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 가을호
0. 문제의식
지난겨울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계엄령부터 서부지법 사태를 거쳐 탄핵과 대선까지, 충격적인 일들이 지나가고 나서 상황이 나름 온건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듯하다. 하지만 무언가 돌아왔고 ‘회복’되고 있다는 안도감에, 김형중 평론가의 말처럼 삐딱한 ‘좌파적’ 의문이 계속 달라붙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 내란 전에는 한국이 정상 국가였는가?”1 이른바 ‘정상화’된 상황도 문제투성이이지 않은가. 정상화된 정치가 대표/재현하지 않는 정치적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제도가 문제없이 작동하고, 법이 존중되고, 경제성장이 느리게나마 이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르고,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것으로 다 괜찮을 것일까?
선거운동 기간에 이재명은 ‘민주당이야말로 진짜 중도보수’라고 말해서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2 국민의힘의 극우화 때문에 갈 길을 잃은 보수 성향 유권자를 아우르고 흡수하려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극우 세력이 집권 여당과 시민사회의 보수화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책방향이 중도보수적인 것이야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지만, 뭐랄까, 불가피하고 합당한 이유라도 있는 듯 중도보수를 말하는 데 있어 한층 당당해졌달까. ‘그들’로부터 사회를, 상식을, 질서를 지켜내고 회복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보수화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극우화와 보수화는 사실상 서로를 강화하며 발맞춰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보수화는 ‘정상적’ 상태를 유지하려 하면서 극우화의 땔감이 될 불안과 분노, 소외감을 키운다. 극우가 충격적인 행각을 벌이면, 더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고 온건한 상태를 지키려고 완고하게 보수화된다. 극우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만큼 정상적이고 질서 있는 사회에 대한 보전적 성향이 강화되면서 좌파적이라고 해야 할 정치적 상상력도 덩달아 봉쇄되는 듯하다.
그래서, 최근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새삼스러운 질문을 떠올리게 됐다. ‘도대체…… 좌파란 무엇인가?’
이 커다란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정치학자도 아니고 투철한 활동가도 아니다. 지금까지 한 적극적 정치 참여라고 해봐야 여러 시위에 다소 산만하게 참여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에서 그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 온라인의 남초 커뮤니티에서 종종 ‘좌파’는 멸칭으로 사용되거나 기껏해야 놀리는 말로 사용된다. 즉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위선적이고, 가르치려 들고, 재수 없고, ‘내로남불’ 성향이 강한 사람이나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꼭 보수적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에서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2030 세대에게 좌파라는 말이 무언가 중요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좌파라는 말을 현재의 맥락에서, 새로운 감수성으로 재활성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지면의 주제인 청년 남성의 문제를 생각했다. 최근 청년 남성들에 대한 담론이 폭증하고 있다. 서부지법 난동과 대선 출구조사, 그리고 대선 불복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극우화 경향이 시민과 지식인 들을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할 말이 너무 많은 주제인 것은 틀림없다. 오래된 여성혐오와 폭력들,3 가부장주의적 가족 모델의 고장, 남성들의 히스테리적인 불안, 특정한 어법과 사고방식으로 젊은 남성들을 끌어당기는 커뮤니티 문화,4 온라인 소통환경에서 안티페미니즘 유행과 전략의 형성,5 그것들을 이용하는 정치. 그리고 지독한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 취업난, ‘비교질’ 문화, 진보 혹은 좌파라고 자임하는 정치인과 엘리트 계층의 위선,6 세대 내 불평등, ‘인셀 남성성’7과 ‘루저 남성 정서’8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문제가 교차하고 얽혀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 글에서는 일단 가까운 텍스트들을 읽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최근 나는 구독하고 있는 언론(《한겨레》, 《시사IN》)의 기사와 칼럼을 한층 주의 깊게 따라 읽게 됐는데, 청년 남성과 극우에 관한 여러 분석기사와 칼럼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지만 이내 청년 남성 극우화를 둘러싸고 생산되는 담론과 지식 일각에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됐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담론들이 어떤 순환논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순환논리가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과 정치적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지금 생산되고 있는 담론, 특히 실증적이고 통계적인 사회학적 담론을 비판하려 한다.
