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사람 친구가 될 수 있을까?(2)

―이연숙 평론가와의 대화 2부

1부: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악인의 서사/가시성의 경제

2부: 남성학의 부상/한국 남성성 분석/몸과 외모의 문제/실망에 관하여

남성학의 부상

희우
한편으론 최근 들어서 남성학이 부상하는 경향도 있는 듯합니다. 그런 관심사들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 같고요. 미묘한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전형적인 의미에서 약자나 소수자는 아니지만, 정체성 정치 혹은 담론에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던, 그리고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남성들에 대한 담론이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일본 비평가 스키타 슌스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안희제 님이 쓴 『증명과 변명』1도 그렇고 남성 작가가 남성을 주제로 쓴 글이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남성 서사랑은 다른 게, 어느 정도 페미니즘적인 감수성이나 인식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문제가 진단된다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당사자성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저술들이고요. 그리고 저는 문학평론가니까 발표되는 소설들을 따라 읽는데, 최근에 남성 인물,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소설들이 좀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젊은 소설가들에 의해서인데, 서장원이나 권희진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2 어쨌든 옛날의 남성 서사랑 다른 게 페미니즘적인 감수성이나 문제의식을 경유한 상태로 쓰인다는 점인 것 같아요. 소설이 꼭 페미니즘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페미니즘적 의제를 의식하고 반응한다는 의미에서요.

연숙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느꼈던 게 과거랑은 달리 페미니즘을 경유한 어떤 남성 서사, 남성 주체가 등장한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이거든요.
한국에서 남성성을 분석할 때, 주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해요. 이 연구들의 핵심은 한국 남성성이 스스로를 약자로 설정하고, 여성을 방패처럼 앞세우면서 동시에 이 여성들에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식민 제국 강대국의 이미지를 덧씌워 비난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여성에 대해 강자라는 사실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이런 자기기만적인 태도가 바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거죠.
정희진 선생님이 분석한 양공주의 사례가 있습니다.3 전쟁 이후에 한국에는 미군이 대거 유입됐고, 한국 남성들은 그 미군들에게 여성을 제공했습니다. 미군들이 지급한 돈으로 여성들이 생계를 유지했고, 그 여성들이 다시 남편이나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공주라는 여성 집단만큼 심한 낙인을 받은 사례도 없었죠.
남성들은 필요할 땐 이 여성들을 불러내 돈을 벌어 오게 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주라고 요구하면서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여성들은 더 이상 순결한 누이, 어머니,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짜 ‘한국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철저히 배제당했습니다. 이미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성들은 자신들이 이 여성들을 마치 포주처럼 이용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약자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여성을 선택하고 배제한 것이죠.
결국 이러한 남성성은 자신들이 가부장의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이라는 상징이 가져오는 모든 특권과 부산물들은 취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태도와 구조를 두고 그동안 한국에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해왔던 거죠.
근데 최근 세대의 남성성은 기존의 식민지 남성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상당히 달라졌는데, 그 중요한 계기가 바로 2015년 이후 강력하게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이거든요. 이전까지의 식민지 남성성은 주로 역사적 약자로서 여성을 방패 삼고 책임을 회피하는 형태였다면, 지금 세대의 남성성은 페미니즘과의 직접적 대결이나 갈등 속에서 형성되고 있어요. 즉, 페미니즘이 이들에게 어떤 정체성 형성의 ‘땔감’ 역할을 하게 된 거죠.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 이후 남성들은 이에 반응해 자기 성찰을 하거나, 자신을 과거의 남성성과는 다른 존재로 차별화하거나,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더 강한 집단적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죠. 오늘날 유행(?)하는 ‘이대남’, ‘인셀남’ 같은 남성성은 페미니즘이라는 맥락과 긴밀히 얽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희우
반동적으로 되는 거지요.

연숙
그렇죠. 그런 식으로 지금의 남성성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프레임하고 다른 게 있죠. 잘 아시겠지만, 요즘 래디컬 페미니스트나 인셀을 분석할 때 ‘인정 투쟁의 결과로 극우화되고 있다’는 설명이 거의 기본처럼 자리 잡았어요.4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에요.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고, 그걸 통해 자립하거나 동료 집단에게 소속감을 얻고 싶어 하니까 굳이 안 해도 될 일들을 스스로 만들어서 행동하는 거죠. 예를 들면, 어떤 운동에 참여한다든지, 아니면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와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고 느껴져요. 그런데 이런 현상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직접 접할 기회는 많지 않잖아요. 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작가들이고, 물론 그분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이런 주제를 깊게 얘기하기는 어렵죠. 또 소위 말하는 ‘이대남’이나 인셀 같은 부류는 대부분 SNS를 통해서만 보게 되니까 실제로 접촉할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관련 책들이5 꽤 많이 나오면서 이런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 같아요. 직접 만나기 어려운 세계를 텍스트를 통해서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 거죠.

한국 남성성 분석

희우
이제 한국 남성성에 대한 우리 나름의 분석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너무 큰 이야기지만 먼저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가속화되는 전통적인 상징의 붕괴……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러니까 공동체의 가치 같은 것도 상징이고, 가부장적 아버지 같은 것도 상징이고 모성애 신화의 어머니도 상징일 텐데요.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모델, 전통적인 의례나 공동체의 구속력, 이런 모든 상징적인 것들의 약화와 사라짐에 대해 말하자면, 이 문제가 여성들보다 남성들한테 훨씬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거든요.

연숙
여성들에게는 그런 전통적인 상징 자체가 이익이 된 적이 없으니까?

희우
네. 그렇기도 하죠. 어떤 공동체의 구속력이라든지 전통적인 어머니상이라든지, 이런 상징들이 약화되거나 사라진 게 오히려 여성들한테는 좋은 일이었을 수 있지요. 하지만 남성들한테는 그게 엄청난 주체성의 위기로 다가왔다는 거예요. 상징들이 사라졌다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누구를 롤 모델로 삼아서, 어떤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나 자신을 정체화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모두 미궁에 빠진다는 것인데요. 어쩌면 남성이 롤 모델 없는 삶에 여성보다 훨씬 취약한 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서 오는 주체적인 불안과 공포가 남성들의 방황이나 극우화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의 현실, 그러니까 양극화나 불평등의 심화라든지 불안정성, 이런 것들은 젊은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처한 현실이었는데, 혹은 여성들한테 더 가혹한 현실이었을 텐데 왜 남성들이 주체성에 더 큰 혼란을 느끼고, 극우화되었는가? 언급하신 칼럼에서 박권일 선생님도 이 문제를 다루셨더라고요. 짧은 칼럼이다 보니까 간명한 대답을 하셨는데, 젊은 여성들에게는 페미니즘이라는 대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종의 새로운 상징으로 작용을 했고, 젊은 여성들은 그 아래에서 모이거나 연대하거나 논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남성들한테는 그런 대의(제 표현으로 하자면 상징)가 부재했다는 진단인데요. 저는 그것도 맞지만, 박권일 선생님의 분석에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 ‘이념적인 빈곤’도 있지만, 아주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문화적·사교적 빈곤도 있어요. 이 두 가지가 물론 연동된 것이지만 동일한 건 아닌데요. 예를 들어 친구들이랑 전시를 보러 가거나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떠는 일이 꼭 무슨 대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많은 돈이나 시간이 드는 일도 아니고. 근데 그런 수준에서도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대안적 문화를 만들거나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도 잘 못 했다. 그러니까 주체적인 수준에서 이중의 빈곤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념적인 수준에서의 빈곤, 또 문화적·일상적 수준에서의 빈곤.
따라서 상징이나 가치의 모델이 없는 세계―이른바 ‘세계 없음(worldlessness)’―에 더 치명적으로, 노골적으로 직면했고, 거기에서 오는 불안과 고독과 공포를 페미니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극우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주관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 극우화는 이미 파괴된 전통적인 상징―권위주의적 통치자나 가부장적 아버지 따위―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또 주관적인/주체적인 차원에서의 상실감, 불안감 같은 게 남성들이 ‘역차별론’ 얘기할 때 강하게 작용한다고 봐요. 객관적으로는 입학이나 취업 등에서 남성들이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데도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러니까 객관적인 상황보다 불이익을 주관적으로 부풀려서 생각하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남성들이 주체적으로 공허하고, 그래서 불안이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졌다.

연숙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까 제가 식민지 남성성 얘기한 것에 이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 남성들 잘하는 게 남 탓인데요. 남 탓 천부적으로 잘하거든요. 이게 식민지 남성성의 어떤 특징이기도 해요. 내가 받은 폭력, 침해, 수탈, 고통이 분명히 있는데, 이걸 진짜 강자한테 뺏겼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데 극복이 안 되고, 패배를 인정하기도 싫으니까 옆에 있는 만만한 사람, 특히 여성에게 투사하는 방식이 되는 거죠. 즉,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 나머지 여혐을 하게 됐다는 거죠.
근데 요즈음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흥미로워요. 어떻게 보면 다들 일종의 ‘식민지 남성성’을 겪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이유를 딱 잘라 말할 순 없고, 누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지목할 수도 없어요. 각 나라, 각 사회마다 맥락이 다르니까요. 근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들의 극우화가 나타나고 있고,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고, 전반적으로 남성들이 마치 한국 남성들처럼 집단 PTSD 겪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다는 게 흥미로운 거죠. 주적을 설정하자면 결국 신자유주의고, 자본주의 체제가 (예정대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걸 인정하고 단합하려면 많은 걸 포기하고 다시 생각해야 하니까 쉽지 않겠죠.
한국 남성들 같은 경우, 기사만 봐도 지금 말씀드린 그런 ‘내가 불이익받고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두드러지게 드러나잖아요. 우리가 얼마 전에 읽은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봤듯이,6 남성들이 부모보다 못 산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그냥 경제적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자기 피해를 부풀리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현실적으로 객관적인 지표를 보면 여성이 훨씬 더 차별받고 있는 게 맞는데도 말이에요.

희우
그렇죠.

연숙
근데 주관적으로는, 나는 우리 아빠 엄마랑 비교했을 때 내가 받아야 할 만큼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왜 이렇게 됐냐고 생각하면 결국 여자들이 뭘 해서 이렇게 됐다고 결론 내리는 거죠. 자기 눈에 보이는 변수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인지 부조화에서 오는 갭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게 안타까운 거죠.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들이 이걸 잘 해결하고 있는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누군가는 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스트들도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불이익이나 고통 같은 걸 전부 남자들 탓으로 돌리잖아요. 물론 그게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세상을 하나의 축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결국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가 다 남자들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가게 되고, 남자들은 또 반대로 여자들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니까, 둘은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이대녀, 이대남들은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저 사람들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해결이 안 돼요. 한쪽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런 상황인 거죠.
근데 다만 페미니즘 같은 경우는 그래도 이념적이든 문화적이든 뭔가 정신 승리할 수 있는 방법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자기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방식들이요. 근데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은 그런 게 없어요. 디시인사이드 같은 커뮤니티 외에는 기댈 데가 없으니까, 훨씬 더 제 살을 파먹고 있는 상황인 거죠.

