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anne Ngai, Theory of the Gimmick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20
이 책은 미적 판단이자 자본주의적 형식으로서 짜증나지만 이상하게 매력적인 기믹을 다룬다. 절충적 형식에 결부된 양가적 판단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책은 미적 범주에는 두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는 언명되는 판단과 말하는 방식이고, 둘째는 지각되는 형식과 보는 방식이다. 이 두 측면은 정동적으로 하나의 경험에 자연스레 통합된다. 과잉수행되면서 동시에 과소수행되는[지나친 성과를 내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치스럽게 빈곤한 기믹을 다룰 때 우리는 노동과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생산양식에 특화된 미학을 다루는 것이다. (1)집합적으로 생성된 추상성과 (2)기묘하게 비사회적인 사회성의 독특한 집합을 부각하면서 말이다.
언제나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항상 수상쩍은 기믹은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근사한 훅일 수도, 낡아빠진 농담일 수도, 노동 절약을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이어지는 연구에서 우리는 기믹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마주할 것이다. 웃는 얼굴, 금융 전략, 자기자신을 해석하는 레디메이드 예술작품 등. 기믹은 근본적으로 이 사례들을 관통하는 무엇이다. 즉 기믹은 너무 적게 작용[일]하는 것(노동 절약 기술)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너무 열심히 작용[일]하는 것(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억지스러운 노력)처럼 보이는, 과대평가된 장치다. 우리는 그 미적으로 의심스러운 대상을 “고안물(contrivance)”이라 부를 것이다. 이는 아이디어, 기술, 사물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느슨한 용어다.
일상적으로 기믹을 접할 때 우리는 노동의 불확실성―결핍이나 과잉―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가치와 시간의 불확실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표들은 경쟁하는 자본들이 이윤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며 버려진 생산라인에서 노동자를 쫒아내는, 끝없는 혁신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에서는 분리할 수 없게 된다. 각각의 변수들은 서로 결정하고, 또 서로를 표현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기믹은 생산성의 암묵적 규준에서 일탈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못 맞춘다―너무 낡았거나 너무 새롭다―고 여겨진다. 역사적 규범에 비추어 과소하거나 과도하게 수행되는 기믹은 기술적으로 퇴행한 듯 보이거나 문제적으로 진보한 듯 보인다. 구글 글래스처럼 오만하게 미래지향적이거나, 《스타트랙》의 TV에피소드에서 난기류를 흉내 내려고 짜여진 안무처럼 우스꽝스럽게 구식이다.
결국, 개발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을 때조차 값싸다는 인상을 주는 장치인 기믹은 거의 모독적인 방식으로 미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와, 더 특정해서 말하자면 비생산적으로 쓰이는 돈과 혼동하게 만든다. 기믹의 범례 중 하나는 누구라도 사겠다고 혹할 정도로 과대평가된 제품, 즉 그 가치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미판매 상품이다. 스테인리스 바나나 조각부터 암호화폐 파생상품에 이르기까지, 기믹의 개념 자체가 값어치 없는(misprized) 것들이 자본주의에서는 끊임없이 사고팔린다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기믹의 노골적으로 쓸모없는 형식은 제조업, 법률, 은행, 교육, 정치, 의료, 부동산, 스포츠, 예술 등 거의 모든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기믹은 자본주의의 가장 성공적인 미학적 범주인 동시에 가장 당혹스러운 무언가이며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을 절약하고, 노동을 줄이며, 가치를 확장하겠다고 의심스럽지만 매혹적인 약속을 내걸면서, 기믹은 사회적 삶이 더 이상 노동에 의해 조직되지 않는 세계를 힐끗 엿보게 해주는 한편, 동시에 노동의 사회적 필연성을 유지하는 조건들을 계속해서 재생산하는 세계를 가리켜 보인다.
