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모국어

―민병훈, 『달력 뒤에 쓴 유서』(민음사, 2023)

가끔 내게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자유롭다. (107쪽)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던질 법한 첫 번째 질문: 어떻게 위의 두 문장이 나란히 있을 수 있을까? 첫 문장은 제약의 느낌을 말하고, 다음 문장은 자유의 느낌을 말한다. 두 문장 사이에서 글쓰기의 억압, 글쓰기의 제약과 글쓰기의 해방, 글쓰기의 치유가 끝나지 않을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밤낮없는 논쟁은 ‘제약 속에 자유가 있다’는 식의 상투어로 타결될 수는 없다. 그 명제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둔탁한 말로 이해하는 순간 이 문장 조합의 무거움과 가벼움, 답답함과 해방감, 현기증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사라지고 말 어떤 언어 고유의 감각이고 사유의 리듬이다.

번역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두 번째 질문: 『달력 뒤에 쓴 유서』를 비평할 수 있을까? 소설이 쉽고 거창하든, 어렵고 사소하든 상관없이 모든 규정을 거부하고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평가와 수식들로 소설을 환원하지 않으면서 비평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칫하다가는 감탄의 단말마나 울먹임으로 끝날 수도 있을 만큼 아주 짧은 분량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감탄을 자아내는 스펙터클한 소설이 아니고, 슬픈 소설도 아니다. 슬프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슬픔을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는 아니며, 슬픈 소설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심지어 『달력 뒤에 쓴 유서』는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평할 내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소설을 규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설명을 요구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무엇을 왜 쓰는가?’를 자문하는 이 소설을 비평하려 하는 즉시 ‘나는 왜 비평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평가로서의 세 번째 질문: 도대체 나는 왜 비평을 쓰는가?

어려운 세 질문에 답하기에 너무 부족한 이 리뷰의 지면이 안타까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소설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따금 너무 많이 말함으로써 너무 적게 말하게 되었다고 후회하는 때가 있다. 이 소설을 비평하기가 어렵다면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격적인 사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어려움은 사건을 의미화하지 않으면서 계속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를 반복하는 이 소설의 태도와 관련 있다. 소설에서 친한 동료 작가는 작가-서술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당신 소설 같네요”(87쪽)라고 한마디 한다. 서술자는 소설에 대한 그러한 사소한 규정조차도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또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삶을 생략하지만 삶을 환원하지 않으려 한다. 삶이 규정을 거부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소설도 규정하지 않고 규정되지 않으려 한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은 이 소설이 아버지의 자살을 둘러싼 기억을 다루기 때문에 흐려진다기보다는 더 예리해진다. 단순화하지 않고 의미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실존에 가시처럼 박힌 그 기억에 접근하고, 또 마치 외국인처럼 “아들의 문장을 읽을 수 없다”(140쪽)고 말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1) 어떻게 사전도 통역사도 번역기도 없는 두 언어 사용자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소통이 시작될까? 사건 당시 어머니는 왜인지 집을 나가 있었으며, 음독 후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의 작가-서술자이다. 둘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열심히 살아왔다. 낭만적인 해결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삶 자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각자의 상처를 안고.

서술자의 이름은 ‘병훈’이고, 소설가이다. 많은 장치가 이 소설이 실화에 바탕하고 있음을 믿게 하지만, 이중의 연출일 가능성을 적어도 원리상 배제할 수 없다. 한편으로 중간중간에 비현실적인, 소설적으로 연출된 듯한 장면들이 있는데, 그런 장면들이 꼭 이 소설이 허구임을 표시한다고도 볼 수 없다. 사람들 말대로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수필이 아니라 소설임을 형식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대부분인 1부와 부록처럼 추가된 짧은 2부의 분리이다. 1부의 어머니는 2부의 ‘그녀’가 되고, 1부의 ‘나’는 2부의 ‘아들’이 된다. 즉 시점이 바뀌어, 서술자는 어머니(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어머니는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작가-서술자의 첫 책을 읽다 말았으며, 두 번째 책은 아예 보지도 못했다. 작가-서술자의 문장은 어머니에게 가닿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책이 왜 안 팔리는지 묻고, 잘 팔리는 그런 책을 왜 쓸 수 없는지 서술자에게 묻는다. 서술자의 친구들 역시 소설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신기해하고, 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작가-서술자가 놀라울 것 없는 이러한 몰이해에 무슨 거창한 기치를 내걸고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서술자는 무언가에 반대하기 위해 깃발을 들고 있지 않다. 깃발이란 뒤따르는 여럿을 하나의 의지로 환원하고, 여럿을 대표함으로써 힘을 얻는 것이 아닌가. 이 소설에서는 사건도, 상처도, 진정성도, 대의도 글쓰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부끼고 있지는 않다.

