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질투 혹은 글쓰기의 이유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1

뜬눈으로 뒤척이다가 사라는 인정했다. 질투가 났다. 밤이나 멜로디보다 훨씬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되고 싶었다. 곁에 누운 마크가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얇은 입술을 열어 그럴 필요 없어, 사라는 사라 자신인 걸로 충분해,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 말을 사라 자신이 믿지 않았으니까. 왜 내 환상인데 내게도 각박한 것일까. 내가 남에게 각박하기 때문인가.
―이희주, 「사과와 링고」2

1. 민주주의적인, 너무나 민주주의적인 감정

만약 내가 조선 시대의 노비라면 양반이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질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이 내 옆의 노비에게만 좋은 음식을 준다면 질투심에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열의가 있는 대학생은 교수의 해박함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수의 칭찬을 받는 동기의 똑똑함은 질투한다. 많은 직장인은 사장을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입사 동기가 먼저 승진한다면 고통스러운 질투를 느낄 것이다. 우리의 배를 아프게 하는 것은 땅을 산 사촌이다. 하지만 부동산 재벌에 대해서라면 차이가 너무 커서 질투조차 나지 않는다. 질투심을 부르는 것은 비교 가능한 차이다. 거꾸로 말해서 질투의 사정거리는 비교할 수 있는 범위를 나타낸다. 비교의 지평선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차이는 질투에서 면제된다. 재벌의 압도적인 재산, 아이돌의 압도적인 미모,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의 압도적인 폭력 같은 것들. 2300년쯤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실을 통찰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자신과 대등한 자들이 뭔가를 갖고 있거나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 시기한다. 여기에서 “대등하다”는 것은 출신이나 나이나 처지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비슷한 경우를 의미한다.3

질투에 대한 역사적·담론적·정치적 논점을 그러모은 유익한 책 『질투라는 감옥』에서 야마모토 케이도 이 문구에 주목했다. 야마모토는 상식적인 논변을 통해 “질투는 비교가 가능할 때 발생한다”고 강조한다.4 그는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통렬한 잠언도 인용했다. “대공은 대공에게, 요리사는 요리사에게 질투하고 가수는 가수를, 거지는 거지를 괴롭히는 법이다.”5

『질투라는 감옥』의 마지막 장은 질투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다룬다.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평등하다고 가정한다. 앞서 말한 비교의 지평선이 무한히 넓어질 수 있는 환경인 셈이다. 야마모토는 “질투는 민주주의의 조건이자 결과”6이며 심지어 질투가 민주주의의 “쌍둥이”7라고까지 말한다. 질투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극렬해진다는 것이다. 실로 제도화된 민주주의와 질투 사이에는 결정적인 관계가 있는 듯하다. 질투를 극대화하는 것은 ‘완전한 불평등’이 아니라 ‘불완전한 평등’이기 때문이다. 넘을 수 없는 ‘현격한 차이’가 아니라 어쩌면 넘어설 수도 있는 ‘애매한 차이’가 질투를 격발한다.

물론 민주주의가 전제하는 원칙적 평등은 질투가 양성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재산이 늘어난 어떤 사람은 이웃이나 친척의 질투를 사지 않으려고 부유함을 숨길 수 있다. 반대로 부를 과시하면 질투를 살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질투가 유발되려면 사람들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한편 항상 처지가 나쁜 사람이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을 질투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대학교수는 젊은 연구자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생활하며 많은 것을 누리는데도 연구자를 질투할 수 있다. 자신에게는 이제 없는 것 같은 열정이나 도전 정신 따위를 질투할 수 있는 것이다. 질투는 객관적으로 처지가 좋으냐 나쁘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자신을 어떻게, 얼마나 비교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질투가 극대화되는 세 가지 조건을 생각해보자. 질투는 (1) 원칙적으로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 (2) 눈에 띄는 차이가 있을 때, 그리고 (3) 사람들이 서로 비교할 때 극대화될 수 있다.

이 조건들을 고려하면, 어떤 사회에서 질투가 극대화되겠는가? 원칙적으로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한 사회. 권위·명망·평판·재산·취향 등에 있어 구별짓기가 첨예한 사회.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고 눈치를 주는 사회. 어쩌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국 사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보여주듯,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원칙적이고 제도적인 수준에서는 평등이 달성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불평등이 엄존하는 사회다.8 경쟁과 비교가 극심한 사회이고, 평등주의가 강렬한 지향으로 남아있는 동시에,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 학벌주의, 서열의식도 끊임없이 존재감을 발휘한다.9 덧붙여, 누구나 발언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듯 보이는 환경에서 질투는 관심을 향한 경쟁에 집중된다. 관심attention을 두고 경쟁하는 온라인 환경에서, 관심이 집중되는 대상은 종종 질투가 집중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질투는 지독하게 평판이 나쁘다.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 끝에서 화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마찬가지로 글 앞머리에 인용한 이희주 소설의 대목에서도 질투는 타인을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비참한 마음의 상태로 진술된다. 질투에 대한 나쁜 평가가 어제오늘 일은 아닌데,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질투심jealousy은 합당한 이유도 없이 생겨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조롱하는 흉측한 괴물에 빗대어졌다10. 질투는 감정계의 불가촉천민인 양 너무 평가절하된 감정이기 때문에 그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심을 주기도 한다.

