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김복희, 김선오의 사례
*『쓺』 2025 상반기
미세하게 수정하여 옮김
집은 결코 그렇게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모리스 블랑쇼1)
건물이 죽어간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에 건물은 살아 있었다
이제 내가 안다
―김복희, 「느린 자살」2)
제가 영원히 모르겠나이다
―황유원, 「알 수 없는 아티스트Unknown Artist」3)
1)『카프카에서 카프카로』, 이달승 옮김, 2013, 그린비, p. 108.
2)『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사, 2018.
3)『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현대문학, 2019.
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과학적 정확성에 대하여」(1946)라는 짧은 소설은 아주 이상한 지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어느 대륙에 강대한 제국이 있었다. 제국 사람들이 온통 골몰한 국가적 과업은 지도 만들기였고,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데 엄청난 자원과 인력이 투여되었다. 수 세대에 걸친 노고 끝에 드디어 완벽한 지도가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딱 제국의 크기만 한 제국의 지도였다.
지도가 완성되자 제국 사람들은 지도 만들기의 과업에서 놓여났다. 할 일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지성과 재능은 점차 완성된 지도를 반성하고 의심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지도는 너무 정확하고, 크고, 위대한 나머지 아무 쓸모가 없었다. 후손들은 그 거추장스러운 사물을 사막에 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뒤틀리고 우거진 지도는 사막의 부랑자들과 동물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처로 쓰이고 있다.

이 짧은 이야기는 일견 지식(과학적 정확성)을 향한 집착을 비꼬는 듯 읽힌다. 결국, 가장 정확한 지도는 가장 쓸모없는 지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읽어볼 수도 있다. 지도의 완성은 제국에 대한 재귀적 인식,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지도가 완성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지도를 완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지도가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물의 성격과 처분을 고민하게 되었다. 지도가 완성되어야 그것을 버리고 해체하고 전혀 다른 용도로 쓰는 등의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의 완성은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데, 지도 만들기에 집중한 선조와 그 기획을 반성하는 후대로 세대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이야기 속 지도는 쓸모가 없지 않다. 그것은 만든 이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활용되어 집 없는 많은 존재에게 거처와 피난처를 마련해준다. 지도가 죽는다, 그리고 집이 태어난다.
자연과 문화의 어느 영역에서나 선형적인 진보는 허구이겠지만, 특히 문학이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이후에 쓰인 시가 이전에 쓰인 시보다 더 낫거나 앞선 것은 아니고, 과거에 쓰인 시가 지금 쓰이는 시보다 꼭 못하거나 뒤처진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기의 시가 스스로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경우가 있고, 덕분에 시의 역사에 나름의 주기와 마디를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지도가 완성되는 순간처럼, 어느 시기의 시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완료되었고, 나는 끝났다. 또한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시들을 연결해보면 한 시기의 시와 이후의 시를 나누는 능선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나의 주장은, 한국 시의 역사에서 2010년대 중후반이 바로 그러한 결정적 순간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2010년대 시에서 두드러지는 재귀성과 반성성, 세련됨, 경제성은 2010년대가 성숙과 완료의 시기임을 표시한다. 괄목할만한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의 2010년대는 창안의 시대가 아니었다. 창조적인 시기의 예술에는 유치한 불순물들, 과도한 표현들, 선언들, 실험들, 감각적 찌꺼기들이 우글거리기 마련이다. 2010년대는 전반적으로 그러한 과도함이 소거되고 절약된 시기였다. 창안의 시기라기보다는 반성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약과 한계 속에서 많은 엄밀한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지난 10년 한국 시의 일면을 돌아보기 위해 세 권의 시집을 살펴보려 한다.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 김선오의『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이다.
지난 10년의 시를 돌아보기 위해 세 시인을 선택한 것은 단지 이들이 독특한 문체와 주요한 경향을 보여준 시인들이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물론 많은 비평적 주목을 받은 시인들이지만,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니다. 열거한 시집들에는 공통으로 어떤 건축의 불가능성, 어떤 건축물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다. 동시에 깨지거나 녹아내린 건물의 잔해를 어떻게 활용할지, 나아가 건축의 불가능성을 어떻게 타개할지 시험하는 나름의 방법이 제시된다. 그래서 세 시인의 시들을 통해 어떤 건축이 불가능해졌고 새롭게 가능해지는지를 점쳐볼 수 있다.
1. 두 번의 실망: 황인찬, 「건축」 외
1.1 “건축이 깨지는 순간”
황인찬의 시들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운 시 중 하나인 「건축」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기하학에 대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건축」 부분(이하 동일)
황인찬의 시가 거의 언제나 그렇듯, 이 시도 지난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단지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만을 의뭉스럽게 암시할 뿐이다. 사연 있어 보이는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황인찬의 시에서 레퍼토리 같은 것이다. 이 시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어떤 기하학≒마음이 죽는 일≒건축이 깨지는 순간’이라는 묘한 공식이다. 세 항은 어떤 관계이길래 나란히 말해지는가?
