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쓺』 2023 하권
인문학계, 비평계에서 “비판의 한계”1)가 새삼스러운 화두가 되고 있다. 나에게 “포스트크리틱(post-critique)”이라는 주제로 이 지면이 주어졌다는 것도 그에 대한 작은 방증일 것이다. 새롭지 않은 이 화두는 여전히 기묘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다. 인문학이나 비평이 ‘비판’을 공격하고 반성하는 것은 자신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일이 아닐까? 인문학자, 비평가가 아니라면 누가 비판의 죽음을 슬퍼할까?
생각해보면 “포스트크리틱”이라는 말 자체가 좀 이상하기도 하다. 그것은 ‘포스트’라는 접두사의 흔한 용법에 따라 ‘비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듯이. 하지만 비판에 대한 비판, 이 말은 어떤 소모적인 악순환을 직감하게 한다.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하는 인문학자이자 비평가로서 확신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비판은 정말 힘을 잃어버렸을까?2) 비판적 사고는 정말로 재난을 맞았을까?3) 선배 인문학자들, 비평가들이 열심히 비판 이론을 (프랑스나 미국에서) 수입해와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는데, 이제 우리가 ‘포스트크리틱’ 담론을 (프랑스나 미국에서) 수입할 차례인가?
나는 논의를 위정척사 운동처럼 비현실적으로 근본화하고 싶지도 않고, 담론 소비 유행의 변화로 격하하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초점을 잘 좁혀야 할 듯하다. 비판이 죽었는가 살았는가, 비판을 죽여야 하는가 되살려야 하는가 하는 원론적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비판이 지금 어떤 상태인가, 우리가 비판을 어떻게 경험해왔는가이다. 후자에 비추어 전자가 결정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인문학 연구나 비평에서 ‘비판 이론’의 역사적 경향들이 아직 살아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은―부르디외식 비판 사회학의 어휘를 빌리자면―어떤 장(場)에서만 통용되는 가치나 문법이 되어가고 있다. 장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설득력도 매력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보면, 어떤 비판적 분위기가 강력하게 확산되어 있는 것 같다. 흠집 잡고, 상대화하고, 반박하고, 폭로하고, 고발하고, 계급적·성적·민족적·지역적으로 혹은 세대별로 적대시하는 일이 댓글 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에 (1) 전문적이지만 고립되어가는 비판이 있고, 다른 한편에 (2) 비전문적이지만 전염성 강한 비판이 있는 것일까? 만약 이런 이분법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상반된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즉 지금 비판은 너무 약해서 오히려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과 도처에 너무 지나친 비판이 있다는 주장 말이다. 아마 그 둘을 똑같이 ‘비판’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날카로운 비판적 질문까지 허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둘을 똑같이 ‘비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실제로는 어떤 명확한 단절도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퀴어 이론 같은 비판 ‘이론’의 영향은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뉴스의 댓글, 일상의 대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에 대한 ‘반동’이나 ‘전유’가 더 눈에 띈다 해도 말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배움과 논쟁을 자극하는 강력한 인자들이지만, 한편으로 그런 이론들을 발전시킨 연구자, 사상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부작용도 광범위하게 낳고 있다. 학계나 비평계에서 엄중하고 올바르며 진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 지저분하게 현시되는 문화적 내전이 자신과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1)과 (2)는 활발한 상호작용으로 이어져 있다. 심지어 제도적 공백인 그 비식별역(de-identification)이야말로 오늘날 비판적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살아갈 방법을 찾는, 배우는 자의 관점에서 보면, 전문적 비판과 일상의 비판적 분위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층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내전이 있을 따름이다. 트위터4)는 그러한 내전의 양상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트위터에서 비판은 논리적 반박부터 발화자의 신상, 경력, 정체성에 대한 공격까지 온갖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내전 상황에서는 적과 친구의 경계가 흐려진다. 문화적 내전에서는 비판과 인신공격의 경계가 흐려지고, 혐오에 대한 비판과 혐오 자체의 경계가 흐려진다.
나는 그 논쟁적 에너지의 일부를 배움을 위한 것으로 전환하고 싶다. 말하자면 한국의 사회문화적 내전, 특히 내가 통계적으로 속하는 ‘세대’가 중대하게 연루된 듯 보이는 내전을 비판적 전쟁이 아니라 ‘배움과 비판 사이의 주체적 분투’로 새롭게 의미화하고 싶다. 우리가 겪는 갈등과 반목, 논쟁과 분열을―서로 상처 입히고, 상대화하고, 원자화하고, 추악하게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주체성을 변화시키면서 회복과 연결의 가능성을 생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다. 나는 비평의 축을 ‘비판’도 ‘무비판적 위로’도 아닌 ‘배움’ 쪽으로 이동시켜보자고 제안한다. 물론 학교에서 교수의 말을 필기하는 그런 배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배움이든 비판이든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루려 하면 한 편의 글에서 손댈 수 없을 만큼 너무 큰 개념이다. 또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이라는 제목하에는 배움뿐만 아니라 (문학비평의 전통적 문제들로만 좁혀도) 매력, 아름다움, 장르, 자율성, 진정성, 천재성 같은 개념들도 포함될 수 있다. 그것들은 전(前)비판적 낭만화/우상화가 아닌 방식으로, 그러나 비판적 탈신비화도 아닌 방식으로, 배움의 관점에서 더 풍부하게 재정의될 수 있다. 문제는 끝없이 확장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특히 예술이나 문학을 배우는 자의 주체적인 수준에서 비판의 문제와 한계를 고려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는 심연에 발뒤꿈치를 담그는 일이 되겠지만, 모든 차후의 논의를 위해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 Rita Felski, the Limits of Critiqu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2)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년 가을호(근간).
