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숙 평론가와의 대화 1부

1부: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악인의 서사/가시성의 경제
2부: 남성학의 부상/한국 남성성 분석/몸과 외모의 문제/실망에 관하여
희우
우리가 만난 지 한 4년 됐나요? 생각보다 오래됐고, 사실 우리 이야기도 꽤 자주 하는 편인 것 같은데요.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니,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이 누군가, 했을 때 이연숙이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부담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연숙 님이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이미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한 시간이 꽤 되다 보니까, 이야기해볼 법한 주제가 쌓인 것 같아서 이렇게 공개하는 대화를 해보자고 제안했지요.
연숙
대화하자고 말씀해주셔서 기뻤어요. 근데 한 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생각보다 이런 대화가 품이 많이 들고 준비할 것도 많잖아요. 무슨 마감이 있는 대화가 아니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도 되고요. 언제 공개를 해야 하고, 누가 읽을 것이고 이런 문제들을 하나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 제안해주신 게 작년 4월이더라고요.
희우
1년 전이네요.
연숙
드디어 이렇게 대화할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다……(??)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
희우
간단한 소개를 해주세요.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어떤 관심사, 어떤 주제로 글을 써오셨는지.
연숙
기본적으로 미술, 영화, 만화와 같은 시각 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관심사라고 했을 때는 조금 더 구체적인 것들이어야 될 텐데, 제가 지금 딱히 말할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소개를 하는 게 더 좋을까요?
희우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을 키워드 정도……
연숙
아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관점을 담은 글을 써왔고요. 특히 지배 규범과 문화에 복종하면서도 저항하는, 모순적인 주체 양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주체 양식은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판다고 말하긴 어렵겠네요. 제가 전문 분야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만물 비평가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희우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본격적인 주제를 얘기하기 전에 비평 쓰기, 비평을 쓰는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관심사 하나를 꼽기 어렵고, 한 분야를 말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마침 저도 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비평 쓰기에 거의 필연적으로 따르는 어떤 어려움, 뭐랄까 업무적인 산만함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연구자와는 달리, 비평가로서는 새롭게 나오는 작품들이나 문화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에 계속 빠르게 반응을 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딜레당티즘 같은 게 있잖아요. 뭔가 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게 아니라, 피상적으로 이것저것 다 건드리는 그런 태도로써 딜레당티즘이요. 저 자신도 그렇고, 제 주변에 비평하는 분들이 많다 보니, 그런 태도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거든요.
연숙
저도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는 게,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전부 두꺼운 책을 쓴 사람들이에요. 한 5년, 10년씩 어떤 주제에 헌신하는 그런 분들의 연구를 존경하는데, 실제로 제가 하는 일은 보따리 장사나 보부상 같은 일이죠. 그분들의 일이 집을 짓는 일이라면, 저는 그 집 마당에서 풀을 뽑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요. 이건 제가 한 비유가 아니라, 제 친구 중 하나가 언제까지 비평 쓸 거냐고 하면서 저한테 말했던 비유예요. 너 언제까지 풀을 뽑을 거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그런데 저도 알고 있거든요. 풀 뽑는 일이 힘들다는 거. 왜냐면 늘 새로운 풀이 자라나고, 그 풀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건 늘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남들이 뽑아놓은 풀 구경하고 나도 풀 뽑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정말 자주 하죠.
근데 제가 그때 그 친구한테 뭐라고 반박했냐면, ‘풀 뽑는 사람도 있어야지’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진짜 뽑고 싶은가 질문하면 잘 모르겠네요.
희우
저도 요새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서요. 선생님이 저보다 더 오래 많은 글을 써오셨기 때문에, 그런 갈등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있는지 혹은 버티고 있는지 요령이랄까 지혜를 여쭤본 거였습니다.
연숙
못하겠는데요. 전혀 못 하겠는데. 언제부터 글 쓰셨는데요?
희우
한 4년 됐죠.
연숙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평론을 쓰신 거예요?
희우
네, 본격적으로 쓴 지 4년 됐네요.
연숙
저는 지금이 굉장히 많은 작업을 하는 시기이긴 한데, 청탁을 받아온 건 그래도 거의 10년 가까이 된 것 같네요. 햇수가 사실 뭐가 중요할까요. 염증이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생각엔, 방법이 없다, 그만두지 않는 이상에는.
희우
절망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아까 딜레당티즘을 얘기했는데, 그게 비평가를 계속 따라다니는 그림자일 것 같아요. 계속 그것과 경쟁하고 지양하려 애쓰지만,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또 그런 생각도 있어요. 딜레당티즘이라고 하면 어쨌든 폄훼하는 말로 많이 쓰이지만, 또 글을 읽어봤을 때 딜레당트적인 면이 전혀 없는 글은 재미가 없어요. 맥락에서 맥락으로 비약을 하고, 어떨 땐 좀 아무렇게나 짜깁기한 것 같은 면모가 약간은 있는 평론이 읽을 때 흥미로운 것 같아요.