“어떤 기하학에 대해”: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에 거주하는 방식은 시적으로 헤아려질 수 있을 뿐 기하학으로 측량될 수 없다.4) 기하학은 거주의 형식에 대한 공허한 앎을 표상할 뿐이다. 황인찬의 「건축」은 이러한 횔덜린-하이데거식의 시적 공식을 비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적 거주’는 불가능하고 “어떤 기하학”만 가능한 세상이다. 꿀벌은 사라지고 텅 빈 벌집만이 남은 것처럼, 거주의 공허하고 규칙적인 형식만이 남아 있는 세상.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세상에 대한 기하학적 파악은, 주체가 돌이킬 수 없는 실망을 겪는 것과 동시적이다. 첫사랑의 정열이든 예술적 열정이든 정치적 신념이든, 세상에 충만한 의미와 동기를 부여했던 마음이 부서진 이후에야 주체는 세상을 측량 가능한 텅 빈 도형들의 연속으로 보게 될 것이다.
다만 나는 여름에 시작된 마음이 여름과 함께 끝났을 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마음은 뜨거웠던 만큼 빠르게 식는다. 한여름날의 사랑은 금세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핵심은 마음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후에 오는 깨달음, 즉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가 더 중요하다. 사랑이 끝나면 무의미한 생활의 시간이 남는데, 이 시간은 이별 직후의 격하고 낭만적인 통증보다 훨씬 길고 지난하다. 말들의 피상적인 반복·연쇄를 가능케 하는 기하학적 패턴은 이러한 시간을 배경으로 출현한다.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전통적인 서정시는 모든 현상, 사물, 풍경을 시적 자아의 ‘마음’으로 회수한다. 즉 주체의 마음은 세계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의미의 중심이고, 시적 건축의 중추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더라도, 임을 향한 마음이 끝나지 않는 한 이 통일성은 유지된다. 반대로 말해서, 마음이 죽었다면 서정적인 건축술은 불가능해진다―중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깨진 건축만이 가능할 것이다.
4) 마르틴 하이데거,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강연과 논문』,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pp 254-56 참조.
1-2. 실패하는 탈주술화
하지만 마음이 죽고, 냉정하면서도 공허한 인식이 출현하는 구도 자체는 새롭거나 흥미롭지 않다. 서정적인 건축술에 대한 서정적인 부정도 마찬가지다. 황인찬의 시는 이러한 실망―혹은 ‘탈주술화’―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황인찬의 시에서, 시적 주체가 순진한 열정에서 벗어나면서 다소 씁쓸한 앎(기하학)을 획득하는 것 자체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새롭지 않게 진술된다. 그러고 나서 기하학은 다시 한번 꿈에 의해, 어떤 끈질긴 주술성에 의해, 희극적 어리석음에 의해 비틀어지고 훼손된다.
분신사바가 끝나고
우리는 집으로 갔다
잘 모르는 선생님도 함께다
비가 올 때는 조심하세요 시야가 좁아서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쉬우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
이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이해한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
우리는 구분할 수 있고
왜 새가 날아오를까 왜 갑자기 선반에 있던 물건이 떨어질까
대답할 수도 있다
밖에서는 비가 자꾸 내린다
잘 모르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채널링」 부분
비가 와서 시야가 좁아지는 상투적인 복선은 (적절하게도) 다음 행에서 즉시 취소된다. 앎은 비가 내리거나 새가 날아오르거나 갑자기 물건이 떨어지는 등의 일에서 서정적 의미부여나 신비화의 여지를 없앤다. 심지어 이제 주체는 옳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진선미’―을 분별할 줄도 안다. 즉 그는 “어떤 기하학”을 확보한 주체로 자신을 소개한다. 거의 모든 것이 알려졌기에, 이제 새로운 것도, 놀랄 일도 없다. 이처럼 이 시의 주체는 ‘계몽된 근대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술(분신사바)이 시시한 놀이의 형식으로나마 유지되고 있고, 시의 마지막에는 마치 주술에 의해 소환된 귀신인 듯 “잘 모르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과학적 계몽이 세계를 “탈주술화(disenchantment)”했다는 것은 옛 학자의 순진한 진단이었다.5) 주체가 자신의 앎을 확언할 때조차 주술성/현혹(enchantment)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끈질긴 주술성은 앎 자체를 더 깊고 근본적인 어리석음에 말려들게 한다. 그토록 많은 것을 ‘안다’고 말하는 주체는, 정작 자기 앞에 있는 선생님의 정체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황인찬의 시에서 거듭 읽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의 레퍼토리이다. ‘나는 이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계속 그것을 합니다. 나는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습니다.’6)
5) 막스 베버,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전성우 옮김, 나남, 2002.
6) 이러한 태도를 ‘냉소적 이성’(페터 슬로터다이크)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손쉬운 해석을 하기보다는 안드레아 롱 추의 “실망의 로맨스”와 연결지어보려 했다. 롱 추의 통찰은 냉소적 이성처럼 ‘이성의 모순’에 의한 설명보다 욕망이나 정서에 의한 설명을 제공한다.
1-3. “실망의 로맨스”
이제 황인찬의 이러한 시적 태도를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책의 중요한 통찰과 연결지어보고 싶다. 미국의 트랜스젠더 저술가 안드레아 롱 추의 『피메일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이년쯤 전에 이 책을 친구에게 추천받아 읽게 되었는데, 책의 말미에 나오는 다음 문단이 황인찬의 시를 강하게 환기했다.