질투가 이렇게 평판이 나쁜 탓에 화가 났음을 인정하는 것보다 질투를 느낌을 인정하기가 훨씬 어렵다. 분노는 때때로 정당성과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광장의 집회에 엄청난 인파가 모였을 때 어떤 기자가 ‘민중이 분노했다’라고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 말은 투쟁의 정당성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투쟁의 힘찬 열정을 부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민중이 질투했다’라고 말하면 투쟁의 정당성을 즉시 약화하고 모욕하는 듯 들릴 것이다. 하지만 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인 질투가 자동적으로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무엇으로 여겨지는 걸까? 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질투에 기반한다고 말하면 그 언행의 정당성을 약화하게 되는가? 그 감정에 대한 인식이 수동적이고, 음침하고, 찌질하다고 굳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예평론가 시엔 나이Sianne Ngai의 말처럼 “분노anger와 달리, 질투envy는 사회적 불평등을 공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응답하는 정당한 양식으로서의 문화적 승인을 결여한다.”11

조직화된 분노는 큰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고, 질투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과도한 반응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뿐더러, 페미니즘 비평이 가르쳐주었듯 ‘큰 불의’와 ‘사소한 차이’를 나누는 기준이야말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다. 분노의 어떤 표현이 정당하게 여겨지고 어떤 표현은 정당하지 않게 여겨지듯이, 질투의 표현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 질투를 도덕적으로 비하하거나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서, 그 감정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격화되거나 잘 전염되는지, 어떤 경로로 전이되거나 투사되는지,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되는지 사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질투를 비평적 개념으로 세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정신분석 이론들을 짧게 탐색한다. 그러고 나서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인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를 읽어볼 것이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의 질투는 특히 글쓰기의 (불)가능성을 둘러싸고 격해진다.

2. 질투의 새로운 조건: 끝없는 또래들

지난 몇 년간 평론가로서 나의 관심사는 어른이 없는, 누구도 어른이 되기 힘든, 어떤 공통감각이나 ‘보편교양’도 전제할 수 없는 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배움과 교양이 가능한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배움의 환경에서는 지식이나 도덕을 가르치는 어른보다 매혹과 폭력을 통해 서로 배우는 또래들의 역할이 압도적으로 커지고 있다고 보았다. 몇 글에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비제도적 배움을 견인하는 매력적인 또래의 역할에 주목했다.12 이제 추가할 것이 있다면, 그 또래는 애정과 욕망, 동경만큼이나 참을 수 없는 질투를 야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의 징후를 이야기해보자. 최근 몇 년간 한국 소설에서 아버지는 정말이지 비중이 없었다. 아버지가 중요하더라도,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에서처럼 애도 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 중요성을 지닐 뿐이다.13 지난겨울 안세진은 최근 한국 소설에 자주 나타나는 이모와 고모, 삼촌 등 방계의 형상에 주목했다.14 그에 따르면 방계의 증식은 오래 진행되어온 “가부장적 마스터 플롯의 해체”와 관련이 있다.15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언급한 몇 소설에서 동기/또래의 존재감도 엄청나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16에서 무경에게 고모의 애정과 선택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언니인 목경과 그것을 두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피다」17에서 화수가 선산에서 삼촌을 마주치게 된 것은 할아버지 묘소에 같이 가자는 사촌 형제 수동의 제안 때문이었다. 화수는 할머니가 장손인 수동만을 예뻐할 때 할아버지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아껴주었다고 기억한다.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18에서 엄마와 ‘나’의 중간 나이쯤인 이모는 종종 ‘나’와 자매로 혼동된다. ‘나’는 죽은 이모의 옷을 남동생을 비롯한 남자 조카들에게 물려주겠다는 큰이모의 결정에 격분해 이모의 집에 찾아가는데, 거기서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는 낯선 여자와 대면한다. 덧붙여 안세진은 언급하지 않지만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19에서도 ‘나’와 같은 방을 썼던 고모는 종종 애증으로 얽힌 ‘나’의 자매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가 동갑내기 여자아이들과 성적이면서 피/가학적인 놀이를 할 때, 이 아슬아슬한 놀이에 고모가 폭력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놀이를 중단시킬 때, 그 순간 고모는 완연히 어른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방계 친척과 동기·또래의 동시적 출현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이지만, 잠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소설의 ‘가족 로망스’에서 재생산을 축으로 하는 수직적 관계(부모-자식 관계)는 존재감을 많이 잃었으며, 그 축을 벗어나는 비스듬한 관계(방계)나 수평적 관계(동기·또래)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스듬한 관계’와 ‘수평적 관계’는 종종 겹쳐지기도 하고 미세하게 구분되면서 서로를 부각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의 렌즈를 빌려 보면 가부장제의 약화, 혹은 상징적 아버지의 약화는 방계뿐 아니라 ‘또래 문제’가 배양되고 증식되는 토양이다. 자주 인용되는 이탈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마시모 레칼카티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오늘날 청년들의 주체성을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20 오늘날 ‘선진국’의 청년들은 아버지의 금지를 경험하면서 자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준과 모델을 제시하는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들들은 권위적인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오늘날의 청년들은 오히려 아버지의 무책임 때문에 방황한다. 도덕과 삶의 지향을 가르치는 내면화된 아버지(초자아)가 약화되는 만큼 청년들의 정신에 너무 많은 지방 호족, 건달, 무법자가 범람한다. 레칼카티는 새로운 세대의 주체적 문제를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로 명명한다. 그들은 오디세이아 이야기 속 텔레마코스처럼 ‘지평선 너머에서 돌아와 질서를 바로잡아줄 아버지’를 기다린다. 아버지의 부재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또래 문화를 낳고, 다시 이 문화가 은밀하게 아버지의 귀환을 욕망하게 하는 셈이다.

