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르상티망, 히스테리: 평범함의 깊은 균열(2)

―한국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의 정동과 역동

4. 르상티망 혹은 평범함의 깊은 균열

르상티망(ressentiment)은 다시 느끼는 감정(re-sentiment), 즉 반복적으로 곱씹어져 곪은 감정을 뜻한다. 흔히 원한으로 번역되는 르상티망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와 극우화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연구들에서 다시 중요한 개념으로 주목받고 있다(예를 들어 Tietjen et al., 2023; Beauregard and Sijstermans, 2025; 특히 코플런드, 2025).

니체는 르상티망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참조되는 철학자다. 니체(2021)는 르상티망의 주요 특징으로 몇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르상티망은 반작용적이고 반응적인 감정이다. 다시 말해 르상티망의 주체는 “나는 훌륭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들은 악하다, 따라서 우리는 선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상대적인 선함을 주장하기 위해 언제나 비방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째, 르상티망은 무력함 속에서 곪은 복수심이다. 직접 행동할 수 없는 주체는 “두고 보자”는 식의 지연된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복수는 가치전도의 형식을 취한다. 강하고 뛰어나며 아름다운 것은 악한 것으로 격하되고, 약하고 상처 입고 억압된 것은 선한 것으로 격상된다.

르상티망 관련 논의에서 마찬가지로 자주 인용되는 막스 셸러(Scheler, 1961)는 니체의 논의를 사회학적으로 확장했다. 셸러가 특히 주목한 것은 ‘자유경쟁 체제’와 민주주의 체제에서 르상티망이 악화되는 경향이다. 명목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해지는 사회에서 실제 불평등은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불평등의 간극이 클수록 르상티망은 격화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셸러는 현대 사회에서 르상티망이 평범한 자의 감정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평범한 자와 대비되는 고귀한 자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결국 르상티망은 현대 사회에 만성적인 감정이 된다.

셸러는 이러한 일반적 고찰에서 더 나아가 “중요한 사회학적 법칙”도 도출한다(Ibid., 50). 르상티망이라는 “심리적 다이너마이트”는 “한 집단의 정치적·헌법적·전통적 지위와 그 집단이 실제로 지닌 힘 사이의 불일치”가 클수록 더 강력해진다. 이 통찰은 왜 오늘날 르상티망이 (여성보다도) 청년 남성의 특징처럼 보이게 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남성은 전통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보상, 더 큰 사회적 인정을 기대하고 추구하도록 훈련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청년 남성은 노동시장, 연애, 주거, 결혼, 가족 형성 등의 영역에서 기대한 만큼의 힘을 갖지 못한다고 느낀다. 전통적 지위와 실제 힘 사이의 간극이 커지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신티아 플뢰리는 (셸러를 참조하며) 어떤 “역전 현상”을 짚어낸다. “이제 르상티망을 지닌 이가, 여성해방의 초기 성과들을 확인하는 데[…] 몰두한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 셸러의 수식어를 빌리자면 ‘평범한’ 남성들로 바뀌어가는 역전 현상이 상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플뢰리, 2026, 48–49). 셸러의 글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 르상티망은 흔히 차별받고 소외된 집단, 가령 유대인, 장애인, 노인, 특히 여성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성해방의 초기 성과들을 확인”함으로써 정치적 효능감을 느낀 여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과 하락을 경험하는 ‘평범한’ 남성들이 르상티망의 주체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요점은 남성들이 실제로 약자라거나 차별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이 자신이 누려야 한다고 여기는 지위와 실제로 경험하는 힘 사이의 간극 속에서 불안과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는 것이다.1

이 지점에서 셸러가 지적한 ‘평범함’이라는 개념을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셸러는 르상티망을 평범한 자의 감정이라 주장했는데, 고귀한 자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정립하는 것과 달리 평범한 자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치를 체험한다. 즉 평범한 자는 어떤 가치를 세우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타인보다 더 많이 갖기를 원할 뿐이다. 물론 셸러의 이러한 주장은 니체식 귀족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지금 우리의 관건은 고귀한 자와 평범한 자를 선명하게 나누는 귀족주의를 답습하지 않으면서, 평범함에 대한 셸러의 통찰을 논리학적으로 수정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어받는 통찰은 ‘평범한 자는 무능한 자’라는 편견이 아니라, 평범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떠한 실정적(positive) 특징으로도 규정될 수 없기에, 평범함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질적인 것과의 비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다.2 언제나 불안정한 것,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는 것,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평범함이다.