이것을 실망의 로맨스라 불러보기로 하자. 당신은 무언가를 원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어떤 대상을 찾아냈다. 특정한 사람일 수도, 정치학일 수도, 예술 형식일 수도, 딱 맞는 블라우스일 수도 있다. 당신은 그 대상에 애착을 가지고서 따라다니고 들고 다니고 TV에서 본다. 어느 날에는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어느 날에는 그렇지 않다. 어느덧 어쩌면 그 대상이 결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덮쳐온다. 하지만 진짜 실망스러운 일은 이것이 아니다. 그다음 국면이야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실망스럽다. 당신은 그 대상을 간직한다. 계속 따라다니고 서랍에 넣어두고 물을 주고 말을 붙인다. 그것은 여전히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도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는 것. 잘 알게 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 이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실망이 그 모든 욕망을 구조 짓고 가능케 한다.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원한다면, 결국은 아무것도 원하지 못할 것이다.7)
여기서 롱 추가 말하는 실망은 트랜스젠더 여성[male to female]으로서의 경험과 불가분하다. 롱 추는 “실망의 로맨스”를 말하기까지 대단히 논쟁적인 화두들을 거치는데, 그것들을 생략하고 이 대목만 발췌하여 시와 연결짓는 것은 병렬독서의 나쁜 버릇(‘탈맥락화’)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롱 추가 들고 있는 다양한 예들―사람, 정치학, 예술 형식, 블라우스―은 실망과 관련한 논의를 저자의 논점보다 넓게 확장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위의 구절에 나타난 롱 추의 가슴 아픈 통찰은 실망이 반드시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정도로 근본적이라면, 실망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 첫 번째 실망은 우리가 호들갑스럽게 기대하고 소망하고 원했던 무언가가 환상이었음을, 실상은 별 것 아니었음을, 구원을 주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그러나 더 중요한 두 번째 실망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시는 대단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은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실재하지 않다는 것을,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돌보고, 그것을 한다. 이것이 황인찬의 시가 ‘두 번의 실망’을 그리는 희극적인 방식이다. ‘제 마음이 죽었는데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죽었다’는 진술은 소박한 실망, 첫 번째 실망을 나타낸다. 반면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라는 진술은 근본적인 실망, 두 번째 실망을 나타낸다. 왜냐면, 정말로 실망스러운 것은, 무언가 끝장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끝장나버렸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실망은 분명히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이 상처는 여전히 낭만적으로 채색될 수 있고 다른 대체물로 봉합될 수도 있다. 두 번째 실망은 마침내 상처 자체를 진부하고 평범한 것으로 만들고, 이미 한 번 뒤집힌 세계를 다시 반 바퀴 돌려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실망 이전에는 믿음, 거창한 기치와 보편적인 가치, 대의와 확신, 애착과 열정이 있다. 실망 이후에는 냉소, 과장된 상처, 불평과 자기연민, 방황과 무기력, 벗어나려는 충동과 폭력적인 반동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실망을 통해서만 주체는 실망스러운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황인찬의 시에서 ‘이중 실망’ 혹은 ‘두 번째 실망’을 공식화할 수 있다는 것은 시사(詩史)적인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많은 평자가 말한 대로, 한국 시의 1990년대가 대의(가령 민중을 대변한다는 대의)를 상실한 시기, 정치적 결집력을 잃어버린 시기, 내면에 침잠한 시기, 내 표현대로 하자면 첫 번째 실망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 중반이 두 번째 실망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까?8) 1990년대와 2010년대 시를 이런 방식으로 대질시킨 결과를 지금 자세히 논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비교가 많은 흥미로운 논의를 가능케 해줄 것이다.
7) 안드레아 롱 추, 『피메일스』, 위즈덤하우스, 2023, pp 176-77. 강조는 인용자.
8) 이것은 물론 한국 시의 역사 전체에서 1990년대가 최초로 ‘실망’을 드러낸 시기라는 뜻은 아니다. 1990년대와 2010년대가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위치 지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 공든 탑이 무너지다: 김복희, 「느린 자살」 외
2-1. 높이의 포기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은 거듭 읽어도 놀라운 시집이다.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정념과 인식 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힘겨루기를 한다. 자신이 취소한 것을 재개하고, 추락시킨 것을 날아오르게 하며, 또한 날아가는 것을 봉쇄한다. 이 충돌과 힘겨루기 때문에, 언어는 시집의 뒤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진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시집의 앞쪽에 실린 시들이 구상적이라면 뒤쪽에 실린 시들은 추상화에 가깝다.
