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단계들

―손보미, 「불장난」1)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발표.

1)『사랑의 꿈』, 문학동네, 2023. 본문에서 소설을 인용할 시 괄호 안에 페이지 번호만 병기한다.

0. 지연과 성장

유명한 할아버지들이 말하길 우리가 사는 이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경제적 독립, 학교에서의 졸업, 양육되는 존재에서 양육하는 존재로의 전환 같은 생애의 단계가 점점 뒤로 늦춰지거나 불가능해지는 경향이 있다. 신체적 고행, 결혼, 등용, 참전 같은 전통적인 성인식 의례의 구속력은 약해지거나 없어지는 한편, 어른이 되는 뚜렷한 의례는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아마 인류사에 전례 없이 길어진 사춘기를 겪는지도 모른다.2) 한 몸 건사하기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인생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되기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되기도 문제가 된다. 두 가지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하거나 혹은 동시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전통적인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 이제 가능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일이라면, 결국 삶의 방식을 생성하는 것이 문제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성장소설의 화자는 어른이 되는 한편으로 아이가 되는 면이 있다. 좋은 성장소설에는 삶의 문제들에 답하기 위한 양방향의 탐색이 있다. 인물이 단지 어른의 관점에서 아이 시절을 추억하고,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서술한다면 뻔한 교훈들을 나열하는 자전 소설이 될 것이다. 반대로 생생한 배움을 주는 소설에는 언제나 양방향의 ‘-되기’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성장’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growth ideology)의 ‘성장’과 얼마나 같거나 다른 것인가? 또 소설이 주는 배움은 자기계발이나 힐링 담론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가? 역사적으로 교양소설이나 감상소설은, 특히 여성들의 품행을 교육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고발되어왔다. 성장소설 역시, 세계를 대면한 인간 주체의 일방향적인 강화와 확장을 그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성장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러라는 법도 없다.

‘성장’을 비롯해 자율성, 창의성, 자유, 능력 같은 말들이 우리가 가장 반대하고 싶은 것들에 의해 지독하게 오염되었더라도 그런 기표들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성장’은 언제나 우상향 그래프로 표시된다. 성장소설의 ‘성장’은 오히려 그런 통계적 성장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시작된다. 내 생각엔 그렇게 유형화되기 힘들고 의미를 부여받기 힘든 배움에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스스로 배움의 능력을 예증하고 촉진하는 것과 더불어 말이다.3) 손보미의 몇몇 소설을 성장소설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남성적 특권의 혐의를 받는 고전적 성장소설과는 다르다. 오히려 손보미는 그렇게 특권화된 이야기 바깥에서 “더 충만하게 역동적이 된” 성장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4) 심지어 화자가 남성인 『디어 랄프 로렌』의 경우에도 이미 그렇다. 그 소설의 화자인 종수가 물리학 대학원에서 쫓겨나면서 자기 배움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직업적이거나 학업적으로 봤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외국을 떠돌며 허송세월하는 아무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의 관점에서 그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다. 한편 시간과 기억, 가치를 헝클어놓는 이 배움의 이야기가 랄프 로렌의 “‘정말’ ‘매력적’”5)인 미소에서 출발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종수의 여정은 랄프 로렌과 같은 유명인에 대한 집중에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향하고, 한편으로는 익명의 삶들을 향한다.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합쳐지기도 하는 이 여정은 그가 작가가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 글에서 새삼스럽게 단계들을 말하는 것은 국가적·경제적 관점에서 무가치해 보이는 이런 성장/교양/배움(Bildung)에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매혹은 배움의 출발점에서 쏘아지는 신호탄이다. 손보미의 소설에서 매력의 문제는 반복적으로 다뤄진다. 많은 맥락과 뉘앙스에서 매력이 언급되기 때문에 ‘매력의 문제’라는 범주화는 소설의 다양한 맥락을 뭉뚱그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소설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의 포괄성과 복잡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낯설고 희귀한 것이 되고 반대로 매력은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은 복잡한 ‘구별짓기’(부르디외)의 기제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성적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도 이제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6) 그러나 소설에 나타나는 매력의 문제는 그러한 구조적 비판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내 귀에 도착하는 건 적당히 뭉쳐지고 굴려진 음파들의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어렴풋이 감지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를 정말로 매혹시켰던 것은 내가 금지당하는 대상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73)

여기서 “매혹”은 ‘구별짓기’나 ‘매력 자본’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대목에서 매혹은 법과 주체가 맺는 기묘한 관계, 소리에 대한 감각과 집착, 자신의 처지에 대한 느낌 등과 관련된다. 매력은 이해관심, 신체적 자극, 성적 끌림, 충동, 인식, 도덕, 미적 판단의 분리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세계의 법칙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지극히 사춘기적인 세계의 법칙이다.

