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학자의 간계
오늘날의 온라인 소통환경은 학자에게 흥미롭고 불안한 이중성을 허용한다. 대학이나 학술지를 ‘지식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SNS나 블로그 등은 ‘의견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학자와 전문가는 이 두 공간 모두에서 숨 쉴 수 있는 수륙양용 존재로 변이 중이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학자는 때로는 지식의 이름으로, 때로는 의견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래서 종종 학자의 블로그나 SNS는 완전히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고, 학자로서의 책임을 요구하기도 요구하지 않기도 애매한 회색지대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비평이 주목해야 하는 공간이 바로 지식과 의견 사이의 그 현란하고 시끌벅적한 ‘회색지대’다.1
김창환 교수 역시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그는 블로그에서 《시사IN》 인터뷰의 후일담을 들려줬는데, 그 ‘후일담’이 트위터 등의 SNS에 캡처된 사진이나 하이퍼링크의 형태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 역시 친구의 공유를 통해 사회학자의 블로그에 접속하게 되었다.
블로그에서 학자는 반박에 대한 재반박도 열심히 했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는 사실이다’라는 조사 결과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으로는 먼저 ‘내부다양성 논리’가 있다.2 사회학자는 이것을 ‘허약한 논리’라고 부른다. 청년들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뭇 당연한 이야기다. 이준석을 지지한 청년들 속에도 다양성이 있다. 다시 『리바이어던』의 표지를 보면, 리바이어던의 형상에 이미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지 않은가. 집단 내부에 다양성이 있다고 해서 큰 경향성을 파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예외 사례도 반증이 되지 못하는데, 사회학자는 자신의 조사는 어디까지나 커다란 경향성을 판별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다양성 논리를 기각했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과 반박 들이 있다. 학자는 그 의문과 반박을 다시 한번 차단하려 하면서 더 문제적인 쟁점으로 옮겨간다.3 점점 인식론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또한 윤리적인 쟁점이 대두된다. 학자는 반박하는 자들에 대한 분류를 시도한다.
다양성론이 기각되었는데도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
사회학자의 요점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가능태론은 청년 남성들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불가지론은 더 유보적인 입장인데, 청년들의 진짜 성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고 따라서 그들을 규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둘 다 근거가 빈약하지만, 불가지론은 특히 더 허약하다. 불가지론은 최근 20대 남성의 정치적 선택이 꾸준히 보수적이었다는 일관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문제는 가능태론·불가지론을 반박하는 사회학자 자신의 논리도 못지않게 이상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지론이 왜 인기를 끄는가? 불가지론에는 우리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당사자들의 외침이 들어있다. 누구나 자신을 한 가지로 규정짓기를 꺼려한다. 개인은 항상 다양하고 중첩적이니까.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능성을 가지기에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자”는 절대자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하여간 신이 누구인가를 논할 때 나오는 논리가 이거다. 트럼프도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한편으로 힘에 대한 숭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불가지론은 20대 남성 당사자들의 논리가 되기 쉽다. (같은 곳)
여기서 학자의 논리는 자신이 비판하는 불가지론 만큼이나 이상해진다. 누군가 규정짓기에 저항한다면, 그는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에서 벗어나려면 규정짓기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납득하기 힘든 논리다. 어쩌다 “힘에 대한 숭배” 이야기까지 나온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학자는 왜 이렇게까지 확고한 ‘규정짓기’를 하고 싶어 하는가? 학자가 이렇게 비약으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블로그가―학술적 발표나 논문과 달리―지식의 시험(동료 학자들의 견제와 비판)으로부터 어느 정도 면제된 의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이 보통의 의견보다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그가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라인 소통공간에서 학자가 누리는 이중성이 있다. 즉 그는 지식의 권위와 의견의 자유를 동시에 누린다.