논의의 과정에서 한 사회학자를 다소 집요하게 비판하게 될 텐데,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 이 글의 비판은 일련의 조사나 한 학자를 괜히 흠집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말할 때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난관을 성찰하고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점검의 과정은 또한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1. 설문 조사의 수행성
〈시사IN〉의 한 기획기사는 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수행한 설문조사를 소개하고 있다.9 세대와 성별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설문조사인데 문항 설계에는 여러 정치·사회 전문가가 참여했다. 일련의 문항에 부/동의 정도를 묻는 방식이었는데, 기사에서 소개하는 문항 중 몇 가지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보복으로 인해 한국이 경제적 타격을 입더라도 중국과 거리를 두고,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장애인 의무고용제’에 대한 찬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반
―‘고위공직자 여성할당제’에 대한 찬반
기사에 따르면 이 모든 문항에서 2030 남성의 특이성이 두드러졌다. “결국 2030 남성은 안보·경제적으로 보수적이면서 각종 차별 시정 조치에 보수층 일반보다 반감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같은 곳). 이것이 조사에서 확인된, 놀랍지 않은 결과다.
전문가들은 적실한 질문을 고른 것 같다. 위 문항들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전문가들을 신뢰할 수 있다. 설문조사의 의도가 사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도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하고 적실한 질문을 던지는 설문조사는, 왜 이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졌는지 말하지 않는다.10 이 질문들은 어쩌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를 만큼 그토록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가? 이 질문들이 특히 결정적 질문이 된 주요 이유는, 젊은 남성들이 그 문제들에 격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은 어쩌다가 남성들을 화나게 하고, 한쪽으로 모이게 하고, 반동적으로 결집하는 효과를 낳는 질문들이 되었는가? 바로 여기에 현재 청년들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떤 질문이 그 사회의 결정적인 정치적 질문으로 부각되고 조성되는 과정은, 한 사회가 특정한 모습의 사회로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단적인 예로, 어떤 정당 혹은 정치인이 ‘우리 사회는 북한에 의해 심각한 안보의 위협을 받는 사회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의 말은 불안을 조장한다. 동시에 그 말은 사람들의 불안을 특정한 형식으로 번역(‘당신의 불안은 북한 때문이다’)한다.11 그 발화를 단순히 ‘사실’과 동떨어진 선동이나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번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정당/정치인의 영향력은 실제로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북한에 의한 안보의 위협이 실제로 심각해질 수 있다. 그 정치인과 정당은 자신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의 상, 즉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의 말에 무슨 마술적 힘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대로 북한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의 선동이 남북관계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변수라는 말도 아니다. 방위가 순전히 담론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아니다. 북한은 세계에 실재하며, 동해로 쏘아진 미사일도 담론과 기호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요점은, 누군가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시적 발화가 아니라 수행적 발화라는 것이다. 즉 사회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진술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며, 발화자의 영향력이 클수록 진술의 수행성 역시 강해진다(혹은 역으로, 진술의 수행성이 강해지면 발화자의 영향력이 커진다).
우리는 대선 토론이나 청문회에서 민정당 계열(현 국민의힘) 정치인이 민주당 계열(현 더불어민주당) 정치인에게 버릇처럼 묻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主敵)입니까 아닙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해 보세요!’ 그들은 이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 수행함으로써 그것이 이 나라 정치의 ‘결정적 질문’으로 유지되게끔 애를 썼다. 그것이 결정적 질문이 될수록 실제로 보수정당(민정당 계열)의 영향력은 커졌으며, 그때마다 실제로 북한은 우리의 주적 비슷한 것이 됐다. 그들의 반복된 수행이 그 질문이 중요해진 유일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 질문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이 되어왔기 때문에, 설문 참여자는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기 위한 설문지에서 비슷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택지를 두 가지(예/아니오)에서 다섯 가지로 늘린다고 해서 질문의 대립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 ‘현실’정치의 맥락 속에 있는 시민은, 그 질문을 마주했을 때 특정한 대립 구도에 휘말리지 않기 힘들다.