기믹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노동, 시간, 가치에 대한 평가를 결합하면서 그것들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들의 역사적 상대성과 변동성은 암묵적으로 파악된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개념 없는 보편성’을 주장하는 칸트의 미적 판단과 매우 유사한데, 칸트의 미적 판단은 로돌프 가쉬가 주장했듯 내용의 개념을 “벗겨내”거나 벌거벗긴 다음 “그저” 형식만 남긴다. 칸트의 어휘로 하자면 미적 판단은 “순전히 형식적”이다. 마찬가지로 기믹에서 대상화되는, 부족하거나 과도한 노동·가치·시간의 양에 대한 우리의 모든 암묵적 평가는 판단 행위가 특정하지 않는[추상적으로 남겨두는] 사회적 규범을 전제한다. 기믹에 대한 판단에 함축된 어떠한 평가도 그것의 정동적 자발성을 폄훼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믹에 대한 경험 전반은 미적 판단의 놀랍도록 역동적인 형식주의―형식화 활동―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개념, 규칙, 법칙과 달리 외형에 의해 활성화된 감정에 근거하는 미적 판단은 그 정의상 인식적이거나 실용적이지 않다. 그러나 미적 판단은 즉각적인 여파 속에서 결정적으로 촉발된다. 특히 기믹의 경우 대상의 형태를 불만족스럽게 절충된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비의식적 정동과 명시적인 미적 평가는 그것을 값싸고 부당한 것으로 보는 경제적·윤리적 평가를 촉발하고 겹쳐지게 한다.
물론 노동, 시간, 가치는 임금, 이윤, 이자를 계산하는 자본과 노동 간 셀 수 없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 자체는 미학적이지 않다. 이러한 연결은 자본들의 경쟁, 부문 내 이윤율의 균등화,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과정의 강제적 구조조정을 포함하는 생산양식을 전제한다. 기믹이 너무 비싸거나 너무 값싸 보인다면, 그 뒤에 있는 기술이 너무 새롭거나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이 너무 새롭거나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종종 기믹이 과대 혹은 과소 수행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설명해준다. 이 관계는 뒤집어봐도 여전히 참이다. 기믹이 너무 과하게 작용[일]하거나 너무 적게 작용[일]한다면, 이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산적인 기술이 너무 일찍 도착했다는 말은, 그것의 비용이 너무 높다는 뜻일 따름이다.
이러한 비율은 모든 생산자, 소비자의 의식적/무의식적 결정을 거쳐 걸러진다. 그럼에도 각각은 기믹이 객관화하는 우려의 씨앗을 품고 있다. 과도작용하는 장치가 시장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너무 많은 물건이 생산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과소작용하는 장치는 생산자가 경쟁력을 유지하기에는 물건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미지는 과잉 생산 또는 과소 소비(잉여자본 혹은 유휴 자본으로 이어짐), 구조적 실업(잉여 인구로 이어짐), 경기 침체와 같은 더 커다란 망령들[더 큰 걱정거리]을 불러일으킨다. 이 모든 것은 기믹의 사치스럽게 빈곤한 형식과의 감각적 만남의 가장자리에 숨어 있다.
기믹은 이렇게 시간 절약, 노동 감소, 가치 확장이라는 허위의 약속을 하는 것으로 지각되는 대상에 결부된 불만―그럼에도 매혹이 섞여 있는 불만―의 경험을 지칭한다. 기믹은 약속들에 대한 불안을 대놓고 촉발하는데, 어떤 다른 미적 경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불안이나 의심을] 자극하지 않는다. 동시에 기믹의 탐욕스러운 선구자들인 애드거 앨런 포와 P. T. 배넌의 속임수(hoaxes)는 기믹이 불러오는 의심이 반직관적인 즐거움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미적 경험에 의도적으로 의심을 도입하는 전통은, 마르셀 뒤샹이 기믹의 뻔뻔스럽게 천박한 형식을 레디메이드(존 로버츠에 따르면 예술적 노동과 가치 생산 노동의 연극적 충돌로서, 두 노동의 애매한 관계를 부각하기 위해 설계되었다)에 편입한 것이나 D.A 밀러가 “흥미롭지만 무의미한 것”이라 부른 기술적 기교(유사하게 읽힐 수 있다)의 전시에 대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애호 등으로 이어져왔다. 이러한 사례들은 의심이 항상 불쾌함으로 느껴지지는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포, 뒤샹, 그리고 다른 기믹 사용자들은 의심이 종종 코미디의 계기가 되고 논쟁의 촉매가 됨을 상기시킨다. 이 점은 책 전반에 걸쳐 보게 될 것이다.
기믹에 함축된 노동, 시간, 가치에 대한 판단은 이 미적 범주가 일상생활을 포획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 법칙과 그 추상성을 그대로 반영함을 시사한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단순한 주장이다. 더 복잡한 주장은 기믹이 자본주의의 법칙들―살아있는 노동력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고, 산업들의 이윤율이 비슷해지고 결국 하락함에 따라 노동자 일인당 생산성 최대화를 체계적으로 도모하는 것―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것이 자본주의를 위기에 노출시키는 축적과 확대 재생산의 한계를 함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주장은 모두 기믹이란 단어의 연대기에 반영되어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그 단어의 첫 등장을 1926년으로 보고 있으며, 구글은 1973년에 정점을 찍는 단어 사용량의 꾸준한 증가를 보여준다. 이는 “자본주의 황금기”의 종언과 “긴 침체”의 시작을 알리는 일반적 지표다.
