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기호와 매력에 대한 단상

0.

내가 주장할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1) 근대미학에서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매력에서 정화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있다.

(2) 그러나 동시대 문화, 경제, 정치에서 매력은 너무나 중요한 기제이자 힘이 되었다. 오늘날 문화의 재현 논리, 활력과 복잡성, 정치적 갈등, 정동의 흐름은 ‘매력의 경제’에 대한 고찰 없이 이해될 수 없다.

(3)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즉 새로운 미학이 작성되는―출발점이다.

(4) 매력의 경제는 감각적 자극, 섹슈얼리티, 지적 관심, 도덕적 관심, 미적 관심, 육체적 끌림, 충동, 수치심, 허영심, 이해관심 등이 분화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경험적’ 세계의 법칙이다. 매력은 한 인간을 신체적-담론적 기호들(피부, 표정, 비율, 머릿결, 냄새, 말투, 옷차림, 예절, 분위기, 평판, 지위 등)의 조합으로 파악하게 한다. 매력은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을 무차별적으로 뒤섞어 매력의 복합적인 서열로 환원한다.

(5) 또한 매력의 경제는 모든 ‘피투자자’의 능력·신용·사회적 책임·평판 등을 투자 가치로 환원하는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국가나 기업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모두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로 환원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셸 페어의 말처럼, 오늘날의 대안적인 정치 운동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

(6) 매력의 경제는 한편으로는 ‘금융적’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감각적’이다. 이 두 측면은 즉각적으로, 광범위하게 상호작용하지만, 이론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전자는 재현적·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나무를 말릴 때 나무가 갈라지는 미묘한 소리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목수나 조각가가 되려면 나무가 내뿜는 감각적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보여준다.

(7) 매력은 배우는 자를 대상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매력을 통해 촉발되는 배움의 운동은 배우는 자를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으로부터 빼내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실망과 상처, 수치심과 모멸감, 적대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장르, 기호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등록·재생산·유통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단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의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교차·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쟁론』에서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이것은 삶이 기호들·장르들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하거나 초월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우리 시대의 문화가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이미 여러 번 들었던 예이지만―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 등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비교적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상황을 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효과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받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만약 과거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나는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단지 영역들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제도적·위계적·영토적·관념적 경계들이 현재보다 더 견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했던 적이 없다.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지저분하게 분투하는 것, 이를 정치적·예술적 실천의 조건으로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어떤 실천이나 미적 실험이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하는데, 외견상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런 비판은 대책 없는 파국적 호소일 뿐이다.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이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적 조건 속에서이다. 아이가 거울 단계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듯이, 배우는 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문화에 재현하는 한에서) 매력의 경제로 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마치 손보미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 속 아이들처럼―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거의 본능적으로’―학습한다. 이것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영역들에는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물론 매력의 경제라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광범위한 부작용이 있다. 매력의 경제는 이른바 ‘현실 정치’가 모종의 광적인 팬덤 문화처럼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에 의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종종 관심과 주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고 도발적으로 말하는 프로보커터이기도 하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 판단, 정치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의 경계를 없애버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사회문화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고도로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거나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적대와 갈등은 결코 ‘순수’하거나 고상할 수 없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끔찍한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준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공격적/방어적으로 되며, 한편으로는 ‘부유하면서-당당하면서-아름다운’, 즉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를 갈구한다. 오늘날 Kpop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그러한 갈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유인하고 있다. 지식인, 활동가, 예술가 등이 고려해야 할 실천적 문제는 동시대 문화에 지배적인 매력적 형상과는 다른 매력적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봐야 할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잔여―‘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가 있느냐이다.

매력에 대한 레퍼런스 모음

(계속 추가)

화려한 필터보다 자본주의 내 매력……
―tripleS, 〈Girl’s Capitalism〉(2023) 가사 중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NCT, 〈무한적아〉(2017) 가사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비서 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 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있어〉(2012) 가사

_______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führt das schöne reizt). 숭고함으로 충만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얼굴은 진지하지만, 때때로 경직되어 있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생생한 느낌은 두 눈 속에 찬란히 빛나는 투명함에 의해서, 미소 띤 얼굴에 의해서, 그리고 종종 환한 웃음에서 생겨난다.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강조는 원저자.

_______수치심은 본성의 비밀이다. [……] 그러나 동시에 수치심은 본성의 가장 적합하고도 긴요한 목적 앞에 비밀스러운 장막을 드리우기 위해서, 그 목적에 관해 잘 알려진 지식이 혐오감을 주거나 혹은 적어도 무관심을 유발하지 않게끔 해준다. 이는 인간 본성의 가장 세련되고도 생동감 넘치는 경향성에 접목된 충동의 궁극적인 의도에 관한 한에서 그러하다. 아름다운 성[여성]에게 이런 기질은 극히 고유할뿐더러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한다. [……] 언제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듯이 우리는 지금도 비밀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으며 […]
―같은 책, 66-67

_______모든 이해관심은 취미판단을 더럽히고, 취미판단의 공평성을 앗는다. 특히 그것이, 이성의 이해관심처럼, 합목적성을 쾌의 감정에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합목적성을 이 쾌감에 근거 지을 때에는 그러하다. [……] 취미가 흡족을 위해 매력Reiz과 감동의 뒤섞임을 필요로 하고, 심지어 이것을 자기에 대한 찬동의 척도로 삼는 곳에서, 취미는 항상 아직도 야만적이다.
[……]
매력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비록 그것들이 미적인 것에서의 흡족과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이카넷, 2009, pp. 218-19. 강조는 원저자.

_______매력{자극}과 감동에 독립적인 순수한 취미만이 ‘문화화한{교화한}’ 것이라는 이러한 칸트의 생각은 초기의 것과 다르다. 『관찰』(1764)에서는 오히려 “숭고한 것은 감동을 주고, 미적인 것은 매력적이다{자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바뀐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같은 곳, 백종현의 역주 56 {}는 역자)

_______미의 감정은 스스로 보편적이고 즉각적이며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있기를 희망하는 반성적이고 개별적인 판단이다. 그것은 오직 영혼의 능력, 즉 쾌와 고통의 능력에 속하며, 형태를 계기로 발생한다. 이른바 무심한 쾌라는 그것의 운명이 걸리는 지점도 거기다.
주어진 대상의 재질이나 색채 음색 따위에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순간 미의 감각은 하나의 “즐거움agrément”으로, 일종의“성향 inclination”이 충족되는 데서 발생하는 쾌감으로 퇴행하고 말며, 이때 대상은 스스로의 현존을 통해 사람의 정신에 어떤 ‘‘매력”을 행사한 셈이라는 것이다.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적 쾌감을 대상의 향유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저 순수한 취미와 불순한 취미를 구별해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다시 말해 감각들의 취미 “Sinnengeschmack”로부터 반성적 취미 “Reflexiongescrunack”를 가려내기만 하면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성 일반은, 혹은 특히 미에 대한 즉각적 판단(감정)이라는 범례적 양식으로서 작용할 때의 반성은, ‘‘어떤 한정된 대상에 대한 의지의 복종’’으로정의되는 관심을 일체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성이란 어떤 정해진 기준이나 판단 규칙 없이, 따라서 어떤 쾌감을 유발할 일종의 대상 또는 유일한 대상을 예견하지 않은 체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_______순수하게 미적인 공통감각은 결국 전제되고 가정될 수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의 해결이 불충분한 해결이라는 것을 별 어려움 없이 발견한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어떻게 충분한 해결일 수 있겠는가? [……] 능력들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과연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23, pp. 191-92. 강조는 원저자.

_______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charme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 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력은 필연적으로 이기는 주사위 던지기입니다. [……]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조합으로 된 숫자입니다. 매력과 스타일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다른 말을 찾아서 대체해야 할 것입니다. 매력이 삶에 개체들보다 우월한 비개인적 역량을 부여하고, 스타일이 글쓰기에 씌어진 것을 넘어서는 외적 목적을 부여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또한 둘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입니다.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_______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apprenti은 없다.
―들뢰즈,『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 23)

_______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같은 책, p. 41)

_______이 진리들은 지성이 선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동하고 임무에 뛰어들면서, 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발견한 진리와 대립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들의 한계를 보았었다. 즉 그런 진리들은 ‘필연성’이 결핍되어 있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지성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같은 책, pp. 49-50)

_______욕망 이론에서 비판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 역시 칸트이다. 칸트는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 정의를 예시하기 위해 칸트가 미신적 신앙들, 환각들, 환상들을 원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이런 식으로 욕망을 규정할 경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 대상의 현실은 심리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혁명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p. 59.; 강조는 원저자, []는 인용자.

_______마지막으로 기호가 재촉하는 응답 안에서. 응답의 운동은 기호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다. 수영하는 사람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모래사장에서 재생하는 수영 교사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개가 어떻게 배우는가를 말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거기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어떤 실천적인 친밀성familiarité, 기호들에 대한 친밀성이 존재한다. 이 친밀성을 통해 모든 교육은 애정의 성격을 띤 어떤 것이 되지만 또한 동시에 치명적인 어떤 것이 된다. 우리는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따라해야 할 몸동작을 보여주는 대신 다질적인 것 안에서 개봉해야 할 기호들을 발신하는 방법을 안다. 달리 말해서 관념적 운동성이란 없다. 오로지 감각적 운동성만이 있는 것이다. [……]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들뢰즈,『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p. 72-73.

금융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 국가 당국은 여전히 상충하는 요구의 균형자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심판관으로 행위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특히 신용 공급자의 요구와 정부를 선출한 시민의 이해 관계를 중재할 임무를 맡고 있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실제로 정부는 자국 영토는 물론이고 통화와 채권의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를 유지시키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유권자의 소망을 채권자의 신뢰에 종속시킨다.
―미셸 페어,『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대항 투기 운동가들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금융 시장에서 높은 가치가 매겨지고 있는 기업 거버넌스와 공공 행정의 기술이 터무니없이 리스크가 높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 으로는―단기적인 금융 수익보다 사회권과 생태 발자국 감소를, 지적 재산권 강화보다 지식과 건강 보험에 대한 접근권을 우선시하는 것과 같은―실현 가능한 대안들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같은 책, p. 56)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 대해

교육과 배움의 관계

너의 교육자는 너를 해방시키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모든 교양의 비밀이다. 교양은 인조 사지와 밀랍 코, 안경 쓴 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이 줄 수 있는 것은 사이비 교육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니체 a 395~96)

사유의 초월론적 조건들은 앎이 아니라 ‘배움’을 기초로 조성되어야 한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들뢰즈 a, 365)

니체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자신이 어떤 “어려움, 욕구와 소망 속에서” 쇼펜하우어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었는지 기술한다(물론 면대면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만난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젊은 니체의 열광―비록 훗날의 실망을 예비하는 것이지만―은 시대의 불만을 넘어서는 교육과 철학에 대한 그의 희구에서 비롯된다. “내가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 즉 시대에 내재한 불만을 넘어설 수 있고 생각과 삶 속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라고, 다시 말해 그 말의 심오한 의미에서 반시대적이 되라고 다시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철학자를 그렸다면, 정말이지 지나친 망상을 한 셈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제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져서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면 부정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니체 a, 401, 강조는 원저자).

그 글에서 니체가 고발하는 당대적 문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인습과 의견에 갇혀 살며 불만을 품으면서도 거기에 안주하는 인간들의 게으름. 둘째, 다양하고 복잡해진 환경 속에서 부정직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언행. 셋째, 국가에 복무하는, 교육의 이념을 국가에 종속시키는, 그리하여 결국 철학적 사유를 모욕하고 무력화하는 강단 철학.

그리고 셋째와 불가분 연결된 문제인 넷째는 젊은이들을 “시험 유령으로 만듦으로써 철학 공부를 겁내서 그만두게 하는”(489) 교육 제도, 교육 관행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공부와 삶은 괴리된다.

니체는 이런 문제들의 타개책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배우는 자가 취해야 하는 주체적 도야이고 둘째는 가르치는 자가 행해야 하는 제도적·사상적 개혁이다.

배우는 자에게 제안된 도야의 방법은 위험한 것이지만 스승이 없을 때도 스스로 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즉 젊은 영혼들이 직접 “자신을 파헤쳐서, 가장 가까운 길로 무리하게 자기 본질의 수직 갱도로 내려가는” 방법이다. 좀더 쉽게는 다음처럼 자문해보는 것이다. “너는 이제까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끌어당겼고 무엇이 너를 지배하는 동시에 행복하게 했는가?”(394~95) 그 자기 탐색의 과정에서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기질과 성향을 발견한다. 이것은 개인의 ‘고유하고 진정한 본질’ 같은 것이 아니다. 니체는 우리의 실존이 역사적·상황의존적·우연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스스로를 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폐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긍정하게 된다―그것이 지배적인 가치에 비추어 추하거나 악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이것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사실에서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는 윤리로의 이동을 함축한다(Lacan). 다시 말해 ‘호명된 주체’에서 ‘배움의 주체’로의 이동을 함축한다.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긍정해야 하는, 우연에 의해 형성된 기질/성향이 배움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대담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섬세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집요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배울 수 있다. 또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냉정한 사람은 그것을 무기로…… 기타 등등. 각자에게 ‘우연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어진 실존적 문제들에 스스로 대답해보려고 골몰하면서 말이다. 배운다는 것, 배움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한다는 것과 엄밀하게 같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 여기에 태어나 이 모양으로 생겨 먹게 되었는데, 좀 못생긴 부분이 있지만, 이것이 내가 지금 걷는 배움의 길에는 최적의 생김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배움은 역사적·국가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배움은 철저히 타자에 의존하고 타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하는 순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배움의 길에 있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 자신보다 전문가일 수 없다. 배움이 특정한 ‘앎’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있을 때 배움은 극복되어야 하는 과정, 아직 앎에 도달하지 못한 미숙한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의 운동을 앎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두면, 오히려 앎이 배움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앎은 관념적 운동이지만 배움은 감각적 운동이다. 앎의 척도는 정확성이고, 배움의 척도는 진정성이다.

이러한 배움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니체는 배움의 주체가 취할 수 있는 발화 방식의 한 범례를 보여준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증인이 되는 그런 종류의 발화이다. 그 발화는 원칙적으로 객관적 재현이나 증명, 자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발화자는 현행화된 지식/권력의 ‘공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하나의 ‘사건’이 되어, 현행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들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가 근본적으로 더 우월함을 천명한다. 이때 시련은 발화와 발화자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데서 오는 ‘광기’이다. 자신이 겪은 시련에 의해 보증되는 이 천명은 자기충족적 예언이다(주판치치). 말하자면 배움은 어떤 대상적/객관적objective 조건들에 구속되어있지 않다. 니체는 자신이 가진 것이 없지만, 심지어 병들었지만, 철학자로서 지녀야 할 ‘매력'(“사회의 모든 계층에 발산하는 완벽한 매력”)을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발화의 내용과 발화자 사이에 어떤 거리도 없어진다는 것, ‘단순하고 정직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정확히 니체 자신의 삶이 보여주듯이 ‘미친다’는 뜻이다. 세계를 둘로 나누려다가 자신이 둘로 쪼개질 수 있는 것이다. 광기는 이 첫 번째 도야의 길에 내재하는 위험이자 시련이다.

최근 의 주목할만한 ‘성장소설’들은 이러한 도야의 동시대적 사례를 보여준다. 손보미의 「불장난」 말미에서 어린 화자는 스스로 세계의 비밀에 도달했다고 느낀다(비록 어린 화자의 광적인 확신에 어른 화자의 회의가 덧붙여지고, 그에 따라 진술의 광기는 누그러지지만). 예소연의 「우리는 계절마다」의 끝에서 화자는 자신을 자기 삶의 입법자로 내세운다. “나는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예소연, 328). 우리는 이 소녀 화자들에게서 니체적인, 약간 광적인 오만함과 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화자들이 그런 방식의 자기 진술에 이르는 것은 상황(스승의 부재, 가정에서 받은 상처, 부모의 무감함이나 부재, 또래 집단 속의 폭력 등)이 그들에게 위험한 도야의 길을 가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성장소설들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는 스승의 부재, 혹은 선생의 영향력의 현저한 약화이다.1 물론 스승이 있든 없든 우리는 배우는 자이다. 그러나 안내자가 없는 이 배움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방황, 여러 시련을 거친다. 성장소설은 이러한 ‘비제도적’ 배움을 예증하는 데 특권적인 장르이다(그리고 이 장르가 소위 제도문학 안에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배우는 자가 미치지 않기 위해 있어야만 하는 장르이다. 배우는 자(성장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소설적 거리는 우리를 메타적으로(배움들을 배우는 자, ‘두 번 배우는’ 자로) 만들고, 메타적으로 미친다는 것은 제정신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어린 화자들이 ‘자기 입법자’가 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인 자기 통치와 얼마나 다른가? 이 성장소설들의 ‘성장’은 국가적인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이것이 가치들을 ‘둘로 나눈다’는 목적에 비추어 고찰되어야 하는 문제다.

*

누군가 스스로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우는 자인 동시에 교육자인 차라투스트라는 다음처럼 말했다. “그대들은 배운다는 것, 잘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 나로부터 배워야 한다!”(니체 b,)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잘못 배운다는 것은 죽음과 예속을 향해 치닫는다는 뜻이다. 스승이 필요하다면 어떤 특정한 앎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서다.

첫 번째 제안이 독특한 시련―그러나 주체성에 가해지는 엄청난 시련은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일반적인 것이다―에 노출된 배우는 자를 위한 것이라면, 보다 ‘보편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교육 사상의 개혁이다. 이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교육자들, 가르치는 자들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의 현재 교육 제도의 근본 사상을 새로운 근본 사상으로 대체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노력을 요한다. 이제 이 대립을 직시할 때가 왔다. 왜냐하면 나중 세대가 승리를 거두어야 할 투쟁을 어떤 세대는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니체 a, 465). 그렇다면 교육의 ‘근본 사상’은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니체의 텍스트는 배움과 교육의 역설적 관계를 사고하게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문제이다.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의 앞부분에서, 니체는 진정한 교육이란 (아는 척하기 위한, 사회적 지위를 위한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 각자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임을 단언한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글의 뒷부분에서 니체는 교육의 이상이 국가보다 높이 있어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국가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교육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동시에 강요하는 것, 교육을 재현의 질서에 종속시키는 것, 배움의 과정을 특정한 ‘앎’의 목적(이를테면 수능에서의 높은 점수)에 종속시키는 것은 결국 국가이기 때문이다.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가 하는 일은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잉여나 초과와 같은 교육의 이상을 담보하고 보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니체는 배움의 다원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교육의 드높은 이상/이념idea을 주장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이항대립, 이를테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나 진리와 다원성의 대립 같은 이분법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중적 주장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보편적 이성, 헤겔의 절대지 같은 교육의 최종목적은 배움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경색시키며, 교육을 국가의 목적에 종속시킨다. 하지만 니체의 비판은 그러한 이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교육의 이상이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더 강대하고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경험적·역사적으로 알듯이, 교육이 어떤 내적 이상도 진리도 없이 ‘다양성’을 가치로 내세울 때는 그 다양성조차도 결코 지켜낼 수가 없다. 한국의 공교육 제도가 다양성, 자율성 등을 기치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의 출범, 즉 김영삼 정권 때부터이다. 그로써 학생의 인권과 자율성을 보장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교육의 ‘시장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김환희). 대학 입시라는 일원화된 목적이 약화되거나 해체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학교에서의 다양한 활동은 결국 더욱 숨 가쁜 평가들로 환원되었다. 다양성이나 자율성의 기치는 학원/과외 종류의 증가와 사교육비 폭증으로 이어졌다. ‘결과 중심 평가’에서 ‘과정 중심 평가’로의 이동은 일견 앎의 목적보다 배움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그리고 그런 효과도 실제로 어느 정도는 있지만―실질적으로 그것은 수행평가 비중의 증가, 수시 비중의 증가, 그에 따른 관리관찰과 자기 관리의 미세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국가는 당연히 배우는 자 개개인을 염려하지 않는다. 국가의 목표는 (외적으로) 타국과의 경쟁에서 존속하기 위해 (내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통제·관리·육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국가에 의해 보호되고 정의되는 교육은 국가를 위한 인적자원의 육성을 목표로 한다. 권위주의적 교육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으로 옮겨오는 동안, 그 인적자원의 형상은 성실하고 근면하며 유순한 ‘노동자’에서 최대 이윤을 위해 자기 삶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기업가’로, 혹은 자신의 가치 상승을 위해 자원을 투자하는 ‘자산 관리사’(페어)로 변모해왔다. 이러한 형상의 변화는 국가의 위상과 역할 변화(산업 인력을 동원하려 하는 국가에서 자신의 ‘금융적 매력도’를 증가시키고자 하는 국가에 이르는 변화)와 상관적이다. 그러나 교육이 어떤 주체성을 생산하려고 하든, 이런 방식으로 사고된 교육의 목적이 국가의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반대로 니체가 말하는, 국가를 초과하는 교육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재현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지배적인 재현 체제로부터 셈해질 수 있는 것만이 공식적·실증적으로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증적·실용적 관점에서 이 ‘이상’은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기껏해야 낭만적인 망상이나 고집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실증적 지식/권력을 무화시켜버리는 니체의 ‘가치전도’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갖추고 있다. 재현될 수 없는 교육의 이상은, 재현될 수 없는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그 자리에서의 발화를 통해 그것의 존재를 증언하는 배우는 자에 의해 보증된다. 역으로, 재현될 수 없는 교육의 이상은 배우는 자 각각의 해방을 보증한다.2 이는 결국 인적자원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그렇기에 예측할 수 없는―사유자들의 훈육이다. 따라서 젊은 니체의 주장은, 겉보기에 상충하는 듯한 두 가지(배움의 예측 불가능한 다원성과 교육의 높은 이상)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 서로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양성과 진리―물론 니체라면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흉내 내는 말이라고 했겠지만―는 교육 안에서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러한 교육은 사실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이념적으로 존재한다. ‘조건 없는’ 교육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조건 없는 대학 같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 없는 대학은, 원칙적으로 대학이 공표한 소명과 공언한 본질에 근거해, 독단적이고 불공정한 전유를 일삼는 모든 권력에 비판적으로―그리고 비판적인 것 그 이상으로―저항하는, 최후의 장소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데리다, 16~17)

대학이 현실에 실재하는 제도/기관인 한에서, 대상적/객관적 조건들에 구속되지 않은 ‘조건 없는 대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건 없는 대학은 교육을 위해서 이념적으로 고수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념을 고수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비판가이자 ‘의심의 세 대가’ 중 하나로 칭해지는 니체의 의도는 가치들이 공허한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학자들, 그것을 위해 철학을 이용하는 학자들, 그들은 국가에 복종하는 학자들로서 니체의 최대 공격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이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비판적인 것 그 이상”인, 스스로도 “지나친 망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니체의 의도는 국가를 초과하는 교육의 급진적 이상으로부터 다양성, 창의성, 진정성 같은 가치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교육자로서의 진정한 철학자”의 상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참조문헌

김환희, 「‘5·31 교육 체제’를 애도한다」, 『문화과학』 2023 겨울호, pp. 40~57.

니체, 프리드리히 a,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pp. 391~494.
_________________b,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4.

데리다, 자크; 『조건 없는 대학』

들뢰즈, 질; a,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___________b, 『스피노자와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14.
___________c,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Lacan, Jacques;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Edit. Jacques-Alain Miller, Trans. Dennis Porte, Norton&Company, 1992.

랑시에르, 자크;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2016.

리오타르, 장 프랑수아;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관하여』, 2005, pp. 197~236.

손보미; a 「불장난」, 『사랑의 꿈』, 문학동네, 2023. pp. 63~132.
________b 「밤이 지나면」, 같은 책, pp. 7~62.

아메드, 사라; 『감정의 문화정치―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안병연, 〈[특별 기획]5·31 교육개혁의 배경과 의미〉, 동아일보, 2023. 5. 25;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524/119453417/1

예소연, 「우리는 계절마다」, 『문학동네』 2023 가을호, pp. 308~28.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주판치치, 알렌카; 『정오의 그림자』, 조창호 옮김, 도서출판b, 2005.

푸코, 미셸; a 『비판이란 무엇인가?·자기 수양』, 오트르망 옮김, 2016.
___________b 『담론과 진실·파레시아』, 오트르망 옮김, 동녘, 2017.

Foucault, Michael; “What is Enlightenment?”, The Foucault Reader, Edit. Paul Rabinow, New York, Pantheon Books, 1984, pp. 32~50

페어, 미셸; 『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칸트, 임마누엘; a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p. 25~38.
______________b 『판단력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1. 물론 제도적·합법적인 스승이 없다는 것이지, 잠정적으로나마 스승의 역할을 하는 어떤 인물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손보미의 「밤이 지나면」의 ‘그녀’, 예소연의 「우리는 계절마다」의 ‘미정 엄마’,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의 ‘모래 고모’ 등은 소녀의 성장기에서 ‘비제도적 스승’의 역할을 한다. ↩︎
  2. 이것이 교육과 ‘천재’의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물론 우리가 19세기의 니체처럼 천재를 예외적 개인의 기질로 정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만 천재성은 대상적/객관적 조건들의 산술로 설명될 수 없는 배움의 예측 불가능한 효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

배움의 단계들

―손보미, 「불장난」1)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발표.

1)『사랑의 꿈』, 문학동네, 2023. 본문에서 소설을 인용할 시 괄호 안에 페이지 번호만 병기한다.

0. 지연과 성장

유명한 할아버지들이 말하길 우리가 사는 이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경제적 독립, 학교에서의 졸업, 양육되는 존재에서 양육하는 존재로의 전환 같은 생애의 단계가 점점 뒤로 늦춰지거나 불가능해지는 경향이 있다. 신체적 고행, 결혼, 등용, 참전 같은 전통적인 성인식 의례의 구속력은 약해지거나 없어지는 한편, 어른이 되는 뚜렷한 의례는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아마 인류사에 전례 없이 길어진 사춘기를 겪는지도 모른다.2) 한 몸 건사하기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인생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되기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되기도 문제가 된다. 두 가지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하거나 혹은 동시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전통적인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 이제 가능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일이라면, 결국 삶의 방식을 생성하는 것이 문제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성장소설의 화자는 어른이 되는 한편으로 아이가 되는 면이 있다. 좋은 성장소설에는 삶의 문제들에 답하기 위한 양방향의 탐색이 있다. 인물이 단지 어른의 관점에서 아이 시절을 추억하고,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서술한다면 뻔한 교훈들을 나열하는 자전 소설이 될 것이다. 반대로 생생한 배움을 주는 소설에는 언제나 양방향의 ‘-되기’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성장’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growth ideology)의 ‘성장’과 얼마나 같거나 다른 것인가? 또 소설이 주는 배움은 자기계발이나 힐링 담론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가? 역사적으로 교양소설이나 감상소설은, 특히 여성들의 품행을 교육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고발되어왔다. 성장소설 역시, 세계를 대면한 인간 주체의 일방향적인 강화와 확장을 그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성장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러라는 법도 없다.

‘성장’을 비롯해 자율성, 창의성, 자유, 능력 같은 말들이 우리가 가장 반대하고 싶은 것들에 의해 지독하게 오염되었더라도 그런 기표들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성장’은 언제나 우상향 그래프로 표시된다. 성장소설의 ‘성장’은 오히려 그런 통계적 성장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시작된다. 내 생각엔 그렇게 유형화되기 힘들고 의미를 부여받기 힘든 배움에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스스로 배움의 능력을 예증하고 촉진하는 것과 더불어 말이다.3) 손보미의 몇몇 소설을 성장소설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남성적 특권의 혐의를 받는 고전적 성장소설과는 다르다. 오히려 손보미는 그렇게 특권화된 이야기 바깥에서 “더 충만하게 역동적이 된” 성장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4) 심지어 화자가 남성인 『디어 랄프 로렌』의 경우에도 이미 그렇다. 그 소설의 화자인 종수가 물리학 대학원에서 쫓겨나면서 자기 배움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직업적이거나 학업적으로 봤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외국을 떠돌며 허송세월하는 아무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의 관점에서 그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다. 한편 시간과 기억, 가치를 헝클어놓는 이 배움의 이야기가 랄프 로렌의 “‘정말’ ‘매력적’”5)인 미소에서 출발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종수의 여정은 랄프 로렌과 같은 유명인에 대한 집중에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향하고, 한편으로는 익명의 삶들을 향한다.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합쳐지기도 하는 이 여정은 그가 작가가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 글에서 새삼스럽게 단계들을 말하는 것은 국가적·경제적 관점에서 무가치해 보이는 이런 성장/교양/배움(Bildung)에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매혹은 배움의 출발점에서 쏘아지는 신호탄이다. 손보미의 소설에서 매력의 문제는 반복적으로 다뤄진다. 많은 맥락과 뉘앙스에서 매력이 언급되기 때문에 ‘매력의 문제’라는 범주화는 소설의 다양한 맥락을 뭉뚱그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소설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의 포괄성과 복잡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낯설고 희귀한 것이 되고 반대로 매력은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은 복잡한 ‘구별짓기’(부르디외)의 기제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성적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도 이제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6) 그러나 소설에 나타나는 매력의 문제는 그러한 구조적 비판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내 귀에 도착하는 건 적당히 뭉쳐지고 굴려진 음파들의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어렴풋이 감지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를 정말로 매혹시켰던 것은 내가 금지당하는 대상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73)

여기서 “매혹”은 ‘구별짓기’나 ‘매력 자본’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대목에서 매혹은 법과 주체가 맺는 기묘한 관계, 소리에 대한 감각과 집착, 자신의 처지에 대한 느낌 등과 관련된다. 매력은 이해관심, 신체적 자극, 성적 끌림, 충동, 인식, 도덕, 미적 판단의 분리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거나 함몰된 세계의 법칙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지극히 사춘기적인 세계의 법칙이다.

배움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가진 인식, 도덕, 미적 판단이 무너져야 한다. 또 무력함이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매력은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예측할 수 없는 길로 질질 끌고 간다. 그 무방비한 배움은 학교에서 어떤 영역의 전문성을 축적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어떤 배움이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 다른 배움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순한 뒤섞임 그 자체가 배움의 내용이자 강도(强度)다. 이런 배움이 제도화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폭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뒤흔들어 그가 접속해 있던 감수성과 지식의 질서에서 이탈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면, 모든 진정한 배움은 폭력적이다. 예술은 폭력적이다. 아무 배움도 주지 않는 예술,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는 문학만이 무해하다. 하지만 어느 화가의 말처럼 회화의 폭력과 전쟁의 폭력은 다르다. 예술의 폭력은 어떤 폭력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물론 정당화도 아니다―앎과 감각의 질서에서 탈구시키는, 신체에 작용하는, 그 순간 발생하는 폭력일 뿐이다. 예술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예술작품이 폭력적인 소재를 재현한다거나 폭력적인 언사를 사용한다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예술은 우리에게 배움을 강제하지만, 지식-권력이 아니라 매력-폭력을 통해 그렇게 한다.

우리가 전례 없이 길어진 사춘기에 유예돼있다 하더라도, 배우는 자에게 이런 지연은 단순히 부정적인 조건이 아니다. 이 지연의 시기는 새로운 배움이 우리를 휘어잡고, 몸에서 성적인 쾌를 주는 다양한 기관들을 되찾거나, 사랑을 하거나, 친구와 절교하거나, 정치에 경도되거나,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거나 기타 등등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다. 그렇게나 많은 성장소설이 사춘기 시절을 불러들이는 이유는 휴머니즘 드라마의 향수(‘좋았던 그 시절……’)를 위해서가 아니라 강렬한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을 지금 가동하여 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2) 알랭 바디우, 『참된 삶』, 박성훈 옮김, 글항아리, 2018 참조.

3)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는 것들」, 『쓺』 2023년 하권 참조.

4) 백지은, 「여자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가」,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 344쪽.

5)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2017, 45쪽.

6)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매력을 무기로 성공을 이룬 사람들』,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참조.

단계 1. 매력: 불안과 사로잡힘(귀의 모티프)

소설은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 화자의 배움은 시간을 헝클어뜨리고, 소설의 표현은 나중에야 이해된다. 가령 독자는 화자의 전남편이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여성을 화자가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떤 문제들을 따라 어른 화자는 어린 화자에게 접속한다. 즉 소설을 끌고 가는 것은 최종적인 질문(‘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에 대답하기 위해 기억을 반추하는 인물의 의지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들에 대답해나가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에 답하게 될 것이다. 문제들 앞에서 어린 화자가 했던 필사적인 탐구가 어른 화자의 언어와 뒤섞여 배움의 내용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많은 것이 불분명하다. 어린 화자의 눈은 가려지고 있다. 보이지 않음―여기에서 어떤 배움이 시작되었던 듯하다.

눈을 가린다―아버지의 커다란 두 손이 급박하게 내 눈앞에 드리워진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외국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키스를 나눌 때에도 아버지는 내 눈을 가렸다. 그런 세계―하지만 그게 어떤 세계란 말인가?―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접근 금지―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되었다면 그때 내가 그들이 술을 마시리라는 사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리라는 사실, 그들이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특별한 단어들을 내뱉으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접근 금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70-71)

아이가 볼 수 있는 것과 봐서는 안 되는 것을 판단하는 아버지는 입법자이고 집행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금지는 (당연하게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눈을 가린다고 해서 감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금지가 아무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반대로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린 화자는 아버지에 의해 시각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그만큼 청각의 세계로 들어간다. 혹은 자신의 몸으로 청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집에 손님을 초대한 아버지와 그녀는 어른들끼리의 이야기를 위해 아이를 방에 들여보낸다. ‘나’는 문 뒤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내 신체 전체가 거대한 귀가 되었다고 상상했다”(73). 어른의 지시에 따라 방에 들어갈 때 아이는 수동적이고 무력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가 ‘거대한 귀’가 되면 어른들은 청각적 기호들을 발산하는 배움의 재료가 되고 아이는 기호들을 해독하는 게걸스러운 기관이 된다.

시각의 세계와 청각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또 시각적 신체와 청각적 신체는? 서구 문화에서 시각과 인식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이론(theory)은 ‘보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theoreo’에서 나왔다고 한다.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말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반대로 청각은 자명하지 않음, 불순함, 속도, 과민함, 정보의 덩어리에 관련된다. 20세기의 매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동시대 문화가 청각적으로 되어가고 있고 따라서 지나치게 시각 편향적인 서구 근대인은 동시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8) 시각의 세계가 체계화된 지식의 세계라면 청각의 세계는 혼란스러운 정보의 세계다. 시각의 세계가 이원론적 틀(주체와 대상, 저자와 독자)을 전제한다면 청각의 세계에서는 주체와 대상, 발신자와 수용자, 언어와 소음의 경계가 흐려진다. 따라서 (소설에서와는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매클루언도 오래전에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근대적 지식의 틀로 포섭할 수 없는 끌림, 속도, 감각적 과민함,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이러하다. 이 청각적 세계의 법칙을 수립하는 것은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매력의 경제다. 지식-권력이 시각의 논리, 낮의 논리라면 매력의 경제는 청각의 논리, 밤의 논리이다. 매력은 물질, 감각적 자극, 육체적 끌림, 편견, 정보가 아직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현상적 차원에 관계하고, 주체의 능력 중에서는 상상력에 관계한다. 상상력은 지성이나 당위적 이성의 감독이 헐거워질수록 더 강해진다(그러나 제약이 아예 없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77).

화자에게 매력의 문제를 치명적으로 제기하는 타자는 새엄마인 ‘그녀’다. 아버지와 그녀는 사교 활동에서 효과적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매력을 발산하며 눈길을 끌고, 아버지는 내내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심을 골고루 나누어준다”(69).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위한 분업인가? 젊은(아직 “비판”을 쓰기 전, 매력을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전) 칸트는 숭고함과 고상함은 남성적인 자질로, 아름다움과 매력은 여성적인 자질로 할당한 바 있다.9) 오늘날 이것을 성차별적 편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소설에서 그려지듯 오늘날의 어느 가정에서 이러한 역할 분업은 얼마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분업을 통해 아내는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남편은 가부장적 권능을 얻는다. “그녀를 숭배하는 듯한 아버지 주위로, 그전까지 마구 흩어져 있던 자신감과 권위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일렬로 줄을 서는 것 같았다”(69).