이 글에서는 시집의 전반부에 실린 시들만을 언급할 것이다. 먼저 「느린 자살」을 읽어보자. 시는 건물의 무너져내림을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 건물은 더 이상 우편물을 받지 않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벽돌이라고, 유리라고, 나무 창틀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을 만든 장인들, 그 모든 것을 설계한 자, 대금을 지불한 자, 그들은 건물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건물이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느린 자살」 부분(이하 동일)
이 시의 건물이 낭독이나 책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건물을 시 혹은 문학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9) 화자는 건물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안다. 애초에 몰랐다면 슬프거나 아쉬울 일도 없겠지만, 건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건물의 무너짐을 어찌 단순하게 반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화자는 건물이 수많은 이의 노고로 지어졌다는 것 또한 안다. 건물을 짓는 데 일조했던 이들 모두 “건물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예술가뿐만 아니라 독자,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 등등이 기꺼이 모두 시라는 건물의 일부가 된 것이다. 블랑쇼의 말처럼, 집은 결코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건물은 죽어 마땅하다. 그것은 너무 높아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너무 빛나서 많은 고통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건물은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었을까.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건물이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건물이 꾸는 꿈속에
살아 있었다 건물이 종종 상상하는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아서 건물의 애를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건물이 가장 아끼지만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 인물은 누구일까? 심지어 건물을 애태우게 하는 인물이란. 아마도 천재일 것이다. 건물은 천재를 편애했다. 그 높이와 아름다움이 결정적으로 천재에 의존한 까닭이다. 건물을 높이는 것은 천재의 몫이었다(그리고 아마 다음 시대의 천재가 나올 때까지 건물을 유지보수 하는 것은 교양의 몫이었다).
높이는 높낮이의 분별을 부른다. 높은 것이 만들어지면 낮은 곳이 생기고, 빛나는 곳이 있으면 필시 그늘도 있다. 건물은 많은 고통을, 비참함을, 어둠을 낳았다.
실로
한낮 건물 앞에서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건물의 정수리에서 건물의 손바닥으로 뛰어내린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건물도 악몽을 꾸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
왼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오른쪽을 어둡게 하는 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 동시에 내리쬐는 빛을 보려고
느리게 죽어갔을 것이다
건물 앞에서 죽는 사람이 있었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건물은 자신을 의심한다. ‘내가 뭐라고 나에게 목숨까지 건단 말인가?’ 이 건물의 슬프고 간악한 특성은, 자신의 빛나는 높이가 야기하는 부작용을 건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이 빛나는 만큼 다른 쪽은 어둠에 잠기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건물은 높이 자체를 포기한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물

높이를 포기한 건물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던 사람들은 건물 주변에 비극적인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무릎 높이의 건물에서 죽겠다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여기에 무서운 반비례 공식이, 이 시의 섬뜩한 통찰이 있다. 건물이 살아 있을 때는 그 건물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 반대로 건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면 건물 자체가 죽게 된다. 그리고 건물이 죽었다면, 이제 그것에 목숨을 걸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 시를 거듭해서 읽으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고통스러운 정념과 통찰이 느껴지는 것 같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을 보자.
건물이 죽어간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에 건물은 살아 있었다
이제 내가 안다
이렇게 절제된 문체 속에 어떤 애환이, 심지어 거의 악에 받친 분노가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내 감정을 투사해서 시를 과장되게 읽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화자가 건물의 죽음을 반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이 시의 주체는 높이의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화자가 건물의 죽음을 “안다”고 말하기 전에 실제로 건물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화자의 진술을 유추해보면, 사람들이 건물의 죽음을 모른다면 건물은 계속 연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죽음은 소박한 의미의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안다”는 화자의 진술이 죽음을 사실로 못 박는 것이다.
① 앎의 소박한 모델: 사실→인식의 발생(건물이 죽었다→‘나’는 그것이 죽었음을 안다)
② 앎의 수행적 모델: 진술→사실의 구성(‘나’는 건물이 죽었음을 “안다”고 말한다→비로소 건물은 죽은 것이 된다)
이 시에서 사실과 진술의 관계는 위의 두 모델 중 후자에 속한다. 진술과 사실은 재귀적으로 서로를 참조하며 강화한다: 건물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건물은 죽는다.
9) “건물의 앞마당에서 아름다운 책이 불타게 두었다/한 글자 한 글자 낱낱이 암송하거나 하지 않으면서”(같은 시).
2-2. 자살의 의미: 두 죽음의 일치
자살이라는 말은 중립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죽음’보다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최근까지 뉴스나 신문에서는 자살을 ‘극단적 선택’ 따위로 바꿔 말하곤 했는데, 마치 그 말이 ‘수행적으로’ 우리를 해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굳이 시의 제목을 ‘느린 죽음’이 아니라 “느린 자살”로 했을까?
상징의 숲에 사는 동물인 인간에게는 두 번의 죽음이 있다. 그것을 ‘외적 죽음’과 ‘내적 죽음’이라고 해보자. 의사의 사망 판정이 확정하는 것은 외적 죽음이다. 그 죽음은 심장이나 뇌 기능의 정지로 확인될 수 있다. 반면 내적 죽음은 살아갈 의미나 의지, 살아 있다는 느낌의 상실처럼 주관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람은 내적으로 죽었는데 외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고, 내적으로 살아 있는데 외적으로 죽을 수도 있다. 가령 앞서 살펴본 황인찬의 화자는, 내적으로 죽었지만 외적으로는 살아 있는 상태였다(“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자살은 거의 언제나 불일치하는 두 죽음을 일치시키려는 시도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내적으로 죽을 때 외적으로도 죽으려는 사람이다. 자살=내적 죽음+외적 죽음.
「느린 자살」에서 자살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건물이므로, 이 공식을 건물에 적용해보자.
건물의 내적 죽음: 어느 시점에 건물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외적 죽음: 이제 건물을 우러러보는 사람도 없고, 그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없다.
화자의 “안다”는 진술이 이 두 죽음을 하나로 묶는다.
