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화된 시대의 예술작품

『학산문학』 2021년 겨울호.

1.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밈meme은 ‘문화적 유전자’를 뜻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조어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밈은 모방을 뜻하는 그리스어 어근 ‘미멤mimeme’과 유전자를 뜻하는 영어 ‘진gene’의 합성어라고 한다.1 간단히 말해 밈은 어떤 신념, 이야기, 콘텐츠, 스타일 등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 모방·확산되면서 문화 속에 전승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어떤 신념, 이야기, 콘텐츠 등이 재생산되면서 형성하는 기호의 계열이 있을 텐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장르’라고 부르려고 한다. 장르는 기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엮는 하나의 문법적 틀이다. 삶이 요약 불가능한 것이라면, 장르는 삶의 요소를 하나의 문법 아래 요약 편성한 것이다. 삶은 일의적이지 않지만, 현시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일의적이다.2 따라서 장르화된 삶은 삶보다 훨씬 쉽게, 훨씬 많이 재현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밈화된 시대’는 ‘삶의 장르화’가 일반화된 시대이다. 이 시대의 공식은 ‘예술의 삶-되기’ 즉 ‘예술의 탈장르화’를 선언했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공식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삶의 장르화란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오늘날 예술가에게 SNS는 미술관이나 잡지의 지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예술가가 SNS에서 하는 일은 단지 새 작품활동에 관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일상을 전시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삶은 그 자체로는 양도하거나 차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장르화되어 어떤 이미지와 기호의 짜임으로 재현되면 재생산되고 패러디될 수 있다. 즉 양도·차용·모방될 수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장르화된 삶, 말하자면 ‘라이프스타일’이다.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 사람은 ‘인플루언서’, 즉 말 그대로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팔로워 수가 곧 돈이 되는 것처럼, 매력이 곧 자산이라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현실, 그것도 꽤 오래된 현실이다.

우리가 물건의 쓰임새보다 기호를 소비한다는 말은 이제 상투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밈화된 시대의 특징은 우리가 기호를 소비하는 만큼 장르를 생산한다는 데에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장르화할 수 있다는 것은 문화에 통용되는 문법적 체계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문화적 요소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립하면서 자신을 문화 속에 현시한다(하지만 그러면서 밈의 물리적 숙주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장르화되지 않은 삶은 문화 속에 재현되지 않는다. 이제 기호들의 흐름을 파악하고 기호를 사유화할 능력은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기호의 경제 속에 재현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존의 문제는 아니지만, 기호의 경제 속 생존, 즉 ‘가시화될 권리’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이 사실은 인플루언서나 젊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을 이끄는 젊은 사업가, 사회 활동가, 가게 주인, 정치인, CEO, 기업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자본주의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일 것이라고 예견된 금융자본주의는 ‘노동의 가치 생산’을 ‘기호의 욕망 생산’으로 점점 더 대체하고, 따라서 육체노동은 가치 없는 것, 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것으로 절하된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은 기호 생산자의 인정 투쟁으로 대체된다. 노동과 계급을 설명하는 모델로서 유물론은 형이상학-미학적 모델로 대체된다.

세계적인 팬데믹과 양적 완화 속에서, 밈화된 시대의 전면화를 예증하는 노골적인 징후들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특히 올해 상반기에 유행했던 ‘밈 주식’은 가장 분명한 징후 중 하나다. ‘밈 주식’은 기업의 실물가치와 상관이 없는, 인터넷상의 유행에 따라 급변동하는 주식을 일컫는다.3 이 주식의 극단적인 요동은 경제에 대한 고전적인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실물에 대한 고려를 배제한 형이상학적이고 동시에 미학적인 고려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주식 커뮤니티 구성원들(‘서학 개미들’)을 단결시키는 헤지펀드 전문가들에 대한 반감, 망해가는 영화관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 영화관 운영업체 사장에 대한 대중적인 호감 등 집단적 정동의 복합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종종 말장난에 불과해 보이는 작용이 주가를 폭등시키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작년부터 화두가 되었던 ‘NFT’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의 약자이다. 이 토큰은 일반적인 가상화폐와 달리 디지털 자산에 고유한 인식 값을 부여하고 있어 상호교환이 불가능하다.4 NFT는 제각기 독특한 디자인이나 서사, 콘텐츠를 갖고 있으며, 어떤 NFT는 수십억 원에 경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올해 배수연 시인이 국내 최초로 NFT 시집을 발행하기도 했다.5) 이 가상화폐는 유명한 미술품처럼 희소하고, 그 희소성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된다. NFT가 인위적인 희소성이 부여된 ‘기호 더미’일 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향한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NFT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종교적 상징물이나 박물관의 예술품처럼―그 출처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가 아니다. 오늘날 기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아우라가 아니라 매력이다. 아우라가 사라져도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매력은 아우라와 어떻게 다를까? 아우라는 대상을 우러러보게 하지만, 매력은 대상을 갖고 싶게 하거나 대상처럼 되고 싶게 만든다. 아우라는 신의 권능이나 천재의 재능처럼 출처가 불분명한 힘의 반향이다. 반대로 매력은 그 출처가 분명하더라도 희소하다는 것 때문에 여전히 욕망의 대상이 된다. 매력은 탈신비화에 아랑곳하지 않으므로 계몽을 통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우라의 신비가 사라진 이후에 기호의 경제에 재도입되는 것이 매력의 서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벤야민의 예견대로 복제 기술의 보급은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상당 부분 사라지게 했지만, 그 후광의 빈자리를 매력이 차지하게 되었다.

기호의 경제가 세계를 둘―노동의 세계와 장르의 세계―로 나누는 이 시대에 고유한 매력의 통치가 있다. 이것은 사람의 욕망과 열등감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에 푸코가 말했던 ‘생명 통치’보다 통치받는 사람들에게 더 큰 조급함과 적극성을 부여한다. 이 기호의 경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일, 누구보다 앞서서 그것을 긍정하는 일이 곧 매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매력은 기호를 사유화私有化할 역량을 의미한다. 매력의 통치는 기호의 경제에 반대하거나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취하라고 속삭인다.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가 대표적으로 그랬듯, 기호의 경제가 (생산양식의 변화와 함께) 급변할 때 그 변화를 선취하면서 제 역량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매력이다. 따라서 매력적인 자는 엄청나게 많은 기호가 모여들고 순환하는 회로가 된다. 반대로 매력 없는 자는 이 기호의 순환 바깥에 있다. 지금 세계에 편재하는 기호를 자신의 방식으로 편성할 수단과 능력을 갖지 못하면, 이 경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존재를 현시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기호의 경제 속에서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다.6 들뢰즈의 말대로 매력을 사유화하는 자―가치를 주관화하는 자―가 예술가라면, 우리 모두 부분적으로 이런 의미의 예술가가 되지 않고서는 오늘날 기호의 경제 속에 살아갈 수 없다. 즉 통용되는 문화적 코드를 자신의 욕망에 알맞게 전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이 기업가의 크리에이터-되기, 활동가의 프로보커터-되기, 만인의 예술가-되기를 부추기고 있다. 기호의 경제 속에서만 의견이 교환되고, 의견의 교환만이 우리의 영향력을 보증해준다면,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일단 주목받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반적 경향 속에서 ‘모든 장르의 모든 장르에 대한 인정 투쟁’이 가속화된다. 돈이 실물과 절연되어 그 자체의 추상적 자동운동을 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장르들의 공허한 미학적 전쟁에 떠밀리듯 자원하게 되는 것이다.

1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이상인 옮김, 을유문화사, 2018, 364쪽.

2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성찰 4 「공백: 존재의 고유명」 참조.

3 “‘밈 주식’에서 희망 찾는 20, 30대의 서글픈 생존 방식”, 〈동아일보〉, 2021.08.13. 참조.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813/108547740/1

4 네이버 지식백과 “NFT” 문서 참조.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226820&cid=43667&categoryId=43667

5“배수연 시인 국내 첫 순수문학 NFT 발행 “시장 성숙 계기됐으면””, 〈파이낸셜뉴스〉, 2021.06.03., https://www.fnnews.com/news/202106031551312391

6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14쪽.

2.

이 글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밈화된 시대’라는 조건은 우리의 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문학은 이러한 조건을 예비하거나 예견했던가? 문학 속에는 어떤 징후들이 있었던가?

오래전부터 미술이 문학보다 이러한 현상 혹은 조건과 더 유연하고, 직설적이고, 전면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쉬운 사실이다. 실제로 ‘밈’을 직접적인 화두로 삼은 미술 작품이나 전시는 지금껏 아주 많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방식으로 포괄적인 관계를 맺는 것까지 고려하면, 미술의 경우에는 너무 광범위해서 셀 수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와 밈 사이에는 미술과 밈의 관계와 유사면서도 다른, 더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관계가 있다. 미술과 문학의 사례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문학의 경우에 먼저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 우선적인 초점은 단지 분량이나 지면을 고려한 절충적인 선택은 아니다. 오늘날 온갖 문화적 산물이 밈과 관계되어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수많은 피상적이고 헐거운 얽힘 속에 숨어있는 가장 핵심적인 매듭이 시와 밈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시와 밈’으로 초점을 좁힐 때 밈이 동시대 예술과 맺는 유착 관계를 더 뚜렷하게 사고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미술이 유연하면서도 종종 피상적인 방식으로 밈과 관계하는 것에 반해, 시와 밈의 야합은 좀 더 본질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밈은 ‘이질적인 기호의 배치를 통한 유희’라는 현대 시의 본질적인 유산을 상속 혹은 강탈해가기 때문이다. 혹은 심지어, 차차 설명하겠지만, 밈은 현대 시의 본질적인 경향성과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향성”7이 결합한 결과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여러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시의 ‘본질적인’ 유산이 무엇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단순화를 무릅쓰고 그것을 포괄적으로 정의하더라도, 그 유산을 다른 장르나 분야가 아닌 ‘밈’이 강탈해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질문에 대답하면서 오늘날 예술의 모호한 조건을 부분적으로나마 규명하기 위해,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로부터 거대병렬grande parataxe이라는 단어를 빌려오자.8 ‘거대병렬’은 미술비평에서 이야기되어 온 ‘탈역사화된 미술’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거대병렬은 오늘날 예술의 근본 바탕을 의미하지만, 이때 ‘오늘’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동시대’처럼 어떤 특정 시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8세기의 연극에서도, 19세기의 소설에서도, 20세기의 영화에서도, 21세기의 전시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적인 것이다. “‘심오한 오늘’의 법, 거대병렬의 법이란 더 이상 어떤 척도도 없다는 것, 더 이상 어떤 공통의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척도를 벗어남이나 카오스라는 공통적인 것이 예술에 그 역량을 부여한다.” 유일하게 공통적인 예술의 규범은, 어떠한 공통적인 규범도 없다는 것뿐이다. 어떠한 보편적 진리도, 사물의 안정적인 근거도 없다는 것이 낭만주의가 동시대 예술에 남긴 영속적인 교훈이라면,9 거대병렬은 근거 없음을 예술의 보편적 근거로 다시 취하면서 낭만주의의 교훈을 뒤집는다.

거대병렬은 척도의 부재라는 전제를 공유하는 모든 예술작품과 동시대적이다. 척도의 부재는 곧 기호들의 서열 없음, 달리 말해 기호들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아방가르드 시대에 이것은 예술의 탈장르화를 의미했고, 벤야민에게 이것은 아우라의 사라짐을 의미했다. ‘장르’는 예술을 다른 분야 혹은 생활 전반과 구분하는 경계였는데, 주지하다시피 아방가르드 예술의 에너지는 그 경계를 분쇄하거나 넘어서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또 장르는 가령 서사시나 모험 소설이 영웅을 서사적으로 특권화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만들듯 사물들의 고정된 서열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여성향’ 소설과 ‘남성향’ 소설이 그렇듯, 장르 속에는 남성과 여성 신체를 배치하는 고정된 틀이 있다. 반대로 거대병렬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작품에서 더 의미 있거나 의미 없는 이야기는 없다.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떤 인물이 귀족이나 영웅이어야 했던 시기는 끝났다. 회화의 중심 소재가 되기 위해 그 대상이 반드시 아름답거나 숭고한 것이라는 합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또 인물의 정체성이나 신분이 그 인물의 행위에 예측 가능한 틀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무엇이든지 예술작품의 표면에 놓일 수 있다. 배경과 주인공의 위치는 뒤바뀌거나 그 경계가 흐려지게 된다. 이처럼 민주적인 조건 속에서 기호들은 자유롭게 뒤섞이고, 나란히 놓이고, 재편성될 수 있다. 이러한 배치의 놀이가 감각적 효과를 낳는 것이다. 하지만 ‘거대병렬’은 단지 포스트모던적인 혼종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황인찬의 시 「멍하면 멍」은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고”처럼 잘 알려진 김수영의 시구와 “멍하면 멍 짖어요”라는 우스갯소리를 나란히 놓는다.10 이것은 지식인의 기념비적 이미지, 반성을 강요하는 지성의 무거움, 혹은 문학사에 대한 조롱이다. 이 가벼운 조롱이 웃음기 가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여기에는 역사적 대결 의식, 최소한 반항적인 의지 같은 것이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황인찬의 이런 시들을 여전히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징후”로 읽곤 했다.11 포스트모던은 그 혼종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에 대한 계승, 반대, 대결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선형적인 역사적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더 최근의 시에서 신은 코스트코 빵을 나눠주는 판촉 사원이 되고(문보영, 「입장모독」12) 김수영은 똑같이 생긴 여러 명의 함바집 인부가 된다(서호준, 「김수영 월드」13). 이때 ‘신’이나 ‘김수영’은 이미 아무 권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결할 역사적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이나 김수영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신’과 ‘김수영’이라는 기호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이냐이다. 배치를 통해 ‘신’이나 ‘김수영’에 대한 달라진 우리의 감각을 드러내고 또 그 감각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반항은 서열을 전제하지만, 배치는 나란함을 전제한다. 배치는 반항보다 훨씬 가볍고 날렵하며, 동시에 공허하고 위태롭다.

우리가 시를 권력과 항거의 변증법이라는 ‘역사적’ 문제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가 미술비평가들이 ‘동시대’라고 불렀던 시간성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14 하지만 이러한 시간적 모델은 예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를 수반한다. 기호와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를 통해 서열과 차이를 횡단하려는 경향이 낭만주의나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나 ‘동시대’라고 불리는 어떤 시기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다. 크게 보면, 국경이나 시기나 저자에 국한할 것 없이, 거의 모든 현대 시가 이 경향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보들레르는 ‘거리의 언어를 쓰라’는 명령을 남겼고, 마야콥스키는 ‘절대 고상하게 쓰지 마라’고 직언했지 않은가? 항상 요지는 ‘시의 언어’와 ‘거리의 언어’를 분리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언어의 결합 방식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시들은 항상 우리의 언어 구석구석에 있는 관습적인 고정관념을 비춰왔다. 언어 속에 있는 차별과 서열을 횡단하기, 이것은 현대 시에 일반적인 문제 설정이었다. 말하자면 ‘거대병렬’은 특히 언어와 관계하는 시 장르에서 ‘기호의 이질적인 배치를 통한 유희’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경향은 긴 시간 속에서 무수한 방식으로 실험되었고, 시대나 장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첨예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따져보려는 것은 작품의 숙련도나 소재의 새로움이 아니라, 작품들의 기저에 있는 사고의 모델에 관한 문제이다. 예술작품의 문법이나 소재는 업데이트되어왔지만, 예술적인 것과 예술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을 횡단하려는 경향 자체는 지속되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말과 소재를 나란히 놓으려고 하는 경향을 현대 시의 ‘민주주의적인 경향’이라고 해보자. 시인이나 시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표출해서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 지니는 횡단적인 특성에 따라 시가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에, 서열화된 의미의 해체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여기서 염두에 두는 것은 랑시에르가 말한 의미의 민주주의이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확립된 역사적·국가적·법적 체제가 아니라) 감각과 인식의 재편성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정치적 역량을 의미한다. 예술적 창안 역시 바로 그러한 정치적 역량의 행사에 다름아니다. “그에게 정치는 감성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15

그런데 랑시에르 본인이 지적하고 있듯 현대 예술의 민주주의적인 토대 혹은 ‘거대병렬’은 기호의 공허한 자동운동 혹은 자본주의적 분열증과 “거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에 의해서만 분리되어 있다.”16 자본주의 역시 기존의 가치의 서열을 해체하고, 이질적인 기호들을 뒤섞으면서 새로운 시장을 끝없이 창출하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관습적인 구분을 넘나들려고 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영토의 경계 혹은 사회적 구분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시장을 계속해서 창출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한 시인의 말대로 시는 언제나 “시 밖으로 나가려”17 하고, 그처럼 자신을 버리는 모험 속에서만 시가 된다. 시의 ‘바깥’이 없다면 시의 운동은 멈추게 되고, 그러면 시 자체가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팽창할 영토가 없어진다면 자본주의 역시 기나긴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현대 시와 자본주의는 둘 다 그 중심이 비어 있고, 다만 혁명적으로 비약하면서 넓어지는 운동 그 자체로 유지된다. 물론 이 지구상에 더는 식민화할 ‘실제’ 영토가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쇠락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장르의 교배를 통해 ‘형이상학적 시장’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는 영토의 부재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기호의 증식을 따라 인간이 사는 땅을 소외시키며 상승한다. 총체적인 장르화 경향 속에서 촌스러운 것과 세련된 것,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위계는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문화적 경계는 계속해서 흐려지게 된다. 장르의 자동운동이 펼쳐지는 세계는 중세이면서 미래다. 생존 서바이벌이면서 소꿉놀이이고, 모험물의 배경이면서 거대한 광고판이다. 자유도가 높은 연애 시뮬레이션 공간이자 일손이 몹시 부족한 물류창고이다. 장르들의 자동운동은 모세혈관처럼 구석구석 뻗어가면서 문화의 죽은 요소들에 혈류를 공급하고, 동시에 변덕스러운 유행을 뒤쫓아가야 한다는 조급함을 조장한다.

