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의 두 문제

―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

매력reiz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 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1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병적인”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2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 비서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 있어〉(2012) 가사

1. 모호성과 취약함

나는 지난 몇 년간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낯선 것,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막연한 생각 속에서 이 년 전에도 ‘매력의 경제’에 대해 썼다.3 그 글에서 나는 매력의 경제가 지적(이론적) 관심, 도덕적(실천적) 관심, 미적 관심의 ‘칸트적’ 분리가 함몰된 문화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는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가 흐려지고, 지적·도덕적·미적 관심과 육체적 자극, 성적 끌림, 경제적 이해 관심, 정념 등이 마구 뒤섞인다. 반대로 말해 매력의 경제는 주목의 흐름, 휩쓸림, 끌림, 공감, 혐오감, 수치심, 열등감이 뒤섞인 정동적 흐름을 설명하려는 동학이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을 통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이른바 ‘현실 정치’는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변해온 듯 보인다. 한국의 여러 사회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또 어느 연예인의 도덕적 논란은, 즉각 그의 ‘인성’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그의 외모에 대한 조롱 혹은 성희롱과 뒤섞여버린다.4 이러한 고발과 조롱은 행위만을 겨냥하지 않고 존재를 사방에서 포획하기에, 훨씬 치명적인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줄 수 있다. 즉 발언이나 행위에 대한 처벌·판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런 종류의 공격과 모욕에 매우 민감하다. “많은 학자가 동시대의 ‘젊은 세대’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오찬호, 2013) 같은 책도 있지 않았는가. 확실히 이런 세대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가 ‘냄새’와 같은 감각적 차원의 일로 번역되면 여전히 충격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불평등이나 계급성이라는 추상적 사실보다는 감각적 번역에 가장 민감한 세대일 것이다.”5 즉 이 세계에 거대하고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훗날 내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기에. 그러나 누군가―영화 〈기생충〉(2019)에서처럼―내 몸에서 나는 냄새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내 행위나 처지에 대한 비난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모욕처럼 느껴진다.

그런 모욕을 마주해서 주체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기 혐오·수치심을 내면화하거나, 〈기생충〉의 기택처럼 돌이킬 수 없는 충동에 휩쓸리거나. 그도 아니면, 모욕을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모욕이 자신을 파괴할 수 없게 자기를 배려하거나. 이 자기 배려가 우리에게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줄 것이다.

매력의 불평등은 당연히 경제적 불평등과 뗄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 둘의 관계가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아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악뮤의 천재적인 노래 가사에서처럼, 나를 홀린 사람은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 비서’만큼 유능한 사람이 아니어도 그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게다가 매력은 외양상의 조화로운 배열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객관적인 조건들로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이 있기에 매력은 마법이나 마술처럼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신비함과 모호함 때문에 매력은 갈급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이 끌림과 욕망의 동학은 어떤 부정적 명령도 발신한다(“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이 명령은 호감과 비호감을 나누는 기준에 예민해지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열등감이나 수치심, 조급함을 주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홀리는 이 모호함을 제거할 수도 없다. 매력을 탈신비화하고 구조적으로 분석해보라. 매력에 ‘비판적 거리’를 두려고 해보라. 매력을,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와 노동을 숨기고 있는 물신fetish이라고 고발해보라. 그것은 가능하겠지만 무력한 일인데, 매력이 자본의 이차적 효과나 그 자체 ‘상징자본’일 뿐이라고, 혹은 물신이라고 파악한다고 해서 매력적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현혹이, 매력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지 무지해서 현혹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은 아우라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매력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일찍이 먼 유럽 땅의 철학자 칸트가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매력의 이러한 모호함과 변덕스러움이었다. 칸트에게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합목적적 조화이지만 매력은 대상이 주체에 행사하는 지배력이다. 매력과 감동은 대상의 영향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의 취미판단으로는 부적절한 ‘야만적’ 관심, 미성숙한 관심이다.6 그러나 매력의 불순함과 모호함, 신비로움을 축출하려는 것은 그것대로―마녀사냥처럼―탄압과 억압적 안정화, 관심들의 위계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열거한 조짐들은 마치 매력이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 특히 젊은 세대에게 중요한 기제이자 기준이 되었다는 착시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면, 주체와 대상의 완고한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라는 특이한 ‘막간극’이 끝남에 따라 매력이 다시 공공연한 경험적 힘으로 부상했고, 그에 따라 비로소 비근대적인 미학이 작성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자극에 취약하고 감정적이며, 관심사들을 엄밀하게 구분할 줄 모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문학은 이 사실을 늘 말해왔지 않은가?). 단지 영역들, 관심사들의 관념적·제도적·규범적 경계가 흐려짐에 따라 이 사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배움이 매력으로부터 촉발된다고 주장7하는 것은―칸트라면 필시 ‘야만적’이라고 했을―동시대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즉 새로운 미학을 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근대적으로 규정된 아름다움, 자유, 도덕, 계몽, 성숙, 교양의 관념을 철저하게 재고해야만 한다. 매력과 순수한 취미판단을 분리하는 문제에, 칸트가 인간적이고 문명적이라 생각한 그 모든 소중한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말했듯 매력은 대상의 영향력에 종속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조화이다. 즉 매력과 아름다움의 분리는 대상과 주체의 근대적 분리와 맞물려 있다. 마찬가지로 계몽은 대상에의 의존이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를 전제한다. 또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일치’, 즉 미적 공통감각은 지적 공통감각과 도덕적 공통감각의 근거이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8

따라서 우리의 판단력이 매력에 휘둘리고 오염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적 공통감각이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이 말은 굳건한 지적·도덕적 공통감각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배움은 대상에서 주체를 분리하는 ‘선험적 형식’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경험적인 세계의 불순한 감각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촉발’된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발적으로’ 배우려 드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가 아님을 의미한다.9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경험적 자극들에 지적·도덕적으로 거리 둘 수 없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휩쓸리고, 방황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 출발점이다.

2. 교실 알레고리

나는 배움이 ‘매력과 실망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 그 연장 선상에서, 이 글에서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인 재현 논리로서 매력의 경제를 면밀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에 의해 촉발되는 배움들을 긍정하고, 보호하고, 촉진할 수 있는가? 이 이중의 과제를 위해서는 매력을 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매력의 경제학」에서 나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 재현 논리’로서의 매력과 ‘감성적 배움을 유인하는 인력’으로서의 매력을 애매하게 혼동했다. 그 애매한 교착 때문에 소설들을 다룰 때도 좀 우왕좌왕했다.

조금 복기해보자면, 내가 이 문제에서 늘 참조해온 손보미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주 예민하게 감지한다. 매력의 경제를 배우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매혹과 동경, 수치심과 혐오감을 느끼며, 이 감정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품행과 감수성, 젠더 규범을 학습하도록 종용한다. 교실에는 혐오와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아이가 있고, 반대로 눈길을 끌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가 있다. 이중 전자의 경우를 보자.

그 애는 목욕을 하지 않아서 언제나 머리카락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고, 얼굴에는 언제나 버짐 같은 게 피어 있었다(그게 영양실조의 결과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다). [……] 그 애의 이름은, 그래, 고장연이었는데, 내가 여전히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반의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 애를 ‘고장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무리로부터 떨어진다면, 무리에 정착하지 못한다면 나는 ‘깨끗한 버전’의 고장연이 되고 말 것이라고.11

어떤 신체(정확히 말해 신체가 발신하는 기호들signs의 특정한 조합)를 “고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신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의미화를 둘러싼 과정이 매력의 정치이고, 교실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화자가 몸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다. 이 경제는 신체적 기호들에 차별적인 의미를 할당한다.

위 소설에서 고장연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이고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인 듯하다. 아이들은 이 사실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혐오하는데, 그 사실이 신체적 기호들(기름때, 버짐, 냄새 등)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실의 무리들에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겉도는 화자는 자신도 비슷한 처지가 될까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 ‘완전히’ 본능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두려움은 사회적인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의 배움에서 본능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도덕적, 인지적, 정치적, 육체적, 성적 관심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를 온몸으로, 감각적으로 배운다. 바로 그렇기에 아이들의 배움은 강렬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종종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사춘기 시절 교실의 아이들은 교과서나 선생의 말보다 또래 집단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배운다.

이처럼, 매력의 경제는 끌림과 동경과 흥분을 낳는 한편으로 혐오감disgust과 수치심shame도 낳는다. 수치심은 죄책감guilty과 밀접하면서도 다른데, 죄책감이 행위에 대한 것인 반면 수치심은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도덕적 위반이 발생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라고 생각한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존재다’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12 혐오와 수치심은 신체적인 반응이지만,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감정(사회 질서와 도덕을 내면화시키는 감정)이기도 하다.13 혐오는 신체적 오염이나 질병을 회피하기 위해 진화된 행동 면역체계이지만, 문화적·도덕적 ‘순수성’에 집착하면서 소수자·약자를 배척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들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낄 때 도덕적으로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중 어떤 것은 농담 같은 것인데, 이를테면 방귀 냄새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타인의 품행에 대해 더 엄격한 도덕적 판단을 했다.14 이는 신체적 관심사bodily concerns와 도덕적 관심이 쉽게 호환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또 혐오감이 도덕적 엄숙주의의 형태로 표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혐오감이 행동 면역체계에서 기인한다면, 수치심은 어디서 비롯할까? 어떤 심리학자들은 ‘수치심의 기원’을 매력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찾는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매력도attractiveness는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며, 수치심은 매력도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상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15 혐오감이 오염된 것을 피하도록 진화된 심리적·신체적 반응이라면, 수치심은 자아를 오염된 것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간단히 말해 수치심은 내면에 반영된 혐오이다. 혐오가 종종 소수자와 타자를 배척하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감정이다.16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에 노출되기를 꺼리게 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매력을 낮게 평가하는데, 이 의기소침함 혹은 자기비하는 그의 매력도를 더욱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오늘날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신의 매력을 당당하게 전시하면서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17

소설과 관련해 이제 새롭게 논해보고 싶은 내용은, 손보미 소설에 그려지는 배움/성장이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배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화자는 실망을 겪고, 실망을 통해 배움의 경로가 매력의 경제에서 이탈하게 된다는 점이다.18 이때 실망은 어떤 대상이나 자신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 자체의 자의성과 허약함에 대한 것이다. 매력이 매력적인 대상의 본성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상황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작은 동네』에서 이러한 배움은 특히 고장연과의 관계에서 온다). 그런 실망을 겪고 나서 화자는 교실의 정치에 어느 정도 무관심해진다. 냉소적으로 될 위험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무관심은 화자가 ‘자기와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어 교실의 분위기에 덜 휘둘림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기와의 관계는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주체화로 해석할 수 있다.19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력의 경제에 저항하고 개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경제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삶의 재현되지 않음’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어린 화자는 작가가 된다. 즉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실망은 매력의 경제 내부에 구멍을 내고 그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배움으로 화자를 인도한다. 이렇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망한 사람은 단지 냉소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그것에 저항할 주체성을 부여하는 그 배움이 매력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중요하다.

손보미의 소설 속 교실은 아주 구체적이지만, 그 교실의 동학,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을 놓고 벌어지는 매력의 정치는 오늘날의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다. 매력의 정치는 소설 속 초등학교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애 시장에서, 금융 시장에서, 현실 정치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에게 어떤 말투, 품행, 사고방식, 가치의 서열들을 가르친다. 거꾸로 말해서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所與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전시장이나 투기投機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사춘기 아이들의 교실이기도 하다. 이 은유적 교실에는 셀 수 없이 많은―매력의 정치의 입법자이자 집행자인―‘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존재라면, 교실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바로잡을 권위주의적 선생은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러한 선생의 회귀를 욕망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매질을 통해 제대로 된 ‘자유’와 ‘합리’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화자처럼.

따라서 나는 이러한 문화적 조건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과제를 위해 이 글에서 새롭게 주장할 가설은, 앞서 말했듯 매력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20

3. 첫 번째 종류: 재현적 매력

매력의 두 종류를 잠정적으로 ‘재현적 매력representational attraction’과 ‘감각적·정동적 매력affective charm’이라고 불러보겠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관념과 정동을 구분하면서 정동을 ‘재현되지 않은 사유’라고 했다.21 관념이 고정된 격자라면 정동은 그 격자들 사이사이에 유동하는 흐름이다.

