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2)

4. 학자의 간계

오늘날의 온라인 소통환경은 학자에게 흥미롭고 불안한 이중성을 허용한다. 대학이나 학술지를 ‘지식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SNS나 블로그 등은 ‘의견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학자와 전문가는 이 두 공간 모두에서 숨 쉴 수 있는 수륙양용 존재로 변이 중이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학자는 때로는 지식의 이름으로, 때로는 의견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래서 종종 학자의 블로그나 SNS는 완전히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고, 학자로서의 책임을 요구하기도 요구하지 않기도 애매한 회색지대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비평이 주목해야 하는 공간이 바로 지식과 의견 사이의 그 현란하고 시끌벅적한 ‘회색지대’다.1

김창환 교수 역시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그는 블로그에서 《시사IN》 인터뷰의 후일담을 들려줬는데, 그 ‘후일담’이 트위터 등의 SNS에 캡처된 사진이나 하이퍼링크의 형태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 역시 친구의 공유를 통해 사회학자의 블로그에 접속하게 되었다.

블로그에서 학자는 반박에 대한 재반박도 열심히 했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는 사실이다’라는 조사 결과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으로는 먼저 ‘내부다양성 논리’가 있다.2 사회학자는 이것을 ‘허약한 논리’라고 부른다. 청년들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뭇 당연한 이야기다. 이준석을 지지한 청년들 속에도 다양성이 있다. 다시 『리바이어던』의 표지를 보면, 리바이어던의 형상에 이미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지 않은가. 집단 내부에 다양성이 있다고 해서 큰 경향성을 파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예외 사례도 반증이 되지 못하는데, 사회학자는 자신의 조사는 어디까지나 커다란 경향성을 판별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다양성 논리를 기각했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과 반박 들이 있다. 학자는 그 의문과 반박을 다시 한번 차단하려 하면서 더 문제적인 쟁점으로 옮겨간다.3 점점 인식론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또한 윤리적인 쟁점이 대두된다. 학자는 반박하는 자들에 대한 분류를 시도한다.

다양성론이 기각되었는데도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

사회학자의 요점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가능태론은 청년 남성들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불가지론은 더 유보적인 입장인데, 청년들의 진짜 성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고 따라서 그들을 규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둘 다 근거가 빈약하지만, 불가지론은 특히 더 허약하다. 불가지론은 최근 20대 남성의 정치적 선택이 꾸준히 보수적이었다는 일관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문제는 가능태론·불가지론을 반박하는 사회학자 자신의 논리도 못지않게 이상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지론이 왜 인기를 끄는가? 불가지론에는 우리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당사자들의 외침이 들어있다. 누구나 자신을 한 가지로 규정짓기를 꺼려한다. 개인은 항상 다양하고 중첩적이니까.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능성을 가지기에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자”는 절대자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하여간 신이 누구인가를 논할 때 나오는 논리가 이거다. 트럼프도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한편으로 힘에 대한 숭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불가지론은 20대 남성 당사자들의 논리가 되기 쉽다. (같은 곳)

여기서 학자의 논리는 자신이 비판하는 불가지론 만큼이나 이상해진다. 누군가 규정짓기에 저항한다면, 그는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에서 벗어나려면 규정짓기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납득하기 힘든 논리다. 어쩌다 “힘에 대한 숭배” 이야기까지 나온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학자는 왜 이렇게까지 확고한 ‘규정짓기’를 하고 싶어 하는가? 학자가 이렇게 비약으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블로그가―학술적 발표나 논문과 달리―지식의 시험(동료 학자들의 견제와 비판)으로부터 어느 정도 면제된 의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이 보통의 의견보다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그가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라인 소통공간에서 학자가 누리는 이중성이 있다. 즉 그는 지식의 권위와 의견의 자유를 동시에 누린다.

위의 문단에 반박해보자. 첫째,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해석에 저항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고 살아있는 존재의 마땅한 권한인데, 잘 알려져 있듯 해석은 권력의지의 행사4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타자의 권력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스스로 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관심의 문제’로 여기면서 타인의 삶은 (이미 규정된) ‘사실의 문제’로 간단히 치부한다는 데 있다. 성인(聖人)이 아닌 다음에야, 아마 우리 모두에게 얼마간 그런 성향이 있을 것이다. 이 딜레마 앞에서 도덕적 당위를 주장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런 것처럼 네 삶도 규정됨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기보다는 ‘타인의 삶도 네 삶만큼이나 규정하기 힘든 것임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둘째, 이 학자가 비판을 차단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잠재적 비판자가 자기 의심(‘혹시 내가 자기애에 판단력이 흐려진 이대남 당사자일까? 내가 불가지론에 빠진 것일까? 어쩌면 나는 맹목적으로 힘을 숭배하는 트럼프 지지자일까?’)에 휘말리도록 은근히 유도함으로써 반박을 미리 차단하고 있다.

셋째, 그가 말하는 통계적 ‘규정짓기’야말로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치안장치의 핵심 부품이다. 사회학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구집단들의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을 어떻게든 식별하고 고정하려는 의지야말로 트럼프 정부의 야만적이고 파렴치한 인종차별 조치들(유학생의 구금이나 ‘불법’체류자의 추방 등)을 뒷받침한다. 반대로 다중에 대한 완전한 식별과 규정은 불가능하다는 진실이 저항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정치적 주체화는 할당된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잘못’에 의해 시작된다.5 사람들은 대의제 정치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고, 사회학적 지식이 자신을 재현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재현되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의 대표/지식의 재현에 저항한다. 바로 그 저항에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저항적 정치는 통계적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계적 사실에 ‘대해서’ 가능하다.

같은 게시물에서, 학자는 가능태론에 대해서도 허술한 비약처럼 보이는 문단을 덧붙인다.

가능태론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무한한 가능태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 이런 심정에서 벗어나 20대 남성도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어른으로 대접하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이는 20대 남성을 특별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로 한 말일 테다. 그 의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들만을 온정적으로 대우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떤 순간의 ‘결과’에 의해 규정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20대든 70대든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도 다른 이들처럼 결과로 평가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순간의 결과로 그 존재를 평가할 수는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자애로운 어머니’ 운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너무 손쉬운 도덕적 비난을 더 이어가지는 말도록 하자. 여기서는, 학자가 미리 설치해둔 두 선택지에 은근하게 괄호가 덧붙여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엄마의 심정’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일 것이다).

