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1)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1. 연구 배경

한국 사회에서 청년 남성의 우경화 혹은 정치적 보수화는 이제 낯선 문제가 아니다. 온라인 안티페미니즘과 민주당 혹은 ‘좌파’에 대한 증오가 결합하는 양상 역시 새삼스럽지 않다.1

온라인 여성혐오 자체는 인터넷의 보급 이후 항상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구한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와 비평가가 분석하고 비판해 왔다. 윤보라(2013)의 연구가 보여주듯, 인터넷 공간에서 여성혐오는 특정 사건이나 세대의 돌출적 현상이라기보다 한국 온라인 문화의 형성 과정과 함께 누적되어 온 문제다. 남성이 약자라는 서사, 이른바 역차별론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수아·이예슬(2017)이 분석한 것처럼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는 남성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여성과 페미니즘을 특권적이거나 위선적인 집단으로 표상하는 담론을 생산해 왔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남성성 규범이 안티페미니즘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분석(김수아, 2022)도 있다.

그럼에도 최근 10년 사이에 지적해야 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온라인 여성혐오·안티페미니즘이 반민주당, 반진보, 반86세대 정서와 단단히 결합하여 하나의 정치적 경향으로 가시화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정치적 현상으로서 ‘이대남’이 정치권과 언론에서 광범위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8년 말엽부터이며, 그것이 선거 정치의 주요 문제로 또렷이 부상한 것은 2021~2022년경이다(김선영, 2023; 김내훈, 2022; Lee, 2025). 2018년 12월 리얼미터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눈에 띄게 하락한 집단으로 20대 남성이 지목되면서 ‘이대남’은 처음으로 언론과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리얼미터, 2018; 또한 고상민, 2018 참조). 곧이어 2019년 봄 《시사IN》의 기획 기사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는 이 집단을 페미니즘과 여성정책에 극히 적대적인 집단으로 식별했다(천관율, 2019). 그러다 2021년 보궐선거에서 20대 남성과 여성의 ‘표심’이 극명하게 갈리면서 청년 남성은 설명되어야 할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거듭 조명받게 됐다(이지혜, 2021). 그간 ‘이대남 현상’ 혹은 그 호명에 대한 많은 비판적 논의(손희정, 2021; 김내훈, 2021; 최성용, 2022)가 이어져 왔으나, 2025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37% 이상이 이준석에게, 36% 이상이 김문수에게 투표한 것으로 드러났고(박영석·김영은, 2025) 청년 남성들이 주축이 된 서부지법 사태 등이 이어지면서 젊은 남성의 보수화 또는 극우화는 부정하기 어려운 사회적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천관율 기자, 시사IN, 2019. 04. 1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44
연합뉴스 2025-06-03
[그래픽] 2025 대선 성별·연령별 출구조사 결과”
https://www.yna.co.kr/view/GYH20250603000500044

청년 남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 현상을 단순히 계급, 젠더, 지역, 세대와 같은 객관적 변수들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러한 변수들은 중요하다. 예컨대 남녀 임금 격차를 보자.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주요국 중 가장 큰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대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조금 다른 그림이 보인다. 박세현·이태(2024)의 분석에 따르면 남녀 임금 격차는 20대에서 가장 작고, 40대와 50대에서 훨씬 크게 나타나며, 60대에서는 다시 조금 줄어든다. 한마디로 평균임금이 높은 중년층일수록 성별 격차도 크게 나타난다. 20대에서 50대로 갈수록 격차가 커지는 현상은 구조적 성차별이나 유리천장의 근거로 보일 수 있다. 처음 일자리를 갖게 되는 20대에서는 남녀 간에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어떤 직군에서는 여성이 우세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이 일을 그만두거나 승진에서 누락되는 등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 통계적 사실은 20대 남성들이 “우리는 이미 거의 평등한 조건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정작 성차별이 가장 심한 40대~60대가 왜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가”라고 반문하는 논리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는 청년 남성의 반86세대 정서, 즉 ‘가장 불공정한 기성세대가 청년 남성에게 도덕적 책임을 전가한다’는 감각과도 연결된다.2 동일한 통계적 사실이 정반대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준석에게 일약 유명세를 안겨준 2018년의 여성할당제 찬반 토론에서, 김지예 변호사와 이준석은 이 지점에서 ‘사실’에 대한 해석을 놓고 충돌했다.