두 종류의 매력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지적으로 분별된다면 둘은 모두 재현적 매력으로 수렴될 것이다―그것이 어떤 주체화에 관여하느냐에 따라 분리된다. 즉 동일한 대상의 매력이 재현적 매력이 될 수도 있고 정동적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전자는 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회화 작품 표면에서 물감층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화가가 되려면 그 기호를 감각적으로 해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준다.22 아이돌 문화 역시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3-1. 금융적 매력도
재현적 매력이란 수치화 가능한 것, 평가·식별·계산 가능한 것으로 ‘이미 표상된 매력’을 뜻하기도 하고 (무엇이 더 많이, 더 중요하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는) 재현의 문법을 뜻하기도 한다. 오늘날 투자자들이 어떤 대상에 투자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가늠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이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페어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투자 대상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로 환원된다.23 그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생산되는 주체성은 ‘피투자자investee’이다. 국가, 기업, 스타트업 창업자, 자영업자, 대출을 받는 가계뿐만 아니라 젊은 예술가, 연구자 역시 피투자자다. 자기 프로젝트의 전시와 자신의 가치 상승24을 통해 투자(국가, 대학, 문화재단, 연구재단, 출판사, 전시기관 등의 지원)를 유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꼭 ‘돈’을 유인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주목과 관심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작업이나 자산의 가치를 상승시키려 하는 경우 우리는 피투자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피투자자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생산한다고 여겨진 ‘기업가 주체’와 다르다. 기업가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삶과 자산을 관리하지만, 피투자자는 당장의 이윤을 감축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려 한다. 실질적인 ‘이윤’은 금융적 매력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매력도는 투자받을 가능성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매력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분투하게 된다. 페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의 대항 투기 액티비즘이 ‘무엇이 매력적인가’의 결정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5

매력도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과 주목의 흐름을 견인하는 지배적 기제이다. 페어는 감정이나 정동에 대해 주요하게 논하지 않지만, 만약 그의 분석이 타당하다면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혐오나 수치심도 심각하게 가중될 것이다. 매력도의 지배적 기준은―이 기준이 다원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분류들(빈곤, 신용불량, 빈약한 포트폴리오, 나쁜 평판, 낮은 생산성, 낮은 디지털 접근성, 인기 없음 등)을 끊임없이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3-2. 기호, 장르, 메타장르
이런 관점에서 매력의 경제를 기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하는 ‘장르들’의 문법, 즉 메타장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선별·등록·재생산·유통·서열화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combination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사조가 아니다,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26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코드화될수록 그 존재는 더 많이, 더 빠르게 재현·유통·패러디·모방된다. ‘뉴진스는 하나의 장르다’와 같은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장르는 기호들을 조합하는 하나의 특별한 방식으로서 (재)생산될 수 있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

동시대의 문화는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예술의 탈장르화(예술의 삶 되기)’를 목표로 했던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과 반대되는 공식이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즉 기호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장르를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 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적 조합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취미,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냉소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대중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27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경험적 조건 속에서 시작된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 학습하며, 그 기준을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은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선 토론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영역마다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지식인, 예술가, 활동가가 고려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는 현재 지배적으로 재현되는 매력과는 다른 매력적인 것을 제시할 수 있느냐이다. 그다음 고려할 수 있는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혹은 구성적 외부), 즉 ‘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이 있느냐이다.

4. 두 번째 매력: 감각적·정동적 매력

첫 번째 매력이 장르들의 문법을 관장하는 경제적 논리라면, 두 번째 매력은 장르화되지 않은 개별적 기호들의 인력이다. 이 인력은 예측할 수 없는 배움들을 유도하고, 우리는 이런 배움들을 통해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확보할 수 있다. 즉 두 번째 매력은 첫 번째 매력에 저항할 가능성이다.

감각적·정동적 매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짧게 이야기해볼 텐데, 하나는 섹슈얼리티와의 관계이고, 그다음은 배움과의 관계이다.

4-1. 매력의 성적인 토대
젊은 시절의―‘비판’을 쓰기 전―칸트는 아직 매력을 순수한 취미판단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격하하지 않았다.28 훨씬 비체계적이고 유연한 텍스트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칸트는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rührt, das schöne reizt)”라고 썼다.29 이 짧은 텍스트에서 칸트는 수치심이라는 “본성의 비밀”이 매력과 관계있으며,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다면서 매력의 기원이 성차性差 혹은 섹슈얼리티와 불가분하다고 확언했다.30

그러나 원숙기의 칸트는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매력에 좌우되는 것은 ‘야만적’이고 ‘미성숙’한 관심이라고 규정했다. 이로부터 취미판단의 지붕 위에는 숭고가 있고 바닥 아래에는 매력이 있는 미학적 위계질서가 확립되었다.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체계적으로 분리하고, 대상에의 애착attachment과 초연함detachment을 분리할 때 미학의 저택 아래로 쫓겨난 것은 육체, 수치심, 여성적인 것, 동물적인 것, 몰입, 습관,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고이다(칸트의 몇 텍스트만 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근대미학의 형성 과정 전반을 염두에 둔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서두에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기입할 때 고려해야 하는 까다로운 함의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방황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혹은 거꾸로 말해서 우리는 상처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매혹되는 것이다. 이 취약함의 기저에는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있다. 섹슈얼리티는 장르/젠더가 아니며, 그렇게 식별·재현할 수 없는 잔여이다.31

배움의 이야기는 복잡하게 뒤섞이는 성적 계열들을 형성한다. 배움이 없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르들/젠더들/분류들만이 있을 것이다. 배움은 한 장르의 문법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앎의 축적이지 배움이 아니다). 배움의 운동은 기호들의 새로운 연결, 새로운 마주침의 공간32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장르들의 경계를 해체한다.

4-2. 감각적 매력과 배움의 관계
칸트 이후에 ‘매력’에 다시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철학자들은 니체와 들뢰즈이다. 일단 여기서는 들뢰즈의 텍스트만을 짧게 인용해보고자 한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33

일반적인 기준에서 약점인 특징도 어떤 독특하고 우연한 조합 속에서는 강점이 된다. 누군가의 억양이나 촌스러운 옷차림, 자기비하가 그런 것처럼.

이 구절은, 기호가 조합되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현재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특징들을 매력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또한 문학에서 전시되는 수치심의 윤리적 함의를 숙고하게 해준다. 진화심리학적 설명에서 수치심은 인간 주체를 위축시키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수치심의 전시 자체가 매력적인 것, 저항적인 것, 적극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매력이 한 인물을 비인격적인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면, 들뢰즈에게 배움은 상형문자처럼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 방출하는 기호를 해독하는decoding 일이다(장르가 삶을 ‘코드화’한 것이라면 배움은 장르들을 개별적, 감각적 기호들로 ‘탈코드화’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넘실대는 물결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34 이때 수영하는 신체가 파악하는 기호들, 즉 물의 리듬, 물결의 세기, 온도와 깊이 등은 감각적인 것이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물결’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전쟁 같은 분위기’처럼 은유적으로 사용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다르게 살고 말할 방법을 실천적으로 배우려면 우리를 휩쓸어가는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캐치해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35 이런 의미의 배움은 필연적으로―숭고가 아니라―매력과 관계할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면 모든 기호와의 모든 감각적 마주침이 반드시 그 기호를 해독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기호가 우리를 감각적으로, 심지어 폭력적으로 휘어잡을 때야 우리는 비로소 배우고자 한다. 캐이팝 해외 팬들이 먼저 가사나 대사를 외운 다음 의미를 이해하듯이(그러면서 순식간에 한국어를 배우듯이). 교실의 아이들이 신체적·언어적 기호들의 의미를 해독하듯이(그러면서 그 의미화의 과정에 개입하듯이). 사랑했던 사람의 차가워진 태도가 한참 나중에야 이해되듯이. 주체를 무장해제시키고 배움을 강제하는 미학적 힘/관심이 숭고가 아니라 매력인 이유는, 숭고는 이미 세계를 ‘풍경’으로 볼 수 있는―즉 대상에 거리 둘 수 있는―주체를 미리 전제하기 때문이다.36 이런 전제는 배움이 경험적 세계에 휩쓸려 있고 얽매여 있는 아무개에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한다는 (내가 들뢰즈에게서 가져온) 전제와는 어긋난다. 배움은 비자발적으로 발생하지만, 한번 발생한 배움의 선에 충실하면서, 그만두고 싶게 하는 유혹들, 한계들, 지배적인 기준들과의 마찰에 자신의 배움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배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때 주체는 인격/개인이 아니라 최소한의 일관성(충실성)을 갖는 집단적 배치이며, 앎의 선험적 형식이 아니라 배움의 운동 속에서 파악된다.

p.s. 차후의 과제

우리가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지만, 모든 상처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배움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나는 정동적 배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명문화된 교육보다 그 자체로 ‘진보적’이리라는 보장은 없다(단지 더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여기서 스승의 필요성이 나온다. 즉 스승은 특정한 앎을 전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배움이 삶을 향한 배움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배움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승이 일이 (앎을 통해) 배우는 자의 매혹을 깨뜨리는 것, 즉 계몽하고 탈신비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식한 스승은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을 잘 분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는 자는 매혹과 실망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워야 하고, 이 배움의 과정이 스승의 앎보다 중요하다. 특정한 앎의 기준에 종속되어 있을 때 배움은 아직 앎에 못 미친 것, 지양해야 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을 더 근본적인 조건으로 두면 앎이야말로 배움의 잠정적 단계들, 수단들이 된다. 가장 큰 틀에서 나의 제안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식론적 질문이지만 후자는 인식·실천·미학의 경계를 무화하는 질문이다. 앎을 통해 배움들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들을 통해 앎을 수정해야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뭍에서 수영하는 올바른 자세를 시연하는 사람은 참된 스승이 아니다. 오직 물결을 함께 해쳐 나가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많은 집회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가 울려 퍼졌는데, 집회 현장에서 듣는 그 노래는 ‘운동’의 감각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내가 중학교 때 많이 들었던―멜로디와 가사의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했다. 나는 작년 923 기후정의 행진에서 그 노래에 맞춰 친구들과 춤을 췄는데, 비록 내가 춤을 너무 못 추는 나뭇가지이긴 해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오늘날 현실 정치가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되어가고 있다면, 반대로 팬덤 문화에서 모종의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특히 북미에서 BTS의 공식 팬클럽 ‘아미’가 정치적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7 최근 아르헨티나의 BTS 팬클럽은 자국의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와 강하게 대립하면서 다른 팬덤이나 야권 정치인과 연대하기도 했는데, 이런 연대를 촉발한 것은 밀레이가 트위터에 올린 BTS 비하(인종차별적 뉘앙스가 담긴) 발언이었다.38

매력의 경제 그리고 배움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문학적 사례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문단에서 많은 비평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소설의 ‘정치성’과 ‘미학성’에 대한 논쟁을 재점화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음의 두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로, 어떤 행위자들의 어떤 말과 행동이 그 작품에 대한 대중적 주목도를 끌어올렸으며, 그 책을 둘러싸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어떤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가? 고(故) 노회찬 의원이 그 책에 대해 남긴 메시지가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레드벨벳의 아이린과 배우 서지혜가 SNS에 그 책을 읽었다고 인증했다가 심한 악플 세례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화화 후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는 ‘#82년생김지영홧팅’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 영화에 대한 응원이 쏟아지기도 했다.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둘째 문제는, 여러 계기로 그 소설을 읽게 된 수많은 독자가―한국의 정치적 지형과 성차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사회 분위기, 비평적 논쟁, 사회적 논란, 반페미니즘적 비난들과 분리할 수 없는―독서 경험 속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이다. 아직 확실히 말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첫 번째 문제는 작품을 접하거나 그것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여러 문화적 자극(홍보, 입소문, 인플루언서의 추천, SNS에서의 논란 등)과 독자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문화기술지적 접근을 허용할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그러한 문화기술지를 수용하면서도, ‘우리가 작품에서 배운 것’에 대한 비평적 탐구의 가능성을 보존할 것이다. 배움의 운동은 매력을 통해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초과한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않았다 해도 매력, 배움, 실망 등의 개념들로 읽어볼 수 있는 많은 작품이 있다. 내가 여러 번 다룬 손보미의 작품들이 그렇고, 예소연이 최근에 쓴 연작소설들39도 그러하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40 같은 작품도 그러하다. 이들을 비롯해 지금 성장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혹은 휘말릴 수 있는) 성장/도야의 방식들을 예증한다. 이런 소설들에서 우리는 니체적이라고 할만한, 약간 광적이고 ‘귀족적’인 가치전도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자기 입법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보편 이성’이 아니라 삶의 시련들―배우는 자를 광기로 몰아가는 시련들―을 통과한 자의 자기 확신이며, 이 확신이 배우는 자에게 지배적인 가치와 도덕을 괄시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들은 배움이 안온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배움의 과정은 동시에 실존적 상처의 치유와 관련된다.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를 통해 인물을 짓누르던 지배적 가치들은 무의미해지고, 무가치한 시간, 유예된 젊음, 허송세월, 외롭고 비참한 순간들, 자신을 상처 입힌 진실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치유는 고통을 억압하고 적대를 숨기는 ‘치유 이데올로기’와 반대되는 것이다. 성장소설들은 우리 자신의 실존적 상처가 얼마나 많은 타자와 연루되어있는지, 얼마나 많은 폭력과 연루되어있는지 드러내는데, 이 드러냄의 과정이 곧 치유이다. 이러한 연루됨 없이는―특정한 앎의 축적은 있을 수 있어도―배움은 있을 수 없다.

