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수동성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한 노트

*웹진 《믿미》에 발표한 「수동성과 장르의 폭발」(2022. 9)을 소폭 수정하여 옮김.
https://artsoonhwanro.com/?p=3190

1.

인도 출신의 작가이자 저술가인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근대 소설의 역사 전체를 ‘인류세’ 혹은 ‘홀로세(Holocene)’와 관련해 매우 대범하게 분석한다. 고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규범이나 개연성(있을 법함, probable)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홀로세의 기후 안정성, 자연을 예측·계량·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서구 근대적 사고방식을 전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 소설은 “인간 문명을 꽃피우게 한 시기―즉 홀로세―에 누린 기후 안정성을 토대로 구축”되었으며 “부르주아적 질서의 현실 안주와 자신감”을 동력으로 발전했고, “자연을 온건하고 질서 정연한 것으로 가정”하는 “‘근대적’ 세계관”을 전제하는 것이었다.1

고시의 글쓰기는 다채로운 맥락들을 흥미진진하게 누비면서 이리저리 비약하기도 하지만, 그 책의 1부를 꼼꼼하게 읽은 독자는 선명하게 나뉜 두 개의 계열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적이고 근대적인 ‘순수 소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인간적이고 비주류적인 ‘장르 소설’이 있다. 즉 ‘근대 소설-순수 소설-개연성-인간 중심주의-서구 중심주의-부르주아적 질서-연속성-유한성’의 계열이 있고, 반대편에 ‘장르 소설-비주류 영역-비인간-비서구-불연속성-언캐니(uncanny)의 계열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이렇게 이분화된 계열이 전제되어 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비인간을 다룬 글이 쓰이고는 있지만, 그것은 순수 소설이라는 대저택 내에서가 아니라 추방당한 공상과학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등이 기거하는 비주류 영역에서다.”2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비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외적인 작품들은 근대 소설의 대저택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물론 고시가 옹호하는 것은 후자의 계열이다.

서구 근대 소설의 역사와 인류세, 인간 중심주의를 연관 지어 사고하는 고시의 도발적인 주장은 시사점이 많다. 하지만 위의 단순한 이분법에 여러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의문은 이 구분으로 포착할 수 없는 문학작품이 많다는 데서 온다.

이를테면 이시구로의 소설은 위의 이분법적 구분을 가로지르는 예다. 이시구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근대 소설의 전통적인 규범에 충실한 작가다. 고시의 말마따나 그것은 연속성과 유한성, 예측 가능성을 전제하는 서구 근대 소설의 보수적인 규범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에서 과도한 사실성, 개연성,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들, 복제 인간이나 인공 친구(artificial friend, AF)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가장 외부자적인 인물들, 예외적인 존재들, 비인간들이 친숙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존재들이 괴이하고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너무 친숙하고 평범해서 ‘언캐니’하다.

‘언캐니’는 하이데거나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영어로 옮긴 것으로, 한국어로는 ‘친밀한 낯섦’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 기이한 감각은 너무 낯설기만 하거나 익숙하기만 한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문득 낯설게 행동할 때, 혹은 낯선 존재가 갑자기 너무 익숙하게 다가올 때 느껴지는 소름 돋는 감각이 ‘언캐니’다.