기믹이라는 단어의 확산은 1930년대 글로벌 경기침체의 시작과 함께 본격화되고, 임금 정체·가계부채 증가·시장 변동의 확대와 발맞춰 1970년대 초 격동기에 급증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에서 살펴보는 기믹 재현들이 베벌리 실버와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자본주의의 “수선책(fixes)”을 주제로 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데이비드 미첼의 공포 영화 〈팔로우〉는 “공간적 수선”에, 헬렌 드위트의 관념소설 『피뢰침』은 “제품 기반 수선”과 “기술적 수선”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병 속의 악마」는 “금융적 수선”에 대응한다. 기발한 해결책들을 중심에 두는 이 텍스트들은 기믹의 절충적 형식을 활용하는, 도전적인 미적 실험이다. 그것들은 자본이 역사적으로 반복해온 처방들―지리적 재배치, 경쟁이 덜한 새로운 제품군으로의 이동, 생산을 조직하는 문화적·기술적 방법에 대한 실험, 그리고 궁극적으로 생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수익성의 위기를 “영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단지 [그 시점을] “재조정(reschedule)”하는 경향이 있음을 은밀히 알려준다. 그리고 그 텍스트들은 최소한 위기에 대응하는 처방들만큼이나 위기 자체에 결부된 자본주의의 특징을 강조한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이 배제되는 것(「피뢰침」), 생산성이 낮은 서비스직의 증대(헨리 제임스의 후기 소설들), 그리고 ‘잉여 인구’의 증가(「병 속의 악마」) 등.
과잉수행하는·과소수행하는 기믹은 재생산의 확장을 막는 내부적 장벽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수용하는지 알려주는 다른 미학적 범주들과는 구분된다. 다정함과 공격성이 뒤섞인 귀여움은 소비자로서 우리가 상품과 맺는 양가적 관계를 드러낸다. 재미있어 보이지만 스트레스를 주는 엉뚱함은 일과 일 아닌 것의 경계가 유동적이고 종종 모호하다는 점을 부각한다. 그와 달리 사치스럽게 쓸모없는 기믹은 가격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폭로하는 우리 문화의 유일한 미적 범주로, 형식으로 코드화된 부족하거나 과도한 노동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느낌에서 비롯되는 불안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유일무이하다. 기믹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적 법칙뿐만 아니라 임금에서 지대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법칙들이 초래하는 경제적 추상성과 우리의 일상이 상호작용할 때 나타나는 미학적[감성적] 외양이다.
다른 모든 미학적 범주들처럼, 기믹은 어느 정도 코드화된 보는 방식과, 그것이 강제하는 말하기 방식의 상관관계를 지칭한다. 그러나 기믹에 대한 판단은 추가적인 상호주관성의 층위를 내포한다. 즉 우리가 어떤 자본주의적 장치가 약속하는 것에―그 순간 암묵적으로 떠올려지거나 상상되는 타인들과 달리―혹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기믹’이라는 말을 쓴다. 로버트 펄러는 이러한 전위 구조를 “중지된 환상(suspended illusion)”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스포츠 팬의 미신적 의식처럼 “항상 타인에게 속하는, 결코 누구의 것도 아닌” 믿음이다. 이는 명백하게 향유와 결합된 문화적 회의주의가 어딘가 다른 곳의 추상화된 신봉자에 기대어 성립하는 현상이다. 반대로 우리가 기믹을 판단할 때 반대편에 있는 판단자의 이미지―기믹을 기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보통 사람―를 떠올리게 되는 방식은, 기믹을 경험하려면 이러한 추상[추상화된 타인의 이미지]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어떤 장치가 지나치게 수행[과성능]하거나 너무 적게 수행[저성능]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믹이 아니라 그저 중립적인 장치라고 여길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는 “가치론적 부담”이 없으며, 따라서 그 판단은 미학적이기보다 인지적이다. 그러나 기믹은 자본주의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에 잠복해있기 때문에, 장치들은 언제든 기믹으로 전환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2012년에 휘황찬란하게 선전하며 등장한 후 3년만에 “전망이 어두워진” 구글 글래스를 지금 글을 쓰면서 조롱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름이 바뀐 새로운 버전의 글래스는 이제 손이 자유롭고 실시간 정보를 제공받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과 창고에서 활용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제1 부문”이라 불렀던, 다른 공장을 위해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 등에서 말이다. 한때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신용카드, 휴대전화, 조리 식품처럼 ‘스마트 글래스’도 일상적인 산업 도구가 될 운명인 듯하다.