이런 과시적 분업이 가능한 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가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가 그녀에게 매혹되어 홀린 듯 군다는 사실은 그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그의 허약함을 노출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을 지시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허가를 갈급하게 구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뜻대로 아버지가 선택하게끔 유도하는 듯 보인다. 그녀의 이런 힘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평한다. “마력.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신체-마음을 조종하는 그녀의 능력을 나는 마력이라고 불렀다”(77).

마력이란 무엇인가? 마력은 매력보다 한층 강력한 힘일 것이다. 매력의 ‘매(魅)’는 도깨비를 뜻한다. 마력의 ‘마(魔)’는 마귀를 뜻한다. 매력은 도깨비의 힘이지만 마력은 마귀의 힘이다. 이매는 아직 귀신[鬼]이 못 된[未] 존재이지만 마귀는 인간의 옷[麻]을 입은 귀신이다. 즉 이매가 ‘귀신-1’이라면 마귀는 ‘귀신+1’이다. 인간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만, 귀신에 약간 못 미치거나 약간 초과하는 존재에게는 간과 쓸개를 내준다. 설화에서 나그네를 매혹했던 존재들의 모호한 정체를 떠올려보자. ‘저것의 정체는 짐승인가, 인간인가, 귀신인가?’ 이런 불확실성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가장 매력적이라 여겨지는 존재가 가장 큰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또 귀신 비슷한 것들을 축출하고 정체를 식별하고자 했던 지적 탄압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혐오는 지성의 결여뿐만 아니라 불안정성을 견디지 못하는 지성의 두려움 때문에 강화된다. 마녀사냥은 계몽주의 시기에 오히려 번창했다.10) 지식-권력의 푸닥거리…… 낮에 불안하게 유지되던 아버지의 권위는 밤의 웃음으로 무너진다.

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내 아내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차린단 말이야.”
음파들의 덩어리 속에서 특정한 음절을 건져올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뭉개진 발음이긴 했지만 쩌렁쩌렁하게 집안이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과묵함을 뚫고 나오는 권위나 자신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평소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처럼 성마른 조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뒤이어 무모하게 무언가를 잔뜩 헝클어뜨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키득거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게 웃음소리(그중에서도 그녀의 웃음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74)

첫번째 단계에서 화자에게 주어진 문제는 대략 이러하다. 보이지 않음과 상상력, 그녀의 마력과 아버지의 실추. 이것들은 불안을 낳고, 이 불안이 화자의 광기를 함양해준다.

8) 마셜 매클루언, 『구텐베르크 은하계』,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참조.

9)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참조.

10) 주경철, 『마녀―서구 문명은 왜 마녀를 필요로 했는가』, 생각의힘, 2016 참조.

단계 2. 추적과 실망(문의 모티프)

배움의 이야기 그리고 매력은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불가분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도, 정신분석학적 설명과 달리 수많은 성장소설이 사춘기 시절을 불러들이고 그 시기에 (유아기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성적 주체로 만드는가? 첫번째로 어른의 호명이 있다. 유아기에 어른에게 당하는 그 호명은―어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모종의 금지인 동시에 유혹이다. 하지만 두번째로, 사춘기에 마주하는 매력적인 동성의 신체와 언행이 있다. 어쩌면 이 매력적인 동성과의 마주침은 유아기의 성욕보다 더 불온하고 모호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 동성 또래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욕정인지 질투인지 그때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 불확실성 속에 호명된 주체와 배움의 주체를 가르는 어떤 문턱이 있다. 물론 유아기에 형성된 ‘어두운 전조’가 사춘기 시절에 반복되지만, 이것은 단순한 재발견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반복이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의 탐구를 강하게 유인하는 매력적인 동성 또래의 이름은 양우정이다. 양우정은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지녔고 고결한 분위기를 풍긴다. 양우정은 남자애들의 장난 혹은 괴롭힘에 아주 싸늘하게 반응함으로써 남자애들을 기죽게 한다. 화자는 그것이 양우정이 타고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타고나는 여자들이 있고 그들은 선택받은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94).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 읽기를 통해, 마치 타고난 것처럼 여겨지는 무언가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배움의 효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자와의 성적 관계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화자를 저항할 수 없게 잡아끄는 문제다(이 문제의 양가적인 심각성은 ‘그녀’와 연관되어 있다). “나와 친구들은 못하는데 양우정(과 그애의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었다. 성숙한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 물론 당시에는 ‘성숙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이렇게 표현했다. 중학생 오빠들”(94-95). 물론 ‘중학생 오빠들’은 실체 없는 소문이고 화자가 양우정에게 더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신기루이다. 그렇긴 해도 중학생 오빠들의 ‘성숙함’은 초등학교 5학년인 화자에게는 엄중한 사실이다.

또래 집단이라고 해도 모두가 같은 배움의 길에 같은 강도로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자의 친구들은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들을 둘러싼 소문을 떠들어대고, ‘임신’과 ‘우웩’을 연결지으면서 즐거워하지만, 어쨌든 금세 다른 관심사로 돌아간다. 화자는 그렇지 않다. 화자는 그 소문의 진상에 집착하고,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빈틈에 조급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친구들과 달리 화자는 거기에 계속 매달리는가? 단지 화자가 남다른 성욕, 호기심, 집착을 ‘타고난’ 아이여서 그렇다고 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첫 단계에서 주어졌다. 첫 단계에서 화자의 눈은 가려져 있었고(아버지의 금지/유혹), 성숙한 남자(아버지)를 유혹한 ‘그녀’의 마력은 화자의 실존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첫 단계에서는 비밀을 추적할 방법이 없었지만, 성숙한 남자(중학생 오빠들)와 관계하는 양우정을 통해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친구들과 달리 화자는 그 성적인 소문의 ‘실체’를 밝히는 데 삶을 걸고 있다. 첫번째 단계에서 비밀은 막후에 있어서 청각적-상상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었다. 두번째 단계에서, 이제 비밀은 가까이 있어서 물리적으로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따라서 화자는 친구들을 따돌리고 어린이 탐정처럼 추적을 시작한다. 그 바람에 친구들에게 절연 당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양우정(과 중학생 오빠들)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학교 뒤 숙직실까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 첫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것이 부동성(不動性)이라면 두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것은 수평적 운동이다.

쓰레기를 태운 연기와 매캐한 냄새를 품고 있는 소각장을 지나 숙직실 쪽으로 갔다. [……] 그리고 문에 바짝 귀를 갖다댔다. 마치 내 몸이 거대한 귀가 된 것처럼. 문 너머, 분명하지는 않지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분간할 수 있는 소리들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팝송, 간헐적인 박수 소리, 가끔씩 내지르는 탄성. (103)

팝송, 박수 소리, 탄성…… 이 절묘한 소리들은 (어린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무엇을 예상하게 하는가? 물론 문 너머에서 성관계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화자가 집착했던 문제의 실체가 바로 문 뒤에 있다고 기대하게 한다. 화자는 용감하게도 힘껏 문을 열어젖혔으나, “눈앞에 펼쳐진 건, 숙직실 안의 그들이 아니라 또다른 낡은 목재 문이었다”(104).

비밀로 접근해가는 여정에 도달을 지연시키는 너무 많은 문이 있다. 문들은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보존하고 부풀린다. 첫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문 뒤에 있었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첫번째 문은 열었지만, 왠지 모를 박탈감과 무력함으로 두번째 문은 열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정말로 양우정이 문을 열고 나온다. 그 순간 양우정이 발산하는 기호들―흐트러진 옷, 땀, 열기―은 화자의(그리고 독자의) 불온한 기대를 잠시간 유지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문이 활짝 열리자 “중학생 오빠들은 없었다”(105). 양우정과 친구들은 어른 옷을 입고 와서 가상의 런웨이를 걷는 중이다.

이제 땀과 흐트러진 옷, 몸의 열기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이렇게 기호들의 의미를 전환하는 솜씨는 손보미의 소설을 읽을 때 감탄하게 되는 특징이다. 소설은 화자가 느끼는 긴장, 당혹감, 허망함을 단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텍스트를 따라 함께 겪을 수 있게 한다. 당연히 화자는 실망한다. 도깨비 같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뒤돌아서 나가지도 못한다. 양우정은 꼼짝 못 하고 있는 화자에게 걸으라고 반복적으로 명령하는데 그 장면의 부조리함은 거의 잔인무도하게 느껴질 정도다. 화자는 결국 도망치는데, 도망쳤다는 사실(그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겨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패배감, 수치심에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주인공은 첫번째 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손보미의 소설은 대놓고 알레고리적인 카프카의 소설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학교의 철문이나 숙직실 문은 익숙한 형태와 색깔로 떠오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많은 문, 반복되는 모티프, 부조리한 장면은 소설적으로 교묘하게 배치되고 연출된 것이다. 이 구성을 알레고리로 읽는다면 배움의 이야기로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령 문학에 매혹되어 배움을 시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번째 문을 여는 것은 쉽다. 약간의 결심만 한다면 누구나 문학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첫번째 문 뒤에 두번째 문이 있다. 그 문은 배우는 자의 힘으로 열 수 없게끔 보이지 않는 힘으로 통제되고 있는 듯하다. 두번째 문은 내부자들이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즉 두번째 문에서부터 소위 ‘계’ 나 ‘장’이라고 불리는 것(‘문학계’)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문들 사이에 갇혀 서성이면서 문 뒤에서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막상 문이 열리고 그 속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먼저 들어가 있는 이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여기는 왜 이 모양인가요?’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그애들조차 이곳의 주인이 아닌데”(105, 강조는 원저자). 두번째 문이 열리면 우리는 주인은 없고(주인이 있을 수 없는데, 주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있는 숙직실에서 우스꽝스러운 런웨이 행렬에 참여하도록 종용받는 것이다.

단계 3. 승화(불의 모티프)

실망 이전에 독단주의라는 함정이 있다면, 실망 이후에는 회의주의라는 함정이 있다. 실망을 겪은 사람은 회의적·냉소적으로 된다. 하지만 실망은 배움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마디들, 쉼표들일 뿐이다.11)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가 겪은 실망은 근본적이지만, 그렇다고 실망의 가능성이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며, 화자는 이후에도 거듭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회의주의는―독단주의와 마찬가지로―이런 상처에 대한 방어 작용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 중산층 가정의 불안한 질서 속에도 행복한 기억이 있다. 정전된 날 가족이 모인 촛불 앞에서 어머니는 행복을 고백한다. 그러나 즉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날, 그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90). 촛불은 불장난의 불 혹은 “배덕의 찌꺼기와 흉허물”(91)에 비하면 너무 연약하고 일시적이다.

가족의 허상은 이미 파괴되었다. 이것이(화자의 경험을 시간순으로 재배열한다면) 다른 실망보다 먼저 있었던 실망일 것이다. 실망은 약속, 행복, 도덕, 풍습, 기대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배우는 자는 어느 순간 이 범상한 사실에 도달하여, 마치 대단한 지혜를 얻은 것처럼 허무주의를 설파하는 사람이 되곤 한다. 하지만 실망은 한 단계의 마감을 알리는 동시에 또다른 단계가 시작될 것을 암시하고, 아직 자기 입장을 요새화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이 고된 사실을 방어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화자는 친구들을 잃고 외톨이가 되었다. 수치심은 화자를 몹시 괴롭게 하고 있다. 방학이 되어 어머니 집에 가는 것은 화자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어머니는 자신의 공부와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어린 화자는 거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 이 벼랑 끝에서 어떤 일탈을 시도하는데, 이 의식화된 일탈은 예술에 가깝지만, 혼자 하는 일이고 주관적인 고양감을 겨냥하기 때문에 아직 예술은 아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법적인 존재처럼 그려졌지만 중대한 일탈, 불장난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아버지이다. 처음부터 드러나는 그의 허술함을 고려할 때 이는 반전이라기보다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어머니가 행복을 고백한 밤 촛불을 켰던 라이터, 그 순간 외에는 아버지가 화자 앞에서 꺼내지 않았던 그 사물은, 아버지의 부주의 때문에 화자에게 재발견된다. 화자는 그 라이터를 가지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데, 여기서도 문의 모티프가 반복된다. 그런데 두번째 단계와는 순서가 반대다. 구 층에 있는 중간 옥상 문은 잠겨 있고, 이십오 층 옥상(‘진짜 옥상’)에 있는 문은 잠겨 있지 않다. 배움의 단계들을 문의 모티프와 관련하여 다음처럼 도식화해볼 수 있다. 배움의 단계마다 화자는 이전 단계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된다(하지만 불능도 부분적으로 계속 남아있다).

단계 1: 문을 열 수 없는 상태
단계 2: 첫번째 문은 열 수 있지만 두번째 문은 열 수 없는 상태
단계 3: 첫번째 문은 열 수 없지만 두번째 문은 열 수 있는 상태

이 세번째 단계에는 복잡한, 거의 종교적으로 보이는 의례가 수반된다. 두번째 단계에서도 단순한 의례(철문을 닫음)가 있기는 했지만, 이제 화자는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의례들을 만들어낸다. 화자는 그녀와 아버지 앞에서 화난 기색을 유지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며, 배가 고파도 아침밥은 굶는 등의 규칙을 만들어 지킨다. 처음에 이 수행적 자해는 아버지, 어머니, 그녀를 향한 시위이기도 했겠지만 점차 의도와 형식의 중요성이 전도된다. 이렇게 까다로운 의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 불장난이 일종의 정화 의식임을 말해준다.

소설에서는 적절하게도 말해지지 않지만 ‘불장난’은 불륜 행각을 뜻하는 관용어이기도 하다. 화자가 실제로 하는 불장난은 상징적인 “배덕의 찌꺼기와 흉허물”뿐 아니라 이 관용어의 상투성마저도 정화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 단계는 화자에게 수치심과 굴욕감을 심어준 경험, 특히 두번째 단계에서의 도망을 상상적으로 벌충한다. “다시 해봐, 다시 해봐, 하고 나를 부추기는 것처럼, 온 사방에서 기타와 드럼 소리가 두드러지는 팝송의 전주 부분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120). 이 명령어와 팝송은, 두번째 단계의 숙직실에서 화자가 들었던 소리의 상상적 반복이고, 이 반복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실제로 넘지 못했던 난관을 주관적 차원에서 초월하려 한다.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수치심과 굴욕감, 이물스러움과 꼴사나운 천진함 기타 등등―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120).

두번째 단계가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수평적 운동으로 특징지어졌다면, 계단을 올라 옥상에서 불을 피우는 이 단계는 상승의 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탈속(脫俗), 탈성애화의 움직임. 이 불장난은 주관적 보상인 희열을 주지만 그만큼 쉽게 사그라든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 가서 우리는 이 불장난이 마지막 난관을 넘기 위한 ‘주관적 차원에서의 예행연습’이었음을 알게 된다.

11) “기호들의 영역 각각에서 대상이 우리가 기대했던 비밀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각각의 [배움의] 선에 대응하여 실망은 그 자체가 복수적이고 다양한 것이다. 처음 볼 때 실망케 하지 않는 사물들이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처음이란 미숙한 순간이고 우리에겐 아직 기호와 대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64쪽. []는 번역자.

단계 4. 글쓰기

글쓰기는 모든 의심과 혼란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도대체 지금 누가 서술하는 것인가(어린 화자인가, 어른 화자인가, 작가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글쓰기 때문에 배움을 단계화하는 게 가능하지만, 동시에 글쓰기는 단계화를 영원히 혼란에 빠뜨린다. 먼저 이 소설에는 다섯 개의 (은유적이거나 실제의) 불장난이 있는데, 이것들은 불과 폐허의 모티프를 반복하면서 각각 배움의 단계들에 상응한다.

(1) 그녀와 아버지의 불륜
(2) 양우정의 손수건을 소각장에 던짐
(3) 옥상에서의 불장난
(4) 불조심 글짓기의 소재로 쓴 불장난
(5) 동급생들 앞에서 낭독한 불장난

글쓰기는 네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소설의 내부에서 글쓰기가 마지막 단계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소설을 특히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특징이다. 글짓기 자체는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처럼 순식간에 일어났고, 다른 단계들에 비하면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중요한 배움을 주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를 이 소설 자체(혹은 소설에 대한 이 비평까지)로 확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글쓰기의 다음 단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것을 포괄하는 글쓰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글쓰기가 있는 한 어떤 ‘마지막’ 단계도 진정으로 마지막이 되지 못한다. 모든 마지막 단계의 에 글쓰기가 은근슬쩍 따라붙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쓰기에는 얼마든지 단계를 만들어내고 해체할 수 있는 자의성이 있다.12)

이 글에서 매력의 문제는 첫번째 단계에, 실망은 두번째 단계에 할당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혹과 실망의 운동이 모든 단계에 걸쳐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반복은 삶에서는 직접 알아차리기 힘든 리듬과 정조를 소설에 부여한다. 반복을 통해 화자가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나 강렬했던 배움의 단계들이 결국 모두 일시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인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128).

하지만 글쓰기가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상처일 수도 있다. 어린 화자가 정말로 매혹과 실망의 운동을 경험했던 것인가, 아니면 작가의 글쓰기가 화자의 삶 속에 반복을 기입한 것인가? (혹은 소설이 정말로 배움의 단계들을 설계한 것인가, 아니면 비평이 소설에 임의로 부여한 것인가?) 더군다나 화자가 자신의 ‘불장난 글짓기’에 번복(“이건 사실이 아니다”, 124)을 덧붙이고 있는 마당에, 이 소설의 글쓰기 자체를 믿을 수 있을까? 글쓰기의 단계에서 화자는 대상에의 집착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 것 같다(이전 단계의 주관적 고양이 글쓰기를 통해 지속성을 얻는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그해가 끝날 무렵에는 그런 것―방문에 귀를 갖다대는 것―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덧붙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타인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127)

앞선 단계에서의 실망을 통해 화자는 이제 비밀을 대상에서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화자는 내면에, ‘자기만의 방’에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역시 허상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우리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관적으로 물러날 수 있단 말인가? 한 작가의 방에도 얼마나 많은 작가의 언어가 있고,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와 사물이 있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고지서와 걱정거리, 작가를 부추기는 과제 들이 있는지? 단지 그런 것들의 연결을 더 견고하게 구성하여 마치 정신적인 방처럼 만듦으로써, 마치 스스로 운동하는 체계가 있는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우리는 주의를 뺏는 대상들과의 관계(이를테면 양우정에 대한 집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화자의 글쓰기 역시 외부에서 우연처럼 주어진 어떤 기회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교를 매개하여 시에서 개최하는 불조심 글짓기 대회 때문에 화자는 글을 쓰게 된다. 원래 화자는 대회에 관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자신의 경험과 글쓰기가 운명적으로 결속되는 것처럼 느낀다. “문득, 불장난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일, 거부할 수 없는 본분처럼 느껴졌고, 심지어는 조급증이 날 지경이었다”(121). 그렇다고 화자가 사실대로 쓴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단계에서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거짓의 역량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대상들에 기생하면서, 삶을 포착하는 동시에 파악 불가능하게 만든다.

12) 다섯 개의 ‘불장난’에 어머니와 함께했던 ‘촛불’의 기억 그리고 “불장난”이라는 제목의 소설 자체를 추가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는 소설에서 그려지는 배움 이야기의 배경이자 메타적 조건이지만, 다른 단계들을 초월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계 5. 되찾기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얻는 거짓의 역량, 그리고 글짓기를 통해 상을 받고 선생들의 관심을 받게 된 데서 오는 약간의 자신감이 마지막 단계에서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인 ‘되찾기’는 어떤 의미에서 과감한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진 적도 없고 잃어버린 적도 없는 무언가를 되찾아야 한다. 배움의 비밀은, 우리가 사실은 허상을 좇는 것일 뿐이라는 진실의 기나긴 지연 그 자체에 있다. 단계들은 어떤 원초적 전조(상실된 대상)의 재현이 아니고 그 실체에 대한 뒤늦은 탐구도 아니다. 매혹과 실망의 운동 그 자체가 배움의 내용이다. 배우는 자는 자기가 좇는 것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는다. 하지만 작가가 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배우는 자는 없는 것을 연출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방하는 자가 아니라 훔치는 자가 된다.

두번째 단계에서 화자는 양우정의 당당함과 매력이 ‘타고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화자는 자신만의 연출 방식을 찾아낸다.

곧 나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특별히 고민을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수줍어서 입을 뗄 수 없다는 식으로 웃어 보였고, 우연찮게 아는 게 나오면 용기를 내는 척하며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선생은 내가 정답을 말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22)

화자는 매혹된 자에서 유혹하는 자로 변한다. 유혹은 없는 것을 연출하는 기술이다. 즉 유혹에는 필연적으로 거짓된 면이 있다. 모든 인간적인 것 중에서 그 실상을 낱낱이 알고 나서도 여전히 매혹될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도 넘기 쉽지 않은 마지막 문턱이 있다. 선생은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수상한 글을 읽어보라고 화자에게 종용한다. 그 순간 모든 우쭐거림이 사라지고 트라우마적인 무력감이 다시 엄습한다. 숙직실에서와 같은 명령어의 반복. “좀더 크게 읽으렴”(128).

왜 화자는 낭독을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하는가? 이 마지막 시험대에, 마치 연극의 커튼콜처럼, 화자를 괴롭게 했던 모든 불안과 패배감, 수치심과 굴욕감이 한꺼번에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형벌을 받는다고 느낀다. “무엇에 대한 형벌이란 말인가? [……] 한때의 굴욕을 손쉬운 안도와 거짓으로 무마하고자 했던 시도에 대한 형벌”(129). 그렇다. 되찾기 위해서는 에누리 받았던 모든 고통, 주관적 보상과 거짓의 몫을 모두 갚아야만 한다. 이것이 배움의 마지막 단계이고, 예술을 넘어서는, 예술의 진실한 측면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거짓과 허상, 기만, 배덕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결산에는 어떤 오류도 에누리도 없다. “하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같은 쪽).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갑작스럽게 다시 자신감이, 약간 황당할 정도의 오만함이, 이전 단계에서 잘 함양되었던 광기가 찾아와 화자에게 마지막 난관을 넘어설 힘을 준다. 화자는 거짓으로 작성한―대회의 취지에 맞게 교훈적인―글에 즉흥적으로 더 지저분하고 구체적인 (진실에 더 가까운) 내용을 추가하여 낭독한다. 이 낭독은 글쓰기의 허위를 벌충하여 글쓰기 속에서, 그러나 글쓰기 이전에는 없었던 삶의 진실을 되찾게 한다. 그 순간 비로소 화자는, 이전 단계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배움의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130).

지금까지의 모든 기대, 매혹, 보상이 허상이었듯이 이 낭독의 도취 역시 허상일지 모른다. 아마도 허상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착각과 기만,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 될 것이다”(130-31).

눈이 가려져 있던 사람이 세계의 뒤편에서 눈을 뜨고, 삶으로 도약하는 이러한 되찾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압도하게 되는 그 배움의 여정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과정에서 허상은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문학도 허상이지만 그런 허상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아무 진실에도 도달할 수 없다. 좋은 예술작품만큼 좋은 선생은 없다. 가르치는 자는 자기도 모르는 것(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르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불투명하게 해야 한다. 예술작품만큼 불투명한 것은 없고, 그것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그만큼 우리는 예술로부터 한없이 중요한 것을, 우리가 매달리는 삶의 그 문제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도 배움의 끝은 아니다. 오히려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 배움들을 배우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거짓되고, 고통스러웠던 배움의 단계들은 이 단계에서 복기될 때 비로소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규정된 의미들은 사라지고 무의미했던 것들이 의미를 얻는다. 이것이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효용”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처럼 비평을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로 정의한다면, 이 마지막 단계에서 비평과 창작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활동이 된다(그러니까 ‘마지막’은 정말로 마지막이 되게 방치되지 않는다). 비판은 한편으로는 대상의 결여를 향하고 한편으로는 주체의 결여를 향한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서 진리가 허상임을 폭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더 어렵고 중요한 문제는 허상을 딛고 진실에 도달하는 것, 사실은 가진 적도 잃어버린 적도 없는 삶을 되찾는 데 있다. 감히 속아 넘어가려고 하라! 없는 것에 몸을 내어줄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배움의 슬로건이다.13)

13) 나는 다음의 유명한 구절을 염두하고 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편역, 도서출판 길, 2020, 28쪽.

이게 나의 손이네?

―시인 김도와의 대화

개인의 정신병과 사회의 정신병//시인의 위치//비트 세대와 우리 세대//소외를 해결하는 방법//김도의 시에 관하여//종말이라는 테마//사이적 존재

희우
제가 지금까지 작가들이랑 인터뷰를 몇 번 해보긴 했는데 대체로 인터뷰 대화하는 게 재미가 없었어요. 지면이 주어져서 인터뷰 같은 걸 하면 비평가가 일방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잖아요. 근데 작품이 인상적인 경우에도 저는 여러 번 작품을 보면서 내가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는 방식으로 계속 읽는 걸 좋아하지, 작가한테 직접 뭘 물어보고자 하는 동기는 안 생기거든요. 비평가가 질문하고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했을 때 작가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고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질문을 뽑아서, 대답을 준비해서 듣고 이런 것보다는 그냥 친구끼리 얘기하듯이……

김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희우
예. 제가 도 씨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만난 지도 좀 됐고 서로 글을 나눈 지도 좀 됐으니 친구끼리 얘기하듯이 한다고 해서 어색할 건 없겠죠. 사실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작가여도, 그 사람이 이미 작가와의 대화라든지 그런 행사 같은 것들을 많이 하고 있으면 굳이 제가 할 필요는 없죠. 그런데 도 씨는 그런 행사를 할 계획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둘 다 인기 있는 작가들은 아니니 공개해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읽겠죠. 이렇게 된 김에 하고 싶은 말 아무것이나 다 해보겠습니다.

김도
네.

희우
편하게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일단 시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도 씨의 인생사를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사실 띄엄띄엄 알고 있는 거고 저랑 만났을 때는 이미 좀……

김도
그런 일을 지나온 상태였죠.

희우
그렇죠. 그래서 구체적으로 모르니까, 저도 이번 기회에 좀 듣고 싶습니다.

개인의 정신병과 사회의 정신병

김도
알겠습니다. 저한테 가장 큰 테마는 ‘병’인데요.

희우
시집에서요?

김도
아니요. 제 삶에서요. 어느 시점까지 제 인생 목표는 ‘좋은 기분으로 살고 싶다’였던 것 같아요. 좀 더 거대한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고요. 어렸을 적부터 기분이 너무 안 좋았어요.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엄마랑 상담할 때 얘는 앞으로 커서 사회생활을 못할 거라고 얘기를 했었고요. 여러 이유가 있었겠죠. 초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에는 어떤 연병장을 연상케 하는 구령대가 있고 그런 상징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교육 시스템 같은 게 있고 분위기가 있잖아요. 저는 (학교와) 너무 안 맞았는데 그 안 맞음을 그냥 눈 감고 지나가는 걸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마찰이 빚어지면서 점점 더 병세가 안 좋아졌던 것 같아요. 우울증이 되게 심했었고요. 그러다가 느낌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10대 중후반 무렵부터는 조증 증세도 조금씩 있었던 것 같아요.

희우
시에도 정신병에 관련한 내용이 있잖아요. 그런 경험에서 기인한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김도
예. 어렸을 적에는 우울증이 전반적으로 심했고 대학교에서도 우울증은 계속 심했어요. 그러다가 이상하게 군대를 갔을 때는 좀 멀쩡해지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힘들어하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뭐랄까 그냥 정신없는 규율에 치이다 보니까 오히려 좀 명료해지는 면이 있었고요. 제대하고 다시 우울증이 심하다가, 그게 너무 심해서 살길을 찾다가 찾은 게 대마초였거든요. 근데 대마초 복용을 하기 전에 약간 조증 조짐이 있었고, 그러다가 조증이 터졌었고, 조증이 터진 다음 좀 시간이 지나면서 터졌던 게 조현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얘기 안 했지만 찾아보니까 의학적으로 조현병은 해당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에게서 발병하고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는 식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돼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제가 전문적으로 논문을 찾아본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의견이 그런 것 같은데, 한편으론 (병의)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한테는 이게 정말 중요한 테마였어요. 왜냐면 이상하게도 조현병에 걸렸을 때 오히려 구원 같은 것을 봤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상태라면 살 수 있겠다 싶은.
그게 어떤 기분이냐면, 나를 의식하는 정도가 거의 사라진 상태고 세상 모든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거거든요. 이를테면 이 포도송이에 가지가 이렇게 3개로 갈라져서 나오는 걸 보면 그 3이라는 숫자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면서, 이 형태도 뭔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데요. 모든 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에고가 희미해져서 그게 가능해지는 거고, 나라고 하는 것을 희미하게 느낄수록 그 빈자리에 다른 감각 대상들이 차오르는 거죠. 그게 정신병적으로 (말하자면) 무적의 상태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설령 내가 죽어도 다른 뭔가가 될 테니까요. 저는 워낙 우울증 기간이 길었고 사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이런 상태(희미한 에고)로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폐쇄 병동에 강제 입원을 당했지요. 그때 온갖 기행들도 많이 했었거든요. 환각, 환시, 환청이 심했으니까요. 망상이랑요. 그래서 (병원에) 갇히고 다시 우울증의 구렁텅이로 던져졌어요. 그 의식 상태로 돌아가거나 혹은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는 미션을 갖고 퇴원했던 것 같아요.

희우
언제 진단을 받으신 거예요?

김도
조증은 한 2016년도부터 좀 있다가 완전 심한 건 2017년도에 크게 터졌고, 조현병은 그때(조증이 심할 때) 같이 터졌어요. 호르몬적으로는 조증 때문에 도파민 분비량이 엄청 늘어나잖아요. 그게 조현병과도 연결이 되는 화학적 요인이에요.
병원에서는 약물로 정신병을 조절하려고 하고(물론 조절이 어느 정도 되지만), 병의 원인도 호르몬으로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우울증은 도파민과 세로토닌 양이 적기 때문에 발병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늘리는 약을 투여한다, 이런 식으로요. 근데 사실 호르몬이 적다는 건 원인이 아니라 결과잖아요. 그러니까 말만 바꾼 거지 같은 지점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적은 상태가 우울증인 거니까요. 이것을 저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정신병이란) 뭘까, 이게 제 탐구 주제였어요. 스피노자의 말처럼 정확하게 이해된 고통은 고통이기를 멈추니까요.
그래서 제 느낌으로는, 미쳤을 때의 경험이나 명상 수행을 통해서 얻는 경험에 의하면, 나라고 할 만한 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나 듣고 있는 이 감각인 반면, 우울증은 내가 지금 이런 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데서 되게 막 멋있는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 같고 마음의 눈은 그런 걸 보고 있는 상태인 거죠. 그렇다 보니까, 뇌는 좀 기계적이다 보니까, 지금 여기에서 쓸 만한 에너지는 덜어내고 그걸(이상적인 모습을) 보는데 에너지를 쓰게 되면서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요. 조증은 거기까지 갈 힘을 낼 수밖에 없게끔 도파민이 증가하게 되는 것 같고요.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조현병은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인 것 같아요. 내가 감각하는 모든 대상뿐만 아니라 감각할 수 없는 추상에서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면, 그러니까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어떤 포기 상태가 되면, 그 반작용으로 양성 증상이 나오는 것 같거든요.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상태가 되는 거는 또 생각해보면 당연하잖아요.
근데 조현병의 양성 증상이 환각과 환청을 동반하는 사이키델릭적인 상태라면 음성 증상도 있거든요. 그 음성 증상이 제가 방금 말한 전적인 무기력 같은 거예요.

희우
그러면 그 상태에서 입원을 하셨어요?

김도
예. 응급실로 가서 링거를 꼽는데 거기에 뭐가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 꼽을 이유가 없잖아요. 저는 기력을 전해질로 보충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바늘 뽑고 도망치다가 붙잡혀서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었죠.
그리고 이제 어느 순간부터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제가 있는데, 그 주사에 들어가는 성분이 기억을 날리더라고요. 벤조디아제핀인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한 주먹씩 항정신병제를 먹으면서 신적인 상태에서 인간으로 끌어내려진 거예요. 그러고 나서 되게 무기력했고요. 퇴원하고 나서도 한 1~2년 동안 거의 누워만 있었어요.

희우
신적인 상태라는 건 어떤 건가요?

김도
그 신적인 상태에 단계적으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요가나 불교의 수행, 기독교에도 어떤 수행법이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카발라, 유대교 밀교처럼 그런 것들이 있듯이…… 그런 수행법들의 지향이 에고를 흐릿하게 하는 것 같거든요. 이를테면 구교의 고해 같은 걸 생각해보면, 어떤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항상 지켜봐야 하는 의식이 일상 속에 있어야 하고, 죄라는 것이 발생한 것 같으면 그것을 기억해야 하고, 그리고 신부님께 가서 고해를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해결하는 어떠한 과제로서 보속 기도를 주고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어떤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지켜보는 어떤 시선이 내면에 자리하게 되는 거고, 그럼 말하자면 내 뒤편에 있는 나의 시선이 또 생기는 거잖아요.

희우
초자아라고 하는 거죠.

김도
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죄를 안 저지르는 일상으로 끊임없이 가면서 깨끗해지다 보면, 나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지고, 그리고 모든 게 신께서 만들어 주셨고 주어지는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붙이거나 거부하려고 밀어내거나 하는 액션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게 되겠죠. 그것을 불교에서는 명상으로 해내는 거고. 모든 영적인 종교들이 하는 일이 그건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그 기능을 좀 많이 잃어버린 것 같고요.

희우
종교들이요?

김도
네. 종교도 그렇고 사람들도요.

희우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렇게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에고가 왜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는가?
어쩌면 도 씨가, 에고가 너무 강한 사람이어서 그런 수행이 너무 중요한 거죠.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이런 얘기도 해보면 좋겠어요. 정신병은 내 기질과 더불어 시대적인 분위기, 속해 있는 집단이나 사회의 환경, 이런 것들에서 영향을 계속 받잖아요. 사실 영향을 받는다는 말도 정확한지 모르겠어요. 어디가 외부이고 내면인지 경계도 모호한 거니까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같은 대학을 나왔잖아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가 2021년에 졸업을 했으니까 사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도 그 학교 다닐 때 엄청 우울할 때가 있었어요. 진단도 받았고요. 정신증이라기보다는 좀 심한 신경증이지만. 근데 그때 저만 그랬던 게 아니고, 아시겠지만 학교 다니면서 만났던 사람 중에 정신과 상담받고 약 먹고 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았어요. 안 그런 애들보다 그런 애들이 훨씬 더 많았고요. 자살 소식도 종종 들려왔고요. 저도 학교나 군대에서 우울할 때가 많았고,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때만큼 괴로웠던 적은 없었어요. 어쨌든 그때 심리적 고통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까 도 씨가 얘기했던 종교적 수행 같은 것들은 문제를 내 안에서 찾는 거잖아요. 그런 방향에 대해 저는 불신과 회의가 있는 것 같아요.

김도
알겠습니다. 이게 왜 저한테 중요했냐 생각해보면 병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치료법으로 느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희우
어떤 게요?