3) 자크 랑시에르, 「비판적 사유의 재난」,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2016, 39~69쪽.
4)이 원고를 쓰는 동안 트위터가 ‘X’로 바뀌었다. X로 바뀌고 나서야 나는 ‘트위터’라는 이름이 얼마나 감미롭고 귀여운 것이었는지 알았다. 이 글에서는 계속 트위터라는 이름을 쓰겠다.
전문화 방법으로서의 비판
배움이 비판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비판 이론에 박학한 사람이라면 이 질문이 실망스럽거나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비판의 역사를 고려할 때 결코 비판이 배움이라는 주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의 주요 문제는 ‘누가 배울 수 있는가’ 혹은 ‘배움은 무엇을 은폐하는가’가 아니었던가. 부르디외가 말하길 철학적·문학적·예술적 탐구는 ‘여가’를 허락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위에서야 가능하다. 노동의 긴급한 필요에서 면제되는 시간이 있어야 그런 탐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철학·문학·예술은 이 조건들에 대해 침묵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은폐한다. 또 푸코에 따르면 학교에서의 지식 생산은 통치국가의 신민으로서 유순한 몸과 사회적 규범을 재생산하는 규율 메커니즘이다. 어떤 배움이 그러한 권력 장치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5)
따라서 순수한 배움을 말하는 것은 무비판적인, 기만적이거나 순진한(naive) 일로 보이기 쉽다. 듣기 좋지만 공허한 알랑방귀로 들릴 수도 있다. 엄격한 자의식을 가진 비평가에게 배움 자체는 아직 비판에 못 미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가령 누군가 자신이 대상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끼는지, 작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그 배움을 다른 경험과 어떻게 연결하는지 등을 기술한다면 주관적인, 아마추어적인, 딜레탕트적인 감상문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 감상이 좀 더 객관적인, 전문적인 비평처럼 보이려면 작품의 매력과 자신의 배움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 즉 다음처럼 자문할수록 더 엄격하고 책임감 있는 글쓴이로 보일 것이다. ‘이 작품의 사상과 매력과 명망과 스타일은 어떤 사회적·담론적·이데올로기적·역사적·젠더적·인종적·매체적·제도적 조건 속에서 구성되었는가?’ ‘나의 배움을 가능하게 한 경제적·문화적·시대적 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에 감상과 비평의 결정적 차이가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감상은 풍부한 배움의 기술(旣述)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비평은 배움의 조건과 내용에 대해 최소한의 비판적 성찰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구도에서는 감상에서 비평으로 넘어가는 데 비판적 초자아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내 글을 지적·윤리적·미학적으로 검토하는 선생님을 머릿속에 탑재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내 배움의 주인일 수 없게 하는 비판 선생님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사실은 네가 한 번도 네 배움의 주인인 적이 없었단다’라고 일깨워 준다. 그리고 ‘나의 배움은 보편화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비판 선생님은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한다. 아니라고. 만약 네가 어떤 것을 보편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해서라고.
물론 비판적 사유의 역사 자체가 너무 많은 변화와 갈래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보편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비판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이 탑재하게 되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이야기해보자. 서구 근대 사유에 뿌리내린 “비판”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어떤 사유의 조건들을 반성적으로 탐문하는 버릇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의 조건과 한계에 대해 엄격하게 질문했다. 이것은 칸트의 말마따나 ‘초월론적(transcendental)’ 사유였다. 즉 사유에 대한 사유, 메타적 사유였다. 비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개량되어온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메타적 탐문의 방식일 것이다. 즉 특정 사유의 조건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발화하는가? 이를테면 자수성가한 사업가는 ‘내 성공은 극기의 노력 덕분이다’라고 말한다. 비판가는 ‘그런 노력과 자기 확신을 가능하게 한 시대적·사회적·경제적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과학자는 ‘A는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비판가는 그 진술을 다른 과학적 지식으로 반박하지 않으면서 ‘A를 사실로 구성하는 사회문화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기술적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정치인이 ‘한국 사회는 성평등한 사회다’라고 말하면, 비판가는 ‘한국 사회를 성평등한 것으로 경험하는 발화자의 위치는 어디인가?’라고 질문한다.
이런 비판적 탐문이 강력한 계몽의 도구였음을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비판적 어법들, 계몽의 도구들이 지금 사람들을 정말로 이데올로기적 객관성, 현행 권력, 차별적인 가치 체계 등으로부터 놓여나게 하느냐이다. 때때로 정반대로 기능하지는 않는가? 또 앞서 말했듯 오늘날 어떤 비판적 분위기가 사회문화적으로 확산되어 있다면, 인문학자나 비평가가 ‘대기 중 비판의 농도’를 더 높이는 것이 좋은 일일까(혹은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비판 이론의 유통과 가공을 담당하는 대학원이나 문단 비평계 등의 제도적 영역에서 비판적 사고의 훈련이 어떻게 기능해왔는지 이야기해보겠다.