이처럼 학자는 자신의 조사 결과나 주장에 뒤따를 수 있는 불만에 미리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반박을 차단한다. 이렇게 교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반박은 사회학자의 심증을 오히려 강화하는 재료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화를 내면서 ‘20대 남성은 극우가 아니다!’라고 댓글을 단다면 ②로 수렴될 것이다. 누군가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에게 다른 면모나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요?’라고 쓴다면 ①로 수렴될 것이다. 어떤 감정적인 반론 혹은 경험적인 반증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이런저런 반증을 제기하는 대신, 학자가 사용하는 논리의 전제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직행해야 한다. 학자의 논리를 90°기울여 그의 방어가 어떤 분할을 전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❶ 과학적 방법과 잘못된 인식론들(가능태론, 불가지론 등)의 대립
❷ 객관적 조사와 주관적 관점들(‘당사자’나 ‘어머니’의 관점)의 대립

이것은 뭇 학자가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아닌가? 당사자와 그의 친지―바로 사회학자가 조사하는 사회의 내용인 사람들―는 자신의 상황을 거리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감정과 선입견을 배제하도록 과학적으로 훈련된 사회학자만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따라 조사한 경우에 한해, 그들의 상황과 성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는 무지한 자들과 학자의 분할을 수립하면서, 즉 의견과 지식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방어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에 ‘형식’을 부여하는 엘리트와 사회의 ‘질료’가 되는 보통 사람들의 오래된 분할을 수행적으로 정당화한다. 당사자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말하지만, 사회학자는 ‘훨씬 많은 사람’에서 뽑아낸 통계적 데이터에 기반해 말한다. 통계가 거시적으로 될수록, ‘그저 한 사람’의 이탈과 예외와 저항은 무력해진다.

물론 블로그의 주인은 학자답게 비판에 열려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의 문은 교묘한 회전문이어서 아마추어리즘과 비과학의 문을 닫는 방식으로만 열릴 것이다. ‘내 과학을 비판하려면 당신도 과학을 하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물론 이 통계 분석은 부정확할 수 있고 맹점도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통계의 한계가 아닌가. 불만이 있으면 더 날카로운 통계와 분석을 해보라.’ 지식의 이름으로 말해진 것은 다른 지식(동료 학자)의 비판만을 허용한다. 이것이 ‘누구나 아는’ 학계의 작동방식이다. 이것은 한 학자의 탓이 아니며, 대학과 학술지로 대표되는 지식생산의 구조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말하고 있는 분할은 특정한 지식인을 비판할 이유라기보다는, 달라지는 소통환경 속에서 인문사회학자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오늘날 학자는 대학이나 학술지와는 확연히 다른 소통공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 탈 많은 회색지대에서 이미 많은 학자가 자신의 지식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 ‘다른’ 공간에서 ‘같은’ 과학을 하려는 태도는 온당한가? 대학이나 학술지에서의 지식생산이 요구하는 선명한 분할―자연어와 학술어, 의견과 지식의 분할―을 이 공간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지식의 권위로 의견을 찍어누르려는 일밖에 안 된다(그러는 동시에 전문가와 학자는 의견의 공간이 허용하는 느슨함과 분방함을 누릴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오늘날 음모론과 확증 편향, 반지성주의가 큰 문제라고 해도, 전문가의 앎을 대중의 무지에 대립6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학자와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느린 과학”7을 시도함으로써 그 문제에 맞서야 한다. 학술 공간에서 생산된 지식의 열화된 찌꺼기를 갖고 와서 대중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공간에서 함께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블로그에서 학자의 ‘의견’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제시하는 통계의 결과를 (그 작동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채로) 그저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가망 없는 반박을 계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지식과 의견의 분할이 한 사회학자를 특히 비판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해도, 다음의 문제는 확실히 비판해야만 하겠다. 학자가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특정한 ‘정체성’의 함정을 설치했다는 것 말이다. ‘만약 조사 결과에 계속 반박한다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 혹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나는 권위 있는 학자가 이런 식의 발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로 느껴진다. 이 글 역시 사회학자의 위치를 묻고 있지만, 이는 사회학자의 정체성(그의 나이나 성별, 인간관계 등)에 대한 시비가 아니다. 그런 시비는 비판의 탈을 쓴 인신공격이 되기 쉽고, 비판이나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활용되는 경우에는 특히 비겁한 짓이다. 오늘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은근히든 노골적으로든 논박하는 상대의 정체성을 겨냥하고 공격하는 발화를 볼 수 있다. 당신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의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이러저러한 정치적 관점을 가졌다면,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여자를, 여자라면 남자를,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대남을 이해하거나 옹호한다면, 당신이 바로 문제의 그 이대남 당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야말로 강력한 수행적 발화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가 사회적 정체성에 각각의 감각 방식과 감수성, 사유방식 등을 할당하고 고정하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사회적 정체성들 사이의 감성적 분할이 실제로 완고해진다.

5. 사실은 실재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몇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로, 나는 지금 단지 ‘숫자 뒤에 사람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구집단에 대해 양적 통계를 하지 말고 사람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미시적’ 연구를 해달라고 사회학자에게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거시적 연구가 흔히 사실로 전제하는 ‘사회구조’가 그 자체로 해명되어야 할 문제인 것처럼 개인들에 밀착한 미시적 연구의 ‘진정성’ 역시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비판적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미시/거시의 층위를 나누는 일 자체, 그 층위가 분화하는 과정 자체다. ‘그저 한 사람’은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가, 그리고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기에 이르는가? 이 성장/분화의 과정은 무엇이 변하기 쉬운 요소이고 변하기 어려운 요소인지를 결정하고, 무엇이 그저 한 명의 개인이고 무엇이 지속적인 구조인지를 결정하며, 무엇이 망상이고 사실인지를 구분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둘째로, 나는 언론이나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가 객관적 실재와 동떨어진 담론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사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나 역시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오늘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묻고 있으며, 나아가 오늘의 사실이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고, 말 걸고,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셋째로, 나는 ‘정말로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자기계발서형 미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낙인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말의 주술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말의 수행성을 문제 삼고 있다.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는 사실이지만, 그의 조사는 사실의 바깥에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사실이 되는 과정에 내재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대해 말함으로써 어떻게든 자신이 말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필연적으로 사회학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구성하는 ‘수행적 학문’이 된다. 관측/진술되는 대상이 관측/진술하는 행위의 영향을 받는다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관측/진술 주체의 위치를 설정할 수 없다. 최선의 경우 그 관측/진술은 개연적이다.8 정치인도 사회에 대해 말하고, 사회학자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 모든 진술은 그 나름대로 사회의 수행이다. 이것은 그저 정치인·전문가와 시민·아마추어의 경계를 흐리고 그 위계를 평탄화하려는 주장은 아니다. 정치인·전문가의 말은 정확성이 아니라 강력한 수행성·견고한 개연성 때문에 보통 사람의 말과 변별된다. 사회학자의 진술은 사회에 대한 보통 사람의 진술보다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다. 사회학자는 주관적 망상과 객관적 사실, 의견과 지식이라는 층위의 차이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활용해야 하는지 아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지식’은 가장 반박하기 어렵고 견고하며, 종종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 대한 의견의 개연성 있는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거나 사실로부터 도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라투르의 지적 이력을 살펴보는 게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9 하지만 실재론과 구성주의를 둘러싼 그의 논쟁적 이력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사실’에 대한 라투르의 대원칙은 이것이라고 본다: 사실은 실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토록 많은 오해와 비판을 샀던 글10에서 라투르가 정말로 하고자 한 이야기였다. 사실은 존재를 나타내지만, 존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사실은 변이와 지속의 과정에 있는 존재의 일시적인, 잠정적인, 빈약한 대리물일 뿐이다.