김도
에고를 흐리는 거요. 말씀드렸듯이 한동안 제 인생 목표는 좋은 기분이었거든요. 그냥 좋은 기분으로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마초도 그렇게 좋아했던 거고요. 그게 사실 의학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돼요. 화학적으로도요. 근데 그걸 떠나서 에고를 흐리는 게 좋은 기분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조현병 양성 증상 속에서 느꼈던 거죠. 그걸 단계적으로 해내는 게 종교적 수행이고요. 저는 이거를 사이키델릭적인 의식 상태라고 보는데요. 그러니까 어떤 선이해나 의미가 없다 보니까 그것이 뭔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구별하는 마음이나 판단하는 마음 같은 게 되게 희박해진 거예요.
근데 병적인 상태의 문제가 뭐냐면, 뭔가가 좋다 나쁘다, 위험하다 안전하다 같은 판단이 이루어지는 마음은 어느 정도 의식의 거름망 같은 게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 거름망이 없어지고 감각이 많이 예민해지다 보니까, 어떤 감각들은 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고, 위협으로 느낄 경우엔 마음이 그걸 (물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시키더라고요. 그게 환시, 환청이고 원효대사의 해골물 같은 건데요. 해골물도 마음이 편할 때는 맛이 좋은 물이었지만 마음이 불편해지고 나면 토하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래서 이 에고를 흐리는 게 왜 정신병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냐면요. 고통은 내가 나라고 여기는 면에 붙는 건데 그런 게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면(고통이 사라지죠). 말씀하신 대로, 어떤 면에서는 문제를 나에게서 찾는 게 사회에 대해서 무책임해 보일 수 있어도, 그거는 그 사람이 뭔가 액션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 같고요. 일단 괴로운 상태를 멈추려면 이걸 분리시킬 수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희우
내면의 문제랑 외부의 문제를요?

김도
아니요. 나한테 오는 이 감각을 나로부터요. 그러니까 어떤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나쁜 기억도 이제 막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 같은 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걸 보는 거예요. 내 일이 아닌 것처럼요.

희우
그런 선택들이 당위적이고 사회적인 것 이전에 필사적인 것이었다는 얘기죠.

김도
예 맞습니다. 약도 먹고 싶지 않고 어쨌든 나는 좀 살아야겠는데, 죽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희우
네. 그런 선택들이 내가 가진 사상이나 스타일을 규정하는 것 같아요. 벼랑 끝에 몰렸다고 생각할 때 하는 필사적인 선택 같은 거요.
그런데 제가 아까 궁금했던 것은 사회적인 책임 같은 게 아니라, 병의 발발이나, 심해지거나 완화되거나 하는 경과 자체가 얼마나 사회적인 일인가예요. 한편으로는 병을 병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도 의학이라든지 법이라든지 여론,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잖아요. 국가의 관리와도 관련이 있고요.

김도
예. 그게 그렇더라고요. 제가 예비군을 가기 싫어서 (정신병을 이유로) 면제를 해버렸는데, 그러니까 운전면허가 같이 멈추더라고요. 아마 데이터상에 뭐가 있겠죠. 저도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아서.

희우
네. 그렇다고 해서 ‘미쳤다’는 게 그냥 법이나 담론이나 의학 지식이나 여론에 비추어서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진짜 미친’ 면이 또 있잖아요. 그러니까 광기 자체가 담론적 구성물은 아닌 거죠. 간단히 말해서 광기에는 실재성이 있는 거죠.

김도
그렇죠.

희우
그런데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느 집단에 있고 어떤 사회 속에 살고 있고 어느 시대를 사느냐에 따라서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든지 줄어든다든지 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관계가 저는 궁금하거든요. 저를 비롯해 그런 일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 들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신기했어요. 저는 지금은(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조현병이나 명상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과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게 여러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도
어떤 거죠?

희우
예를 들면 이런 거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좋아지는 게 있어요. 저는 최근에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꼈어요.

김도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희우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몇 년 전에 우울해서 누워 있고, 아무것도 못 하고 그럴 때에 비하면 굉장히 좋아졌다고 느껴요. 그 시기를 거치면서 두려움이나 불안 같은 것들이 좀 사라진 것 같아요. 이 느낌은 제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규칙들, 내가 사는 세계의 규범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받아들이는 것하고 관련이 있는 듯해요. 그러면서 내 존재의 쓸모나 당위를 덜 자문하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스스로 덜 괴롭히게 된 거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막 불법을 저질러야 된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없는 거죠. 굳이 애써서 불법을 저지를 필요는 없잖아요. 필요하다면 저지르겠지만요. 도 씨가 대마와 관련해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런 문제에 있어서 저는 도덕적인 판단을 할 이유나 자격이 저한테 전혀 없다고 느껴요. 하지만 어쨌든 저는 그게(대마가) 필요한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죠. 그래서 도 씨가 대마로 무슨 짓을 해도 저한테는 화가 나거나 특별한 인상을 주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저한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요.
도 씨의 개인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떤 실존적인 문제를 겪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과정에서 대마를 했거나 액티비스트로 활동을 했거나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시인으로서 혹은 활동가로서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일관성에 비추어서 이해될 수 있어요. 그러나 어쨌든 법이나 도덕 같은 거에 비춰서는 용인될 수 없는 거지요. 특히 지금 한국에서는.

시인의 위치

김도
말씀 들으면서 생각이 좀 났는데요. 아까 말씀하신 것,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자의적이다, 자의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비슷한 것처럼 굴고 있지만 사실 생각하는 건 각자 아주 다르고, 그리고 진짜 객관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이런 것들 사이에는 없다는 느낌 같은 거잖아요. 그래서 괜찮아지는 마음이 어떤 건지 좀 알 것 같아요. 좀 풀려나는 거지요, 묶여 있었는데. 제가 액티비스트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시를 쓸 때 그런 상태인 것 같은데요. 많은 사람한테 대마초가 아주 나쁜 걸로 프레이밍 돼 있고, 마약이라는 단어 안에 묶여 있고, 좀 오해되고 있는데요. 그걸 딱히 수정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고, 지금은 반드시 수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여하간 제가 액티비스트로 활동했던 이유 중엔 제가 보기에 좀 낡은 도덕관, 오해된 도덕, 잘못 만들어진 법 그리고 그것에 얽힌 역사 같은 것을 따를 이유는 저한테 하나도 없었던 거고 그걸 따르는 마음보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따르지 않아, 라고 이야기했을 때 얻게 되는 어떤 심리적인 안정감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라는 장르가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러니까 언제나 질서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어떤 틀 같은 것이 있어서 무언가 움직이더라도 그 틀 안에서 운동이 일어나게끔 해야 하는 건데, 그것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면……
이게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인데요. 모든 게 자의적으로 비칠 수는 있어도 누군가가 신념을 갖고 행동할 때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감각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희우
예. 거기서 뭔가 전도되는 것이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시의 위치에 관해서라면 할 얘기가 너무 많을 텐데요. 플라톤의 공화국, 『국가』에 보면 ‘시인 추방론’이 있잖아요. 거기서도 공동체의 어떤 기하학적인 질서를 위해서 시인이 추방돼야 하잖아요. 국가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시인이 처음부터 골칫거리죠. 플라톤이 자기 철학을 시나 연극과 분리하려고 애를 쓰는 한편으로(완전히 분리하지 못하지만), 당대 수학인 기하학과 정치 그리고 철학 이 세 가지는 그렇게 분리가 안 되어 있단 말이에요. 시는 그 지식-정치-철학의 배치에서 타자가 되는 거죠.
근데 이제 20세기쯤 되면, (특히 전쟁 이후에) 국가나 철학적 체계가 다 의심에 붙여지기 시작하고, 특히 하이데거를 보면 그 사람이 시인들을 많이 호명하잖아요. 하이데거 생각에는 (플라톤과) 반대로 시만이 존재의 진리를 보존하고 있고, 수학이나 형이상학이나 이런 형식들은 오히려 존재를 은폐하는 거죠. 그러니까 체계와 권력의 타자로서 시가 있다는 생각은 엄청나게 오래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매도되거나 추앙되었던 것이죠. 저는 한편으로는 이런 구도가 우리한테 안 맞는 면이 있다고 보지만, 한편으로는 적절한 보호 조치 없이 기각된 사고방식이라고도 생각하거든요.

김도
그다음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시인 추방론이 재밌는 게, 그 추방된 자리가 사실은 질서 내에 시인이 위치하는 자리인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 추방된 자리가, 오히려 시인에게 허락된 자리인 것 같더라고요. 아예 추방되었으면 사실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희우
예. 그리고 그 구도에서는, 도덕이나 법과 다른, 시인의 윤리 같은 거를 말하기가 아주 쉽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가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진척이 돼야 할 텐데요. 어쨌든 그런 구도에서 시인의 일탈이 용인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 나름대로의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지를 얘기해 봐야 해요. 안 그러면 그것도 결국 자의적인 게 되겠죠.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범법이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매도하고 비난하다가 나랑 친한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는 팔이 안으로 굽는 식으로 인간적으로 이해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안 되려면 어쨌든 이것도 나름대로 논리를 갖춰야 할 텐데요. 아까 얘기했던 플라톤적/반플라톤적인 구도에 비추어보면, 시인의 일탈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권력하고 가능한 한 상관없는 존재로 머무르는 한에서 그런 것이겠죠. 또 권력이 없는 존재를 도덕에 비추어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보수적인 행위잖아요.

김도
아 네.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어울리는 레퍼런스가 떠올랐는데 『리어왕』이에요. 그거 읽어보면 옆에서 항상 바른말을 하는 존재가 광대잖아요. 그 광대도 궁정에서 허락된 자리잖아요. 얘는 우리 밖에 있는 애라서, 왕 같이 위대한 존재에게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어떤 자리를 내어준 거잖아요.

희우
그렇죠. 그런데 누가 그런 광대의 역할을 정당하게 할 수 있을까요? 권력형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가령 권력형 성범죄는 시인으로서의 정당성을 없앤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우리가 권력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시인의 일탈이 용인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했을 때도 문제가 쉽지 않아요. 누가 권력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하는 기준도 굉장히 모호한 거잖아요. 그리고 비판적으로, 권력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정리가 필요한 거죠. 실천적인 지침이 필요하고요.
사실 이런 부분에서 진짜 필요한 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은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고, 철학자는 언어를 정화하는 사람이죠. 저도 제가 왜 이런 욕망을 갖게 됐는지 철저하게 규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삶 속에서 한 선택들을 통해, 내가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들을 통해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시인이 그냥 권력의 타자라고 말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했던 광대처럼 그런 일탈에 있어서 허용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이제 너무 순진해 보이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사실 예술가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행태나 정당화하는 일들을 많이 봤잖아요. 그런 것들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시인의 일탈을 옹호하는 논리들을 사용하는 게 어려워졌다고 보거든요. 도 씨가 시집을 내고 나서 뭔가 불법적인 일을 했다는 이유로 약간의 소란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도 그런 분위기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법과 비스듬히 있거나 대립하는 시의 윤리, 시인의 윤리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법과 제도만 남게 되고 법과 제도가 유일한 기준이자 해결책이 돼버리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권력은 지극히 상대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객관적인 무언가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김도
이게 바로 그 지점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희우 씨가 종종 말씀하신 어떤 사명감, 철학의 위치, 그리고 한국에서 철학의 필요성 같은 것을 절감할 때 느끼는, 그 순간 발생하는 마음이라는 게, 상황이 이러저러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건 사실 믿음인 것 같거든요. 근데 시인도 그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요?

희우
무엇으로부터요?

김도
본인이 믿는 것을 하는 것이요.

희우
아 그렇죠.

김도
리어왕의 광대든 아니면 어떤 추방된 시인의 자리도 어쨌든 그 사람이 그러는 건, 그걸 해야만 하는 어떤 필요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게 되는 거잖아요. 시를 쓰는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게 그것 같아요. 지금 이것이 나쁘게 보일 수 있다거나, 혹은 명예롭지 못하다거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존재에게 명예롭고 좋은 기분을 주고 반복해야 마땅한 것. 믿음이 남들과는 다른 데 있는 것이지요. 이게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시를 쓰는 사람들, 어쨌든 끊임없이 쓰는 사람들, 반복하는 사람들이 본인의 말을 얼마나 믿고 있느냐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본인이 하려는 말과 실제 행위와의 관계 말이에요. 고은처럼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시인으로서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 본인은 어떤 위대한 것을 향해 시를 썼을 텐데, 실제로 저지른 행위를 비추어보았을 때 그분들도 부끄러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저는 대마초 같은 경우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거죠. 그럴 일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자연적인 혜택 같은 거라고 믿기 때문에 (액티비스트 활동을) 한 거니까요.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는 자의적인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믿음이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가소롭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럴수록 이게 중요하더라고요.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이 일어났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나든 어떻든 간에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의 말을 믿는 것이요. 그리고 믿을 수 있게끔 계속 스스로를 통제하고요.
또 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쓴 사람도 사람들에게 정리될 수 있는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좀 없어요. 그러니까 시인에게 없다기보다, 시를 쓰는 일 자체에요. 근데 그게 (그에게는) 가장 맞는 방식이고 가장 시에 가까운 방식인 거겠죠. 시가 쓰려고 하는 어떤 대상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리고 저는 일상이나 혹은 일상에서 제가 느꼈던 감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만, 사실은 이것이 지시하고 있는 더 위대한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을 쓰고 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시 쓰기가) 가능한데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말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일 거라고요. 그래서 결국에는 어떤 실어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희우
도 씨 시에서도 그런 게 느껴져요. 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시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죠. 그 태도가 결국 시와 철학의 차이일 것 같기도 하고요. 왜냐면 저는 결국은 아무것도 밑바닥에 신비롭게 남겨두고 싶지 않거든요.
나왔던 얘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시인이 권력과 무관하게 있으려 하는 한에서 그의 일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그것은 시가 혹은 시인이 모든 권위나 권력과 무관해야 한다는 것보다는―아무 권력도 가지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니까―시가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인 자신조차도 대표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이것은 시가 인간적인 허위를 비워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궁정 속 광대의 은유로 말하자면 광대는 민중을 대표해서, 어떤 집단을 대표해서, 어떤 지적 체계를 대표해서 왕에게 간언하는 것처럼 자기 말의 정당성을 확보해서는 안 되죠. 그렇게 하면 그는 광대가 아니라 정치가이거나 학자이거나 시민단체 대표이거나 뭔가 다른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시는 확실히 철학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죠. 뭔가를 잘 대표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기가 더 어렵잖아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고, 헤아릴 수 없는 고독으로 들어가는 일이고요. 저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작업을 향해 가는 시인을 한두 명 본 적 있는데 그것이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경력이 쌓여 얼마간 권위와 명성을 가진 작가들이었고, 히스테리컬한 면도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보여주는 특이한 순수함과 단호함, 수수함과 냉정함이 있어요. 나는 그런 면모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비트 세대와 우리 세대

김도
옛날에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피카르트 책(『침묵의 세계』, 『인간과 말』)도 마음에 안 들어했었어요. 너무 기독교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당시에는 인간 의식의 이러한(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고요. 근데 제가 좀 살아야겠고,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하고 난 다음 느끼는 바는 ‘이유가 있다’라는 거예요. 약간 말도 안 돼 보이는 것도요. 심지어 저는 오르페우스교에서 콩 먹지 말라는 것도 이유가 있었을 것 같거든요. 어떤 영양분이나 아니면 그 화학적 성분이나 그런 걸 떠나서, 심지어는 그냥 문학적인 이유라도. 피라미드도 토목 사업이 아니라 사실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그런 식으로 죽은 왕과 금은보화를 넣으면 어떤 식으로든 혜택이 돌아오는 것이다. 십계명 같은 것도요. 그 내용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희우
그러면 도 씨의 입장에서 충돌이 생기지 않을까요?

김도
뭐랑 뭐가요?

희우
어떤 주체적인 믿음에 따라서 내가 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과,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법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이유를 따지지 않고 존중하는 게요.

김도
존중이 이루어지는 법들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법의 끝에 있달까요? 사실 이미 논리적으로 따질 가능성 자체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것들이잖아요. 콩을 먹지 말라는 건 사실 따질 만한 게 아니잖아요. 밤에 휘파람 불지 말아라 뱀 나온다 이런 거요.
물론 제가 지금 그런 룰을 지킨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이 다 무의미하다고 볼 수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식으로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을 때 그게 삶에 주는 혜택 같은 게 있더라고요.

희우
도 씨한테 일종의 종교적인 열정이나 끌림, 그런 게 있는 거 아닐까요?

김도
네. 그런 게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슬럼프라 책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과거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가들에게로 눈길이 가더라고요. 특히 시인으로는 루미나 휘트먼. 그리고 가볍게 넘어갔던 것 같아서 다시 읽은, 한국에 번역된 긴즈버그 두 권(『하울』이랑 『리얼리티 샌드위치』요).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마음산책에서 나왔던 메리 올리버의 『갈매기』, 『천 개의 아침』.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과 이러한 규칙들은 좀 일맥상통하거든요. 그리고 예이츠도 되게 흥미롭더라고요.

희우
비트 세대라고 하잖아요? 긴즈버그가 속한 세대는. 그때 히피들도 있었고, 또 영성이나 명상,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도 많았고 마약도 많이 하고 그랬잖아요.

김도
그렇죠.

희우
제가 보기에는, 도 씨가 아주 고전적인 시인으로 보이는 한편으로, 비트 세대의 정신과 감수성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탑재하고 있는 사람처럼도 보이는데요. 비평적으로는 그런 경향이 지금 한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혹은 왜 생겨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도 씨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거든요.

김도
저는 자연스러운 현상 같아요. 이런 진단은 좀 야매긴 해요. 제가 의사도 아니고 정신분석학자도 아니니까요. 정신병을 낳는 가장 주된 마음 상태가 에고를 과잉 의식하는 상태인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는 거죠. 심지어 인스타그램이든 페이스북 같은 것들 때문에 더 많이 의식을 하게 됐잖아요.
근데 그런 것들을 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계속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문학이 이제 비트 세대의 문학인 거죠. 한국은 당시에 그런 문화를 겪을 수도 없었고, 그런 문학이 올 기회도 없었던 것이죠. 저는 이제는 그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숨구멍 같은 거죠.

희우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압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특히 우리가 속하는 이 세대를 통계적으로 봤을 때, 행복도나 자살률이나 출산율이나 아니면 우울증 정도라든지 이런 통계들을 보면 전쟁 상태에 준하잖아요. 출산율이나 자살률을 인구의 문제로 바라보는 건 국가의 관점이지만, 여기에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죠. 시대의 고통 같은 걸 얘기하면 무슨 거창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 그런 염려를 진지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엄청난 강박과 회피와 억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 씨는 비트 세대 식의 문화가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어떤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증상이 아닐까요? 우리가 마약을 필요로 한다든지 내적인 명상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종의 증상 같은 것 아닐까요?

김도
그렇죠. 전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 나타나야 할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아이를 안 낳는다든지 자살률 같은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더는 할 수 없겠다는 태도가 세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잖아요. 지속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는 거잖아요. 끊임없이 중단되는 상태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거잖아요. 저 또한 거기로 빨려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미쳤었고 괴로웠었던 것 같거든요.

희우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거군요.

김도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또 그게 에고의 문제인 것인데, 저는 (그 문제가) 스마트폰 이후로 두드러지는 것 같거든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요.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는 거요. 말하자면 몸은 여기에 있는데, 의식의 일부분 혹은 대부분의 의식을 보이지 않는, 이렇게 까맣게 둔 (스마트폰) 화면 어딘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인스타그램 피드라든지, 카카오톡이라든지, 아직 울리지도 않은 진동이지만 누군가한테 올 목소리라든지)에 두고 있는 거잖아요. 이거는 사실 괴로운 상태잖아요. 이 상태를 즐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저는 그게 좀 괴로운 상태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아까 말했던 긴즈버그 같은 경우에는, 『하울』을 읽어보면 그러한 시대적인 고통으로 출발해서 아수라장을 겪어가며 살아 돌아오는 이야기 같은 것이고 거기서 얻은 어떤 가르침과 감동이 있어요. 또 휘트먼은 시의 태도를 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을 희미하게 하면서 고통스러운 문제를 괜찮게 하는 구석이 있거든요. 실용적인 차원에서요.
뭐랄까, 그래야만 한다는 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여기가 이러니까 저기가 이래야 한다, 라는 균형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우
20세기 후반 미국의 비트 세대나 힙스터들이나 이런 사람들도 대체로 백인 중산층 젊은이들이지 않았나요?

김도
그렇죠.

희우
그들에게 뭔가 어떤 심한 공허 같은 데 있었던 거 같아요. 지금 한국에는 다른 정치적 문제도 추가적으로 있고요.

김도
좀 리얼한 걸 느끼고 싶은 것 같아요.

희우
리얼한 걸 느끼고 싶은 충동이요?

김도
충동이라기보다, ‘삶을 살고 싶다’는 느낌인 것 같아요.

희우
그런 느낌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을 해요. 과거에 ‘실제에 대한 열정’ 이런 말이 문학 비평에서 회자되었을 때가 있어요. 원래 알랭 바디우가 『세기』라는 책에서 쓴 말인데요. 20세기가 실재에의 열정이라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사회학자이면서 비평도 하셨던 김홍중 선생님이 이제 그 실재에의 열정이 끝났고, 시인들도 그거를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비평가들이 아직 그 열정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 열정을 시에 투사했다고 한 적이 있어요. 2천년대에 ‘미래파’ 같은 거 있었다잖아요. 그게 그 투사의 구성물이라는 거예요.
근데 저는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런 비평 분석들이 좀 틀린 것 같아요. 혹은 틀린 건 아니더라도 일시적인 분석인 것 같아요. 왜냐면 실재에의 열정이 사라진 적도 없고, 절대 사라질 수도 없고, 이 세대의 사람들이 표현을 하건 안 하건 간에 엄청나게 강렬한 열망이 있는 것 같거든요. 진짜 작업, 진짜 사랑, 진짜 삶…… 진짜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그 열정에서 온 온갖 일탈과 좌절이 있는 거죠.

김도
그렇죠.

희우
그런데 우리가 왜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요?

김도
그거는 저한테는 좀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얼마나 의식이 여기에 있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느냐인 것 같아요.

희우
여기에 있느냐 저기에 있느냐가 무슨 뜻이에요?

김도
SNS처럼, 우리가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서비스들을 많이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그런 것들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서, 그냥 이런 거(테이블 위의 포도송이)를 보고 있는 시간이요.

희우
그냥 눈앞에 있는 것들요?

김도
네. 그리고 그냥 지금 지나가고 있는 저 비행기 소리 같은 거요. 그냥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요. 보통 평소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겠지만 사실 대부분 화면을 보고 있고, 화면을 보고 있지 않은 시간에도 화면을 보고 있는 경우가 되게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내가 뭘 보고 듣고 있는지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지금 보고 있는 걸 더 지금 보게 되고 듣고 있는 것도 지금 더 듣게 되는 의식 상태가 되더라고요. 이건 물론 수행적인 반복이 요구되는 거지만요. 근데 제가 말하는 작가들이나 책들이 지향하는 바가 이러한 것이고요. 제 말은 어쨌든 이게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거죠.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것에 관해서 계속 생각하는 동안 힘겨운 상태를 겪는다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기술적으로 유도하는 게 주변에 너무 많고 사실 그것 자체의 인력도 되게 강하기 때문에 끌려 들어가기가 너무 쉽다는 거죠.

희우
네 그렇죠…… 하지만 저기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가 더 실재적이고 인스타그램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김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인스타그램 이미지를 그냥 인스타그램 이미지로 본다면요. 그런데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SNS를 다 그만뒀지만 노트북으로 유튜브 들어가면 가끔 빨려 들어가거든요. 근데 저는 그때 제가 뭘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다 끄고 나서도 뭘 보고 있는지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하기가 어려워요.
거기에 이미지로 올리기 위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배경이나 오브제 혹은 공간 분위기로서 보면서, 감각할 수 있는 바들을 거름망으로 계속해서 걸러서, 결과적으로 경험을 축소시키게 되는 거잖아요.

희우
저도 비평가로 데뷔하고 초기에(지금도 초기지만 어쨌든 등단하자마자) 그런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글을 쓰긴 했었는데요. SNS나 인터넷 밈 같은 거요. 하지만 더 광범위하게 생각해 봤을 때, 매체나 이런 것들이 변하는 상황에서는 항상 비슷한 비판들이 반복되었던 것 같은 거예요. 뭔가 실재적인 것들은 다른 데 있는데, 그거를 복제하거나 재현하는 이미지들에 의해서 실재성이 가려지고 훼손된다는 불안과 두려움. 그게 일종의 문화 지체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낯선 것이 일상의 편안한 부분이 되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매체 환경이 변하면서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이 바뀌는 거는 맞지만, 그걸 더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기준은 자의적이라는 거죠.

김도
사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되게 골수적인 거예요.

소외를 해결하는 방법

희우
음 그렇죠. 뭔가 하이데거적인 뉘앙스도 있고요. 나름대로 골수적인 것은 우리 둘 다 똑같죠. 여하튼 우리보다 더 어린 세대들한테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게 옷처럼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어요. 저는 제 또래 중에서도 되게 늦게 스마트폰을 갖게 됐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래서 저도 그거에 대한 어떤 낯설고 불편한 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죠.
그리고 저는, 그 실재에 대한 열정, ‘진짜 삶’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것도 굉장히 고전적인 관점입니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노동의 문제와 배움의 문제.

김도
그렇죠.

희우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사랑. 노동과 배움과 사랑이요.
그것들이 없으면 삶에서 어떤 실재성이라고 할까요, 충만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셋 중에 두 개는 있어야 해요. 어쨌든 저는, 그 열정은 공감하지만, 어떤 초월적인 것, 영성, 종교적인 거나 명상이나 신비적인 체험에서 충족하려 하는 방향에는 회의가 있죠. 어떤 측면에서 저는 세속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형이상학이나 문학을 좋아하지만요. 종교에 끌린 적은 제가 기억하기로는 단 한 번도 없고, 마약이나 명상을 통해서 신비적인 체험을 한다든지 영적인 체험을 한다든지 이런 거에도 관심이 없고요.
저는 노동하고 배우고 사랑하면서 삶을 느껴야 된다고 생각하고, 더 쉬운 길도 특별한 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관점에서, 그 세 가지에서 우리가 다 소외되는 면이 있다고 봤어요. 삼중의 소외.

김도
이것들을 중단했을 때요?

희우
아니요. 그게 막 인스타그램 때문이다 이런 건 아니고요. 그건 부분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 같고요. 또 소외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우리가 (언젠가 완전한 무언가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잃어버렸다는 오해, 그리고 어떤 소외도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는 오해 같은 것들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환상과는 상관없어요. 노동으로부터 소외됐다, 이거는 너무 오래된 얘기이지요.
노동 소외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근대적인 분업에 의해서 심화된다고 설명을 하거든요. 근대에 산업이 거대해지고 국가가 거대해지면서 우리가 점점 부분적인 일만 하게 되잖아요. 자동차를 만든다고 했을 때 나 혼자서 모든 걸 다 만드는 게 아니듯이요. 그런 식으로 고도의 분업이 일어나서 내가 내 노동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주인일 수 없고, 공정을 파악할 수도 없고, 또 생산수단을 부르주아가 독점하니까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있어서도 굉장히 부분적인 것만 받게 되죠. 배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어요. 세계는 복잡해지고, 또 통계적으로 우리가 지금 점점 학습 기간이 늘어나잖아요. 대학원 진학하는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압도적인 비율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근데 대학이라는 것도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어떤 전공 어떤 과로 갈 거냐부터 해서, 성적순으로 줄 세워지고, 또 그것이 직업의 문제랑 연결이 되어 있고, ‘문과특’, ‘이과특’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언어를 배우느냐에 따라서 감수성도 사고방식도 달라지는 것이고, 어떤 영역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배울 수 있다는 그런 감각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고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앎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죠. 저도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아주 골수적인 면이 있어요. 인문대 출신이 아닌데도(아마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문학은 한편으로 유사과학보다 못한 사이비 과학이 되고, 한편으로는 기획서나 홍보문 잘 쓰는 법, 아니면 사치스럽고 공허한 교양으로 여겨지게 된 것 같고요. 간학문이나 통섭, 문이과 통합 같은 간판이 달린 것들은 경제적이거나 정책적이거나 예산상의 이유로 만들어진 잡스러운 행사인 경우가 많고요.

김도
저도 동의합니다.

희우
그리고 사랑으로부터의 소외가 있어요. 데이트 앱이나 결혼 정보회사 같은 데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거죠. 한국 20대~60대에서 지금 20대가 성관계를 가장 안 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어요. 물론 성관계가 사랑의 표시는 아니지만요. 어쨌든 내가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해서 그 사람하고 살겠다, 이런 꿈을 꾸기가 어려운 것 같고요. 사랑을 둘러싸고 엄청난 질투와 조롱과 열등감, 혐오도 있고요. 가족에 관한 관념으로 말하자면, 오래된 것은 저물었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상태이고, 한국에서는 오래된 가족 모델의 재생산과 새롭고 다양한 가족 모델의 실험이 동시에 가능한 게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한 상태죠. 물론 (성 소수자가 결혼을 할 수 없는 것과 소위 ‘정상 가족’의 재생산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같은 종류의 불가능은 아니지만요.
우리가 욕망이 없다면 소외가 고통스럽지도 않겠지요. 욕망하는 동시에 소외되어 있는 거예요. 혹은 소외되는 동시에 대상에 대한 신비화와 혐오가 함께 생산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 직업을 갖고 싶어 하지만 또 한편으로 예술가나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재미없고 보람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정말로 나의 욕망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그 결과물을 책임지고 인정과 관심을 받는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배움에 대한 열망도 사실 엄청나게 커요. 단지 학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열망이 아니고 이 세계와 삶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요. 근데 현실적인 요구들에 맞춰서 진학을 하고, 교육은 입시나 취업을 위한 경쟁으로 환원되고, 그러니까 내가 밟아온 배움의 경로에서 이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능력을 깨우칠 수 없죠.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타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작업과 배움에 대한 신비화와 원한, 노동에 대한 경멸이 심화되는 것 같아요.

김도
그렇죠.

희우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죠. 심지어 사람들이 지금 사랑에 미쳐 있는 것 같아요. 무슨 결혼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들, 진짜 많고 엄청나게 흥행하잖아요. 그 폭발적인 ‘리얼리티’야말로 실재에의 열정의 대리보충 아닐까요? 그렇게 실재에의 열정을 해소하는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사랑(신비화된 사랑)에서 소외되는 거죠.
뻔한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이것들을 해결하는 게, 이 시대의 불행에 대한 근본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특히 배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비평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김도
그것은 최근 글에서 쓰셨던 내용이군요.

희우
그렇죠. 비평 활동에 대해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애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에요. 여전히 작가들은, 비평가들이 작품을 너무 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분석하려 든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죠.

김도
고질적인 문제죠.

희우
그런 한편으로, 제가 대학원에 와보니까 비평이 학술적인 것과도 여전히 좀 분리되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교수님들이 은근히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비평가들은 엄밀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문학적으로 대충 말만 끼워 맞춰가지고 막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비평이 그 지위나 하는 일이 애매한 거예요. 창작적인 글쓰기도 아니고 학술적인 글쓰기도 아닌 거예요. 일반화할 수 없지만, 비평가들이 느끼는 어떤 불안이나 열패감, 무력감 같은 것들이 거기서도 일정 부분 기인하는 것 같거든요.
근데 오히려 저는, 배움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복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비평이 애매하기 때문에 오히려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여요. 그 애매성이 비평의 강점이 되고 매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제가 말하는 배움은 어쨌든 학교 안에서 어떤 전공을 정해서 전문성을 축적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내 힘으로 세계와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확신과 관련된 문제에요. 또 결정적인 배움은 영역들, 분과들, 장르들, 구조적 요건들을 가로지를 때만 얻어질 수 있어요. 그런 모험을 통해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배움들을 내 방식으로 연결하고 재발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창작은 작가의 인간적 독특함이라는 환상과 너무 결부되어 있어요. 근데 비평은 그런 것들을 덜 요구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비평을 쓰기 위해서 특별한 사람이거나 특별한 재능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럴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냥 내가 지금 어떤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것만 확실히 있어도 누구나 비평을 할 수 있는 거죠.

김도
네. 근데 아까, 그 사랑 이야기할 때, 결혼 정보회사 말씀하셨잖아요. 지하철 타면 듀오 광고가 되게 많이 보이잖아요. 근데 듀오 광고 이미지마다 좀 공통적으로 보이는 재미난 특징이 있더라고요.
그게 뭐냐면 항상 남녀가 같이 있는데, 남성은 여성을 보고 있는데, 여성은 렌즈를 보고 있는 거거든요. 우리가 그 여성과 눈을 맞추게 되는 구도로 사진이 찍혀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나를 행복하게 바라보는 배우자가 있는데 배우자와 눈을 맞추는 대신 화면 쪽을 보고 있는 거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눈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건, 내가 보여지고 있다는 걸 의식하는 거잖아요. 두 인간이 사랑으로 행복한 순간이면 누가 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래도 좋을 텐데요.
그게 결혼 정보회사 광고 이미지로 찍힌다는 거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보여지는 나, 나에 대한 인식이 결혼에 침투해 있는 좀 상징적인 이미지로 읽히거든요.

희우
네.

김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결혼 정보회사 광고 이미지에서, 그는 나를 보고 있고, 나는 보여지고 있다, 보여지고 있는 나는 좋다, 행복한 내가 보여져야 한다라는 어떤 인식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는 거죠.
그게 제가 말하는 ‘필요’인 거거든요. 이런 것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건 당면한 상황이지만, 당면한 상황에 마찰감이 없다고 해서 다르게 볼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그건 이상해 보이고요. 사실 결혼은 신성한 의식이고 지켜야 할 약속 같은 것이기도 하잖아요. 가족들에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쨌든 그 사건은 일생에 한 번뿐인 것으로 오랫동안 다루어져 왔고,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암묵적인 인식이 희미하게나마 있는 거니까요.

희우
일단 인간 욕망이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고 타인에 의해 구성되는 건 어떤 면에선 당연한 거죠. 지금 한국 문화에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게 부추겨지는 면이 있고 그게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도 사실이겠지만요.
그런데 제가 비판적 사고에 뇌가 절여진 사람이라 그런지, 저는 애초에 풍습에 대한 믿음이랄까 존중이 없는 것 같아요.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게 꼭 신성하고 지켜져야 될 약속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요. 결혼은 언제나 사회적인 관습이었고, 성에 대한 관념, 타인들의 판단이나 평가에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었고, 결혼식은 늘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혼을 통해 사랑을 규정하면 사랑이 그냥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문제는 그런 압력과 욕망을 이용해서 더 많은 상품란, 고급 상품부터 보급형 상품들, 특별 상품, 소수자 상품까지 생기는 상황이겠지요.

김도
맞아요. 희우 씨는 비판에 절여진 거 아닌가 스스로 성찰하셨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그거야말로 에고를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치는 건 어떤 의미에서 저한텐 좀 신비 체험 같은 거였고, 그거는 개인으로서 논리로 극복 가능한 게 아니거든요.
아우구스티누스인가요, 방탕하게 살다가 신비 체험 이후 완전히 삶의 방향이 바뀌어버리잖아요. 근데 그러한 경험이 마치 번개 맞은 것처럼 지나가고 나면 존재의 방향이 틀어져 버리더라고요. 그리고 그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요. 올해 4월쯤에 절필하고 역시 스님이 되는 것이 맞나 고민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거겠죠. 사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동떨어진 게 맞고, 어느 시대였건, 어두운 시대였건 밝은 시대였건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지요. 근데 이제 이런(비트 세대 식의) 문화에 필요성이 있다면, 저 같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죠. 제가 어쨌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있긴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것을 취소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저는 좀 골수고요.

희우
그 점에서 아무래도 우리가 차이가 있는 거겠죠. 자기를 주체로 특히 내세우게 되는 사람들이 번개 맞는 듯한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하죠. 저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를 받아들이고 철학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 사람들은 항상 그 사람의 전기 자체가 너무 중요한 게 되잖아요. 반대로 저는 제 주체성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철학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말하자면 예술가보다 훨씬 재미없는 사람이죠. 설령 삶이 다사다난했더라도 저는 저를 피뢰침 같은 주체로 정체화하지 않는 거죠. 다만 비평가로서든 철학자로서든 그런 피뢰침 같은 주체를 보호하고 옹호할 의무가 있겠지요.