인문학이나 비평의 영역에서도 탐문의 버릇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비판은 이 영역들에서 유난히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듯하다. 팬, 마니아,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비평가 이상의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작품에 대한 설명도 비평가보다 더 매력적으로 할 수도 있다. 웹툰이나 웹 소설에 달린 댓글, 블로그의 세계문학 논평, 유튜브의 만화 해설 등을 보면 이따금 마니아나 팬이 대상에 가진 사랑의 깊이와 지식의 방대함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연구자와 비평가는 ‘그러한 애착이나 명망이 구성된 시대적·사회문화적·경제적·매체적 조건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비전문적 마니아와 차별화된다. 물론 대학이 연구자에게 요구하는 비판적 태도는 학술적인 것이고 비평가가 요구받는 비판적 태도는 더 시의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와 비평가는 둘 다 나름대로 비판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문학 연구자나 비평가가 그 자체 비판되어야 하는 응용과학의 방법들(빅데이터 통계 같은 것)이나 제도적 권위(등단했다는 자격이나 학벌 같은 것)에서 유사 객관성을 빌려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대상(문학작품)은 전문가의 자격을 뒷받침할 ‘객관적’ 지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 비판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기 쉬웠다. 연구자나 비평가에게 일반 관객이나 독자, 마니아와 구분되는 전문성을 부여해온 것이 비판적 사고 자체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팬, 마니아, 오타쿠는 자신의 애착을 따라 대상을 알아가면서 즐거움을 얻는 데 관심이 있지 비판적 성찰을 통해 대상에 거리를 두고 지식과 애착이 형성된 조건들을 탐문하는 데 관심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애착과 즐거움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엄격한 비판가의 눈에는 그런 애착이나 즐거움이 너무 순진하고, 반성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기만적으로 보인다. 대상의 배후나 여백에 있는 사회적 문제들, 이데올로기들, 차별들을 보지 않는 듯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연구자, 비평가들이야말로 그런 암묵적 이데올로기, 가령 ‘문학은 아주 특별하고 가치 있다’는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해온 사람들에 속한다.
비판 자체가 인문학 연구나 비평장에서 주요한 전문화의 방법이므로, 이 영역들에서 비판 담론의 발전과 갱신은 때때로 경쟁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나마 아직 열정이 있는 소수의 인문대 대학원생들이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지금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포스트-퀴어’, ‘에코크리티시즘’ 담론에 이르기까지 더 예리하고 ‘선진’적인 비판 담론을 찾아 두리번거리겠는가? 왜 젊은 비평가들이 입장 정립을 위해 문학에 대한 사랑이나 배움의 밀도뿐만 아니라 내세울 수 있는 비판적 스탠스를 필요로 하겠는가? 왜 온갖 ‘포스트’ 담론들이 생산되면서 담론의 소비 사이클을 촉진하겠는가?
또 어떤 이름으로 정립된 비판적 입장이 아니더라도, 비판적 사고는 비평가에게 개성, 정당성, 활력을 부여한다. 숨어 있는 전제들을 찾아낸다는 비판의 방식은 비평가의 예리함, 감각적 민감성, 윤리적 엄격함을 드러낸다. 또 비평에 추리 소설 같은 짜릿함, 저항의 기치, 눈길을 끄는 소란을 불어넣을 수 있다.6) 비판은 비평의 정당성과 매력의 주요 원천이었다. 그래서 최근까지 비판의 약화는 비평의 약화와 거의 동시적인 것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인문학장과 비평장에서 비판적 사고는 ‘지식/권력’에 대항하는 수단인 동시에 종종 ‘지식/권력’ 그 자체였다. 비판은 숨어 있는 전제들을 찾아내는 방법인 동시에 숨어 있는 전제 그 자체였다. ‘포스트크리틱’이라는 화두가 지금 비평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유를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이제 ‘비판이야말로 정당하고 엄정한 방법’이라는 식의 전제가 많이 약화됨에 따라 그것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면 정립된 비판 이론들, 전문화된 비판은 우리가 예술과 문학에서, 또 삶에서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배움의 예측할 수 없는 길들을 협소하게 만들어왔던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비슷한 질문의 구조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면서, 어떤 방식의 배움만을 특권화하면서.
비판은 배우는 자를 어떻게 분열시키는가?
비판에 대한 이상의 거친 문제 제기는 여러 반문과 반박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 비판 선생님이 다음의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첫째로 나는 비판을 비판하기 위해 비판의 관습적인 방식을 되풀이하는 죄를 저질렀다. 대상을 단순화한 다음 그 이면을 공략하는 식으로. 관습화, 전문화, 제도화된 것이라면 무조건 나쁜가? 어쨌거나 인문학자나 비평가의 경쟁적 공부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드러내고 우리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또 누군가에게 비판은 한낱 게임이 아니라 삶의 문제다. 장의 안팎에 엄존하는 차별과 부조리를 고려할 때 어떻게 비판을 한물간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의 문제 제기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배움이든 비판을 배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비판을 비판할 때조차 우리는 비판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하지만 배움을 비판할 때조차 우리는 배워야 한다―배움을 죄악으로 만드는 방식으로나마. 배움이냐 비판이냐 하는 것은 대상의 본질로부터(객관적 증거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비판으로서의 비평’은 당연히 배움을 배제할 수 없고 ‘배움으로서의 비평’도 비판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비평인가? 전자냐 후자냐에 따라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배우는 자가 비판을 어떻게 학습하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물을 상상해보겠다. 비판 이론을 접한 어떤 예술가 지망생. 이를테면 부르디외식 비판 사회 이론을 귀동냥한 덕분에 예술적 감각이나 안목조차도 사회적 요인(계급, 문화 자본, 아비투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예술대학 학생 말이다. 그는 그러한 비판이 세상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비판 이론 덕분에 상황을 보다 냉철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런 것이었군.’ 그는 실망한다. 그는 쾌감을 느낀다. 결국 그런 것이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것 같지 않은, 너무 뛰어난 감각을 자랑하는 어떤 동기는 사실 부잣집 자제였고 부모 중 한쪽이 유명한 예술가이거나 교수였고, 기타 등등이었다. 천재성은 허구였다.