연숙
그건 요즘 일하는 사람들이 다 조금씩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나 심정인 것도 같아요.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고민이 비단 비평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겠죠. 무엇이든 깊이 있게 할 수 없고 표면만 훑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광범위하게 많은 직업군에 퍼져 있지 않을까요? 다들 ADHD고, 모든 게 너무나 빠르고, 다들 포모(FOMO) 상태로 모든 정보를 다 흡수하고 싶어 하고, 놓치면 또 불안해하고. 동시에 빨리 성과 내고 성취해야 되니까 뭐든 깊이 파고드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우리 대부분은 정보를 먹어 치워서 돈을 받는 일을 하는 거나 다름 없어요. 일단 생산이 된 정보니까 누구라도 먹어서 없애야죠. 그러니까 제가 말했던 그런 종류의 두꺼운 책을 쓰는 건, 그런 연구를 하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굉장한 특권의 반증일 수 있죠.
희우
지금 비평 쓰기의 슬픔에 대해서만 좀 얘기를 했는데 기쁨이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요? 그런 순간도 있겠지요?
연숙
그냥 저는 늘 이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 건 기쁘죠. 글 쓰고, 글을 어디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건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그리고 당연히 작가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작품을 먼저 접할 기회를 가진다는 건 비밀스러운 희열을 주고요. 그게 다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희우
저는 아주 몰입해서 글을 쓸 때가 간혹 있는데, 그럴 때는 좋은데요. 그런데 그런 글이 나중에 시간 지나고 봤을 때 잘 된 글인가 하면 언제나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고요. 평론을 누가 읽는지도 모르겠고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보람을 찾아야 하니까 이렇게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연숙
최근에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현상들에 비해서 글 쓰는 일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계엄 이후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진짜 글 써서 뭐 하지, 뭐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이게 과거 세대와의 차이일 것도 같아요. 왜냐면 조금만 윗세대로 올라가면, 굳이 386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70년대생이나 80년대생들이랑 얘기를 할 때는, 그들에게 글은 어쨌든 문화 전쟁의 도구니까 이걸 잘 사용해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주 큰 관건인 것 같거든요.
근데 우리 세대는 압도적인 무력감이 일단 먼저 있죠. 글이라는 것은 일단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전제를 먼저 인정한 뒤에 겨우겨우 다른 가능성이나 희망을 더듬는 과정 자체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과 글을 쓰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마 저나 희우 님도 그럴 것 같고요. 이런 상황을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좀 막막하죠. 뭐 그래도 쓸모가 있다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합니다.
좀 다른 이야긴데 저는 일반화를 위한 세대론은 물론 반대하지만, 경험적 차원에서는 세대 간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거고, 이건 당연한 거죠. 소위 선배 세대들이 우릴 꾸짖는데 거기다 대고 ‘님들이 다 망쳐놔서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라고 대꾸하고 싶어질 때가 있기도 하고요. 물론 저는 그때마다 그레타 툰베리를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배 세대가 된다…… 아니 이미 선배 세대죠.
희우
연숙 님 말대로, 무력함에 더한 산만함이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나 심정, 삶의 양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 했다가 저 일 했다가, 또 굉장히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콘텐츠들도 따라가야 하고요. 근데 그거를 도착적인 수준으로, 너무 성실하게 해버리면, 그러니까 딜레당티즘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면 거기서 굉장히 재미있고 이상한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되네요. 그러니까 삶의 양식은 강요된 조건 같은 것이지만, 글쓰기라는 게 항상 그런 조건들을 전유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또 사실 비평이 아니면 무엇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비평의 프라이드일 수도 있겠다 싶고요. 정신없는 세계에서 정신없이 살면서 수많은 맥락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고 어떤 맥락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것이 비평의 일이 아닐까?
연숙
네, 제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그렇죠.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경우에는 이론들이나 비평들에서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용기나 희망을 얻지만, 다른 사람도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어서 그냥 계속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희우
지당한 말씀입니다.
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
연숙
그러니까 지금처럼 ‘한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대담 형식으로 하게 된 거죠.
희우
예, 우리 한국 남자 이야기하기로 했었죠. 사실 이 주제는 선생님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나 성차(性差), 그리고 ‘젠더 갈등’에 관련된 이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얘기했던 주제지요.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많은 맥락이 이미 쌓여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한 번 대화를 정리하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가 된 것이었죠.
그런데 대화를 읽으시는 분들은 안 그럴 테니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최근에 관심 두게 된 것들, 읽은 것들, 본 것들,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 한번 개괄해보면 좋겠습니다.
연숙
네. 특히 인셀 문제라든지, 아니면 극우화되는 남성들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한국의 ‘이대남’ 관련 문제라든지 이런 얘기는 특히 작년에 꽤 많이 했었던 것 같고요.
그것과 동시에 여성들이 피해자로서만 정체화를 하게 되는 문제, 그리고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 전체에서 어떤 종류의 ‘성별 분업화’가 일어나고 있는 문제, 그리고 이런저런 대세의 흐름들에 대한 어떤 불만들을 좀 공유를 했던 것 같거든요.
희우
몇 가지 구체적인 계기도 있었죠. 유튜브의 어떤 영상이라든지, 최근의 서부지법 사태라든지.
연숙
네, 그 전에는 설거지론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요. 설거지론은 레드필 이론의 한국 버전이라고 할까요. 레드필 이론은 소위 매노스피어, 남성계라고 부르는 남성 중심적 공간에서 발전한, 남성들을 계급으로 분류하는 세계관이에요. 우월한 알파메일, 열등한 베타메일 이런 식으로요. 알파일수록 우월한 여자를 만나서 유전자를 남긴다, 뭐 그런 얘기인데 사실 이게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고, 90년대에 진화심리학 유행할 때부터 계속 하던 말이잖아요. 그걸 다시 리브랜딩해서 레드필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이데올로기처럼 팔게 된 거죠.