물론 문학이 깃발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현실의 능력 있는 활동가들이 깃발 혹은 언어의 권력을 활용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종종 강력한 깃발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의 저항은 깃발을 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깃발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데, 이 작업을 진행하는 어떤 순간에는 너무 힘든 나머지, 다른 방식의 문장을 바란 적도 있었다. 사명감, 책임감, 정치, 의욕이 담긴 것들.
(76쪽, 강조는 원저자)

예술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미학주의’가 현실로부터의 도피임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언술이나 당위를 내세우는 일이 문학으로부터의 도피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이 어려울 때 우리는 꿈으로 도피할 수 있지만, 꿈이 고통스러운 진실에 접근할 때는 결정적인 장면 직전에 벌떡 일어나며 꿈에서 현실로 도피하곤 한다. 글쓰기를 지속하는 일은 이러한 양방향의 도피에의 거절이지만, 민병훈의 완고한 글쓰기가 자기충족적이거나 자기 만족적인 글쓰기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 사람은 자연어 속의 외국어를,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모국어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환이 아니라 변환이다. 이러한 변환이 없으면 타인의 언어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 속에 왜 작은 외국어가 생겨날까? 확실히 파격을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동정받기 위해서는 아니다. “전통적인 소설과의 결별? 혹은 반감? 아니다. 불행한 사건을 겪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 아니다. 평단과 대중에 의한 인정? 더더욱 아니다. 하나씩 거둬 내고 보니, 욕구만 남았다”(p. 118). 서술자의 이 대답은 진실이겠지만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서술자는 어느 순간 “문장으로 무언가를 이해하고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152쪽)고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글쓰기는 ‘이해’라는 목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구가 자신의 모든 목적을 초과할 수 있음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 욕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욕구는 ‘코기토’처럼 그 자체로 의심 불가능한 기원적 확실성이 아니고, 명석판명한 단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대답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질문이 다시 남게 된다: 이런 욕구는 왜 생기는가? 다음 내용은 소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소설이 남긴 질문에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하는 대답이다.

욕망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위의 진술(“욕구만 남았다”)은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그보다는 (소설에 상담하는 상황이 짧게 그려졌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상담실의 상황을 상상해보고 싶다. 이를테면 상담사가 “그렇게나 힘든데 글을 왜 쓰시나요?”라고 질문하는 상황. 이런저런 대답을 하자 상담사가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으시군요?”라고 대답한다(나는 어릴 적 타의로 갔던 어떤 상담 센터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은 그다지 억압적인 규정이 아닌데도 “아니, 그게 아니고요……”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도대체 그렇게 대답하고 싶게 만드는 ‘욕구’는 무엇일까? 물론 이해받고자 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이 욕구에 따라 “그게 아니고요”라고 대답했다면 동시에 “사실 맞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욕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이중성을 가졌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사태의 진실은 욕망의 이중성이 아니다. 규정을 거부하는,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분명한 서사를 만들지 않는 소설의 욕구가 이중성에 대한 것이라면, 소설은 언어가 주체를 둘로 분열시킨다는 정신분석학적 명제에 대한 불가결한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달력 뒤에 쓴 유서』는 그러한 확인과는 별 상관이 없다). 존재가 이중적이라면, 존재를 규정하는 언어에 대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가령 누군가 “넌 너무 감상적이야”라고 규정하는 말을 한다면, 거기에 “내게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어”라고 대응하는 것으로는 그 규정을 충분히 물리칠 수 없다. 감상적인 것과 감상적이지 않은 것의 분할 자체가 그러한 언어에 의해서만 도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언어에 대한 존재의 이중성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인 다의성이다. 한 사람이 정말로 많은 영혼을 가졌듯이 상황은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다의성을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가 애도도 이해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고독이 모국어 속의 작은 외국어를 만들도록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상실, 외로움, 원망, 몰이해, 자기 정당화를 통과하여 이해받기를 단념할 때, 모든 쉬운 이해와 극복을 포기할 때,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해의 가능성이 열리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짧은 2부가 타진하는 것은 그러한 역설적인 이해의 가능성인 것처럼 보인다.