중국에 대한 외교나 여성·소수자 정책에 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에 비하면 중국과 페미니즘에 관한 관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특히 젊은 세대에서 결정적으로 부상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모종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수행을 거쳐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은 똑같다. 그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지는 과정이 곧 청년 남성들이 극우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질문들을 통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인식의 변화를 만들지 않는 사회학적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난민이나 장애인,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은근하거나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유튜버와 정치인의 말을 듣고,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발 소문과 담론 들에 노출되고, 그것들에 반응하면서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친구와 절교하고, 대선 토론을 보고, 정치인이 불안의 해소를 약속하거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마침내 선거장에 가서 어떤 선택지를 고른다. 그 결과로 누군가 당선되고 세대별·지역별·성별 표심이 나타난다. 설문조사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정교하게 재연함으로써 개연성 있는,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는다. 즉 한국 현실정치의 ‘현실’을 바로 그러한 현실로 구성하는 질문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현실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질문과 선택지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동일한 대립 구도의 논리에 가둔다. 민주주의를 허울 좋게 내세우는 ‘관객 참여 예술’에서 관객이 그렇게 이용되듯이, 설문조사의 응답자들은 기획자가 미리 설치해둔 틀을 따라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2. 사회학자는 무엇을 하는가
사회학자는 사람들을 어떻게 분류할지 아는 사람 같다. 사회학자 김창환은 마찬가지로 《시사IN》에서 ‘한국의 극우’를 식별하는 유용한 분류법을 제시했다.
첫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력이나 폭력 사용, 규칙 위반을 용인하는 자세다. 두 번째는 복지에 대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인식이다. 세 번째는 한국적 특수성으로 ‘대북 제재 중시’를 고려했다. 네 번째는 ‘설령 중국의 보복으로 경제에 타격을 입더라도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좀 복합적인 질문이긴 한데, 외교에서 국익에 관계없이 특정 이념을 중시하는지 측정한 질문이라고 봤다. 다섯 번째가 극우 하면 보편적으로 포함되는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다. 이 다섯 가지에 모두 동의하면 극우라고 분류했다.12
김창환은 극우의 보편적 특징으로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꼽는다. 미국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그는 동시에 한국적 특수성도 잘 알고 있어서 대북 제재, 중국과의 외교, 한미 동맹 등의 문제도 문항에 적절히 포함한다. 그가 제시한 분류법은 적실하고 한국의 현실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자가 좋은 의도로, 학자로서 책임감 있고 성실한 방식으로, 유용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애썼음을 믿을 수 있다. 조사가 부정확하거나 그 배후에 어두운 의도가 있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심 없는 정확성과 유용성에, 바로 거기에 의문을 던져야 할 문제가 있다.
“설문조사는 사회학자가 질문을 만들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을 드러낸다.”13 사회학자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질문이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인지 안다는 것은 곧 그 질문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념과 의견을 지금 이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도식화하고, 분류하고, 편 가르고, 부추기고, 추동하고, 극단화하고, 한데 묶고, 대립시켜왔는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가 유능하고 유식할수록 그는 더 적확한 질문을 고를 것이며, 그가 적확한 질문을 고를수록 설문조사는 바로 지금 이 사회를 이러한 사회로 구성하는 ‘현실’의 정교한 미니어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이번 대선을 통해서 확인한 사회적 정체성들의 상이한 정치적 입장이 조사 결과에서 거의 정확하게 재연되는 데에는 놀라울 것이 없다.
사회학자가 사회에 대해 말할 때, 종종 그 지식의 내용보다는 그 지식의 생산방식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설문조사를 통해 익명의 응답자로부터 어떤 사실을 추출하는 방식은 대의제가 선거를 통해 익명의 유권자로부터 어떤 결과를 추출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 ●정치인은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표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대의민주주의 선거제도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정치인은 ‘나의 말은 국민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말이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대변하는 대표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대표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 ○사회학자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재현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설문조사의 형식은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사회학자는 ‘이 조사의 결과는 응답자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 결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의 말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재현하는 학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재현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출한 데이터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
대표/재현representation이 성공적일수록, 정치인/사회학자는 다음처럼 층위를 선명하게 나누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내용이고, 나는 형식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정치인은 자기 말의 정치적 정당성을, 사회학자는 자기 말의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한다. 비록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과 사회학자 모두 완전한 정당성/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고 단지 끊임없이 관측하고, 회유하고, 유도하고, 설득하고, 협상하고, 안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학자 역시 정치인만큼이나 ‘리바이어던’이다.