그 외연과 내포의 커져 가는 불일치를 고려하면, 오늘날 평범함은 대단히 모순적이고 기이한 개념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평범한 삶은 점점 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표상된다. 만약 서울의 4년제 대학을 다니는 것이 ‘평범한’ 것이라면, 평범함을 위해서는 성적이 ‘평균 이상’이어야만 한다. 만약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평범한’ 목표를 위한 조건이라면, 그 조건에 부합하는 청년은 소수일 것이다. 반대로,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평오’(국민 수능 평균은 5등급) 같은 표현은 오늘날 평균이 얼마나 쉽고 당연하게 경멸의 대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평범함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모욕의 이름이다. 이 심대한 모순은 평범함 자체가 실정적 특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평범함은 때로는 규범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일컫고, 때로는 막연하게 평균이나 다수를 지칭하며, 때로는 개성 없는 것, 권력을 결여한 것, 뛰어나지 않은 것, ‘서민적’인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누구나 평범함에 속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을 나오고,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평균 이상의 자산을 축적하며, 휴가철에는 해외여행을 다니고, 적당한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하는 ‘바람직한’ 생애 경로를 무리 없이 밟는 사람도 스스로를 ‘서민’이라고 부를 수 있다(그러면서 재벌이나 정치인 등 ‘특권층’과 자신을 대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고 복수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산을 전혀 축적하지 못하는 20대 후반 청년의 삶 역시 ‘평범한’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 이렇듯 평범함은 너무 많은 차이를 뭉뚱그려 지칭하는 헐거운 고무줄 같은 개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주체가 평범함과 맺는 관계는 항상 불안정하며, 이 불안정성은 특히 극심한 경쟁과 비교 속에서 숙성될 때 르상티망의 비옥한 양분이 된다.

한마디로 오늘날 평범함은 도달하기 힘든 것이면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응답하라〉와 같은 TV 시리즈에 소박하고도 환상적으로 그려지는,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서민’ 가장의 삶은 오늘날 많은 청년 남성에게 너무 힘겨운 꿈으로 나타난다. ‘평균적’인 삶만 살아서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거나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은 청년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 역시 경험하는 것이다.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청년들은 평범함(‘정상적인’ 삶)에서 탈락할까 봐 불안하고, 동시에 평범함(평균, 개성 없음, 뛰어날 것 없음)으로 환원될까 봐 불안하다. 그러나 탈락하거나 뒤처질 것 같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나 우울 역시 누구나 겪는 ‘평범한’ 고통이기에, 그 고통을 특별히 인정받기도 어렵다. 청년들을 이중구속으로 몰아넣는 이 모순이 만성적인 수치심, 열등감, 분노, 우울, 무기력을 낳는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거기서 오는 수치심과 열등감, 질투와 불안이 무기력한 시간 속에서 곪아 르상티망이 된다면, 자신이 평범함에 속한다고 체념하는 동시에 평범함에 미달한다고 불안해하는 것만큼 르상티망이 자라나기에 좋은 조건은 없다.