희우
네. 아버지처럼 살 수 없다는 거…… 그 문제가 핵심인 거 같아요. 제 생각엔 바로 그 문제에서 두 가지 새로운 유형의 남성성이 출현한 것 같아요. 식민지 남성성을 전제하지만 어쨌든 과거와는 뭔가 차별화된 두 개의 남성성이 나타난 거지요. 첫째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춘기 남성성’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요. 지금도 아주 많은 남자한테 어른 남자가 된다는 건 ‘처자식’을 갖는다는 거잖아요. 그게 삶의 목표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자기가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면 어른 남자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꼭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게 아니더라도, 그것을 비롯해 한 사회의 어른으로 거듭나는 전통적인 의례를 거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사춘기 상태에 머물게 되는 현상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 사춘기 주체성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식의 네트워크 속에서는 굉장히 무서운 괴물성을 갖게 될 수 있죠. 총 든 중학생처럼요. 서부지법 난동에서도 그런 불균형한 괴물성 같은 게 드러난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위압적인 논리로 무장하고 커다란 몸으로 폭력을 휘두를 때도 사실은 상처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일 없이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주체성, 이카리 신지 같은 주체성이 표면 아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거랑 맞물려서 나타나는 두 번째 주체성은 ‘냉소적 이성의 주체’라고 할 만한 건데요. 이건 전자(사춘기에 유예된 남성성)에 비하면 훨씬 영리한 관리자에 가까운 주체성으로, 전자의 불안과 공포를 자기 이익이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주체죠. 냉소적 이성이 그런 거잖아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거.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게 자기한테 이득이 되면 말하고, 혹은 그게 자기한테 편안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냥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 이 냉소적 이성을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게 이준석 같은 사람일 텐데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맞물려 있으면서도 다른 주체성이라는 거예요. 한 사람에게 겹쳐져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요. 서부지법에 가서 난동하는 애들하고 이준석이나 그 지지자들이 체현한 주체성은 다른 종류의 것이니까요. 또 극우 세력에 선을 그으면서 오히려 이준석의 포지션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듯한 착시가 일어나는데, 주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지자면 사실 오히려 전자가 후자(냉소적 이성의 주체)보다 훨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연숙
무척 흥미롭네요. ‘사춘기 남성성’은 어떻게 보면 퀴어 시간성 개념7과 신자유주의 아래 프레카리아트 주체8와도 연결되는 개념 같아요. 연장된 사춘기를 겪는, 몸만 커다란 ‘어른’이 어떻게 공동체를 향한, 타자를 향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부분은 남성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어른’이 못될 우리 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두 번째로 언급하신 ‘냉소적 이성의 주체’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준석 얘기하셔서 저도 이어서 말해보자면, 남초 커뮤니티에서 나온 말 중에 ‘wwe’라는 게 있어요. 사회적인 이슈가 터지고 사람들이 시위하는 걸 보면, 거기서 바로 냉소적으로 “이거 다 짜고 치는 거지”라는 식으로 댓글이 달리거든요. 그래서 “이거 다 wwe다” 이런 식으로 말해요.9
이번 계엄령 얘기 나왔을 때도 그렇고, 그 이후 시위 현장에서도 그렇고, 동덕여대 사태 때도 그렇고, 이런 일들 볼 때마다 방구석 커뮤니티 애들은 저거 다 짜고 치는 거라고 해버려요. 이게 완전 음모론적 사고죠. 근데 또 한편으로는 이준석 같은 사람들의 태도가 뭐냐면, “내가 사기 치고 있는 거 나도 다 알아. 나도 아는데, 이건 그냥 내가 정치인으로서 플레이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굴잖아요. 이 멘탈리티가 인터넷에서 흔히 만나는 20대 남성들, 그 집단의 핵심 속성인 것 같아요. 세상을 게임으로 보고, 나는 이 게임에 참여해서 내 몫만 챙기면 된다, 손해만 안 보면 된다 이런 식인 거죠.
희망 걸고 뭔가를 믿는 순간 손해 보게 되고, 도박하면 무조건 잃는다고 생각하니까 차라리 냉소하는 게 안전하다고 여기는 거죠. 냉소하면 잃을 게 없으니까요. 어차피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되니까. 이런 식으로 사고가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흥미롭게 본 텍스트가 있었는데, 김민하 평론가가 20대 남성들이 왜 시위에 안 나오냐는 질문에 대해 게임에서 그 원인을 찾더라고요.10 사실 이런 결론은 흔한 문화비평이긴 한데, 어쨌든 게임을 많이 한다는 게 상대방의 전략이나 전술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진다는 거죠. 상대방의 진심을 진심으로 안 받아들이고, 그냥 전술로 해석하고, 상대의 체력 게이지나 능력치를 보고 싸울지 말지 계산하는 식으로만 사고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치나 정의 같은 추상적인 개념보다 이길지 질지, 손해 볼지 안 볼지가 훨씬 중요한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사람들 바꾸는 게 진짜 어려워요. 왜냐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뀌지 않거든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이건 일종의 중독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거죠. 사고방식이 완전히 게임에 절여져서, 세상을 게임처럼 보고, 이런 프레임에 중독돼 있다면, 이걸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 중독을 멈추게 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희우
말씀하신 것처럼 냉소적 이성을 탑재한 사람들은 변화의 여지가 거의 없죠. 그리고 한편으로 그 냉소적 이성 때문에 남성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게 어려운 일이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어서, 군 복무의 어려움은 남자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할 때 늘 꺼내는 레토릭이잖아요. ‘남자들은 가장 꽃다운 나이에 군대 가는데 여자들은……’ 이런 이야기. 또 한국 남성성 분석할 때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군사주의인데요. 한국 사회 전체가 군사주의적 사회라는 분석도 많이 있고요. 그렇지만 미시적인 차원까지 들여다보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군대에 흔히 있을 법한 병사를 떠올려 보자면요. 여성 간부에 대해 뒤에서 성적인 농담하고, 힘 약한 선임들 무시하고, 가끔 후임들한테 욕하고, 힘든 업무에서 미꾸라지처럼 도망 다니는…… 이렇게 흔히 있을 법한 병사는 병사들 사이에 인기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어떤 매력적인 남성성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사실 이 병사가 하는 그 행위들은 군법에 의해 금지된 거잖아요. 위반인 것이죠. 또 현판에 적혀 있는 ‘국군의 이념’을 진짜 진지하게 믿는 20대 병사가 있을까요? 사실 그 군사주의 이념의 명목적인 내용을 진짜로 믿는 주체는 없고, 군대에서 여러 더러운 꼴을 보면서, 오히려 모두가 거기에 더욱 냉소적인 거리를 취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조직이 유지될 수 있는 건데, 만약 모든 병사한테―특히 신자유주의적인 자기 경영 마인드를 탑재한 20대 청년들에게―군사주의 이념과 군법을 정말로 엄격하게 지키고 내면화하라고 하면 조직이 붕괴하거나 폭발할 테니까요. 그래서 적당한 위반과 군사주의에 대한 냉소적 거리는 오히려 군대 조직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고 심지어 군대에서 함양되는 덕목이라는 거예요.
반대로, 해병대 박정훈 대령의 사례처럼, 오히려 군대 조직이 참을 수 없는 것은 ‘참군인’이죠.
그러니까, 한국 남자들이 군대에서 정말로 배우는 것은 어떤 남성성인가? 저는 군 복무가 20대 초반 남자애들 모아놓고 하는 강도 높은 남성성 훈육의 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훈육의 내용은 말 그대로의 군사주의를 내면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위반의 감각을 익히게 하는 것이죠. 필요에 따라 군사주의를 이용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하는 위반의 감각. 그 미시적 감각 속에 ‘남성성’이 있는 거죠. 어떤 법은 지켜야만 하고, 어떤 법은 위반해도 되는가? 누가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인가, 누가 무시해도 되는 이빨 빠진 호랑이인가? 어떻게 성적인 농담을 해야 하는가, 어떤 선은 넘으면 안 되는가? 기타 등등…… 이게 말씀하신 게임의 사고방식과 관련이 될 것도 같습니다.

연숙
네, 저도 너무 동의하면서 들었고요. 저희가 얼마 전에 같이 봤던 맥스 디킨즈의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도 지금 말씀하신 거랑 연결되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남자들이 사실 진심으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게, 중요한 건 진심이 아니라 농담이라는 거죠. 농담을 하면서 어디까지 상대가 받아줄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남자답게 선을 넘고, 어디까지 희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핵심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다 같이 선을 넘어보는, 일탈의 경험들이 오히려 남성들 사이의 결속을 더 강화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사실 많은 퀴어 이론가들이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도 지적했던 부분이고요. 결국 그게 남성들이 서로 얼마나 끈끈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농담의 대상이 되는 약자들, 특히 여성들은 사실 이 남성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고, 그냥 남자들끼리 농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에요. 진짜 중요한 건 그 농담을 통해 남자들끼리 얼마나 결속하고 유대를 느끼느냐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런 게 당연히 동성 사회적이라고 얘기되는 거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제가 아까 얘기한 디시인사이드라든지, 이준석에 대한 남성들의 열광도 결국 같은 결인 것 같아요. 이준석이 공중파에서 그런 농담의 감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걸 보면서 엄청난 해소감과 쾌감을 느끼는 거죠. 그리고 그걸 보고 나도 웃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자기 남성성을 확인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요.

희우
네, 그래서 저는 정면대결식의 비판, 이를테면 군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면 싸움,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식이 안 통한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면 사실 진짜로 그런 주체, 군사주의적 주체는 없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주체적인 차원에서 궁지에 몰린 남성들에게는 또 다른 측면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상황에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계산 능력이 부재하는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멍청해 보이는 주체들이 있잖아요. 서부지법에서 난동한 애들 같은. 그리고 이것은 일정 부분 페미니즘의 역설적인 효과였을 텐데, 젊은 남자들이 세계에 냉소적 거리를 취할 수 없게끔 강제했다는 거예요. 전투적으로 만들었다는 거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땔감’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이 젊은 남성들의 극우화에 큰 역할을 했지만(이 말이 오해되지 않기를), 그래서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했다는 거예요. 왜냐면 누군가 자기 세계에 냉소적 거리를 취하는 모순적 태도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되니까요. 아무튼, 오히려 그 사람들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연숙
맞아요. 결국 우리가 말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게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고 다 섞여 있을 수밖에 없죠. 말씀하신 것처럼 연약함과 안쓰러움, 동시에 냉소적이고 합리화에 능한 태도가 하나의 사람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게 현실일 거예요. 『증명과 변명』에 대해 얘기하신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 ‘인생이다’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단순히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사이 어딘가에 낀 채로 계속 머물러 있는 상태인 거죠.
저도 사실 20대 시스 헤테로 남자들이랑 직접 얘기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텍스트나 기사로 접하는 이미지들이 전부일 때가 많은데, 막상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동생 같은 경우를 보면 인터넷에 나오는 전형적인 20대 남성상하고는 또 다르잖아요. 그렇다고 그들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게, 밤에는 또 어떤 댓글을 달고 있을지 모르고, 그런 양가적인 지점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친구들이 언젠가 자기 상황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끔, 최소한 자기 경험을 이해할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뭔가 이론적인 쿠션을 마련해두는 게 진짜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그 언어가 없어서 냉소로 흘러버리고, 농담으로 넘기고, 피해의식에만 갇혀버리는 건데, 그걸 풀어낼 수 있는 틀이 있다면 조금은 다른 방향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게 쉽게 될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중요하겠죠.