한국에서도 2020년대 초반부터 남자들끼리 서로, 혹은 여자들을 깎아내릴 때 ‘설거지해준다’느니 ‘퐁퐁남’이니 하는 얘기들이 본격적으로 가시화가 됐어요. 이제 스스로를 인셀로 정체화하는 남자들도 흔히 찾아볼 수 있죠.
저희 예전에 그거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유튜브 채널 ‘주둥이방송’. 거기서 어떤 인셀이 사연 보냈다가 조리돌림 당했던 편이요.1 그 사람 그냥 여자들이 자기를 안 만나준다고, 여자들은 다 알파만 만나고, 데이트 비용도 안 내고, 그냥 인셀 사고방식 그대로였잖아요. 완전 뻔한 소리 막 쏟아내고. 근데 주둥이가 또 얼마나 못됐어요. 진짜 말로 그냥 깔아뭉개버렸잖아요. “너 여자 만나본 적이나 있어?”, “여자들이 너랑 섹스도 해주는데 너는 뭘 해줄 건데?” 이런 식으로. 그 클립 돌아다니면서 SNS에서 난리 났었고, 욕도 많이 먹고 또 반대로 호응도 얻고 그랬죠. 어떻게 보면 남성 인셀 문화가 가시화됐던 어느 한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희우
저는 그 방송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오늘 할 이야기랑 연결될 텐데요. 그 사연자가 잘못된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잖아요. 논리적으로 구멍도 많고,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일단 듣자마자 불쾌를 느끼게 하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문제적인 건 그 방송 진행자(주둥이)의 논리인 것 같아요. 그걸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주둥이가 완전히 신자유주의적인 논리로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비난하는데, 거기서는 사연자보다 상대적으로 주둥이의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게 되죠.
한편, 역으로 그 사연자는 신자유주의 비판, 자본주의 비판에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비판적 어휘들을 전유해서 불평등이 어떻고, 독점이 어떻고, 분배가 어떻고 이런 말을 쓰잖아요. 물론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식의 전유이기는 하죠. 불평등을 비판하는 담론들에서 그럴듯한 용어들을 가져와서 ‘여성의 분배’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요. 하지만 저는 그 방송에서 나타난 대립 구도가 매우 징후적으로 느껴졌어요. 신자유주의나 능력주의, 불평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의 어휘들은 그런 식으로 오염돼서 뒤틀려버리고, 그걸 방어하는 주둥이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커먼센스’처럼 보이는 구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숙
맞아요. 저도 똑같이 그 방송에 대한 반응으로 ‘주둥이가 맞는 말 한다’라는 반응이 많은 걸 보고 진짜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어떤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만들어서 원하는 걸 쟁취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안 되죠.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상황, 조건에 놓여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억울하면 너도 돈 벌어서 성형해, 억울하면 너도 꾸며서 여자 끼고 다녀’, 이런 이야기를 무슨 진짜 아침 먹고 저녁 먹는 이야기처럼 한다는 게 우리 모두가 능력주의에 미쳐서 단단히 망가졌다는 증거인 거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심정적으로는 그 못난 인셀한테 훨씬 공감이 가거든요.
희우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났는데요. 저도 능력주의가 우리한테 너무 깊이 침투해서 완전히 커먼센스로 자리 잡았고, 그것에 문제조차 느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떤 전문가(뇌과학자인지 정신과 의사인지)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봤어요. ‘사람들이 머리 나쁘다고, 지능이 낮다고 하면 되게 기분 나빠하고 모욕으로 받아들이는데, 너 공감 못 한다, 공감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별로 그렇게 안 받아들인다. 그런데 사실 공감을 못 하는 것도 지능이 낮은 거다.’ 그러면서 공감 능력의 결여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듣거나 볼 때 기가 차요. 사람들이 자기 말의 논리를 점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만약 그 말대로 공감 능력이 지능의 문제라고 하면, 더욱이 공감의 결여를 문제 삼거나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거잖아요.
연숙
그런 사람들은 누가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안타까워서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 나쁘라고 욕하는 거죠. 실제로 ‘지능이 낮다’라는 말이 공격과 비하의 의도로 쓰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너네는 좀 이거를 욕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잖아요. 상황을 개선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거죠. 지능이 낮고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시급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면 그게 회복될 수 없는 선천적인 어떤 결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희우
네, 그러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또 제가 불만을 느끼는 논리 중 하나는 이런 거예요. 흔히 우파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만들고 좌파들은 구조나 체계, 사회의 문제로 생각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이제 뭔가 안 통하는 논리가 돼버린 것 같아요. ‘개인의 책임’과 ‘구조의 문제’라는 구도 자체가 진짜 이상하게 뒤틀려버린 것 같거든요.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원인을 밝히려는 분석이 부지불식간에 결정론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회적으로 이런 위치니까, 이런 성별 혹은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까, 감수성이나 사고방식이나 품행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라는 식의 결정론이요. 이런 구조적 결정론이 윤리적 사고를 봉쇄하면서 윤리적인 책임에서 행위자들을 면제시켜버리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 거지요. 역설적으로 정치적 상상력도 봉쇄하고요.