김도
동의합니다. 그 말씀에 완전 동의해요.
철학자라는 사람들, 그런 존재들이 항상 어느 시대에 있었든 간에 포지셔닝하는 위치는 그런 곳이었고 모든 거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물러서 있되 그렇다고 너무 멀어서 안 보일 정도로는 물러서지 않는 어떤 위치에서 봐야 하잖아요. 동물들도 그 형상이 그 동물의 성격과 성향을 보여주잖아요. 인간은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근데 그런 것처럼 좀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까지도, 발견하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요즘 있거든요.
저는 골수화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눈이 먼 것 같아요. 근데 어떤 방향에 대해서 눈이 멀면 전혀 눈 뜨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어요. 그런 색깔을 추가하는 게 제 소명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인들이 식물 중에 꽃이라면 이런 꽃도 있어야지요. 뭐 대마초라거나. 대마초도 꽃이잖아요.

김도의 시에 관하여

김도
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비평가로서 느끼는 지금의 시, 시가 가야 할 것 같은 방향 같은 것을 좀 간단하게나마 들어보고 싶습니다.

희우
일단 제가 최근에 시를 진짜 많이 못 읽었어요. 다만 막연하게 요즘 나오는 시들이 하이브리드적이라고 느껴요. 시들도 역사적으로 분별이 되잖아요. 예를 들면 모더니즘 시, 서정시, 민중시, 포스트모더니즘 시, 좀 소수적인 계열이긴 하지만 사물시 같은 것도 있고요.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도 많이 이야기되었죠. 이제 그러한 구별들이 완전히 무의미해진 느낌이에요.

김도
그런 의미에서 하이브리드군요. 이것저것이 막 뒤섞이는 느낌으로.

희우
네. 한때는 서정을 피하고 은유를 절제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오히려 이제는 하이브리드적으로 더 많이 쓰는 식 같아요. 사물시를 보면 시인의 정서 표현을 절제하잖아요. 내면적인 표현을 자제하면서 사물의 비중이 커지는 쪽으로 쓰였는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 세계’랑 ‘인간의 내면’의 분리를 전제하는 것이죠. 요즘은 동물이나 사물을 말하는 시에서도 그런 분리가 없어진 느낌이에요. 감정적이면서도 세련된 사물시가 나올 수 있죠.

김도
그렇군요. 사실 저는 시의 분류에 관해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들어보니까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희우
그리고 지금 언어적인 실험을 하는 것 같은 시인들도 언어의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보다는 시가 (언어 자체보다) 다른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사실 누군가 실험적인 시에 대해서, 현실이 없고 자기 지시적이기만 하다고 비난할 때는 (그렇게 평하는 사람이) 시가 관계하는 현실이 무슨 현실인지 모르고 말하는 경우가 많겠죠. 어쨌든 자기 지시적인 시와 현실 반영적인 시, 이런 이분법도 무의미해지는 거지요.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는 말은 제가 감히 못 하겠어요. 그래도 이런 섞임이 2020년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의 경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건 비인간적이거나 사이보그적인 소재가 나오는 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언어적 감수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도
그러면 『핵꿈』도 하이브리드의 자장 안에 있다고 보시나요?

희우
고전적인 틀로 보면 서정시에 가까울 텐데 우리가 아는 익숙한 서정시는 아닌 거겠지요.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뭘까요?

김도
무엇과 무엇의 차이요?

희우
익숙한 서정시처럼 읽히지 않게 하는 차이요.

김도
저는 리듬 때문이 아닐까 싶기는 해요.

희우
도 씨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반복인 것 같기는 합니다. 많은 시가 반복을 사용하지만, 이 시집에서 특히 느껴지는 기묘한 반복이 있잖아요. 사태가 끝나지도 않고 정리되지도 않고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반복의 형식 자체가 남게 되는.
서정시는 시인이 일반 사람들하고는 뭔가 다른 내면을 가져서, 그 사람이 세계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상 자체가 특별하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만 하면 특별한 시가 된다는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쉽죠. 이 시집(『핵꿈』)도 서정시라고 묶일 수 있겠지만 반복의 형식 자체가 중요해짐으로 인해서 (시인의 자아 표현이 덜 중요해지는) 전환이 있는 것 같거든요.
리듬은 우리가 시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일반적인 요소 중 하나이지만, 여기서의 반복은 그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기능의 지연이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런 세계감과도 관련이 되고요. 예를 들자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그만해도 좋아/나는 말하지 못한다”(「단 하나의 문제만이 출제되는 시험」) 이런 구문들의 반복. 혹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서 층마다 늙지 않는 아이가 타는 식(「천국보다 낯선」)으로, 전개되지 않고 같은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기만 하는 것이 이 시집에 특색을 부여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반복의 형식이 작가의 감수성이나 사상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아무 변화가 없는 상태 그대로인 것을 수용한다고 해야 할까요?

김도
네, 그런 것 같아요.

희우
이런 거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면/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는 거겠지”(「Golden Tiger」). 이런 것도 그냥 같은 말의 반복이잖아요. 일반적으로는 무엇인가 가정되었으면(~라면) 그 뒤에 조건절(~일 것이다)이 나올 차례인데, 여기서는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인 거죠.

김도
그 문장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변한 건 없는 것 같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냥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형성되면서 오히려 변화의 느낌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요? 왠지 좀 그런 것 같아요.

희우
또 이런 것도 있어요. 첫 번째 시의 이런 문장도 참 좋은데요. “여행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여행이 시작된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 거야”(「잠수」). 이것도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어서 다르게 느껴지는 게 있어요. 결론을 향해서 가고 있는 느낌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태 자체를 수용하는 느낌이 드는 거죠. 이런 반복이 변증법적인 발전 같은 것도 아니고 나선형적으로 어떤 중심을 향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부록으로 쓴 수기에서도 잘 나타나는 건데) 개개 시편들의 반복을 관통하는, 그 자체로는 규정되거나 말해질 수 없는 를 향한 경도가 느껴져요. 그러니까 시편들하고 구분되는 절대적 의 개념이 있어요. 부록의 에세이를 보면 개개의 시는 그냥 시라고 되어 있고 후자는 볼드체로 라고 적혀 있어요. 영어로 치면 소문자 시랑 대문자 시 같이요. 현행화된 시와 잠재적인 시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김도
예. 그렇죠.

희우
그래서 이 시집에서 반복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내면적인 맴돎으로 읽힐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복 자체가 더 깊은 차원에 있는 무언가의 반향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후자의 차원, 즉 절대적인 것을 향한 정신적 경도가 지난 십여 년의 ‘신서정’에서 『핵꿈』을 분별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읽었던 황인찬의 시는 메타-서정시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한국 서정시에 대한 계승이 있는 한편, 자신의 역사와 매체에 대한 반성적 자의식을 가진 모더니즘 시의 특징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미 황인찬의 시는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 것이었고, 시를 읽는 독자가 품을 법한 이중의 기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지요. 또 황인찬의 시에서도 도 씨의 시에서와 비슷한 반복을 이미 볼 수 있죠.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아침에는/아침을 먹고”(황인찬, 「무화과 숲」). 그런데 어쨌든 2010년대 황인찬의 시에서는 시에 대한 냉소적 거리와 메타적인 균형 감각을 볼 수 있잖아요. 반면 『핵꿈』을 비롯해서 최근의 많은 시에서는 몰입이나 경도, 광기 같은 것이 더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도
시 쓰는 분들은 스스로 계속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 앞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듯해요. 나는 왜 계속 시를 쓰고 있는 걸까? 특히 저는 지금도 등단을 안 했다고도 볼 수 있는 입장이고, 따라서 비등단 기간이 사실 제 삶의 대부분이었음에도 치열하게 썼거든요. 왜 그렇게 치열하게 썼는가 자문한다면,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저는 한 번 더 물어봐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내가 있고, 쓰고 있는 나는 따로 있는 거죠. 다만 실질적인 보답도 없고 정답도 없기 때문에 왜 쓰는지에 관한 질문을 떠올리고 답할 필요가 있는 나와 그리고 시를 써야만 하고 읽고 쓰는 나는 별개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를 왜 쓰는지 대답을 해본 간략한 결과가 시집 마지막의 부록인 것인데, 시가 가는 방향 끝에 있는 거()는 대상과의 일치라고 생각하거든요. 대상과의 언어적인 일치는 존재적 차원의 일치와 다름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상과 주체가 떨어져 있어야만 가능한 거잖아요. 반대로 시가 지향하는 방향 끝엔 대상과 주체가 분간이 안 되는 상태를 가정해야만 하고요. 시가 시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게 그것이기 때문인데, 시를 이루는 언어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분리돼 있으니까 (시의 지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통 시에 관한 정론이고요. 어쨌든 그와 같은 시의 극점은 그것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시를 생각할 때 염두에 둘 수밖에 없죠. 시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마땅하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거죠. 특히 이러한 관점은 제 병의 경험과도 연결되는데 조현병의 피아 분간이 흐릿해진 상태, 나와 사물 간의 경계가 흐릿해진 상태가 저는 대문자 의 인지적인 상태와 흡사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시를 통해 대문자 를 이룬 시의 완성 상태가 더 완전할 테지만요. 조현병 상태는 불안정한 상태이니까요.
그래서 대문자 적 상태로 어떻게 갈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의 결과 중 하나로 시에서의 반복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반복이 대문자 를 이루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쓰는 것의 너머를 알지 못하거든요. 아는 데까지만 쓰고 있는데, 거짓말하지 않고 아는 척하지 않고, 다만 아는 데까지만 진실하게 쓰고 내가 뭘 쓰고 있는지 그래도 최대한 알아차리려는 솔직한 태도랄까요. 솔직하다는 말이 적당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대문자 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문자 가 보인다는 착각에 속지 않고 그냥 당장 내가 쓰고 있는 것을 쓰려고 쓰다 보니까(이상한 말인데) 반복적인 형태가 나온 것 같아요.

희우
그런데 이 시집의 반복은 언어와 사물의 경계가 없어지는 분열적인 상태를 향해서 가속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한편으로 닫힌 회로처럼 폐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김도
네. 저도 동의해요. 그러니까 어…… 제 생각은 계속 벽을 부수면서 나아가는 느낌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한 편, 한 편 시를 쓸 때 나아가고 있다는 그 운동 상태의 체감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거죠. 대문자 로요. 말하자면 한 칸의 계단은 한 칸의 계단이라는 인식으로 쓰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니까 그 계단에서 다른 계단으로 옮겨가는 발의 느낌으로서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칸의 계단은 한 칸의 계단으로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걸 인정해야 하고요. 그 계단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떤 사적인 욕망이나 아니면 미래에 대한 기대나 이런 것보다도 그저 그 한 칸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쓰는 거죠. 미신적이고 계시적인 이야기이긴 한데, 그저 이 순간 쓰고 있는 게 이 순간에 써야만 했을 그 무엇이라는 받아들임이랄까요. 그래도 말씀하신 대로 폐쇄적인 느낌 속에서 영원히 돌고 도는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달리 말하면 정지한 거고요. 제가 의도했던 느낌은 아니었지만요.

희우
「떨어지는 돌」의 화자는 약간 신적인 존재잖아요. 어떻게 보면 영화 〈트루먼쇼〉의 연출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화자이지요. 이런 시를 보면 어떤 전능한 느낌이라는 게 고전적인 연출가의 위치와 연결이 되면서,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요.

김도
네. 말씀하신 대로 전능하기 때문에 유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희우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시집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이 시집에 화자가 시 안에서 폐쇄적으로 맴돌 때가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돌」에서와 같이 전지적 관찰자로 위치가 달라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김도
「떨어지는 돌」은 약간은 캐주얼하게 쓴 건데요. 화자가 떨어지는 돌인 거고 그래서 오히려 희망적인 느낌을 내보고 싶었어요. 지구에 떨어지는 돌이 화자인데, 그 돌이 지구에 관해 모르는 게 없다면 근사하잖아요. 심지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모르는 게 없으면 정말 멋진 돌이니까 그 정도면 (지구에) 부딪쳐도 괜찮지 않나 그런 의미로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포칼립스」랑 또…… 뭐였죠? 막대한 빚으로 끝내는 시 제목이 뭐더라…… 왜 내가 제목을 기억 못 하지? 뭐였지? 아 「달콤한 인생」. 그렇게 세 편을 묶었던 거예요.

희우
그러니까 여기서 ‘떨어지는 돌’이 화자이고, 화자는 운석이군요!

김도
그렇게 쓰긴 했습니다.

희우
그런 거군요.

김도
예. 비하인드 스토리 정도로…….

희우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이 시집엔 종말에 관한 테마도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종말이라는 테마

김도
네. 확실히 그렇죠.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돌아버렸을 때 종말론적인 환각 같은 것을 봤었는데, 그게 요즘에도 기억나곤 해요. 영화에서 연출하듯이 햄버거 먹는 와중에 별안간 콜라 쏟고 그런 식으로 떠오르지는 않아요. 다만 벗어나기는 어려운 거죠. 왠지 계속 그런 종말이 발생할 것 같고 저는 그 자장 안에 있는 거죠. 그렇다 보니 그런 시들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희우
이거는 시에서 좀 벗어난 얘기인데요. 소위 ‘미친다’라고 할 때, 언어적인 질서에서 탈구되는 거긴 하지만 정신이 아무 방향으로나 가는 건 아니잖아요. 미쳤을 때 흔히 반복되는 서사나 이미지 같은 게 있잖아요. 종말의 이미지가 대표적으로 그렇고요. 그게 좀 궁금해요. 그러니까 미친 사람들이 완전히 임의적으로 다른 환상, 환각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고 거기서도 어떤 패턴이 발견된다는 게요.

김도
예. 그 얘기를 하자면…… 이상하게도 시랑 연결되는데, 바슐라르가 자의적인 메타포라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도 이 말에 동의를 하는 이유가 경험에 있거든요. 어떤 공통되는 특징이 전혀 없다면, 공통되게 하는 기반이 없다면 미치는 사람들은 진짜 막 아무런 방향으로나 튀어나갈 것이고 테이블이나 드라이기나 아니면 220볼트 콘센트 따위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근데 미쳤을 때 그런 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내가 모든 존재고 모든 존재가 나인 그 지경까지 비어버리면, 뭐랄까 본인이 좀 신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건 아주 고전적인 테마잖아요. 어쨌든 그런 압도적인 느낌이 드니 제가 예수라고 믿게 되더라고요. 계시들이 밀려오고요. 그래서 저는 「시도시도는 이렇게 쓰인다」 부록에서 말하는 그냥 시와 대문자 , 그리고 제가 명상을 하면서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와 조현병적인 어떤 상태, 각기 다른 환자들인데도 공유하는 병증의 레퍼토리가 다 유관하다고 생각해요. 또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희우
종교적인 틀이나 신화소(Mytheme) 같은 것들이요?

김도
신화소요?

희우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요소들이 있잖아요. 신화를 신화로 만드는 최소 단위 같은 것을 신화소라고 하는데요. 언어의 밑바닥에 그런 신화소들이 있기 때문에 타아의 구분이 무너진 광인들이나 아니면 구분을 무화시켜버린 수행자들이 도달하는 인지 상태가 비슷한 것인지……

김도
맞는 말씀 같아요. 또 말씀하신 제 시집에서 나오는 특징들도 사실 이러한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저는 미치고 치료받은 뒤로는 이 방향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죠.

희우
그런데 구원이나 종말론적 이미지나 메시아 같은 것은 많은 종교에 공통된 요소를 품고 있긴 하지만 특히 기독교적인 테마이기도 하잖아요. 그게 이상한 것 같아요. 기독교는 이 나라의 국교였던 적도 없는데요. 도 씨한테 기독교적 테마가 특별히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있나요?

김도
이번 삶에서 특히 중요했다고, 특징적이었다고 말할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정도로 기독교 문화의 자장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종말론적인 테마가 기독교적인 테마인 건 틀림이 없지만, 또 동시에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종교라면) 이 세상의 이유를 밝혀야 되는데, 보통 그 이유를 밝히다 보면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고, 그리고 또다시 어떻게 시작되어야 되는지를 해명하려고 하니까요.

희우
불교에는 그런 식의 구원이나 종말의 테마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김도
불교와 힌두교의 구원이 좀 비슷하죠. 그러니까 계속 윤회하고 있고 깨달음을 얻으면 이것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요.

희우
네.

김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본인이 예수가 되었다거나 신이 되었다거나 같은 망상은 조현병이나 조증적으로 흔한 증상이지만, 막 판문점에 유엔 본부를 설치해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거나 하는 망상도 대한민국에서는 좀 흔한 레퍼토리거든요.

희우
그런 사례들이 있나요?

김도
네. 근데 제가 겪은 이 구세주 레퍼토리가 가장 흔한 것이에요. 시중에 나와 있는 책에서도 쉽게 접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같은 걸 읽어봐도 그 아들이 예수가 되거든요. 제가 그랬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예수가 가장 유명한 신이라서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어쩌면 종말을 감지했던 이유는, 이상한 얘기인데, 당시 어떤 생명들이 끝장나고 있다는 그런 이상한 촉감 속에 있었거든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사과를 먹을 때도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닌 거예요. 포도 한 알을 씹을 때도요. 보면 안에 되게 뭐가 많잖아요. 사실 굳이 미치지 않은 눈으로도 자세히 보면 되게 복잡하잖아요. 이게 막 움직이고 있고요. 그런데 그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무방비하게 열려있다 보니까, 특히 그걸 제어하는 힘이 언어 같은데 그것이 와해되어 있다 보니까 온갖 이상한 감각들이 밀려오는데요. 그중 저한테 강하게 왔던 것이 생명들이 끝장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얘기하면 추상적이지만 막상 몸으로 오는 느낌은 구체적이었던 거죠.
그때 저는 보기에 너무 안 좋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먹는 그런 환각을 봤거든요. 그게 어떠한 이유로 왔는지는 저도 모르죠. 맥카시의 『더 로드』의 교육 효과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좀비 영화나 온갖 영상물들의 영향일 수도 있죠. 근데 중요한 건 그런 소재적인 이미지들보다도 그걸 일으키는 힘 같아요. 사실 그건 제정신이 아닌 거잖아요. 눈이 여기에 있는데 웬 이상한 걸 보고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되면 왜 압도당하게 되느냐가 관건인데, 그걸 다룰 수 없어서인 것 같아요. 그 상태를 컨트롤 할 능력이 없으니까. 무서운 마음이 들면 그 무서운 마음을 의식이 구체화시켜버리는 거죠. 그리고 거기에 다시 당해버리면서 악순환에 빠지고요. 환각의 원리가 그렇더라고요. 내 기분이 좋으면 유니콘 같은 게 무지개 타고 날아올 것 같고 그런데, 기분이 안 좋으면 마치 얇은 필름 하나가 벗겨지는 것처럼 서울이 지옥으로 보이는 거죠.

희우
그게 궁금한 점인데요. 그런 식으로 미치면 주체와 대상, 언어와 사물의 경계가 없어진다고들 하지만, 조현병이 환각이나 환영하고 연관되는 만큼 그 경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도의 착각 속에, 더 주관적인 차원에 갇혀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상상적인 차원에요.

김도
네.

희우
다시 말해 실제로 구분이 없어진 게 아니라 구분이 없어졌다는 착각 속에 있는 것일 수 있는데, 그거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주체와 대상의 일치라는 시의 고전적 테마도 그렇죠. 생각해보면 절대지는 주관에서 객관으로 갔다가 그걸 다시 주관으로 종합하는 변증법적인 운동을 통해 대상과 주체의 일치에 이르는 것인데, 시의 엑스터시는 그런 변증법적 발전을 반대로 뒤집은 것일 수 있지요. 근대철학적 절대지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주관적인 만큼 광기도 주관적인 것일 수 있죠. 그러니까 그저 주관 안에서 분열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사물과 접속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김도
날카로운 말이네요. 실제로도 그렇게 양분되는 것 같아요. 자폐적으로, 껌껌한 곳에 본인이 무엇을 감각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갇혀서 누구와도 소통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과 차단된 상태. 그런 상태와 제가 말하는 ‘만물이 나고 내가 곧 만물이 돼버린 상태’는 어쩌면 밖에서 보기에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그 둘을 객관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면 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체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것에 관해서 시도 조금 썼고 블로그에도 조금씩 끄적이고 있긴 한데, 제가 겪은 병적인 상태는 병적이었기 때문에 불안정했고 깊이로 따져도 그렇게 깊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아요. 말하고자 해도 이 정도밖에는 말할 수가 없거든요. 이거는 말해줄 수 없는 종류의 사건이자 감각인 것 같아요. 겪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상태를 겪는 방법으로 동시대에 잘 알려진 게 버섯이나 LSD 같은 것이겠죠. 강제로, 화학적으로 그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에고가 흐려진 상태가 무엇인지 좀 알게 되죠. 다만 제가 말씀드렸던 문제도 같이 나타나겠죠. 그러니까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상태에서, 열려버린 상태에서 두려운 마음이나 안 좋은 생각 같은 것에 사로잡히면 엄청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거죠. 제가 광증에서 겪은 환각들처럼요.

희우
거기서 그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 종말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들이 그냥 개인적인 두려움 때문일까요? 예를 들면 아까 서울이 지옥으로 보였다고 하셨잖아요. 서울에 실제로 어떤 지옥 같은 특성이 있어서 그 실재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김도
둘 다일 것 같아요. 서울에 지옥 같은 속성이 있어서 지옥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정도 지옥 같은 면이 없는 곳은 이 별에 엄밀히 말해서 없잖아요. 숲에만 가도 뭐가 뭐를 끊임없이 먹고 있으니까요. 작은 이빨로 오독오독 씹으면서요. 서울에도 당연히 그러한 면은 있을 거고요. 인간적인 면에서요. 근데 그런 것을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쁘고 두려운 식으로 안 보일 거라는 거죠. 미쳐도요. 오히려 근사하게만 보일 수도 있을 거고, 몹시 흉하거나 마음 아픈 장면을 보면서도 거기서 희망이나 오히려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상태라면요. 하지만 불안정하고 연약한 마음이면 온갖 지옥도에 사로잡히는 거죠. 조현병 환자들이 불행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상태, 에고가 흐려진 상태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왜냐면 마음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기절했기 때문에 강제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고 그러면 휘둘리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폐쇄병동에서 봤던 사람들도 그랬고요. 그리고 저도 거기 있었던 모습이 되게 안 좋아 보였겠죠.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겠죠.

사이적 존재

희우
버섯 얘기해서 생각나는데 『돈 후안의 가르침』 읽으셨어요? 그 책의 저자는 원래 미국에서 근대적인 인류학 교육을 받은 학생이고 그 사람이 멕시코의 선주민, 일종의 구루한테 견습을 받는 내용이잖아요. 근데 사실상 배우는 게 마약 복용법이란 말이죠. 이런 장면이 나와요. 스승이 가르쳐주는 천연 마약을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고 나서 새로 변하는데……

김도
스모크였어요.

희우
네. 새로 변하는 경험을 하고 나서 정신을 차렸을 때, 스승이 “너는 새가 되었어”라고 단언하는데 서술자가 계속 그거를 못 믿거든요. 그러면서 계속 질문하지요. 내가 그냥 새가 됐다고 느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새가 된 것인가요? 그러니까 만약에 남이 그때 당시 나를 봤어도 내가 새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겠냐고 계속 질문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 해소할 수 없는 관점의 차이가 있어요. 아주 거칠게 말해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근데 그 스승한테는 그런 사고방식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서술자가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는지조차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반대로 우리가 근대적인 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물에 접속하거나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형되거나 세계로 확장되는 기분이, 그냥 미치거나 마약에 취했거나 미몽에 빠져서 자기 혼자 착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게 근대적인 틀로 보면 사고방식에 위계가 생기고요. ‘물아일체’는 전근대적인, 말하자면 의심(데카르트)이나 비판(칸트)을 할 줄 모르는 상태인 거죠. 분열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여 종합한 상태가 아니라 아직 분열조차 겪지 못한 상태…… 헤겔이 동방의 예술(특히 이집트 예술)에 대해 했던 평가가 정확히 이런 것이었어요. 거기서는 자연과 인간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거든요.

김도
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게, 저는 좀 사이에 있는 것 같거든요. 말씀하신 대로 근대적으로 교육받았고 그런 교육으로 나름대로 자신을 단련한 것 같은데, 일단 신비로운 체험을 지나고 나서는 그런 교육도 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상태, 에고가 흐려진 상태에 제 존재의 구원이 있다고 믿고, 명상 수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명상을 하면서 인지 상태나 감각의 변화 이런 건 좀 사소한 거고요. 예를 들어 열차에 앉아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제 손을 보면요. 보통 평소에는 제가 손을 딱히 보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돼요. 또 손이 제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당연한 거라서 굳이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잖아요. 근데 이상하게 보이는 거죠. 이게 나의 손이네? 감각 자체만 바라보는 훈련을 계속하다 보니까 그냥 물이 휴지에 스미듯이 의식이 변화하더라고요. 그게 제겐 흥미로운 지점이었고, 예전에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일상이 된 것 같고요. 하지만 저도 무슨 변신 이야기처럼 사람이 막 갑자기 깃털이 나면서 할리우드 영화처럼 날아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근데 ‘스모크’라고 하는 무언가를 통해서 어쨌든 비행을 하고 새가 되긴 되잖아요. 어떻게 그게 되는 건지 모르겠고 뭘 한 건지도 모르겠는데 날긴 난 거죠. 그럼 난 거예요. 그 책을 읽어보면 처음에 페요테부터 시작을 하잖아요. 그 유명한 선인장 열매. 사이키델릭으로 말해지는 자연물 중 유명한 것인데요. (그런 걸 복용하면) 에고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과의 교류가 감각되는 상태가 오는 건데, 그게 객관적인 진실이냐, 그것이 과학적인 진실이냐, 정말 나무의 정령이 있어서 나무와 대화를 하는 것이냐, 그냥 자의적인 것 아니냐, 그거야말로 주관에 사로잡힌 거 아니냐고 반문은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명상을 통해 과거에 비하면 약간은 기묘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데, 과거에는 포도가 내가 생각하던 나고 사과가 내가 생각하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그사이의 어디라 말하기 어려운 허공에서 지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고정된 좌표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모든 게 움직이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그거라고 부르는 건 그저 언어적인 편의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진실은 나무가 뿌리내린 그 자리와 돌이 위치한 그 자리, 고정된 자리들이 아니고, 김모 씨와 한모 씨 같은 이름들의 좌표값이 아니고, 그 사이들만 있는 거고, 그렇게 치면 사실 그 무엇도 없는 게 돼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이’로서만 있는 거죠. 어느 개체든지 다 사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지거든요. 그저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여져요. 그렇다고 지금 이상하게 세상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도요. 새가 된다거나,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들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그 사이적인 상태로 의식을 변화시키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보았을 땐 사이가 아닌 고정된 자리가 있다는 게 착각인 것이고, 사이만이 있다는 게 진실이라는 거죠.

희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 그러한 인식에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나 광기나 마약을 빌리지 않고서도 주체/대상과 같은 구분을 넘어설 합리적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김도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 같아요. 전자를 쐈는데 그것은 관측되기 전까지는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있다가 관측되는 순간 그곳에 있는 것으로 되잖아요. 아주 작은 미시 세계에서의 법칙이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에서 자주 말해지는 ‘위에서도 그러하듯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아주 작은 것들이 아주 많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이고, 불교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알아내는 건 미시 세계까지 감각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 같아요. 근데 말씀하신 대로 그것을 합리적인 언어로 이룬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일 것 같아요. 어떻게 그게 될지도 잘 모르겠어요.

희우
그것은 이미 동시대 철학의 명시적인 과제예요. 캐런 버라드(Karen Barad)라는 동시대 철학자, 원래 물리학자였다가 지금은 철학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마침 양자 물리학 이중 슬릿 실험 말씀하셨잖아요. 버라드가 그 중첩된 상태랑 존재론과 퀴어 이론을 연결해서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 말하는 “내부-작용(intra-action)”은 말씀했던 그 ‘사이 존재’랑 비슷한 거예요. 아마도요.
그런데 근대철학을 비판하면서 그런 상태에 ‘합리적’으로 도달한다는 말은, 제가 독학한 맥락에서는 하이데거식 해석학적 낭만주의나 들뢰즈의 무정부주의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요. 하이데거가 근대철학 혹은 서구 철학에서 망각된 존재에 가닿기 위해서 특권을 부여했던 것이 시의 언어이고,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작업했던 후기에 정신분열증에 의미를 많이 부여했거든요. 주객의 (재현적)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서요. 그들도 ‘사이 존재’를 말했지만,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철학자들하고는 달라지는 거죠. 더 멀리 가려는 것이지요.

김도
그렇네요.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것 같아요. <라스트 샤먼>이라는 다큐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미국인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을 것 같고 실제로 죽을 뻔도 했으니까 페루에 가서 아야와스카 리추얼에 정통한 샤먼을 만나서 아야와스카를 복용하고, 의식을 치른 다음에 병을 치유하는 다큐멘터리거든요. 아아와스카가 그 지방의 전통적인 사이키델릭 물질인데 화학적 성분으로는 DMT라고 하는 거거든요. 근데 DMT는 뇌에서도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거고, 그게 가장 많이 분비되는 시기가 죽을 때입니다. 그래서 주마등이라는 말이 있는 거고요. DMT가 분비되는 부위가 송과체인 거고 제3의 눈이라는 것과도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수행을 하면서 제3의 눈과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게 감지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수행할수록 점점 느낌이 강해지더니 이마와 코뿌리 안쪽에 어떤 공 같은 것이 온몸으로 떨림을 퍼뜨리면서 회전하고 있거든요. 물론 이건 수행을 통한 것이지만 사이키델릭을 통해 경험을 해보시는 것도 가능성으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철학적 과제를 위해서요.
자연에 섭취하면 그런 효과가 일어나는 것들이 있다는 건,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건 먹어보라는 뜻으로 보이거든요. 저한테는요. 대마초도 사실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식물의 암꽃을 수정시키지 않은 상태로 잘 키워서 말려서 피우는 거고 뭔가 거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것을 섭취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섭취를 안 하셔도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경험하는 가장 좋고 쉬운 방법은 명상입니다. 물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많은 집중을 필요로 하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근데 그건 사람마다 달라요. 불교적 관점으로 따지면 희우님이 저와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이런 세계와 인연이 닿아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고요.

희우
계속 말했지만 명상이나 약물은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 대화를 통해 인연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다시 한번 시집 발간 축하드리고요. 앞으로도 계속 쓰시길 기원합니다.

김도
예. 계속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요.
정말 긴 이야기를 나누었네요. 이 대담이 어떻게 정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읽는 분들이 재밌게 읽으시면 좋겠네요. 담소 나누는 동안 저는 재밌었거든요.

희우
저도요.

한 사람의 모국어

―민병훈, 『달력 뒤에 쓴 유서』(민음사, 2023)

가끔 내게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자유롭다. (107쪽)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던질 법한 첫 번째 질문: 어떻게 위의 두 문장이 나란히 있을 수 있을까? 첫 문장은 제약의 느낌을 말하고, 다음 문장은 자유의 느낌을 말한다. 두 문장 사이에서 글쓰기의 억압, 글쓰기의 제약과 글쓰기의 해방, 글쓰기의 치유가 끝나지 않을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밤낮없는 논쟁은 ‘제약 속에 자유가 있다’는 식의 상투어로 타결될 수는 없다. 그 명제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둔탁한 말로 이해하는 순간 이 문장 조합의 무거움과 가벼움, 답답함과 해방감, 현기증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사라지고 말 어떤 언어 고유의 감각이고 사유의 리듬이다.

번역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두 번째 질문: 『달력 뒤에 쓴 유서』를 비평할 수 있을까? 소설이 쉽고 거창하든, 어렵고 사소하든 상관없이 모든 규정을 거부하고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평가와 수식들로 소설을 환원하지 않으면서 비평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칫하다가는 감탄의 단말마나 울먹임으로 끝날 수도 있을 만큼 아주 짧은 분량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감탄을 자아내는 스펙터클한 소설이 아니고, 슬픈 소설도 아니다. 슬프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슬픔을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는 아니며, 슬픈 소설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심지어 『달력 뒤에 쓴 유서』는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평할 내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소설을 규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설명을 요구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무엇을 왜 쓰는가?’를 자문하는 이 소설을 비평하려 하는 즉시 ‘나는 왜 비평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평가로서의 세 번째 질문: 도대체 나는 왜 비평을 쓰는가?

어려운 세 질문에 답하기에 너무 부족한 이 리뷰의 지면이 안타까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소설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따금 너무 많이 말함으로써 너무 적게 말하게 되었다고 후회하는 때가 있다. 이 소설을 비평하기가 어렵다면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격적인 사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어려움은 사건을 의미화하지 않으면서 계속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를 반복하는 이 소설의 태도와 관련 있다. 소설에서 친한 동료 작가는 작가-서술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당신 소설 같네요”(87쪽)라고 한마디 한다. 서술자는 소설에 대한 그러한 사소한 규정조차도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또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삶을 생략하지만 삶을 환원하지 않으려 한다. 삶이 규정을 거부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소설도 규정하지 않고 규정되지 않으려 한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은 이 소설이 아버지의 자살을 둘러싼 기억을 다루기 때문에 흐려진다기보다는 더 예리해진다. 단순화하지 않고 의미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실존에 가시처럼 박힌 그 기억에 접근하고, 또 마치 외국인처럼 “아들의 문장을 읽을 수 없다”(140쪽)고 말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1) 어떻게 사전도 통역사도 번역기도 없는 두 언어 사용자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소통이 시작될까? 사건 당시 어머니는 왜인지 집을 나가 있었으며, 음독 후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의 작가-서술자이다. 둘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열심히 살아왔다. 낭만적인 해결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삶 자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각자의 상처를 안고.

서술자의 이름은 ‘병훈’이고, 소설가이다. 많은 장치가 이 소설이 실화에 바탕하고 있음을 믿게 하지만, 이중의 연출일 가능성을 적어도 원리상 배제할 수 없다. 한편으로 중간중간에 비현실적인, 소설적으로 연출된 듯한 장면들이 있는데, 그런 장면들이 꼭 이 소설이 허구임을 표시한다고도 볼 수 없다. 사람들 말대로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수필이 아니라 소설임을 형식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대부분인 1부와 부록처럼 추가된 짧은 2부의 분리이다. 1부의 어머니는 2부의 ‘그녀’가 되고, 1부의 ‘나’는 2부의 ‘아들’이 된다. 즉 시점이 바뀌어, 서술자는 어머니(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어머니는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작가-서술자의 첫 책을 읽다 말았으며, 두 번째 책은 아예 보지도 못했다. 작가-서술자의 문장은 어머니에게 가닿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책이 왜 안 팔리는지 묻고, 잘 팔리는 그런 책을 왜 쓸 수 없는지 서술자에게 묻는다. 서술자의 친구들 역시 소설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신기해하고, 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작가-서술자가 놀라울 것 없는 이러한 몰이해에 무슨 거창한 기치를 내걸고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서술자는 무언가에 반대하기 위해 깃발을 들고 있지 않다. 깃발이란 뒤따르는 여럿을 하나의 의지로 환원하고, 여럿을 대표함으로써 힘을 얻는 것이 아닌가. 이 소설에서는 사건도, 상처도, 진정성도, 대의도 글쓰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부끼고 있지는 않다.