몸과 외모의 문제

희우
이제 조금 시선을 옮겨서 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몸과 시선의 문제, 이건 거시적이거나 구조적인 분석에서는 흔히 말하지 않는 문제인 것 같거든요.
아까 전통적인 상징의 붕괴 얘기했는데, 사실 그 문제는 엄청나게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죠. 거슬러 올라가면 청년기 마르크스가 이미 한 얘기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목가적이고 낭만적이고 종교적이고 예술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들이 ‘이기적인 계산의 차디찬 얼음물’에 처박힌다는 것이었지요. 그 말은 ‘다른 가치들은 모르겠고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식의 태도가 지배적으로 된다는 건데요. 이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 잘 해당하는 말이지만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이념이나 상징이 붕괴하면, 돈만 남는 게 아니라 또한 몸이 남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이 돈 아니면 몸으로 환원된다는 거죠. 먼저 돈만 남는다는 거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 앞에서 자기를 분류하고 결정하게 된다는 거지요: ‘너 부자야 아니야? 너 이거 소비할 능력이 있어 없어? 소비할 능력이 있으면 여기서 놀고, 아니면 입 다물고 꺼져.’
그런데 돈의 문제뿐만 아니라 몸의 문제가 남게 되는데, 몸의 문제가 사람들에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죠: ‘너 남자야 여자야? 젊어 아니면 젊지 않아? 아름답고 멋지고 잘 가꿔진 몸을 가졌어, 아니면 그렇지 못한 몸을 가졌어?’ 남자들이 진짜 돈만 생각하고 그러는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점점 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게 잘생긴 남자, 멋진 몸을 가진 남자에 대한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자조적인, 때로는 굉장히 심각해지기도 하는) 어떤 질투심이나 선망 같은 거잖아요. 매노스피어에서 말하는 ‘알파메일’이 그냥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자가 아니라 잘생기고 잘 발달한 근육질 몸을 가진 남자인 것처럼요.

연숙
그렇죠.

희우
사실 한국 남자들이 여성들에 비해 꾸밈을 안 한다, 안 가꾼다고 말하지만요. 물론 여성들이 외모에 관해 받는 압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떤 통계를 보면 한국 남성이 전 세계 남자들 중에서 화장품 소비를 가장 많이 한다는 거예요.11 피부관리를 위해서요. 우리가 흔히 돈 없으면 ‘가진 건 몸뿐’이라고 하는데 그 몸이 어떤 몸인가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어요. 그게 젊은 몸이냐 아닌가? 멋진 몸인가 아닌가? 잘 가꿔졌는가 아닌가? 그 지점에서 우리가 같이 읽었던 서장원의 소설 「리틀 프라이드」가 흥미로운 거였죠. 선생님도 재밌게 읽으셨다고 하셨지만, 전 그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게 남자/여자, 성소수자/시스젠더 이성애자 같은 식으로 (정체성을 축으로) 나뉘거나 페미니스트/안티 페미니스트 입장의(정치적 입장을 축으로) 분열만 그려지는 게 아니고 또 다른 한 축의 나뉨이 그려진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멋진 몸을 가진 사람/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나뉨이지요.
그 소설의 화자는 트랜스젠더 남성(FTM)인데, 키가 160대 중반 정도 되고, 자기의 남성적인 매력에 전혀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퀴어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당연히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거기서 웃옷을 벗고 노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죠. “땀으로 번들거리는, 잘 다듬어진 예쁜 몸을 나는 조금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봤다.” 이런 구절이 있거든요. 화자는 그 지점에서 오스틴이라는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데, 직장 동료인 오스틴은 키가 화자보다 더 작은 남자예요. 하지만 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한테 그나마 호감을 살 수 있는지 아는 노련한 인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나중에 이 남자가 여성 혐오적인, 안티페미니즘적인 발언을 해서 화자가 확 거리를 느끼게 되거든요. 두 인물이 대립적인 관계가 되는 이유는 물론 화자는 페미니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데 오스틴은 안티페미니즘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화자가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매력적인 몸을 가진 사람들/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할에서 오스틴이 자신과 같은 편에 속한다고 느끼기 때문인 거죠.

연숙
그렇죠, 이 매력이라는 부분이, 그러니까 외모를 말씀하시는 거죠?

희우
대체로 그렇죠. 제 생각엔 단순히 외모로 환원되지 않는 매력의 복합성이나 창발성을 사고하는 게 동시대 문화를 이해하고 비평할 때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 문화 안에서 차이를 만들기 위해 꼭 검토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리틀 프라이드」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매력은 외관상의 ‘정상성’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고 이 정상성이라는 기준이 매력을 굉장히 획일적인 규범으로 만들고 있어요. 소설 속 오스틴은 외견상 멋지지 못한 남자인데 그래도 노련한 유머나 화술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으로 나와요. 당연히 누군가의 매력은 그런 문제까지 포함하는 거겠죠. 자신감, 유머, 화술, 매너, 분위기 등등. 그렇지만 결국은 오스틴이 사지연장술을 받잖아요. ‘내 삶의 문제는 그거야, 내가 키가 작은 남자라는 거’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사지연장술을 받게 되는데, 많은 경우 화술이나 유머 등의 요소도 외모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거겠지요. 특히 연애의 문제, 젊은이들의 성적 관계라는 문제에서는 그렇게 되는 거지요.

연숙
그렇죠. 이 매력이라는 게 예전부터 희우 님이 관심 갖던 주제이기도 하고요.12 좀 더 넓게 보자면 사실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매력의 종류는 정말 무수히 많잖아요. 그런데 결국 가장 지배적인 게 외모고,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이대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외모가 핵심이에요. 특히 남자로서, 여자를 상대로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외모 말이에요.
근데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제가 며칠 전에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에 다녀왔거든요.13 벌써 3회째라 3년째 이어지고 있는 행사인데, 거기서 한국 섭식장애 연구 현황을 발표하는 세션이 있었어요. 여러 발표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게 강의영 님의 「여성 섭식장애 경험과 페미니즘의 내재화」(2023)이라는 제목의 연구였어요. 당시 강의영 님이 보여주신 PPT에서 논문에 등장하는 인터뷰를 몇 문장씩 옮긴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인상 깊었거든요.
그 인터뷰들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게, 20대 여성들, 특히 페미니스트인 여성들에게도 외모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문제라는 거였어요. 사실 남성들보다 여성한테 가해지는 외모 압력이 훨씬 더 심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여성이 자기 경험을 재해석하면서 “내가 어릴 때 뚱뚱하다고 놀림당하고 상처받아서 그때부터 섭식장애가 시작된 것 같다”는 식으로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는데, 그 안에 이미 자기들도 페미니스트로서 인식하고 있는 모순이 있더라고요.
예컨대 나는 페미니스트고,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가부장제 문화에서 훈육된 결과라는 걸 아는데도, 왜 계속 외모를 신경 쓰게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는 거죠. 너무 오랫동안 외모를 차등적으로 바라보는 기준에 길들어 있어서, 다른 건 공부하면 이해가 되는데 외모만큼은 아무리 알고 있어도 극복이 잘 안 되는 거죠. 퀴어 이론을 읽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외모지상주의가 해롭다는 걸 분명히 아는데도 거기서 벗어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예요. 그래도 결국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요. 결국 이게 다 정상성의 문제잖아요.
남자들도 결국은 그냥 어떤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남자로서 매력을 갖고 싶어 하는 거고, 그러니까 남자로서 구실을 하려면 어느 정도는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여자들도 비슷하겠죠. 근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꼭 그렇게 안 살아도 되지 않나 싶어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이미 많은 인셀 분석에서도 나오잖아요. 이 남자들이 특정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라, 여자를 그냥 자원이나 재화처럼 생각하면서 인기 얻고 싶어 하는 거고, 그래서 외모를 바꾸고 싶어 하는 거고.14 근데 이런 종류의 욕망을 좀 포기할 수는 없을까, 그냥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불가능하겠지만요.15

희우
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그런 강박이 완화된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심해지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요. 물론 페미니즘에서 탈코르셋 운동도 있었고 저도 그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워낙 꾸밈에 대한 압력이 여성들한테만 엄청나게 부과되어왔던 거니까요.
하지만 지금 변화가 있다면 오히려 남성들도 점점 외모에 더 집착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물론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식에도 큰 성차가 있겠지만요.

연숙
이게 사실 답이 없는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이미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서 살고 있잖아요. 디지털 기기들이 너무 일상화돼 있고, 핸드폰만 켜도 24시간 내내 릴스나 틱톡 같은 데서 매끄럽고 완벽하게 다듬어진 몸들을 계속 보게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욕망이 그런 이미지들에 계속 피드백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욕망 자체가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재구성되는 거죠. 결국 우리의 욕망이 스스로 진화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이미지들에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벗어나기가 정말 어려운 거고요.
그런데도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은, 그냥 그런 거 그만 좀 보자는 거예요. 물론 말이 쉽지, 그만 보는 게 쉽겠느냐마는, 백날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론 읽어도 특히 20대들은 그런 데 예민할 수밖에 없고, 저도 사실 그랬거든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저도 2~3년 정도 섭식장애를 겪었고, 한참 동안 내 ‘부드럽고 말랑한, 여성적인’ 몸에 대한 생각으로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시기를 보냈어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키 크고 잘생긴 남자들 보면 부럽죠. 희우 님한테도 자주 말했지만, 저런 사람들은 태어나서 여자 만나려고 노력이라는 걸 해봤을까 싶은 생각 들 때마다 진짜 열 받거든요…….
근데 이런 열 받음은 결국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같아요. 계급 투쟁도 결국엔 질투에서 출발하는 거잖아요. 내가 못 가진 걸 남이 가졌을 때, 빼앗고 싶고 심지어 파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게 어떤 형태로든 ‘운동성’으로 나타나는 거고요. 여기서 말하는 운동은 무브먼트가 아니라 그냥 인간의 본능적인 액티비티 같은 거죠. 이런 감정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인간한테 너무 자연스러운 거니까. 다만, 이런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인정’ 받지 못하는 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그냥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이런 문제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요.

희우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

연숙
그러니까, 그 정도로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물론 한창 예민한 상태에서는 그게 정말 어렵고, 일단 그 사고에 빠져 있으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아요. 저도 그걸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단순히 남자들 얘기만이 아니라, 그냥 전반적으로 외모라는 게 일종의 정신병처럼 작동하는 것 같아요. 외모 정신병은 진짜 말 그대로 정신병이라서, 분석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냥 그만 생각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요. 제가 아까 말한 ‘이 욕망을 포기, 철회, 중단하면 안 되나’라는 게 결국 그 얘기예요.
『섹스할 권리』를 쓴 아미아 스리니바산이랑 『피메일스』를 쓴 안드레아 롱 추가 딱 이 주제로 한 번 부딪힌 적이 있어요. 『섹스할 권리』에 실린 「섹스할 권리」라는 글 보면, 남자들이 특히 백인이고 금발에 가슴 큰, 아주 전형적인 트레이시 같은 여자랑 자고 싶어 하는데, 그런 여자들이 자기한테 관심 없다고 느끼면 열 받아서 총기 난사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근데 스리니바산은 여기서 문제를 욕망 자체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이 그런 여자를 원하고, 또 그 욕망이 좌절됐다고 해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미 비틀려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욕망이라는 게 너무 성별 규범이나 정상성에 갇혀 있어서, 남자들끼리 관계 맺는 것도 어렵고, 여자들에게도 끊임없이 평가를 하고, 그 평가 기준을 자기 자신한테도 들이대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욕망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욕망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죠.
그랬더니 안드레아 롱 추가 그건 위험한 발상이라고 반박해요.16 그렇게 욕망을 바꾸라고 하면, 오히려 소수자들이 가지고 있는 ‘뻔한 욕망’,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정상성에 가까운 욕망조차도 포기하라는 말이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라든지, 트랜스 여성이나 트랜스 남성 같은 사람들에게 그 말이 더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거죠. 왜냐면 그들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상성’을 향한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바꾸라고 요구하는 게 결국 소수자들한테 더 가혹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욕망을 바꾸라거나, 양보하라거나, 욕망을 해체하라는 식의 말이 실제로는 불가능하고, 때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런 논쟁을 보면, 우리가 쉽게 ‘욕망을 포기하자’고 말하는 것도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다시 생각하게 돼요.

