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의 한계를 넘어

―강동호,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문학과지성사, 2022)

0.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은 총 13개의 평론으로 이루어져 있고, 크게는 세 부로 나뉘어 있다. 1부 “한계―문학, 이론, 정치”에서는 책의 바탕이 되는 전제들와 문제틀을 제시하는 이론적 기초 공사가 이뤄진다. 꼼꼼히 읽은 독자들은 글의 신중한 배치 뒤에 있는 저자의 야심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름다움, 앎, 실천이라는 세 영역의 ‘한계’를 밝히고자 했던 “비판”의 칸트적 전통에 대한 자의식이 있는 것이다. 2부 “비판―문학주의, 권력, 통치성”은 말하자면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독단의 잠’에서 사유를 깨우고자 했던 비판가처럼, 강동호는 한국 비평사 곳곳을 고고학적·계보학적으로 탐문하면서 숨어 있는 독단성, 이데올로기, 모순들을 찾아낸다. 3부 “동시대성―불능, 시대착오, 희망”은 몇몇 작가들에 대한 작가론을 담고 있다. 물론 이 부분도 저자의 체계적인 신중함이 돋보이지만, ‘희망’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앞의 첨예한 비평적 논의에서 조금 벗어나 저자의 주관적인 애호, 믿음, 소망까지도 노출하고 있다. 그래서 3부를 읽고 다시 읽으면 앞의 글들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모든 글은 비평이 직면한 현안들, 의문들과 한 비평가가 치열하게 부딪혀온 기록이다. 덕분에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은 비평을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하는 한편 광범위한 이론적 실험 무대를 제공한다. 저자가 다양한 현안과 이론적 문제들을 책 안에 잘 마름질해놓았기 때문이다. 이 실험 무대에 뛰어들면서 문학비평은 여러모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의 입장에서 이러한 토론의 장이 주어졌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지만, 이 책의 주장들 혹은 책이 전제하는 이론들과 구체적으로 논쟁하려면 여러 편의 긴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또 책이 다루는 모든 쟁점과 사례를 논하는 것은, 저자만큼 비평이 직면한 문제들과 오랫동안 씨름해오지 않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평소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에 따라 책의 저자와 이 글의 독자에게 몇 가지 질문과 가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질문과 가설을 제기하기에 앞서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긴장이 있음을 짚고 넘어가겠다. 이 글의 질문들은 바로 그 긴장과 관련 있다. 책은 ‘담론 바깥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단순한 바깥과는 구분되는 의미의 ‘외부’라는 영역을 교환 내부에서 발견하려는 의식”(p. 410)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에서 두 개의 어조를 알아볼 수 있다. 기성의 비평들, 담론들을 집요하게 분석·비판하는 부분과, 담론화되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것 혹은 “불능의 외부”(p. 410)를 찾으려는 소망이 나타나는 부분은 미묘하게 다른 어조로 쓰여졌다. 어조의 차이는 책 전체에 긴 리듬을 부여하면서 하나의 글 안에 촘촘하게 겹쳐져 있기도 하다.

1. 재현의 한계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이 책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개념을 꼽으라면 ‘동시대성’이겠지만, 재현, 자본, 역사, 비판과 같은 개념들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 중 재현의 문제는 책의 논의에 접속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현은 자본, 역사, 비판과 같은 다른 모든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의 맨 앞에 실린 글 「문학의 정치―재현·잠재성·민주주의」는 ‘재현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다.