배움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가진 인식, 도덕, 미적 판단이 무너져야 한다. 또 무력함이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매력은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예측할 수 없는 길로 질질 끌고 간다. 그 무방비한 배움은 학교에서 어떤 영역의 전문성을 축적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어떤 배움이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 다른 배움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순한 뒤섞임 그 자체가 배움의 내용이자 강도(强度)다. 이런 배움이 제도화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폭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뒤흔들어 그가 접속해 있던 감수성과 지식의 질서에서 이탈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면, 모든 진정한 배움은 폭력적이다. 예술은 폭력적이다. 아무 배움도 주지 않는 예술,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는 문학만이 무해하다. 하지만 어느 화가의 말처럼 회화의 폭력과 전쟁의 폭력은 다르다. 예술의 폭력은 어떤 폭력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물론 정당화도 아니다―앎과 감각의 질서에서 탈구시키는, 신체에 작용하는, 그 순간 발생하는 폭력일 뿐이다. 예술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예술작품이 폭력적인 소재를 재현한다거나 폭력적인 언사를 사용한다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예술은 우리에게 배움을 강제하지만, 지식-권력이 아니라 매력-폭력을 통해 그렇게 한다.

우리가 전례 없이 길어진 사춘기에 유예돼있다 하더라도, 배우는 자에게 이런 지연은 단순히 부정적인 조건이 아니다. 이 지연의 시기는 새로운 배움이 우리를 휘어잡고, 몸에서 성적인 쾌를 주는 다양한 기관들을 되찾거나, 사랑을 하거나, 친구와 절교하거나, 정치에 경도되거나,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거나 기타 등등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다. 그렇게나 많은 성장소설이 사춘기 시절을 불러들이는 이유는 휴머니즘 드라마의 향수(‘좋았던 그 시절……’)를 위해서가 아니라 강렬한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을 지금 가동하여 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2) 알랭 바디우, 『참된 삶』, 박성훈 옮김, 글항아리, 2018 참조.

3)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는 것들」, 『쓺』 2023년 하권 참조.

4) 백지은, 「여자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가」,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 344쪽.

5)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2017, 45쪽.

6)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매력을 무기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참조.

단계 1. 매력: 불안과 사로잡힘(귀의 모티프)

소설은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 화자의 배움은 시간을 헝클어뜨리고, 소설의 표현은 나중에야 이해된다. 가령 독자는 화자의 전남편이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여성을 화자가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떤 문제들을 따라 어른 화자는 어린 화자에게 접속한다. 즉 소설을 끌고 가는 것은 최종적인 질문(‘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에 대답하기 위해 기억을 반추하는 인물의 의지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들에 대답해나가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에 답하게 될 것이다. 문제들 앞에서 어린 화자가 했던 필사적인 탐구가 어른 화자의 언어와 뒤섞여 배움의 내용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많은 것이 불분명하다. 어린 화자의 눈은 가려지고 있다. 보이지 않음―여기에서 어떤 배움이 시작되었던 듯하다.

눈을 가린다―아버지의 커다란 두 손이 급박하게 내 눈앞에 드리워진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외국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키스를 나눌 때에도 아버지는 내 눈을 가렸다. 그런 세계―하지만 그게 어떤 세계란 말인가?―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접근 금지―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되었다면 그때 내가 그들이 술을 마시리라는 사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리라는 사실, 그들이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특별한 단어들을 내뱉으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접근 금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70-71)

아이가 볼 수 있는 것과 봐서는 안 되는 것을 판단하는 아버지는 입법자이고 집행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금지는 (당연하게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눈을 가린다고 해서 감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금지가 아무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반대로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린 화자는 아버지에 의해 시각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그만큼 청각의 세계로 들어간다. 혹은 자신의 몸으로 청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집에 손님을 초대한 아버지와 그녀는 어른들끼리의 이야기를 위해 아이를 방에 들여보낸다. ‘나’는 문 뒤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내 신체 전체가 거대한 귀가 되었다고 상상했다”(73). 어른의 지시에 따라 방에 들어갈 때 아이는 수동적이고 무력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가 ‘거대한 귀’가 되면 어른들은 청각적 기호들을 발산하는 배움의 재료가 되고 아이는 기호들을 해독하는 게걸스러운 기관이 된다.

