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노스의 성공과 실패: 철학이라는 욕망

이 글에서 참조하는 영화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이다. 대사를 인용하는 경우 박지훈·김은주 번역가의 번역을 참조했으나, 글의 맥락에 맞게 수정을 가했다.

1.

세계화된 세계 속을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타노스라는 유령이. 일찍이 타노스를 막기 위해 창의적인 자본가, 얼었다 녹은 미국 군인, 북유럽의 근육질 고대 신,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경직된 아이돌, 이중인격 과학자, 서구화된 토착민, 마술사와 주술사, 의인화된 ‘비인간 행위자’들이 신성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타노스는 그 동맹에 의해 이미 두 번 죽었다. 그럼에도 타노스는 영화 안팎에 여전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작년 말 〈이터널스〉가 개봉한 이후, ‘타노스 재평가’가 마블 팬들 사이에 유행했다. 또 드라마 〈호크아이〉에는 “타노스가 옳았다”라는 낙서를 보고 호크아이가 회의를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엔딩 크레딧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타노스는 돌아온다.”

타노스에 반대하여 한 편이 된 〈어벤져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개성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서로 반목하기도 했다. 즉 타노스라는 절대적인 적이 없었더라면 그처럼 광범위하게 단결하지 않았을 세력들이다. 타노스를 저지하기 위해 형성된 이 거대한 ‘동맹’은, 외견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가치의 총집합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종족과 히어로가 선봉에 선 캡틴 아메리카의 구호(“어벤져스 어셈블!”)에 따라 마지막 돌격을 하는 것처럼. 즉 어벤져스와 타노스의 대립에서 우리는 서구적(혹은 미국적) 가치와 그것이 방어하려 하는 것 사이의 전형적인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서구적 가치’는 우리에게 친숙하고 정겨운 인물들로 재현되는 반면 그 반대편은 추상적이고, 어둡고, 추한 무엇으로 그려지지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질서 자체가 ‘1 세계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반대편은 항상 낯설고 무섭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직설적이건 은근하건 간에 ‘반대편’은 항상 가난, 전체주의, 대학살, 전쟁, 근본주의, 비인간성 따위와 결부되어 있다. 저항과 비난에 맞서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물론 오늘날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모순되었다. 그러나 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 체제만큼 나쁘지는 않다. 만약 이 체제를 중단하거나 변화시키려 한다면, 훨씬 더 파국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타노스는 이러한 ‘파국’을 추상적으로 상징하며, 상상적인 파국의 공포에 대항하여 서구적 가치가 수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결집하도록 촉구한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나쁜 현실 중 최선이라는 것, 이것이 세계화된 세계를 지탱하는 첫 번째 합의이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이 자유민주주의는 더 큰 부, 더 거대한 다양성을 원하는 ‘성장주의’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왔다. 부를 위해 경쟁하는 개인 의견들의 총합은 ‘성장’이라는 지상과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엄청나게 다양한 캐릭터와 이종을 영화 속으로 불러들이면서 세계관을 팽창시키고, 그에 따라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계화된 세계를 지탱하는 두 번째 합의는,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생명의 공평한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타노스와 이념적으로 가장 분명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어벤져스〉에서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라는 구호는 위선 없이 말해질 수 없었다.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이종들은 의인화된, 특히 서구적으로 의인화된 이종들이다. 즉 개인주의적이고, 권위적이지 않고, 민주적이고, 영어에 유창하고, 유머 코드가 맞는, 귀엽고 유능한 이종들이다. 〈어벤져스〉에서 그들은 대체로 백인들이 활약하는 가운데 열심히 보조 역할을 맡았다. 물론 그들의 생명이 타노스나 그의 못생긴 수하들보다, 그리고 형상과 언어를 부여받지 못한 이종들보다 훨씬 소중했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 그리고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것. 이 두 가지 합의는 때로는 군사적 개입으로, 때로는 윤리적 교설로 나타나면서 ‘세계화된 세계’를 틀 짓는 사유의 한계를 표시한다.

그렇다면 이 동맹이 방어하려고 했던 타노스는 무엇을 표상할까?

