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시, 찢어진 세계

―21세기 생태시 비평을 위한 제안

『현대시』 2023 7월호

지리역사학자 앨프래드 크로스비는 자신의 명저 『태양의 아이들』에서 석탄과 석유를 “화석화된 햇살(fossilized sunshine)”이라는 표현으로 명명한다. 한국어판에서는 그 표현을 “지구가 저장해둔 햇빛”이라고 옮겼는데, 뜻은 명확하지만 원전의 표현이 주는 ‘시적인’ 느낌은 없어졌다.1

그래서 원전과 국역본을 나란히 살펴보면서 다음처럼 자문하게 되었다. 시적이거나 시적이지 않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2 “화석화된 햇살”이라는, 생각해보면 과학적이고 적확한―석유는 태양에너지를 머금은 동식물의 사체가 땅밑에서 혹은 바닷속에서 긴 시간 압축된 것이다―표현은 왜 시적이라는 느낌을 주는가? 마지막으로 시적 언어는 ‘자연’이나 ‘사물’과 어떻게 상관하는가?

단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영어 표현에 낯설어서 내가 이 표현을 시적이라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미국 소설가 나디아 보작은 영화와 태양의 관계에 대한 인상적인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석유는 다른 연료보다 밀도가 높기에 값지고, 그래서 크로스비는 그것을 시적으로 ‘화석화된 햇살’이라 칭했다.”3 여기서 연료의 ‘밀도 높음’, ‘값짐’이라는 특징과 ‘시적’이라는 느낌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란히 말해지는가? 이 문장은 근대적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른 성질과 가치를 마구 뒤섞고 있는 것으로 보일 텐데, ‘밀도 높음’은 석유라는 객체의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데카르트가 ‘제1 성질’이라고 불렀던) 성질에 관련되고, ‘값짐’은 인간의 문화적, 경제적 이해관심과 가치판단을 전제하는 것이며, ‘시적’이라는 규정은 미학적 반응(칸트가 ‘무관심한 관심’이라고 불렀던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론적 이유를 따지기 전에, 그 표현에서 내가 즉시 시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아마도 다음의 시를 언젠가 여러 번 필사한 적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체조가 있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

그렇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다.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기를 가리켜 보인다.

무너지느라고 체조가 서 있다.

―이수명, 「체조하는 사람」(『마치』, 문학과지성사, 2014) 부분

“화석화된 햇살”이라는 역사학자의 표현은 즉시 나에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라는 시인의 표현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나에게 내가 외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나를 외우는”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서 이 시는 화석이나 광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마 이 시가 ‘시간성’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면서 위 질문에 간접적으로 답할 수 있을 성싶다. 시간성은 시의 초반에는 인간적인 규모이지만, 후반에는 인간을 훌쩍 초과해 전개된다. 처음 체조를 할 때, 체조가 낯설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체조를 한다. 그러나 어떤 체조가 매일 반복되면, 몸에 익숙해지면, 의식하지 않고서도 체조를 할 수 있다. 체조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내가 체조를 외우는 것인지 체조가 나를 외우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복의 시간성은 어느 시점까지는 익숙함(숙련)과 정비례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서는 다시 인간에게 낯설어진다. 어떤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같은 체조를 하는 모습을 압축된 영상으로 본다고 상상해보자. 인간이나 인격은 무화되고, 거대한 율동만이, 체조의 하릴없는 반복만이 눈에 띌 것이다. 중국 도시의 광장에서 이름 모를 중년 여성들이 아침마다 추는 광장무에 담긴 역사를 생각하면 아득해지듯이.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은 고도로 압축된 시각성을 상상하게 하는 표현이다.4 햇빛이 화석화되어 석유가 되는 정도의 기나긴 시간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당연히 등장할 수 없다. 지구의 45억 년을 하루로 압축하면 인간은 3초 남짓 머물렀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체조하는 사람」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지고, 반복되는 체조의 운동이 남는다 해도, 체조 역시 결국 “무너지느라고” 서 있는 것이다. 지리역사적인 시간 척도에서 보면, 콘크리트 건물들 역시 여름날의 얼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나는 가끔 움직이지 않는 구름을 본다./흘러내리는 벽돌들을 바라본다”(「천천히」, 같은 책). 우리의 시간관이 이 정도로까지 확장되면 시는 세계에 대해 혹은 삶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 Alfred W. Crosby, Children of the Sun, W. W. Norton & Company, 2007; 알프레드 W. 크로스비, 『태양의 아이들』, 이창희 옮김, 세종서적, 2009. ‘fossilized sunshine/지구가 저장해둔 햇빛’은 책 2장의 제목이다.

