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2)

4. 학자의 간계

오늘날의 온라인 소통환경은 학자에게 흥미롭고 불안한 이중성을 허용한다. 대학이나 학술지를 ‘지식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SNS나 블로그 등은 ‘의견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학자와 전문가는 이 두 공간 모두에서 숨 쉴 수 있는 수륙양용 존재로 변이 중이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학자는 때로는 지식의 이름으로, 때로는 의견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래서 종종 학자의 블로그나 SNS는 완전히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고, 학자로서의 책임을 요구하기도 요구하지 않기도 애매한 회색지대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비평이 주목해야 하는 공간이 바로 지식과 의견 사이의 그 현란하고 시끌벅적한 ‘회색지대’다.1

김창환 교수 역시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그는 블로그에서 《시사IN》 인터뷰의 후일담을 들려줬는데, 그 ‘후일담’이 트위터 등의 SNS에 캡처된 사진이나 하이퍼링크의 형태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 역시 친구의 공유를 통해 사회학자의 블로그에 접속하게 되었다.

블로그에서 학자는 반박에 대한 재반박도 열심히 했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는 사실이다’라는 조사 결과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으로는 먼저 ‘내부다양성 논리’가 있다.2 사회학자는 이것을 ‘허약한 논리’라고 부른다. 청년들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뭇 당연한 이야기다. 이준석을 지지한 청년들 속에도 다양성이 있다. 다시 『리바이어던』의 표지를 보면, 리바이어던의 형상에 이미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지 않은가. 집단 내부에 다양성이 있다고 해서 큰 경향성을 파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예외 사례도 반증이 되지 못하는데, 사회학자는 자신의 조사는 어디까지나 커다란 경향성을 판별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다양성 논리를 기각했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과 반박 들이 있다. 학자는 그 의문과 반박을 다시 한번 차단하려 하면서 더 문제적인 쟁점으로 옮겨간다.3 점점 인식론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또한 윤리적인 쟁점이 대두된다. 학자는 반박하는 자들에 대한 분류를 시도한다.

다양성론이 기각되었는데도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

사회학자의 요점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가능태론은 청년 남성들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불가지론은 더 유보적인 입장인데, 청년들의 진짜 성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고 따라서 그들을 규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둘 다 근거가 빈약하지만, 불가지론은 특히 더 허약하다. 불가지론은 최근 20대 남성의 정치적 선택이 꾸준히 보수적이었다는 일관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문제는 가능태론·불가지론을 반박하는 사회학자 자신의 논리도 못지않게 이상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지론이 왜 인기를 끄는가? 불가지론에는 우리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당사자들의 외침이 들어있다. 누구나 자신을 한 가지로 규정짓기를 꺼려한다. 개인은 항상 다양하고 중첩적이니까.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능성을 가지기에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자”는 절대자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하여간 신이 누구인가를 논할 때 나오는 논리가 이거다. 트럼프도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한편으로 힘에 대한 숭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불가지론은 20대 남성 당사자들의 논리가 되기 쉽다. (같은 곳)

여기서 학자의 논리는 자신이 비판하는 불가지론 만큼이나 이상해진다. 누군가 규정짓기에 저항한다면, 그는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자기애”에서 벗어나려면 규정짓기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납득하기 힘든 논리다. 어쩌다 “힘에 대한 숭배” 이야기까지 나온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학자는 왜 이렇게까지 확고한 ‘규정짓기’를 하고 싶어 하는가? 학자가 이렇게 비약으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블로그가―학술적 발표나 논문과 달리―지식의 시험(동료 학자들의 견제와 비판)으로부터 어느 정도 면제된 의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이 보통의 의견보다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그가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라인 소통공간에서 학자가 누리는 이중성이 있다. 즉 그는 지식의 권위와 의견의 자유를 동시에 누린다.

위의 문단에 반박해보자. 첫째,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해석에 저항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고 살아있는 존재의 마땅한 권한인데, 잘 알려져 있듯 해석은 권력의지의 행사4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타자의 권력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스스로 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관심의 문제’로 여기면서 타인의 삶은 (이미 규정된) ‘사실의 문제’로 간단히 치부한다는 데 있다. 성인(聖人)이 아닌 다음에야, 아마 우리 모두에게 얼마간 그런 성향이 있을 것이다. 이 딜레마 앞에서 도덕적 당위를 주장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런 것처럼 네 삶도 규정됨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기보다는 ‘타인의 삶도 네 삶만큼이나 규정하기 힘든 것임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둘째, 이 학자가 비판을 차단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잠재적 비판자가 자기 의심(‘혹시 내가 자기애에 판단력이 흐려진 이대남 당사자일까? 내가 불가지론에 빠진 것일까? 어쩌면 나는 맹목적으로 힘을 숭배하는 트럼프 지지자일까?’)에 휘말리도록 은근히 유도함으로써 반박을 미리 차단하고 있다.

셋째, 그가 말하는 통계적 ‘규정짓기’야말로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치안장치의 핵심 부품이다. 사회학자의 주장과는 반대로, 인구집단들의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을 어떻게든 식별하고 고정하려는 의지야말로 트럼프 정부의 야만적이고 파렴치한 인종차별 조치들(유학생의 구금이나 ‘불법’체류자의 추방 등)을 뒷받침한다. 반대로 다중에 대한 완전한 식별과 규정은 불가능하다는 진실이 저항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정치적 주체화는 할당된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잘못’에 의해 시작된다.5 사람들은 대의제 정치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고, 사회학적 지식이 자신을 재현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재현되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의 대표/지식의 재현에 저항한다. 바로 그 저항에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저항적 정치는 통계적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계적 사실에 ‘대해서’ 가능하다.

같은 게시물에서, 학자는 가능태론에 대해서도 허술한 비약처럼 보이는 문단을 덧붙인다.

가능태론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무한한 가능태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 이런 심정에서 벗어나 20대 남성도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어른으로 대접하는게 좋지 않겠나 싶다.

이는 20대 남성을 특별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로 한 말일 테다. 그 의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들만을 온정적으로 대우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떤 순간의 ‘결과’에 의해 규정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20대든 70대든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도 다른 이들처럼 결과로 평가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순간의 결과로 그 존재를 평가할 수는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자애로운 어머니’ 운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너무 손쉬운 도덕적 비난을 더 이어가지는 말도록 하자. 여기서는, 학자가 미리 설치해둔 두 선택지에 은근하게 괄호가 덧붙여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계속해서 조사 결과에 반박한다면, 당신은―
① 가능태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엄마의 심정’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② 더 나쁘게는, 불가지론자일 것이다(어쩌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일 것이다).

이처럼 학자는 자신의 조사 결과나 주장에 뒤따를 수 있는 불만에 미리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반박을 차단한다. 이렇게 교묘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반박은 사회학자의 심증을 오히려 강화하는 재료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화를 내면서 ‘20대 남성은 극우가 아니다!’라고 댓글을 단다면 ②로 수렴될 것이다. 누군가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에게 다른 면모나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요?’라고 쓴다면 ①로 수렴될 것이다. 어떤 감정적인 반론 혹은 경험적인 반증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이런저런 반증을 제기하는 대신, 학자가 사용하는 논리의 전제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직행해야 한다. 학자의 논리를 90°기울여 그의 방어가 어떤 분할을 전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❶ 과학적 방법과 잘못된 인식론들(가능태론, 불가지론 등)의 대립
❷ 객관적 조사와 주관적 관점들(‘당사자’나 ‘어머니’의 관점)의 대립

이것은 뭇 학자가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아닌가? 당사자와 그의 친지―바로 사회학자가 조사하는 사회의 내용인 사람들―는 자신의 상황을 거리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감정과 선입견을 배제하도록 과학적으로 훈련된 사회학자만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따라 조사한 경우에 한해, 그들의 상황과 성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는 무지한 자들과 학자의 분할을 수립하면서, 즉 의견과 지식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방어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에 ‘형식’을 부여하는 엘리트와 사회의 ‘질료’가 되는 보통 사람들의 오래된 분할을 수행적으로 정당화한다. 당사자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말하지만, 사회학자는 ‘훨씬 많은 사람’에서 뽑아낸 통계적 데이터에 기반해 말한다. 통계가 거시적으로 될수록, ‘그저 한 사람’의 이탈과 예외와 저항은 무력해진다.

물론 블로그의 주인은 학자답게 비판에 열려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의 문은 교묘한 회전문이어서 아마추어리즘과 비과학의 문을 닫는 방식으로만 열릴 것이다. ‘내 과학을 비판하려면 당신도 과학을 하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물론 이 통계 분석은 부정확할 수 있고 맹점도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통계의 한계가 아닌가. 불만이 있으면 더 날카로운 통계와 분석을 해보라.’ 지식의 이름으로 말해진 것은 다른 지식(동료 학자)의 비판만을 허용한다. 이것이 ‘누구나 아는’ 학계의 작동방식이다. 이것은 한 학자의 탓이 아니며, 대학과 학술지로 대표되는 지식생산의 구조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말하고 있는 분할은 특정한 지식인을 비판할 이유라기보다는, 달라지는 소통환경 속에서 인문사회학자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오늘날 학자는 대학이나 학술지와는 확연히 다른 소통공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 탈 많은 회색지대에서 이미 많은 학자가 자신의 지식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 ‘다른’ 공간에서 ‘같은’ 과학을 하려는 태도는 온당한가? 대학이나 학술지에서의 지식생산이 요구하는 선명한 분할―자연어와 학술어, 의견과 지식의 분할―을 이 공간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지식의 권위로 의견을 찍어누르려는 일밖에 안 된다(그러는 동시에 전문가와 학자는 의견의 공간이 허용하는 느슨함과 분방함을 누릴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오늘날 음모론과 확증 편향, 반지성주의가 큰 문제라고 해도, 전문가의 앎을 대중의 무지에 대립6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학자와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느린 과학”7을 시도함으로써 그 문제에 맞서야 한다. 학술 공간에서 생산된 지식의 열화된 찌꺼기를 갖고 와서 대중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공간에서 함께 다른 과학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블로그에서 학자의 ‘의견’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제시하는 통계의 결과를 (그 작동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채로) 그저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가망 없는 반박을 계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지식과 의견의 분할이 한 사회학자를 특히 비판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해도, 다음의 문제는 확실히 비판해야만 하겠다. 학자가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특정한 ‘정체성’의 함정을 설치했다는 것 말이다. ‘만약 조사 결과에 계속 반박한다면, 당신은 이대남 당사자 혹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나는 권위 있는 학자가 이런 식의 발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로 느껴진다. 이 글 역시 사회학자의 위치를 묻고 있지만, 이는 사회학자의 정체성(그의 나이나 성별, 인간관계 등)에 대한 시비가 아니다. 그런 시비는 비판의 탈을 쓴 인신공격이 되기 쉽고, 비판이나 반박을 차단하기 위해 활용되는 경우에는 특히 비겁한 짓이다. 오늘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은근히든 노골적으로든 논박하는 상대의 정체성을 겨냥하고 공격하는 발화를 볼 수 있다. 당신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의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이러저러한 정치적 관점을 가졌다면,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여자를, 여자라면 남자를,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대남을 이해하거나 옹호한다면, 당신이 바로 문제의 그 이대남 당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야말로 강력한 수행적 발화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가 사회적 정체성에 각각의 감각 방식과 감수성, 사유방식 등을 할당하고 고정하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사회적 정체성들 사이의 감성적 분할이 실제로 완고해진다.

5. 사실은 실재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몇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로, 나는 지금 단지 ‘숫자 뒤에 사람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구집단에 대해 양적 통계를 하지 말고 사람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미시적’ 연구를 해달라고 사회학자에게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거시적 연구가 흔히 사실로 전제하는 ‘사회구조’가 그 자체로 해명되어야 할 문제인 것처럼 개인들에 밀착한 미시적 연구의 ‘진정성’ 역시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비판적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미시/거시의 층위를 나누는 일 자체, 그 층위가 분화하는 과정 자체다. ‘그저 한 사람’은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가, 그리고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기에 이르는가? 이 성장/분화의 과정은 무엇이 변하기 쉬운 요소이고 변하기 어려운 요소인지를 결정하고, 무엇이 그저 한 명의 개인이고 무엇이 지속적인 구조인지를 결정하며, 무엇이 망상이고 사실인지를 구분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둘째로, 나는 언론이나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가 객관적 실재와 동떨어진 담론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사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나 역시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오늘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묻고 있으며, 나아가 오늘의 사실이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고, 말 걸고,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셋째로, 나는 ‘정말로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자기계발서형 미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낙인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말의 주술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말의 수행성을 문제 삼고 있다. 사회학자의 조사 결과는 사실이지만, 그의 조사는 사실의 바깥에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사실이 되는 과정에 내재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대해 말함으로써 어떻게든 자신이 말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필연적으로 사회학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구성하는 ‘수행적 학문’이 된다. 관측/진술되는 대상이 관측/진술하는 행위의 영향을 받는다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관측/진술 주체의 위치를 설정할 수 없다. 최선의 경우 그 관측/진술은 개연적이다.8 정치인도 사회에 대해 말하고, 사회학자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 모든 진술은 그 나름대로 사회의 수행이다. 이것은 그저 정치인·전문가와 시민·아마추어의 경계를 흐리고 그 위계를 평탄화하려는 주장은 아니다. 정치인·전문가의 말은 정확성이 아니라 강력한 수행성·견고한 개연성 때문에 보통 사람의 말과 변별된다. 사회학자의 진술은 사회에 대한 보통 사람의 진술보다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다. 사회학자는 주관적 망상과 객관적 사실, 의견과 지식이라는 층위의 차이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활용해야 하는지 아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지식’은 가장 반박하기 어렵고 견고하며, 종종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 대한 의견의 개연성 있는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거나 사실로부터 도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라투르의 지적 이력을 살펴보는 게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9 하지만 실재론과 구성주의를 둘러싼 그의 논쟁적 이력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사실’에 대한 라투르의 대원칙은 이것이라고 본다: 사실은 실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토록 많은 오해와 비판을 샀던 글10에서 라투르가 정말로 하고자 한 이야기였다. 사실은 존재를 나타내지만, 존재를 규정하지 않는다. 사실은 변이와 지속의 과정에 있는 존재의 일시적인, 잠정적인, 빈약한 대리물일 뿐이다.

사실의 완고함—“당신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것은 거기에 있다”—은 “미국을 사랑하라, 아니면 떠나라”라고 외치는 정치적 시위자들의 완고함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한 구호는 진동하고, 명료하고, 억세고, 의연하고, 장기적인 존재의 아주 빈약한 대리자substitute이다.11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여기라”12고 명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사유를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했다면, 라투르는 ‘사물을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matter of concern로 여기라’고 제언하면서 전통적이고 정석적인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을 뒤집으려 한다. 사실은 논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자체로 논의의 대상이다. 한 번 정립된 사실조차도 언제나 다시 열리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는 사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사실을 상대화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냉혹한 과학적 사실에 인문학적(인본주의적)으로 따뜻한 말 몇 마디를 장식처럼 덧대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실에서 꿈으로 도피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는지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보자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 ‘배후’에 숨겨진 의도, 구조, 세력, 권력을 폭로하고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실을 구성할 가능성을 찾고 그 가능성을 실재화하기 위함이다. ‘오늘 사실인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아니게 만들 것인가?’ ‘오늘 사실이 아닌 것을 어떻게 내일은 사실이 되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난해한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변하기 힘든 사실이라면, 우리는 거의 모든 동료, 친구와 마찬가지로 극우화되었다는 이들과 이 땅에서 평생 함께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청년 남성 극우화’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로 들여다보라. 청년 남성들이 어여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볼 때만 변화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13 비판의 초점을 옮기자는 제안은,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말이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사물의 주름을 펼치자는 말이다.

나는 당사자로서 내가 규정되지 않고 싶다거나, 아니면 자애로운 보호자의 마음으로 젊은 남자들을 극우화에서 ‘구제’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대신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이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으로 정치적 입장이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페미니즘인지를 논쟁하는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나는 북한에 대한 제제나 중국에 대한 호오(好惡)가 더 이상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는 장애인이나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정치적 선동과 결집의 도구로 활용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나는 장애인과 소수자의 권리를 정당이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한 사회가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 변화를 희망한다면, 이미 특정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중요해진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 질문들이 지금처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 되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질문이 새로운 사회적 사실을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6.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빈약한 대리물이다

김창환은―계속 부정적인 사례로 언급하여 송구하지만―현 상황에서 (거대양당 구도의) 대의제의 불가피한 성격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드러낸다.

거의 다른 모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대의제다.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유권자가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대략적인 지향성으로 대리인을 뽑으면 그들이 정책을 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지 정당이다. 민주주의와 복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투표는 민정당(=전두환 정당)에 하고, 오세훈이 무상급식 없애자고 해도 뽑으면,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나?14

누군가의 정치적 입장이 ‘누구에게 표를 던졌느냐로 결정된다’는 대의제의 완고함은 응답자의 정치적 입장이 ‘설문조사에서 어떻게 응답했느냐로 식별된다’는 사회학자의 완고함과 닮아있다. 그 두 완고함은 미리 주어져 있는 질문, 주어져 있는 선택지로 사람들을 규정하려 한다. 그 완고함은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미리 주어진 선택지에 제한한다. ‘이 선택지 안에서 고르든지, 아니면―무효표가 됨으로써―셈해지지 않던지.’

하지만 우리는 최근의 대선에서 1번을 찍었으나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1번을 찍었으나 집권 정부가 자신을 전혀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현representation과 현시presentation 사이에 있는 그 ‘불일치’다. 현실에 아직 없는 질문, 아직 없는 선택지를 만들려고 분투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좌파라면 그렇게 흘러넘치는 욕망과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에 훨씬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무리 미약해 보이고 때로는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없는 것’(셈해지지 않는 것)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제도를 존중하지 않아야 한다(부정선거 음모론처럼)는 말이 아니다. 대의제 속의 중대한 절차들(토론과 선거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제도를 존중하고, 선거에 참여하여 필요하다면 ‘차악’을 고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좌파라면 제도에 의해 재현/대표되지 않는 목소리, 셈해지지 않는 목소리, 흘러넘치는 목소리, 광장의 목소리를 훨씬 더 존중한다.

이는 정치적인 적을 상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자체나 리바이어던을 구성하는 신체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몸들 사이의 불일치, 즉 빈틈이다.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국지적 전략은 이준석 같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없게 억제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사회의 현실을 더 이상 ‘거시적으로’ 조직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사회에 대해 가진 상이 사실이 되거나 사실로 유지될 수 없도록―한낱 ‘주관적 망상’에 불과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방해해야 한다. 나아가 몸들 사이의 빈틈을 더 크게 벌려 그 형상에서 더 많은 몸이 이탈하도록 하고, 그 리바이어던을 결국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리바이어던 속에 있는 불일치의 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끊임없이 흘러 다니고 모이거나 갈라지는 정념들이 있다. 사회의 현 상태, 특히 거대양당 체제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의 정념을 이준석이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 정념의 방향을 바꾸고 다른 물길을 터 나가지 않는 한,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해체하더라도 유사한 리바이어던들이 다시 생겨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게다가 더 어려운 문제는 정념의 흐름이 잘 식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들뢰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념은 “재현 이하의 사태들”이다.15 그 흐름을 분명한 경향이나 형상으로 식별/재현할 수 있게 되면, 이미 모종의 리바이어던이 생겨난 후다. 그런 이후에 ‘이 경향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구축된 리바이어던의 존재를 승인하는 일밖에 안 된다. 정념의 흐름을 변화시키려면 아직 재현되지 않는 흐름 속에서 사고하고, 작업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적으로 정념들을 형상화하는 ‘덜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을 구성할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직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못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평등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만큼 남에게도 있다(혹은 누군가에게 있는 것만큼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저히 평등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아무것도 믿지 않기보다는 차라리―불평등을 믿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질문을 던질 능력이고, 그 능력이 이미 모두에게 있다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16 사실 글을 쓴다는 것, 익명의 다수가 읽기를 바라며 글을 발표한다는 것, 읽는 사람을 미약하게나마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는 것, 그 모든 일은 글을 읽는 아무개의 평등한 능력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그 믿음이 없으면 글을 쓰고 발표하는 모든 일은―어떤 종류의 글이건 간에―의미가 없다. 말의 전달을 위해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정체성’도 ‘전문성’도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모국어를 배울 때 발휘한 바 있는, ‘아무개로서 아무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그 평범한 능력일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삶을 산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을 통해서다. 차이 있는 사람과 연대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능력을 통해서다. 우리가 통계에 의해 식별되는 ‘사회적 정체성’에서 이탈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평범한 능력을 통해서다. 문학은 그 평범한 능력의 가장 주의 깊은 사용이다. 습작생의 심오한 작품부터 거장의 평이한 작품까지, 모든 문학작품은 그 평범한 능력의 거의 무한한 변주이고 쉼 없는 실행일 뿐이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힘에 대한 숭배’라는 사회학자의 말은 틀렸다.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는 어떤 평범한 능력에 대한, 즉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1. 사실 비평이야말로 항상 ‘지식도 의견도 아닌’ 애매하고 의심스러운 말하기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 애매한 공간이 새로운 위계와 분할을 낳기도 하고 새로운 연결과 질문을 낳기도 하는, 문제적이고, 혼란스럽고, 히스테리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
  2. 20대 남성, 내부다양성이라는 허약한 논리〉, 블로그 SOVIDENCE, 게시일 2025.06.03. (마지막 접속 2025.08.05.) ↩︎
  3.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같은 블로그, 게시일 2025.06.04. (마지막 접속 2025.08.05.) ↩︎
  4.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 1988, pp. 301-02, 잠언 481 참조. ↩︎
  5. 이 글에서 드러내고 있는 나의 정치적 입장(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치안’과 대비되는 저항적 ‘정치’에 대한 관점, 실증적 지식의 ‘규정짓기’에 대한 거부)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회적으로 할당된 몫과 자리에서 이탈하는 ‘잘못tort’, 잘못에 의해 촉발되는 ‘탈정체화로서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서는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6 참조. ↩︎
  6. 쉽게 현혹되는 ‘무지한 대중’과 ‘전문가의 앎’이라는 잘못된 대립 구도는 대중에 대한 은근한 경멸과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재귀적으로,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이 대립 구도 자체가 반지성주의의 토양이 된다. ↩︎
  7. 이자벨 스탕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느린 과학’ 선언』, 김연화·장하원 옮김, 에디토리얼, 2025 참조. ↩︎
  8. 사회학에서 ‘개연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김정환, 「사회학의 소설적 전통」, 『사회와이론』 43집(2019년 5월), pp. 7-83을 참조했다. ↩︎
  9. 1990년대의 ‘과학 전쟁’과 자신에 가해진 ‘반실재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판도라의 희망―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장하원·홍성욱 옮김, 휴머니스트, 2018) 1장 「당신은 실재를 믿습니까?」에서 라투르가 직접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상원, 「라투르의 구성주의와 해킹의 실험적 실재론」(『과학기술학연구』 제 55권, 2024년 11월, pp. 270-94)에서도 구성주의의 ‘반실재론적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 ↩︎
  10.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pp. 291-318. ↩︎
  11. 같은 글, p. 315. ↩︎
  12. 에밀 뒤르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민혜숙 옮김, 이른비, 2021, p. 79. ↩︎
  13.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
  14. 20대 남성, 일부 반박에 대해서.↩︎
  15.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200. ↩︎
  16.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16, p. 142. 강조는 원저자. ↩︎

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1)

―‘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 가을호
 

0. 문제의식

지난겨울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계엄령부터 서부지법 사태를 거쳐 탄핵과 대선까지, 충격적인 일들이 지나가고 나서 상황이 나름 온건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듯하다. 하지만 무언가 돌아왔고 ‘회복’되고 있다는 안도감에, 김형중 평론가의 말처럼 삐딱한 ‘좌파적’ 의문이 계속 달라붙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 내란 전에는 한국이 정상 국가였는가?”1 이른바 ‘정상화’된 상황도 문제투성이이지 않은가. 정상화된 정치가 대표/재현하지 않는 정치적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제도가 문제없이 작동하고, 법이 존중되고, 경제성장이 느리게나마 이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르고,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것으로 다 괜찮을 것일까?

선거운동 기간에 이재명은 ‘민주당이야말로 진짜 중도보수’라고 말해서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2 국민의힘의 극우화 때문에 갈 길을 잃은 보수 성향 유권자를 아우르고 흡수하려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극우 세력이 집권 여당과 시민사회의 보수화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책방향이 중도보수적인 것이야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지만, 뭐랄까, 불가피하고 합당한 이유라도 있는 듯 중도보수를 말하는 데 있어 한층 당당해졌달까. ‘그들’로부터 사회를, 상식을, 질서를 지켜내고 회복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보수화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극우화와 보수화는 사실상 서로를 강화하며 발맞춰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보수화는 ‘정상적’ 상태를 유지하려 하면서 극우화의 땔감이 될 불안과 분노, 소외감을 키운다. 극우가 충격적인 행각을 벌이면, 더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고 온건한 상태를 지키려고 완고하게 보수화된다. 극우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만큼 정상적이고 질서 있는 사회에 대한 보전적 성향이 강화되면서 좌파적이라고 해야 할 정치적 상상력도 덩달아 봉쇄되는 듯하다.

그래서, 최근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새삼스러운 질문을 떠올리게 됐다. ‘도대체…… 좌파란 무엇인가?’

이 커다란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정치학자도 아니고 투철한 활동가도 아니다. 지금까지 한 적극적 정치 참여라고 해봐야 여러 시위에 다소 산만하게 참여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에서 그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 온라인의 남초 커뮤니티에서 종종 ‘좌파’는 멸칭으로 사용되거나 기껏해야 놀리는 말로 사용된다. 즉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위선적이고, 가르치려 들고, 재수 없고, ‘내로남불’ 성향이 강한 사람이나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꼭 보수적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에서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2030 세대에게 좌파라는 말이 무언가 중요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좌파라는 말을 현재의 맥락에서, 새로운 감수성으로 재활성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지면의 주제인 청년 남성의 문제를 생각했다. 최근 청년 남성들에 대한 담론이 폭증하고 있다. 서부지법 난동과 대선 출구조사, 그리고 대선 불복 등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극우화 경향이 시민과 지식인 들을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가 할 말이 너무 많은 주제인 것은 틀림없다. 오래된 여성혐오와 폭력들,3 가부장주의적 가족 모델의 고장, 남성들의 히스테리적인 불안, 특정한 어법과 사고방식으로 젊은 남성들을 끌어당기는 커뮤니티 문화,4 온라인 소통환경에서 안티페미니즘 유행과 전략의 형성,5 그것들을 이용하는 정치. 그리고 지독한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 취업난, ‘비교질’ 문화, 진보 혹은 좌파라고 자임하는 정치인과 엘리트 계층의 위선,6 세대 내 불평등, ‘인셀 남성성’7과 ‘루저 남성 정서’8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문제가 교차하고 얽혀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 글에서는 일단 가까운 텍스트들을 읽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최근 나는 구독하고 있는 언론(《한겨레》, 《시사IN》)의 기사와 칼럼을 한층 주의 깊게 따라 읽게 됐는데, 청년 남성과 극우에 관한 여러 분석기사와 칼럼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지만 이내 청년 남성 극우화를 둘러싸고 생산되는 담론과 지식 일각에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됐다.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담론들이 어떤 순환논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순환논리가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과 정치적 상상력을 봉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지금 생산되고 있는 담론, 특히 실증적이고 통계적인 사회학적 담론을 비판하려 한다.

논의의 과정에서 한 사회학자를 다소 집요하게 비판하게 될 텐데,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 이 글의 비판은 일련의 조사나 한 학자를 괜히 흠집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 말할 때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난관을 성찰하고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점검의 과정은 또한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1. 설문 조사의 수행성

〈시사IN〉의 한 기획기사는 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수행한 설문조사를 소개하고 있다.9 세대와 성별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설문조사인데 문항 설계에는 여러 정치·사회 전문가가 참여했다. 일련의 문항에 부/동의 정도를 묻는 방식이었는데, 기사에서 소개하는 문항 중 몇 가지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보복으로 인해 한국이 경제적 타격을 입더라도 중국과 거리를 두고,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장애인 의무고용제’에 대한 찬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반
―‘고위공직자 여성할당제’에 대한 찬반

기사에 따르면 이 모든 문항에서 2030 남성의 특이성이 두드러졌다. “결국 2030 남성은 안보·경제적으로 보수적이면서 각종 차별 시정 조치에 보수층 일반보다 반감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같은 곳). 이것이 조사에서 확인된, 놀랍지 않은 결과다.

전문가들은 적실한 질문을 고른 것 같다. 위 문항들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전문가들을 신뢰할 수 있다. 설문조사의 의도가 사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도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하고 적실한 질문을 던지는 설문조사는, 왜 이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졌는지 말하지 않는다.10 이 질문들은 어쩌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를 만큼 그토록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가? 이 질문들이 특히 결정적 질문이 된 주요 이유는, 젊은 남성들이 그 문제들에 격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은 어쩌다가 남성들을 화나게 하고, 한쪽으로 모이게 하고, 반동적으로 결집하는 효과를 낳는 질문들이 되었는가? 바로 여기에 현재 청년들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떤 질문이 그 사회의 결정적인 정치적 질문으로 부각되고 조성되는 과정은, 한 사회가 특정한 모습의 사회로 구성되는 과정 자체다. 단적인 예로, 어떤 정당 혹은 정치인이 ‘우리 사회는 북한에 의해 심각한 안보의 위협을 받는 사회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의 말은 불안을 조장한다. 동시에 그 말은 사람들의 불안을 특정한 형식으로 번역(‘당신의 불안은 북한 때문이다’)한다.11 그 발화를 단순히 ‘사실’과 동떨어진 선동이나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번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수록, 그 정당/정치인의 영향력은 실제로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북한에 의한 안보의 위협이 실제로 심각해질 수 있다. 그 정치인과 정당은 자신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의 상, 즉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의 말에 무슨 마술적 힘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대로 북한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의 선동이 남북관계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변수라는 말도 아니다. 방위가 순전히 담론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아니다. 북한은 세계에 실재하며, 동해로 쏘아진 미사일도 담론과 기호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요점은, 누군가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시적 발화가 아니라 수행적 발화라는 것이다. 즉 사회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진술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며, 발화자의 영향력이 클수록 진술의 수행성 역시 강해진다(혹은 역으로, 진술의 수행성이 강해지면 발화자의 영향력이 커진다).

우리는 대선 토론이나 청문회에서 민정당 계열(현 국민의힘) 정치인이 민주당 계열(현 더불어민주당) 정치인에게 버릇처럼 묻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主敵)입니까 아닙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해 보세요!’ 그들은 이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 수행함으로써 그것이 이 나라 정치의 ‘결정적 질문’으로 유지되게끔 애를 썼다. 그것이 결정적 질문이 될수록 실제로 보수정당(민정당 계열)의 영향력은 커졌으며, 그때마다 실제로 북한은 우리의 주적 비슷한 것이 됐다. 그들의 반복된 수행이 그 질문이 중요해진 유일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 질문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이 되어왔기 때문에, 설문 참여자는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기 위한 설문지에서 비슷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당신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택지를 두 가지(예/아니오)에서 다섯 가지로 늘린다고 해서 질문의 대립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 ‘현실’정치의 맥락 속에 있는 시민은, 그 질문을 마주했을 때 특정한 대립 구도에 휘말리지 않기 힘들다.

중국에 대한 외교나 여성·소수자 정책에 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에 비하면 중국과 페미니즘에 관한 관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특히 젊은 세대에서 결정적으로 부상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모종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수행을 거쳐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은 똑같다. 그 질문들이 그토록 중요해지는 과정이 곧 청년 남성들이 극우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질문들을 통해 청년 남성들의 극우화를 식별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인식의 변화를 만들지 않는 사회학적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난민이나 장애인,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은근하거나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유튜버와 정치인의 말을 듣고,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발 소문과 담론 들에 노출되고, 그것들에 반응하면서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친구와 절교하고, 대선 토론을 보고, 정치인이 불안의 해소를 약속하거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마침내 선거장에 가서 어떤 선택지를 고른다. 그 결과로 누군가 당선되고 세대별·지역별·성별 표심이 나타난다. 설문조사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정교하게 재연함으로써 개연성 있는,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는다. 즉 한국 현실정치의 ‘현실’을 바로 그러한 현실로 구성하는 질문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현실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질문과 선택지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동일한 대립 구도의 논리에 가둔다. 민주주의를 허울 좋게 내세우는 ‘관객 참여 예술’에서 관객이 그렇게 이용되듯이, 설문조사의 응답자들은 기획자가 미리 설치해둔 틀을 따라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2. 사회학자는 무엇을 하는가

사회학자는 사람들을 어떻게 분류할지 아는 사람 같다. 사회학자 김창환은 마찬가지로 《시사IN》에서 ‘한국의 극우’를 식별하는 유용한 분류법을 제시했다.

첫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력이나 폭력 사용, 규칙 위반을 용인하는 자세다. 두 번째는 복지에 대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인식이다. 세 번째는 한국적 특수성으로 ‘대북 제재 중시’를 고려했다. 네 번째는 ‘설령 중국의 보복으로 경제에 타격을 입더라도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좀 복합적인 질문이긴 한데, 외교에서 국익에 관계없이 특정 이념을 중시하는지 측정한 질문이라고 봤다. 다섯 번째가 극우 하면 보편적으로 포함되는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다. 이 다섯 가지에 모두 동의하면 극우라고 분류했다.12

김창환은 극우의 보편적 특징으로 이주민 또는 난민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꼽는다. 미국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그는 동시에 한국적 특수성도 잘 알고 있어서 대북 제재, 중국과의 외교, 한미 동맹 등의 문제도 문항에 적절히 포함한다. 그가 제시한 분류법은 적실하고 한국의 현실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자가 좋은 의도로, 학자로서 책임감 있고 성실한 방식으로, 유용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애썼음을 믿을 수 있다. 조사가 부정확하거나 그 배후에 어두운 의도가 있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심 없는 정확성과 유용성에, 바로 거기에 의문을 던져야 할 문제가 있다.

“설문조사는 사회학자가 질문을 만들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을 드러낸다.”13 사회학자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떤 질문이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가름하는 결정적 질문인지 안다는 것은 곧 그 질문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념과 의견을 지금 이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도식화하고, 분류하고, 편 가르고, 부추기고, 추동하고, 극단화하고, 한데 묶고, 대립시켜왔는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가 유능하고 유식할수록 그는 더 적확한 질문을 고를 것이며, 그가 적확한 질문을 고를수록 설문조사는 바로 지금 이 사회를 이러한 사회로 구성하는 ‘현실’의 정교한 미니어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이번 대선을 통해서 확인한 사회적 정체성들의 상이한 정치적 입장이 조사 결과에서 거의 정확하게 재연되는 데에는 놀라울 것이 없다.

사회학자가 사회에 대해 말할 때, 종종 그 지식의 내용보다는 그 지식의 생산방식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설문조사를 통해 익명의 응답자로부터 어떤 사실을 추출하는 방식은 대의제가 선거를 통해 익명의 유권자로부터 어떤 결과를 추출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은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표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대의민주주의 선거제도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정치인은 ‘나의 말은 국민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말이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대변하는 대표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대표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사회학자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재현한다represent고 주장한다.  
○설문조사의 형식은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사람들은 그 속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사회학자는 ‘이 조사의 결과는 응답자의 목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 결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의 말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얻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의 말이 단지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많은 이를 재현하는 학자의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적으로 재현한다면, 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출한 데이터에 기반해 말하게 된다.