타노스는 죽음을 표상한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인구의 절반을 죽이는 타노스는 운석 충돌과도 같은 대재앙이고, 히어로들은 그 재난을 막기 위해서 분투한다. 이런 관점에서 타노스와 어벤져스의 전쟁은 죽음과 생명의 대립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단순한 대립은 많은 사람이 타노스에게 느끼는 매력을 다 설명해주지 못한다. 타노스의 매력은 추상적 ‘죽음’이 주는 현혹을 넘어선다. 그의 행보는 우리가 어릴 적 위인전에서 보았던 ‘위대한’ 인물과 형식적으로 닮았다. 즉 자신의 이해관심을 넘어서, 두려움 없이 이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나 혁명가, 위대한 학자 등과 닮았다. 물론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에서처럼 완전무결한 ‘위인’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 타노스 역시 모순과 결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타노스의 결단과 거침없는 행동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영웅이 우리가 소망하는 가능성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할 때, 타노스는 빌런이면서 동시에 영웅이기도 한 것이다.

2.

그렇다면 타노스가 표상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타노스는 철학, 더 정확히 말해 철학이라는 욕망을 표상한다. 철학은 전체를 사유하고자 하는 욕망, 그렇기에 ‘사유의 탈주관화’를 이끄는 욕망이다. 아마 이보다 더 시대착오적인 욕망은 없을 것이다.

학식이나 교양으로서의 철학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진리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철학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을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소개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에 따르면 철학자는 가장 똑똑한 사람은 아니다. 이미 진리를 아는 자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포교함으로써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젊은이들을 당대에 통용되는 ‘지혜’ 혹은 ‘의견’으로부터 단절시켰다. 아마 진리를 아는 것(지혜sophia)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철학philo-sophy),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타노스의 성공과 실패를 규명하는 데에 결정적일 것이다.

한편 타노스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질적으로 나쁜 이미지 역시 체화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니체는 서구의 형이상학이 삶의 구체성과 감각적 다양성을 억압하고, 다양한 욕망과 신체를 무시하며, 따라서 죽음을 향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아가 형이상학은 전체주의적이며, 타자를 이념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고 오래도록 비난받아 왔다. 심지어 ‘전체’를 지향하는 형이상학은 20세기의 전쟁 범죄와 대학살의 주요 책임자로서 고발당하기도 했다. 타노스는 철학의 이러한 ‘나쁜 면’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타노스의 거대한 우주선 ‘생츄어리’는 육중하고, 황량하고, 어두운 회색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타노스는 학살자이기도 하다. 그의 엄격한 사상은 외설적인 가학적 욕망과 뒤얽혀 있으며, 두말할 것 없이 전체주의적이다.

이처럼 나쁜 것이 뭉뚱그려진 타노스, 철학의 진부한 이미지인 타노스로부터 어떤 새로운 것을 추출할 수 있을까?

첫째로, 무시무시하게 뭉뚱그려진 이 ‘어떤 것’이 우리에게 결여된 무엇임을 인정해야 한다. 타노스는 전체주의, 근본주의, 본질주의, 인권이나 생명에 대한 무시 등 우리가 사유를 중단하게 되는 함정들 너머에 있는 위험한 것들의 덩어리이다. 하지만 그 무섭고 매혹적인 덩어리 속에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사유의 가능성 또한 있을지 모른다.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기를 원한다면, 이 가능성은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취해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영화 속에만 우화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현실에서도 취해질 수 있는 욕망의 형식을 구분해야 한다. 타노스는 이미 초인적인 힘을 지닌 존재이지만, 타노스가 찾아다니는 ‘인피니티 스톤’은 그보다 훨씬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상상하게 한다. 초월적인 존재 혹은 힘이 실재한다면, 타노스가 선택한 방식이 현실적으로 고려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초월적 존재들이 은하계를 가로질러 날아다니는 세계가 아니다. 인피니티 스톤도 없다. 즉 골치 아픈 문제를 초월적 힘을 빌려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이 ‘초월자 없는 세계의 철학’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동시에 뚜렷한 영웅도 악당도 있을 수 없는 세계의 철학이기도 하다는 것 역시. 그러고 나면 인구의 절반을 일거에 말살한다는 비현실적이고 유치한 내용은 고려될 수 없다. 우리가 타노스에게서 취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여주는 철학적 욕망이다. 관건은 이 ‘욕망’을 선험적이거나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초월자 없는 세계에서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무엇에 연결할 수 있느냐이다.