실망에 관하여

희우
음…… 안 그래도 안드레아 롱 추의 『피메일스』17를 최근에 재독했는데, 그 책 뒷부분에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니까 욕망을 부정하거나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내 욕망을 끝까지 따라갔을 때 어디에 부딪히게 되느냐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선생님이 그 책에 발문도 쓰셨지만, 그 책 뒷부분에 ‘실망’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나오잖아요. 저는 그 실망에 대한 논의에 무언가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봐요. 저는 사실 비평 쓰면서 몇 가지 개념 주위를 한 시기 동안 배회하는데, 한동안 매력에 대해서 많이 썼지만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실망’ 혹은 ‘실망 이후’에요.
이 주제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와 어느 정도는 느슨하게 연결이 될 것 같은데요, 그 책에서 물론 롱 추가 말하는 실망이라는 건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겪었던 경험하고 불가분한 것이겠죠. 자기는 여성이 되면, 자기가 욕망했던 그 여성의 몸을 얻으면 구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되어 보니까 아니라는 거잖아요.

연숙
‘내 새로운 보지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 글 말씀하시는 거 맞죠?

희우
네. 그리고 그 뒷부분에 실망에 대해 논의하는데…… 거기서 롱 추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상성 따위에 대한) 헛된 희망을 품는 것까지 포함해서, 우리 자신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좀 망가져 있고 못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 그런 자신과 계속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좀 신기하게도, 그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제시하는 대안하고도 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거기서 저자인 스기타가 일본 남성들에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알파메일’이 되지 못한, 약자 남성에게 제시하는 두 가지 대안인데요. 첫 번째는 좌파가 되라는 것, 이건 정치적 이념을 가지라는 말이겠지요. 자신의 불행을 더 약한 존재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지 말고, 체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라. 그러고 나서 두 번째 대안을 제시하는데, 저는 이 부분에서 그 책이 차별화된다고 느꼈고, 진짜 현실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염려한다고 느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대안은 요약하자면 ‘그냥 버티는 삶을 살아라’라는 것인데요. 남을 해치지도 말고 자기를 해치지도 말고 그냥 버티는 삶을 살아라. 첫 번째 대안, 즉 이념을 갖고 정치적 투사로 살아라는 것 자체도 일종의 명령일 수 있는데, 그 명령의 수행에도 실패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이 투사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럼 투사조차 되지 못하는 삶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에 대한 대답이 ‘버티는 삶’인 것인데요. 아까 제가 젊은 남성들이 이념적인 수준에서도 빈곤하고 일상적인 수준에서도 빈곤하다고 했잖아요. 저자가 제안한 두 가지 대안이 이 두 가지 빈곤에 각각 대응하는 거지요. 이념적인 빈곤에 대한 대답은 ‘좌파가 돼라’는 것이고 일상적인 빈곤에 대한 대답은 ‘버텨라’. 그런데 이게 진짜 빈곤한 상태 그대로 버티라는 뜻은 아니고 소소한 의미를 찾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인데……

연숙
네, 저도 계속 쭉 동의하면서 듣고 있었어요. 제가 아직 읽지 못한 책이지만 하나 떠오르는 게 있네요. 얼마 전에 하버드 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제목이 『정치적 실망(Political Disappointment)』이에요. 이 책의 저자 사라 마커스는 실망을 “시기적절하지 않은 욕망”으로 정의하고, 이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실현되지 못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이 지속되는 상태라고 설명해요. 이러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과 집단적 실천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는 거죠.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실망은 비전을 품고 있는 어떤 장소일 수 있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앤 츠베트코비치의 『우울: 공적 감정』에서도 이런 부분이 나와요. “정치적 우울에 대한 논의는 실망을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급진적 비전과 삶의 방식이 끈질기게 지속된다는 점을 스스로 상기해야 하는 필요에서 비롯한다”18, “정치적 실패 이후 실망을 견뎌낼 정동적 에너지의 필요”19……. 실망은 그 자체로 엄청 큰 마이너스 에너지인거죠. 그러나 마이너스 에너지도 분명 에너지고요. 이걸 타자를 향한 분노, 혐오로 확 돌려버리는 대신에 붙잡고 소화하는 것도 굉장히 큰 공간과 노동을 필요로 하고요.
요즘 같은 시국이라서 그런지 다들 이렇게 너무 크지 않고, 그냥 여진처럼 남아 있는 감정들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실망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도 좀 달라질 것 같고요. 어쨌든 실망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국 내가 한 번 기대를 걸었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실망이 따라오는 거고, 그 지점에서 오히려 희망적인 전망도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 내가 한 번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기대를 걸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뭔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려고 했지만, 막상 가보니 별거 없었고.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아 있다는 거, 그 자체가 의미가 될 수도 있죠. 내가 한 번은 다르게 살아보려고 했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극적으로 변하는 건 아니죠. 애초에 원래 내 인생이 그런 거니까. 결국엔 자기 인생이 그렇다는 걸 받아들이는 연습 같은 건데, 이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윗세대는 비평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우리 세대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다는 현실과도 연결돼요. 그래도 우리는 어쨌든 한 번은 비평으로 살아봤고, 불평하면서 글 쓰는 재미도 느껴봤으니까 그냥 계속 하는 거고요.
근데 이런 모습이 윗세대 눈에는 완전 패배감의 증상처럼 보일 거예요. 무력하고, 실망에 안주하는 모습으로요. 사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는데, 그걸 하려다가 실망해서 그냥 주저앉아버린 거니까요. 근데 여기서 저는 진짜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무력감과 패배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 실망 속에서도 내가 한 번 다르게 살아보려 했다는 걸 기억하는 것 사이의 차이요. 이게 구분하기 쉽진 않지만요.
예를 들어, 말씀하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제시하는 대안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너무 기대하지 말고, 인셀이 됐다고 해서 남들 몇 명 죽인다고 네 인생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냥 살아라, 이런 식의 조언이요. 얼핏 들으면 굉장히 무력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사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그냥 살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을 거예요. 오히려 그게 자기 변형의 과정일 수도 있고요. 저는 이런 걸 단순히 수동적으로 철회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양보하고, 포기하고, 물러서는 것도 하나의 운동성이라고 봐요. 겉보기엔 진보가 아니라 퇴보처럼 보여도, 사실 뒤로 가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실패하고 실망하는 것조차도 거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거고, 단순한 무력이나 패배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이 저한테는 중요해요.

희우
맞습니다. 실망이 단순히 무기력이나 패배감과는 다르다는 말이 참 좋네요.
실망 이후 혹은 ‘버티는 삶’은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해결책인데, 이 대안을 더 구체적으로 우리 삶으로 끌어와서 논의를 확장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버티는 삶이라는 게 뭘까? 거창한 이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물론 좋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어쨌든 오늘 하루, 이번 일주일 나름 의미 있게 보냈다, 했을 때 그 의미란 무엇일까? 이념에 따라 사는 사람도 어쨌든 일상을 작은 의미로 채울 필요가 있잖아요. 아니면 삶이 망가질 테니까.
사실 인셀 담론들도 너무, 남자들이 연애를 하느냐 섹스를 하느냐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증명과 변명』을 읽고, 또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를 읽고 든 생각은 이건데요. 오히려 집중할만한 문제는 우정 혹은 친구 만들기가 아닐까? ‘오늘 그래도 살 만했다’라고 느끼는 건 우정이나 친구 만들기에 달린 문제 아닐까? 또 친구 관계에서는 외모가 덜 중요하잖아요. 물론 사춘기 때나 20대에는 우정도 외모에 좌우될 수 있지만 그래도 연애에서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문제잖아요.
근데 어쨌든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남자들이 그런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능력도 많이 망가져 있기는 하죠. 그래서 더 이런 생각이 드는데, 지금 남자들이 주체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면 오히려 ‘친구-되기’가 답일 수도 있겠다. 서열 관계나 냉소적 농담으로만 가득한 뒤틀린 친구 관계 말고,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친구 만드는 법을 배우기. 남성들의 관계가, 이성애자 남성들끼리의 관계라고 해도 꼭 위압적인 남성연대나 ‘알탕 문화’처럼 될 이유는 없잖아요. (갑자기 선생님이 쓰신 「비우정의 우정」에서 동질성이 아니라 차이를 전제하는 우정에 대해 말씀하신 게 떠오르네요20.) 해답이 엉뚱한 곳에서 나올 때가 많잖아요. 예를 들어 나이든 친척이 태극기 집회에 너무 열심히 참여하고, 그 논리에 세뇌돼있는 듯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임영웅에 빠져서 더 이상 태극기 집회를 안 나가는 것처럼요. 우리가 그 사람이 태극기 집회에 경도되어 소리 지를 때는 답이 없다고 느끼는데, 도저히 못 바꾸겠다 싶은데 그게 엉뚱한 방식으로 해소되기도 하는 거잖아요. 왜냐면 결국 그 사람이 완고한 논리로 무장하고 경도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진짜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불안이나 외로움, 고독 같은 것을 해소하려다가 그렇게 된 거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물길을 터주면, 비가 많이 올 때 개울의 형태가 변하듯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죠.

연숙
네, 맞아요. 친구 만들기라는 게 사실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가장 일상적인 사회적 활동 중 하나인 거죠. 굳이 ‘친구’라는 이름일 필요도 없고, 꼭 깊은 관계가 아니어도 되는데, 그 기본적인 사회적 연결 자체가 어려우니까 결국 ‘친구 없음’이라는 식으로 그 결핍이 표면화되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꼭 친구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오프라인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게 최소한 인터넷에서 계속 여혐 커뮤니티 들락날락하고 댓글 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런 온라인 활동도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실망한 자기 자신을 견디기 위한 방식일 수 있겠죠. 일종의 감정 관리 같은 거니까요. 근데 그게 결국은 더 자기 파괴적이고, 실망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좀 더 회복적인 방식으로 실망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망이 꼭 파괴적일 필요는 없는데, 문제는 그걸 다르게 감당할 수 있는 루트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거죠.

희우
맞아요. 롱 추의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리를 발견했는데요. 롱 추가 말하는 바는, 실망이 두 번 일어난다는 거예요. 두 번의 실망에 대한 이 논의가 말씀하신 ‘회복적인 방식’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실망은 내가 너무 간절하게 원했고, 구원이 있을 줄 알았고, 뭔가 삶이 나아지리라고 기대를 걸었던 그 X가 실제로는 별거 아니고,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인데요. 롱 추가 드는 예는 (물론 성전환도 있지만) 가령 연인, 정치적 신념, 운동, 예술 형식, 한 벌의 옷 등이에요.21 저 옷을 가지면 삶이 더 좋아질 거야, 이런 기대나 희망을 품게 하는 X, 그것이 구원을 주지 않고 균열이 가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느끼는 첫 번째 실망.
일단 첫 번째 실망이 있고,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실망이 뒤따르는데요. 롱 추는 이 두 번째가 더 중요한 거라고 말을 해요. 두 번째 실망은 이런 거예요. 내가 실망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네. 내가 상처받았고, 마음이 꺾였는데 인생은 그대로네. 이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하네. 이게 두 번째 실망, 말하자면 실망에 대한 실망인 거죠. 한국 시에서 상징적인 시구를 가져와보자면 첫 번째 실망이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22)는 말로 표현되는 종류의 것이라면 두 번째 실망은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황인찬, 「건축」23) 같은 말로 표현되는 종류의 실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잔치는 예전에 끝났지. 하지만 나는 계속 살아 있는걸?
반동적인 폭력이나 충동 같은 것은 첫 번째 실망과 두 번째 실망 사이에 있는 반응이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 실망까지 거치고 나서야, 주체는 이 실망스러운 것들, 실망스러운 나 자신과 그냥 계속 살아야 한다는 걸 수용하게 되지요. 근데 이 실망이 말씀하신 대로 그냥 어두침침하고 무기력한 것만은 아닌데, 롱 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마 이게 책의 마지막 문장일 텐데, “실망의 다른 이름은 필시 사랑이다.” 그러니까 실망 이후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자란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매혹이나 선망과는 많이 다른 사랑인 거죠. 오히려 인내나 보살핌에 의해 지탱되는 사랑일 텐데……