따라서 ‘언캐니’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익숙한 것이 너무 낯설어지는 방향이다. 예를 들어 인간인 화자가 벌레가 되는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방향이다. 둘째는 낯선 것이 과도하게 친밀해지는 방향으로, 『나를 보내지 마』가 복제 인간을 그리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은 비인간 존재를 인간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 자체가 폭발하는 것 같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특질과 관념 전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시구로의 소설은 장르적 요소와 설정을 ‘순수 소설’의 문법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순수 소설의 관념이 폭발하는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근대 소설’, ‘순수 소설’ 자체가 순수 혈통이 기거하고 높은 벽으로 담을 지은 대저택이 아니라 이미 장르들의 복합체와 혼종체(hybrid)로 가득한 오래된 숲이라는 것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온갖 장르적 성분들로 직조한 얼룩덜룩한 직물이다. 이 직물 속에서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의 경계는 전혀 뚜렷하지 않다. 사실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동적으로 교류하고, 경쟁하고, 명멸하는 장르들의 생태계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프레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고시의 주장에 대해 드는 두 번째 의문은 ‘근대 소설’이라는 범주 자체가 따져 보면 일관성이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가령 카프카는 서구 근대 소설사에서 기념비적인 중요성을 부여받은 작가이지만, 그의 소설은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성을 보여주고, 비약적이며, 『프랑켄슈타인』 못지않게 ‘언캐니’하다. 동시에 카프카의 스타일은 차용·모방·패러디 가능한 문법화된 장르로 자리 잡았다(이시구로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카프카적 스타일도 차용·모방·오마주 가능한 문법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복제 인간의 클리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르적 성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를 따라 말하자면, 카프카의 작품이 갖는 생성(becoming)의 힘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재현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역사적 재현은 항상 어떤 작품에 고정된 위상, 가치, 범주, 스타일을 부여하려 하지만 작품이 갖는 생성의 힘은 가능한 한 그러한 고정성을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도 그것의 위상과 이름과 역사적 분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문학 텍스트가 갖는 생성의 힘, 지금 우리에게 생생하게 말을 거는 그 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은 ‘근대 소설’이나 ‘주류 소설’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장르 소설’이나 ‘비주류 소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전복적 읽기가 둘 사이의 낡은 위계적 이분법을 역설적으로 보존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재현적 범주를 뒤집기는 해도 그 낡은 범주의 경계를 해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낡은 이분법은 동시대 독자들의 독서 경험과 이미 얼마간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장르 소설, 웹 소설, ‘순수 문학’을 가리지 않는 잡다한 독서 경험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끌리는 것을 선택해서 읽고, 작품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주류 문학과 비주류 문학을 나누는 구조적 차이들, 이데올로기들, 장치들이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을 없는 셈 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한 구분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우리의 독서 경험에 좀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표면적으로 보면 이시구로 소설의 궤적은 주인공들을 점점 더 철저하게 ‘고아’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 『우리가 고아였을 때』,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초·중기 소설에서는 평생 지켜온 가치관이 붕괴하고, 삶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는 인물들이 나온다. 어쨌든 그들은 인간이고, 인간인 만큼 부모가 존재한다. 초·중기 소설에서는 ‘부모’로 상징되는 법, 의미, 기억, 가치 등이 있었지만 산산조각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부모가 없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은 인간에게 장기 기증을 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할 운명이다.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아이를 돌보는 AF로서 한 아이를 위해 헌신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운명으로부터 불쑥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전 소설들의 주인공이 실존적으로 고아가 되어간다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이미 고아다.3 초·중기 소설의 목적지였던 곳이 최근 소설에서는 출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초·중기 소설에서 인간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충실했으나 자신의 신념에 배반당하고, 자신의 삶이 부정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파괴되고 공허해진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초·중기 소설에는 패턴처럼 반복되는 인식의 변화가 있다. 처음에 인물들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상황에 수동적으로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사실을 뼈아프게 알게 된다. 그런데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수동성을 기본값처럼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궤적을 염두에 두면 이시구로의 소설이 점점 더 소수적인 존재 혹은 체제의 외부자(outsider)에 주목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시구로는 자기 소설의 인물들이 외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수(major)’에 속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제 소설의 인물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외부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 두 번째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은 그 사회와 그 세대에서 다수에 속하는 인물이고, 이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비극입니다. 그는 전쟁 중의 그 세대와 시기에서 외부에 서 있을 만큼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조류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다소 이상한 공동체에 속해 있긴 하지만, 그 공동체의 대다수에 속하고, 공동체의 외부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주어진 일에 매우 수동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상황의 외부에 서 있지 못합니다.”4 여기서 우리는 소수와 다수에 대한 전도된 이해를 본다. 대다수 사람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자신의 계급과 처지를 받아들이고, 체제와 규범에 맞추어 살아간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극소수다. 그렇기에 극도로 수동적인 존재를 그림으로써 우리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 예외 상태가 곧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 “헐벗은 생명”(아감벤)이 모든 생명의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가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중요한 점은 그들이 반항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기[기증] 때문에 도살되는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우리 대부분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원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은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사람들이 필멸적인 존재라는 것,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죽는다는 것,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5