그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안목, 감각,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들도 결국은 사회구조적 조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미술은 여러 사회적 관계와 차별, 생산 관계 등을 보지 못하게 하는 물신이었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설명이 안 될 것 같은 경우에도 비판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다. 가령 매우 가난하고 전공자도 아닌 청년이 소위 모더니즘적인 ‘고급 예술’에 빠져있다면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허위의식’으로 설명하는 식이다. 친구의 사상이 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라면, 그는 ‘아마 그건 걔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일 거야’라고 넘겨짚을 수 있다. 어떤 비판 이론가의 글이 어딘가 기만적으로 느껴져 화가 난다면, 그는 ‘저자가 1세계 백인 중산층 지식인이기 때문일 거야’라고 단정할 수 있다. 비판 이론을 어설프게 배운(모든 배움은 처음에 어설프니까) 사람이 이렇게 무례하고 환원적인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를 본 적 없는가? 어쨌거나 그는 일상에서 또 작업을 통해 자신의 비판적 배움을 실천하려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유학하고 온 젊은 강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해줌으로써 그를 더욱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거 90년대에 제도 비판 미술이 다 했던 것이거든요.”
그러는 동안 부잣집 아들의 예술대학 유학 지원용 포트폴리오를 지도하는(거의 대필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문할 수도 있다. ‘얘는 누구보다 조기 교육을 많이 받고 문화 자본을 많이 누리는데 감각이 왜 이리 형편없지?’
그는 우월한 안목이나 미감이란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것이고 차별적인 사회구조적 요인들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가 지망생으로서 그가 가장 욕망하는 것은 바로 그 미감이다.
이것은 다소 오래된 비판 모델에 대한 단순한 우화이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사회구조적 차별에 대한 비판은 배우는 자를 차별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만드는가? 드물게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사에게도 비판 선생님은 단계별로 따끔한 가르침을 내린다. 너는 투쟁을 순진하고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 냉철해지고 엄격해져야만 한다. 비판은 다음과 같은 정해진 해답으로 배우는 자를 유도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존하는 차별을 철저히 학습하고, 부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해서, 차별적 조건들을 전유하는 것뿐이야.’ 반복된 비판의 어법에 따르면 체제의 바깥에 대한 낭만적 망상은 체제를 더 공고히 살찌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배우는 자를 역설적으로 차별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만든다. 차별을 성찰하기 위해서든 전유하기 위해서든, 배우는 자는 차별을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하고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가르침은 배우는 자를 한편으로는 원한의 주체로, 한편으로는 죄책감의 주체로 분열시킨다. 그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누려온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갖게 되는 한편으로,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것과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요인(부모, 출신 성분, 생물학적 성별, 외모, 정치, 심지어 대한민국이나 세계)에는 원한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위아래라는 틀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든 (현상적) 차이는 (배후의) 차별로 번역된다. 차별을 모르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순진함은 죄가 된다.
5) 하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배움의 기술로서의 비평’은 푸코가 말년에 이야기한 “자기 배려”와 매우 유사하다. 푸코의 “자기 배려”를 전비판적인 주체로의 퇴행이 아니라 후비판적인 주체화로의 나아감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특히 심세광의 ‘역자 서문’ 참조. 또한, 질 들뢰즈의 대담 「푸코의 초상화」(『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 2000, 99~122쪽) 참조.
6) Felski, “An Inspector calls,” the Limits of Critique, pp. 85-116 참조.
비판적 분위기
나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우리가 동경했던 많은 예술가와 선생은, 특히 2010년대 중후반부터 우리에게 끔찍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미투 운동 이후 나를 비롯해 많은 친구가 비판적으로 ‘의식화’되었다. 하지만 비판은 양날의 검이라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원한의 주체로, 한편으로는 죄책감의 주체로 분열되었다. 이를테면 어떤 친구는 남자친구가 있다거나 자기 머리가 길다는 사실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당연히, 외관상 그리고 법적으로 ‘한국인 청년 남성’인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분열의 고통은 어떤 쾌(pleasure)로 보충되어야 했는데, 그 쾌는 절대 무구한 것일 수 없어서 종종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조건적 쾌로 명명되곤 했다. 2010년대의 비판적 분위기를 나름대로 통과한―그러니까 반동적으로 되지 않으려고 애썼던―사람들은 실망, 죄책감, 원한, 길티 플레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구한 쾌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비판은 그런 것을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허락하지 않을 텐데, 우리가 무구한 쾌를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죄책감의 원인이 되어 결국은 어떠한 쾌도 ‘길티 플레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대학가, 문단, 예술계,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던 비판적 분위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물론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운동과 이념 들의 의의나 정당성에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십여 년간의 페미니즘적 물결에 배움의 풍부함과 즐거움은 없었고 비판의 엄격한 가르침만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배움의 관점에서 보면 그 물결은 대단한 다채로움과 활기를 띠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는 비판의 가르침이 배우는 자에게 어떤 분열과 모순을 일으켰는가, 어떤 식으로 훼절되곤 했는가를 이야기하려 한다.
누가 우리를 가르쳤는가? 2010년대 중후반에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대학에서 페미니즘 강의가 많이 열렸지만, 선생은 두세 명의 강사가 아니었다. 거의 모두가 모두의 선생이었다. 지적인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수백 개의 지론이 경합했다. 수십 년간 페미니즘 이론을 가르친 강사와 이제 막 ‘의식화’된 학생이 격돌하여 서로 상처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인식의 즐거움과 연대와 폭력과 고통과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 통과했는지 혹은 통과하지 못했는지 쓴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분량의 소설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모순적으로 경험해온 문제 두 가지 정도만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는 ‘발화자의 위치’에 관련된 문제이고, 두 번째는 ‘지적이면서-올바르면서-아름다운’ 기준에 관련한 문제이다.