물론 어느 모로 보아도 ‘역차별’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설령 군복무가 청년 남성에게 불리한 제도적 조건이라고 인정하더라도, 20대에서조차 남성은 여성보다 미세하게나마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정책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이미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면 역차별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역차별론은 많은 남성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가? 왜 많은 청년 남성은 자신이 더 많은 짐을 지고 있고, 더 불리하며,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가? 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남성들이 오히려 ‘피해자’나 ‘약자’라는 서사(김수아·이예슬, 2017)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어떤 심리적 현실, 어떤 결여, 어떤 욕망,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과 경쟁에 시달리고, 규범적·정상적 삶에 대한 압력에 짓눌리며, 커뮤니티와 SNS에서 혐오와 비교, 음모론에 노출되고, 너무 크게 오른 집값 때문에 ‘내 집 마련’의 꿈이 좌절되는 등의 문제는 청년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일 테다. 그렇다면 왜 우경화 혹은 ‘반민주당화’(김연희, 2026)는 청년 남성들에게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청년 남성의 감정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복이나 삶의 만족은 학력, 경제력, 직업 안정성 같은 객관적 지표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같은 조건에 놓여 있더라도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는지, 나빠지고 있다고 느끼는지에 따라 주체의 감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또한 누구와 어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어떤 기대와 요구 속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도 삶의 감각과 감수성은 달라진다. 삶에 대한 만족은 단순한 객관적 조건들 속에서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마땅히 누리거나 도달해야 하는 삶’이라는 상상적·상징적 기준과 객관적 조건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 남성들은 ‘마땅히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규범적 기대에―그런 기대가 실체가 있건 없건 간에―부담을 느끼면서 그 기대에 부합하기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한 기대와 욕망이 남아 있고 재생산되는 사회에서 형식적 평등의 진전은 어떤 남성들에게 오히려 박탈과 상실의 경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글은 감정을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고자 하며, 이 점에서 페미니즘과 정동 연구의 문제의식을 따른다. 앤 츠베트코비치(2025)가 말하듯,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공유되며 때로는 정치적 실천의 조건이 된다.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감정을 “개인과 집단의 몸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아메드, 2023, 24). 특정한 몸에 특정 감정이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몸의 표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감정은 어딘가에 위치 지어진, 누군가와 결속하고 부대끼는, 누군가를 밀쳐내고 배척하는 몸의 경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대상에 역겨움이나 공포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에 맞서 소름이 돋은 피부를, 움츠러들고 경계 태세를 갖춘 몸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는 국가, 민족, 시민, 민중 등을 하나의 집합적 몸으로 상상하거나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몸 역시 어떤 대상을 밀쳐내거나 배제하려는, 감싸거나 보호하려는 감정을 통해 그 형태와 경계를 갖춘다. 아메드를 따라 이 글은 정동과 감정을 엄격히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다.3 대신 감정이 전염되고 전파되며 정치적·사회적 몸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2. 세 가지 감정: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이 글은 감정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한국의 몇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조사·분석과 결합한다. 즉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역동을 감정이라는 렌즈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동시대 청년들의 감수성과 멘털리티를 이해하는 데 커뮤니티의 맥락과 문법, 역동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청년 남성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많은 청년 남성이 커뮤니티를 이용하며 또 커뮤니티의 언어가 청년들의 문화와 감수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연구를 위해 감정에 대한 정신분석학·철학·사회학 문헌들을 살펴보는 한편으로, 커뮤니티에 대한 선행 연구 분석과 함께 일련의 커뮤니티 게시물과 댓글을 수집하고 살펴보았다.4 이 글의 목표는 한국 남초 커뮤니티의 감정 흐름을 큰 틀에서 이해하기 위해 가설적 얼개를 그리는 것으로, 선택적인 사례와 불충분한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글은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세 가지 감정의 조합으로 설명한다. 질투,5 르상티망, 히스테리다. 세 감정 모두 오래도록 낮게 평가되어 온 부정적 감정이며, 특히 여성화된 감정이기도 하다. 질투는 사소하고 비천한 감정으로(Ngai, 2005), 히스테리는 비이성적이고 병리적인 상태로(미첼, 2025), 르상티망은 약자의 음습한 복수심으로(Illouz, 2023) 간주되어 왔다. 이 감정들은 이성적 토론이나 정당한 정치적 분노와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공적 논의의 대상이라기보다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오랫동안 이 감정들에 대한 부정적 담론은 여성이나 약자의 감정을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모욕하고 병리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재생산되었다(Illouz, 2023; Ngai, 2005).