사실의 완고함—“당신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것은 거기에 있다”—은 “미국을 사랑하라, 아니면 떠나라”라고 외치는 정치적 시위자들의 완고함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한 구호는 진동하고, 명료하고, 억세고, 의연하고, 장기적인 존재의 아주 빈약한 대리자substitute이다.11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여기라”12고 명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사유를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했다면, 라투르는 ‘사물을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matter of concern로 여기라’고 제언하면서 전통적이고 정석적인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을 뒤집으려 한다. 사실은 논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논의의 대상이다. 한 번 정립된 사실조차도 언제나 다시 열리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는 사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사실을 상대화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냉혹한 과학적 사실에 인문학적(인본주의적)으로 따뜻한 말 몇 마디를 장식처럼 덧대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실에서 꿈으로 도피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보자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 ‘배후’에 숨겨진 의도, 구조, 세력, 권력을 폭로하고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실을 구성할 가능성을 찾고 그 가능성을 실재화하기 위함이다. ‘오늘 사실인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만들 것인가?’ ‘오늘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되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난해한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변하기 힘든 사실이라면, 우리는 거의 모든 동료, 친구와 마찬가지로 극우화되었다는 이들과 이 땅에서 평생 함께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청년 남성 극우화’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로 들여다보라. 청년 남성들이 어여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볼 때만 변화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13 비판의 초점을 옮기자는 제안은,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말이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사물의 주름을 펼치자는 말이다.

나는 당사자로서 내가 규정되지 않고 싶다거나, 아니면 자애로운 보호자의 마음으로 젊은 남자들을 극우화에서 ‘구제’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대신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이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으로 정치적 입장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페미니즘인지를 논쟁하는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나는 북한에 대한 제제나 중국에 대한 호오(好惡)가 더 이상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는 장애인이나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정치적 선동과 결집의 도구로 활용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나는 장애인과 소수자의 권리를 정당이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한 사회가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변화를 희망한다면, 이미 특정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중요해진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 질문들이 지금처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 되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질문이 새로운 사회적 사실을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6.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김창환은―계속 부정적인 사례로 언급하여 송구하지만―현 상황에서 (거대양당 구도의) 대의제의 불가피한 성격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드러낸다.

거의 다른 모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대의제다.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유권자가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대략적인 지향성으로 대리인을 뽑으면 그들이 정책을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지 정당이다. 민주주의와 복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투표는 민정당(=전두환 정당)에 하고, 오세훈이 무상급식 없애자고 해도 뽑으면,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나?14

누군가의 정치적 입장이 ‘누구에게 표를 던졌느냐로 결정된다’는 대의제의 완고함은 응답자의 정치적 입장이 ‘설문조사에서 어떻게 응답했느냐로 식별된다’는 사회학자의 완고함과 닮아있다. 그 두 완고함은 미리 주어져 있는 질문, 주어져 있는 선택지로 사람들을 규정하려 한다. 그 완고함은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미리 주어진 선택지에 제한한다. ‘이 선택지 안에서 고르든지, 아니면―무효표가 됨으로써―셈해지지 않던지.’

하지만 우리는 최근의 대선에서 1번을 찍었으나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1번을 찍었으나 집권 정부가 자신을 전혀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현representation과 현시presentation 사이에 있는 그 ‘불일치’다. 현실에 아직 없는 질문, 아직 없는 선택지를 만들려고 분투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좌파라면 그렇게 흘러넘치는 욕망과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에 훨씬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무리 미약해 보이고 때로는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없는 것’(셈해지지 않는 것)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제도를 존중하지 않아야 한다(부정선거 음모론처럼)는 말이 아니다. 대의제 속의 중대한 절차들(토론과 선거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제도를 존중하고, 선거에 참여하여 필요하다면 ‘차악’을 고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좌파라면 제도에 의해 재현/대표되지 않는 목소리,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 흘러넘치는 목소리, 광장의 목소리를 훨씬 더 존중한다.