2 첫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는 문자와 독자의 이해 사이에 있는 시차(時差)다. “화석화된 햇살”은 감각적이지만 그 의미가 즉각 전달되는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독자가 그 의미를 곱씹고 유추할만한 여유 공간을 열어놓는다(물론 『태양의 아이들』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지리역사학 서적이며, 번역자는 다양한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것보다는 오해의 소지를 줄이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그 표현이 시적인 느낌을 주는 두 번째 이유로는 언어적 성질과 사물적 성질의 얽힘을 들 수 있을 듯하다. “화석화된 햇살”은 압축적 표현이고, 석유 역시 에너지가 압축된 것이다. 비평가나 연구자가 시에서 의미를 추출하기 위해 종종 그것을―때때로 부당하게―분류하고 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석유에서 에너지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압축된 그것을 뽑아내고 분류하고 정제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3 Nadia Bozak, The Cinematic Footprint, Rutgers University Press, 2011, pp. 30-31.

4 비슷한 사례로 사진작가 김아타의 연작 중에 뉴욕 타임스퀘어를 여덟 시간 장노출로 찍은 사진이 있다(On-Air Project #110-1,2 Times Square from the serize “New York”, 2005). 그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으면 움직이는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여덟 시간 동안 정지해 있었던 것만 표면에 남게 된다. 낮이나 밤이나 사람으로 우글거리는 타임스퀘어는 건물이나 표지판 등의 구조물만 남고 텅 비게 된다. 김아타의 사진은 언뜻 인간종이 사라진 이후의 도시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렇다기에는 풍경이 너무 깨끗하다(동물도, 넝쿨도, 먼지도, 잔해도 없다).

인류세와 이중의 난점

시가 인간의 사라짐에 대한 연습이고, 인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언어의 체조라면, 그 체조 역시 결국 무너지려고 서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우리가 읽은 훌륭한 사상가와 비평가들은 ‘인간의 죽음’과 ‘예술의 죽음’을 너무 당연한 듯 연결 지어왔다. 우리가 21세기의 생태시를 말하고자 한다면, 이 당연하게 전제된 순장(殉葬)의 운명에서 예술을 해방해야 한다. 다른 시간성을 ‘인간의 시’에 겹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를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 감각을 비인간적인 수준으로 확장하는 방향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라는 개념은 시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인간의 지위에 대해 매우 이중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인간의 생활, 특히 산업화 이후의 풍요한 생활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속하는 것일 뿐임을 일깨운다. 학자마다 인류세의 시작점을 다르게 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개념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근래에 시작되었듯이 곧 끝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구 환경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대함을, 따라서 저편에 언제나 그대로 있는―잉여가치의 추출을 수동적으로 허락하는―‘자연’과 이편에서 정신없이 변하는 ‘역사’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지구에 잠시 머무르는 종이지만, 산업화 이후 인간이 소비한 닭의 뼈가 지층을 형성했다고 하듯이, 지구 환경에 지리역사학적인 규모의 영향을 끼쳤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의 세계에서 인간의 영역과 그 밖의 영역을 나누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그 두 영역이 정말 나뉜 적이 있기는 할까? 근대인들은 비인간 없이 독립적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단지 엄청나게 많은 인간-비인간 ‘하이브리드’를 동원하면서도 그것들을 진지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율배반적 사고방식을 발명했을 뿐이다.5 근대인의 복잡한 사물함은, 많은 것을 그들 뜻대로 분류하고 동원할 수 있도록 했으나, 그들이 나눌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나눠 담은 바람에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후 재난은, 라투르에 따르면 억압되었던 ‘하이브리드의 귀환’이다. 탄소, 박쥐, 코비드 바이러스, 오존층의 구멍, 가축화된 10억 마리 소, 소들 각각이 지닌 네 개의 위 속에 있는 1000조 마리 미생물 등 하이브리드들은 근대인의 이율배반적 사물함에서 쏟아져 나와 자연과 문화, 과학과 정치,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 구분을 무화시키면서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우리의 시 그리고 비평은 ‘생태’를 말하는 데 여전히 이중의 난점을 겪고 있는 듯 보인다. 즉 한편에는 인간의 존재감, 언어의 권력, 근대적 야망(해방을 향한 것이든 풍요를 향한 것이든)을 축소하고 인간은 생태사(生態史)라는 무대의 구석이나 아래로 물러나야 한다는 당위가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존재감, 야망, 권력을 축소하는 관점과 말하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막대해진 인간의 힘과 책임을 외면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문학의 무대에서 비인간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 좋다는 당위적 경향6은, 때때로 실상에 적절하지 않은 윤리적 알리바이로 작동하는 것 같다.7