연숙
지금 많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하고 있는 게 그거죠. 남성 성별 안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이들은 타고나기를 가해자이자 강간범이자 살인자로 타고 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러면 어떻게 그들에게 죄를 물어요. 그냥 본능대로 하는 건데.
오늘날 젊은 남자들, ‘이대남’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해요.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성별이나 조건, 상황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받아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문제를 이해할 수도 개선할 수도 없을 거예요.
희우
이런 사태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읽은 책도 공유를 많이 했었지요. 벨 훅스 얘기도 했던 것 같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2 등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었죠.
연숙
맞아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공유한 주제들에 뭐랄까, 나쁜 취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런 종류의 주제들이 악하기 때문에 끌리는 것도 있거든요. 좀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계속 냄새 맡고 좀 찍어 먹어보기도 하고, 저는 그런 종류의 행위에 재미를 느껴요. 그래서 여기에는 솔직히 좀 떳떳하지 못한, 조금 구린 취향도 있는 거죠.
희우
길티 플래저인가요?
연숙
네네. 그런데 동시에 얘네가 이유 없이 이러는 걸까, 진짜로 그냥 갑자기 미친 걸까? 그렇게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게 있죠. ‘이대녀’들은 멀쩡하고 ‘이대남’들은 갑자기 다 미쳤다고? 이게 가능한가? 분명 그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합리적 의심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희우
저도 비슷하지만, 한국 남성이나 ‘이대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명의 한국 남자로서 느끼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심정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사실 많은 사람이 그럴 텐데) 문제가 되는 남성성이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 같거든요. ‘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 회피하는 마음 혹은 구별하고 싶은 마음이요.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정말 아닐까?’ 반문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죠. ‘왜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제게는 너무 가까이 있는 문제, 그래서 두렵고 혐오스럽기도 한 문제에요. 저도 호기심, 알고 싶음, 당연히 그것도 있지만, 내가 사로잡혀 있는, 피할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숙
그러네요. 희우 님에 비하면 저에게 ‘이대남’은 거리가 있는 주제죠. 저는 FTM 트랜스젠더 스펙트럼에 가까운 퀴어로서 ‘이대남’에게 가끔 동일시할 때도 있고 ‘유해한 남성성’의 특성들을 때로 질투할 때도 있어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옛날엔 더 심했어요. 동일시를 하든 시기를 하든 대상과 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가 돼야 가능한 일이니, 사실은 쭉 나는 남성이 아니라고, 남성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당연히 살면서 한 번도 남성 집단에 속해본 적도 없고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희우 님 같은 방식(‘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은 아니지만 제 젠더 정체성 때문에 각종 남성성 문제를 여러 관점으로 생각해오기는 했어요. 잭 할버스탐의 『여성의 남성성』 같은 책을 읽으면서 남성성을 일종의 장르로 간주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좀 더 편하게 내가 이 분야에 말을 얹어도 되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도 했고요. 우리가 친해지는 속도가 붙을 시점에 이런 종류의 시각 차이도 많이 공유했었지요.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는 처음 겪어봐요. 그러니까 남성으로 사회화된 20대 (주로 시스 헤테로일) 남성의 행동 양식과 정체성이 우리 사회에서 크고 심각한 문제로 성큼 다가온 거죠. 물론 원래도 문제였어요. 처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면서 식민지 남성성, 헤게모니 남성성, 유해한 남성성 이러면서 온갖 남성성의 유형을 공부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 경우 주로 이런 프레임은 폭력적 가부장과 같은 여러 민족적, 국가적 비극을 겪은 아버지 세대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 같아요.3 과거에 비해서 남성들이 더 희한한 방식으로 가시화가 되고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단지 그렇게 규정될 순 없겠다, 이런 생각을 최근에 좀 비판적으로 다시 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저한테 의미 있는 주제가 된 거죠, 단순히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악인의 서사
희우
네. 말씀하신 대로 사실 이론적인 분석은 이미 많지만,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만드는 게 관건이니까요. 그런데 분석이든 변화든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누고 싶은 고민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혹은 이 주제로 글을 쓰거나 관련된 작품들을 조명할 때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있어요. 가령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먼저 얘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지금 한국의 인문학 담론장이나 저널리즘에서 남성, 특히 이대남이 폭력, 성차별, 극우화 등의 문제에 결부된 기표인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나빠 보이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짚어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나쁜 사람들,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굳이 거기에 시간을 들이고 지면을 들이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요.