이 ‘여성화’된 감정을 남초 커뮤니티의 감수성과 역동을 이해하기 위해 호출하는 것은 모욕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남성들에게 향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대로 도덕적 비방이나 모욕의 뉘앙스를 덜어내고 감정의 사회적 형성과 변이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는 특별히 ‘여성적’인 감정도, 단지 비합리적인 감정도 아니다. 이 감정들이 언제나 반동적이거나 파괴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인정의 실패, 욕망의 좌절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될 때 나타나는 정동적 형식이다. 질투는 불평등을 감지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 르상티망은 무력감 속에서 불만과 분노가 도덕적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히스테리는 상징적 질서 안에서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다고 느끼는 주체가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담론 형식이며, 그 담론 형식을 가동하는 정동 형식이기도 하다. 질투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일 수 있고, 르상티망은 부당한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적 감각과 인정 요구(Rostbøll, 2023)로 이어질 수 있으며, 히스테리적 질문은 기존 상징질서의 결함을 폭로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들이 특정한 온라인 환경,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 남성성의 위기, 여성혐오 담론과 결합할 때 어떤 방향으로 굳어지는가에 있다. 이 글은 감정들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극우화와 안티페미니즘의 양분이 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세 감정은 각기 다른 맥락과 주요하게 연결된다. 첫째, 온라인 주목 경쟁은 특히 질투와 관련된다. 이 경쟁 속에서 “누가 더 쉽게 주목받는가”라는 질문은 곧 질투의 문제로 변한다. 온라인상에서 주목을 끄는 사람이나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갖거나 상징적·물질적 자원을 더 쉽게 점유할 수 있다―혹은 적어도 그렇게 여겨진다. 둘째, 도달할 수 없는 동시에 벗어날 수도 없는 ‘평범함’의 모순된 압력은 르상티망과 관련된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평범한 삶’은 한편으로는 모든 측면에서 ‘평균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는 힘겨운 꿈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뛰어나지 못한 것, 개성 없는 것으로서 무시되거나 경멸된다. 평범함의 이러한 모순과 균열, 불안정성이 르상티망을 격화한다. 셋째, 정치적·문화적으로 대변되거나 인정되지 못한다는 감각은 히스테리와 관련된다. 물리적 몸은 있지만 상징적 몸은 갖지 못한 주체, 즉 사회에 존재하지만 자신의 고통과 요구가 제대로 대변되거나 인정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주체가 대타자를 향해 히스테리적 질문을 반복한다.

이 세 감정은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들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실제로 온라인 소통 환경에서 복잡하게 뒤섞인다. 막스 셸러(Scheler, 1961)는 르상티망에 대한 고전적 분석에서 질투가 무력함 속에서 곪을 때 르상티망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질투와 르상티망을 하나의 연속적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르상티망은 히스테리적 질문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왜 우리만 손해 보는가?”, “왜 남성의 고통은 인정되지 않는가?”, “왜 여성과 소수자만 보호받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구가 아니라, 대답을 요구하면서도 어떤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악순환의 정동 형식이다. 히스테리적 질문이 질투와 르상티망을 새롭게 생산하고 심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세 감정은 한 방향으로 심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두 가지 경로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는 불만과 르상티망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는 경로다. 여기서는 에펨코리아(이하 펨코) 정치시사게시판과 ‘이준석 현상’을 주요 사례로 다룬다. 다른 하나는 축적된 불만의 정동이 충분히 상징계에 등록되지 못하고 더 ‘마이너’하고 음모론적인 공간에 고여 곪아가는 경로다. 여기서는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의 ‘레드필 갤러리’ 같은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경로는 서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동적 흐름이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거나 붕괴하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3. 질투 혹은 온라인 주목 경쟁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의 형성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민철(2026, 88-92)은 한국 남초 온라인 문화를 대략 세 단계로 구분한다. 1세대는 디시와 일베로 대표되는 ‘막장’ 커뮤니티 문화고, 2세대는 펨코처럼 ‘공정’ ‘자유주의’ 등 합리적인 어휘의 겉옷을 입은 커뮤니티이며, 3세대는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등 짧고 강렬한 영상과 알고리즘 기반 플랫폼이다. 실로 현재 청소년 사이에 음모론이나 혐오 표현이 전파되는 데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3세대’ SNS의 역할이 중대해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은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이나 SNS는 다루지 않으며 정민철이 1세대와 2세대라고 했던 커뮤니티에 주목할 것이다.6 커뮤니티는 오늘날에도 정동과 담론의 중요한 저장소이자 증폭기이고, SNS나 오프라인에서 전파되는 정치관, 세계관, 음모론, 혐오 표현의 상당 부분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여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디시는 1999년 디지털카메라 동호인 웹사이트로 출발했다. 이후 수많은 갤러리를 거느린 국내 최대의 커뮤니티 포털로 성장했고, 한국 온라인 문화의 발원지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디시에는 수만 개의 갤러리가 있고, 갤러리마다 관심사와 성격이 판이하기에 디시 전체를 어떤 정치적 성향으로 식별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는 디시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문제를 간략히 짚고, 이후에 디시의 한 마이너 갤러리를 중요하게 살펴볼 것이다.