물론 문학이 깃발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현실의 능력 있는 활동가들이 깃발 혹은 언어의 권력을 활용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종종 강력한 깃발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의 저항은 깃발을 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깃발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데, 이 작업을 진행하는 어떤 순간에는 너무 힘든 나머지, 다른 방식의 문장을 바란 적도 있었다. 사명감, 책임감, 정치, 의욕이 담긴 것들.
(76쪽, 강조는 원저자)

예술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미학주의’가 현실로부터의 도피임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언술이나 당위를 내세우는 일이 문학으로부터의 도피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이 어려울 때 우리는 꿈으로 도피할 수 있지만, 꿈이 고통스러운 진실에 접근할 때는 결정적인 장면 직전에 벌떡 일어나며 꿈에서 현실로 도피하곤 한다. 글쓰기를 지속하는 일은 이러한 양방향의 도피에의 거절이지만, 민병훈의 완고한 글쓰기가 자기충족적이거나 자기 만족적인 글쓰기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 사람은 자연어 속의 외국어를,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모국어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환이 아니라 변환이다. 이러한 변환이 없으면 타인의 언어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 속에 왜 작은 외국어가 생겨날까? 확실히 파격을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동정받기 위해서는 아니다. “전통적인 소설과의 결별? 혹은 반감? 아니다. 불행한 사건을 겪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 아니다. 평단과 대중에 의한 인정? 더더욱 아니다. 하나씩 거둬 내고 보니, 욕구만 남았다”(p. 118). 서술자의 이 대답은 진실이겠지만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서술자는 어느 순간 “문장으로 무언가를 이해하고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152쪽)고 말할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글쓰기는 ‘이해’라는 목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구가 자신의 모든 목적을 초과할 수 있음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 욕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욕구는 ‘코기토’처럼 그 자체로 의심 불가능한 기원적 확실성이 아니고, 명석판명한 단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대답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질문이 다시 남게 된다: 이런 욕구는 왜 생기는가? 다음 내용은 소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소설이 남긴 질문에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하는 대답이다.

욕망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위의 진술(“욕구만 남았다”)은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그보다는 (소설에 상담하는 상황이 짧게 그려졌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상담실의 상황을 상상해보고 싶다. 이를테면 상담사가 “그렇게나 힘든데 글을 왜 쓰시나요?”라고 질문하는 상황. 이런저런 대답을 하자 상담사가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으시군요?”라고 대답한다(나는 어릴 적 타의로 갔던 어떤 상담 센터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은 그다지 억압적인 규정이 아닌데도 “아니, 그게 아니고요……”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도대체 그렇게 대답하고 싶게 만드는 ‘욕구’는 무엇일까? 물론 이해받고자 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이 욕구에 따라 “그게 아니고요”라고 대답했다면 동시에 “사실 맞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욕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이중성을 가졌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사태의 진실은 욕망의 이중성이 아니다. 규정을 거부하는,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분명한 서사를 만들지 않는 소설의 욕구가 이중성에 대한 것이라면, 소설은 언어가 주체를 둘로 분열시킨다는 정신분석학적 명제에 대한 불가결한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달력 뒤에 쓴 유서』는 그러한 확인과는 별 상관이 없다). 존재가 이중적이라면, 존재를 규정하는 언어에 대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가령 누군가 “넌 너무 감상적이야”라고 규정하는 말을 한다면, 거기에 “내게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어”라고 대응하는 것으로는 그 규정을 충분히 물리칠 수 없다. 감상적인 것과 감상적이지 않은 것의 분할 자체가 그러한 언어에 의해서만 도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언어에 대한 존재의 이중성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인 다의성이다. 한 사람이 정말로 많은 영혼을 가졌듯이 상황은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다의성을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가 애도도 이해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고독이 모국어 속의 작은 외국어를 만들도록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상실, 외로움, 원망, 몰이해, 자기 정당화를 통과하여 이해받기를 단념할 때, 모든 쉬운 이해와 극복을 포기할 때,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해의 가능성이 열리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짧은 2부가 타진하는 것은 그러한 역설적인 이해의 가능성인 것처럼 보인다.

1) 아버지의 죽음이, 나선형처럼 기억을 풀어놓는 이 소설의 비어있는 중심축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억하고, 기리고, 애도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글을 쓰는 서술자와 그의 어머니 사이의 불가능한 이해가 소설의 구성 전체를 고려했을 때 더 핵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구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애도의 작업에서 정말로 어렵고, 더디고, 중요한 것은 같은 존재의 상실을 마음에 새긴 사람들, 그러나 사건을 전혀 다르게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그래서 원망과 몰이해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2)또 규정된 사람은 규정하는 사람에게 규정의 언어를 돌려줌으로써 관계를 치명적으로 얽히게 만들 수 있다. 너의 언어 역시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다고 응수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존경스러울 만큼 천착한 사람들과 로맨스물의 클리셰를 통해, 언어의 권력을 가진 사람과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전쟁 같은 사랑이 벌어지거나 사랑 같은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주인이나 노예에 대한 사랑, 분석가와 히스테리증자, 로고스와 로고스의 권력을 사랑하는 반(反)로고스중심주의 기타 등등.

P.S.

아마도 비평은 ‘무엇을 왜 쓰는가?’와 같은 답이 없는 질문에 직면하지 않기 더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달력 뒤에 쓴 유서』에 대한 리뷰를 써 달라고 청탁받았기 때문에 이 글을 썼다. 하지만 사명은 아니라도 최소한 긍지 비슷한 것이라도 느끼려면―그런 것도 없다면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글쓰기는 내적인 논리를 가져야만 하는 것 같다. 비평이 문학 시간 수행평가나 문예지 혹은 ‘문학계’의 구색을 위한 회전 초밥3)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쓴 글이 어딘가 발표된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흥분과 신기함의 구름이 걷히면서 이 문제가 부상하는 경험을 했다. 소설에 담긴 고민의 무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 문학비평을 왜 쓰는지 진지하게 대답하려 한다면 소설가보다 상황이 아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읽고 싶어 한다는 데서 즉각 글쓰기의 당위와 열의가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글을 가족도 읽지 않고 친구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나고 유쾌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내가 잡지에 글을 발표하고 있음을 조금 늦게 아신 할머니가 당신에게도 글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끼어들어 읽지 않는 게 좋으리라는 말을 다음과 같은 짧은 평으로 갈음하셨다. “한국어가 아닙니다.” 그 후 낙담해 있던 어느 날 정체 모를 사람에게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쓴 글이 불특정 다수에게 한국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많은 사람과 책은 때때로 상반된 이야기를 했다. 한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과 위치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게 좋다고, 특히 어떤 주장을 할 때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셨다. 반대로 다른 선생님은 (내가 첫 번째 비평을 발표하기 직전에) 글에서 ‘나’를 지우는 게 좋다고, 꼭 써야 한다면 ‘필자’라고 쓰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필자라는 말이 너무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이 들어가는 문장의 구성을 아예 다 바꿔 버렸다. 나는 그러한 수정이 글을 보다 엄밀한 논의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글을 발표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두 가르침의 의미와 그것들을 대립으로 생각하게 하는(물론 두 선생님은 이러한 ‘대립’에 직접적 책임이 없다) 사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둘 다 따를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여기의 글쓰기의 조건은 그러한 대립을 구성하는 사유의 조건을 넘어서 있다. 우리는 마치 세상에서 최고로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기라도 한 양 세계와 인류 혹은 존재자 일반을 말하는 글이 ‘나’ 혹은 ‘우리’를 숨기고 있음을 아는 만큼, 세상에는 어떠한 보편성도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오직 나’ 혹은 ‘오직 우리’를 말하는 글이 세계와 인류 혹은 존재자 일반을 숨기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3)회전 초밥은 예전에 리뷰를 쓰다가 떠오른 이미지이다. 넓은 행사장에는 여전히 손님이 있긴 하지만 행사의 중심(심지어 복수화된 중심이라 해도)은 다른 곳이며, 다만 행사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공감각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행사장 구석에서 돌고 있는 회전 초밥. 손님들은 ‘저기에 초밥이 돌고 있네’하고 인지하기는 하지만 차갑게 식어 맛없어진 초밥을 웬만하면 먹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리뷰를 쓰면서 내가 그러한 회전 초밥 접시 위에 올라갈 초밥을 열심히 요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인문학계, 비평계에서 “비판의 한계”1)가 새삼스러운 화두가 되고 있다. 나에게 “포스트크리틱(post-critique)”이라는 주제로 이 지면이 주어졌다는 것도 그에 대한 작은 방증일 것이다. 새롭지 않은 이 화두는 여전히 기묘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다. 인문학이나 비평이 ‘비판’을 공격하고 반성하는 것은 자신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일이 아닐까? 인문학자, 비평가가 아니라면 누가 비판의 죽음을 슬퍼할까?

생각해보면 “포스트크리틱”이라는 말 자체가 좀 이상하기도 하다. 그것은 ‘포스트’라는 접두사의 흔한 용법에 따라 ‘비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듯이. 하지만 비판에 대한 비판, 이 말은 어떤 소모적인 악순환을 직감하게 한다.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하는 인문학자이자 비평가로서 확신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비판은 정말 힘을 잃어버렸을까?2) 비판적 사고는 정말로 재난을 맞았을까?3) 선배 인문학자들, 비평가들이 열심히 비판 이론을 (프랑스나 미국에서) 수입해와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는데, 이제 우리가 ‘포스트크리틱’ 담론을 (프랑스나 미국에서) 수입할 차례인가?

나는 논의를 위정척사 운동처럼 비현실적으로 근본화하고 싶지도 않고, 담론 소비 유행의 변화로 격하하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초점을 잘 좁혀야 할 듯하다. 비판이 죽었는가 살았는가, 비판을 죽여야 하는가 되살려야 하는가 하는 원론적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비판이 지금 어떤 상태인가, 우리가 비판을 어떻게 경험해왔는가이다. 후자에 비추어 전자가 결정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인문학 연구나 비평에서 ‘비판 이론’의 역사적 경향들이 아직 살아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은―부르디외식 비판 사회학의 어휘를 빌리자면―어떤 장(場)에서만 통용되는 가치나 문법이 되어가고 있다. 장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설득력도 매력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보면, 어떤 비판적 분위기가 강력하게 확산되어 있는 것 같다. 흠집 잡고, 상대화하고, 반박하고, 폭로하고, 고발하고, 계급적·성적·민족적·지역적으로 혹은 세대별로 적대시하는 일이 댓글 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에 (1) 전문적이지만 고립되어가는 비판이 있고, 다른 한편에 (2) 비전문적이지만 전염성 강한 비판이 있는 것일까? 만약 이런 이분법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상반된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즉 지금 비판은 너무 약해서 오히려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과 도처에 너무 지나친 비판이 있다는 주장 말이다. 아마 그 둘을 똑같이 ‘비판’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날카로운 비판적 질문까지 허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둘을 똑같이 ‘비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실제로는 어떤 명확한 단절도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퀴어 이론 같은 비판 ‘이론’의 영향은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뉴스의 댓글, 일상의 대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에 대한 ‘반동’이나 ‘전유’가 더 눈에 띈다 해도 말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배움과 논쟁을 자극하는 강력한 인자들이지만, 한편으로 그런 이론들을 발전시킨 연구자, 사상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부작용도 광범위하게 낳고 있다. 학계나 비평계에서 엄중하고 올바르며 진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 지저분하게 현시되는 문화적 내전이 자신과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1)과 (2)는 활발한 상호작용으로 이어져 있다. 심지어 제도적 공백인 그 비식별역(de-identification)이야말로 오늘날 비판적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살아갈 방법을 찾는, 배우는 자의 관점에서 보면, 전문적 비판과 일상의 비판적 분위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층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내전이 있을 따름이다. 트위터4)는 그러한 내전의 양상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트위터에서 비판은 논리적 반박부터 발화자의 신상, 경력, 정체성에 대한 공격까지 온갖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내전 상황에서는 적과 친구의 경계가 흐려진다. 문화적 내전에서는 비판과 인신공격의 경계가 흐려지고, 혐오에 대한 비판과 혐오 자체의 경계가 흐려진다.

나는 그 논쟁적 에너지의 일부를 배움을 위한 것으로 전환하고 싶다. 말하자면 한국의 사회문화적 내전, 특히 내가 통계적으로 속하는 ‘세대’가 중대하게 연루된 듯 보이는 내전을 비판적 전쟁이 아니라 ‘배움과 비판 사이의 주체적 분투’로 새롭게 의미화하고 싶다. 우리가 겪는 갈등과 반목, 논쟁과 분열을―서로 상처 입히고, 상대화하고, 원자화하고, 추악하게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주체성을 변화시키면서 회복과 연결의 가능성을 생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다. 나는 비평의 축을 ‘비판’도 ‘무비판적 위로’도 아닌 ‘배움’ 쪽으로 이동시켜보자고 제안한다. 물론 학교에서 교수의 말을 필기하는 그런 배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배움이든 비판이든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루려 하면 한 편의 글에서 손댈 수 없을 만큼 너무 큰 개념이다. 또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이라는 제목하에는 배움뿐만 아니라 (문학비평의 전통적 문제들로만 좁혀도) 매력, 아름다움, 장르, 자율성, 진정성, 천재성 같은 개념들도 포함될 수 있다. 그것들은 전(前)비판적 낭만화/우상화가 아닌 방식으로, 그러나 비판적 탈신비화도 아닌 방식으로, 배움의 관점에서 더 풍부하게 재정의될 수 있다. 문제는 끝없이 확장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특히 예술이나 문학을 배우는 자의 주체적인 수준에서 비판의 문제와 한계를 고려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는 심연에 발뒤꿈치를 담그는 일이 되겠지만, 모든 차후의 논의를 위해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 Rita Felski, the Limits of Critiqu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2)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년 가을호(근간).

    3) 자크 랑시에르, 「비판적 사유의 재난」,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2016, 39~69쪽.

    4)이 원고를 쓰는 동안 트위터가 ‘X’로 바뀌었다. X로 바뀌고 나서야 나는 ‘트위터’라는 이름이 얼마나 감미롭고 귀여운 것이었는지 알았다. 이 글에서는 계속 트위터라는 이름을 쓰겠다.

    전문화 방법으로서의 비판

    배움이 비판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비판 이론에 박학한 사람이라면 이 질문이 실망스럽거나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비판의 역사를 고려할 때 결코 비판이 배움이라는 주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의 주요 문제는 ‘누가 배울 수 있는가’ 혹은 ‘배움은 무엇을 은폐하는가’가 아니었던가. 부르디외가 말하길 철학적·문학적·예술적 탐구는 ‘여가’를 허락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위에서야 가능하다. 노동의 긴급한 필요에서 면제되는 시간이 있어야 그런 탐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철학·문학·예술은 이 조건들에 대해 침묵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은폐한다. 또 푸코에 따르면 학교에서의 지식 생산은 통치국가의 신민으로서 유순한 몸과 사회적 규범을 재생산하는 규율 메커니즘이다. 어떤 배움이 그러한 권력 장치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5)

    따라서 순수한 배움을 말하는 것은 무비판적인, 기만적이거나 순진한(naive) 일로 보이기 쉽다. 듣기 좋지만 공허한 알랑방귀로 들릴 수도 있다. 엄격한 자의식을 가진 비평가에게 배움 자체는 아직 비판에 못 미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가령 누군가 자신이 대상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끼는지, 작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그 배움을 다른 경험과 어떻게 연결하는지 등을 기술한다면 주관적인, 아마추어적인, 딜레탕트적인 감상문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 감상이 좀 더 객관적인, 전문적인 비평처럼 보이려면 작품의 매력과 자신의 배움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 즉 다음처럼 자문할수록 더 엄격하고 책임감 있는 글쓴이로 보일 것이다. ‘이 작품의 사상과 매력과 명망과 스타일은 어떤 사회적·담론적·이데올로기적·역사적·젠더적·인종적·매체적·제도적 조건 속에서 구성되었는가?’ ‘나의 배움을 가능하게 한 경제적·문화적·시대적 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에 감상과 비평의 결정적 차이가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감상은 풍부한 배움의 기술(旣述)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비평은 배움의 조건과 내용에 대해 최소한의 비판적 성찰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구도에서는 감상에서 비평으로 넘어가는 데 비판적 초자아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내 글을 지적·윤리적·미학적으로 검토하는 선생님을 머릿속에 탑재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내 배움의 주인일 수 없게 하는 비판 선생님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사실은 네가 한 번도 네 배움의 주인인 적이 없었단다’라고 일깨워 준다. 그리고 ‘나의 배움은 보편화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비판 선생님은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한다. 아니라고. 만약 네가 어떤 것을 보편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해서라고.

    물론 비판적 사유의 역사 자체가 너무 많은 변화와 갈래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보편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비판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이 탑재하게 되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이야기해보자. 서구 근대 사유에 뿌리내린 “비판”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어떤 사유의 조건들을 반성적으로 탐문하는 버릇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의 조건과 한계에 대해 엄격하게 질문했다. 이것은 칸트의 말마따나 ‘초월론적(transcendental)’ 사유였다. 즉 사유에 대한 사유, 메타적 사유였다. 비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개량되어온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메타적 탐문의 방식일 것이다. 즉 특정 사유의 조건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발화하는가? 이를테면 자수성가한 사업가는 ‘내 성공은 극기의 노력 덕분이다’라고 말한다. 비판가는 ‘그런 노력과 자기 확신을 가능하게 한 시대적·사회적·경제적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과학자는 ‘A는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비판가는 그 진술을 다른 과학적 지식으로 반박하지 않으면서 ‘A를 사실로 구성하는 사회문화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기술적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정치인이 ‘한국 사회는 성평등한 사회다’라고 말하면, 비판가는 ‘한국 사회를 성평등한 것으로 경험하는 발화자의 위치는 어디인가?’라고 질문한다.

    이런 비판적 탐문이 강력한 계몽의 도구였음을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비판적 어법들, 계몽의 도구들이 지금 사람들을 정말로 이데올로기적 객관성, 현행 권력, 차별적인 가치 체계 등으로부터 놓여나게 하느냐이다. 때때로 정반대로 기능하지는 않는가? 또 앞서 말했듯 오늘날 어떤 비판적 분위기가 사회문화적으로 확산되어 있다면, 인문학자나 비평가가 ‘대기 중 비판의 농도’를 더 높이는 것이 좋은 일일까(혹은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비판 이론의 유통과 가공을 담당하는 대학원이나 문단 비평계 등의 제도적 영역에서 비판적 사고의 훈련이 어떻게 기능해왔는지 이야기해보겠다.

    인문학이나 비평의 영역에서도 탐문의 버릇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비판은 이 영역들에서 유난히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듯하다. 팬, 마니아,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비평가 이상의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작품에 대한 설명도 비평가보다 더 매력적으로 할 수도 있다. 웹툰이나 웹 소설에 달린 댓글, 블로그의 세계문학 논평, 유튜브의 만화 해설 등을 보면 이따금 마니아나 팬이 대상에 가진 사랑의 깊이와 지식의 방대함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연구자와 비평가는 ‘그러한 애착이나 명망이 구성된 시대적·사회문화적·경제적·매체적 조건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비전문적 마니아와 차별화된다. 물론 대학이 연구자에게 요구하는 비판적 태도는 학술적인 것이고 비평가가 요구받는 비판적 태도는 더 시의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와 비평가는 둘 다 나름대로 비판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문학 연구자나 비평가가 그 자체 비판되어야 하는 응용과학의 방법들(빅데이터 통계 같은 것)이나 제도적 권위(등단했다는 자격이나 학벌 같은 것)에서 유사 객관성을 빌려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대상(문학작품)은 전문가의 자격을 뒷받침할 ‘객관적’ 지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 비판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기 쉬웠다. 연구자나 비평가에게 일반 관객이나 독자, 마니아와 구분되는 전문성을 부여해온 것이 비판적 사고 자체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팬, 마니아, 오타쿠는 자신의 애착을 따라 대상을 알아가면서 즐거움을 얻는 데 관심이 있지 비판적 성찰을 통해 대상에 거리를 두고 지식과 애착이 형성된 조건들을 탐문하는 데 관심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애착과 즐거움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엄격한 비판가의 눈에는 그런 애착이나 즐거움이 너무 순진하고, 반성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기만적으로 보인다. 대상의 배후나 여백에 있는 사회적 문제들, 이데올로기들, 차별들을 보지 않는 듯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연구자, 비평가들이야말로 그런 암묵적 이데올로기, 가령 ‘문학은 아주 특별하고 가치 있다’는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해온 사람들에 속한다.

    비판 자체가 인문학 연구나 비평장에서 주요한 전문화의 방법이므로, 이 영역들에서 비판 담론의 발전과 갱신은 때때로 경쟁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나마 아직 열정이 있는 소수의 인문대 대학원생들이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지금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포스트-퀴어’, ‘에코크리티시즘’ 담론에 이르기까지 더 예리하고 ‘선진’적인 비판 담론을 찾아 두리번거리겠는가? 왜 젊은 비평가들이 입장 정립을 위해 문학에 대한 사랑이나 배움의 밀도뿐만 아니라 내세울 수 있는 비판적 스탠스를 필요로 하겠는가? 왜 온갖 ‘포스트’ 담론들이 생산되면서 담론의 소비 사이클을 촉진하겠는가?

    또 어떤 이름으로 정립된 비판적 입장이 아니더라도, 비판적 사고는 비평가에게 개성, 정당성, 활력을 부여한다. 숨어 있는 전제들을 찾아낸다는 비판의 방식은 비평가의 예리함, 감각적 민감성, 윤리적 엄격함을 드러낸다. 또 비평에 추리 소설 같은 짜릿함, 저항의 기치, 눈길을 끄는 소란을 불어넣을 수 있다.6) 비판은 비평의 정당성과 매력의 주요 원천이었다. 그래서 최근까지 비판의 약화는 비평의 약화와 거의 동시적인 것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인문학장과 비평장에서 비판적 사고는 ‘지식/권력’에 대항하는 수단인 동시에 종종 ‘지식/권력’ 그 자체였다. 비판은 숨어 있는 전제들을 찾아내는 방법인 동시에 숨어 있는 전제 그 자체였다. ‘포스트크리틱’이라는 화두가 지금 비평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유를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이제 ‘비판이야말로 정당하고 엄정한 방법’이라는 식의 전제가 많이 약화됨에 따라 그것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면 정립된 비판 이론들, 전문화된 비판은 우리가 예술과 문학에서, 또 삶에서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배움의 예측할 수 없는 길들을 협소하게 만들어왔던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비슷한 질문의 구조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면서, 어떤 방식의 배움만을 특권화하면서.

    비판은 배우는 자를 어떻게 분열시키는가?

    비판에 대한 이상의 거친 문제 제기는 여러 반문과 반박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 비판 선생님이 다음의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첫째로 나는 비판을 비판하기 위해 비판의 관습적인 방식을 되풀이하는 죄를 저질렀다. 대상을 단순화한 다음 그 이면을 공략하는 식으로. 관습화, 전문화, 제도화된 것이라면 무조건 나쁜가? 어쨌거나 인문학자나 비평가의 경쟁적 공부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드러내고 우리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또 누군가에게 비판은 한낱 게임이 아니라 삶의 문제다. 장의 안팎에 엄존하는 차별과 부조리를 고려할 때 어떻게 비판을 한물간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의 문제 제기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배움이든 비판을 배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비판을 비판할 때조차 우리는 비판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하지만 배움을 비판할 때조차 우리는 배워야 한다―배움을 죄악으로 만드는 방식으로나마. 배움이냐 비판이냐 하는 것은 대상의 본질로부터(객관적 증거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비판으로서의 비평’은 당연히 배움을 배제할 수 없고 ‘배움으로서의 비평’도 비판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비평인가? 전자냐 후자냐에 따라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배우는 자가 비판을 어떻게 학습하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물을 상상해보겠다. 비판 이론을 접한 어떤 예술가 지망생. 이를테면 부르디외식 비판 사회 이론을 귀동냥한 덕분에 예술적 감각이나 안목조차도 사회적 요인(계급, 문화 자본, 아비투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예술대학 학생 말이다. 그는 그러한 비판이 세상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비판 이론 덕분에 상황을 보다 냉철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런 것이었군.’ 그는 실망한다. 그는 쾌감을 느낀다. 결국 그런 것이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것 같지 않은, 너무 뛰어난 감각을 자랑하는 어떤 동기는 사실 부잣집 자제였고 부모 중 한쪽이 유명한 예술가이거나 교수였고, 기타 등등이었다. 천재성은 허구였다.

    그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안목, 감각,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들도 결국은 사회구조적 조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미술은 여러 사회적 관계와 차별, 생산 관계 등을 보지 못하게 하는 물신이었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설명이 안 될 것 같은 경우에도 비판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다. 가령 매우 가난하고 전공자도 아닌 청년이 소위 모더니즘적인 ‘고급 예술’에 빠져있다면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허위의식’으로 설명하는 식이다. 친구의 사상이 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라면, 그는 ‘아마 그건 걔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일 거야’라고 넘겨짚을 수 있다. 어떤 비판 이론가의 글이 어딘가 기만적으로 느껴져 화가 난다면, 그는 ‘저자가 1세계 백인 중산층 지식인이기 때문일 거야’라고 단정할 수 있다. 비판 이론을 어설프게 배운(모든 배움은 처음에 어설프니까) 사람이 이렇게 무례하고 환원적인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를 본 적 없는가? 어쨌거나 그는 일상에서 또 작업을 통해 자신의 비판적 배움을 실천하려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유학하고 온 젊은 강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해줌으로써 그를 더욱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거 90년대에 제도 비판 미술이 다 했던 것이거든요.”

    그러는 동안 부잣집 아들의 예술대학 유학 지원용 포트폴리오를 지도하는(거의 대필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문할 수도 있다. ‘얘는 누구보다 조기 교육을 많이 받고 문화 자본을 많이 누리는데 감각이 왜 이리 형편없지?’

    그는 우월한 안목이나 미감이란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것이고 차별적인 사회구조적 요인들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가 지망생으로서 그가 가장 욕망하는 것은 바로 그 미감이다.

    이것은 다소 오래된 비판 모델에 대한 단순한 우화이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사회구조적 차별에 대한 비판은 배우는 자를 차별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만드는가? 드물게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사에게도 비판 선생님은 단계별로 따끔한 가르침을 내린다. 너는 투쟁을 순진하고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 냉철해지고 엄격해져야만 한다. 비판은 다음과 같은 정해진 해답으로 배우는 자를 유도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존하는 차별을 철저히 학습하고, 부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해서, 차별적 조건들을 전유하는 것뿐이야.’ 반복된 비판의 어법에 따르면 체제의 바깥에 대한 낭만적 망상은 체제를 더 공고히 살찌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배우는 자를 역설적으로 차별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만든다. 차별을 성찰하기 위해서든 전유하기 위해서든, 배우는 자는 차별을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하고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가르침은 배우는 자를 한편으로는 원한의 주체로, 한편으로는 죄책감의 주체로 분열시킨다. 그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누려온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갖게 되는 한편으로,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것과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요인(부모, 출신 성분, 생물학적 성별, 외모, 정치, 심지어 대한민국이나 세계)에는 원한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그는 위아래라는 틀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든 (현상적) 차이는 (배후의) 차별로 번역된다. 차별을 모르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순진함은 죄가 된다.

    5) 하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배움의 기술로서의 비평’은 푸코가 말년에 이야기한 “자기 배려”와 매우 유사하다. 푸코의 “자기 배려”를 전비판적인 주체로의 퇴행이 아니라 후비판적인 주체화로의 나아감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특히 심세광의 ‘역자 서문’ 참조. 또한, 질 들뢰즈의 대담 「푸코의 초상화」(『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 2000, 99~122쪽) 참조.

    6) Felski, “An Inspector calls,” the Limits of Critique, pp. 85-116 참조.

    비판적 분위기

    나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우리가 동경했던 많은 예술가와 선생은, 특히 2010년대 중후반부터 우리에게 끔찍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미투 운동 이후 나를 비롯해 많은 친구가 비판적으로 ‘의식화’되었다. 하지만 비판은 양날의 검이라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원한의 주체로, 한편으로는 죄책감의 주체로 분열되었다. 이를테면 어떤 친구는 남자친구가 있다거나 자기 머리가 길다는 사실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당연히, 외관상 그리고 법적으로 ‘한국인 청년 남성’인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분열의 고통은 어떤 쾌(pleasure)로 보충되어야 했는데, 그 쾌는 절대 무구한 것일 수 없어서 종종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조건적 쾌로 명명되곤 했다. 2010년대의 비판적 분위기를 나름대로 통과한―그러니까 반동적으로 되지 않으려고 애썼던―사람들은 실망, 죄책감, 원한, 길티 플레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구한 쾌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비판은 그런 것을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허락하지 않을 텐데, 우리가 무구한 쾌를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죄책감의 원인이 되어 결국은 어떠한 쾌도 ‘길티 플레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대학가, 문단, 예술계,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던 비판적 분위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물론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운동과 이념 들의 의의나 정당성에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십여 년간의 페미니즘적 물결에 배움의 풍부함과 즐거움은 없었고 비판의 엄격한 가르침만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배움의 관점에서 보면 그 물결은 대단한 다채로움과 활기를 띠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는 비판의 가르침이 배우는 자에게 어떤 분열과 모순을 일으켰는가, 어떤 식으로 훼절되곤 했는가를 이야기하려 한다.

    누가 우리를 가르쳤는가? 2010년대 중후반에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대학에서 페미니즘 강의가 많이 열렸지만, 선생은 두세 명의 강사가 아니었다. 거의 모두가 모두의 선생이었다. 지적인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수백 개의 지론이 경합했다. 수십 년간 페미니즘 이론을 가르친 강사와 이제 막 ‘의식화’된 학생이 격돌하여 서로 상처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인식의 즐거움과 연대와 폭력과 고통과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 통과했는지 혹은 통과하지 못했는지 쓴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분량의 소설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모순적으로 경험해온 문제 두 가지 정도만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는 ‘발화자의 위치’에 관련된 문제이고, 두 번째는 ‘지적이면서-올바르면서-아름다운’ 기준에 관련한 문제이다.

    우리는 발화자의 위치에 대한 탐문이 강력한 비판의 방법임을 배웠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보편성이 사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폭로하는 방편이었다. 가령 ‘1세계 백인 남성’의 예술은 보편적으로 보이지만 그 보편성은 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조건 위에서 구성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누가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인신공격이나 비방, 신상털기의 논리가 되어버린 면이 있다. 작년 가을·겨울에 트위터에서 불거졌던 ‘판교문학’ 논쟁을 생각해보자. ‘판교문학’은 어느 트위터 이용자에 의해 언급되어 갑자기 논쟁의 화두가 되었다. 그 조어는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을 법한, 상대적으로 고연봉의 직장에 다니는 전문직 중산층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것의 예로 언급되어 공격당한 소설들이 대체로 젊은 여성 작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 논쟁은 ‘여성 작가들의 약진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반페미니즘적 공격’으로 다시 공격받았다. ‘판교문학’이라는 말을 트위터에서 처음 쓴 이용자의 신상이 국문학을 전공한 중년 남성임이 밝혀지자, 몇몇 트위터 이용자는 ‘그럴 줄 알았다’고 반응했다. 그 논쟁에 관여된 평자인 최진석이 예의 논쟁을 다룬 글이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에 실렸다.7)

    우선, 이 사례는 장의 유동성, 다공성, 모호성을 보여준다. 출판계·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소설들에 대한 논쟁이 SNS상에서 다소 격하게 불거지고, 또 그 논쟁이 주요 문예지의 지면에 소개되었다. 비평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SNS상의 ‘넋두리’와 비평 활동의 경계가 어디인지 명확히 할 수 없다. 따라서 발언의 엄밀성에 대한 발화자들의 책임도 모호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사이 모호한 지대에서 많은 비판적 언어가 발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엇갈린 비판의 작대기들이 어떤 전망을 가리켰는가? 결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차이들을 더 성찰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식의 뻔한 당위만 반복된 것이 아닌가? 그 당위적인 말은 물론 옳지만, 비난과 공격의 과정에서 논쟁이 정말 그 당위를 청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는가? 실질적으로는 작품, 발화자, 청자를 상처 입히기만 한 것은 아닌가? 비평이 작품들을 비판할 때, 많은 경우 문학작품이 현실을 편향되게 재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평이 문학작품을 편향되게 해석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어떤 명철하고 박학한 비평가도 독자가 소설에서 무엇을 배울지 미리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비판은 작품을 어떤 을 통해 읽게끔 유도하면서 소설을 즐기는 독자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다. 도처에 차별과 부조리가 있다. 우리가 경계를 잠시라도 늦추는 순간 악이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우리는 ‘악의 평범성’이나 ‘탈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에 조종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눈을 부라리면서 모든 곳에서 악을 세밀하게 찾아내야 한다! 악을 고발하는 사람의 악까지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당위적인 비판이 수행적으로 악을 승리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어쨌든 상대적으로 ‘잘 팔리는’ 몇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드러난 정체성이 ‘중산층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혹은 그들이 어떤 ‘전형성’을 띤다는 이유로 작품들을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문제 제기의 발화자가 ‘국문학 전공 남성’이라는 이유로 문제 제기의 의미나 정당성이 훼손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관련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나는 지난 몇 년간 인간의 기질에 대한 통찰력을 뽐내는 달변을 종종 들어왔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때때로 그런 말을 내뱉기도 한다. 즉 이런 특성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것이고, 저런 특성은 헤테로 여성의 것이고, 이런 옷차림은 신도시 졸부 같고, 그 제스처는 게이 같은 것이고, 누군가의 말투는 너무 1세계 백인 같고, 경상도스럽고, 너무 천박하다는 식의 말들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유동적으로 될수록 미묘한 차이들을 관상학적으로 꿰뚫어 보는 능력이 필요해진다고 생각했다. 즉 다른 특성들에 미묘하게 감춰져 있는 출신 성분 같은 것을 꿰뚫어 봐야 한다고.8) 내 생각은 반대다. 사회구조적 조건들과 발화자의 위치에 민감하게 만드는 비판은 미묘한 단층과 복합적 정체성(이를테면 남성 고학력자이면서 가난한 긱 노동자, 부유한 여성 고학력자이면서 성소수자 등)의 상(像)을 만들어내는 동시대의 문화적 환경에서 지독하게 가학적/피학적인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비판은 설명 혹은 고발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지고 단층들의 위치를 식별하면서 그것들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우리가 한 사람 안에서 얼마나 많은 정체성이 ‘교차’하는지 세심하게 염려할 수 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 모든 차이의 ‘위아래’를 기어코 식별하고자 하는 강박은 우리 자신의 배움에도 차별에의 저항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명하기 어렵고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차이들 하나하나 차별과 불평등으로 못 박는 언술은 배우는 자에게 죄책감/원한 혹은 우월감/열등감을 더욱 주입한다. 그러한 언술은 종종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과 원한을 남들도 똑같이 느끼기를 강요하는 식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어쨌든 그러한 관상학에 반대하면서,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겠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러한 차이들에 무관심해져야 한다고. 이것은 차별이나 부조리,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무관심해져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일상적 차이들에 대한 검열과 평가, 식별 기술을 늘려가는 것이 차별, 부조리, 위협에 대항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기만족, 자신과 타인에 대한 학대, 불필요한 갈등 조장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누군가는 ‘불필요한’ 갈등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는 식의 근본화된 주장을 여전히 선호하겠지만).