연숙
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구호가 유행했죠. 아마도 트위터 같은 SNS에서 남성 범죄자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 때 페미니스트 사용자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게 계기인 걸로 알아요. 그리고 이에 관한 어떤 책도 얼마 전에 나왔었고요.4
서사라는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니까 범주를 좀 좁혀 볼게요. 저런 구호가 겨냥하는 건 남성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을 때 판결이 피해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보이는 데 반해 가해자의 불행한 과거나 창창한 미래를 강조하는 어떤 지배적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이 경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건 서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을 면피시킬 목적으로 특정한 서사가 자동적으로 부착되고 유통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인 것 같거든요. 이 구호가 페미니스트 집단의 지지를 얻게 된 건 유독 남성 가해자들에게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동시에는 가해자에게 ‘서사’가 있을 수도 있죠. 정의롭고 ‘선한’ 서사는 아니겠지만 인간이니까 자기 삶을 설명하는 서사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당연히 소위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죠. 근데 이런 판단은 단순히 기계적인 평등이나 중립의 감각일 수도 있어요. 저는 이를테면 레비나스라든지, 주디스 버틀러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작업을 통해서 ‘나’라는 주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걸 들어주는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걸 이해해 왔어요. 타자의 존재가 실제로 내 생명, 내 삶에 필수 불가결한 상호 의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작업을 제가 계속 읽어 왔기 때문에 자동 반사적으로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지,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타자 윤리가 아니라 서울권 4년제 대학을 다니며 타자 윤리를 말하는 두꺼운 책들에 반복 노출된 결과겠죠…….
희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런 이론들, 결정 불가능성…… 타자…… 윤리 어쩌고 이론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한다고,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해하는 것과 면죄하는 건 다른 일이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왜 이 둘을 계속 혼동하게 될까? 서사를 부여하면 인간적으로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연민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뭔가 단호하게 처벌을 하거나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질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이해하면서 처벌해야 한다,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해가 처벌을 어렵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잘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물론 엄청 많은 딜레마가 있겠지만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특정한 의도로 부여되는 ‘자동적인 서사’가 아닌 서사를 추구해야 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옛날에 유일신 종교들에서 성상을 금지했던 걸 생각해보면요. 신이 재현되면 안 된다는 게, 유일하고 신성해야 하는 신이 재현되어서 세속적으로 되고, 다양해지고, 인간적으로 되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안 된다’ 같은 생각은, 그런 성상 금지를 도착적으로 뒤집은 방식으로 악에 적용하는 거라고 봐요. 순수하고 추상적인 악으로만 남겨놓기 위해서요. 악이 우리한테 가까이 오고, 세속화되고, 다양한 면을 갖게 되면 정상적인 것과 악을 선명하게 구분하기가 당연히 어려워지니까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어려움이, 버틀러를 따라 말하자면 윤리적인 사고의 공간인 것이고,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의 공간일 텐데요. 그리고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그런 얘기도 했었지요.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이 구제될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윤리적인 사고의 여지를 파괴해버리는 일이 된다고.
연숙
그렇죠.
희우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처벌하거나 윤리적인 책임을 묻거나 하는 일들은, 그 사람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고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 사람이 ‘마치 선을 선택할 만큼 자유로운 것처럼’ 가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악을 처벌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페미니스트이건 안티페미니스트이건 상관없이, 점점 사람들 사이에 극도로 강화되는 엄벌주의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트위터에서든 네이버 댓글에서든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인데, 저런 애들은 갱생시킬 수 없고, 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려해야 된다, 사형시켜야 된다, 이런 말들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달라질 수 없다면, 그게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든,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든 그 사람이 악한 일을 하도록―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일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거죠. 그 사람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거라면 역으로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거잖아요. ‘당신은 생물학적인 수준에서든, 환경적인 수준에서든 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윤리적인 책임은 없지만, 이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당신을 격리하겠다 혹은 죽이겠다.’ 이런 방식은 경제적으로나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있어도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죠.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우리가 악인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됐는지, 다른 길은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는 게 따뜻하고 물렁하고 관대한 마음씨를 가져서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 처벌에 대해서든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든 사고할 여지 자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또, 『윤리적 폭력 비판』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 책에서 버틀러가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어떤 주체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의 의지를 박탈할 정도까지 되어선 안 된다.5 왜냐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일단 살고자 하는 욕망 위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 대목은 버틀러가 윤리적 비판이 어떤 한계를 가져야 하는지 말하는 부분이라서 저에게는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오해를 살 수 있고 욕을 먹을 수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사실 너무 많은 경험적인 혹은 저널리즘적인 사례들이 있잖아요.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나쁜 짓들을 많이 하는지. 데이트 폭력부터 서부지검 난동에 이르기까지. 근데 이런 역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절대 구제할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 역설적으로 그 사람들을 점점 더 도덕적인 고려에서 면제해 주는 효과가 생긴다는 거예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옳게 될 수 없고 감수성을 갖출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윤리적으로 살고 싶고 그런 감수성을 갖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한테는 계속해서 어떤 도덕적인 책임이 부과되지만, 이미 윤리적 담론이나 페미니즘이나 여하한 진보적 가치를 등진 사람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 것이죠. 어차피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요.
연숙
네. 저도 동의합니다. 굉장히 원론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인간은 특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존재 그 이상이고 그럴 수 있다는 걸 믿어야 나 자신도 이해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오해받을 수 있고 욕먹을 수 있다고 해주셨듯 특히 요즘에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어렵죠. 그럼 지금 뭐 조주빈 같은 애들도 이해하자는 말이냐? 네, 이해하자는 말이긴 해요. 그 이유는 당연하지만 인간 종이 지배 종으로서 지금 지구 하나를 같이 공유하고 있고 어떻게든 다 함께 끝까지 잘 살아 남아야 되는데(혹은 잘 죽어야 되는데) 자꾸 특정 개체, 특정 부류에만 예외 조항을 둬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특정 개체, 특정 부류가 구제 불가능한 완전한 악으로 규정된다면 답은 그들을 그냥 지구에서 없애는 수밖에 없잖아요. ‘최종 해결책’과 같은 그런 예외 조항이 누군가에게 적용 가능하다면 곧 나에게도 그렇겠죠. 모두에게 그럴 거고요.