디시는 수많은 혐오 표현과 온라인 ‘막장’ 문화의 진원지로 말해지지만, 한편으로는 반권위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한 유희의 공간으로 의미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가성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초기 연구인 이길호의 『우리는 디씨』에도 잘 나타난다. 이 책은 2000년대 디시 문화를 연구한 저자의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2012년에 출간되었다. 연구가 진행된 시점은 일베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부상하기 전이며, 청년 남성의 보수화가 지금처럼 뚜렷해지기 전이다. 디시라는 ‘남성적’ 공간에 대한 이길호의 평가는 상당히 유보적이었다. 디시의 ‘패륜’과 ‘막장’ 같은 성격 그리고 여성혐오를 비판적으로 경계하면서도, 디시를 ‘잉여’ 청년들이 스스로 가시화하는 유희의 장으로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화가 심화되면서 청년들은 경쟁과 불안정성에 더 많이 노출되었고, 점차 생산의 주체라기보다 부양과 관리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조민서, 2019). 이런 상황 속에서 ‘잉여’ 청년들은 디시에서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자유롭고 평등한 발언의 공간’을 찾고 추구했다.

이길호는 디시의 성격을 “남성적 에토스와 극단적 평등주의”(이길호, 2012, 233)라고 짚어낸다. 여기서 ‘남성적 에토스’는 당시 유저 대다수가 남성이었다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특징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 평등주의’다. 디시는 초기부터 모두에게 똑같은 발언권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 평등주의를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원칙이 아니라 강박적이고 전투적인 실천으로 추구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초기 디시에서 발언의 평등을 위한 싸움은 격렬했다. 그 주요한 대립물은 네이버 카페였다(같은 책, 236 이하 참조). 많은 네이버 카페는 ‘계급제’로 운영되었고, 유저들 사이의 발언권은 등급, 인지도, 참여도에 따라 달라졌다. 디시는 이러한 발언권의 서열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갤러’들은 모두 똑같은 발언권을 갖는다. 어떤 유저가 인지도를 얻더라도 더 큰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니다. 많은 추천을 받아 ‘개념글’에 등극하더라도 다음 날에는 다시 처음부터 경쟁해야 했다. 매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임과 같았다.

바로 이 평등주의가 디시의 폭발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여러 카페의 ‘평민들’은 말의 평등을 좇아 디시로 유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디시 유저들은 스스로 ‘민주화’ 투사의 정체성을 부여했고, 기존 카페 질서에 맞서는 자신들의 움직임을 “전쟁”이나 “혁명”으로 의미화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등이 어떤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였다는 점이다. 구성원들은 같은 발언권을 가지고, 같은 장에서, 같은 인정의 내기물을 두고 경쟁했다. 개념글은 위로부터 주어진 ‘자격’이 아니라 동등한 구성원들이 부여한 ‘인정’의 표지였다. 이 게임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등한 발언권을 가진 모든 구성원이, 바로 그 구성원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매 순간 새롭게 경쟁한다.’