이는 정치적인 적을 상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자체나 리바이어던을 구성하는 신체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몸들 사이의 불일치, 즉 빈틈이다.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국지적 전략은 이준석 같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없게 억제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사회의 현실을 더 이상 ‘거시적으로’ 조직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사회에 대해 가진 상이 사실이 되거나 사실로 유지될 수 없도록―한낱 ‘주관적 망상’에 불과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방해해야 한다. 나아가 몸들 사이의 빈틈을 더 크게 벌려 그 형상에서 더 많은 몸이 이탈하도록 하고, 그 리바이어던을 결국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리바이어던 속에 있는 불일치의 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끊임없이 흘러 다니고 모이거나 갈라지는 정념들이 있다. 사회의 현 상태, 특히 거대양당 체제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의 정념을 이준석이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 정념의 방향을 바꾸고 다른 물길을 터 나가지 않는 한,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해체하더라도 유사한 리바이어던들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게다가 더 어려운 문제는 정념의 흐름이 잘 식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들뢰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념은 “재현 이하의 사태들”이다.15 그 흐름을 분명한 경향이나 형상으로 식별/재현할 수 있게 되면, 이미 모종의 리바이어던이 생겨난 후다. 그런 이후에 ‘이 경향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구축된 리바이어던의 존재를 승인하는 일밖에 안 된다. 정념의 흐름을 변화시키려면 아직 재현되지 않는 흐름 속에서 사고하고, 작업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적으로 정념들을 형상화하는 ‘덜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구성할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직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못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평등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만큼 남에게도 있다(혹은 누군가에게 있는 것만큼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저히 평등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아무것도 믿지 않기보다는 차라리―불평등을 믿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질문을 던질 능력이고, 그 능력이 이미 모두에게 있다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16 사실 글을 쓴다는 것, 익명의 다수가 읽기를 바라며 글을 발표한다는 것, 읽는 사람을 미약하게나마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는 것, 그 모든 일은 글을 읽는 아무개의 평등한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그 믿음이 없으면 글을 쓰고 발표하는 모든 일은―어떤 종류의 글이건 간에―의미가 없다. 말의 전달을 위해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정체성’도 ‘전문성’도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모국어를 배울 때 발휘한 바 있는, ‘아무개로서 아무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그 평범한 능력일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삶을 산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을 통해서다. 차이 있는 사람과 연대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능력을 통해서다. 우리가 통계에 의해 식별되는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평범한 능력을 통해서다. 문학은 그 평범한 능력의 가장 주의 깊은 사용이다. 습작생의 심오한 작품부터 거장의 평이한 작품까지, 모든 문학작품은 그 평범한 능력의 거의 무한한 변주이고 쉼 없는 실행일 뿐이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힘에 대한 숭배’라는 사회학자의 말은 틀렸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어떤 평범한 능력에 대한, 즉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1. 사실 비평이야말로 항상 ‘지식도 의견도 아닌’ 애매하고 의심스러운 말하기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 애매한 공간이 새로운 위계와 분할을 낳기도 하고 새로운 연결과 질문을 낳기도 하는, 문제적이고, 혼란스럽고, 히스테리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
  2. 20대 남성, 내부다양성이라는 허약한 논리〉, 블로그 SOVIDENCE, 게시일 2025.06.03. (마지막 접속 2025.08.05.) ↩︎
  3.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같은 블로그, 게시일 2025.06.04. (마지막 접속 2025.08.05.) ↩︎
  4.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 1988, pp. 301-02, 잠언 481 참조. ↩︎
  5. 이 글에서 드러내고 있는 나의 정치적 입장(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치안’과 대비되는 저항적 ‘정치’에 대한 관점, 실증적 지식의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회적으로 할당된 몫과 자리에서 이탈하는 ‘잘못tort’, 잘못에 의해 촉발되는 ‘탈정체화로서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서는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6 참조. ↩︎
  6. 쉽게 현혹되는 ‘무지한 대중’과 ‘전문가의 앎’이라는 잘못된 대립 구도는 대중에 대한 은근한 경멸과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재귀적으로,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이 대립 구도 자체가 반지성주의의 토양이 된다. ↩︎
  7. 이자벨 스탕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느린 과학’ 선언』, 김연화·장하원 옮김, 에디토리얼, 2025 참조. ↩︎
  8. 사회학에서 ‘개연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김정환, 「사회학의 소설적 전통」, 『사회와이론』 43집(2019년 5월), pp. 7-83을 참조했다. ↩︎
  9. 1990년대의 ‘과학 전쟁’과 자신에 가해진 ‘반실재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판도라의 희망―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장하원·홍성욱 옮김, 휴머니스트, 2018) 1장 「당신은 실재를 믿습니까?」에서 라투르가 직접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상원, 「라투르의 구성주의와 해킹의 실험적 실재론」(『과학기술학연구』 제 55권, 2024년 11월, pp. 270-94)에서도 구성주의의 ‘반실재론적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 ↩︎
  10.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pp. 291-318. ↩︎
  11. 같은 글, p. 315. ↩︎
  12.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민혜숙 옮김, 이른비, 2021, p. 79. ↩︎
  13.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
  14.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15.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200. ↩︎
  16.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16, p. 142. 강조는 원저자. ↩︎

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1)

―‘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 가을호
 

0. 문제의식

지난겨울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계엄령부터 서부지법 사태를 거쳐 탄핵과 대선까지, 충격적인 일들이 지나가고 나서 상황이 나름 온건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듯하다. 하지만 무언가 돌아왔고 ‘회복’되고 있다는 안도감에, 김형중 평론가의 말처럼 삐딱한 ‘좌파적’ 의문이 계속 달라붙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 내란 전에는 한국이 정상 국가였는가?”1 이른바 ‘정상화’된 상황도 문제투성이이지 않은가. 정상화된 정치가 대표/재현하지 않는 정치적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제도가 문제없이 작동하고, 법이 존중되고, 경제성장이 느리게나마 이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르고,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것으로 다 괜찮을 것일까?

선거운동 기간에 이재명은 ‘민주당이야말로 진짜 중도보수’라고 말해서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2 국민의힘의 극우화 때문에 갈 길을 잃은 보수 성향 유권자를 아우르고 흡수하려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극우 세력이 집권 여당과 시민사회의 보수화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책방향이 중도보수적인 것이야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지만, 뭐랄까, 불가피하고 합당한 이유라도 있는 듯 중도보수를 말하는 데 있어 한층 당당해졌달까. ‘그들’로부터 사회를, 상식을, 질서를 지켜내고 회복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보수화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극우화와 보수화는 사실상 서로를 강화하며 발맞춰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보수화는 ‘정상적’ 상태를 유지하려 하면서 극우화의 땔감이 될 불안과 분노, 소외감을 키운다. 극우가 충격적인 행각을 벌이면, 더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고 온건한 상태를 지키려고 완고하게 보수화된다. 극우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만큼 정상적이고 질서 있는 사회에 대한 보전적 성향이 강화되면서 좌파적이라고 해야 할 정치적 상상력도 덩달아 봉쇄되는 듯하다.

그래서, 최근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새삼스러운 질문을 떠올리게 됐다. ‘도대체…… 좌파란 무엇인가?’

이 커다란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정치학자도 아니고 투철한 활동가도 아니다. 지금까지 한 적극적 정치 참여라고 해봐야 여러 시위에 다소 산만하게 참여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에서 그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 온라인의 남초 커뮤니티에서 종종 ‘좌파’는 멸칭으로 사용되거나 기껏해야 놀리는 말로 사용된다. 즉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위선적이고, 가르치려 들고, 재수 없고, ‘내로남불’ 성향이 강한 사람이나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꼭 보수적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에서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2030 세대에게 좌파라는 말이 무언가 중요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좌파라는 말을 현재의 맥락에서, 새로운 감수성으로 재활성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지면의 주제인 청년 남성의 문제를 생각했다. 최근 청년 남성들에 대한 담론이 폭증하고 있다. 서부지법 난동과 대선 출구조사, 그리고 대선 불복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극우화 경향이 시민과 지식인 들을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할 말이 너무 많은 주제인 것은 틀림없다. 오래된 여성혐오와 폭력들,3 가부장주의적 가족 모델의 고장, 남성들의 히스테리적인 불안, 특정한 어법과 사고방식으로 젊은 남성들을 끌어당기는 커뮤니티 문화,4 온라인 소통환경에서 안티페미니즘 유행과 전략의 형성,5 그것들을 이용하는 정치. 그리고 지독한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 취업난, ‘비교질’ 문화, 진보 혹은 좌파라고 자임하는 정치인과 엘리트 계층의 위선,6 세대 내 불평등, ‘인셀 남성성’7과 ‘루저 남성 정서’8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문제가 교차하고 얽혀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 글에서는 일단 가까운 텍스트들을 읽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최근 나는 구독하고 있는 언론(《한겨레》, 《시사IN》)의 기사와 칼럼을 한층 주의 깊게 따라 읽게 됐는데, 청년 남성과 극우에 관한 여러 분석기사와 칼럼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지만 이내 청년 남성 극우화를 둘러싸고 생산되는 담론과 지식 일각에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됐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담론들이 어떤 순환논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순환논리가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과 정치적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지금 생산되고 있는 담론, 특히 실증적이고 통계적인 사회학적 담론을 비판하려 한다.