나는 상징적 아버지의 부재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주체성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는 레칼카티의 선견지명에 동의한다.21 그러나 ‘좋은 아버지’를 귀환시켜야 한다는 그의 해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새로운 문제에 오래된 해법으로 대응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새로운 또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상징적 아버지의 약화를 부정적 결여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실험과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조건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 문제에서 줄리엣 미첼은 참고해야 할 중요한 정신분석 이론가다22. 미첼의 이론은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관계에 배타적으로 집중해온 정신분석학이 간과한 동기간의 수평적·측면적 관계를 조명했다고 평가받는다.23 미첼이 부모 자식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정신분석이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만 집중하면서 인간의 주체성과 사회성을 형성하는 데 못지않게 중요한 동기/또래 관계는 간과해왔다고 본다.

정신분석 전통에서 아버지가 그토록 중요했던 것은 분석가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가령 프로이트의 경우)이다. 혹은 어떤 정신분석 이론에서 어머니가 그토록 중요했던 것은 분석가가 어머니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가령 멜라니 클라인의 경우)이다. “아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물론 어른이며, 그 결과 부모-아이의 수직적 관계가 탐구 방식 안에 복제된다.”24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결정적이다. 반면 클라인은 질투에 대한 정초적 텍스트25에서 이차적 질투심jealousy과 원초적 질투envy를 구분하면서, 원초적 질투를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 국한했다. 미첼은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원초적 장면에 이미 제3의 인물, 즉 동기/또래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러한 관찰을 어머니에 대한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의 분열/투사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그렇지만 동기/또래(가령 어머니 가슴에 있는 다른 아기)가 이 과정에 기여하는 바는 결정적으로 보인다.26

질투에 대한 클라인의 분석과 달리, 유아는 어머니의 가슴에 질투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질투를 격발하는 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붙어 있는 동기(형제자매)다. 아이에게 보호자의 애정과 관심이 그토록 필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놓고 경쟁하는 동기/또래가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에 가장 고통스러운 비교 대상으로 말해지던 것이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는 동기/또래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27 동기/또래는 관심이나 사랑을 내가 독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결국 평범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존재다. 동기는 아이의 나르시시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상처 입힌다. 따라서 아이는 동기/또래를 사랑하는 동시에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 미첼에 따르면, 바로 이 사랑/증오 양가성이 아이에게 히스테리를 격발한다.28 달리 말해 인간은 사회에 노출되고 사회적 존재가 되는 만큼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신경증자가 된다. 비교적 동등한 처지인 자매와 형제, 또래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증오 양가성을 어떻게 소화하는가가 아이들의 사회화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아이들이 갖게 될 가치관과도 연결된다. “동기들(그리고 나중에는, 학교아이들) 간의 강렬한 질투, 경쟁, 선망은 [나중에] 평등과 공정에 대한 요구로 역전된다.”29

또한 “젠더는 동기(또는 동기 등가물)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30 전통적인 정신분석의 틀에서 주체는 오이디푸스 의례를 통과하여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로 고착된다. 반면 동기들의 세계는 재생산에 국한되지 않는 성적 유희와 실험으로 가득한 세계이며, 따라서 섹스가 아닌 다양한 젠더가 생성될 수 있다.