사실 근데 참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다, 그래서 지금 한국 남자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 조심스럽다…….
희우
네. 이 대담은 주제 자체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계속 달라지는 와중에 있다는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나이브하고 낡은 휴머니즘 운운으로 받아들여질 텐데, 만약 지금 우리가 그런 가능성을 계산에 넣지 않고 생각하면, 선택지가 내전밖에 남지 않을 거예요. 저 사람이 달라질 수 없고 내가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선택지는 상대가 어떤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집회를 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을 제거하거나, 억류하거나 권리를 박탈하는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연숙
네. 자칫하면 지금 저희가 한국 남성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특별히 누구 편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편이 문제죠.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여성들도 트랜스젠더, 외국인 혐오가 심각하고 인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인터넷 바깥으로 눈을 돌리려 해도 연일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뉴스가 쏟아지고요.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봐도 그렇죠.
계속 주디스 버틀러 얘기를 하게 되는데, 버틀러가 『비폭력의 힘』에서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정신분석학자를 경유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6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사람은 대상 관계 이론의 창시자인데요. 인간이 유아 때부터 특정 관계를 통해 자신의 불안, 시기를 다룬다고 보는 이론이에요. 당연하지만 이 관계란 어머니와의 관계일 가능성이 크겠죠. 젖을 빠는 유아들한테 어머니 역할은 딱 두 가지밖에 없겠죠. 하나는 젖 주는 엄마, 다른 하나는 젖 안 주는 엄마. 젖 주는 엄마는 좋은 엄마죠. 안 준 엄마는 나쁜 엄마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유아의 머릿속에서는 이분법적으로 양분된, 극단적인 두 가지 사고에서 비롯된 분열된 어머니가 존재하는 거예요. 초기에 이러한 극단적 분리는 유아로 하여금 좋은 엄마를 나쁜 엄마로부터 분리된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게 돕고 자신의 파괴적 충동을 나쁜 엄마에게 투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멜라니 클라인은 편집 분열적 위치로 설명해요.
한편 유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에 대한 파괴적 충동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어머니가 자신과 분리된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하고 상실감을 느끼기도 해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도 느끼고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어머니를 염려하고 애도하면서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상태가 오는 거죠. 이걸 우울증적 위치라고 불러요. 근래 소소하게 국내 문학 비평가들에게 유행했던 세즈윅의 ‘회복적 읽기’가 이런 관점에서 오기도 했고요. 멜라니 클라인은 나쁜 엄마를 죽이고 좋은 엄마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편집 분열적 위치를 제대로 우울증적 위치로 바꿔내지 못하면 앞으로 사는 게 굉장히 어려워진다고 말해요. 하지만 안정적으로 어머니와 분리되면서도 그 분리를 애도할 수 있는 위치에 우리는 생애 단계 어디서든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유아 때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실 평생 우리는 두 위치를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버틀러는 클라인의 이 논의를 가지고 와서, 타인을 절멸시키거나 또는 ‘쟤는 어떤 부분은 좋지만 어떤 부분은 죽이고 싶어’라는 방식으로 타인을 분리, 절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같이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거든요. 생애 초기 단계에서 가장 강렬한 애착 관계에서 가능한 의존 방식을 전 인류에게 확대해 적용해보자는 거죠. 꼭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모두 한 번은 유아였단 말이죠. 유아 시기에 우리는 모두 최약체였고 최약체인 우리를 누가 돌봐줘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단 말이죠. 이렇게 최소 단위에서 출발해보자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생존자죠. 우리는 전부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끔찍한 생명체였어요. 그런 시기를 화해와 용서의 드라마로 다시 재구성하려는 버틀러의 노력은 놀랍고 아름답죠.
어쨌든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안다면 누가 좀 거지 같아도 참고 견디거나 그런 부분을 포함해서 그 사람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그러지 않는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뭐 전쟁이죠, 그 누구를 죽여야 하니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에 불과하지만요. 누가 나랑 똑같지 않다고 해서 죽이는 건 그냥 투사된 형태의 자살이기도 해요. 그러지 말고 그냥 우울해하는 게 낫다. 너랑 나는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게 정말 단순한 이야긴데 어렵죠. 저도 늘 어렵고요.
가시성의 경제
희우
네,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악인의 서사’ 문제에 이어서, 이 문제도 잠깐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한 건 일반적인 차원의 인문학적 논의라면, 이건 좀 더 동시대의 SNS라든지 매체와 관련된 문제인데요. ‘가시성의 경제’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노출되거나, 재현되거나,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기회 자체가 희소한 자원이고 그것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인데요. 누군가가 문화에 노출이 되고 재현되고 발언권을 얻으면, 그 상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이나 권리를 제한받거나 박탈당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당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자원 경쟁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들, 지금까지 소외돼 있었던 사람들, 혹은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을 조명하는 것만 해도 관심이나 가시성이라는 자원이 부족한데 나쁜 놈들 혹은 기득권층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까지 지면이나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죠.
