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기호와 매력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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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할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1) 근대미학에서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매력에서 정화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있다.

(2) 그러나 동시대 문화, 경제, 정치에서 매력은 너무나 중요한 기제이자 힘이 되었다. 오늘날 문화의 재현 논리, 활력과 복잡성, 정치적 갈등, 정동의 흐름은 ‘매력의 경제’에 대한 고찰 없이 이해될 수 없다.

(3)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즉 새로운 미학이 작성되는―출발점이다.

(4) 매력의 경제는 감각적 자극, 섹슈얼리티, 지적 관심, 도덕적 관심, 미적 관심, 육체적 끌림, 충동, 수치심, 허영심, 이해관심 등이 분화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경험적’ 세계의 법칙이다. 매력은 한 인간을 신체적-담론적 기호들(피부, 표정, 비율, 머릿결, 냄새, 말투, 옷차림, 예절, 분위기, 평판, 지위 등)의 조합으로 파악하게 한다. 매력은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을 무차별적으로 뒤섞어 매력의 복합적인 서열로 환원한다.

(5) 또한 매력의 경제는 모든 ‘피투자자’의 능력·신용·사회적 책임·평판 등을 투자 가치로 환원하는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국가나 기업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모두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로 환원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셸 페어의 말처럼, 오늘날의 대안적인 정치 운동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

(6) 매력의 경제는 한편으로는 ‘금융적’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감각적’이다. 이 두 측면은 즉각적으로, 광범위하게 상호작용하지만, 이론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전자는 재현적·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나무를 말릴 때 나무가 갈라지는 미묘한 소리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목수나 조각가가 되려면 나무가 내뿜는 감각적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보여준다.

(7) 매력은 배우는 자를 대상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매력을 통해 촉발되는 배움의 운동은 배우는 자를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으로부터 빼내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실망과 상처, 수치심과 모멸감, 적대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장르, 기호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등록·재생산·유통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단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의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교차·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쟁론』에서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이것은 삶이 기호들·장르들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하거나 초월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우리 시대의 문화가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이미 여러 번 들었던 예이지만―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 등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비교적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상황을 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효과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받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만약 과거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나는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단지 영역들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제도적·위계적·영토적·관념적 경계들이 현재보다 더 견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했던 적이 없다.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지저분하게 분투하는 것, 이를 정치적·예술적 실천의 조건으로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어떤 실천이나 미적 실험이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하는데, 외견상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런 비판은 대책 없는 파국적 호소일 뿐이다.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이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적 조건 속에서이다. 아이가 거울 단계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듯이, 배우는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문화에 재현하는 한에서) 매력의 경제로 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마치 손보미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 속 아이들처럼―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거의 본능적으로’―학습한다. 이것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영역들에는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물론 매력의 경제라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광범위한 부작용이 있다. 매력의 경제는 이른바 ‘현실 정치’가 모종의 광적인 팬덤 문화처럼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에 의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종종 관심과 주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고 도발적으로 말하는 프로보커터이기도 하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 판단,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의 경계를 없애버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사회문화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고도로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거나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적대와 갈등은 결코 ‘순수’하거나 고상할 수 없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끔찍한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준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공격적/방어적으로 되며, 한편으로는 ‘부유하면서-당당하면서-아름다운’, 즉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를 갈구한다. 오늘날 Kpop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그러한 갈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유인하고 있다. 지식인, 활동가, 예술가 등이 고려해야 할 실천적 문제는 동시대 문화에 지배적인 매력적 형상과는 다른 매력적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잔여―‘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가 있느냐이다.

매력에 대한 레퍼런스 모음

(계속 추가)

화려한 필터보다 자본주의 내 매력……
―tripleS, 〈Girl’s Capitalism〉(2023) 가사 중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NCT, 〈무한적아〉(2017) 가사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비서 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 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있어〉(2012) 가사

_______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führt das schöne reizt). 숭고함으로 충만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얼굴은 진지하지만, 때때로 경직되어 있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생생한 느낌은 두 눈 속에 찬란히 빛나는 투명함에 의해서, 미소 띤 얼굴에 의해서, 그리고 종종 환한 웃음에서 생겨난다.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강조는 원저자.