    비판의 가르침에서 기인하는 두 번째 문제는 지적 전문성, 정치적 올바름, 미학적 세련됨의 착종에서 기인하는 이상한 서열화이다. 즉 비판 담론이 오히려 선진적인 것과 ‘미개한’ 것의 자의적인 구분을 생산하면서 못 배운 것, 후진적인 것, 촌스러운 것에 대한 은근한 무시나 의식하지 않은 전제를 조장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작년 한 글에서 홍성희는 어떤 국제 학술 대회에서 겪은 일화를 썼다. 그는 한국문학에서 장애가 재현되는 방식의 문제점에 대해 발표하였다. 그러자 사회자는 “미국에서 진행된 장애학 연구에 관해서, 장애를 가진 신체를 예술적으로 해석하여 작품을 만들고 있는 미국 내 여러 예술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겠다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홍성희에 따르면 다른 참가자들이 건넨 친절한 말들도 비슷한 전제를 깔고 있는 듯했다. 즉 “그 말에서 ‘새로움’과 ‘통찰력’이란 한국에 없고 미국에 있는 것, 그러므로 실상은 말 그대로의 ‘새로움’이나 ‘통찰’일 수 없는 것이었고, 한국 문학장에 대한 고민 역시도 ‘새로울 것 없이’ 구태의연한 것, 뒤떨어진 것, 어떤 선진(先秦)을 뒤따르거나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었다.”9)

    세상 사람들이 따라야 할 ‘지적이면서-올바르면서-세련된’ 글로벌한 기준이 있는가? 이러한 선형적 “고정”은 우리의 배움을 하나의 길로 경색시킨다. 이런 선형화가 비단 미국의 연구자와 한국의 연구자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비판 이론이나 비판적 분위기를 익힌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촌스러움’이나 ‘올바르지 못함’을 깔보고 비난하는 것을 본 적 없는가? 심지어 ‘빻았다’는 말을 사용하곤 하면서 말이다. 그런 비난을 입에 담지 않더라도, 정도는 다르겠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인문학자, 비평가, 작가가 얼마간 ‘선진’에서 ‘후진’으로 이어지는 선형적 기준을 의식하는 듯하다. 이것은 그야말로 ‘분위기’ 같은 것이어서 특정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현상적 문제들을 비판 자체의 본질적 문제인 것처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비판적 사고 자체의 위선과 한계를 비판하면서 발전해왔다. 비판을 가장 많이 반성하는 것은 비판 자체다. 하지만 비판 이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를 혹은 자기 자신을 자꾸만 고발하면서 정교해지고 난해해지는 비판 담론들을 당연히 다 따라갈 수가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꾸만 가르치고 지적하려 드는 비판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분노하게 되는데, 거기에다 대고 “냉소적 이성”이니 “악의 평범성”이니 또 지적하는 것은 비판가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비판 담론은 한편으로 사람들의 뻔뻔함과 속물근성, 염치없음과 이기주의를 개탄하면서,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죄책감을 심어줄 미학적·수사적 전략들을 동원해왔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은 사람들을 가르치려 드는 권위적, 가부장적 습성을 스스로 고발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비판의 변증법, 비판의 진보, 비판의 갱신과 발전이 예의 선형적 서열화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본다. 비판의 자기 고발을 통한 이론적 발전, 비판 이론들끼리의 논쟁과 경합은 근 삼십여 년간 특히 미국 명문 인문대학원에서 이루어져 한국의 대학이나 비평장에 수입되어왔다. 이 수입과 개량 자체가 얼마간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7) 최진석, 「재현의 계급화와 소시민적 문학 주체의 (재)등장, 그리고 문학의 염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 133-48쪽.

    8)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188쪽.

    9) 홍성희, 「문학의 종이」,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여름호, 30쪽.


    배움이라는 즐거운 소식

    그러나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다. 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비판 이론에 주안점을 둔 비평이 아니라 ‘배움의 이론’에 주안점을 둔 비평을 제안하고,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설득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배움의 구체적인 단계들과 원리들, 가능성과 난점들, 그 결과들을 밝히지는 못했다. 이 관점을 실제 작품들에 적용했을 때 어떤 새로운 비평이 가능한지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주제에 따라 비판을 비판하는 데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차후의 문제들을 하나씩, 오랫동안 다룰 것이다. 일단 ‘배움으로서의 비평’의 개괄적인 방향만을 제시하고 이 글을 마치겠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비판이 사용하는 설명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배움의 이야기 구조를 제안하고 싶다. 즉 비판 이론이 동원하는 서사적 틀―물신, 우상, 징벌, 파국, 우상파괴, 의식화, 탈신비화, 모순, 부인―을 배움의 이론이 만들어가는 서사적 구조―기호, 매혹, 실망, 승화, 세속화, 깨달음, 되찾기―로 대체하고 싶다. 이것은 비판을 금지하거나 한물간 것 취급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비판적 가르침(계몽하기, 일깨우기, 의식화하기, 상대화하기)과 배움의 역량(추구하기, 실망하기, 되찾기, 연결하기)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주체적 결단의 문제다.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지적이고-올바르며-아름다운’ 기준을 좇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지고 연결되는 배움들에 집중할 수 있다(하지만 이것은 ‘글로벌’보다 ‘로컬’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글 마지막에 달린 각주를 참조해달라).

    나는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과도하게 뒤엉켜 있는 배움의 선들을 풀어 우리의 배움이 더 넓게 전개되고 역동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강박적으로 되거나, 아니면 반동적으로 되거나 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지는 비판적 담론들 혹은 비판적 분위기가 배우는 자에게 주입한 서사적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모순을 설명하는 비판이 사태를 모순으로 구성하기 전에는, 우리의 배움에 아무런 죄스러움도, 모순도, 위아래도 없다.10) 물론 우리의 배움이 사회구조적 압력에 의해 미리 정향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구조적 설명에 들어맞지 않는 예외가 도처에서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 구조적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예외를 늘리는 쪽에 이바지하느냐이다(여기서 예외는 특출한 예술가 개인 같은 예외성보다는 사회적 위치·정체성·취향 등의 지향을 벗어나는 예외적 마주침, 연결, 매혹을 말하는 것이다). 배움은 변증법적이지도 않고 모순을 동력으로 삼지도 않는다. 배움은 횡단적이고 또한 구성적이다. 비판은 위에서(지식인으로부터) 오거나 아래에서(소외된 자들로부터) 오지만 배움은 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직 가로지름과 연결의 실천 속에서만 오기 때문에 배움은 장르나 장들, 영역들의 위계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해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배움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러한 위계와 분리를 해체한다.

    비판 이론의 역사에서 사람들을 매혹하는 거짓 대상은 ‘물신(fetish)’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배움의 이야기는 ‘물신’이라는 나쁜 이름을 매력이라는 긍정적인 이름으로 대체한다. 물론 매력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는 것도 힘든 이론적·비평적 작업을 필요로 한다. 칸트 이래 비판의 지적 역사 전반에서 매력, 매혹, 현혹, 유혹 같은 말들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이해관심을 벗어난 관심(‘무관심한 관심’)이지만, 매력은 온갖 세속적인 이해관심과 불순하게 뒤얽혀 있다.11) 이후의 많은 비판 이론가들은 아름다움의 순수성이나 자율성에 대한 칸트식 형식주의를 비판했지만, 몇몇 예외를 빼면 매력, 매혹, 현혹에 대한 나쁜 평가를 수정하지는 않았다. 나는 우월한 당위가 아니라 세속적인 매력에 오염되고 이끌리는 배움을 들여다보고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서 비평을 제안한다.

    둘째로 배움의 이야기 구조는 ‘탈신비화’나 ‘비판적 거리 두기’ 같은 지적인 방법을 ‘실망’이라는 감정적인 어휘로 대체한다. 후자를 전자보다 선호하는 이유는 ‘비판적 거리’ 같은 말이 매혹, 애착, 몰입 같은 감정·정동을 비판에 못 미친 것으로, 아직 의식화되지 못한 상태로 격하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2)

    셋째로 배움의 이야기는 표상과 실상의 이분법을 매혹과 실망, 잃어버림과 찾기의 운동으로 대체한다. 비판적 비평의 어법은 표상과 실상의 이분법적 틀 속에서 변주되어왔다. 과거에 비판은 물신, 표상, 진술의 배후에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아름다운 시나 미술 작품은 그 배후에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주의, 제도적 권력 등으로 설명되는 현실을 숨기고 있는 물신이다. 그 물신의 현혹에서 벗어나 그것이 구성된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 비판적 비평이었다. 그런 비평은 (종종 사람들이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한다고 전제하면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현실을 보려면 더 의식화되어야 한다고 배우는 자를 채찍질했다. 한편 습관적으로 ‘배후’를 탐문하는 비판의 방식을 따분하게 여기는 다른 비평가들은, 심층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라고 비웃으면서 표층을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표층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이미지와 기표의 상호작용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문화적 비평’과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비평’의 대립은 이제 낡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해석이냐 현전이냐’하는 비평의 논쟁 구도는 심층이냐 표층이냐, 계보학적(종적) 추적이냐 상호작용에의 (횡적) 집중이냐 하는 문제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이외에도 표상과 실상, 재현과 실재의 이분법에서 비롯한 비판의 모순은 수없이 많다. 비판의 한 극단에서는 편견(이데올로기)을 객관적 실체에 대한 앎으로 교정하려 한다. 반대쪽 극단에서는 실상(과학적 객관성)은 없고 관점들(정치적 입장들)이 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편견은 객관적 사실의 이름으로 비판받고 ‘객관적 사실’은 그 자체 편향된 관점일 따름이라고 비판받는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의견도, 사실도, 비판 자체도. 비판은 공회전하면서, 매연을 내뿜듯이 사회적 불신의 농도를 높여왔다.

    하지만 배움의 관점에서는 애초에 표상과 실상의 이분법 같은 것이 존재한 적 없다. 단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운동이 있을 따름이다. 실망은 배움의 역사를 구성하는 마디들, 관절들, 경첩들, 쉼표들이다. 기성 비평의 대립하는 방법론들은 배움의 연속 선상에서 각자가 취하는 일부분만을 확대[crop]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견해는 일리 있는 것이지만 배움의 방법으로 일반화될 수 없다. 배움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 구조를 따라 진행될 수 있다. 어떤 기호와의 마주침은 한 사람의 실존적 문제와 강하게 연결된다. 그는 그 기호에 집착한다. 그는 처음에는 기호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을 대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매력의 비밀이 대상에 있다고 믿는다.13) 즉 작품, 예술가, 연예인, 짝사랑 상대나 질투심을 느끼게 하는 상대에게 있다고. 어쨌든 그의 배움은 홀린 듯 기호를 따라가고, 그 배움의 선을 따라 자신의 인간적 특질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그가 엄격한 당위나 ‘위아래’에 대한 의식으로 자신의 배움을 제한하지 않을수록, 그는 온갖 영역에서 온갖 타자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동료나 협력자뿐 아니라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행위자들도 있겠지만 실망과 수복의 과정에서 귀인이 적이 되기도 하고 적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배움은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타자와의 협력과 타협, 갈등과 투쟁, 배려와 얽힘을 수반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전력으로 좇던 기호와 대상의 고통스러운 불일치를 목격할 수 있다. 즉 매력의 비밀이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실망한다. 매력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이 슬쩍 가려놓았던 세속적 관계들의 효과였다(이 실망은 대상에 거리를 둔 결과가 아니라 가까이 간 결과다). 하지만 매력이 허상이라 하더라도 매혹을 통해 그가 얻은 배움은 허상이 아니다.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내가 비평이라 부르고 싶은 것)는 그가 사실은 가졌던 적도 없고 잃어버린 적도 없었던 어떤 것을 수복한다. 이를테면 배려와 번역의 기술, 실망의 공동체 같은 것을. 이러한 배움을 수용하고 입증하고 고무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매력이나 비판은 그 자체로는 공허한 것이지만 배움을 이끄는 필수적인 동력과 수단으로서 긍정될 수 있다. 비판은 비판을 통해 긍정될 수 없고 배움을 통해 긍정될 수 있다. 그러니 좋은 비평에 비판, 매력, 배움은 항상 있겠지만 그중에 제일은 배움인 것이다. 우리는 대상에 매혹되어 배움을 시작하지만 배움의 여정에서 실망을 맛본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거쳐온 배움의 역사에 거리를 둘 기회를 얻는 한편으로, 배움의 중단과 공허함, 환멸로 방황하게 된다. 비판은 이 실망과 공허함을 정당화하면서 인식의 쾌라는 보상을 준다. 우리를 전투적으로 무장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를 단련한 비판의 무거운 갑옷과 무기들은 배움의 긴 여정을 재개하기 위해 가벼워져야 한다. 물론 이것이 한 번 비판을 졸업하면 다시는 비판적으로 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비판해야 할 것들이 있고 또 배움에는 비판적 인식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환멸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비판적 입장을 요새화하지 않는다면 다른 매혹이, 배움이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주장이 여전히 너무 무비판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배움은 자칫 대상에 대한 순종이나 딜레탕트적 애호처럼 비칠 수 있다. 세상만사를 자기 배움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뻔뻔한 게걸스러움으로 비칠 수도 있다. 위선적인 자기계발 담론이나 ‘정신 승리법’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째, 앞서 말했듯 비평의 전문화 방식으로서의 ‘비판’은 그 자체 비판적으로 성찰될 필요가 있는 문제다. 둘째로 배움은 기성의 구분들, 장르들, 영역들을 가로지르고 이질적으로 여겨지는 성질이나 존재를 연결하는 과정이지만, 이 가로지름과 연결은 장르들의 ‘믹스 앤 매치’와 같은 공허한 창작술과는 다르다. 어떻게 매혹된 자가 유혹하는 자가 되고,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고, 돌봄을 받던 사람이 돌보는 사람이 되는가? 이러한 전환의 고된 과정으로서 배움은 실천적인 것이지 단지 책 속의 글이나 교수의 말로부터 얻어지는 관념이 아니다. 셋째, 배움을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으로 볼 수 있다면, 오직 비판적 상투어에 배움을 억압적으로 끼워 맞추는 한에서다. 현실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되)건 간에 배움은 그러한 구조화를 벗어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배움의 선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자신을―호명된 주체가 아니라―배움의 주체로 정체화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배움을 말하는 것은 비판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전방위적으로 위태로운/비판적인(critical) 지반14) 위에서 다르게 살고 말할 방법을 찾을 것인가? 어떻게 권위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면서, 또 ‘나는 그들보다 올바르고 똑똑하다’는 식의 자기만족으로 도피하지 않으면서 함께 변화할 것인가? 나는, 내가 통계적으로 속하게 되는 ‘세대’가 반동적, 냉소적, 반사회적으로 재현되는 것은 우리가 이 질문들에 대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의 반영일 뿐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모든 재현이 그렇듯 이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하는 동안 이것은 점점 더 견고한 사실이 될 것이다.

    ‘사실’로 재현되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식의 비판은 결코 사실을 이길 수 없다.

    10) 배움의 평등한 능력과 그것을 가로막는 허구/서사적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는 자크 랑시에르의 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방된 관객』 참조. 배움에 위아래가 없다는 말은 많은 해명이 필요하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추가적인 글을 발표하겠다.

    11)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218쪽.

    12) Felski, the Limits of Critique, 특히 “The Stake of Suspicion”(pp. 14-51) 참조.

    13) 배움과 기호, 대상과 실망에 대한 구상은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을 따르고 있다.

    14) 공간적인 비유로 말하자면, 비판적 관점에서 의견과 보편성의 관계가 로컬과 글로벌의 관계(의견:보편성=로컬:글로벌)라면 배움의 관점에서 배우는 자와 보편성의 관계는 행위자와 임계 영역(critical zone)의 관계(배우는 자:보편성=행위자:임계 영역)다. 글로벌은 세계화의 관념적 무대를 일컫는 말이지만 ‘임계 영역’은 지구 지각 주위의 얇고 위태로운 생존층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지적이면서-올바르고-세련된’ 글로벌한 기준은 없지만, 함께 살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야 하는 위태로운 세계는 있다. ‘글로벌’과 ‘임계 영역’, ‘비판’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은 브뤼노 라투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김예령 옮김, 이음, 2021, 49~50쪽 참조.

    기울어진 시, 찢어진 세계

    ―21세기 생태시 비평을 위한 제안

    『현대시』 2023 7월호

    지리역사학자 앨프래드 크로스비는 자신의 명저 『태양의 아이들』에서 석탄과 석유를 “화석화된 햇살(fossilized sunshine)”이라는 표현으로 명명한다. 한국어판에서는 그 표현을 “지구가 저장해둔 햇빛”이라고 옮겼는데, 뜻은 명확하지만 원전의 표현이 주는 ‘시적인’ 느낌은 없어졌다.1

    그래서 원전과 국역본을 나란히 살펴보면서 다음처럼 자문하게 되었다. 시적이거나 시적이지 않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2 “화석화된 햇살”이라는, 생각해보면 과학적이고 적확한―석유는 태양에너지를 머금은 동식물의 사체가 땅밑에서 혹은 바닷속에서 긴 시간 압축된 것이다―표현은 왜 시적이라는 느낌을 주는가? 마지막으로 시적 언어는 ‘자연’이나 ‘사물’과 어떻게 상관하는가?

    단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영어 표현에 낯설어서 내가 이 표현을 시적이라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미국 소설가 나디아 보작은 영화와 태양의 관계에 대한 인상적인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석유는 다른 연료보다 밀도가 높기에 값지고, 그래서 크로스비는 그것을 시적으로 ‘화석화된 햇살’이라 칭했다.”3 여기서 연료의 ‘밀도 높음’, ‘값짐’이라는 특징과 ‘시적’이라는 느낌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란히 말해지는가? 이 문장은 근대적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른 성질과 가치를 마구 뒤섞고 있는 것으로 보일 텐데, ‘밀도 높음’은 석유라는 객체의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데카르트가 ‘제1 성질’이라고 불렀던) 성질에 관련되고, ‘값짐’은 인간의 문화적, 경제적 이해관심과 가치판단을 전제하는 것이며, ‘시적’이라는 규정은 미학적 반응(칸트가 ‘무관심한 관심’이라고 불렀던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론적 이유를 따지기 전에, 그 표현에서 내가 즉시 시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아마도 다음의 시를 언젠가 여러 번 필사한 적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체조가 있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

    그렇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다.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기를 가리켜 보인다.

    무너지느라고 체조가 서 있다.

    ―이수명, 「체조하는 사람」(『마치』, 문학과지성사, 2014) 부분

    “화석화된 햇살”이라는 역사학자의 표현은 즉시 나에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라는 시인의 표현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나에게 내가 외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나를 외우는”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서 이 시는 화석이나 광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마 이 시가 ‘시간성’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면서 위 질문에 간접적으로 답할 수 있을 성싶다. 시간성은 시의 초반에는 인간적인 규모이지만, 후반에는 인간을 훌쩍 초과해 전개된다. 처음 체조를 할 때, 체조가 낯설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체조를 한다. 그러나 어떤 체조가 매일 반복되면, 몸에 익숙해지면, 의식하지 않고서도 체조를 할 수 있다. 체조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내가 체조를 외우는 것인지 체조가 나를 외우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복의 시간성은 어느 시점까지는 익숙함(숙련)과 정비례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서는 다시 인간에게 낯설어진다. 어떤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같은 체조를 하는 모습을 압축된 영상으로 본다고 상상해보자. 인간이나 인격은 무화되고, 거대한 율동만이, 체조의 하릴없는 반복만이 눈에 띌 것이다. 중국 도시의 광장에서 이름 모를 중년 여성들이 아침마다 추는 광장무에 담긴 역사를 생각하면 아득해지듯이.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은 고도로 압축된 시각성을 상상하게 하는 표현이다.4 햇빛이 화석화되어 석유가 되는 정도의 기나긴 시간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당연히 등장할 수 없다. 지구의 45억 년을 하루로 압축하면 인간은 3초 남짓 머물렀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체조하는 사람」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지고, 반복되는 체조의 운동이 남는다 해도, 체조 역시 결국 “무너지느라고” 서 있는 것이다. 지리역사적인 시간 척도에서 보면, 콘크리트 건물들 역시 여름날의 얼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나는 가끔 움직이지 않는 구름을 본다./흘러내리는 벽돌들을 바라본다”(「천천히」, 같은 책). 우리의 시간관이 이 정도로까지 확장되면 시는 세계에 대해 혹은 삶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 Alfred W. Crosby, Children of the Sun, W. W. Norton & Company, 2007; 알프레드 W. 크로스비, 『태양의 아이들』, 이창희 옮김, 세종서적, 2009. ‘fossilized sunshine/지구가 저장해둔 햇빛’은 책 2장의 제목이다.

    2 첫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는 문자와 독자의 이해 사이에 있는 시차(時差)다. “화석화된 햇살”은 감각적이지만 그 의미가 즉각 전달되는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독자가 그 의미를 곱씹고 유추할만한 여유 공간을 열어놓는다(물론 『태양의 아이들』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지리역사학 서적이며, 번역자는 다양한 문학적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것보다는 오해의 소지를 줄이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그 표현이 시적인 느낌을 주는 두 번째 이유로는 언어적 성질과 사물적 성질의 얽힘을 들 수 있을 듯하다. “화석화된 햇살”은 압축적 표현이고, 석유 역시 에너지가 압축된 것이다. 비평가나 연구자가 시에서 의미를 추출하기 위해 종종 그것을―때때로 부당하게―분류하고 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석유에서 에너지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압축된 그것을 뽑아내고 분류하고 정제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3 Nadia Bozak, The Cinematic Footprint, Rutgers University Press, 2011, pp. 30-31.

    4 비슷한 사례로 사진작가 김아타의 연작 중에 뉴욕 타임스퀘어를 여덟 시간 장노출로 찍은 사진이 있다(On-Air Project #110-1,2 Times Square from the serize “New York”, 2005). 그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으면 움직이는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여덟 시간 동안 정지해 있었던 것만 표면에 남게 된다. 낮이나 밤이나 사람으로 우글거리는 타임스퀘어는 건물이나 표지판 등의 구조물만 남고 텅 비게 된다. 김아타의 사진은 언뜻 인간종이 사라진 이후의 도시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렇다기에는 풍경이 너무 깨끗하다(동물도, 넝쿨도, 먼지도, 잔해도 없다).

    인류세와 이중의 난점

    시가 인간의 사라짐에 대한 연습이고, 인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언어의 체조라면, 그 체조 역시 결국 무너지려고 서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우리가 읽은 훌륭한 사상가와 비평가들은 ‘인간의 죽음’과 ‘예술의 죽음’을 너무 당연한 듯 연결 지어왔다. 우리가 21세기의 생태시를 말하고자 한다면, 이 당연하게 전제된 순장(殉葬)의 운명에서 예술을 해방해야 한다. 다른 시간성을 ‘인간의 시’에 겹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를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 감각을 비인간적인 수준으로 확장하는 방향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라는 개념은 시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인간의 지위에 대해 매우 이중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인간의 생활, 특히 산업화 이후의 풍요한 생활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속하는 것일 뿐임을 일깨운다. 학자마다 인류세의 시작점을 다르게 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개념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근래에 시작되었듯이 곧 끝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구 환경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대함을, 따라서 저편에 언제나 그대로 있는―잉여가치의 추출을 수동적으로 허락하는―‘자연’과 이편에서 정신없이 변하는 ‘역사’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지구에 잠시 머무르는 종이지만, 산업화 이후 인간이 소비한 닭의 뼈가 지층을 형성했다고 하듯이, 지구 환경에 지리역사학적인 규모의 영향을 끼쳤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의 세계에서 인간의 영역과 그 밖의 영역을 나누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그 두 영역이 정말 나뉜 적이 있기는 할까? 근대인들은 비인간 없이 독립적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단지 엄청나게 많은 인간-비인간 ‘하이브리드’를 동원하면서도 그것들을 진지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율배반적 사고방식을 발명했을 뿐이다.5 근대인의 복잡한 사물함은, 많은 것을 그들 뜻대로 분류하고 동원할 수 있도록 했으나, 그들이 나눌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나눠 담은 바람에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후 재난은, 라투르에 따르면 억압되었던 ‘하이브리드의 귀환’이다. 탄소, 박쥐, 코비드 바이러스, 오존층의 구멍, 가축화된 10억 마리 소, 소들 각각이 지닌 네 개의 위 속에 있는 1000조 마리 미생물 등 하이브리드들은 근대인의 이율배반적 사물함에서 쏟아져 나와 자연과 문화, 과학과 정치,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 구분을 무화시키면서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우리의 시 그리고 비평은 ‘생태’를 말하는 데 여전히 이중의 난점을 겪고 있는 듯 보인다. 즉 한편에는 인간의 존재감, 언어의 권력, 근대적 야망(해방을 향한 것이든 풍요를 향한 것이든)을 축소하고 인간은 생태사(生態史)라는 무대의 구석이나 아래로 물러나야 한다는 당위가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존재감, 야망, 권력을 축소하는 관점과 말하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막대해진 인간의 힘과 책임을 외면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문학의 무대에서 비인간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 좋다는 당위적 경향6은, 때때로 실상에 적절하지 않은 윤리적 알리바이로 작동하는 것 같다.7

    물론 오늘날 많은 연구자와 활동가가 하듯이 문학도 (근대인들이 동원하면서도 감춰두었던) 비근대적, 비인간적 존재들을 ‘가시화’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 소재의 측면에서, 비인간 존재들의 양적 증가는 환영받아야 할 경향인 만큼 비판적으로 성찰될 필요가 있는 문제다. 비인간의 비중을 늘리면서 근대성을 극복한다고 쉽게 전제하는 것은 잘못인데, 비인간을 대규모로 동원한 것이 다름 아닌 근대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지금 아주 큰 붓으로 논의의 개괄적인 윤곽을 그리고 있다. 근대문학이 비인간을 동원하는 방식과 요즘의 한국 시가 비인간을 등장시키는 방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들은 세심한 연구와 비평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2010년대 이후 많은 한국 시에서 신이 강력한 믿음의 대상이자 정당화의 심급(그만큼 치명적인 의심의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하고, 귀엽고, 어리고, 나약한 존재로 등장하는 경향이 눈에 띈다. 그러나 어떤 문화적 코드―이를테면 ‘귀여움’―를 통해서 재현되는 비인간은 우리의 편의와 기호에 따라 교화된 타자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동시대 한국 시에서 어린 신들은 우리의 감수성을 비추기 위해 거듭 불려나오는 것 이상의 어떤 구체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이 글을 통해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인간의 편을 기각하고 사물의 편을 들면서 인간 중심적 근대성을 비판한다고 전제하는 사고방식이다. 나는 그러한 전제가 시대와 장소에 맞지 않는 낡은 전략 설정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한 ‘비판’은 오히려 서구 근대의 비판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로부터 법제화된 이분법, 즉 ‘인간의 편’ 아니면 ‘사물의 편’이라는 이분법에 너무 충실하게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사물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비합법적이라는 것, 우리가 언제나 주체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칸트였다. 이후 하이데거는 형이상학과 과학의 지배가 존재를 망각하게 했다며, 존재의 진리를 보존하는 시의 언어를 찬양했다. 반면 사물을 마음대로 노래하는 시인의 권능이 마땅찮았던 프랑시스 퐁주는 은유를 배제하는 ‘사물의 편’을 주장하며 독특한 반시(反詩)를 창안했다. 서구 철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려 했던 데리다는 말년에 ‘속을 알 수 없는’ 고양이의 시선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다.8 이들은 우리가 비인간, 동물, 사물에 인간의 언어나 지식, 감관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독단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러한 비판적 겸손함에 반대하고, 과학적 사고와 시적 사유의 낡은 대립에도 반대하며, 오히려 시가―근대적, 비판적 사유가 체계적으로 억압한―진리와 실재를 향해 대범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의 이상야릇한 문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세계는 물화(物化)의 죽은 지대가 아니라 여느 모더니즘 시처럼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9

    즉 문제는 비인간과 인간 영역의 분리를 고수한 채 비인간들을 이편으로 끌어 오거나 시를 저편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인간 언어의 한계를 받아들인 채 인간의 편에서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사물과 언어가 근대적 사고방식이 상정했던 만큼 그렇게 철저히 분리된 적이 없었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5 브뤼노 라투르는 사물 세계나 인간 세계의 이분법으로 나눠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를 ‘하이브리드’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사물 세계와 인간 세계를 굳이 이분법적으로 분류한 것이 근대성의 ‘헌법’이다. 이 헌법은 사물의 표상 체제(representation system)로서의 과학과 인민에 대한 대의 체제(representative system)로서의 정치의 분할을 보장하고 발전시켰다.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특히 2장 「헌법」 참조.

    6 《요즘비평포럼》의 2023년 1회 〈비평 대화〉 코너에서 송현지는―비인간을 사고하고 관계를 감각하고자 하는 문학적, 비평적 시도들의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비인간 존재의 출현 빈도 증가와 그것들의 낭만적 전제, 혹은 동어반복성에 의문을 표한 바 있다. SNS에 공유된 송현지와 황사랑의 〈비평 대화〉 게시물을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였다.

    7 이를테면, 예술과 문학 비평에서 많이 인용되는 『생동하는 물질』에서 제인 베넷은 물질의 생동성을 보여주는 예로 2003년 북미에서 있었던 대규모 정전 사태를 언급한다. 물론 전신주, 참새, 자기장, 핵연료, 빗방울, 기업, 법률, 소비자는 근대적 지식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이며 복잡하게 상호작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대정전은 전기 공급을 민영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고삐 풀린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그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런 욕망을 제어하는 정치의 부재가 통제 불가능한 규모에 이르는 하이브리드를 동원했기 때문에 그 사태가 난 것이다. 생동하는 물질에 대한 강조는 상황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와 기업의 무책임한 이윤 추구에 가해야 할 강한 비판을 희석하는 듯도 보인다. 또 베넷은 ‘외주의 외주’로 이어지는 기업의 규모 확장에서 비가시화되는 노동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는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84-107쪽 참조.

    8 자크 데리다,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최성희·문성원 옮김, 『문화과학』, 2013년 겨울호.

    9 ita Felski, The Limit of Critiqu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p. 175. 이 책은 신형철 교수의 지도 아래 서울대 비교문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번역·강독되었다. 인용된 문장은 수업에 참여한 학우들의 번역을 참고한 것이다.

    세 가지 함정

    따라서 우리의 생태시와 비평은 다음의 함정들을 피하는 좁은 길을 찾아야 한다. 1: 비인간 존재를 인간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동원할 수 있게 하는 독단적 전제들, 문화적 코드들에 의존하기. 2: 1을 비판하면서 비판적 겸손함으로 물러나기. 3: 2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편’에서 ‘사물의 편’으로 건너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함정 1은 여전히 잔존하는 위험이기는 하나, 이론적, 비평적으로 너무나 많이 비판되어왔다. 그러니 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도록 하자.

    함정 2의 역설적 문제는, 비인간을 대변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는 역할로부터 지적, 문화적, 예술적 영역이 서서히 물러남에 따라 오히려 비인간 타자를 회의주의 속에 내버려 두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시인이자 탁월한 산문 작가였던 제발트는 “우리는 청어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썼다.10 이 문장은 인간에 의한 청어의 대규모 죽음에 대해, ‘청어는 고등동물이 아니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며 사람들을 안심시킨 당시의 과학적 합리화를 반성하고 비판하며, 동시에 청어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하거나 쉽게 연민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엄결한 자의식도 담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주장이 이제 정반대의 의도로 사용된다면 어찌하겠는가?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자. 오히려 최근 몇십 년간 과학자들은 동물 역시 감정과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를 축적해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절대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음처럼 대꾸한다. ‘과학자들이 동물 돼봤냐?’ 좀더 점잖게 말하자면 과학자들의 주장 역시 실재라는 보장은 없는데, 그들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혹은 능력상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회의주의가 우리의 문학이나 비평과 상관없는 극단적 반지성주의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 회의론자들은 인문학이 정교하게 발전시킨 비판의 어법―과학자들조차도 특정 관점에서 말할 뿐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준―을 학습했다.11 회의론자들은 ‘우리는 동물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제발트가 인간 중심적 과학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썼던) 그 문장을 갱신된 과학적 증거(‘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를 부정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러한 회의론은,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는 기후 회의론을 비롯해 근래 도처에서 극단주의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전적인 타자’는 윤리적 급진성이 아니라 그저 인간 주체의 무능력의 증상, 의미를 알 수 없는 얼룩으로 전락해버리고, 무지에 대한 인정은 앎과 염려(care)의 책임을 회피하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린다. 이 회의주의나 광신을 견제할 언어를 오늘날의 인문학 연구자나 비평가는 거의 갖고 있지 못한데, ‘전적인 타자’에 대한 접근 가능성으로부터 철학도 시도 ‘겸손하게’ 물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어렵지만 필요한 일은, 타자에의 앎을 향해,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는 것 같다.12

    그렇다면 한국 시에서도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3의 길은 어떠할까? 몇 년 전에 이수명은 이 길을 모범적으로 개척한 예로 프랑시스 퐁주와 오규원을 호명하였다. 이수명은 퐁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퐁주가 생각한 ‘반휴머니스트’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반(反)은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은유를 멀리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사물은 인간과 연결되지 않고, 인간에 동원되지 않고, 사물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13 오규원의 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나비」는 나비에 대한 생각도, 형이상학도, 정념이나 느낌도 아니다. 단지 [……] 나비라는 대상, 구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한 사실성의 추구가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본질일 뿐이다. 주체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는 객관성이 중시되는 것이다.”14

    자의적인 은유와 의미 부여를 자제하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애쓰기. 이수명의 표현대로 ‘반은유’라고 명명할 수 있을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이미 많이 논의되어왔다. 아마 이수명 자신의 시에도 오규원과 퐁주의 영향이 녹아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시는 사물의 전위로 나아가는 반인간주의적 시로 평가받기도 했다.15

    한편에 자연과 사물의 나라가 있고 반대편에 언어와 관념의 나라가 있다면, 언어의 법도를 사물에 적용하는 것은 언어의 제국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언어의 권력, 은유의 욕망, 관념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물의 편에 서고 언어의 압제에 항거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전제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3의 길에서 특히 눈에 띄는 난점은 시의 중요한 일면인 정서적 측면의 억제다. 정서 역시도 인간의 전유물이고, 종종 인간이 자연이나 사물에 덧씌우는 것이니, 사물의 편에 정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시에서 정서적인 면을 억제하거나 심지어 축출할 필요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이 길의 두 번째 난점은 “인간과 연결되지 않”은 순수 사물을, 주체와 분리된 객관의 차원을 여전히 상정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전체주의적 나라에서 시의 언어만이, 완전히 단교된 두 나라의 삼엄한 국경을 월담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듯이, 사물의 민주주의적 나라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적 은유와 정서 표현의 습성을 교정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20세기 후반에 사물의 편에 서려 했던,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비판했던 국내외의 시인, 작가, 사상가에게는 그들의 역사적 당위가 있다. 그들 작업에는 존경할만한 면이 있다. 그것들에서 현재적 의미, 새로운 전략을 발굴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당면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이 불거졌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미 정립된 전략들을 계속 취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창작과 비평 앞에는, 근대성을 명민하게 비판했던 이들이 직면한 적 없었던 새로운 함정, 이를테면 ‘반데카르트적 인간중심주의’나 ‘독단적 회의주의’라고 부를만한 혼종적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다. 또 앞서 언급한 세 개의 함정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1의 함정을 피하려다 2의 덫에 빠지고, 3의 함정을 피하려다 1의 함정으로 굴러떨어지기 쉬워 보인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세 함정 사이에 오랫동안 좁은 길을 내온 이수명의 시적 궤적에 퐁주나 오규원의 ‘사물시’를 넘어서는 면이 있다고 본다. 시인 자신은 그 선배 시인들을 높이 평가하지만(그리고 그 평가는 유익하지만), 그의 시는 오히려 자신의 시론적·비평적 관점과 각을 세우거나 그 관점을 초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부분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글의 뒷부분은 (생태와 관련해 딱히 비평된 적 없었던) 이수명의 시에서 새로운 생태적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 문제들을 확장 가능한 비평적 쟁점으로 만드는 데 할애하려 한다.16

    10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 2011, 73쪽.

    11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Bruno Latour, “Why Has the Critique Run Out of Steam? From Matter of Fact to matter of Concern”, Critical Inquiry, winter 2004, pp. 225-248을 보라. 이 글에 대한 나의 번역은 올해 가을에 『문학과사회』에 실릴 예정이다.

    12 중요한 문제는, 비판적 사유를 부정하면서 독단적, 본질주의적 전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비판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다시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느냐이다. 근래 폭넓게 호응을 얻고 있는 신유물론이나 ‘새로운 실재론’의 다양한 조류는, 적어도 이 과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13 이수명, 「은유 없는 세계 은유 없는 시」, 『시와세계』, 2015년 여름호, 18-22쪽. 강조는 인용자.

    14 이수명, 「프랑시스 퐁주의 <나비>와 오규원의 <나비> 비교 연구」, 『동서비교문학저널』, 29호, 247-64쪽. 강조는 인용자.

    15 이혜원, 「미지의 세계를 향한 진지한 놀이―이수명론」, 『계간 시작』, 2014년 겨울호, 23-38쪽.