물론 오늘날 많은 연구자와 활동가가 하듯이 문학도 (근대인들이 동원하면서도 감춰두었던) 비근대적, 비인간적 존재들을 ‘가시화’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 소재의 측면에서, 비인간 존재들의 양적 증가는 환영받아야 할 경향인 만큼 비판적으로 성찰될 필요가 있는 문제다. 비인간의 비중을 늘리면서 근대성을 극복한다고 쉽게 전제하는 것은 잘못인데, 비인간을 대규모로 동원한 것이 다름 아닌 근대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지금 아주 큰 붓으로 논의의 개괄적인 윤곽을 그리고 있다. 근대문학이 비인간을 동원하는 방식과 요즘의 한국 시가 비인간을 등장시키는 방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들은 세심한 연구와 비평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2010년대 이후 많은 한국 시에서 신이 강력한 믿음의 대상이자 정당화의 심급(그만큼 치명적인 의심의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하고, 귀엽고, 어리고, 나약한 존재로 등장하는 경향이 눈에 띈다. 그러나 어떤 문화적 코드―이를테면 ‘귀여움’―를 통해서 재현되는 비인간은 우리의 편의와 기호에 따라 교화된 타자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동시대 한국 시에서 어린 신들은 우리의 감수성을 비추기 위해 거듭 불려나오는 것 이상의 어떤 구체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이 글을 통해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인간의 편을 기각하고 사물의 편을 들면서 인간 중심적 근대성을 비판한다고 전제하는 사고방식이다. 나는 그러한 전제가 시대와 장소에 맞지 않는 낡은 전략 설정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한 ‘비판’은 오히려 서구 근대의 비판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로부터 법제화된 이분법, 즉 ‘인간의 편’ 아니면 ‘사물의 편’이라는 이분법에 너무 충실하게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사물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비합법적이라는 것, 우리가 언제나 주체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칸트였다. 이후 하이데거는 형이상학과 과학의 지배가 존재를 망각하게 했다며, 존재의 진리를 보존하는 시의 언어를 찬양했다. 반면 사물을 마음대로 노래하는 시인의 권능이 마땅찮았던 프랑시스 퐁주는 은유를 배제하는 ‘사물의 편’을 주장하며 독특한 반시(反詩)를 창안했다. 서구 철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려 했던 데리다는 말년에 ‘속을 알 수 없는’ 고양이의 시선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다.8 이들은 우리가 비인간, 동물, 사물에 인간의 언어나 지식, 감관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독단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러한 비판적 겸손함에 반대하고, 과학적 사고와 시적 사유의 낡은 대립에도 반대하며, 오히려 시가―근대적, 비판적 사유가 체계적으로 억압한―진리와 실재를 향해 대범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의 이상야릇한 문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세계는 물화(物化)의 죽은 지대가 아니라 여느 모더니즘 시처럼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9

즉 문제는 비인간과 인간 영역의 분리를 고수한 채 비인간들을 이편으로 끌어 오거나 시를 저편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인간 언어의 한계를 받아들인 채 인간의 편에서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사물과 언어가 근대적 사고방식이 상정했던 만큼 그렇게 철저히 분리된 적이 없었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5 브뤼노 라투르는 사물 세계나 인간 세계의 이분법으로 나눠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를 ‘하이브리드’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사물 세계와 인간 세계를 굳이 이분법적으로 분류한 것이 근대성의 ‘헌법’이다. 이 헌법은 사물의 표상 체제(representation system)로서의 과학과 인민에 대한 대의 체제(representative system)로서의 정치의 분할을 보장하고 발전시켰다.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특히 2장 「헌법」 참조.

6 《요즘비평포럼》의 2023년 1회 〈비평 대화〉 코너에서 송현지는―비인간을 사고하고 관계를 감각하고자 하는 문학적, 비평적 시도들의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비인간 존재의 출현 빈도 증가와 그것들의 낭만적 전제, 혹은 동어반복성에 의문을 표한 바 있다. SNS에 공유된 송현지와 황사랑의 〈비평 대화〉 게시물을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였다.

7 이를테면, 예술과 문학 비평에서 많이 인용되는 『생동하는 물질』에서 제인 베넷은 물질의 생동성을 보여주는 예로 2003년 북미에서 있었던 대규모 정전 사태를 언급한다. 물론 전신주, 참새, 자기장, 핵연료, 빗방울, 기업, 법률, 소비자는 근대적 지식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이며 복잡하게 상호작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대정전은 전기 공급을 민영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고삐 풀린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그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런 욕망을 제어하는 정치의 부재가 통제 불가능한 규모에 이르는 하이브리드를 동원했기 때문에 그 사태가 난 것이다. 생동하는 물질에 대한 강조는 상황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와 기업의 무책임한 이윤 추구에 가해야 할 강한 비판을 희석하는 듯도 보인다. 또 베넷은 ‘외주의 외주’로 이어지는 기업의 규모 확장에서 비가시화되는 노동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는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84-107쪽 참조.

8 자크 데리다,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최성희·문성원 옮김, 『문화과학』, 2013년 겨울호.

9 ita Felski, The Limit of Critiqu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p. 175. 이 책은 신형철 교수의 지도 아래 서울대 비교문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번역·강독되었다. 인용된 문장은 수업에 참여한 학우들의 번역을 참고한 것이다.