위의 문단에 반박해보자. 첫째,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해석에 저항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고 살아있는 존재의 마땅한 권한인데, 잘 알려져 있듯 해석은 권력의지의 행사4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타자의 권력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스스로 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관심의 문제’로 여기면서 타인의 삶은 (이미 규정된) ‘사실의 문제’로 간단히 치부한다는 데 있다. 성인(聖人)이 아닌 다음에야, 아마 우리 모두에게 얼마간 그런 성향이 있을 것이다. 이 딜레마 앞에서 도덕적 당위를 주장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런 것처럼 네 삶도 규정됨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기보다는 ‘타인의 삶도 네 삶만큼이나 규정하기 힘든 것임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둘째, 이 학자가 비판을 차단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잠재적 비판자가 자기 의심(‘혹시 내가 자기애에 판단력이 흐려진 이대남 당사자일까? 내가 불가지론에 빠진 것일까? 어쩌면 나는 맹목적으로 힘을 숭배하는 트럼프 지지자일까?’)에 휘말리도록 은근히 유도함으로써 반박을 미리 차단하고 있다.
셋째, 그가 말하는 통계적 ‘규정짓기’야말로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치안장치의 핵심 부품이다. 사회학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구집단들의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을 어떻게든 식별하고 고정하려는 의지야말로 트럼프 정부의 야만적이고 파렴치한 인종차별 조치들(유학생의 구금이나 ‘불법’체류자의 추방 등)을 뒷받침한다. 반대로 다중에 대한 완전한 식별과 규정은 불가능하다는 진실이 저항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정치적 주체화는 할당된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잘못’에 의해 시작된다.5 사람들은 대의제 정치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고, 사회학적 지식이 자신을 재현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재현되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의 대표/지식의 재현에 저항한다. 바로 그 저항에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저항적 정치는 통계적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계적 사실에 ‘대해서’ 가능하다.
같은 게시물에서, 학자는 가능태론에 대해서도 허술한 비약처럼 보이는 문단을 덧붙인다.
가능태론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무한한 가능태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 이런 심정에서 벗어나 20대 남성도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어른으로 대접하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이는 20대 남성을 특별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로 한 말일 테다. 그 의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들만을 온정적으로 대우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떤 순간의 ‘결과’에 의해 규정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20대든 70대든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도 다른 이들처럼 결과로 평가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순간의 결과로 그 존재를 평가할 수는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자애로운 어머니’ 운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너무 손쉬운 도덕적 비난을 더 이어가지는 말도록 하자. 여기서는, 학자가 미리 설치해둔 두 선택지에 은근하게 괄호가 덧붙여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엄마의 심정’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일 것이다).
이처럼 학자는 자신의 조사 결과나 주장에 뒤따를 수 있는 불만에 미리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반박을 차단한다. 이렇게 교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반박은 사회학자의 심증을 오히려 강화하는 재료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화를 내면서 ‘20대 남성은 극우가 아니다!’라고 댓글을 단다면 ②로 수렴될 것이다. 누군가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에게 다른 면모나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요?’라고 쓴다면 ①로 수렴될 것이다. 어떤 감정적인 반론 혹은 경험적인 반증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이런저런 반증을 제기하는 대신, 학자가 사용하는 논리의 전제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직행해야 한다. 학자의 논리를 90°기울여 그의 방어가 어떤 분할을 전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❶ 과학적 방법과 잘못된 인식론들(가능태론, 불가지론 등)의 대립
❷ 객관적 조사와 주관적 관점들(‘당사자’나 ‘어머니’의 관점)의 대립
이것은 뭇 학자가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아닌가? 당사자와 그의 친지―바로 사회학자가 조사하는 사회의 내용인 사람들―는 자신의 상황을 거리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감정과 선입견을 배제하도록 과학적으로 훈련된 사회학자만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따라 조사한 경우에 한해, 그들의 상황과 성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는 무지한 자들과 학자의 분할을 수립하면서, 즉 의견과 지식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방어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에 ‘형식’을 부여하는 엘리트와 사회의 ‘질료’가 되는 보통 사람들의 오래된 분할을 수행적으로 정당화한다. 당사자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말하지만, 사회학자는 ‘훨씬 많은 사람’에서 뽑아낸 통계적 데이터에 기반해 말한다. 통계가 거시적으로 될수록, ‘그저 한 사람’의 이탈과 예외와 저항은 무력해진다.