    16 나는 이미 이수명에 대해 몇 편의 글을 썼지만, 그 글들에서 스스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누락했던 문제들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한 ‘누락’은 내가 그의 시를 생태적으로 읽지 못하고 다소 낡은 비판적 관점으로 읽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 글의 배치에는 본인의 비평적 누락을 바로잡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기울어진 시와 기후 우울증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에서 『도시가스』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보면, 건조하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인 ‘객체 지향적’ 진술들로 가득했던 이수명의 시가 점점 더 일상적이면서도 정서적으로 변해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우리가 앞서 비판했던 이분법에 머무른다면, 이수명의 시가 사물의 편에 가까운 시적 전위로 나아갔다가 인간의 편에 속하는 것들(정서, 감정, 일상, 느낌)로 물러섰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이수명의 시적 궤적이 어딘가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의 편과 인간의 편의 분리를 극복하고 횡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하려 한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느끼고, 자연 자체의 취약함을 자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이제 『도시가스』(문학과지성사, 2022)의 첫 시를 읽어보자. 이 시에는―날씨와 옷의 관계라는 이수명 시의 오래된 테마와 함께―기울어진 세계에 대한 감각이 드러나고 있다.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부분

    ‘너’는 나쁜 날씨에서,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세계에서 누더기를 입은 사람이다. 그는 왜 똑바로 서 있지 못하는가?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음과 나쁜 날씨는 무슨 상관인가? ‘기후’로 번역되는 영단어 climate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 단어가 땅의 경사를 의미하는 라틴어 clima, 그리고 기울어짐이나 기댐을 의미하는 고대 인도-게르만 공통어 klei-에서 연원했음을 알 수 있다.17 그 단어는 서사적 긴장이 극대화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클라이맥스’, 성향이나 기질을 뜻하는 ‘proclivity’, 경향과 의향을 뜻하는 ‘inclination’, 치료를 뜻하는 ‘클리닉’ 등과 어원이 같다.

    우리 존재가 본래 서로 기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언제나 편향되어 있고 취약하다는 것― 또 그렇기에 약해지는 것과 치료되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날씨가 나빠지면서 더 자명해진다. ‘너’가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로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개인적, 예술가적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날씨 때문이다. 시의 동인은 문제적 인물이 아니라 ‘문제적 날씨’다. 기후가 우리 삶에서 점점 더 존재감을 갖게 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삶의 환경인 ‘세계’의 치명적인 기울어짐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18

    그런데 더욱 특이한 점은 꿈속의 ‘너’가 화자보다 훨씬 의연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울어진 세계에 오래 살아왔고 화자보다 잘 적응한 사람처럼 보인다. 세계의 기울어짐을 처음 겪는 화자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느끼고 “피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는 “천천히 산책 중”일 뿐이다. 즉 그는 세계의 기울어짐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도시가스』에 깊이 깔린 우울한 정조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처럼 생각했다.19 물론 시집의 우울에 인식과 전환의 가능성이 잠재하며, 또 그것이 시대적 분위기를 독특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한편으로 시집의 우울이 내가 속한 세대의 우울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너’에게 “피하라”고 소리치는 위 시의 화자 같았는지도 모른다. 기울어진 세계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우울을 해결하거나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딘가 기울어지지 않은 세계, 평탄하고 안전한, 중립적 세계가 있으리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전제로 시집을 읽은 것은 잘못이었다. 이 시집의 세계를 산책하는 사람은, 벗어날 곳 없이 기울어져 있고 불안정한 세계를 계속 걸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가스』의 산책은 ‘구기후체제’에 안전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신기후체제(New Climate Regime)’에서 살 방법을 찾는 “지구생활자(Earthbound)”의 체조라고 볼 수 있다.20 인간은 자연의 반대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려 하지만, 지구생활자는 자신의 기울어짐이 다른 존재들의 기울어짐과 불가결하게 얽혀 있음을 안다. 인간의 사망일과 예술의 사망일이 꼭 일치할 필요는 없는데, 이제 우리는 인간의 시가 아닌 지구생활자의 시를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가스』의 우울함이 단지 주관적인, 담론적인 증상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시집의 우울함은 날씨, 분위기, 대기에 대한 지속적인 정서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기후 우울증’으로 맥락화될 수 있을 듯하다.21 기후 우울증은, 말 그대로 이해하자면 기후변화에 연동되어 의욕의 저하와 수면장애, 생각과 감정의 변화, 공허함, 자살 충동 등을 겪는 심리적 상태다.22 그러나 이러한 임상적 정의는 기후 우울증이라는 주체적 현상이 문학과 비평에 요구하는 존재론적 성찰을 담지는 못한다. 기후 우울증은 자연과 사회, 환경과 인간, 심지어 건강과 질병의 구분을 헝클어 놓는 하이브리드적 현상처럼 보인다. 그것은 변화의 치명적 예측 불가능성과 동시에 누가 더 피해에 실존적으로 노출되어 있는가 하는―사회적 불평등과 정서적 민감성을 포함하는―문제를 제기한다. 또 그것은 사실상 세계를 구획하는 선험적 경계가 없고 오히려 날씨, 재화, 물질, 피부, 신경, 언어, 타인의 감정 표현 등이 극히 복잡하게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는 우리의 정서와 가치관에 어떤 지속적 영향을 끼치는가? 자외선을 쬐라는 의사의 반복된 말은 우리의 생활 습관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비가 올 때마다 감정이 변하는 연인과 보내는 장마철은? 재난과 관련된 기사에 실린 황폐한 바닷속 사진은? 치솟는 물가와 긴급재난문자는? 이런 감정적, 정서적 문제에서 무엇이 실재적이고 무엇이 담론적인지, 무엇이 문학적이고 무엇이 일상적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바로 이것이 책, 전단지, 폐쇄된 사진관, 사라진 날벌레, 긴급재난문자, 폭우, 진흙탕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울한 화자(「물류창고」, 『도시가스』, 35-37쪽)가 겪는 이 세계의 모호함이다.

    한편 이 우울을 단순히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도 안 될 것이다(이런 종류의 단순화는 합리성을 보수적으로 옹호하는 쪽과 합리성을 비판적으로 공격하는 쪽 양편에서 모두 일어날 수 있다). 여전히 근대 철학적인 합리성에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신체, 정동, 욕망, 무의식, 물질―을 맞세우면서 그 합리성에 대항하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근대적 합리성에 의해 도입되었을 뿐인 이성과 비이성의 단순한 이분법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 세계가 기울어져 있고 균열이 가 있으며 취약한 만큼 나도 기울어지고 취약한 것이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일이다(그러나 이 합리성은 자연의 총체적 원리를 암시하는 ‘섭리’와는 상관없고, 차라리 그것에 반대된다). 국가나 기업이 인간과 다른 종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된 기후 문제를 축소하고 등한시한다면 거기에 강한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다.23 요컨대 정서, 감정, 취약함, 기울어짐을―갈수록 권위와 신뢰를 잃고 있는 근대적 편견이 아니라면―꼭 합리성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7 https://www.etymonline.com/word/climate

    18 물론 매일의 ‘날씨’는 현상이고, ‘기후’는 그 현상들의 경향과 원인을 아우르는 시스템으로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시집, 나아가 한 시인의 궤적에서 날씨에 대한 반응이 지속적으로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러한 현상과 반응을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어떤 경향과 구조를 시적 기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후는 심리적, 담론적, 시대적인 것이지만 동시에―이 시집이 구성되고 유통되는 세계의 조건이라는 의미에서―실재적이기도 하다.

    19 이희우, 「나의 우울과 나무의 기쁨」,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265-78쪽.

    20 ‘신기후체제’와 ‘지구생활자’는 라투르의 개념이다. 라투르는 홀로세의 안정된 기후에 바탕한 자연의 관념, 삶의 방식의 짜임을 ‘구기후체제’로, 기후변화 이후 달라지는 사고와 존재 방식의 짜임을 ‘신기후체제’로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 현재 드러날 필요가 있는 정치적 적대는 구기후체제에 머무르고자 하는 ‘인간’과 신기후체제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는 ‘지구생활자’의 거대한 대립이다. 이에 대해서는 Bruno Latour, Facing Gaia, trans. Catherine Porter, Polity Press, 2017, 특히 7장 참조.

    21 이 글에서 다루는 ‘기후 우울증’의 개념과 맥락을 내게 귀띔해준 것은 사회학자 조민서이다. 그는 현재 ‘기후 우울증자의 주체성’이라는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22 https://wellcome.org/news/explained-how-climate-change-affects-mental-health

    23 기후 재난과 관련해 강한 주장을 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활동가들을 두고 일각에서 너무 감정적이라고, 비합리적이라고, 극단적이라고 조롱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렇게 ‘비판적 거리’를 취하며 반대로 자신들은 합리적이고 온건하다는 식으로 구는 오만한 태도는 비속어로 가득한 인터넷 댓글에서부터 지식인의 교양 있는 지적, 기업의 친환경 전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물론 그들의 ‘합리성’ 역시 편향되었고, 특정한 관점을 전제함을 드러내며 그들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한 ‘비판적 상대화’가 이제 전혀 참신하지도 효과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약간의 합리성을 탈환할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없다면 ‘합리성’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나 보수주의의 전유물로 남겨두게 될 것이다.

    찢어진 자연

    하지만 이러한 정조가 단지 인간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취약함이 자연의 취약함과 어떻게 긴밀히 관계하는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도시가스』에 실린 시들 중에서 가장 사변적이면서도 난해한 시―“모더니즘 시처럼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는―를 한 편 더 읽어보려 한다.

    한 번은 풀밭에 서 있었다.
    앞만 보고 풀만 보고
    풀 속에 죽어버린 쥐가 있었다.
    죽은 채 발견되는 일을 생각한다.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멀리는 못 간 것이다. 안 보이게 되는 순간까지
    가지는 못한 것이다.

    풀이 찢겨 있기 때문이라고
    찢긴 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두 사람이 풀밭을 따라 걸어갔다.
    풀이 돋아나면 오세요
    남자는 남자에게서 비켜서고 여자는 여자에게서 비켜서고
    남자는 여자를 가리고 여자는 남자를 가리고
    두 사람이 풀을 따라 걸어갔다.
    풀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풀을 밟지도 않고
    풀을 누르지도 않고 걸어갔다.
    풀 위에서 동작은 실현되지 못한다.
    자연이 먼저 찢겨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도 무심한 풀은 돋아나고 이리저리 아무 데나 돋아나고 심심풀이로 돋아나고 머릿속에도 돋아나고 그래서 머리가 이상해지고 머리를 숙여도 아무리 숙여도 머릿속의 풀을 토하지는 못한다.

    한번은 풀 위에서 웃었다.
    풀의 전위
    발끝을 세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도
    풀은 다시 반짝이고

    ―「풀 위에서 웃었다」 전문

    첫 연에서 화자의 계획은 이미 어그러진 상태다. 그러나 화자는 “안 보이게 되는 순간까지” 도약하지도 못한다. 풀밭은 뭐든 뜻대로 되지 않고, 그렇다고 벗어날 수도 없는 공간이다. 도약 혹은 탈출을 금지하는 환경이다. 이수명은 십여 년 전에도 “모든 도약이 사라진 풀밭”(「누워 있는 사람」, 『마치』)에 대해 쓴 바 있다. 시대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이 풀밭에 “누워 있는 사람은 감정에서 떨어져/감정이 되려는 사람/감정과 교대하는 사람/육체보다 길어진 사람”이었다(같은 시). ‘누워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적 감정에서 떨어져나오는데, 그것은 그가 감정이 없는―초연하고 중립적인―존재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됨’을, 즉 세계의 분위기, 정조, ‘기분(stimmung)’에 열리게 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풀 위에서 웃었다」에서 인간의 내적 의지에 따른 도약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존재론적으로 모든 비약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 더 결정적이면서 치명적인 도약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데, 4연에서 볼 수 있는 바대로,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으로서의 “자연이 먼저 찢겨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먼저 찢겨 있”다는 표현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연의 균열과 비약, 현격한 변화는 인간이 자연에 투사한 의미나 이미지가 아니다(오히려 인간이 자연에 투사한 것은 안정된 객관적 상태였다). 자연은 인간의 투사나 의미 부여가 있기 전부터 이미 찢겨 있다.24

    그런데 이 시에서 한층 문제적이고 이상한 것은, ‘자연이 먼저 찢겨 있다’는 진술이 위 3연의 내용과 공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연결되고, 한편으로는 “풀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일견 반실재론적인) 느낌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객관적, 전체적인 자연이 없다면 감지할 수 있는 자연 자체가 없어진다는 듯이 말이다. 이 풀기 어려운, 모순된 듯한 시의 꼬임은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나를 고민하게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나는 이 시의 감각(분열의 지각과 실체가 없는 듯한 느낌)과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을 듯한 어떤 사변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뤼스 이리가레의 다음과 같은 진술.

    자연은 적어도 둘이다. 둘이란 남성과 여성이다. 보편적으로 자연을 극복하려는 모든 사변은 자연이 하나[一者]가 아니라는 점을 망각한다. 그 사변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이 추론은 필수적이다―분절점으로서의 실재를 만들어야 한다. [……] 보편적인 것은 하나로서 사유되어왔고, 하나에 기반해 사유되어왔다. 그러나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25

    이는 자연, 보편,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보편적이고 실재적인 ‘자연’은 분열의 형식으로, 비(非)전체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연의 분열에 ‘남자와 여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칫하면 양성에 대한 본질주의로 퇴행할 위험이 있을 듯 보인다. 바로 이러한 우려가 자연적, 보편적 실재를 말하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동시대 비판적 분위기의 중요한 축을 구성한다.26 그러나 이 구문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반드시 둘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둘이라는 점이다. ‘둘’은 자연을 뿔뿔이 상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전체나 총체로 여기지 않기 위한 최소 조건을 표시한다. 말하자면 (사회적 영역에 선행하는) 남자와 여자의 자연적 본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불완전한 것들로의 나뉨과 침투가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찢어지고 기울어진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고 기묘한 말이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 ‘실체’를 파악한다는 뜻이 아니고, 대상과 주체의 합일이라는 뜻도 아니며, 차라리 세계의 기울어짐/찢어짐을 몸소 겪고, “그래서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을 감내하는 일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돌아가야 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은 없다.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세속적 세계에서 ‘인간’만 말소하면 ‘자연’이 회복되리라는 망상도 가능하지 않다. 한편으로 예술의 ‘단독성’이라는 근대적 관념에 비추어보면, 세속적, 생태적 연결에 대한 강조는 자칫 예술의 자율적 지위를 약화시키리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바로 이러한 대립적 사고에 반대하고 싶었다. 시인이 너무 개입하고 작위를 부리면 사물의 생생함은 퇴색하고, 심지어 언어를 사용하는 즉시 사물이 죽을 것이라 말해지곤 했다. 반대로 사물에의 천착이 예술의 주체성을 감퇴시키고 시를 물화시킬 것이라고(즉 정신적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하는 경우도 여전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함양해야 하는 것은, 시인이 무언가를 하면 사물 역시 더 강해지는 그런 연결과 염려의 기술들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시인이 언어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인이 많은 사물, 타자와 연결되는 한에서다. 또 그런 연결을 통해 예술을 더 자유롭고 아름답게 하는 미학적, 비평적 기술 역시 필요하다. 시가 약간의 자율성을 갖는다면, 그것이 일상어나 사물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독특한 연결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연결은 빼어난 시의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시집의 유통과 확산, 독자의 반응에서도 역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인간의 죽음=예술의 죽음’이라는 공동 운명을 의문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편 대(對) 사물의 편’이라는 근대적 분리에 반대하고자 했다. 원론적인 문제 제기이지만, 이 두 가지 과제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가 생태시 비평의 관점을―과거 시와 비평의 중요한 유산들을 간직하면서도―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정향하는 과제에도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기후 문제에 이론적일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강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나는 시인의 다음 문장을 믿게 되었다. “이 세계가 등이 없어서 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방명록」, 『마치』). 『도시가스』에 드러나는, 찢어지고 기울어진 ‘아무개’의 보편성은 근대 철학의 규제적, 총체적 보편성과 다르다. “모두 다 휩쓸린다. [……] 너는 손발이 벌써 없어진 옆 사람에게 괜찮냐고 물어본다. 괜찮아……”(「이 노을」, 『도시가스』).

    25 Elzabeth Grosz, “The nature of Sexual Difference”, Journal of the Theoretical Humanities 17, p. 74에서 재인용. 이 글에서 그로츠는 이리가레와 다윈을 연결하여 섹슈얼리티의 담론적, 문화적 측면과 자연적, 생물학적 측면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26 정신분석 이론가 조운 콥젝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을 ‘현대적 회의론’의 범례적 예로 비판한 바 있다. 버틀러의 이론이 젠더를 담론적, 사회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섹슈얼리티의 ‘실재’를 등한시하거나 심지어 금기시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콥젝은 섹슈얼리티가 단순히 자연적인 것도, 단순히 담론적인 것도 아닌 ‘실재’라고 주장한다. 조운 콥젝, 「성과 이성의 안락사」, 박대진·조창호 옮김, 『성관계는 없다』(김영찬 외 엮음, 도서출판 b, 2005), 89-139쪽 참조. 이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철학적 논의를 잘 정리한 논문으로는 김남이, 「성의 존재론과 존재론적 성: 버라드, 그로스, 주판치치의 경우」, 『한국여성철학학회』38, 2022, 67-115 참조.

    스트럼·라투르,「사회적 연계를 재정의하기: 개코원숭이에서 인간까지」

    Redefining the social link: from baboons to humans

    S. S. Strum and Bruno Latour

    Social Science Information 1987 26: 783 DOI: 10.1177/053901887026004004

    The online version of this article can be found at: http://ssi.sagepub.com/content/26/4/783

    셜리 스트럼, 브뤼노 라투르(1987)

    오역 있을 수 있음.

    지난 십 년간, 인간/비인간 사회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가 사회의 본성 그리고 사회적 연계에 대한 기성의 사고에 은밀히 도전해왔다. 그 정보들의 모호함과 불일치는 사회를 단순한 용어로 정의하려는 앞선 시도들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 부조화와 불일치는 그저 더 많은 정보와 더 나은 방법론이 마련된다면, 또 이데올로기와 아마추어리즘으로부터 과학적 시도를 더욱 격리한다면 교정될 “실행상의 어려움”의 결과일 뿐일까? 이 논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관습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문제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하려 한다.

    만약 불일치야말로 실재이며, 기존 맥락의 틀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틀 짓는 방식의 변화가 불러올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사회에 대한 대안적 패러다임들을 살펴본 다음, 한 가지 특정 사례를 검토할 것이다. 그 사례는 바로 개코원숭이 사회에 관한 생각들의 역사다. 그다음 사회적 연계의 진화에 관한 우리의 생각에 사회의 다른 의미들을 적용했을 때 생겨나는 결과들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치”의 진화 [문제]를 포함한 기성의 인간·비인간 사회학이 지닌 여러 문제점을 분석할 새로운 틀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칠 것이다.

    사회의 개념을 재정의하기

    탐색과 포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사회과학은 “사회”가 명확히 정의된 객체가 될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채택해왔다. 사회의 행위자들은, 사회학 학파마다 그들에게 부여하는 활동성의 정도가 다를지라도, 어쨌든 더 큰 사회에 속한다. 이는 사회과학자들이 규모의 차이를 사고함을 의미한다. 즉 미시 층위(행위자들, 구성원들, 참가자들)와 거시 층위(전체로서의 사회)(Knorr and Cicourel, 1981). 지난 이십 년간, 사회에 대한 이 지시적 정의는 에스노메소돌로지(Garfinkel, 1967)와 과학 사회학(Knorr and Mulkay, 1983)에 의해, 그리고 특히 사회과학들(Law, 1986)과 기술 사회학(Latour, 1986a)에 의해 도전받아왔다. 이런 연구들 덕분에, 미시 층위와 거시 층위의 관습적 구분은 흐려졌고, 사회에 대한 전통적 정의는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그 대신 사회는 그들의 “작업” 과정에서 “층위”를 침범하는 활동적인 사회적 존재에 의해 지속적으로 구성되거나 “수행된다”는 관점이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원칙과 실천의 측면에서 다른 두 입장, 즉 지시적ostensive 모델과 수행적performative 모델은 사회적 연계가 어떻게 특징지어지는지에 대해 결정적으로 다른 결론을 내린다. 두 관점은 다음처럼 요약될 수 있다.

    ――사회적 연계에 대한 지시적 정의

    1. 원칙적으로, 사회를 하나로 묶는 전형적 속성들, 사회적 연계와 그것의 진화를 설명하는 속성들을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실천적으로, 그것들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 이런 속성들과 요소들은 사회적이다. 만약 이와 다른 속성들이 포함된다면 그때 사회에 대한 설명은 경제학, 생물학, 심리학 등의 영역일 것이다.

    3. 사회적 행위자들(그들의 규모가 미시적이건 거시적이건 간에)은 하나로 정의되는 사회 안에 있다. 행위자의 활동적인 정도에 따라 그들의 활동은 제한될 텐데, 그들은 거대한 사회의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4. 행위자들이 사회 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의 원칙들을 밝혀내는 데 관심이 있는 과학자들에게 유용한 정보원이다. 그러나 행위자들은 사회의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설령 그들이 “지각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전체 그림을 보거나 알 수 없다.

    5. 적절한 방법론이 있다면 사회과학자들은 사회를 하나로 묶는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행위자의 신념과 행동을 구분할 수 있다. 그렇게 고안된 전체로서의 사회의 그림은 그 속에 있는 개별 사회적 행위자들로서는 접근 불가능하다.

    이 전통적 패러다임에 따르면, 사회는 존재하고, 행위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규칙과 구조에 따라 그것에 들어간다. 사회의 전반적인 본성은 행위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질 수도 없다. 사회 바깥에 서 있는 과학자들만이 그것을 전체적으로 보고 이해할 능력을 지닌다.

    ――사회적 연계에 대한 수행적정의

    1. 사회생활에 특유한 속성을 설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실천적으로 가능하다.

    2. 요소들, 속성들의 다양성은 사회적 행위자들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적 연계에 관여한다. 그것들의 다양성은 순수하게 사회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학, 생물학, 심리학 등의 영역을 포괄할 수 있다.

    3. 실천적으로, 자신과 타자들에 대해 행위자들은(그들의 규모가 미시적이건 거시적이건 간에) 사회가 무엇인지 전체와 부분 양쪽에서 정의한다.

    4. 사회를 “수행하는” 행위자들은 그들의 성공을 위해 무엇이 필수적인지 안다. 이 앎은 부분에 대한, 전체에 대한, 신념과 행동의 차이에 대한 지식을 포함할 것이다.

    5. 사회과학자들은 다른 여느 사회적 행위자들처럼 질문을 제기하고, 과학자들이 아닌 이들보다 더도 덜도 아닌 정도로 사회를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정의를 강제하는 다른 실천적 방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수행적 관점에 따르면, 사회는 그것을 정의하려는 수많은 노력으로 구성된다. 즉 사회는, 그것을 정의하려고 분투하는 과학자를 포함한 모든 행위자의 수행으로 달성되는 무언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 행위자는, 가핑클의 표현(1967)을 사용하자면, “문화적 백치dopes”에서 사회의 활동적 달성자로 변모하게 된다. 이 관점에서는, 행위자들 간의 관계에서 사회적 연계를 찾는 것보다는, 행위자들이―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그들의 탐색을 통해―어떻게 그런 연계를 달성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전통적 체계에서 수행적 체계로 이동하면 두 쌍의 반비례 관계들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모든 행위자 사이의 낯선 대칭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비대칭을 지시한다. 첫 번째 반비례 관계는 다음과 같다. 행위자가 활동적일수록, 그들은 다른 행위자와 분리되지 않는다. [활동적 행위자에 대한] 이러한 변화된 정의는 그 행위자가 사회가 무엇인지, 무엇이 사회를 결속하는지, 사회가 어떻게 대체될 수 있는지 조사하는 완전히 숙련된 사회과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비대칭 관계는 다음과 같다. 행위자들이 동등해 보일수록, 원칙적으로는, 그들이 사회를 달성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수단 때문에 그들 사이의 수행적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제 이러한 원칙들이 개코원숭이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겠다.

    개코원숭이: 생각들의 역사

    우리가 대다수의 서구 철학자보다 개코원숭이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다윈이 말했을 때, 그는 사실 개코원숭이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Darwin, 1977). 다른 동물들의 행동과 사회에 대한 근대적 과학 연구를 개시한 것이 바로 다윈주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개코원숭이에 대한 전-과학적인 통속적 생각은 그들이 질서 없는 짐승들의 무리여서 전적으로 사회적 조직화가 부재하며, 무작위로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Morris and Morris, 1966). [그러나] 최초의 “과학적” 연구는 [개코원숭이 집단에서] 질서 있는 사회의 한 면모를 포착해냈다. 원숭이에 대한 초기의 실험적 연구(Kemmpt, 1917)와 포획된 개코원숭이에 대한 연구(Zuckerman, 1932)는 야생에서의 그 동물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의 지식만을 포함하고 있었다(Marais, 1956, 1969; Zuckerman, 1932). 그럼에도 이 연구들은 개코원숭이가, 매우 단순하게 조직된 것일지라도 사회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 연구들에서는] 성과 지배력이 주요 요인이었다(Maslow, 1936; Zuckerman, 1932). 성, 혹은 암컷에 성적으로 접근하려는 수컷의 열망은 사회를 하나로 유지했다. 개코원숭이는 질서 있지만 단순한 영장류 사회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고전적인 표상representatives이었다.

    1950년대에 개시된 근대적인 개코원숭이 현장 연구들(DeVore, 1965; DeVore and Hall, 1965; Hall, 1963; Washburn and DeVore, 1961)은 영장류의 행동을 그것의 본성적인, 즉 진화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하려는 선구적 시도에 속한다(Washburn and Hamburg, 1965; Washburn et al., 1965). 그 연구들은 사회가 성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님을 암시했다. 대신 사회적 구조는 수컷의 공격성의 영향력과 거기에서 기인하는 지배 계급에 의해 구성되었다. 성적이지 않은 사회적 유대가 무리를 결속했다. 워시번과 드보어, 홀(DeVore and Hall, 1965; Hall and DeVore, 1965; Washburn and DeVore, 1961)은 각자의 결과를 비교하면서, 그들이 연구한 개코원숭이가 세 종이 포함되어 있고 수백에서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다른 무리인데도 유사하다는 점에 감명받았다. 사회적 생활로 조직된 특정 개코원숭이의 사례뿐만 아니라, 지리와 종차(種差)에 상관없이 개코원숭이는 동일한 사회를 유지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유인원 현장 연구가 급증했고, 개코원숭이 연구 역시 마찬가지였다(e.g. Altmann and Altmann, 1971; Ransom, 1984; Rowell, 1966, 1969; Stoltz and Saayman, 1970). 다양한 서식지에서 행해진 개코원숭이에 대한 관찰은 개코원숭이 사회에 관한 기존의 생각에 도전했다. 우간다의 숲에 사는 개코원숭이(Rowell, 1966, 1969)에게는 수컷의 안정적인 지배 체계가 결여되어 있었고, “적응적인” 수컷의 다채로운 행동이 일찍 보고되었다. 수컷의 지배 질서보다 친족 관계와 우정이 개코원숭이 사회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Ransom, 1984; Ransom and Ransom, 1971; Strum, 1975a, 1982). 이러한 새로운 발견은 인식된 특정 동물들을 개별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하는 것을 비롯한 새로운 방법론들 덕분에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관찰된 개코원숭이 무리들은 ‘표준’에서 갈라져 나왔고, 개코원숭이 행동 방식의 다양함은 종의 우세 패턴과 진화론적 해석 모두를 약화시켰다.

    종 내 변동성이라는 난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늘어나는 불일치(그리고, 함축적으로 말해서 개코원숭이 행동의 증가하는 예측 불가능성)를 누락시키는 것뿐인데, 이는 관찰자들의 정보와 관점을 거부하는 일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이러했다. 개코원숭이 집단들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고, 다만 연구들이 부정확했을 뿐이다. 개코원숭이 사회의 구조는 고정적인 것으로, 다양한 관찰의 심층에 존재한다.

    그러나 개코원숭이들(그리고 다른 유인원 종들) 속에서 보고된 수많은 변동은 방법론적 논쟁을 결국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과학자들은 행동 방식과 사회가 모두 가변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e.g. Crook, 1970; Crook and Gartlan, 1966; Eisenberg et al., 1972; Gartlan, 1968; Jay, 1968; struhsaker, 1969). 어려운 문제는 가변성을 좌우하는 원칙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들은 생태학과 계통발생학이었지만, 결국 [그것들이 아니라] 1970년대 중반의 사회생물학적 접근(Wilson, 1975)만이 새로운 종합을 제공했다. 이 개조된 진화론적 틀은, 사회적 원칙에 관한 의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했다. 고정적인 요소는 사회적 구조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개체의 유전자형에 있었다. 초기의 진화론적 공식이 암시했던 것처럼, 집단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선택되는 것이었다. 사회 자체는 안정적이지만 그 사회는 개체의 결단, 진화적 안정전략(Evolutionary Stable Strategy, ESS),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ESS들의 “우연적” 결과였다(Maynard Smith, 1976; Maynald Smith and Parker, 1976; Maynard Smith and Price, 1973).

    [그런데] 사회생물학적 해결책은 사회를 달성할 수 있는 ‘근접원인으로서의 수단들’에 대한 의문의 여지를 남겼다. “궁극적” 시나리오에서는 ‘스마트 유전자 계산기’가 적절한 행위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전체 개체는 사회의 실제 참가자로서 공존, 경쟁 또는 협력했다. 개코원숭이(그리고 영장류) 연구의 가장 최근 단계는 이러한 근접원인의 층위를 다뤄왔다. [그 연구들에서] 정보는 주로 야생에서의 개코원숭이를 장기간 연구하면서 얻어진다(연구 현장: 케냐―엠보젤리, 길길/레이키피아, 마사이마라; 탄자니아―곰베, 미쿠미; 보츠와나―오카방고).

    최근의 연구는 우리의 논의에 대단히 흥미롭다. 최근 연구 동향은 사회생물학적인 “스마트 생물학” 논의가 허용했던 것보다 개코원숭이가 더 풍부한 사회적 기술과 사회적 의식을 가졌음을 인정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사회적 기술은 협상하기, 시험하기, 평가하기, 조종하기를 포함한다(Strum, 1975a,b, 1981, 1982, 1983a,b,c, 근간; Western and Strum, 1983). 유전자에 의해 번식 성공률을 극대화하도록 추동되는 수컷 개코원숭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단순히 자신의 크기나 힘 혹은 지배 서열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설령 지배력만으로 충분하[게 설명될 수 있]다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개코원숭이는 누가 우세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지배력은 사실fact인가 가공물artefact인가? 그것이 가공물이라면, 누구의 가공물인가? 개코원숭이의 사회를 찾고 있는 관찰자의 것인가? (심지어 고전적인 지배력 연구에서도, 조사관은 지배 계급을 “발견”하기 위해 음식을 둘러싼 경쟁으로 수컷들을 짝지어 넣으면서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혹 그것은 관찰자와 개코원숭이 모두가 풀어야만 하는 보편적 문제인가?

    최근의 증거가 제시하듯이 개코원숭이들이 누가 누구와 동맹인지, 누가 누구를 이끄는지, 어떤 전략이 그들의 목표를 더 잘 성취하는지 알아내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시험한다면, 개코원숭이와 과학자 양자는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코원숭이가 지속적으로 협상하고 있다면, 사회적 연계는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변모한다. 약간 다르게 말해보자. 개코원숭이가 안정적인 구조 속에 들어가 있지 않고 오히려 그 구조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협상하는 중에 있고, 그 협상으로 모두를 떠밀고, [그것의 진행을] 관찰하고 시험하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단순한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개코원숭이 사회의 다양성은 “수행적” 문제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증거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훨씬 명백해진다. 만약 들어갈 수 있는 구조가 [미리] 존재했다면, 왜 시험하고, 협상하고, 관찰하는 그 모든 행동이 마련되었겠는가(i.e. Strum, 1975a,b, 1981, 1982, 1983a,b,c; Boese, 1975; Busse and Hamilton, 1981; Cheney, 1977; Dunbar, 1983; Gilmore, 1980; Hamilton et al ., 1975; Hausfater, 1975; Kummer, 1967, 1973, 1978; Kummer et al ., 1974; Nash, 1976; Packer, 1979, 1980; Popp, 1978; Post et al ., 1980; Rasmussen, 1979; Rhine, 1975; Rhine and Owens, 1972; Rhine and Westlund, 1978; Sapolsky, 1982, 1983; Seyfarth, 1976; Smuts, 1982; Stein, 1984; Walters, 1980, 1981; Wasser, 1981)? 그리고 개코원숭만이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비인간 유인원인 것도 아니다(e.g. Bernstein and Ehardt, 1985; Chepko-Sade, 1974; Chepko-Sade and Olivier, 1979; Chepko-Sade and Sade, 1979; DeWaal, 1982; Drickamer, 1974; Gouzoules, 1984; Kaplan, 1978; Kleiman, 1979; Parker and MacNair, 1978; Seyfarth, 1977, 1980; Silk, 1980).

    우리는 지금까지의 개코원숭이 데이터와 논의를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개코원숭이 사회에 관한 전통적이고 지시적인 정의는 개코원숭이의 사회생활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수용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부 정보는 “데이터”로 취급됐고 다른 정보는 무시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불일치로 처리됐다. 둘째, 더 최근의 연구들은 개코원숭이들이 서로 협상하고, 시험하고, 감시하고, 간섭하는데 극히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의 수행적 정의는 우리가 두 가지 “사실”의 집합을 통합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개코원숭이는 무리 안의 존재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사회와 무리, 그것의 구조와 경계를 정의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들은 계급제 내부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들의 활동 자체가 그들의 사회적 세계를 질서 지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변화하거나 고정적인 계급 구조는 개코원숭이가 반드시 적응해야 하는 사회의 한 지배적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상호작용의 기반을 위한 탐색의 잠정적인 결과로서 발전한 것일 수 있다. 사회를 수행하는 개코원숭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동맹체제에 들어가기보다는, 어떤 관계가 유지되고 어떤 관계가 깨질지 미리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동맹의 가용성과 견고성을 시험한다. 요컨대, 수행적 [관점에서 본] 개코원숭이들은 그들의 사회가 무엇이고 무엇이 될지를 적극적으로 협상하고 재협상하는 사회적 참여자들이다.

    사회에 대한 수행적 설명은 전통적인 모델보다 종적(縱的)인 데이터를 더 잘 해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포식자의 행동 방식(Strum, 1975b, 1981, 1983), 수컷의 상호작용(Strum, 1982, 1983a,b), 세력 투쟁의 완화(Strum 1982a,b), 사회적 전략(Strum, 1982, 1983a,b, 근간), 사회적 계략의 발전(Western and Strum, 1983), 주요 연구 집단의 분열(Strum, 근간)을 조사할 때 사실로 드러난다. 사회를 “수행하는” 개코원숭이[라는 아이디어]는 또한 교차-인구적 데이터와 원숭이나 유인원 등 다른 종의 데이터를 더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하게 해준다.

    사회적 복잡성과 사회적 복합성

    우리가 개코원숭이를 그들 사회의 활동적 수행자들로 변모시킨다면, 그들을 인간과 나란히 놓게 되는 것인가? 수행적 패러다임은 [둘 사이에] 중요한 구별을 [또한] 도입한다. 차이점은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개별적 버전을 실행하는 행위자가 사회의 버전을 강제하거나 거대한 규모로 타자를 조직하기 위해 사용하는 실천적 수단이 무엇이냐에 있다.