재현 체제(representation system)는 왜 중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 강동호가 ‘재현 체제’의 정의를 위해 참조하고 있는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재현 체제는 말과 소음을 구분하고, 도상과 배경을 구분하고, 장르들의 서열을 구분하는 그러한 규범성의 형태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곧 정치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재현 논리는 정치적·사회적 점유들의 전체적 위계와의 총체적 유비 관계 속에” 있다.1

소설이 삶을 재현할 때 일반적으로 삶의 어떤 요소들을 선별하여 거기에 서사적 구조를 부여하는 것처럼, 재현은 재현되지 못하는 ‘나머지’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문학 제도가 ‘젊은 예술가’에게 문학상을 수여하거나 지원금을 준다고 할 때,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단 ‘젊은’ ‘예술가’로 제도에 식별(identify)될 수 있어야 한다. 재현은 ‘젊은/젊지 않은’, ‘예술가/비예술가’와 같이 필연적으로 어떤 이분법을 작동시킨다. 이처럼 문학에서 “재현 체제는 이분화된 문학과 현실을 메타적으로 지시하는 언어들의 존재론적 조건을 제공하면서, 문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화의 기제를 가리킨다”(p. 36). 주지하다시피 누가 다수로 재현되느냐, 다수가 어떻게 재현되느냐 하는 문제, 즉 편향된 재현의 구조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적 분리와 편향은 지배적으로 재현되는 것 속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런 욕망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분리가 지속된다.

어떤 텍스트를 가치 있는 것으로 식별하는 문학 제도의 재현 논리를, 인간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국가의 논리에 빗대어볼 수 있다. “문학적 재현 체제와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 체제라고 할 수 있는 대의제(representation system)가 유사한 원리에 토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p. 50). 대의제는 국민의 의견에 대한 선별로써 당연히 모든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재현되지 않는 ‘나머지’ 의견이 생겨난다. 또 한 사람은 주민, 시민, 시민단체 대표, 청년의 대표 따위로 법에 의해 재현되어야만 국가와 관계할 수 있고, 의견은 집단을 이루어야만 대의제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원론적인 문제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재현 체제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동시대 예술에서 더 이상 재현이 지배적인 작법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든 예술작품 또한 이데올로기적 통치성으로서의 재현 체제에 연루되어 있다. 재현 체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 당장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식의 무정부주의적 환상이다. 강동호도 ‘재현 체제’를 어떤 역사적 국면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처럼 사고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인간이 재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현의 한계는 곧 담론의 한계다. 어떤 포괄적인 체제도 모든 것을 재현할 수는 없으므로, 담론에는 필연적으로 구멍이 있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모든 담론에 대해 비판이 가능하지만, 비판의 문법 안에서 담론에 대한 완전한 대안은 제시될 수 없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역시 결과적으로 담론의 질서에 귀속된다는 아이러니, 즉 담론 바깥은 없다는 사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다”(p. 275). 즉 어떤 담론이나 지식을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담론은, 그 자체가 다시 이데올로기라고 비판받을 위험을 항상 지니고 있다. 초월적·형이상학적·독단적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비판적 사유는 이데올로기를 판정하는 상위의 논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최선의’ 이데올로기인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초월적 이데아나 메타적인 상위 규율 같은 것이 애초에 부재하기 때문이다”(p. 415).

그렇다면 재현에 대한 끝나지 않는 비판을 영원히 가동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는 않다. 그처럼 끝나지 않는 비판의 변증법은 담론들의 인정 투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공허한 순환, ‘소모적인 논쟁’이 될 공산이 크다. 앞서 말했듯 강동호는 재현의 구조와 그것의 모순을 면밀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재현과 비판의 끝나지 않는 변증법과는 다른 논리를 요청하고 있다.

재현 체계의 흔들림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주체와 현실을 목도하는 가운데,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저 대의제적 원리에 기반한 재현 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나아가 재현의 한계라는 언어적 조건 속에서 형상화되는 문학적 역량의 동시대성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다시, 재현 체제가 포섭할 수 없는 시공간의 잠재성을 발견해야 한다. (p. 52)

“재현 체제가 포섭할 수 없는 시공간의 잠재성을 발견”하는 일은 담론 내부에 있지만 담론화되지 않은 것, 말하자면 재현 체제 속의 ‘실재’를 발견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데올로기화되지 않는 잠재성의 시공간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 구분할 수 있을까? 그곳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지점일 수도 있지 않은가? 텅 빈 이념인 ‘문학’은 이 문제 앞에서 종종 결정 불가능한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결정 불가능성 자체를 문학의 정치적 가능성으로 전유해야 하는가, 아니면 (오늘날 여기저기서 유행하는 ‘사변적 유물론’처럼) 비판적 사유의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실재’가 합리적으로 사유 가능하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1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 b, 2008, p. 29

2. 장치란 무엇인가?