수많은 현대시에서 버릇처럼 되풀이되어온 시의 죽음은 내적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죽음은 비극적이다. 말하자면 존경받는 추락, 드높은 추락이었다. 시가 외적으로 살아 있었기에 내적 죽음을 거듭 상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시가 외적으로 죽어가더라도―팔리지 않고 무관심이나 무시 속에 처하더라도―발명과 창안으로 충만하다면 내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다. 2010년대 시에서 말해진 죽음은 내적 죽음이나 외적 죽음이 아니라 두 죽음의 일치다. 시는 자신의 소진을 반성적으로 인식했는데, 동시에 외적으로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2010년대의 시에 그려진 죽음은 종종 희극적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존경받지 않는 추락이었다. 이중적인 실망의 공식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나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2-3. 타개책: 비약도 자살도 아닌 “새 인간”의 길
한국 시의 2010년대는 반성과 소거의 시기였고, 시의 반성은 자기 자신을 취소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10) 「느린 자살」은 분명한 하나의 사례이다.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마 2010년대 후반부터, 사뭇 다른 시들이 쏟아져 왔다. 강렬한 표현 충동, 두꺼운 시집들, 자기도취, 말뭉치(corpus), 선언적인 문체, 장르적 혼종들이 돌아왔다.11) 일종의 ‘양적완화’가 일어났다. 아마도 몇 년 전 한국 시에서, 어떤 최소주의와 최대주의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교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정적인 교차점에 김복희의 「새 인간」을 놓을 수 있다. 말하자면, 사후적이고 결과적인 논평이지만, 「새 인간」이 이후의 어떤 시적 경향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새는 현대시에서 엄청난 비중을 가진 동물이다. 시가 새를 그토록 애호한 이유는, 무엇보다 새가 높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시가 사랑한 새는 보이지 않게 날고 있든, 안쓰럽게 추락했든, 인간사를 날카롭게 내려다보든 간에 높이와 관련된 존재였다. 보들레르의 시에서는 명백하게 그랬고, 김혜순의 시에서도 종종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야 느낀다/새가 날지 않으면 세상이 거울처럼 납작해진다는 것”(김혜순, 「안새와 밖새」12)). 새가 날기 때문에 세상에 높이와 깊이가 생긴다. 세상을 납작한 거울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시는 새처럼 높이 비상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의 새는 잠들어서도 날아간다는 것”(같은 시).
그런데 우리는 앞서「느린 자살」을 읽으면서 시가 높이를 포기했고 더 이상 높지 않다는 인식을 보았다. 「새 인간」의 놀라운 타개책은 이러한 인식과 연동되어 있다. 「새 인간」은 높이 비상하지 않으면서, 지상에 밀착한 산문의 수평적 펼침을 통해 새와 만남을 재개했다.13) 화자는 새에게 닿기 위해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을 부지런히 걸어 동묘 앞 시장으로 간다. 지금은 시인이 높이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시라는 건물 자체가 높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새를 만나려면, 새가 내려와 줘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새 인간”은 ‘나’를 위해 지상에 살기로 한 새, 높이를 양보한 새다. “이 조끼 가득히 날 수 있지만 나를 위해서 날지 않기로 마음먹고 죽고 싶지만 죽지 않기로 결심한 나의 새 인간”(김복희, 「새 인간」).
날아가지 않고 내 옆에 있어 준다니, ‘나’의 관점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새 인간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그는 날지 못하는 지상의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높이를 단념한다. 사랑은 새 인간에게 살 이유를 주지만, 동시에 날아가는 일을 억제하기를 요구한다. 살게 하는 동시에 구속하는 것―이것이 새 인간이 겪는 사랑의 양가성이고, 그가 날 줄 모르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이다. 「새 인간」의 산문적 수평성은 「느린 자살」의 절망적인 수직성을 해소한다. 이 시는 가로막힌 상승의 충동을 보살핌의 다정한 구속 속으로 구부렸던 것 같다.14) 하지만 낮 동안 내 옆에 머무르던 새 인간은 내가 잠들었을 때는 다시 날아오를 채비를 한다. “내가 잠든 동안에만 날개를 펼쳐 보이는”. 김혜순의 시에서 “나의 새”는 내가 잠들었을 때도 날아가는 반면, 김복희의 시에서 “나의 새 인간”은 내가 잠들었을 때만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아마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화자가 ‘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서, 깨어 있는 동안은 날아오름을 의식적으로 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날아오름에의 열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의 꿈속에, 무의식에 물러난 채 남아 있다.
10)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 또 한 명의 시인으로 송승언을 꼽을 수 있다.
11)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시인들로 박지일, 신이인, 조시현 등을 꼽을 수 있다.
12) 『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19.
13) 따라서 이 시는 언어의 폭을 활달하게 넓히면서 겨드랑이 땀 냄새처럼 시시콜콜하고 구체적인 지상(생활세계)의 요소를 수용한다.
14) 혹은 반대로 「느린 자살」이 「새 인간」의 배면에 있는 회한이나 좌절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시집상의 순서는 「새 인간」이 「느린 자살」보다 먼저다.
3. 남겨진 시인의 손: 김선오, 「부드러운 반복」 외
3-1. 유령 건축술
아마도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잇는 기념비적인 시로 평가받아야 할 김언의 「유령-되기」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중이고, 얼굴을 잃어가는 중이며 익명의 군중에 동화되는 중이다. 「유령-되기」의 화자는 강조해서 말한다.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김언, 「유령-되기」15)).