_______수치심은 본성의 비밀이다. [……] 그러나 동시에 수치심은 본성의 가장 적합하고도 긴요한 목적 앞에 비밀스러운 장막을 드리우기 위해서, 그 목적에 관해 잘 알려진 지식이 혐오감을 주거나 혹은 적어도 무관심을 유발하지 않게끔 해준다. 이는 인간 본성의 가장 세련되고도 생동감 넘치는 경향성에 접목된 충동의 궁극적인 의도에 관한 한에서 그러하다. 아름다운 성[여성]에게 이런 기질은 극히 고유할뿐더러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한다. [……] 언제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듯이 우리는 지금도 비밀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으며 […]
―같은 책, 66-67

_______모든 이해관심은 취미판단을 더럽히고, 취미판단의 공평성을 앗는다. 특히 그것이, 이성의 이해관심처럼, 합목적성을 쾌의 감정에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합목적성을 이 쾌감에 근거 지을 때에는 그러하다. [……] 취미가 흡족을 위해 매력Reiz과 감동의 뒤섞임을 필요로 하고, 심지어 이것을 자기에 대한 찬동의 척도로 삼는 곳에서, 취미는 항상 아직도 야만적이다.
[……]
매력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비록 그것들이 미적인 것에서의 흡족과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이카넷, 2009, pp. 218-19. 강조는 원저자.

_______매력{자극}과 감동에 독립적인 순수한 취미만이 ‘문화화한{교화한}’ 것이라는 이러한 칸트의 생각은 초기의 것과 다르다. 『관찰』(1764)에서는 오히려 “숭고한 것은 감동을 주고, 미적인 것은 매력적이다{자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바뀐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같은 곳, 백종현의 역주 56 {}는 역자)

_______미의 감정은 스스로 보편적이고 즉각적이며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있기를 희망하는 반성적이고 개별적인 판단이다. 그것은 오직 영혼의 능력, 즉 쾌와 고통의 능력에 속하며, 형태를 계기로 발생한다. 이른바 무심한 쾌라는 그것의 운명이 걸리는 지점도 거기다.
주어진 대상의 재질이나 색채 음색 따위에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순간 미의 감각은 하나의 “즐거움agrément”으로, 일종의“성향 inclination”이 충족되는 데서 발생하는 쾌감으로 퇴행하고 말며, 이때 대상은 스스로의 현존을 통해 사람의 정신에 어떤 ‘‘매력”을 행사한 셈이라는 것이다.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적 쾌감을 대상의 향유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저 순수한 취미와 불순한 취미를 구별해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다시 말해 감각들의 취미 “Sinnengeschmack”로부터 반성적 취미 “Reflexiongescrunack”를 가려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성 일반은, 혹은 특히 미에 대한 즉각적 판단(감정)이라는 범례적 양식으로서 작용할 때의 반성은, ‘‘어떤 한정된 대상에 대한 의지의 복종’’으로정의되는 관심을 일체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성이란 어떤 정해진 기준이나 판단 규칙 없이, 따라서 어떤 쾌감을 유발할 일종의 대상 또는 유일한 대상을 예견하지 않은 체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_______순수하게 미적인 공통감각은 결국 전제되고 가정될 수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의 해결이 불충분한 해결이라는 것을 별 어려움 없이 발견한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어떻게 충분한 해결일 수 있겠는가? [……]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과연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23, pp. 191-92. 강조는 원저자.