물론 블로그의 주인은 학자답게 비판에 열려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의 문은 교묘한 회전문이어서 아마추어리즘과 비과학의 문을 닫는 방식으로만 열릴 것이다. ‘내 과학을 비판하려면 당신도 과학을 하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물론 이 통계 분석은 부정확할 수 있고 맹점도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통계의 한계가 아닌가. 불만이 있으면 더 날카로운 통계와 분석을 해보라.’ 지식의 이름으로 말해진 것은 다른 지식(동료 학자)의 비판만을 허용한다. 이것이 ‘누구나 아는’ 학계의 작동방식이다. 이것은 한 학자의 탓이 아니며, 대학과 학술지로 대표되는 지식생산의 구조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말하고 있는 분할은 특정한 지식인을 비판할 이유라기보다는, 달라지는 소통환경 속에서 인문사회학자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오늘날 학자는 대학이나 학술지와는 확연히 다른 소통공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 탈 많은 회색지대에서 이미 많은 학자가 자신의 지식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 ‘다른’ 공간에서 ‘같은’ 과학을 하려는 태도는 온당한가? 대학이나 학술지에서의 지식생산이 요구하는 선명한 분할―자연어와 학술어, 의견과 지식의 분할―을 이 공간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지식의 권위로 의견을 찍어누르려는 일밖에 안 된다(그러는 동시에 전문가와 학자는 의견의 공간이 허용하는 느슨함과 분방함을 누릴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오늘날 음모론과 확증 편향, 반지성주의가 큰 문제라고 해도, 전문가의 앎을 대중의 무지에 대립6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학자와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느린 과학”7을 시도함으로써 그 문제에 맞서야 한다. 학술 공간에서 생산된 지식의 열화된 찌꺼기를 갖고 와서 대중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공간에서 함께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블로그에서 학자의 ‘의견’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제시하는 통계의 결과를 (그 작동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채로) 그저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가망 없는 반박을 계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지식과 의견의 분할이 한 사회학자를 특히 비판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해도, 다음의 문제는 확실히 비판해야만 하겠다. 학자가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특정한 ‘정체성’의 함정을 설치했다는 것 말이다. ‘만약 조사 결과에 계속 반박한다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 혹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나는 권위 있는 학자가 이런 식의 발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로 느껴진다. 이 글 역시 사회학자의 위치를 묻고 있지만, 이는 사회학자의 정체성(그의 나이나 성별, 인간관계 등)에 대한 시비가 아니다. 그런 시비는 비판의 탈을 쓴 인신공격이 되기 쉽고, 비판이나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활용되는 경우에는 특히 비겁한 짓이다. 오늘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은근히든 노골적으로든 논박하는 상대의 정체성을 겨냥하고 공격하는 발화를 볼 수 있다. 당신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의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이러저러한 정치적 관점을 가졌다면,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여자를, 여자라면 남자를,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대남을 이해하거나 옹호한다면, 당신이 바로 문제의 그 이대남 당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야말로 강력한 수행적 발화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가 사회적 정체성에 각각의 감각 방식과 감수성, 사유방식 등을 할당하고 고정하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사회적 정체성들 사이의 감성적 분할이 실제로 완고해진다.