이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모순이 사회 문제이자 증상으로서 ‘일베’를 낳은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추론할 근거가 있다. 김학준은 일베에 대한 양적 연구와 질적 분석을 결합하고 있는 『보통 일베들의 시대』(2022)에서 일베 멘탈리티의 중요한 축을 “평범 내러티브”라는 말로 묘파했다. 이 내러티브에서 타인의 고통은 “누구나 그 정도는 겪는다”는 말로 환원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적 불안정성이 야기하는 불안이나 모멸감은 누구나 겪는 것이기에, 그 때문에 체제를 비판하거나 변화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김학준이 옳게 지적했듯 일베 유저들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평범한 순응자들이었다(같은 책, 195 이하 참조). 그들은 인정이나 변화를 요구하는 약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이 불안을 버티면서 사는데 너희는 왜 자꾸 무언가를 더 요구하냐?’ 고통을 참아낸 생존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면서 타인의 고통 호소는 과장이나 떼쓰기로 취급하는 것이다. 평범 내러티브는 이중의 규율, 즉 ‘평범함에 만족해야 한다’와 ‘내가 견뎠다면 너도 견뎌야 한다’는 규율로 요약된다. 이 내러티브는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까지 억압한다. 약자와 소수자의 인정 요구는 “왜 너만 특별 대우를 받으려 하느냐”는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 내러티브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평범함 자체가 너무나 힘겨운 것으로 체험됨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평범 내러티브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평범함’ 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되었음을 암시한다”(같은 책, 261). 평범하고 규범적인 삶에 대한 일베의 도착적 갈망, 또 ‘평범 이상’을 요구하거나 다수의 평범한 삶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증오는 평범함 자체의 불안정성과 모순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평범 네러티브”는 평범함의 불안정성과 모순을 소화하는 일베의 방식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베에만 국한된 멘탈리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준석은 2019년 맥심에서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대중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달라요’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이 방식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 당황스러운 거다. 그들 목소리를 들어보면 ‘이렇게 안 하면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인데, 내가 봤을 때는 너무 단기적인 성과를 내려는 것 같다. 그리고 성평등 운동은 보통 ‘우린 다르지 않아’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격한 행동파 운동은 ‘우릴 봐줘’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박정훈, 2019에서 재인용)

많은 청년 남성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이준석의 페미니즘 비판에는 “평범함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규범이 강하게 깔려 있다. 또한 관심이나 인정을 요구하는 약자에 대한 반감도 선명하게 깔려 있다. 이렇듯 약자의 인정 요구는 특권 요구로 치부되고, 공정한 경쟁 질서를 교란하거나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에 대해 이준석이 “공공을 인질로 잡은 투쟁은 연대가 아니라 인질극”(한예섭, 2025에서 재인용)이라고 비방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에도 이준석은 교통권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매일 출근하는 성실한 보통 사람들의 당연한 권리를 위협한다는 생각을 조장하거나 재생산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로 내세우는 동시에 소수자를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이다. 아마 남성들이 과거에 있었다고 가정된, 안정적인 ‘평범한 삶’이라는 환상에 여성보다 더 많은 욕망을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동에 더 취약하겠지만, 꼭 ‘이성애자 남성’만이 ‘그들만 없다면 평범한 삶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혐오의 약속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준석이 여성정책과 페미니즘, 장애인 운동을 비방하면서 ‘평범한’ 청년 남성들의 대변자를 자임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르상티망과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평범함은 어떤 실정적인 특징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을 규정할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즉 평범함이 안정화되려면 ‘평범하지 않은’ 타자가 필요하다(바타유, 2022 참조). 한편으로 평범함은 안정화되기 위해 자신을 대변하고 종합해 줄 우월한 타자(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평범함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평범의 경계를 확정해 줄 열등한 타자(소수자, 약자, 이민자 등)를 필요로 한다. 평범함은 우월성에 기대어 자신을 대변 받고, 열등성에 비추어 자신을 식별한다. 오늘날 평범함의 모순과 균열이 르상티망을 배양한다면, 이렇게 축적된 르상티망은 적을 만들어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평범함의 환상적인 통일성을 복구하려 한다. 우익 포퓰리즘 정치인은 바로 그러한 약속을 통해 세를 불리는 것이다.