연숙
맞아요. 근데 정말 어려운 일이죠.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사실 이런 걸 사랑이라고까지 부르려면 정말 큰 감정적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라서, 저도 이런 종류의 실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걸 모두에게 권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실망하고 그냥 살라고 말하는 게, 특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욕망을 변형해야 하니까 어렵죠. 그리고 이게 단순히 실망 하나에만 걸려있는 게 아니라, 사실 사랑이나 욕망이라는 게 결국 세상 전체를 포함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때, 그걸 통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게 되고,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도 결국 어떤 가치 체계 안으로 진입하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런 걸 그만 생각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집중한다는 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살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죠.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믿어왔던 걸 다 내려놓고,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그게 달성되지 않아도 여전히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자기 수양이 필요한 거고, 그래서 쉽지 않죠.
이런 사고방식이 자칫하면 영성이나 종교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그렇게라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비판적 담론에서 지배적인 메시지들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흐르고 있으니까요. 너희는 이미 망가졌고, 없어져도 된다는 식의 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소멸 외의 방식으로 견디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잖아요. 앞으로 더 그럴 거고, 왜냐하면 그렇게 비판을 외치던 사람들은 곧 사라질 테고, 우리는 결국 이 인간들이랑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우리 자신이 저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들은 필요하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단위의 이론 같은 것들이겠죠. 일상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기술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종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교리처럼 굳어져서도 안 되는 거고요. 『우울: 공적 감정』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건 뜨개질이나 일기 쓰기 같은 단순한 습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습관은 “‘지금 여기’의 유토피아”의 형식을 보여주기도 해요. 이는 “미래를 지금 이 세계를 벗어나 도피하거나 이 세계를 대체하는 페티시로 취급하지 않는” 그런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24

희우
벌써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대화가 많이 길어졌으니 이만 줄여야겠어요. 마지막 인사는 연숙 님의 「비우정의 우정」에서 가져온 문장으로 갈음하겠습니다. “비우정의 우정이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너를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25 제가 연숙 님을 좋은 대화 상대로 느끼는 것은 우리가 비슷해서라기보다는 아주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사이엔 비슷함 속에 약간의 다름이 있는 게 아니고, 큰 차이 속에 아주 미세한 같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숙 님과 대화한 몇 년의 시간 동안, 그리고 이번 대화를 통해서도 저는 이 큰 다름과 작은 같음을 가지고 친구와 놀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 대화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화를 읽어주실 분들도 감사합니다.

  1.  안희제,  『증명과 변명』, 다다서재, 2024. ↩︎
  2. e.g. 서장원, 「리틀 프라이드」(『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상어」(『문학들』 2024년 겨울호); 권희진, 「고쳐 쓰다가」(『Axt』 2024년 3/4월호), 「열다섯 가지 습관」(『Littor』 2024년 10/11월호) ↩︎
  3.  정희진,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2017, 교양인. ↩︎
  4.  박권일, “‘이대남’이 이상해진 이유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마지막 수정: 2024-02-23, 한겨레21 ↩︎
  5. 『인셀 테러: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로라 베이츠, 성원 옮김, 2023, 위즈덤하우스)가 대표적이다. ↩︎
  6. 김원진, ““부모보다 못 산다” 느끼는 남성, ‘남자가 차별받는 세상’으로 생각한다고요?”, 마지막 수정:  2025-01-24, 경향신문, ↩︎
  7. Halberstam, J. (2003). What’s that Smell? Queer Temporalities and Subcultural Lives. International Journal of Cultural Studies, 6(3), 313-333. (Original work published 2003) ↩︎
  8. 제니퍼 M. 실바, 문현아 역, 『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2020, 리시올 ↩︎
  9.  “WWE(은어)”, 나무위키,
    ↩︎
  10. [강연록] “좌파-오타쿠 정치는 가능한가?”, ↩︎
  11. 차민지 기자, <남성 스킨케어소비 세계 1위…화장품업계, ‘남성뷰티 강화한다’> 연합뉴스, 2024. 01. 07.
    https://www.yna.co.kr/view/AKR20240105130800030 ↩︎
  12.  “매력의 두 문제―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매력의 경제학”, ↩︎
  13.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인스타그램 ↩︎
  14.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2025) 참고. ↩︎
  15.  테드 창의 단편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당신 인생의 이야기』 수록) 참고. ↩︎
  16.  Andrea Long Chu and Anastasia Berg, “Wanting Bad Things: Andrea Long Chu responds to Amia Srinivasan”, July 18, 2018, The Point. 이연숙은 이 글의 한국어 번역을 ‘소스충’의 번역으로 접했다. “나쁜 것을 원하기 – 안드레아 롱 추가 에이미아 스리니바산에게 답하다 (안드레아 롱 추, 아나스타샤 버그)”, ↩︎
  17. 안드레아 롱 추, 『피메일스』, 위즈덤하우스, 2023. ↩︎
  18.  앤 츠베트코비치, 박미선, 오수원 옮김, 『우울: 공적 감정』, 2025, 마티, 25쪽. ↩︎
  19.  같은 책, 26쪽. ↩︎
  20.  이연숙,  「비우정의 우정」,  『우정』, 민음사 인문한편, 2023. ↩︎
  21.  『피메일스』, 176-77쪽. ↩︎
  22.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 1994 ↩︎
  23.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
  24.  『우울: 공적 감정』, 352쪽. ↩︎
  25.  「비우정의 우정」, 51쪽. ↩︎

남자, 사람 친구가 될 수 있을까?(1)

―이연숙 평론가와의 대화 1부

1부: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악인의 서사/가시성의 경제

2부: 남성학의 부상/한국 남성성 분석/몸과 외모의 문제/실망에 관하여

희우
우리가 만난 지 한 4년 됐나요? 생각보다 오래됐고, 사실 우리 이야기도 꽤 자주 하는 편인 것 같은데요.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니,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이 누군가, 했을 때 이연숙이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부담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연숙 님이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이미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한 시간이 꽤 되다 보니까, 이야기해볼 법한 주제가 쌓인 것 같아서 이렇게 공개하는 대화를 해보자고 제안했지요.

연숙
대화하자고 말씀해주셔서 기뻤어요. 근데 한 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생각보다 이런 대화가 품이 많이 들고 준비할 것도 많잖아요. 무슨 마감이 있는 대화가 아니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도 되고요. 언제 공개를 해야 하고, 누가 읽을 것이고 이런 문제들을 하나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 제안해주신 게 작년 4월이더라고요.

희우
1년 전이네요.

연숙
드디어 이렇게 대화할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다……(??)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

희우
간단한 소개를 해주세요.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어떤 관심사, 어떤 주제로 글을 써오셨는지.

연숙
기본적으로 미술, 영화, 만화와 같은 시각 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관심사라고 했을 때는 조금 더 구체적인 것들이어야 될 텐데, 제가 지금 딱히 말할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소개를 하는 게 더 좋을까요?

희우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을 키워드 정도……

연숙
아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관점을 담은 글을 써왔고요. 특히 지배 규범과 문화에 복종하면서도 저항하는, 모순적인 주체 양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주체 양식은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판다고 말하긴 어렵겠네요. 제가 전문 분야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만물 비평가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희우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본격적인 주제를 얘기하기 전에 비평 쓰기, 비평을 쓰는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관심사 하나를 꼽기 어렵고, 한 분야를 말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마침 저도 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비평 쓰기에 거의 필연적으로 따르는 어떤 어려움, 뭐랄까 업무적인 산만함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연구자와는 달리, 비평가로서는 새롭게 나오는 작품들이나 문화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에 계속 빠르게 반응을 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딜레당티즘 같은 게 있잖아요. 뭔가 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게 아니라, 피상적으로 이것저것 다 건드리는 그런 태도로써 딜레당티즘이요. 저 자신도 그렇고, 제 주변에 비평하는 분들이 많다 보니, 그런 태도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거든요.

연숙
저도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는 게,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전부 두꺼운 책을 쓴 사람들이에요. 한 5년, 10년씩 어떤 주제에 헌신하는 그런 분들의 연구를 존경하는데, 실제로 제가 하는 일은 보따리 장사나 보부상 같은 일이죠. 그분들의 일이 집을 짓는 일이라면, 저는 그 집 마당에서 풀을 뽑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요. 이건 제가 한 비유가 아니라, 제 친구 중 하나가 언제까지 비평 쓸 거냐고 하면서 저한테 말했던 비유예요. 너 언제까지 풀을 뽑을 거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그런데 저도 알고 있거든요. 풀 뽑는 일이 힘들다는 거. 왜냐면 늘 새로운 풀이 자라나고, 그 풀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건 늘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남들이 뽑아놓은 풀 구경하고 나도 풀 뽑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정말 자주 하죠.
근데 제가 그때 그 친구한테 뭐라고 반박했냐면, ‘풀 뽑는 사람도 있어야지’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진짜 뽑고 싶은가 질문하면 잘 모르겠네요.

희우
저도 요새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서요. 선생님이 저보다 더 오래 많은 글을 써오셨기 때문에, 그런 갈등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있는지 혹은 버티고 있는지 요령이랄까 지혜를 여쭤본 거였습니다.

연숙
못하겠는데요. 전혀 못 하겠는데. 언제부터 글 쓰셨는데요?

희우
한 4년 됐죠.

연숙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평론을 쓰신 거예요?

희우
네, 본격적으로 쓴 지 4년 됐네요.

연숙
저는 지금이 굉장히 많은 작업을 하는 시기이긴 한데, 청탁을 받아온 건 그래도 거의 10년 가까이 된 것 같네요. 햇수가 사실 뭐가 중요할까요. 염증이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생각엔, 방법이 없다, 그만두지 않는 이상에는.

희우
절망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아까 딜레당티즘을 얘기했는데, 그게 비평가를 계속 따라다니는 그림자일 것 같아요. 계속 그것과 경쟁하고 지양하려 애쓰지만,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또 그런 생각도 있어요. 딜레당티즘이라고 하면 어쨌든 폄훼하는 말로 많이 쓰이지만, 또 글을 읽어봤을 때 딜레당트적인 면이 전혀 없는 글은 재미가 없어요. 맥락에서 맥락으로 비약을 하고, 어떨 땐 좀 아무렇게나 짜깁기한 것 같은 면모가 약간은 있는 평론이 읽을 때 흥미로운 것 같아요.

연숙
그건 요즘 일하는 사람들이 다 조금씩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나 심정인 것도 같아요.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고민이 비단 비평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겠죠. 무엇이든 깊이 있게 할 수 없고 표면만 훑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광범위하게 많은 직업군에 퍼져 있지 않을까요? 다들 ADHD고, 모든 게 너무나 빠르고, 다들 포모(FOMO) 상태로 모든 정보를 다 흡수하고 싶어 하고, 놓치면 또 불안해하고. 동시에 빨리 성과 내고 성취해야 되니까 뭐든 깊이 파고드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우리 대부분은 정보를 먹어 치워서 돈을 받는 일을 하는 거나 다름 없어요. 일단 생산이 된 정보니까 누구라도 먹어서 없애야죠. 그러니까 제가 말했던 그런 종류의 두꺼운 책을 쓰는 건, 그런 연구를 하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굉장한 특권의 반증일 수 있죠.

희우
지금 비평 쓰기의 슬픔에 대해서만 좀 얘기를 했는데 기쁨이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요? 그런 순간도 있겠지요?