이러한 전환은 기믹의 절충적 미학을 양성하는 세계에 고유한 현상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계획적 진부화나 일상화된 혁신 등의 역설로 만연한 것처럼, 기믹은 시간에 민감하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형식이다. ‘액티브 엣지’나 ‘터보 부스트’ 같은 이름에서 직감할 수 있듯, 기믹에서 장치로 혹은 장치에서 기믹으로의 전환은 기믹에, 그리고 실은 장치에도 내재한다. 양자는 서로의 발전 궤적에 잠재적인 한 단계를 지칭한다.
이런 역학은 20세기 초 대중과학에서 두드러진다. 그랜드 위트호프가 휴고 건스백(절연기나 다이아노폰 같은 노동 절감 기구의 발명가이자 SF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의 창간인)의 ‘가젯 이야기’에 대해 지적했듯, “자연과학과 환상예술은 오랫동안 의심과 확신의 변증법으로 연결되어왔다.” 예컨대 건스백의 베스트셀러 「텔림코 전신기」는 “기믹, 즉 허황된 속임수일 뿐이다. 버튼을 누르면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다른 방의 전화기가 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조악한 부품을 그러모아 만든 이 전신기는 [무선 전화기의] 거친 프로토타입으로써, 미래의 무선 매체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논의를 촉진했다.”
기믹은 속임수이고, 때로는 경이로운 것이며, 또 어떨 때는 별것 아니다. 그렇지만 기믹은 이러한 위상들 사이의 체계적인 미끄러짐을 설명해주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기술적인 차원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면 이 미끄러짐을 포착할 수 없다. 과잉수행하면서 과소수행하는, 너무 과도하게 코드화하면서 너무 적게 코드화하는, 또 근본적으로 무가치하면서도 이상하게 본질적인 기믹은 어쩌면 자본 자체의 미니어처일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잘 알려진 구절에서 묘사한 “ 기계의 단편”처럼.
자본 자체는 노동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압박하는 동시에 노동 시간을 부의 유일한 수단이자 원천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움직이는 모순이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 시간을 필수적인 형식으로 감소시킴으로써 과잉으로 증가시킨다. 또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양의 과잉적 요소를 필수적 요소의 존립을 가늠하는 생사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어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낙관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의 요지는 “일반지성”과 “실질적 예속”으로 요약되는 20세기의 두 가지 경향―생산에서 과학과 기술의 역할 증대, 생산뿐 아니라 “교육·성·소통 등 사회적 재생산에 관여하는 전반”에 대한 자본주의의 통제―이 결국 가치와 노동을 분리하여 자본에 재앙을 초래할 것이고, “오래된 가치 형식을 폭발”시키고 “가치 법칙을 위기로” 몰아넣으리라는 것이다.