시각의 세계와 청각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또 시각적 신체와 청각적 신체는? 서구 문화에서 시각과 인식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이론(theory)은 ‘보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theoreo’에서 나왔다고 한다.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말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반대로 청각은 자명하지 않음, 불순함, 속도, 과민함, 정보의 덩어리에 관련된다. 20세기의 매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동시대 문화가 청각적으로 되어가고 있고 따라서 지나치게 시각 편향적인 서구 근대인은 동시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8) 시각의 세계가 체계화된 지식의 세계라면 청각의 세계는 혼란스러운 정보의 세계다. 시각의 세계가 이원론적 틀(주체와 대상, 저자와 독자)을 전제한다면 청각의 세계에서는 주체와 대상, 발신자와 수용자, 언어와 소음의 경계가 흐려진다. 따라서 (소설에서와는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매클루언도 오래전에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근대적 지식의 틀로 포섭할 수 없는 끌림, 속도, 감각적 과민함,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이러하다. 이 청각적 세계의 법칙을 수립하는 것은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매력의 경제다. 지식-권력이 시각의 논리, 낮의 논리라면 매력의 경제는 청각의 논리, 밤의 논리이다. 매력은 물질, 감각적 자극, 육체적 끌림, 편견, 정보가 아직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현상적 차원에 관계하고, 주체의 능력 중에서는 상상력에 관계한다. 상상력은 지성이나 당위적 이성의 감독이 헐거워질수록 더 강해진다(그러나 제약이 아예 없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77).

화자에게 매력의 문제를 치명적으로 제기하는 타자는 새엄마인 ‘그녀’다. 아버지와 그녀는 사교 활동에서 효과적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매력을 발산하며 눈길을 끌고, 아버지는 내내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을 골고루 나누어준다”(69).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위한 분업인가? 젊은(아직 “비판”을 쓰기 전, 매력을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전) 칸트는 숭고함과 고상함은 남성적인 자질로, 아름다움과 매력은 여성적인 자질로 할당한 바 있다.9) 오늘날 이것을 성차별적 편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소설에서 그려지듯 오늘날의 어느 가정에서 이러한 역할 분업은 얼마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분업을 통해 아내는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남편은 가부장적 권능을 얻는다. “그녀를 숭배하는 듯한 아버지 주위로, 그전까지 마구 흩어져 있던 자신감과 권위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일렬로 줄을 서는 것 같았다”(69).

이런 과시적 분업이 가능한 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가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가 그녀에게 매혹되어 홀린 듯 군다는 사실은 그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그의 허약함을 노출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을 지시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허가를 갈급하게 구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뜻대로 아버지가 선택하게끔 유도하는 듯 보인다. 그녀의 이런 힘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평한다. “마력.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신체-마음을 조종하는 그녀의 능력을 나는 마력이라고 불렀다”(77).

마력이란 무엇인가? 마력은 매력보다 한층 강력한 힘일 것이다. 매력의 ‘매(魅)’는 도깨비를 뜻한다. 마력의 ‘마(魔)’는 마귀를 뜻한다. 매력은 도깨비의 힘이지만 마력은 마귀의 힘이다. 이매는 아직 귀신[鬼]이 못 된[未] 존재이지만 마귀는 인간의 옷[麻]을 입은 귀신이다. 즉 이매가 ‘귀신-1’이라면 마귀는 ‘귀신+1’이다. 인간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만, 귀신에 약간 못 미치거나 약간 초과하는 존재에게는 간과 쓸개를 내준다. 설화에서 나그네를 매혹했던 존재들의 모호한 정체를 떠올려보자. ‘저것의 정체는 짐승인가, 인간인가, 귀신인가?’ 이런 불확실성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가장 매력적이라 여겨지는 존재가 가장 큰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또 귀신 비슷한 것들을 축출하고 정체를 식별하고자 했던 지적 탄압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혐오는 지성의 결여뿐만 아니라 불안정성을 견디지 못하는 지성의 두려움 때문에 강화된다. 마녀사냥은 계몽주의 시기에 오히려 번창했다.10) 지식-권력의 푸닥거리…… 낮에 불안하게 유지되던 아버지의 권위는 밤의 웃음으로 무너진다.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내 아내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차린단 말이야.”
음파들의 덩어리 속에서 특정한 음절을 건져올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뭉개진 발음이긴 했지만 쩌렁쩌렁하게 집안이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과묵함을 뚫고 나오는 권위나 자신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평소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처럼 성마른 조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뒤이어 무모하게 무언가를 잔뜩 헝클어뜨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게 웃음소리(그중에서도 그녀의 웃음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74)

첫번째 단계에서 화자에게 주어진 문제는 대략 이러하다. 보이지 않음과 상상력, 그녀의 마력과 아버지의 실추. 이것들은 불안을 낳고, 이 불안이 화자의 광기를 함양해준다.