대표/재현representation이 성공적일수록, 정치인/사회학자는 다음처럼 층위를 선명하게 나누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내용이고, 나는 형식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정치인은 자기 말의 정치적 정당성을, 사회학자는 자기 말의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한다. 비록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과 사회학자 모두 완전한 정당성/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고 단지 끊임없이 관측하고, 회유하고, 유도하고, 설득하고, 협상하고, 안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학자 역시 정치인만큼이나 ‘리바이어던’이다.

[사회학자는] 여론조사, 양적·질적 탐구를 통해 행위자들의 소망과 그들의 가치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번역해 낸다. [……]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대변자로 자임하고 자칭하면서, 그들은 홉스의 주권자로부터 [다음의 아이디어를] 넘겨받았다. ‘가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들 자신의 것이다.’14

인용한 페이지에서 프랑스의 과학기술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와 미셸 칼롱은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을 이야기한다. 사회학자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자나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라투르와 칼롱 역시 사회학자다). 사회학자가 작업하는 곳이 얼마나 놀라운 정치적 요충지인지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현장이든 연구실이든 학술지든 언론기사든 간에, 사회학자가 활동하는 곳은 거시와 미시의 층위가 나뉘고, 구조와 개인이 나뉘고, 형식과 질료가 나뉘고, 어떤 틀에 의해 현실이 안정화되어 설명되는, 그렇게 중대한 일들이 벌어지는 정치적 장소다. 사회학자가 훌륭하게 설계한 설문조사의 전제와 결과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가 보지 않는 등잔 밑의 어둠에 정치의 근본문제가 있다. 바로 이 문제이다: 누가 이 사회의 질료matter가 되는가, 그리고 누가 형식form이 되는가? 다시 말해 누가 이 사회의 물질이 되고 누가 정신이 되는가? 누가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누가 규정하는 존재가 되는가? 누가 선택을 요구받게 되고 누가 선택지를 설계하는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는가? 이러한 규정은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3.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3.1 홉스의 논리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이론적 우회로가 있다. 근대적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을 먼지 쌓인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보자. “교회국가와 시민국가의 질료Matter, 형식Forme 그리고 권력Power”이라는 부제가 붙은,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 초판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다.

*프랑스 판화가 아브라함 보스가 동판화로 제작한 『리바이어던』 표지 그림 일부

마을 위로 솟은 거대한 몸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대한 몸의 형체를 작은 몸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흔히 전체주의적 괴물 비슷한 뜻으로 여겨지지만, 홉스는 리바이어던이 인민people을 내용으로 하는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리바이어던은 인민의 투명하고 충실한 대변자일 뿐이다. 리바이어던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한 주권자로, 사람들(리바이어던에 예속된 자subject)의 이익과 생명, 안전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15

홉스가 말하길, 사회가 없는 자연상태에는 오직 평등한 개인들만이 있다. 다시 말해 사회가 발생하기 전에는 행위자들 사이에 어떠한 크기의 차이도, 권력의 차이도, 층위의 차이도 없다. 자연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단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단지 한 사람’일 때는, 다른 누구보다 특별히 크지도 강하지도 유능하지도 않다.16 이 평등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항구적인 투쟁 상태에 있다. 그 유명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다. 결국 사람들의 평등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평등이다.

홉스의 이론은 이렇다. 완전한 평등이라는 혼란과 야만―모두가 서로 죽일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즉 모든 인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주권자,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개인과 국가의 차이에 이르는 크기/권력/층위의 차이가 생겨날 것이다. 그 차이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곧 사회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리바이어던은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다수다. 그것은 하나의 의지처럼, 하나의 신체처럼 움직이는 다수의 의지이자 신체다.17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흩어져 있는 개인보다 압도적으로 더 크고, 강하고,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구조적이고, 거시적이다.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그 순간에 비로소 개인은 상대적으로 작고, 약하고, 일시적이고,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무엇이 된다. 비로소 사회에 예속된 자, 즉 사회적 주체subject가 되는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모든 행위자는 동등하며 그들의 크기/힘/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라는 핵심 아이디어를 홉스로부터 계승했다.18 물론 홉스의 신화myth는 중대한 변형 없이는 현대의 과학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이 계승은 도전적인 것이다. “역사학과 인류학, 그리고 오늘날의 동물행동학은 그러한 [홉스식의] 사회계약은 불가능함을 입증해왔다.”19 1980년대 초에 젊은 라투르와 칼롱은 사회학이 홉스의 총체적이고 일회적인 ‘계약’을 ‘번역translation’이라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홉스의 해답에 독창성을 다시 불어넣기 위해서는 단지 계약을 번역의 과정들로 대체하면” 된다.20 이것은 단일한 총체적 계약이 사회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협상과 분쟁, 설득과 안정화의 과정이 사회를 끊임없이 ‘수행한다’는 말이다. 차이는 한순간에 발생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구성되고 안정화된다.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를 끊임없이 조성하는 것, 그것을 둘러싸고 분쟁하며 차이를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곧 사회가 구성되는 과정이다.21

라투르와 칼롱은 타자의 의지를 단일한 의지로 번역하는 모든 존재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홉스의 생각과 달리 ‘국가=주권자’라는 하나의 리바이어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에 온갖 리바이어던이 있다. 너무나 크고 오래되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 알기 어려운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스타트업이나 신흥 정치인처럼 갓 만들어져 성장하려고 애쓰는 작은 리바이어던도 있다.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 리바이어던이 있는가 하면 구글 같은 다국적 자유주의 기업 리바이어던도 있다. ‘사회학자 리바이어던’도 있는데, 사회학자 리바이어던은 다른 모든 리바이어던이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되는지, 그 논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의 장점은 거시적인 것(국가, 기업, 당[黨], 사회구조 등)과 미시적인 것(개인, 가족, 노동자, 친구 관계 등)을 미리 구분하지 않으면서 더 커지려고 애쓰는 행위자들의 분쟁, 설득과 협력, 암중모색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1987)의 엄석대도 제 나름의 리바이어던인데, 교실의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부림으로써 교실을 지배했다가, ‘단지 한 사람’으로 쪼그라듦으로써 무리 지은 아이들에게 패배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어떤 일그러진 영웅의 권력 행사는 엄석대보다 덜 폭력적이고 더 설득적일 수 있다.

3.2 이준석의 사례

이를테면, 영웅다운 구석은 전혀 없지만, 이준석이라는 일그러진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가 어떻게 나름의 ‘리바이어던’이 되었는지를. 이준석은 역사가 짧은 신흥 리바이어던이어서 그 구성 과정을 살펴보기 요긴하다.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안티페미니즘’이라는 기표로 결집한 행위자다. 그러한 번역을 통해 그는 청년 남성들을 아우르는 형식이 되려 한다. 그 과정을 단순화해보자면 이렇다: ①당신들에게는 불만이 있다―나는 그것을 느낀다(감성적 감응). ②당신들의 불만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페미니즘 때문이다(구상, 도식화, 번역). ②당신들이 나를 지지한다면, 내가 당신들을 대리해서 페미니즘과 싸우겠다(재현, 대표).

③이 가능하려면 일단 ①과 ②가 선행되어야 한다. ③은 ①과 ②의 부단한 과정이 만든 잠정적·일시적 결과일 뿐이다. 재현이 있으려면 먼저 감성이나 정동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재현을 매개하는 부단한 번역(협상과 타협을 포함한 번역)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번역 과정에서 수동성과 능동성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구분 자체가 번역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준석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안티페미니즘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이준석의 논리는 이랬다: ‘나는 단지 청년들의 대변자일 뿐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청년들의 편에 서려다 보니 의도치 않게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 뿐이다.’22 그는 마치 자신이 수동적 감응에 의해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 그는 그저 여느 청년과 똑같은 한 명의 보통 남자로 청년들에게 다가가려 하고 그들에게 감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년들의 공감을 샀다. 그가 충분히 수동적이지 않았다면 결코 능동적 행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가 ‘단지 한 남자’ 만큼 작지 않았다면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커질 수 없었을 것이다.23 이준석이 종종 거의 에펨코리아의 여론을 그대로 읊는 듯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리바이어던은 커지기 위해 공허해졌는데, 공허한 형식이 됨으로써 더 많은 몸을 자신의 내용(질료)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의 주장처럼 청년들이 정말로 안티페미니즘으로 ‘이미’ 뭉쳐 있었고 페미니즘에 맞서 싸우기를 원했으며 그는 그 의지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보면, 이준석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이준석에 의해 청년 남성들의 형체 없는 불만이 비로소 안티페미니즘이라는 형식으로 결집되었다고 하면, 청년 남성들을 순전히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준석도, 청년 남성들도 순전히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지 않았다. 이준석 이전에도 이미 오랜 역사의 여성혐오가 있고, 특히 상층 계급 남성들은 자신의 유리한 지위가 유지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청년 남성들은 단지 이준석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상당한 수의 청년 남성은, 홉스의 설화에서 계약에 서명하는 사람들처럼 ‘자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준석이라는 리바이어던이 자라나게 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청년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심이 없었다면, 이준석의 번역은 실재와 동떨어진 망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 번역은 성공할 수 없다. 번역은 개연적인 한에서 성공할 수 있다.24 정치인은 정념과 의지에 ‘그럴듯한’ 형식을 부여하고, 지지자들은 정치인의 말에 ‘그럴듯한’ 내용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에펨코리아)의 유저들과 이준석은 재귀적으로 서로를 구성하며 정치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 능동적인 행위자(대변하면서 앞장서는 자)와 수동적인 행위자(지지하면서 뒤따르는 자)가 나뉜다. 정치인/지지자, 형식/질료, 능동/수동이 서로를 규정하고 뒷받침함으로써 분화한다. 이 분화의 과정은 리바이어던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다. 이준석이 충분히 크고 안정적인 리바이어던으로 자라나고 나면, 소수의 지지자가 이탈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위협하지 못한다. 리바이어던이 거시적으로 된 만큼 지지자 개인은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해왔다: ‘이 사회는 페미니즘 때문에 분열된 사회다.’ 이것은 그의 망상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나름으로 자신이 사는 사회에 대한 상을 갖는다. 그중 무엇이 주관적 망상이고 무엇이 엄연한 사실인가? 적어도 사회에 관한 한, 망상과 사실은 선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망상과 사실의 분리야말로 사회적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이며 그것을 분리하는 과정이 곧 사회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소리높여 ‘이 사회는 이러저러한 사회다’라고 말한다. 그가 강해지는 만큼 그 말은 사실이 된다. 그가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그저 망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역으로 그의 말이 사실과 동떨어져 있는 한, 그는 강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①사회적 플레이어가 큰 영향력을 얻는 것, ②그가 점점 더 현실을 ‘거시적으로’ 조직하는 것, ③동시에 타자를 상대적으로 더 ‘작게’ 만드는 것, ④그가 자신이 사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드는 것은 동시적이다.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의 적대 역시 재귀적으로 강화됐다. 이준석은 그 분열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물론 나는 페미니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페미니즘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준석식의 음해를 물리치기에 충분치 않다. 이준석은 ‘페미니즘’을 사회를 분열시키는 기표로 부각함으로써 사회를 특정하게 분열시키고, 그렇게 특정한 구도로 ‘분열된 사회’의 상을 사실로 만듦으로써 그 사회의 작은 리바이어던이 되는 데 성공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을 묻는다면, 당연히(!) 그 질문은 특히 젊은 세대 남녀의 정치적 입장을 식별하는 데 결정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 설문조사는, 그 질문이 어째서 그렇게나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문제의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재인식/승인recognition할 뿐이다.

(2)에서 계속

  1. 김형중, 「좌파적 우울」,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봄호, p. 64. ↩︎
  2. 심우삼 기자, 〈이재명 “한국 정치에 보수 있나… 국힘은 범죄집단, 중도보수는 우리”〉, 한겨레, 2025.05.20. (마지막 접속 2025. 07. 28.) ↩︎
  3. 추지현, 「폭력의 연속성과 남성성‘들’」,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폭주하는 남성성』, 동녘, 2025, pp. 21-52 참조. ↩︎
  4. 김학준, 『보통 일베들의 시대―‘혐오의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오월의봄, 2022 참조. ↩︎
  5. 이우창, 「안티페미니즘 전략의 형성에서 음모론적 남성성의 등장까지」, 『폭주하는 남성성』, pp. 173-201 참조. ↩︎
  6. 박권일은 최근 연재 중인 칼럼에서 “극우의 토양이 되는 ‘어떤 진보주의’”를 이야기했다. 박권일 칼럼, 〈극우는 외계에서 오지 않았다〉, 한겨레, 2025.05.29. (마지막 접속 2025.07.28.) ↩︎
  7.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성원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3 참조. ↩︎
  8. 이리예, 「짤의 시대, 안티페미니즘으로 공모하는 루저 남성 정서와 정치 언어」, 『폭주하는 남성성』, pp. 203-42 참조. 이하 인용 시 「짤의 시대」 ↩︎
  9. 진혜원 기자, 〈2030 이준석·김문수 투표자는 무엇이 달랐나[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여론조사]〉,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 08. 05) ↩︎
  10. 물론 이 조사의 목표는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 질문들이 중요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 문항에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조사의 목표이며, ‘과정적 분석’은 다른 연구의 몫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학문적 분업에 기반을 둔 조사와 연구의 설계 자체가 정치적 대안과 변화의 상상에 방해가 됨을 주장하려 한다. ↩︎
  11. 물론 이 ‘번역’은 말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일각의 여론을 정치인이 부각하고, 정치인의 말을 언론이 받아쓰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다시 전파되어 여론이 형성되는 등의 번역의 연쇄가 있다. 이 번역의 과정에 너무 많은 매개가 있어서, 번역이 항상 정치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번역의 성패 여부는 정치인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매개의 연쇄를 고려하더라도, 정치인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갖는 사회적 행위자다. ↩︎
  12. 진혜원 기자가 진행한 김창환 교수 인터뷰, 〈“서울 거주 경제적 상층일수록 극우 청년일 확률 높다”〉, 《시사IN》, 2025.07.02. (마지막 접속 2025.08.05.) ↩︎
  13. Jacques Rancière, The Philosopher and His Poor, edit. Andrew Parker, trans. John Drury etc., Durham&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3, p. 189. 인용한 문장은 랑시에르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비판하면서 쓴 문장이다. ↩︎
  14. Michel Callon and Bruno Latour, “Unscrewing the big Leviathan: how actors macro-structure reality and how sociologists help them to do so”, Advances in social theory and methodology―Toward an integration of micro and macro-sociologies, Routledge&Kegan paul, 1981, p. 297. 강조는 원저자. 이하 인용 혹은 언급시 UBL로 표기. ↩︎
  15.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1』, 진석용 옮김, 나남, 2008, pp. 232-33 참조. ↩︎
  16. 물론 사람들 사이에는 지능에서나 체력에서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도 머리가 좋은 사람을 치명적인 함정에 빠뜨릴 만큼은 똑똑하다. 힘이 약한 사람도 돌멩이를 쥐고 뒤에서 힘센 사람을 기습할 만큼의 힘은 있다.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 차이는 무시해도 될 만큼 미세한 것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강하다면, 그 상대적 강함은 ‘죽임당할 가능성의 평등’ 앞에 아무 의미도 없다. 『리바이어던 1』, p. 168 참조. ↩︎
  17. 우리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정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이해하면 여전히 홉스의 이야기는 놀라운 현재성과 비판성을 갖는다. 홉스의 논리는 이렇다. 어떤 기원적 평등을 가정할 때만 사회적 불평등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혹은, 합리화될 수 있다). 만약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원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전근대 정치의 왕권신수설이 ‘신’을 가정하듯이) 인간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어떤 불평등의 기원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한 불평등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즉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화할 수 없는―불평등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그보다 앞서 있는 평등을 전제하는 것뿐이다. 평등과 불평등의 이 관계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만약 불평등이 자연적이었다면, 즉 인간들의 능력에 본성적인 차이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불평등의 형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에게 정치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월한 존재의 열등한 존재에 대한 지배가 있을 뿐, 정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불평등의 형식은 완전히 안정화되어,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사회적 역동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인간 사회에 ‘정치’가 있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선(先)정치적 전제를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평등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오늘의’ 불평등을 자연화하고 영속화하려 하는 모든 논리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치안논리다. 오늘날 한국의 상류층이 계층의 ‘세습’을 위해 그토록 많은 자원을 투여하고, 제도를 왜곡하고,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모든 인간 능력의 자연적 평등’이라는 홉스의 가설을 강하게 지지한다. 리바이어던이 되는 자는 다른 인간보다 더 뛰어난 자가 아니다. 동등한 능력을 가진 한 사람 혹은 한 집합(assembly)이 필요에 의해,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운이 좋아서 대표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
  18. UBL, pp. 278-280 참조. ↩︎
  19. Ibid., p. 279. ↩︎
  20. Ibid. ↩︎
  21. 라투르와 칼롱은 이 분화와 안정화 과정에 물질과 기호의 동원 혹은 등록enrolment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강조한다. 사회의 안정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비인간이 동원되는가―이 질문의 제기가 홉스의 정치이론에 라투르가 가한 가장 중대한 변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라투르의 이론을 참조하면서, 이 글에서 나는 비인간 물질과 매개의 역할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다만 ‘행위자들 간 크기/권력/층위의 차이는 선험적으로 주어져있지 않고 그 분리는 행위자들의 분쟁에 달린 문제’라는 아이디어를 강조하려 했다. ↩︎
  22. 이준석은 잡지 『맥심』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반페미니스트의 선두 주자 비슷한 역할에 놓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리예, 「짤의 시대」, p. 234에서 재인용. ↩︎
  23. 「짤의 시대」, pp. 233-35 참조. ↩︎
  24. 그러나 번역이 개연적이라는 말은, 역으로 그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청년들에게 혐오와 불안의 정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이준석이라는 형상으로 모이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았다. 만약 그것이 필연적이었다면, 이준석은 그렇게 성실하고도 요란하게 번역의 노고를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

남자, 사람 친구가 될 수 있을까?(2)

―이연숙 평론가와의 대화 2부

1부: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악인의 서사/가시성의 경제

2부: 남성학의 부상/한국 남성성 분석/몸과 외모의 문제/실망에 관하여

남성학의 부상

희우
한편으론 최근 들어서 남성학이 부상하는 경향도 있는 듯합니다. 그런 관심사들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 같고요. 미묘한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전형적인 의미에서 약자나 소수자는 아니지만, 정체성 정치 혹은 담론에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던, 그리고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남성들에 대한 담론이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일본 비평가 스키타 슌스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안희제 님이 쓴 『증명과 변명』1도 그렇고 남성 작가가 남성을 주제로 쓴 글이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남성 서사랑은 다른 게, 어느 정도 페미니즘적인 감수성이나 인식을 체화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문제가 진단된다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당사자성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저술들이고요. 그리고 저는 문학평론가니까 발표되는 소설들을 따라 읽는데, 최근에 남성 인물,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소설들이 좀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젊은 소설가들에 의해서인데, 서장원이나 권희진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2 어쨌든 옛날의 남성 서사랑 다른 게 페미니즘적인 감수성이나 문제의식을 경유한 상태로 쓰인다는 점인 것 같아요. 소설이 꼭 페미니즘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페미니즘적 의제를 의식하고 반응한다는 의미에서요.

연숙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느꼈던 게 과거랑은 달리 페미니즘을 경유한 어떤 남성 서사, 남성 주체가 등장한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이거든요.
한국에서 남성성을 분석할 때, 주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해요. 이 연구들의 핵심은 한국 남성성이 스스로를 약자로 설정하고, 여성을 방패처럼 앞세우면서 동시에 이 여성들에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식민 제국 강대국의 이미지를 덧씌워 비난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여성에 대해 강자라는 사실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이런 자기기만적인 태도가 바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거죠.
정희진 선생님이 분석한 양공주의 사례가 있습니다.3 전쟁 이후에 한국에는 미군이 대거 유입됐고, 한국 남성들은 그 미군들에게 여성을 제공했습니다. 미군들이 지급한 돈으로 여성들이 생계를 유지했고, 그 여성들이 다시 남편이나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공주라는 여성 집단만큼 심한 낙인을 받은 사례도 없었죠.
남성들은 필요할 땐 이 여성들을 불러내 돈을 벌어 오게 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주라고 요구하면서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여성들은 더 이상 순결한 누이, 어머니,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짜 ‘한국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철저히 배제당했습니다. 이미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성들은 자신들이 이 여성들을 마치 포주처럼 이용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약자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여성을 선택하고 배제한 것이죠.
결국 이러한 남성성은 자신들이 가부장의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이라는 상징이 가져오는 모든 특권과 부산물들은 취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태도와 구조를 두고 그동안 한국에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해왔던 거죠.
근데 최근 세대의 남성성은 기존의 식민지 남성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상당히 달라졌는데, 그 중요한 계기가 바로 2015년 이후 강력하게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이거든요. 이전까지의 식민지 남성성은 주로 역사적 약자로서 여성을 방패 삼고 책임을 회피하는 형태였다면, 지금 세대의 남성성은 페미니즘과의 직접적 대결이나 갈등 속에서 형성되고 있어요. 즉, 페미니즘이 이들에게 어떤 정체성 형성의 ‘땔감’ 역할을 하게 된 거죠.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 이후 남성들은 이에 반응해 자기 성찰을 하거나, 자신을 과거의 남성성과는 다른 존재로 차별화하거나,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더 강한 집단적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죠. 오늘날 유행(?)하는 ‘이대남’, ‘인셀남’ 같은 남성성은 페미니즘이라는 맥락과 긴밀히 얽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희우
반동적으로 되는 거지요.

연숙
그렇죠. 그런 식으로 지금의 남성성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프레임하고 다른 게 있죠. 잘 아시겠지만, 요즘 래디컬 페미니스트나 인셀을 분석할 때 ‘인정 투쟁의 결과로 극우화되고 있다’는 설명이 거의 기본처럼 자리 잡았어요.4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에요.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고, 그걸 통해 자립하거나 동료 집단에게 소속감을 얻고 싶어 하니까 굳이 안 해도 될 일들을 스스로 만들어서 행동하는 거죠. 예를 들면, 어떤 운동에 참여한다든지, 아니면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와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고 느껴져요. 그런데 이런 현상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직접 접할 기회는 많지 않잖아요. 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작가들이고, 물론 그분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이런 주제를 깊게 얘기하기는 어렵죠. 또 소위 말하는 ‘이대남’이나 인셀 같은 부류는 대부분 SNS를 통해서만 보게 되니까 실제로 접촉할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관련 책들이5 꽤 많이 나오면서 이런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 같아요. 직접 만나기 어려운 세계를 텍스트를 통해서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 거죠.

한국 남성성 분석

희우
이제 한국 남성성에 대한 우리 나름의 분석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너무 큰 이야기지만 먼저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가속화되는 전통적인 상징의 붕괴……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러니까 공동체의 가치 같은 것도 상징이고, 가부장적 아버지 같은 것도 상징이고 모성애 신화의 어머니도 상징일 텐데요.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모델, 전통적인 의례나 공동체의 구속력, 이런 모든 상징적인 것들의 약화와 사라짐에 대해 말하자면, 이 문제가 여성들보다 남성들한테 훨씬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거든요.

연숙
여성들에게는 그런 전통적인 상징 자체가 이익이 된 적이 없으니까?

희우
네. 그렇기도 하죠. 어떤 공동체의 구속력이라든지 전통적인 어머니상이라든지, 이런 상징들이 약화되거나 사라진 게 오히려 여성들한테는 좋은 일이었을 수 있지요. 하지만 남성들한테는 그게 엄청난 주체성의 위기로 다가왔다는 거예요. 상징들이 사라졌다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누구를 롤 모델로 삼아서, 어떤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나 자신을 정체화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모두 미궁에 빠진다는 것인데요. 어쩌면 남성이 롤 모델 없는 삶에 여성보다 훨씬 취약한 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서 오는 주체적인 불안과 공포가 남성들의 방황이나 극우화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의 현실, 그러니까 양극화나 불평등의 심화라든지 불안정성, 이런 것들은 젊은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처한 현실이었는데, 혹은 여성들한테 더 가혹한 현실이었을 텐데 왜 남성들이 주체성에 더 큰 혼란을 느끼고, 극우화되었는가? 언급하신 칼럼에서 박권일 선생님도 이 문제를 다루셨더라고요. 짧은 칼럼이다 보니까 간명한 대답을 하셨는데, 젊은 여성들에게는 페미니즘이라는 대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종의 새로운 상징으로 작용을 했고, 젊은 여성들은 그 아래에서 모이거나 연대하거나 논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남성들한테는 그런 대의(제 표현으로 하자면 상징)가 부재했다는 진단인데요. 저는 그것도 맞지만, 박권일 선생님의 분석에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 ‘이념적인 빈곤’도 있지만, 아주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문화적·사교적 빈곤도 있어요. 이 두 가지가 물론 연동된 것이지만 동일한 건 아닌데요. 예를 들어 친구들이랑 전시를 보러 가거나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떠는 일이 꼭 무슨 대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많은 돈이나 시간이 드는 일도 아니고. 근데 그런 수준에서도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대안적 문화를 만들거나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도 잘 못 했다. 그러니까 주체적인 수준에서 이중의 빈곤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념적인 수준에서의 빈곤, 또 문화적·일상적 수준에서의 빈곤.
따라서 상징이나 가치의 모델이 없는 세계―이른바 ‘세계 없음(worldlessness)’―에 더 치명적으로, 노골적으로 직면했고, 거기에서 오는 불안과 고독과 공포를 페미니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극우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주관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 극우화는 이미 파괴된 전통적인 상징―권위주의적 통치자나 가부장적 아버지 따위―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또 주관적인/주체적인 차원에서의 상실감, 불안감 같은 게 남성들이 ‘역차별론’ 얘기할 때 강하게 작용한다고 봐요. 객관적으로는 입학이나 취업 등에서 남성들이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데도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러니까 객관적인 상황보다 불이익을 주관적으로 부풀려서 생각하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남성들이 주체적으로 공허하고, 그래서 불안이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졌다.

연숙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까 제가 식민지 남성성 얘기한 것에 이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 남성들 잘하는 게 남 탓인데요. 남 탓 천부적으로 잘하거든요. 이게 식민지 남성성의 어떤 특징이기도 해요. 내가 받은 폭력, 침해, 수탈, 고통이 분명히 있는데, 이걸 진짜 강자한테 뺏겼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데 극복이 안 되고, 패배를 인정하기도 싫으니까 옆에 있는 만만한 사람, 특히 여성에게 투사하는 방식이 되는 거죠. 즉,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 나머지 여혐을 하게 됐다는 거죠.
근데 요즈음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흥미로워요. 어떻게 보면 다들 일종의 ‘식민지 남성성’을 겪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이유를 딱 잘라 말할 순 없고, 누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지목할 수도 없어요. 각 나라, 각 사회마다 맥락이 다르니까요. 근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남성들의 극우화가 나타나고 있고,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고, 전반적으로 남성들이 마치 한국 남성들처럼 집단 PTSD 겪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다는 게 흥미로운 거죠. 주적을 설정하자면 결국 신자유주의고, 자본주의 체제가 (예정대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걸 인정하고 단합하려면 많은 걸 포기하고 다시 생각해야 하니까 쉽지 않겠죠.
한국 남성들 같은 경우, 기사만 봐도 지금 말씀드린 그런 ‘내가 불이익받고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두드러지게 드러나잖아요. 우리가 얼마 전에 읽은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봤듯이,6 남성들이 부모보다 못 산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그냥 경제적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자기 피해를 부풀리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현실적으로 객관적인 지표를 보면 여성이 훨씬 더 차별받고 있는 게 맞는데도 말이에요.

희우
그렇죠.

연숙
근데 주관적으로는, 나는 우리 아빠 엄마랑 비교했을 때 내가 받아야 할 만큼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왜 이렇게 됐냐고 생각하면 결국 여자들이 뭘 해서 이렇게 됐다고 결론 내리는 거죠. 자기 눈에 보이는 변수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인지 부조화에서 오는 갭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게 안타까운 거죠.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들이 이걸 잘 해결하고 있는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누군가는 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스트들도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불이익이나 고통 같은 걸 전부 남자들 탓으로 돌리잖아요. 물론 그게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세상을 하나의 축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결국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가 다 남자들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가게 되고, 남자들은 또 반대로 여자들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니까, 둘은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이대녀, 이대남들은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저 사람들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해결이 안 돼요. 한쪽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런 상황인 거죠.
근데 다만 페미니즘 같은 경우는 그래도 이념적이든 문화적이든 뭔가 정신 승리할 수 있는 방법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자기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방식들이요. 근데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은 그런 게 없어요. 디시인사이드 같은 커뮤니티 외에는 기댈 데가 없으니까, 훨씬 더 제 살을 파먹고 있는 상황인 거죠.

희우
네. 아버지처럼 살 수 없다는 거…… 그 문제가 핵심인 거 같아요. 제 생각엔 바로 그 문제에서 두 가지 새로운 유형의 남성성이 출현한 것 같아요. 식민지 남성성을 전제하지만 어쨌든 과거와는 뭔가 차별화된 두 개의 남성성이 나타난 거지요. 첫째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춘기 남성성’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요. 지금도 아주 많은 남자한테 어른 남자가 된다는 건 ‘처자식’을 갖는다는 거잖아요. 그게 삶의 목표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데 자기가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면 어른 남자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꼭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게 아니더라도, 그것을 비롯해 한 사회의 어른으로 거듭나는 전통적인 의례를 거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사춘기 상태에 머물게 되는 현상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 사춘기 주체성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식의 네트워크 속에서는 굉장히 무서운 괴물성을 갖게 될 수 있죠. 총 든 중학생처럼요. 서부지법 난동에서도 그런 불균형한 괴물성 같은 게 드러난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위압적인 논리로 무장하고 커다란 몸으로 폭력을 휘두를 때도 사실은 상처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일 없이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주체성, 이카리 신지 같은 주체성이 표면 아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거랑 맞물려서 나타나는 두 번째 주체성은 ‘냉소적 이성의 주체’라고 할 만한 건데요. 이건 전자(사춘기에 유예된 남성성)에 비하면 훨씬 영리한 관리자에 가까운 주체성으로, 전자의 불안과 공포를 자기 이익이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주체죠. 냉소적 이성이 그런 거잖아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거.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게 자기한테 이득이 되면 말하고, 혹은 그게 자기한테 편안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냥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 이 냉소적 이성을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게 이준석 같은 사람일 텐데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맞물려 있으면서도 다른 주체성이라는 거예요. 한 사람에게 겹쳐져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요. 서부지법에 가서 난동하는 애들하고 이준석이나 그 지지자들이 체현한 주체성은 다른 종류의 것이니까요. 또 극우 세력에 선을 그으면서 오히려 이준석의 포지션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듯한 착시가 일어나는데, 주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지자면 사실 오히려 전자가 후자(냉소적 이성의 주체)보다 훨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연숙
무척 흥미롭네요. ‘사춘기 남성성’은 어떻게 보면 퀴어 시간성 개념7과 신자유주의 아래 프레카리아트 주체8와도 연결되는 개념 같아요. 연장된 사춘기를 겪는, 몸만 커다란 ‘어른’이 어떻게 공동체를 향한, 타자를 향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부분은 남성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어른’이 못될 우리 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두 번째로 언급하신 ‘냉소적 이성의 주체’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준석 얘기하셔서 저도 이어서 말해보자면, 남초 커뮤니티에서 나온 말 중에 ‘wwe’라는 게 있어요. 사회적인 이슈가 터지고 사람들이 시위하는 걸 보면, 거기서 바로 냉소적으로 “이거 다 짜고 치는 거지”라는 식으로 댓글이 달리거든요. 그래서 “이거 다 wwe다” 이런 식으로 말해요.9
이번 계엄령 얘기 나왔을 때도 그렇고, 그 이후 시위 현장에서도 그렇고, 동덕여대 사태 때도 그렇고, 이런 일들 볼 때마다 방구석 커뮤니티 애들은 저거 다 짜고 치는 거라고 해버려요. 이게 완전 음모론적 사고죠. 근데 또 한편으로는 이준석 같은 사람들의 태도가 뭐냐면, “내가 사기 치고 있는 거 나도 다 알아. 나도 아는데, 이건 그냥 내가 정치인으로서 플레이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굴잖아요. 이 멘탈리티가 인터넷에서 흔히 만나는 20대 남성들, 그 집단의 핵심 속성인 것 같아요. 세상을 게임으로 보고, 나는 이 게임에 참여해서 내 몫만 챙기면 된다, 손해만 안 보면 된다 이런 식인 거죠.
희망 걸고 뭔가를 믿는 순간 손해 보게 되고, 도박하면 무조건 잃는다고 생각하니까 차라리 냉소하는 게 안전하다고 여기는 거죠. 냉소하면 잃을 게 없으니까요. 어차피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되니까. 이런 식으로 사고가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흥미롭게 본 텍스트가 있었는데, 김민하 평론가가 20대 남성들이 왜 시위에 안 나오냐는 질문에 대해 게임에서 그 원인을 찾더라고요.10 사실 이런 결론은 흔한 문화비평이긴 한데, 어쨌든 게임을 많이 한다는 게 상대방의 전략이나 전술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진다는 거죠. 상대방의 진심을 진심으로 안 받아들이고, 그냥 전술로 해석하고, 상대의 체력 게이지나 능력치를 보고 싸울지 말지 계산하는 식으로만 사고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치나 정의 같은 추상적인 개념보다 이길지 질지, 손해 볼지 안 볼지가 훨씬 중요한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사람들 바꾸는 게 진짜 어려워요. 왜냐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뀌지 않거든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이건 일종의 중독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거죠. 사고방식이 완전히 게임에 절여져서, 세상을 게임처럼 보고, 이런 프레임에 중독돼 있다면, 이걸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 중독을 멈추게 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희우
말씀하신 것처럼 냉소적 이성을 탑재한 사람들은 변화의 여지가 거의 없죠. 그리고 한편으로 그 냉소적 이성 때문에 남성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게 어려운 일이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어서, 군 복무의 어려움은 남자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할 때 늘 꺼내는 레토릭이잖아요. ‘남자들은 가장 꽃다운 나이에 군대 가는데 여자들은……’ 이런 이야기. 또 한국 남성성 분석할 때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군사주의인데요. 한국 사회 전체가 군사주의적 사회라는 분석도 많이 있고요. 그렇지만 미시적인 차원까지 들여다보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군대에 흔히 있을 법한 병사를 떠올려 보자면요. 여성 간부에 대해 뒤에서 성적인 농담하고, 힘 약한 선임들 무시하고, 가끔 후임들한테 욕하고, 힘든 업무에서 미꾸라지처럼 도망 다니는…… 이렇게 흔히 있을 법한 병사는 병사들 사이에 인기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어떤 매력적인 남성성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사실 이 병사가 하는 그 행위들은 군법에 의해 금지된 거잖아요. 위반인 것이죠. 또 현판에 적혀 있는 ‘국군의 이념’을 진짜 진지하게 믿는 20대 병사가 있을까요? 사실 그 군사주의 이념의 명목적인 내용을 진짜로 믿는 주체는 없고, 군대에서 여러 더러운 꼴을 보면서, 오히려 모두가 거기에 더욱 냉소적인 거리를 취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조직이 유지될 수 있는 건데, 만약 모든 병사한테―특히 신자유주의적인 자기 경영 마인드를 탑재한 20대 청년들에게―군사주의 이념과 군법을 정말로 엄격하게 지키고 내면화하라고 하면 조직이 붕괴하거나 폭발할 테니까요. 그래서 적당한 위반과 군사주의에 대한 냉소적 거리는 오히려 군대 조직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고 심지어 군대에서 함양되는 덕목이라는 거예요.
반대로, 해병대 박정훈 대령의 사례처럼, 오히려 군대 조직이 참을 수 없는 것은 ‘참군인’이죠.
그러니까, 한국 남자들이 군대에서 정말로 배우는 것은 어떤 남성성인가? 저는 군 복무가 20대 초반 남자애들 모아놓고 하는 강도 높은 남성성 훈육의 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훈육의 내용은 말 그대로의 군사주의를 내면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위반의 감각을 익히게 하는 것이죠. 필요에 따라 군사주의를 이용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하는 위반의 감각. 그 미시적 감각 속에 ‘남성성’이 있는 거죠. 어떤 법은 지켜야만 하고, 어떤 법은 위반해도 되는가? 누가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인가, 누가 무시해도 되는 이빨 빠진 호랑이인가? 어떻게 성적인 농담을 해야 하는가, 어떤 선은 넘으면 안 되는가? 기타 등등…… 이게 말씀하신 게임의 사고방식과 관련이 될 것도 같습니다.