5. 조직화: 펨코와 정치적 승화

질투와 르상티망은 커뮤니티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접합된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는 청년 남성의 이질적인 불만이 ‘공정’과 ‘자유’라는 기표 및 이준석이라는 정치적 대표를 통해 제도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절에서는 이러한 접합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어떤 정치적 몸을 구성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펨코는 원래 축구와 게임을 중심으로 네티즌이 모여 성장한 커뮤니티였고, 한때는 비교적 친문재인 성향이 강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9년을 전후로 급격히 ‘반민주당화’되었다(김선영, 2023). 2021년의 한 기사에서 어떤 정치 인플루언서는 이렇게 말했다. “2017년과 2018년만 하더라도 펨코에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더 많았다. 현 정부[문재인 정부]의 실적이 누적되면서 점점 더 변해갔고, 엠팍이나 펨코 그리고 대부분의 남초 커뮤니티들이 반페미 정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준석 현상이 일어나면서 대동단결했다”(정용인, 2021에서 재인용). 2019년경에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은 안티페미니즘과 반민주당 정서가 뜨겁게 결합하는(그럼으로써 친민주당 유저들을 밀어내는) 중요한 경합의 장이 되었다. 펨코의 덩치가 커지면서 정치인 이준석의 존재감 또한 급부상했다. 따라서 질문은 분명하다. 2019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여러 일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조국 사태’다. 조국 사태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정, 계급, 세대, 젠더, 진보의 위선이라는 여러 담론적 요소가 한꺼번에 응축되어 폭발한 사건이었다.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학생들이 모두 반민주당 성향인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의 불만을 단순히 진영논리로 환원할 수도 없으며, 대학생들의 ‘공정’에 대한 요구를 정당하지 않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어와 공격의 구도 속에서 ‘청년’의 정치적 얼굴이 매우 빠르게 구성되었다는 점이다.3 가령 변상욱 앵커와 페이스북에서 설전을 벌였던 백경훈은 스스로를 ‘조국 같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으나 열심히 노력한 청년’으로 소개하며 조국과 민주당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고, 여러 보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예를 들어 고성민, 2019; 고재석, 2019).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위원이 되었다. 이렇듯 청년들의 불만은 물줄기가 홈을 따라 흐르듯 ‘진보’나 민주당에 대한 분노와 반감으로 빠르게 수렴했고, 일련의 언론 매체는 청년들의 억하심정을 자극하고 조명하며 그것을 진영논리의 언어로 번역했다. 당시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이러한 번역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림 2는 〈“입으로만 부르짖는 공정·정의… 진보 꼰대들의 위선이 역겹다”〉(원선우·김영준, 2019)라는 제목의 기사에 실린 도표로, 2016년 ‘최순실 사태’와 2019년 ‘조국 사태’ 때 달라진 ‘친여 인사들’의 발언을 비교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9. 08. 26
“입으로만 부르짖는 공정·정의… 진보 꼰대들의 위선이 역겹다”

이 도표는 최순실 사태에 대해서는 “부정 입학”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한편 조국 사태에 대해서는 “‘황제 입시’ 논란”이라는 논쟁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조국을 둘러싼 당시의 논란이 검찰과 언론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려지고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부정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 그 논란의 추이가 어떤 식으로 청년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결집했느냐이다. 격한 감정을 이끌어 낸 중요한 요인은 조국의 딸 조민이라는 인물의 형상이었다. 엘리트 중년 남성 정치인의 비리는 한국 정치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환멸과 분노를 샀겠지만, ‘조국 사태’가 청년 남성들에게 이토록 강한 감정을 격발한 데에는 조민이라는 또래 여성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다. 조민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논란이 입시나 취업처럼 청년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치명적으로 건드릴 뿐만 아니라, ‘사치하는 여성’이나 ‘무임승차하는 여성’ 같은 오래된 여성혐오적 상상계를 소환하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조민은 조국 사태를 ‘젠더화’하여 수용하게 만든 중요한 형상이었다.