7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70쪽.

8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85쪽.

9 이시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석기용 옮김, 필로소피, 2021, 220~264쪽 참조.

10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4.

11 장이지 해설 「패쇄회로의 시니시즘」, 같은 책, 131쪽.

12 『책기둥』, 민음사, 2019.

13 『소규모 팬클럽』, 파란, 2020.

14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는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동시대 미술의 핵심적인 특징이 ‘탈역사’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김광우 옮김, 미술문화, 2004, 56~57쪽 참조.

15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76쪽.

16 『이미지의 운명』, 85쪽.

17 이수명, 『표면의 시학』, 난다, 2018, 19쪽.

3.

그런데도 최근까지 한국 문학장에서 ‘장르적인 것’과 문학의 불순하면서도 유희적인 관계는 종종 새로움의 표시처럼 평가받아왔다. 가령 이광호는 이상우의 소설집 『프리즘』에 대해 “실험문학의 엘리트주의적 ‘특권 의식’을 무화시킨 자리에서 시크한 포즈로 장르적인 것들과 실컷 어울”린다고 상찬한다.18 물론 이상우의 텍스트가 장르적이면서도 시적이라는 이광호의 평은 타당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장르의 어울림이라는 모델 자체는 오늘날의 문화에 흔한 것이다. 지금 모든 장르적인 요소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교호交互하고 있다. 오늘날 장르 소설은 점점 더 ‘남성향’과 ‘여성향’의 요소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양상을 띤다. 많은 웹 소설 플랫폼에서 판타지, 무협, SF, 루프물, 로맨스, BL, GL 등의 장르가 서로 뒤섞이면서 다변화되고 있다.

가령 (실제로 성인물 웹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인데) 동물이나 반인반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르를 뜻하는 ‘퍼리물’과 소년들의 연애를 다루는 장르인 ‘BL’이 뒤섞여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서로 연애 관계에 있는 두 소년 중 한 쪽(혹은 두 명 모두)은 동물의 귀나 꼬리가 달린 모습으로, 심지어는 주둥이가 튀어나오거나 털에 뒤덮인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여기서 이 트랜스-장르의 창출은 동시에 새로운 욕망의 생산이다. 시장을 형성할 만큼 충분히 많은 사람이―BL의 상품화된 동성애 코드에 더욱 금기시되는 수간(獸姦)의 맥락을 덧입힌―‘BL-퍼리물’을 욕망했기 때문에 그런 트랜스-장르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런 장르가 플랫폼에 재현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욕망하고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르의 공급이 있어서 욕망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처럼 트랜스-장르의 자극적인 생산은 자본주의가 욕망을 견인하고 구성하는 방식이며, 사회적 금기나 정치적 불화를 상품화하는 방식이다. 상이한 장르들이 뒤섞여 제3의 장르로 진화하면, 독자들이 새로운 장르 속으로 자연스레 흘러 들어간다. 그런 방식으로 장르들은 뒤섞이면서―마치 미개척된 신대륙을 발견하듯이―새로운 시장 혹은 상품란을 끝없이 형성해 나간다.

오늘날 문학과 ‘하위문화’의 뒤섞임도 시장의 이러한 요구 혹은 경향을 반영한다. 물론 제도적으로 구분된 플랫폼 사이에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기는 한다. 잘 알려진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의 편집과 교열 수준은, 웹 소설 플랫폼에서 읽을 수 있는 장르 소설에서보다 평균적으로 높을 것이다. 또 ‘순문학’은 종이책의 형식이 여전히 더 어울리고, 웹 소설은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판형으로 읽는 것이 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도 점점 더 흐려지거나 다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점점 시를 e북으로 접하고, 종이책으로 재출간된 웹 소설을 자주 읽게 되고, 점점 더 여러 플랫폼과 잡지를 취향에 따라 선택하게 되면서 말이다.

이미 많은 독자에게 ‘순문학’ 혹은 ‘실험문학’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수많은 장르 중에서 다소 어렵고 따분한 하나의 장르를 의미할 것이다. 아니면 어렵고 모호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매력적인 하나의 장르일 수도 있다. 장르적인 것과 뒤섞이면서 문학의 외연을 넓혀가는 전략의 미학적 유효성을 긍정하려면 ‘문학’과 ‘하위문화’ 사이에 여전히 완고한 서열이 있음을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로질러야 하는 서열이 있다는 가정 자체가 이미 사라진 서열을 상상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여전히 그런 구분이 있다는 가정 자체가 보수적인 제도의 관점일 수 있는 것이다. 장르적인 것과 대범하게 어울리는 소설의 사례를 제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 소설의 평균적인 미학에 들이닥친 예기치 않은 침입자”19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밈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편재하는 ‘트랜스-장르’의 사례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팬픽이나 웹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요소가 ‘제도 문학’ 속에서 모종의 진화를 거쳐 발견되고, 그 역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흔하게 일어난다. 예술이 하위문화로부터 쓸만한 원자재를 수입한다는 식의 설명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든 긍정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든 정확하지 않다. 그보다는 경계 없는 장르들의 우주에서 기호들의 엔트로피가 끝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현실에 더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우리의 책장과 장바구니 속에 이미 모든 것이 어울려 섞여 있듯, 그런 어울림 혹은 엮임assemblage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퇴행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제 새로운 것도 아니다.

삶의 장르화가 우리 시대에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그리고 ‘급진적’이라는 말이 문화의 지배적인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면) 오히려 급진적인 예술은 ‘삶의 장르화’에 반대하여 ‘예술의 삶-되기’라는 공식의 업데이트를 요구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임무가 제도적 예술이나 특정한 플랫폼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문학의 탈중심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차별적으로 뒤섞이고 있는 장르들의 평면 속에서 어떻게 삶을 재발명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18 이광호, 「누가 비트를 두려워하랴―이상우와 소설의 유령들」, 《문학과 사회》, 2015년 여름호, 341쪽.

19 같은 페이지.

4.

하지만 무엇이 ‘급진적’인지를 말하기 전에, 오늘날 일반화된 밈의 논리를 단순하게나마 검토할 수 있다면 유익할 것이다. 거기에 비추어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짚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인터넷 밈은 추상적인 밈의 논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넷 밈은 삶의 구체적인 차이, 고통, 모순을 장르적 코드나 한갓 웃음 속으로 환원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인터넷 밈에는 현대 시의 사례에 필적할 만큼 심오한 면도 있다. ‘이질적인 기호들의 배치’ ‘주체와 대상의 혼동’, ‘인간과 비인간의 뒤섞임’, ‘동물-되기’, ‘기계-되기’ 등의 시론적 테마는 인터넷 밈의 단골 소재이다. 유명한 정치인, 독재자, 활동가, 연예인은 인터넷 밈에서 동물이나 사물이 된다. 독재자나 CEO는 우스갯소리를 어눌하게 되풀이하는 ‘짤’이 되어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이때 실제 인물의 권위와 ‘짤’의 우스움 사이의 격차가 클수록 더 효과적인 밈이 된다(즉 더 활발하게 패러디된다). 인터넷 밈은 혐오 발언과 편견, 스팸 이미지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실어나르지만, 동시에 사회적 권력, 젠더, 인종, 계급 등의 구분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넘나들기도 한다. 우리는 밈에서 광범위하게 실현된 ‘민주주의적 시학’을 재발견할 수 있다. 문화 속에 극히 세분된 서열을 만들어내는 장르들의 인정 투쟁은 밈화된 시대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밈’은 모든 기호의 위계를 휩쓸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예외적 역량이기도 하다. 가령 주식이나 코인을 유도하는 일론 머스크의 말과 사진은 누군가에게는 동경을,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심한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밈이 되어 이런저런 방식으로 패러디되면 점차 동경도 분노도 박탈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웃음거리로 변한다. SNS를 비롯한 오늘날의 일상이 심한 박탈감과 열등감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면, 밈은 그러한 정념을 가벼운 웃음으로 망각하게 한다. 유행하는 콘텐츠들이 뚜렷한 차이와 서열을 생산한다면, 밈은 그 차이들을 자신의 순환 속에 녹여 없애버린다.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설명했던바 자본주의는 기존의 사회체와 그 사회체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봉건적·가부장적·목가적 논리―를 해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밈의 경제는 마르크스의 예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간다. 밈의 압도적인 순환 속에는 ‘부르주아지’라는 주체도 없고, 주체가 없으니 ‘이기적 타산’도 없다. 오히려 밈의 경제에서 주체는 공허한 관념일 뿐으로, 밈을 유통시키는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거나 “유일한 주체는 욕망 그 자체이다.”20 밈을 생산한 창작자의 독특성은 그것의 끝없는 재생산 속에 서서히 용해되어 사라진다. 그런 방식으로 밈은 진정한 ‘저자의 죽음’에 도달한다. 재미있는 콘텐츠는 계속해서 복제되고 재생산되면서 원래의 내용과 형식을 잃어버리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진화가 활발하게 일어날수록 더 유리한데, 밈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콘텐츠의 이런저런 고정적 정체성이 아니라 끝없는 재생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창작자는 주체가 아니다. 말 그대로 ‘유일한 주체는 순환의 욕망 그 자체’이고, 콘텐츠를 창작하거나 패러디하는 사람들은 밈의 운반자 역할을 할 뿐이다. 밈은 (그 기원부터 유전자에 빗대어 생긴 개념으로서) 그것을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인간 주체를 장르나 콘텐츠를 전달하는 물리적 숙주에 불과한 것으로 사고하게 유도한다.

인터넷 밈의 감각적 생산물들은 끝없이 다양하다. 그래서 온종일 보고 있을 수 있지만, 다음 날이면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몸에 남는 것은 거대하고 공허한 순환의 감각뿐으로, 웃긴 이미지나 이야기의 다양성이란 일의적인 순환의 욕망이 낳은 환영들simulacres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로 그것―일의적인 존재의 다양한 메아리를 남기는 순환―이 들뢰즈가 자신의 시학에서 언제나 원했던 것이었다. “인간을 위한 것도 신을 위한 것도 아닌 빈칸, […] 인칭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닌 특이성들. 인간이 꿈꾸고 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와 자유, 효과 창출에 기반하는 순환들, 메아리들, 사건들이 이 모든 것들을 가로지른다. 빈칸을 순환시키는 것,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21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의 시학이 말하는 비인칭적인 ‘빈칸’에 대응하는 것을 두 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자본과 시이다. 자본이야말로 감각적 메아리들을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모든 분열자를 예외적으로 능가하는 잠재적 욕망 자체다. 한편 시 역시 “인칭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닌 특이성들”로서 감각과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오늘날 모든 것을 자신의 메아리로 만들어버리는 빈칸으로서, 밈은 자본의 경향성과 시의 경향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이 교차 속에서 일종의 ‘시적 물신’으로서 NFT 같은 화폐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지금 말하는 ‘시’는 하나의 장르나 매체로서의 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어떤 형식을 해체·조립하면서 감각적 효과를 산출하는 기호의 역량 자체다. 이 역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식의 시도 분쇄하고 재조립해 버린다. 지금 (장르로서의) 시는 한 연만 골라 찍은 사진, 캘리그래피, 감성적인 그림에 곁들인 문구, 스팸 광고에 함께 기재된 ‘오늘의 좋은 글귀’로 분해되어 이미지 파일로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미지 파일이 된 시를 볼 때 새삼 느끼는 것은 (장르로서의) 시가 전방위적인 밈의 유통 경제에서 대단히 불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장벽은 (이미지가 아닌, 그리고 영어가 아닌) 언어라는 불편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혐오 발언과 선정적인 이미지, 스팸 광고를 무차별적으로 실어나르는 인터넷 밈과 달리 시는 윤리적·지적으로 ‘수준 높은’ 감독을 받는다. 이것은 밈의 즉각적인 자극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를 한층 더 따분하게 느끼게 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더 자극적으로 만들고, 검열을 제거하고, 시집을 눈에 띄게 포장한다고 해서 시가 밈의 막대한 유통과 경쟁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쟁점은 글의 내용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따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22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이미지의 피상적인 자극에 홀딱 빠진 나머지 시를 즐기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에게 기호들의 이질적인 배치를 통해 유희하고, 거기서 어떤 비약적 의미를 산출하려는 ‘시적 본능’이 있다면, 동시대인은 그 본능을 포만하게 충족하고 있다. 밈이 기호와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충분한 시적 경험을 생산과 소비 양쪽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굳이 종이에 글자로 쓰인 시를 찾아볼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밈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향이 편향된, 자본이라는 단 한 명의 천재 시인이 생산하는 막대한 양의 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밈의 무한한 다양성은 동시에 지극히 일의적이다.

그래서 아마도 동시대의 특징 하나는 다음처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과 시가 서로의 ‘수준’에 도달한 시대. 시는 교환 가능한 추상적 재료가 되고, 자본은 독자적이고 재미있는 시학을 갖게 된다. 그 교차 속에서 밈의 경제가 형성된다.

이 경제를 설명하기 위해 동시대 이미지 경제에 계급론적 틀을 부여하는 시도를 해봐야 헛된 일이다. 가령 독일의 미술가 히토 슈타이얼은 고자본 미디어의 해상도 높은 이미지에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잡다한 콘텐츠들과 ‘3세계’ 영화의 ‘빈곤한 이미지’를 대립시키고, 빈곤한 이미지의 연대를 통해 미디어에 지배적인 시각적 위계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3 하지만 오늘날 이미지의 계급적 정체성은 전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미지는 계급투쟁을 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옷을 갈아입고 치장하면서 문화 속에 살아남기 위해 인정 투쟁을 한다. 밈은 NFT의 사례들처럼 비쌀 수도 있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짤’처럼 (디지털 풍화를 겪은 나머지) 빈곤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가 밈으로 살아남기에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밈은 양극단의 계급적 성격과 이질적인 정체성을 동시에 갖는데, 이질적인 요소가 뒤섞일수록 밈으로 살아남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레트로한 밈 이미지를 활용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광고처럼, 이미지는 외양상 ‘빈곤’하더라도 기호의 경제에서는 오히려 매력적인 것, 비싼 것일 수 있다. 밈의 순환을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은 이미지의 외양에 대한 계급적 정체성 식별을 바탕으로 한 유사 유물론이 아니라, 기호들의 산만한 분산과 조립을 설명하는 형이상학-미학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양적 완화가 특이점 너머로 밀어붙인 세계의 형이상학-미학화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기관 없는 몸 위에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주체인 분열자를 온 힘을 다해 생산하는 경향성이 있다. 이 주체는 자본가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이 경향성으로 늘 더 멀리 가면, 마침내 자본주의는 자신의 모든 흐름과 더불어 달나라에 이를 것이다. 물론 아직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24

20세기의 저자들은 ‘아직은 달나라까지 가지는 않았다’라고 썼다. 그런데 올해 초 가상화폐와 ‘밈 주식’에 사활을 걸었던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 주식이나 가상화폐의 형이상학적인 치솟음을 따라 ‘달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신난 듯하면서도 자포자기한 듯 들리는 이 구호에는, 어차피 이 가속화된 자동운동을 멈출 수 없다면 누구보다 빨리 이 운동에 동참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올해 초 베스트셀러였던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 역시 이러한 경향의 가속화에 대한 한 보고서로 읽을 수 있다). 이 탈코드화 경향에 앞장서는 ‘분열자’는 삶의 모든 것을 장르적 요소로 취하는 자이다. 즉 분열자에게는 예술이나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노동, 질병, 사회적 적대, 고독, 가난 역시 장르이다.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그러한 장르들의 ‘믹스 앤 매치’로 형성된다. 마치 주식을 하는 사람에게 기업의 비리, 정치적 추문, 빈부격차, 기술적 진보, 전쟁의 위협, 전염병, 장기 불황 따위가 주식 매매를 위해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경제적 요소로 환원되는 것과 같다. 밈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심지어 나의 안위나 재산이 걸린 일이라 하더라도, 이런저런 장르적 요소의 조합으로 여기는 데 익숙해졌다.