연숙
네, 저도 너무 동의하면서 들었고요. 저희가 얼마 전에 같이 봤던 맥스 디킨즈의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도 지금 말씀하신 거랑 연결되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남자들이 사실 진심으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게, 중요한 건 진심이 아니라 농담이라는 거죠. 농담을 하면서 어디까지 상대가 받아줄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남자답게 선을 넘고, 어디까지 희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핵심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다 같이 선을 넘어보는, 일탈의 경험들이 오히려 남성들 사이의 결속을 더 강화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사실 많은 퀴어 이론가들이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도 지적했던 부분이고요. 결국 그게 남성들이 서로 얼마나 끈끈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농담의 대상이 되는 약자들, 특히 여성들은 사실 이 남성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고, 그냥 남자들끼리 농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에요. 진짜 중요한 건 그 농담을 통해 남자들끼리 얼마나 결속하고 유대를 느끼느냐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런 게 당연히 동성 사회적이라고 얘기되는 거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제가 아까 얘기한 디시인사이드라든지, 이준석에 대한 남성들의 열광도 결국 같은 결인 것 같아요. 이준석이 공중파에서 그런 농담의 감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걸 보면서 엄청난 해소감과 쾌감을 느끼는 거죠. 그리고 그걸 보고 나도 웃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자기 남성성을 확인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요.

희우
네, 그래서 저는 정면대결식의 비판, 이를테면 군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면 싸움,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식이 안 통한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면 사실 진짜로 그런 주체, 군사주의적 주체는 없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주체적인 차원에서 궁지에 몰린 남성들에게는 또 다른 측면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상황에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계산 능력이 부재하는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멍청해 보이는 주체들이 있잖아요. 서부지법에서 난동한 애들 같은. 그리고 이것은 일정 부분 페미니즘의 역설적인 효과였을 텐데, 젊은 남자들이 세계에 냉소적 거리를 취할 수 없게끔 강제했다는 거예요. 전투적으로 만들었다는 거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땔감’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이 젊은 남성들의 극우화에 큰 역할을 했지만(이 말이 오해되지 않기를), 그래서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했다는 거예요. 왜냐면 누군가 자기 세계에 냉소적 거리를 취하는 모순적 태도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되니까요. 아무튼, 오히려 그 사람들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연숙
맞아요. 결국 우리가 말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게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고 다 섞여 있을 수밖에 없죠. 말씀하신 것처럼 연약함과 안쓰러움, 동시에 냉소적이고 합리화에 능한 태도가 하나의 사람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게 현실일 거예요. 『증명과 변명』에 대해 얘기하신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 ‘인생이다’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단순히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사이 어딘가에 낀 채로 계속 머물러 있는 상태인 거죠.
저도 사실 20대 시스 헤테로 남자들이랑 직접 얘기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텍스트나 기사로 접하는 이미지들이 전부일 때가 많은데, 막상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동생 같은 경우를 보면 인터넷에 나오는 전형적인 20대 남성상하고는 또 다르잖아요. 그렇다고 그들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게, 밤에는 또 어떤 댓글을 달고 있을지 모르고, 그런 양가적인 지점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친구들이 언젠가 자기 상황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끔, 최소한 자기 경험을 이해할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뭔가 이론적인 쿠션을 마련해두는 게 진짜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그 언어가 없어서 냉소로 흘러버리고, 농담으로 넘기고, 피해의식에만 갇혀버리는 건데, 그걸 풀어낼 수 있는 틀이 있다면 조금은 다른 방향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게 쉽게 될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중요하겠죠.

몸과 외모의 문제

희우
이제 조금 시선을 옮겨서 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몸과 시선의 문제, 이건 거시적이거나 구조적인 분석에서는 흔히 말하지 않는 문제인 것 같거든요.
아까 전통적인 상징의 붕괴 얘기했는데, 사실 그 문제는 엄청나게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죠. 거슬러 올라가면 청년기 마르크스가 이미 한 얘기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목가적이고 낭만적이고 종교적이고 예술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들이 ‘이기적인 계산의 차디찬 얼음물’에 처박힌다는 것이었지요. 그 말은 ‘다른 가치들은 모르겠고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식의 태도가 지배적으로 된다는 건데요. 이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 잘 해당하는 말이지만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이념이나 상징이 붕괴하면, 돈만 남는 게 아니라 또한 몸이 남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이 돈 아니면 몸으로 환원된다는 거죠. 먼저 돈만 남는다는 거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 앞에서 자기를 분류하고 결정하게 된다는 거지요: ‘너 부자야 아니야? 너 이거 소비할 능력이 있어 없어? 소비할 능력이 있으면 여기서 놀고, 아니면 입 다물고 꺼져.’
그런데 돈의 문제뿐만 아니라 몸의 문제가 남게 되는데, 몸의 문제가 사람들에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죠: ‘너 남자야 여자야? 젊어 아니면 젊지 않아? 아름답고 멋지고 잘 가꿔진 몸을 가졌어, 아니면 그렇지 못한 몸을 가졌어?’ 남자들이 진짜 돈만 생각하고 그러는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점점 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게 잘생긴 남자, 멋진 몸을 가진 남자에 대한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자조적인, 때로는 굉장히 심각해지기도 하는) 어떤 질투심이나 선망 같은 거잖아요. 매노스피어에서 말하는 ‘알파메일’이 그냥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자가 아니라 잘생기고 잘 발달한 근육질 몸을 가진 남자인 것처럼요.

연숙
그렇죠.

희우
사실 한국 남자들이 여성들에 비해 꾸밈을 안 한다, 안 가꾼다고 말하지만요. 물론 여성들이 외모에 관해 받는 압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떤 통계를 보면 한국 남성이 전 세계 남자들 중에서 화장품 소비를 가장 많이 한다는 거예요.11 피부관리를 위해서요. 우리가 흔히 돈 없으면 ‘가진 건 몸뿐’이라고 하는데 그 몸이 어떤 몸인가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어요. 그게 젊은 몸이냐 아닌가? 멋진 몸인가 아닌가? 잘 가꿔졌는가 아닌가? 그 지점에서 우리가 같이 읽었던 서장원의 소설 「리틀 프라이드」가 흥미로운 거였죠. 선생님도 재밌게 읽으셨다고 하셨지만, 전 그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게 남자/여자, 성소수자/시스젠더 이성애자 같은 식으로 (정체성을 축으로) 나뉘거나 페미니스트/안티 페미니스트 입장의(정치적 입장을 축으로) 분열만 그려지는 게 아니고 또 다른 한 축의 나뉨이 그려진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멋진 몸을 가진 사람/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나뉨이지요.
그 소설의 화자는 트랜스젠더 남성(FTM)인데, 키가 160대 중반 정도 되고, 자기의 남성적인 매력에 전혀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퀴어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당연히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거기서 웃옷을 벗고 노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죠. “땀으로 번들거리는, 잘 다듬어진 예쁜 몸을 나는 조금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봤다.” 이런 구절이 있거든요. 화자는 그 지점에서 오스틴이라는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데, 직장 동료인 오스틴은 키가 화자보다 더 작은 남자예요. 하지만 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가 어떻게 해야 사람들한테 그나마 호감을 살 수 있는지 아는 노련한 인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나중에 이 남자가 여성 혐오적인, 안티페미니즘적인 발언을 해서 화자가 확 거리를 느끼게 되거든요. 두 인물이 대립적인 관계가 되는 이유는 물론 화자는 페미니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데 오스틴은 안티페미니즘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화자가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매력적인 몸을 가진 사람들/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할에서 오스틴이 자신과 같은 편에 속한다고 느끼기 때문인 거죠.

연숙
그렇죠, 이 매력이라는 부분이, 그러니까 외모를 말씀하시는 거죠?

희우
대체로 그렇죠. 제 생각엔 단순히 외모로 환원되지 않는 매력의 복합성이나 창발성을 사고하는 게 동시대 문화를 이해하고 비평할 때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 문화 안에서 차이를 만들기 위해 꼭 검토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리틀 프라이드」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매력은 외관상의 ‘정상성’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고 이 정상성이라는 기준이 매력을 굉장히 획일적인 규범으로 만들고 있어요. 소설 속 오스틴은 외견상 멋지지 못한 남자인데 그래도 노련한 유머나 화술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으로 나와요. 당연히 누군가의 매력은 그런 문제까지 포함하는 거겠죠. 자신감, 유머, 화술, 매너, 분위기 등등. 그렇지만 결국은 오스틴이 사지연장술을 받잖아요. ‘내 삶의 문제는 그거야, 내가 키가 작은 남자라는 거’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사지연장술을 받게 되는데, 많은 경우 화술이나 유머 등의 요소도 외모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거겠지요. 특히 연애의 문제, 젊은이들의 성적 관계라는 문제에서는 그렇게 되는 거지요.

연숙
그렇죠. 이 매력이라는 게 예전부터 희우 님이 관심 갖던 주제이기도 하고요.12 좀 더 넓게 보자면 사실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매력의 종류는 정말 무수히 많잖아요. 그런데 결국 가장 지배적인 게 외모고,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이대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외모가 핵심이에요. 특히 남자로서, 여자를 상대로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외모 말이에요.
근데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제가 며칠 전에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에 다녀왔거든요.13 벌써 3회째라 3년째 이어지고 있는 행사인데, 거기서 한국 섭식장애 연구 현황을 발표하는 세션이 있었어요. 여러 발표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게 강의영 님의 「여성 섭식장애 경험과 페미니즘의 내재화」(2023)이라는 제목의 연구였어요. 당시 강의영 님이 보여주신 PPT에서 논문에 등장하는 인터뷰를 몇 문장씩 옮긴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인상 깊었거든요.
그 인터뷰들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게, 20대 여성들, 특히 페미니스트인 여성들에게도 외모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문제라는 거였어요. 사실 남성들보다 여성한테 가해지는 외모 압력이 훨씬 더 심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여성이 자기 경험을 재해석하면서 “내가 어릴 때 뚱뚱하다고 놀림당하고 상처받아서 그때부터 섭식장애가 시작된 것 같다”는 식으로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는데, 그 안에 이미 자기들도 페미니스트로서 인식하고 있는 모순이 있더라고요.
예컨대 나는 페미니스트고,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가부장제 문화에서 훈육된 결과라는 걸 아는데도, 왜 계속 외모를 신경 쓰게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는 거죠. 너무 오랫동안 외모를 차등적으로 바라보는 기준에 길들어 있어서, 다른 건 공부하면 이해가 되는데 외모만큼은 아무리 알고 있어도 극복이 잘 안 되는 거죠. 퀴어 이론을 읽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외모지상주의가 해롭다는 걸 분명히 아는데도 거기서 벗어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예요. 그래도 결국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요. 결국 이게 다 정상성의 문제잖아요.
남자들도 결국은 그냥 어떤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남자로서 매력을 갖고 싶어 하는 거고, 그러니까 남자로서 구실을 하려면 어느 정도는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여자들도 비슷하겠죠. 근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꼭 그렇게 안 살아도 되지 않나 싶어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이미 많은 인셀 분석에서도 나오잖아요. 이 남자들이 특정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라, 여자를 그냥 자원이나 재화처럼 생각하면서 인기 얻고 싶어 하는 거고, 그래서 외모를 바꾸고 싶어 하는 거고.14 근데 이런 종류의 욕망을 좀 포기할 수는 없을까, 그냥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불가능하겠지만요.15

희우
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그런 강박이 완화된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심해지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요. 물론 페미니즘에서 탈코르셋 운동도 있었고 저도 그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워낙 꾸밈에 대한 압력이 여성들한테만 엄청나게 부과되어왔던 거니까요.
하지만 지금 변화가 있다면 오히려 남성들도 점점 외모에 더 집착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물론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식에도 큰 성차가 있겠지만요.

연숙
이게 사실 답이 없는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이미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서 살고 있잖아요. 디지털 기기들이 너무 일상화돼 있고, 핸드폰만 켜도 24시간 내내 릴스나 틱톡 같은 데서 매끄럽고 완벽하게 다듬어진 몸들을 계속 보게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욕망이 그런 이미지들에 계속 피드백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욕망 자체가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재구성되는 거죠. 결국 우리의 욕망이 스스로 진화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이미지들에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벗어나기가 정말 어려운 거고요.
그런데도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은, 그냥 그런 거 그만 좀 보자는 거예요. 물론 말이 쉽지, 그만 보는 게 쉽겠느냐마는, 백날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론 읽어도 특히 20대들은 그런 데 예민할 수밖에 없고, 저도 사실 그랬거든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저도 2~3년 정도 섭식장애를 겪었고, 한참 동안 내 ‘부드럽고 말랑한, 여성적인’ 몸에 대한 생각으로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시기를 보냈어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키 크고 잘생긴 남자들 보면 부럽죠. 희우 님한테도 자주 말했지만, 저런 사람들은 태어나서 여자 만나려고 노력이라는 걸 해봤을까 싶은 생각 들 때마다 진짜 열 받거든요…….
근데 이런 열 받음은 결국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같아요. 계급 투쟁도 결국엔 질투에서 출발하는 거잖아요. 내가 못 가진 걸 남이 가졌을 때, 빼앗고 싶고 심지어 파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게 어떤 형태로든 ‘운동성’으로 나타나는 거고요. 여기서 말하는 운동은 무브먼트가 아니라 그냥 인간의 본능적인 액티비티 같은 거죠. 이런 감정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인간한테 너무 자연스러운 거니까. 다만, 이런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인정’ 받지 못하는 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그냥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이런 문제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요.

희우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

연숙
그러니까, 그 정도로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물론 한창 예민한 상태에서는 그게 정말 어렵고, 일단 그 사고에 빠져 있으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아요. 저도 그걸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단순히 남자들 얘기만이 아니라, 그냥 전반적으로 외모라는 게 일종의 정신병처럼 작동하는 것 같아요. 외모 정신병은 진짜 말 그대로 정신병이라서, 분석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냥 그만 생각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요. 제가 아까 말한 ‘이 욕망을 포기, 철회, 중단하면 안 되나’라는 게 결국 그 얘기예요.
『섹스할 권리』를 쓴 아미아 스리니바산이랑 『피메일스』를 쓴 안드레아 롱 추가 딱 이 주제로 한 번 부딪힌 적이 있어요. 『섹스할 권리』에 실린 「섹스할 권리」라는 글 보면, 남자들이 특히 백인이고 금발에 가슴 큰, 아주 전형적인 트레이시 같은 여자랑 자고 싶어 하는데, 그런 여자들이 자기한테 관심 없다고 느끼면 열 받아서 총기 난사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근데 스리니바산은 여기서 문제를 욕망 자체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이 그런 여자를 원하고, 또 그 욕망이 좌절됐다고 해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미 비틀려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욕망이라는 게 너무 성별 규범이나 정상성에 갇혀 있어서, 남자들끼리 관계 맺는 것도 어렵고, 여자들에게도 끊임없이 평가를 하고, 그 평가 기준을 자기 자신한테도 들이대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욕망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욕망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죠.
그랬더니 안드레아 롱 추가 그건 위험한 발상이라고 반박해요.16 그렇게 욕망을 바꾸라고 하면, 오히려 소수자들이 가지고 있는 ‘뻔한 욕망’,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정상성에 가까운 욕망조차도 포기하라는 말이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라든지, 트랜스 여성이나 트랜스 남성 같은 사람들에게 그 말이 더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거죠. 왜냐면 그들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상성’을 향한 욕망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바꾸라고 요구하는 게 결국 소수자들한테 더 가혹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욕망을 바꾸라거나, 양보하라거나, 욕망을 해체하라는 식의 말이 실제로는 불가능하고, 때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런 논쟁을 보면, 우리가 쉽게 ‘욕망을 포기하자’고 말하는 것도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다시 생각하게 돼요.

실망에 관하여

희우
음…… 안 그래도 안드레아 롱 추의 『피메일스』17를 최근에 재독했는데, 그 책 뒷부분에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니까 욕망을 부정하거나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내 욕망을 끝까지 따라갔을 때 어디에 부딪히게 되느냐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선생님이 그 책에 발문도 쓰셨지만, 그 책 뒷부분에 ‘실망’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나오잖아요. 저는 그 실망에 대한 논의에 무언가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봐요. 저는 사실 비평 쓰면서 몇 가지 개념 주위를 한 시기 동안 배회하는데, 한동안 매력에 대해서 많이 썼지만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실망’ 혹은 ‘실망 이후’에요.
이 주제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와 어느 정도는 느슨하게 연결이 될 것 같은데요, 그 책에서 물론 롱 추가 말하는 실망이라는 건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겪었던 경험하고 불가분한 것이겠죠. 자기는 여성이 되면, 자기가 욕망했던 그 여성의 몸을 얻으면 구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되어 보니까 아니라는 거잖아요.

연숙
‘내 새로운 보지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 글 말씀하시는 거 맞죠?

희우
네. 그리고 그 뒷부분에 실망에 대해 논의하는데…… 거기서 롱 추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상성 따위에 대한) 헛된 희망을 품는 것까지 포함해서, 우리 자신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좀 망가져 있고 못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 그런 자신과 계속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좀 신기하게도, 그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제시하는 대안하고도 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거기서 저자인 스기타가 일본 남성들에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알파메일’이 되지 못한, 약자 남성에게 제시하는 두 가지 대안인데요. 첫 번째는 좌파가 되라는 것, 이건 정치적 이념을 가지라는 말이겠지요. 자신의 불행을 더 약한 존재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지 말고, 체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라. 그러고 나서 두 번째 대안을 제시하는데, 저는 이 부분에서 그 책이 차별화된다고 느꼈고, 진짜 현실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염려한다고 느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대안은 요약하자면 ‘그냥 버티는 삶을 살아라’라는 것인데요. 남을 해치지도 말고 자기를 해치지도 말고 그냥 버티는 삶을 살아라. 첫 번째 대안, 즉 이념을 갖고 정치적 투사로 살아라는 것 자체도 일종의 명령일 수 있는데, 그 명령의 수행에도 실패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이 투사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럼 투사조차 되지 못하는 삶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에 대한 대답이 ‘버티는 삶’인 것인데요. 아까 제가 젊은 남성들이 이념적인 수준에서도 빈곤하고 일상적인 수준에서도 빈곤하다고 했잖아요. 저자가 제안한 두 가지 대안이 이 두 가지 빈곤에 각각 대응하는 거지요. 이념적인 빈곤에 대한 대답은 ‘좌파가 돼라’는 것이고 일상적인 빈곤에 대한 대답은 ‘버텨라’. 그런데 이게 진짜 빈곤한 상태 그대로 버티라는 뜻은 아니고 소소한 의미를 찾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인데……

연숙
네, 저도 계속 쭉 동의하면서 듣고 있었어요. 제가 아직 읽지 못한 책이지만 하나 떠오르는 게 있네요. 얼마 전에 하버드 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제목이 『정치적 실망(Political Disappointment)』이에요. 이 책의 저자 사라 마커스는 실망을 “시기적절하지 않은 욕망”으로 정의하고, 이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실현되지 못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이 지속되는 상태라고 설명해요. 이러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과 집단적 실천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는 거죠.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실망은 비전을 품고 있는 어떤 장소일 수 있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앤 츠베트코비치의 『우울: 공적 감정』에서도 이런 부분이 나와요. “정치적 우울에 대한 논의는 실망을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급진적 비전과 삶의 방식이 끈질기게 지속된다는 점을 스스로 상기해야 하는 필요에서 비롯한다”18, “정치적 실패 이후 실망을 견뎌낼 정동적 에너지의 필요”19……. 실망은 그 자체로 엄청 큰 마이너스 에너지인거죠. 그러나 마이너스 에너지도 분명 에너지고요. 이걸 타자를 향한 분노, 혐오로 확 돌려버리는 대신에 붙잡고 소화하는 것도 굉장히 큰 공간과 노동을 필요로 하고요.
요즘 같은 시국이라서 그런지 다들 이렇게 너무 크지 않고, 그냥 여진처럼 남아 있는 감정들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실망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도 좀 달라질 것 같고요. 어쨌든 실망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국 내가 한 번 기대를 걸었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실망이 따라오는 거고, 그 지점에서 오히려 희망적인 전망도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 내가 한 번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기대를 걸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뭔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려고 했지만, 막상 가보니 별거 없었고.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아 있다는 거, 그 자체가 의미가 될 수도 있죠. 내가 한 번은 다르게 살아보려고 했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극적으로 변하는 건 아니죠. 애초에 원래 내 인생이 그런 거니까. 결국엔 자기 인생이 그렇다는 걸 받아들이는 연습 같은 건데, 이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윗세대는 비평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우리 세대는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다는 현실과도 연결돼요. 그래도 우리는 어쨌든 한 번은 비평으로 살아봤고, 불평하면서 글 쓰는 재미도 느껴봤으니까 그냥 계속 하는 거고요.
근데 이런 모습이 윗세대 눈에는 완전 패배감의 증상처럼 보일 거예요. 무력하고, 실망에 안주하는 모습으로요. 사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는데, 그걸 하려다가 실망해서 그냥 주저앉아버린 거니까요. 근데 여기서 저는 진짜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무력감과 패배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 실망 속에서도 내가 한 번 다르게 살아보려 했다는 걸 기억하는 것 사이의 차이요. 이게 구분하기 쉽진 않지만요.
예를 들어, 말씀하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제시하는 대안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너무 기대하지 말고, 인셀이 됐다고 해서 남들 몇 명 죽인다고 네 인생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냥 살아라, 이런 식의 조언이요. 얼핏 들으면 굉장히 무력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사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그냥 살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을 거예요. 오히려 그게 자기 변형의 과정일 수도 있고요. 저는 이런 걸 단순히 수동적으로 철회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양보하고, 포기하고, 물러서는 것도 하나의 운동성이라고 봐요. 겉보기엔 진보가 아니라 퇴보처럼 보여도, 사실 뒤로 가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실패하고 실망하는 것조차도 거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거고, 단순한 무력이나 패배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이 저한테는 중요해요.

희우
맞습니다. 실망이 단순히 무기력이나 패배감과는 다르다는 말이 참 좋네요.
실망 이후 혹은 ‘버티는 삶’은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해결책인데, 이 대안을 더 구체적으로 우리 삶으로 끌어와서 논의를 확장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버티는 삶이라는 게 뭘까? 거창한 이념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물론 좋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어쨌든 오늘 하루, 이번 일주일 나름 의미 있게 보냈다, 했을 때 그 의미란 무엇일까? 이념에 따라 사는 사람도 어쨌든 일상을 작은 의미로 채울 필요가 있잖아요. 아니면 삶이 망가질 테니까.
사실 인셀 담론들도 너무, 남자들이 연애를 하느냐 섹스를 하느냐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증명과 변명』을 읽고, 또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를 읽고 든 생각은 이건데요. 오히려 집중할만한 문제는 우정 혹은 친구 만들기가 아닐까? ‘오늘 그래도 살 만했다’라고 느끼는 건 우정이나 친구 만들기에 달린 문제 아닐까? 또 친구 관계에서는 외모가 덜 중요하잖아요. 물론 사춘기 때나 20대에는 우정도 외모에 좌우될 수 있지만 그래도 연애에서보다는 훨씬 덜 중요한 문제잖아요.
근데 어쨌든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남자들이 그런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능력도 많이 망가져 있기는 하죠. 그래서 더 이런 생각이 드는데, 지금 남자들이 주체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면 오히려 ‘친구-되기’가 답일 수도 있겠다. 서열 관계나 냉소적 농담으로만 가득한 뒤틀린 친구 관계 말고,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친구 만드는 법을 배우기. 남성들의 관계가, 이성애자 남성들끼리의 관계라고 해도 꼭 위압적인 남성연대나 ‘알탕 문화’처럼 될 이유는 없잖아요. (갑자기 선생님이 쓰신 「비우정의 우정」에서 동질성이 아니라 차이를 전제하는 우정에 대해 말씀하신 게 떠오르네요20.) 해답이 엉뚱한 곳에서 나올 때가 많잖아요. 예를 들어 나이든 친척이 태극기 집회에 너무 열심히 참여하고, 그 논리에 세뇌돼있는 듯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임영웅에 빠져서 더 이상 태극기 집회를 안 나가는 것처럼요. 우리가 그 사람이 태극기 집회에 경도되어 소리 지를 때는 답이 없다고 느끼는데, 도저히 못 바꾸겠다 싶은데 그게 엉뚱한 방식으로 해소되기도 하는 거잖아요. 왜냐면 결국 그 사람이 완고한 논리로 무장하고 경도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진짜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불안이나 외로움, 고독 같은 것을 해소하려다가 그렇게 된 거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물길을 터주면, 비가 많이 올 때 개울의 형태가 변하듯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죠.

연숙
네, 맞아요. 친구 만들기라는 게 사실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가장 일상적인 사회적 활동 중 하나인 거죠. 굳이 ‘친구’라는 이름일 필요도 없고, 꼭 깊은 관계가 아니어도 되는데, 그 기본적인 사회적 연결 자체가 어려우니까 결국 ‘친구 없음’이라는 식으로 그 결핍이 표면화되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꼭 친구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오프라인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게 최소한 인터넷에서 계속 여혐 커뮤니티 들락날락하고 댓글 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런 온라인 활동도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실망한 자기 자신을 견디기 위한 방식일 수 있겠죠. 일종의 감정 관리 같은 거니까요. 근데 그게 결국은 더 자기 파괴적이고, 실망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좀 더 회복적인 방식으로 실망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망이 꼭 파괴적일 필요는 없는데, 문제는 그걸 다르게 감당할 수 있는 루트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거죠.

희우
맞아요. 롱 추의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리를 발견했는데요. 롱 추가 말하는 바는, 실망이 두 번 일어난다는 거예요. 두 번의 실망에 대한 이 논의가 말씀하신 ‘회복적인 방식’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실망은 내가 너무 간절하게 원했고, 구원이 있을 줄 알았고, 뭔가 삶이 나아지리라고 기대를 걸었던 그 X가 실제로는 별거 아니고,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인데요. 롱 추가 드는 예는 (물론 성전환도 있지만) 가령 연인, 정치적 신념, 운동, 예술 형식, 한 벌의 옷 등이에요.21 저 옷을 가지면 삶이 더 좋아질 거야, 이런 기대나 희망을 품게 하는 X, 그것이 구원을 주지 않고 균열이 가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느끼는 첫 번째 실망.
일단 첫 번째 실망이 있고,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실망이 뒤따르는데요. 롱 추는 이 두 번째가 더 중요한 거라고 말을 해요. 두 번째 실망은 이런 거예요. 내가 실망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네. 내가 상처받았고, 마음이 꺾였는데 인생은 그대로네. 이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하네. 이게 두 번째 실망, 말하자면 실망에 대한 실망인 거죠. 한국 시에서 상징적인 시구를 가져와보자면 첫 번째 실망이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22)는 말로 표현되는 종류의 것이라면 두 번째 실망은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황인찬, 「건축」23) 같은 말로 표현되는 종류의 실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잔치는 예전에 끝났지. 하지만 나는 계속 살아 있는걸?
반동적인 폭력이나 충동 같은 것은 첫 번째 실망과 두 번째 실망 사이에 있는 반응이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 실망까지 거치고 나서야, 주체는 이 실망스러운 것들, 실망스러운 나 자신과 그냥 계속 살아야 한다는 걸 수용하게 되지요. 근데 이 실망이 말씀하신 대로 그냥 어두침침하고 무기력한 것만은 아닌데, 롱 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마 이게 책의 마지막 문장일 텐데, “실망의 다른 이름은 필시 사랑이다.” 그러니까 실망 이후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자란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매혹이나 선망과는 많이 다른 사랑인 거죠. 오히려 인내나 보살핌에 의해 지탱되는 사랑일 텐데……

연숙
맞아요. 근데 정말 어려운 일이죠.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사실 이런 걸 사랑이라고까지 부르려면 정말 큰 감정적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라서, 저도 이런 종류의 실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걸 모두에게 권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실망하고 그냥 살라고 말하는 게, 특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욕망을 변형해야 하니까 어렵죠. 그리고 이게 단순히 실망 하나에만 걸려있는 게 아니라, 사실 사랑이나 욕망이라는 게 결국 세상 전체를 포함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때, 그걸 통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게 되고,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도 결국 어떤 가치 체계 안으로 진입하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런 걸 그만 생각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집중한다는 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살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죠.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믿어왔던 걸 다 내려놓고,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그게 달성되지 않아도 여전히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자기 수양이 필요한 거고, 그래서 쉽지 않죠.
이런 사고방식이 자칫하면 영성이나 종교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그렇게라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비판적 담론에서 지배적인 메시지들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흐르고 있으니까요. 너희는 이미 망가졌고, 없어져도 된다는 식의 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소멸 외의 방식으로 견디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잖아요. 앞으로 더 그럴 거고, 왜냐하면 그렇게 비판을 외치던 사람들은 곧 사라질 테고, 우리는 결국 이 인간들이랑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우리 자신이 저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들은 필요하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단위의 이론 같은 것들이겠죠. 일상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기술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종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교리처럼 굳어져서도 안 되는 거고요. 『우울: 공적 감정』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건 뜨개질이나 일기 쓰기 같은 단순한 습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습관은 “‘지금 여기’의 유토피아”의 형식을 보여주기도 해요. 이는 “미래를 지금 이 세계를 벗어나 도피하거나 이 세계를 대체하는 페티시로 취급하지 않는” 그런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24

희우
벌써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대화가 많이 길어졌으니 이만 줄여야겠어요. 마지막 인사는 연숙 님의 「비우정의 우정」에서 가져온 문장으로 갈음하겠습니다. “비우정의 우정이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너를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25 제가 연숙 님을 좋은 대화 상대로 느끼는 것은 우리가 비슷해서라기보다는 아주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사이엔 비슷함 속에 약간의 다름이 있는 게 아니고, 큰 차이 속에 아주 미세한 같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숙 님과 대화한 몇 년의 시간 동안, 그리고 이번 대화를 통해서도 저는 이 큰 다름과 작은 같음을 가지고 친구와 놀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 대화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화를 읽어주실 분들도 감사합니다.

  1.  안희제,  『증명과 변명』, 다다서재, 2024. ↩︎
  2. e.g. 서장원, 「리틀 프라이드」(『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상어」(『문학들』 2024년 겨울호); 권희진, 「고쳐 쓰다가」(『Axt』 2024년 3/4월호), 「열다섯 가지 습관」(『Littor』 2024년 10/11월호) ↩︎
  3.  정희진,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2017, 교양인. ↩︎
  4.  박권일, “‘이대남’이 이상해진 이유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마지막 수정: 2024-02-23, 한겨레21 ↩︎
  5. 『인셀 테러: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로라 베이츠, 성원 옮김, 2023, 위즈덤하우스)가 대표적이다. ↩︎
  6. 김원진, ““부모보다 못 산다” 느끼는 남성, ‘남자가 차별받는 세상’으로 생각한다고요?”, 마지막 수정:  2025-01-24, 경향신문, ↩︎
  7. Halberstam, J. (2003). What’s that Smell? Queer Temporalities and Subcultural Lives. International Journal of Cultural Studies, 6(3), 313-333. (Original work published 2003) ↩︎
  8. 제니퍼 M. 실바, 문현아 역, 『커밍 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2020, 리시올 ↩︎
  9.  “WWE(은어)”, 나무위키,
    ↩︎
  10. [강연록] “좌파-오타쿠 정치는 가능한가?”, ↩︎
  11. 차민지 기자, <남성 스킨케어소비 세계 1위…화장품업계, ‘남성뷰티 강화한다’> 연합뉴스, 2024. 01. 07.
    https://www.yna.co.kr/view/AKR20240105130800030 ↩︎
  12.  “매력의 두 문제―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매력의 경제학”, ↩︎
  13.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인스타그램 ↩︎
  14.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2025) 참고. ↩︎
  15.  테드 창의 단편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당신 인생의 이야기』 수록) 참고. ↩︎
  16.  Andrea Long Chu and Anastasia Berg, “Wanting Bad Things: Andrea Long Chu responds to Amia Srinivasan”, July 18, 2018, The Point. 이연숙은 이 글의 한국어 번역을 ‘소스충’의 번역으로 접했다. “나쁜 것을 원하기 – 안드레아 롱 추가 에이미아 스리니바산에게 답하다 (안드레아 롱 추, 아나스타샤 버그)”, ↩︎
  17. 안드레아 롱 추, 『피메일스』, 위즈덤하우스, 2023. ↩︎
  18.  앤 츠베트코비치, 박미선, 오수원 옮김, 『우울: 공적 감정』, 2025, 마티, 25쪽. ↩︎
  19.  같은 책, 26쪽. ↩︎
  20.  이연숙,  「비우정의 우정」,  『우정』, 민음사 인문한편, 2023. ↩︎
  21.  『피메일스』, 176-77쪽. ↩︎
  22.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비, 1994 ↩︎
  23.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
  24.  『우울: 공적 감정』, 352쪽. ↩︎
  25.  「비우정의 우정」, 51쪽. ↩︎

남자, 사람 친구가 될 수 있을까?(1)

―이연숙 평론가와의 대화 1부

1부: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악인의 서사/가시성의 경제

2부: 남성학의 부상/한국 남성성 분석/몸과 외모의 문제/실망에 관하여

희우
우리가 만난 지 한 4년 됐나요? 생각보다 오래됐고, 사실 우리 이야기도 꽤 자주 하는 편인 것 같은데요.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니,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이 누군가, 했을 때 이연숙이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부담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연숙 님이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이미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한 시간이 꽤 되다 보니까, 이야기해볼 법한 주제가 쌓인 것 같아서 이렇게 공개하는 대화를 해보자고 제안했지요.

연숙
대화하자고 말씀해주셔서 기뻤어요. 근데 한 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생각보다 이런 대화가 품이 많이 들고 준비할 것도 많잖아요. 무슨 마감이 있는 대화가 아니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도 되고요. 언제 공개를 해야 하고, 누가 읽을 것이고 이런 문제들을 하나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 제안해주신 게 작년 4월이더라고요.

희우
1년 전이네요.

연숙
드디어 이렇게 대화할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다……(??)

평론 쓰기의 기쁨과 슬픔

희우
간단한 소개를 해주세요.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어떤 관심사, 어떤 주제로 글을 써오셨는지.

연숙
기본적으로 미술, 영화, 만화와 같은 시각 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관심사라고 했을 때는 조금 더 구체적인 것들이어야 될 텐데, 제가 지금 딱히 말할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소개를 하는 게 더 좋을까요?