8) 마셜 매클루언, 『구텐베르크 은하계』,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참조.

9)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참조.

10) 주경철, 『마녀―서구 문명은 왜 마녀를 필요로 했는가』, 생각의힘, 2016 참조.

단계 2. 추적과 실망(문의 모티프)

배움의 이야기 그리고 매력은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불가분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도, 정신분석학적 설명과 달리 수많은 성장소설이 사춘기 시절을 불러들이고 그 시기에 (유아기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성적 주체로 만드는가? 첫번째로 어른의 호명이 있다. 유아기에 어른에게 당하는 그 호명은―어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모종의 금지인 동시에 유혹이다. 하지만 두번째로, 사춘기에 마주하는 매력적인 동성의 신체와 언행이 있다. 어쩌면 이 매력적인 동성과의 마주침은 유아기의 성욕보다 더 불온하고 모호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 동성 또래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욕정인지 질투인지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 불확실성 속에 호명된 주체와 배움의 주체를 가르는 어떤 문턱이 있다. 물론 유아기에 형성된 ‘어두운 전조’가 사춘기 시절에 반복되지만, 이것은 단순한 재발견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반복이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의 탐구를 강하게 유인하는 매력적인 동성 또래의 이름은 양우정이다. 양우정은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지녔고 고결한 분위기를 풍긴다. 양우정은 남자애들의 장난 혹은 괴롭힘에 아주 싸늘하게 반응함으로써 남자애들을 기죽게 한다. 화자는 그것이 양우정이 타고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타고나는 여자들이 있고 그들은 선택받은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94).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 읽기를 통해, 마치 타고난 것처럼 여겨지는 무언가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배움의 효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자와의 성적 관계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화자를 저항할 수 없게 잡아끄는 문제다(이 문제의 양가적인 심각성은 ‘그녀’와 연관되어 있다). “나와 친구들은 못하는데 양우정(과 그애의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었다. 성숙한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 물론 당시에는 ‘성숙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이렇게 표현했다. 중학생 오빠들”(94-95). 물론 ‘중학생 오빠들’은 실체 없는 소문이고 화자가 양우정에게 더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신기루이다. 그렇긴 해도 중학생 오빠들의 ‘성숙함’은 초등학교 5학년인 화자에게는 엄중한 사실이다.

또래 집단이라고 해도 모두가 같은 배움의 길에 같은 강도로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자의 친구들은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들을 둘러싼 소문을 떠들어대고, ‘임신’과 ‘우웩’을 연결지으면서 즐거워하지만, 어쨌든 금세 다른 관심사로 돌아간다. 화자는 그렇지 않다. 화자는 그 소문의 진상에 집착하고,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빈틈에 조급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친구들과 달리 화자는 거기에 계속 매달리는가? 단지 화자가 남다른 성욕, 호기심, 집착을 ‘타고난’ 아이여서 그렇다고 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첫 단계에서 주어졌다. 첫 단계에서 화자의 눈은 가려져 있었고(아버지의 금지/유혹), 성숙한 남자(아버지)를 유혹한 ‘그녀’의 마력은 화자의 실존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첫 단계에서는 비밀을 추적할 방법이 없었지만, 성숙한 남자(중학생 오빠들)와 관계하는 양우정을 통해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친구들과 달리 화자는 그 성적인 소문의 ‘실체’를 밝히는 데 삶을 걸고 있다. 첫번째 단계에서 비밀은 막후에 있어서 청각적-상상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었다. 두번째 단계에서, 이제 비밀은 가까이 있어서 물리적으로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따라서 화자는 친구들을 따돌리고 어린이 탐정처럼 추적을 시작한다. 그 바람에 친구들에게 절연 당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들)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학교 뒤 숙직실까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 첫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것이 부동성(不動性)이라면 두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것은 수평적 운동이다.

쓰레기를 태운 연기와 매캐한 냄새를 품고 있는 소각장을 지나 숙직실 쪽으로 갔다. [……] 그리고 문에 바짝 귀를 갖다댔다. 마치 내 몸이 거대한 귀가 된 것처럼. 문 너머, 분명하지는 않지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분간할 수 있는 소리들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팝송, 간헐적인 박수 소리, 가끔씩 내지르는 탄성. (103)

팝송, 박수 소리, 탄성…… 이 절묘한 소리들은 (어린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무엇을 예상하게 하는가? 물론 문 너머에서 성관계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화자가 집착했던 문제의 실체가 바로 문 뒤에 있다고 기대하게 한다. 화자는 용감하게도 힘껏 문을 열어젖혔으나, “눈앞에 펼쳐진 건, 숙직실 안의 그들이 아니라 또다른 낡은 목재 문이었다”(104).