세 가지 함정

따라서 우리의 생태시와 비평은 다음의 함정들을 피하는 좁은 길을 찾아야 한다. 1: 비인간 존재를 인간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동원할 수 있게 하는 독단적 전제들, 문화적 코드들에 의존하기. 2: 1을 비판하면서 비판적 겸손함으로 물러나기. 3: 2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편’에서 ‘사물의 편’으로 건너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함정 1은 여전히 잔존하는 위험이기는 하나, 이론적, 비평적으로 너무나 많이 비판되어왔다. 그러니 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도록 하자.

함정 2의 역설적 문제는, 비인간을 대변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는 역할로부터 지적, 문화적, 예술적 영역이 서서히 물러남에 따라 오히려 비인간 타자를 회의주의 속에 내버려 두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시인이자 탁월한 산문 작가였던 제발트는 “우리는 청어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썼다.10 이 문장은 인간에 의한 청어의 대규모 죽음에 대해, ‘청어는 고등동물이 아니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며 사람들을 안심시킨 당시의 과학적 합리화를 반성하고 비판하며, 동시에 청어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하거나 쉽게 연민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엄결한 자의식도 담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주장이 이제 정반대의 의도로 사용된다면 어찌하겠는가?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자. 오히려 최근 몇십 년간 과학자들은 동물 역시 감정과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를 축적해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절대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음처럼 대꾸한다. ‘과학자들이 동물 돼봤냐?’ 좀더 점잖게 말하자면 과학자들의 주장 역시 실재라는 보장은 없는데, 그들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혹은 능력상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회의주의가 우리의 문학이나 비평과 상관없는 극단적 반지성주의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 회의론자들은 인문학이 정교하게 발전시킨 비판의 어법―과학자들조차도 특정 관점에서 말할 뿐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준―을 학습했다.11 회의론자들은 ‘우리는 동물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제발트가 인간 중심적 과학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썼던) 그 문장을 갱신된 과학적 증거(‘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를 부정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러한 회의론은,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는 기후 회의론을 비롯해 근래 도처에서 극단주의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전적인 타자’는 윤리적 급진성이 아니라 그저 인간 주체의 무능력의 증상, 의미를 알 수 없는 얼룩으로 전락해버리고, 무지에 대한 인정은 앎과 염려(care)의 책임을 회피하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린다. 이 회의주의나 광신을 견제할 언어를 오늘날의 인문학 연구자나 비평가는 거의 갖고 있지 못한데, ‘전적인 타자’에 대한 접근 가능성으로부터 철학도 시도 ‘겸손하게’ 물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어렵지만 필요한 일은, 타자에의 앎을 향해,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는 것 같다.12

그렇다면 한국 시에서도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3의 길은 어떠할까? 몇 년 전에 이수명은 이 길을 모범적으로 개척한 예로 프랑시스 퐁주와 오규원을 호명하였다. 이수명은 퐁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퐁주가 생각한 ‘반휴머니스트’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반(反)은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은유를 멀리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사물은 인간과 연결되지 않고, 인간에 동원되지 않고, 사물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13 오규원의 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나비」는 나비에 대한 생각도, 형이상학도, 정념이나 느낌도 아니다. 단지 [……] 나비라는 대상, 구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한 사실성의 추구가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본질일 뿐이다. 주체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는 객관성이 중시되는 것이다.”14

자의적인 은유와 의미 부여를 자제하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애쓰기. 이수명의 표현대로 ‘반은유’라고 명명할 수 있을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이미 많이 논의되어왔다. 아마 이수명 자신의 시에도 오규원과 퐁주의 영향이 녹아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시는 사물의 전위로 나아가는 반인간주의적 시로 평가받기도 했다.15

한편에 자연과 사물의 나라가 있고 반대편에 언어와 관념의 나라가 있다면, 언어의 법도를 사물에 적용하는 것은 언어의 제국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언어의 권력, 은유의 욕망, 관념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물의 편에 서고 언어의 압제에 항거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전제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3의 길에서 특히 눈에 띄는 난점은 시의 중요한 일면인 정서적 측면의 억제다. 정서 역시도 인간의 전유물이고, 종종 인간이 자연이나 사물에 덧씌우는 것이니, 사물의 편에 정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시에서 정서적인 면을 억제하거나 심지어 축출할 필요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이 길의 두 번째 난점은 “인간과 연결되지 않”은 순수 사물을, 주체와 분리된 객관의 차원을 여전히 상정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전체주의적 나라에서 시의 언어만이, 완전히 단교된 두 나라의 삼엄한 국경을 월담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듯이, 사물의 민주주의적 나라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적 은유와 정서 표현의 습성을 교정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20세기 후반에 사물의 편에 서려 했던,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비판했던 국내외의 시인, 작가, 사상가에게는 그들의 역사적 당위가 있다. 그들 작업에는 존경할만한 면이 있다. 그것들에서 현재적 의미, 새로운 전략을 발굴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당면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이 불거졌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미 정립된 전략들을 계속 취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창작과 비평 앞에는, 근대성을 명민하게 비판했던 이들이 직면한 적 없었던 새로운 함정, 이를테면 ‘반데카르트적 인간중심주의’나 ‘독단적 회의주의’라고 부를만한 혼종적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다. 또 앞서 언급한 세 개의 함정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1의 함정을 피하려다 2의 덫에 빠지고, 3의 함정을 피하려다 1의 함정으로 굴러떨어지기 쉬워 보인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세 함정 사이에 오랫동안 좁은 길을 내온 이수명의 시적 궤적에 퐁주나 오규원의 ‘사물시’를 넘어서는 면이 있다고 본다. 시인 자신은 그 선배 시인들을 높이 평가하지만(그리고 그 평가는 유익하지만), 그의 시는 오히려 자신의 시론적·비평적 관점과 각을 세우거나 그 관점을 초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부분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글의 뒷부분은 (생태와 관련해 딱히 비평된 적 없었던) 이수명의 시에서 새로운 생태적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 문제들을 확장 가능한 비평적 쟁점으로 만드는 데 할애하려 한다.16