우리는 발화자의 위치에 대한 탐문이 강력한 비판의 방법임을 배웠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보편성이 사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폭로하는 방편이었다. 가령 ‘1세계 백인 남성’의 예술은 보편적으로 보이지만 그 보편성은 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조건 위에서 구성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누가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인신공격이나 비방, 신상털기의 논리가 되어버린 면이 있다. 작년 가을·겨울에 트위터에서 불거졌던 ‘판교문학’ 논쟁을 생각해보자. ‘판교문학’은 어느 트위터 이용자에 의해 언급되어 갑자기 논쟁의 화두가 되었다. 그 조어는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을 법한, 상대적으로 고연봉의 직장에 다니는 전문직 중산층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것의 예로 언급되어 공격당한 소설들이 대체로 젊은 여성 작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 논쟁은 ‘여성 작가들의 약진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반페미니즘적 공격’으로 다시 공격받았다. ‘판교문학’이라는 말을 트위터에서 처음 쓴 이용자의 신상이 국문학을 전공한 중년 남성임이 밝혀지자, 몇몇 트위터 이용자는 ‘그럴 줄 알았다’고 반응했다. 그 논쟁에 관여된 평자인 최진석이 예의 논쟁을 다룬 글이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에 실렸다.7)
우선, 이 사례는 장의 유동성, 다공성, 모호성을 보여준다. 출판계·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소설들에 대한 논쟁이 SNS상에서 다소 격하게 불거지고, 또 그 논쟁이 주요 문예지의 지면에 소개되었다. 비평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SNS상의 ‘넋두리’와 비평 활동의 경계가 어디인지 명확히 할 수 없다. 따라서 발언의 엄밀성에 대한 발화자들의 책임도 모호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사이 모호한 지대에서 많은 비판적 언어가 발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엇갈린 비판의 작대기들이 어떤 전망을 가리켰는가? 결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차이들을 더 성찰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식의 뻔한 당위만 반복된 것이 아닌가? 그 당위적인 말은 물론 옳지만, 비난과 공격의 과정에서 논쟁이 정말 그 당위를 청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는가? 실질적으로는 작품, 발화자, 청자를 상처 입히기만 한 것은 아닌가? 비평이 작품들을 비판할 때, 많은 경우 문학작품이 현실을 편향되게 재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평이 문학작품을 편향되게 해석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어떤 명철하고 박학한 비평가도 독자가 소설에서 무엇을 배울지 미리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비판은 작품을 어떤 악을 통해 읽게끔 유도하면서 소설을 즐기는 독자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다. 도처에 차별과 부조리가 있다. 우리가 경계를 잠시라도 늦추는 순간 악이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우리는 ‘악의 평범성’이나 ‘탈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에 조종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눈을 부라리면서 모든 곳에서 악을 세밀하게 찾아내야 한다! 악을 고발하는 사람의 악까지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당위적인 비판이 수행적으로 악을 승리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어쨌든 상대적으로 ‘잘 팔리는’ 몇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드러난 정체성이 ‘중산층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혹은 그들이 어떤 ‘전형성’을 띤다는 이유로 작품들을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문제 제기의 발화자가 ‘국문학 전공 남성’이라는 이유로 문제 제기의 의미나 정당성이 훼손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관련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나는 지난 몇 년간 인간의 기질에 대한 통찰력을 뽐내는 달변을 종종 들어왔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때때로 그런 말을 내뱉기도 한다. 즉 이런 특성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것이고, 저런 특성은 헤테로 여성의 것이고, 이런 옷차림은 신도시 졸부 같고, 그 제스처는 게이 같은 것이고, 누군가의 말투는 너무 1세계 백인 같고, 경상도스럽고, 너무 천박하다는 식의 말들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유동적으로 될수록 미묘한 차이들을 관상학적으로 꿰뚫어 보는 능력이 필요해진다고 생각했다. 즉 다른 특성들에 미묘하게 감춰져 있는 출신 성분 같은 것을 꿰뚫어 봐야 한다고.8) 내 생각은 반대다. 사회구조적 조건들과 발화자의 위치에 민감하게 만드는 비판은 미묘한 단층과 복합적 정체성(이를테면 남성 고학력자이면서 가난한 긱 노동자, 부유한 여성 고학력자이면서 성소수자 등)의 상(像)을 만들어내는 동시대의 문화적 환경에서 지독하게 가학적/피학적인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비판은 설명 혹은 고발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지고 단층들의 위치를 식별하면서 그것들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우리가 한 사람 안에서 얼마나 많은 정체성이 ‘교차’하는지 세심하게 염려할 수 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 모든 차이의 ‘위아래’를 기어코 식별하고자 하는 강박은 우리 자신의 배움에도 차별에의 저항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명하기 어렵고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차이들 하나하나 차별과 불평등으로 못 박는 언술은 배우는 자에게 죄책감/원한 혹은 우월감/열등감을 더욱 주입한다. 그러한 언술은 종종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과 원한을 남들도 똑같이 느끼기를 강요하는 식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어쨌든 그러한 관상학에 반대하면서,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겠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러한 차이들에 무관심해져야 한다고. 이것은 차별이나 부조리,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무관심해져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일상적 차이들에 대한 검열과 평가, 식별 기술을 늘려가는 것이 차별, 부조리, 위협에 대항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기만족, 자신과 타인에 대한 학대, 불필요한 갈등 조장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누군가는 ‘불필요한’ 갈등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는 식의 근본화된 주장을 여전히 선호하겠지만).