비밀로 접근해가는 여정에 도달을 지연시키는 너무 많은 문이 있다. 문들은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보존하고 부풀린다. 첫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문 뒤에 있었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첫번째 문은 열었지만, 왠지 모를 박탈감과 무력함으로 두번째 문은 열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정말로 양우정이 문을 열고 나온다. 그 순간 양우정이 발산하는 기호들―흐트러진 옷, 땀, 열기―은 화자의(그리고 독자의) 불온한 기대를 잠시간 유지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문이 활짝 열리자 “중학생 오빠들은 없었다”(105). 양우정과 친구들은 어른 옷을 입고 와서 가상의 런웨이를 걷는 중이다.

이제 땀과 흐트러진 옷, 몸의 열기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이렇게 기호들의 의미를 전환하는 솜씨는 손보미의 소설을 읽을 때 감탄하게 되는 특징이다. 소설은 화자가 느끼는 긴장, 당혹감, 허망함을 단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텍스트를 따라 함께 겪을 수 있게 한다. 당연히 화자는 실망한다. 도깨비 같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뒤돌아서 나가지도 못한다. 양우정은 꼼짝 못 하고 있는 화자에게 걸으라고 반복적으로 명령하는데 그 장면의 부조리함은 거의 잔인무도하게 느껴질 정도다. 화자는 결국 도망치는데, 도망쳤다는 사실(그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겨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패배감, 수치심에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주인공은 첫번째 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손보미의 소설은 대놓고 알레고리적인 카프카의 소설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학교의 철문이나 숙직실 문은 익숙한 형태와 색깔로 떠오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많은 문, 반복되는 모티프, 부조리한 장면은 소설적으로 교묘하게 배치되고 연출된 것이다. 이 구성을 알레고리로 읽는다면 배움의 이야기로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령 문학에 매혹되어 배움을 시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번째 문을 여는 것은 쉽다. 약간의 결심만 한다면 누구나 문학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첫번째 문 뒤에 두번째 문이 있다. 그 문은 배우는 자의 힘으로 열 수 없게끔 보이지 않는 힘으로 통제되고 있는 듯하다. 두번째 문은 내부자들이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즉 두번째 문에서부터 소위 ‘계’ 나 ‘장’이라고 불리는 것(‘문학계’)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문들 사이에 갇혀 서성이면서 문 뒤에서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막상 문이 열리고 그 속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먼저 들어가 있는 이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여기는 왜 이 모양인가요?’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그애들조차 이곳의 주인이 아닌데”(105, 강조는 원저자). 두번째 문이 열리면 우리는 주인은 없고(주인이 있을 수 없는데, 주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있는 숙직실에서 우스꽝스러운 런웨이 행렬에 참여하도록 종용받는 것이다.

단계 3. 승화(불의 모티프)

실망 이전에 독단주의라는 함정이 있다면, 실망 이후에는 회의주의라는 함정이 있다. 실망을 겪은 사람은 회의적·냉소적으로 된다. 하지만 실망은 배움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마디들, 쉼표들일 뿐이다.11)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가 겪은 실망은 근본적이지만, 그렇다고 실망의 가능성이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며, 화자는 이후에도 거듭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회의주의는―독단주의와 마찬가지로―이런 상처에 대한 방어 작용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 중산층 가정의 불안한 질서 속에도 행복한 기억이 있다. 정전된 날 가족이 모인 촛불 앞에서 어머니는 행복을 고백한다. 그러나 즉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날, 그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90). 촛불은 불장난의 불 혹은 “배덕의 찌꺼기와 흉허물”(91)에 비하면 너무 연약하고 일시적이다.