희우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을 키워드 정도……

연숙
아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관점을 담은 글을 써왔고요. 특히 지배 규범과 문화에 복종하면서도 저항하는, 모순적인 주체 양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주체 양식은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판다고 말하긴 어렵겠네요. 제가 전문 분야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만물 비평가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희우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본격적인 주제를 얘기하기 전에 비평 쓰기, 비평을 쓰는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관심사 하나를 꼽기 어렵고, 한 분야를 말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마침 저도 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비평 쓰기에 거의 필연적으로 따르는 어떤 어려움, 뭐랄까 업무적인 산만함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연구자와는 달리, 비평가로서는 새롭게 나오는 작품들이나 문화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에 계속 빠르게 반응을 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딜레당티즘 같은 게 있잖아요. 뭔가 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게 아니라, 피상적으로 이것저것 다 건드리는 그런 태도로써 딜레당티즘이요. 저 자신도 그렇고, 제 주변에 비평하는 분들이 많다 보니, 그런 태도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거든요.

연숙
저도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되는 게,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전부 두꺼운 책을 쓴 사람들이에요. 한 5년, 10년씩 어떤 주제에 헌신하는 그런 분들의 연구를 존경하는데, 실제로 제가 하는 일은 보따리 장사나 보부상 같은 일이죠. 그분들의 일이 집을 짓는 일이라면, 저는 그 집 마당에서 풀을 뽑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요. 이건 제가 한 비유가 아니라, 제 친구 중 하나가 언제까지 비평 쓸 거냐고 하면서 저한테 말했던 비유예요. 너 언제까지 풀을 뽑을 거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그런데 저도 알고 있거든요. 풀 뽑는 일이 힘들다는 거. 왜냐면 늘 새로운 풀이 자라나고, 그 풀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건 늘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남들이 뽑아놓은 풀 구경하고 나도 풀 뽑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정말 자주 하죠.
근데 제가 그때 그 친구한테 뭐라고 반박했냐면, ‘풀 뽑는 사람도 있어야지’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진짜 뽑고 싶은가 질문하면 잘 모르겠네요.

희우
저도 요새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서요. 선생님이 저보다 더 오래 많은 글을 써오셨기 때문에, 그런 갈등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있는지 혹은 버티고 있는지 요령이랄까 지혜를 여쭤본 거였습니다.

연숙
못하겠는데요. 전혀 못 하겠는데. 언제부터 글 쓰셨는데요?

희우
한 4년 됐죠.

연숙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평론을 쓰신 거예요?

희우
네, 본격적으로 쓴 지 4년 됐네요.

연숙
저는 지금이 굉장히 많은 작업을 하는 시기이긴 한데, 청탁을 받아온 건 그래도 거의 10년 가까이 된 것 같네요. 햇수가 사실 뭐가 중요할까요. 염증이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생각엔, 방법이 없다, 그만두지 않는 이상에는.

희우
절망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아까 딜레당티즘을 얘기했는데, 그게 비평가를 계속 따라다니는 그림자일 것 같아요. 계속 그것과 경쟁하고 지양하려 애쓰지만,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또 그런 생각도 있어요. 딜레당티즘이라고 하면 어쨌든 폄훼하는 말로 많이 쓰이지만, 또 글을 읽어봤을 때 딜레당트적인 면이 전혀 없는 글은 재미가 없어요. 맥락에서 맥락으로 비약을 하고, 어떨 땐 좀 아무렇게나 짜깁기한 것 같은 면모가 약간은 있는 평론이 읽을 때 흥미로운 것 같아요.

연숙
그건 요즘 일하는 사람들이 다 조금씩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나 심정인 것도 같아요.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고민이 비단 비평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겠죠. 무엇이든 깊이 있게 할 수 없고 표면만 훑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광범위하게 많은 직업군에 퍼져 있지 않을까요? 다들 ADHD고, 모든 게 너무나 빠르고, 다들 포모(FOMO) 상태로 모든 정보를 다 흡수하고 싶어 하고, 놓치면 또 불안해하고. 동시에 빨리 성과 내고 성취해야 되니까 뭐든 깊이 파고드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요. 우리 대부분은 정보를 먹어 치워서 돈을 받는 일을 하는 거나 다름 없어요. 일단 생산이 된 정보니까 누구라도 먹어서 없애야죠. 그러니까 제가 말했던 그런 종류의 두꺼운 책을 쓰는 건, 그런 연구를 하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굉장한 특권의 반증일 수 있죠.

희우
지금 비평 쓰기의 슬픔에 대해서만 좀 얘기를 했는데 기쁨이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요? 그런 순간도 있겠지요?

연숙
그냥 저는 늘 이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 건 기쁘죠. 글 쓰고, 글을 어디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건 기쁘고 감사한 일이죠. 그리고 당연히 작가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작품을 먼저 접할 기회를 가진다는 건 비밀스러운 희열을 주고요. 그게 다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희우
저는 아주 몰입해서 글을 쓸 때가 간혹 있는데, 그럴 때는 좋은데요. 그런데 그런 글이 나중에 시간 지나고 봤을 때 잘 된 글인가 하면 언제나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고요. 평론을 누가 읽는지도 모르겠고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보람을 찾아야 하니까 이렇게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연숙
최근에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현상들에 비해서 글 쓰는 일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계엄 이후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진짜 글 써서 뭐 하지, 뭐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이게 과거 세대와의 차이일 것도 같아요. 왜냐면 조금만 윗세대로 올라가면, 굳이 386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70년대생이나 80년대생들이랑 얘기를 할 때는, 그들에게 글은 어쨌든 문화 전쟁의 도구니까 이걸 잘 사용해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주 큰 관건인 것 같거든요.
근데 우리 세대는 압도적인 무력감이 일단 먼저 있죠. 글이라는 것은 일단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전제를 먼저 인정한 뒤에 겨우겨우 다른 가능성이나 희망을 더듬는 과정 자체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과 글을 쓰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마 저나 희우 님도 그럴 것 같고요. 이런 상황을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좀 막막하죠. 뭐 그래도 쓸모가 있다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합니다.
좀 다른 이야긴데 저는 일반화를 위한 세대론은 물론 반대하지만, 경험적 차원에서는 세대 간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거고, 이건 당연한 거죠. 소위 선배 세대들이 우릴 꾸짖는데 거기다 대고 ‘님들이 다 망쳐놔서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라고 대꾸하고 싶어질 때가 있기도 하고요. 물론 저는 그때마다 그레타 툰베리를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배 세대가 된다…… 아니 이미 선배 세대죠.

희우
연숙 님 말대로, 무력함에 더한 산만함이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나 심정, 삶의 양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 했다가 저 일 했다가, 또 굉장히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콘텐츠들도 따라가야 하고요. 근데 그거를 도착적인 수준으로, 너무 성실하게 해버리면, 그러니까 딜레당티즘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면 거기서 굉장히 재미있고 이상한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되네요. 그러니까 삶의 양식은 강요된 조건 같은 것이지만, 글쓰기라는 게 항상 그런 조건들을 전유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또 사실 비평이 아니면 무엇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비평의 프라이드일 수도 있겠다 싶고요. 정신없는 세계에서 정신없이 살면서 수많은 맥락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고 어떤 맥락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것이 비평의 일이 아닐까?

연숙
네, 제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그렇죠.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경우에는 이론들이나 비평들에서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용기나 희망을 얻지만, 다른 사람도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어서 그냥 계속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희우
지당한 말씀입니다.

대화의 계기: ‘한국 남자

연숙
그러니까 지금처럼 ‘한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대담 형식으로 하게 된 거죠.

희우
예, 우리 한국 남자 이야기하기로 했었죠. 사실 이 주제는 선생님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나 성차(性差), 그리고 ‘젠더 갈등’에 관련된 이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얘기했던 주제지요.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많은 맥락이 이미 쌓여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한 번 대화를 정리하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가 된 것이었죠.
그런데 대화를 읽으시는 분들은 안 그럴 테니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최근에 관심 두게 된 것들, 읽은 것들, 본 것들,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 한번 개괄해보면 좋겠습니다.

연숙
네. 특히 인셀 문제라든지, 아니면 극우화되는 남성들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한국의 ‘이대남’ 관련 문제라든지 이런 얘기는 특히 작년에 꽤 많이 했었던 것 같고요.
그것과 동시에 여성들이 피해자로서만 정체화를 하게 되는 문제, 그리고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 전체에서 어떤 종류의 ‘성별 분업화’가 일어나고 있는 문제, 그리고 이런저런 대세의 흐름들에 대한 어떤 불만들을 좀 공유를 했던 것 같거든요.

희우
몇 가지 구체적인 계기도 있었죠. 유튜브의 어떤 영상이라든지, 최근의 서부지법 사태라든지.

연숙
네, 그 전에는 설거지론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요. 설거지론은 레드필 이론의 한국 버전이라고 할까요. 레드필 이론은 소위 매노스피어, 남성계라고 부르는 남성 중심적 공간에서 발전한, 남성들을 계급으로 분류하는 세계관이에요. 우월한 알파메일, 열등한 베타메일 이런 식으로요. 알파일수록 우월한 여자를 만나서 유전자를 남긴다, 뭐 그런 얘기인데 사실 이게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고, 90년대에 진화심리학 유행할 때부터 계속 하던 말이잖아요. 그걸 다시 리브랜딩해서 레드필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이데올로기처럼 팔게 된 거죠.
한국에서도 2020년대 초반부터 남자들끼리 서로, 혹은 여자들을 깎아내릴 때 ‘설거지해준다’느니 ‘퐁퐁남’이니 하는 얘기들이 본격적으로 가시화가 됐어요. 이제 스스로를 인셀로 정체화하는 남자들도 흔히 찾아볼 수 있죠.
저희 예전에 그거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유튜브 채널 ‘주둥이방송’. 거기서 어떤 인셀이 사연 보냈다가 조리돌림 당했던 편이요.1 그 사람 그냥 여자들이 자기를 안 만나준다고, 여자들은 다 알파만 만나고, 데이트 비용도 안 내고, 그냥 인셀 사고방식 그대로였잖아요. 완전 뻔한 소리 막 쏟아내고. 근데 주둥이가 또 얼마나 못됐어요. 진짜 말로 그냥 깔아뭉개버렸잖아요. “너 여자 만나본 적이나 있어?”, “여자들이 너랑 섹스도 해주는데 너는 뭘 해줄 건데?” 이런 식으로. 그 클립 돌아다니면서 SNS에서 난리 났었고, 욕도 많이 먹고 또 반대로 호응도 얻고 그랬죠. 어떻게 보면 남성 인셀 문화가 가시화됐던 어느 한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희우
저는 그 방송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오늘 할 이야기랑 연결될 텐데요. 그 사연자가 잘못된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잖아요. 논리적으로 구멍도 많고,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일단 듣자마자 불쾌를 느끼게 하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문제적인 건 그 방송 진행자(주둥이)의 논리인 것 같아요. 그걸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주둥이가 완전히 신자유주의적인 논리로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비난하는데, 거기서는 사연자보다 상대적으로 주둥이의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게 되죠.
한편, 역으로 그 사연자는 신자유주의 비판, 자본주의 비판에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비판적 어휘들을 전유해서 불평등이 어떻고, 독점이 어떻고, 분배가 어떻고 이런 말을 쓰잖아요. 물론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식의 전유이기는 하죠. 불평등을 비판하는 담론들에서 그럴듯한 용어들을 가져와서 ‘여성의 분배’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요. 하지만 저는 그 방송에서 나타난 대립 구도가 매우 징후적으로 느껴졌어요. 신자유주의나 능력주의, 불평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의 어휘들은 그런 식으로 오염돼서 뒤틀려버리고, 그걸 방어하는 주둥이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커먼센스’처럼 보이는 구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숙
맞아요. 저도 똑같이 그 방송에 대한 반응으로 ‘주둥이가 맞는 말 한다’라는 반응이 많은 걸 보고 진짜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어떤 사람이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만들어서 원하는 걸 쟁취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안 되죠.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상황, 조건에 놓여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억울하면 너도 돈 벌어서 성형해, 억울하면 너도 꾸며서 여자 끼고 다녀’, 이런 이야기를 무슨 진짜 아침 먹고 저녁 먹는 이야기처럼 한다는 게 우리 모두가 능력주의에 미쳐서 단단히 망가졌다는 증거인 거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심정적으로는 그 못난 인셀한테 훨씬 공감이 가거든요.

희우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났는데요. 저도 능력주의가 우리한테 너무 깊이 침투해서 완전히 커먼센스로 자리 잡았고, 그것에 문제조차 느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떤 전문가(뇌과학자인지 정신과 의사인지)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봤어요. ‘사람들이 머리 나쁘다고, 지능이 낮다고 하면 되게 기분 나빠하고 모욕으로 받아들이는데, 너 공감 못 한다, 공감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별로 그렇게 안 받아들인다. 그런데 사실 공감을 못 하는 것도 지능이 낮은 거다.’ 그러면서 공감 능력의 결여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듣거나 볼 때 기가 차요. 사람들이 자기 말의 논리를 점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만약 그 말대로 공감 능력이 지능의 문제라고 하면, 더욱이 공감의 결여를 문제 삼거나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거잖아요.

연숙
그런 사람들은 누가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안타까워서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기분 나쁘라고 욕하는 거죠. 실제로 ‘지능이 낮다’라는 말이 공격과 비하의 의도로 쓰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너네는 좀 이거를 욕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잖아요. 상황을 개선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거죠. 지능이 낮고 공감을 못 한다는 게 시급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면 그게 회복될 수 없는 선천적인 어떤 결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희우
네, 그러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또 제가 불만을 느끼는 논리 중 하나는 이런 거예요. 흔히 우파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만들고 좌파들은 구조나 체계, 사회의 문제로 생각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이제 뭔가 안 통하는 논리가 돼버린 것 같아요. ‘개인의 책임’과 ‘구조의 문제’라는 구도 자체가 진짜 이상하게 뒤틀려버린 것 같거든요.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원인을 밝히려는 분석이 부지불식간에 결정론이 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회적으로 이런 위치니까, 이런 성별 혹은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까, 감수성이나 사고방식이나 품행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라는 식의 결정론이요. 이런 구조적 결정론이 윤리적 사고를 봉쇄하면서 윤리적인 책임에서 행위자들을 면제시켜버리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 거지요. 역설적으로 정치적 상상력도 봉쇄하고요.

연숙
지금 많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하고 있는 게 그거죠. 남성 성별 안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이들은 타고나기를 가해자이자 강간범이자 살인자로 타고 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그러면 어떻게 그들에게 죄를 물어요. 그냥 본능대로 하는 건데.
오늘날 젊은 남자들, ‘이대남’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해요.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성별이나 조건, 상황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받아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문제를 이해할 수도 개선할 수도 없을 거예요.

희우
이런 사태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읽은 책도 공유를 많이 했었지요. 벨 훅스 얘기도 했던 것 같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2 등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었죠.

연숙
맞아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공유한 주제들에 뭐랄까, 나쁜 취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런 종류의 주제들이 악하기 때문에 끌리는 것도 있거든요. 좀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계속 냄새 맡고 좀 찍어 먹어보기도 하고, 저는 그런 종류의 행위에 재미를 느껴요. 그래서 여기에는 솔직히 좀 떳떳하지 못한, 조금 구린 취향도 있는 거죠.

희우
길티 플래저인가요?

연숙
네네. 그런데 동시에 얘네가 이유 없이 이러는 걸까, 진짜로 그냥 갑자기 미친 걸까? 그렇게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게 있죠. ‘이대녀’들은 멀쩡하고 ‘이대남’들은 갑자기 다 미쳤다고? 이게 가능한가? 분명 그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합리적 의심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희우
저도 비슷하지만, 한국 남성이나 ‘이대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명의 한국 남자로서 느끼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심정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사실 많은 사람이 그럴 텐데) 문제가 되는 남성성이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 같거든요. ‘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 회피하는 마음 혹은 구별하고 싶은 마음이요.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정말 아닐까?’ 반문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죠. ‘왜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제게는 너무 가까이 있는 문제, 그래서 두렵고 혐오스럽기도 한 문제에요. 저도 호기심, 알고 싶음, 당연히 그것도 있지만, 내가 사로잡혀 있는, 피할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숙
그러네요. 희우 님에 비하면 저에게 ‘이대남’은 거리가 있는 주제죠. 저는 FTM 트랜스젠더 스펙트럼에 가까운 퀴어로서 ‘이대남’에게 가끔 동일시할 때도 있고 ‘유해한 남성성’의 특성들을 때로 질투할 때도 있어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옛날엔 더 심했어요. 동일시를 하든 시기를 하든 대상과 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가 돼야 가능한 일이니, 사실은 쭉 나는 남성이 아니라고, 남성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당연히 살면서 한 번도 남성 집단에 속해본 적도 없고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희우 님 같은 방식(‘나는 아니야’ 혹은 ‘아니고 싶어’)은 아니지만 제 젠더 정체성 때문에 각종 남성성 문제를 여러 관점으로 생각해오기는 했어요. 잭 할버스탐의 『여성의 남성성』 같은 책을 읽으면서 남성성을 일종의 장르로 간주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좀 더 편하게 내가 이 분야에 말을 얹어도 되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도 했고요. 우리가 친해지는 속도가 붙을 시점에 이런 종류의 시각 차이도 많이 공유했었지요.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는 처음 겪어봐요. 그러니까 남성으로 사회화된 20대 (주로 시스 헤테로일) 남성의 행동 양식과 정체성이 우리 사회에서 크고 심각한 문제로 성큼 다가온 거죠. 물론 원래도 문제였어요. 처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면서 식민지 남성성, 헤게모니 남성성, 유해한 남성성 이러면서 온갖 남성성의 유형을 공부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 경우 주로 이런 프레임은 폭력적 가부장과 같은 여러 민족적, 국가적 비극을 겪은 아버지 세대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 같아요.3 과거에 비해서 남성들이 더 희한한 방식으로 가시화가 되고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단지 그렇게 규정될 순 없겠다, 이런 생각을 최근에 좀 비판적으로 다시 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저한테 의미 있는 주제가 된 거죠, 단순히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악인의 서사

희우
네. 말씀하신 대로 사실 이론적인 분석은 이미 많지만, 한국 남성성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만드는 게 관건이니까요. 그런데 분석이든 변화든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누고 싶은 고민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혹은 이 주제로 글을 쓰거나 관련된 작품들을 조명할 때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있어요. 가령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먼저 얘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지금 한국의 인문학 담론장이나 저널리즘에서 남성, 특히 이대남이 폭력, 성차별, 극우화 등의 문제에 결부된 기표인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나빠 보이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짚어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나쁜 사람들,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굳이 거기에 시간을 들이고 지면을 들이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요.

연숙
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구호가 유행했죠. 아마도 트위터 같은 SNS에서 남성 범죄자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 때 페미니스트 사용자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게 계기인 걸로 알아요. 그리고 이에 관한 어떤 책도 얼마 전에 나왔었고요.4
서사라는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니까 범주를 좀 좁혀 볼게요. 저런 구호가 겨냥하는 건 남성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을 때 판결이 피해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보이는 데 반해 가해자의 불행한 과거나 창창한 미래를 강조하는 어떤 지배적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이 경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건 서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을 면피시킬 목적으로 특정한 서사가 자동적으로 부착되고 유통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인 것 같거든요. 이 구호가 페미니스트 집단의 지지를 얻게 된 건 유독 남성 가해자들에게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동시에는 가해자에게 ‘서사’가 있을 수도 있죠. 정의롭고 ‘선한’ 서사는 아니겠지만 인간이니까 자기 삶을 설명하는 서사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당연히 소위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죠. 근데 이런 판단은 단순히 기계적인 평등이나 중립의 감각일 수도 있어요. 저는 이를테면 레비나스라든지, 주디스 버틀러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작업을 통해서 ‘나’라는 주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걸 들어주는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걸 이해해 왔어요. 타자의 존재가 실제로 내 생명, 내 삶에 필수 불가결한 상호 의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작업을 제가 계속 읽어 왔기 때문에 자동 반사적으로 ‘악인에게도 서사가 있겠지, 나한테 서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타자 윤리가 아니라 서울권 4년제 대학을 다니며 타자 윤리를 말하는 두꺼운 책들에 반복 노출된 결과겠죠…….

희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런 이론들, 결정 불가능성…… 타자…… 윤리 어쩌고 이론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저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한다고,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해하는 것과 면죄하는 건 다른 일이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왜 이 둘을 계속 혼동하게 될까? 서사를 부여하면 인간적으로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연민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뭔가 단호하게 처벌을 하거나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질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이해하면서 처벌해야 한다,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해가 처벌을 어렵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잘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물론 엄청 많은 딜레마가 있겠지만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특정한 의도로 부여되는 ‘자동적인 서사’가 아닌 서사를 추구해야 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옛날에 유일신 종교들에서 성상을 금지했던 걸 생각해보면요. 신이 재현되면 안 된다는 게, 유일하고 신성해야 하는 신이 재현되어서 세속적으로 되고, 다양해지고, 인간적으로 되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안 된다’ 같은 생각은, 그런 성상 금지를 도착적으로 뒤집은 방식으로 악에 적용하는 거라고 봐요. 순수하고 추상적인 악으로만 남겨놓기 위해서요. 악이 우리한테 가까이 오고, 세속화되고, 다양한 면을 갖게 되면 정상적인 것과 악을 선명하게 구분하기가 당연히 어려워지니까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어려움이, 버틀러를 따라 말하자면 윤리적인 사고의 공간인 것이고,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의 공간일 텐데요. 그리고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그런 얘기도 했었지요.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이 구제될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윤리적인 사고의 여지를 파괴해버리는 일이 된다고.

연숙
그렇죠.

희우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처벌하거나 윤리적인 책임을 묻거나 하는 일들은, 그 사람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고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 사람이 ‘마치 선을 선택할 만큼 자유로운 것처럼’ 가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악을 처벌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페미니스트이건 안티페미니스트이건 상관없이, 점점 사람들 사이에 극도로 강화되는 엄벌주의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트위터에서든 네이버 댓글에서든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인데, 저런 애들은 갱생시킬 수 없고, 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려해야 된다, 사형시켜야 된다, 이런 말들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달라질 수 없다면, 그게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든,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든 그 사람이 악한 일을 하도록―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일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거죠. 그 사람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거라면 역으로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거잖아요. ‘당신은 생물학적인 수준에서든, 환경적인 수준에서든 사회에 피해를 끼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윤리적인 책임은 없지만, 이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당신을 격리하겠다 혹은 죽이겠다.’ 이런 방식은 경제적으로나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있어도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죠.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우리가 악인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됐는지, 다른 길은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는 게 따뜻하고 물렁하고 관대한 마음씨를 가져서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 처벌에 대해서든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든 사고할 여지 자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또, 『윤리적 폭력 비판』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 책에서 버틀러가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어떤 주체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의 의지를 박탈할 정도까지 되어선 안 된다.5 왜냐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일단 살고자 하는 욕망 위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 대목은 버틀러가 윤리적 비판이 어떤 한계를 가져야 하는지 말하는 부분이라서 저에게는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오해를 살 수 있고 욕을 먹을 수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사실 너무 많은 경험적인 혹은 저널리즘적인 사례들이 있잖아요.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나쁜 짓들을 많이 하는지. 데이트 폭력부터 서부지검 난동에 이르기까지. 근데 이런 역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절대 구제할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 역설적으로 그 사람들을 점점 더 도덕적인 고려에서 면제해 주는 효과가 생긴다는 거예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옳게 될 수 없고 감수성을 갖출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윤리적으로 살고 싶고 그런 감수성을 갖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한테는 계속해서 어떤 도덕적인 책임이 부과되지만, 이미 윤리적 담론이나 페미니즘이나 여하한 진보적 가치를 등진 사람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 것이죠. 어차피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요.

연숙
네. 저도 동의합니다. 굉장히 원론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인간은 특정 방식으로 정의되는 존재 그 이상이고 그럴 수 있다는 걸 믿어야 나 자신도 이해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오해받을 수 있고 욕먹을 수 있다고 해주셨듯 특히 요즘에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어렵죠. 그럼 지금 뭐 조주빈 같은 애들도 이해하자는 말이냐? 네, 이해하자는 말이긴 해요. 그 이유는 당연하지만 인간 종이 지배 종으로서 지금 지구 하나를 같이 공유하고 있고 어떻게든 다 함께 끝까지 잘 살아 남아야 되는데(혹은 잘 죽어야 되는데) 자꾸 특정 개체, 특정 부류에만 예외 조항을 둬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특정 개체, 특정 부류가 구제 불가능한 완전한 악으로 규정된다면 답은 그들을 그냥 지구에서 없애는 수밖에 없잖아요. ‘최종 해결책’과 같은 그런 예외 조항이 누군가에게 적용 가능하다면 곧 나에게도 그렇겠죠. 모두에게 그럴 거고요.
사실 근데 참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다, 그래서 지금 한국 남자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 조심스럽다…….

희우
네. 이 대담은 주제 자체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계속 달라지는 와중에 있다는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나이브하고 낡은 휴머니즘 운운으로 받아들여질 텐데, 만약 지금 우리가 그런 가능성을 계산에 넣지 않고 생각하면, 선택지가 내전밖에 남지 않을 거예요. 저 사람이 달라질 수 없고 내가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선택지는 상대가 어떤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집회를 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을 제거하거나, 억류하거나 권리를 박탈하는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연숙
네. 자칫하면 지금 저희가 한국 남성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특별히 누구 편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모든 편이 문제죠.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여성들도 트랜스젠더, 외국인 혐오가 심각하고 인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인터넷 바깥으로 눈을 돌리려 해도 연일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뉴스가 쏟아지고요.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봐도 그렇죠.
계속 주디스 버틀러 얘기를 하게 되는데, 버틀러가 『비폭력의 힘』에서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정신분석학자를 경유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6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사람은 대상 관계 이론의 창시자인데요. 인간이 유아 때부터 특정 관계를 통해 자신의 불안, 시기를 다룬다고 보는 이론이에요. 당연하지만 이 관계란 어머니와의 관계일 가능성이 크겠죠. 젖을 빠는 유아들한테 어머니 역할은 딱 두 가지밖에 없겠죠. 하나는 젖 주는 엄마, 다른 하나는 젖 안 주는 엄마. 젖 주는 엄마는 좋은 엄마죠. 안 준 엄마는 나쁜 엄마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유아의 머릿속에서는 이분법적으로 양분된, 극단적인 두 가지 사고에서 비롯된 분열된 어머니가 존재하는 거예요. 초기에 이러한 극단적 분리는 유아로 하여금 좋은 엄마를 나쁜 엄마로부터 분리된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게 돕고 자신의 파괴적 충동을 나쁜 엄마에게 투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멜라니 클라인은 편집 분열적 위치로 설명해요.
한편 유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에 대한 파괴적 충동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어머니가 자신과 분리된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하고 상실감을 느끼기도 해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도 느끼고 그런 양가감정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어머니를 염려하고 애도하면서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상태가 오는 거죠. 이걸 우울증적 위치라고 불러요. 근래 소소하게 국내 문학 비평가들에게 유행했던 세즈윅의 ‘회복적 읽기’가 이런 관점에서 오기도 했고요. 멜라니 클라인은 나쁜 엄마를 죽이고 좋은 엄마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편집 분열적 위치를 제대로 우울증적 위치로 바꿔내지 못하면 앞으로 사는 게 굉장히 어려워진다고 말해요. 하지만 안정적으로 어머니와 분리되면서도 그 분리를 애도할 수 있는 위치에 우리는 생애 단계 어디서든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유아 때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실 평생 우리는 두 위치를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버틀러는 클라인의 이 논의를 가지고 와서, 타인을 절멸시키거나 또는 ‘쟤는 어떤 부분은 좋지만 어떤 부분은 죽이고 싶어’라는 방식으로 타인을 분리, 절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같이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거든요. 생애 초기 단계에서 가장 강렬한 애착 관계에서 가능한 의존 방식을 전 인류에게 확대해 적용해보자는 거죠. 꼭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모두 한 번은 유아였단 말이죠. 유아 시기에 우리는 모두 최약체였고 최약체인 우리를 누가 돌봐줘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단 말이죠. 이렇게 최소 단위에서 출발해보자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생존자죠. 우리는 전부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끔찍한 생명체였어요. 그런 시기를 화해와 용서의 드라마로 다시 재구성하려는 버틀러의 노력은 놀랍고 아름답죠.
어쨌든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안다면 누가 좀 거지 같아도 참고 견디거나 그런 부분을 포함해서 그 사람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그러지 않는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뭐 전쟁이죠, 그 누구를 죽여야 하니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에 불과하지만요. 누가 나랑 똑같지 않다고 해서 죽이는 건 그냥 투사된 형태의 자살이기도 해요. 그러지 말고 그냥 우울해하는 게 낫다. 너랑 나는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게 정말 단순한 이야긴데 어렵죠. 저도 늘 어렵고요.

가시성의 경제

희우
네,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악인의 서사’ 문제에 이어서, 이 문제도 잠깐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한 건 일반적인 차원의 인문학적 논의라면, 이건 좀 더 동시대의 SNS라든지 매체와 관련된 문제인데요. ‘가시성의 경제’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노출되거나, 재현되거나,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기회 자체가 희소한 자원이고 그것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인데요. 누군가가 문화에 노출이 되고 재현되고 발언권을 얻으면, 그 상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이나 권리를 제한받거나 박탈당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당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자원 경쟁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들, 지금까지 소외돼 있었던 사람들, 혹은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을 조명하는 것만 해도 관심이나 가시성이라는 자원이 부족한데 나쁜 놈들 혹은 기득권층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까지 지면이나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죠.

연숙
지금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얼핏 드는 생각은,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들 이야기 별로 재미없어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봤자 내 삶에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알면 알수록 내 삶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피하죠. 다만 ‘인간 극장’ 같은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거는 괜찮아요. 그거는 자극을 추구하도록 세팅된 인간의 뇌에 되게 좋은 먹이를 주니까. 뭐든 포르노화하면 자극이 되고, 그래서 재밌어져요. 전통적인 재현 논의에서 가시성이라는 주제는 권력 구조와 관련이 깊었는데 오늘날 인터넷 문화 안에서 가시성은 그냥 전두엽 자극을 뜻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시성 경제 내에서 누가 더 파이를 차지하느냐는 결국 누가 더 이 경제의 논리를 잘 이용할 것인가, 이런 논의로 귀결되겠죠. 이를테면 우파 알고리즘에 맞서는 좌파 알고리즘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요. 홍진훤 작가의 작업 <DESTROY THE CODES>(2021)이 그런 예시 중 하나죠.7 이 작업은 관심 경제의 파이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하는 ‘저항’을 하자고 요청하고 있죠.
저는 이런 논의에 동의하는 동시에 어느 날은 그냥 전혀 인터넷을 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인터넷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그냥 접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2000년대 초반과 다르게 지금은 인터넷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그냥 그 안에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거지…… 문제는 그러니까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를 어떻게 좌파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할 것인가, 혹은 거꾸로 어떻게 좌파 자체를 그런 경제에 유리할 수 있도록 재교육할 것이냐는 질문이 아니라, 애당초 가시성을 화폐 삼게 만드는 인터넷이라는 환경과 우리가 맺고 있는 이 애증 어린 관계 그 자체에요. 인터넷은 환경이에요. 지저분하고, 더럽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환경이죠. 마치 난곡동과 같은 거죠……. 죄송합니다. 저희 동네[이연숙과 이희우가 사는 동네]가 난곡동이라서요. 저에게 난곡동을 받아들이는 건 선택이 아니에요. 그냥 제 삶에 따라오는 조건이죠. 인터넷도 마찬가지고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런 조건을 바꾸기란 무척 어려우므로 능동적으로 조건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개발하고 협상하는 전략도 필요해요.
정리하자면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주조해 낸 관심 경제, 가시성 경제, ‘조회수’ 경제가 아닌 다른 원리를 통해 인터넷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미 자극 추구에 쩔어버린 머리를 뭐 어떻게 디톡스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전략을 고안해 봐야죠. 가끔 저는 유튜브에서 어떤 아마추어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놀라운 애니메이션을 발견하곤 하는데요. 일정 시간을 들여 주목 경제의 바깥으로 밀려난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그로 인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대단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험은 여전히 짜릿하고 놀라워요. 주목이라는 화폐를 둘러싼 자원 경쟁 문제로만 보자면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자’는 주장은 당위가 있어 보이지만, 자극적이기만 하면 팔리는 인터넷 환경 안에서 악인에게 줄 주목이 자동적으로 선인에게 분배되는 건 또 아니잖아요. 파이 싸움 외에도 다른 방식의 싸움이 가능해요. 사회 1면에 실리는 걸 부러워하는 게 전부가 될 순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해주신 질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희우
어…… 그렇죠. 사실 범죄 기사나 포르노화된 재현은 좀 극단적인 사례들이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도파민이 자극되고 관심이 쏠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가시성의 경제를 언급하면서 제가 이야기하려던 건, 최근 한국소설들이 흔히 다룰 법한 인물들, 그러니까 적당히 악하고 적당히 착하기도 하고 적당히 문제적인, 그런 대부분의 사람 이야기에요. 그러한 이야기의 장에서 ‘가시성의 경제’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거죠. 노출되고 재현되고 많은 지면을 갖는 일 자체가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가령 ‘여성 서사’에 부여되는 중요성처럼, 소수자나 여성 인물을 많이 재현하고 내세우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경향에 대한 거예요. 반대로 나쁜 사람들 혹은 기득권층에게 서사나 지면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연숙
아, 네 그렇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죠.