사회 분석이나 문학비평에 응용할 수 있는 틀로서 미첼의 정신분석 이론이 갖는 큰 강점은, 오이디푸스적 수직관계(부모 자식 관계, 혹은 그것이 전이된 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사회화와 신경증, 정신증, 경계선 인격의 경과를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데 사실 인구구성의 통계적 변화만 고려하면 미첼 이론의 사회정치적, 문화적 중요성은 감소해야 한다. 이른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인구는 줄어들고 많은 아이가 외동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의 이론은 통렬한 시의성을 갖는 듯하다. 어째서인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우리는 압도적으로 많은 또래를 만난다. 그곳은 셀 수 없는 또래들이 있는 세상, 영원히 또래들만 있는 세상, 만인이 동지이자 친구이며 경쟁자이자 적이 되는 세상이다. 커뮤니티와 SNS는 근본적으로 어른이 없는 동기들의 세계다. 나이가 적든 많든 또래가 됨으로써만 그 과시와 비교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31 이 세계는 질투심, 호승심, 경쟁심, ‘비교질’과 모방 심리 그리고 연극성을 격화한다.

그곳엔 종종 끔찍한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에 개입해 “그만해!”라고 명령하거나 도덕을 훈계할 어른이 없다. 이것은 아이들의 놀이가 어떤 도덕적 금지를 거쳐 사회적 형식으로 승화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사회에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금 커뮤니티, 인스타그램, 틱톡 등을 통해 혐오가 청소년에게 놀이의 형식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32

아마도 동시대 문화의 심리적 현실은 너무 약한 초자아와 너무 강한 자아 이상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초자아는 상징적 아버지의 내면화다. 반대로 자아이상은 내가 되고 싶은 언니나 형의 형상 혹은 내가 눈치를 보는 또래의 형상이다.33 주인 혹은 아버지의 귀환이라는 망상에 빠지는 대신 이 상황을 탐색과 실험의 불가역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미첼의 말처럼, 새로운 형태의 자매애와 형제애는 파시즘의 반복을 저지하기 위해 발명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남아있다.34

3. 글쓰기의 ()가능성

먼 길을 돌아왔지만, 이제 이희주의 「사과와 링고」를 읽어보자. 이 소설은 불평등과 질투, 고된 생활, 비교가 야기하는 신경증이 어떻게 증오 폭력으로 치닫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희주의 여느 작품처럼 도발적이고 폭력적이지만, 이 소설에는 특히 섬뜩한 구석이 있다.

주인공 사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여동생 사야는 (사라의 생각에 따르면) 예쁜 외모를 가졌지만 생활력이 없고 사라에게 경제적으로 무책임하게 의존한다. 지금까지 사라에게 1500만 원을 빌려 가 놓고 거의 갚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라가 이십 대 초반일 때 죽었다. 사야에게 휘둘리는 어머니는 자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한다.

한편 사회학과를 졸업한 사라에게는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한때는 “미술…… 같은 걸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p. 313). 이 문장이 과거형으로 쓰였음을 주의하자. 미술은 이제 사라에게 너무 멀리 있는 “옛얘기”(같은 곳)다. 우리가 흔히 보는, 커다란 전시 공간에서 조명받는 미술을 하려면 상당한 자원과 자본이 필요하고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교육 없이 ‘고급미술’을 하는 것은 대체로 수천만 원짜리 카메라로 근사한 사진을 찍어 사진작가로 데뷔하는 의사나 갑자기 화가로 데뷔하는 아이돌 가수와 같은 특수한 경우다.

그럼에도 사라에게 예술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라가 유일하게 향유하는 사치라 할 만한 것은 〈더 라스트〉라는 뮤지컬이다. 〈더 라스트〉는 소행성 충돌로 예정된 “종말 당일”(p. 293)을 배경으로 하는데, 사라는 뮤지컬이 자신의 죽고 싶은 마음과 외로움을 오롯이 이해해준다고 느낀다. 사라는 경제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 뮤지컬을 반복해서 본다.

그런데 어느 날 고대하던 뮤지컬을 보러 갔음에도 공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연찮게도 사라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p. 313)에게 신경을 빼앗긴 탓이다. 공연이 끝난 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면서 사라는 그 여자와 자신의 동생을 비교한다.

사라는 그 여자의 쫑쫑 땋은 긴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예쁜 걸로 치면 20대의 사야가 훨씬 예뻤다. 그렇지만 옆자리 여자는 사야가 가지지 못한 것, 단어를 붙이자면 개성을 갖고 있었다. 그 여자 또한 예술을 애호하고 풍부한 취향을 가진 젊은 여자들 사이에 두면 그저 그런 클론처럼 보일지라도 어쨌든 반짝반짝했다. 그가 의복으로 드러낸 삶이, 예술에 대한 애정이 사라의 신경에 거슬렸다. (p. 313)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사라가 옆자리 여자와 자신을 직접 비교하지 않고 동생을 매개로 비교한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랬을까?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라는 ‘그 여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일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대신 기억 속 “20대의 사야”라면 비교해볼 만하다. 외모는 사야가 더 예쁘지만, ‘그 여자’는 훨씬 개성 있다. 그리고 외모와 개성 중에 사라가 더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것은 후자다. 달리 말해 사라에게 자괴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예쁜 외모보다 두드러진 개성이다. 개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이나 학력처럼 분명한 특권의 지표가 아니다. 예쁜 얼굴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안목이나 미감, 취향처럼 모호한 것이다. 그 모호함이 사라를 미치게 한다. 자산의 큰 격차나 한눈에 보이는 외모처럼 분명한 차이는 차라리 체념하기 쉽다. 반면 개성은 모호하기 때문에 단념하기 어렵다.