“진리는 전체”라는 헤겔의 단언은 유명하다. 그러나 헤겔이 일관된 전체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헤겔이 강조한 것은 진리는 전체를 포괄해야 하기에 모순과 부정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철학은 전체를 사유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체화되지 않는 모순을 계속해서 치열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다. 전체를 사유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공백’을 사유 내부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착안하여 많은 현대 철학자는 오히려 ‘진리는 비(非)전체’라고 말한다.1 어떠한 논리도 전체를 한 번에 사유할 수 없고, 어떠한 체계도 전체를 완전히 재현할 수 없다. 어떤 체계에는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공백’이야말로 보편적(혹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의 불가능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주장했듯) 철학이 현 체제가 재현하거나 사유하지 못하는 바로 그것, 상황의 ‘공백’에 충실해야 함을 의미한다.2 마찬가지로 〈어벤져스〉에서, 역설적으로 전체주의자 타노스만이 이 세계가 비전체라는 것을 일깨운다. 사람들은 타노스를 추방하고, 억제하고, 지우면서 ‘정상적인’ 세계의 항상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타노스가 없어진다면 〈어벤져스〉의 세상에는 수용 가능한 타자만 남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다양성의 요구―정치적 올바름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다양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위협하지는 않는 타자들 말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가치관을 위협하지 않는 타자란 동일자일 뿐이다. 타노스가 없는 세계는 하나의 ‘전체’가 되어버린 세계이다. 화면에 나오는 모든 종족이 어벤져스에 동화될 수 있을 만큼 귀엽고 착하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주의자 타노스보다 체제의 ‘공백’으로서의 타노스에 초점을 맞춰볼 수 있다. 타노스의 이미지 속에는, ‘세계화된 세계’의 전체성이 유지될 수 없는 허구임을 일깨우는 두려운 것들―기후 위기, 전염병, 식량 고갈, 전쟁, 착취, 기아, 난민, 극단주의적 테러 등―이 뭉뚱그려져 있다. 우리는 세계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이러한 위험 요소를 없애고 싶어 하고, 때로는 어떤 영웅적 존재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결한 히어로들도 어찌할 수 없는 ‘타노스의 유령’은 세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1“정확한 유물론적 입장(……)은 하나의 ‘전체’로서 우주는 없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레닌의 유산―진리로 나아갈 권리』, 정영목 옮김, 생각의힘, 2017, p. 51.

2알랭 바디우, 『윤리학』(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4장 「진리들의 윤리학」 참조.

3.

타노스의 고향 행성은 폭증한 인구와 자원 고갈로 인해 멸망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타노스는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인구의 절반을 죽여 멸망을 막자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고, 그는 광인 취급을 받으며 행성에서 추방당했다. 고향 행성의 멸망 이후 타노스는 우주 인구의 절반을 죽이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집요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지만, 그것을 달성한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순진할 정도로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1927년에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에 불과했다.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인구는 80억에 도달했다. 이처럼 비슷한 수준의 문명이 유지된다면 인구는 금세 늘어날 수 있다. 요컨대 인구의 순간적 감소는 별다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성장주의적인 방향에서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돌려놓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타노스는 이러한 고민 없이 자신의 과업에서 쉽게 은퇴했다. 마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원리와 모순을 파헤치는 데에서는 놀라운 집요함과 지성을 보여주지만,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순진한 낙관으로 일관한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철학자의 이러한 ‘순진함’을 종종 비웃거나 의아하게 생각한다. 타노스의 대책 없음이 설정 오류가 아닌가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있듯이.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철학자는 지배적 의견이 해명하지 않는 단 하나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삶을 바칠 수 있고, 그 문제에 천착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철학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란 ‘전체’를 사유하는 것에 누구보다 앞서 실패하는 바보에 불과할 수도 있다. 타노스는 철학자치고도 유난히 바보 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첫 번째 죽음에서 타노스는 철학자다운 겸허함과 검소함을 보여주었다. 타노스는 인구의 절반을 없애는 ‘핑거 스냅’의 확률에 자신마저 포함시켰으나 공교롭게도 살아남았다.3 이후 타노스는 어느 행성의 한적한 시골로 가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자신의 오두막에서, 그는 탐욕을 불러일으킬 뿐인 인피니티 스톤을 파괴했다. 어벤져스는 그의 오두막으로 쳐들어가 타노스에게 복수하지만, 우리는 타노스가 별다른 미련 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타노스의 두 번째 죽음은 그의 철학적 실패를 보여준다. 타노스는 그의 목적을 관철하지 못했고, 허무와 회한 속에 죽었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이 무엇일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킨 타노스는, 자신이 성공할지 모르는 채 계속했다. 그는 오직 자신의 확신에 의거하여 목적을 달성했고 죽었다. 그러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는 미래에서 온 네뷸라 때문에 자신이 성공했음을 알게 된다. 이 앎 때문에 타노스는 약해지고, 오만해지며, 어벤져스와 그의 처지는 반전된다.