논의의 과정에서 한 사회학자를 다소 집요하게 비판하게 될 텐데,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 이 글의 비판은 일련의 조사나 한 학자를 괜히 흠집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말할 때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난관을 성찰하고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점검의 과정은 또한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1. 설문 조사의 수행성

〈시사IN〉의 한 기획기사는 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수행한 설문조사를 소개하고 있다.9 세대와 성별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설문조사인데 문항 설계에는 여러 정치·사회 전문가가 참여했다. 일련의 문항에 부/동의 정도를 묻는 방식이었는데, 기사에서 소개하는 문항 중 몇 가지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보복으로 인해 한국이 경제적 타격을 입더라도 중국과 거리를 두고,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장애인 의무고용제’에 대한 찬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반
―‘고위공직자 여성할당제’에 대한 찬반

기사에 따르면 이 모든 문항에서 2030 남성의 특이성이 두드러졌다. “결국 2030 남성은 안보·경제적으로 보수적이면서 각종 차별 시정 조치에 보수층 일반보다 반감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같은 곳). 이것이 조사에서 확인된, 놀랍지 않은 결과다.

전문가들은 적실한 질문을 고른 것 같다. 위 문항들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전문가들을 신뢰할 수 있다. 설문조사의 의도가 사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도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하고 적실한 질문을 던지는 설문조사는, 왜 이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졌는지 말하지 않는다.10 이 질문들은 어쩌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를 만큼 그토록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가? 이 질문들이 특히 결정적 질문이 된 주요 이유는, 젊은 남성들이 그 문제들에 격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은 어쩌다가 남성들을 화나게 하고, 한쪽으로 모이게 하고, 반동적으로 결집하는 효과를 낳는 질문들이 되었는가? 바로 여기에 현재 청년들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떤 질문이 그 사회의 결정적인 정치적 질문으로 부각되고 조성되는 과정은, 한 사회가 특정한 모습의 사회로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단적인 예로, 어떤 정당 혹은 정치인이 ‘우리 사회는 북한에 의해 심각한 안보의 위협을 받는 사회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의 말은 불안을 조장한다. 동시에 그 말은 사람들의 불안을 특정한 형식으로 번역(‘당신의 불안은 북한 때문이다’)한다.11 그 발화를 단순히 ‘사실’과 동떨어진 선동이나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번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정당/정치인의 영향력은 실제로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북한에 의한 안보의 위협이 실제로 심각해질 수 있다. 그 정치인과 정당은 자신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의 상, 즉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의 말에 무슨 마술적 힘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대로 북한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의 선동이 남북관계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변수라는 말도 아니다. 방위가 순전히 담론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아니다. 북한은 세계에 실재하며, 동해로 쏘아진 미사일도 담론과 기호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요점은, 누군가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시적 발화가 아니라 수행적 발화라는 것이다. 즉 사회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진술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며, 발화자의 영향력이 클수록 진술의 수행성 역시 강해진다(혹은 역으로, 진술의 수행성이 강해지면 발화자의 영향력이 커진다).

우리는 대선 토론이나 청문회에서 민정당 계열(현 국민의힘) 정치인이 민주당 계열(현 더불어민주당) 정치인에게 버릇처럼 묻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主敵)입니까 아닙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해 보세요!’ 그들은 이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 수행함으로써 그것이 이 나라 정치의 ‘결정적 질문’으로 유지되게끔 애를 썼다. 그것이 결정적 질문이 될수록 실제로 보수정당(민정당 계열)의 영향력은 커졌으며, 그때마다 실제로 북한은 우리의 주적 비슷한 것이 됐다. 그들의 반복된 수행이 그 질문이 중요해진 유일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 질문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이 되어왔기 때문에, 설문 참여자는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기 위한 설문지에서 비슷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택지를 두 가지(예/아니오)에서 다섯 가지로 늘린다고 해서 질문의 대립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 ‘현실’정치의 맥락 속에 있는 시민은, 그 질문을 마주했을 때 특정한 대립 구도에 휘말리지 않기 힘들다.

중국에 대한 외교나 여성·소수자 정책에 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에 비하면 중국과 페미니즘에 관한 관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특히 젊은 세대에서 결정적으로 부상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모종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수행을 거쳐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은 똑같다. 그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지는 과정이 곧 청년 남성들이 극우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질문들을 통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인식의 변화를 만들지 않는 사회학적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난민이나 장애인,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은근하거나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유튜버와 정치인의 말을 듣고,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발 소문과 담론 들에 노출되고, 그것들에 반응하면서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친구와 절교하고, 대선 토론을 보고, 정치인이 불안의 해소를 약속하거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마침내 선거장에 가서 어떤 선택지를 고른다. 그 결과로 누군가 당선되고 세대별·지역별·성별 표심이 나타난다. 설문조사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정교하게 재연함으로써 개연성 있는,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는다. 즉 한국 현실정치의 ‘현실’을 바로 그러한 현실로 구성하는 질문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현실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질문과 선택지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동일한 대립 구도의 논리에 가둔다. 민주주의를 허울 좋게 내세우는 ‘관객 참여 예술’에서 관객이 그렇게 이용되듯이, 설문조사의 응답자들은 기획자가 미리 설치해둔 틀을 따라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2. 사회학자는 무엇을 하는가

사회학자는 사람들을 어떻게 분류할지 아는 사람 같다. 사회학자 김창환은 마찬가지로 《시사IN》에서 ‘한국의 극우’를 식별하는 유용한 분류법을 제시했다.