그런데 사라에게 취향이나 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무엇이 개성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을 테고, 그것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라는 결여해서가 아니라 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나도 안다고. 나도 너희가 아는 것을 알고, 너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아름답게 느낀다고. 감각적으로 구분 가능하다고”(p. 314). 정확히 말해, 사라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다. 그는 여느 직장인과 구분되지 않는 무난한 옷을 입고 다니는 자신의 상황을 비관한다.

이렇게 ‘개성 있는’ 여자와 비교하며 자괴감을 느낀 직후 사라는 인터넷에 〈더 라스트〉를 검색한다. 그런데 몇 편의 글이 사라의 마음을 더욱 헤집어 놓는다. 이때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도, 연출가도 아니다. 한때 되고 싶었던 미술가도 아니다. 블로그나 SNS에 리뷰를 쓰는 논평가일 뿐이다.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자괴감과 더불어, 사라의 질투는 ‘고작’ 그 논평가들에게 집중된다. 앞서 ‘그 여자’의 경우와 달리, 이제 사라는 논평가들과 자신을 직접 비교한다.

뭐가 되었든 사라의 인생에서는 〈더 라스트〉가 중요했다.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 보일 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게 된다면, 그래도 조금은 자신에게 너그러워질지 몰랐다. 자부심을 갖게 될 수도. 그런데 할말이 없고, 레퍼런스로 댈 만한 책도 모르고, 서양 예술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쏘핫처럼 영어를 잘해서 퍼온 글을 번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게, 이게 인생인가. 배우거나, 가꾸거나, 무언가를 남기려고 하거나 탐구할 마음도 없이 이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것이 삶인가. (p. 317)

사랑하는 작품에 대해 괜찮은 글을 쓸 수 있었다면, 그래도 자신을 좀더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논평가들의 글에 기가 죽어 자신은 “사람들이 관심 보일 만한”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논평가들이 자랑하는 유창함, 해박함, 영어 실력 역시 학력이나 재산처럼 명백한 차이의 표지가 아니다. 훨씬 애매한 차이들이다. 사라는 그렇게 ‘애매하게’ 잘난 논평가들에게 고통스러운 부러움을 느낀다. “밤이나 멜로디보다 훨씬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되고 싶었다”(같은 곳).

사라의 질투는 왜 이들에게 집중되는가? 그것은 사라에게 글쓰기가 ‘어쩌면 나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 여자’와 자신을 직접 비교하지 않았던 사라는 글쓴이들과는 자신을 직접 비교한다. 부자가 될 수는 없더라도, 예쁜 외모를 가질 수는 없더라도 글쓰기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개성 있게 꾸미고 다니지 못하더라도 글쓰기를 통해 개성을 표현하고 이목을 끌 수는 있지 않은가?

글쓰기는 다른 학문이나 예술보다 접근성에 있어 훨씬 평등하다. 고급미술과 달리 글쓰기에는 대단한 자원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이것이 다른 학문이나 예술보다 문학에 여성이 일찍 진출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에 관심을 받을 만한 글과 아닌 글을 나누는 차이는 미세하고도 첨예한 것이 된다.

한편 사라가 온라인에 게재된 글을 보고 질투를 느끼듯이, 글쓰기의 (불)평등이라는 모순된 조건은 동시대 문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누구나 블로그, 페이스북, 엑스 혹은 브런치에 논평을 쓸 수 있다. 질투는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더 격렬해진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모든 글이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35 이 때문에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는 질투와 불가분 연관되는 것 같다. “누구나 각자의 방법으로 〈더 라스트〉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p. 316). 내가 직접 아름다워지거나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없다면, 그 아름다움의 파편이나마 갖고 싶다. 어떤 관객은 글을 씀으로써 작품의 일부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 자신의 것과 비슷한 감상을 먼저 써버렸다면 기회를 빼앗겼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라에게 뮤지컬을 반복적으로 볼 만큼의 열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논평을 찾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정황은 그에게 글을 쓸 가능성과 역량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미약한 가능성이 사라를 괴롭힌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사라를 괴롭히는 것은 단순히 글을 쓸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아니다. 반대로 ‘어쩌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를 괴롭힌다. 즉 글쓰기는 사라에게 여전히 어떤 희망을, “잔인한 낙관”36을 갖게 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원칙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처럼 글을 쓸 수 없다. 이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교차 속에서 질투가 극대화된다.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이 (불)가능성은 배우고, 가꾸고, 탐구하는 일 전반의 불가능성으로 확대된다. 나는 그들처럼 글을 쓸 수 없다―따라서 나는 무언가를 배울 수도 가꿀 수도 탐구할 수도 없다. 물론 이 두 문장 사이에는 비약이 있다. 관심받는 글을 쓸 수 없는 것과 무언가를 탐구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하지만 사라는 논평가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여하한 탐구의 가능성까지 체념한다.