잠깐 곁길로 새자면 내가 통계적으로 속한 세대(소위 MZ)의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애매한 위로가 아니라 진정한 치유이다. 즉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남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사세요’라는 위로의 말은 이미 상처받고 분열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중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나는 왜 남의 시선을 자꾸 신경 쓸까? 나는 왜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할까?’ 이런 죄의식은 쉽게 냉소나 원한으로 전치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성인식 의례(등용, 결혼, 취업, 육아, 정치활동, 공적인 발화 기회 등)는 점점 뒤로 늦춰지거나 불가능해지고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 어른으로 정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적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상태로 유예되고, 이중화된 형상으로―한편으로는 조숙하고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로, 한편으로는 다른 이를 보살피거나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로―재현된다. 역사적으로 성장소설은 이렇게 어른도 아이도 아닌 ‘미성년 상태’41를 배움의 주체적 가능성으로 취해왔으며, 우리가 방황하거나 허송세월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정말로 중요한 배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배움이 있었음을 증언해왔다. 배움의 이론은 이러한 증언을 집단적·시대적 수준에서 보호하고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주어진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되느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단지 재현되는 대상, 통계적 분류의 대상일 것이다. 이러한 재현/대표, 통계적 분류들―이를테면 ‘이찍남’ ‘일찍녀’―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러한 재현을 통해서는 기성 권력의 재현적 틀을 공고히 하는 갈등과 반목, 분열이 끝없이 깊어질 뿐이다.

‘세대와 배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내가 다시 다뤄보고 싶은 주제는 나 자신을 비롯해 젊은 남성들의 페미니즘적 배움에 대한 것이다.42 이미 많은 사람이 다룬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논할 수 없었는데, 매력과 배움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 선행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후에 그 문제를 별개의 글로 다루겠다.

마지막으로, 실망은 매력만큼 중요하게 이야기될 가치가 있다. (그런 이론을 정말로 구성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배움의 이론의 윤리성과 정직성을 담보하는 것은 매혹보다는 실망의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실망의 공동체’가 우리를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고, 모든 갈등이나 적대가 사라진 유토피아라는 환상을 품게 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강한 정치적 조직화를 허용하는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력에 대한 충분한 고찰을 한 다음에야 실망을 논할 수 있다는, 그렇게 차례를 지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매혹되기도 전에 실망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배우는 자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이다. 매력은 우리를 휘어잡는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를 예속한다. 그러나 매력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매혹이 실망으로 끝날지라도, 매혹과 실망을 통해 우리가 얻은 배움은 허상이 아니다. 하지만 배움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쓰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지 못한다.

  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219. ↩︎
  2.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5. p. 198. ‘파토스적’이라고 번역된 pathologique를 ‘병적인’으로 수정했. ↩︎
  3.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문장웹진》, 2022년 2월호. ↩︎
  4. 안희제, 『망설이는 사랑―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오월의봄, 2023, pp. 38~40 참조. 이 책은 ‘덕질’의 경험 속에서 아이돌 팬들이 어떤 매혹과 실망을 경험하고, 윤리적 고민과 자기 배려를 하는지 알려준다. 이 책은 ‘매혹의 네트워크’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조사이기도 하다. ↩︎
  5.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
  6. 칸트, 『판단력비판』, pp. 218~19. ↩︎
  7.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년 하반기호, pp. 102~09. ↩︎
  8.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pp. 191~92. ↩︎
  9.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p. 47~50 참조. ↩︎
  10. 한편으로 이 주장이 모든 비판적 가르침/교육법pedagogy을 ‘배타적’으로 거부하면서 배움의 다양성과 수평성을 상찬하는, 듣기 좋은(기만적인) 소리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듣기 좋은 주장은 또한 비평에 어떤 급진적인 변화와 그에 따르는 대가에 대한 엄격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배움과 비판 사이에 ‘배타적 이분법’을 설정하지 않았다. 일전의 글(「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에서 나의 진단은 단순히 비판이 너무 약해져서 강해져야 한다거나, 너무 지나치므로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진단은 “‘비판이야말로 정당하고 엄정한 방법’이라는 식의 전제가 많이 약화됨에 따라 그것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게”(p. 92)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배움을 말하는 것은, 누차 강조했듯 어떤 의미에서든 비판을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침체되고 관습화되어 힘을 잃거나, 왜곡되어 범람하는 비판이 배움을 통해 적실성을 얻고 활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판은 비판을 통해 긍정될 수 없고 배움을 통해 긍정될 수 있다”(p. 107). 다만 나는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근거로 배움을 내세웠으므로 어떤 비판적 문법이 관습화되어 배움을 경색시키는 경우라면 그 비판적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
  11. 손보미, 『작은 동네』, 문학과지성사, 2020, pp. 115~16, pp. 116~17. ↩︎
  12. John Terrizzi Jr, NAtalie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Does Shame Emerge From an Evolved Disease-Avoidance Architecture?” Front. Behav. Neurosci, 14, 2020 참조. ↩︎
  13.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참조. ↩︎
  14. Simone Schnall, Jonathan Haidt, Gerald Clore and Alexander Jordan, “Disgust as embodied moral judgment”, Pers Soc Psychol Bull. 34(8), pp. 1096–1109 참조. ↩︎
  15. J. Terrizzi Jr, N.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p. 2에서 인용한 폴 길버트Paul Gilbert의 주장. 물론 매력적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진화된 ‘본능’일지라도,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다. ↩︎
  16. 따라서 소수자는 특히 수치심에 취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인상적인 글로는 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퀴어 부정성과 시각문화』, SeMA, 2023의 「들어가며: ‘젠더 문제’」(pp. 7~15)와 「슬픈 퀴어 초상」(pp. 17~43) 참조. ↩︎
  17. 이 문제에 대한 생각에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가 많은 도움을 줬다. 아마 매력의 경제는 ‘생명 정치’와 다르면서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 같다. 푸코에게 생명 정치는 국가가 보건과 건강을 이유로―발전한 근대 의학과 촘촘한 사회 기반 네트워크,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인구’ 전체를 통치 대상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심세광·전혜리 옮김, 난장, 2012 참조). 매력의 경제는 그러한 안정적 관리를 넘어―특히 발전한 인터넷망과 SNS를 통해―어떤 존재/콘텐츠가 문화에 더 많이, 더 쉽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고, 그러한 기준에 맞는 기호들의 가속화된 소비와 생산, 변덕스러운 투자를 부추긴다. 이러한 경향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전시하는 알고리즘과 그것을 활용하는 플랫폼들, 신체와 관련된 산업 복합체(성형, 피트니스, 콘텐츠, 식품 산업 등)과 체계적으로 관련된다. ↩︎
  18. 이희우,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pp. 120~38 참조. ↩︎
  19. 질 들뢰즈, 「작품으로서의 삶」, 『대담』, 신지영 옮김, 갈무리, 2023, p. 185. ↩︎
  20.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매력을 둘로 나눈다는 이 과제가 번역상의 모호함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가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미셸 페어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다.
    한국에서 “매력 자본”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이다(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이런 개념들이 지금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기묘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여러 자극과 관심이 분화되지 않은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개념 자체에 체계화될 수 없는 모호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21. 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서창현 옮김,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pp. 21~35 참조. ↩︎
  22. 하지만 두 매력 사이의 번역이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젊은 화가는 당장 감각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회화 작품을 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매력적인 투자 상품이 되려면―예술가 자신의 자기 홍보, 다른 예술가나 기관들과의 네트워크 형성, 평론가들의 평가, 전시와 경매 이력, 구매자들의 입소문 등을 거쳐야 하기에―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반드시 그렇게 번역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
  23. 미셸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페어의 논지와 ‘피투자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피투자자의 시간』의 역자이자 사회학 연구자인 조민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페어의 주장은 명쾌하고 유익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음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할지라도, 무엇이 그러한 저항을 ‘욕망’하게 하는지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우리에게 단지 투자나 자기 홍보를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하는가? 무엇이 매력의 지배적인 기준을 갈급하게 좇기보다 그 기준에 저항하기를 욕망하게 하는가? 한마디로 어떤 과정, 어떤 사건, 어떤 마주침이 우리에게 그러한 저항적 주체성을 부여하는가? ↩︎
  24. 미셸 페어,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욕망」, 조민서 옮김, 『문학과사회』, 2023년 봄호, pp. 358-81. ↩︎
  25.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p.56. ↩︎
  26.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참조). 그런데 사실 장르의 문법들을 결정하는 상위의 메타장르는 존재한다. 그것은 금융자본주의이고, 나는 매력의 경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다. ↩︎
  27.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되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이기 이전에 정동적인데, 이런 정동적 차원을 배움·교양의 동시대적 조건으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지식인에게는 그런 감정에 휩쓸린 사람들이 ‘반지성주의’에 빠진 바보들이나 괴물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바로 그 ‘야만적’인 차원 속에서 다른 배움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느냐이다. ↩︎
  28. 『판단력비판』, 백종현의 56번 역주(p. 218) 참조. ↩︎
  29.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
  30. 같은 책, p. 66, p. 67. ↩︎
  31. 알렌카 주판치치, 『왓 이즈 섹스?』, 김남이 옮김, 여이연, 2021, 특히 3장(pp. 72~143) 참조. ↩︎
  32.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73. ↩︎
  33. 질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
  34. 들뢰즈, 『차이와 반복』, p. 72. ↩︎
  35.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3, p. 50. ↩︎
  36. 칸트, 『판단력비판』, pp. 275~77 참조. ↩︎
  37. 김영화 기자, 「전 세계 풀뿌리 운동 에너지원 BTS 팬덤 ‘아미 액티비즘’」, 시사IN, 2022.08.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128 ↩︎
  38. 조성호 기자, 「BTS·테일러 스위프트 팬, ‘아르헨의 트럼프’ 집중포화」, 조선일보, 2023.10.31.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mideast-africa-latin/2023/10/31/TDUXWIPG2BCPDJMOMZ3RHK4OZ4/ ↩︎
  39. 예소연, 「아주 사소한 시절」, 『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4~80; 「우리는 계절마다」,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pp. 308~28. ↩︎
  40.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pp. 273~312. ↩︎
  41.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 대립시켰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 28 참조. ↩︎
  42. 나는 지금으로부터 칠여 년 전에「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의 진단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모순(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에서 기인한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성의 특정한 환상―즉 여성혐오―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불거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젊은 남성들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을 대안으로 주장했다. 그 글은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법을 과장되게 모방하고 있는데, 현재 나는 그런 이데올로기적·구조적 분석보다 집단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배움들에 더 관심이 있다. 이휘웅,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 《월간 틀》, 2017년 11월호. ↩︎

장르와 수동성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한 노트

*웹진 《믿미》에 발표한 「수동성과 장르의 폭발」(2022. 9)을 소폭 수정하여 옮김.
https://artsoonhwanro.com/?p=3190

1.

인도 출신의 작가이자 저술가인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근대 소설의 역사 전체를 ‘인류세’ 혹은 ‘홀로세(Holocene)’와 관련해 매우 대범하게 분석한다. 고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규범이나 개연성(있을 법함, probable)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홀로세의 기후 안정성, 자연을 예측·계량·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서구 근대적 사고방식을 전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 소설은 “인간 문명을 꽃피우게 한 시기―즉 홀로세―에 누린 기후 안정성을 토대로 구축”되었으며 “부르주아적 질서의 현실 안주와 자신감”을 동력으로 발전했고, “자연을 온건하고 질서 정연한 것으로 가정”하는 “‘근대적’ 세계관”을 전제하는 것이었다.1

고시의 글쓰기는 다채로운 맥락들을 흥미진진하게 누비면서 이리저리 비약하기도 하지만, 그 책의 1부를 꼼꼼하게 읽은 독자는 선명하게 나뉜 두 개의 계열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적이고 근대적인 ‘순수 소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인간적이고 비주류적인 ‘장르 소설’이 있다. 즉 ‘근대 소설-순수 소설-개연성-인간 중심주의-서구 중심주의-부르주아적 질서-연속성-유한성’의 계열이 있고, 반대편에 ‘장르 소설-비주류 영역-비인간-비서구-불연속성-언캐니(uncanny)의 계열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이렇게 이분화된 계열이 전제되어 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비인간을 다룬 글이 쓰이고는 있지만, 그것은 순수 소설이라는 대저택 내에서가 아니라 추방당한 공상과학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등이 기거하는 비주류 영역에서다.”2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비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외적인 작품들은 근대 소설의 대저택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물론 고시가 옹호하는 것은 후자의 계열이다.

서구 근대 소설의 역사와 인류세, 인간 중심주의를 연관 지어 사고하는 고시의 도발적인 주장은 시사점이 많다. 하지만 위의 단순한 이분법에 여러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의문은 이 구분으로 포착할 수 없는 문학작품이 많다는 데서 온다.

이를테면 이시구로의 소설은 위의 이분법적 구분을 가로지르는 예다. 이시구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근대 소설의 전통적인 규범에 충실한 작가다. 고시의 말마따나 그것은 연속성과 유한성, 예측 가능성을 전제하는 서구 근대 소설의 보수적인 규범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에서 과도한 사실성, 개연성,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들, 복제 인간이나 인공 친구(artificial friend, AF)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가장 외부자적인 인물들, 예외적인 존재들, 비인간들이 친숙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존재들이 괴이하고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너무 친숙하고 평범해서 ‘언캐니’하다.

‘언캐니’는 하이데거나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영어로 옮긴 것으로, 한국어로는 ‘친밀한 낯섦’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 기이한 감각은 너무 낯설기만 하거나 익숙하기만 한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문득 낯설게 행동할 때, 혹은 낯선 존재가 갑자기 너무 익숙하게 다가올 때 느껴지는 소름 돋는 감각이 ‘언캐니’다.