[사회학자는] 여론조사, 양적·질적 탐구를 통해 행위자들의 소망과 그들의 가치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번역해 낸다. [……]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대변자로 자임하고 자칭하면서, 그들은 홉스의 주권자로부터 [다음의 아이디어를] 넘겨받았다. ‘가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들 자신의 것이다.’14
인용한 페이지에서 프랑스의 과학기술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와 미셸 칼롱은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을 이야기한다. 사회학자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자나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라투르와 칼롱 역시 사회학자다). 사회학자가 작업하는 곳이 얼마나 놀라운 정치적 요충지인지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현장이든 연구실이든 학술지든 언론기사든 간에, 사회학자가 활동하는 곳은 거시와 미시의 층위가 나뉘고, 구조와 개인이 나뉘고, 형식과 질료가 나뉘고, 어떤 틀에 의해 현실이 안정화되어 설명되는, 그렇게 중대한 일들이 벌어지는 정치적 장소다. 사회학자가 훌륭하게 설계한 설문조사의 전제와 결과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가 보지 않는 등잔 밑의 어둠에 정치의 근본문제가 있다. 바로 이 문제이다: 누가 이 사회의 질료matter가 되는가, 그리고 누가 형식form이 되는가? 다시 말해 누가 이 사회의 물질이 되고 누가 정신이 되는가? 누가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누가 규정하는 존재가 되는가? 누가 선택을 요구받게 되고 누가 선택지를 설계하는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는가? 이러한 규정은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3.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3.1 홉스의 논리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이론적 우회로가 있다. 근대적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을 먼지 쌓인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보자. “교회국가와 시민국가의 질료Matter, 형식Forme 그리고 권력Power”이라는 부제가 붙은,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 초판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다.

마을 위로 솟은 거대한 몸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대한 몸의 형체를 작은 몸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흔히 전체주의적 괴물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지만, 홉스는 리바이어던이 인민people을 내용으로 하는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리바이어던은 인민의 투명하고 충실한 대변자일 뿐이다. 리바이어던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한 주권자로, 사람들(리바이어던에 예속된 자subject)의 이익과 생명, 안전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15
홉스가 말하길, 사회가 없는 자연상태에는 오직 평등한 개인들만이 있다. 다시 말해 사회가 발생하기 전에는 행위자들 사이에 어떠한 크기의 차이도, 권력의 차이도, 층위의 차이도 없다. 자연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단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단지 한 사람’일 때는, 다른 누구보다 특별히 크지도 강하지도 유능하지도 않다.16 이 평등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항구적인 투쟁 상태에 있다. 그 유명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다. 결국 사람들의 평등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평등이다.
홉스의 이론은 이렇다. 완전한 평등이라는 혼란과 야만―모두가 서로 죽일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즉 모든 인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주권자,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개인과 국가의 차이에 이르는 크기/권력/층위의 차이가 생겨날 것이다. 그 차이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곧 사회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리바이어던은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다수다. 그것은 하나의 의지처럼, 하나의 신체처럼 움직이는 다수의 의지이자 신체다.17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흩어져 있는 개인보다 압도적으로 더 크고, 강하고,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구조적이고, 거시적이다.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그 순간에 비로소 개인은 상대적으로 작고, 약하고, 일시적이고,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무엇이 된다. 비로소 사회에 예속된 자, 즉 사회적 주체subject가 되는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모든 행위자는 동등하며 그들의 크기/힘/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라는 핵심 아이디어를 홉스로부터 계승했다.18 물론 홉스의 신화myth는 중대한 변형 없이는 현대의 과학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이 계승은 도전적인 것이다. “역사학과 인류학, 그리고 오늘날의 동물행동학은 그러한 [홉스식의] 사회계약은 불가능함을 입증해왔다.”19 1980년대 초에 젊은 라투르와 칼롱은 사회학이 홉스의 총체적이고 일회적인 ‘계약’을 ‘번역translation’이라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홉스의 해답에 독창성을 다시 불어넣기 위해서는 단지 계약을 번역의 과정들로 대체하면” 된다.20 이것은 단일한 총체적 계약이 사회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협상과 분쟁, 설득과 안정화의 과정이 사회를 끊임없이 ‘수행한다’는 말이다. 차이는 한순간에 발생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구성되고 안정화된다.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를 끊임없이 조성하는 것, 그것을 둘러싸고 분쟁하며 차이를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곧 사회가 구성되는 과정이다.21
라투르와 칼롱은 타자의 의지를 단일한 의지로 번역하는 모든 존재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홉스의 생각과 달리 ‘국가=주권자’라는 하나의 리바이어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에 온갖 리바이어던이 있다. 너무나 크고 오래되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 알기 어려운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스타트업이나 신흥 정치인처럼 갓 만들어져 성장하려고 애쓰는 작은 리바이어던도 있다.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구글 같은 다국적 자유주의 기업 리바이어던도 있다. ‘사회학자 리바이어던’도 있는데,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은 다른 모든 리바이어던이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지, 그 논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의 장점은 거시적인 것(국가, 기업, 당[黨], 사회구조 등)과 미시적인 것(개인, 가족, 노동자, 친구 관계 등)을 미리 구분하지 않으면서 더 커지려고 애쓰는 행위자들의 분쟁, 설득과 협력, 암중모색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1987)의 엄석대도 제 나름의 리바이어던인데, 교실의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부림으로써 교실을 지배했다가, ‘단지 한 사람’으로 쪼그라듦으로써 무리 지은 아이들에게 패배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어떤 일그러진 영웅의 권력 행사는 엄석대보다 덜 폭력적이고 더 설득적일 수 있다.