희우
하지만 이제(바야흐로) 이 문제를 깊이 재고해 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꼭 노출되거나 재현되는 게 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인가? 혹은 어떤 재현이 정체성/동일성에 호소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여기에 ‘그렇지 않다’라고 해야 우리가 어떤 경쟁심 같은 것 없이 재현된 인물을 다룰 수 있게 되겠지요. 현재는 가시성의 경제와 관련해서 상반된 두 가지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나쁘다’는 편견이고, 하나는 ‘보여지는 것은 좋다’는 편견인데요. 첫 번째 편견에 따르면, 보이는 대상이 되는 것은 나쁘다, 보는 주체가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거죠. 가령 여성이 보이는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의 생각.
이 오래된 생각은 지금 우리 관점에서 보면 너무 투박한 것인데, 많은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고 싶어 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욕망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전유하기도 하고요. 여기에서 정반대의(좀 더 최신의) 두 번째 편견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건 ‘보여지는 것은 좋다’라는 편견이죠. 그런데 가시성 자체는 희소한 자원이고, 누구나 마음껏 보여질 수는 없으니까, 보이기 위해(가시성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는 거지요. ‘보여지는 것이 곧 좋은 일이다’라는 선입견은 악인을 재현하는 것이 어떻게든 악에 이익이 된다는 생각하고도 붙어 있고, 여성을 많이 재현하는 것이 곧 여성에게 이롭다는 식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 두 가지 편견(전제)을 비판하는 논의와 비평이 존재해왔지만, 한국의 문화나 문학장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로 보여요. 짧은 강의 경력 중에, 저는 이런 생각이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요. 작품이 악인이나 문제적인 인물을 재현하기 때문에 나쁘고, 소외된 인물이나 소수자를 재현했기 때문에 진보적이라는 식의 생각. 제가 보기엔 언급한 두 가지 편견이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사고를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연숙
페미니즘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늘 어려운 상황에 처하죠.8 주류 페미니즘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놓고 봤을 때 여태까지 여성 재현이 부족했으니까 이제는 양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쭉 해왔어요. 여성 정치인을 예로 들면, 지금 여성 대표가 부족하니까 여성 의원을 더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정치에서 쿼터제를 적용하듯이, 이런 방식이 소설이나 예술 같은 장르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여성 서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여성 인물을 더 자주 재현해야 한다는 요구가 바로 그런 양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인 거죠.
그런데 방금 말씀한 것처럼 기계적 평등을 따르는 게 과연 페미니즘에 항상 긍정적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하죠. 여성 재현이 늘어야 하고 여성 권리가 확대되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보존될 필요가 있거든요. ‘여성’이라는 범주가 계속해서 약자로, 피해자로, 소수자로 남아야지 양적 평등에 대해 말할 명분이 생긴다는 거죠. 우린 약자다, 피해자다, 소수자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여태까지 너네가 부당하게 빼앗아 간 ‘파이’를 더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거죠. ‘여성’으로 남아 있는 대가로 당장의 ‘파이’를 지불받게 되는 건데요. 이게 과연 긍정적인가, 정말로 여성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가, 반드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요즈음 문학계, 더 정직하게는 문학 시장 내에서도 ‘여성 작가’를 선호하고 또 강조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물론 그 여성 작가와 여성 서사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다양성이 발견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기야 하겠지만, 또한 ‘여성 작가’로 호명되는 대가로 ‘특정한’ 여성 재현, 여성 서사만을 반복해서 생산하게 될 가능성 또한 늘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재현이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현실을 재생산하기도 하구요.
정체성 정치와 관련해 다른 이야기를 더 이어서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가기 힘든 이유는 진짜 이게 자원이라서 그래요. 그냥 이게 정말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고 지금 우리 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 안에 살고 있으니까. 예컨대 제 지인인 30대 시스 헤테로 남자 작가는 머뭇거리며 제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퀴어나 페미니즘에 대해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요즈음 남자 작가가 너무 인기가 없어서 청탁도 잘 없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고. 저는 그 분에게 작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런 분위기는 역사적으로 다 ‘한때’에 불과하다고,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농담으로 답했지만,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다들 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죠. 요즘 이게 인기가 없다. 남자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여자 이야기가 대세다, 이런 식으로 다들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희우
말씀을 듣고 나니 더더욱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어떤 작가에게 청탁이 많이 가거나 덜 가는 건 단순히 정체성이 이유일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작가의 감수성이나 감각도 그의 정체성과 관련이 없을 수 없고, 지면이나 관심의 특정한 분배가 그 정체성-감수성을 틀 짓는 전형적인 구획들을 강화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어쨌든 가시성 자체를 경쟁하고 획득해야 하는 자원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흔들 필요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남성 인물, 특히 문제적인 남성 인물을 다루는 게 여성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반대로 여성 인물들이 인기가 많기 때문에 남성 이야기를 쓰는 남성 작가가 설 자리가 없다…… 같은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1. 주둥이방송, “[분노주의] 살면서 만나기 싫은 한심한 유형 1위”, ↩︎
  2. 스기타 슌스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명다인 옮김, 또다른우주, 2023. ↩︎
  3. 식민지 남성성에 관해서는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권김현영, 루인, 엄기호, 정희진, 준우, 한채윤 지음, 교양인, 2017), 『남성성과 젠더』(권김현영, 정희진, 한채윤, 루인, 엄기호, 나영정 지음, 자음과모음, 2011), 『페니스 파시즘』(강준만, 노혜경, 진중권, 이명원, 김현수, 시타, 정승화, 권김현영, 김진희 지음, 개마고원, 2001) 등 참고. ↩︎
  4. 『악인의 서사』(듀나 , 박혜진 , 전승민 , 김용언 , 강덕구 , 전자영 , 최리외 , 이융희 , 윤아랑 지음, 돌고래, 2023) “창작 서사의 이런 입체성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명령만으로 특정 작품의 재현 윤리를 온전히 가늠하기란 무리에 가깝다. 여기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악의 서사와 재현의 문제를 엄밀히 논하려면 적어도 이 한 줄짜리 문장에 멈추기보다 이로부터 상세하고 정연한 고찰을 시작해야 한다.” (출판사 책소개 중에서) ↩︎
  5.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88~89쪽. ↩︎
  6. 주디스 버틀러,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이연숙은 이 글을 박준호가 번역한 “왜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가?”으로 처음 접했다. 웹진OFF) ↩︎
  7.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홈페이지 참고, ↩︎
  8.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조앤 W. 스콧, 공임순, 최영석, 이화진 옮김, 2006, 앨피) 참고. ↩︎

죽은 건물의 축제: 한국 시의 지난 10년

―황인찬, 김복희, 김선오의 사례

*『쓺』 2025 상반기
미세하게 수정하여 옮김

집은 결코 그렇게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모리스 블랑쇼1)

건물이 죽어간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에 건물은 살아 있었다
이제 내가 안다
―김복희, 「느린 자살」2)

제가 영원히 모르겠나이다
―황유원, 「알 수 없는 아티스트Unknown Artist」3)

1)『카프카에서 카프카로』, 이달승 옮김, 2013, 그린비, p. 108.
2)『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사, 2018.
3)『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현대문학, 2019.

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과학적 정확성에 대하여」(1946)라는 짧은 소설은 아주 이상한 지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어느 대륙에 강대한 제국이 있었다. 제국 사람들이 온통 골몰한 국가적 과업은 지도 만들기였고,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데 엄청난 자원과 인력이 투여되었다. 수 세대에 걸친 노고 끝에 드디어 완벽한 지도가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딱 제국의 크기만 한 제국의 지도였다.

지도가 완성되자 제국 사람들은 지도 만들기의 과업에서 놓여났다. 할 일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지성과 재능은 점차 완성된 지도를 반성하고 의심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지도는 너무 정확하고, 크고, 위대한 나머지 아무 쓸모가 없었다. 후손들은 그 거추장스러운 사물을 사막에 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뒤틀리고 우거진 지도는 사막의 부랑자들과 동물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처로 쓰이고 있다.

이 짧은 이야기는 일견 지식(과학적 정확성)을 향한 집착을 비꼬는 듯 읽힌다. 결국, 가장 정확한 지도는 가장 쓸모없는 지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읽어볼 수도 있다. 지도의 완성은 제국에 대한 재귀적 인식,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지도가 완성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지도를 완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지도가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물의 성격과 처분을 고민하게 되었다. 지도가 완성되어야 그것을 버리고 해체하고 전혀 다른 용도로 쓰는 등의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의 완성은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데, 지도 만들기에 집중한 선조와 그 기획을 반성하는 후대로 세대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서 이야기 속 지도는 쓸모가 없지 않다. 그것은 만든 이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활용되어 집 없는 많은 존재에게 거처와 피난처를 마련해준다. 지도가 죽는다, 그리고 집이 태어난다.

자연과 문화의 어느 영역에서나 선형적인 진보는 허구이겠지만, 특히 문학이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이후에 쓰인 시가 이전에 쓰인 시보다 더 낫거나 앞선 것은 아니고, 과거에 쓰인 시가 지금 쓰이는 시보다 꼭 못하거나 뒤처진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기의 시가 스스로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경우가 있고, 덕분에 시의 역사에 나름의 주기와 마디를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지도가 완성되는 순간처럼, 어느 시기의 시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완료되었고, 나는 끝났다. 또한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시들을 연결해보면 한 시기의 시와 이후의 시를 나누는 능선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나의 주장은, 한국 시의 역사에서 2010년대 중후반이 바로 그러한 결정적 순간 중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2010년대 시에서 두드러지는 재귀성과 반성성, 세련됨, 경제성은 2010년대가 성숙과 완료의 시기임을 표시한다. 괄목할만한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의 2010년대는 창안의 시대가 아니었다. 창조적인 시기의 예술에는 유치한 불순물들, 과도한 표현들, 선언들, 실험들, 감각적 찌꺼기들이 우글거리기 마련이다. 2010년대는 전반적으로 그러한 과도함이 소거되고 절약된 시기였다. 창안의 시기라기보다는 반성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약과 한계 속에서 많은 엄밀한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지난 10년 한국 시의 일면을 돌아보기 위해 세 권의 시집을 살펴보려 한다.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민음사, 2018), 김선오의『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이다.

지난 10년의 시를 돌아보기 위해 세 시인을 선택한 것은 단지 이들이 독특한 문체와 주요한 경향을 보여준 시인들이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물론 많은 비평적 주목을 받은 시인들이지만,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니다. 열거한 시집들에는 공통으로 어떤 건축의 불가능성, 어떤 건축물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다. 동시에 깨지거나 녹아내린 건물의 잔해를 어떻게 활용할지, 나아가 건축의 불가능성을 어떻게 타개할지 시험하는 나름의 방법이 제시된다. 그래서 세 시인의 시들을 통해 어떤 건축이 불가능해졌고 새롭게 가능해지는지를 점쳐볼 수 있다.

1. 두 번의 실망: 황인찬, 건축

1.1 “건축이 깨지는 순간

황인찬의 시들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운 시 중 하나인 「건축」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기하학에 대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건축」 부분(이하 동일)

황인찬의 시가 거의 언제나 그렇듯, 이 시도 지난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단지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만을 의뭉스럽게 암시할 뿐이다. 사연 있어 보이는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황인찬의 시에서 레퍼토리 같은 것이다. 이 시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어떤 기하학≒마음이 죽는 일≒건축이 깨지는 순간’이라는 묘한 공식이다. 세 항은 어떤 관계이길래 나란히 말해지는가?

어떤 기하학에 대해”: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에 거주하는 방식은 시적으로 헤아려질 수 있을 뿐 기하학으로 측량될 수 없다.4) 기하학은 거주의 형식에 대한 공허한 앎을 표상할 뿐이다. 황인찬의 「건축」은 이러한 횔덜린-하이데거식의 시적 공식을 비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적 거주’는 불가능하고 “어떤 기하학”만 가능한 세상이다. 꿀벌은 사라지고 텅 빈 벌집만이 남은 것처럼, 거주의 공허하고 규칙적인 형식만이 남아 있는 세상.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세상에 대한 기하학적 파악은, 주체가 돌이킬 수 없는 실망을 겪는 것과 동시적이다. 첫사랑의 정열이든 예술적 열정이든 정치적 신념이든, 세상에 충만한 의미와 동기를 부여했던 마음이 부서진 이후에야 주체는 세상을 측량 가능한 텅 빈 도형들의 연속으로 보게 될 것이다.

다만 나는 여름에 시작된 마음이 여름과 함께 끝났을 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마음은 뜨거웠던 만큼 빠르게 식는다. 한여름날의 사랑은 금세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핵심은 마음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후에 오는 깨달음, 즉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가 더 중요하다. 사랑이 끝나면 무의미한 생활의 시간이 남는데, 이 시간은 이별 직후의 격하고 낭만적인 통증보다 훨씬 길고 지난하다. 말들의 피상적인 반복·연쇄를 가능케 하는 기하학적 패턴은 이러한 시간을 배경으로 출현한다.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전통적인 서정시는 모든 현상, 사물, 풍경을 시적 자아의 ‘마음’으로 회수한다. 즉 주체의 마음은 세계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의미의 중심이고, 시적 건축의 중추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더라도, 임을 향한 마음이 끝나지 않는 한 이 통일성은 유지된다. 반대로 말해서, 마음이 죽었다면 서정적인 건축술은 불가능해진다―중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깨진 건축만이 가능할 것이다.

4) 마르틴 하이데거,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강연과 논문』,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pp 254-56 참조.

1-2. 실패하는 탈주술화

하지만 마음이 죽고, 냉정하면서도 공허한 인식이 출현하는 구도 자체는 새롭거나 흥미롭지 않다. 서정적인 건축술에 대한 서정적인 부정도 마찬가지다. 황인찬의 시는 이러한 실망―혹은 ‘탈주술화’―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황인찬의 시에서, 시적 주체가 순진한 열정에서 벗어나면서 다소 씁쓸한 앎(기하학)을 획득하는 것 자체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새롭지 않게 진술된다. 그러고 나서 기하학은 다시 한번 꿈에 의해, 어떤 끈질긴 주술성에 의해, 희극적 어리석음에 의해 비틀어지고 훼손된다.

분신사바가 끝나고
우리는 집으로 갔다

잘 모르는 선생님도 함께다

비가 올 때는 조심하세요 시야가 좁아서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쉬우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

이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이해한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
우리는 구분할 수 있고

왜 새가 날아오를까 왜 갑자기 선반에 있던 물건이 떨어질까

대답할 수도 있다

밖에서는 비가 자꾸 내린다

잘 모르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채널링」 부분

비가 와서 시야가 좁아지는 상투적인 복선은 (적절하게도) 다음 행에서 즉시 취소된다. 앎은 비가 내리거나 새가 날아오르거나 갑자기 물건이 떨어지는 등의 일에서 서정적 의미부여나 신비화의 여지를 없앤다. 심지어 이제 주체는 옳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진선미’―을 분별할 줄도 안다. 즉 그는 “어떤 기하학”을 확보한 주체로 자신을 소개한다. 거의 모든 것이 알려졌기에, 이제 새로운 것도, 놀랄 일도 없다. 이처럼 이 시의 주체는 ‘계몽된 근대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술(분신사바)이 시시한 놀이의 형식으로나마 유지되고 있고, 시의 마지막에는 마치 주술에 의해 소환된 귀신인 듯 “잘 모르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과학적 계몽이 세계를 “탈주술화(disenchantment)”했다는 것은 옛 학자의 순진한 진단이었다.5) 주체가 자신의 앎을 확언할 때조차 주술성/현혹(enchantment)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끈질긴 주술성은 앎 자체를 더 깊고 근본적인 어리석음에 말려들게 한다. 그토록 많은 것을 ‘안다’고 말하는 주체는, 정작 자기 앞에 있는 선생님의 정체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황인찬의 시에서 거듭 읽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의 레퍼토리이다. ‘나는 이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계속 그것을 합니다. 나는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습니다.’6)

5) 막스 베버,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전성우 옮김, 나남, 2002.
6) 이러한 태도를 ‘냉소적 이성’(페터 슬로터다이크)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손쉬운 해석을 하기보다는 안드레아 롱 추의 “실망의 로맨스”와 연결지어보려 했다. 롱 추의 통찰은 냉소적 이성처럼 ‘이성의 모순’에 의한 설명보다 욕망이나 정서에 의한 설명을 제공한다.

1-3. “실망의 로맨스

이제 황인찬의 이러한 시적 태도를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책의 중요한 통찰과 연결지어보고 싶다. 미국의 트랜스젠더 저술가 안드레아 롱 추의 『피메일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이년쯤 전에 이 책을 친구에게 추천받아 읽게 되었는데, 책의 말미에 나오는 다음 문단이 황인찬의 시를 강하게 환기했다.

이것을 실망의 로맨스라 불러보기로 하자. 당신은 무언가를 원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어떤 대상을 찾아냈다. 특정한 사람일 수도, 정치학일 수도, 예술 형식일 수도, 딱 맞는 블라우스일 수도 있다. 당신은 그 대상에 애착을 가지고서 따라다니고 들고 다니고 TV에서 본다. 어느 날에는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어느 날에는 그렇지 않다. 어느덧 어쩌면 그 대상이 결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덮쳐온다. 하지만 진짜 실망스러운 일은 이것이 아니다. 그다음 국면이야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실망스럽다. 당신은 그 대상을 간직한다. 계속 따라다니고 서랍에 넣어두고 물을 주고 말을 붙인다. 그것은 여전히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도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는 것. 잘 알게 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 이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실망이 그 모든 욕망을 구조 짓고 가능케 한다.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원한다면, 결국은 아무것도 원하지 못할 것이다.7)

여기서 롱 추가 말하는 실망은 트랜스젠더 여성[male to female]으로서의 경험과 불가분하다. 롱 추는 “실망의 로맨스”를 말하기까지 대단히 논쟁적인 화두들을 거치는데, 그것들을 생략하고 이 대목만 발췌하여 시와 연결짓는 것은 병렬독서의 나쁜 버릇(‘탈맥락화’)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롱 추가 들고 있는 다양한 예들―사람, 정치학, 예술 형식, 블라우스―은 실망과 관련한 논의를 저자의 논점보다 넓게 확장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위의 구절에 나타난 롱 추의 가슴 아픈 통찰은 실망이 반드시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정도로 근본적이라면, 실망은 두 번 일어나야 한다. 첫 번째 실망은 우리가 호들갑스럽게 기대하고 소망하고 원했던 무언가가 환상이었음을, 실상은 별 것 아니었음을, 구원을 주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그러나 더 중요한 두 번째 실망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시는 대단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은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실재하지 않다는 것을,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돌보고, 그것을 한다. 이것이 황인찬의 시가 ‘두 번의 실망’을 그리는 희극적인 방식이다. ‘제 마음이 죽었는데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죽었다’는 진술은 소박한 실망, 첫 번째 실망을 나타낸다. 반면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라는 진술은 근본적인 실망, 두 번째 실망을 나타낸다. 왜냐면, 정말로 실망스러운 것은, 무언가 끝장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끝장나버렸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실망은 분명히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이 상처는 여전히 낭만적으로 채색될 수 있고 다른 대체물로 봉합될 수도 있다. 두 번째 실망은 마침내 상처 자체를 진부하고 평범한 것으로 만들고, 이미 한 번 뒤집힌 세계를 다시 반 바퀴 돌려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실망 이전에는 믿음, 거창한 기치와 보편적인 가치, 대의와 확신, 애착과 열정이 있다. 실망 이후에는 냉소, 과장된 상처, 불평과 자기연민, 방황과 무기력, 벗어나려는 충동과 폭력적인 반동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실망을 통해서만 주체는 실망스러운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황인찬의 시에서 ‘이중 실망’ 혹은 ‘두 번째 실망’을 공식화할 수 있다는 것은 시사(詩史)적인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많은 평자가 말한 대로, 한국 시의 1990년대가 대의(가령 민중을 대변한다는 대의)를 상실한 시기, 정치적 결집력을 잃어버린 시기, 내면에 침잠한 시기, 내 표현대로 하자면 첫 번째 실망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 중반이 두 번째 실망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까?8) 1990년대와 2010년대 시를 이런 방식으로 대질시킨 결과를 지금 자세히 논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비교가 많은 흥미로운 논의를 가능케 해줄 것이다.

7) 안드레아 롱 추, 『피메일스』, 위즈덤하우스, 2023, pp 176-77. 강조는 인용자.
8) 이것은 물론 한국 시의 역사 전체에서 1990년대가 최초로 ‘실망’을 드러낸 시기라는 뜻은 아니다. 1990년대와 2010년대가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위치 지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 공든 탑이 무너지다: 김복희, 느린 자살

2-1. 높이의 포기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은 거듭 읽어도 놀라운 시집이다.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정념과 인식 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힘겨루기를 한다. 자신이 취소한 것을 재개하고, 추락시킨 것을 날아오르게 하며, 또한 날아가는 것을 봉쇄한다. 이 충돌과 힘겨루기 때문에, 언어는 시집의 뒤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진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시집의 앞쪽에 실린 시들이 구상적이라면 뒤쪽에 실린 시들은 추상화에 가깝다.

이 글에서는 시집의 전반부에 실린 시들만을 언급할 것이다. 먼저 「느린 자살」을 읽어보자. 시는 건물의 무너져내림을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 건물은 더 이상 우편물을 받지 않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벽돌이라고, 유리라고, 나무 창틀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을 만든 장인들, 그 모든 것을 설계한 자, 대금을 지불한 자, 그들은 건물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건물이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느린 자살」 부분(이하 동일)

이 시의 건물이 낭독이나 책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건물을 시 혹은 문학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9) 화자는 건물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안다. 애초에 몰랐다면 슬프거나 아쉬울 일도 없겠지만, 건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건물의 무너짐을 어찌 단순하게 반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화자는 건물이 수많은 이의 노고로 지어졌다는 것 또한 안다. 건물을 짓는 데 일조했던 이들 모두 “건물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예술가뿐만 아니라 독자,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 등등이 기꺼이 모두 시라는 건물의 일부가 된 것이다. 블랑쇼의 말처럼, 집은 결코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건물은 죽어 마땅하다. 그것은 너무 높아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너무 빛나서 많은 고통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건물은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었을까.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건물이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건물이 꾸는 꿈속에
살아 있었다 건물이 종종 상상하는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아서 건물의 애를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건물이 가장 아끼지만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 인물은 누구일까? 심지어 건물을 애태우게 하는 인물이란. 아마도 천재일 것이다. 건물은 천재를 편애했다. 그 높이와 아름다움이 결정적으로 천재에 의존한 까닭이다. 건물을 높이는 것은 천재의 몫이었다(그리고 아마 다음 시대의 천재가 나올 때까지 건물을 유지보수 하는 것은 교양의 몫이었다).

높이는 높낮이의 분별을 부른다. 높은 것이 만들어지면 낮은 곳이 생기고, 빛나는 곳이 있으면 필시 그늘도 있다. 건물은 많은 고통을, 비참함을, 어둠을 낳았다.

실로
한낮 건물 앞에서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건물의 정수리에서 건물의 손바닥으로 뛰어내린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건물도 악몽을 꾸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
왼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오른쪽을 어둡게 하는 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 동시에 내리쬐는 빛을 보려고
느리게 죽어갔을 것이다

건물 앞에서 죽는 사람이 있었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건물은 자신을 의심한다. ‘내가 뭐라고 나에게 목숨까지 건단 말인가?’ 이 건물의 슬프고 간악한 특성은, 자신의 빛나는 높이가 야기하는 부작용을 건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이 빛나는 만큼 다른 쪽은 어둠에 잠기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건물은 높이 자체를 포기한다.

높기 때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물
그림자를 없애려고
높이를 포기한 건물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던 사람들은 건물 주변에 비극적인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무릎 높이의 건물에서 죽겠다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여기에 무서운 반비례 공식이, 이 시의 섬뜩한 통찰이 있다. 건물이 살아 있을 때는 그 건물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 반대로 건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면 건물 자체가 죽게 된다. 그리고 건물이 죽었다면, 이제 그것에 목숨을 걸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 시를 거듭해서 읽으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고통스러운 정념과 통찰이 느껴지는 것 같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을 보자.

건물이 죽어간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에 건물은 살아 있었다
이제 내가 안다

이렇게 절제된 문체 속에 어떤 애환이, 심지어 거의 악에 받친 분노가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내 감정을 투사해서 시를 과장되게 읽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화자가 건물의 죽음을 반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이 시의 주체는 높이의 불가능성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화자가 건물의 죽음을 “안다”고 말하기 전에 실제로 건물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화자의 진술을 유추해보면, 사람들이 건물의 죽음을 모른다면 건물은 계속 연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죽음은 소박한 의미의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안다”는 화자의 진술이 죽음을 사실로 못 박는 것이다.

이 시에서 사실과 진술의 관계는 위의 두 모델 중 후자에 속한다. 진술과 사실은 재귀적으로 서로를 참조하며 강화한다: 건물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건물은 죽는다.

9) “건물의 앞마당에서 아름다운 책이 불타게 두었다/한 글자 한 글자 낱낱이 암송하거나 하지 않으면서”(같은 시).

2-2. 자살의 의미: 두 죽음의 일치

자살이라는 말은 중립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죽음’보다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최근까지 뉴스나 신문에서는 자살을 ‘극단적 선택’ 따위로 바꿔 말하곤 했는데, 마치 그 말이 ‘수행적으로’ 우리를 해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굳이 시의 제목을 ‘느린 죽음’이 아니라 “느린 자살”로 했을까?

상징의 숲에 사는 동물인 인간에게는 두 번의 죽음이 있다. 그것을 ‘외적 죽음’과 ‘내적 죽음’이라고 해보자. 의사의 사망 판정이 확정하는 것은 외적 죽음이다. 그 죽음은 심장이나 뇌 기능의 정지로 확인될 수 있다. 반면 내적 죽음은 살아갈 의미나 의지, 살아 있다는 느낌의 상실처럼 주관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람은 내적으로 죽었는데 외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고, 내적으로 살아 있는데 외적으로 죽을 수도 있다. 가령 앞서 살펴본 황인찬의 화자는, 내적으로 죽었지만 외적으로는 살아 있는 상태였다(“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자살은 거의 언제나 불일치하는 두 죽음을 일치시키려는 시도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내적으로 죽을 때 외적으로도 죽으려는 사람이다. 자살=내적 죽음+외적 죽음.

「느린 자살」에서 자살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건물이므로, 이 공식을 건물에 적용해보자.

화자의 “안다”는 진술이 이 두 죽음을 하나로 묶는다.

수많은 현대시에서 버릇처럼 되풀이되어온 시의 죽음은 내적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죽음은 비극적이다. 말하자면 존경받는 추락, 드높은 추락이었다. 시가 외적으로 살아 있었기에 내적 죽음을 거듭 상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시가 외적으로 죽어가더라도―팔리지 않고 무관심이나 무시 속에 처하더라도―발명과 창안으로 충만하다면 내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다. 2010년대 시에서 말해진 죽음은 내적 죽음이나 외적 죽음이 아니라 두 죽음의 일치다. 시는 자신의 소진을 반성적으로 인식했는데, 동시에 외적으로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2010년대의 시에 그려진 죽음은 종종 희극적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존경받지 않는 추락이었다. 이중적인 실망의 공식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나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2-3. 타개책: 비약도 자살도 아닌 새 인간의 길

한국 시의 2010년대는 반성과 소거의 시기였고, 시의 반성은 자기 자신을 취소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10) 「느린 자살」은 분명한 하나의 사례이다.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마 2010년대 후반부터, 사뭇 다른 시들이 쏟아져 왔다. 강렬한 표현 충동, 두꺼운 시집들, 자기도취, 말뭉치(corpus), 선언적인 문체, 장르적 혼종들이 돌아왔다.11) 일종의 ‘양적완화’가 일어났다. 아마도 몇 년 전 한국 시에서, 어떤 최소주의와 최대주의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교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정적인 교차점에 김복희의 「새 인간」을 놓을 수 있다. 말하자면, 사후적이고 결과적인 논평이지만, 「새 인간」이 이후의 어떤 시적 경향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새는 현대시에서 엄청난 비중을 가진 동물이다. 시가 새를 그토록 애호한 이유는, 무엇보다 새가 높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시가 사랑한 새는 보이지 않게 날고 있든, 안쓰럽게 추락했든, 인간사를 날카롭게 내려다보든 간에 높이와 관련된 존재였다. 보들레르의 시에서는 명백하게 그랬고, 김혜순의 시에서도 종종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야 느낀다/새가 날지 않으면 세상이 거울처럼 납작해진다는 것”(김혜순, 「안새와 밖새」12)). 새가 날기 때문에 세상에 높이와 깊이가 생긴다. 세상을 납작한 거울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시는 새처럼 높이 비상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의 새는 잠들어서도 날아간다는 것”(같은 시).

그런데 우리는 앞서「느린 자살」을 읽으면서 시가 높이를 포기했고 더 이상 높지 않다는 인식을 보았다. 「새 인간」의 놀라운 타개책은 이러한 인식과 연동되어 있다. 「새 인간」은 높이 비상하지 않으면서, 지상에 밀착한 산문의 수평적 펼침을 통해 새와 만남을 재개했다.13) 화자는 새에게 닿기 위해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을 부지런히 걸어 동묘 앞 시장으로 간다. 지금은 시인이 높이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시라는 건물 자체가 높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새를 만나려면, 새가 내려와 줘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새 인간”은 ‘나’를 위해 지상에 살기로 한 새, 높이를 양보한 새다. “이 조끼 가득히 날 수 있지만 나를 위해서 날지 않기로 마음먹고 죽고 싶지만 죽지 않기로 결심한 나의 새 인간”(김복희, 「새 인간」).

날아가지 않고 내 옆에 있어 준다니, ‘나’의 관점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새 인간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그는 날지 못하는 지상의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높이를 단념한다. 사랑은 새 인간에게 살 이유를 주지만, 동시에 날아가는 일을 억제하기를 요구한다. 살게 하는 동시에 구속하는 것―이것이 새 인간이 겪는 사랑의 양가성이고, 그가 날 줄 모르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이다. 「새 인간」의 산문적 수평성은 「느린 자살」의 절망적인 수직성을 해소한다. 이 시는 가로막힌 상승의 충동을 보살핌의 다정한 구속 속으로 구부렸던 것 같다.14) 하지만 낮 동안 내 옆에 머무르던 새 인간은 내가 잠들었을 때는 다시 날아오를 채비를 한다. “내가 잠든 동안에만 날개를 펼쳐 보이는”. 김혜순의 시에서 “나의 새”는 내가 잠들었을 때도 날아가는 반면, 김복희의 시에서 “나의 새 인간”은 내가 잠들었을 때만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아마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화자가 ‘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서, 깨어 있는 동안은 날아오름을 의식적으로 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날아오름에의 열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의 꿈속에, 무의식에 물러난 채 남아 있다.

10)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 또 한 명의 시인으로 송승언을 꼽을 수 있다.
11)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시인들로 박지일, 신이인, 조시현 등을 꼽을 수 있다.
12) 『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19.
13) 따라서 이 시는 언어의 폭을 활달하게 넓히면서 겨드랑이 땀 냄새처럼 시시콜콜하고 구체적인 지상(생활세계)의 요소를 수용한다.
14) 혹은 반대로 「느린 자살」이 「새 인간」의 배면에 있는 회한이나 좌절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시집상의 순서는 「새 인간」이 「느린 자살」보다 먼저다.

3. 남겨진 시인의 손: 김선오, 부드러운 반복

3-1. 유령 건축술

아마도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잇는 기념비적인 시로 평가받아야 할 김언의 「유령-되기」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중이고, 얼굴을 잃어가는 중이며 익명의 군중에 동화되는 중이다. 「유령-되기」의 화자는 강조해서 말한다.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김언, 「유령-되기」15)).

그런데 김언의 「유령-되기」와 달리 김선오의 시에 나오는 유령들은 이미 유령인 것이 퍽 자연스러운 유령들이다. 그러니까 새삼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해서 말할 필요도, 회한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인간의 눈에 유령은 그저 투명하거나 희미해 보일 뿐이지만, 유령들 자신은 서로의 미묘한 빛깔 차이를, 변화의 스펙트럼을 알아본다(김선오, 「농담과 명령」).16)

김선오의 유령들이 신선하다면, 죽어가는 느린 과정을 겪기보다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김선오의 시는 폐허를 “세트장”으로 취한다. 유령들은 죽은 세계를 거주지로, 놀이터로, 학교로 취한다. 이미 죽은 존재들에게는 죽은 세계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버려진 지도를 집으로 전환하는 존재들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사막의 부랑자, 동물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세트장은 때로는 “폐교”(「세트장」)이고 때로는 “폐장한 놀이공원”(「범세계종」)이며 때로는 “연쇄되는 무덤”(「풀의 밀폐」)이다. 시가 전개되는 배경인 이 세트장을 깨져버린, 무너져 내린, 시효가 끝난 ‘현대시’의 폐허로 읽어도 어색할 것은 없다.

김선오의 시는 시의 죽음 이후를 조건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전의 시와 날카롭게 단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죽은 것을 세트장 속으로, 유령의 모습으로 불러들여 부드럽게 반복한다는 의미에서다. 김선오의 시에서 낱말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버려진 지도에서 오려 붙인 기호들이고, 김선오의 시는 그 기호들로 구성된 회전하는 세트들이다.17) 이것은 시의 한 시기가 마감되고 완료된 이후에 가능해지는 독특한 건축술, 말하자면 ‘유령적 건축술’이다.

15) 김언, 『거인』, 문예중앙, 2011(개정판).
16) 황사랑이 김선오 시의 유령성에 주목한 바 있다. 황사랑,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문장웹진》, 2024년 3월호.
17) 김선오의 시를 최다영이 말한 ‘가속류 시’와 연결지어보면 흥미로울 듯하다. 최다영에 따르면 가속류 시는 어떤 작법을 구축한 후 기계적 효율성에 따라 언어를 복제·반복하는 시이다(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문학동네』 2024 여름호 참조). 하지만 이 글에서 분석하는 것처럼, 기호의 육체 없는 연쇄와 반복은 ‘시인의 손’이라는 잔여를, 혹은 공백을 남긴다. 따라서 김선오의 시는 가속류 시로 읽히는 특징이 있으면서도, 또한 그런 시의 조건으로 포섭되지 않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3-2. 손의 위치에 대한 물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선오의 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유령적 세계를 맴돌고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유령적 세계로의 대대적인 이전은 어떤 날카로운 질문을 세계 뒤편에 남긴다. 바로 ‘시인의 손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시를 짓고 건물을 짓는 시인의 손에 대한 물음은 건축이라는 주제에 비추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이 물음은 특정한 건축물/건축술이 아니라 시적 건축 자체의 조건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적기 위해 한 획을 그었다. 더는 글자를 쓰지 않고 손을 멈추었다. 종이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어느 날 서랍을 열자 선은 녹슬어 있었다. 선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텐데. 왜 이토록 많은 세월을 지나온 것처럼 보이는 거지.

[……]

선 위로 수없이 많은 선을 긋고 났을 때 종이 위에 학교가 지어져 있었다. 선들이 학교를 이루고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곳의 선생이 되었다. 선으로 된 학생들이 나를 찾아왔다.
―「부드러운 반복」 부분(이하 동일)

처음 작업을 시작한 것은 “내 이름을 적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심심풀이였을 수도 있다. 의아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다음이다. 내가 긋고 잊어버렸던 선들이 그 자체로 살아 활동하며, 어떤 세월을 건너온 듯 보인다. 작업물이 ‘나’와는 별개의 생명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선 긋기를 훨씬 진지한 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선들이 하나의 건축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수없이 많은 선을” 그었다. 종이 속 학교를 지은 것은 ‘나’의 손이다. 그러나 곧이어 “얼떨결에 나는 그곳의 선생이 되었다.” 모르는 새 자신이 지은 세계에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수업을 했다. 나는 그에게 삼차원을 가르쳤다. 공이나 나무, 심장처럼 부피가 있는 것들, 그 속에 담기는 사랑이나 감기, 졸음 같은 것도 가르쳤다. 선으로 된 학생은 몸의 이곳저곳이 끊어질 듯했지만 언제나 열심이었다. 총명한 선이었다.

그는 종이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방법은 없었다.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선을 데리고 종이 밖으로 나갈 수는 없을까.

‘나’는 종이 속에 현실을 불어넣고 싶은 듯이 “선으로 된 학생”에게 삼차원을, 그 속에 담기는 마음을 가르친다. 하지만 어쩌면 너무 높은 차원을 가르친 것일 텐데, “선으로 된 학생”은 이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자 때문에 종이 밖 삼차원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종이 밖 세계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시 속 세계와 바깥 세계는 통행할 수 없이 막혀 있는 것일까. 시와 현실은 서로를 배울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차원을 나눈 시인의 손은 차원들을 잇는 유일한 통로일 것이다. 하지만 시를/학교를 지은 자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유령적 세상에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러면서 작업하는/노동하는 손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어느 날 선으로 된 학생이 쓰러졌다. 그는 숱한 점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점을 주워 담으며 울었다. 학교가 새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

울다 보니 나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흩날리는 지우개 가루 속을 걷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거대한 지우개의 형상이 나를 가르쳤다. 주먹 속을 보라고. 그러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고.

그러나 나의 주먹은 종이 밖에서 무언가 쉴 새 없이 적어대고 있었다.