이것은 디시가 추구한 세계의 상을 보여준다. 그곳은 온갖 사회적 불평등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세계, 완전 경쟁이 가능한 세계, 경쟁의 결과가 매일 초기화되는 세계, 따라서 경쟁이 놀이가 되는 세계였다.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불안정성을 내면화한 청년들은 디시에서 그 위협과 스트레스를 놀이의 형식으로 순치했다. 디시는 살고 싶은 세계의 축소판이자, 동시에 실제 세계의 압력을 견디게 하는 가상의 훈련장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모두가 병신’이라는 기묘한 평등주의적 전제 위에서 ‘누가 더 웃기는가’를 놓고 벌이는 놀이화된 경쟁의 장으로 만들었다(김학준, 2022, 1장 참조).7 이 기묘한 평등주의와 능력주의적 경쟁 논리의 조합은 몇 가지 역설적 결과로 이어졌다.

첫째,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평등’은 사회에 엄존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구조적 차별을 괄호 안에 넣는 효과를 낳았다. 커뮤니티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김학준이 이길호의 논의를 요약하며 말했듯, “모두가 ‘좆병신’인 평등한 세상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은 인위적으로 탈각된다”(같은 책, 64). 둘째, 게임의 내기물이 동등한 구성원들의 인정이기 때문에, 유저들은 자극적이고 웃기면서도 구성원들이 공감할 만한 콘텐츠를 경쟁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는 커뮤니티 언어의 학습을 장려하는 조건이자, 커뮤니티의 정치적 편향을 강화하고 혐오의 모방과 전파를 가속화하는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효과는 ‘여성 배제적 혐오’의 형성이다.

초기 디시에서 특히 강하게 혐오된 것은 ‘친목질’이었다(이길호, 2012, 339 이하). 친목질은 공정한 경쟁을 망치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성 유저가 있으면 친목질이 일어나기 쉽다. 이 ‘남초’ 환경에서 여성은 쉽게 주목받는다. 남성 유저들은 여성이 쓴 게시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웃기거나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더라도) 관심을 주고 추천을 누른다. 그 결과 공정한 경쟁의 질서가 흐트러진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반동으로 갤러리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혹은 여성임을 티 내지 말아야 한다는―그리고 친목질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는―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고도 주목과 인정을 편취하는 존재로 표상되었다(김학준, 2022, 61-63).8 친목질에 대한 혐오는 일베에 계승되어 한층 강화된다.

물론 게임 등 온라인 환경에서 남성 이용자들이 여성 이용자에게 괜히 관심을 표하거나 과도하게 친절하게 구는 것도 여성혐오와 성역할 통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 친밀한 태도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말이 이상하지만 ‘친화적 혐오’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여성 이용자를 배제하고 억제하려는 혐오는 그와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후자는 ‘배제적 혐오’라고 구분해서 부를 수 있다. 여성 배제적 혐오는 단순히 여성 일반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룰이 여성에 의해 훼손된다는 상상에 기초한다. 반대로 완전히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려면 ‘친목질’이 철저히 배제된 채, 뿔뿔이 흩어진 순수한 개인―이 개인은 남성으로 상정된다―만이 있어야 한다. 온라인 소통환경과 커뮤니티의 ‘세팅’이 청년 세대의 공정 감각에, 그리고 그 감각이 여성혐오와 결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무리한 추론은 아닐 테다. ‘역차별론’이나 여성의 ‘무임승차론’ 등이 커뮤니티에서 쉽게 전파되고 강화된 데는, 온라인 소통 환경이 실로 그렇게 느껴지도록 조성되어 있기 때문인 면도 있다.

온라인 소통 환경에서 주목은 희소한 자원이다. 아무나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추천을 받고 많은 댓글이 달리며 ‘개념글’에 오르는 것은 커뮤니티 안에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이때 여성은 쉽게 보이는 존재, 쉽게 주목받는 존재, 따라서 공정한 경쟁을 교란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여기서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오래 전승되어 온 여성혐오적·성차별적 편향, 즉 여성을 시선의 대상으로 만드는 욕망과 권력의 구조가 마치 여성에게 유리한 조건처럼 보이게 전도되는 것이다. 시선의 권력에 대한 고전적 담론(벤담과 푸코의 ‘파놉티콘’을 떠올려보라)에서, 보이는 것은 불리하고 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온라인 주목 경쟁의 장에서는 이 관계가 얼핏 뒤집히는 듯 보인다. 보이는 것은 주목받는 것이며, 주목받는 것은 유리하다. 주목은 돈이 되고 영향력이 된다. 물론 온라인에서 여성의 높은 가시성은 성적 대상화, 괴롭힘, 신상 털기의 위험을 수반(Lewis et al., 2017 참조)하고, ‘벗방’과 같은 성 착취 산업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맥락들은 쉽게 무시되며, 가시성의 현금화 가능성과 문화적 영향력만이 여성의 특권으로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이미지가 온라인상에서 더 쉽게 주목과 관심을 끈다는―그리고 그로부터 여성이 ‘쉽게’ 이익을 얻는다는―이데올로기적 통념은 상당 부분 왜곡된 것이지만, 이 통념의 사회적 효과는 실재한다.9