    행위자들이 오직 자신만을 가졌다면, 즉 자원으로 가진 것이 자신의 몸뿐이라면,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과업은 어려울 것이다. 아마 이것이 개코원숭이들의 경우일 테다. 그들은 누가 집단의 일원인지, 무엇이 집단의 적절한 단위체로 고려되어야 하는지, 다른 단위체와의 상호작용의 본질이 무엇인지 등을 결정하려 애쓰지만, 이러한 사안을 한 번에 하나씩 나누어 집중하거나 결정할 수 있게 하는, 단순하거나 단순화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나이, 젠더, 그리고 아마 친족 관계는 대부분의 상호작용에서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지배 체계의 확장도 친족 관계와 연계되므로, 지배 서열 역시 조건으로 주어질 수 있다(Chapais and Schulman, 1980; Hausfater et al., 1982). 그러나 나이, 친족, 친족에 연계된 지배[체제]조차도 결정적 지점에서는 협상의 대상일 것이다(Altmann, 1980; Cheney, 1977; ChepkoSade and Sade, 1979; Popp and DeVore, 1979; Trivers, 1972; Walters, 1981; Wasser, 1982; Wasser and Barash, 1981). 즉 수많은 변수가 동시에 충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잡성complexity의 정의이다. 즉 복잡성은 “다수의 대상을 동시에 감수하는 것”이다. 개코원숭이에 관한 것인 한, 그들은 다양한 요소를 한 번에 소화하려 한다.

    이제 우리는 개코원숭이가 복잡한 사회에 살고 있고 복잡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사회 질서를 구축하고 보수할 때, 그들은 아주 제한된 자원, 그들 자신의 몸, 자신의 사회적 기술, 그들이 구성할 수 있는 여느 사회적 전략만을 활용한다. 우리 관점에서 한 번에 하나의 요소를 협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비슷한 문제를 지닌 다른 이의 간섭을 끊임없이 받는 개코원숭이는 민속방법론자들ethnomethodologists이 묘사하는 능동적 구성원의 이상적인 예다. 이러한 제한된 자원으로는 약간의 사회적 안정성만을 이룰 수 있다.

    더 강대한 안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추가적인 자원뿐이다. 즉 몸에 각인된 것과 사회적 기술로 이룰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물질적 자원과 상징들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강제하고 강화할 수 있고, 사회생활을 복잡성에서 우리가 복합성complication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무언가가 단순한 작업의 성공적 산물일 때 그것은 “복합적”이다. 일련의 단순한 단계들을 밟아나가는 기계에 의해 업무가 달성된다는 점에서, 컴퓨터는 복합적 구조의 전형이다. 우리는 복잡성에서 복합성으로의 이동이 사회생활의 유형들을 결정적이면서도 실천적으로 구별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개코원숭이의 사회생활을 이해하려고 개코원숭이 관찰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먼저, 개체들은 식별되고 이름 붙여졌으며, 집단의 구성은 나이, 성별, 친족, 그리고 지배 서열[등의 요인]에 의해 측정되었다. 행동 양식의 항목들은 식별되고, 규정되고, 코드화되었다. 그러고 나서, 동시에 일어나는 다양한 상호작용 중에서 개체들, 시기들, 활동들로 구획된 한 부분집합에 의도적으로 주의가 집중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절차가 그저 개코원숭이 사회에 실존하고 그 사회에 대해 알려주는 사회 구조에 도달하는 엄정한 방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과학적 작업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사회에 대한 지시적 정의에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우리의 [수행적] 관점에서는, 인간 탐구자가 개코원숭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행한 작업은 그야말로 인간 사회를 개코원숭이 사회와 다르게 만드는 과정 그 자체다. 근대적인 과학 탐구자는 변화하고, 모호하고, 하릴 없는 행동, 관계, 의미의 복잡성을 단순하고, 상징적이고, 명확하게 다듬어진 항목들의 복합적 배열로 대체한다. 이러한 단순화는 중차대한 과업이다.

    어떻게 사회적 복잡성이 사회적 복합성으로 이동하게 되는가? 그림1은 우리가 이 진행을 상상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선은, 우리의 용어로 말하자면 복잡한 사회성을 띠는 개코원숭이식 사회를 나타낸다. 이 사회는 복잡하지만 복합적이지는 않은데, 개체들이 타자들을 거대한 규모로 조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회적 협상의 높은 강도는 자기 버전의 사회를 타자에게 강요하지 못하는, 혹은 사회를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것으로 관철하지 못하는 그들의 상대적 무력함을 반영한다.

    두 번째 선은 가설적인 수렵 채집 무리를 표시하는데, 이들이 사회를 구축하는 데 이용하는 물질적, 상징적 수단은 근대적 산업 사회에 비교하면 빈곤하지만, 개코원숭이와 비교하면 풍부하다. 여기서 언어, 상징, 물질적 대상은 사회적 질서의 본성을 탐지하고 협상하는 과업을 단순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사회를 수행하는 데 있어 몸들은 각자의 사회적 전략을 지속하지만, 더 거대하고, 지속적이고, 덜 복잡한 규모에서 그렇게 한다. 물질적 자원, 그리고 언어와 관련된 상징적 혁신은 개체들이 타자에게 더 많은 힘을 행사하고 영향력을 가지게 함으로써 사회적 질서의 본성을 규정할 수 있게 한다.

    세 번째 선은 농경 사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서는 사회적 유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 사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회적 유대는 개체의 상대적인 부재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다. 이 사회는 수렵 채집 무리에서보다 더 복합적이고 강력하며, 협상의 각 단계가 훨씬 덜 복잡하기 때문에 더 거대한 규모에서 사회를 수행할 수 있다.

    근대 산업 사회는 도표의 네 번째 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 개체들은 타자를 장대한 규모에서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다. 우리의 설정에 대입해보면, 산업 사회의 기술은 다른 인간, 동물 사회와 비교했을 때 사회적 과업들을 덜 복잡하게 하면서 더 복합적으로 만드는 단순화의 기술이다. 다양한 요소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한 번에 하나의 변수를 순차적으로 협상함으로써 안정적인 복합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사회적 복합성[이 증대되는]의 과정에 운용되는 육체 외적인extra-somatic 자원을 통해 다국적 기업, 주나 국가 같은 단위체가 구성될 수 있게 된다(Lature, 1987). 우리가 스케치한 동향은 개코원숭이에게서 발견되는 복잡한 사회성에서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복합적 사회성으로 흘러간다. 타자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사회에 대한 자신의 버전을 강요하거나, 영속적인 사회적 질서를 만들 힘을 거의 갖지 않은 개체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개체가 사회적 협상을 단순화하기 위해 더더욱 많은 물질과 “육체 외적인” 수단을 운용하는 상황을 마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타자―이때 타자가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닐지라도―를 거대한 규모에서 조직할 능력을 개체들에게 부여한다. 새로운 추가적 자원을 사용하면서, 사회적 행위자들은 (수컷 개코원숭이 사이의 동맹처럼) 약하고 재협상의 여지가 있는 연합을 강하고 파괴할 수 없는 단위체로 만들 수 있다(Callon and Latour, 1981; Latour, 1986a).

    수행적인 사회적 유대의 진화

    수행적 틀을 채택하면 두 가지 중요한 공식이 뒤따라 생겨난다. 첫째로 그것은 모든 사회적 참여자에게 완전한 활동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또 함께 사회를 만들어내며, 이론적으로는 모두 동등하다. 하지만 둘째로,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인적 관점에 따라 타자를 조직하고 사회적 유대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강요하는 행위자들의 실천적 수단을 고려할 때, 새로운 비대칭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사회적 유대의 진화를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뒤따르는 내용은 진화적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의 의미에 대한 분류이다.

    우리는 사회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 즉 “연합하기”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한 행위자가 사회적 연계를 유지하도록 할 수 있는가? 어떤 연합이 더 강해지고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연합은 약해진다. 개코원숭이에서 인간에 이르는, 복잡성과 복합성에 대한 우리의 비교 작업은 자원들이 사회의 구축과 안정성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회라는 단어에 대한 어원 역시 참고할 만하다. 그것의 뿌리는 seq-, sequi이며 그 뜻은 “뒤따름following”이다. 라틴어 “socius”는 함께하는 동료, 파트너, 동지, 동반자, 일행을 뜻한다. “socio”는 함께 뭉친 것, 연합, 공동으로 하거나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언어들에서 “사회”라는 단어의 역사적 계보는 첫째로는 누군가를 뒤따르기, 그다음엔 등록하기나 협력하기, 마지막으로는 공동으로 무언가를 갖기라는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세 가지 뜻은 개코원숭이에게 꽤 잘 들어맞는다. 사회의 다음 뜻은 상업적 사업의 지분을 갖는 것이다. 사회 계약으로서 “사회”는 루소의 발명품이다. “사회” 자체를 사회적 문제이자 질문으로 여긴 것은 19세기의 혁신이다. 비근한 단어로 “사교적sociable”은 사회 집단에서 예의 바르게 지낼 수 있는 개인의 기술을 가리킨다. 단어의 변천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듯, 사회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좁아졌다. 모든 연합과 동연적인[연합의 모든 방식을 아우르는] 정의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 용법에서 사용하는 ‘사회’의 의미는 연합에서 각자 전담하는 부분을 취하는 정치, 생물학, 경제, 법, 심리학, 경영, 기술 기타 등등을 뺀 나머지로 제한된다.

    우리가 지지하는 수행적 틀은 사실상 “사회”라는 단어에 연합이라는 원래의 [폭넓은] 뜻을 돌려준다. 이러한 정의를 사용하면 사회를 달성하는 조직체들의 실천적 방식을 비교해볼 수 있다. 그림2는 수행적인 사회적 유대의 가능한 진화 방식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행위자가 사회를 만들고 연합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자원의 유형에 집중했다. “자원”이라는 관념을 특정 의미로 제한하지는 않았다.

    사회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설명에서 ‘사회’가 최초로 의미하는 것은 동종의 군집이다(Latour ans Strum, 1986과 거기에 포함된 자료들을 참고). 그러나 대부분의 설명은 군집과 사회적 기술의 기원을 구별하는 데 실패한다. 군집이 한 번 생겨나면, 그 원인이 뭐가 됐든 간에(e. g. Alock, 1975; Hamilton, 1971), 우리의 모델에서는 두 개의 다른 전략이 가능하다. 첫째는 행위자가 가능한 한 타자에게서 달아나고 분리되는 것이다. 이 선택지는 잠깐의 번식기나 일시적인 연합을 제외하면 혼자 있는 반사회적 동물을 발생시킨다.

    두 번째 선택지는 더 흥미롭다. 군집을 이룬 개체가 [무리에서] 달아나지 않는다면, 그/그녀는 새로운 동종의 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 이는 동물의 품행을 다루는 문헌에서 [재현되는] 가장 일반적인 사회의 의미다. 일원이 동종의 타자들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 말이다.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기술을 획득하는 것은 대체로 동종간에 형성되는 환경에 대한 이차적 적응이다. 새로운 사회적 환경에서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개체는 더 영리하게 타자들을 조종하고 계책을 부릴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사회적 선택지가 한 번 골라지고 나면, [다시] 두 가지 다른 가능성이 출현한다. 첫 번째 경우에는 유전자형이 사회적으로 구분될 때까지 변형된다. 곤충 사회는 행위자들의 몸이 비가역적으로 조형된 곳의 예다. 이와는 다른 사회의 의미를 두 번째 선택지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경우 유전자형은 유사한 표현형을 낳는다. 이런 표현형은 개체들의 끊임없이 향상되는 사회적 기술에 의해 조작된다. 이 선택지는 또한 두 가지 대안으로 갈라진다.

    개코원숭이는 그 중 첫 번째 예를 제공한다. 사회적 기술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행위자의 정의에 타자를 등록[동참]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개코원숭이는 “무른soft 도구”밖에 갖고 있지 않고, 따라서 “무른” 사회밖에 건설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몸, 지성, 그리고 장기간 축조한 상호작용의 역사 말고는 자신의 정의를 타자에게 설득시키고 요청할 다른 방도가 없다. 이는 복잡한 과업이고, 오직 사회적으로 “영리하고” 능숙한 개체만이 개코원숭이 사회에서 성공적이기를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사회적 유대를 정의하고 강화할 추가적인 수단을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맞은 예로는 물질적 자원과 상징들을 과업을 단순화하는 데 활용함으로써 사회를 창안하는 인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사회적 상호작용은 더 복합적으로 되지만 덜 복잡해진다. 개코원숭이의 경우에 타자들 속에서 사회를 달성하는 데 많은 기술이 필수적이었다면, 이 선택지에서는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유대의 창안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 결과로 행위자들은 이제 사회를 만들려고 출현하기보다는 그들을 압도하는 물질적 사회에 끼워 넣어지는 것처럼 보인다(앞서 논했던 [사회에 대한] 전통적 패러다임[의 관점]).

    인간 사회에서 추가적인 갈래들이 나뉜다. “원시적” 사회는 최소한의 물질적 자원들로 형성된다. 자원의 증가는 “근대” 사회를 낳는다. 따라서 [자원을 동원하는] 테크놀로지는 거대한 규모로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의 유일한 해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의 테크놀로지는 사회적이다. 그것은 사회의 수행과 개채들의 동원에 쓰이는 더 많은 자원을 재현한다represents.

    우리의 이론적 모델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개체들이 한 번 군집을 이루고 서로를 피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동종간의 새로운 경쟁적인 환경에 이차적으로 적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적응에는]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하다. 다른 표현형을 얻기 위해서 유전자형을 조작하기(진사회적eusocial 곤충), 아니면 향상된 사회적 기술로 유사한 유전자형의 표현형을 조작하기. 사회적 삶에 적응하는 유사한 몸들에게는 다시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오직 사회적 기술만을 활용하여 사회를 건설하기(비인간 유인원), 아니면 사회적 유대를 규정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추가적인 물질적 자원과 상징들을 활용하기(인간 사회). 인간 단계에서 다른 유형의 사회들은 그 사회가 사용하는 새로운 자원의 범위에 따라 형성된다.

    정치

    사회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탐색은 정치에는 어떻게 적용될까? 그 대답은 물론 정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Mackenzie, 1967). 가장 간단하고 넓은 차원에서, 정치는 단순히 “현명한, 신중한, 기민한 사람”에 의해 혹은 “편의에 맞고, 능숙하게 고안된 조치”로서의 정책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옥스퍼드 영어사전). 슈베르트(1986)는 종간 발전적 비교를 허용하는 정치의 정의를 제안했다. 그에게 정치란, 개인이 밀접한 관계의 타자가 아니라 큰 사회 집단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에게 영향력과 통제력을 미치는 양식이다. 이러한 집단 안에는 집단의 문화적 규범을 결정하는 정책을 통제하기 위해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하위 집단이 있다.1

    우리의 접근과 슈베르트의 제안 모두, 동종에 영향을 미치고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정치적 행위에서 중요한 측면으로 본다. 사회에 대한 수행적 정의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사회적 연결을 협상과 통제를 위한 활동적 시도로서 구상했다. 종들 사이의, 그리고 인간 집단들 사이의 차이점은 타자를 조직하고, 동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규모에 있다. 우리의 모델에서 물질적 자원과 상징은 (개체가 타자에게 최소한의 영향력을 갖는) 제한된 안정성을 지닌 “무른” 사회와 (타자가 어떠한 현재하는 존재 없이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이고 “강한” 사회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사회적 유대의 진화에 대한 우리의 버전을 통해 사회적 유대를 재정의하고 그것의 발전을 추적했듯이, 사회성의 시작에서 정치적 행위의 시작을 식별해낼 수 있을까? 개체들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이고 그들을 압도하는 사회로 진입한다는 전통적 관점은, 분명히 개체가 “행위자”가 되고 “사회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주도권을 가질 때 정치적 행동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러한 [정치적] 주도권은 진화적 시간 척도에서 매우 늦게 나타난다. 하지만 모든 행위자가 어느 정도는 사회를 “수행”하며, 처음부터 조사하고 탐사하고, 협상하고 재협상하는 활동적인 참여자라면, 우리는 정치적 행동의 시작점을 어디에 적당히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주요한 협상이 표현형의 출현 이전에 벌어진다는 이유로 진사회적 곤충을 배제해야 할 것인가? 인간이 아닌 영장류는 그들의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자원의 범위에 의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므로 배제해야 하는가?

    슈베르트의 “생물학적 행동주의”에 입각한 정의의 요점은 비인간 영장류에 정치적 행위를 부여하는 일(적어도 최근의 몇몇 연구가 했던 일(e.g. deWaal, 1982))에 주의를 촉구하는 것인 한편, 우리 논의의 요점은 우리가 “사회”라고 부른 것과 정치라고 정의되어 온 것 사이에 더 밀접한 관련성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개미, 개코원숭이, 그리고 이를테면 펜타곤의 기술관료들 사이의 중대한 차이를 지우지는 못한다.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차이의 근원을 강조한다. 즉 사용되는 자원들과 그들을 동원하는 데 요구되는 실천적 작업 말이다. 자원에 대한 우리의 정의에서 가령 유전자, 권력, 언어, 자본 및 기술은 모두 점점 더 지속적인 방식으로 타자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간주된다. 정치는 다른 것들과 분리된 하나의 행동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치는 많은 이질적인 자원들을, 갈수록 점점 더 부수기 어려워지는 사회적 연결고리로 엮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 최근까지 “문화적 규범”은 선험적으로 비인간 동물을 배제해온 듯하다. 이제 동물의 “정신적 모델”에 대한 증거가 불거지고 있다(e.g. Griffin, 1981, 1984).


    크리스틴 로스, 『공동의 유복』 서문

    

    Kristin Ross, Communal Luxury–The Political Imaginary of the Paris Commune, London: Verso, 2014.

    오역 있을 수 있음.

    서문

    이 책에서 나는 1871년 파리 코뮌으로 알려진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또 그 사건보다 오래 살아남은 상상계imaginary―파리 코뮌 지지자들과 내가 “공동의 유복”이라고 이름 붙였던 상상계―의 요소들을 한데 모아보려고 했다. 1871년 봄의 72일 동안 벌어진 노동자 주도의 반란은 파리라는 도시를 자치권 있는 공동체로 바꾸어 놓았으며, 결속과 협력의 원칙에 따라 사회생활의 자유로운 조직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로, 그해 봄 파리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유럽 주요 도시의 서민들이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던 힘과 능력을 엘리트 지배 계급에게 행사한 것에 대한 충격에서부터, 그에 대한 국가적 보복의 야만성에 이르기까지―은 논란과 분석을 불러일으켜 왔다. 내가 여기에 스케치한 코뮌의 역사적 풍경은 지금 살아있는 것인 동시에 개념적인 것이다. “살아있는”이라는 말을 통해서 내가 의미하는 바는, 말해진 단어 자체, 채택된 태도들, 반란자들과 그들의 동료 여행객들 그리고 가까운 동시대의 지지자에 의해 수행된 물리적 행동들을 포함한 구체적인 질료들materials이다. 개념적으로, 그 단어와 행동 들이 그 자체로 많은 논리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나는 뒤따르는 페이지[이 책]에서 그것들에 따라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행동가들의 말과 창안을 집요하게 지속함으로써 우리가 코뮌의 구심적인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코뮌이 영감을 준 방대한 양의 정치적 분석 가운데, 파리 코뮌 지지자들Communard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심지어 그 사건의 기억에 정치적으로 동조하는 작가와 학자들로부터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상―반란군들이 했던 것, 자신들이 행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한 것, 그들이 자신의 행동에 부여한 중요성, 그들이 포용했거나 수입했거나 반발한 이름들과 말들―의 대부분[의 내용]은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가령 좌파 편집자 프랑수아 마스페로에 의해 (코뮌이 높은 주목을 받았던 마지막 기간인) 1960년대와 70년대에 재발행된 책들을 통해 말이다. 나는 사건 뒤에 코러스처럼 이어지는 정치적 논평이나 분석―찬양하는 것이든 비판하는 것이든―보다는 그들[행동가들]의 목소리와 행동 들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선호해 왔다. 나는 코뮌의 성패를 따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 이후에 오는 운동, 반란, 혁명을 위해 코뮌이 제공할 수 있거나 계속 제공해 온 직접적인 교훈을 알아내는 데도 관심이 없다. 과거가 실제로 교훈을 준다는 것은 내게 전혀 분명하지 않다. 발터 벤야민의 경우에서처럼, 나는 특정한 사건이나 투쟁이 현재의 형태화 역량figurability에 생생하게 개입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믿으며, 오늘날 바로 코뮌의 경우가 그렇다고 본다.

    2011년 세계적인 정치적 장면은 진영 혹은 직업의 형상과 현상학이 지배하고 있었고, 직업적인 형식의 항의로의 회귀는 (내가 1980년대에 이미 썼던, 코뮌에 활기를 불어넣은 역사적인 시인들의 문제와는 다른 일련의 문제 설정과 함께) 다시 나를 파리 코뮌의 정치 문화로 돌아가도록 밀어붙였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오늘날의 정치적 의제를 지배하는 관심사들―인터네셔널주의자의 결합, 교육의 미래, 노동, 예술의 지위, 공동-형식 그리고 생태학적 이론과 실천 등을 어떻게 개조할 것이냐 하는 문제―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코뮌의 문화를 바라보는 방식(바로 그들의 생각이 이 책 속에서 스스로 구조화되도록 함으로써)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대체로, 나는 오늘날의 정치 속에 코뮌의 반향들을 확고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비록 내가 그러한 반향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말이다. 그 ‘반향들’ 중 몇몇은 농담 같은 것인데, 『뉴욕 타임즈』가 2011년 11월,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의 한 거리에서 이름을 모르는 젊은 활동가를 인터뷰하면서 ‘루이즈 미셸’이라고 소개한 경우가 그렇다.[1]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찾는 데 썼던 노동자들과 장인들이 코뮌을 결성한 19세기의 노동 환경보다 한술 더 뜨는 자본주의의 동시대적 형식―노동 시장의 붕괴, 비공식적 경제의 증가, 과도하게 개발된 세계의 사회적 연대 시스템의 약화―아래 오늘날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몇몇 미래학자가 십년 전에 주장했던, 그리고 오늘날에도 계속 주장하려고 발악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창의적인 테크노-유토피아의 실체 없는[비유물론적]immaterial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은―특히 그리스나 스페인 등지에서 사회가 와해된 이후로―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파트타임으로 일하거나, 공부와 일을 동시에 하거나, 그들이 하기 위해 훈련 받았던 전공과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해 찾은 일 사이에 걸쳐 있거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통근 혹은 이주해야 하는 머나먼 거리와 타협하는 등―은 모두 나에게,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것처럼, 우리 부모님 세대의 세계보다 코뮌 지지자들의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비디오 게임 디자인, 해지펀드 매니저, 스마트폰의 관료 체계bureaucacy에 자기 커리어의 궤적을 위임하고 있는 오늘날의 젊은 사람들, 즉 다양한 비형식적 경제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 위한 공간과 방식 들을 개척하려 애쓰고 있고, 번성하는―파국적 위험이 숨어있지만―글로벌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지금 다르게 살기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해 보는 젊은 사람들이, 1870년대 쥐라 산에서 발발한 코뮌 참여자 난민과 동료 여행객 사이에 있었던 논쟁에 관심을 기울이리란 생각은 내게는 완전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무정부주의적 코뮤니즘”이라고 불리는 것의 이론화를 이끌었던 그 논쟁은, 공동체의 세력을 탈중심화하는 문제, 어떻게 그들이 실체가 되어 번성할지의 문제, 그리고 유대 관계 속에서 그들 각자가 “연합”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코뮌의 반향을 오늘날의 정치 문화와 사건들에 더 명확한 방법으로 적용하기를 삼간다면, 현재, 특히 1989년 이후로 내가 그 사건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그 사건이 그것을 재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 정박한 두 가지 지배적인 역사학으로부터 출항하는―마치 랭보의 「취한 배」처럼, 해방되는―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지배적인 역사학이란, 한편으로는 공식적인 국가-공산주의자의 역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공화국의 국민적national인 역사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주입된 계통lineages과 서사적 구조들로부터 해방된 그것을 다른 틀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조급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국가-공산주의의 종말은 코뮌을 공식적인 공산주의 역사학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역할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그것은 1989년 이후로, 러시아혁명의 33번째 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있었다는―그다지 사실임직하지 않은―레닌의 춤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날, 새로운 혁명이 오래된 것을 실패한 혁명으로 변경시켰다는 그 혁명이 코뮌보다 하루 더 길게 지속되었다는 날로부터 말이다. 그리고 내 논쟁의 대부분은 코뮌이 한 번도 정말로 ‘프랑스 공화주의의 영웅적인 급진적 시퀀스’라는 프랑스의 국민적 허구―그것을 ‘19세기 말의 발작적인 반응’으로 치부하는―에 속했던 적이 없음을 명확하게 하는 방향을 따른다. 우리가 만약 코뮌의 잘 알려진 참여자 중 하나인 구스타브 쿠르베의 기록, 즉 코뮌이 지속되는 동안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기를 포기했다”[2]는 말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또 죽었던 그 파리의 반란자들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그랬다는 거창한 신념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파리 코뮌의 상상계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중간 계급의 국민적 공화주의자들도, 국가 주도형 집산주의도 아니다. ‘공동의 유복’은 그것을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의 유복이 아닐뿐더러, 공리주의적 국가 집산주의자들이 20세기 전반세기에 경험했던 지배적인 세력의 성취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다른 참여자들이, 몇 년 후 코뮌의 정치적 구조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평가 한가운데, 다음과 같이 주장했던 게 아닐까 한다.

    사건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옹호자들을 통해 [……] 코뮌은, 미래를 위한 더 우월한 이상 하나를 건립한다. [……] 그것의 탄생에 관한 전문가도 있을 수 없는, 타이틀이나 부유함도 없는, 카스트제건 봉급제건 간에 근원적으로 노예제가 없는 이상 말이다. 도처에서 “코뮌”이란 단어는 가장 거대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즉 새로운 인간성을 나타내고, 자유롭고 평등한 승리자들을 만들어내며, 낡은 범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게 하고, 다른 세계를 향해 하나의 세계가 끝난 평화 속에서 서로 돕는 것으로서 말이다.[3]

    부르주아지가 분리된 상태로 남겨 놓기 위해 분투하는 사회적 지형의 영역들―도시와 시골뿐만 아니라 이론과 실행,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 등―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코뮌의 포용력으로,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역사를 전혀 다른 기초 위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그 기초와 역사는 자신의 윤곽에 따라, 정확히 “프랑스적인” 혹은 국민적인 사유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것의 윤곽은 한편으로는 그보다 작았고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다. 코뮌의 상상력은 국제주의적인 지평선 속에 있지만, 지역 자치 단위의 규모에서 우선적으로 가동된다. 그것은 국민[적 차원]에서, 혹은 마찬가지로, 시장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자신을 위한 공간을 갖지 못한다. 코뮌의 상상력이 발생시킨 맥락―그것이 대대적으로 패퇴하게 되었던, 프랑스 국가나 억압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자리잡은 시점보다, 그토록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더 나은 순간이란 무엇인가?―속에서, 코뮌은 욕망들의 극히 강력한 집합으로 드러날 것이다.

    앞서 이 서문을 시작할 때, 나는 코뮌을 노동자 주도의 반란이라고 일컬었다. 72일동안 지속되었던 그 반란은, 파리를 협력과 유대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삶이 재구성되었던 코뮌의 자치 구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여러 요소를 가진 사건의 일면만 재현하는 이와 같은 단순한 묘사도 문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공동의 유복”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사건을 ‘파리 거주자들의 72일’―대포를 나포하려 시도한 3월 18일부터 5월 말 대학살의 마지막 피의 날들에 이르기까지―로 제한하는 통상적인 연대적이거나 지형학적인 틀을 넘어 확장시켜야만 한다. 알랭 달로텔과 다른 이들을 따라, 나는 그 사건을 제국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노동자 계급의 모임과 클럽에서 분출되었던 열기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본다. 또 나는 그 사건을 엘리제 레클루, 앙드레 레오, 폴 라파르그, 구스타브 르프랑세, 그리고 다른 이들을 비롯한 코뮌 참여자 난민들과 영국과 스위스의 망명자들이 그들의 지지자들과 동료 여행객들―마르크스, 크로포트킨, 윌리엄 모리스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협력했던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생산된 사유의 광범위한 탐색과 함께 끝마친 것으로 본다. 비록 지리적으로 봄의 반란으로부터 멀리 있지만, 그 사건의 동시대인들인 후자의 세 사람―덧붙이자면, 내가 다른 곳에서 그에 대해 쓴 바 있는 아루튀르 랭보의 경우처럼―은 몇 주 동안 파리에서 있었던 격변이 그들의 삶과 사고의 전환점이 된 많은 사람들에 속한다.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코뮌을 관습적인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넘어 이러한 두 개의 인접한 장면으로 흘러넘치는 것으로 변경하고자 해왔다. 확장된 시간성은 [첫째로] 나로 하여금, 내전을―그것이 흔히 그렇게 규정되는 것처럼―국제전이 야기한 상황적인 곤궁과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결과로 보지 않도록 해준다. 사실, 그와 정반대의 시야를 갖게 한다. 계속 진행 중이던 내전의 한 순간적인 양상으로서 국제전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4] 둘째로, 프랑스 바깥으로의 망명의 움직임을 뒤쫓고 그에 따라 발생한 이론적 생산물들을 우선시하는 것은(그것의 선도적인 사상가들, 가령 프루동주의자들이나 블랑키주의자들보다), 일종의 이후의 삶[내세적 삶]afterlife―그러나 정확히 말해 나의 관점에서는 이후에 온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의 본질적 부분인―이주, 교차, 생존자들의 기록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해준다. 프랑스 단어 survie[생존, 사후의 삶, 내세 등을 동시에 의미하는 명사]는 이것을 아주 잘 상기시켜준다. 즉 삶을 넘어선 삶. 사건의 추억이나 전통이 아니라―비록 그것들의 일부 형식이 확고하게 형성되는 중이라 할지라도―사건의 연장으로서, 도시의 거리들에서 있었던 반란의 최초 행동들까지, 사건의 논리를 위해 모든 조각을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것.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투쟁의 지속이다. 앙리 르페브르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있는 것과 개념적인 것 사이의 변증법’ 속에서, 운동에 대한 사유는 오직 운동과 함께, 동시에 오직 운동 이후에 발생한다. 즉 운동 자체의 창조적 힘과 스스로에 대한 과잉으로서 촉발된다. 행동이 꿈과 이상을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사건의 과잉된 부분과 아주 긴밀하게 결속된 사유는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내는 이론의 잘 조율된 수완을 갖고 있지 않다. 그 ‘거리’가 지리적인 것이건 연대기적인 것이건 말이다. 그 사유는 [사건의 과잉된 부분의] 순간을 인내심 있게 추적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를 그 순간의 실질적 구축의 지속되는 한 부분으로서 바라본다. 따라서 투박하지만 건설적인 사유가 된다. 그것은 소위 통상적으로 “고급 이론”이라고 말해지는 것과는 거의 닮지 않았다. 『프랑스 내전』은 『자본론』과는 다른 종류의 책이다. 그리고 예컨대 르클뤼와 모리스가 때때로 거칠고 체계 없는 사상가들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유를 맥락context―이념들이 그 순간에 생산적인 동시에 즉각 효과를 낼 수 있는 장소로서의 맥락의 창조와 구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십오 년 전 처음 엘리제 르클뤼에 대해 썼을 때, 그의 작업은 드문 몇몇 개척적인 반식민주의적 지리학자들, 가령 베아트리체 기블린과 이브 라코스테 등의 연구들을 제외하곤 사실상 알려진 바가 없었다. 오늘날 그는 막대한 양의 국제적 관심―미완의 생태학의 한 종류로서 그의 작업을 재고하려는―의 중심에 있다. 무정부주의에 대한 그의 저술들 역시, 크로포트킨의 저술들처럼, 새로운 관심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윌리엄 모리스 역시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사회주의적 생태학”의 논의를 설립한 하나의 목소리로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학술적 관점은, 나 자신의 사유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잠깐 지나치듯 언급하는 것을 제외하면, 모리스, 크로포트킨, 르클뤼의 정치적 사유에 근간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즉 모리스가 “우리가 1871년 파리 코뮌이라 부르는, 노동의 자유를 근본으로 하는 사회를 설립하려는 시도”[5]라고 불렀던 것과 더불어 역사적 관계를 사유하는 것 말이다. 그 연결성을 설립하는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단원에서 하는 작업 일부이다. 또다른 초점은, 이 세 작가의 작업 속에 있는, 르클뤼가 연대라고 불렀고, 모리스가 “동료애”라고 불렀으며, 크로포트킨이 “상호 도움”이라고 불렀던, 심오하고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사유rethinking를―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감수성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지침으로서―비교해보는 것이다.

    운동의 즉각적인 사후적 삶survie―참여자들의 일생 동안 있었던 일―을 추적하면서, 나는 르클뤼가 자신이 쓴 책 중 가장 좋아했던 책 『시냇물의 역사L’Histoire d’un ruisseau』에서 빌려온 이미지 하나를 상기하곤 한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 쓰였고 종종 교내의 상으로 주어지기도 하는 그 작은 책에서, 그는 “바다의 파도가 물러난 뒤 모래에 나타나는 물길의 작은 체계”[6]의 구불구불한 형태를 상기시킨다. 우리의 목적에 따라 ‘파도’가 코뮌의 막대한 열정과 업적, 그리고 그것들을 파괴했던 대학살의 폭력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작은 물길은 거대한 힘으로 상충하는 두 운동 한가운데서, 공기가 통하는 작은 체계가,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가, 예측하기도 전에, 모래 위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급격한 변화와 교차와 협력을 포함한, 드물고 종종 수명이 짧은 동료들의 연대의 상징적 형태인 그 체계는, 아마도 일시적momentary이겠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무언가의 계기가 되는] 하나의 순간momentum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전하고자 노력한 내용이다. 또 『시냇물의 역사』는 다른 면에서도 우리에게 유익한데, 그것이 코뮌의 불균형한 역사적 힘을, 그 사건의 비교적 미시적인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책은 피에르줄 헤셀, 쥘 베른, 프루동, 투르게네프로부터 의뢰받은 시리즈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전형적으로 19세기 중반의 백과사전적 야망(흔히 역사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물들과 성분들의 역사, 즉 “역사들의 문학”을 청소년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그 시리즈를 고안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유명한 천문학자는 하늘의 역사를 써 달라고 요청받았고, 비올레 르 뒤크는 브뤼셀 시청사와 대성당에 대해 저술했다.[7] 개울과 시냇물에 관해 쓰겠다는 르클뤼의 선택은, 일종의 병적이지 않은non-pathological 지리학적 규모, 예를 들면 들판이나 마을 혹은 지역 등에 대한 그의 선호를 반영한다. 아마 코뮌은, 르클뤼가 그의 책에서 산개울에 대해 갖춘 태도와 자질을 통해 가장 잘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태도의 규모와 지리학은 살아가기에 적합한livable 것이지만, 거창한 것은 아니다. 르클뤼의 관점에서 개울은, 그것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강보다 더 나았다. 강물의 급류는 무수한 흐름에 의해 미리 조성된 깊은 고랑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반면 개울은 자신의 길을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어떤 산개울의 물줄기의 강도는 아마존의 강과 비교했을 때 비례적으로 더 커진다.


    [1]Malia Wollan, “Occupy Okland Reground, Calling for a strike,”, New York Times, November 1, 2011. [루이즈 미셸(1830~1905)은 대표적인 코뮌 참여자 중 한명으로서, 시인, 교육자,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역주]

    [2]Gustave Courbet, letter to his parents, April 30, 1871, in Petra Ten- Doesschate chu, ed., Correspondance de Courbet (Paris: Flammarion, 1996), p. 266.

    [3]Elisée Reclus, in La Revue blanche, 1871: Enquête sur la Commune[1897](Paris: Editions de l’amteur, 2011) pp. 81-2. Here and elsewhere, translations from French are mine.

    [4]여기서 ‘국제전’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을 말한다. 저자는 코뮌의 반란이 프로이센의 침략에 대항한 것이었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관점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역주.

    [5]William Morris, “The Hope of Civilization,” in A. L Moton, ed., the political writing of Willam Morris (London: Wishart, 1973) p.175.

    [6]Elisée Reclus, Histoire d’un ruisseau (Paris: Actes sud, 1995), p.93.

    [7]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 르 뒤크(1814~1979)는 프랑스의 건축가, 중세 미술사가이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