따라서 ‘언캐니’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익숙한 것이 너무 낯설어지는 방향이다. 예를 들어 인간인 화자가 벌레가 되는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방향이다. 둘째는 낯선 것이 과도하게 친밀해지는 방향으로, 『나를 보내지 마』가 복제 인간을 그리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은 비인간 존재를 인간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 자체가 폭발하는 것 같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특질과 관념 전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시구로의 소설은 장르적 요소와 설정을 ‘순수 소설’의 문법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순수 소설의 관념이 폭발하는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근대 소설’, ‘순수 소설’ 자체가 순수 혈통이 기거하고 높은 벽으로 담을 지은 대저택이 아니라 이미 장르들의 복합체와 혼종체(hybrid)로 가득한 오래된 숲이라는 것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온갖 장르적 성분들로 직조한 얼룩덜룩한 직물이다. 이 직물 속에서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의 경계는 전혀 뚜렷하지 않다. 사실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동적으로 교류하고, 경쟁하고, 명멸하는 장르들의 생태계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프레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고시의 주장에 대해 드는 두 번째 의문은 ‘근대 소설’이라는 범주 자체가 따져 보면 일관성이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가령 카프카는 서구 근대 소설사에서 기념비적인 중요성을 부여받은 작가이지만, 그의 소설은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성을 보여주고, 비약적이며, 『프랑켄슈타인』 못지않게 ‘언캐니’하다. 동시에 카프카의 스타일은 차용·모방·패러디 가능한 문법화된 장르로 자리 잡았다(이시구로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카프카적 스타일도 차용·모방·오마주 가능한 문법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복제 인간의 클리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르적 성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를 따라 말하자면, 카프카의 작품이 갖는 생성(becoming)의 힘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재현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역사적 재현은 항상 어떤 작품에 고정된 위상, 가치, 범주, 스타일을 부여하려 하지만 작품이 갖는 생성의 힘은 가능한 한 그러한 고정성을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도 그것의 위상과 이름과 역사적 분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문학 텍스트가 갖는 생성의 힘, 지금 우리에게 생생하게 말을 거는 그 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은 ‘근대 소설’이나 ‘주류 소설’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장르 소설’이나 ‘비주류 소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전복적 읽기가 둘 사이의 낡은 위계적 이분법을 역설적으로 보존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재현적 범주를 뒤집기는 해도 그 낡은 범주의 경계를 해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낡은 이분법은 동시대 독자들의 독서 경험과 이미 얼마간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장르 소설, 웹 소설, ‘순수 문학’을 가리지 않는 잡다한 독서 경험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끌리는 것을 선택해서 읽고, 작품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주류 문학과 비주류 문학을 나누는 구조적 차이들, 이데올로기들, 장치들이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을 없는 셈 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한 구분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우리의 독서 경험에 좀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표면적으로 보면 이시구로 소설의 궤적은 주인공들을 점점 더 철저하게 ‘고아’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 『우리가 고아였을 때』,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초·중기 소설에서는 평생 지켜온 가치관이 붕괴하고, 삶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는 인물들이 나온다. 어쨌든 그들은 인간이고, 인간인 만큼 부모가 존재한다. 초·중기 소설에서는 ‘부모’로 상징되는 법, 의미, 기억, 가치 등이 있었지만 산산조각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부모가 없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은 인간에게 장기 기증을 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할 운명이다.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아이를 돌보는 AF로서 한 아이를 위해 헌신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운명으로부터 불쑥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전 소설들의 주인공이 실존적으로 고아가 되어간다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이미 고아다.3 초·중기 소설의 목적지였던 곳이 최근 소설에서는 출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초·중기 소설에서 인간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충실했으나 자신의 신념에 배반당하고, 자신의 삶이 부정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파괴되고 공허해진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초·중기 소설에는 패턴처럼 반복되는 인식의 변화가 있다. 처음에 인물들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상황에 수동적으로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사실을 뼈아프게 알게 된다. 그런데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수동성을 기본값처럼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궤적을 염두에 두면 이시구로의 소설이 점점 더 소수적인 존재 혹은 체제의 외부자(outsider)에 주목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시구로는 자기 소설의 인물들이 외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수(major)’에 속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제 소설의 인물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외부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 두 번째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은 그 사회와 그 세대에서 다수에 속하는 인물이고, 이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비극입니다. 그는 전쟁 중의 그 세대와 시기에서 외부에 서 있을 만큼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조류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다소 이상한 공동체에 속해 있긴 하지만, 그 공동체의 대다수에 속하고, 공동체의 외부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주어진 일에 매우 수동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상황의 외부에 서 있지 못합니다.”4 여기서 우리는 소수와 다수에 대한 전도된 이해를 본다. 대다수 사람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자신의 계급과 처지를 받아들이고, 체제와 규범에 맞추어 살아간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극소수다. 그렇기에 극도로 수동적인 존재를 그림으로써 우리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 예외 상태가 곧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 “헐벗은 생명”(아감벤)이 모든 생명의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가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중요한 점은 그들이 반항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기[기증] 때문에 도살되는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우리 대부분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원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은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사람들이 필멸적인 존재라는 것,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죽는다는 것,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5

이시구로의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우뚝 서서 세계와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그러한 근대적 주체의 삶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평범한 삶은 ‘세계-속의-삶’, 세계의 온갖 법칙과 변화에 수동적으로 영향받는 삶이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인물들을 놓고 누군가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기도 한다.6 그러나 이시구로의 소설들이 그려온 궤적을 보면, 소설이 일관되게 천착하는 것은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조건―혹은 생명 일반의 조건―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그 가혹한 조건의 메타포가 되는 것이 ‘고아’이다. 부모 없는 존재들, 타자의 처분에 수동적으로 내맡겨진 존재들,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들, 즉 복제 인간이나 AF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보여주는 형상으로 그려지면서 인간과 비인간, 장르 소설과 순수 소설의 경계가 폭파되고 익숙한 관념들이 낯설어진다. 가장 약하고, 비인간적이고, 장르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3.

사실 ‘수동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시구로의 소설은 정치적 무기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고, 주체적으로 체계를 변형시키고, 체제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그러한 태도 자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로 읽힐 수 있다. 이 수동성을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적 모순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한층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생태사회주의자인 제이슨 W. 무어는 근대의 자본주의 체제가 자연, 생명, 돌봄, 노동 등을 저렴하게 착취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7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인간 문명의 저변에서 생명과 돌봄에 드는 노동력을 순순히 착취당하듯이 근대 자본주의는 ‘자연(그리고 근대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동일시한 것들: 가령 여성, 유색인종, 동식물)’을 수동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으로 외부화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동적인 존재들, 즉 ‘자연’과 동일시된 존재들은 오랫동안 역사나 담론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수백 년간 밀어붙인 ‘발전’과 ‘성장’의 폐해를 마주하고 있다. 기후재난, 환경 오염, 에너지 고갈 등의 문제 말이다. 그런데 문제의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이시구로의 말처럼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오늘날 인간 존재는, 능동적으로 상황을 개척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당황하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을 닮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한편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존재와 상태를 깊이 사고해야 함이 마땅하다. 또 우리 자신이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 즉 생명의 그물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지구적인 문제에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입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가로지르고 해체해야 하는 것은 ‘능동성’과 ‘수동성’의 이분법 자체인지 모른다. 우리는 ‘자연’과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단독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인, 사물, 자연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체이자 혼성체이며,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페이션시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의 주목할만한 논문을 읽었다.8 그 논문은 주체, 행위자, 능동성이 아니라 ‘페이션시(patiency)’, ‘감수자(感受者, patient)’, 수동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감수자’는 ‘행위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영향을 끼치기보다 영향을 받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논문의 저자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이론은 지나치게 ‘행위자 중심적’이었다. 행위자만큼이나 중요한 감수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행위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의 영향을 받는 존재도 반드시 있다는 점에서, 이 편향된 이론적 관심은 잘못된 것이다. 존재의 절반에만 이론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능동적 행위자를 주인공으로 여겨왔다. 사실 이 점은 ‘순수 소설’에서나 ‘장르 소설’에서나 거의 매한가지다. 보통 SF나 디스토피아 소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통쾌하게 성공하건, 비극적으로 실패하건, 적당히 타협하건 어쨌든 저항하려고 한다. 우리는 디스토피아적 배경에서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거나 주요한 인물로 나오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대를 배반하려는 듯이 이시구로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즉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인물들,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 인물들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인물들이 디스토피아 장르의 주인공이었던 경우가 많이 없었던 만큼 이시구로 소설의 주인공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수동성’을 무기력이나 패배주의로 읽는 것은 너무 단순한 독해일 테다. 그런 독해를 피하기 위해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타나는 ‘수동성의 주체성’을 간략히 짚어보려 한다.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이 말하듯이 수동성은 어떤 종류의 전도된 힘일 수 있다. 감수성도 하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감수성이야말로 ‘생성’과 ‘배움’, ‘접속’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고 열이 날 때 피부가 예민해지는 것처럼, 바람과 온도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는 약해질 때 동시에 강해지기도 한다. 이시구로 소설의 모든 인물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만, 그렇다고 그 인물들이 다 같은 의미를 띠는 인물들인 것은 아니다. 운명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듯, 수동성에도 여러 결이 있다. 특히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전적으로 순응적이지만,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보다 강해 보이기도 한다. 클라라는 환경을 예민하게 감응하고, 세계를 관찰하고 배운다. 자연 속에서 터전을 꾸리는 동물들처럼 목표를 설계하고, 끈질기고 기민하게 수행한다. 클라라가 세계를 배우는 방식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과정 그 자체다.

4.

“클라라,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매니저는 로사나 다른 에이에프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네.” 매니저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걸 알아야 해. 우리 매장은 아주 특별한 곳이야. 세상엔 너나 로사나 여기 다른 누구를 친구로 갖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이 아주 많아. 그 아이들은 너를 가질 수가 없어. 그래서 창으로 다가와서 너를 가졌으면 하는 꿈을 꾸는 거야. 그러다 보면 슬퍼지지.”
[……]
“그런 아이는, 에이에프가 없으니 틀림없이 외로울 거예요.”9

세계를 ‘배우는’ 클라라의 감수성 덕분에 소설 속 세계의 부조리한 전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독자는 초반부에서 극심한 빈부격차와 나빠진 날씨가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는 현재보다 더욱 완고해진 불평등이 그려진다. 아이들은 ‘향상’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로 나뉜다. 정확하게 그 과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향상’은 엄청난 비용과 부작용의 가능성을 무릅쓰는 것으로, 상류층 아이들에게만 가능한 과정인 것 같다. 또 대체로 명문대나 좋은 직장은 ‘향상’된 사람들만을 받아주고 있는 것 같다. 클라라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조시의 AF가 되어 조시와 ‘향상’되지 않은 옆집 아이 릭의 관계를 관찰한다. 릭은 향상되지 않은 상태로 대학에 진학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인다. 소꿉친구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한 조시와 릭은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 세계에 레지스탕스처럼 저항하는 세력이 있음이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암시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은 먼 배경으로 물러나―특이한 소수의 행위처럼―흐릿하게 암시될 뿐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가 사는 세계만큼이나 암울하고 냉정하다.

이렇게 암울한 세계를 클라라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기이하게도, 조시의 어머니는 클라라에게 조시를 모방하라고 명령한다. 클라라는 명령에 따라 조시를 따라한다. 이때 클라라가 지닌 뛰어난 감수성은 모방의 능력으로 변모한다.

“잘한다. 정말 잘해. 그러면 이제 움직여 보렴. 뭔가 해. 계속 조시인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 좀 보여 줘.”
나는 조시처럼 웃으며 구부정하고 편안한 자세를 했다.
“잘한다. 이제 무슨 말을 해 봐. 말 좀 들어 보자.”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아니. 그건 클라라잖아. 조시처럼.”
“안녕, 엄마. 나 조시야.”
“좋아. 더 해 봐. 어서.”
“안녕, 엄마.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맞지? 나 여기 왔는데 괜찮잖아.”10

‘어머니’가 조시를 따라 하라고 시키는 이유는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유는 나중에야 밝혀지는데, 어머니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병든 조시가 죽으면 클라라를 조시와 똑같이 생긴 장치에 옮겨 담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 조시 없이 살아갈 자신(조시를 애도할 자신)이 없기에 아이의 복제물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클라라는 조시를 훌륭하게 모방한다(이 얼마나 ‘언캐니’한 모습인가). 그러나 동시에 클라라는 이러한 수행이 결국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라라는 조시가 완쾌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시가 완쾌할 거라는 클라라의 확신은 맹신이나 광신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인다. AF는 햇빛을 양분 삼아 기동하는데, 클라라는 햇빛이 자신을 강하게 해주는 것처럼 조시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이 조시를 마음에 들어 하면 조시에게 기적을 베풀어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태양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클라라는 공해를 생산하는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태양의 마음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할 법한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태양에 말을 거는 클라라의 엉뚱한 수행 덕분인지 조시는 정말로 건강해진다.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AF의 ‘초지능’이 인간이 원리를 알지 못하는 기적 같은 일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클라라를 제외한 소설 속 인간들이 날씨가 생명과 건강에 미치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비인간 클라라만이 인간이 얼마나 주변 환경에 ‘영향받는’ 존재인지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 인과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므로, 클라라가 수행한 희생이 실질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실질적인 보상이 없는,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클라라의 헌신을 보여준다.