타노스의 첫 번째 죽음 이전, 즉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어벤져스는 감정적 애착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로키는 자신의 형 토르가 죽을까 봐 타노스에게 스페이스 스톤을 넘겨준다. 가모라의 죽음에 분노한 스타로드는 타노스를 때려 타노스를 제압할 수도 있었을 정신지배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어벤져스는 비전이 죽을까 봐 그의 머리에 박힌 마인드 스톤을 빨리 제거하지 못하고, 결국 타노스에게 마인드 스톤을 빼앗긴다. 어벤져스는 뭔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포기하지 못해 타노스에게 패배한다. 대조적으로 타노스는 날카롭고, 냉정하고, 신중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딸 가모라를 소울 스톤을 얻는 대가로 잃고, 그럼으로써 지키고 싶은 것을 모두 잃는다(핑거 스냅 이후 보는 환상에서, 어린 가모라가 “무엇을 대가로 치렀나요?”라고 묻자 타노스는 “모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미래에 승리했음을 확실히 알게 된 후, 타노스에게 어벤져스와의 대립은 감정적 문제가 된다. 첫 번째 죽음 이전, 자신이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어벤져스가 넘어서야 하는 난관이었다면, 미래를 본 이후, 어벤져스는 이미 달성한 것을 망친 짜증 나는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타노스는 아이언맨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종족들을 죽이면서 개인적인 흥미를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너희들 때문에 지구를 파괴하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군.” 승리에 대한 확실한 앎은 타노스를 오만하고 조급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이제 불확실성을 겸허하게 감당하는 자는 아이언맨이다. 마지막 전쟁에서 아이언맨은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묻는다. “이게 네가 본 우리가 승리하는 미래인가?”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답한다. “내가 그것을 지금 말하면 아니게 되겠지.”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승리라는 결과를 아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이미 가진 것을 방어하려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쪽이 승리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철학자 타노스와 전체주의자 타노스를 분리한다. 진리가 전체의 공백에서 출현하는 것이라면, 진리는 불확실성 속으로 몸을 던지는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반대로 전체주의자는 상황 속에 이미 확실하게 규정된 어떤 것이 전체를 장악하기를 원한다. 첫 번째 타노스가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철학이라는 욕망’을 보여주는 특별한 악당이라면, 두 번째 타노스는 자신이 달성한 것을 지키려 하기에 흔한 악당, 실패한 전체주의자에 불과하다. 시간여행을 통해 그를 한낱 악당으로 전락시킴으로써, 타노스의 승리를 누설함으로써, 어벤져스는 타노스에게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3영화 개봉 후 학생들과의 인터뷰에서 루소 감독은 타노스가 절반의 확률에서 자신을 제외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터뷰 번역본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s://extmovie.com/movietalk/33449027

4.