연숙
그냥 저는 늘 이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 건 기쁘죠. 글 쓰고, 글을 어디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건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그리고 당연히 작가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작품을 먼저 접할 기회를 가진다는 건 비밀스러운 희열을 주고요. 그게 다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희우
저는 아주 몰입해서 글을 쓸 때가 간혹 있는데, 그럴 때는 좋은데요. 그런데 그런 글이 나중에 시간 지나고 봤을 때 잘 된 글인가 하면 언제나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고요. 평론을 누가 읽는지도 모르겠고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보람을 찾아야 하니까 이렇게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연숙
최근에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현상들에 비해서 글 쓰는 일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계엄 이후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진짜 글 써서 뭐 하지, 뭐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이게 과거 세대와의 차이일 것도 같아요. 왜냐면 조금만 윗세대로 올라가면, 굳이 386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70년대생이나 80년대생들이랑 얘기를 할 때는, 그들에게 글은 어쨌든 문화 전쟁의 도구니까 이걸 잘 사용해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주 큰 관건인 것 같거든요.
근데 우리 세대는 압도적인 무력감이 일단 먼저 있죠. 글이라는 것은 일단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전제를 먼저 인정한 뒤에 겨우겨우 다른 가능성이나 희망을 더듬는 과정 자체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과 글을 쓰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마 저나 희우 님도 그럴 것 같고요. 이런 상황을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좀 막막하죠. 뭐 그래도 쓸모가 있다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합니다.
좀 다른 이야긴데 저는 일반화를 위한 세대론은 물론 반대하지만, 경험적 차원에서는 세대 간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거고, 이건 당연한 거죠. 소위 선배 세대들이 우릴 꾸짖는데 거기다 대고 ‘님들이 다 망쳐놔서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라고 대꾸하고 싶어질 때가 있기도 하고요. 물론 저는 그때마다 그레타 툰베리를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배 세대가 된다…… 아니 이미 선배 세대죠.

희우
연숙 님 말대로, 무력함에 더한 산만함이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나 심정, 삶의 양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 했다가 저 일 했다가, 또 굉장히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콘텐츠들도 따라가야 하고요. 근데 그거를 도착적인 수준으로, 너무 성실하게 해버리면, 그러니까 딜레당티즘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면 거기서 굉장히 재미있고 이상한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되네요. 그러니까 삶의 양식은 강요된 조건 같은 것이지만, 글쓰기라는 게 항상 그런 조건들을 전유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또 사실 비평이 아니면 무엇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비평의 프라이드일 수도 있겠다 싶고요. 정신없는 세계에서 정신없이 살면서 수많은 맥락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고 어떤 맥락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것이 비평의 일이 아닐까?

연숙
네, 제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그렇죠.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경우에는 이론들이나 비평들에서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용기나 희망을 얻지만, 다른 사람도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어서 그냥 계속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희우
지당한 말씀입니다.

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

연숙
그러니까 지금처럼 ‘한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대담 형식으로 하게 된 거죠.

희우
예, 우리 한국 남자 이야기하기로 했었죠. 사실 이 주제는 선생님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나 성차(性差), 그리고 ‘젠더 갈등’에 관련된 이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얘기했던 주제지요.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많은 맥락이 이미 쌓여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한 번 대화를 정리하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가 된 것이었죠.
그런데 대화를 읽으시는 분들은 안 그럴 테니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최근에 관심 두게 된 것들, 읽은 것들, 본 것들,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 한번 개괄해보면 좋겠습니다.

연숙
네. 특히 인셀 문제라든지, 아니면 극우화되는 남성들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한국의 ‘이대남’ 관련 문제라든지 이런 얘기는 특히 작년에 꽤 많이 했었던 것 같고요.
그것과 동시에 여성들이 피해자로서만 정체화를 하게 되는 문제, 그리고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 전체에서 어떤 종류의 ‘성별 분업화’가 일어나고 있는 문제, 그리고 이런저런 대세의 흐름들에 대한 어떤 불만들을 좀 공유를 했던 것 같거든요.

희우
몇 가지 구체적인 계기도 있었죠. 유튜브의 어떤 영상이라든지, 최근의 서부지법 사태라든지.

연숙
네, 그 전에는 설거지론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요. 설거지론은 레드필 이론의 한국 버전이라고 할까요. 레드필 이론은 소위 매노스피어, 남성계라고 부르는 남성 중심적 공간에서 발전한, 남성들을 계급으로 분류하는 세계관이에요. 우월한 알파메일, 열등한 베타메일 이런 식으로요. 알파일수록 우월한 여자를 만나서 유전자를 남긴다, 뭐 그런 얘기인데 사실 이게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고, 90년대에 진화심리학 유행할 때부터 계속 하던 말이잖아요. 그걸 다시 리브랜딩해서 레드필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이데올로기처럼 팔게 된 거죠.
한국에서도 2020년대 초반부터 남자들끼리 서로, 혹은 여자들을 깎아내릴 때 ‘설거지해준다’느니 ‘퐁퐁남’이니 하는 얘기들이 본격적으로 가시화가 됐어요. 이제 스스로를 인셀로 정체화하는 남자들도 흔히 찾아볼 수 있죠.
저희 예전에 그거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유튜브 채널 ‘주둥이방송’. 거기서 어떤 인셀이 사연 보냈다가 조리돌림 당했던 편이요.1 그 사람 그냥 여자들이 자기를 안 만나준다고, 여자들은 다 알파만 만나고, 데이트 비용도 안 내고, 그냥 인셀 사고방식 그대로였잖아요. 완전 뻔한 소리 막 쏟아내고. 근데 주둥이가 또 얼마나 못됐어요. 진짜 말로 그냥 깔아뭉개버렸잖아요. “너 여자 만나본 적이나 있어?”, “여자들이 너랑 섹스도 해주는데 너는 뭘 해줄 건데?” 이런 식으로. 그 클립 돌아다니면서 SNS에서 난리 났었고, 욕도 많이 먹고 또 반대로 호응도 얻고 그랬죠. 어떻게 보면 남성 인셀 문화가 가시화됐던 어느 한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희우
저는 그 방송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오늘 할 이야기랑 연결될 텐데요. 그 사연자가 잘못된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잖아요. 논리적으로 구멍도 많고,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일단 듣자마자 불쾌를 느끼게 하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문제적인 건 그 방송 진행자(주둥이)의 논리인 것 같아요. 그걸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주둥이가 완전히 신자유주의적인 논리로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비난하는데, 거기서는 사연자보다 상대적으로 주둥이의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게 되죠.
한편, 역으로 그 사연자는 신자유주의 비판, 자본주의 비판에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비판적 어휘들을 전유해서 불평등이 어떻고, 독점이 어떻고, 분배가 어떻고 이런 말을 쓰잖아요. 물론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식의 전유이기는 하죠. 불평등을 비판하는 담론들에서 그럴듯한 용어들을 가져와서 ‘여성의 분배’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요. 하지만 저는 그 방송에서 나타난 대립 구도가 매우 징후적으로 느껴졌어요. 신자유주의나 능력주의, 불평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의 어휘들은 그런 식으로 오염돼서 뒤틀려버리고, 그걸 방어하는 주둥이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커먼센스’처럼 보이는 구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숙
맞아요. 저도 똑같이 그 방송에 대한 반응으로 ‘주둥이가 맞는 말 한다’라는 반응이 많은 걸 보고 진짜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어떤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만들어서 원하는 걸 쟁취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안 되죠.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상황, 조건에 놓여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억울하면 너도 돈 벌어서 성형해, 억울하면 너도 꾸며서 여자 끼고 다녀’, 이런 이야기를 무슨 진짜 아침 먹고 저녁 먹는 이야기처럼 한다는 게 우리 모두가 능력주의에 미쳐서 단단히 망가졌다는 증거인 거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심정적으로는 그 못난 인셀한테 훨씬 공감이 가거든요.

희우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났는데요. 저도 능력주의가 우리한테 너무 깊이 침투해서 완전히 커먼센스로 자리 잡았고, 그것에 문제조차 느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떤 전문가(뇌과학자인지 정신과 의사인지)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봤어요. ‘사람들이 머리 나쁘다고, 지능이 낮다고 하면 되게 기분 나빠하고 모욕으로 받아들이는데, 너 공감 못 한다, 공감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별로 그렇게 안 받아들인다. 그런데 사실 공감을 못 하는 것도 지능이 낮은 거다.’ 그러면서 공감 능력의 결여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듣거나 볼 때 기가 차요. 사람들이 자기 말의 논리를 점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만약 그 말대로 공감 능력이 지능의 문제라고 하면, 더욱이 공감의 결여를 문제 삼거나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거잖아요.

연숙
그런 사람들은 누가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안타까워서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 나쁘라고 욕하는 거죠. 실제로 ‘지능이 낮다’라는 말이 공격과 비하의 의도로 쓰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너네는 좀 이거를 욕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잖아요. 상황을 개선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거죠. 지능이 낮고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시급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면 그게 회복될 수 없는 선천적인 어떤 결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희우
네, 그러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또 제가 불만을 느끼는 논리 중 하나는 이런 거예요. 흔히 우파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만들고 좌파들은 구조나 체계, 사회의 문제로 생각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이제 뭔가 안 통하는 논리가 돼버린 것 같아요. ‘개인의 책임’과 ‘구조의 문제’라는 구도 자체가 진짜 이상하게 뒤틀려버린 것 같거든요.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원인을 밝히려는 분석이 부지불식간에 결정론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회적으로 이런 위치니까, 이런 성별 혹은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까, 감수성이나 사고방식이나 품행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라는 식의 결정론이요. 이런 구조적 결정론이 윤리적 사고를 봉쇄하면서 윤리적인 책임에서 행위자들을 면제시켜버리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 거지요. 역설적으로 정치적 상상력도 봉쇄하고요.

연숙
지금 많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하고 있는 게 그거죠. 남성 성별 안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이들은 타고나기를 가해자이자 강간범이자 살인자로 타고 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러면 어떻게 그들에게 죄를 물어요. 그냥 본능대로 하는 건데.
오늘날 젊은 남자들, ‘이대남’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해요.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성별이나 조건, 상황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받아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문제를 이해할 수도 개선할 수도 없을 거예요.

희우
이런 사태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읽은 책도 공유를 많이 했었지요. 벨 훅스 얘기도 했던 것 같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2 등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었죠.

연숙
맞아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공유한 주제들에 뭐랄까, 나쁜 취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런 종류의 주제들이 악하기 때문에 끌리는 것도 있거든요. 좀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계속 냄새 맡고 좀 찍어 먹어보기도 하고, 저는 그런 종류의 행위에 재미를 느껴요. 그래서 여기에는 솔직히 좀 떳떳하지 못한, 조금 구린 취향도 있는 거죠.

희우
길티 플래저인가요?