클라라가 조시의 건강을 위해 바치는 헌신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만큼 인과관계를 벗어난 주체적 행위처럼도 보인다. 인물들은 상황의 인과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클라라는 인과관계를 벗어나 정말로 무언가를 ‘한다’. 클라라는 조시를 위한다는 자신의 정해진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인간적인 정도의 순응성이 오히려 이상하게도 클라라를 주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클라라와 태양』은 수동과 능동의 구분 자체가 와해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클라라의 수행은 어머니와의 계약관계 속에서 수립되는 것이 아니다. AF에게 주입된,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는 원칙을 자의식 없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AF가 인간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고, 또 클라라가 매우 독특한 AF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클라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명령은 따르지 않고 거부하기도 한다. 게다가 클라라는 자신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아이 중 조시를 스스로 선택했다.

조시의 어머니가 클라라를 구매하면서 원했던 것은 클라라가 조시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조시가 죽은 후 클라라가 조시의 대리물로서 자기 옆에 있기를 바랐다. 자기 보존 욕망을 따른다면, 어머니의 바람대로 되는 편이 클라라에게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조시가 낫기를 바라고, 나을 거라고 확신하며, 조시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한다. 자신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헌신한다는 점에서 클라라의 생각과 행동은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에게 낯설다. 클라라가 수행하는 것은 누군가 알아주고 보상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희생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합리적인’ 인간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클라라와 태양』의 온갖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과 말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클라라의 확신과 희생뿐이다. 나머지 인간의 말과 행동은 상황의 인과관계 속에 붙잡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클라라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p. 442). 그러나 이것은 클라라의 겸손한 표현인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아주 특별한 무언가’로 만드는 것은 인간들―특히 부모자식 간의―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클라라 자신의 확신과 희생이다.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비인간 클라라의 삶 속에 특별함이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친밀한 낯섦을 지닌다면, 클라라는 인간과 비인간, 수동성과 능동성, 지혜와 어리석음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숭고함을 지닌다. 이 ‘숭고함’은 인간적인 것일까 비인간적인 것일까? 알 수 없다. 그것은 ‘숭고(sublime)’라는 말 그대로 낯설고 절대적이어서 상대적인 구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p. 35. ↩︎
  2. 같은 책, p. 95. ↩︎
  3. 박선주는 철저한 외부성인 동시에 인간의 근본 조건이기도 한 ‘고아’의 개념을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과 연결지어 자세히 분석한다. 다음 논문에서 박선주는 “인조인간이야말로 ‘고아’라는 정체성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온전히 전유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박선주, 「인조인간, “헐벗은 생명,” 포스트/휴머니즘: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카즈오 이시구로의 『날 보내지 말아줘』에 나타난 고아와 인간」, 《역사와 문화》, 24, 2012, pp. 129-152. ↩︎
  4. Sean Matthews “’I’m Sorry I Can’t Say More’: An Interview with Kazuo Ishiguro” Kazuo Ishiguro: Contemporary Critical Perspectives. Continuum: London and New York, 2009, p. 115. ↩︎
  5. lbid, p. 124. ↩︎
  6. 김남주 해설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2010, p. 306 참조. ↩︎
  7.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자본의 축적과 세계생태론』,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참조. ↩︎
  8. 김홍중·조민서, 「페이션시의 재발견―고프만과 부르디외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5(3), 2021, pp. 35-65. ↩︎
  9.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홍한별 옮김, 민음사, 2021, pp. 22-23. ↩︎
  10. 같은 책, pp. 159-160. ↩︎

거대한 바람과 접이식 지도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와의 대화 1부

1부: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피투자자라는 형상/매력의 경제학/『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2부: 기후-금융?/기후위기의 재현/기후정의 행진/기후우울증

희우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지요?

민서
네. 연초에는 독감 때문에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한결 낫네요. 우리가 평소에 얘기를 많이 하니까 이런 자리가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희우
예, 좀 낯설고 두근두근거리는 자리네요.
민서 씨는 작년 화제의(?) 책인 『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하기도 했고 여러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 중이시지요. 제가 사회자처럼 민서 씨 경력이나 이력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도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서
이런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 희우 씨는 제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분이고, 또 우리가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재밌는 얘기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런 대화가 좀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아직 학위 과정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소개하려면 뭔가 고정되어있어야 하는데, 저는 지금도 계속 흔들리면서 바뀌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라고 소개하는 게 아직 좀 어색한 것 같아요.

희우
그럼 이 얘기부터 해주세요. 어떤 걸 공부해오셨고 어떤 연구들을 하셨는지, 하고 있는지……

민서
네. 저는 학부 때부터 사회학을 전공해왔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사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전개되면서 이 모순이 위기로 표출되는 과정, 특히 이 과정에서 인간·비인간 존재들의 안정(security)이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정치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사회보장을 둘러싼 복지정치, 그리고 생태위기 시대 기후정치 쪽에 관심이 있어요. 둘 다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어떤 ‘보장’의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치와 관련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구요. 그 교차점에서 작년에 리시올 출판사에서 미셸 페어(Michel Feher)의『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했어요.

희우
먼저 석사 논문에서의 연구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해주실래요? 복지정치 관련해서…

민서
복지정치랑 관련해서는 서울시 청년수당,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어요. 소위 국가 경제에 기여해야 하는 주체로서의 청년이, 국가로부터 어떤 ‘돈’을 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과정을 본 건데요. 이런 정책들을 형성하고 집행하는 정치인, 공무원 같은 사람들, 당사자인 청년들, 운동가들,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이 ‘돈’의 도덕적·문화적인 의미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고 논쟁되는지 봐왔습니다.

희우
한 사안에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오신 것 같아요. 기후 관련 연구도 금융 쪽을 주로 보시지만 작년 기후정의행진에서 관계자로 일을 하시기도 했지요.

민서
네. 작년 923 기후정의행진의 경우에는, 행진 참가자들, 참가 단체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기획팀에서 담당했고요. 이것도 나중에 얘기를 더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923 기후정의행진은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기후 정치와 관련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 참여했던 사람들이 행진이라는 집합행동을 어떻게 경험하고 결산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데이터를 정리한 것이죠.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

희우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들어보기로 하고, 일단 번역하신 책에 대한 얘기부터 해봐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책을 번역하게 되셨는지,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어떠셨는지 얘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서
사실 제가 번역은 완전 처음 해봐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깨달은 것도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번역이 아니었다면 알기 힘들었을 것 같은 출판의 단계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식의 유통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충만한 경험이었어요.
책을 옮기게 된 계기는… 이 책에 재밌는 포인트들이 워낙 많지만, 저한테 가장 중요했던 지점은 이 책이 동시대 자본주의의 지형을, 금융화 이전의 자본주의와 대비하면서, 그 역사적 차이를 포착하는 개념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제공해준다는 점이었어요. 책의 목차를 보면 챕터별 소제목이 전부 A & B 식으로 짜여져있는데요.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A는 산업자본주의와 여기에 대한 정치에서 중요했거나 혹은 이걸 소묘하기 위한 개념들의 계열이고, B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에 대응합니다. 저자의 진단에 당연히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A와 B를 이렇게 각각 일관된 그림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읽어낸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A가 무효화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왜 B라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한지. 특히 제가 관심이 있었던 복지국가, 복지정치처럼, 누군가는 ‘진보’와 동일시하는 어떤 정치적 유산―구체적인 제도, 정치적 상상, 전제들―에 B라는 새로운 현실 인식이 어떤 과제들을 제기하는지를 사고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희우
저도 그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에게 재미있게 읽힐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왜냐면 책이 좀 어렵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제 주변에서 재밌게 읽었다고 하고 관심을 표하는 분들도 꽤 있었어요. 그 책을 2023년 ‘올해의 책’으로 꼽는 분들도 있었고……

민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말 너무너무 기뻤어요(웃음). 희우 씨 본인이나 주변 분들은 어떤 포인트를 좀 재미있게 읽으셨던 걸까요?

희우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꼼꼼히 읽을수록 논의가 정치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어요. 특히 제가 흥미로웠던 건 ‘인적자본’에 대해서 그 책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거예요. 국가가 생산하려 하는 인적자본의 형상이 유순하고 성실한 노동자였다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가로 변했다는 게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인데, 페어는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이 ‘기업가’보다는 ‘자산관리사’ 혹은 ‘피투자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좋은 점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개탄이나 푸념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어떤 전망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책의 내용에 대해 좀 얘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먼저 책이 어렵기도 하고, 여러 가지 논의가 다층적으로 돼 있으니까 번역자로서 책 요지를 간단히 안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민서
간단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먼저 책 제목에서부터 출발해 보자면요.
제목에서 “피투자자(investee)”라는 건 투자를 당하는 자, 그러니까 투자를 받는 존재죠. 이 ‘피투자자’라는 형상을 이해하기에 앞서 부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국어 부제를 ‘금융자본주의 시대 새로운 주체성과 대항 투기’라고 옮겼어요. 금융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시대에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 주체성에 근거해서 금융자본주의에 맞서는 어떤 식의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항 투기’라 불리는 전략을 제안하는 거죠. 한국어 부제는 제가 이렇게 달았습니다만, 여기 차마 넣지 못한 프랑스어 부제도 중요합니다. 프랑스어 부제(“Essai sur la nouvelle question sociale”)는 직역하면 “새로운 사회 문제에 대한 에세이”인데요. 여기서 ‘사회 문제’라는 말을 조금 설명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사회 문제라고 생각하면 빈곤, 범죄, 고령화, 환경 문제 같이 사회적으로 problematic한 문제들, 해결을 요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이 말하는 사회 문제는 social problem이 아니라 ‘social question’이에요. question도, problem도 우리말로 ‘문제’로 옮겨질 때가 많은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게 다소 차이가 있어요. question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뚜렷한 답은 없지만 계속해서 잠정적인 해답(answer)만이 조금씩 나올 수 있을 뿐인 ‘질문’이고, problem은 1+1은 뭐냐, x+1 = 2에서 x는 뭐냐는 것처럼, 구체적인 해(solution), 어떤 ‘솔루션’을 통해 해소,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과제’에 가까운 것이죠. social question이라고 했을 때 서구권에서 많이 얘기하는 맥락은, 자본주의가 모종의 문제/질문(question)을 낸다는 거예요.
그 질문이 뭐냐면,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상정하지만, 우리는 모두 현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평등과 자유’의 의미가 얼마나 굴절되어 협애하게 나타나는지 알고 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는 결국 우리의 노동력을 거래할 자유이고, 우리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고요. 헌법이나 인권 선언 같은 텍스트에서 이야기하는 이 자유의 이념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양극화니 ‘~계급론’ 같은 말들에 담겨있듯이, 극단적인 불평등 앞에서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지지요. 곧 이런 형식적인 평등과 내용적인 불평등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게 social question, 사회 문제인 것이죠.

희우
그렇군요. 요지를 정리해보자면 ‘사회 문제’란 일종의 자유주의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런 괴리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이죠.

민서
그렇죠. 그게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회 문제’의 통상적인 용법이에요.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오는 과정,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고, 이 과정에서 착취가 발생하고… 그런데 페어는 이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던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바라보았던 틀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회 문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제기된다고 보는 거죠.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적대는 자본과 노동, 페어의 표현대로라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적대였어요. 그렇다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적대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했을 때, 투자자랑 피투자자라는 것이죠.
피투자자가 누군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거는 투자를 받기 위해 자기를 어필해야 하는 존재들, 가령 스타트업 창업자를 떠올릴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스타트업 창업자만 그런 게 아니고, 따지고 보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우리 둘도 그렇고, 예술가와 연구자들도 끊임없이 자기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유망하고 의미가 있는지 증명해서 그걸 잠재적인 후원자들(국가가 될 수도 있고 문화재단이 될 수도 있고 학술진흥재단이 될 수도 있는)에게서 크레딧을 확보해서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과 동반되는 어떤 매력도와 평판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들인 거죠.
그래서 ‘매력도’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 신용의 흐름을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도 피투자자고, 예술가와 연구자뿐만 아니라 플랫폼에서 뭘 파는 사람들, 당근마켓이건 에어비앤비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과 주목의 흐름을 유인해야 하는 사람들도 피투자자죠. 투자를 받기 위해 주가를 관리하는 기업, 채권을 발행해서 재정을 운용하기 위해 국가 신용도를 관리하는 국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페어는 등급 평가를 당하고 투자를 당하는 존재 일반, 즉 개인과 국가, 가계, 기업을 모두 아우르는 어떤 주체성이 ‘피투자자’라는 거죠. 그게 이제 새로운 사회 문제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겠죠.

희우
네. 정리 감사합니다.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논지가 과거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있었던 사회 문제의 전선이 이제 투자자와 피투자자 사이로 옮겨온다는 것이고, 그래서 페어는 그런 과거와 현재의 ‘유비 관계’ 속에서 계속 논의를 진행하잖아요. 이 유비 관계가 좀 흥미롭습니다.
과거의 노동운동에서, 피고용인들도 자신을 ‘자유로운 노동자’로 정체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위치를 투쟁을 위해서 전유했다는 것이죠. 이중의 전략이 있었다는 거죠. 그와 똑같은 형식으로, 사실 우리가 자유롭게 투자를 하거나 받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이렇게 주어진(소여所與된) 피투자자의 조건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이 페어의 전제인 것 같습니다.