이제 우리는 타노스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말, “나는 필연적이다(I am inevitable)”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필연성에 ‘나’를 일치시키는 말일 수 있고, 반대로 ‘나’에 필연성을 일치시키는 말일 수도 있다. 필연성에 ‘나’를 일치시키는 경우, 그는 철학자이다. ‘나’에 필연성을 일치시키는 경우―‘나’가 권력자 개인을 의미하건, 집단적·민족적·국가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의미하건 간에―그는 전체주의자이다. 많은 사람이 이 둘 사이의 구분 불가능한 유사성을 이유로 철학의 모순을 지적해왔다. 도대체 어떻게 한 주체가 자신이 복무하는 논리적 필연성과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분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해 타노스가 남긴 힌트가 있다면 진리의 필연성은 언제나 동시에 불확실성으로 경험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상황 속에서 전혀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주의와 철학(악명 높은 “로고스 중심주의”)의 근접성이라는 식상한 혐의보다 더욱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 즉 아이언맨의 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가 타노스의 말과 재미있게 대구를 이룬다는 점이 더 불길한 혐의를 검토하게 한다. 타노스는 우주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임무와 자신의 삶을 동일시한다. 대조적으로 아이언맨의 그 대사는, 타노스에게 승리하는 1400만분의 1의 확률을 실현하는 것이 자신임을, 바로 여기에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임을 동어반복적으로 표현한다. 타노스의 말에 거대한 야심과 자의식이 들어 있다면, 아이언맨의 말에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임을 받아들이는 유머가 있다. 어벤져스의 전쟁은 마지막에는 결국 타노스와 아이언맨의 대립으로 집중된다. 이념적·의식적으로 타노스와 캡틴 아메리카가 가장 분명하게 대립하며 닮아있다면, 형식적·무의식적으로는 타노스와 아이언맨이 가장 분명하게 대립하면서 닮아있다. 즉 캡틴 아메리카와 타노스의 관계가 서사적이라면, 아이언맨과 타노스의 관계는 외설적이다. 타노스와 아이언맨은 니체의 그 유명한 “나는 운명이다”를 양분하는 21세기의 신화적 인물들이다.

요컨대 타노스와 아이언맨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운명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것을 긍정한다. 어쩌면 둘의 대구는 ‘철학의 비인격성’과 ‘자본의 비인격성’이 쌍둥이처럼 닮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언맨은 순환하고, 팽창하고, 분열하고, 재구성되는 자본주의적 세계의 전모 그 자체를 표상한다(마르크스는 자본가가 한 개인이 아닌 “인격화된 자본”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타노스는 그러한 세계의 중단이야말로 필연적이며, 그러한 필연성이 곧 자신이라고 주장한다(스피노자는 철학자를 필연성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자, 즉 “탈주관화”된 개인이라고 여겼다).

둘은 모두 불확실성 속으로 몸을 던지며, 죽음을 불사하며, 그럼으로써 한 번씩 승리했다. 이것은 상황의 불확실성, 말 속에 등장하는 ‘나’와 말하는 주체 사이의 시차(parallax),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 주관성과 필연성의 일치, 승리나 패배라는 결과 등을 따져도 둘 중 어느 쪽에 도래할 진리가 있는지 식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비슷하게, 우리는 눈앞에 닥친 이 세계의 위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힘들다. 한편에서는 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급진적으로 중단하고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온 문제들을,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방식을 더 가속함으로써―가령 친환경 사업에의 대규모 투자, 에너지를 위한 우주 식민지 개척 등의 방식으로―해결하자고 한다. 이 둘은 똑같이 불확실한 미래로 열려 있는 듯 보이고, 둘 다 끔찍한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결단을 미룬다고 해서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이 짧은 글에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일단 상황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철학이라는 욕망’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 다시 한번(미리) 강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앞서 오늘날의 사유를 한계 짓는 두 가지 합의를 이야기했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는 한편으로 문화적 재현과 연결되고, 한편으로 국민에 대한 국가의 통치와 연결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고통을 ‘재현할 권리’를 가진 생명이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데 정치적 사유를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편에 ‘권리’의 무분별함이 있고(실제로 고통을 기준으로 둘 때 어떤 고통받는 존재도 다른 고통받는 존재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에 재현된 고통의 선별이 있다. 가령 우리는 소말리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우크라이나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후자의 죽음이 ‘1 세계’에 더 가까운 것으로서 더 많이 재현되기 때문이다. 한편 거의 모든 정치적 상상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헌법적 명분을 넘어설 수 없는 것 같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의 ‘기회의 공평함’과 ‘무한 경쟁’이라는 원칙은 필연적으로 성장주의와 연결된다. 성장주의는 한편으로는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잔혹한 착취와 연결되고, 한편으로는 개인들 사이의 끝없는 경쟁과 서열화에 연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내면화한 성장주의의 한계는 점점 더 자명해지고 있다.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와 같은 책은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성장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이어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사는 지금 이 방식을 유지해서는, 세계가 결국 어떤 인간도 살 수 없는 곳이 되리라는 사실 말이다.4 이러한 설명은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더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사람들이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하느냐일 것이다. 즉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모두에게 욕망하도록 강제되는 것(가령 부자 되기)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기를 욕망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상처와 세계의 상처가 다른 것이 아님을 어떤 논리를 통해 드러내야만 한다.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민족이나 언어, 가치관, 피부색 등의 차이―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항상 제국의 통치술이었다. 반대로 해방 운동은 정체성에 기반한 모든 차별의 철폐를 약속하면서 세계를 피지배자와 지배자로 양분하는 어떤 주체―결코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주체―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서로 차별하고 적대하는 상황은 해방 운동 이전의 여느 사람들이 겪은 상황과 비슷하다. 모두가 모두를 차별하고, 서로 비교하고 검열하는 오늘날 도시의 삶은 사람들을 심한 고통 속에 밀어 넣고 있다. 많은 사람이 역동적으로 뒤섞여 살아가는 도시의 삶 속에서 사람들의 몸과 욕망은 세분화된다. 그에 따라 ‘몸’을 규정하고 식별하는 법과 언어도 세분화된다. 이러한 세분화가 ‘윤리적’이라는 착시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윤리’는 우리를 가둔 사유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윤리는 해방 운동을 방어하는 어느 선량한 제국주의자의 논리와 비슷하다(가령 아이티 혁명 직전 프랑스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권리를 보장받는 유색인종의 범위를 조정하고, 노예제와 관련된 언어적 표현들을 덜 야만적으로 들리게끔 교정했다5). 이처럼 타협적인 ‘윤리적’ 고려 속에서, 우리는 세계에 만연한 불평등을 감내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 같다. 만연한 불평등과 경쟁 속에서, 상황의 한계를 벗어나는 거창한 사유는커녕 타자에 대한 일말의 이해조차 불가능해지고 있다.