소설의 끝에 가서 사라는 어떤 끔찍한 폭력을 저지른다. 소설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인물이 그러한 상황으로 치닫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의 사실 또한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사라는 적어도 잠재적으로 파시스트다. 자신의 불행과 신경증, 열등감, 동생에 대한 원한을 항거할 수 없는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해소하려 하기 때문이다.

5. 악랄한 열정

이 글은 질투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로 시작해 일련의 정신분석 담론을 거쳐 질투와 (불)가능한 글쓰기의 관계라는 문제로 넘어왔다. 솔직히 말해 여기에는 몇 겹의 기만이 있다. 먼저 우리가 글쓰기의 (불)가능성 때문에 고통받는 인물에 대해 읽을 수 있는 것은 소설의 글쓰기 덕분이다. 게다가 인물을 파국적인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는 소설의 글쓰기에는 어떤 가학적 악취미가 있다. 동물의 숨통을 막는 주인공의 손이 갖는 폭력성은, 인물을 그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는 소설의 글쓰기가 갖는 가학성과 깨끗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온갖 ‘레퍼런스’와 ‘서양 예술사에 대한 지식’으로 훈련받은 비평가인 내가 바로 그것들에 억눌려 글을 쓰지 못하는 인물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역시 기만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소설의 인물을 이중 삼중으로 소외시키는 데 일조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기만은 회피하고 싶다고 회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기만은 문학을 둘러싼 어떤 동시대적 쟁투의 핵심을 가리킨다. 누가 쓸 수 있는가, 누가 자신의 글로 관심을 받는가? 누가 누구에 관해 쓰는가? 누가 경험과 감상을 ‘소유’하는가? 말하자면 누가 경험이라는 공동의 자원을 ‘현금화’하는가? 이 문제를 둘러싼 경쟁과 분쟁이 격렬해지고 있다. 읽는 사람은 줄어들지만 쓰는 사람은 늘어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문학이 정치적이라면, 문학이 이 마찰의 한가운데서 고열을 앓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이 마찰에 사로잡히고, 계속해서 기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파스칼적 명상』의 서문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작업이 자기를 공격하는 도구를 생산하고 동료들을 욕보이게 할 것이라고 썼다.37 『파스칼적 명상』은 지성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논파하는 책이다. 예술·문학·철학적 탐구는 여가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위에서야 가능하다. 즉 고된 노동에서 면제되는 시간이 있어야 그런 탐구를 할 수 있다. 순수한 지성은 그 조건에 대해 침묵하고 그것을 은폐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지성을 비판하는 지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성을 비판하는 지성 또한 자신이 고발하는 그 조건 위에서 가능하다. 철저하고 엄밀해질수록 자신의 정당성을 취소하게 되는 비판적 사유의 이상한 운명.

자기 작업의 기만을 정직하게 꿰뚫어 봤다는 점에서 부르디외는 여전히 옳다. 하지만 상류층과 대중의 문화를 분리하는 방식에서라면 그는 틀렸다. 대중은 문화를 ‘결여’하고 있지 않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대중의 미학을 부정으로써, 즉 칸트적 미학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38 칸트가 말한 ‘아름다움에 대한 무사심한 관조’는 부르주아적 습성으로, 노동자 계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형식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기보다는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런저런 자극들에 휩쓸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라의 독백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나도 안다고. 나도 너희가 아는 것을 알고, 너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아름답게 느낀다고. 감각적으로 구분 가능하다고.” 사라는 ‘미학’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여기서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신이 향유하지 못하는 것을 향유하는 ‘상류층’이 아니라 함께 뮤지컬을 본 ‘개성 있는’ 또래 여성이다.