팔 끝이 텅 빈 채로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마도 무자비한 지우개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은 “숱한 점으로 찢어지고” 학교는 “새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물론 학교를 지은 것이 나의 손이었던 것처럼, 그것을 지우고 해체해버린 것도 나의 손일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에 ‘나’는 작업하는/노동하는 손을 떠나 자신이 만든 종이 속 세상에 들어갔고, 그 세상의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나’와 ‘나의 손’이 따로 놀게 된 것이다. ‘나’가 슬퍼하든 말든, 늙어가든 말든 종이 밖의 주먹은 “쉴 새 없이” 작업 중이다. 짓고 부수고,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김선오의 시에서 종종 손(때로는 손바닥, 때로는 주먹)은 액자의 뒤편에, 무덤 밖에, 종이 밖에, 꿈 밖에, 단춧구멍 밖에, 세계의 배후에, 시의 마지막에 남겨져 있다.18) 판도라의 희망처럼. 이것은 인간적 세계가 남긴 유령적 잔여가 아니라, 반대로 유령적 세계가 남긴 인간적 잔여로 보인다.

이처럼 탈구된 손이 의미하는 바는 먼저 시를 쓰는 세계(손이 있는 세계)와 시 세계(화자가 접속한 세계)의 현격한 격리이다. 그것은 삼차원과 이차원처럼, 시인의 육체와 육체 없는 언어처럼, 인간의 세계와 유령의 세계처럼 나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차원은 서로 의존적이고, 원격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마치 게임 속 세계와 게임 밖 세계처럼. VR 게임에 접속해서 가상의 세계에 몰입할 때도, 그 몰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게임 밖의 손이 컨트롤러를 끊임없이 조작해야만 한다. 손의 존재는 게임의 몰입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인 동시에, 게임에의 완전한 몰입―게임 밖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망각―을 방해하고 저지한다. 때때로 유령들은 자신의 세계 배후에서 이루어지는 손의 작업을 감지한다. “어디선가 붓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 소리의 메아리 같은”(「농담과 명령」). 반대편에서 보면, 유령의 세계는 손에 쥘 수 있는 동전만큼이나 작아지기도 한다. 마치 시의 역사 전체가 한 편의 시 속에 응축될 수 있는 것처럼. 현기증 나는 프랙털 도형처럼. “놀이터가 사람만 해진다. 주먹만 해진다. [……] 이미 많은 동전이 그 속에 있다”(「투어」).

18)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① “그러면 나는 나의 두 손을/등 뒤로 감춘다.//손바닥을 위로 보이게/둔다” (「루시드 서머」); ② “색이 묻어나지 않는 붓의 머리 쥐고 손은 백지를 긋고 있었다”(「침묵의 푸가」); ③ “내장들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나지만 두리번거려도 손 모양 태양 두 개를 빼면 온통 캄캄한 어둠 속이라 한다”(「커피나 마실까」). ④ “거미줄을 떼어낸다. 손이 끈끈하다. 그러나 거미줄 여전히 눈앞에서 흔들린다. 비가 오려는 건가. 나는 주먹 속의 거미와 함께 돌아간다”(「나무에 기대어」). 위의 예들은 모두 시의 마지막 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때로는 손이 아니라 팔다리인 경우도 있다. ⑤ “나는 꿈속에 남겨졌다.//팔다리가 나 대신 무덤 주변을 뛰고 있었다”(「풀의 밀폐」).

3-3. 재귀성과 우연성19)

김선오의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떠오른 그림이 있는데, 네덜란드 판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우스 에셔의 〈손을 그리는 손〉(1948)이다.

‘재귀성’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언급되는 이 판화 작품에서, 손이 그리는 것은 자신을 그리는 손이다. 예술에서 이와 같은 재귀성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가 그림의 내용이 되는 순간으로, 한 시퀀스의 예술이 자신을 돌아볼 만큼 충분히 성숙했음을, 혹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음을, 혹은 공허해졌음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상태(성숙, 포화, 공허해짐)는 종종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재귀성의 선제조건은 그리는 나(주체)와 그려지는 나(대상)의 분할이다. 그다음 조건은 대상과 주체가 꼬리를 물듯 교차하며 다시 분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어떤 손도 단순히 주체나 대상인 채로 머무르지 않으며, 서로에게 대상이자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손들은 서로를 만들어내면서 서로를 반성한다.

이러한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예술이 자신의 조건을 의식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내용으로 삼게 되는 것은 ‘모더니즘 예술’의 식상한 특징이 아니냐고. “지구를본떠만든지구의를본떠만든지구”(이상, 「건축무한육각면체」)처럼 되는 것은 머리 아픈 모더니즘 예술의 고질적인 특징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20세기의 모더니즘 예술은 (에셔의 판화처럼) 재귀성의 가장 명료한 형식을 제시했을 뿐이다. 재귀성의 출현은 근대예술/현대예술만의 배타적인 특징이 아니라, 근대와 비근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다. 성숙과 반성의 시기마다 예술은 자신을 돌아보지만, 매번 전혀 다르게 돌아본다.

시의 역사에서는 우연성과 재귀성이, 창안의 시기와 성숙의 시기가 교차한다. 이 교차가 어떤 시퀀스를 이룬다. 김선오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 시퀀스들의 단절이 아니라 “부드러운 반복”이고, 반복되는 시퀀스들에 대한 의식이다. “계속되는 B, 타진되는 A”(김선오, 「시퀀스」). A는 구조이고, B는 운동이다. A는 재귀성이고, B는 우연성이다. A는 건축이고, B는 반(反)건축이다. B는 A에 반영되어 A를 풍요롭게 하고, A는 B에 침투하여 B를 견고하게 한다. 그리고 시퀀스들의 반복은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다: ‘어떤 죽음도 마지막 죽음이 아니고, 어떤 탄생도 최초의 탄생이 아니다.’

19) 허욱(육휘), 『재귀성과 우연성』,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23.

4. 결론…… 혹은 이어지는 질문들

살펴본 세 시집은 공통적으로 어떤 건축의 불가능성, 어떤 건물의 죽음에 대한 ‘앎’을 자신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인식은 ‘앎에도 불구하고’라는 제약 위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건축술, 타개책 들을 풍요롭게 시험하는 역설적인 동인이자 가능성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2010년대 중후반의 시가 무언가 닫히는 동시에 열리는 중요한 결절점에 위치한다는 내 생각은, 이 시인들뿐만은 아니지만 특히 이 시인들의 시를 따라 읽은 경험에서 나왔다.

다음의 두 질문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2010년대 중후반에 정확히 어떤 시퀀스가 완결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때 어떤 또 다른 시퀀스가 시작되었는가?

이에 대답하려면 또 다른 글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고 시 안팎을 넘나드는 많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한국 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었던 데에는 두말할 것 없이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기후위기와 생태적 재난에 대한 의식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또 2010년대 중후반에 문학계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의 반성을 가열하게 강제하기도 했을 것이다. 변화한 미디어 환경과 ‘인간’의 조건이 시의 작법을 변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런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요인들을 짚어보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자신이 속한 시간/시대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면서 그 시대를 수행적으로 구성하기도 한 소수의 시를 꼼꼼히 읽어봤을 따름이다.20)

이어질 작업을 기약하기로 하고, 하나의 전망을 제안하면서 글을 마치고 싶다. 만약 내 주장대로 김복희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이 동시대 한국 시의 중요한 교차점에 위치한다면, 그 교차점에서 죽음들의 관계 또한 전환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현대시에서 반복된 상징적 죽음: 외적 삶+내적 죽음
“느린 자살”: 외적 죽음+내적 죽음
이후의 삶(afterlife): 외적 죽음+내적 삶

실제로, 외적으로 죽은 것으로 보이는 시가 ‘내적 삶’을 획득하는 조짐이 나타나는 중이다.

발밑에 있는 것

땅 밑에 있는 것

죽은 것

죽은 줄 알았던 것

태어나기 직전인 것

우글우글한 것
―윤지양, 「입덧」 전문21)

무언가 땅밑에서 우글거린다. 땅 위에서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다는 신호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에게 어떤 메스꺼움이나 현기증으로 먼저 감지될 뿐이다. 따라서 ‘이후의 삶’은 정신승리라는 오명을 짊어질 수 있을 텐데, 외적으로 죽은 듯 보이는 것을 단지 몇몇 주체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감지하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주관적 믿음으로 미리 지탱되는 삶일 것이다.

죽음을 선포하는 것(신의 죽음, 인간의 죽음, 예술의 죽음, 주체의 죽음……)은 ‘현대’가 자신을 현대로 내세우기 위해 반복하는 고질적인 버릇이다. 물론 이 죽음들은 과장된 것이었다. 첫 번째 실망은 죽음을 공표하지만, 두 번째 실망은 죽음의 습관 자체를 사소하고 진부한 것으로 만든다. 버려진 지도를 집으로 취하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정말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어떤 죽음도 최후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도, 인간도, 예술도 유령 공동체의 실망스러운 일원인 탓에. 그들의 모든 찌꺼기가 높고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라 넓고 지저분한 집을 이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앎이 시를 수행적으로 죽일 수 있다면, 아무것도 죽지 않았다는 믿음은 시를 살릴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적어도 시의 생사에 관한 한 앎과 믿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20) 한편 다음과 같은 가설을 생각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1990년대에 시작된 한국 시의 어떤 시퀀스는 2010년대 중후반에 완결되었다. 그사이 시는 세계와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웅대한 자아에서 독립해 내면의 복잡성을 발견하고, 폭발하는 전집의 나날과 전투적인 “사춘기”(김행숙)를 지났다. 이 ‘개인’은 “간결한 배치”(신해욱)를 시험하고 투명한 유령이 되어갔으며(김언) 마침내 자신의 소진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가설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려면 훨씬 많은 시인의 많은 시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21)『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예소연에 대한 노트1)

1) 이 글을 탈고하고 나서 예소연의 소설집 『사랑과 결함』(문학동네, 2024)이 출간되었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예소연의 소설들은 최초 발표된 것을 따르며, 출처는 다음과 같다. 「분재」(『현대문학』 2021년 12월호, pp. 80~99), 「사랑과 결함」(『현대문학』 2022년 11월호, pp. 72~101), 「아주 사소한 시절」(『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6~82), 「우리는 계절마다」(『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그 개와 혁명」(《문장웹진》 2024년 1월호), 「우리 철봉하자」(『문학들』, 2024년 봄호), 「그 얼굴을 마주하고」(『릿터』 2024년 4/5월호).
이하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페이지만 밝힘.

1. 돌봄과 고독

예소연의 소설을 읽으면 상충하는 힘들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소설은 상대적으로 긴장을 해소해 주고 화해의 국면에 도달한다. 반면 어떤 소설은 완강한 충동,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도가 두드러지며, 그것이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 어떤 소설은 다정하게 헤어짐을 그리지만, 어떤 소설은 비장하게 고통스러운 공생을 그린다. 애틋한 공감을 자아내는 일상의 묘사가 있는 한편, 세속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심연도 있다. 물론 한 작가의 소설들을 두 측면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예소연의 소설을 따라 읽다 보면, 그의 소설이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이 모순이 작품들에 뜨거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이 에너지는 모순이 모순이 아니게 되는 지점까지, 양극단에 있는 듯 보였던 것이 엉키고 뒤섞여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막 주조되고 있는 작품 세계의 생명력과도 같은 이 뜨거운 불순함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의 방법으로, 이 글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자 한다. 돌봄과 고독이다.

돌봄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을까? 먼저 자기 배려 혹은 자기 돌봄에 대해서. 「우리 철봉하자」에서 동갑내기 친구 맹지는 ‘나’에게 자기를 돌보라고 촉구한다.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pp. 162~63). 여기서 맹지가 ‘나’에게 주문하는 것은 ‘너 자신을 알아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돌아봄, 반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 돌봄을 위한 관문이다.

왜 맹지는 ‘나’에게 자신을 돌보라고 말했을까? 맹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나’도 채팅 앱을 통해 남자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데 소설에 그려진 정황을 보면 남자들은 (완곡하게 말해서) 사랑할만한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에,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님을 알면서도 남자와의 일회적 만남을 반복해왔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섹스하며 견딜 수 없는 마음을 키워”(p. 163) 왔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로움 혹은 공허함을 자신과 닮은 동갑내기인 맹지와의 관계로 해소하려 한다. ‘나’는 맹지에게 같이 살자고 어필하는데, 그러면서 다소 무턱대고 맹지의 생활에 침투(?)한다. “너를 돌봐야 해”라는 맹지의 당부는 ‘나’의 구애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당부는 다정한 것이지만 뼈아픈 구석이 있다.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

둘째는 아픈 가족의 간병처럼 가까운 타인에 대한 돌봄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나’는 자신의 아버지 ‘태수 씨’를 돌본다. 태수 씨는 암 투병 중이다. 여기서 돌봄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이다. 그러나 돌봄이 가까운 이를 간병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그 개와 혁명」이 감동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돌봄이 누군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과 떼어놓을 수 없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할 수 없게” 되는데, 이러한 앎은 더 풍부하게 관계할 수 있게 하고 더 공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마리아 푸이그 드 라 벨라카사가 “돌봄의 문제matters of care”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돌봄은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관계를 두텁게 하는 실천이면서, 앎과 무지의 경계에 개입하고 관여하는 인식론적·정치적 실천이기도 하다.3) 소설에 그려진 정황은 태수 씨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범주화(86세대, 운동권……)를 허용하지만, 그러한 범주화가 “한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화자는 태수 씨의 장례식에서 독자적인 연극을 진행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그 역사를 이어 쓰면서 변형을 가하는 수행이다.

그렇다면 고독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새롭게 해볼 수 있을까? 돌봄과의 관계 속에서 고독은 특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돌봄은 관계 지향적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고독한 사람이 보살핌과 관심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하고, 고독 속으로 침잠하며 자신의 고립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고독이 해소되려면 누군가의 삶은 보일 수 있고, 이야기될 수 있고, 설명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번역-설명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손실이, 모종의 소외가 일어난다. “아빠가 그런 내 어깨를 붙잡고 얼른 설명해보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우리는 계절마다」, p. 317). 고독은 우선 ‘설명할 수 없음’으로 체험되고, 고독한 자는 설명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단념의 시간을 거친다. “친구에게 함부로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며 고작 그들이 원할 만한, 그럴듯한 비밀만 털어놓는 청소년이 되었다”(「아주 사소한 시절」, p. 80).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고독한 자의식은 ‘어차피 말해봐야 너희들은 모를 거야’ 같은 오만함과 연관되는 것도 사실이다. 설명 불가능성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특권적으로 과장하는 면도 있고, 반대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어떤 오만에 의해 보상되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독한 사람은 설명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데, 애초에 설명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것을 이해해야만 해소될 수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감히 이해하지 못한다. 고독은 이러한 모순 속에 기거하는 상태이다.

보살핌과 관심을 요청하는 동시에 거부한다는 점에서, 고독한 사람은 그야말로 어려운 “돌봄의 문제”다. 「사랑과 결함」의 화자에게 고모는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 아닐까? 고모는 연민을 자아내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위엄을 지닌 사람이다. 고모는 ‘나’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요구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힘겹게 하고 미움을 느끼게 하며 심연에 휩쓸리게 하고, 관계를 가학적인 게임으로 만든다.

그런데…… 더욱 기이한 모순은, 고독이 매혹과 관련 있으며, 때로는 그 자체 매혹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에서 화자는 말한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일 강렬하게 나를 매혹했던 주제는 그것이었다. 죽음과 은총. 완전히 생을 망각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이끌림”(p. 69). 「사랑과 결함」의 어린 화자는 고모의 향정신성 약을 한 움큼 삼킨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잃어갈 때 “몹시 충만하고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p. 94). 형언할 수 없는, 세속의 언어를 초월하는, 끔찍하면서도 황홀한 죽음의 경험. ‘죽음의 경험’이라는 말은 가장 오래된 모순을 품고 있는데,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경험, 다른 모든 경험의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론적 경험이다. 따라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경험, 소통할 수 없는 경험이다. 고독은 이러한 경험에 강박된 트라우마적 매혹과 관련이 있다.4) 일찍이 모리스 블랑쇼는 이 점을 간파하고 깊이 파고들었다. 이미지에 대한 애착인 매력은 고독에 상반되지만, 기이하게도 가장 강렬한 매혹은 고독 그 자체이다. 그러한 매혹이란 “고독한 전능과 마주하고 있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어떤 종류의 해방인데, “사실은 자신을 벗어나 빠져들게 되는 데서 오는 해방”, 즉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5) 블랑쇼가 암시하는 것은 매혹의 본체가 다름 아닌 죽음 충동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소연의 소설에서 매혹과 고독과 죽음의 묘한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지니면서부터다. 이야기할 수 없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주변을 맴도는 애타는 방황의 과정이 된다.

「사랑과 결함」의 고모가 ‘나’에게 전승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런저런 요인으로 설명되는 병(우울증)이 아니라 설명할 길 없는 고독일 것이다.

2) 이 소설에서 ‘나’와 맹지가 헬스장에서 만나 함께 운동하는 친구가 된다는 것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소설의 결말에서 말해지는 자기 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 혹은 자기계발과 어떻게 겹쳐지거나 분리되는 것일까?

3) 벨라카사가 말하는 돌봄의 문제는 브뤼노 라투르의 “관심의 문제matters of concern”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우리가 한낱 도구로, 이미 구성되었기에 다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는 자신의 복합성을 드러낼 때 관심의 문제가 된다. 벨라카사가 라투르에 제기하는 문제는, 관심의 문제 역시 이미 관계망 안에 들어와 가시화된 사물/문제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들어오지 못한 것,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관심의 문제로 만드는 적극적 실천이 돌봄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 벨라카사는 돌봄이 관심의 집중된 분배라고 주장하며, 또한 그렇기에 돌봄이 항상 잔여와 공백을 남길 수밖에 없는 실천이라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 Maria Puig de la Bellacasa, “Matters of care in technoscience: Assembling neglected things”, Social Studies of Science, Vol. 41, No.1, pp. 85-106 참조. “관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옮김, 『문학과사회』, 2023 가을호 참조.

4) 매혹이 근본적으로 트라우마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작품이나 풍경, 아이돌 등에 대해 느끼는 매력은 이러한 근원적 매혹의 대체물일 것이다. 하지만 재현적 매력도 극한에 이르면 근원적 매혹에 버금가게 된다.

5)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6, p. 60.

2. 나의 말이 아니면서 나의 말인 것

우리가 고독을 느끼거나 죽음에 매혹되는 이유는 우리가 ‘나’의 한계(이것은 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이 문학의 원동력인 것도 같다. 소설에는 일인칭을 사용하면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방법들이 있다. 먼저 간단한 방식은 복수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분재」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독자는 교차로 목소리를 들려주는 화자들을 통해 할머니와 손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도 그의 마음속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좀더 복잡한 방법도 있다. 「사랑과 결함」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나’가 말한다. 그러나 이 ‘나’는 이미 한 사람이 아니다.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사랑과 결함」의 첫 문단을 보자.

잠을 많이 자면 머리가 이상해진다. 그런데 나는 그 이상해지는 느낌이 좋다. (p. 72)

그리고 다음 문단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고모가 나에게 한 말 중 유일하게 동의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곳)

독자는 이 세 문장을 연달아 읽으며, 소설의 화자가 어쩌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리라는 것, 그리고 이 소설에서 고모가 중요한 인물이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단의 연속된 배치는 한층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 문단의 ‘나’는 고모인가 화자인가? 그러니까 저 두 문장은 고모의 말인가 나의 말인가? 물론 “고모가 나에게 한 말”이다. 분명 저 문장을 화자가 말하기 이전에 고모가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아닌 고모의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 말은 화자가 의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말”이어서 화자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 앞서 타자의 말이었지만, 이제 나의 말이기도 하다. 고모의 입에서 ‘나’의 입으로 전해지는 성찬식 빵처럼, 고모의 말이 ‘나’의 말이 될 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형을 겪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구성하는 타자를 미워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에게서 부모와 닮은 부분을 발견하고 몸서리치듯이. 하지만 그것을 도려내 없애려 한다면 ‘나’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타자가 없다면 애초에 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증보다 더 복잡한 관계 속으로 말려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타자의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하는 일, 그러면서 타자의 말이 나를 구성하도록 하는 일―거기서 오는 모든 치명적인 뒤엉킴을 감내하는 책임과 정직함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 특히 핵심적인 윤리이다. 또한 (유전자나 재산이 아니라) 의 전승, 이것은 특히 문학적인 가능성인데, 그러한 전승은 고모와 조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연작으로, ‘어둠의 성장소설’이라 불릴 만하다.6) 상승이나 화해보다 갈등과 고통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에 대해서는 가능하다면 별개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싶다. 이 글에서는 「우리는 계절마다」의 마지막 부분만을 살펴보겠다. 거기서는 독특한 ‘교육’의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이 연작소설에서 선생이나 부모는 스승의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위험하고 내밀한 스승이 존재한다.

「우리는 계절마다」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은 미정 엄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순리를 강요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희조[연작소설의 화자]의 세상에 그렇지 않은 단 한 명의 존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7) 미정 엄마는 다른 어른들과 좀 다르다.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꿰뚫어 보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른이 마땅히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체면이나 권위, 도덕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담대함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힘은 그의 삶이 정상적인 궤에서 이탈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 “딱 갖출 것만 갖춘 전형적인 젊은 엄마”(p. 318)처럼 보였으나 남편의 죽음 이후 주체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미정 엄마는 미정의 병실에서, 병문안하러 간 윤다혜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부른 건.”
미정의 엄마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네는 결코 걸레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어쩐지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미정 엄마에게서 어떤 어른다운 힘을 느꼈다.
“자, 따라 해봐. 나는, 걸레가, 아니다.”
(……)
나와 윤다혜는 뜻 모를 그 말들을 천천히 따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거리자 윤다해도 훌쩍거렸다.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은 그렇게 이상한 주문을 외며 기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미정 엄마가 침대를 빙 둘러 와서 나와 윤다혜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살아. 그렇지만 결코 그들과 같아질 필요는 없단다. 나는 남편이 죽고 나서 활력을 되찾았어. 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pp. 327)

이 대목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기묘한 (매우 치명적으로 뒤틀릴 수도 있는) 의존 관계를 보여준다. 미정 엄마는 아이들이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는 바로 그 말(“걸레”)을 과감하게 취하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준다. 이것이 그의 “위엄”이자 “어른다운 힘”일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미정 엄마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당당함은 자기 삶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기묘한 공모 관계다. 가르치는 자는 분명 배우는 자에게 어떤 힘을 주지만, 자신이 이미 갖고 있었던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힘을 줌으로써 비로소 자신도 힘을 얻는다. 스승의 말은 아이들이 끔찍한 현실을 직면케 하지만, 동시에 말의 반복을 통해 그 현실의 지배력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말의 놀라운 힘이 아닌가? 사람을 예속하고 상처 입히는 그만큼 치유할 수도 있는 악마적인 힘. “걸레”라는 말이 ‘나’를 예속시키고, 호명이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수치스럽게 한다면, 그 말을 내 입으로 반복할 때, 말이 갖는 예속의 힘은 경감될 뿐 아니라, 나를 강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반복을 지시하는(“따라 해봐”) 타자의 말이 필요했다. 몇 페이지 뒤에 나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치유의 현장에서 벌어진 교육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엄마의 조금 부른 배를 보며 이번만큼은 이들이 절대로 내 삶의 결정권자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p. 328)

소설의 결말인 이 자립의 다짐은 타자와 자기의 온건한 화해와는 사뭇 다른 결론이다. 출발점에 있는 자기가 자기의 부정(타자)을 마주해 갈등과 분열을 겪고 더 높은 수준에서 통합(화해)되는 것이 가장 상투적인 도덕적 변증법이다. 예소연의 연작은 그러한 도덕적 교훈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연작에 그려진 윤리적 변화는 타자의 압도적인 우선성으로부터 ‘자기’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기원에 있는 자기란 없기에 자기는 양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되어야 하는 무언가이다. 하지만 이 창조는 철저하게 타자에 빚지고 있다.

분명 우리를 자기로 ‘만드는’ 것은 타자의 말이다(미정 엄마 같은 ‘어른’은 아니었지만, 또 어조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 철봉하자」의 맹지도 이러한 타자이다). 이렇게 자립을 명령하는 타자들을 스승이라고 한다면, 한 인간의 자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스승이 필요할까? 마치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같다. 예소연의 소설에 그려지는 전이와 전승은 다음의 역설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자립한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것이다. 자립을 돕고, 촉구하고, 명령하는 타자에 대한 의존 없이 인간은 자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립은 의존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왔고, 그만큼 (의존성을 격하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비판받기도 했다. 예소연의 소설은 자립이나 의존 중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함이란 곧 의존함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한편 예소연의 소설에 종종―사연 있을 뿐만 아니라―‘위엄 있는’ 어른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예소연 소설의 어른들은 모범적인 ‘롤모델’이나 귀인들로 이상화·낭만화되어있지 않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기득권’처럼 단순히 적대시되고 고발되는 대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은 표면적으로 애증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의 양상을 뜯어보면 ‘사랑과 미움’의 양가성보다 더 복합적이다.

6) ‘어둠의’라는 수식의 의미는 무엇보다 예소연의 연작들이 규범적인 의미의 ‘성장’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장’은 집합적 차원에서 발전과 개발, 팽창을 뜻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부정성이나 부조리와의 타협과 화해, 그로 인한 성숙을 뜻하기도 한다. 근대의 성장소설을 세계의 부정성을 마주해 방황을 겪는 근대적(부르주아적) 인간 주체가 부정성을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면서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이런 해석을 일반화해서 성장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근대화/자본주의화하는 국가와 주체를 화해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가 이런 주장을 담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이 분석은 완벽하게 설득력 있지만, 소설 장르에 대한 이런 비판적 해석―멀리서 읽기―의 결과에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이런 비판적 방식은 실증 가능한 지식으로 자신의 설득력을 보충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본주의적·국가적 논리로 실증되고 표상될 수 있는 ‘성장’만을 유일한 성장으로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경향이 있다. 즉 실증 가능한 것과 이미 실증된 것을 재차 확증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설득력을 강화한다. 자신이 비판하는 ‘성장’의 전형적 방식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지금 성장소설에 대해 말하면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실증되는 종류의 성장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성장’이 있느냐이다.

7)「예소연·최선교 인터뷰」, 『소설보다』 2023 겨울, p. 178.

3. 말 없는 포옹

「사랑과 결함」에서 고모의 고독은 “소박맞은”(p. 80) 그의 처지라든가, “모계 유전”(p. 96)이라든가, 호르몬 이상에 대한 의학적 진단이라든가, 이런저런 사회적 이유로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설명될 수 없는데, 고독한 자는 그러한 환원과 설명 때문에 더욱 소외될 뿐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악화시킨다면, 그것은 유익하거나 좋은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명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더 잘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써야 할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는 식으로 겸허하게 물러나야 할까?

이 문제는 화자의 전 남자친구 수와의 관계에서 어떤 딜레마,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딜레마로 나타난다. 화자는 수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수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정해둔 한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너머의 문제는 회피하는 듯하다. “삶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는 도무지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p. 85). 화자는 수가 고모의 ‘금융 문제’를 도와준 일에 대해 그의 진의를 추궁한다.

“귀찮았잖아. 괜찮아. 나도 귀찮았어, 평생.”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평생 그 외로움을 책임질 수는 없잖아.”
“평생 외로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니?” (p. 95)

반대로 수는 화자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듯하다. ‘진정함’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타인에 대한 일상적 배려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 있지 않은가. 타인의 외로움을 완벽하게 책임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완전하게라도 보살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화자가 자문하듯이, 수에게는 심연이 없고 그런 것을 들여다볼 마음도 없다는 생각이 ‘나’의 독단이었을 수도 있다. 수는 자신이나 타인의 심연은 제쳐놓더라도, 어쩌면 얼마간 위선적일지라도, 불완전한 배려나마 성실히 해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태도란 건 내가 평생 시달릴 고통과 우울, 그리움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p. 95).

고독한 자는 소통을 단념하려 하지만(혹은 단념할 수 있는 척하지만) 사실 정말로 단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모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고독한 사람이 정말로 단념에 이르렀다면 그는 해탈한 상태일 것이고, 이해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야기하려는 욕망도 없을 것이고, 더 이상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간청하지 않아도 자신의 심연에 사랑하는 사람이 도착해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수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뒷걸음질 친다. 심연이 지식이나 의미의 형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삶으로 전염되고 전승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궤를 이탈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안전하고 편안한 일이 아니다. 화자는 수가 뒷걸음질 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내몰린 사람이 자신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것만큼 마땅한 일은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고 수가 벼랑 끝에서 자기보다 나를 위해주길 바랐다”(p. 99). 이렇게 ‘나’는 단념과 호소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내 안에 이식된 심연이 나를 결정하고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그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상 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것인 듯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독한 자는 자신의 고독을 어른스럽게 감추고 그럴듯한 비밀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자신이 하는 일이 허위이고 공허한 연극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진정성은 어두운 충동으로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덧붙이도록 하자. 인간의 관점에서 고독은 분명 관계에서의 이탈이지만 고독이 단순히 비(非)관계인 것은 아니다. 「사랑과 결함」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고독과 사물의 관계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인간 배우/행위자actor가 등장하는데, 바로 로봇청소기다. 처음에 로봇청소기는 꽤 ‘개연성 있는’ 사물로 보인다. 화자는 엄마에게 식기세척기를 선물하는데, 고모가 그것을 질투하는 듯하다. 그래서 화자는 고심 끝에 고모에게 로봇청소기를 선물한다. 중년 여성에게 (이를테면 태블릿이나 스마트워치 등의 전자제품이 아니라) 가사의 편리를 위한 가전제품(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을 선물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물론 여기서 있을 법함/개연성probability은 선(善)이나 합리성을 의미하지 않고, 사물이 자연적 사실에 부합함을 뜻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는 일상적 편견에 부합함을 뜻한다.8)

그러나 이렇게 매우 일상적이고 있을 법한 사물로 보였던 로봇청소기는 도구적 역할을 벗어나 괴물로 귀환한다. 고모에게서 수의 손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그것은 청소하지 않고 마치 시위하듯 벽에 ‘머리’를 힘껏 찧는다. 사물의 이러한 변신은 절묘하면서도 놀랍다.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올 때, 있을 법함/개연성 자체가 내파되어 공포로 변한다. 수는 고장 난 청소기를 두려워하는데, 이유 없는 두려움은 아니다.

“겁이 났구나?”
“겁? 그게 다가 아니야. 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 로봇청소기는 나한테 화를 내고 있었어.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던 거라고.” (p. 99)

수는 이렇게 주장하는 것 같다. 사물에 별문제가 없는데 자신이 주관적으로 과장된 감정(“겁”)을 느끼는 게 아니라, 사물이 정말로, 진짜로, 이상하다고. 어떤 도구가 기능에 맞게 잘 작동할 때는 그것을 걱정하고 살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문제”처럼 주어져 있다. 사물이 고장 나 목적과 기능에서 이탈할 때, 비로소 그것은 “돌봄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물이 예측 가능한 질서에서 벗어나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위기’이다. 달리 말해 위기는 사물들이 개연성을 잃어버렸거나 초과한 상태이다.

고독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탈해 있고, 고장 난 사물은 사물의 질서에서 이탈해 있다. 그런데 정작 둘은 서로 독특하게 관계하고 얽매여 있다. 일상적 관계에서 물러나 있는 ‘심연 속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로봇청소기는 고모 삶의 심연으로부터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듯 보인다. 거기에는 어떤 고통과 외로움으로 응축된 혼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도대체 고모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로봇청소기는 어떤 고독한 시간을 통과했던 것일까? 사물은 사물에 대한 앎의 질서(과학과 기술)에서 벗어날 때 위기로 육박해온다. 그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며 직면을 요구하는 세계의 “기괴한 얼굴”이다. 반대로 인간은 관계의 질서(사회와 문화)에서 이탈할 때 고독하다. 인간의 고독한 부분은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인간(人間)이 아니다. 사물은 위태로울 때 인간이고, 인간은 고독할 때 사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사물과 사물이 된 인간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괴물이다. 그것들은 일상적 관계 바깥의 불가해한 관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심연 속에서만 가능한 말 없는 포옹이 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달려가서 끝내 전원을 끄지도 못하고 청소기를 끌어안았다”(p. 101). 예소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윤리적 태도를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을, 그저 품에 안기. 마지막 장면에서, 고모와 엄마 사이에 오가는, 화해라고도 인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통 아닌 소통도 비슷한 일이 아닐까? 죽기 전 고모는 엄마에게 “민애야”하고 이름을 부를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말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엄마는 그 부름에 응답한다. “저도요”(p. 101). 그 공백 속에서, 침묵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어떤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8) 이러한 편견은 누군가의 개인적 잘잘못을 판단하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편견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개연성’은 일상적이고 상상적이며, 동시에 실재적인 관계에 대한 집단적 감수성이다.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긴 하지만, 근대소설의 규범인 개연성이 특히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아미타브 고시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참조.

추기(追記)

이 글에서는 작가의 일부 작품만을 다뤘을 뿐 아니라 작품들에 나타난 여러 흥미로운 측면 중 극히 일부만 짚어보았다. 아쉽지만 벌써 주어진 분량을 꽤 초과했으므로, 본문에 포함하지 못한 메모들을 붙여 글을 마감하려 한다.

(1) 예소연이 그리는 관계의 양상에는 시의적인 독특성이 있다. 「도블」9) 「내가 머물던 자리」10) 「분재」같은 소설들에서는 계획에 없었던 돌연한 합석이 그려진다. 「통신광장」11) 에서 ‘나’는 대화방에서 만나 며칠 대화를 나눈 여인2에게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p. 121)다면서도 만나자고 한다. 이렇게 종종 등장하는 우발적 관계들에는 물론 시대적인 이유와 맥락이 있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들, 고립을 벗어나려는 소망, 우발성이 허용하는 어떤 솔직함, 일시적 공동체……

(2) 젊은 여성이 조직에서 혹은 가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자기 의심도 눈에 띈다. 「우리 철봉하자」에서 강의 영상들을 검수하는 일을 했던 ‘나’는 자신이 “페미 같아”(p. 152) 보이는지 검열하고, 「그 개와 혁명」에서는 “요즘 여자들”에 대한 태수 씨의 말에 분개하기도 한다.

(3) 예소연 소설의 인물들은 종종 관계에 적극적인데, 이 적극성은 잘못 비칠까 봐 미리 조심하는 점잖음이나 손익을 따지는 신중함,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는 식의 ‘쿨함’과는 사뭇 다르다.

(4) 전반적으로 ‘개인’을 넘어서는 거대한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이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이것은 작가의 최근작 「영원에 빚을 져서」12)의 제목처럼 ‘나’의 주관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자신의 관점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오해와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은 작가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개인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대한 의식은 ‘나’와 세계의 윤리적 관계에 대한 고민이고, 언어의 한계에 대한 고뇌이면서, ‘나’의 언어를 넘어서려는 소망이기도 하다. 이 소망은 관계에 대한 희구가 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립과 외로움, 소통 불가능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5) 개인을 초과하는 힘과 차원에 대한 의식은 한편으로 삶의 본질적인 수동성·피동성에 대한 회의로도 연결된다. 즉 주체는 삶을 결정하지 못하고 삶에 휩쓸릴 뿐이다. “삶은 지독히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니, 내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손에 쥔 적이 있던가. 삶은 언제나 나를 쥐고 흔들 뿐이었다”(「그 개와 혁명」).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작가가 한 말처럼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13) 이렇게 태어남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면, 피동성은 누군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가 된다. 다만 그것이 각자에게 다른 장면으로, 다른 강도로, 다른 형태의 질문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이 문제는 특히 삶에서 겪는 고통의 인과를 따지고 들 때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잘못된 건지 찬찬히 돌아보았다. [……]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없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뺏겼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을 뿐인데. (「아주 사소한 시절」, p. 67)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그냥 적당히 돈 없고 적당히 뭘 모르고 살아온 것일 뿐인데. (「그 개와 혁명」)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지만, 그 고통에 합리적인 도덕적 인과는 없다. 즉 고통은 잘못의 대가가 아니다. 삶이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고 존엄이란 무엇인가? 예소연의 소설 저변에는 이렇게 본질적인―너무나 본질적이어서 잊어버리거나 없는 셈 치기 쉬운―문제를 “오래도록 생각”하는 사색적 집념이 있다. 이 사색적 정열이 시의적인·감각적인 구체성과 어우러져 독특한 에너지가 되는 것 같다.