민서
네. 이걸 책에 수록된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문학과사회』작년 봄호에 페어 글에 대한 해설로 수록한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짚었는데요. 사실 그 전략, 소여 혹은 주어진 것을 전유해서 정치에 활용한다는 발상은 미셸 페어 자신의 발상이라기보다는 페어가 참조하는 미셸 푸코의 권력론에서 온다고 볼 수 있어요. 푸코에게 권력은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하고, 억압하고 금지하는 권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게끔, 주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면서 작동되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억압적인 권력의 전범으로 생각하는 게 감옥, 군대, 학교 이런 곳일 텐데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감옥, 군대, 학교 같은 권력의 장치들이 그 장치에 입장한 주체들에게 어떤 역능을 함양한다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는 제식을 훈련시키고,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는 40분 동안, 중학교 때는 45분, 고등학교 때는 50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게 훈련시키는 등.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집중하게끔 만드는 그 훈련이 억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써 우리는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특정한 과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역능을 배양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체제에 입장한 신민들이 권력에 예속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자유와 의지를―비록 권력에 의해서 내면화되는 거긴 하지만―행사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 그게 푸코가 말하는 주체론이지요. 그 함의는, 주체가 되기 위해 내면화했던 권력의 작동 양식이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의 대전제를 어떤 식으로 전유하고 활용한다는 것.
페어는 이걸 통치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인간학(moral anthropology)’이라고 표현합니다(책 본문에는 없고 제가 했던 인터뷰 부분에 나와요). 그 도덕적 인간학이 산업 자본주의하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죠. 그 자유는 물론 아주 기만적인 자유죠. 자본의 착취를 가능케 하는 어떤 형식적 전제니까요. 즉 판매할 것이 노동력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 자유란 그 자유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니까요. 가진 게 노동력밖에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대면할 때 한 가지 가능한 선택지는 이런 거죠. ‘너희가 말하는 자유는 기만이고 허구야! 말도 안 되는 거고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교설이고 협잡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노동운동가들은 그런 ‘자유’의 위선을 비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일정하게 활용했다는 거예요.
고용주들이 처음에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주려고 카르텔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노동력 상품에 대한 가격을 집단적으로 내려치기를 하죠. 거기에 맞서 노동자들은 개인의 노동을 노동력 상품으로 성립시키고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하는 어떤 인간의 조건, 즉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통치의 조건을 거부하기보다는 이게 ‘맞다고 치고’ 파업이라는 집합적 행동을 통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교섭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했다는 거지요. 우리 노동력 상품을 개별적으로 거래할 ‘자유’를 가진 모든 개인이 연합해서 특정 임금, 특정 노동 조건을 보장하지 않는 작업장에 가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집단적인 협상을 벌였죠. 여기서 이제 복지국가도 나오고, 노동계급 정당도 나오고, 일련의 ‘진보 정치’라고 부르는 세력들이 성취했던 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페어가 던지는 물음은, 이렇게 통치의 전제가 되는 인간학, 즉 ‘인간이란 이러한 존재다’라는 조건을 전유하는 전략을 지금 시대에 해본다면 어떨까, 하는 거죠. 왜냐면 이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연합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걸 기반으로 협상했던 전략이 이른바 금융화 그리고 신자유주의화 이후에는 굉장히 불안정하게 돼버렸거든요.
첫 번째로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자본이 언제든지 노동력 가격이 싼 데로 옮겨갈 수 있게 됐죠. 그리고 두 번째는 (산업자본주의 같은 경우에는 제조업 기업들이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고 그걸 팔아서 어떤 산업적인 수익을 거둔 후 다시 재투자하고 이런 식의 모델이었다면) 지금은 단기적인 측면에서 주가 관리가 굉장히 중요해져 버렸고, 이걸 위해서는 소위 노무비용 절감이라 불리는, 임금으로 나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임금 수준도 조절하고, 고용 규모도 ‘유연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거든요.

희우
그러니까 경제가 금융화·세계화되면서 주주가치를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경영 관행에 맞서서, 노동자들이 ‘전유’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고 협상력이 약해졌다는 것이지요?

민서
그렇죠. 이 모든 과정에서 결국 노동조합들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빠르게 자금 투자와 투자 철회를 통해 작동하는 금융의 권력에 대적하기 힘들어졌다는 거예요. 과거엔 고용인-피고용인이라는 양자 관계였는데, 외부에서 주주(shareholder)라는 존재, 회사의 내부자가 아니지만 몫(share)의 담지자(holder)로 여겨지는 주주의 입맛에 맞게 경영이 돌아가게 됨으로써 피고용인이 고용인에게, 노동이 자본 측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에요.
즉 이때까지 진보 정치가 상정하고 활용하고 전유했던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조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돼버렸고, 그게 아니면 뭘까, 그 답이 페어가 볼 때는 ‘피투자자라는 조건을 활용할 수 있다’ 이게 책 1장의 논지라고 할 수 있겠어요. 1장이 기업 내부의 정치, 즉 기업 거버넌스가 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권력에 의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2장은 일국적 차원의 경제 조절과 사회보장을 성취했던 국가적 수준의 복지자본주의와 같은 기획이 어떻게 채권자와 투자자라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행위자들에 의해 제약되는지를 다루고 있구요.

피투자자라는 형상

민서
희우 씨는 ‘피투자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어떤 형상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우리 주변에서 이 개념을 가지고 조명할 수 있는 대상들이 있다면……

희우
실제로 페어도 그런 예를 들지만, 제 주변에 지원금을 받기 위해 지원서를 쓰는 젊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많아서요, 저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나네요.

민서
그렇지요. 펀딩을 끌어오려는 존재들, 그러기 위해서 포트폴리오를 짜고 관리하는 사람들. 자기 작업한 것부터 세계관, 취향, 네트워크 등 자신을 구성하는 넓은 의미의 포트폴리오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책 3장에서는 이걸 하이퍼페이지라고 부르는데, 홈페이지일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 같은 걸 수도 있고. 특히 모종의 ‘작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웹페이지에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올리잖아요. 그러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미학적 능력, 취향, 세계관, 성과 등을 전시해서 주목을 끌고, 관심이 되었건 화폐가 되었건 모종의 자원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걸 어필하잖아요. 희우씨가 주요하게 밀고 있는 어휘로는 ‘매력’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거죠. 우리 말 ‘매력’에 대응하는 영단어는 charm, attraction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제가 “매력도”라고 옮긴 “attractiveness”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구요. 기업이든 예술가든 자금과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의 척도랄까요. 페어가 이 책을 쓰기 10년 전에 쓴 글이자 제가 《문학과 사회》에 번역했던 글(「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열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영어로는 이걸 “self-appreciation”이라고 부르고 한국어로는 제가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고 번역을 했어요.

희우
맞아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민서
재밌게 읽었다니 다행이네요. appreciation의 명사형이 appreciate인데 이게 고마워하다, 가치를 인정하다, 알아보다, 평가하다, 그리고 자동사로 쓰이면 ‘가치가 상승하다’라는 뜻도 있어요. 주가 상승을 stock appreciation이라고 하거든요. 여기 앞에 “self”가 붙으면 ‘자화자찬’ 이렇게 많이 번역되는데요. 이게 그러니까 우리가 SNS에서 내 작품이 이번에 나왔다, 하고 올릴 때 그것은 단순히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알리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수행적으로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거고 사람들이 내 걸 감상하게끔 주목을 집중시키고 관심과 반응을 이끌 수 있도록 게시물을 올리는 거잖아요. 플랫폼에서 자기를 마케팅하고, 자기가 맨션될 기회를 높이고 좋아요와 팔로워와 하트를 유인하는 존재들…… 책에서는 이런 존재들이 ‘평판 자본’을 축적하려 하고 그걸 축적한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획득하려고 한다고 분석하는데요. 작년에 나왔던 아이브의 <키치>라는 노래 가사가 이런 주체를 전범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SNS에 뭔가를 올리고 상대방의 알고리즘에 노출되고 평판이 올라가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전시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해서 그걸 통해 더 많은 자본과 주목을 수행적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식의 주체성을 표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희우
네. 저도 점점 그…… 광의의 ‘평판 자본’을 많이 신경 쓰게 되는 거 같은데요. 안 그러기가 힘든 것 같아요. 어쨌든 그건 확실히 제 관심사와도 연결되는 문제네요. 제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죠.
또 이 문제는, 아까 얘기했던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전제하는 ‘도덕적 인간학’과도 관련이 되는 듯해요. 페어 책에도 그런 내용이 있잖아요. 원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념적인 수준에서 목표로 했던 것은, ‘복지로 인해서 왜곡된 계몽주의의 혁명적 이상을 되살리는 것’이었다고요. 계몽은, 칸트의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타인에게 의존하는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잖아요. 칸트는 자신이 직접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의존하는 상태를 ‘미성년 상태’라고 하고 계몽을 거기에 대립시키죠. 또 칸트는 어른이 되고도 그런 미성년 상태에 안주하는 것에 개개인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신자유주의도, 적어도 이념적 수준에서는 어딘가에 의존하지 않는―권위에 의존하지 않지만 사회 부조에도 의존하지 않는―자유로운 주체들을 전제하고, 만약 우리가 계속 어딘가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나약하고 게으른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말하잖아요.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는, 이념적/이상적으로는 계몽주의의 이상과 비슷하게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자기 입법자’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자유는, 자유를 허용하는 합리적 체제에 대한 복종과 같은 의미죠. 한편으로 아이돌 가사에서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전시되는 주체는, 어떻게 보면 그런 계몽의 이상이 전도된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의존할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주체들인 것이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높게 평가하는 어떤 경제적 장에는 매여 있는……

민서
그렇죠. 자기 행동을 조직할 주권이 본인한테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결국 그 실천의 준칙은 주어진 매력의 경제라는 장 내에서 매력 상승을 담보해준다고 여겨지는 테크닉들로 국한되는 것이죠.

매력의 경제학

민서
여기서 희우 씨의 글 「매력의 경제학」과 좀 엮어서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이 책에서도 ‘매력도’ 얘기를 많이 하지만 매력은 남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잖아요.
희우 씨가 매력(魅力)의 ‘매(魅)’가 도깨비를 뜻한다고 하셨는데요. 매혹시키다, 내지는 매료시키다 할 때 그 ‘매’는 모종의 신비한 어떤 힘, 역능처럼도 보여져요.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끌려갈 때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거잖아요. 물리학에서도 attraction이 ‘끌개’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저는 이 매력이란 개념 자체가 굉장히 어떤…… 비표상적/비재현적 이론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힘, 소위 ‘정동적 전환’ 이후에 중요시되는 어떤 힘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희우 씨가 「매력의 경제학」에서 해석한 걸 보면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이라는 곳에서, 거의 처음으로 모종의 사회를 경험하는 주체들이 거기 입장했을 때 본능적으로 어떤 매력의 문법을 학습해 나가면서 그 학습을 바탕으로 매력의 기호를 학습하는 과정을 겪죠. 근데 그런 일이 교실이라는 어떤 원형적인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문인들과 예술가들도, 스타트업 창업주도, 기업들도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사실 요새 SNS에 자기의 매력을 전시하는 모든 존재가 그런 힘을 따라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비교질”이라고 사람들이 자조하는 어떤 등급 평가(rating) 문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고요. 저는 그 “매력의 경제학”에 ‘매력의 물리학’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어요. 매력은 상징적이거나 표상적이기만 한 힘이 아니니까요.