가족의 허상은 이미 파괴되었다. 이것이(화자의 경험을 시간순으로 재배열한다면) 다른 실망보다 먼저 있었던 실망일 것이다. 실망은 약속, 행복, 도덕, 풍습, 기대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배우는 자는 어느 순간 이 범상한 사실에 도달하여, 마치 대단한 지혜를 얻은 것처럼 허무주의를 설파하는 사람이 되곤 한다. 하지만 실망은 한 단계의 마감을 알리는 동시에 또다른 단계가 시작될 것을 암시하고, 아직 자기 입장을 요새화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이 고된 사실을 방어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화자는 친구들을 잃고 외톨이가 되었다. 수치심은 화자를 몹시 괴롭게 하고 있다. 방학이 되어 어머니 집에 가는 것은 화자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어머니는 자신의 공부와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어린 화자는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 이 벼랑 끝에서 어떤 일탈을 시도하는데, 이 의식화된 일탈은 예술에 가깝지만, 혼자 하는 일이고 주관적인 고양감을 겨냥하기 때문에 아직 예술은 아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법적인 존재처럼 그려졌지만 중대한 일탈, 불장난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아버지이다. 처음부터 드러나는 그의 허술함을 고려할 때 이는 반전이라기보다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어머니가 행복을 고백한 밤 촛불을 켰던 라이터, 그 순간 외에는 아버지가 화자 앞에서 꺼내지 않았던 그 사물은, 아버지의 부주의 때문에 화자에게 재발견된다. 화자는 그 라이터를 가지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데, 여기서도 문의 모티프가 반복된다. 그런데 두번째 단계와는 순서가 반대다. 구 층에 있는 중간 옥상 문은 잠겨 있고, 이십오 층 옥상(‘진짜 옥상’)에 있는 문은 잠겨 있지 않다. 배움의 단계들을 문의 모티프와 관련하여 다음처럼 도식화해볼 수 있다. 배움의 단계마다 화자는 이전 단계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된다(하지만 불능도 부분적으로 계속 남아있다).

단계 1: 문을 열 수 없는 상태
단계 2: 첫번째 문은 열 수 있지만 두번째 문은 열 수 없는 상태
단계 3: 첫번째 문은 열 수 없지만 두번째 문은 열 수 있는 상태

이 세번째 단계에는 복잡한, 거의 종교적으로 보이는 의례가 수반된다. 두번째 단계에서도 단순한 의례(철문을 닫음)가 있기는 했지만, 이제 화자는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의례들을 만들어낸다. 화자는 그녀와 아버지 앞에서 화난 기색을 유지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며, 배가 고파도 아침밥은 굶는 등의 규칙을 만들어 지킨다. 처음에 이 수행적 자해는 아버지, 어머니, 그녀를 향한 시위이기도 했겠지만 점차 의도와 형식의 중요성이 전도된다. 이렇게 까다로운 의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 불장난이 일종의 정화 의식임을 말해준다.

소설에서는 적절하게도 말해지지 않지만 ‘불장난’은 불륜 행각을 뜻하는 관용어이기도 하다. 화자가 실제로 하는 불장난은 상징적인 “배덕의 찌꺼기와 흉허물”뿐 아니라 이 관용어의 상투성마저도 정화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 단계는 화자에게 수치심과 굴욕감을 심어준 경험, 특히 두번째 단계에서의 도망을 상상적으로 벌충한다. “다시 해봐, 다시 해봐, 하고 나를 부추기는 것처럼, 온 사방에서 기타와 드럼 소리가 두드러지는 팝송의 전주 부분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120). 이 명령어와 팝송은, 두번째 단계의 숙직실에서 화자가 들었던 소리의 상상적 반복이고, 이 반복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실제로 넘지 못했던 난관을 주관적 차원에서 초월하려 한다.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수치심과 굴욕감, 이물스러움과 꼴사나운 천진함 기타 등등―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120).

두번째 단계가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수평적 운동으로 특징지어졌다면, 계단을 올라 옥상에서 불을 피우는 이 단계는 상승의 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탈속(脫俗), 탈성애화의 움직임. 이 불장난은 주관적 보상인 희열을 주지만 그만큼 쉽게 사그라든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 가서 우리는 이 불장난이 마지막 난관을 넘기 위한 ‘주관적 차원에서의 예행연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11) “기호들의 영역 각각에서 대상이 우리가 기대했던 비밀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각각의 [배움의] 선에 대응하여 실망은 그 자체가 복수적이고 다양한 것이다. 처음 볼 때 실망케 하지 않는 사물들이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처음이란 미숙한 순간이고 우리에겐 아직 기호와 대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64쪽. []는 번역자.

단계 4. 글쓰기

글쓰기는 모든 의심과 혼란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도대체 지금 누가 서술하는 것인가(어린 화자인가, 어른 화자인가, 작가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글쓰기 때문에 배움을 단계화하는 게 가능하지만, 동시에 글쓰기는 단계화를 영원히 혼란에 빠뜨린다. 먼저 이 소설에는 다섯 개의 (은유적이거나 실제의) 불장난이 있는데, 이것들은 불과 폐허의 모티프를 반복하면서 각각 배움의 단계들에 상응한다.