이 전도 속에서 여성은 주목을 끄는 인자를 가진 존재로 상상된다. 여성 방송인, 연예인, 인플루언서, 공인 등 ‘잘 보이는 곳의 여성들’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욕망의 대상이자 질투 혹은 ‘샤덴프로이데’(김현경, 2016)의 대상이 된다.10 가령,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매노스피어 커뮤니티에는 ‘현대에 여성이 남성보다 돈을 더 쉽게 번다’는 주장이 종종 등장한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전문직 남성 혹은 남성 운동선수와 여성 방송인―특히 ‘성적인’ 맥락의 방송인―을 비교한다. 비교를 통해 도출하는 결론은 이렇다. 남성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전문성이나 특출함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성은 그저 타고난 ‘몸만으로도’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몸이 시선을 끌고, 오늘날의 온라인 소통 환경은 그 관심을 쉽게 현금화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련의 청년 남성들은 “돈 되지 않는 몸을 가진 남성-피해자들”(김주희, 2024)로 스스로를 정체화한다.11

‘돈’뿐만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일부 남성들은 여성들이 더 많은 자산을 불공정하게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 당시 청년 남성들이 정부가 “여자 편”만 든다는 이유로 정권에 분개를 드러냈던 것(이재호, 2019)도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분노 역시 여성들의 말이 더 잘 들리고 정치적·문화적으로 더 잘 수용된다는 판단을 깔고 있다. “왜 문재인/민주당은 여성들의 이야기만 들어주는가?”라는 질문은 주목과 인정의 분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한편, 당시 청년 남성들에게 ‘문재인-민주당-86세대’가 주목과 인정을 나눠줄 대타자(the Other)12로 여겨진 측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성이 더 쉽게 주목받는다’는 질투(envy)는 ‘이 사회, 혹은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여성의 말에 더 귀 기울인다’는 질투심(jealousy)과 쉽게 연동된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온라인의 대중적 페미니즘이 강하게 의견을 결집하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을 본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페미니즘의 전략을 모방하고 차용하려고 애쓰기도 했다(이우창, 2021).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역량을, 주목을 끌고 여론을 휘어잡는 능력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해, 201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청년 남성은 ‘조직화’된 페미니스트들만큼의 정치적 힘과 역량이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사실에 무력함을 경험했다. 이 무력함은 민주당과 페미니스트들이 합세하여 자신을 사회적·정치적 장에서 소외시키고 있다는 피해의식으로 곪아가기도 했다. 2021년 ‘젠더 갈등’에 대한 공개 토론에서, 이준석은 구조적·문화적 성차별이 엄존한다고 주장하는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의원님은 변호사가 되기까지 여성으로서 무슨 불합리한 차별을 겪으셨습니까?” 이 질문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정치적 수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잘 보이는’ 곳에 있는 엘리트 여성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다수 남성’을 효과적으로 대립시킨다. 그러한 대립 구도 속에서 ‘평범한’ 남성들은 구조적 성차별을 주장하는 엘리트 여성에 비추어 스스로를 약자나 소외된 자로 경험한다. 이런 왜곡된 가시성의 장이 만들어내는 대립 구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질투가 격화된다. 이 질투는 여당이나 기성세대가 여성만 편애한다는 질투심과 연동되고, 무력감이나 소외감 속에서 곪을 때 쉽게 르상티망으로 변한다.