10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 2011, 73쪽.

11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Bruno Latour, “Why Has the Critique Run Out of Steam? From Matter of Fact to matter of Concern”, Critical Inquiry, winter 2004, pp. 225-248을 보라. 이 글에 대한 나의 번역은 올해 가을에 『문학과사회』에 실릴 예정이다.

12 중요한 문제는, 비판적 사유를 부정하면서 독단적, 본질주의적 전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비판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다시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느냐이다. 근래 폭넓게 호응을 얻고 있는 신유물론이나 ‘새로운 실재론’의 다양한 조류는, 적어도 이 과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13 이수명, 「은유 없는 세계 은유 없는 시」, 『시와세계』, 2015년 여름호, 18-22쪽. 강조는 인용자.

14 이수명, 「프랑시스 퐁주의 <나비>와 오규원의 <나비> 비교 연구」, 『동서비교문학저널』, 29호, 247-64쪽. 강조는 인용자.

15 이혜원, 「미지의 세계를 향한 진지한 놀이―이수명론」, 『계간 시작』, 2014년 겨울호, 23-38쪽.

16 나는 이미 이수명에 대해 몇 편의 글을 썼지만, 그 글들에서 스스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누락했던 문제들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한 ‘누락’은 내가 그의 시를 생태적으로 읽지 못하고 다소 낡은 비판적 관점으로 읽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 글의 배치에는 본인의 비평적 누락을 바로잡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기울어진 시와 기후 우울증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에서 『도시가스』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보면, 건조하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인 ‘객체 지향적’ 진술들로 가득했던 이수명의 시가 점점 더 일상적이면서도 정서적으로 변해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우리가 앞서 비판했던 이분법에 머무른다면, 이수명의 시가 사물의 편에 가까운 시적 전위로 나아갔다가 인간의 편에 속하는 것들(정서, 감정, 일상, 느낌)로 물러섰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이수명의 시적 궤적이 어딘가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의 편과 인간의 편의 분리를 극복하고 횡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하려 한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느끼고, 자연 자체의 취약함을 자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이제 『도시가스』(문학과지성사, 2022)의 첫 시를 읽어보자. 이 시에는―날씨와 옷의 관계라는 이수명 시의 오래된 테마와 함께―기울어진 세계에 대한 감각이 드러나고 있다.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부분

‘너’는 나쁜 날씨에서,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세계에서 누더기를 입은 사람이다. 그는 왜 똑바로 서 있지 못하는가?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음과 나쁜 날씨는 무슨 상관인가? ‘기후’로 번역되는 영단어 climate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 단어가 땅의 경사를 의미하는 라틴어 clima, 그리고 기울어짐이나 기댐을 의미하는 고대 인도-게르만 공통어 klei-에서 연원했음을 알 수 있다.17 그 단어는 서사적 긴장이 극대화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클라이맥스’, 성향이나 기질을 뜻하는 ‘proclivity’, 경향과 의향을 뜻하는 ‘inclination’, 치료를 뜻하는 ‘클리닉’ 등과 어원이 같다.

우리 존재가 본래 서로 기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언제나 편향되어 있고 취약하다는 것― 또 그렇기에 약해지는 것과 치료되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날씨가 나빠지면서 더 자명해진다. ‘너’가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로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개인적, 예술가적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날씨 때문이다. 시의 동인은 문제적 인물이 아니라 ‘문제적 날씨’다. 기후가 우리 삶에서 점점 더 존재감을 갖게 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삶의 환경인 ‘세계’의 치명적인 기울어짐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18