‘조민 포르쉐’ 가세연 명예훼손 무죄…”공적 관심사” / SBS – YouTube 썸네일

예를 들어 ‘가로세로연구소’(이하 가세연)에서 유포한 조민의 ‘빨간 포르쉐’ 같은 허위 소문이 뭇 커뮤니티에 그렇게 빠르게 유통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학교 주차장에 세워진 빨간 포르쉐의 이미지는 질투와 여성혐오를 동시에 자극한다. 그것은 사치하는 여성, 특권을 누리는 여성, 공정한 경쟁 없이 좋은 것을 취하는 여성이라는 오래된 상을 재활용한다. 조선일보 같은 ‘레거시 미디어’가 민주당이나 86세대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와 억하심정을 자극하는 동안, 가세연 같은 유튜브의 ‘황색언론’은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이 시기에 청년 남성들에게 민주당의 이미지는 ‘위선적인 기득권 세력’으로 굳어졌고, 그에 대한 증오가 조민이라는 형상을 통해 오랜 맥락을 가진 온라인 여성혐오와―그리고 부모의 애정과 지지를 독점하는 또래 여성에 대한 질투심과―결합했다. 이 점에서 2019년은 촛불에 대한 백래시가 새로운 담론적 연합을 구성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조국 사태는 86세대, 진보, 민주당, 페미니즘, 엘리트 여성에 대한 질투와 르상티망을 하나의 정치적 정동으로 묶어낸 사건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그토록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2016년 최순실과 정유라를 둘러싼 부정 입시 논란이 촉발한 이화여대 시위가 거대한 ‘촛불’로 번져 나간 것―그리고 응원가로 Kpop을 트는 등 ‘청년 여성’의 시위 문화가 광장에 일반화된 것―에 대한 백래시로서, 2019년 조국과 조민을 둘러싼 논란은 거대한 반동적 담론의 연합을 만들고 그 주축으로 ‘청년 남성’을―더 정확히 말해, 청년 남성의 한쪽 얼굴을―조명했다.

특혜를 누리는 또래 여성에 대한 질투, 위선적인 86세대와 민주당에 대한 증오, 자신을 이끌거나 대변해 주지 않는 부모 세대에 대한 실망. 홍수처럼 불어난 이 부정적 감정이 어떤 정치적 을 이루게 되었는가? 이 시기 이준석의 행보를 살펴보자. 이준석은 2018년 ‘여성할당제’를 둘러싼 토론에서 김지예 변호사와 선명하게 대립함으로써 일약 청년 남성들의 대변자로 떠올랐다. 곧이어 2019년 여름에 이준석은 본인의 인터뷰가 실린 《맥심》의 표지에 등장했는데, 《맥심》이 젊은 남성들을 타겟으로 하는 잡지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준석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남성들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이리예, 2025). 맥심의 표지에서 이준석은 헝클어진 머리에 귀여운 캐릭터 잠옷을 입은 채 등장한다(그림 2). 반면 잡지의 내지에는 번듯하게 수트를 차려 입은 사진이 실려 있다. 이 병존하는 두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듯, 이준석은 ‘평범함’과 ‘우월함’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한편에 수더분한 ‘옆집 형’의 이미지가 있고, 다른 한편에 잘 갖춰진 ‘엘리트 정치인’의 이미지가 있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서 그의 저력은 바로 이 두 이미지를 오갈 수 있다는 데서 왔다.4 ‘엘리트 정치인’으로서 이준석은 대변되는 자들(청년 남성들)끼리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했고, ‘옆집 형’으로서는 자신과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남성들의 불만을 제도 정치의 언어로 대변하는 엘리트이지만, 동시에 커뮤니티의 언어를 이해하고, 가까운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으며, ‘준석이’ 혹은 ‘준스톤’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친밀한 애착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 공정 담론, 반페미니즘, 반민주당 정서를 묶어내는 이름이 되었다. 여성정책을 둘러싼 논란과 ‘인국공 사태’ 그리고 조국 사태를 거치며 거대하고 뜨거운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은 ‘공정’이라는 기표는 이준석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 되었다.