하지만 원론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금 재현의 한계를 말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또 있다. 재현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이 오늘날의 복잡한 현실 혹은 우리의 주체화를 규명하는 데 점점 무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의 고전적인 문제인 재현/대표의 필연적인 편향은 언제나 부단히 비판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이나 문학이 재현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전적인 재현 논리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는 국가 같은 고전적인 재현 장치들의 영향력을 점점 더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인간적·언어적·재현적 사고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장치들이 너무나 복잡해졌다. 이러한 상황이 문학을 사고하는 방식 역시 바꾸어놓는 것 같다.

강동호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는 생각이지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호명’으로 인간 주체를 예속하는 고전적 재현 체제의 논리와, 유동적인 장치의 흐름으로 인간·비인간을 포섭하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논리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랏자라또는 재현 체제가 주체에 미치는 효과는 “사회적 복종”으로, 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 체제가 (탈)주체화에 미치는 효과는 “기계적 예속”으로 나누어 부른다.2 사회적 복종은 주체에 대한 재현 체제의 확고한 정체성 식별을 전제한다. 즉 사회적 복종은 확실히 구분되는 사회적 개체들을 전제한다. 반대로 기계적 예속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유동적인 생산/소비의 사슬에의 참여를 부추긴다. 기계적 예속은 재현 체제를 공고히 하기보다는 이분법적 재현을 빠져나간다. 예를 들어 국가는 법적·제도적 통치를 위해 반드시 인간/비인간, 성년/미성년, 국민/외국인, 남성/여성, 자본가/근로자, 생산 주체/부양 대상 등을 나누어 식별하려고 한다. 반면 동시대 자본주의는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을 점점 더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체성 식별이 불가능한 배치들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증식시키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의 구분을 ‘문학 제도’와 ‘출판 시장’의 관계에도 비슷하게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장은 문학/비문학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식별되지 못했던 것들까지 활발하게 유통시킨다. 등단으로 얻는 작가의 ‘자격’은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상품의 매력을 구성하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비평이나 문학상 제도의 평가와 선별을 아랑곳하지 않는 독자들도 점차 많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적 장치보다 시장이 더 많은 다양성을 수용하리라는 생각은 일견 자연스럽다. 강동호도 인용하고 있는 좌담에서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제도로서의 문학 권력은 너무나 공고하고, 이것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 현시점에서 불가능하다면, 지금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의 요구에 따르는 것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3 이것은 협소하고 권위적인 제도의 체질 변경에 대한 다소 도발적인 요구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다양성의 증가에만 초점을 맞췄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품 다양성의 끝없는 증가는 오늘날 우리를 고통스럽게 예속하는 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재현되지 않는 ‘존재의 다수성’과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상품의 다양성’을 혼동하곤 한다.