3.2 이준석의 사례
이를테면, 영웅다운 구석은 전혀 없지만,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가 어떻게 나름의 ‘리바이어던’이 되었는지를. 이준석은 역사가 짧은 신흥 리바이어던이어서 그 구성 과정을 살펴보기 요긴하다.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안티페미니즘’이라는 기표로 결집한 행위자다. 그러한 번역을 통해 그는 청년 남성들을 아우르는 형식이 되려 한다. 그 과정을 단순화해보자면 이렇다: ①당신들에게는 불만이 있다―나는 그것을 느낀다(감성적 감응). ②당신들의 불만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페미니즘 때문이다(구상, 도식화, 번역). ②당신들이 나를 지지한다면, 내가 당신들을 대리해서 페미니즘과 싸우겠다(재현, 대표).
③이 가능하려면 일단 ①과 ②가 선행되어야 한다. ③은 ①과 ②의 부단한 과정이 만든 잠정적·일시적 결과일 뿐이다. 재현이 있으려면 먼저 감성이나 정동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재현을 매개하는 부단한 번역(협상과 타협을 포함한 번역)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번역 과정에서 수동성과 능동성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구분 자체가 번역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준석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안티페미니즘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이준석의 논리는 이랬다: ‘나는 단지 청년들의 대변자일 뿐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청년들의 편에 서려다 보니 의도치 않게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 뿐이다.’22 그는 마치 자신이 수동적 감응에 의해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 그는 그저 여느 청년과 똑같은 한 명의 보통 남자로 청년들에게 다가가려 하고 그들에게 감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년들의 공감을 샀다. 그가 충분히 수동적이지 않았다면 결코 능동적 행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가 ‘단지 한 남자’ 만큼 작지 않았다면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커질 수 없었을 것이다.23 이준석이 종종 거의 에펨코리아의 여론을 그대로 읊는 듯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리바이어던은 커지기 위해 공허해졌는데, 공허한 형식이 됨으로써 더 많은 몸을 자신의 내용(질료)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의 주장처럼 청년들이 정말로 안티페미니즘으로 ‘이미’ 뭉쳐 있었고 페미니즘에 맞서 싸우기를 원했으며 그는 그 의지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보면, 이준석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이준석에 의해 청년 남성들의 형체 없는 불만이 비로소 안티페미니즘이라는 형식으로 결집되었다고 하면, 청년 남성들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준석도, 청년 남성들도 순전히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지 않았다. 이준석 이전에도 이미 오랜 역사의 여성혐오가 있고, 특히 상층 계급 남성들은 자신의 유리한 지위가 유지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청년 남성들은 단지 이준석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상당한 수의 청년 남성은, 홉스의 설화에서 계약에 서명하는 사람들처럼 ‘자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준석이라는 리바이어던이 자라나게 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청년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심이 없었다면, 이준석의 번역은 실재와 동떨어진 망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 번역은 성공할 수 없다. 번역은 개연적인 한에서 성공할 수 있다.24 정치인은 정념과 의지에 ‘그럴듯한’ 형식을 부여하고, 지지자들은 정치인의 말에 ‘그럴듯한’ 내용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에펨코리아)의 유저들과 이준석은 재귀적으로 서로를 구성하며 정치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 능동적인 행위자(대변하면서 앞장서는 자)와 수동적인 행위자(지지하면서 뒤따르는 자)가 나뉜다. 정치인/지지자, 형식/질료, 능동/수동이 서로를 규정하고 뒷받침함으로써 분화한다. 이 분화의 과정은 리바이어던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다. 이준석이 충분히 크고 안정적인 리바이어던으로 자라나고 나면, 소수의 지지자가 이탈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위협하지 못한다. 리바이어던이 거시적으로 된 만큼 지지자 개인은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해왔다: ‘이 사회는 페미니즘 때문에 분열된 사회다.’ 이것은 그의 망상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나름으로 자신이 사는 사회에 대한 상을 갖는다. 그중 무엇이 주관적 망상이고 무엇이 엄연한 사실인가? 적어도 사회에 관한 한, 망상과 사실은 선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망상과 사실의 분리야말로 사회적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이며 그것을 분리하는 과정이 곧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소리높여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한다. 