연숙
네네. 그런데 동시에 얘네가 이유 없이 이러는 걸까, 진짜로 그냥 갑자기 미친 걸까? 그렇게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게 있죠. ‘이대녀’들은 멀쩡하고 ‘이대남’들은 갑자기 다 미쳤다고? 이게 가능한가? 분명 그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합리적 의심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희우
저도 비슷하지만, 한국 남성이나 ‘이대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명의 한국 남자로서 느끼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심정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사실 많은 사람이 그럴 텐데) 문제가 되는 남성성이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 같거든요. ‘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 회피하는 마음 혹은 구별하고 싶은 마음이요.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정말 아닐까?’ 반문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죠. ‘왜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제게는 너무 가까이 있는 문제, 그래서 두렵고 혐오스럽기도 한 문제에요. 저도 호기심, 알고 싶음, 당연히 그것도 있지만, 내가 사로잡혀 있는, 피할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숙
그러네요. 희우 님에 비하면 저에게 ‘이대남’은 거리가 있는 주제죠. 저는 FTM 트랜스젠더 스펙트럼에 가까운 퀴어로서 ‘이대남’에게 가끔 동일시할 때도 있고 ‘유해한 남성성’의 특성들을 때로 질투할 때도 있어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옛날엔 더 심했어요. 동일시를 하든 시기를 하든 대상과 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가 돼야 가능한 일이니, 사실은 쭉 나는 남성이 아니라고, 남성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당연히 살면서 한 번도 남성 집단에 속해본 적도 없고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희우 님 같은 방식(‘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은 아니지만 제 젠더 정체성 때문에 각종 남성성 문제를 여러 관점으로 생각해오기는 했어요. 잭 할버스탐의 『여성의 남성성』 같은 책을 읽으면서 남성성을 일종의 장르로 간주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좀 더 편하게 내가 이 분야에 말을 얹어도 되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도 했고요. 우리가 친해지는 속도가 붙을 시점에 이런 종류의 시각 차이도 많이 공유했었지요.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는 처음 겪어봐요. 그러니까 남성으로 사회화된 20대 (주로 시스 헤테로일) 남성의 행동 양식과 정체성이 우리 사회에서 크고 심각한 문제로 성큼 다가온 거죠. 물론 원래도 문제였어요. 처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면서 식민지 남성성, 헤게모니 남성성, 유해한 남성성 이러면서 온갖 남성성의 유형을 공부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 경우 주로 이런 프레임은 폭력적 가부장과 같은 여러 민족적, 국가적 비극을 겪은 아버지 세대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 같아요.3 과거에 비해서 남성들이 더 희한한 방식으로 가시화가 되고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단지 그렇게 규정될 순 없겠다, 이런 생각을 최근에 좀 비판적으로 다시 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저한테 의미 있는 주제가 된 거죠, 단순히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악인의 서사

희우
네. 말씀하신 대로 사실 이론적인 분석은 이미 많지만,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만드는 게 관건이니까요. 그런데 분석이든 변화든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누고 싶은 고민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혹은 이 주제로 글을 쓰거나 관련된 작품들을 조명할 때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있어요. 가령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먼저 얘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지금 한국의 인문학 담론장이나 저널리즘에서 남성, 특히 이대남이 폭력, 성차별, 극우화 등의 문제에 결부된 기표인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나빠 보이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짚어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나쁜 사람들,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굳이 거기에 시간을 들이고 지면을 들이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요.

연숙
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구호가 유행했죠. 아마도 트위터 같은 SNS에서 남성 범죄자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 때 페미니스트 사용자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게 계기인 걸로 알아요. 그리고 이에 관한 어떤 책도 얼마 전에 나왔었고요.4
서사라는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니까 범주를 좀 좁혀 볼게요. 저런 구호가 겨냥하는 건 남성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을 때 판결이 피해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보이는 데 반해 가해자의 불행한 과거나 창창한 미래를 강조하는 어떤 지배적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이 경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건 서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을 면피시킬 목적으로 특정한 서사가 자동적으로 부착되고 유통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인 것 같거든요. 이 구호가 페미니스트 집단의 지지를 얻게 된 건 유독 남성 가해자들에게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동시에는 가해자에게 ‘서사’가 있을 수도 있죠. 정의롭고 ‘선한’ 서사는 아니겠지만 인간이니까 자기 삶을 설명하는 서사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당연히 소위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죠. 근데 이런 판단은 단순히 기계적인 평등이나 중립의 감각일 수도 있어요. 저는 이를테면 레비나스라든지, 주디스 버틀러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작업을 통해서 ‘나’라는 주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걸 들어주는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걸 이해해 왔어요. 타자의 존재가 실제로 내 생명, 내 삶에 필수 불가결한 상호 의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작업을 제가 계속 읽어 왔기 때문에 자동 반사적으로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지,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타자 윤리가 아니라 서울권 4년제 대학을 다니며 타자 윤리를 말하는 두꺼운 책들에 반복 노출된 결과겠죠…….

희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런 이론들, 결정 불가능성…… 타자…… 윤리 어쩌고 이론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한다고,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해하는 것과 면죄하는 건 다른 일이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왜 이 둘을 계속 혼동하게 될까? 서사를 부여하면 인간적으로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연민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뭔가 단호하게 처벌을 하거나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질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이해하면서 처벌해야 한다,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해가 처벌을 어렵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잘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물론 엄청 많은 딜레마가 있겠지만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특정한 의도로 부여되는 ‘자동적인 서사’가 아닌 서사를 추구해야 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옛날에 유일신 종교들에서 성상을 금지했던 걸 생각해보면요. 신이 재현되면 안 된다는 게, 유일하고 신성해야 하는 신이 재현되어서 세속적으로 되고, 다양해지고, 인간적으로 되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안 된다’ 같은 생각은, 그런 성상 금지를 도착적으로 뒤집은 방식으로 악에 적용하는 거라고 봐요. 순수하고 추상적인 악으로만 남겨놓기 위해서요. 악이 우리한테 가까이 오고, 세속화되고, 다양한 면을 갖게 되면 정상적인 것과 악을 선명하게 구분하기가 당연히 어려워지니까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어려움이, 버틀러를 따라 말하자면 윤리적인 사고의 공간인 것이고,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의 공간일 텐데요. 그리고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그런 얘기도 했었지요.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이 구제될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윤리적인 사고의 여지를 파괴해버리는 일이 된다고.

연숙
그렇죠.

희우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처벌하거나 윤리적인 책임을 묻거나 하는 일들은, 그 사람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고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 사람이 ‘마치 선을 선택할 만큼 자유로운 것처럼’ 가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악을 처벌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페미니스트이건 안티페미니스트이건 상관없이, 점점 사람들 사이에 극도로 강화되는 엄벌주의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트위터에서든 네이버 댓글에서든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인데, 저런 애들은 갱생시킬 수 없고, 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려해야 된다, 사형시켜야 된다, 이런 말들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달라질 수 없다면, 그게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든,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든 그 사람이 악한 일을 하도록―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일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거죠. 그 사람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거라면 역으로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거잖아요. ‘당신은 생물학적인 수준에서든, 환경적인 수준에서든 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윤리적인 책임은 없지만, 이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당신을 격리하겠다 혹은 죽이겠다.’ 이런 방식은 경제적으로나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있어도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죠.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우리가 악인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됐는지, 다른 길은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는 게 따뜻하고 물렁하고 관대한 마음씨를 가져서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 처벌에 대해서든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든 사고할 여지 자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또, 『윤리적 폭력 비판』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 책에서 버틀러가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어떤 주체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의 의지를 박탈할 정도까지 되어선 안 된다.5 왜냐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일단 살고자 하는 욕망 위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 대목은 버틀러가 윤리적 비판이 어떤 한계를 가져야 하는지 말하는 부분이라서 저에게는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오해를 살 수 있고 욕을 먹을 수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사실 너무 많은 경험적인 혹은 저널리즘적인 사례들이 있잖아요.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나쁜 짓들을 많이 하는지. 데이트 폭력부터 서부지검 난동에 이르기까지. 근데 이런 역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절대 구제할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 역설적으로 그 사람들을 점점 더 도덕적인 고려에서 면제해 주는 효과가 생긴다는 거예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옳게 될 수 없고 감수성을 갖출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윤리적으로 살고 싶고 그런 감수성을 갖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한테는 계속해서 어떤 도덕적인 책임이 부과되지만, 이미 윤리적 담론이나 페미니즘이나 여하한 진보적 가치를 등진 사람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 것이죠. 어차피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요.

연숙
네. 저도 동의합니다. 굉장히 원론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인간은 특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존재 그 이상이고 그럴 수 있다는 걸 믿어야 나 자신도 이해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오해받을 수 있고 욕먹을 수 있다고 해주셨듯 특히 요즘에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어렵죠. 그럼 지금 뭐 조주빈 같은 애들도 이해하자는 말이냐? 네, 이해하자는 말이긴 해요. 그 이유는 당연하지만 인간 종이 지배 종으로서 지금 지구 하나를 같이 공유하고 있고 어떻게든 다 함께 끝까지 잘 살아 남아야 되는데(혹은 잘 죽어야 되는데) 자꾸 특정 개체, 특정 부류에만 예외 조항을 둬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특정 개체, 특정 부류가 구제 불가능한 완전한 악으로 규정된다면 답은 그들을 그냥 지구에서 없애는 수밖에 없잖아요. ‘최종 해결책’과 같은 그런 예외 조항이 누군가에게 적용 가능하다면 곧 나에게도 그렇겠죠. 모두에게 그럴 거고요.
사실 근데 참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다, 그래서 지금 한국 남자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 조심스럽다…….

희우
네. 이 대담은 주제 자체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계속 달라지는 와중에 있다는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나이브하고 낡은 휴머니즘 운운으로 받아들여질 텐데, 만약 지금 우리가 그런 가능성을 계산에 넣지 않고 생각하면, 선택지가 내전밖에 남지 않을 거예요. 저 사람이 달라질 수 없고 내가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선택지는 상대가 어떤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집회를 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을 제거하거나, 억류하거나 권리를 박탈하는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연숙
네. 자칫하면 지금 저희가 한국 남성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특별히 누구 편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편이 문제죠.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여성들도 트랜스젠더, 외국인 혐오가 심각하고 인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인터넷 바깥으로 눈을 돌리려 해도 연일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뉴스가 쏟아지고요.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봐도 그렇죠.
계속 주디스 버틀러 얘기를 하게 되는데, 버틀러가 『비폭력의 힘』에서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정신분석학자를 경유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6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사람은 대상 관계 이론의 창시자인데요. 인간이 유아 때부터 특정 관계를 통해 자신의 불안, 시기를 다룬다고 보는 이론이에요. 당연하지만 이 관계란 어머니와의 관계일 가능성이 크겠죠. 젖을 빠는 유아들한테 어머니 역할은 딱 두 가지밖에 없겠죠. 하나는 젖 주는 엄마, 다른 하나는 젖 안 주는 엄마. 젖 주는 엄마는 좋은 엄마죠. 안 준 엄마는 나쁜 엄마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유아의 머릿속에서는 이분법적으로 양분된, 극단적인 두 가지 사고에서 비롯된 분열된 어머니가 존재하는 거예요. 초기에 이러한 극단적 분리는 유아로 하여금 좋은 엄마를 나쁜 엄마로부터 분리된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게 돕고 자신의 파괴적 충동을 나쁜 엄마에게 투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멜라니 클라인은 편집 분열적 위치로 설명해요.
한편 유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에 대한 파괴적 충동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어머니가 자신과 분리된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하고 상실감을 느끼기도 해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도 느끼고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어머니를 염려하고 애도하면서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상태가 오는 거죠. 이걸 우울증적 위치라고 불러요. 근래 소소하게 국내 문학 비평가들에게 유행했던 세즈윅의 ‘회복적 읽기’가 이런 관점에서 오기도 했고요. 멜라니 클라인은 나쁜 엄마를 죽이고 좋은 엄마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편집 분열적 위치를 제대로 우울증적 위치로 바꿔내지 못하면 앞으로 사는 게 굉장히 어려워진다고 말해요. 하지만 안정적으로 어머니와 분리되면서도 그 분리를 애도할 수 있는 위치에 우리는 생애 단계 어디서든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유아 때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실 평생 우리는 두 위치를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버틀러는 클라인의 이 논의를 가지고 와서, 타인을 절멸시키거나 또는 ‘쟤는 어떤 부분은 좋지만 어떤 부분은 죽이고 싶어’라는 방식으로 타인을 분리, 절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같이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거든요. 생애 초기 단계에서 가장 강렬한 애착 관계에서 가능한 의존 방식을 전 인류에게 확대해 적용해보자는 거죠. 꼭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모두 한 번은 유아였단 말이죠. 유아 시기에 우리는 모두 최약체였고 최약체인 우리를 누가 돌봐줘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단 말이죠. 이렇게 최소 단위에서 출발해보자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생존자죠. 우리는 전부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끔찍한 생명체였어요. 그런 시기를 화해와 용서의 드라마로 다시 재구성하려는 버틀러의 노력은 놀랍고 아름답죠.
어쨌든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안다면 누가 좀 거지 같아도 참고 견디거나 그런 부분을 포함해서 그 사람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그러지 않는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뭐 전쟁이죠, 그 누구를 죽여야 하니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에 불과하지만요. 누가 나랑 똑같지 않다고 해서 죽이는 건 그냥 투사된 형태의 자살이기도 해요. 그러지 말고 그냥 우울해하는 게 낫다. 너랑 나는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게 정말 단순한 이야긴데 어렵죠. 저도 늘 어렵고요.