희우
맞아요. 근데 좀 부끄럽지만, 그 미숙한 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그 글을 쓰고 약 이 년이 지나는 동안 제 생각이 좀 더 정교화되고 바뀐 면이 있어요.
일단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고찰해보려면 근대미학을 좀 들여다봐야 해요. 칸트도 ‘매력Reiz’을 언급하는데, 매력은 대상이 우리한테 미치는 효과이고, 우리가 어떤 매력을 느낀다는 건 대상의 감각적 특징에 휘둘리고 좌우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칸트한테 매력은 야만적인, 미성숙한 관심인데요.1 칸트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매력(charme)이 대상에 노예처럼 종속된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관심이라고 말한 바 있어요.2
칸트 미학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조화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그건 대상의 역량이 아니라 순전히 주체의 역량이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 미학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칸트는 순수한 아름다움(주체의 역량)을 매력(대상의 역량)으로부터 정화시키고 분리하거든요. 칸트의 관심사는 인간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그리고 능력들 간의 관계니까요. 이게 결국 주체와 대상의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되는 문제죠.
아무튼 제 진단은,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같은 거는 너무 낯설고 희귀하고, 심지어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너무나 일상적이면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 상황을 칸트의 미학이나 계몽관, 교육학에 대입시켜 보면, 매력을 중요시하고 매력에 좌우되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근대적 감상자 혹은 계몽된 주체보다는 훨씬 ‘야만적’인……

민서
칸트 입장에서 보면 매력의 세계로 ‘퇴행’했다고 볼 수 있는……

희우
그렇죠. 그러니까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서 이성의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주체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칸트의 문법에 비추어보면, 동시대 문화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의 비근대적인 문화가 된다는 것이죠. 물론 저는 이 문화적 경향을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조건으로 경험하고 사고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근대 미학과 다른 미학을 써야 한다는 거죠.
문학작품의 사례로 얘기해 보자면,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교양소설 중 하나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계몽의 모순, 계몽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손보미를 포함해 최근의 젊은 작가들이 쓰고 있는 성장소설/교양소설은 ‘배움의 다면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6학년 담임은 아이들을 매질하면서 ‘너희들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촉구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불합리한 엄석대 체제에서 좀더 합리적인 선생의 체제로 옮겨가기 위해) 아이들은 일단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선생의 매질에 복종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손보미의 소설을 포함한 최근의 한국 성장소설들에서는 선생의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혹은 선생이 한 명의 어른이 아니라 수십 명의 어른아이들과 애늙은이들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 소설들에서 배움은 또래 집단 속의 수치심, 매혹, 실망, 상처, 분노 등의 정동적 경험을 거쳐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죠.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이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가를 감지하는 어떤 논리(제가 ‘매력의 경제’라 부르는 것)가 SNS에서의 전시나 피투자자로서의 가치 상승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경향을 그냥 비판하거나 분석하는 걸 넘어서 그 문화적 경향에서 어떤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보려면, 매력에 두 종류가 있음을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이게 제가 최근에 연구 중인 문제에요. 말하자면 표상적, 재현적 매력과 감각적, 정동적 매력이 있다고 할까요?
이게 또 한편으로는 번역의 모호성이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이를테면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 같은 사람이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페어가 말하는 ‘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어요. 또 한국에서 『매력 자본』3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인데요. 그 책의 논지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의 성적 매력 역시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지금 한국어에서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어요. 근데 또 이게, 어떻게 보면,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이상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앞서 얘기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감각적 자극, 성적 끌림, 도덕적 관심, 지적 관심, 미적 관심, 경제적 이해관심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잖아요.

민서
Erotic Capital이 “매력 자본”으로 옮겨진 건 ‘매력’의 원형적인 이미지가 성적인 범주로 이해되서 그런 걸까요? 여러모로 ‘매력’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생산적인 모호성이 있는 것 같네요.

희우
맞아요. 경험적 세계의, 지저분하게 얽혀 있는, 분화되지 않은 그런 힘인 거죠. 저는 매력의 경제가 정치적 관심, 지적 관심, 미학적 관심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아마도 이게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 계몽, 교양이 무력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매력을 두 종류로 나눠 보면 좀더 재밌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이 조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어요. 먼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SNS에서의 자기 전시나, 아니면 투자자들 사이의 평판 등으로 평가되는 매력은 이미 전달 가능하고 유통 가능한 방식으로 재현된 매력이지요. 그렇게, 어떤 추상적인 기호들로 전시될 수 있고 평가될 수 있는 매력이 있는 한편으로, 아까 민서 씨가 ‘매력의 물리학’이라고 말씀했듯 훨씬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의 매력이 또 있죠.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면 저는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는 힘이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자가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고 했던 그 보드리야르적 의미의 기호와 관련된다면 후자는 들뢰즈적 의미의 기호랑 관련이 있어요.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는 언어처럼 추상화된 기호뿐만 아니라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것까지 포함하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목재를 만질 때 느끼는 까칠까칠함이나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같은 것. 들뢰즈는 그런 것들도 나무가 내뿜는 기호라고 하는데요. 조각가나 목수가 되려면 그런 기호들을 해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잖아요.

민서
비언어적이고 비표상적인 그런 것들……

희우
그렇죠. 어떤 예술 작품, 특히 회화 작품 같은 것이 그 두 종류의 매력의 모호한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매력적인 회화의 표면은 한편으로는, 가령 화가 지망생들한테는 배움을 유인하는 강렬한 기호들로 가득한 것이죠. 화가 지망생은 표면에 겹겹이 쌓인 물감들의 층이라든지 뒤섞임이라든지 갈라짐 같은 것들을 지적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해독하면서 배우죠. 그런데 그렇게 매력적인 회화 작품은 많은 경우 투기 상품이 되잖아요.

민서
그렇죠. 이 그림은 뜰 거야, 하는 투기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게 매력에 대한 모종의 해석인 건지…

희우
하지만 그런 번역이 생각보다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젊은 화가는 당장 매력적인 회화를 생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되는 것은 작가의 자기 홍보(페어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 상승), 작가의 명성, 작가에 대한 평판, 경매된 이력, 비평가와 구매자, 투자자 들의 평가가 축적이 되고 난 이후니까요. 그래서 매력의 두 측면이 현실에서는 상호작용하고 변환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론적으로는 분리할 수 있고 분리하는 게 좋다는 거예요. 매력이 주체성에 미치는 효과를 사고하기 위해서 분리할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제가 「매력의 경제학」이라는 글을 쓸 때는 이런 생각들이 아직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매력이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논리, 재현 논리가 되었다는 비판과 매력이 어떤 비재현적인, 감각적인 배움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그 두 가지 논지가 섞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던 것 같아요.

민서
그렇네요.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중핵에 있는 매력과 거기서 우리가 되짚어 볼 수 있는 배움의 계기 내지는 배움의 절차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매력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느냐, 이 두 가지 문제가 섞여 있다는 얘기죠.
음, 저는 그 charm과 attractiveness의 구분이, 매력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와는 별개로 유용한 구분이라고 여겨지네요. 도식적으로 정리해보자면 attractiveness는 평판이나 어떤 고도의 상징적 기호들, 그리고 이제 그 기호들이 번역되고 유통되는 기호가치, 어떤 경제적인 재화로의 교환 가능성과 연결되는 매력이고, 또 다른 한편에는 비표상적이고 비언어적인 매력으로서 charm이 있다는 거네요. 마우리치오 랏자라또가 쓴 『기호와 기계』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보셨나요? 거기서도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를 구분하는데…

희우
맞아요! 읽어 봤습니다.

민서
그러니까 들뢰즈적 의미의 비표상적인, 상징화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육박해 오는, 그렇기 때문에 신비화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매력이 있는 거겠네요.

희우
그렇죠. 근데 그거를 어떻게 한국어로 나눠 부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칸트도 숭고를 얘기할 때 수학적 숭고랑 역학적 승고를 구분했어요. 매력에도 어떤 수식을 달아서 구분할 수 있을까요? 랏자라또처럼 기표적 매력과 비기표적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어떤 매력이든 평가되고, 소통 가능해지고, 수치화 가능하려면 기표적인 것으로 재현이 돼야만 하는 것이긴 하죠. 그렇지만 우리 삶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변화시키거나 하는 게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민서
말씀하신 예를 들어서 비표상적인 무언가가 떠오르더라도, 그걸 결국 시장에서 유통시키고 카탈로그를 만들고 비평을 하고, 또 콘텐츠를 큐레이션하고 이런 과정에서 그게 계속 상징화되고 기표가 될 텐데, 그거는 일종의 사후적인 프로세스인 거고 그 이전에 애초에 비기표적인 어떤 것이 왜 우리의 주목을 끄는가를 해명하려면 어떡해야 할지는 좀 생각해봐야 하겠네요. 표상 이전에 존재하는, 날 것의 힘들이 경합하는 세계…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힘의 시험(trial of strength) 같은 것도 떠오르구요. 저로서는, 희우 씨가 비평했던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서는 교실이라는 현장으로 표현됐고 우리 얘기에서는 SNS와 같이 거의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학습의 장이자 동시에 자기를 전시하는 전시장, 그런 세계를 분석할 때 이런 개념의 구분이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우
정확히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이자 산업적 논리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한편으로는 전시장이나 투기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교실이기도 한 것이죠. 우리는 자신의 가치평가를 높이려고 애쓰는 피투자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야만적’인,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상태’에 유예된 사춘기 학생들이기도 하다는 거죠.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것이 동시대 문화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지금은 모호한 가설 수준인 것이고, 이제 좀 연구를 해야겠지요. 그러면서 다른 분과들, 사회학이라든지 경제학 등으로 많이 확장하고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민서
『피투자자의 시간』을 우리 논제에 맞게 좀 과감하게 재해석을 해보자면(여기서부터는 옮긴이보다는 독자로서 말해보려 하는데), 그걸 ‘투자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업 경영, 국가 정책, 사회운동까지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의 흐름을 좌우하는 평판의 흐름, 주목의 흐름, 무엇이 윤리적·미학적으로 우월하다는 거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 ESG 투자도 마찬가지고… ‘이 시대에 이럴 수는 없어’, ‘저건 정말 아니야’라는 판단을 사람들이 다 갖고 살아가잖아요. 무언가를 접할 때 어떤 윤리적·미학적기준에 따른 생래적인 거부감 같은 게 발생하고, 그걸 통해 특정한 집단, 혹은 투자 대상의 매력도는 낮아지는, 이런 식의 동학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폐어가 말하는 것은, 결국 그게 기업의 투자를 넘어서는 자금, 시간, 노력, 평판, 매력, 감정 이런 것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 흐름들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재구성할 건지가 『피투자자의 시간』이 제기하는 과제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금융에 대한, 그리고 금융과 얽혀있는 이 비금융적인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된 투자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을 번역하고 필드워크를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가치, 대의, 정치인, 집단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고 그 대상에게 돈이든 시간이든 관심이든 내가 가진 자원의 일부를 ‘투자(invest)한다는 것. 나의 일부를 그만큼 던져넣는다는 건, 그 비율에 비례해서 그 대상의 운명과 내 운명이 일정하게 묶이는 것이기도 하고, 거기서 그만큼의 유대(bond)가 발생한다는 것.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세계를 이런 방향으로 만들어나가는 흐름에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서있고 싶다. 나도 그 일부가 되어, 오롯이 함께하진 못해도 그 에너지의 흐름에 뭔가를 보태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시간이나 에너지를 쏟게 되는 것 같거든요. 어떤 단체나 개인을 후원할 때도 이런 맥락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 같구요. ‘투자(投資)’의 ‘자(資)’는 일차적으로는 자본, 재물이나 금전을 의미하지만 – 어떤 내러티브를 가지고 사회를 ‘혁신’하겠다고 천명하는 스타트업이나, 테슬라 같은 기업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 시간을 투자한다, 관심을 쏟는다는 것도 사실 같은 맥락인 것 같구요. 사회이론적으로는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의 경제학도 이런 ‘투자’의 대상이 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비경제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용례에 해당하구요.
이걸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얘기와 엮어보면, 매력의 정치경제라는 거랑 닿는 거 같아요. 무엇이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지를 둘러싼 사람들의 경합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희우
그렇죠. 실제로 페어 책에도 그런 얘기가 있죠. 대안 투자 혹은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목표는 매력도가 평가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이라는.

민서
매력도라는 게,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모종의 에너지들의 흐름을 조건 짓는 것일 텐데, 그 매력의 평가 기준은 미학적일 수도 있고 윤리적일 수도 있고요. 책에서도 언급하는 노스다코타 파이프라인 투자 철회(#DefundDAPL) 운동처럼 미국의 화석 연료 석유를 운송하는 송유관에 대한 투자가 왜 매력적이지 않은지를 그 운동가들이 끊임없이 알리는 방식으로 운동이 이루어지잖아요.
결국 그것도 매력이 평가받는 매력도에 평가 기준을 바꾸고 그걸 통해 매력 평가에 근거한 신용 할당 기준을 바꾸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신용 역시 매력이랑 마찬가지로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어떤 비경제적인, 일종의 정동적인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희우
예, 근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의문이 한 가지 있는데, 이른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입장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거예요. 페어는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를 언급하는데요.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인 평가가 의문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말했듯 ‘정동의 흐름’ 같은 것과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좌파 포퓰리즘과 페어의 주장에는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거든요.
저도 무페의 작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무페의 기본적인 전제는 제도적·법적·물리적으로 현행화된 ‘정치(politics)’와 그것의 사라지지 않는 구성적 외부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다르다는 것이고, 정치를 끊임없이 탈구축하고 재구축하는 ‘정치적인 것’―어떤 적대라든지 불만, 분노 같은 것들―이 해소될 수는 없다는 거지요. 그것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는 어떻게 적대나 갈등을 ‘해소’할 것인가가 아니라 적대와 갈등의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어디에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가 되지요. 그런 흐름의 형성이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면,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효과적으로 되기 위해 그런 정동적 흐름들을 조직하고 흐름들에 개입하는 문제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왜냐면 결국 사람들이 투자를 통해서 그냥 부자가 되고 자산을 증식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거를 욕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잖아요. 사람들이 뭔가 다른 걸 욕망한다는 것은 현 상황에 대한, 처지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분노가 있다는 뜻이고요. 욕망의 흐름을 그렇게 조직할 수 있을 때 금융자본주의 조건을 전유해서 어떤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겠다는 전략도 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지……