(1) 그녀와 아버지의 불륜
(2) 양우정의 손수건을 소각장에 던짐
(3) 옥상에서의 불장난
(4) 불조심 글짓기의 소재로 쓴 불장난
(5) 동급생들 앞에서 낭독한 불장난

글쓰기는 네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소설의 내부에서 글쓰기가 마지막 단계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소설을 특히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특징이다. 글짓기 자체는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처럼 순식간에 일어났고, 다른 단계들에 비하면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중요한 배움을 주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를 이 소설 자체(혹은 소설에 대한 이 비평까지)로 확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글쓰기의 다음 단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것을 포괄하는 글쓰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글쓰기가 있는 한 어떤 ‘마지막’ 단계도 진정으로 마지막이 되지 못한다. 모든 마지막 단계의 에 글쓰기가 은근슬쩍 따라붙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쓰기에는 얼마든지 단계를 만들어내고 해체할 수 있는 자의성이 있다.12)

이 글에서 매력의 문제는 첫번째 단계에, 실망은 두번째 단계에 할당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혹과 실망의 운동이 모든 단계에 걸쳐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반복은 삶에서는 직접 알아차리기 힘든 리듬과 정조를 소설에 부여한다. 반복을 통해 화자가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나 강렬했던 배움의 단계들이 결국 모두 일시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인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128).

하지만 글쓰기가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상처일 수도 있다. 어린 화자가 정말로 매혹과 실망의 운동을 경험했던 것인가, 아니면 작가의 글쓰기가 화자의 삶 속에 반복을 기입한 것인가? (혹은 소설이 정말로 배움의 단계들을 설계한 것인가, 아니면 비평이 소설에 임의로 부여한 것인가?) 더군다나 화자가 자신의 ‘불장난 글짓기’에 번복(“이건 사실이 아니다”, 124)을 덧붙이고 있는 마당에, 이 소설의 글쓰기 자체를 믿을 수 있을까? 글쓰기의 단계에서 화자는 대상에의 집착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 것 같다(이전 단계의 주관적 고양이 글쓰기를 통해 지속성을 얻는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그해가 끝날 무렵에는 그런 것―방문에 귀를 갖다대는 것―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덧붙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타인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127)

앞선 단계에서의 실망을 통해 화자는 이제 비밀을 대상에서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화자는 내면에, ‘자기만의 방’에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역시 허상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우리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관적으로 물러날 수 있단 말인가? 한 작가의 방에도 얼마나 많은 작가의 언어가 있고,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와 사물이 있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고지서와 걱정거리, 작가를 부추기는 과제 들이 있는지? 단지 그런 것들의 연결을 더 견고하게 구성하여 마치 정신적인 방처럼 만듦으로써, 마치 스스로 운동하는 체계가 있는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우리는 주의를 뺏는 대상들과의 관계(이를테면 양우정에 대한 집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화자의 글쓰기 역시 외부에서 우연처럼 주어진 어떤 기회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교를 매개하여 시에서 개최하는 불조심 글짓기 대회 때문에 화자는 글을 쓰게 된다. 원래 화자는 대회에 관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자신의 경험과 글쓰기가 운명적으로 결속되는 것처럼 느낀다. “문득, 불장난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일, 거부할 수 없는 본분처럼 느껴졌고, 심지어는 조급증이 날 지경이었다”(121). 그렇다고 화자가 사실대로 쓴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단계에서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거짓의 역량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대상들에 기생하면서, 삶을 포착하는 동시에 파악 불가능하게 만든다.

12) 다섯 개의 ‘불장난’에 어머니와 함께했던 ‘촛불’의 기억 그리고 “불장난”이라는 제목의 소설 자체를 추가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는 소설에서 그려지는 배움 이야기의 배경이자 메타적 조건이지만, 다른 단계들을 초월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계 5. 되찾기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얻는 거짓의 역량, 그리고 글짓기를 통해 상을 받고 선생들의 관심을 받게 된 데서 오는 약간의 자신감이 마지막 단계에서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인 ‘되찾기’는 어떤 의미에서 과감한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진 적도 없고 잃어버린 적도 없는 무언가를 되찾아야 한다. 배움의 비밀은, 우리가 사실은 허상을 좇는 것일 뿐이라는 진실의 기나긴 지연 그 자체에 있다. 단계들은 어떤 원초적 전조(상실된 대상)의 재현이 아니고 그 실체에 대한 뒤늦은 탐구도 아니다. 매혹과 실망의 운동 그 자체가 배움의 내용이다. 배우는 자는 자기가 좇는 것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는다. 하지만 작가가 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배우는 자는 없는 것을 연출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방하는 자가 아니라 훔치는 자가 된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양우정의 당당함과 매력이 ‘타고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화자는 자신만의 연출 방식을 찾아낸다.