비판의 가르침에서 기인하는 두 번째 문제는 지적 전문성, 정치적 올바름, 미학적 세련됨의 착종에서 기인하는 이상한 서열화이다. 즉 비판 담론이 오히려 선진적인 것과 ‘미개한’ 것의 자의적인 구분을 생산하면서 못 배운 것, 후진적인 것, 촌스러운 것에 대한 은근한 무시나 의식하지 않은 전제를 조장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작년 한 글에서 홍성희는 어떤 국제 학술 대회에서 겪은 일화를 썼다. 그는 한국문학에서 장애가 재현되는 방식의 문제점에 대해 발표하였다. 그러자 사회자는 “미국에서 진행된 장애학 연구에 관해서, 장애를 가진 신체를 예술적으로 해석하여 작품을 만들고 있는 미국 내 여러 예술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겠다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홍성희에 따르면 다른 참가자들이 건넨 친절한 말들도 비슷한 전제를 깔고 있는 듯했다. 즉 “그 말에서 ‘새로움’과 ‘통찰력’이란 한국에 없고 미국에 있는 것, 그러므로 실상은 말 그대로의 ‘새로움’이나 ‘통찰’일 수 없는 것이었고, 한국 문학장에 대한 고민 역시도 ‘새로울 것 없이’ 구태의연한 것, 뒤떨어진 것, 어떤 선진(先秦)을 뒤따르거나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었다.”9)
세상 사람들이 따라야 할 ‘지적이면서-올바르면서-세련된’ 글로벌한 기준이 있는가? 이러한 선형적 “고정”은 우리의 배움을 하나의 길로 경색시킨다. 이런 선형화가 비단 미국의 연구자와 한국의 연구자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비판 이론이나 비판적 분위기를 익힌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촌스러움’이나 ‘올바르지 못함’을 깔보고 비난하는 것을 본 적 없는가? 심지어 ‘빻았다’는 말을 사용하곤 하면서 말이다. 그런 비난을 입에 담지 않더라도, 정도는 다르겠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인문학자, 비평가, 작가가 얼마간 ‘선진’에서 ‘후진’으로 이어지는 선형적 기준을 의식하는 듯하다. 이것은 그야말로 ‘분위기’ 같은 것이어서 특정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현상적 문제들을 비판 자체의 본질적 문제인 것처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비판적 사고 자체의 위선과 한계를 비판하면서 발전해왔다. 비판을 가장 많이 반성하는 것은 비판 자체다. 하지만 비판 이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를 혹은 자기 자신을 자꾸만 고발하면서 정교해지고 난해해지는 비판 담론들을 당연히 다 따라갈 수가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꾸만 가르치고 지적하려 드는 비판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분노하게 되는데, 거기에다 대고 “냉소적 이성”이니 “악의 평범성”이니 또 지적하는 것은 비판가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비판 담론은 한편으로 사람들의 뻔뻔함과 속물근성, 염치없음과 이기주의를 개탄하면서,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죄책감을 심어줄 미학적·수사적 전략들을 동원해왔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은 사람들을 가르치려 드는 권위적, 가부장적 습성을 스스로 고발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비판의 변증법, 비판의 진보, 비판의 갱신과 발전이 예의 선형적 서열화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본다. 비판의 자기 고발을 통한 이론적 발전, 비판 이론들끼리의 논쟁과 경합은 근 삼십여 년간 특히 미국 명문 인문대학원에서 이루어져 한국의 대학이나 비평장에 수입되어왔다. 이 수입과 개량 자체가 얼마간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7) 최진석, 「재현의 계급화와 소시민적 문학 주체의 (재)등장, 그리고 문학의 염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 133-48쪽.
8)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188쪽.
9) 홍성희, 「문학의 종이」,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여름호, 30쪽.
배움이라는 즐거운 소식
그러나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다. 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비판 이론에 주안점을 둔 비평이 아니라 ‘배움의 이론’에 주안점을 둔 비평을 제안하고,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설득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배움의 구체적인 단계들과 원리들, 가능성과 난점들, 그 결과들을 밝히지는 못했다. 이 관점을 실제 작품들에 적용했을 때 어떤 새로운 비평이 가능한지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주제에 따라 비판을 비판하는 데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차후의 문제들을 하나씩, 오랫동안 다룰 것이다. 일단 ‘배움으로서의 비평’의 개괄적인 방향만을 제시하고 이 글을 마치겠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비판이 사용하는 설명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배움의 이야기 구조를 제안하고 싶다. 즉 비판 이론이 동원하는 서사적 틀―물신, 우상, 징벌, 파국, 우상파괴, 의식화, 탈신비화, 모순, 부인―을 배움의 이론이 만들어가는 서사적 구조―기호, 매혹, 실망, 승화, 세속화, 깨달음, 되찾기―로 대체하고 싶다. 이것은 비판을 금지하거나 한물간 것 취급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비판적 가르침(계몽하기, 일깨우기, 의식화하기, 상대화하기)과 배움의 역량(추구하기, 실망하기, 되찾기, 연결하기)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주체적 결단의 문제다.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지적이고-올바르며-아름다운’ 기준을 좇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지고 연결되는 배움들에 집중할 수 있다(하지만 이것은 ‘글로벌’보다 ‘로컬’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글 마지막에 달린 각주를 참조해달라).