첫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력이나 폭력 사용, 규칙 위반을 용인하는 자세다. 두 번째는 복지에 대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인식이다. 세 번째는 한국적 특수성으로 ‘대북 제재 중시’를 고려했다. 네 번째는 ‘설령 중국의 보복으로 경제에 타격을 입더라도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좀 복합적인 질문이긴 한데, 외교에서 국익에 관계없이 특정 이념을 중시하는지 측정한 질문이라고 봤다. 다섯 번째가 극우 하면 보편적으로 포함되는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다. 이 다섯 가지에 모두 동의하면 극우라고 분류했다.12

김창환은 극우의 보편적 특징으로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꼽는다. 미국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그는 동시에 한국적 특수성도 잘 알고 있어서 대북 제재, 중국과의 외교, 한미 동맹 등의 문제도 문항에 적절히 포함한다. 그가 제시한 분류법은 적실하고 한국의 현실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자가 좋은 의도로, 학자로서 책임감 있고 성실한 방식으로, 유용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애썼음을 믿을 수 있다. 조사가 부정확하거나 그 배후에 어두운 의도가 있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심 없는 정확성과 유용성에, 바로 거기에 의문을 던져야 할 문제가 있다.

“설문조사는 사회학자가 질문을 만들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을 드러낸다.”13 사회학자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질문이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인지 안다는 것은 곧 그 질문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념과 의견을 지금 이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도식화하고, 분류하고, 편 가르고, 부추기고, 추동하고, 극단화하고, 한데 묶고, 대립시켜왔는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가 유능하고 유식할수록 그는 더 적확한 질문을 고를 것이며, 그가 적확한 질문을 고를수록 설문조사는 바로 지금 이 사회를 이러한 사회로 구성하는 ‘현실’의 정교한 미니어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이번 대선을 통해서 확인한 사회적 정체성들의 상이한 정치적 입장이 조사 결과에서 거의 정확하게 재연되는 데에는 놀라울 것이 없다.

사회학자가 사회에 대해 말할 때, 종종 그 지식의 내용보다는 그 지식의 생산방식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설문조사를 통해 익명의 응답자로부터 어떤 사실을 추출하는 방식은 대의제가 선거를 통해 익명의 유권자로부터 어떤 결과를 추출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은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표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대의민주주의 선거제도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정치인은 ‘나의 말은 국민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말이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대변하는 대표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대표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사회학자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재현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설문조사의 형식은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사회학자는 ‘이 조사의 결과는 응답자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 결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의 말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재현하는 학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재현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출한 데이터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대표/재현representation이 성공적일수록, 정치인/사회학자는 다음처럼 층위를 선명하게 나누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내용이고, 나는 형식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정치인은 자기 말의 정치적 정당성을, 사회학자는 자기 말의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한다. 비록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과 사회학자 모두 완전한 정당성/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고 단지 끊임없이 관측하고, 회유하고, 유도하고, 설득하고, 협상하고, 안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학자 역시 정치인만큼이나 ‘리바이어던’이다.

[사회학자는] 여론조사, 양적·질적 탐구를 통해 행위자들의 소망과 그들의 가치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번역해 낸다. [……]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대변자로 자임하고 자칭하면서, 그들은 홉스의 주권자로부터 [다음의 아이디어를] 넘겨받았다. ‘가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들 자신의 것이다.’14

인용한 페이지에서 프랑스의 과학기술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와 미셸 칼롱은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을 이야기한다. 사회학자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자나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라투르와 칼롱 역시 사회학자다). 사회학자가 작업하는 곳이 얼마나 놀라운 정치적 요충지인지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현장이든 연구실이든 학술지든 언론기사든 간에, 사회학자가 활동하는 곳은 거시와 미시의 층위가 나뉘고, 구조와 개인이 나뉘고, 형식과 질료가 나뉘고, 어떤 틀에 의해 현실이 안정화되어 설명되는, 그렇게 중대한 일들이 벌어지는 정치적 장소다. 사회학자가 훌륭하게 설계한 설문조사의 전제와 결과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가 보지 않는 등잔 밑의 어둠에 정치의 근본문제가 있다. 바로 이 문제이다: 누가 이 사회의 질료matter가 되는가, 그리고 누가 형식form이 되는가? 다시 말해 누가 이 사회의 물질이 되고 누가 정신이 되는가? 누가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누가 규정하는 존재가 되는가? 누가 선택을 요구받게 되고 누가 선택지를 설계하는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는가? 이러한 규정은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3.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3.1 홉스의 논리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이론적 우회로가 있다. 근대적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을 먼지 쌓인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보자. “교회국가와 시민국가의 질료Matter, 형식Forme 그리고 권력Power”이라는 부제가 붙은,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 초판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다.

*프랑스 판화가 아브라함 보스가 동판화로 제작한 『리바이어던』 표지 그림 일부

마을 위로 솟은 거대한 몸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대한 몸의 형체를 작은 몸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흔히 전체주의적 괴물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지만, 홉스는 리바이어던이 인민people을 내용으로 하는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리바이어던은 인민의 투명하고 충실한 대변자일 뿐이다. 리바이어던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한 주권자로, 사람들(리바이어던에 예속된 자subject)의 이익과 생명, 안전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15

홉스가 말하길, 사회가 없는 자연상태에는 오직 평등한 개인들만이 있다. 다시 말해 사회가 발생하기 전에는 행위자들 사이에 어떠한 크기의 차이도, 권력의 차이도, 층위의 차이도 없다. 자연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단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단지 한 사람’일 때는, 다른 누구보다 특별히 크지도 강하지도 유능하지도 않다.16 이 평등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항구적인 투쟁 상태에 있다. 그 유명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다. 결국 사람들의 평등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평등이다.

홉스의 이론은 이렇다. 완전한 평등이라는 혼란과 야만―모두가 서로 죽일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즉 모든 인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주권자,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개인과 국가의 차이에 이르는 크기/권력/층위의 차이가 생겨날 것이다. 그 차이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곧 사회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리바이어던은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다수다. 그것은 하나의 의지처럼, 하나의 신체처럼 움직이는 다수의 의지이자 신체다.17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흩어져 있는 개인보다 압도적으로 더 크고, 강하고,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구조적이고, 거시적이다.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그 순간에 비로소 개인은 상대적으로 작고, 약하고, 일시적이고,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무엇이 된다. 비로소 사회에 예속된 자, 즉 사회적 주체subject가 되는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모든 행위자는 동등하며 그들의 크기/힘/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라는 핵심 아이디어를 홉스로부터 계승했다.18 물론 홉스의 신화myth는 중대한 변형 없이는 현대의 과학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이 계승은 도전적인 것이다. “역사학과 인류학, 그리고 오늘날의 동물행동학은 그러한 [홉스식의] 사회계약은 불가능함을 입증해왔다.”19 1980년대 초에 젊은 라투르와 칼롱은 사회학이 홉스의 총체적이고 일회적인 ‘계약’을 ‘번역translation’이라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홉스의 해답에 독창성을 다시 불어넣기 위해서는 단지 계약을 번역의 과정들로 대체하면” 된다.20 이것은 단일한 총체적 계약이 사회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협상과 분쟁, 설득과 안정화의 과정이 사회를 끊임없이 ‘수행한다’는 말이다. 차이는 한순간에 발생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구성되고 안정화된다.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를 끊임없이 조성하는 것, 그것을 둘러싸고 분쟁하며 차이를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곧 사회가 구성되는 과정이다.21