그런데 더욱 특이한 점은 꿈속의 ‘너’가 화자보다 훨씬 의연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울어진 세계에 오래 살아왔고 화자보다 잘 적응한 사람처럼 보인다. 세계의 기울어짐을 처음 겪는 화자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느끼고 “피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는 “천천히 산책 중”일 뿐이다. 즉 그는 세계의 기울어짐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도시가스』에 깊이 깔린 우울한 정조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처럼 생각했다.19 물론 시집의 우울에 인식과 전환의 가능성이 잠재하며, 또 그것이 시대적 분위기를 독특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한편으로 시집의 우울이 내가 속한 세대의 우울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너’에게 “피하라”고 소리치는 위 시의 화자 같았는지도 모른다. 기울어진 세계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우울을 해결하거나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딘가 기울어지지 않은 세계, 평탄하고 안전한, 중립적 세계가 있으리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전제로 시집을 읽은 것은 잘못이었다. 이 시집의 세계를 산책하는 사람은, 벗어날 곳 없이 기울어져 있고 불안정한 세계를 계속 걸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가스』의 산책은 ‘구기후체제’에 안전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신기후체제(New Climate Regime)’에서 살 방법을 찾는 “지구생활자(Earthbound)”의 체조라고 볼 수 있다.20 인간은 자연의 반대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려 하지만, 지구생활자는 자신의 기울어짐이 다른 존재들의 기울어짐과 불가결하게 얽혀 있음을 안다. 인간의 사망일과 예술의 사망일이 꼭 일치할 필요는 없는데, 이제 우리는 인간의 시가 아닌 지구생활자의 시를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가스』의 우울함이 단지 주관적인, 담론적인 증상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시집의 우울함은 날씨, 분위기, 대기에 대한 지속적인 정서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기후 우울증’으로 맥락화될 수 있을 듯하다.21 기후 우울증은, 말 그대로 이해하자면 기후변화에 연동되어 의욕의 저하와 수면장애, 생각과 감정의 변화, 공허함, 자살 충동 등을 겪는 심리적 상태다.22 그러나 이러한 임상적 정의는 기후 우울증이라는 주체적 현상이 문학과 비평에 요구하는 존재론적 성찰을 담지는 못한다. 기후 우울증은 자연과 사회, 환경과 인간, 심지어 건강과 질병의 구분을 헝클어 놓는 하이브리드적 현상처럼 보인다. 그것은 변화의 치명적 예측 불가능성과 동시에 누가 더 피해에 실존적으로 노출되어 있는가 하는―사회적 불평등과 정서적 민감성을 포함하는―문제를 제기한다. 또 그것은 사실상 세계를 구획하는 선험적 경계가 없고 오히려 날씨, 재화, 물질, 피부, 신경, 언어, 타인의 감정 표현 등이 극히 복잡하게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는 우리의 정서와 가치관에 어떤 지속적 영향을 끼치는가? 자외선을 쬐라는 의사의 반복된 말은 우리의 생활 습관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비가 올 때마다 감정이 변하는 연인과 보내는 장마철은? 재난과 관련된 기사에 실린 황폐한 바닷속 사진은? 치솟는 물가와 긴급재난문자는? 이런 감정적, 정서적 문제에서 무엇이 실재적이고 무엇이 담론적인지, 무엇이 문학적이고 무엇이 일상적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바로 이것이 책, 전단지, 폐쇄된 사진관, 사라진 날벌레, 긴급재난문자, 폭우, 진흙탕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울한 화자(「물류창고」, 『도시가스』, 35-37쪽)가 겪는 이 세계의 모호함이다.

한편 이 우울을 단순히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도 안 될 것이다(이런 종류의 단순화는 합리성을 보수적으로 옹호하는 쪽과 합리성을 비판적으로 공격하는 쪽 양편에서 모두 일어날 수 있다). 여전히 근대 철학적인 합리성에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신체, 정동, 욕망, 무의식, 물질―을 맞세우면서 그 합리성에 대항하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근대적 합리성에 의해 도입되었을 뿐인 이성과 비이성의 단순한 이분법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 세계가 기울어져 있고 균열이 가 있으며 취약한 만큼 나도 기울어지고 취약한 것이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일이다(그러나 이 합리성은 자연의 총체적 원리를 암시하는 ‘섭리’와는 상관없고, 차라리 그것에 반대된다). 국가나 기업이 인간과 다른 종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된 기후 문제를 축소하고 등한시한다면 거기에 강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다.23 요컨대 정서, 감정, 취약함, 기울어짐을―갈수록 권위와 신뢰를 잃고 있는 근대적 편견이 아니라면―꼭 합리성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7 https://www.etymonline.com/word/climate

18 물론 매일의 ‘날씨’는 현상이고, ‘기후’는 그 현상들의 경향과 원인을 아우르는 시스템으로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시집, 나아가 한 시인의 궤적에서 날씨에 대한 반응이 지속적으로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러한 현상과 반응을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어떤 경향과 구조를 시적 기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후는 심리적, 담론적, 시대적인 것이지만 동시에―이 시집이 구성되고 유통되는 세계의 조건이라는 의미에서―실재적이기도 하다.

19 이희우, 「나의 우울과 나무의 기쁨」,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265-78쪽.