5. 사실은 실재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몇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로, 나는 지금 단지 ‘숫자 뒤에 사람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구집단에 대해 양적 통계를 하지 말고 사람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미시적’ 연구를 해달라고 사회학자에게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거시적 연구가 흔히 사실로 전제하는 ‘사회구조’가 그 자체로 해명되어야 할 문제인 것처럼 개인들에 밀착한 미시적 연구의 ‘진정성’ 역시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비판적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미시/거시의 층위를 나누는 일 자체, 그 층위가 분화하는 과정 자체다. ‘그저 한 사람’은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가, 그리고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기에 이르는가? 이 성장/분화의 과정은 무엇이 변하기 쉬운 요소이고 변하기 어려운 요소인지를 결정하고, 무엇이 그저 한 명의 개인이고 무엇이 지속적인 구조인지를 결정하며, 무엇이 망상이고 사실인지를 구분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둘째로, 나는 언론이나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가 객관적 실재와 동떨어진 담론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사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나 역시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오늘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묻고 있으며, 나아가 오늘의 사실이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고, 말 걸고,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셋째로, 나는 ‘정말로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자기계발서형 미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낙인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말의 주술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말의 수행성을 문제 삼고 있다.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는 사실이지만, 그의 조사는 사실의 바깥에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사실이 되는 과정에 내재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대해 말함으로써 어떻게든 자신이 말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필연적으로 사회학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구성하는 ‘수행적 학문’이 된다. 관측/진술되는 대상이 관측/진술하는 행위의 영향을 받는다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관측/진술 주체의 위치를 설정할 수 없다. 최선의 경우 그 관측/진술은 개연적이다.8 정치인도 사회에 대해 말하고, 사회학자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 모든 진술은 그 나름대로 사회의 수행이다. 이것은 그저 정치인·전문가와 시민·아마추어의 경계를 흐리고 그 위계를 평탄화하려는 주장은 아니다. 정치인·전문가의 말은 정확성이 아니라 강력한 수행성·견고한 개연성 때문에 보통 사람의 말과 변별된다. 사회학자의 진술은 사회에 대한 보통 사람의 진술보다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다. 사회학자는 주관적 망상과 객관적 사실, 의견과 지식이라는 층위의 차이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활용해야 하는지 아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지식’은 가장 반박하기 어렵고 견고하며, 종종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 대한 의견의 개연성 있는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거나 사실로부터 도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라투르의 지적 이력을 살펴보는 게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9 하지만 실재론과 구성주의를 둘러싼 그의 논쟁적 이력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사실’에 대한 라투르의 대원칙은 이것이라고 본다: 사실은 실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토록 많은 오해와 비판을 샀던 글10에서 라투르가 정말로 하고자 한 이야기였다. 사실은 존재를 나타내지만, 존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사실은 변이와 지속의 과정에 있는 존재의 일시적인, 잠정적인, 빈약한 대리물일 뿐이다.
사실의 완고함—“당신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것은 거기에 있다”—은 “미국을 사랑하라, 아니면 떠나라”라고 외치는 정치적 시위자들의 완고함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한 구호는 진동하고, 명료하고, 억세고, 의연하고, 장기적인 존재의 아주 빈약한 대리자substitute이다.11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여기라”12고 명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사유를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했다면, 라투르는 ‘사물을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matter of concern로 여기라’고 제언하면서 전통적이고 정석적인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을 뒤집으려 한다. 사실은 논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논의의 대상이다. 한 번 정립된 사실조차도 언제나 다시 열리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는 사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사실을 상대화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냉혹한 과학적 사실에 인문학적(인본주의적)으로 따뜻한 말 몇 마디를 장식처럼 덧대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실에서 꿈으로 도피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보자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 ‘배후’에 숨겨진 의도, 구조, 세력, 권력을 폭로하고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실을 구성할 가능성을 찾고 그 가능성을 실재화하기 위함이다. ‘오늘 사실인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만들 것인가?’ ‘오늘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되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난해한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변하기 힘든 사실이라면, 우리는 거의 모든 동료, 친구와 마찬가지로 극우화되었다는 이들과 이 땅에서 평생 함께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청년 남성 극우화’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로 들여다보라. 청년 남성들이 어여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볼 때만 변화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13 비판의 초점을 옮기자는 제안은,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말이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사물의 주름을 펼치자는 말이다.