연숙
지금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얼핏 드는 생각은,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들 이야기 별로 재미없어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봤자 내 삶에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알면 알수록 내 삶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피하죠. 다만 ‘인간 극장’ 같은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거는 괜찮아요. 그거는 자극을 추구하도록 세팅된 인간의 뇌에 되게 좋은 먹이를 주니까. 뭐든 포르노화하면 자극이 되고, 그래서 재밌어져요. 전통적인 재현 논의에서 가시성이라는 주제는 권력 구조와 관련이 깊었는데 오늘날 인터넷 문화 안에서 가시성은 그냥 전두엽 자극을 뜻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시성 경제 내에서 누가 더 파이를 차지하느냐는 결국 누가 더 이 경제의 논리를 잘 이용할 것인가, 이런 논의로 귀결되겠죠. 이를테면 우파 알고리즘에 맞서는 좌파 알고리즘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요. 홍진훤 작가의 작업 <DESTROY THE CODES>(2021)이 그런 예시 중 하나죠.7 이 작업은 관심 경제의 파이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하는 ‘저항’을 하자고 요청하고 있죠.
저는 이런 논의에 동의하는 동시에 어느 날은 그냥 전혀 인터넷을 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인터넷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그냥 접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2000년대 초반과 다르게 지금은 인터넷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그냥 그 안에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거지…… 문제는 그러니까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를 어떻게 좌파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할 것인가, 혹은 거꾸로 어떻게 좌파 자체를 그런 경제에 유리할 수 있도록 재교육할 것이냐는 질문이 아니라, 애당초 가시성을 화폐 삼게 만드는 인터넷이라는 환경과 우리가 맺고 있는 이 애증 어린 관계 그 자체에요. 인터넷은 환경이에요. 지저분하고, 더럽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환경이죠. 마치 난곡동과 같은 거죠……. 죄송합니다. 저희 동네[이연숙과 이희우가 사는 동네]가 난곡동이라서요. 저에게 난곡동을 받아들이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그냥 제 삶에 따라오는 조건이죠. 인터넷도 마찬가지고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런 조건을 바꾸기란 무척 어려우므로 능동적으로 조건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개발하고 협상하는 전략도 필요해요.
정리하자면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주조해 낸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 ‘조회수’ 경제가 아닌 다른 원리를 통해 인터넷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미 자극 추구에 쩔어버린 머리를 뭐 어떻게 디톡스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전략을 고안해 봐야죠. 가끔 저는 유튜브에서 어떤 아마추어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놀라운 애니메이션을 발견하곤 하는데요. 일정 시간을 들여 주목 경제의 바깥으로 밀려난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그로 인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대단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험은 여전히 짜릿하고 놀라워요. 주목이라는 화폐를 둘러싼 자원 경쟁 문제로만 보자면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자’는 주장은 당위가 있어 보이지만, 자극적이기만 하면 팔리는 인터넷 환경 안에서 악인에게 줄 주목이 자동적으로 선인에게 분배되는 건 또 아니잖아요. 파이 싸움 외에도 다른 방식의 싸움이 가능해요. 사회 1면에 실리는 걸 부러워하는 게 전부가 될 순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해주신 질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희우
어…… 그렇죠. 사실 범죄 기사나 포르노화된 재현은 좀 극단적인 사례들이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도파민이 자극되고 관심이 쏠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가시성의 경제를 언급하면서 제가 이야기하려던 건, 최근 한국소설들이 흔히 다룰 법한 인물들, 그러니까 적당히 악하고 적당히 착하기도 하고 적당히 문제적인, 그런 대부분의 사람 이야기에요. 그러한 이야기의 장에서 ‘가시성의 경제’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거죠. 노출되고 재현되고 많은 지면을 갖는 일 자체가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가령 ‘여성 서사’에 부여되는 중요성처럼, 소수자나 여성 인물을 많이 재현하고 내세우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경향에 대한 거예요. 반대로 나쁜 사람들 혹은 기득권층에게 서사나 지면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연숙
아, 네 그렇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죠.
희우
하지만 이제(바야흐로) 이 문제를 깊이 재고해 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꼭 노출되거나 재현되는 게 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인가? 혹은 어떤 재현이 정체성/동일성에 호소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여기에 ‘그렇지 않다’라고 해야 우리가 어떤 경쟁심 같은 것 없이 재현된 인물을 다룰 수 있게 되겠지요. 현재는 가시성의 경제와 관련해서 상반된 두 가지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나쁘다’는 편견이고,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좋다’는 편견인데요. 첫 번째 편견에 따르면, 보이는 대상이 되는 것은 나쁘다, 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거죠. 가령 여성이 보이는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의 생각.