20 『안티 오이디푸스』, p. 61, 135쪽.

21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153쪽.

22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48쪽.

23 히토 슈타이얼,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참조.

24 『안티 오이디푸스』, 70-71쪽.

5.

그렇다면 지금 예술은 어떻게 밈과 구분될 수 있는가?

잘 알려진 첫 번째 대답은 ‘제도’이다. 이제 밈과 예술작품 사이에 내재적인 변별점은 없지만,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예술계’나 ‘신scene’이 있어서 무엇이 예술이고 아닌지를 분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미술에서, 가령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1962)에도 뒤따랐던 설명이다. 마트에서 무차별하게 유통되는 캠벨 수프 캔과 달리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은 미술 제도와 제도 내적 존재들(비평가, 미술관의 관객, 동료 작가 등)을 의식하고 만들어졌고, 그 점이 평범한 상품과 예술작품을 분리해주었다. 만약 그렇다면 〈캠벨 수프 캔〉처럼 도발적인 작품은 제도적인 구분을 횡단하는 동시에 바로 그 도발을 통해 제도적 권력을 보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이해하기 쉽고, 여전히 참고할 만하다. 제도 자체가 다변화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제도는 재현되는 것의 경계와 위계를 관장하는 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이 오직 제도의 인정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제도를 벗어날 수 없는 심급이라고 생각할 때 예술적 실천 또한 제도에 대한 저항 아니면 복무로 축소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역사적인 제도 비판 미술에서 종종 볼 수 있었듯이 예술작품은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 시장에 의존하고, 시장을 비판하기 위해 제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우왕좌왕하고 말 것이다. 시장이 기호를 탈영토화하고 제도가 기호를 재영토화한다는 점에서, 시장과 제도는 구조적으로는 공생 관계이지만 일시적으로는 서로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활동/작품은 재현되는 한에서 제도 아니면 시장에 반드시 의존할 수밖에 없다(상품화·제도화를 전적으로 거부한다면 결코 문화 속에 현시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두 번째 대답은 ‘진정성’이다. 밈의 순환은 모든 문화적 산물에서 진정성을 녹여 없애버리지만, 여전히 예술작품은 진정성을 담지하거나 전달하거나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런 종류의 진정성, 즉 사회의 일반적 흐름과 구분되는 예술가의 진정성은 낭만주의가 낳은 관념이다. 진정성은 속된 사회에 거리를 두고 자신의 ‘실존적인 미학’ 혹은 ‘자기 통치’를 지속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성은 엘리트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라는 혐의를 받긴 해도 속물 자본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성을 띠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논리’는 이러한 낭만적 부정성을 자본주의적 매력의 통치 아래 흡수한 결과다. 즉 동시대에는 개인주의, 다원주의, 기호들의 사유화, 가치의 주관화, 예술가-되기 등 예술의 부정성/창조성이 일반화된 문화적 논리가 되었다. 또 특히 한국 문학장에서 진정성은 1980년대 이후 거대 담론이 퇴각한 이념적 빈자리를 메꾸며 부상한 윤리적 ‘레짐regime’으로 맥락화되곤 한다.25 진정성이 진품성이나 유일성의 관념과 연결되면서 “‘나의 진정성’과 ‘타인의 비진정성’”26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되어왔다는 폭넓은 반성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밈화된 시대의 무분별함에서 모종의 문학성 혹은 글쓴이 개인을 방어하기 위해 ‘진정성’이 복권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특히 이 모종의 문학성 혹은 글쓴이의 목소리가 지금까지는 소외되어온 소수자의 것이라는 명분과 연결되면 ‘진정성’은 다시금 침략 불가능한 요새가 된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트랜스-장르’라는 밈화된 시대의 문화적 전략이 맹위를 떨치고, 반대편에는 진정성이라는 방어 진지가 재구축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존재 증명과 관련된 진정성 관념을 고수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진정한 것과 진정하지 않은 것,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자기중심적인 잣대를 계속해서 세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성의 배타적인 요새 안에 머물 때, 결국 ‘나’라는 중심 기표를 부여받은 존재의 정체성이나 성격만 교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진정성을 증명하는 개인적 사례의 전시가 아닌, 장르들을 가지고 하는 강도intensité의 놀이도 아닌, 예술에 대한 전혀 다른 보편적 비전을 찾아야 한다.

어떤 문학적 사례가 이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미 유사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던 몇몇 평자가 박솔뫼의 소설에 주목한 것은 참고할 만하다. 가령 강동호는 박솔뫼의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강조해야 할 것은 그의 픽션이 안내하는 시공간이 모종의 초현실주의적이고 탈역사적인 장소일 수 없다는 점이다. […] 박솔뫼의 픽션적 정치성은, 그러한 공간을 누구도 온전히 점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곳을 향해 자신을 포함한 더 많은 사람이 연루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과정에서 확보되는 것처럼 보인다.”27 즉 박솔뫼의 소설은 재현의 우선순위 혹은 위계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사라진 세계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세계의 풍경을 탈역사화하지 않는다. 이 글의 어휘로 말하자면 ‘거대병렬’을 토대로 하면서도 장르나 기호의 놀이로 빠져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충분히 장르화·서사화될 만큼 인상적인 것들을 소설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박솔뫼 소설의 특징이다. “이두현의 영화에서는 무척 인상적으로 찍힐 것이 분명하고 중요해 보일 법한 장면들이 프레임 밖에서 벌어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 무언가를 중요해 보이게 만들고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일을 이 영화감독은 지겨워하는 것이다”(「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28). 많은 비평가가 평했듯 박솔뫼의 소설에서는 중요한 것 혹은 중요한 이야기가 빠져나간 픽션의 평평한 공터를 익명의 형상들이 채우고 있다.

물론 지금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박솔뫼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소설과 시의 많은 사례가 장르적인 효과를 덜어내고 가능한 ‘평평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상우의 『두 사람이 걸어가』는 『프리즘』에 있었던 장르적인 ‘고어함’을 비롯해 모든 작위적인 장치들을 벗으려고 하는 듯 보인다. 일관된 서사를 전혀 만들지 않는 산만한 요소들 사이에 한 줄의 일기가 마치 선언처럼 있다. “이들은 그냥 존재한다.”29 이 말은 일견 책에 산만하게 나열된 모든 것에 대한 긍정처럼 읽힌다. 존재를 말하는 데 있어 문학이 어떤 의미도 서사적 전략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한마디로 문학이 사물에 ‘그냥 존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문학작품의 표면에서 소외되거나 추방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가』에는 더욱 의심스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그리는 공간은 그 구체적인 말과 사물의 나열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초현실주의적이고 탈역사적인 장소”처럼 보이는데, 소설이 밝히고 있듯 이 다양한 말과 사물이 몽땅 “하나의 국가, 외국이라는 픽션의 소유”(p. 120)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퇴물들”(p. 39)과 어느새 낡은 역사적 이름들, 까다로운 유행의 감별사와 최신의 것들이 서로 경쟁하고 야합하는 이 “하나의 국가” 속에는 국경이 없다. 이 기호들의 무정부 상태는 거대병렬의 한 예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밈화된 시대의 전형적 풍경으로도 읽을 수 있다(실로 이 책 속의 초국적 공간에 아우라의 위계는 없지만, 매력의 서열은 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이 걸어가』는 오히려 과장된 장르적 장치를 소거함으로써 삶 자체의 장르화라는 동시대의 조건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외국이라는 장르, 문화적 대화라는 장르, 다국적 어울림이라는 장르, 현대 예술이라는 장르 등의 배열이 『두 사람이 걸어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두 사람이 걸어가』에 “이들은 그냥 존재한다”라는 탈장르적 선언과 삶 자체의 장르화라는 모순된 경향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평평하게’ 될수록, 즉 다양한 기호들과 위계 없이 뒤섞일수록 예술작품은 밈화된 시대의 일반화된 경향에 더 치명적으로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순수문학’ 혹은 ‘진정성’의 가치를 드높임으로써 장르들 혹은 기호들 사이에 위계를 재도입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중요한 문제는 밈화된 시대 속 장르들의 생존 전략인 ‘혼종성’으로부터 삶의 임의성과 다면성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삶의 제거할 수 없는 임의성과 다면성은 삶의 어떤 면을 명명할 수 없게 하고, 망각하게 하고, 체념하게 하고, 때로는 강렬한 정동으로 휘어잡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삶의 그런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문학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특한 개인’이라는 환상에 기대는 진정성 증명과는 다른 일이다.

‘제도의 인정’에도 ‘진정성 증명’에도 의존하지 않는 세 번째 길은 장르화된 세계의 공백으로부터 출발하는 길이며, 제도와는 비스듬한 관계만을 맺는다. 누군가의 마음속 진정성을 격하하지도 않지만, 진정성에 특별한 미학적·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진정성을 최종 선택지에서 제외한다면, 우리는 ‘예술과 밈이 어떻게 구분되는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독특한 작품 혹은 한 명의 예외적인 예술가만으로는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 또 제도적 측면에서 예술과 밈은 형식적으로 쉽게 구분될 수 있지만, 그러한 형식적 구분에 의존하는 것은 예술의 민주주의적 토대 즉 ‘거대병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현재 생성되고 있는 예술의 연쇄적인 창안으로부터 어떤 의미의 전선을 구축하기 전까지 예술적 사건과 밈의 순환이 어떤 측면에서, 어떤 방법으로 구분될 수 있는지 확실히 정의할 수 없다. 즉 밈과 구분된 ‘문학’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확보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혼잡한 장르들의 우주에서 순수문학의 영토를 탈환하자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장르문학’의 새로운 사례들이 오늘날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이 문제 삼은 것은 삶 자체의 장르화 경향을 어떻게 사고하고, 그 전반적인 경향 속에서 약간 다른 방향을 찾을 것이냐이다.

오늘날 점점 더 표면적으로 되어가는 수많은 문학적 사례 속에는, 그 ‘표면’을 어떤 이름으로 점유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삶의 장르화’에 저항하는 실천들이 있다. 이 실천들은 당연히 ‘순수문학’의 제도적 범위나 ‘순문학’의 본질주의적 환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그 실천들을 엮어내면서 밈과 동시대 예술의 분리 작업을 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작품 혹은 비평의 연결을 중요시할 때, 결국 다시 기성 제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제도의 울타리 속에서만 어떤 문학적·담론적 연속성이 식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제도와 달리, 거대병렬은 밈과 마찬가지로 문화 속에 분열로 현상된다. 거대병렬은 문화적인 구분 혹은 학문 분과를 가로지르면서,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거대병렬의 영속적 경향은 제도의 일관성과 다르다. 그러나 이때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는 오늘날 장르들의 생존 전략인 ‘믹스 앤 매치’와도 다른 것이다.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의 역량은 삶의 독점 불가능한 다면성과 임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장르들을 뒤섞는 문화적 전략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는 무질서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는 열역학 법칙처럼, 모든 발견과 창조는 질서보다는 무질서 쪽에, 체계보다는 혼돈 쪽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분열과 혼돈이 같은 종류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의 생활이 바쁘고 고되어 시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읽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경제’보다 더 뜬구름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경제는 우리의 노동과는 점점 더 상관없는 것이 되어간다. 그러나 이 체계의 허구성을 꿰뚫어 본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조급함과 박탈감을 심어주는 기호의 경제에 의해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기호 생산자/소비자로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이토록 공허한 기호의 경제는 우리를 실제로 부자로 만들거나 빈자로 만들고 있다. 물론 시는 이 경제를 중단시킬 강제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다른 패러다임을 건설할 수 있는 세계의 비어 있는 표면을 발견한다. 오늘날 장르화된 삶만이 재현된다면, 역으로 장르화된 것들의 ‘공백’에 재현되지 않은 삶이 있을 것이다. 밈은 장르들을 마구 뒤섞으면서 세계의 관습적·역사적·이데올로기적 형상이 해체된 혼돈을 향해 간다. 문학은 혼돈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혼돈으로서 세계가 있음’을 토대로 더 멀리 나아간다.

25 낭만주의 이후 ‘진정성의 레짐’이 근대의 다양한 지적·사회적·정치적 조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부흥하고 발현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로는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15 참조. 덧붙여 이소연은 ‘진정성이라는 환상’이 1990년대에 가속화된 문화의 상품화·제도화 경향과 문학 담론장의 ‘권력 구도 재편’ 속에서 한국 문학의 새로운 윤리적 레짐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진정성이라는 환상―1990년대 문학이 타전하는 것」, 《문학과 사회》 2017년 봄호, 183~194쪽 참조.

26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15, 36쪽.

27 강동호, 「문학의 정치―재현·잠재성·민주주의」,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1년 여름호, 30쪽.

28 『우리의 사람들』, 창비, 2021, 202쪽.

29 『두 사람이 걸어가』, 문학과 지성사, 2020, 45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페이지만 병기.

『학산문학』 2021년 겨울호

매력의 경제학

0.