(6)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는 이러한 본질적 피동성을 조건으로 윤리적 주체의 ‘발생’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발생’이 현실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덕적 화해나 교훈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그 얼굴을 마주하고」에서는 앞 소설들에서 예비된 갈등과 실망이 지속되거나 심화되고 있으며, 그것들이 ‘자기와의 관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7) 앞서 말했듯 예소연의 소설에서 돌연한 마주침·출현이 종종 그려지지만, 더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오래된 것의 낯선 회귀이다. 「그 개와 혁명」에서 진돗개 ‘유자’가 태수 씨의 장례식에 난입하는 일이나 「사랑과 결함」에서 로봇청소기가 무서운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일처럼. 갑자기 시야에 들어와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 배우/행위자들은 일상적 관계의 연극성을 극적으로 폭로하는데,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재현되지 못하는 심층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9)『현대문학』 2021년 6월호, pp. 200~16.

10) 엔솔러지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안온, 2023, pp. 79~110.

11) 『LIM: 옥구슬 민나』 2024년 봄호, pp. 112~140.

12)『현대문학』, 2024년 4월호, pp. 188~251.

13)「예소연·최선교 인터뷰」, p. 171.

거대한 바람과 접이식 지도 2부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와의 대화

기후금융 연구/기후정의행진/기후우울증

기후금융 연구

희우
이제 자연스럽게 필드워크에 대한 얘기를 하면 되겠네요. 먼저 필드워크 하면서 인상 깊게 본 장면 혹은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부터 조금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서
필드워크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여의도에서 보내게 됩니다. 여의도가 한국에서는 금융산업의 수도 같은 곳이니까요. 증권사들, 한국증권거래소, 자산운용사들이 여의도에 밀집해 있고요. 정책을 입안하는 국회의사당도 있으니… 여러모로 정치경제의 수도 같은 곳이죠.
여의도의 마천루 빌딩에 들어갔을 때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들은 굉장히 평면화돼 있는데, 그게 금융의 시선을 잘 드러내는 이미지 같아요. 사실 창밖은 아주 울퉁불퉁하고, 갈등이나 적대가 많은 세상인데, 금융의 시선에서는 투자 대상으로 평면화되는 그런 이미지가 기억에 남아요.
기후금융 쪽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나기 전에, 제가 제일 처음 생각했던 이미지는 사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에 가까웠어요. 모든 걸 경제적으로 동질화하고 계산하고, 효율적으로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금융가들에게 그런 아비투스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분들이 기후 쪽에 관심을 가지고 금융적으로 뭔가를 해나가려 할 때는 다른 면모도 있어요. 기후 문제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기후 테마가 투자처로서 매력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걸 통해 지구과학과 기후변화 담론, 그걸 둘러싼 여러 가지 맥락들을 보면서 거리 행진 같은 움직임에도 참여하게 되기도 하지요. 그런 걸 보면서 이분들을 회색 신사 같은 이미지로만 본 제 관점이 오히려 평면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건 제 연구보다 좀 더 넓은 맥락이긴 하지만, ‘기후인’이라고 불리는 범주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 포함되는 존재들로는 싱크 탱크도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환경운동 단체들도 있을 테지만, 현재 시민사회에서 아직 특정한 범주로 구획하기 힘든, 하지만 기후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연루될 수 있는 모종의 이벤트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후가 아니었더라면 금융인으로, 운동가로, 연구자로, 예술가로 따로따로 살아갔을 이들이 기후 문제를 계기로 뒤섞이는 풍경들을 여러 군데서 보게 돼요.
하나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기후금융과 관련된 컨퍼런스에서는 대기업 출신 한 발표자가 ESG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 책 이미지와 책의 한 문장을 인용하는 거예요.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식물들의 것이다, 그런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기후위기나 인류세, 생태에 대한 감수성이 문단에서도 얘기가 많이 되는 걸로 알고 있고, 비판적 사회과학이나 운동 진영에서도 많이 얘기되고 있지만, 이제 그런 담론이 금융계와 산업계를 포함한, 거의 모든 영역의 언어에 부분적으로 침투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이런 상황을 냉소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만 기후위기에 대한 감수성과 윤리적 책임 의식이 그 자체로 ‘급진성’의 표지로 통용될 수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대한 생태적 비판이라는 계기 자체가 동시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재편이 된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자본에 친화적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감수성이 피상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그게 어디로 이어질지 미리 예단하지는 않으려 해요. 이제는 ESG 투자를 비롯해 기후위기에 쏟아지고 있는 정치적 관심과 자금의 흐름이―우리가 얘기했던 투자의 정치학하고도 연관되는 부분인데―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서 어떤 정치적 동학을 만들어낼 것이냐는 부분을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동학의 최전선에 있는 행위자들이 우리가 ‘기후금융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컨설턴트, 그리고 기업과 정부에서 관련 사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인 것이죠.

희우
그래서 그쪽을 연구하고 계신 거군요. 그런데 ‘기후금융’이라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여전히 생소한데요. 기초적인 수준의 설명을 좀 해주신다면요.

민서
일단 이 연구를 하게 된 문제의식부터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제가 관심 있었던 주제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가 어떤 지점에서 촉발되는가. 그걸 둘러싼 정치적 동학이 어떻게 전개되느냐는 건데, 그 중 석사과정 때 관심을 가졌던 게 20세기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복지 자본주의, 내지는 복지 정책이라는 키워드였죠. 인간 노동력의 상품화에 한계를 그었던 복지 정치의 흐름들이 20세기 복지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면, 지금은 인류세와 기후위기 담론의 유행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생태적 위기가 도래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20세기의 자본주의에 도래했던 위기와 그 한계의 근거가 인간의 노동적 성격이라는 이른바 ‘내적 자연’에 대한 문제였다면, 지금은 행성적 한계라고 부르는 ‘외적 자연’이 투쟁의 중심에 온다는 거죠.
기후위기를 여전히 부정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만(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죠), 다른 대다수의 소위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엘리트들은 기후위기의 실재를 부정하지는 않죠. 오히려 대규모 ‘녹색 투자’를 통해 환경 문제를 어떻게 새로운 경제 성장의 계기로 삼을지 고민하죠. 한국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저탄소 녹색성장을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 틀을 짰던 분이 현 정권에서 기후 관련 문제를 총괄하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를 이끌고 있죠. 이런 걸 보면 행성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기후위기, 이상 기후,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지금까지 굴러왔던 게임의 규칙만으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되는 위기로 나타나고 있고, 여기에 대한 대응으로 ‘녹색 자본주의’라는 새판 짜기가 일어나고 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 이 새판 짜기에 참가하는 주인공들은 누굴까. 이 과정에서 전개되는 기후 정치의 문법은 뭘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희우
그러니까 ‘복지정치’에서 ‘기후정치’로의 이행은 ‘내적 자연’에서 ‘외적 자연’의 한계에 대한 관리로 이행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구체적인 환경 문제나 다른 직업군, 혹은 운동 집단이 아닌 엘리트 주도 기후위기 대응,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의 대응 쪽을 보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민서
예를 들어 한국에서 기후 정치와 관련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말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탄소 중립’이 있고요. 2022년 초 이재명, 윤석열 대선후보가 토론회에서 기후와 관련된 얘기를 딱 한 번 한 적이 있어요.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한테 원자력 에너지를 확충하면 국제사회의 경제적 흐름이랑 어긋나는 게 아니냐, 하고 질문했던 게 있는데 여기서 ‘세계적 흐름’의 예시로 들었던 게 ‘RE100’, 그다음 ‘유럽연합 택소노미’였죠. 그런데 이 제도들이 모두 금융이랑 직결된 말이에요.
RE100은 ‘Renewable Energy 100%’를 줄인 말인데, 기업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100퍼센트 재생에너지로 조달한다는 캠페인이에요. 영국의 한 비영리 시민단체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화석 연료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한테 동참을 호소해서 일종의 서명을 받은 거예요. 여기 가입하고 실제 RE100을 달성한 기업들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등 꽤 되는데, 이런 변화는 국가의 강제가 아니라 민간의 자발적인 선의에 기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러면서 금융시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이 되었고요. RE100을 이행하는지가 친환경 경영의 지표처럼 되니까요. 이 상황에서 주요 정당의 후보가 미국도 영국도 유럽도 다 하는 흐름이 있고,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도 압력을 받고 있는데 정부는 기업들의 RE100을 어떻게 지원할 거냐고 물었던 거죠.
유럽연합 택소노미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수립한 친환경 투자의 기준, 그러니까 무엇이 ‘친환경’인지를 분류하는 체계에요. 요새 사실 ESG, 그린, 탄소중립 같은 말들이 유행하다 보니까 유럽연합 입장에서는 이른바 그린워싱(greenwashing)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진짜 그린이고 무엇이 가짜 그린인지를 판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그래서 유럽연합 차원에서 분류해 주겠다, 그렇게 만든 게 택소노미죠. 여기서 질문은, 이 택소노미가 애초에 왜 필요하냐는 거죠. 공적인 권력이 자신의 역량으로 모든 저탄소 전환을 이뤄내는 게 아니라, 무엇이 ‘녹색’인지를 가려내는 ‘신호’를 개별적인 경제 행위자들에게 발신해야 되기 때문에 필요한 거거든요. 유럽연합 차원의 공적 재정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민간 자본을 어떤 식으로든 유인해서 활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생겨나는 거지요. 그 돈을 어디로 흐르게 할 거냐. 여기서 아까 얘기했던 투자의 흐름, 특히 ‘매력적인 그린 투자’를 정하는 기준 설정의 문제가 등장하는 거죠. 『피투자자의 시간』에 나오는 표현으로는 이른바 ‘신용 할당의 기준’을 만들려고 했던 게 택소노미인 거지요.
한국의 대선 정국에서 기후와 관련하여 회자되었던 RE100, 택소노미 둘 다 결국 기후와 관련된 자본의 흐름에 대한 문제인 거죠. 기후변화 대응에서 (가령 말름 같은 논자들이 급진적 전환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보는) 공적 권력이 아니라 초국적 민간 자본, 이들이 투자하는 자본이 이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현실. 이걸 어떻게 볼 거냐는 게 제 문제의식입니다. 그래서 기후금융과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컨퍼런스, 심포지움, 세미나 같은 행사들을 참관하거나,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생산하는 말과 글에 대한 분석, 경우에 따라서는 이 행위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인터뷰나 관찰을 병행하고 있어요.
이 ‘기후금융’이라는 건 기후 문제는 금융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할 수밖에 없다, 혹은 해봄직하다 같은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담론적 현실이기도 할 것이고, 기후변화에 대한 모종의 대응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상이한 행위자들이 모여드는 장(field)이기도 할 텐데요. 소위 ESG 투자 같은 걸 하는 펀드매니저들, 각종 동향을 파악하는 애널리스트들, 기업 가치와 결정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신용 평가사들, 회계법인의 컨설턴트들, 여기에 대한 공적 규제의 틀을 짜는 국가의 금융 관련 기관들 등 협의의 ‘금융계’도 있겠지만, 기후위기 대응에서 기후금융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이들과 함께 전개되는 다른 정부 기관들, 씽크탱크, 사회운동들까지… 이들을 포괄하는 기후정치와 관련된 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려고 해요. 이 모두를 학위논문에서 다 다룰 수는 없겠지만, 큰 그림을 나름대로 그려보고 있어요.

희우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지금 기후변화에 대한 지도 그리기, 혹은 대응의 방식과 수단을 주도적으로 제공하는 게 (국가나 학문이 아니라) 금융이라는 거겠지요.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딜레마와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지금 한국의 금융사들, 관계자들의 분위기는 좀 어떤가요? 그들이 기후 문제를 재현하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 이런 것들이 좀 궁금하네요.

민서
지금 진행 중인 관찰과 분석이라 거칠지만, 인상 깊었던 것만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우선 경영학에서 ‘시간 지평(time horizon)’이란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10년 후냐 5냐 후년 아니면 평생이냐, 우리가 투자하거나 자금을 운용할 때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게 결국 어디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거죠. 이게 투자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고, 집합적인 정치건 개인적인 경제활동이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염두에 두는 시간의 길이가 모두 해당될 텐데요. 미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 파장의 크기와 길이는 이렇게 될 것이니 거기 맞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거죠. 가령 주식시장에서 일론 머스크가 화성을 간대, 아니면 생성형 AI가 뜬대, 이런 식의 트렌드들이 소문의 형태로 금융시장을 움직이게 되면 그 소문에 따라서 자금이 움직이게 되고, 이걸 사전적으로 돋우거나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수많은 상상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느끼기로는 기후금융에 얽혀있는 행위자들이 기후변화의 시간 지평을 굉장히 길게 잡고 있어요.
제가 만난 어떤 금융업 종사자는 보통 주식시장에서 하나의 트렌드는 5년, 10년 가면 정말 길게 가는 건데, 기후변화는 그거보다 훨씬 길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불가역적이고 장기 지속적인 트렌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 여기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말을 하신 분도 계세요.
여기서 저는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데, 금융의 핵심은 결국 금융 시스템을 일부로 해서 돌아가는 인류 사회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특히 투자라는 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내가 먼저 취득해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먹고 빠지는 게 핵심인데 근데 이제 기후변화라는 거는 그렇게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됐을 때 이 금융의 시간 지평과 금융을 그 부분 집합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금융의 논리에 점점 더 휘둘리고 있는 인류 사회 전체, 그 둘의 시간 지평이 심각하게 탈구돼 있다는 거죠.
기후변화라는 건 결국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양이 증가하면서 태양에서 지구로 보낸 열이 방출되지 못해서 대기 시스템이 바뀌는 거고, 이게 기후‘위기’인 이유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왔던, 농사를 짓고 생활을 영위해 왔던 대기의 질서가 교란되고, 이 교란, 변화의 속도와 내용이 인간의 과학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불확실성을 띠고 전개되기 때문일 텐데요. 이 기후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결국 (근대 계몽주의의 후손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태도죠. 정치 혁명이 됐건 사람의 생명이 됐건 무언가를 성취해내고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의 체계가 있었고 그게 특히 20세기에는 가시적으로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이어졌고요. 발전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결과가 20세기 특히 초중반에 (소위 ‘거대한 가속’이라고 하는) 인간이 자연 생태계에 배출했던 물질적 부하의 급격한 증가이고요. 그게 인류세의 출발점인 거지요. 인류세를 초래한 에토스라고 할까요. 낙관주의, 자신감, 믿음. 가령 일론 머스크가 보여주는 그 낙관주의와 자신만만함, 과학기술과 자본력으로 뭐든지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그런 태도. 영화 《인터스텔라》 보셨나요? 그 영화의 포스터 문구 중에 “하나가 우리는 해낼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런 문구가 있잖아요.

희우
그렇죠. 기억이 나네요.

민서
근데 영화 내용을 보면 그 문구는 좀 역설적이라고 느껴져요. 그 영화가 20세기에 나왔더라면, 혹은 지금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했다면, 자신감에 가득 찬 어조로 했다면 느낌이 달랐겠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그 영화 내용을 보면 거기서 우주로 쏘아 보내는 우주선은 일종의… 몰락한 테크노토피아에서 발사된 마지막 승부수에 가깝잖아요. 그러니까 그 문구는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래야만 한다고 주문을 거는 거에 가깝잖아요. 그 영화가 나올 때도 기후변화가 심각했으니까 그런 이미지가 나왔겠지만, 이제 거기서 느껴지는 (우린 해낼 수 있다, 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워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 저는 그런 느낌이 필드워크 하면서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필드워크를 하다 보면 결국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금융이라는 장이,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상승에 대한 기대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주식시장이 만약에 우상향하지 않는다(그게 어떤 지수건 간에)면 어떤 직군이든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상승이 항상 대전제로 깔려있고 그 믿음이 붕괴하지 않을 때만 돌아갈 수 있는 게 금융이라는 장인데요. 그런데 기후 관련 금융을 하는 분들하고 얘기를 나누다보면 이 분들은, 자연스럽게 여러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고 그 위기를 타개할 만큼 변화가 빨리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금융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니까, 그 대전제가 앞으로도 성립할 거라고 (인터스텔라 포스터의 문구처럼) 뭔가 강박적으로 이럴 거야, 이래야만 해, 라고 약간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 연사 한명 한명이 그런다기보다는, 이들이 모여있는 기후금융 장 전체의 대전제가요.

희우
그렇군요. 분위기가 조금 상상이 가기도 하는데요. 민서 씨가 가끔 저에게 필드워크를 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묻어나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고 얘기해주신 적이 있잖아요. 그런 장면들을 좀 더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어요.

민서
제가 참석했던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서시는 분들은 금융인의 특성상 가장 최신의 정보를 업데이트해서 갖고 와야 하는 분들인데요. 그분들의 프레젠테이션들을 보고 있으면 발표도 잘하시고, 형식적으로 정말 몰입도가 높았어요.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 서사에 이끌리게 되는데, 그 서사 속에도 약간 진실의 순간 같은 것이 육박해 올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굉장히 유명한 컨설팅 업체가 참가한 컨퍼런스 중 하나였는데 발표자분이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제 정보를 취합해서 동향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보니 PPT들을 계속 바꾸고 업데이트하는데 몇 년째 안 바꾼 슬라이드가 하나 있다.’ 그게 뭐냐면 각국의 탄소 감축 노력이 전혀 안 바뀌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의 무게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너무나 절망적인 느낌이 들죠.
왜냐면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증언하는 데이터를 내놓고 있지만, 기후변화가 진행되는 상황은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따라가고 있어요. 각국이 언제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얼마만큼 줄이겠다, 말들만 무성한 상황이고, 한국도 물론 예외는 아니고요.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움직임에 동행하는 국가와 시장의 문제가 지적되지 않을 수 없는 건데. 산업계, 금융계의 책임이라는 쟁점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텐데.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사실 이런 컨퍼런스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이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와중에 그게 전면화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 슬라이드 바로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되니까…… 이런 식으로 말씀하면서 직업적 소임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이럴 때는 뭐랄까, 현대사회에서, 각자가 밥벌이를 위해서, 각자의 직분이 허락하고 지지하는 범위 내에서 모종의 액션을 하며 사는데, 자기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정치인들도 그 정신으로 5년 후 임기를 생각하면서 정책을 펼 것이고, 펀드매니저들은 이게 수익성이 있다고 설득해 가면서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건데, 모든 흐름이 조화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그 결과가 충분한 대응의 부재로 귀결되는 느낌이 들어서, 연구하면서 느끼는 절망이 있어요. 어쨌든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산해내는 게 우리 같은 연구자들의 일인데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게 제때 의미를 가질 수는 있을까…… 이런 회의가 들어요.

기후정의행진

희우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은 ‘기후금융가’와는 다른 중요한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민서
제가 아는 한 펀드매니저분은 2022년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여를 하셨는데 2023년에는 안 가셨거든요. 왜 안 가셨냐고 물어보니까 너무 실망했다는 거예요. 기후 얘기를 해야 할 곳에서 왜 이렇게 기후랑 무관한 얘기를 많이 하냐는 거예요. 뭐 노동 얘기, 장애 얘기, 페미니즘, 정부 비판 등. 그래서 그런 데 너무너무 실망해서 안 가게 됐다는 거예요.
근데 정반대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급진적이었다고 실망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희우
맞아요. 그분은 말하자면 탈정치화된 기후정치를 기대했던 것 같은데, 제 주변에는 정반대의 기대를 하는 분들이 많아요.

민서
혹은 더 급진적이냐 덜 급진적이냐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 애초에 기후행진을 우리가 왜 하는가, 기후행진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도 많이 나왔어요.

희우
그렇군요…… 맞아요.

민서
희우 씨는 참여하셨던 입장에서 어떠셨어요?

희우
저도 굉장히 많은 걸 느꼈지만, 그리고 가서 아는 분들도 만나고 친구들과 같이 걷는 게 참 좋았지만, 저도 이 행진의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느낌이 좀 있었어요.
관련해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는데, 전반적이고 중요한 의제로 ‘탈화석연료’가 있잖아요. 근데 행진을 이끄는 트럭들 위에 발언자들이 한 분씩 올라와서 구호를 선창하는데 그중 한 분이 원래 화력발전소에서 일하시던 노동자였어요. 그분이 일자리를 잃은 것 때문에 발언자로 올라왔던 거로 기억해요. 그분이 자기소개하고 올라온 이유를 얘기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탈화석연료, 환경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일자리를 잃는 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정부 차원에서, 제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거나 보호해 줄 거냐 이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요. 결국 집회가 내세우는, 그리고 겨냥하는 목적, 그것을 위한 정치적 언어, 아주 강력한 구호 같은 것도 필요하잖아요.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슬로건이 꼭 필요하고, 하지만 그런 구호들이 담아낼 수 없을, 굉장히 복잡한 이해관계와 실존적 문제들이 당연히 있을 거예요. 제가 집회에서 느낀 불분명함이 그 사이에서 생겨났던 것 같아요.

민서
그렇죠. 희우 씨가 보셨다는,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가 요구했던 건 결국 기후정의 운동에서는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이야기하는 건데요. 지금 자본이나 국가부터 시민사회까지 기후위기를 전기로 모종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전환이 단순히 화석 연료를 대안적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에너지 전환 혹은 녹색 전환에 그칠 것인가 하면 그게 아니라는 거죠. 녹색 전환의 의미를, 단순히 녹색은 비화석 원료고 화석 연료는 갈색이고 이 갈색을 벗어나면 만사 OK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있을 것이고, 그 쟁점들을 예를 들면 아까 말했던 기존의 화석연료와 연계된 산업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생계를 누가 책임질 것이냐도 있을 것이고, 그 이행의 비용을 누구에게 분담할 것이냐는 쟁점도 있을 것이고요.
그리고 이 녹색 전환, 곧 탈탄소 전환을 위한 기술적 해결책의 시장을 통한 확산, 가령 전기차나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서 새로운 산업 패권을 이끌자는 게 선진자본주의 세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합의인데요. IRA 법안을 포함해서 녹색 산업을 먼저 우리가 육성하고 일종의 기술적 비교 우위를 확보해서 이걸 새로운 이윤 창출의 원천으로 삼자는 거죠.
그렇지만 과연 그런 전환만으로, 기존의 경제 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에너지원을 바꾸는 것만으로 충분하냐는 의문을 제기했던 게 기후정의행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기서도 사실 요구안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 정도로 축약이 됐었는데요. 그중에 첫 번째가 주거 빈곤이죠. 가령 한국에서 이제 재작년 여름에 특히 이슈가 됐던 신림동 침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건 기후위기의 두 가지 시간성과 연관되는 쟁점이에요.
첫째로 우리가 태우고 있는 화석 연료를 감축해야 된다. 이거는 이제 미래에 더더욱 심화될 대기 중 탄소 농도의 변화와, 그게 초래할 기후변화의 속도와 밀도를 낮춘다는 것이고요, 또 이미 지금 진행되고 있고 현상으로 나타나는 변화들이 있잖아요. 이미 기존의 기상학적인 데이터만 가지고는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인 기상 사건이라고 불리는, 말 그대로 이 기후라는 구조가 심대하게 변형되면서 그 구조의 변형이 현행화되는 사건들(홍수, 폭염, 산불 등). 거기서 이제 피해를 받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죠. 폭염에 취약한 쪽방촌 주민일 수도 있고, 산불에서 도망쳐야 하는 숲속의 동물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이미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치가 하나의 요구였는데 이런 것들은 녹색 신산업 육성만큼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거든요. 그 자체로 이윤 창출의 원천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이건 사회적 보호와 보장(security)의 문제에 가깝죠.
그 외에도 이제 현재 윤석열 정부가 특히 주장하고 있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대안적 에너지원으로서 핵발전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었고요. 그다음에 이 에너지 전환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들이 지금 국가가 지원하는 민간 자본들인데 이거 말고 다른 이행과 전환의 방식을 구상해 볼 수 없을까, 이런 문제 제기도 있었고… 이렇게 여러 요구들이 모였던 집회였던 거죠.

희우
그렇죠. 그런데 제가 잘 모르고 말하는 것이지만…… 제가 느꼈던 건 그 집회를 이끄는 깃발이라 할 만한 것의 부재였어요. 아마도 그 집회가 현재로서는 좀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려는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여러 다양한 요구들, 사회적 보장에 대한 요구라든지 탈화석연료에 대한 구호라든지 탈핵에 관한 요구는 그 집회를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묶어줄 구호는 아니었던 것 같고, 우리가 많이 보고 느꼈던, 많이 읽었던 그런 필요성들의 모음이자 드러냄이었던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는 축제 분위기가 있고, 회합의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이 참여자로서 행복하고 좋지만, 정치적인 것은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그러니까 ‘모인 것들을 다시 한 번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서
기후정의행진 집행부 차원에서 5개 요구안을 만들었고 14개 세부 요구안을 또 만들었어요.
그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탈핵을 비롯해 에너지 기본권, 그다음에 주거안전, 에너지 전환을 이윤 주도 논리가 아니라 다른 공공성을 포괄하는 식으로 가자, 그 외에도 공장식 축산에 대한 반대, 개발 사업 반대 등 여러 가지 의제들이 있었는데요. 희우 씨가 말씀하는 건,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다기한 슬로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가 잡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의제로 치면 기후·환경 외에도 반빈곤, 페미니즘, 평화, 농업 등등 대단히 다양했거든요.

희우
그렇죠. 그런데 제가 말한 건 그 집회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세대는 소위 ‘운동권’이라 하는 세력이나 경향이 대학에서도 많이 약화된 시대에 대학을 다녔고, 전반적으로 그런 투쟁이나 단결의 언어가 우리 감수성이 아니게 되었잖아요. 어찌 보면 그런 언어를 많이 상실했잖아요. 그게 흔히 말하는 ‘탈정치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최근에, 특히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후로 느끼는 문제는, 우리 감수성에 맞으면서도 강한 조직화를 허용하는 정치적 언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다양성들을 억압하거나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집회의 효과가 한층 더 커질 수 있게……
이 기후 운동도 알록달록하고, 축제 같고, 음악도 신나고, 그런 감수성부터 옛날의 데모랑은 꽤 다르다는 생각도 드는데, 저는 그런 게 좋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을 위해서 우리가 한발 더 나아가야 할 때 뭔가 그것을 허용하는 언어가 부재한다는 느낌도 계속 받게 되는 것 같거든요. 강력한 정치화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옛날의 정치적 언어를 답습하자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의제들이 있을 때 이것들의 다양성을 모으는 걸 넘어 한 번 더 조직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져요.

민서
그렇죠. 이 모든 차이들을 누비는 기표가 뭐가 될지가 불분명한 상황인 거죠. 사실 이 14개 요구안의 다양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 기후정의행진이 어쨌든 2022년 2023년 그리고 2023년 4월에 있었던 기후정의 파업까지 고려한다면 세 번 정도의 대중 동원이 있었는데(그전까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 많이 갖고 올 수 있겠지만), 핵심은 빈곤, 노동, 페미니즘, 에너지, 교통 등등의 여러 가지 의제들이 기후라는 화두를 경유해서, 시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후변화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의 정치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기후가 라투르가 말하는 일종의 ‘필수 통과점’이 되면서 그 기후라는 말을 둘러싸고 상이한 정치적 지향과 의제들을 가진 이들이 어셈블리지로 결합되는 형태인 거죠. 이들이 2022년 9월 2023년 4월과 9월에 반복적으로, ‘기후정의’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행진하고 스스로를, 자신들의 정치적인 요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목소리들이 우리가 재현/대표/표상이라고 번역하는 ‘representation’에까지 이르렀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그때 거기에 함께 현전했다는 것을 넘어서, 이제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기록하고 정치적으로 의미화할 것인가가 문제죠.
제가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던 개인 참여자들 약 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게 있는데, 행진 전체에서 인상적인 게 뭐였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거기서 이제 60% 이상이 ‘기후 정의를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를 꼽았거든요. ‘정부를 향한 직접 행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가 그다음에 40% 정도 돼요. 근데 가장 낮은 응답을 받았던 게 ‘기후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와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날 모여서 서로의 에너지를 느끼고 스스로의 존재를 현시한 거는 맞는데, 이날 나왔던 많은 목소리들을 어떻게 종합할 거냐, 어떤 하나의 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밀어붙일 거냐, 이게 남겨진 과제라는 거죠.
아까 ‘운동권’을 말씀하셨지만 거기서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는 이거예요. 운동의 시대가 이제는 지나갔다는 얘기 자체가 사실 대단히 수행적인 진술인데, 왜냐하면 지금도 운동은 계속되고 있거든요. 다만 우리가 ‘운동의 시대’라고 기억하는 시대에 비해서 현재의 사회운동이, 촛불 집회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수평적인 연대나 소통을 강조하면서 위계적인 대표 자체를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경향도 있고… 이 사회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상들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지금 동시대에 맞는 운동의 문법이 무엇이냐는 건 생각해봐야 되겠죠. 그 운동의 문법, 형식의 문제는 사실 기존의 급진적 운동의 정치가 지양하고자 해왔던 체제가 무엇이었냐는 질문, 즉 내용적인 질문이랑 떨어질 수 없죠.
기후정의행진 설문 분석을 통해 도출되는 건 결국 반자본주의라는 쟁점인 것 같은데요, 제가 설문조사를 취합할 때 (객관식 설문 문항이 아니라 주관식으로 받은 응답에서) 많은 의견이 나왔던 것이 한편에는, ‘기후 얘기가 너무 적었다. 기후 말고 딴 얘기가 많았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딴 얘기라는 건 결국 ‘기후’를 필수 통과점으로 경유하는 일종의 급진적 정치들의 의제들인 것이죠. 그것들이 이제 반자본주의 정치학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요. 다른 한편에는 반대로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충분히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는 평가가 있죠. 향후 기후정의행진의 과제는 이 사이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아닐까요?

희우
네. 더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고, 합의를 위한 노력도…… 그런데 합의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적대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모이는 사람들이, 라투르와 슐츠의 용어를 빌려서 “녹색 계급” 혹은 “생태계급”(ecological class)이라면 모인 이들이 적대하는 ‘생태 기득권’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거 아닐까요? 도나 해러웨이나 말름 같은 이들이 ‘인류세’라는 말, 이제 거의 학술적이거나 정책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그 용어를 비판하면서 ‘자본세’를 주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기후위기가 우리 모두가 연루된 문제는 맞지만(그걸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만),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주범은 ‘모든 인류’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민서
『녹색 계급의 출현』에 “녹색 계급은 이미 새로운 제3신분, 즉 모든 것이기를 열망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1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계급 개념이 기술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행적이라는 게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공산당 선언이라는 텍스트를 근거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노동계급 정치라는 어떤 물질성을 띠게 되었던 것처럼 녹색 계급이라는 정치적인 집합 행동의 실체도 지금 생성 중에 있는 것 같아요.
계급이라는 개념이 적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후 내지는 녹색이라는 가치에 명시적으로 이의 제기를 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결국 피/아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결국 대두될 것 같아요. 기후정의행진 참여자 설문조사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그런 내용이 있었어요. 행진 참여를 통해 기대하는 효과를 물었을 때 많이 나온 응답이 ‘기후정의를 위한 사회적 세력 형성에 기여’나 그다음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의 인식 향상’이었고, ‘기후위기에 관련된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체제 전환의 필요’ 이건 되게 낮게 나왔거든요?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보면, 희우 씨도 아까 말했지만, 첫 번째 불평등은 기후변화를 몰고 온 탄소 배출의 역사적 책임이라는 것인데 이제까지 북반구 국가들과 남반구 국가들이 누적적으로 배출해왔던 탄소 배출량의 불평등이 있는 거고요. 두 번째 불평등은 현재 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 및 기반시설이 필요한 만큼 분배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텐데 재작년 신림동 침수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전혀 평등하지 않잖아요. 이 두 가지 불평등을 어떤 식으로 문제화할 거냐, 이거는 사실 녹색이냐 아니냐 아니면 녹색으로 얼마나 빨리 갈 거냐는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인 것이죠.
기후정의행진 참여자들도 과연 우리가 불평등, 자본주의 체제 전환, 이런 방향이 가리키는 혹은 함축하는, ‘직접적으로는’ 기후와 무관해 보이는 의제에 모두 동의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기후위기와 기후정의에 대해서 어떤 집합적인 발화를 시도하는 것을 넘어서 대응을 어떤 방향으로 해나갈지에 대한 합의의 부재가 설문 결과에도 반영돼 있지 않았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우
어떻게 그런 것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저도 최근에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최근에 참석했던, 어느 경제학과에서 있었던 컨퍼런스에서도 결국 해결책을 산업적 혁신과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찾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문제의 원인인 것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제도적·학술적으로, 대중적으로 지배적인 경향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현재 지배적인 합의라면 합의일 텐데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합의보다는 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합의에 가깝겠지만…

민서
그렇죠. 제가 여러 프로그램에 구체적으로 코멘트를 하기보다는, 이런 얘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후변화의 재현이라는 문제와 연관되는 부분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 빙하가 녹아내리는 사진부터 홍수, 폭염, 산불같이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을 통해 기후위기가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기후위기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게 파리 협정이에요. 2015년에 파리에서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막자, 정말 안 되더라도 2도 안쪽으로 제한하자 이야기가 나왔고 그 1.5, 2도라는 목표치가 많이 알려져 있지요. 몇 년까지 이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이러이러한 할당량이 필요하고 각 국가에 우리가 이걸 위해서 이때까지 이만큼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겠다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산업혁명 대비,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제약한다는 말 자체는, 직관적으로 잘 안 와닿지 않나요? 사실 지구 평균 기온이라는 것도 기상학의 측정과 개념적 조작을 통해 얻어지는 무언가에 가깝고, 1.5도라는 것도 감각할 수 없고, ‘산업화 혁명 이전’이라는 기준은 더더욱 안 잡히는 개념인 거죠. 수백년의 시간 간격이 있는 거니까. 한마디로 개개인이 감각할 수 있는 시공간 지평을 넘어서 있는 거죠.
그렇지만 분명한 건 기후변화가 진행 중이고, 폭염으로 쓰러지는 노동자와 농민들, 폭우나 산불 때문에 거처를 위협받는 사람들이 이미 있잖아요. 이런 이미지들이 기후변화의 실재성을 그나마 증언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이미지를 목격한 사람들이 기후 정치의 과정에 자기도 모르게 연루되는 게 아닐까요.

희우
방금 해주신 말씀에 두 가지 쟁점이 있는 것 같아요. 기후변화는 너무 큰 시공간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상적으로, 즉각적으로 체험하거나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은 그것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큰 틀에서 거시적으로, 지적으로 파악/표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연루된다는 거,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데서 오는 그런 정동적인·정서적인 변화에 관한 이야기네요.