나는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과도하게 뒤엉켜 있는 배움의 선들을 풀어 우리의 배움이 더 넓게 전개되고 역동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강박적으로 되거나, 아니면 반동적으로 되거나 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지는 비판적 담론들 혹은 비판적 분위기가 배우는 자에게 주입한 서사적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모순을 설명하는 비판이 사태를 모순으로 구성하기 전에는, 우리의 배움에 아무런 죄스러움도, 모순도, 위아래도 없다.10) 물론 우리의 배움이 사회구조적 압력에 의해 미리 정향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구조적 설명에 들어맞지 않는 예외가 도처에서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 구조적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예외를 늘리는 쪽에 이바지하느냐이다(여기서 예외는 특출한 예술가 개인 같은 예외성보다는 사회적 위치·정체성·취향 등의 지향을 벗어나는 예외적 마주침, 연결, 매혹을 말하는 것이다). 배움은 변증법적이지도 않고 모순을 동력으로 삼지도 않는다. 배움은 횡단적이고 또한 구성적이다. 비판은 위에서(지식인으로부터) 오거나 아래에서(소외된 자들로부터) 오지만 배움은 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직 가로지름과 연결의 실천 속에서만 오기 때문에 배움은 장르나 장들, 영역들의 위계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해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배움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러한 위계와 분리를 해체한다.
비판 이론의 역사에서 사람들을 매혹하는 거짓 대상은 ‘물신(fetish)’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배움의 이야기는 ‘물신’이라는 나쁜 이름을 매력이라는 긍정적인 이름으로 대체한다. 물론 매력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는 것도 힘든 이론적·비평적 작업을 필요로 한다. 칸트 이래 비판의 지적 역사 전반에서 매력, 매혹, 현혹, 유혹 같은 말들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이해관심을 벗어난 관심(‘무관심한 관심’)이지만, 매력은 온갖 세속적인 이해관심과 불순하게 뒤얽혀 있다.11) 이후의 많은 비판 이론가들은 아름다움의 순수성이나 자율성에 대한 칸트식 형식주의를 비판했지만, 몇몇 예외를 빼면 매력, 매혹, 현혹에 대한 나쁜 평가를 수정하지는 않았다. 나는 우월한 당위가 아니라 세속적인 매력에 오염되고 이끌리는 배움을 들여다보고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서 비평을 제안한다.
둘째로 배움의 이야기 구조는 ‘탈신비화’나 ‘비판적 거리 두기’ 같은 지적인 방법을 ‘실망’이라는 감정적인 어휘로 대체한다. 후자를 전자보다 선호하는 이유는 ‘비판적 거리’ 같은 말이 매혹, 애착, 몰입 같은 감정·정동을 비판에 못 미친 것으로, 아직 의식화되지 못한 상태로 격하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2)
셋째로 배움의 이야기는 표상과 실상의 이분법을 매혹과 실망, 잃어버림과 찾기의 운동으로 대체한다. 비판적 비평의 어법은 표상과 실상의 이분법적 틀 속에서 변주되어왔다. 과거에 비판은 물신, 표상, 진술의 배후에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아름다운 시나 미술 작품은 그 배후에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주의, 제도적 권력 등으로 설명되는 현실을 숨기고 있는 물신이다. 그 물신의 현혹에서 벗어나 그것이 구성된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 비판적 비평이었다. 그런 비평은 (종종 사람들이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한다고 전제하면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현실을 보려면 더 의식화되어야 한다고 배우는 자를 채찍질했다. 한편 습관적으로 ‘배후’를 탐문하는 비판의 방식을 따분하게 여기는 다른 비평가들은, 심층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라고 비웃으면서 표층을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표층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이미지와 기표의 상호작용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문화적 비평’과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비평’의 대립은 이제 낡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해석이냐 현전이냐’하는 비평의 논쟁 구도는 심층이냐 표층이냐, 계보학적(종적) 추적이냐 상호작용에의 (횡적) 집중이냐 하는 문제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이외에도 표상과 실상, 재현과 실재의 이분법에서 비롯한 비판의 모순은 수없이 많다. 비판의 한 극단에서는 편견(이데올로기)을 객관적 실체에 대한 앎으로 교정하려 한다. 반대쪽 극단에서는 실상(과학적 객관성)은 없고 관점들(정치적 입장들)이 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편견은 객관적 사실의 이름으로 비판받고 ‘객관적 사실’은 그 자체 편향된 관점일 따름이라고 비판받는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의견도, 사실도, 비판 자체도. 비판은 공회전하면서, 매연을 내뿜듯이 사회적 불신의 농도를 높여왔다.