글을 시작할 때 종종 어떤 선문답이 떠올라 망설이게 된다. 그 선문답의 내용은 이렇다.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사람은 일하고 있고, 한 사람은 쉬고 있고, 한 사람은 여행을 갔고, 한 사람은 공부하고 있다. 네 사람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한 다음 스승이 묻는다. “이 중에 돈 욕심이 가장 많은 사람이 누굴까?” 질문에 대한 선문답식 정답은,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는 네 사람의 모든 행적을 돈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고, 또 질문함으로써 제자들이 상황의 모든 요소를 돈과 관련된 것으로 보게끔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 선문답은 비판적 사유가 자신이 비판하는 것에 얽매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 선문답 때문에 ‘매력의 경제’를 말하기에 앞서 고민이 되었다. 동시대 문화에 매력의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논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을까?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비통함을 주입하는 논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머릿속에 한 번 떠오른 이후로 이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낳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매력의 불공평함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를 말하지 않고 건너뛰면, 동시대 문화에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보였다. 그중 하나는 윤리적 판단, 미적 판단, 정치적 판단을 카레에 들어가는 구황작물처럼 한데 뒤섞는 문화적 경향이다. 잘 알려져 있듯 윤리와 미학은 칸트가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에서 따로따로 다룬 문제다. 칸트는 인식의 한계를 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와 취미비판의 한계를 정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각각 영역의 자율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가령 행위는 미적 판단이나 다른 이해 관심을 배제할 때만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도덕적 판단이나 이해 관심을 배제할 때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은 도덕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이해 관심을 추구하면 아름답지 않다. 이것이 ‘무관심한 관심’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이가 이러한 형식주의적 분리 혹은 자율성의 개념을 공격해 왔다. 사회학자들은 취향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역시 사회 구조적·이데올로기적 산물이므로,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에는 당연히 윤리적·정치적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정치란 감수성을 조직하고 감정을 분배하는 문제이므로, 혹은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가르는 ‘감각의 나눔’이야말로 정치적인 문제이므로, 정치적 판단에는 윤리적·미학적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에 드는 생각은 칸트식 분리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형식주의적 분리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 그리고 정치적 판단이 뒤섞여 있다. 단순한 예를 하나 들자면,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예의 없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행을 하는 사람을 보고 종종 ‘미개하다’, ‘빻았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 특히 두드러지게 된 현상이다. ‘미개하다’는 말은 문화적 우열에 관한 판단을 함유한다. 이것은 개발된 것이 곧 윤리적이거나 예의 바른 것이고, 미개발된 것은 비윤리적이고 예의 없다는 식의 잘못된―그러나 점점 더 완고해지고 있는―일방향성을 전제한다. ‘빻았다’는 말은 2016년 이전에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특히 여성의) 못생긴 얼굴을 비하하는 비속어로 사용되었는데, 2016년쯤에 (특히 남성의) 올바르지 않은 언행을 공격하는 말로 전유되었다. 이런 전유의 효력을 평가하는 것과 미적·윤리적·정치적 판단을 뒤섞는 일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것이 별개의 일로 여겨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의 야합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매력의 서열 속에서 보게 한다. 이 서열은 물론 주관적이고 다원적인 서열이다. 그렇긴 해도 윤리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반감이 못난 것, 가난한 것, 후진적인 것, 촌스러운 것에 관한 멸시와 착종(錯綜)되는 경향은 점점 더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실로 최근 한국의 문화적 갈등은, 자신의 적이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조롱하는 전략을 다방면으로 발전시켜 왔지 않은가?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윤리와 미학을 넘나드는 포괄적인 사유가 요구된다는 생각도 맞지만, 이런저런 대상이나 현상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큰 틀에서 윤리적 판단과 미적 판단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문화적 논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매력의 경제학’이라는 말을 공론장에 제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맥락이다. 아직은 근거가 부족한 가설에 불과하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기생충〉(2020)에서 주인공 기택은 경제적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는다. 다른 가족이 자신의 가족보다 훨씬 잘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 적절한 태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듯하다. 그가 심각한 상처를 받고 충동에 휩쓸리는 것은 계급적 차이가 ‘냄새’라는 감각적 문제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런 번역이 있기 전에는 기택도, 그를 지켜보는 관객도 불평등의 의미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많은 학자가 동시대의 ‘젊은 세대’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오찬호, 2013) 같은 책도 있지 않았는가. 확실히 이런 세대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가 ‘냄새’와 같은 감각적 차원의 일로 번역되면 여전히 충격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불평등이나 계급성이라는 추상적 사실보다는 감각적 번역에 가장 민감한 세대일 것이다. 매력과는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오늘날 문제가 되는 ‘공정/불공정’ 역시 평등/불평등의 감각 가능한 범위를 표시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매력의 불평등이 단지 경제적 불평등의 감각적 효과인 것만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매력의 불평등 사이에는 오차를 발생시키는 모호함이 있다(돈이 많아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모호함이 없으면 매력의 경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매력도 갈급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매력은 몸과 깊이 연루되는데, 매력이 한 사람을 신체적 기호들(몸짓, 냄새, 말투, 옷차림, 제스처, 예절, 분위기 등)의 조합(assemblage)으로 파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매력의 경제는 이 기호들의 의미와 위상에 관여한다. 이 경제가 절대적인 것은 전혀 아니지만, 매력의 불평등은 돈의 불평등보다 종종 더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신체나 인격에 대한 모욕은 경제적 상황에 대한 모욕보다 훨씬 직접적인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력의 경제는 정동과 윤리, 미학과 정치, 재현/대표(representation)와 배움의 문제를 포괄하지만, 내 생각엔 특히 장르와 삶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1.

이 글에서는 매력의 경제와 연결 지어 손보미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비교해 보려 한다. 하지만 소설들을 다루기 전에, 이 글의 주장이 뜬금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꼭 인용하고 넘어가야 하는 텍스트가 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클레르 파르네의 대담 일부인데, 매력을 비평적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중요한 텍스트다.

사람들은 항상 메이저리티의 미래를 생각합니다(“내가 위대한 사람이 된다면, 내가 권력을 갖게 된다면……”). 하지만 문제는 ‘마이너리티-되기’입니다. 즉 문제는 어린이·미치광이·여자·동물·말더듬이·이방인인 척하거나, 흉내 내거나, 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 새로운 무언가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personne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기호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력은 필연적으로 이기는 주사위 던지기입니다.1

흔히 ‘반전 매력’을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도 매력의 핵심은 가치의 전환이다. 즉 일반적인 관점에서 결점인 특징도 독특한 조합 속에서는 강점으로 전환된다. 아니 바로 그 약점 때문에 누군가는 매력적으로 된다. 이처럼 놀라운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들뢰즈에게 창조적 글쓰기와 삶의 역량은 동일하다. 매력은 기호를 사유화(私有化)할 수 있는 역량, 혹은 들뢰즈식으로 말해서 ‘가치를 주관화’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들뢰즈에게 예술은 가치를 주관화하는 역량 그 자체다.

삶의 원천으로서 매력을 글쓰기의 문제와 연결 짓는 것은 아름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확히 들뢰즈적인 의미의 매력이 동시대 문화의 재현 논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인스타그램은 사람을 수많은 기호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장르로 파악하게 한다. 기호가 조합되는 특정한 방식을 ‘장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 오늘날 매력이 자산이 된다는 말은 전혀 은유가 아니다. 높은 팔로워 수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예술가, 가게 주인, 스타트업 창업가, 정치인, 활동가에게 SNS는 점점 더 중요한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것, 나의 활동, 혹은 나라는 존재를 욕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를 기호의 경제 속에 계속해서 노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을 장르화해야 한다. 오늘날 예술가가 SNS에서 하는 일은 단지 새 작품 활동에 관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는 일, 즉 삶 자체의 장르화가 필수적이다. 삶은 패러디하거나, 차용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장르화된 삶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장르화된 삶이란 말하자면 ‘라이프스타일’이다.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 사람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 즉 인플루언서가 된다. 문화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일단 문화 속에 재현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통용되는 문화적 코드를 자신의 욕망에 알맞게 전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만인의 예술가-되기(becoming), 활동가의 프로보커터(provocateur)-되기, 예술가의 인플루언서-되기를 부추기고 있다.

문화에 전면화된 장르들의 경쟁과 야합은 장르의 인플레이션을 부추긴다. 장르의 인플레이션은 매력의 빈부격차를 야기한다. 매력적인 자는 점점 더 많은 문화적 코드를 사유화하는 반면, 매력 없는 자는 점점 더 문화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다고 했다. 우리는 반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매력이 없어서 삶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재현되지 않기 때문에 매력 없는 삶으로 여겨진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셈하는 단위다. 따라서 장르화되지 않는 삶은 전파될 수도, 패러디될 수도, 밈(meme)이 되어 전승될 수도 없다. 동시에 장르들의 인플레이션은 재현되지 않는 것들을 뒤에 두고 어서 앞으로 달려 나가라고 명령한다. 우리가 콘텐츠가 모여드는 곳을 부지런히 순례하지 않는다면 기호의 운동에 뒤처지게 되고, 그러면 우리도 매력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급해 보여서도 안 된다. 매력을 뒤쫓는 느낌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화가가 은은한 마감재를 발라 회화의 표면을 완성하듯이, ‘진정성’이 장르들의 표면을 한 번 덮어서 마지막 처리를 해야만 한다. 아우라가 고전적인 예술의 생산수단을 은폐했듯이, 매력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진정성이 장르들의 공허한 논리를 살짝 가려 줘야 한다.

1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pp. 14~5.

2.

진정성과 매력은 소설 장르가 전통적으로 다뤄 온 문제다. 관련하여 이제 프루스트의 소설과 손보미의 소설의 유사성을 짚고, 손보미의 소설 일부를 읽어 볼 생각이다.2 마침 얼마 전에 18세기 후반 프랑스와 21세기 초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짧은 글이 한 지면에 게재되었다. 그 글의 저자인 허경이 18세기 프랑스와 21세기 대한민국이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최종 판단을 내려 줄 권위의 부재, 문화적 동일성의 와해, 문화나 정치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설명 모델 부재 등.3

그런데 이것들은 매력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는 정치적·문화적 배경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허경의 글은 프루스트와 손보미의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러프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는 듯하다. 물론 프루스트는 18세기 후반을 살았던 작가가 아니라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작가이긴 하지만, 허경이 18세기 프랑스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한 정치적 모호함과 문화적 역동성을 잘 보여주는 소설가이므로, 프루스트의 소설이 “1789년 체제”4의 후반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보미의 소설들은 21세기 한국의 도입부에 속한다. 공교롭게도 프루스트의 소설과 손보미의 소설 모두 1) 감각의 질서에의 비자발적 참여, 2) 미/추와의 대면, 3) 사교계/교실의 정치, 4) “실망과 깨달음의 운동”5이라는 테마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프루스트와 손보미의 소설은 각자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매력이 문제 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프루스트의 사교계에서는 말투, 문체, 표정, 제스처, 목소리뿐만 아니라 턱수염과 옷차림, 입 냄새까지도 세심하게 변별된다. “비단 같은 금빛 턱수염과 잘생긴 이목구비, 콧소리, 강한 입 냄새와 의안(義眼)”(❶ p. 154)……. 이것들은 인물을 구성하는 기호들로 파악된다. 화자는 이러한 기호들의 차별화 작업을 통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세련된 것이고 무엇이 천박한 것인지를 배운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인 구별에서 출발하는 명증한 배움이 아니라, 극히 미세한 차이들을 확보해 가는 감각적 배움이다. 초반부에서 이 배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대상은 화자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 질베르트의 아버지인 스완이다. 화자에게 스완은 고통스러운 의문의 대상이다. 화자는 그가 우아한 사람인지 천박한 사람인지, 세련된 사람인지 촌스러운 사람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다. 부르주아이고, 사교계의 핵심 인물들과 고위 귀족들과 친하고, “재치와 매력에 대해 끊임없이 까다롭게 굴”(p. 157) 만큼 세련된 취향을 가졌으면서도 범속한 사람들과 호들갑스럽게 어울리며, 천한 직업의 여인과 결혼한 그를 계급적으로 고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성이 프루스트의 화자가 “정신적 혈족”을 변별하는 주관적인 기준을 고도로 발전시키는 아이러니한 원인이 된다. 여러 계급과 인물상이 뒤섞이던 당대의 사교계만큼 “많은 기호들을 방출하고 집결시키는 영역은 없다.(……) 그것들은 계급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정신적 혈족’을 따라서 서로 차별화된다.”6 말하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사교계는 기호들이 등록되고 비교되며, 모방되고 평가되는 장(場)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작품이 시대의 단순한 반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적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당대 사교계의 계급적 모호성이 프루스트를 기호에 극도로 민감한 사람으로 훈련시켰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가 매력의 세분화된 서열과 그 자잘한 표식들에 예민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교계나 극장, 위락정원 등이 부르주아에 의해 흥행하게 되었던, 즉 부르주아들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던 당대 프랑스의 문화적 역동성이 있다. 혹은 발터 벤야민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대상을 가리지 않는 프루스트의 산문이 당대에 전면화된 ‘속물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프루스트가 의도했던 바는 상류사회의 전 구조를 수다의 생리학이라는 형태로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상류사회의 편견과 도덕적 기준의 모든 목록은 그의 위험스러운 희극에 의해 파괴되어지고 있다.”7 어쨌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배경에는 귀족 문화를 자신들의 일부로 흡수했던 부르주아 문화의 부흥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소설가가 매력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룬다면, 그 원인을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양가적인 평등주의,8 특히 인터넷과 SNS를 통해 가치가 빠르게 전파되고 전환되는 문화적 역동성, (복장 단속을 하는 학교 같은) 규율 사회와 (매력을 자기 계발의 목표로 가르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 사회가 복잡하게 착종된 한국의 문화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문화적 맥락들을 거치면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화자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매력의 문제에 민감해져 온 것이다.

2 이 글에서 인용하는 소설들은 다음과 같다. 손보미, ① 『디어 랄프 로렌』(문학동네, 2017), ② 『작은 동네』(문학과지성사, 2020), ③ 「해변의 피크닉」(《문학과사회》 2020년 가을호). 마르셸 프루스트, ❶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4). 이하 인용 시 번호와 페이지를 병기한다. 따로 병기하지 않을 시 바로 앞 인용과 동일.

3 허경, 「현재의 진단학―21세기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1년 겨울호, pp. 123~39 참조.

4 위의 글, p. 124.

5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 23.

6 위의 책, p. 24.

7 발터 벤야민, 「프루스트의 이미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p. 108.

8 김종엽, 「‘사회를 말하는 사회’와 분단체제론」,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pp. 15~37 참조.

3.

소설의 ‘비자발적 기억’은 매력의 경제에 진입하는 중요한 입구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여행이 마들렌의 풍미에서 출발하듯이 『디어 랄프 로렌』의 ‘비자발적 기억’은 어떤 박사의 피겨스케이팅에서 촉발된다. 『디어 랄프 로렌』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자신이 악감정을 가진 어떤 박사의 피겨스케이팅을 지켜본다. 그런데 박사의 스핀은 예상외로 너무나 완벽하다. 박사가 선보이는 스핀과 화자의 기억 속 랄프 로렌의 미소가 둘 다 비인간적으로 완벽하다는 감각적 동일성 때문에 랄프 로렌에 대한 연상이 발생한다. 화자는 잡지에서 랄프 로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의 미소가 “‘정말’ ‘매력적’”(① p. 45)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화자는 학창 시절에 수영이라는 아이와 함께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낸 적 있기 때문에, 랄프 로렌의 미소는 화자를 학창 시절의 기억으로 돌려보낸다. 이 무의지적 연상 작용은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의식적인 질서 배면에 있는 감각의 질서를 의식하게 한다. 누군가의 뛰어난 피겨스케이팅 기술이나 아름다운 미소는 이 감각의 질서 속에서 비로소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꼭 마찬가지로 『디어 랄프 로렌』에서도 비자발적인 감각적 질서를 따라가는 과정은 작가가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 감각적 질서를 관장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이므로, 19세기의 예에서도 21세기의 예에서도 작가는 매력의 경제에 관한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매력의 문제에 있어 좀 더 솔직한데, 소설의 표면에 이미 매력의 서열(고상한 사람과 천박한 사람, 위대한 예술가와 그저 그런 예술가……) 속에 인물을 고정하려는 집착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집착 때문에 역설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삶을 결코 어떤 가치의 서열 속에 고정할 수 없다는 진실이다. 짧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19세기의 어린 화자는 스완 부인의 살롱에서 평소에 흠모해 마지않던 시인 베르고트를 소개받는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베르고트와 처음 인사를 나눌 때 화자의 예술에 대한 동경과 세계에 대한 신뢰가 박살나는데, 그 박살의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베르고트가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을 듯이 슬펐다. (……) 그의 책들이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축조했던 베르고트 전체가, 지금 달팽이 모양 코를 보존하고 검은 턱수염을 활용해야 하자 그런 베르고트는 단번에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다. (❶ pp. 215~6)

즉시 내게는 그 책의 가치가 하락하면서(이 하락과 더불어 ‘아름다움’과 우주와 삶의 모든 가치도 더불어 하락했다) 드디어는 그 책이 턱수염 난 남자의 하찮은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❶ p. 218)

이 ‘베르고트의 못생김’에 대한 분노는 한 시인을 향한 몹쓸 인신공격에 그치지 않고 훨씬 심오한 교란을 야기한다. 즉 화자가 마음속에 나눠 놓은 시시한 예술과 위대한 예술, 절대 섞일 수 없는 두 우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못생긴 얼굴이 인간 베르고트에게서 어떤 위대함의 작은 표시도 새어 나갈 수 없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즉 베르고트와의 대면은 (미모·인격의 비범함·예술적 탁월성을 연결하는) 화자의 선입견을 훼절시키고 그가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가치 체계를 재편성하도록 강요한다. 19세기의 어린 화자는 이제 위대한 예술이 범접할 수 없는 개성의 발로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노동의 얻어걸린 결과인지 심각하게 자문하게 된다.