라투르와 칼롱은 타자의 의지를 단일한 의지로 번역하는 모든 존재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홉스의 생각과 달리 ‘국가=주권자’라는 하나의 리바이어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에 온갖 리바이어던이 있다. 너무나 크고 오래되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 알기 어려운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스타트업이나 신흥 정치인처럼 갓 만들어져 성장하려고 애쓰는 작은 리바이어던도 있다.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구글 같은 다국적 자유주의 기업 리바이어던도 있다. ‘사회학자 리바이어던’도 있는데,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은 다른 모든 리바이어던이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지, 그 논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의 장점은 거시적인 것(국가, 기업, 당[黨], 사회구조 등)과 미시적인 것(개인, 가족, 노동자, 친구 관계 등)을 미리 구분하지 않으면서 더 커지려고 애쓰는 행위자들의 분쟁, 설득과 협력, 암중모색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1987)의 엄석대도 제 나름의 리바이어던인데, 교실의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부림으로써 교실을 지배했다가, ‘단지 한 사람’으로 쪼그라듦으로써 무리 지은 아이들에게 패배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어떤 일그러진 영웅의 권력 행사는 엄석대보다 덜 폭력적이고 더 설득적일 수 있다.

3.2 이준석의 사례

이를테면, 영웅다운 구석은 전혀 없지만,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가 어떻게 나름의 ‘리바이어던’이 되었는지를. 이준석은 역사가 짧은 신흥 리바이어던이어서 그 구성 과정을 살펴보기 요긴하다.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안티페미니즘’이라는 기표로 결집한 행위자다. 그러한 번역을 통해 그는 청년 남성들을 아우르는 형식이 되려 한다. 그 과정을 단순화해보자면 이렇다: ①당신들에게는 불만이 있다―나는 그것을 느낀다(감성적 감응). ②당신들의 불만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페미니즘 때문이다(구상, 도식화, 번역). ②당신들이 나를 지지한다면, 내가 당신들을 대리해서 페미니즘과 싸우겠다(재현, 대표).

③이 가능하려면 일단 ①과 ②가 선행되어야 한다. ③은 ①과 ②의 부단한 과정이 만든 잠정적·일시적 결과일 뿐이다. 재현이 있으려면 먼저 감성이나 정동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재현을 매개하는 부단한 번역(협상과 타협을 포함한 번역)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번역 과정에서 수동성과 능동성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구분 자체가 번역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준석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안티페미니즘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이준석의 논리는 이랬다: ‘나는 단지 청년들의 대변자일 뿐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청년들의 편에 서려다 보니 의도치 않게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 뿐이다.’22 그는 마치 자신이 수동적 감응에 의해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 그는 그저 여느 청년과 똑같은 한 명의 보통 남자로 청년들에게 다가가려 하고 그들에게 감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년들의 공감을 샀다. 그가 충분히 수동적이지 않았다면 결코 능동적 행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가 ‘단지 한 남자’ 만큼 작지 않았다면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커질 수 없었을 것이다.23 이준석이 종종 거의 에펨코리아의 여론을 그대로 읊는 듯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리바이어던은 커지기 위해 공허해졌는데, 공허한 형식이 됨으로써 더 많은 몸을 자신의 내용(질료)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의 주장처럼 청년들이 정말로 안티페미니즘으로 ‘이미’ 뭉쳐 있었고 페미니즘에 맞서 싸우기를 원했으며 그는 그 의지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보면, 이준석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이준석에 의해 청년 남성들의 형체 없는 불만이 비로소 안티페미니즘이라는 형식으로 결집되었다고 하면, 청년 남성들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준석도, 청년 남성들도 순전히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지 않았다. 이준석 이전에도 이미 오랜 역사의 여성혐오가 있고, 특히 상층 계급 남성들은 자신의 유리한 지위가 유지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청년 남성들은 단지 이준석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상당한 수의 청년 남성은, 홉스의 설화에서 계약에 서명하는 사람들처럼 ‘자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준석이라는 리바이어던이 자라나게 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청년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심이 없었다면, 이준석의 번역은 실재와 동떨어진 망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 번역은 성공할 수 없다. 번역은 개연적인 한에서 성공할 수 있다.24 정치인은 정념과 의지에 ‘그럴듯한’ 형식을 부여하고, 지지자들은 정치인의 말에 ‘그럴듯한’ 내용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에펨코리아)의 유저들과 이준석은 재귀적으로 서로를 구성하며 정치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 능동적인 행위자(대변하면서 앞장서는 자)와 수동적인 행위자(지지하면서 뒤따르는 자)가 나뉜다. 정치인/지지자, 형식/질료, 능동/수동이 서로를 규정하고 뒷받침함으로써 분화한다. 이 분화의 과정은 리바이어던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다. 이준석이 충분히 크고 안정적인 리바이어던으로 자라나고 나면, 소수의 지지자가 이탈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위협하지 못한다. 리바이어던이 거시적으로 된 만큼 지지자 개인은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해왔다: ‘이 사회는 페미니즘 때문에 분열된 사회다.’ 이것은 그의 망상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나름으로 자신이 사는 사회에 대한 상을 갖는다. 그중 무엇이 주관적 망상이고 무엇이 엄연한 사실인가? 적어도 사회에 관한 한, 망상과 사실은 선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망상과 사실의 분리야말로 사회적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이며 그것을 분리하는 과정이 곧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소리높여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한다. 그가 강해지는 만큼 그 말은 사실이 된다. 그가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그저 망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역으로 그의 말이 사실과 동떨어져 있는 한, 그는 강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①사회적 플레이어가 큰 영향력을 얻는 것, ②그가 점점 더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는 것, ③동시에 타자를 상대적으로 더 ‘작게’ 만드는 것, ④그가 자신이 사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것은 동시적이다.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의 적대 역시 재귀적으로 강화됐다. 이준석은 그 분열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물론 나는 페미니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페미니즘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준석식의 음해를 물리치기에 충분치 않다. 이준석은 ‘페미니즘’을 사회를 분열시키는 기표로 부각함으로써 사회를 특정하게 분열시키고, 그렇게 특정한 구도로 ‘분열된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듦으로써 그 사회의 작은 리바이어던이 되는 데 성공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을 묻는다면, 당연히(!) 그 질문은 특히 젊은 세대 남녀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데 결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 설문조사는, 그 질문이 어째서 그렇게나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문제의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재인식/승인recognition할 뿐이다.