대중은 자신이 갖지 못한 좋은 문화를 선망하지 않는다. 대중은 문화로 충만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만이 문화로 충만하다. 대중은 계급이나 정체성이 아니며, 당대의 충만한 문화를 향유하고, 그 문화를 구성하며, 그 문화에 의해 구성되는 다중이다. 문화를 구성하고 문화에 의해 구성될 때 누구나 대중인 것이다. 범용함에 대한 혐오는 대중의 내부에서 싹튼다. 상류층이 대중과 구별되기 위해 고급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대중이 대중 자신과 구별되기 위해 개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고급문화를 견인하는 것은 범용함에서 벗어나 상승하려는 그 개성에의 압력이다. 한마디로, 고급문화는 대중문화의 히스테리다. 사라는 똑같은 일상에서 일탈하기 위해 뮤지컬을 보고 또 본다. 마찬가지로 신경숙의 『외딴 방』에서 산업체특별학급의 급장 미서는 헤겔이 좋아서 헤겔을 읽은 것이 아니다. 또래들과 달라지고 싶어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일을 하는 무리의 일원이기 싫어서 헤겔의 책을 애지중지 들고 다녔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만 내가 너희들과 다른 거 같아. 나는 너희들이 싫어.”39 현대의 성장소설에서 소녀들이 어려운 단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구분되고 싶은 또래들이 없었다면, 또래들이 치명적으로 제기하는 평범함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누가 무엇하러 어려운 책을 읽겠는가?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2025) 2화에서 중학생 은중은 또래 여자아이들 앞에서 며칠 전 배운 어려운 단어(‘염세적’)를 과시적으로 사용한다. “난 너무 염세적인 것 같아.”

언어의 제련에 경쟁심, 호승심, 우월감과 열등감, 질투는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 왜 누군가 어려운 단어를 배우는가, 왜 게걸스럽게 지식을 먹어치우는가? 왜 어느 독학자는 밤새 미친 공부를 하는가, 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가? 기형도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왜 마음속에 그토록 많은 공장을 세우는가? 만약 또래들이 내가 평범하다는 것을 알게 하면서 그 평범함을 혐오하도록 밀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범용함을 내가 사랑하면서 증오하고, 갈망하면서 경멸하지 않는다면, 평범함을 정수리를 내리치는 도끼로 느끼지 않는다면, 그렇게 내가 둘로 쪼개지지 않았다면, 이 시대에 무엇하러 여전히 글을 쓰겠는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이 전제는 ‘이성의 공적 사용’(칸트)을, 비판의 자유를, 표현의 자유를, 한마디로 민주주의를 떠받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구절을 환기해보자. 공산주의 사회가 오면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목축을, 오후에는 사냥을, 밤에는 비평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40 이때 ‘비평’은 제도 내의 문학비평이나 미술비평처럼 전문화된 영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 낮에 보고 느낀 것에 대한 성찰적 글쓰기 일반을 뜻한다. 사람들은 낮의 생활과 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 그러나 밤의 글쓰기가 없다면 낮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스스로 알 수 없다. 따라서 낮의 노동은 어떤 종류여도 괜찮지만, 밤의 글쓰기는 대체될 수 없다.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비평을 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며, 한편으로는 만개한 인간성 그리고 실현된 자유와 평등의 증거다.

오늘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상적 희망은 종종 도착적 명령으로 전환된다. 28살쯤 된, 오늘날의 어떤 프레카리아트precariat를 생각해보자. 그는 오전에는 이런 아르바이트를, 오후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저녁에는 공부를, 밤에는 글쓰기를 한다(그리고 난해하고 날 선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그것은 가장 끔찍한 형태의 자기착취는 아닐까? 마찬가지로 사라에게 누구나 마음먹은 대로 비평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유토피아적 약속이 아니라 가혹한 명령으로, “잔인한 낙관”의 유혹으로 들릴 것이다.

게다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조건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는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동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이른바 ‘관심 경제’)에서 격렬한 질투를 향해 구부러진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인터넷이 ‘집단지성’을 위한 ‘공론장’의 역할을 하여 전례 없는 민주화를 견인하리라는 낙관이 있었다. 인터넷이 공적 영역에서 소외된 하위주체들이 자신을 가시화하고 표현하는 열린 광장이 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는 기대이지만, 인터넷이 일반화된 신경증을 야기했다면, 그것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이상이 배반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질투는 민주주의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격화된다.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무언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신경증자들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문화가 너무 많은 사람을 신경증자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온갖 사람, 정체성이 자신이야말로 가장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지식과 권력을 헐뜯게 된다면, 그러면서도 은밀하게 압도적인 폭력과 지식으로 불안과 불만을 잠재워줄 주인을 기다리게 된다면? 그런 주인은 언제까지나 오지 않을 것이기에, 주인 없는 신경증자들의 힘겨운 공존은 우리의 난제로 남아있다.