그와 달리 어떤 이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단편”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치스럽게 빈곤한 기믹으로 읽는다. 여기서 우리는 “움직이는 모순”을 자동화된 미래―더 이상 부가 노동에 매여 있지 않은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예언보다는 조슈아 클로버가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구에 따라 절대적 잉여가치의 원천이 소멸”한다고 명쾌하게 정리한 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마르크스가 설명한 이 역학에서 자본 축적은 잉여가치 추출에 의존한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값만큼의 노동을 다한 후 [추가적으로] 수행하는 노동 시간에서 창출된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시간의 연장에서 발생하고, 상대적 잉여가치는 기술 혁신으로 생산성을 향상시켜 필요한 노동시간을 단축함으로써 발생한다. 더 큰 생산성을 둘러싼 자본가들 간의 경쟁(“상대적 잉여가치의 추구”)은 살아있는 노동을 기계로 대체한다. 이로 인해 살아있는 노동(“절대적 잉여가치의 원천”)의 비중은 줄어들지만 축적이 잉여 노동에 의존하는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노동자 일인당 생산성이 증가하더라도 “여전히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은 체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가치 창출 노동이야말로 끊임없이 축출되는 무엇이다. 모이셰 포스톤이 말한 자본주의의 “트래드밀 효과”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 양상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대적 잉여인구” 논의로 직결된다. 그것은 “자본의 자기 가치 증식을 위한 평균적인 필요를 초과하는 인구”로서,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들을 밀어내는 뚜렷한 형식”을 취할 수도 있고, “그보다는 덜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덜 실재적인 것은 아닌 형식으로, 즉 관습적 방식으로 추가적인 노동인구를 수용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본주의적 기믹에 대한 이 책 전반에서, 이러한 과정을 반복되는 서사로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피뢰침」에서 서술되는 임시직의 등장(1장), 헨리 제임스의 성숙한 후기 소설을 채우는, 급여를 받지 않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계속 일하는 하인들(8장), 「병 속의 악마」와 〈팔로우〉에서 나쁜 금융 장치의 유통을 막으려는, 피붙이가 없고/거나 비생산적인 인물들(4장), 그리고 스탠 두글라스의 비디오 설치작품 〈서스페리아〉에 나오는 기술적 진부화에 대한 우화와 교환의 동화 같은 이야기(7장) 등을 통해서. 이 텍스트들은 기믹이 노동 절감 장치의 형태를 취할 때 그림자처럼 그것을 밀접하게 따라다닌다. 즉 가치 생산 노동이 “잉여”가 되고[쓸모없어지고] 더 불확실하게 생산적인 종류의 노동이 부상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자동차 제조 노동자 제임스 보그는 「미국 혁명: 흑인 노동자들의 노트 속 페이지들」(1963)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심각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실업자 집단의 증가라는 문제다. 우리는 경기 부양 정책, 페더베딩, 공공사업, 전쟁 계약 등 노동계 지도자들과 선량한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하는 온갖 기믹에서 해결책을 찾는 짓을 멈춰야 한다.” 보그는 그 “기믹”이 노동만큼이나(혹은 그보다 더) 비노동에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실제로 비노동과 노동의 관계는 자본의 구조적 안티테제이자 대립물로서 이미 노동 안에 암호화되어 있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구에 따라 절대적 잉여가치의 원천이 소멸한다.” 기믹은 부족하거나 과도한 노동, 시간, 가치에 대한 추상적이거나 암묵적인 사회적 평가 속에 이 “움직이는 모순”을 반영한다. 그렇게 기믹은 생산성 향상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동 축출 경향을 미학적으로 “개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경향에 따르는 축적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나타내기도 한다.
위기의 이념이 겉보기에 평범하고 진부한 기믹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밀러는 「애널 로프」의 도입부에서 이를 빠르게 지적하는데, 이 글은 히치콕의 〈로프〉에서 볼 수 있는 편집 없는 촬영 기법(컷 없이 촬영하는 트릭)을 “호들갑스럽게” 과장하는 비평가들에 대한 신랄한 논의로 시작한다. 마치 영화의 동성애 서사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굴면서, 그 기믹은 동성애 서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무력화한다. “그 기믹은 관심을 끌지만, 결국에는 과시적이고 쓸모없는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욕구를 경감한다.”
밀러는 이 미학적 마주침에 두 가지 순간이 있음을 시사한다. 첫째는 형식에 대한 최초의 활기찬 지각에 의해 촉발되는 순간적 각성 상태다. 둘째는 형식의 실망스러운 빈곤함을 인식하면서 완화되는[힘이 빠지는] 상태다. 따라서 기믹이 비판적 반응을 일으키는 순간은 동시에 비판성이 소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왜 즉각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겠는가? “과시적이고 쓸모없는”, “사치스럽게 불필요한”, “매혹적이지만 무의미한” 기믹은 그것을 자세히 보기 싫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이 활성화하는 의심도 무마한다. [하지만] 그 의심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어떻게 조직하는지 알려주며, 그 관계가 사람들이 즐거움과 불쾌함을 공유하는 방식에도 스며들어 있음을 알려준다. 기믹은 자본주의적 축적에 근본적인 무엇을 미학적으로 가공하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방식이다. 그 근본적인 무엇은 가치로서의 부를 생산하고, 가치를 노동의 추상화에 옭아매며, 추상적인 노동을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한다. 그러나 그 자체의 요란함 뒤에 숨고, 노골적인 멍청함으로 자신이 불러일으킨 비판적 감정을 영리하게 무력화시키는 기믹은 자신을 분석하려는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지적 의구심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