《맥심》 2018년 8월호 표지

국민의힘 탈당과 신당 창당을 앞둔 2023년 11월에, 이준석은 자신의 지지자를 결집하기 위해 ‘전국 순회 콘서트’를 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이준석의 콘서트에는 약 1,500명의 지지자가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에는 콘서트에 갔다 왔음을 ‘인증’하는 게시물과 그것을 응원하는 댓글들이 순례길의 신자들 마냥 기나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 게시물 중 하나의 인상적인 ‘인기글’을 보자(그림 3).

펨코 정치시사게시판 2023년 11월 인기게시물

게시물의 글쓴이는 드디어 ‘우리’도 조직화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을 표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이준석을 매개로 모인 청년 남성들이다. 바로 이 ‘조직화’를 통해 르상티망은 자부심으로 전환된다. 자신이 대변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은 자신을 대변해 주는 정치인에 대한 애착으로, 정치적 무력감은 대표되고 있다는 기쁨으로 전환된다. 마치 라캉의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자신의 통일된 이미지(자아 이상)를 보고 기뻐하듯이, 펨코의 유저들은 이준석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정치적 몸으로 ‘조직화’되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이준석에 대한 펨코의 강한 애착과 충성심은 이 전환의 효과로 이해할 수 있다. 펨코가 불만을 정치적 언어로 승화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집단이라면, 그 승화의 탯줄이 바로 이준석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의 게시물은, 냉소적으로 ‘팩트’를 내세우며 감상적인 ‘좌파’를 비웃고 비방하는 펨코 유저들(‘펨붕이’들)이 얼마나 ‘감정적’인지를, 좌파와 페미니스트의 ‘선동’과 ‘떼법’을 조롱하는 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이준석의 확장 행보를 둘러싸고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정의당 의원이었던 류호정과의 ‘제 3지대’ 연합설이 불거지면서 이준석이 페미니즘에 ‘오염’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불거졌던 것이다.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추천을 받은 인기글과 거기에 달린 일련의 댓글을 보자.

펨코 정치시사게시판 2023년 11월 인기게시물
위 게시물의 댓글

게시물은 이준석이 ‘래디컬 페미니즘’과 선명하게 대립한다는 증거로 이준석이 책에 쓴 문구를 제시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다. 사진상 첫 번째 댓글은 ‘안티페미니즘’을 “좌파의 반지성주의와 자유 탄압에 대한 저항의 정신”으로 거창하게 의미화한다. 거기에 달린 대댓글은 페미니즘에 신중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유주의’라는 이념에 입각해 극단적인 안티페미니즘·여성혐오(신남성연대 등)와는 선을 긋고 있다.

이처럼 펨코 이용자들은 자신을 일베나 신남성연대 같은 ‘극단적 여성혐오’ 집단과 구분하며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유주의자’로 정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김선영(2023)은 펨코의 안티페미니즘이 일베식 여성혐오와 다르며, 그 근저에는 공정 담론과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있다고 분석한다. 즉 여성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를 무턱대고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한 신자유주의적 논리 하에 여성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선영의 분석은 일리 있지만, 한편으로는 펨코의 자기 정체화를 너무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기도 하다. 앞서 보았듯, 온라인 안티페미니즘은 공정 감각 자체에 영향을 미쳐 왔고, 반대로 공정 담론은 안티페미니즘을 정당화해 왔다. 따라서 안티페미니즘보다 능력주의가 더 근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 요소는 어느 하나가 더 근본적이라기보다 상호 구성적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엄혜진, 2021; 2024).