_______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charme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 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력은 필연적으로 이기는 주사위 던지기입니다. [……]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조합으로 된 숫자입니다. 매력과 스타일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다른 말을 찾아서 대체해야 할 것입니다. 매력이 삶에 개체들보다 우월한 비개인적 역량을 부여하고, 스타일이 글쓰기에 씌어진 것을 넘어서는 외적 목적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또한 둘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입니다.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_______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apprenti은 없다.
―들뢰즈,『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 23)

_______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같은 책, p. 41)

_______이 진리들은 지성이 선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동하고 임무에 뛰어들면서, 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발견한 진리와 대립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들의 한계를 보았었다. 즉 그런 진리들은 ‘필연성’이 결핍되어 있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지성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같은 책, pp. 49-50)

_______욕망 이론에서 비판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 역시 칸트이다. 칸트는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 정의를 예시하기 위해 칸트가 미신적 신앙들, 환각들, 환상들을 원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런 식으로 욕망을 규정할 경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 대상의 현실은 심리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혁명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p. 59.; 강조는 원저자, []는 인용자.

_______마지막으로 기호가 재촉하는 응답 안에서. 응답의 운동은 기호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다. 수영하는 사람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모래사장에서 재생하는 수영 교사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개가 어떻게 배우는가를 말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거기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어떤 실천적인 친밀성familiarité, 기호들에 대한 친밀성이 존재한다. 이 친밀성을 통해 모든 교육은 애정의 성격을 띤 어떤 것이 되지만 또한 동시에 치명적인 어떤 것이 된다. 우리는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따라해야 할 몸동작을 보여주는 대신 다질적인 것 안에서 개봉해야 할 기호들을 발신하는 방법을 안다. 달리 말해서 관념적 운동성이란 없다. 오로지 감각적 운동성만이 있는 것이다. [……]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들뢰즈,『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p. 72-73.

금융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 국가 당국은 여전히 상충하는 요구의 균형자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심판관으로 행위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특히 신용 공급자의 요구와 정부를 선출한 시민의 이해 관계를 중재할 임무를 맡고 있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실제로 정부는 자국 영토는 물론이고 통화와 채권의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를 유지시키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유권자의 소망을 채권자의 신뢰에 종속시킨다.
―미셸 페어,『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대항 투기 운동가들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금융 시장에서 높은 가치가 매겨지고 있는 기업 거버넌스와 공공 행정의 기술이 터무니없이 리스크가 높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 으로는―단기적인 금융 수익보다 사회권과 생태 발자국 감소를, 지적 재산권 강화보다 지식과 건강 보험에 대한 접근권을 우선시하는 것과 같은―실현 가능한 대안들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같은 책, p. 56)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 대해

교육과 배움의 관계

너의 교육자는 너를 해방시키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모든 교양의 비밀이다. 교양은 인조 사지와 밀랍 코, 안경 쓴 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이 줄 수 있는 것은 사이비 교육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니체 a 395~96)

사유의 초월론적 조건들은 앎이 아니라 ‘배움’을 기초로 조성되어야 한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들뢰즈 a, 365)

니체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자신이 어떤 “어려움, 욕구와 소망 속에서” 쇼펜하우어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었는지 기술한다(물론 면대면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만난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젊은 니체의 열광―비록 훗날의 실망을 예비하는 것이지만―은 시대의 불만을 넘어서는 교육과 철학에 대한 그의 희구에서 비롯된다. “내가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 즉 시대에 내재한 불만을 넘어설 수 있고 생각과 삶 속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라고, 다시 말해 그 말의 심오한 의미에서 반시대적이 되라고 다시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철학자를 그렸다면, 정말이지 지나친 망상을 한 셈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제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져서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면 부정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니체 a, 401, 강조는 원저자).

그 글에서 니체가 고발하는 당대적 문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인습과 의견에 갇혀 살며 불만을 품으면서도 거기에 안주하는 인간들의 게으름. 둘째, 다양하고 복잡해진 환경 속에서 부정직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언행. 셋째, 국가에 복무하는, 교육의 이념을 국가에 종속시키는, 그리하여 결국 철학적 사유를 모욕하고 무력화하는 강단 철학.

그리고 셋째와 불가분 연결된 문제인 넷째는 젊은이들을 “시험 유령으로 만듦으로써 철학 공부를 겁내서 그만두게 하는”(489) 교육 제도, 교육 관행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공부와 삶은 괴리된다.