화자가 특히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일수록 엄격한 매력의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화자는 실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매력에 대한 집착은 작가 지망생에게 엄청난 양의 기호들, 차별화된 가치들, 장르의 문법들을 가르친다. 프루스트의 경우, 이것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배움이었다. 하지만 막상 소설은 매력을 개개인으로부터 떼어낸다. 만연체가 인물에 대한 평가를 끊임없이 번복하기 때문에, 사실상 독자는 인물에 대해 아무것도 판단 내릴 수 없게 된다. 마치 기호의 인플레이션이 매력의 경제의 대공황을 불러오는 듯이. 이것이 그 경제의 전문가가 남긴 공산주의적인 교훈이다. 마찬가지로 손보미의 『디어 랄프 로렌』은 크게 보면 랄프 로렌이라는 유명하고 매력적인 남자에 대한 집중으로부터 무명인들의 기억과 이야기에 접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랄프 로렌의 주변 인물들을 추적하는 화자의 여정에서, 처음엔 매력의 절대적인 화신처럼 그려지던 랄프 로렌은 인간적인 이중성과 모호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랄프 로렌처럼 유명하지 않은 다른 인물들의 삶에도 그만큼의 이중성과 모호성이 있다. 이 동등한 이중성과 모호성의 발견은 문화 속에 재현되지 않던 삶의 구체적인 발굴과 동일하다. 따라서 『디어 랄프 로렌』은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로부터 편안하게 벗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작은 동네』나 「해변의 피크닉」 같은 손보미의 최근 소설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즉 오히려 매력의 불평등을 향해 대범하게 나아간다. 그래서 이 소설들은 퇴행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손보미의 소설을 계속 따라 읽어 온 입장에서 드는 생각은 그의 소설이 매우 도발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의 최근 소설은 우리가 한동안 쉽게 말하지 못했던 불편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4.

이제 손보미의 소설에서 비슷한 예를 들어 보자. 『작은 동네』의 화자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개를 키우자고 조른다. 그러자 화자의 엄마는 화자를 데리고 옆집 개를 보러 간다. 그러나 개의 주인인 이웃집 할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누자마자 화자의 감정은 급변한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나는 그녀의 목구멍 안에 작은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점점 더 길게 갈라지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늙은 여자의 눈동자는 탁했고 무언가 막이 씌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늙은 여자는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손상된 육체의 현현이었다. (……) 개를 만지는 것, 나는 그걸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내게 그 집 개, 혹은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개들의 의미가 변했던 것이다. 이제 그건 내가 안고 싶고 눈을 마주치고 싶은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 소중한 대상을 상실했다는 증표였다.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② pp. 57~8)

화자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사랑스러운 강아지는 노인의 “손상된 육체”와 연루되면서 “의미가 변”해버린다. 이제 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연결되고, 급기야 상실을 의미하는 “증표”가 된다. 노인의 육체와의 마주침은, 화자가 그때까지 조부모나 이웃과의 관계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미나 추는 단순히 외양상의 조화/부조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감각적 기호들의 짜임에 신체가 어떻게 접속하느냐의 문제다. 이 점에서 매력의 경제 논리와 ‘무의지적 기억’은 밀접하게 관련된다. 무의지적 기억이 기호들의 계열에의 접속에 관련된 문제라면, 매력의 경제는 감각적 기호들의 편성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언어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신체적 경험의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설명하기 힘든 감각적 경험을 통해 기호들의 의미를 끊임없이 배운다. 이 기호와 이미지의 감각적 엮임이 삶 속에서 축적되면 사람들이 ‘편견’이라 부르는 사고의 비논리적 체계로 굳어진다. 가령 노인의 이미지를 ‘상실’이나 ‘상처’ 등의 기호와 습관적으로 결부해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편견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편견은―세계의 표면에 이미 편향되게 현상되고 있는―감각적 사실들의 짜임에서 기원한다.

손보미 소설에 나오는 ‘작은 동네’나 교실의 상황은 물론 매우 구체적이지만, 동시대 문화에 대한 통렬한 알레고리처럼도 보인다. 이 알레고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매력의 경제 속에 그어져 있는 ‘분할선’이다. 말하자면 발언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분할선. 손보미의 소설에서 아이들은 매력의 문제에 종종 어른 이상으로 민감하다. 그것은 누가 이 세상에서 사랑받고, 주목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반대로 누가 그렇지 못한지를,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이 민감하게 감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른에게는 매력의 문제가 돈의 문제에 포함된 부수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의 문제가 “돈을 포함한, 훨씬 심오한 문제”다. 이 문제가 가장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공간은 물론 교실이다.

내 기억으로, 모든 아이들이―그게 아무리 싸구려라고 할지라도―플라스틱 단소를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건 돈의 문제일 수도 있었고 돈을 포함한, 훨씬 심오한 문제의 결과일 수도 있었다. (② p. 115)

플라스틱 단소를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아이는 단지 돈이 없는 집안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다. 아이들은 이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혐오한다. 그 사실이 어떤 신체적 기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애는 목욕을 하지 않아서 언제나 머리카락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고, 얼굴에는 언제나 버짐 같은 게 피어 있었다(그게 영양실조의 결과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다). (……) 그 애의 이름은, 그래, 고장연이었는데, 내가 여전히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반의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 애를 ‘고장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pp. 115~6)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무리로부터 떨어진다면, 무리에 정착하지 못한다면 나는 ‘깨끗한 버전’의 고장연이 되고 말 것이라고. (pp. 116~7)

어떤 신체를 “고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신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의미화를 둘러싼 과정이 매력의 정치이고, 교실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화자가 몸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사교계의 유치함, 치열함, 공허함이 손보미의 교실에도 있다. 하지만 교실의 언어에는 사교계의 언어만큼의 호화로움이나 다양성, 여유로움이 없다. 또 교실의 학생들은 여러 사교계를 옮겨 다니며 배우는 프루스트의 화자처럼 배움의 장을 옮겨 다닐 수 없다. 교실은 훨씬 일괄적이고 강제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실은 배움의 강도에 있어서 사교계를 능가한다. “정신적 혈족”이라는 귀족적인 말이 어떻게 교실의 ‘일괄적인’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지 보자.

팔짱을 낀 채 또래 남자애들을 바라보고 혀를 끌끌 차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수준 낮아. 수준 낮아서 같이 못 놀겠어.” 수준, 그래 그 애들에게는 수준이 있었다. 그 애들은 순식간에 교실을 공포로 얼어붙게 만들 수 있었고 (……) 그건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다. (② p. 151)

따라서 핵심적인 문제는 청결하냐 아니냐, 단소를 살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런 문제를 “포함한, 훨씬 심오한 문제” 즉 포괄적인 ‘수준’이 교실의 아이들을 갈라놓고 있다. 수준이 있는 아이들은 매력의 문제에 관한 입법자이고 법원장이고 검찰총장이다. 아이들의 정치에 3권 분립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교실의 정치가 그토록 잔혹해질 수 있는 이유다. 따돌림을 주도하던 아이가 되레 따돌림을 당하는 식으로, 탄핵 역시 매우 쉽고 빈번한 일이지만. 아이들은 이와 같은 매력의 정치를 통해 어쩌면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보다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어디가 이 체제의 다수적인 지점인지, 누가 무시하거나 괴롭혀도 되는 약자인지, 사회에 어울리며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느 정도 수위의 농담을 할 수 있는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남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의 ‘감각’을 말이다.

5.

손보미의 「해변의 피크닉」은 배움의 강도에서 사교계와 교실을 초과한다. 소설적으로 압축된 이 시공간에서는 사교적 기호들, 사랑의 기호들, 정치의 기호들, 예술의 기호들이 마구 뒤섞여 자가증식하기 때문이다. 어린 화자는 해변에서 심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첫 번째 충격은 아름다운 동성과의 대면에서 온다. 처음 만난 삼촌의 여자친구는, “그때까지 내가 만나 본 성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웠다”(③ p. 151). 삼촌 여자친구의 아름다움은, 화자가 ‘난봉꾼’ 삼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사랑과 혼동하기 때문에 더욱 비통하게 다가온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르고 예쁜 저 여자. 그날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어떤 여자를 ‘예쁘다’고 표현하기까지 아주 복잡한 과정들이 수반된다는 점이었다. 그건 단순히 얼굴의 어떤 한 부분―눈이나 코, 입―이 보기 좋다거나, 배열이 잘 되었다거나,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예쁘다는 것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어떤 요소를 초월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 내가 밤에 외운 단어 중 하나가 떠올랐다. 비통하다. (③ p. 152)

이 도발적인 구절의 묘사가 고전적인 예술을 상기시킨다는 것(그래서 더 문제적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고전적인 예술이 생산수단·생산과정의 은폐를 통해 아우라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예쁜 저 여자”가 예쁘기 위해 하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짐작할 수 없게 감춰져 있다. 드러난 외모 때문이 아니라 이 ‘인간적인’ 것들의 은폐 때문에 아름다움은 초월적인 느낌을 준다.

게다가 어린 화자는 아름다운 외모에만 압도되는 것이 아니다. 몸짓과 표정, 말투 등을 꾸며내는 부유한 어른들의 능숙함에 기가 눌린다. 어린 화자에게 해변에 모인 어른들은 흉내 낼 수 없는 매력의 대가들이다. 그들은 감정을 너무 능숙하게 감추고, 연기인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할머니와 삼촌은 어제만 해도 서로를 끔찍하게 미워했는데, 삼촌의 여자친구가 있는 해변에서는 사이좋은 엄마와 아들이 된다. “그들이 서로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내 눈앞에 실재하는 일이었고, (……) 진실된 세계의 모습이었다.”(p. 159) 매력이 문제가 될 때, 실제로 미워하느냐 미워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몸짓, 어떤 눈길, 어떤 목소리를 통해 권위와 존재감, 분위기를 사유화할 것인가가 문제다. 마음을 감추는 어른들의 연출 중에서도 할머니의 연출은 특히 대가다운 솜씨를 보여준다.

할머니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는 주인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자연스러운 생활양식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꾸며진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p. 154)

마침내 나는 낙담했고 패배를 인정했다. (……) 나는 알 것 같았다. 주인의 권위는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가짜 배신자, 작은 협잡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의 그러한 표정, 말투,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그저 그런 속임수가 아니었다. 그래, 그건 진짜 마술이었다. (pp. 158~9)

기호는 공허한 것이지만 기호를 사유화하는 능력, 즉 매력은 속임수가 아니다. 이 점에서 「해변의 피크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정반대의 교훈을 주는데, 이 교훈은 훨씬 냉소적이고 보수적이다. 매력은 몸에 진정으로 배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매력을 완성하는 것은 진정성이다. “주인의 위엄”을 몸에 두르기 위해서는 진짜 주인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화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어린 화자는 교실에서부터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우는 건…… 내가 슬픈 건…… 내가 마음이 아픈 건…… 내가 못생기고 뚱뚱하기 때문이에요.”(③ p. 165)

어른들의 ‘승인’을 받고자 했던 허영심이 극단적으로―반역의 수준으로―나아갔던 만큼, 이 어린 화자에게 허영심의 철회는 치명적이다. 이 철회는 ‘나는 특별해, 나는 그 경제에 속하지 않아’라고 믿는 상상적 일탈을 중단하고 자신의 신체, 자신의 인격, 자신의 존재감을 매력의 경제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촌은 이 “실망과 깨달음”의 원인 제공자이지만, 막상 해변에서는 매력의 경제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삼촌이 가진 존재감이란 할머니가 지닌 진짜 “주인의 권위”에 비하면 “치졸하고 졸렬한 권위”(p. 147)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한 ‘난봉꾼’인 줄 알았으나 여기서는 다정한 아들·남자친구·삼촌을 연기하고 있는 삼촌은 그저 실망스러운 존재다. “나는 진심으로 그 여자가 미웠고, 삼촌에게 지독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가 너무 평범해 보여서.”(p. 154) 마찬가지로 화자의 모든 동경과 질투와 증오는 두 여성에게 집중된다.

그녀에 대한 미움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그래, 나는 그녀를 증오했다. 그녀의 길게 뻗은 목과 쇄골, 꼿꼿한 등을, (……) 그런 생각을 하자 몸이 떨리는 것 같다. 살갗으로 올라오는 무수한 작은 돌기,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것, 순전히 신체적인 영역에 속하는 반응들. (p. 156)

물론 이 도발적인 소설이 ‘여성과 여성의 적대’의 사례인 양 유치하게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소설은 왜 양성이 기호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는가, 왜 “이 세상의 불공평”(② p. 265)에 대한 감각이 성별 이분법적으로 되는가를 역추적한다. 세계를―특히 소설에 재현된 교실처럼 일괄적인 사회 속에서―배우는 자에게는 성별에 따라 복종해야 할 두 개의 질서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일반적인 배움 속에서 ‘여자’와 ‘남자’는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분리된 두 계열의 이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의 신체가 배우는 자를 더 위협하고 더 많은 것을 가르치는 한편, “서로 영원히 섞이지 않을 거라고 맹세라도 한 것처럼”(③ p. 117)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사건이 두 계열을 횡단하고 새로운 배움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면, 두 계열은 언제까지나 각자의 앎만을 고수할 것이다. 양성의 배움의 계열은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분리되어 있지만(그가 특히 매력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스완이나 베르고트처럼 자신이 동경하는 남성 어른들이다), 손보미의 최근 소설에서는 더더욱 심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나눠진 양성의 계열은 프루스트의 경우에는 동성애와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으로 휘몰아치듯 나아가지만, 손보미의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6.

「해변의 피크닉」의 화자는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어른들에게, 혹은 세상에 복수심을 느꼈고, 매력의 정치의 주권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해변의 피크닉”에서 삼촌 여자친구의 미모와 어른들의 능숙함에 압도되고 자신의 초라함에 상처받는다. 할머니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우는 손녀를 달래기 위해 화자가 “그런 여자들” 혹은 “그저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해 준다. 이제 화자가 학습하게 되는 것은 “할머니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종류”다. “그저 그런 사람들, 그런 여자들, 뛰어난 여성, 훌륭한 사람.”(p. 166) 물론 이것은 할머니가 가진 ‘편견’에 따른 구분이다. 하지만 편견은 할머니만의 것이 아니다. 할머니가 살아온 세계에 존재하는 기호들의 편성 방식을 반영한다. 할머니의 편견이 반영하는 매력의 경제는 계급적인 동시에 성차별적이다. 할머니의 머릿속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훌륭한 사람”은 남자로만 채워져 있다. 두 번째 위치인 “뛰어난 여성”은 할머니가 화자에게 약속하는, (할머니 생각에는)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다. 그런데 “뛰어난 여성”의 위치는 돈이 있어야 도달/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남자들만이 “훌륭한 사람”에 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남자들이 ‘돈’과 ‘능력’을 사유한 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화자는 “해변의 피크닉”을 통해, 특히 할머니를 통해 이 세계가 매력의 계급이 엄존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화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재회한 엄마에게 다음처럼 고백한다.

“엄마, 내가 커서 뭐가 되고 싶은 줄 아세요?”
“뭐가 되고 싶은데?”
“나는 커서 배신자가 될 거예요. 진짜 배신자.”
어머니는 나를 힐긋 바라보더니 정말이지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꼭 그렇게 되어라. 제발 꼭.” (p. 169)

여기서 화자가 말하는 “진짜 배신자”의 의미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계급의 배신자’가 되겠다는 말. ‘나’를 “우리 사랑스러운 돼지”(p. 167)라고 부르는 가난한 엄마, 보잘것없지만 고통스러운 교실의 정치, “폴로 티셔츠를 입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던 그 아이”(p. 168)가 있는 매력의 소시민 계급을 떠나, “주인의 위엄”을 지닌 할머니가 있는 매력의 상류층 계급으로 이동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장래희망을 고해성사하듯 엄마에게 고백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나’를 종종 낯 뜨겁게 하지만 어쨌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9라는 테마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했을 때, “진짜 배신자”가 되겠다는 말은 감각의 질서 자체에 대한 배신자가 되겠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성의 질서란 화자를 기껏해야 2등 시민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전혀 주체적이지 않은 배움을 통해 가능한 것일 테니까 말이다. 엄마가 가르쳤던 것, 할머니가 가르쳤던 것, 교실에서 배운 것, 이 세계가 가르친 것, 이것들은 ‘되찾은 시간’ 속에서 나의 언어로 다시 쓰기 전에는 살아가기에 유익하거나 무익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배신자”의 이 두 번째 갈림길이 바로 작가의 길일 것이고, 여기서부터 배우는 자는 자신의 배움의 독자적인 길을 따라 감각의 질서를 교란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9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2.

7.

물론 이 미학적 ‘교란’은 쉽지 않고, 결코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자족적인 문제인 것도 아니다. 매력의 문제를 도발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손보미의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기호들을 관장하는, 국가적 체제나 자본의 체제를 다시 의식하게 한다. 『작은 동네』에서 어떤 신체에 ‘간첩’이라는 기호를 부착하고, 그 기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배후의 국가 체제다. 간첩이라는 기호가 부착된 신체는 절대 사회에 재현될 수 없다. 하나의 신체가 철저한 ‘공백’이 되기 때문에 그 신체를 둘러싼 모든 진실, 모든 배움이 왜곡된다. 『작은 동네』의 화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진실을 알게 되며, 이것이 화자를 자신이 믿어 온 모든 것의 배신자가 되도록 밀어붙인다. 또 「해변의 피크닉」에서 할머니가 “주인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 난봉꾼인 삼촌이 “예쁜 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이유는 할아버지의 돈이다. 할아버지는 매력의 차별적인 경제에 개입하지 않지만, 이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배후처럼 재현되었다.