하지만 배움의 관점에서는 애초에 표상과 실상의 이분법 같은 것이 존재한 적 없다. 단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운동이 있을 따름이다. 실망은 배움의 역사를 구성하는 마디들, 관절들, 경첩들, 쉼표들이다. 기성 비평의 대립하는 방법론들은 배움의 연속 선상에서 각자가 취하는 일부분만을 확대[crop]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견해는 일리 있는 것이지만 배움의 방법으로 일반화될 수 없다. 배움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 구조를 따라 진행될 수 있다. 어떤 기호와의 마주침은 한 사람의 실존적 문제와 강하게 연결된다. 그는 그 기호에 집착한다. 그는 처음에는 기호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을 대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매력의 비밀이 대상에 있다고 믿는다.13) 즉 작품, 예술가, 연예인, 짝사랑 상대나 질투심을 느끼게 하는 상대에게 있다고. 어쨌든 그의 배움은 홀린 듯 기호를 따라가고, 그 배움의 선을 따라 자신의 인간적 특질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그가 엄격한 당위나 ‘위아래’에 대한 의식으로 자신의 배움을 제한하지 않을수록, 그는 온갖 영역에서 온갖 타자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동료나 협력자뿐 아니라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행위자들도 있겠지만 실망과 수복의 과정에서 귀인이 적이 되기도 하고 적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배움은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타자와의 협력과 타협, 갈등과 투쟁, 배려와 얽힘을 수반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전력으로 좇던 기호와 대상의 고통스러운 불일치를 목격할 수 있다. 즉 매력의 비밀이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실망한다. 매력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이 슬쩍 가려놓았던 세속적 관계들의 효과였다(이 실망은 대상에 거리를 둔 결과가 아니라 가까이 간 결과다). 하지만 매력이 허상이라 하더라도 매혹을 통해 그가 얻은 배움은 허상이 아니다.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내가 비평이라 부르고 싶은 것)는 그가 사실은 가졌던 적도 없고 잃어버린 적도 없었던 어떤 것을 수복한다. 이를테면 배려와 번역의 기술, 실망의 공동체 같은 것을. 이러한 배움을 수용하고 입증하고 고무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매력이나 비판은 그 자체로는 공허한 것이지만 배움을 이끄는 필수적인 동력과 수단으로서 긍정될 수 있다. 비판은 비판을 통해 긍정될 수 없고 배움을 통해 긍정될 수 있다. 그러니 좋은 비평에 비판, 매력, 배움은 항상 있겠지만 그중에 제일은 배움인 것이다. 우리는 대상에 매혹되어 배움을 시작하지만 배움의 여정에서 실망을 맛본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거쳐온 배움의 역사에 거리를 둘 기회를 얻는 한편으로, 배움의 중단과 공허함, 환멸로 방황하게 된다. 비판은 이 실망과 공허함을 정당화하면서 인식의 쾌라는 보상을 준다. 우리를 전투적으로 무장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를 단련한 비판의 무거운 갑옷과 무기들은 배움의 긴 여정을 재개하기 위해 가벼워져야 한다. 물론 이것이 한 번 비판을 졸업하면 다시는 비판적으로 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비판해야 할 것들이 있고 또 배움에는 비판적 인식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환멸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비판적 입장을 요새화하지 않는다면 다른 매혹이, 배움이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주장이 여전히 너무 무비판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배움은 자칫 대상에 대한 순종이나 딜레탕트적 애호처럼 비칠 수 있다. 세상만사를 자기 배움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뻔뻔한 게걸스러움으로 비칠 수도 있다. 위선적인 자기계발 담론이나 ‘정신 승리법’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째, 앞서 말했듯 비평의 전문화 방식으로서의 ‘비판’은 그 자체 비판적으로 성찰될 필요가 있는 문제다. 둘째로 배움은 기성의 구분들, 장르들, 영역들을 가로지르고 이질적으로 여겨지는 성질이나 존재를 연결하는 과정이지만, 이 가로지름과 연결은 장르들의 ‘믹스 앤 매치’와 같은 공허한 창작술과는 다르다. 어떻게 매혹된 자가 유혹하는 자가 되고,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고, 돌봄을 받던 사람이 돌보는 사람이 되는가? 이러한 전환의 고된 과정으로서 배움은 실천적인 것이지 단지 책 속의 글이나 교수의 말로부터 얻어지는 관념이 아니다. 셋째, 배움을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으로 볼 수 있다면, 오직 비판적 상투어에 배움을 억압적으로 끼워 맞추는 한에서다. 현실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되)건 간에 배움은 그러한 구조화를 벗어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배움의 선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자신을―호명된 주체가 아니라―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배움을 말하는 것은 비판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전방위적으로 위태로운/비판적인(critical) 지반14) 위에서 다르게 살고 말할 방법을 찾을 것인가? 어떻게 권위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면서, 또 ‘나는 그들보다 올바르고 똑똑하다’는 식의 자기만족으로 도피하지 않으면서 함께 변화할 것인가? 나는, 내가 통계적으로 속하게 되는 ‘세대’가 반동적, 냉소적, 반사회적으로 재현되는 것은 우리가 이 질문들에 대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의 반영일 뿐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모든 재현이 그렇듯 이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하는 동안 이것은 점점 더 견고한 사실이 될 것이다.
‘사실’로 재현되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식의 비판은 결코 사실을 이길 수 없다.
10) 배움의 평등한 능력과 그것을 가로막는 허구/서사적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는 자크 랑시에르의 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방된 관객』 참조. 배움에 위아래가 없다는 말은 많은 해명이 필요하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추가적인 글을 발표하겠다.
11)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218쪽.
12) Felski, the Limits of Critique, 특히 “The Stake of Suspicion”(pp. 14-51) 참조.
13) 배움과 기호, 대상과 실망에 대한 구상은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을 따르고 있다.
14) 공간적인 비유로 말하자면, 비판적 관점에서 의견과 보편성의 관계가 로컬과 글로벌의 관계(의견:보편성=로컬:글로벌)라면 배움의 관점에서 배우는 자와 보편성의 관계는 행위자와 임계 영역(critical zone)의 관계(배우는 자:보편성=행위자:임계 영역)다. 글로벌은 세계화의 관념적 무대를 일컫는 말이지만 ‘임계 영역’은 지구 지각 주위의 얇고 위태로운 생존층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지적이면서-올바르고-세련된’ 글로벌한 기준은 없지만, 함께 살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야 하는 위태로운 세계는 있다. ‘글로벌’과 ‘임계 영역’, ‘비판’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은 브뤼노 라투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김예령 옮김, 이음, 2021, 49~5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