대신 일베와 변별되는 펨코의 특징은 일련의 감정들이 ‘공정’이나 ‘자유주의’처럼 외견상 합리적인 정치적 언어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질투와 르상티망이 깔려 있지만, 동시에 이용자들은 자신들에게 정도와 이념이 있으며,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있는, 합리적인 집단이라는 자신감을 갖는다. 바로 이 자신감이 히스테리로부터 그들을 방어해 준다. 2026년 지방선거에서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이준석은 ‘부정선거론’과 분명히 선을 그었으며, 마찬가지로 선관위와 정부의 큰 실책이지만 부정선거는 아니라는 것이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의 여론이다. 물론 부정선거 쪽으로 기우는 목소리들도 없지 않지만,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게시글에는 흔히 이준석의 발언을 참조하는 반박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이준석이라는 아이콘이 청년 남성들에게 미치는 이중적인 효과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분명 이준석은 여성·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 반민주당 정서를 대변하며 정당화하는 인물이지만, 바로 그 대변을 통해 청년 남성들을 더 어둡고 공격적인 음모론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이 ‘승화’는 불안정하다. 그것은 분열, 좌절, 폭력적인 충동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2026년 봄 지방선거를 앞두고 펨코의 정치시사게시판에서는 개혁신당에 표를 줄 것인가, 국민의힘에 표를 줄 것인가를 두고 격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는 펨코의 정치적 정체성이 긍정적 비전보다 반민주당, 반페미니즘, 반86세대 등 부정적 정서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어떤 당이나 공약을 지지하는 것보다는 ‘민주당이 잘 안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펨코 정치시사게시판에서 이준석에 대한 애착이나 관심도에 비해 개혁신당에 대한 관심도나 애정은 현저히 낮다. 이준석에 대한 펨코의 애착은 그만큼 단단한 정치적 기반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대표받는다는 감각이 약해지거나 정치적 실패가 누적될 때, 조직화된 르상티망은 다시 해체되어 분산된 충동으로 붕괴할 수 있다.

(3)에서 계속

  1. 이는 마이클 키멜(Kimmel, 2013)이 말한 ‘억울한 특권의식(aggrieved entitlement)’과도 연관되는 생각이다. ↩︎
  2. 이 인식에 중요한 참조점이 되는 사상가는 조르주 바타유다. 바타유(2022)가 파시즘의 심리 구조를 분석하면서 말했듯, 동질성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질적인 것에 의존한다. 바타유는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는 “동질적 사회의 무능력”(같은 책, 38)이 파시즘이나 권위주의를 불러오게 된다고 분석한다. ↩︎
  3. 그 당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부모의 기대, 즉 당위적으로는 ‘평등’이나 ‘진보’를 말하면서도 자식에게는 경쟁의 승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부모의 이중성에 대한 청년들의 성토가 주목과 호응을 끌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조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에는 부모 혹은 부모 세대에 대한 분노가 전이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4. 『포퓰리즘 이성』의 흥미로운 대목(라클라우, 2026, 98-104)에서, 라클라우는 프로이트의 ‘집단심리학’을 참조하며 동일시의 두 가지 경우를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사령관과 병사들의 경우처럼 지도자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는 경우로, 이때 동일시는 동등한 형제들 사이에 이루어지며, 그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다. 두 번째는 지도자가 “동등한 자 중 첫째”(103) 즉 맏형인 경우인데, 이때 지도자는 전자와 같이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동시에 동일시하는 형제들에 스스로 속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지도자는 동일시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바로 그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지도자의 정체성은 아버지이면서 형제 중 한 명으로 분열된다”(104). 이는 이준석이 갖는 ‘두 가지 이미지’가 갖는 포퓰리즘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논의로 보인다. 지도자의 이중성에 대한 라클라우의 논의는 브릿지와 파스코가 말한 ‘하이브리드 남성성’(Bridges and Pascoe, 2014)과도 연관될 수 있다. 하이브리드 남성성은 고전적인 ‘헤게모니 남성성’ 담론이 갖는 일면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즉 오늘날 특권적 남성은 단순히 전통적 남성성이 요구하는 강인한 마초적 성격만 갖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친밀하며 탈권위적인 면모를 함께 가질 수 있다. 이준석이 ‘엘리트 정치인’과 친밀한 ‘옆집 형’의 이미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하이브리드적으로’ 갱신된 포퓰리즘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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