니체는 이런 문제들의 타개책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배우는 자가 취해야 하는 주체적 도야이고 둘째는 가르치는 자가 행해야 하는 제도적·사상적 개혁이다.

배우는 자에게 제안된 도야의 방법은 위험한 것이지만 스승이 없을 때도 스스로 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즉 젊은 영혼들이 직접 “자신을 파헤쳐서, 가장 가까운 길로 무리하게 자기 본질의 수직 갱도로 내려가는” 방법이다. 좀더 쉽게는 다음처럼 자문해보는 것이다. “너는 이제까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끌어당겼고 무엇이 너를 지배하는 동시에 행복하게 했는가?”(394~95) 그 자기 탐색의 과정에서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기질과 성향을 발견한다. 이것은 개인의 ‘고유하고 진정한 본질’ 같은 것이 아니다. 니체는 우리의 실존이 역사적·상황의존적·우연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스스로를 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폐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긍정하게 된다―그것이 지배적인 가치에 비추어 추하거나 악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이것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사실에서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는 윤리로의 이동을 함축한다(Lacan). 다시 말해 ‘호명된 주체’에서 ‘배움의 주체’로의 이동을 함축한다.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긍정해야 하는, 우연에 의해 형성된 기질/성향이 배움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대담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섬세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집요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배울 수 있다. 또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냉정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기타 등등. 각자에게 ‘우연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어진 실존적 문제들에 스스로 대답해보려고 골몰하면서 말이다. 배운다는 것, 배움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는 것과 엄밀하게 같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 여기에 태어나 이 모양으로 생겨 먹게 되었는데, 좀 못생긴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내가 지금 걷는 배움의 길에는 최적의 생김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배움은 역사적·국가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배움은 철저히 타자에 의존하고 타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하는 순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배움의 길에 있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 자신보다 전문가일 수 없다. 배움이 특정한 ‘앎’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있을 때 배움은 극복되어야 하는 과정, 아직 앎에 도달하지 못한 미숙한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의 운동을 앎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두면, 오히려 앎이 배움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앎은 관념적 운동이지만 배움은 감각적 운동이다. 앎의 척도는 정확성이고, 배움의 척도는 진정성이다.

이러한 배움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니체는 배움의 주체가 취할 수 있는 발화 방식의 한 범례를 보여준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증인이 되는 그런 종류의 발화이다. 그 발화는 원칙적으로 객관적 재현이나 증명, 자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발화자는 현행화된 지식/권력의 ‘공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하나의 ‘사건’이 되어, 현행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들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가 근본적으로 더 우월함을 천명한다. 이때 시련은 발화와 발화자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데서 오는 ‘광기’이다. 자신이 겪은 시련에 의해 보증되는 이 천명은 자기충족적 예언이다(주판치치). 말하자면 배움은 어떤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들에 구속되어있지 않다. 니체는 자신이 가진 것이 없지만, 심지어 병들었지만, 철학자로서 지녀야 할 ‘매력'(“사회의 모든 계층에 발산하는 완벽한 매력”)을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발화의 내용과 발화자 사이에 어떤 거리도 없어진다는 것, ‘단순하고 정직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정확히 니체 자신의 삶이 보여주듯이 ‘미친다’는 뜻이다. 세계를 둘로 나누려다가 자신이 둘로 쪼개질 수 있는 것이다. 광기는 이 첫 번째 도야의 길에 내재하는 위험이자 시련이다.