20 ‘신기후체제’와 ‘지구생활자’는 라투르의 개념이다. 라투르는 홀로세의 안정된 기후에 바탕한 자연의 관념, 삶의 방식의 짜임을 ‘구기후체제’로, 기후변화 이후 달라지는 사고와 존재 방식의 짜임을 ‘신기후체제’로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 현재 드러날 필요가 있는 정치적 적대는 구기후체제에 머무르고자 하는 ‘인간’과 신기후체제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지구생활자’의 거대한 대립이다. 이에 대해서는 Bruno Latour, Facing Gaia, trans. Catherine Porter, Polity Press, 2017, 특히 7장 참조.

21 이 글에서 다루는 ‘기후 우울증’의 개념과 맥락을 내게 귀띔해준 것은 사회학자 조민서이다. 그는 현재 ‘기후 우울증자의 주체성’이라는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22 https://wellcome.org/news/explained-how-climate-change-affects-mental-health

23 기후 재난과 관련해 강한 주장을 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활동가들을 두고 일각에서 너무 감정적이라고, 비합리적이라고, 극단적이라고 조롱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렇게 ‘비판적 거리’를 취하며 반대로 자신들은 합리적이고 온건하다는 식으로 구는 오만한 태도는 비속어로 가득한 인터넷 댓글에서부터 지식인의 교양 있는 지적, 기업의 친환경 전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물론 그들의 ‘합리성’ 역시 편향되었고, 특정한 관점을 전제함을 드러내며 그들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비판적 상대화’가 이제 전혀 참신하지도 효과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약간의 합리성을 탈환할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없다면 ‘합리성’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나 보수주의의 전유물로 남겨두게 될 것이다.

찢어진 자연

하지만 이러한 정조가 단지 인간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취약함이 자연의 취약함과 어떻게 긴밀히 관계하는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도시가스』에 실린 시들 중에서 가장 사변적이면서도 난해한 시―“모더니즘 시처럼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는―를 한 편 더 읽어보려 한다.

한 번은 풀밭에 서 있었다.
앞만 보고 풀만 보고
풀 속에 죽어버린 쥐가 있었다.
죽은 채 발견되는 일을 생각한다.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멀리는 못 간 것이다. 안 보이게 되는 순간까지
가지는 못한 것이다.

풀이 찢겨 있기 때문이라고
찢긴 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두 사람이 풀밭을 따라 걸어갔다.
풀이 돋아나면 오세요
남자는 남자에게서 비켜서고 여자는 여자에게서 비켜서고
남자는 여자를 가리고 여자는 남자를 가리고
두 사람이 풀을 따라 걸어갔다.
풀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풀을 밟지도 않고
풀을 누르지도 않고 걸어갔다.
풀 위에서 동작은 실현되지 못한다.
자연이 먼저 찢겨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도 무심한 풀은 돋아나고 이리저리 아무 데나 돋아나고 심심풀이로 돋아나고 머릿속에도 돋아나고 그래서 머리가 이상해지고 머리를 숙여도 아무리 숙여도 머릿속의 풀을 토하지는 못한다.

한번은 풀 위에서 웃었다.
풀의 전위
발끝을 세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도
풀은 다시 반짝이고

―「풀 위에서 웃었다」 전문

첫 연에서 화자의 계획은 이미 어그러진 상태다. 그러나 화자는 “안 보이게 되는 순간까지” 도약하지도 못한다. 풀밭은 뭐든 뜻대로 되지 않고, 그렇다고 벗어날 수도 없는 공간이다. 도약 혹은 탈출을 금지하는 환경이다. 이수명은 십여 년 전에도 “모든 도약이 사라진 풀밭”(「누워 있는 사람」, 『마치』)에 대해 쓴 바 있다. 시대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이 풀밭에 “누워 있는 사람은 감정에서 떨어져/감정이 되려는 사람/감정과 교대하는 사람/육체보다 길어진 사람”이었다(같은 시). ‘누워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적 감정에서 떨어져나오는데, 그것은 그가 감정이 없는―초연하고 중립적인―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됨’을, 즉 세계의 분위기, 정조, ‘기분(stimmung)’에 열리게 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풀 위에서 웃었다」에서 인간의 내적 의지에 따른 도약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존재론적으로 모든 비약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 더 결정적이면서 치명적인 도약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데, 4연에서 볼 수 있는 바대로,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으로서의 “자연이 먼저 찢겨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먼저 찢겨 있”다는 표현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연의 균열과 비약, 현격한 변화는 인간이 자연에 투사한 의미나 이미지가 아니다(오히려 인간이 자연에 투사한 것은 안정된 객관적 상태였다). 자연은 인간의 투사나 의미 부여가 있기 전부터 이미 찢겨 있다.24

그런데 이 시에서 한층 문제적이고 이상한 것은, ‘자연이 먼저 찢겨 있다’는 진술이 위 3연의 내용과 공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연결되고, 한편으로는 “풀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일견 반실재론적인) 느낌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객관적, 전체적인 자연이 없다면 감지할 수 있는 자연 자체가 없어진다는 듯이 말이다. 이 풀기 어려운, 모순된 듯한 시의 꼬임은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나를 고민하게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나는 이 시의 감각(분열의 지각과 실체가 없는 듯한 느낌)과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을 듯한 어떤 사변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뤼스 이리가레의 다음과 같은 진술.