그런데 김언의 「유령-되기」와 달리 김선오의 시에 나오는 유령들은 이미 유령인 것이 퍽 자연스러운 유령들이다. 그러니까 새삼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해서 말할 필요도, 회한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인간의 눈에 유령은 그저 투명하거나 희미해 보일 뿐이지만, 유령들 자신은 서로의 미묘한 빛깔 차이를, 변화의 스펙트럼을 알아본다(김선오, 「농담과 명령」).16)
김선오의 유령들이 신선하다면, 죽어가는 느린 과정을 겪기보다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김선오의 시는 폐허를 “세트장”으로 취한다. 유령들은 죽은 세계를 거주지로, 놀이터로, 학교로 취한다. 이미 죽은 존재들에게는 죽은 세계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버려진 지도를 집으로 전환하는 존재들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사막의 부랑자, 동물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세트장은 때로는 “폐교”(「세트장」)이고 때로는 “폐장한 놀이공원”(「범세계종」)이며 때로는 “연쇄되는 무덤”(「풀의 밀폐」)이다. 시가 전개되는 배경인 이 세트장을 깨져버린, 무너져 내린, 시효가 끝난 ‘현대시’의 폐허로 읽어도 어색할 것은 없다.
김선오의 시는 시의 죽음 이후를 조건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전의 시와 날카롭게 단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죽은 것을 세트장 속으로, 유령의 모습으로 불러들여 부드럽게 반복한다는 의미에서다. 김선오의 시에서 낱말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버려진 지도에서 오려 붙인 기호들이고, 김선오의 시는 그 기호들로 구성된 회전하는 세트들이다.17) 이것은 시의 한 시기가 마감되고 완료된 이후에 가능해지는 독특한 건축술, 말하자면 ‘유령적 건축술’이다.
15) 김언, 『거인』, 문예중앙, 2011(개정판).
16) 황사랑이 김선오 시의 유령성에 주목한 바 있다. 황사랑,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문장웹진》, 2024년 3월호.
17) 김선오의 시를 최다영이 말한 ‘가속류 시’와 연결지어보면 흥미로울 듯하다. 최다영에 따르면 가속류 시는 어떤 작법을 구축한 후 기계적 효율성에 따라 언어를 복제·반복하는 시이다(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문학동네』 2024 여름호 참조). 하지만 이 글에서 분석하는 것처럼, 기호의 육체 없는 연쇄와 반복은 ‘시인의 손’이라는 잔여를, 혹은 공백을 남긴다. 따라서 김선오의 시는 가속류 시로 읽히는 특징이 있으면서도, 또한 그런 시의 조건으로 포섭되지 않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3-2. 손의 위치에 대한 물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선오의 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유령적 세계를 맴돌고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유령적 세계로의 대대적인 이전은 어떤 날카로운 질문을 세계 뒤편에 남긴다. 바로 ‘시인의 손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시를 짓고 건물을 짓는 시인의 손에 대한 물음은 건축이라는 주제에 비추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이 물음은 특정한 건축물/건축술이 아니라 시적 건축 자체의 조건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적기 위해 한 획을 그었다. 더는 글자를 쓰지 않고 손을 멈추었다. 종이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서랍을 열자 선은 녹슬어 있었다. 선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텐데. 왜 이토록 많은 세월을 지나온 것처럼 보이는 거지.
[……]
선 위로 수없이 많은 선을 긋고 났을 때 종이 위에 학교가 지어져 있었다. 선들이 학교를 이루고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곳의 선생이 되었다. 선으로 된 학생들이 나를 찾아왔다.
―「부드러운 반복」 부분(이하 동일)
처음 작업을 시작한 것은 “내 이름을 적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심심풀이였을 수도 있다. 의아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다음이다. 내가 긋고 잊어버렸던 선들이 그 자체로 살아 활동하며, 어떤 세월을 건너온 듯 보인다. 작업물이 ‘나’와는 별개의 생명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선 긋기를 훨씬 진지한 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선들이 하나의 건축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수없이 많은 선을” 그었다. 종이 속 학교를 지은 것은 ‘나’의 손이다. 그러나 곧이어 “얼떨결에 나는 그곳의 선생이 되었다.” 모르는 새 자신이 지은 세계에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수업을 했다. 나는 그에게 삼차원을 가르쳤다. 공이나 나무, 심장처럼 부피가 있는 것들, 그 속에 담기는 사랑이나 감기, 졸음 같은 것도 가르쳤다. 선으로 된 학생은 몸의 이곳저곳이 끊어질 듯했지만 언제나 열심이었다. 총명한 선이었다.
그는 종이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방법은 없었다.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선을 데리고 종이 밖으로 나갈 수는 없을까.