최근 의 주목할만한 ‘성장소설’들은 이러한 도야의 동시대적 사례를 보여준다. 손보미의 「불장난」 말미에서 어린 화자는 스스로 세계의 비밀에 도달했다고 느낀다(비록 어린 화자의 광적인 확신에 어른 화자의 회의가 덧붙여지고, 그에 따라 진술의 광기는 누그러지지만). 예소연의 「우리는 계절마다」의 끝에서 화자는 자신을 자기 삶의 입법자로 내세운다. “나는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예소연, 328). 우리는 이 소녀 화자들에게서 니체적인, 약간 광적인 오만함과 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화자들이 그런 방식의 자기 진술에 이르는 것은 상황(스승의 부재, 가정에서 받은 상처, 부모의 무감함이나 부재, 또래 집단 속의 폭력 등)이 그들에게 위험한 도야의 길을 가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성장소설들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는 스승의 부재, 혹은 선생의 영향력의 현저한 약화이다.1 물론 스승이 있든 없든 우리는 배우는 자이다. 그러나 안내자가 없는 이 배움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방황, 여러 시련을 거친다. 성장소설은 이러한 ‘비제도적’ 배움을 예증하는 데 특권적인 장르이다(그리고 이 장르가 소위 제도문학 안에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배우는 자가 미치지 않기 위해 있어야만 하는 장르이다. 배우는 자(성장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소설적 거리는 우리를 메타적으로(배움들을 배우는 자, ‘두 번 배우는’ 자로) 만들고, 메타적으로 미친다는 것은 제정신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어린 화자들이 ‘자기 입법자’가 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인 자기 통치와 얼마나 다른가? 이 성장소설들의 ‘성장’은 국가적인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이것이 가치들을 ‘둘로 나눈다’는 목적에 비추어 고찰되어야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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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스스로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우는 자인 동시에 교육자인 차라투스트라는 다음처럼 말했다. “그대들은 배운다는 것, 잘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 나로부터 배워야 한다!”(니체 b,)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잘못 배운다는 것은 죽음과 예속을 향해 치닫는다는 뜻이다. 스승이 필요하다면 어떤 특정한 앎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서다.