이시구로의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우뚝 서서 세계와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그러한 근대적 주체의 삶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평범한 삶은 ‘세계-속의-삶’, 세계의 온갖 법칙과 변화에 수동적으로 영향받는 삶이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인물들을 놓고 누군가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기도 한다.6 그러나 이시구로의 소설들이 그려온 궤적을 보면, 소설이 일관되게 천착하는 것은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조건―혹은 생명 일반의 조건―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그 가혹한 조건의 메타포가 되는 것이 ‘고아’이다. 부모 없는 존재들, 타자의 처분에 수동적으로 내맡겨진 존재들,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들, 즉 복제 인간이나 AF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보여주는 형상으로 그려지면서 인간과 비인간, 장르 소설과 순수 소설의 경계가 폭파되고 익숙한 관념들이 낯설어진다. 가장 약하고, 비인간적이고, 장르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3.

사실 ‘수동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시구로의 소설은 정치적 무기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고, 주체적으로 체계를 변형시키고, 체제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그러한 태도 자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로 읽힐 수 있다. 이 수동성을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적 모순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한층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생태사회주의자인 제이슨 W. 무어는 근대의 자본주의 체제가 자연, 생명, 돌봄, 노동 등을 저렴하게 착취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7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인간 문명의 저변에서 생명과 돌봄에 드는 노동력을 순순히 착취당하듯이 근대 자본주의는 ‘자연(그리고 근대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동일시한 것들: 가령 여성, 유색인종, 동식물)’을 수동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으로 외부화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동적인 존재들, 즉 ‘자연’과 동일시된 존재들은 오랫동안 역사나 담론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수백 년간 밀어붙인 ‘발전’과 ‘성장’의 폐해를 마주하고 있다. 기후재난, 환경 오염, 에너지 고갈 등의 문제 말이다. 그런데 문제의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이시구로의 말처럼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오늘날 인간 존재는, 능동적으로 상황을 개척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당황하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을 닮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한편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존재와 상태를 깊이 사고해야 함이 마땅하다. 또 우리 자신이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 즉 생명의 그물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지구적인 문제에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입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가로지르고 해체해야 하는 것은 ‘능동성’과 ‘수동성’의 이분법 자체인지 모른다. 우리는 ‘자연’과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단독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인, 사물, 자연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체이자 혼성체이며,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페이션시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의 주목할만한 논문을 읽었다.8 그 논문은 주체, 행위자, 능동성이 아니라 ‘페이션시(patiency)’, ‘감수자(感受者, patient)’, 수동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감수자’는 ‘행위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영향을 끼치기보다 영향을 받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논문의 저자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이론은 지나치게 ‘행위자 중심적’이었다. 행위자만큼이나 중요한 감수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행위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의 영향을 받는 존재도 반드시 있다는 점에서, 이 편향된 이론적 관심은 잘못된 것이다. 존재의 절반에만 이론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능동적 행위자를 주인공으로 여겨왔다. 사실 이 점은 ‘순수 소설’에서나 ‘장르 소설’에서나 거의 매한가지다. 보통 SF나 디스토피아 소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통쾌하게 성공하건, 비극적으로 실패하건, 적당히 타협하건 어쨌든 저항하려고 한다. 우리는 디스토피아적 배경에서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거나 주요한 인물로 나오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대를 배반하려는 듯이 이시구로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즉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인물들,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 인물들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인물들이 디스토피아 장르의 주인공이었던 경우가 많이 없었던 만큼 이시구로 소설의 주인공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수동성’을 무기력이나 패배주의로 읽는 것은 너무 단순한 독해일 테다. 그런 독해를 피하기 위해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타나는 ‘수동성의 주체성’을 간략히 짚어보려 한다.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이 말하듯이 수동성은 어떤 종류의 전도된 힘일 수 있다. 감수성도 하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감수성이야말로 ‘생성’과 ‘배움’, ‘접속’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고 열이 날 때 피부가 예민해지는 것처럼, 바람과 온도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는 약해질 때 동시에 강해지기도 한다. 이시구로 소설의 모든 인물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만, 그렇다고 그 인물들이 다 같은 의미를 띠는 인물들인 것은 아니다. 운명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듯, 수동성에도 여러 결이 있다. 특히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전적으로 순응적이지만,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보다 강해 보이기도 한다. 클라라는 환경을 예민하게 감응하고, 세계를 관찰하고 배운다. 자연 속에서 터전을 꾸리는 동물들처럼 목표를 설계하고, 끈질기고 기민하게 수행한다. 클라라가 세계를 배우는 방식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과정 그 자체다.