가시성의 경제

희우
네,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악인의 서사’ 문제에 이어서, 이 문제도 잠깐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한 건 일반적인 차원의 인문학적 논의라면, 이건 좀 더 동시대의 SNS라든지 매체와 관련된 문제인데요. ‘가시성의 경제’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노출되거나, 재현되거나,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기회 자체가 희소한 자원이고 그것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인데요. 누군가가 문화에 노출이 되고 재현되고 발언권을 얻으면, 그 상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이나 권리를 제한받거나 박탈당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당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자원 경쟁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들, 지금까지 소외돼 있었던 사람들, 혹은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을 조명하는 것만 해도 관심이나 가시성이라는 자원이 부족한데 나쁜 놈들 혹은 기득권층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까지 지면이나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죠.

연숙
지금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얼핏 드는 생각은,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들 이야기 별로 재미없어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봤자 내 삶에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알면 알수록 내 삶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피하죠. 다만 ‘인간 극장’ 같은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거는 괜찮아요. 그거는 자극을 추구하도록 세팅된 인간의 뇌에 되게 좋은 먹이를 주니까. 뭐든 포르노화하면 자극이 되고, 그래서 재밌어져요. 전통적인 재현 논의에서 가시성이라는 주제는 권력 구조와 관련이 깊었는데 오늘날 인터넷 문화 안에서 가시성은 그냥 전두엽 자극을 뜻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시성 경제 내에서 누가 더 파이를 차지하느냐는 결국 누가 더 이 경제의 논리를 잘 이용할 것인가, 이런 논의로 귀결되겠죠. 이를테면 우파 알고리즘에 맞서는 좌파 알고리즘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요. 홍진훤 작가의 작업 <DESTROY THE CODES>(2021)이 그런 예시 중 하나죠.7 이 작업은 관심 경제의 파이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하는 ‘저항’을 하자고 요청하고 있죠.
저는 이런 논의에 동의하는 동시에 어느 날은 그냥 전혀 인터넷을 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인터넷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그냥 접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2000년대 초반과 다르게 지금은 인터넷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그냥 그 안에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거지…… 문제는 그러니까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를 어떻게 좌파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할 것인가, 혹은 거꾸로 어떻게 좌파 자체를 그런 경제에 유리할 수 있도록 재교육할 것이냐는 질문이 아니라, 애당초 가시성을 화폐 삼게 만드는 인터넷이라는 환경과 우리가 맺고 있는 이 애증 어린 관계 그 자체에요. 인터넷은 환경이에요. 지저분하고, 더럽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환경이죠. 마치 난곡동과 같은 거죠……. 죄송합니다. 저희 동네[이연숙과 이희우가 사는 동네]가 난곡동이라서요. 저에게 난곡동을 받아들이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그냥 제 삶에 따라오는 조건이죠. 인터넷도 마찬가지고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런 조건을 바꾸기란 무척 어려우므로 능동적으로 조건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개발하고 협상하는 전략도 필요해요.
정리하자면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주조해 낸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 ‘조회수’ 경제가 아닌 다른 원리를 통해 인터넷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미 자극 추구에 쩔어버린 머리를 뭐 어떻게 디톡스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전략을 고안해 봐야죠. 가끔 저는 유튜브에서 어떤 아마추어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놀라운 애니메이션을 발견하곤 하는데요. 일정 시간을 들여 주목 경제의 바깥으로 밀려난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그로 인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대단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험은 여전히 짜릿하고 놀라워요. 주목이라는 화폐를 둘러싼 자원 경쟁 문제로만 보자면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자’는 주장은 당위가 있어 보이지만, 자극적이기만 하면 팔리는 인터넷 환경 안에서 악인에게 줄 주목이 자동적으로 선인에게 분배되는 건 또 아니잖아요. 파이 싸움 외에도 다른 방식의 싸움이 가능해요. 사회 1면에 실리는 걸 부러워하는 게 전부가 될 순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해주신 질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희우
어…… 그렇죠. 사실 범죄 기사나 포르노화된 재현은 좀 극단적인 사례들이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도파민이 자극되고 관심이 쏠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가시성의 경제를 언급하면서 제가 이야기하려던 건, 최근 한국소설들이 흔히 다룰 법한 인물들, 그러니까 적당히 악하고 적당히 착하기도 하고 적당히 문제적인, 그런 대부분의 사람 이야기에요. 그러한 이야기의 장에서 ‘가시성의 경제’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거죠. 노출되고 재현되고 많은 지면을 갖는 일 자체가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가령 ‘여성 서사’에 부여되는 중요성처럼, 소수자나 여성 인물을 많이 재현하고 내세우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경향에 대한 거예요. 반대로 나쁜 사람들 혹은 기득권층에게 서사나 지면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연숙
아, 네 그렇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죠.

희우
하지만 이제(바야흐로) 이 문제를 깊이 재고해 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꼭 노출되거나 재현되는 게 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인가? 혹은 어떤 재현이 정체성/동일성에 호소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여기에 ‘그렇지 않다’라고 해야 우리가 어떤 경쟁심 같은 것 없이 재현된 인물을 다룰 수 있게 되겠지요. 현재는 가시성의 경제와 관련해서 상반된 두 가지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나쁘다’는 편견이고,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좋다’는 편견인데요. 첫 번째 편견에 따르면, 보이는 대상이 되는 것은 나쁘다, 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거죠. 가령 여성이 보이는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의 생각.
이 오래된 생각은 지금 우리 관점에서 보면 너무 투박한 것인데, 많은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고 싶어 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욕망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전유하기도 하고요. 여기에서 정반대의(좀 더 최신의) 두 번째 편견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건 ‘보여지는 것은 좋다’라는 편견이죠. 그런데 가시성 자체는 희소한 자원이고, 누구나 마음껏 보여질 수는 없으니까, 보이기 위해(가시성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는 거지요. ‘보여지는 것이 곧 좋은 일이다’라는 선입견은 악인을 재현하는 것이 어떻게든 악에 이익이 된다는 생각하고도 붙어 있고, 여성을 많이 재현하는 것이 곧 여성에게 이롭다는 식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 두 가지 편견(전제)을 비판하는 논의와 비평이 존재해왔지만, 한국의 문화나 문학장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로 보여요. 짧은 강의 경력 중에, 저는 이런 생각이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요. 작품이 악인이나 문제적인 인물을 재현하기 때문에 나쁘고, 소외된 인물이나 소수자를 재현했기 때문에 진보적이라는 식의 생각. 제가 보기엔 언급한 두 가지 편견이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사고를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연숙
페미니즘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늘 어려운 상황에 처하죠.8 주류 페미니즘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놓고 봤을 때 여태까지 여성 재현이 부족했으니까 이제는 양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쭉 해왔어요. 여성 정치인을 예로 들면, 지금 여성 대표가 부족하니까 여성 의원을 더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정치에서 쿼터제를 적용하듯이, 이런 방식이 소설이나 예술 같은 장르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여성 서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여성 인물을 더 자주 재현해야 한다는 요구가 바로 그런 양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인 거죠.
그런데 방금 말씀한 것처럼 기계적 평등을 따르는 게 과연 페미니즘에 항상 긍정적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하죠. 여성 재현이 늘어야 하고 여성 권리가 확대되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보존될 필요가 있거든요. ‘여성’이라는 범주가 계속해서 약자로, 피해자로, 소수자로 남아야지 양적 평등에 대해 말할 명분이 생긴다는 거죠. 우린 약자다, 피해자다, 소수자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여태까지 너네가 부당하게 빼앗아 간 ‘파이’를 더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거죠. ‘여성’으로 남아 있는 대가로 당장의 ‘파이’를 지불받게 되는 건데요. 이게 과연 긍정적인가, 정말로 여성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가, 반드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요즈음 문학계, 더 정직하게는 문학 시장 내에서도 ‘여성 작가’를 선호하고 또 강조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물론 그 여성 작가와 여성 서사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다양성이 발견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기야 하겠지만, 또한 ‘여성 작가’로 호명되는 대가로 ‘특정한’ 여성 재현, 여성 서사만을 반복해서 생산하게 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재현이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현실을 재생산하기도 하구요.
정체성 정치와 관련해 다른 이야기를 더 이어서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가기 힘든 이유는 진짜 이게 자원이라서 그래요. 그냥 이게 정말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고 지금 우리 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 안에 살고 있으니까. 예컨대 제 지인인 30대 시스 헤테로 남자 작가는 머뭇거리며 제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퀴어나 페미니즘에 대해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요즈음 남자 작가가 너무 인기가 없어서 청탁도 잘 없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고. 저는 그 분에게 작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런 분위기는 역사적으로 다 ‘한때’에 불과하다고,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농담으로 답했지만,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다들 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죠. 요즘 이게 인기가 없다. 남자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여자 이야기가 대세다, 이런 식으로 다들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희우
말씀을 듣고 나니 더더욱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어떤 작가에게 청탁이 많이 가거나 덜 가는 건 단순히 정체성이 이유일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작가의 감수성이나 감각도 그의 정체성과 관련이 없을 수 없고, 지면이나 관심의 특정한 분배가 그 정체성-감수성을 틀 짓는 전형적인 구획들을 강화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어쨌든 가시성 자체를 경쟁하고 획득해야 하는 자원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흔들 필요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남성 인물, 특히 문제적인 남성 인물을 다루는 게 여성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반대로 여성 인물들이 인기가 많기 때문에 남성 이야기를 쓰는 남성 작가가 설 자리가 없다…… 같은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1. 주둥이방송, “[분노주의] 살면서 만나기 싫은 한심한 유형 1위”, ↩︎
  2. 스기타 슌스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명다인 옮김, 또다른우주, 2023. ↩︎
  3. 식민지 남성성에 관해서는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지음, 교양인, 2017), 『남성성과 젠더』(권김현영, 정희진, 한채윤, 루인, 엄기호, 나영정 지음, 자음과모음, 2011), 『페니스 파시즘』(강준만, 노혜경, 진중권, 이명원, 김현수, 시타, 정승화, 권김현영, 김진희 지음, 개마고원, 2001) 등 참고. ↩︎
  4. 『악인의 서사』(듀나 , 박혜진 , 전승민 , 김용언 , 강덕구 , 전자영 , 최리외 , 이융희 , 윤아랑 지음, 돌고래, 2023) “창작 서사의 이런 입체성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명령만으로 특정 작품의 재현 윤리를 온전히 가늠하기란 무리에 가깝다. 여기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악의 서사와 재현의 문제를 엄밀히 논하려면 적어도 이 한 줄짜리 문장에 멈추기보다 이로부터 상세하고 정연한 고찰을 시작해야 한다.” (출판사 책소개 중에서) ↩︎
  5.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88~89쪽. ↩︎
  6. 주디스 버틀러,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이연숙은 이 글을 박준호가 번역한 “왜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가?”으로 처음 접했다. 웹진OFF) ↩︎
  7.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홈페이지 참고, ↩︎
  8.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조앤 W. 스콧, 공임순, 최영석, 이화진 옮김, 2006, 앨피)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