자연은 적어도 둘이다. 둘이란 남성과 여성이다. 보편적으로 자연을 극복하려는 모든 사변은 자연이 하나[一者]가 아니라는 점을 망각한다. 그 사변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이 추론은 필수적이다―분절점으로서의 실재를 만들어야 한다. [……] 보편적인 것은 하나로서 사유되어왔고, 하나에 기반해 사유되어왔다. 그러나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25

이는 자연, 보편,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보편적이고 실재적인 ‘자연’은 분열의 형식으로, 비(非)전체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연의 분열에 ‘남자와 여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칫하면 양성에 대한 본질주의로 퇴행할 위험이 있을 듯 보인다. 바로 이러한 우려가 자연적, 보편적 실재를 말하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동시대 비판적 분위기의 중요한 축을 구성한다.26 그러나 이 구문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반드시 둘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둘이라는 점이다. ‘둘’은 자연을 뿔뿔이 상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전체나 총체로 여기지 않기 위한 최소 조건을 표시한다. 말하자면 (사회적 영역에 선행하는) 남자와 여자의 자연적 본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불완전한 것들로의 나뉨과 침투가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찢어지고 기울어진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고 기묘한 말이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 ‘실체’를 파악한다는 뜻이 아니고, 대상과 주체의 합일이라는 뜻도 아니며, 차라리 세계의 기울어짐/찢어짐을 몸소 겪고, “그래서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을 감내하는 일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돌아가야 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은 없다.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세속적 세계에서 ‘인간’만 말소하면 ‘자연’이 회복되리라는 망상도 가능하지 않다. 한편으로 예술의 ‘단독성’이라는 근대적 관념에 비추어보면, 세속적, 생태적 연결에 대한 강조는 자칫 예술의 자율적 지위를 약화시키리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바로 이러한 대립적 사고에 반대하고 싶었다. 시인이 너무 개입하고 작위를 부리면 사물의 생생함은 퇴색하고, 심지어 언어를 사용하는 즉시 사물이 죽을 것이라 말해지곤 했다. 반대로 사물에의 천착이 예술의 주체성을 감퇴시키고 시를 물화시킬 것이라고(즉 정신적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하는 경우도 여전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함양해야 하는 것은, 시인이 무언가를 하면 사물 역시 더 강해지는 그런 연결과 염려의 기술들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시인이 언어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인이 많은 사물, 타자와 연결되는 한에서다. 또 그런 연결을 통해 예술을 더 자유롭고 아름답게 하는 미학적, 비평적 기술 역시 필요하다. 시가 약간의 자율성을 갖는다면, 그것이 일상어나 사물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독특한 연결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연결은 빼어난 시의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시집의 유통과 확산, 독자의 반응에서도 역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인간의 죽음=예술의 죽음’이라는 공동 운명을 의문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편 대(對) 사물의 편’이라는 근대적 분리에 반대하고자 했다. 원론적인 문제 제기이지만, 이 두 가지 과제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가 생태시 비평의 관점을―과거 시와 비평의 중요한 유산들을 간직하면서도―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정향하는 과제에도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기후 문제에 이론적일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강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나는 시인의 다음 문장을 믿게 되었다. “이 세계가 등이 없어서 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방명록」, 『마치』). 『도시가스』에 드러나는, 찢어지고 기울어진 ‘아무개’의 보편성은 근대 철학의 규제적, 총체적 보편성과 다르다. “모두 다 휩쓸린다. [……] 너는 손발이 벌써 없어진 옆 사람에게 괜찮냐고 물어본다. 괜찮아……”(「이 노을」, 『도시가스』).

25 Elzabeth Grosz, “The nature of Sexual Difference”, Journal of the Theoretical Humanities 17, p. 74에서 재인용. 이 글에서 그로츠는 이리가레와 다윈을 연결하여 섹슈얼리티의 담론적, 문화적 측면과 자연적, 생물학적 측면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26 정신분석 이론가 조운 콥젝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을 ‘현대적 회의론’의 범례적 예로 비판한 바 있다. 버틀러의 이론이 젠더를 담론적, 사회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섹슈얼리티의 ‘실재’를 등한시하거나 심지어 금기시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콥젝은 섹슈얼리티가 단순히 자연적인 것도, 단순히 담론적인 것도 아닌 ‘실재’라고 주장한다. 조운 콥젝, 「성과 이성의 안락사」, 박대진·조창호 옮김, 『성관계는 없다』(김영찬 외 엮음, 도서출판 b, 2005), 89-139쪽 참조. 이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철학적 논의를 잘 정리한 논문으로는 김남이, 「성의 존재론과 존재론적 성: 버라드, 그로스, 주판치치의 경우」, 『한국여성철학학회』38, 2022, 67-1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