나는 당사자로서 내가 규정되지 않고 싶다거나, 아니면 자애로운 보호자의 마음으로 젊은 남자들을 극우화에서 ‘구제’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대신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이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으로 정치적 입장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페미니즘인지를 논쟁하는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나는 북한에 대한 제제나 중국에 대한 호오(好惡)가 더 이상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는 장애인이나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정치적 선동과 결집의 도구로 활용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나는 장애인과 소수자의 권리를 정당이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한 사회가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변화를 희망한다면, 이미 특정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중요해진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 질문들이 지금처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 되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질문이 새로운 사회적 사실을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6.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김창환은―계속 부정적인 사례로 언급하여 송구하지만―현 상황에서 (거대양당 구도의) 대의제의 불가피한 성격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드러낸다.
거의 다른 모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대의제다.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유권자가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대략적인 지향성으로 대리인을 뽑으면 그들이 정책을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지 정당이다. 민주주의와 복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투표는 민정당(=전두환 정당)에 하고, 오세훈이 무상급식 없애자고 해도 뽑으면,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나?14
누군가의 정치적 입장이 ‘누구에게 표를 던졌느냐로 결정된다’는 대의제의 완고함은 응답자의 정치적 입장이 ‘설문조사에서 어떻게 응답했느냐로 식별된다’는 사회학자의 완고함과 닮아있다. 그 두 완고함은 미리 주어져 있는 질문, 주어져 있는 선택지로 사람들을 규정하려 한다. 그 완고함은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미리 주어진 선택지에 제한한다. ‘이 선택지 안에서 고르든지, 아니면―무효표가 됨으로써―셈해지지 않던지.’
하지만 우리는 최근의 대선에서 1번을 찍었으나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1번을 찍었으나 집권 정부가 자신을 전혀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현representation과 현시presentation 사이에 있는 그 ‘불일치’다. 현실에 아직 없는 질문, 아직 없는 선택지를 만들려고 분투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좌파라면 그렇게 흘러넘치는 욕망과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에 훨씬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무리 미약해 보이고 때로는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없는 것’(셈해지지 않는 것)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제도를 존중하지 않아야 한다(부정선거 음모론처럼)는 말이 아니다. 대의제 속의 중대한 절차들(토론과 선거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제도를 존중하고, 선거에 참여하여 필요하다면 ‘차악’을 고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좌파라면 제도에 의해 재현/대표되지 않는 목소리,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 흘러넘치는 목소리, 광장의 목소리를 훨씬 더 존중한다.
이는 정치적인 적을 상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자체나 리바이어던을 구성하는 신체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몸들 사이의 불일치, 즉 빈틈이다.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국지적 전략은 이준석 같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없게 억제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사회의 현실을 더 이상 ‘거시적으로’ 조직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사회에 대해 가진 상이 사실이 되거나 사실로 유지될 수 없도록―한낱 ‘주관적 망상’에 불과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방해해야 한다. 나아가 몸들 사이의 빈틈을 더 크게 벌려 그 형상에서 더 많은 몸이 이탈하도록 하고, 그 리바이어던을 결국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리바이어던 속에 있는 불일치의 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끊임없이 흘러 다니고 모이거나 갈라지는 정념들이 있다. 사회의 현 상태, 특히 거대양당 체제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의 정념을 이준석이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 정념의 방향을 바꾸고 다른 물길을 터 나가지 않는 한,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해체하더라도 유사한 리바이어던들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게다가 더 어려운 문제는 정념의 흐름이 잘 식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들뢰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념은 “재현 이하의 사태들”이다.15 그 흐름을 분명한 경향이나 형상으로 식별/재현할 수 있게 되면, 이미 모종의 리바이어던이 생겨난 후다. 