그렇다면 손보미의 소설에서도 여전히 ‘국가’ 혹은 ‘돈’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매력은 돈의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고, 또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매력은 노동자나 브랜드로서의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상징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현/대표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틀림없이 국가의 문제라고.

국가와 자본이 매력의 문제와 절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를 채우고 있는 차별적인 사실들은, 그것이 감각적 차원으로 번역되기 이전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불공평의 의미를 가르치는가? 그리고 무엇이 불공평에 대한 감각을 성별 이분법적으로 만드는가?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 세상의 불공평”에 붙들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하고, 불공평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차별화된 기호를 뒤쫓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주입하는가? 매력의 경제학은 이러한 문제들을 더 잘 사고하기 위한 모델이다. 이 경제는 종종 소설의 전담 분야였지만, 문학 작품 속에만 있었던 문제는 당연히 아니며,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재현의 한계를 넘어

―강동호,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문학과지성사, 2022)

0.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은 총 13개의 평론으로 이루어져 있고, 크게는 세 부로 나뉘어 있다. 1부 “한계―문학, 이론, 정치”에서는 책의 바탕이 되는 전제들와 문제틀을 제시하는 이론적 기초 공사가 이뤄진다. 꼼꼼히 읽은 독자들은 글의 신중한 배치 뒤에 있는 저자의 야심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름다움, 앎, 실천이라는 세 영역의 ‘한계’를 밝히고자 했던 “비판”의 칸트적 전통에 대한 자의식이 있는 것이다. 2부 “비판―문학주의, 권력, 통치성”은 말하자면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독단의 잠’에서 사유를 깨우고자 했던 비판가처럼, 강동호는 한국 비평사 곳곳을 고고학적·계보학적으로 탐문하면서 숨어 있는 독단성, 이데올로기, 모순들을 찾아낸다. 3부 “동시대성―불능, 시대착오, 희망”은 몇몇 작가들에 대한 작가론을 담고 있다. 물론 이 부분도 저자의 체계적인 신중함이 돋보이지만, ‘희망’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앞의 첨예한 비평적 논의에서 조금 벗어나 저자의 주관적인 애호, 믿음, 소망까지도 노출하고 있다. 그래서 3부를 읽고 다시 읽으면 앞의 글들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모든 글은 비평이 직면한 현안들, 의문들과 한 비평가가 치열하게 부딪혀온 기록이다. 덕분에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은 비평을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하는 한편 광범위한 이론적 실험 무대를 제공한다. 저자가 다양한 현안과 이론적 문제들을 책 안에 잘 마름질해놓았기 때문이다. 이 실험 무대에 뛰어들면서 문학비평은 여러모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의 입장에서 이러한 토론의 장이 주어졌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지만, 이 책의 주장들 혹은 책이 전제하는 이론들과 구체적으로 논쟁하려면 여러 편의 긴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또 책이 다루는 모든 쟁점과 사례를 논하는 것은, 저자만큼 비평이 직면한 문제들과 오랫동안 씨름해오지 않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평소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에 따라 책의 저자와 이 글의 독자에게 몇 가지 질문과 가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질문과 가설을 제기하기에 앞서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긴장이 있음을 짚고 넘어가겠다. 이 글의 질문들은 바로 그 긴장과 관련 있다. 책은 ‘담론 바깥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단순한 바깥과는 구분되는 의미의 ‘외부’라는 영역을 교환 내부에서 발견하려는 의식”(p. 410)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에서 두 개의 어조를 알아볼 수 있다. 기성의 비평들, 담론들을 집요하게 분석·비판하는 부분과, 담론화되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것 혹은 “불능의 외부”(p. 410)를 찾으려는 소망이 나타나는 부분은 미묘하게 다른 어조로 쓰여졌다. 어조의 차이는 책 전체에 긴 리듬을 부여하면서 하나의 글 안에 촘촘하게 겹쳐져 있기도 하다.

1. 재현의 한계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이 책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개념을 꼽으라면 ‘동시대성’이겠지만, 재현, 자본, 역사, 비판과 같은 개념들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 중 재현의 문제는 책의 논의에 접속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현은 자본, 역사, 비판과 같은 다른 모든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의 맨 앞에 실린 글 「문학의 정치―재현·잠재성·민주주의」는 ‘재현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다.

재현 체제(representation system)는 왜 중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 강동호가 ‘재현 체제’의 정의를 위해 참조하고 있는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재현 체제는 말과 소음을 구분하고, 도상과 배경을 구분하고, 장르들의 서열을 구분하는 그러한 규범성의 형태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곧 정치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재현 논리는 정치적·사회적 점유들의 전체적 위계와의 총체적 유비 관계 속에” 있다.1

소설이 삶을 재현할 때 일반적으로 삶의 어떤 요소들을 선별하여 거기에 서사적 구조를 부여하는 것처럼, 재현은 재현되지 못하는 ‘나머지’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문학 제도가 ‘젊은 예술가’에게 문학상을 수여하거나 지원금을 준다고 할 때,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단 ‘젊은’ ‘예술가’로 제도에 식별(identify)될 수 있어야 한다. 재현은 ‘젊은/젊지 않은’, ‘예술가/비예술가’와 같이 필연적으로 어떤 이분법을 작동시킨다. 이처럼 문학에서 “재현 체제는 이분화된 문학과 현실을 메타적으로 지시하는 언어들의 존재론적 조건을 제공하면서, 문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화의 기제를 가리킨다”(p. 36). 주지하다시피 누가 다수로 재현되느냐, 다수가 어떻게 재현되느냐 하는 문제, 즉 편향된 재현의 구조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적 분리와 편향은 지배적으로 재현되는 것 속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런 욕망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분리가 지속된다.

어떤 텍스트를 가치 있는 것으로 식별하는 문학 제도의 재현 논리를, 인간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국가의 논리에 빗대어볼 수 있다. “문학적 재현 체제와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 체제라고 할 수 있는 대의제(representation system)가 유사한 원리에 토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p. 50). 대의제는 국민의 의견에 대한 선별로써 당연히 모든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재현되지 않는 ‘나머지’ 의견이 생겨난다. 또 한 사람은 주민, 시민, 시민단체 대표, 청년의 대표 따위로 법에 의해 재현되어야만 국가와 관계할 수 있고, 의견은 집단을 이루어야만 대의제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원론적인 문제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재현 체제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동시대 예술에서 더 이상 재현이 지배적인 작법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든 예술작품 또한 이데올로기적 통치성으로서의 재현 체제에 연루되어 있다. 재현 체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 당장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식의 무정부주의적 환상이다. 강동호도 ‘재현 체제’를 어떤 역사적 국면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처럼 사고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인간이 재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현의 한계는 곧 담론의 한계다. 어떤 포괄적인 체제도 모든 것을 재현할 수는 없으므로, 담론에는 필연적으로 구멍이 있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모든 담론에 대해 비판이 가능하지만, 비판의 문법 안에서 담론에 대한 완전한 대안은 제시될 수 없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역시 결과적으로 담론의 질서에 귀속된다는 아이러니, 즉 담론 바깥은 없다는 사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다”(p. 275). 즉 어떤 담론이나 지식을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담론은, 그 자체가 다시 이데올로기라고 비판받을 위험을 항상 지니고 있다. 초월적·형이상학적·독단적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비판적 사유는 이데올로기를 판정하는 상위의 논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최선의’ 이데올로기인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초월적 이데아나 메타적인 상위 규율 같은 것이 애초에 부재하기 때문이다”(p. 415).

그렇다면 재현에 대한 끝나지 않는 비판을 영원히 가동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는 않다. 그처럼 끝나지 않는 비판의 변증법은 담론들의 인정 투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공허한 순환, ‘소모적인 논쟁’이 될 공산이 크다. 앞서 말했듯 강동호는 재현의 구조와 그것의 모순을 면밀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재현과 비판의 끝나지 않는 변증법과는 다른 논리를 요청하고 있다.

재현 체계의 흔들림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주체와 현실을 목도하는 가운데,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저 대의제적 원리에 기반한 재현 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나아가 재현의 한계라는 언어적 조건 속에서 형상화되는 문학적 역량의 동시대성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다시, 재현 체제가 포섭할 수 없는 시공간의 잠재성을 발견해야 한다. (p. 52)

“재현 체제가 포섭할 수 없는 시공간의 잠재성을 발견”하는 일은 담론 내부에 있지만 담론화되지 않은 것, 말하자면 재현 체제 속의 ‘실재’를 발견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데올로기화되지 않는 잠재성의 시공간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 구분할 수 있을까? 그곳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지점일 수도 있지 않은가? 텅 빈 이념인 ‘문학’은 이 문제 앞에서 종종 결정 불가능한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결정 불가능성 자체를 문학의 정치적 가능성으로 전유해야 하는가, 아니면 (오늘날 여기저기서 유행하는 ‘사변적 유물론’처럼) 비판적 사유의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실재’가 합리적으로 사유 가능하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1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 b, 2008, p. 29

2. 장치란 무엇인가?

하지만 원론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금 재현의 한계를 말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또 있다. 재현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이 오늘날의 복잡한 현실 혹은 우리의 주체화를 규명하는 데 점점 무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의 고전적인 문제인 재현/대표의 필연적인 편향은 언제나 부단히 비판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이나 문학이 재현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전적인 재현 논리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는 국가 같은 고전적인 재현 장치들의 영향력을 점점 더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인간적·언어적·재현적 사고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장치들이 너무나 복잡해졌다. 이러한 상황이 문학을 사고하는 방식 역시 바꾸어놓는 것 같다.

강동호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는 생각이지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호명’으로 인간 주체를 예속하는 고전적 재현 체제의 논리와, 유동적인 장치의 흐름으로 인간·비인간을 포섭하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논리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랏자라또는 재현 체제가 주체에 미치는 효과는 “사회적 복종”으로, 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 체제가 (탈)주체화에 미치는 효과는 “기계적 예속”으로 나누어 부른다.2 사회적 복종은 주체에 대한 재현 체제의 확고한 정체성 식별을 전제한다. 즉 사회적 복종은 확실히 구분되는 사회적 개체들을 전제한다. 반대로 기계적 예속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유동적인 생산/소비의 사슬에의 참여를 부추긴다. 기계적 예속은 재현 체제를 공고히 하기보다는 이분법적 재현을 빠져나간다. 예를 들어 국가는 법적·제도적 통치를 위해 반드시 인간/비인간, 성년/미성년, 국민/외국인, 남성/여성, 자본가/근로자, 생산 주체/부양 대상 등을 나누어 식별하려고 한다. 반면 동시대 자본주의는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을 점점 더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체성 식별이 불가능한 배치들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증식시키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의 구분을 ‘문학 제도’와 ‘출판 시장’의 관계에도 비슷하게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장은 문학/비문학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식별되지 못했던 것들까지 활발하게 유통시킨다. 등단으로 얻는 작가의 ‘자격’은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상품의 매력을 구성하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비평이나 문학상 제도의 평가와 선별을 아랑곳하지 않는 독자들도 점차 많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적 장치보다 시장이 더 많은 다양성을 수용하리라는 생각은 일견 자연스럽다. 강동호도 인용하고 있는 좌담에서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제도로서의 문학 권력은 너무나 공고하고, 이것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 현시점에서 불가능하다면, 지금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의 요구에 따르는 것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3 이것은 협소하고 권위적인 제도의 체질 변경에 대한 다소 도발적인 요구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다양성의 증가에만 초점을 맞췄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품 다양성의 끝없는 증가는 오늘날 우리를 고통스럽게 예속하는 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재현되지 않는 ‘존재의 다수성’과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상품의 다양성’을 혼동하곤 한다.

어쨌든 출판 시장으로 진입하는 통로가 다변화되는 만큼, 표면적으로 시장은 제도의 재현 논리가 토대로 삼았던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시장은 어떤 이분법적 구획으로 나뉘지 않는 모호한 지대, 새로운 경로의 발견을 오히려 반기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제도와 시장의 논리는 구조적으로는 상호의존적이기도 하다. 문학적 ‘수준’을 평가하는 비평가나 문학상 등의 제도적 장치가 작품을 선별하면, 선별된 작품을 엮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시장에서 새로운 경로를 개척한 진정성 있는 주체가 약간의 시차를 거쳐 제도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제도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를 다른 벡터와 층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동시대 문화에 예술의 역량에 대한 점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두 종류의 불평등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예술 제도 내에 편입되느냐 아니냐 하는 오래된 문제가 있다. 문학계에서 ‘등단’이 여전히 지배적인 등용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와 비평가는 일단 등단해야 ‘문학계’에 재현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식별은 고전적 재현 체제의 논리에 속한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둘째로 위계 없는 장르들 사이의 광범위한 인정 투쟁이 있다. 작가들에게도 제도가 부여하는 ‘자격’보다 동료와 독자, SNS 팔로워 등의 ‘인정’이 점차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간다. 또 오늘날 기호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하면서 이목을 끄는 일은 결코 작가의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자기 브랜딩, 콘텐츠 생산, 자아실현, 인정 투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현실은 만인의 ‘예술가-되기’를 부추겨왔다. 오늘날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기호의 새로운 조합/배치(assemblage)를 경쟁적으로 생산하고, 그 조합/배치는 소비 욕구, 의혹, 질투, 열등감, 혐오 등의 정동을 재생산한다. 문화에 통용되는 기호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사유화할수록 문화적 영향력을 갖게 되는데, 문화적 영향력이 곧 돈이 되는 것은 오래된 현실이다.4

오늘날 사람들이 ‘봉준호는 하나의 장르’ ‘아이유는 하나의 장르’라고 말하듯이, 이제 ‘장르’는 예술의 제도적 구획만을 의미하지 않고 기호들의 독특한 조합/배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대의 문화는 장르들의 광범위한 경쟁과 뒤섞임을 부추기고 있다. 랑시에르는 재현 체제가 붕괴하고, “예술을 일반법칙으로부터, 주제들, 장르들 그리고 예술들의 모든 위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체제” 즉 ‘미학 체제’가 일반화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5 그런데 그 ‘미학 체제’가 동시대 자본주의 문화에서 야기되는 장르들의 자유주의적 경쟁 체제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는 모호하다. 장르들의 무정부주의적 경쟁은 계속해서 생산/소비 욕구와 문화적 틈새시장을 만들어내므로 자본주의의 이익에 잘 부합한다. 웹 소설 플랫폼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표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저런 기성의 장르들이 뒤섞여 제3의 장르를 만들어내면, 제3의 장르가 포화된 장르들 사이에 새로운 틈새시장을 형성하고, 독자들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새로운 장르적 배치 중 어떤 것은 흥행에 성공하여 확고하게 자리 잡고, 어떤 배치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이러한 일은 웹 소설 시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체와 장르들의 구분을 넘어 문화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재현’을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장르들의 경쟁과 뒤섞임 역시 결국 문화적 재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결국은 문화에 무엇이 현시되고 유통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역동적인 문화적 흐름이 문학 제도의 재현/대표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서 생산·유통·교환·차용되는 기호 혹은 장르의 경제에 대한 사유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이 경제는 문학작품의 생산 과정에도 마찬가지로 깊이 침투해 있다. 작가들은 동시대적 경험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요소와 기호들, 장르적 문법을 익히고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동시대 예술은 서로 뒤섞이고 경쟁하는 장르들로 우글거리고 있는데, 제도는 이러한 우글거림을 거의 식별하지 못한다. 이 광범위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장르적 배치들만을 새로운 것으로 식별할 뿐이다. 이러한 ‘식별’은 문학계 안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것이지만, 모든 장르가 서로 경쟁하고 야합하는 동시대 문화 전반에 비추어보면 점점 더 국지적인 문제가 되어간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문화에서 장르들의 경쟁과 야합은 예술/비예술의 경계를 넘어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비평의 시야도 넓어질 필요가 있다. 강동호의 말처럼 “장치라는 개념이 지닌 함의는 여기서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제도적 층위보다 훨씬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체화의 기제를 설명해주며,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비판적 전선을 정치하게 확장시켜준다”(p. 255). 강동호가 푸코에게서 빌려온 개념인 ‘장치’는 유동적 흐름들 속에 있는 인간, 사물, 제도, 지식 등의 조합/배치다. 강동호의 말처럼 ‘장치’에 대한 고려는 비평의 시야를 확장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장르’를 제도에 의해 식별된 예술의 구획(소설, 시, 조각, 대중음악 등)이나 고정된 문법의 짜임(스릴러, 공포, 로맨스 등)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연결 접속하는 미시적 장치라고 보면 오늘날 문화의 역동적인 변화를 사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2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기호와 기계―기계적 예속 기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신병현·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7, pp. 31-79 참조.

