 비행을 하고 새가 되긴 되잖아요. 어떻게 그게 되는 건지 모르겠고 뭘 한 건지도 모르겠는데 날긴 난 거죠. 그럼 난 거예요. 그 책을 읽어보면 처음에 페요테부터 시작을 하잖아요. 그 유명한 선인장 열매. 사이키델릭으로 말해지는 자연물 중 유명한 것인데요. (그런 걸 복용하면) 에고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과의 교류가 감각되는 상태가 오는 건데, 그게 객관적인 진실이냐, 그것이 과학적인 진실이냐, 정말 나무의 정령이 있어서 나무와 대화를 하는 것이냐, 그냥 자의적인 것 아니냐, 그거야말로 주관에 사로잡힌 거 아니냐고 반문은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명상을 통해 과거에 비하면 약간은 기묘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데, 과거에는 포도가 내가 생각하던 나고 사과가 내가 생각하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그사이의 어디라 말하기 어려운 허공에서 지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고정된 좌표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모든 게 움직이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그거라고 부르는 건 그저 언어적인 편의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진실은 나무가 뿌리내린 그 자리와 돌이 위치한 그 자리, 고정된 자리들이 아니고, 김모 씨와 한모 씨 같은 이름들의 좌표값이 아니고, 그 사이들만 있는 거고, 그렇게 치면 사실 그 무엇도 없는 게 돼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이’로서만 있는 거죠. 어느 개체든지 다 사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지거든요. 그저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여져요. 그렇다고 지금 이상하게 세상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도요. 새가 된다거나,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들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그 사이적인 상태로 의식을 변화시키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보았을 땐 사이가 아닌 고정된 자리가 있다는 게 착각인 것이고, 사이만이 있다는 게 진실이라는 거죠.
희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 그러한 인식에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나 광기나 마약을 빌리지 않고서도 주체/대상과 같은 구분을 넘어설 합리적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김도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 같아요. 전자를 쐈는데 그것은 관측되기 전까지는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있다가 관측되는 순간 그곳에 있는 것으로 되잖아요. 아주 작은 미시 세계에서의 법칙이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에서 자주 말해지는 ‘위에서도 그러하듯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아주 작은 것들이 아주 많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이고, 불교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알아내는 건 미시 세계까지 감각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 같아요. 근데 말씀하신 대로 그것을 합리적인 언어로 이룬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일 것 같아요. 어떻게 그게 될지도 잘 모르겠어요.
희우
그것은 이미 동시대 철학의 명시적인 과제예요. 캐런 버라드(Karen Barad)라는 동시대 철학자, 원래 물리학자였다가 지금은 철학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마침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말씀하셨잖아요. 버라드가 그 중첩된 상태랑 존재론과 퀴어 이론을 연결해서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 말하는 “내부-작용(intra-action)”은 말씀했던 그 ‘사이 존재’랑 비슷한 거예요. 아마도요.
그런데 근대철학을 비판하면서 그런 상태에 ‘합리적’으로 도달한다는 말은, 제가 독학한 맥락에서는 하이데거식 해석학적 낭만주의나 들뢰즈의 무정부주의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요. 하이데거가 근대철학 혹은 서구 철학에서 망각된 존재에 가닿기 위해서 특권을 부여했던 것이 시의 언어이고,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작업했던 후기에 정신분열증에 의미를 많이 부여했거든요. 주객의 (재현적)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서요. 그들도 ‘사이 존재’를 말했지만,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철학자들하고는 달라지는 거죠. 더 멀리 가려는 것이지요.
김도
그렇네요.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것 같아요. <라스트 샤먼>이라는 다큐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미국인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을 것 같고 실제로 죽을 뻔도 했으니까 페루에 가서 아야와스카 리추얼에 정통한 샤먼을 만나서 아야와스카를 복용하고, 의식을 치른 다음에 병을 치유하는 다큐멘터리거든요. 아아와스카가 그 지방의 전통적인 사이키델릭 물질인데 화학적 성분으로는 DMT라고 하는 거거든요. 근데 DMT는 뇌에서도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거고, 그게 가장 많이 분비되는 시기가 죽을 때입니다. 그래서 주마등이라는 말이 있는 거고요. DMT가 분비되는 부위가 송과체인 거고 제3의 눈이라는 것과도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수행을 하면서 제3의 눈과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게 감지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수행할수록 점점 느낌이 강해지더니 이마와 코뿌리 안쪽에 어떤 공 같은 것이 온몸으로 떨림을 퍼뜨리면서 회전하고 있거든요. 물론 이건 수행을 통한 것이지만 사이키델릭을 통해 경험을 해보시는 것도 가능성으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철학적 과제를 위해서요.
자연에 섭취하면 그런 효과가 일어나는 것들이 있다는 건,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건 먹어보라는 뜻으로 보이거든요. 저한테는요. 대마초도 사실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식물의 암꽃을 수정시키지 않은 상태로 잘 키워서 말려서 피우는 거고 뭔가 거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것을 섭취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섭취를 안 하셔도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경험하는 가장 좋고 쉬운 방법은 명상입니다. 물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많은 집중을 필요로 하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근데 그건 사람마다 달라요. 불교적 관점으로 따지면 희우님이 저와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이런 세계와 인연이 닿아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고요.
희우
계속 말했지만 명상이나 약물은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 대화를 통해 인연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다시 한번 시집 발간 축하드리고요. 앞으로도 계속 쓰시길 기원합니다.
김도
예. 계속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요.
정말 긴 이야기를 나누었네요. 이 대담이 어떻게 정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읽는 분들이 재밌게 읽으시면 좋겠네요. 담소 나누는 동안 저는 재밌었거든요.
희우
저도요.
진짜 두 분 다 최고십니다! 이상하게 계속 키득키득 대면서 글을 읽었네요. 김도 님의 마찰없이 뻗어나가는 정신병, 사이키델릭, 명상 예찬을 이희우 님이 자신의 관심사를 통해 은근히 제지하는 모습이 두 분의 특성을 각각 잘 보여주는 것 같아 너무 재밌었네요. 제가 원하던 인터뷰는 바로 이런 것이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