그가 강해지는 만큼 그 말은 사실이 된다. 그가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그저 망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역으로 그의 말이 사실과 동떨어져 있는 한, 그는 강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①사회적 플레이어가 큰 영향력을 얻는 것, ②그가 점점 더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는 것, ③동시에 타자를 상대적으로 더 ‘작게’ 만드는 것, ④그가 자신이 사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것은 동시적이다.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의 적대 역시 재귀적으로 강화됐다. 이준석은 그 분열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물론 나는 페미니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페미니즘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준석식의 음해를 물리치기에 충분치 않다. 이준석은 ‘페미니즘’을 사회를 분열시키는 기표로 부각함으로써 사회를 특정하게 분열시키고, 그렇게 특정한 구도로 ‘분열된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듦으로써 그 사회의 작은 리바이어던이 되는 데 성공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을 묻는다면, 당연히(!) 그 질문은 특히 젊은 세대 남녀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데 결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 설문조사는, 그 질문이 어째서 그렇게나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문제의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재인식/승인recognition할 뿐이다.
(2)에서 계속
- 김형중, 「좌파적 우울」,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봄호, p. 64. ↩︎
- 심우삼 기자, 〈이재명 “한국 정치에 보수 있나… 국힘은 범죄집단, 중도보수는 우리”〉, 한겨레, 2025.05.20. (마지막 접속 2025. 07. 28.) ↩︎
- 추지현, 「폭력의 연속성과 남성성‘들’」,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폭주하는 남성성』, 동녘, 2025, pp. 21-52 참조. ↩︎
- 김학준, 『보통 일베들의 시대―‘혐오의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오월의봄, 2022 참조. ↩︎
- 이우창, 「안티페미니즘 전략의 형성에서 음모론적 남성성의 등장까지」, 『폭주하는 남성성』, pp. 173-201 참조. ↩︎
- 박권일은 최근 연재 중인 칼럼에서 “극우의 토양이 되는 ‘어떤 진보주의’”를 이야기했다. 박권일 칼럼, 〈극우는 외계에서 오지 않았다〉, 한겨레, 2025.05.29. (마지막 접속 2025.07.28.) ↩︎
-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성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3 참조. ↩︎
- 이리예, 「짤의 시대, 안티페미니즘으로 공모하는 루저 남성 정서와 정치 언어」, 『폭주하는 남성성』, pp. 203-42 참조. 이하 인용 시 「짤의 시대」 ↩︎
- 진혜원 기자, 〈2030 이준석·김문수 투표자는 무엇이 달랐나[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여론조사]〉,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 08. 05) ↩︎
- 물론 이 조사의 목표는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 질문들이 중요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 문항에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조사의 목표이며, ‘과정적 분석’은 다른 연구의 몫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학문적 분업에 기반을 둔 조사와 연구의 설계 자체가 정치적 대안과 변화의 상상에 방해가 됨을 주장하려 한다. ↩︎
- 물론 이 ‘번역’은 말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일각의 여론을 정치인이 부각하고, 정치인의 말을 언론이 받아쓰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다시 전파되어 여론이 형성되는 등의 번역의 연쇄가 있다. 이 번역의 과정에 너무 많은 매개가 있어서, 번역이 항상 정치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번역의 성패 여부는 정치인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매개의 연쇄를 고려하더라도, 정치인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갖는 사회적 행위자다. ↩︎
- 진혜원 기자가 진행한 김창환 교수 인터뷰, 〈“서울 거주 경제적 상층일수록 극우 청년일 확률 높다”〉,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08.05.) ↩︎
- Jacques Rancière, The Philosopher and His Poor, edit. Andrew Parker, trans. John Drury etc., Durham&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3, p. 189. 인용한 문장은 랑시에르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비판하면서 쓴 문장이다. ↩︎
- Michel Callon and Bruno Latour, “Unscrewing the big Leviathan: how actors macro-structure reality and how sociologists help them to do so”, Advances in social theory and methodology―Toward an integration of micro and macro-sociologies, Routledge&Kegan paul, 1981, p. 297. 강조는 원저자. 이하 인용 혹은 언급시 UBL로 표기. ↩︎