민서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첫째가 좌파 포퓰리즘이 이야기하는 정치적 적대라는 게 피투자자 액티비즘에서는 무엇이냐, 아니 있기는 있냐. 이건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기획 자체를 의문시하기보다는 금융시장 내부로 들어가버리는 게 아닌가. 사실 이건 꼭 좌파 포퓰리즘의 시각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둘째 측면은, 희우씨가 욕망과 정동의 문제라고 말한 부분인 것 같아요.
첫 번째 지점에 대해서는 제가 북토크를 하면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기도 한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이런 식으로 이해가 많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특정 기업이 비윤리적인 관행을 보이니 동일 업종의 다른 회사 주식을 사는 게 대항 투기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를 많이 하시는데요. 하지만 일단 페어가 말하는 대항 투기는 사회운동의 레퍼토리지, 돈을 벌 목적으로 개인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투자를 어디다가 하자, 이런 건 아니에요. 범박하게 말해 민주주의 정치는 1인 1표인 것과 다르게 금융시장의 정치는 1원 1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선각자적인 개인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금을 끌어서(상대적으로) 대안적인 기업에 투자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명확하잖아요. 페어가 얘기하는 거는 그래서 어떤 기준으로든 윤리적이고 좋은 기업, 혹은 대안적인 기업에 우리의 자금을 할당하여 돈도 많이 벌고, 이렇게 꿩 먹고 알 먹고 하자는 게 아니에요. 거대한 자산 시장의 흐름을 움직이는 잣대들과 가치들이 있잖아요. ESG처럼 ‘바람직한’ 자산 할당의 기준을 변경시키는 걸 목표로 삼자는 거죠.
어쨌든 그 오해를 해명하고 나서도 남는 두 번째 쟁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가령 트럼프 같은 우파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왜 떴을까를 이해하려면 사람들의 정서적·정동적인 흐름과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거죠. 적대의 선이 지금은 외국인 타자, 이주민 타자, 여성 타자, 장애인 타자 대(對) 우리라는 식으로 그어지고 있지만, 그 전선을 정말 이런 문제를 몰고 온 주범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했던 엘리트 세력에게로 돌리자, 이게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일 텐데요. 아까 하신 질문은 페어에게는 이런 정동의 어떤 재배치 내지는 그 흐름이 다르게 흘러갈 물길을 어떻게 터줄 거냐, 이런 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안 보인다는 말씀인 것 같아요.
저도 타당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페어의 독자로서 우리가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 고민을 전개시켜볼 수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우리 대화랑 계속 연결되는 지점인데 매력이라는 개념이 기표적이면서도 비기표적인 측면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죠. 기후금융에 관련된 필드워크를 하다보면 어떤 특정한 이미지들의 질서 같은 게 있어요. 이건 지금 제가 하는 연구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지금 인류세 시대의 어떤 파격적인 재해의 스펙터클, 이제 그것 때문에 멸종되어가는 생물종들의 얼굴, 그런 이미지들이 뿜어내는 어떤 정동적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절망적이거나 희망적인 미래상을 담은 풍경들. 이건 정말 아니다, 아니면 저렇게 가야 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 펀드매니저들도 사회운동가들도 그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모종의 추적을 강화시켜 나가는 그런 이미지 유통과 인용의 질서 같은 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여기에 어떻게 비판적으로 관여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있으면 어떨까요? 페어가 제시하는 투자의 정치경제학을, 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력도 혹은 매력이라는 키워드를 매개해서, 정동적 차원에 대한 고려와 함께 가져갈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지 않을까요?

희우
예. 그런 것들이 같이 이야기됐을 때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최근에 다시 샹탈 무페를 읽고 있는데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아주 동시대적인 저술들인 것 같아요. 저도 무페(혹은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비판하는 저술들만 많이 읽어서 사실 ‘한물 간 이론’ 정도의 막연한 상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직접 읽어보니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경우 많잖아요. 어떤 저자가 많이 비판 받을 때, 막상 직접 읽어보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는 경우. 제가 오래전부터 고민했던 것도 비슷한 문제인데, 민서 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한 7년 전에, 비평가로 등단하기 한참 전에 발표했던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2017)이라는 어설픈 글이 있어요. 전역한 이듬해에 썼던 글인데, 엉망인 글이지만…… 그 글에서 제 진단은,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을 경험하는 한국의 젊은 남성들이, 그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한 여성성의 ‘환상’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런 환상에 고착된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대두될 거라는 것이었죠. 한국 군대에서 어떤 여성혐오적인 감정이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봉합’하는 것으로서 활용이 되고 구조적으로 생산이 되고 있어요. 그런 진단 위에서, 그렇다면 그 불만이나 고통, 분노, 억울함 등의 정동을 어떻게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가 아닌, 군대 체제나 부조리, 군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었고요. 그런데 이 문제는, 제가 그 글을 썼던 때보다 지금 더, 훨씬 더 절망적으로 나빠졌잖아요.

민서
그렇죠. 그 글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 때 짚으셨던 경향이 확실히 더 짙어진 것 같아요.

희우
왜 이 지경이 된 걸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다가 무페를 다시 읽게 됐어요.
그리고 앞의 문제랑 좀 연결되는 것일 수 있는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말하자면 다소 엘리트들의, 혹은 최소한 ‘프레카리아트’라고 하는, 가난하지만 고학력이고 도시에 거주하는……
저 역시 프레카리아트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아무튼 페어의 대안은 그런 존재들이 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페어는 과거의 노동운동과의 유비 속에서 액티비즘을 얘기하는데, 페어는 아니라고 하지만,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과거의 운동을 대체하는 것인가 하는 느낌도 들죠. 어쨌든 이 유비 안에서 생각해 봤을 때, 노동자라는 경제적 조건을 통해서 단합할 수 있었던 노동운동에 비해서 피투자자 운동이 그 정도의 대중성이나 조직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부분도 좀 궁금하네요.

민서
두 가지 쟁점이네요. 하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주인공인 피투자자들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춘 사람들에 한정되는 게 아니냐 이런 쟁점이고, 두 번째는 이거랑 연결된 질문으로서 이 운동이 노동운동만큼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냐는 질문인데요. 이건 노동운동과의 관계 맺음이라는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두 번째 것부터 답변을 해볼게요.
이 책에 굉장히 여러 논지들이 있지만 사실 책의 구조 자체는 굉장히 간명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책의 소제목들이 A&B 식인데, A에 해당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의 정치와 운동을 설명하는 어휘들이고, B에 해당하는 것은 금융화 이후의 사회 문제, 새로운 사회 문제, 이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필요한 어휘들이지요. 근데 이 A와 B의 관계가, 제가 볼 때는 경우에 따라 어떤 거는 대체에 가깝고 어떤 건 대체라기보다 병존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근데 확실한 건 저자도 얘기하고 있지만 산업자본주의적 착취만으로 설명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지, 과거의 문제가 사라졌다거나 비중이 적어졌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금융자본의 위세에 주목한다 할지라도,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문제, 곧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고 여기에 대한 노동운동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요.
작년에 진행했던 북토크 중에, 플랫폼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라이더유니온에서 활동하셨던 분이 토론해주셨던 내용이 기억이 남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을 경유한다고 해서 노동운동의 레퍼토리를 배제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기성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레퍼토리를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는데요. 저는 이런 고민을 통해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지금은 낯설지만 더욱 대중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 3장에서 다루는 플랫폼 자본주의 관련 투쟁 현장은 물론이고 금융적·비금융적 가치평가가 중요한 다른 전선에서도요. 여기까지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요.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저자도 3장에서 희우 씨가 말씀하셨던 비판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3장에서 얘기하는 게 플랫폼 라이더들 혹은 배달 플랫폼에 혹은 그런 뭔가 별점 평가를 주고받고…… 페어가 플랫폼 협동조합 이런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은 디지털 리터러시가 있고, 대안적인 플랫폼을 만들 수 있고, 그걸 통해 자기를 이렇게 전시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존재들인데요. 그러면 이게 과연 ‘보편화’될 수 있는 전략이냐 이런 의구심이 당연히 저는 나올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페어가 얘기하는 것 중 하나는,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을 전유했던 주인공들이 당시로서는 극소수였다는 거죠. 그렇지만 사후적으로 볼 때 그건 일종의 부상하는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고, 앞으로 점점 커져갈, 전범적인 존재들이었던 거죠. 지금 프레카리아트-피투자자 액티비스트들도 수적으로는 작을 수 있어도 앞으로 점점 중요해질 흐름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어요. 여기까지가 옮긴이로서 할 말이라면, 독자로서 덧붙이자면 저는 앞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운동에 대한 예측이 한 사람의 이론가의 몫이라기보다는 운동과 이론이 주고받으면서 만들어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희우
그렇군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책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이 질문은 민서 씨가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오래 고민했을 문제일 거예요. 어찌 보면 너무 거창하면서도 여러모로 괴로운 질문인데요.
기후 문제의 광범위한 시급성에 비추어봤을 때, 페어의 전략이 너무 소극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지요? 사실 한국어판 뒤에 민서 씨랑 페어 인터뷰가 있잖아요. 굉장히 인상적이고 엄청난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도 페어가 이런 문제를 스스로도 좀 의식을 하는 것 같았어요.

민서
감사합니다(웃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인터뷰를) 하기 잘한 것 같아요. 그런데 희우씨는 기후 문제가 시급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시급한 것 같나요?

희우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민서 씨보다 훨씬 모를 것 같아서 자신은 없지만요, 예를 들면 ‘생태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곤 하는 입장의 책들을 봤을 때, 이를테면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저자들의 책을 읽었을 때는 지금 당장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중단되고 새로운 체제가 나타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건 그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기후 생태 문제의 전문가인 과학자들도 그렇게 얘기를 많이 하고 있잖아요.

민서
그렇죠.

희우
그런데 페어의 전략은, 이건 이 책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푸코식 ‘비판적 전유’의 일반적 문제일 수도 있는데, 지금 현존하는 체제, 이 체제에서 유용한 것으로 식별되고 재현되는 조건들 ‘내부’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이런 방식으로 세계적으로 고착화되어 있고, 어떤 투자자들과 거대 기업들이 행성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런 상황이 우리의 주체성을 조직하고 있는, 이런 조건들 내부에서 약간씩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방법인 거죠. 그러니까 어떤 엄청난 속도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러 저술에서 제기되는 대안들이, 어떤 거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그게 옳다는 건 납득이 가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고, 한편으로 페어의 책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실천이나 저항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는 좀 구체적인 상을 주지만, 이것만으로 괜찮을까 하는 의심이 남습니다……

민서
말름이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4에서서 얘기하는 게 그런 거죠. 기후위기의 시급성,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파국적 재난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속하고 급격한 단절이다. 그리고 그걸 이루어낼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주체의 형성이 시급하다. 말름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그 혁명적 시도의 합리적 핵심을 기후위기 시대에 되살려야 된다는 거고요. 그걸 ‘생태적 레닌주의’라고 표현하죠. 거기서 두드러지는 건, 지금 당장 무언가 시급히 일어나야 한다는 호소죠.
말름이 인용하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이 전개되던 와중에 동지들한테 썼던 글 중에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기다리는 건 범죄다.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의회를 기다릴 권리가 없다… 기다리는 건 형식적인 걸 따지는 유치하고 불명예스러운 게임이고, 혁명에 대한 배반이다” 등등. 지금 기다리는 와중에도 온갖 모순이 폭발하고 있고,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인페이션트(impatient)의 감정이 가득한 글입니다.
반면 페어는 지금 존재하는 통치 질서를 우리가 끝까지 한번 잘 활용해 보자는 식의 주장인데, 말씀하신 대로 그게 현실성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현실로 여기는 것들이 붕괴하고 있는 시점이라면 그 ‘현실적’인 선택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기성 체제 내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건 기성 체제가 권장하는 어떤 비판을 통한 변화의 게임에 일정한 정당성과 가치가 있다는 걸 승인하는 거기도 하구요. 맞아요. 말름과 페어의 논의는 맥락상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이걸 좀 큰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페어가 계속 갖고 가는 유비, 즉 노동조합 운동과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유비가 한계에 봉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노동조합들이 임금 단체 협상을 하고, 복지국가를 만들어내고, 좀 더 인간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를 위해서 노력해 온 건 맞지만, 그 목적이 과연 정말 ‘인간적인 자본주의’ 자체였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해석도 많단 말이죠. 이건 페어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그렇게 저항해서 끊임없이 자본의 효율을 낮추고,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이른바 ‘이윤율의 경항적 저하’를 앞당겨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격화시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그러니까 이 체제 자체를 ‘지양’한다는 계기가 노동운동에 있었다는 거죠. 체제 자체를 좀더 인간적으로 개량하는 것을 넘어서요. 페어가 기후 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지금 기후 파국을 초래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전망이 피투자자 액티비즘에 있는가? 여기에 확실하게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렵죠.
다만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가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책에서 나오는 화석 연료에 대한 투자 철회 운동이나 ESG를 활용해서 일정한 제도의 변화를 도모하는 일군의 집단들, 이전이라면 함께하기 힘들었을 집단들(투자자, 컨설턴트, 노조, 씽크탱크 연구원 등등)이 모이고 새로운 운동의 형식을 창안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걸 조명하는 데 페어의 논의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페어 논의와는 별도로, 제가 말름의 그 책을 읽고 든 생각은… 레닌주의의 ‘지금 당장 단절하고 넘어가자’는 식의 주장이, 당위적으로는 공감이 되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이게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에 대한 전망이 잘 안 보인다는 거예요. 필요성과 가능성 간에 괴리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기후금융 연구를 추동하는 물음도 이런 괴리감과 무관하지 않구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1.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p. 218-19. ↩︎
  2.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
  3.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
  4. 안드레아스 말름,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우석영·장석준 옮김, 마농지,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