‘나’는 종이 속에 현실을 불어넣고 싶은 듯이 “선으로 된 학생”에게 삼차원을, 그 속에 담기는 마음을 가르친다. 하지만 어쩌면 너무 높은 차원을 가르친 것일 텐데, “선으로 된 학생”은 이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자 때문에 종이 밖 삼차원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종이 밖 세계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시 속 세계와 바깥 세계는 통행할 수 없이 막혀 있는 것일까. 시와 현실은 서로를 배울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차원을 나눈 시인의 손은 차원들을 잇는 유일한 통로일 것이다. 하지만 시를/학교를 지은 자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유령적 세상에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러면서 작업하는/노동하는 손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어느 날 선으로 된 학생이 쓰러졌다. 그는 숱한 점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점을 주워 담으며 울었다. 학교가 새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
울다 보니 나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흩날리는 지우개 가루 속을 걷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거대한 지우개의 형상이 나를 가르쳤다. 주먹 속을 보라고. 그러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고.
그러나 나의 주먹은 종이 밖에서 무언가 쉴 새 없이 적어대고 있었다.
팔 끝이 텅 빈 채로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마도 무자비한 지우개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은 “숱한 점으로 찢어지고” 학교는 “새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물론 학교를 지은 것이 나의 손이었던 것처럼, 그것을 지우고 해체해버린 것도 나의 손일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에 ‘나’는 작업하는/노동하는 손을 떠나 자신이 만든 종이 속 세상에 들어갔고, 그 세상의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나’와 ‘나의 손’이 따로 놀게 된 것이다. ‘나’가 슬퍼하든 말든, 늙어가든 말든 종이 밖의 주먹은 “쉴 새 없이” 작업 중이다. 짓고 부수고,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김선오의 시에서 종종 손(때로는 손바닥, 때로는 주먹)은 액자의 뒤편에, 무덤 밖에, 종이 밖에, 꿈 밖에, 단춧구멍 밖에, 세계의 배후에, 시의 마지막에 남겨져 있다.18) 판도라의 희망처럼. 이것은 인간적 세계가 남긴 유령적 잔여가 아니라, 반대로 유령적 세계가 남긴 인간적 잔여로 보인다.
이처럼 탈구된 손이 의미하는 바는 먼저 시를 쓰는 세계(손이 있는 세계)와 시 세계(화자가 접속한 세계)의 현격한 격리이다. 그것은 삼차원과 이차원처럼, 시인의 육체와 육체 없는 언어처럼, 인간의 세계와 유령의 세계처럼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차원은 서로 의존적이고, 원격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마치 게임 속 세계와 게임 밖 세계처럼. VR 게임에 접속해서 가상의 세계에 몰입할 때도, 그 몰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게임 밖의 손이 컨트롤러를 끊임없이 조작해야만 한다. 손의 존재는 게임의 몰입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인 동시에, 게임에의 완전한 몰입―게임 밖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망각―을 방해하고 저지한다. 때때로 유령들은 자신의 세계 배후에서 이루어지는 손의 작업을 감지한다. “어디선가 붓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 소리의 메아리 같은”(「농담과 명령」). 반대편에서 보면, 유령의 세계는 손에 쥘 수 있는 동전만큼이나 작아지기도 한다. 마치 시의 역사 전체가 한 편의 시 속에 응축될 수 있는 것처럼. 현기증 나는 프랙털 도형처럼. “놀이터가 사람만 해진다. 주먹만 해진다. [……] 이미 많은 동전이 그 속에 있다”(「투어」).
18)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① “그러면 나는 나의 두 손을/등 뒤로 감춘다.//손바닥을 위로 보이게/둔다” (「루시드 서머」); ② “색이 묻어나지 않는 붓의 머리 쥐고 손은 백지를 긋고 있었다”(「침묵의 푸가」); ③ “내장들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나지만 두리번거려도 손 모양 태양 두 개를 빼면 온통 캄캄한 어둠 속이라 한다”(「커피나 마실까」). ④ “거미줄을 떼어낸다. 손이 끈끈하다. 그러나 거미줄 여전히 눈앞에서 흔들린다. 비가 오려는 건가. 나는 주먹 속의 거미와 함께 돌아간다”(「나무에 기대어」). 위의 예들은 모두 시의 마지막 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때로는 손이 아니라 팔다리인 경우도 있다. ⑤ “나는 꿈속에 남겨졌다.//팔다리가 나 대신 무덤 주변을 뛰고 있었다”(「풀의 밀폐」).
3-3. 재귀성과 우연성19)
김선오의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떠오른 그림이 있는데, 네덜란드 판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우스 에셔의 〈손을 그리는 손〉(1948)이다.

‘재귀성’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언급되는 이 판화 작품에서, 손이 그리는 것은 자신을 그리는 손이다. 예술에서 이와 같은 재귀성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가 그림의 내용이 되는 순간으로, 한 시퀀스의 예술이 자신을 돌아볼 만큼 충분히 성숙했음을, 혹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음을, 혹은 공허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상태(성숙, 포화, 공허해짐)는 종종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재귀성의 선제조건은 그리는 나(주체)와 그려지는 나(대상)의 분할이다. 그다음 조건은 대상과 주체가 꼬리를 물듯 교차하며 다시 분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어떤 손도 단순히 주체나 대상인 채로 머무르지 않으며, 서로에게 대상이자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손들은 서로를 만들어내면서 서로를 반성한다.