어쨌든 출판 시장으로 진입하는 통로가 다변화되는 만큼, 표면적으로 시장은 제도의 재현 논리가 토대로 삼았던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시장은 어떤 이분법적 구획으로 나뉘지 않는 모호한 지대, 새로운 경로의 발견을 오히려 반기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제도와 시장의 논리는 구조적으로는 상호의존적이기도 하다. 문학적 ‘수준’을 평가하는 비평가나 문학상 등의 제도적 장치가 작품을 선별하면, 선별된 작품을 엮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시장에서 새로운 경로를 개척한 진정성 있는 주체가 약간의 시차를 거쳐 제도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제도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를 다른 벡터와 층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동시대 문화에 예술의 역량에 대한 점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두 종류의 불평등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예술 제도 내에 편입되느냐 아니냐 하는 오래된 문제가 있다. 문학계에서 ‘등단’이 여전히 지배적인 등용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와 비평가는 일단 등단해야 ‘문학계’에 재현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식별은 고전적 재현 체제의 논리에 속한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둘째로 위계 없는 장르들 사이의 광범위한 인정 투쟁이 있다. 작가들에게도 제도가 부여하는 ‘자격’보다 동료와 독자, SNS 팔로워 등의 ‘인정’이 점차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간다. 또 오늘날 기호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하면서 이목을 끄는 일은 결코 작가의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자기 브랜딩, 콘텐츠 생산, 자아실현, 인정 투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현실은 만인의 ‘예술가-되기’를 부추겨왔다. 오늘날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기호의 새로운 조합/배치(assemblage)를 경쟁적으로 생산하고, 그 조합/배치는 소비 욕구, 의혹, 질투, 열등감, 혐오 등의 정동을 재생산한다. 문화에 통용되는 기호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사유화할수록 문화적 영향력을 갖게 되는데, 문화적 영향력이 곧 돈이 되는 것은 오래된 현실이다.4

오늘날 사람들이 ‘봉준호는 하나의 장르’ ‘아이유는 하나의 장르’라고 말하듯이, 이제 ‘장르’는 예술의 제도적 구획만을 의미하지 않고 기호들의 독특한 조합/배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대의 문화는 장르들의 광범위한 경쟁과 뒤섞임을 부추기고 있다. 랑시에르는 재현 체제가 붕괴하고, “예술을 일반법칙으로부터, 주제들, 장르들 그리고 예술들의 모든 위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체제” 즉 ‘미학 체제’가 일반화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5 그런데 그 ‘미학 체제’가 동시대 자본주의 문화에서 야기되는 장르들의 자유주의적 경쟁 체제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는 모호하다. 장르들의 무정부주의적 경쟁은 계속해서 생산/소비 욕구와 문화적 틈새시장을 만들어내므로 자본주의의 이익에 잘 부합한다. 웹 소설 플랫폼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표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저런 기성의 장르들이 뒤섞여 제3의 장르를 만들어내면, 제3의 장르가 포화된 장르들 사이에 새로운 틈새시장을 형성하고, 독자들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새로운 장르적 배치 중 어떤 것은 흥행에 성공하여 확고하게 자리 잡고, 어떤 배치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이러한 일은 웹 소설 시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체와 장르들의 구분을 넘어 문화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재현’을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장르들의 경쟁과 뒤섞임 역시 결국 문화적 재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결국은 문화에 무엇이 현시되고 유통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역동적인 문화적 흐름이 문학 제도의 재현/대표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생산·유통·교환·차용되는 기호 혹은 장르의 경제에 대한 사유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이 경제는 문학작품의 생산 과정에도 마찬가지로 깊이 침투해 있다. 작가들은 동시대적 경험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요소와 기호들, 장르적 문법을 익히고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동시대 예술은 서로 뒤섞이고 경쟁하는 장르들로 우글거리고 있는데, 제도는 이러한 우글거림을 거의 식별하지 못한다. 이 광범위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장르적 배치들만을 새로운 것으로 식별할 뿐이다. 이러한 ‘식별’은 문학계 안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것이지만, 모든 장르가 서로 경쟁하고 야합하는 동시대 문화 전반에 비추어보면 점점 더 국지적인 문제가 되어간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문화에서 장르들의 경쟁과 야합은 예술/비예술의 경계를 넘어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비평의 시야도 넓어질 필요가 있다. 강동호의 말처럼 “장치라는 개념이 지닌 함의는 여기서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제도적 층위보다 훨씬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체화의 기제를 설명해주며,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비판적 전선을 정치하게 확장시켜준다”(p. 255). 강동호가 푸코에게서 빌려온 개념인 ‘장치’는 유동적 흐름들 속에 있는 인간, 사물, 제도, 지식 등의 조합/배치다. 강동호의 말처럼 ‘장치’에 대한 고려는 비평의 시야를 확장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장르’를 제도에 의해 식별된 예술의 구획(소설, 시, 조각, 대중음악 등)이나 고정된 문법의 짜임(스릴러, 공포, 로맨스 등)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연결 접속하는 미시적 장치라고 보면 오늘날 문화의 역동적인 변화를 사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2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기호와 기계―기계적 예속 기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신병현·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7, pp. 31-79 참조.