4.

“클라라,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매니저는 로사나 다른 에이에프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네.” 매니저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걸 알아야 해. 우리 매장은 아주 특별한 곳이야. 세상엔 너나 로사나 여기 다른 누구를 친구로 갖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이 아주 많아. 그 아이들은 너를 가질 수가 없어. 그래서 창으로 다가와서 너를 가졌으면 하는 꿈을 꾸는 거야. 그러다 보면 슬퍼지지.”
[……]
“그런 아이는, 에이에프가 없으니 틀림없이 외로울 거예요.”9

세계를 ‘배우는’ 클라라의 감수성 덕분에 소설 속 세계의 부조리한 전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독자는 초반부에서 극심한 빈부격차와 나빠진 날씨가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는 현재보다 더욱 완고해진 불평등이 그려진다. 아이들은 ‘향상’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로 나뉜다. 정확하게 그 과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향상’은 엄청난 비용과 부작용의 가능성을 무릅쓰는 것으로, 상류층 아이들에게만 가능한 과정인 것 같다. 또 대체로 명문대나 좋은 직장은 ‘향상’된 사람들만을 받아주고 있는 것 같다. 클라라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조시의 AF가 되어 조시와 ‘향상’되지 않은 옆집 아이 릭의 관계를 관찰한다. 릭은 향상되지 않은 상태로 대학에 진학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인다. 소꿉친구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한 조시와 릭은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 세계에 레지스탕스처럼 저항하는 세력이 있음이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암시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은 먼 배경으로 물러나―특이한 소수의 행위처럼―흐릿하게 암시될 뿐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가 사는 세계만큼이나 암울하고 냉정하다.

이렇게 암울한 세계를 클라라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기이하게도, 조시의 어머니는 클라라에게 조시를 모방하라고 명령한다. 클라라는 명령에 따라 조시를 따라한다. 이때 클라라가 지닌 뛰어난 감수성은 모방의 능력으로 변모한다.

“잘한다. 정말 잘해. 그러면 이제 움직여 보렴. 뭔가 해. 계속 조시인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 좀 보여 줘.”
나는 조시처럼 웃으며 구부정하고 편안한 자세를 했다.
“잘한다. 이제 무슨 말을 해 봐. 말 좀 들어 보자.”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아니. 그건 클라라잖아. 조시처럼.”
“안녕, 엄마. 나 조시야.”
“좋아. 더 해 봐. 어서.”
“안녕, 엄마.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맞지? 나 여기 왔는데 괜찮잖아.”10

‘어머니’가 조시를 따라 하라고 시키는 이유는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유는 나중에야 밝혀지는데, 어머니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병든 조시가 죽으면 클라라를 조시와 똑같이 생긴 장치에 옮겨 담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 조시 없이 살아갈 자신(조시를 애도할 자신)이 없기에 아이의 복제물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클라라는 조시를 훌륭하게 모방한다(이 얼마나 ‘언캐니’한 모습인가). 그러나 동시에 클라라는 이러한 수행이 결국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라라는 조시가 완쾌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시가 완쾌할 거라는 클라라의 확신은 맹신이나 광신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인다. AF는 햇빛을 양분 삼아 기동하는데, 클라라는 햇빛이 자신을 강하게 해주는 것처럼 조시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이 조시를 마음에 들어 하면 조시에게 기적을 베풀어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태양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클라라는 공해를 생산하는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태양의 마음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할 법한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태양에 말을 거는 클라라의 엉뚱한 수행 덕분인지 조시는 정말로 건강해진다.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AF의 ‘초지능’이 인간이 원리를 알지 못하는 기적 같은 일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클라라를 제외한 소설 속 인간들이 날씨가 생명과 건강에 미치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비인간 클라라만이 인간이 얼마나 주변 환경에 ‘영향받는’ 존재인지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 인과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므로, 클라라가 수행한 희생이 실질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실질적인 보상이 없는,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클라라의 헌신을 보여준다.