그런 이후에 ‘이 경향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구축된 리바이어던의 존재를 승인하는 일밖에 안 된다. 정념의 흐름을 변화시키려면 아직 재현되지 않는 흐름 속에서 사고하고, 작업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적으로 정념들을 형상화하는 ‘덜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구성할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직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못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평등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만큼 남에게도 있다(혹은 누군가에게 있는 것만큼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저히 평등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아무것도 믿지 않기보다는 차라리―불평등을 믿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질문을 던질 능력이고, 그 능력이 이미 모두에게 있다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16 사실 글을 쓴다는 것, 익명의 다수가 읽기를 바라며 글을 발표한다는 것, 읽는 사람을 미약하게나마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는 것, 그 모든 일은 글을 읽는 아무개의 평등한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그 믿음이 없으면 글을 쓰고 발표하는 모든 일은―어떤 종류의 글이건 간에―의미가 없다. 말의 전달을 위해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정체성’도 ‘전문성’도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모국어를 배울 때 발휘한 바 있는, ‘아무개로서 아무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그 평범한 능력일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삶을 산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을 통해서다. 차이 있는 사람과 연대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능력을 통해서다. 우리가 통계에 의해 식별되는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평범한 능력을 통해서다. 문학은 그 평범한 능력의 가장 주의 깊은 사용이다. 습작생의 심오한 작품부터 거장의 평이한 작품까지, 모든 문학작품은 그 평범한 능력의 거의 무한한 변주이고 쉼 없는 실행일 뿐이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힘에 대한 숭배’라는 사회학자의 말은 틀렸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어떤 평범한 능력에 대한, 즉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 사실 비평이야말로 항상 ‘지식도 의견도 아닌’ 애매하고 의심스러운 말하기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 애매한 공간이 새로운 위계와 분할을 낳기도 하고 새로운 연결과 질문을 낳기도 하는, 문제적이고, 혼란스럽고, 히스테리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
- 〈20대 남성, 내부다양성이라는 허약한 논리〉, 블로그 SOVIDENCE, 게시일 2025.06.03. (마지막 접속 2025.08.05.) ↩︎
-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같은 블로그, 게시일 2025.06.04. (마지막 접속 2025.08.05.) ↩︎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 1988, pp. 301-02, 잠언 481 참조. ↩︎
- 이 글에서 드러내고 있는 나의 정치적 입장(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치안’과 대비되는 저항적 ‘정치’에 대한 관점, 실증적 지식의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회적으로 할당된 몫과 자리에서 이탈하는 ‘잘못tort’, 잘못에 의해 촉발되는 ‘탈정체화로서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서는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6 참조. ↩︎
- 쉽게 현혹되는 ‘무지한 대중’과 ‘전문가의 앎’이라는 잘못된 대립 구도는 대중에 대한 은근한 경멸과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재귀적으로,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이 대립 구도 자체가 반지성주의의 토양이 된다. ↩︎
- 이자벨 스탕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느린 과학’ 선언』, 김연화·장하원 옮김, 에디토리얼, 2025 참조. ↩︎
- 사회학에서 ‘개연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김정환, 「사회학의 소설적 전통」, 『사회와이론』 43집(2019년 5월), pp. 7-83을 참조했다. ↩︎
- 1990년대의 ‘과학 전쟁’과 자신에 가해진 ‘반실재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판도라의 희망―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장하원·홍성욱 옮김, 휴머니스트, 2018) 1장 「당신은 실재를 믿습니까?」에서 라투르가 직접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상원, 「라투르의 구성주의와 해킹의 실험적 실재론」(『과학기술학연구』 제 55권, 2024년 11월, pp. 270-94)에서도 구성주의의 ‘반실재론적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 ↩︎
-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pp. 291-318. ↩︎
- 같은 글, p. 315. ↩︎
-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민혜숙 옮김, 이른비, 2021, p. 79. ↩︎
-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
-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200. ↩︎
-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16, p. 142. 강조는 원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