곧 나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특별히 고민을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수줍어서 입을 뗄 수 없다는 식으로 웃어 보였고, 우연찮게 아는 게 나오면 용기를 내는 척하며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선생은 내가 정답을 말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22)

화자는 매혹된 자에서 유혹하는 자로 변한다. 유혹은 없는 것을 연출하는 기술이다. 즉 유혹에는 필연적으로 거짓된 면이 있다. 모든 인간적인 것 중에서 그 실상을 낱낱이 알고 나서도 여전히 매혹될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도 넘기 쉽지 않은 마지막 문턱이 있다. 선생은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수상한 글을 읽어보라고 화자에게 종용한다. 그 순간 모든 우쭐거림이 사라지고 트라우마적인 무력감이 다시 엄습한다. 숙직실에서와 같은 명령어의 반복. “좀더 크게 읽으렴”(128).

왜 화자는 낭독을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하는가? 이 마지막 시험대에, 마치 연극의 커튼콜처럼, 화자를 괴롭게 했던 모든 불안과 패배감, 수치심과 굴욕감이 한꺼번에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형벌을 받는다고 느낀다. “무엇에 대한 형벌이란 말인가? [……] 한때의 굴욕을 손쉬운 안도와 거짓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시도에 대한 형벌”(129). 그렇다. 되찾기 위해서는 에누리 받았던 모든 고통, 주관적 보상과 거짓의 몫을 모두 갚아야만 한다. 이것이 배움의 마지막 단계이고, 예술을 넘어서는, 예술의 진실한 측면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거짓과 허상, 기만, 배덕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결산에는 어떤 오류도 에누리도 없다. “하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같은 쪽).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갑작스럽게 다시 자신감이, 약간 황당할 정도의 오만함이, 이전 단계에서 잘 함양되었던 광기가 찾아와 화자에게 마지막 난관을 넘어설 힘을 준다. 화자는 거짓으로 작성한―대회의 취지에 맞게 교훈적인―글에 즉흥적으로 더 지저분하고 구체적인 (진실에 더 가까운) 내용을 추가하여 낭독한다. 이 낭독은 글쓰기의 허위를 벌충하여 글쓰기 속에서, 그러나 글쓰기 이전에는 없었던 삶의 진실을 되찾게 한다. 그 순간 비로소 화자는, 이전 단계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배움의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130).

지금까지의 모든 기대, 매혹, 보상이 허상이었듯이 이 낭독의 도취 역시 허상일지 모른다. 아마도 허상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착각과 기만,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 될 것이다”(130-31).

눈이 가려져 있던 사람이 세계의 뒤편에서 눈을 뜨고, 삶으로 도약하는 이러한 되찾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압도하게 되는 그 배움의 여정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과정에서 허상은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문학도 허상이지만 그런 허상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아무 진실에도 도달할 수 없다. 좋은 예술작품만큼 좋은 선생은 없다. 가르치는 자는 자기도 모르는 것(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르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불투명하게 해야 한다. 예술작품만큼 불투명한 것은 없고, 그것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그만큼 우리는 예술로부터 한없이 중요한 것을, 우리가 매달리는 삶의 그 문제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도 배움의 끝은 아니다. 오히려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 배움들을 배우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거짓되고, 고통스러웠던 배움의 단계들은 이 단계에서 복기될 때 비로소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규정된 의미들은 사라지고 무의미했던 것들이 의미를 얻는다. 이것이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처럼 비평을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로 정의한다면, 이 마지막 단계에서 비평과 창작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활동이 된다(그러니까 ‘마지막’은 정말로 마지막이 되게 방치되지 않는다). 비판은 한편으로는 대상의 결여를 향하고 한편으로는 주체의 결여를 향한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서 진리가 허상임을 폭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더 어렵고 중요한 문제는 허상을 딛고 진실에 도달하는 것, 사실은 가진 적도 잃어버린 적도 없는 삶을 되찾는 데 있다. 감히 속아 넘어가려고 하라! 없는 것에 몸을 내어줄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배움의 슬로건이다.13)

13) 나는 다음의 유명한 구절을 염두하고 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편역, 도서출판 길, 2020,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