클라라가 조시의 건강을 위해 바치는 헌신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만큼 인과관계를 벗어난 주체적 행위처럼도 보인다. 인물들은 상황의 인과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클라라는 인과관계를 벗어나 정말로 무언가를 ‘한다’. 클라라는 조시를 위한다는 자신의 정해진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인간적인 정도의 순응성이 오히려 이상하게도 클라라를 주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클라라와 태양』은 수동과 능동의 구분 자체가 와해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클라라의 수행은 어머니와의 계약관계 속에서 수립되는 것이 아니다. AF에게 주입된,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는 원칙을 자의식 없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AF가 인간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고, 또 클라라가 매우 독특한 AF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클라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명령은 따르지 않고 거부하기도 한다. 게다가 클라라는 자신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아이 중 조시를 스스로 선택했다.

조시의 어머니가 클라라를 구매하면서 원했던 것은 클라라가 조시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조시가 죽은 후 클라라가 조시의 대리물로서 자기 옆에 있기를 바랐다. 자기 보존 욕망을 따른다면, 어머니의 바람대로 되는 편이 클라라에게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조시가 낫기를 바라고, 나을 거라고 확신하며, 조시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한다. 자신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헌신한다는 점에서 클라라의 생각과 행동은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에게 낯설다. 클라라가 수행하는 것은 누군가 알아주고 보상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희생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합리적인’ 인간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클라라와 태양』의 온갖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과 말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클라라의 확신과 희생뿐이다. 나머지 인간의 말과 행동은 상황의 인과관계 속에 붙잡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클라라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p. 442). 그러나 이것은 클라라의 겸손한 표현인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아주 특별한 무언가’로 만드는 것은 인간들―특히 부모자식 간의―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클라라 자신의 확신과 희생이다.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비인간 클라라의 삶 속에 특별함이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친밀한 낯섦을 지닌다면, 클라라는 인간과 비인간, 수동성과 능동성, 지혜와 어리석음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숭고함을 지닌다. 이 ‘숭고함’은 인간적인 것일까 비인간적인 것일까? 알 수 없다. 그것은 ‘숭고(sublime)’라는 말 그대로 낯설고 절대적이어서 상대적인 구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p. 35. ↩︎
  2. 같은 책, p. 95. ↩︎
  3. 박선주는 철저한 외부성인 동시에 인간의 근본 조건이기도 한 ‘고아’의 개념을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과 연결지어 자세히 분석한다. 다음 논문에서 박선주는 “인조인간이야말로 ‘고아’라는 정체성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온전히 전유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박선주, 「인조인간, “헐벗은 생명,” 포스트/휴머니즘: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카즈오 이시구로의 『날 보내지 말아줘』에 나타난 고아와 인간」, 《역사와 문화》, 24, 2012, pp. 129-152. ↩︎
  4. Sean Matthews “’I’m Sorry I Can’t Say More’: An Interview with Kazuo Ishiguro” Kazuo Ishiguro: Contemporary Critical Perspectives. Continuum: London and New York, 2009, p. 115. ↩︎
  5. lbid, p. 124. ↩︎
  6. 김남주 해설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2010, p. 306 참조. ↩︎
  7.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자본의 축적과 세계생태론』,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참조. ↩︎
  8. 김홍중·조민서, 「페이션시의 재발견―고프만과 부르디외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5(3), 2021, pp. 35-65. ↩︎
  9.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홍한별 옮김, 민음사, 2021, pp. 22-23. ↩︎
  10. 같은 책, pp. 159-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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