1) 아버지의 죽음이, 나선형처럼 기억을 풀어놓는 이 소설의 비어있는 중심축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억하고, 기리고, 애도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글을 쓰는 서술자와 그의 어머니 사이의 불가능한 이해가 소설의 구성 전체를 고려했을 때 더 핵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구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애도의 작업에서 정말로 어렵고, 더디고, 중요한 것은 같은 존재의 상실을 마음에 새긴 사람들, 그러나 사건을 전혀 다르게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그래서 원망과 몰이해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2)또 규정된 사람은 규정하는 사람에게 규정의 언어를 돌려줌으로써 관계를 치명적으로 얽히게 만들 수 있다. 너의 언어 역시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다고 응수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존경스러울 만큼 천착한 사람들과 로맨스물의 클리셰를 통해, 언어의 권력을 가진 사람과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전쟁 같은 사랑이 벌어지거나 사랑 같은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주인이나 노예에 대한 사랑, 분석가와 히스테리증자, 로고스와 로고스의 권력을 사랑하는 반(反)로고스중심주의 기타 등등.

P.S.

아마도 비평은 ‘무엇을 왜 쓰는가?’와 같은 답이 없는 질문에 직면하지 않기 더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달력 뒤에 쓴 유서』에 대한 리뷰를 써 달라고 청탁받았기 때문에 이 글을 썼다. 하지만 사명은 아니라도 최소한 긍지 비슷한 것이라도 느끼려면―그런 것도 없다면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글쓰기는 내적인 논리를 가져야만 하는 것 같다. 비평이 문학 시간 수행평가나 문예지 혹은 ‘문학계’의 구색을 위한 회전 초밥3)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쓴 글이 어딘가 발표된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흥분과 신기함의 구름이 걷히면서 이 문제가 부상하는 경험을 했다. 소설에 담긴 고민의 무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 문학비평을 왜 쓰는지 진지하게 대답하려 한다면 소설가보다 상황이 아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읽고 싶어 한다는 데서 즉각 글쓰기의 당위와 열의가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글을 가족도 읽지 않고 친구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나고 유쾌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내가 잡지에 글을 발표하고 있음을 조금 늦게 아신 할머니가 당신에게도 글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끼어들어 읽지 않는 게 좋으리라는 말을 다음과 같은 짧은 평으로 갈음하셨다. “한국어가 아닙니다.” 그 후 낙담해 있던 어느 날 정체 모를 사람에게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쓴 글이 불특정 다수에게 한국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많은 사람과 책은 때때로 상반된 이야기를 했다. 한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과 위치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게 좋다고, 특히 어떤 주장을 할 때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셨다. 반대로 다른 선생님은 (내가 첫 번째 비평을 발표하기 직전에) 글에서 ‘나’를 지우는 게 좋다고, 꼭 써야 한다면 ‘필자’라고 쓰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필자라는 말이 너무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이 들어가는 문장의 구성을 아예 다 바꿔 버렸다. 나는 그러한 수정이 글을 보다 엄밀한 논의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글을 발표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두 가르침의 의미와 그것들을 대립으로 생각하게 하는(물론 두 선생님은 이러한 ‘대립’에 직접적 책임이 없다) 사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둘 다 따를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여기의 글쓰기의 조건은 그러한 대립을 구성하는 사유의 조건을 넘어서 있다. 우리는 마치 세상에서 최고로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기라도 한 양 세계와 인류 혹은 존재자 일반을 말하는 글이 ‘나’ 혹은 ‘우리’를 숨기고 있음을 아는 만큼, 세상에는 어떠한 보편성도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오직 나’ 혹은 ‘오직 우리’를 말하는 글이 세계와 인류 혹은 존재자 일반을 숨기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3)회전 초밥은 예전에 리뷰를 쓰다가 떠오른 이미지이다. 넓은 행사장에는 여전히 손님이 있긴 하지만 행사의 중심(심지어 복수화된 중심이라 해도)은 다른 곳이며, 다만 행사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공감각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행사장 구석에서 돌고 있는 회전 초밥. 손님들은 ‘저기에 초밥이 돌고 있네’하고 인지하기는 하지만 차갑게 식어 맛없어진 초밥을 웬만하면 먹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리뷰를 쓰면서 내가 그러한 회전 초밥 접시 위에 올라갈 초밥을 열심히 요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