이 오래된 생각은 지금 우리 관점에서 보면 너무 투박한 것인데, 많은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고 싶어 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욕망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전유하기도 하고요. 여기에서 정반대의(좀 더 최신의) 두 번째 편견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건 ‘보여지는 것은 좋다’라는 편견이죠. 그런데 가시성 자체는 희소한 자원이고, 누구나 마음껏 보여질 수는 없으니까, 보이기 위해(가시성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는 거지요. ‘보여지는 것이 곧 좋은 일이다’라는 선입견은 악인을 재현하는 것이 어떻게든 악에 이익이 된다는 생각하고도 붙어 있고, 여성을 많이 재현하는 것이 곧 여성에게 이롭다는 식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 두 가지 편견(전제)을 비판하는 논의와 비평이 존재해왔지만, 한국의 문화나 문학장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로 보여요. 짧은 강의 경력 중에, 저는 이런 생각이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요. 작품이 악인이나 문제적인 인물을 재현하기 때문에 나쁘고, 소외된 인물이나 소수자를 재현했기 때문에 진보적이라는 식의 생각. 제가 보기엔 언급한 두 가지 편견이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사고를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연숙
페미니즘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늘 어려운 상황에 처하죠.8 주류 페미니즘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놓고 봤을 때 여태까지 여성 재현이 부족했으니까 이제는 양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쭉 해왔어요. 여성 정치인을 예로 들면, 지금 여성 대표가 부족하니까 여성 의원을 더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정치에서 쿼터제를 적용하듯이, 이런 방식이 소설이나 예술 같은 장르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여성 서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여성 인물을 더 자주 재현해야 한다는 요구가 바로 그런 양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인 거죠.
그런데 방금 말씀한 것처럼 기계적 평등을 따르는 게 과연 페미니즘에 항상 긍정적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하죠. 여성 재현이 늘어야 하고 여성 권리가 확대되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보존될 필요가 있거든요. ‘여성’이라는 범주가 계속해서 약자로, 피해자로, 소수자로 남아야지 양적 평등에 대해 말할 명분이 생긴다는 거죠. 우린 약자다, 피해자다, 소수자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여태까지 너네가 부당하게 빼앗아 간 ‘파이’를 더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거죠. ‘여성’으로 남아 있는 대가로 당장의 ‘파이’를 지불받게 되는 건데요. 이게 과연 긍정적인가, 정말로 여성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가, 반드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요즈음 문학계, 더 정직하게는 문학 시장 내에서도 ‘여성 작가’를 선호하고 또 강조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물론 그 여성 작가와 여성 서사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다양성이 발견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기야 하겠지만, 또한 ‘여성 작가’로 호명되는 대가로 ‘특정한’ 여성 재현, 여성 서사만을 반복해서 생산하게 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재현이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현실을 재생산하기도 하구요.
정체성 정치와 관련해 다른 이야기를 더 이어서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가기 힘든 이유는 진짜 이게 자원이라서 그래요. 그냥 이게 정말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고 지금 우리 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 안에 살고 있으니까. 예컨대 제 지인인 30대 시스 헤테로 남자 작가는 머뭇거리며 제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퀴어나 페미니즘에 대해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요즈음 남자 작가가 너무 인기가 없어서 청탁도 잘 없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고. 저는 그 분에게 작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런 분위기는 역사적으로 다 ‘한때’에 불과하다고,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농담으로 답했지만,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다들 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죠. 요즘 이게 인기가 없다. 남자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여자 이야기가 대세다, 이런 식으로 다들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희우
말씀을 듣고 나니 더더욱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어떤 작가에게 청탁이 많이 가거나 덜 가는 건 단순히 정체성이 이유일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작가의 감수성이나 감각도 그의 정체성과 관련이 없을 수 없고, 지면이나 관심의 특정한 분배가 그 정체성-감수성을 틀 짓는 전형적인 구획들을 강화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어쨌든 가시성 자체를 경쟁하고 획득해야 하는 자원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흔들 필요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남성 인물, 특히 문제적인 남성 인물을 다루는 게 여성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반대로 여성 인물들이 인기가 많기 때문에 남성 이야기를 쓰는 남성 작가가 설 자리가 없다…… 같은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 주둥이방송, “[분노주의] 살면서 만나기 싫은 한심한 유형 1위”, ↩︎
- 스기타 슌스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명다인 옮김, 또다른우주, 2023. ↩︎
- 식민지 남성성에 관해서는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지음, 교양인, 2017), 『남성성과 젠더』(권김현영, 정희진, 한채윤, 루인, 엄기호, 나영정 지음, 자음과모음, 2011), 『페니스 파시즘』(강준만, 노혜경, 진중권, 이명원, 김현수, 시타, 정승화, 권김현영, 김진희 지음, 개마고원, 2001) 등 참고. ↩︎
- 『악인의 서사』(듀나 , 박혜진 , 전승민 , 김용언 , 강덕구 , 전자영 , 최리외 , 이융희 , 윤아랑 지음, 돌고래, 2023) “창작 서사의 이런 입체성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명령만으로 특정 작품의 재현 윤리를 온전히 가늠하기란 무리에 가깝다. 여기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악의 서사와 재현의 문제를 엄밀히 논하려면 적어도 이 한 줄짜리 문장에 멈추기보다 이로부터 상세하고 정연한 고찰을 시작해야 한다.” (출판사 책소개 중에서) ↩︎
-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88~89쪽. ↩︎
- 주디스 버틀러,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이연숙은 이 글을 박준호가 번역한 “왜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가?”으로 처음 접했다. 웹진OFF) ↩︎
-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홈페이지 참고, ↩︎
-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조앤 W. 스콧, 공임순, 최영석, 이화진 옮김, 2006, 앨피) 참고. ↩︎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글입니다. ‘요즘 이야기는 여자 이야기가 대세다‘ 란 부분에선 공감과, 여성이 소수자여야 재현이 많아질 수 있는 명분이 된단 점에선 새로운 시야를 배웠습니다. 남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에요. 후속편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부도 바로 읽으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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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