-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1』, 진석용 옮김, 나남, 2008, pp. 232-33 참조. ↩︎
- 물론 사람들 사이에는 지능에서나 체력에서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도 머리가 좋은 사람을 치명적인 함정에 빠뜨릴 만큼은 똑똑하다. 힘이 약한 사람도 돌멩이를 쥐고 뒤에서 힘센 사람을 기습할 만큼의 힘은 있다.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 차이는 무시해도 될 만큼 미세한 것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강하다면, 그 상대적 강함은 ‘죽임당할 가능성의 평등’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 『리바이어던 1』, p. 168 참조. ↩︎
- 우리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정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이해하면 여전히 홉스의 이야기는 놀라운 현재성과 비판성을 갖는다. 홉스의 논리는 이렇다. 어떤 기원적 평등을 가정할 때만 사회적 불평등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혹은, 합리화될 수 있다). 만약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원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전근대 정치의 왕권신수설이 ‘신’을 가정하듯이) 인간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어떤 불평등의 기원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한 불평등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즉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화할 수 없는―불평등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그보다 앞서 있는 평등을 전제하는 것뿐이다. 평등과 불평등의 이 관계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만약 불평등이 자연적이었다면, 즉 인간들의 능력에 본성적인 차이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불평등의 형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에게 정치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월한 존재의 열등한 존재에 대한 지배가 있을 뿐, 정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불평등의 형식은 완전히 안정화되어,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사회적 역동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인간 사회에 ‘정치’가 있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선(先)정치적 전제를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평등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오늘의’ 불평등을 자연화하고 영속화하려 하는 모든 논리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치안논리다. 오늘날 한국의 상류층이 계층의 ‘세습’을 위해 그토록 많은 자원을 투여하고, 제도를 왜곡하고,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모든 인간 능력의 자연적 평등’이라는 홉스의 가설을 강하게 지지한다. 리바이어던이 되는 자는 다른 인간보다 더 뛰어난 자가 아니다. 동등한 능력을 가진 한 사람 혹은 한 집합(assembly)이 필요에 의해,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운이 좋아서 대표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 - UBL, pp. 278-280 참조. ↩︎
- Ibid., p. 279. ↩︎
- Ibid. ↩︎
- 라투르와 칼롱은 이 분화와 안정화 과정에 물질과 기호의 동원 혹은 등록enrolment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강조한다. 사회의 안정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비인간이 동원되는가―이 질문의 제기가 홉스의 정치이론에 라투르가 가한 가장 중대한 변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라투르의 이론을 참조하면서, 이 글에서 나는 비인간 물질과 매개의 역할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다만 ‘행위자들 간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있지 않고 그 분리는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라는 아이디어를 강조하려 했다. ↩︎
- 이준석은 잡지 『맥심』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반페미니스트의 선두 주자 비슷한 역할에 놓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리예, 「짤의 시대」, p. 234에서 재인용. ↩︎
- 「짤의 시대」, pp. 233-35 참조. ↩︎
- 그러나 번역이 개연적이라는 말은, 역으로 그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청년들에게 혐오와 불안의 정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이준석이라는 형상으로 모이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았다. 만약 그것이 필연적이었다면, 이준석은 그렇게 성실하고도 요란하게 번역의 노고를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