‘세계화된 세계’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강대국의 대형 선박들이 앞바다를 약탈하기 때문에, 인도양에 접한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중국의 공장이 대기를 오염시킨다고 비난하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생산하는 제품의 부품들이 바로 그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선진국의 사람들은 ‘세계화된 세계’의 순환에서 막대한 이익을 누리지만, 그러한 순환이 낳는 피해는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부과된다. 세계화된 세계 속을 사는 모두가 파괴와 약탈, 착취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문제를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상황의 ‘전체’를 사유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세계화된 세계의 순환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은 이렇게 방어할 것이다. “물론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는 부조리합니다. 그러나 섣불리 바꾸려고 하면 훨씬 더 야만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6 따라서 체제를 바꾸는 대신 몸들을 더욱 섬세하게 고려하고, 차별적이지 않은 세심한 언어를 발명하자고 말할 것이다.

진리를 사유할 수 없다면 판단의 기준으로 남는 것은 사실과 의견, 그리고 당사자성이다. 이것들에 대한 고려는 각자의 몸과 언어, 즉 주관적 이해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동시대적 합의 속을 순환하고 그 합의를 견고하게 한다. ‘무엇이 재현 가능한 사실인가? 무엇이 다수의 의견인가? 누가 이 문제를 몸으로 겪는 당사자인가?’ 모두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판단의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누구도 이 상황에서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는다. 몸과 언어에 대한 세심한 고려는 지적 신중함과 윤리적 태도의 옷을 입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진리에의 욕망을 무한히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진리의 배제는 결국 처참한 주관화, 온갖 상대주의적 폭력, 사유의 끝없는 보수화, 만연한 무기력을 낳았다. 우리가 훨씬 거대한 적대의 드러남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허영 때문이 아니다. 오직 그러한 적대의 드러남만이 우리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하고 있는 것,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다. 학식이나 교양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욕망으로서의 철학. 이 욕망은 한 시대를 틀 짓는 사유의 한계를 마치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논리를 따라 전체를 향해 나아간다.

4 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김현우·민정희 옮김, 창비, 2021) 참조.

5 시 엘 아르 제임스, 『블랙 자코뱅(우태정 옮김, 필맥, 2007) 3장 「프랑스 의회와 노예」 참조.

6 앙투안 피에르 조제프 바르나브는 혁명 프랑스 의회 최고석에서 노예 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식민지] 체제는 부조리합니다. 그러나 이미 수립된 이상 섣불리 다루려다가는 엄청난 혼란이 발생되고 말 겁니다. 이 체제는 포악합니다. 그러나 수백 만 명의 프랑스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있습니다. 이 체제는 야만적입니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분이 간섭하면 훨씬 더 야만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같은 곳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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