3 강동호·서효인·천희란·최지인·황인찬, 「우리에게 더 많은 미래를―한국 문학장의 현재와 미래」, 『문학과사회』 2020년 봄호, pp. 117-118.

4 예술의 역량에 대한 이 두 가지 ‘점유’는 서로 대치되기도 하고 길항하기도 한다. 전자의 형상이 문학 제도에 의해 중요한 작가의 자격을 부여받은 ‘유망한 작가’라면, 후자의 형상은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인플루언서’다.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날 인플루언서가 작가가 되고 작가가 인플루언서가 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5 『감성의 분할』, p. 30.

3. 문학적 가속주의

그런데 ‘장치’에 대한 고려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전적 비판과는 조금 다른 문제, 즉 우리가 장치라는 유동적이면서도 촘촘한 그물망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는가(혹은 장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불러온다. 이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의 심층을 관통하는 고민일 것이다. 들뢰즈가 푸코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했던 고민, 즉 “장치라는 그물망에 의해 배치(포섭/배제)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시공간의 변화 불가능성을 위한 고민”(p. 136)은 강동호 자신의 고민이고, ‘지금 여기’의 고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가동하는 예속의 논리에 대한 강동호의 논의는 양선형에 대한 평론에서 특히 멀리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불능의 시뮬라크르―양선형 소설의 정치적 프로토콜」은 이 책에서 가장 긴장감 높은 대목 중 하나다. 강동호는 양선형의 글쓰기-기계가 “자본주의라는 기계 체계”(p. 404)를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거기서 이탈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체계를 답습하고, 모방하고, 그것을 구축하는 원리를 내장”(p. 404)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두 기계는 형식적으로 닮아있다. 조금 덧붙이자면, 주체의 사라짐, 식별 가능한 의미의 점진적 박탈, 실물과 절연된 기호들의 가속화된 교환 등은 동시대의 글쓰기-기계와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기계가 공유하는 특징일 것이다.

강동호가 “불능의 외부”를 말하는 것 역시 이 지점이다. 즉 “불능의 외부”는 단지 재현에서 벗어나기를 도모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탈영토화/재영토화 경향의 중단에 대한 사유를 도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양선형의 글쓰기는] 불능이 가시화되는 어떤 영역, 자본주의 기계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변증법이 작동하지 않는 장소, 다시 말해 단순한 바깥과는 구분되는 의미의 ‘외부’라는 영역을 교환 내부에서 발견하려는 의식적 소산이다. [……] 사실을 훼손한다는 것, 사실을 능가한다는 것은 바깥으로의 도피나 탈출이 아니며, ‘무용성의 유용성’이라는 변증법적 환상에 의존하는 행위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유용한 것들의 극단적 사용을 통해 발견되는 새로운 무용성, 즉 불능을 가시화한다. (p. 404.)

강동호는 문학이 현실을 자유롭게 초월해 있다는 문학주의적 믿음이나 ‘무용한 것의 유용성’을 말하는 낡은 변증법적 논리를 기각하고, 다른 종류의 ‘외부’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전개한다. 즉 체제의 한가운데에서, 자본주의의 논리를 모방하고, “그것의 가속화에 과잉 가담”(p. 404)하면서 만나게 되는 역설적인 출구를 상상한다. 이것은 기계의 작동을 더욱 가속함으로써 ‘기계적 예속’을 중지시키는 전략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기호들의 교환을 극도의 비효율성 속에서 과잉 반복함으로써 교환을 무용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소설’ 혹은 ‘글쓰기’는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념의 지위로 격상된다. “이것은 욕망을 위한 욕망이라는 자본주의 기계의 목적적 프로토콜과 유사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도착적으로 뒤집어버린 것이다”(p. 423). 자본주의 논리를 도착적으로 뒤집어 밀어붙이는 이 전략에 ‘문학적 가속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양선형에 대한 평론은 이 책에서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강동호는 자신의 이론적 전제 혹은 방법론에 따라 필연적으로 ‘문학적 가속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강동호는 비판적 사유가 전통적으로 그래왔듯이 초월적 규정, 형이상학적 정당화, 낭만적 이상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확인 가능한 장치, 권력, 담론에 대한 면밀하고 실제적인 비판이다. 그런데 이 분석적 비판은 앞서 말했듯 비판의 끝없는 상대주의적 순환에 갇혀 공회전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저자는 형이상학적·초월적 외부가 아닌 ‘유물론적 외부’를 찾으려 하고, 그러한 충동에 따라 기성의 자본주의적 논리를 더욱 밀어붙이면서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문학적 가속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다. 즉 이 책에서 나타나는 엄밀한 비판적 입장과 ‘문학적 가속주의’라는 급진적 입장은 필연적인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비판이론의 엄격함은 종종 우리에게 자본주의 ‘바깥’을 전제하는 것은 순진한 일이고, 오히려 자본주의를 살찌우는 양분을 제공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가르쳐왔다. 따라서 가능한 전략은 이미 주어진 예속의 조건을 면밀하게 파악해 저항의 조건으로 전유하는 것뿐이다. ‘문학적 가속주의’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결과인 듯하다.

그러나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정말로 인류를 멸종의 길로 몰고 가는 듯한 오늘날,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또 가능할 수 있다. 어떤 동시대 사상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이대로 지속되면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야만 상태에서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닥쳐올 여러 문제(기후재난, 식량난, 에너지 고갈, 전쟁 등)에 대처하려면 ‘탈성장 코뮤니즘’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6 그런 다급한 전언이 전혀 과장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변화가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적으로 ‘세계화된 세계’의 균열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문학과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세계의 변화 속에서 문학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문학적 가속주의라고 불릴 만한 입장이 있다면, 그에 대립하는 다른 전략도 상상해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포함하여, 매우 긴급하고 논쟁적인 문제들이 ‘문학적 가속주의’라는 입장을 둘러싸고 촘촘하게 모여드는 것 같다. 문학적 가속주의가 어떠한 함의와 문제들을 갖는지 자세히 논의할 기회가 있기를 희망한다.

‘문학적 가속주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차치하더라도, “내부의 외부성”(p. 422)을 찾으려는 강동호의 문제의식 자체에는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비평에 필요한 것은 현실을 초월해 자유롭게 부유하거나 판단의 권위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고, 형이상학적·낭만적 전제로부터 행동이나 생각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현행화되지 못한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전개하는 데 있을 테니 말이다. 동시에 ‘내부의 외부’가 내부보다 훨씬 큰 외계가 있다는 사실의 작은 증거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지만, 1990~2010년대 문학의 역사화 문제, ‘문학적 가속주의’의 개념화와 평가, ‘진정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 비평의 정치성, “불능의 외부” 등이 『지나간 시간의 광장』 이후의 연구들, 혹은 뒤따르는 논쟁들의 화두로 오래 남게 될 듯하다. 강동호는 문학을 “서로 다른 시간에 걸쳐 형성된 변화의 계기들 사이의 연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들의 광장”(p. 25)이라고 말한다.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역시 바로 그러한 광장인 것처럼 보인다. 이 ‘광장’으로 더 많은 이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6 사이토 고헤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참조. 재미있게도 고헤이는 가속주의를 ‘현실도피’라고 비난하고 있다(같은 책 pp. 207~231 참조).

타노스의 성공과 실패: 철학이라는 욕망

이 글에서 참조하는 영화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이다. 대사를 인용하는 경우 박지훈·김은주 번역가의 번역을 참조했으나, 글의 맥락에 맞게 수정을 가했다.

1.

세계화된 세계 속을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타노스라는 유령이. 일찍이 타노스를 막기 위해 창의적인 자본가, 얼었다 녹은 미국 군인, 북유럽의 근육질 고대 신,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경직된 아이돌, 이중인격 과학자, 서구화된 토착민, 마술사와 주술사, 의인화된 ‘비인간 행위자’들이 신성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타노스는 그 동맹에 의해 이미 두 번 죽었다. 그럼에도 타노스는 영화 안팎에 여전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작년 말 〈이터널스〉가 개봉한 이후, ‘타노스 재평가’가 마블 팬들 사이에 유행했다. 또 드라마 〈호크아이〉에는 “타노스가 옳았다”라는 낙서를 보고 호크아이가 회의를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엔딩 크레딧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타노스는 돌아온다.”

타노스에 반대하여 한 편이 된 〈어벤져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개성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서로 반목하기도 했다. 즉 타노스라는 절대적인 적이 없었더라면 그처럼 광범위하게 단결하지 않았을 세력들이다. 타노스를 저지하기 위해 형성된 이 거대한 ‘동맹’은, 외견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가치의 총집합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종족과 히어로가 선봉에 선 캡틴 아메리카의 구호(“어벤져스 어셈블!”)에 따라 마지막 돌격을 하는 것처럼. 즉 어벤져스와 타노스의 대립에서 우리는 서구적(혹은 미국적) 가치와 그것이 방어하려 하는 것 사이의 전형적인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서구적 가치’는 우리에게 친숙하고 정겨운 인물들로 재현되는 반면 그 반대편은 추상적이고, 어둡고, 추한 무엇으로 그려지지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질서 자체가 ‘1 세계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반대편은 항상 낯설고 무섭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직설적이건 은근하건 간에 ‘반대편’은 항상 가난, 전체주의, 대학살, 전쟁, 근본주의, 비인간성 따위와 결부되어 있다. 저항과 비난에 맞서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물론 오늘날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모순되었다. 그러나 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 체제만큼 나쁘지는 않다. 만약 이 체제를 중단하거나 변화시키려 한다면, 훨씬 더 파국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타노스는 이러한 ‘파국’을 추상적으로 상징하며, 상상적인 파국의 공포에 대항하여 서구적 가치가 수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결집하도록 촉구한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나쁜 현실 중 최선이라는 것, 이것이 세계화된 세계를 지탱하는 첫 번째 합의이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이 자유민주주의는 더 큰 부, 더 거대한 다양성을 원하는 ‘성장주의’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왔다. 부를 위해 경쟁하는 개인 의견들의 총합은 ‘성장’이라는 지상과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엄청나게 다양한 캐릭터와 이종을 영화 속으로 불러들이면서 세계관을 팽창시키고, 그에 따라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계화된 세계를 지탱하는 두 번째 합의는,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생명의 공평한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타노스와 이념적으로 가장 분명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어벤져스〉에서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라는 구호는 위선 없이 말해질 수 없었다.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이종들은 의인화된, 특히 서구적으로 의인화된 이종들이다. 즉 개인주의적이고, 권위적이지 않고, 민주적이고, 영어에 유창하고, 유머 코드가 맞는, 귀엽고 유능한 이종들이다. 〈어벤져스〉에서 그들은 대체로 백인들이 활약하는 가운데 열심히 보조 역할을 맡았다. 물론 그들의 생명이 타노스나 그의 못생긴 수하들보다, 그리고 형상과 언어를 부여받지 못한 이종들보다 훨씬 소중했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 그리고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것. 이 두 가지 합의는 때로는 군사적 개입으로, 때로는 윤리적 교설로 나타나면서 ‘세계화된 세계’를 틀 짓는 사유의 한계를 표시한다.

그렇다면 이 동맹이 방어하려고 했던 타노스는 무엇을 표상할까?

타노스는 죽음을 표상한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인구의 절반을 죽이는 타노스는 운석 충돌과도 같은 대재앙이고, 히어로들은 그 재난을 막기 위해서 분투한다. 이런 관점에서 타노스와 어벤져스의 전쟁은 죽음과 생명의 대립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단순한 대립은 많은 사람이 타노스에게 느끼는 매력을 다 설명해주지 못한다. 타노스의 매력은 추상적 ‘죽음’이 주는 현혹을 넘어선다. 그의 행보는 우리가 어릴 적 위인전에서 보았던 ‘위대한’ 인물과 형식적으로 닮았다. 즉 자신의 이해관심을 넘어서, 두려움 없이 이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나 혁명가, 위대한 학자 등과 닮았다. 물론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에서처럼 완전무결한 ‘위인’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 타노스 역시 모순과 결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타노스의 결단과 거침없는 행동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영웅이 우리가 소망하는 가능성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할 때, 타노스는 빌런이면서 동시에 영웅이기도 한 것이다.

2.

그렇다면 타노스가 표상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타노스는 철학, 더 정확히 말해 철학이라는 욕망을 표상한다. 철학은 전체를 사유하고자 하는 욕망, 그렇기에 ‘사유의 탈주관화’를 이끄는 욕망이다. 아마 이보다 더 시대착오적인 욕망은 없을 것이다.

학식이나 교양으로서의 철학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진리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철학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을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소개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에 따르면 철학자는 가장 똑똑한 사람은 아니다. 이미 진리를 아는 자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포교함으로써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젊은이들을 당대에 통용되는 ‘지혜’ 혹은 ‘의견’으로부터 단절시켰다. 아마 진리를 아는 것(지혜sophia)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철학philo-sophy),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타노스의 성공과 실패를 규명하는 데에 결정적일 것이다.

한편 타노스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질적으로 나쁜 이미지 역시 체화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니체는 서구의 형이상학이 삶의 구체성과 감각적 다양성을 억압하고, 다양한 욕망과 신체를 무시하며, 따라서 죽음을 향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아가 형이상학은 전체주의적이며, 타자를 이념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고 오래도록 비난받아 왔다. 심지어 ‘전체’를 지향하는 형이상학은 20세기의 전쟁 범죄와 대학살의 주요 책임자로서 고발당하기도 했다. 타노스는 철학의 이러한 ‘나쁜 면’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타노스의 거대한 우주선 ‘생츄어리’는 육중하고, 황량하고, 어두운 회색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타노스는 학살자이기도 하다. 그의 엄격한 사상은 외설적인 가학적 욕망과 뒤얽혀 있으며, 두말할 것 없이 전체주의적이다.

이처럼 나쁜 것이 뭉뚱그려진 타노스, 철학의 진부한 이미지인 타노스로부터 어떤 새로운 것을 추출할 수 있을까?

첫째로, 무시무시하게 뭉뚱그려진 이 ‘어떤 것’이 우리에게 결여된 무엇임을 인정해야 한다. 타노스는 전체주의, 근본주의, 본질주의, 인권이나 생명에 대한 무시 등 우리가 사유를 중단하게 되는 함정들 너머에 있는 위험한 것들의 덩어리이다. 하지만 그 무섭고 매혹적인 덩어리 속에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사유의 가능성 또한 있을지 모른다.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기를 원한다면, 이 가능성은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취해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영화 속에만 우화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현실에서도 취해질 수 있는 욕망의 형식을 구분해야 한다. 타노스는 이미 초인적인 힘을 지닌 존재이지만, 타노스가 찾아다니는 ‘인피니티 스톤’은 그보다 훨씬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상상하게 한다. 초월적인 존재 혹은 힘이 실재한다면, 타노스가 선택한 방식이 현실적으로 고려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초월적 존재들이 은하계를 가로질러 날아다니는 세계가 아니다. 인피니티 스톤도 없다. 즉 골치 아픈 문제를 초월적 힘을 빌려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이 ‘초월자 없는 세계의 철학’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동시에 뚜렷한 영웅도 악당도 있을 수 없는 세계의 철학이기도 하다는 것 역시. 그러고 나면 인구의 절반을 일거에 말살한다는 비현실적이고 유치한 내용은 고려될 수 없다. 우리가 타노스에게서 취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여주는 철학적 욕망이다. 관건은 이 ‘욕망’을 선험적이거나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초월자 없는 세계에서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무엇에 연결할 수 있느냐이다.