(2)에서 계속

  1. 이러한 경향이 한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영미권의 온라인 매노스피어 및 극우화 연구에서 온라인 안티페미니즘은 청년 남성을 극우적 세계관으로 이끄는 주요한 경로 가운데 하나로 분석된다(예컨대 Mamié et al., 2021). ↩︎
  2. 『공정하지 않다』(박원익·조윤호, 2019)에 이런 논리로 청년 남성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이 있다. ↩︎
  3. 이 글에서는 정동을 ‘감정의 흐름’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감정과 정동의 구분 (불)가능성과 그에 따른 문제에 대해서는 김남이(2024)의 논의를 참조. ↩︎
  4. 연구 과정에서 현재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온라인 커뮤니티인 에펨코리아 정치시사게시판에 대한 데이터 크롤링도 수행했다. 다만 이 글은 해당 자료에 대한 정량적 분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수집 자료는 논의할 사례를 찾고 게시판의 담론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만 활용했다. 자료의 수집 방법, 수집한 데이터에 기반한 시기별 어휘·의제 변화에 대한 분석, 펨코의 정치 성향 변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
  5. 이 글에서 다루는 질투는 jealousy보다는 envy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의 구분에 따르면 원초적 질투(envy)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거나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느끼는 감정인 반면, 이차적 감정인 질투심(jealousy)은 내가 소유했다고 여기거나 애착을 가진 존재를 제삼자에게 뺏길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다(Klein, 1975, 181 이하 참조). 즉 envy는 이자관계에서, jealousy는 삼각관계에서 주로 발현되는 감정이다. 이 글에서 envy는 ‘질투’로, jealousy는 ‘질투심’으로 나누어 부른다. 한편 동기간·또래 관계에 주목하는 줄리엣 미첼(2015)을 주요하게 참조하는 필자는 원초적 질투가 어머니와의 이자관계뿐 아니라 또래 관계에서도 발현될 수 있다고 본다. 또래 관계에서의 질투 문제에 대한 평론으로는 이희우, 2026 참조. ↩︎
  6. 현재 한국에서 혐오, 극우적 세계관·가치관, 음모론의 전파에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틱톡, X 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
  7. 이 기묘한 평등주의를 디시보다 더 극단적으로 밀고 간 것이 일베다. 그것은 ‘잉여의 평등주의’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디시에서 일베까지 자조적으로 자주 쓰던 말을 사용하자면) ‘좆병신의 평등주의’라고 할 수 있을 무언가다. 일베에서 이 평등주의는 단순히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도덕적 최저점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위악적 평등주의가 노무현, 민주화, 세월호, 촛불혁명 등 사회적·도덕적 의미를 부여받은 대상에 대한 일베의 대대적인 공격과 조롱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즉 만약 그러한 대상들이 정말로 도덕적으로 의미 있다면, 모든 인간이 결국 쓰레기나 ‘좆병신’일 뿐이라는 일베의 ‘평등주의적’ 전제―이 전제는 모든 위악적이고 경쟁적인 유희의 조건이다―가 훼손되므로, 일베는 그러한 대상들을 깎아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쾌락을 ‘불쾌한 긴장의 해소’라고 보는 프로이트적 관점(프로이트, 2020)에서, 노무현이나 민주화 등을 조롱하고 하찮게 만드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도덕적 부담 혹은 도덕적 질투의 해소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8. 여성에게 잘해주거나 집적대는 남성, 이른바 ‘보빨러’나 ‘스윗남’, ‘영포티’ 등에 대한 조롱 역시 이 논리의 연속선상에 있다. ↩︎
  9. ‘정치적 넷카마’의 출현을 그 효과의 예로 들 수 있다. ‘넷카마’는 온라인상에서 여성인 척하는 남성을 일컫는다. 2018년에 ‘최지혜’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활동했던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실체가 사실 30대 남성임이 밝혀지는 일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2026년 5월에 ‘윤어게인’을 외치고 참여를 고무하는 한 젊은 여성의 인스타그램 계정 주인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자백에 의해 밝혀졌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것으로, 더 많은 사람(특히 남성)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
  10. 질투와 샤덴프로이데의 관계에 대해서는 케이, 2024, 1장 참조. ↩︎
  11. 김주희(2024)의 분석이 보여주듯, 타고난 몸까지 ‘자산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 젠더화된 인식은 온라인에서의 주목 경쟁뿐 아니라 연애나 결혼, 취업, 자산 축적, 문화적 영향력 등에 영향을 미치는 ‘인적자본’ 전반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
  12. 라캉의 ‘대타자’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주체의 말과 요구를 듣고 그 의미와 정당성을 승인해 줄 것으로 상정되는 상징적 권위의 자리다(Žižek, 1997). 법, 국가, 사회, 제도 등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특정한 정치인이나 집단이 그 대리자로 경험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의 맥락에서, 주인의 관심이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한다는 데서 오는 질투심이 히스테리의 주요한 원인이자 히스테리에 동반하는 감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프로이트, 2020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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