(2)에서 계속

  1. 김형중, 「좌파적 우울」,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봄호, p. 64. ↩︎
  2. 심우삼 기자, 〈이재명 “한국 정치에 보수 있나… 국힘은 범죄집단, 중도보수는 우리”〉, 한겨레, 2025.05.20. (마지막 접속 2025. 07. 28.) ↩︎
  3. 추지현, 「폭력의 연속성과 남성성‘들’」,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폭주하는 남성성』, 동녘, 2025, pp. 21-52 참조. ↩︎
  4. 김학준, 『보통 일베들의 시대―‘혐오의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오월의봄, 2022 참조. ↩︎
  5. 이우창, 「안티페미니즘 전략의 형성에서 음모론적 남성성의 등장까지」, 『폭주하는 남성성』, pp. 173-201 참조. ↩︎
  6. 박권일은 최근 연재 중인 칼럼에서 “극우의 토양이 되는 ‘어떤 진보주의’”를 이야기했다. 박권일 칼럼, 〈극우는 외계에서 오지 않았다〉, 한겨레, 2025.05.29. (마지막 접속 2025.07.28.) ↩︎
  7.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성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3 참조. ↩︎
  8. 이리예, 「짤의 시대, 안티페미니즘으로 공모하는 루저 남성 정서와 정치 언어」, 『폭주하는 남성성』, pp. 203-42 참조. 이하 인용 시 「짤의 시대」 ↩︎
  9. 진혜원 기자, 〈2030 이준석·김문수 투표자는 무엇이 달랐나[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여론조사]〉,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 08. 05) ↩︎
  10. 물론 이 조사의 목표는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 질문들이 중요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 문항에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조사의 목표이며, ‘과정적 분석’은 다른 연구의 몫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학문적 분업에 기반을 둔 조사와 연구의 설계 자체가 정치적 대안과 변화의 상상에 방해가 됨을 주장하려 한다. ↩︎
  11. 물론 이 ‘번역’은 말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일각의 여론을 정치인이 부각하고, 정치인의 말을 언론이 받아쓰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다시 전파되어 여론이 형성되는 등의 번역의 연쇄가 있다. 이 번역의 과정에 너무 많은 매개가 있어서, 번역이 항상 정치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번역의 성패 여부는 정치인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매개의 연쇄를 고려하더라도, 정치인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갖는 사회적 행위자다. ↩︎
  12. 진혜원 기자가 진행한 김창환 교수 인터뷰, 〈“서울 거주 경제적 상층일수록 극우 청년일 확률 높다”〉,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08.05.) ↩︎
  13. Jacques Rancière, The Philosopher and His Poor, edit. Andrew Parker, trans. John Drury etc., Durham&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3, p. 189. 인용한 문장은 랑시에르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비판하면서 쓴 문장이다. ↩︎
  14. Michel Callon and Bruno Latour, “Unscrewing the big Leviathan: how actors macro-structure reality and how sociologists help them to do so”, Advances in social theory and methodology―Toward an integration of micro and macro-sociologies, Routledge&Kegan paul, 1981, p. 297. 강조는 원저자. 이하 인용 혹은 언급시 UBL로 표기. ↩︎
  15.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1』, 진석용 옮김, 나남, 2008, pp. 232-33 참조. ↩︎
  16. 물론 사람들 사이에는 지능에서나 체력에서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도 머리가 좋은 사람을 치명적인 함정에 빠뜨릴 만큼은 똑똑하다. 힘이 약한 사람도 돌멩이를 쥐고 뒤에서 힘센 사람을 기습할 만큼의 힘은 있다.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 차이는 무시해도 될 만큼 미세한 것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강하다면, 그 상대적 강함은 ‘죽임당할 가능성의 평등’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 『리바이어던 1』, p. 168 참조. ↩︎
  17. 우리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정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이해하면 여전히 홉스의 이야기는 놀라운 현재성과 비판성을 갖는다. 홉스의 논리는 이렇다. 어떤 기원적 평등을 가정할 때만 사회적 불평등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혹은, 합리화될 수 있다). 만약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원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전근대 정치의 왕권신수설이 ‘신’을 가정하듯이) 인간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어떤 불평등의 기원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한 불평등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즉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화할 수 없는―불평등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그보다 앞서 있는 평등을 전제하는 것뿐이다. 평등과 불평등의 이 관계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만약 불평등이 자연적이었다면, 즉 인간들의 능력에 본성적인 차이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불평등의 형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에게 정치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월한 존재의 열등한 존재에 대한 지배가 있을 뿐, 정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불평등의 형식은 완전히 안정화되어,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사회적 역동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인간 사회에 ‘정치’가 있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선(先)정치적 전제를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평등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오늘의’ 불평등을 자연화하고 영속화하려 하는 모든 논리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치안논리다. 오늘날 한국의 상류층이 계층의 ‘세습’을 위해 그토록 많은 자원을 투여하고, 제도를 왜곡하고,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모든 인간 능력의 자연적 평등’이라는 홉스의 가설을 강하게 지지한다. 리바이어던이 되는 자는 다른 인간보다 더 뛰어난 자가 아니다. 동등한 능력을 가진 한 사람 혹은 한 집합(assembly)이 필요에 의해,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운이 좋아서 대표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
  18. UBL, pp. 278-280 참조. ↩︎
  19. Ibid., p. 279. ↩︎
  20. Ibid. ↩︎
  21. 라투르와 칼롱은 이 분화와 안정화 과정에 물질과 기호의 동원 혹은 등록enrolment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강조한다. 사회의 안정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비인간이 동원되는가―이 질문의 제기가 홉스의 정치이론에 라투르가 가한 가장 중대한 변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라투르의 이론을 참조하면서, 이 글에서 나는 비인간 물질과 매개의 역할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다만 ‘행위자들 간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있지 않고 그 분리는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라는 아이디어를 강조하려 했다. ↩︎
  22. 이준석은 잡지 『맥심』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반페미니스트의 선두 주자 비슷한 역할에 놓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리예, 「짤의 시대」, p. 234에서 재인용. ↩︎
  23. 「짤의 시대」, pp. 233-35 참조. ↩︎
  24. 그러나 번역이 개연적이라는 말은, 역으로 그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청년들에게 혐오와 불안의 정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이준석이라는 형상으로 모이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았다. 만약 그것이 필연적이었다면, 이준석은 그렇게 성실하고도 요란하게 번역의 노고를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