  1.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
  2. 이희주, 『크리미널 러브』, 문학동네, 2025, p. 317. ↩︎
  3.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20, p. 146. ↩︎
  4. 야마모토 케이, 『질투라는 감옥』, 최주연 옮김, 북모먼트, 2024, p. 48. ↩︎
  5. 같은 곳. ↩︎
  6. 같은 책, p. 216 ↩︎
  7. 같은 책, p. 276. ↩︎
  8. 최창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2010. ↩︎
  9. 정태석, 『한국인의 에너지, 평등주의: 평등주의와 서열주의의 모순적 공존』, 피어나, 2020. ↩︎
  10.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01, p. 109, p. 133 참조. 이 글에서 내가 말하는 질투는 jealousy보다는 envy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원초적 질투envy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거나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느끼는 감정인 반면, 이차적 감정인 질투심jealous은 내가 소유했다고 여기거나 애착을 가진 존재를 제삼자에게 뺏길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다. 그런데 클라인이 지적하듯 셰익스피어는 둘을 엄밀하게 구분해서 쓰지는 않는다. Melanie Klein, “Envy and Gratitude”, The Writings of Melanie Klein Vol. Ⅲ: Envy and Gratitude and Other Works 1946-1963, The Free Press, 1975. p. 182 참조. jealousy와 envy의 구분에 대해서는 p. 181 이하 참조. ↩︎
  11. Sianne Ngai, Ugly Feeling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 128. 나이는 질투가 특히 ‘여성화’된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감정의 여성화는 그 감정 자체가 수치스럽고 모욕적으로 여겨지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여성화되고 개인화됨에 따라 질투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고 진지하게 성찰될 여지를 차단당했다. 어쩌면 질투가 촉발할 수도 있을 투쟁적·비판적 행위성도 덩달아 평가절하되고 억압되었다. 나이는 질투를 비롯한 “못난 감정ugly Feelings”을 회피하거나 모른 척 덮어두지 않고 진지하게 사고하는 것이 페미니즘 비평에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
  12. 예를 들어 이희우,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
  13.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 ↩︎
  14. 안세진, 「신(新) 가족 로망스―2020년대 한국 소설의 이모, 고모, 그리고 삼촌」, 『자음과모음』 2025 겨울호. ↩︎
  15. 같은 글, p. 42. ↩︎
  16.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
  17. 김지연, 「무덤을 보살피다」, 『자음과모음』, 2025 봄호. ↩︎
  18.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 『문학동네』 2024 겨울호. ↩︎
  19. 예소연, 「사랑과 결함」, 『사랑과 결함』 ↩︎
  20. 마시모 레칼카티, 『버려진 아들의 심리학―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로』, 윤병언 옮김, 책세상, 2016. ↩︎
  21. 물론 이는 권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너무 빠르게 변한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한국의 청년 세대에게는 ‘권위적 아버지’와 ‘방임하는 아버지’라는 두 형상이 더 구분할 수 없게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
  22. 나에게 줄리엣 미첼을 읽으라고 처음 권한 사람은 미술비평가 이연숙이다. 그의 제안에 감사드린다. ↩︎
  23. 이성민, 「옮긴이 서문」, 줄리엣 미첼, 『동기간』,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15 참조. ↩︎
  24. 줄리엣 미첼, 『동기간』, pp. 17-18. ↩︎
  25. Melanie Klein, “Envy and Gratitude” ↩︎
  26. 줄리엣 미첼, 『동기간』, p. 46. ↩︎
  27. 줄리엣 미첼, 『미친 남자들과 메두사들』, 반태진·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25, p.39. ↩︎
  28. 같은 곳. 미첼 이론의 또 다른 특이성은, 그가 히스테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서 히스테리를 ‘여성의 병’으로 여겨온 역사를 탈구축해 ‘남성 히스테리’를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연다는 것이다. ↩︎
  29. 줄리엣 미첼, 『동기간』, p. 42. ↩︎
  30. 같은 책, p. 338. ↩︎
  31. 15살과 45살 남자는 생물학적으로는 아들/아버지뻘이지만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순간 서로 ‘형’이 된다. 서로 무엇이라고 부르든, 남초든 여초든, 커뮤니티에서는 원칙적으로 반말을 사용한다. 혹은 SNS에서 서로 존대하며 논쟁하더라도, 대체로 거기에 어른과 아이 같은 수직적인 차이는 없다. 다만 페이스북은 예외적으로 다른 것 같은데, 실명을 기반으로 하는 그 SNS에서는 여전히 ‘선생’이나 ‘지식인’이 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
  32. 탁지영·김원진 기자, 〈거리낌 없이… 혐오·차별 ‘놀이’ 삼는 학생들〉, 경향신문, 2025. 01. 24.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240600015 ↩︎
  33. 줄리엣 미첼, 『동기간』, p. 43. ↩︎
  34. 같은 책, p. 25. ↩︎
  35. 사라가 질투를 느끼는 대상은 권위 있는 문예지나 학술지에 실린 전문 비평가·학자의 글이 아니다. 단지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글이다. 문예지나 학술지에 글을 쓸 가능성은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에 좌우된다. 반대로 온라인 환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격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이다. 사라를 괴롭히는 것은 자격의 불평등이 아니라 관심의 불평등이다―비록 이 두 가지는 현실에서 종종 겹치고 얽혀 있는 것이지만. ↩︎
  36. 로런 벌렌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
  37. 피에르 부르디외, 『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p. 13. ↩︎
  38. 피에르 부르디외, 『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p. 13. ↩︎
  39. 신경숙, 『외딴방』, 문학동네, 2014, p. 192. ↩︎
  4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옮김, 두레, p.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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