3 강동호·서효인·천희란·최지인·황인찬, 「우리에게 더 많은 미래를―한국 문학장의 현재와 미래」, 『문학과사회』 2020년 봄호, pp. 117-118.

4 예술의 역량에 대한 이 두 가지 ‘점유’는 서로 대치되기도 하고 길항하기도 한다. 전자의 형상이 문학 제도에 의해 중요한 작가의 자격을 부여받은 ‘유망한 작가’라면, 후자의 형상은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인플루언서’다.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날 인플루언서가 작가가 되고 작가가 인플루언서가 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5 『감성의 분할』, p. 30.

3. 문학적 가속주의

그런데 ‘장치’에 대한 고려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전적 비판과는 조금 다른 문제, 즉 우리가 장치라는 유동적이면서도 촘촘한 그물망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는가(혹은 장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불러온다. 이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의 심층을 관통하는 고민일 것이다. 들뢰즈가 푸코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했던 고민, 즉 “장치라는 그물망에 의해 배치(포섭/배제)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시공간의 변화 불가능성을 위한 고민”(p. 136)은 강동호 자신의 고민이고, ‘지금 여기’의 고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가동하는 예속의 논리에 대한 강동호의 논의는 양선형에 대한 평론에서 특히 멀리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불능의 시뮬라크르―양선형 소설의 정치적 프로토콜」은 이 책에서 가장 긴장감 높은 대목 중 하나다. 강동호는 양선형의 글쓰기-기계가 “자본주의라는 기계 체계”(p. 404)를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거기서 이탈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체계를 답습하고, 모방하고, 그것을 구축하는 원리를 내장”(p. 404)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두 기계는 형식적으로 닮아있다. 조금 덧붙이자면, 주체의 사라짐, 식별 가능한 의미의 점진적 박탈, 실물과 절연된 기호들의 가속화된 교환 등은 동시대의 글쓰기-기계와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기계가 공유하는 특징일 것이다.

강동호가 “불능의 외부”를 말하는 것 역시 이 지점이다. 즉 “불능의 외부”는 단지 재현에서 벗어나기를 도모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탈영토화/재영토화 경향의 중단에 대한 사유를 도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양선형의 글쓰기는] 불능이 가시화되는 어떤 영역, 자본주의 기계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변증법이 작동하지 않는 장소, 다시 말해 단순한 바깥과는 구분되는 의미의 ‘외부’라는 영역을 교환 내부에서 발견하려는 의식적 소산이다. [……] 사실을 훼손한다는 것, 사실을 능가한다는 것은 바깥으로의 도피나 탈출이 아니며, ‘무용성의 유용성’이라는 변증법적 환상에 의존하는 행위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유용한 것들의 극단적 사용을 통해 발견되는 새로운 무용성, 즉 불능을 가시화한다. (p. 404.)