첫 번째 제안이 독특한 시련―그러나 주체성에 가해지는 엄청난 시련은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일반적인 것이다―에 노출된 배우는 자를 위한 것이라면, 보다 ‘보편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교육 사상의 개혁이다. 이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교육자들, 가르치는 자들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의 현재 교육 제도의 근본 사상을 새로운 근본 사상으로 대체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노력을 요한다. 이제 이 대립을 직시할 때가 왔다. 왜냐하면 나중 세대가 승리를 거두어야 할 투쟁을 어떤 세대는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니체 a, 465). 그렇다면 교육의 ‘근본 사상’은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니체의 텍스트는 배움과 교육의 역설적 관계를 사고하게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문제이다.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의 앞부분에서, 니체는 진정한 교육이란 (아는 척하기 위한, 사회적 지위를 위한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 각자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임을 단언한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글의 뒷부분에서 니체는 교육의 이상이 국가보다 높이 있어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국가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교육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동시에 강요하는 것, 교육을 재현의 질서에 종속시키는 것, 배움의 과정을 특정한 ‘앎’의 목적(이를테면 수능에서의 높은 점수)에 종속시키는 것은 결국 국가이기 때문이다.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가 하는 일은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잉여나 초과와 같은 교육의 이상을 담보하고 보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니체는 배움의 다원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교육의 드높은 이상/이념idea을 주장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이항대립, 이를테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나 진리와 다원성의 대립 같은 이분법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중적 주장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보편적 이성, 헤겔의 절대지 같은 교육의 최종목적은 배움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경색시키며, 교육을 국가의 목적에 종속시킨다. 하지만 니체의 비판은 그러한 이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교육의 이상이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더 강대하고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경험적·역사적으로 알듯이, 교육이 어떤 내적 이상도 진리도 없이 ‘다양성’을 가치로 내세울 때는 그 다양성조차도 결코 지켜낼 수가 없다. 한국의 공교육 제도가 다양성, 자율성 등을 기치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의 출범, 즉 김영삼 정권 때부터이다. 그로써 학생의 인권과 자율성을 보장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교육의 ‘시장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김환희). 대학 입시라는 일원화된 목적이 약화되거나 해체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학교에서의 다양한 활동은 결국 더욱 숨 가쁜 평가들로 환원되었다. 다양성이나 자율성의 기치는 학원/과외 종류의 증가와 사교육비 폭증으로 이어졌다. ‘결과 중심 평가’에서 ‘과정 중심 평가’로의 이동은 일견 앎의 목적보다 배움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그리고 그런 효과도 실제로 어느 정도는 있지만―실질적으로 그것은 수행평가 비중의 증가, 수시 비중의 증가, 그에 따른 관리관찰과 자기 관리의 미세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국가는 당연히 배우는 자 개개인을 염려하지 않는다. 국가의 목표는 (외적으로) 타국과의 경쟁에서 존속하기 위해 (내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통제·관리·육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국가에 의해 보호되고 정의되는 교육은 국가를 위한 인적자원의 육성을 목표로 한다. 권위주의적 교육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으로 옮겨오는 동안, 그 인적자원의 형상은 성실하고 근면하며 유순한 ‘노동자’에서 최대 이윤을 위해 자기 삶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기업가’로, 혹은 자신의 가치 상승을 위해 자원을 투자하는 ‘자산 관리사’(페어)로 변모해왔다. 이러한 형상의 변화는 국가의 위상과 역할 변화(산업 인력을 동원하려 하는 국가에서 자신의 ‘금융적 매력도’를 증가시키고자 하는 국가에 이르는 변화)와 상관적이다. 그러나 교육이 어떤 주체성을 생산하려고 하든, 이런 방식으로 사고된 교육의 목적이 국가의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반대로 니체가 말하는, 국가를 초과하는 교육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재현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지배적인 재현 체제로부터 셈해질 수 있는 것만이 공식적·실증적으로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증적·실용적 관점에서 이 ‘이상’은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기껏해야 낭만적인 망상이나 고집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실증적 지식/권력을 무화시켜버리는 니체의 ‘가치전도’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갖추고 있다. 재현될 수 없는 교육의 이상은, 재현될 수 없는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그 자리에서의 발화를 통해 그것의 존재를 증언하는 배우는 자에 의해 보증된다. 역으로, 재현될 수 없는 교육의 이상은 배우는 자 각각의 해방을 보증한다.2 이는 결국 인적자원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그렇기에 예측할 수 없는―사유자들의 훈육이다. 따라서 젊은 니체의 주장은, 겉보기에 상충하는 듯한 두 가지(배움의 예측 불가능한 다원성과 교육의 높은 이상)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 서로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양성과 진리―물론 니체라면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흉내 내는 말이라고 했겠지만―는 교육 안에서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러한 교육은 사실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이념적으로 존재한다. ‘조건 없는’ 교육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조건 없는 대학 같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 없는 대학은, 원칙적으로 대학이 공표한 소명과 공언한 본질에 근거해, 독단적이고 불공정한 전유를 일삼는 모든 권력에 비판적으로―그리고 비판적인 것 그 이상으로―저항하는, 최후의 장소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데리다, 16~17)

대학이 현실에 실재하는 제도/기관인 한에서, 대상적/객관적 조건들에 구속되지 않은 ‘조건 없는 대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건 없는 대학은 교육을 위해서 이념적으로 고수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념을 고수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비판가이자 ‘의심의 세 대가’ 중 하나로 칭해지는 니체의 의도는 가치들이 공허한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학자들, 그것을 위해 철학을 이용하는 학자들, 그들은 국가에 복종하는 학자들로서 니체의 최대 공격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이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비판적인 것 그 이상”인, 스스로도 “지나친 망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니체의 의도는 국가를 초과하는 교육의 급진적 이상으로부터 다양성, 창의성, 진정성 같은 가치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의 상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참조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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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론 제도적·합법적인 스승이 없다는 것이지, 잠정적으로나마 스승의 역할을 하는 어떤 인물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손보미의 「밤이 지나면」의 ‘그녀’, 예소연의 「우리는 계절마다」의 ‘미정 엄마’,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의 ‘모래 고모’ 등은 소녀의 성장기에서 ‘비제도적 스승’의 역할을 한다. ↩︎
  2. 이것이 교육과 ‘천재’의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물론 우리가 19세기의 니체처럼 천재를 예외적 개인의 기질로 정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만 천재성은 대상적/객관적 조건들의 산술로 설명될 수 없는 배움의 예측 불가능한 효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