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기호와 매력에 대한 단상

0.

내가 주장할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1) 근대미학에서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매력에서 정화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있다.

(2) 그러나 동시대 문화, 경제, 정치에서 매력은 너무나 중요한 기제이자 힘이 되었다. 오늘날 문화의 재현 논리, 활력과 복잡성, 정치적 갈등, 정동의 흐름은 ‘매력의 경제’에 대한 고찰 없이 이해될 수 없다.

(3)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즉 새로운 미학이 작성되는―출발점이다.

(4) 매력의 경제는 감각적 자극, 섹슈얼리티, 지적 관심, 도덕적 관심, 미적 관심, 육체적 끌림, 충동, 수치심, 허영심, 이해관심 등이 분화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경험적’ 세계의 법칙이다. 매력은 한 인간을 신체적-담론적 기호들(피부, 표정, 비율, 머릿결, 냄새, 말투, 옷차림, 예절, 분위기, 평판, 지위 등)의 조합으로 파악하게 한다. 매력은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을 무차별적으로 뒤섞어 매력의 복합적인 서열로 환원한다.

(5) 또한 매력의 경제는 모든 ‘피투자자’의 능력·신용·사회적 책임·평판 등을 투자 가치로 환원하는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국가나 기업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모두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로 환원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셸 페어의 말처럼, 오늘날의 대안적인 정치 운동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

(6) 매력의 경제는 한편으로는 ‘금융적’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감각적’이다. 이 두 측면은 즉각적으로, 광범위하게 상호작용하지만, 이론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전자는 재현적·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나무를 말릴 때 나무가 갈라지는 미묘한 소리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목수나 조각가가 되려면 나무가 내뿜는 감각적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보여준다.

(7) 매력은 배우는 자를 대상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매력을 통해 촉발되는 배움의 운동은 배우는 자를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으로부터 빼내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실망과 상처, 수치심과 모멸감, 적대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장르, 기호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등록·재생산·유통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단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의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교차·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쟁론』에서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이것은 삶이 기호들·장르들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하거나 초월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우리 시대의 문화가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이미 여러 번 들었던 예이지만―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 등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비교적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상황을 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효과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받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만약 과거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나는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단지 영역들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제도적·위계적·영토적·관념적 경계들이 현재보다 더 견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했던 적이 없다.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지저분하게 분투하는 것, 이를 정치적·예술적 실천의 조건으로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어떤 실천이나 미적 실험이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하는데, 외견상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런 비판은 대책 없는 파국적 호소일 뿐이다.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이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적 조건 속에서이다. 아이가 거울 단계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듯이, 배우는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문화에 재현하는 한에서) 매력의 경제로 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마치 손보미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 속 아이들처럼―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거의 본능적으로’―학습한다. 이것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영역들에는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물론 매력의 경제라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광범위한 부작용이 있다. 매력의 경제는 이른바 ‘현실 정치’가 모종의 광적인 팬덤 문화처럼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에 의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종종 관심과 주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고 도발적으로 말하는 프로보커터이기도 하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 판단,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의 경계를 없애버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사회문화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고도로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거나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적대와 갈등은 결코 ‘순수’하거나 고상할 수 없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끔찍한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준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공격적/방어적으로 되며, 한편으로는 ‘부유하면서-당당하면서-아름다운’, 즉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를 갈구한다. 오늘날 Kpop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그러한 갈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유인하고 있다. 지식인, 활동가, 예술가 등이 고려해야 할 실천적 문제는 동시대 문화에 지배적인 매력적 형상과는 다른 매력적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잔여―‘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가 있느냐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