강동호는 문학이 현실을 자유롭게 초월해 있다는 문학주의적 믿음이나 ‘무용한 것의 유용성’을 말하는 낡은 변증법적 논리를 기각하고, 다른 종류의 ‘외부’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전개한다. 즉 체제의 한가운데에서, 자본주의의 논리를 모방하고, “그것의 가속화에 과잉 가담”(p. 404)하면서 만나게 되는 역설적인 출구를 상상한다. 이것은 기계의 작동을 더욱 가속함으로써 ‘기계적 예속’을 중지시키는 전략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기호들의 교환을 극도의 비효율성 속에서 과잉 반복함으로써 교환을 무용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소설’ 혹은 ‘글쓰기’는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념의 지위로 격상된다. “이것은 욕망을 위한 욕망이라는 자본주의 기계의 목적적 프로토콜과 유사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도착적으로 뒤집어버린 것이다”(p. 423). 자본주의 논리를 도착적으로 뒤집어 밀어붙이는 이 전략에 ‘문학적 가속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양선형에 대한 평론은 이 책에서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강동호는 자신의 이론적 전제 혹은 방법론에 따라 필연적으로 ‘문학적 가속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강동호는 비판적 사유가 전통적으로 그래왔듯이 초월적 규정, 형이상학적 정당화, 낭만적 이상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확인 가능한 장치, 권력, 담론에 대한 면밀하고 실제적인 비판이다. 그런데 이 분석적 비판은 앞서 말했듯 비판의 끝없는 상대주의적 순환에 갇혀 공회전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저자는 형이상학적·초월적 외부가 아닌 ‘유물론적 외부’를 찾으려 하고, 그러한 충동에 따라 기성의 자본주의적 논리를 더욱 밀어붙이면서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문학적 가속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다. 즉 이 책에서 나타나는 엄밀한 비판적 입장과 ‘문학적 가속주의’라는 급진적 입장은 필연적인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비판이론의 엄격함은 종종 우리에게 자본주의 ‘바깥’을 전제하는 것은 순진한 일이고, 오히려 자본주의를 살찌우는 양분을 제공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가르쳐왔다. 따라서 가능한 전략은 이미 주어진 예속의 조건을 면밀하게 파악해 저항의 조건으로 전유하는 것뿐이다. ‘문학적 가속주의’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결과인 듯하다.

그러나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정말로 인류를 멸종의 길로 몰고 가는 듯한 오늘날,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또 가능할 수 있다. 어떤 동시대 사상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이대로 지속되면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야만 상태에서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닥쳐올 여러 문제(기후재난, 식량난, 에너지 고갈, 전쟁 등)에 대처하려면 ‘탈성장 코뮤니즘’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6 그런 다급한 전언이 전혀 과장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변화가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적으로 ‘세계화된 세계’의 균열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문학과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세계의 변화 속에서 문학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문학적 가속주의라고 불릴 만한 입장이 있다면, 그에 대립하는 다른 전략도 상상해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포함하여, 매우 긴급하고 논쟁적인 문제들이 ‘문학적 가속주의’라는 입장을 둘러싸고 촘촘하게 모여드는 것 같다. 문학적 가속주의가 어떠한 함의와 문제들을 갖는지 자세히 논의할 기회가 있기를 희망한다.

‘문학적 가속주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차치하더라도, “내부의 외부성”(p. 422)을 찾으려는 강동호의 문제의식 자체에는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비평에 필요한 것은 현실을 초월해 자유롭게 부유하거나 판단의 권위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고, 형이상학적·낭만적 전제로부터 행동이나 생각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현행화되지 못한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전개하는 데 있을 테니 말이다. 동시에 ‘내부의 외부’가 내부보다 훨씬 큰 외계가 있다는 사실의 작은 증거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지만, 1990~2010년대 문학의 역사화 문제, ‘문학적 가속주의’의 개념화와 평가, ‘진정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 비평의 정치성, “불능의 외부” 등이 『지나간 시간의 광장』 이후의 연구들, 혹은 뒤따르는 논쟁들의 화두로 오래 남게 될 듯하다. 강동호는 문학을 “서로 다른 시간에 걸쳐 형성된 변화의 계기들 사이의 연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들의 광장”(p. 25)이라고 말한다.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역시 바로 그러한 광장인 것처럼 보인다. 이 ‘광장’으로 더 많은 이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6 사이토 고헤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참조. 재미있게도 고헤이는 가속주의를 ‘현실도피’라고 비난하고 있다(같은 책 pp. 207~2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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