이러한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예술이 자신의 조건을 의식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내용으로 삼게 되는 것은 ‘모더니즘 예술’의 식상한 특징이 아니냐고. “지구를본떠만든지구의를본떠만든지구”(이상, 「건축무한육각면체」)처럼 되는 것은 머리 아픈 모더니즘 예술의 고질적인 특징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20세기의 모더니즘 예술은 (에셔의 판화처럼) 재귀성의 가장 명료한 형식을 제시했을 뿐이다. 재귀성의 출현은 근대예술/현대예술만의 배타적인 특징이 아니라, 근대와 비근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다. 성숙과 반성의 시기마다 예술은 자신을 돌아보지만, 매번 전혀 다르게 돌아본다.
시의 역사에서는 우연성과 재귀성이, 창안의 시기와 성숙의 시기가 교차한다. 이 교차가 어떤 시퀀스를 이룬다. 김선오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 시퀀스들의 단절이 아니라 “부드러운 반복”이고, 반복되는 시퀀스들에 대한 의식이다. “계속되는 B, 타진되는 A”(김선오, 「시퀀스」). A는 구조이고, B는 운동이다. A는 재귀성이고, B는 우연성이다. A는 건축이고, B는 반(反)건축이다. B는 A에 반영되어 A를 풍요롭게 하고, A는 B에 침투하여 B를 견고하게 한다. 그리고 시퀀스들의 반복은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다: ‘어떤 죽음도 마지막 죽음이 아니고, 어떤 탄생도 최초의 탄생이 아니다.’
19) 허욱(육휘), 『재귀성과 우연성』,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23.
4. 결론…… 혹은 이어지는 질문들
살펴본 세 시집은 공통적으로 어떤 건축의 불가능성, 어떤 건물의 죽음에 대한 ‘앎’을 자신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인식은 ‘앎에도 불구하고’라는 제약 위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건축술, 타개책 들을 풍요롭게 시험하는 역설적인 동인이자 가능성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2010년대 중후반의 시가 무언가 닫히는 동시에 열리는 중요한 결절점에 위치한다는 내 생각은, 이 시인들뿐만은 아니지만 특히 이 시인들의 시를 따라 읽은 경험에서 나왔다.
다음의 두 질문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2010년대 중후반에 정확히 어떤 시퀀스가 완결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때 어떤 또 다른 시퀀스가 시작되었는가?
이에 대답하려면 또 다른 글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고 시 안팎을 넘나드는 많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한국 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었던 데에는 두말할 것 없이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기후위기와 생태적 재난에 대한 의식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또 2010년대 중후반에 문학계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의 반성을 가열하게 강제하기도 했을 것이다. 변화한 미디어 환경과 ‘인간’의 조건이 시의 작법을 변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런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요인들을 짚어보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자신이 속한 시간/시대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면서 그 시대를 수행적으로 구성하기도 한 소수의 시를 꼼꼼히 읽어봤을 따름이다.20)
이어질 작업을 기약하기로 하고, 하나의 전망을 제안하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만약 내 주장대로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이 동시대 한국 시의 중요한 교차점에 위치한다면, 그 교차점에서 죽음들의 관계 또한 전환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현대시에서 반복된 상징적 죽음: 외적 삶+내적 죽음
“느린 자살”: 외적 죽음+내적 죽음
이후의 삶(afterlife): 외적 죽음+내적 삶
실제로, 외적으로 죽은 것으로 보이는 시가 ‘내적 삶’을 획득하는 조짐이 나타나는 중이다.
발밑에 있는 것
땅 밑에 있는 것
죽은 것
죽은 줄 알았던 것
태어나기 직전인 것
우글우글한 것
―윤지양, 「입덧」 전문21)
무언가 땅밑에서 우글거린다. 땅 위에서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다는 신호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에게 어떤 메스꺼움이나 현기증으로 먼저 감지될 뿐이다. 따라서 ‘이후의 삶’은 정신승리라는 오명을 짊어질 수 있을 텐데, 외적으로 죽은 듯 보이는 것을 단지 몇몇 주체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감지하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주관적 믿음으로 미리 지탱되는 삶일 것이다.
죽음을 선포하는 것(신의 죽음, 인간의 죽음, 예술의 죽음, 주체의 죽음……)은 ‘현대’가 자신을 현대로 내세우기 위해 반복하는 고질적인 버릇이다. 물론 이 죽음들은 과장된 것이었다. 첫 번째 실망은 죽음을 공표하지만, 두 번째 실망은 죽음의 습관 자체를 사소하고 진부한 것으로 만든다. 버려진 지도를 집으로 취하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정말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어떤 죽음도 최후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도, 인간도, 예술도 유령 공동체의 실망스러운 일원인 탓에. 그들의 모든 찌꺼기가 높고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라 넓고 지저분한 집을 이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앎이 시를 수행적으로 죽일 수 있다면, 아무것도 죽지 않았다는 믿음은 시를 살릴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적어도 시의 생사에 관한 한 앎과 믿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20) 한편 다음과 같은 가설을 생각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1990년대에 시작된 한국 시의 어떤 시퀀스는 2010년대 중후반에 완결되었다. 그사이 시는 세계와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웅대한 자아에서 독립해 내면의 복잡성을 발견하고, 폭발하는 전집의 나날과 전투적인 “사춘기”(김행숙)를 지났다. 이 ‘개인’은 “간결한 배치”(신해욱)를 시험하고 투명한 유령이 되어갔으며(김언) 마침내 자신의 소진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가설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려면 훨씬 많은 시인의 많은 시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21)『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