“진리는 전체”라는 헤겔의 단언은 유명하다. 그러나 헤겔이 일관된 전체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헤겔이 강조한 것은 진리는 전체를 포괄해야 하기에 모순과 부정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철학은 전체를 사유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체화되지 않는 모순을 계속해서 치열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다. 전체를 사유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공백’을 사유 내부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착안하여 많은 현대 철학자는 오히려 ‘진리는 비(非)전체’라고 말한다.1 어떠한 논리도 전체를 한 번에 사유할 수 없고, 어떠한 체계도 전체를 완전히 재현할 수 없다. 어떤 체계에는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공백’이야말로 보편적(혹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의 불가능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주장했듯) 철학이 현 체제가 재현하거나 사유하지 못하는 바로 그것, 상황의 ‘공백’에 충실해야 함을 의미한다.2 마찬가지로 〈어벤져스〉에서, 역설적으로 전체주의자 타노스만이 이 세계가 비전체라는 것을 일깨운다. 사람들은 타노스를 추방하고, 억제하고, 지우면서 ‘정상적인’ 세계의 항상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타노스가 없어진다면 〈어벤져스〉의 세상에는 수용 가능한 타자만 남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다양성의 요구―정치적 올바름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다양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위협하지는 않는 타자들 말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가치관을 위협하지 않는 타자란 동일자일 뿐이다. 타노스가 없는 세계는 하나의 ‘전체’가 되어버린 세계이다. 화면에 나오는 모든 종족이 어벤져스에 동화될 수 있을 만큼 귀엽고 착하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주의자 타노스보다 체제의 ‘공백’으로서의 타노스에 초점을 맞춰볼 수 있다. 타노스의 이미지 속에는, ‘세계화된 세계’의 전체성이 유지될 수 없는 허구임을 일깨우는 두려운 것들―기후 위기, 전염병, 식량 고갈, 전쟁, 착취, 기아, 난민, 극단주의적 테러 등―이 뭉뚱그려져 있다. 우리는 세계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이러한 위험 요소를 없애고 싶어 하고, 때로는 어떤 영웅적 존재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결한 히어로들도 어찌할 수 없는 ‘타노스의 유령’은 세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1“정확한 유물론적 입장(……)은 하나의 ‘전체’로서 우주는 없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레닌의 유산―진리로 나아갈 권리』, 정영목 옮김, 생각의힘, 2017, p. 51.

2알랭 바디우, 『윤리학』(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4장 「진리들의 윤리학」 참조.

3.

타노스의 고향 행성은 폭증한 인구와 자원 고갈로 인해 멸망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타노스는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인구의 절반을 죽여 멸망을 막자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고, 그는 광인 취급을 받으며 행성에서 추방당했다. 고향 행성의 멸망 이후 타노스는 우주 인구의 절반을 죽이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집요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지만, 그것을 달성한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순진할 정도로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1927년에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에 불과했다.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인구는 80억에 도달했다. 이처럼 비슷한 수준의 문명이 유지된다면 인구는 금세 늘어날 수 있다. 요컨대 인구의 순간적 감소는 별다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성장주의적인 방향에서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돌려놓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타노스는 이러한 고민 없이 자신의 과업에서 쉽게 은퇴했다. 마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원리와 모순을 파헤치는 데에서는 놀라운 집요함과 지성을 보여주지만,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순진한 낙관으로 일관한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철학자의 이러한 ‘순진함’을 종종 비웃거나 의아하게 생각한다. 타노스의 대책 없음이 설정 오류가 아닌가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있듯이.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철학자는 지배적 의견이 해명하지 않는 단 하나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삶을 바칠 수 있고, 그 문제에 천착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철학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란 ‘전체’를 사유하는 것에 누구보다 앞서 실패하는 바보에 불과할 수도 있다. 타노스는 철학자치고도 유난히 바보 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첫 번째 죽음에서 타노스는 철학자다운 겸허함과 검소함을 보여주었다. 타노스는 인구의 절반을 없애는 ‘핑거 스냅’의 확률에 자신마저 포함시켰으나 공교롭게도 살아남았다.3 이후 타노스는 어느 행성의 한적한 시골로 가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자신의 오두막에서, 그는 탐욕을 불러일으킬 뿐인 인피니티 스톤을 파괴했다. 어벤져스는 그의 오두막으로 쳐들어가 타노스에게 복수하지만, 우리는 타노스가 별다른 미련 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타노스의 두 번째 죽음은 그의 철학적 실패를 보여준다. 타노스는 그의 목적을 관철하지 못했고, 허무와 회한 속에 죽었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이 무엇일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킨 타노스는, 자신이 성공할지 모르는 채 계속했다. 그는 오직 자신의 확신에 의거하여 목적을 달성했고 죽었다. 그러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는 미래에서 온 네뷸라 때문에 자신이 성공했음을 알게 된다. 이 앎 때문에 타노스는 약해지고, 오만해지며, 어벤져스와 그의 처지는 반전된다.

타노스의 첫 번째 죽음 이전, 즉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어벤져스는 감정적 애착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로키는 자신의 형 토르가 죽을까 봐 타노스에게 스페이스 스톤을 넘겨준다. 가모라의 죽음에 분노한 스타로드는 타노스를 때려 타노스를 제압할 수도 있었을 정신지배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어벤져스는 비전이 죽을까 봐 그의 머리에 박힌 마인드 스톤을 빨리 제거하지 못하고, 결국 타노스에게 마인드 스톤을 빼앗긴다. 어벤져스는 뭔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포기하지 못해 타노스에게 패배한다. 대조적으로 타노스는 날카롭고, 냉정하고, 신중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딸 가모라를 소울 스톤을 얻는 대가로 잃고, 그럼으로써 지키고 싶은 것을 모두 잃는다(핑거 스냅 이후 보는 환상에서, 어린 가모라가 “무엇을 대가로 치렀나요?”라고 묻자 타노스는 “모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미래에 승리했음을 확실히 알게 된 후, 타노스에게 어벤져스와의 대립은 감정적 문제가 된다. 첫 번째 죽음 이전, 자신이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어벤져스가 넘어서야 하는 난관이었다면, 미래를 본 이후, 어벤져스는 이미 달성한 것을 망친 짜증 나는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타노스는 아이언맨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종족들을 죽이면서 개인적인 흥미를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너희들 때문에 지구를 파괴하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군.” 승리에 대한 확실한 앎은 타노스를 오만하고 조급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이제 불확실성을 겸허하게 감당하는 자는 아이언맨이다. 마지막 전쟁에서 아이언맨은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묻는다. “이게 네가 본 우리가 승리하는 미래인가?”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답한다. “내가 그것을 지금 말하면 아니게 되겠지.”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승리라는 결과를 아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이미 가진 것을 방어하려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쪽이 승리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철학자 타노스와 전체주의자 타노스를 분리한다. 진리가 전체의 공백에서 출현하는 것이라면, 진리는 불확실성 속으로 몸을 던지는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반대로 전체주의자는 상황 속에 이미 확실하게 규정된 어떤 것이 전체를 장악하기를 원한다. 첫 번째 타노스가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철학이라는 욕망’을 보여주는 특별한 악당이라면, 두 번째 타노스는 자신이 달성한 것을 지키려 하기에 흔한 악당, 실패한 전체주의자에 불과하다. 시간여행을 통해 그를 한낱 악당으로 전락시킴으로써, 타노스의 승리를 누설함으로써, 어벤져스는 타노스에게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3영화 개봉 후 학생들과의 인터뷰에서 루소 감독은 타노스가 절반의 확률에서 자신을 제외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터뷰 번역본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s://extmovie.com/movietalk/33449027

4.

이제 우리는 타노스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말, “나는 필연적이다(I am inevitable)”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필연성에 ‘나’를 일치시키는 말일 수 있고, 반대로 ‘나’에 필연성을 일치시키는 말일 수도 있다. 필연성에 ‘나’를 일치시키는 경우, 그는 철학자이다. ‘나’에 필연성을 일치시키는 경우―‘나’가 권력자 개인을 의미하건, 집단적·민족적·국가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의미하건 간에―그는 전체주의자이다. 많은 사람이 이 둘 사이의 구분 불가능한 유사성을 이유로 철학의 모순을 지적해왔다. 도대체 어떻게 한 주체가 자신이 복무하는 논리적 필연성과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분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해 타노스가 남긴 힌트가 있다면 진리의 필연성은 언제나 동시에 불확실성으로 경험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상황 속에서 전혀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주의와 철학(악명 높은 “로고스 중심주의”)의 근접성이라는 식상한 혐의보다 더욱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 즉 아이언맨의 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가 타노스의 말과 재미있게 대구를 이룬다는 점이 더 불길한 혐의를 검토하게 한다. 타노스는 우주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임무와 자신의 삶을 동일시한다. 대조적으로 아이언맨의 그 대사는, 타노스에게 승리하는 1400만분의 1의 확률을 실현하는 것이 자신임을, 바로 여기에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임을 동어반복적으로 표현한다. 타노스의 말에 거대한 야심과 자의식이 들어 있다면, 아이언맨의 말에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임을 받아들이는 유머가 있다. 어벤져스의 전쟁은 마지막에는 결국 타노스와 아이언맨의 대립으로 집중된다. 이념적·의식적으로 타노스와 캡틴 아메리카가 가장 분명하게 대립하며 닮아있다면, 형식적·무의식적으로는 타노스와 아이언맨이 가장 분명하게 대립하면서 닮아있다. 즉 캡틴 아메리카와 타노스의 관계가 서사적이라면, 아이언맨과 타노스의 관계는 외설적이다. 타노스와 아이언맨은 니체의 그 유명한 “나는 운명이다”를 양분하는 21세기의 신화적 인물들이다.

요컨대 타노스와 아이언맨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운명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것을 긍정한다. 어쩌면 둘의 대구는 ‘철학의 비인격성’과 ‘자본의 비인격성’이 쌍둥이처럼 닮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언맨은 순환하고, 팽창하고, 분열하고, 재구성되는 자본주의적 세계의 전모 그 자체를 표상한다(마르크스는 자본가가 한 개인이 아닌 “인격화된 자본”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타노스는 그러한 세계의 중단이야말로 필연적이며, 그러한 필연성이 곧 자신이라고 주장한다(스피노자는 철학자를 필연성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자, 즉 “탈주관화”된 개인이라고 여겼다).

둘은 모두 불확실성 속으로 몸을 던지며, 죽음을 불사하며, 그럼으로써 한 번씩 승리했다. 이것은 상황의 불확실성, 말 속에 등장하는 ‘나’와 말하는 주체 사이의 시차(parallax),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 주관성과 필연성의 일치, 승리나 패배라는 결과 등을 따져도 둘 중 어느 쪽에 도래할 진리가 있는지 식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비슷하게, 우리는 눈앞에 닥친 이 세계의 위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힘들다. 한편에서는 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급진적으로 중단하고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온 문제들을,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방식을 더 가속함으로써―가령 친환경 사업에의 대규모 투자, 에너지를 위한 우주 식민지 개척 등의 방식으로―해결하자고 한다. 이 둘은 똑같이 불확실한 미래로 열려 있는 듯 보이고, 둘 다 끔찍한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결단을 미룬다고 해서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이 짧은 글에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일단 상황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철학이라는 욕망’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 다시 한번(미리) 강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앞서 오늘날의 사유를 한계 짓는 두 가지 합의를 이야기했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는 한편으로 문화적 재현과 연결되고, 한편으로 국민에 대한 국가의 통치와 연결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고통을 ‘재현할 권리’를 가진 생명이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데 정치적 사유를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편에 ‘권리’의 무분별함이 있고(실제로 고통을 기준으로 둘 때 어떤 고통받는 존재도 다른 고통받는 존재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에 재현된 고통의 선별이 있다. 가령 우리는 소말리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우크라이나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후자의 죽음이 ‘1 세계’에 더 가까운 것으로서 더 많이 재현되기 때문이다. 한편 거의 모든 정치적 상상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헌법적 명분을 넘어설 수 없는 것 같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의 ‘기회의 공평함’과 ‘무한 경쟁’이라는 원칙은 필연적으로 성장주의와 연결된다. 성장주의는 한편으로는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잔혹한 착취와 연결되고, 한편으로는 개인들 사이의 끝없는 경쟁과 서열화에 연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내면화한 성장주의의 한계는 점점 더 자명해지고 있다.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와 같은 책은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성장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이어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사는 지금 이 방식을 유지해서는, 세계가 결국 어떤 인간도 살 수 없는 곳이 되리라는 사실 말이다.4 이러한 설명은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더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사람들이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하느냐일 것이다. 즉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모두에게 욕망하도록 강제되는 것(가령 부자 되기)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기를 욕망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상처와 세계의 상처가 다른 것이 아님을 어떤 논리를 통해 드러내야만 한다.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민족이나 언어, 가치관, 피부색 등의 차이―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항상 제국의 통치술이었다. 반대로 해방 운동은 정체성에 기반한 모든 차별의 철폐를 약속하면서 세계를 피지배자와 지배자로 양분하는 어떤 주체―결코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주체―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서로 차별하고 적대하는 상황은 해방 운동 이전의 여느 사람들이 겪은 상황과 비슷하다. 모두가 모두를 차별하고, 서로 비교하고 검열하는 오늘날 도시의 삶은 사람들을 심한 고통 속에 밀어 넣고 있다. 많은 사람이 역동적으로 뒤섞여 살아가는 도시의 삶 속에서 사람들의 몸과 욕망은 세분화된다. 그에 따라 ‘몸’을 규정하고 식별하는 법과 언어도 세분화된다. 이러한 세분화가 ‘윤리적’이라는 착시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윤리’는 우리를 가둔 사유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윤리는 해방 운동을 방어하는 어느 선량한 제국주의자의 논리와 비슷하다(가령 아이티 혁명 직전 프랑스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권리를 보장받는 유색인종의 범위를 조정하고, 노예제와 관련된 언어적 표현들을 덜 야만적으로 들리게끔 교정했다5). 이처럼 타협적인 ‘윤리적’ 고려 속에서, 우리는 세계에 만연한 불평등을 감내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 같다. 만연한 불평등과 경쟁 속에서, 상황의 한계를 벗어나는 거창한 사유는커녕 타자에 대한 일말의 이해조차 불가능해지고 있다.

‘세계화된 세계’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강대국의 대형 선박들이 앞바다를 약탈하기 때문에, 인도양에 접한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중국의 공장이 대기를 오염시킨다고 비난하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생산하는 제품의 부품들이 바로 그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선진국의 사람들은 ‘세계화된 세계’의 순환에서 막대한 이익을 누리지만, 그러한 순환이 낳는 피해는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부과된다. 세계화된 세계 속을 사는 모두가 파괴와 약탈, 착취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문제를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상황의 ‘전체’를 사유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세계화된 세계의 순환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은 이렇게 방어할 것이다. “물론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는 부조리합니다. 그러나 섣불리 바꾸려고 하면 훨씬 더 야만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6 따라서 체제를 바꾸는 대신 몸들을 더욱 섬세하게 고려하고, 차별적이지 않은 세심한 언어를 발명하자고 말할 것이다.

진리를 사유할 수 없다면 판단의 기준으로 남는 것은 사실과 의견, 그리고 당사자성이다. 이것들에 대한 고려는 각자의 몸과 언어, 즉 주관적 이해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동시대적 합의 속을 순환하고 그 합의를 견고하게 한다. ‘무엇이 재현 가능한 사실인가? 무엇이 다수의 의견인가? 누가 이 문제를 몸으로 겪는 당사자인가?’ 모두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판단의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누구도 이 상황에서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는다. 몸과 언어에 대한 세심한 고려는 지적 신중함과 윤리적 태도의 옷을 입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진리에의 욕망을 무한히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진리의 배제는 결국 처참한 주관화, 온갖 상대주의적 폭력, 사유의 끝없는 보수화, 만연한 무기력을 낳았다. 우리가 훨씬 거대한 적대의 드러남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허영 때문이 아니다. 오직 그러한 적대의 드러남만이 우리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하고 있는 것,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다. 학식이나 교양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욕망으로서의 철학. 이 욕망은 한 시대를 틀 짓는 사유의 한계를 마치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논리를 따라 전체를 향해 나아간다.

4 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김현우·민정희 옮김, 창비, 2021) 참조.

5 시 엘 아르 제임스, 『블랙 자코뱅(우태정 옮김, 필맥, 2007) 3장 「프랑스 의회와 노예」 참조.

6 앙투안 피에르 조제프 바르나브는 혁명 프랑스 의회 최고석에서 노예 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식민지] 체제는 부조리합니다. 그러나 이미 수립된 이상 섣불리 다루려다가는 엄청난 혼란이 발생되고 말 겁니다. 이 체제는 포악합니다. 그러나 수백 만 명의 프랑스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있습니다. 이 체제는 야만적입니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분이 간섭하면 훨씬 더 야만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같은 곳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