민서
첫 번째 것부터 얘기해 보자면 사실 제가 이제 기후금융 내지는 정책 관련된 행사들을 참가하면 그게 축사나 인사말 형태로 나올 때도 있고 아니면 PPT에 있는 이미지로 나올 때도 있는데 거의 항상 행사 초반에는 이미 이런 얘기가 나와요.
“얼마 전에 있었던 폭염에서 볼 수 있듯이”, “이번 몇 월은 역사상 가장 더운 몇 월이었는데……” 같은.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이 극단적 기상 사건들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늘상 얼마 전에 있었던 ‘사상 초유의’ 이벤트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렇게 한편에는 너무 익숙해진 이미지, 화염이나 쓰나미 같은 게 넘실대는 파국적인 스펙터클들이 있고요. 한편에서는 빈곤 포르노그래피처럼 일종의 생태 포르노그래피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호주의 코알라를 보여준다거나 북극곰을 보여준다거나… 그러니까 이런 이미지들의 질서가 지금 얼마나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효과를 주는지, 우리가 이걸 통해서 어떤 기후정치의 당사자로 변해가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결산이 필요한 것 같네요. 그 재현의 문제야말로 사실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술은 새로운 감성 체제를 만들어내고 혁신하고 비판하는 그런 영역이잖아요.

희우
민서 씨도 아시겠지만 사실 지금 기후나 생태라는 타이틀로 진행되는 전시는 많아요. 관련된 문학작품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좀 소재적으로만 사용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녹색 계급의 출현』에 녹색 계급은 이전의 계급들(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과 달리 미학을 심하게 결여하고 있다는 말이 나와요.2 여기서 제기되는 게 재현 방법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 미학적으로 좀더 파고들어 얘기하면 (앞서 우리가 말했던 문제와도 연결될 텐데) 결국 이 문제가 예술에 제기하는 질문은 신체의 감성적 측면(매력)과 이성의 초감성적 측면(숭고)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것’과 ‘우리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것’의 관계 설정이요. 라투르가 말하는 ‘가이아’도 굉장히 신체적·정서적 대상이면서 인간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거대한 대상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미시적인 체험과 극히 거시적인 인식을 동시에 요구하는 대상인 거죠. 아직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저도 이 문제에 대해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그 둘의 관계에서 결국 새로운 공통감각, 새로운 교양, 새로운 주체성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텐데…… 음, 이건 좀 정리해서 다음에 더 얘기해 보면 좋겠네요.

민서
네. 그런 경험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이랑 얘기해 보면 기후 문제로 이끌리게 된 계기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거기서 공통적인 어떤 감응의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이 경험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기후우울증’을 앓는 기후 운동가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어요.

기후우울증

희우
기후우울증이란 무엇일까요?

민서
그 생각이 나네요. 영화 〈멜랑콜리아〉(2012)를 보면 주인공이 처음엔 무엇도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이잖아요. 결혼을 비롯해 자기 주변 사회, 세계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뭔가 포기했거나 수동적으로 떠밀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주체잖아요.
제가 기후를 ‘앓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생각하는 바는 이런 거예요. 능동/수동이 영어로 active/passive이고 이제 그걸 명사로 바꾸면 action/passion이고요. 보통 ‘행위’로 옮겨지는 액션(action)의 반댓말인 패션(passion)이란 말은 보통 ‘열정’, ‘정열’ 아니면 기독교적 맥락에서 ‘수난’ 이렇게 옮기는데, 사실 ‘액션’이 행동 혹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함을 뜻한다면 ‘패션’은 뭔가를 감수하거나 겪어내는 거에 가깝죠. 기후우울증 역시 정적으로 가만히 있고 무기력하게 떠밀리고 이런 걸 넘어서, 겪음을 통한 존재의 변모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그레타 툰베리의 경우에는, 툰베리는 기후우울증을 앓는 페이션트, 그러니까 환자=앓는 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치지 않고 굉장히 정열적으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해내잖아요. 페이션트이자 액티비스트인 툰베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패션이라는 건, 나도 모른 채로 내 안에서 터져 나와서 나를 휘감고 내가 어딘가에 연루되게 만드는 어떤 계기인 거죠.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이-인 액션(die-in action)’ 같은 거 했잖아요.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다 같이 드러눕고. 사실 그게 패션이 함께 경험되는 과정인 거죠.
그러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 기후우울증이라는 걸 굉장히 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후변화를, 말하자면 위기로 앓으면서, 동시에 기후 운동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어떤 임상학적 의미의 우울이라기보다는 (물론 그것 때문에 정서적으로 힘들 때도 당연히 있지만) 일론 머스크가 체현하는 그런 식의 (낙천적인) 에이전시가 아니라 행성 앞에서 좀 겸허해지고 한계를 알고, 구속돼 있고, 묶여 있음을 아는. 근데 그것을 단순히 억압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겸허하지만 냉철하게 응시하는 그런 태도를 기후우울증 페이션트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듯해요.

희우
기후우울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저한테 처음 들려주신 게 민서 씨인데, 듣고 나서 보니까 동시대 문학이나 미술에서도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는 것 같이 보이더라고요. 민서 씨한테는 이미 많이 얘기했지만요. 재작년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에 대한 짧은 글을 쓰면서 (민서 씨가 김홍중 선생님과 함께 쓰셨던) ‘페이션시’ 연구를 인용하기도 했어요. 동시대 한국 시와 관련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 주제인 듯해요.
또 하나 새로운 예를 들어보자면―앓는 자, 지구생활자 얘기가 나와서 생각이 나는데―저도 추천받아서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에요. 거기서 ‘초공감능력’이라는 가상의 초능력이 나오는데요. 초능력이지만 공감 능력이 너무 극대화되어서 고통을 겪게 되는 병이기도 해요. 타인이 아플 때 자기도 정말로 아픔, 신체적인 통증을 똑같이 느끼게 되는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민서
소설에 등장한다는 그 초능력이 임상학적인 의미를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의 페이션트의 경험과 직결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그 논문3에서 짚었던 페이션트의 용례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가 “환자”라는 명사. 두 번째가 “인내하는, 참을성 있는” 같은 형용사에요. 무언가를 견디고 감수하고 참아내고 인간의 이미지가 환자라서 아마 우리가 페이션들을 환자라고 쓰는 것일 텐데 이걸 환자가 아니라 ‘감수자’나 ‘겪는 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후 운동가도 그런 점에서 페이션트인 거고요.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를 앓는다는 건, 질병이나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종의 선각先覺의 경험이기도 하죠. 아니 선‘각’자이기 이전에 선‘감(感)’자인 거죠. 감수(感受)할 때 그 ‘감’이요. 내가 무언가를 깨달아버린 순간 혹은 알게 된 순간, 혹은 무언가를 접하는 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은데, 나를 어떤 식으로 다른 존재자가 정동/감응(affect)시키는가.
이 타자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비인간 동물일 수도 있고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어떤 추상적인 인류로 표상되는 거대한 개념적 덩어리에 작용하는 위기 그 자체일 수도 있고… 그것들을 내가 접하게 되는 순간 그게 나를 어떤 식으로든 어펙트하고, 나는 어펙트 당하는 존재로 바뀌어 가는 거죠. 이런 생성의 드라마가 climate patient-climate activist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희우
네,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네요. 많은 얘기를 했는데 개인적인 얘기는 많이 못 한 것 같아요. 사실 기후우울증도…… 연구자로서 개념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이런 것 이전에, 민서 씨 본인이 앓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이걸 글로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좀 그런 심정을 민서 씨가 토로하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되기도 했거든요.

민서
저는 사회학을 공부해 왔는데, 연구자로서 스스로 갖게 되는 연구자에 대한 특정한 상 같은 게 있잖아요.
연구자는 사회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생산하는 사람이고, 이걸 위해서는 사회 세계 일부분을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하고 이제 근거로 삼아서 사회 세계는 이러이러하다라는 진술을 생산해내는 것 같은데… 이 과정에서, 사실 제가 금방 썼던 어휘들만 다시 생각해보더라도 어디론가 들어가서 무언가를 모아서 해석해서 무언가를 제시하는 사람, 이 모든 과정이 다 능동태로 돼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에는, 그리고 이걸 계속하게 되는 동기에는 어떤 ‘패션’이 있는 것 같아요.
기후우울증을 연구 주제로서 계속 봐왔지만 제 스스로의 상태를 우울이라고 명명하게 된 건 되게 최근인데요. 연구하다가 멈칫하는 순간들이 점점 많이 찾아와요. 능동적으로 계속 데이터를 모으고, 무언가 말을 보태는 흐름이 단절되는 순간들이 오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후위기라고 부르는 어떤 사태의 전개 속도랑 밀도랑 강도가 너무 높은 거예요. 기후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어떻게 진행될 지에 대한 시나리오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대로만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연구자이기 이전에 행성 거주자로서 비관적인 감정이 찾아올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이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연구라는 건, 사실은 뭐 이건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만, 사회 세계를 관찰한 결과를 성찰을 담아 공론장에 내놓고 시민들과 나누는 걸 텐데. 이게 학문이나 문학 같은 분화된 기관들의 역할일 텐데… 이게 제때, 필요한 만큼, 충분히 되고 있느냐는 의문이 들어요.
그럴 때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니까 이런 걸 하자, 하면서 힘을 얻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요. 그래도 기후변화를 진지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모종의 실천에 나서는 분들을 보면 힘이 나는 것 같아요. 그 힘이라는 게 꼭 이 연구가 유의미하고 잘 될 거야 내지는 제때 필요한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확신을 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세계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 옆에, 이 사람들이랑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가야겠다, 그럼 될 것 같다, 그런 느낌?
그 와중에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은, 기후 우울증을 앓는 사람, 자연과학자, 정책 결정자, 운동가, 펀드매니저 등등 ‘기후인’들이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거예요. 이미 객관적으로는 기후변화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어셈블리 상에 있는 이분들이, 제 연구라는 하나의 평면을 경유해서 배치됨으로써,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희우
제가 민서 씨랑 이제 만난 지 이제 10년이 됐는데, 그간 옆에서 보기에는 거의 유재석처럼 바른 사람이면서, 유능하고 스마트한 연구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런 사람이 실존하긴 하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인데요. 그런데 최근에 연구하시면서 많이 우울해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기도 했어요.
그래도 민서 씨 말대로 우울이 새로운 마주침과 주체화의 계기이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게 우리 둘에게 좋은 시간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민서
인터뷰를 하다가 당하는 입장이 오랜만에 돼 보니까 참 새롭네요(웃음).
글을 쓴다는 게, 단순히 이미 준비돼 있던 뭔가를 밖으로 꺼내는 행위가 아니고, 글을 쓰면서 저도 모르게 생성되는 게 많은 것 같은데요. 사실 글 자체가 대화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요. 누가 읽을지를 늘 생각하게 되니까요. 희우씨랑 얘기하면서 제가 겪고 있는 혼란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습니다.

(끝)

  1.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이규현 역, 이음, 2022. 73쪽. ↩︎
  2. 『녹색 계급의 출현』, 53~54쪽. ↩︎
  3. 김홍중·조민서, 「페이션시의 재발견」, 『한국사회학』, 56(1), 2021, 77-114쪽. ↩︎

매력의 두 문제

―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

매력reiz과 감동이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 그러므로 순전히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근거로 갖는 취미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1

매력charme은 관심의 일종이자, 경험적이고 “병적인” 사례를 구성한다. 이때(욕망의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을) 의지의 원칙은 대상의 향유에 의해 좌우된다. 정신은 대상의 존재로 인해 어떤 관심을 느낀다. 경험적 대상에 노예와도 같은 관심, 종속의 쾌감이 쏠린다. 이른바 ‘~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2

네 어떤 면이 도대체 내 맘을 따뜻하게 하는지
회장 비서보다 더 매력 있어
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하지만 이게 뭐야 난 네게 빠져버렸어
도대체 뭐야 날 이렇게 만든
네 정체가 뭐야 마법사? 마술사?
아님 어디서 매력학과라도 전공하셨나
어서 벗어 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악뮤(악동뮤지션), 〈매력 있어〉(2012) 가사

1. 모호성과 취약함

나는 지난 몇 년간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낯선 것,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막연한 생각 속에서 이 년 전에도 ‘매력의 경제’에 대해 썼다.3 그 글에서 나는 매력의 경제가 지적(이론적) 관심, 도덕적(실천적) 관심, 미적 관심의 ‘칸트적’ 분리가 함몰된 문화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는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가 흐려지고, 지적·도덕적·미적 관심과 육체적 자극, 성적 끌림, 경제적 이해 관심, 정념 등이 마구 뒤섞인다. 반대로 말해 매력의 경제는 주목의 흐름, 휩쓸림, 끌림, 공감, 혐오감, 수치심, 열등감이 뒤섞인 정동적 흐름을 설명하려는 동학이다.

오늘날 정치인은 선출을 통해 책임과 정당성을 얻는 대변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대중에 어필해야 하는 한 명의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이른바 ‘현실 정치’는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변해온 듯 보인다. 한국의 여러 사회적·정치적 갈등들은, 자신의 적수가 얼마나 매력 없는지 고발하고 조롱하는 전략을 발전시켜왔다. 상대편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그릇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하고, 심지어 미적으로 추하며 지적으로는 멍청하다. 이것은 거대양당이―혹은 그들의 지지자들이―서로 하고 있는 비방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 세대 갈등에서도 쉽게 관찰되는 분쟁의 양상이다. 또 어느 연예인의 도덕적 논란은, 즉각 그의 ‘인성’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그의 외모에 대한 조롱 혹은 성희롱과 뒤섞여버린다.4 이러한 고발과 조롱은 행위만을 겨냥하지 않고 존재를 사방에서 포획하기에, 훨씬 치명적인 수치심과 모멸감을 심어줄 수 있다. 즉 발언이나 행위에 대한 처벌·판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런 종류의 공격과 모욕에 매우 민감하다. “많은 학자가 동시대의 ‘젊은 세대’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오찬호, 2013) 같은 책도 있지 않았는가. 확실히 이런 세대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가 ‘냄새’와 같은 감각적 차원의 일로 번역되면 여전히 충격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불평등이나 계급성이라는 추상적 사실보다는 감각적 번역에 가장 민감한 세대일 것이다.”5 즉 이 세계에 거대하고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훗날 내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기에. 그러나 누군가―영화 〈기생충〉(2019)에서처럼―내 몸에서 나는 냄새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내 행위나 처지에 대한 비난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모욕처럼 느껴진다.

그런 모욕을 마주해서 주체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기 혐오·수치심을 내면화하거나, 〈기생충〉의 기택처럼 돌이킬 수 없는 충동에 휩쓸리거나. 그도 아니면, 모욕을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모욕이 자신을 파괴할 수 없게 자기를 배려하거나. 이 자기 배려가 우리에게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줄 것이다.

매력의 불평등은 당연히 경제적 불평등과 뗄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 둘의 관계가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아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악뮤의 천재적인 노래 가사에서처럼, 나를 홀린 사람은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 비서’만큼 유능한 사람이 아니어도 그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게다가 매력은 외양상의 조화로운 배열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크지 않은 눈 오똑하지 않은 코”). 객관적인 조건들로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이 있기에 매력은 마법이나 마술처럼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신비함과 모호함 때문에 매력은 갈급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이 끌림과 욕망의 동학은 어떤 부정적 명령도 발신한다(“비호감 티는 어서 벗어”). 이 명령은 호감과 비호감을 나누는 기준에 예민해지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열등감이나 수치심, 조급함을 주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홀리는 이 모호함을 제거할 수도 없다. 매력을 탈신비화하고 구조적으로 분석해보라. 매력에 ‘비판적 거리’를 두려고 해보라. 매력을,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와 노동을 숨기고 있는 물신fetish이라고 고발해보라. 그것은 가능하겠지만 무력한 일인데, 매력이 자본의 이차적 효과나 그 자체 ‘상징자본’일 뿐이라고, 혹은 물신이라고 파악한다고 해서 매력적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현혹이, 매력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지 무지해서 현혹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은 아우라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매력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일찍이 먼 유럽 땅의 철학자 칸트가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매력의 이러한 모호함과 변덕스러움이었다. 칸트에게 매력은 순수한 미적 판단(무관심한 관심)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합목적적 조화이지만 매력은 대상이 주체에 행사하는 지배력이다. 매력과 감동은 대상의 영향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의 취미판단으로는 부적절한 ‘야만적’ 관심, 미성숙한 관심이다.6 그러나 매력의 불순함과 모호함, 신비로움을 축출하려는 것은 그것대로―마녀사냥처럼―탄압과 억압적 안정화, 관심들의 위계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열거한 조짐들은 마치 매력이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 특히 젊은 세대에게 중요한 기제이자 기준이 되었다는 착시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면, 주체와 대상의 완고한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라는 특이한 ‘막간극’이 끝남에 따라 매력이 다시 공공연한 경험적 힘으로 부상했고, 그에 따라 비로소 비근대적인 미학이 작성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자극에 취약하고 감정적이며, 관심사들을 엄밀하게 구분할 줄 모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문학은 이 사실을 늘 말해왔지 않은가?). 단지 영역들, 관심사들의 관념적·제도적·규범적 경계가 흐려짐에 따라 이 사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배움이 매력으로부터 촉발된다고 주장7하는 것은―칸트라면 필시 ‘야만적’이라고 했을―동시대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즉 새로운 미학을 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근대적으로 규정된 아름다움, 자유, 도덕, 계몽, 성숙, 교양의 관념을 철저하게 재고해야만 한다. 매력과 순수한 취미판단을 분리하는 문제에, 칸트가 인간적이고 문명적이라 생각한 그 모든 소중한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말했듯 매력은 대상의 영향력에 종속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조화이다. 즉 매력과 아름다움의 분리는 대상과 주체의 근대적 분리와 맞물려 있다. 마찬가지로 계몽은 대상에의 의존이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를 전제한다. 또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일치’, 즉 미적 공통감각은 지적 공통감각과 도덕적 공통감각의 근거이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8

따라서 우리의 판단력이 매력에 휘둘리고 오염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적 공통감각이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이 말은 굳건한 지적·도덕적 공통감각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배움은 대상에서 주체를 분리하는 ‘선험적 형식’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경험적인 세계의 불순한 감각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촉발’된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발적으로’ 배우려 드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주체가 아님을 의미한다.9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경험적 자극들에 지적·도덕적으로 거리 둘 수 없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휩쓸리고, 방황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동시대 문화에서 매력이 갖는 중요성은 근대적 의미의 비판, 계몽, 교양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매력의 경제는 근대적 계몽의 기획이 무력화되는 문화적 조건인 동시에,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기획이 작성되는 출발점이다.

2. 교실 알레고리

나는 배움이 ‘매력과 실망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 그 연장 선상에서, 이 글에서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인 재현 논리로서 매력의 경제를 면밀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에 의해 촉발되는 배움들을 긍정하고, 보호하고, 촉진할 수 있는가? 이 이중의 과제를 위해서는 매력을 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매력의 경제학」에서 나는 ‘동시대 문화의 지배적 재현 논리’로서의 매력과 ‘감성적 배움을 유인하는 인력’으로서의 매력을 애매하게 혼동했다. 그 애매한 교착 때문에 소설들을 다룰 때도 좀 우왕좌왕했다.

조금 복기해보자면, 내가 이 문제에서 늘 참조해온 손보미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주 예민하게 감지한다. 매력의 경제를 배우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매혹과 동경, 수치심과 혐오감을 느끼며, 이 감정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품행과 감수성, 젠더 규범을 학습하도록 종용한다. 교실에는 혐오와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아이가 있고, 반대로 눈길을 끌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가 있다. 이중 전자의 경우를 보자.

그 애는 목욕을 하지 않아서 언제나 머리카락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고, 얼굴에는 언제나 버짐 같은 게 피어 있었다(그게 영양실조의 결과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다). [……] 그 애의 이름은, 그래, 고장연이었는데, 내가 여전히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반의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 애를 ‘고장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무리로부터 떨어진다면, 무리에 정착하지 못한다면 나는 ‘깨끗한 버전’의 고장연이 되고 말 것이라고.11

어떤 신체(정확히 말해 신체가 발신하는 기호들signs의 특정한 조합)를 “고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신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의미화를 둘러싼 과정이 매력의 정치이고, 교실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화자가 몸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다. 이 경제는 신체적 기호들에 차별적인 의미를 할당한다.

위 소설에서 고장연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이고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인 듯하다. 아이들은 이 사실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혐오하는데, 그 사실이 신체적 기호들(기름때, 버짐, 냄새 등)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교실의 무리들에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겉도는 화자는 자신도 비슷한 처지가 될까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 ‘완전히’ 본능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두려움은 사회적인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의 배움에서 본능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도덕적, 인지적, 정치적, 육체적, 성적 관심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를 온몸으로, 감각적으로 배운다. 바로 그렇기에 아이들의 배움은 강렬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종종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사춘기 시절 교실의 아이들은 교과서나 선생의 말보다 또래 집단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을―배운다.

이처럼, 매력의 경제는 끌림과 동경과 흥분을 낳는 한편으로 혐오감disgust과 수치심shame도 낳는다. 수치심은 죄책감guilty과 밀접하면서도 다른데, 죄책감이 행위에 대한 것인 반면 수치심은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도덕적 위반이 발생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라고 생각한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나는 잘못된 존재다’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12 혐오와 수치심은 신체적인 반응이지만,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감정(사회 질서와 도덕을 내면화시키는 감정)이기도 하다.13 혐오는 신체적 오염이나 질병을 회피하기 위해 진화된 행동 면역체계이지만, 문화적·도덕적 ‘순수성’에 집착하면서 소수자·약자를 배척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들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낄 때 도덕적으로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중 어떤 것은 농담 같은 것인데, 이를테면 방귀 냄새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타인의 품행에 대해 더 엄격한 도덕적 판단을 했다.14 이는 신체적 관심사bodily concerns와 도덕적 관심이 쉽게 호환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또 혐오감이 도덕적 엄숙주의의 형태로 표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혐오감이 행동 면역체계에서 기인한다면, 수치심은 어디서 비롯할까? 어떤 심리학자들은 ‘수치심의 기원’을 매력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찾는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매력도attractiveness는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며, 수치심은 매력도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상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15 혐오감이 오염된 것을 피하도록 진화된 심리적·신체적 반응이라면, 수치심은 자아를 오염된 것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간단히 말해 수치심은 내면에 반영된 혐오이다. 혐오가 종종 소수자와 타자를 배척하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감정이다.16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에 노출되기를 꺼리게 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매력을 낮게 평가하는데, 이 의기소침함 혹은 자기비하는 그의 매력도를 더욱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오늘날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신의 매력을 당당하게 전시하면서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17

소설과 관련해 이제 새롭게 논해보고 싶은 내용은, 손보미 소설에 그려지는 배움/성장이 매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배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화자는 실망을 겪고, 실망을 통해 배움의 경로가 매력의 경제에서 이탈하게 된다는 점이다.18 이때 실망은 어떤 대상이나 자신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 자체의 자의성과 허약함에 대한 것이다. 매력이 매력적인 대상의 본성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상황에 따라 쉽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작은 동네』에서 이러한 배움은 특히 고장연과의 관계에서 온다). 그런 실망을 겪고 나서 화자는 교실의 정치에 어느 정도 무관심해진다. 냉소적으로 될 위험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무관심은 화자가 ‘자기와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어 교실의 분위기에 덜 휘둘림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기와의 관계는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앎과 권력을 넘어서서 우리를 ‘자기’로 구성할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주체화로 해석할 수 있다.19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력의 경제에 저항하고 개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경제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삶의 재현되지 않음’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어린 화자는 작가가 된다. 즉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실망은 매력의 경제 내부에 구멍을 내고 그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배움으로 화자를 인도한다. 이렇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망한 사람은 단지 냉소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매력의 경제를 교란하고 그것에 저항할 주체성을 부여하는 그 배움이 매력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중요하다.

손보미의 소설 속 교실은 아주 구체적이지만, 그 교실의 동학, 매력을 결정하는 기준을 놓고 벌어지는 매력의 정치는 오늘날의 문화적·경제적·정치적 조건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다. 매력의 정치는 소설 속 초등학교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애 시장에서, 금융 시장에서, 현실 정치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에게 어떤 말투, 품행, 사고방식, 가치의 서열들을 가르친다. 거꾸로 말해서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所與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전시장이나 투기投機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사춘기 아이들의 교실이기도 하다. 이 은유적 교실에는 셀 수 없이 많은―매력의 정치의 입법자이자 집행자인―‘일그러진 영웅’이 존재한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존재라면, 교실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바로잡을 권위주의적 선생은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러한 선생의 회귀를 욕망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매질을 통해 제대로 된 ‘자유’와 ‘합리’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화자처럼.

따라서 나는 이러한 문화적 조건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과제를 위해 이 글에서 새롭게 주장할 가설은, 앞서 말했듯 매력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20

3. 첫 번째 종류: 재현적 매력

매력의 두 종류를 잠정적으로 ‘재현적 매력representational attraction’과 ‘감각적·정동적 매력affective charm’이라고 불러보겠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관념과 정동을 구분하면서 정동을 ‘재현되지 않은 사유’라고 했다.21 관념이 고정된 격자라면 정동은 그 격자들 사이사이에 유동하는 흐름이다.

두 종류의 매력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지적으로 분별된다면 둘은 모두 재현적 매력으로 수렴될 것이다―그것이 어떤 주체화에 관여하느냐에 따라 분리된다. 즉 동일한 대상의 매력이 재현적 매력이 될 수도 있고 정동적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전자는 추상적 기호들의 논리이고 후자는 감각적 기호들의 논리이다. 가령,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보드리야르)고 할 때의 기호는 전자이다. 반면 회화 작품 표면에서 물감층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감각적 기호(들뢰즈)로서 후자이다. 화가가 되려면 그 기호를 감각적으로 해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한다.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된 미술 작품은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준다.22 아이돌 문화 역시 두 매력의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3-1. 금융적 매력도
재현적 매력이란 수치화 가능한 것, 평가·식별·계산 가능한 것으로 ‘이미 표상된 매력’을 뜻하기도 하고 (무엇이 더 많이, 더 중요하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는) 재현의 문법을 뜻하기도 한다. 오늘날 투자자들이 어떤 대상에 투자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가늠하는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이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페어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투자 대상의 실적·신용·사회적 책임·평판은 투자를 유인하는 금융적 매력도로 환원된다.23 그에 따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생산되는 주체성은 ‘피투자자investee’이다. 국가, 기업, 스타트업 창업자, 자영업자, 대출을 받는 가계뿐만 아니라 젊은 예술가, 연구자 역시 피투자자다. 자기 프로젝트의 전시와 자신의 가치 상승24을 통해 투자(국가, 대학, 문화재단, 연구재단, 출판사, 전시기관 등의 지원)를 유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꼭 ‘돈’을 유인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주목과 관심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작업이나 자산의 가치를 상승시키려 하는 경우 우리는 피투자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피투자자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생산한다고 여겨진 ‘기업가 주체’와 다르다. 기업가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삶과 자산을 관리하지만, 피투자자는 당장의 이윤을 감축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매력도를 증대시키려 한다. 실질적인 ‘이윤’은 금융적 매력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매력도는 투자받을 가능성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매력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분투하게 된다. 페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의 대항 투기 액티비즘이 ‘무엇이 매력적인가’의 결정에 개입하는 투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5

매력도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과 주목의 흐름을 견인하는 지배적 기제이다. 페어는 감정이나 정동에 대해 주요하게 논하지 않지만, 만약 그의 분석이 타당하다면 이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혐오나 수치심도 심각하게 가중될 것이다. 매력도의 지배적 기준은―이 기준이 다원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분류들(빈곤, 신용불량, 빈약한 포트폴리오, 나쁜 평판, 낮은 생산성, 낮은 디지털 접근성, 인기 없음 등)을 끊임없이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3-2. 기호, 장르, 메타장르
이런 관점에서 매력의 경제를 기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하는 ‘장르들’의 문법, 즉 메타장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매력의 경제는 기호들이 선별·등록·재생산·유통·서열화되는 논리이지만, 그 경제는 개별적인 감각적 기호들과 직접 관계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하게 재현된 기호들의 조합combination 혹은 집합set, 즉 장르들과 관계한다.

이때 장르란 소설이나 조각, 연극과 같은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리얼리즘처럼 이미 역사화되어 패러디·전용·혼성모방되는 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어 ‘genre’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장르뿐 아니라 젠더gender나 생물학적 의미의 속(屬, genus)을 의미하기도 하고,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의성을 참조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때 그 문장은 우리는 하나의 사조가 아니다, 하나의 젠더가 아니다, 하나의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하나의 종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될 수 있다.26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코드화될수록 그 존재는 더 많이, 더 빠르게 재현·유통·패러디·모방된다. ‘뉴진스는 하나의 장르다’와 같은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장르는 기호들을 조합하는 하나의 특별한 방식으로서 (재)생산될 수 있다.

기호들은 감성적·현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신체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고 분류된 결과인 장르들은 언어적·담론적이다. 기호들은 배움의 대상이고, 장르들은 식별과 분류, 소비와 축적의 대상이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재현하는 단위이다.

동시대의 문화는 ‘삶의 장르화’를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예술의 탈장르화(예술의 삶 되기)’를 목표로 했던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과 반대되는 공식이다. 자신을 문화에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화에 의해 식별 가능한 기호의 조합을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즉 기호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장르를 생산하도록 추동된다. 간단한 예로 SNS나 유튜브, TV 프로그램에서 인플루언서가 전시하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삶을 재현하는 하나의 장르적 조합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져 광범위하게 모방·차용·전유·패러디되지만, 어떤 라이프스타일은 그렇지 못하다. 삶은 비교·평가·계산·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옷차림이나 집안의 인테리어, 운동 습관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들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성 정체성, 비건 지향, 환경친화적 태도, 정치적 실천 등 ‘진지한’ 문제들로도 구성될 수도 있다. 라이프스타일들은 문화 안에서 재현될 권리를 두고 분투하고, 영향력을 두고 경쟁한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활동가나 예술가가 SNS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공적 활동’의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많은 활동가와 예술가는 그것들을 포함하여―어투, 생활양식, 취미, 정치적 견해 등과 함께―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데, 그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일수록 그들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 영향력은 경제적 수입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냉소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팔로워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를 전파하는 일을 부정적·냉소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오늘날 어떤 액티비즘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자유주의적인 것이든, 대중적으로 되려면 그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27 물론 배움은 단지 주어진 조건을 ‘전유’하거나 ‘지양’하는 것을 넘어 저항의 가능성이 되는 어떤 주체화의 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배움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경험적 조건 속에서 시작된다. 매력의 경제 속에서 행위자들은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놓고 분투하고 또 그 기준을 시시각각 학습하며, 그 기준을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은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SNS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선 토론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만 영역마다 상이한 장르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지식인, 예술가, 활동가가 고려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는 현재 지배적으로 재현되는 매력과는 다른 매력적인 것을 제시할 수 있느냐이다. 그다음 고려할 수 있는 이론적 문제는 매력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혹은 구성적 외부), 즉 ‘정치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것’ 등이 있느냐이다.

4. 두 번째 매력: 감각적·정동적 매력

첫 번째 매력이 장르들의 문법을 관장하는 경제적 논리라면, 두 번째 매력은 장르화되지 않은 개별적 기호들의 인력이다. 이 인력은 예측할 수 없는 배움들을 유도하고, 우리는 이런 배움들을 통해 매력의 경제에 저항할 힘을 확보할 수 있다. 즉 두 번째 매력은 첫 번째 매력에 저항할 가능성이다.

감각적·정동적 매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짧게 이야기해볼 텐데, 하나는 섹슈얼리티와의 관계이고, 그다음은 배움과의 관계이다.

4-1. 매력의 성적인 토대
젊은 시절의―‘비판’을 쓰기 전―칸트는 아직 매력을 순수한 취미판단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격하하지 않았다.28 훨씬 비체계적이고 유연한 텍스트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칸트는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Das erhaben rührt, das schöne reizt)”라고 썼다.29 이 짧은 텍스트에서 칸트는 수치심이라는 “본성의 비밀”이 매력과 관계있으며, “성별적인 경향성은 여타의 모든 매력의 토대에 놓여 있”다면서 매력의 기원이 성차性差 혹은 섹슈얼리티와 불가분하다고 확언했다.30

그러나 원숙기의 칸트는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매력에 좌우되는 것은 ‘야만적’이고 ‘미성숙’한 관심이라고 규정했다. 이로부터 취미판단의 지붕 위에는 숭고가 있고 바닥 아래에는 매력이 있는 미학적 위계질서가 확립되었다.

매력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체계적으로 분리하고, 대상에의 애착attachment과 초연함detachment을 분리할 때 미학의 저택 아래로 쫓겨난 것은 육체, 수치심, 여성적인 것, 동물적인 것, 몰입, 습관,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고이다(칸트의 몇 텍스트만 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근대미학의 형성 과정 전반을 염두에 둔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이야기 서두에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기입할 때 고려해야 하는 까다로운 함의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매력에 좌우된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상처받고 방황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혹은 거꾸로 말해서 우리는 상처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매혹되는 것이다. 이 취약함의 기저에는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있다. 섹슈얼리티는 장르/젠더가 아니며, 그렇게 식별·재현할 수 없는 잔여이다.31

배움의 이야기는 복잡하게 뒤섞이는 성적 계열들을 형성한다. 배움이 없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르들/젠더들/분류들만이 있을 것이다. 배움은 한 장르의 문법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앎의 축적이지 배움이 아니다). 배움의 운동은 기호들의 새로운 연결, 새로운 마주침의 공간32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장르들의 경계를 해체한다.

4-2. 감각적 매력과 배움의 관계
칸트 이후에 ‘매력’에 다시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철학자들은 니체와 들뢰즈이다. 일단 여기서는 들뢰즈의 텍스트만을 짧게 인용해보고자 한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33

일반적인 기준에서 약점인 특징도 어떤 독특하고 우연한 조합 속에서는 강점이 된다. 누군가의 억양이나 촌스러운 옷차림, 자기비하가 그런 것처럼.

이 구절은, 기호가 조합되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현재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특징들을 매력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또한 문학에서 전시되는 수치심의 윤리적 함의를 숙고하게 해준다. 진화심리학적 설명에서 수치심은 인간 주체를 위축시키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수치심의 전시 자체가 매력적인 것, 저항적인 것, 적극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매력이 한 인물을 비인격적인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면, 들뢰즈에게 배움은 상형문자처럼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 방출하는 기호를 해독하는decoding 일이다(장르가 삶을 ‘코드화’한 것이라면 배움은 장르들을 개별적, 감각적 기호들로 ‘탈코드화’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넘실대는 물결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34 이때 수영하는 신체가 파악하는 기호들, 즉 물의 리듬, 물결의 세기, 온도와 깊이 등은 감각적인 것이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물결’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전쟁 같은 분위기’처럼 은유적으로 사용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다르게 살고 말할 방법을 실천적으로 배우려면 우리를 휩쓸어가는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캐치해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35 이런 의미의 배움은 필연적으로―숭고가 아니라―매력과 관계할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면 모든 기호와의 모든 감각적 마주침이 반드시 그 기호를 해독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기호가 우리를 감각적으로, 심지어 폭력적으로 휘어잡을 때야 우리는 비로소 배우고자 한다. 캐이팝 해외 팬들이 먼저 가사나 대사를 외운 다음 의미를 이해하듯이(그러면서 순식간에 한국어를 배우듯이). 교실의 아이들이 신체적·언어적 기호들의 의미를 해독하듯이(그러면서 그 의미화의 과정에 개입하듯이). 사랑했던 사람의 차가워진 태도가 한참 나중에야 이해되듯이. 주체를 무장해제시키고 배움을 강제하는 미학적 힘/관심이 숭고가 아니라 매력인 이유는, 숭고는 이미 세계를 ‘풍경’으로 볼 수 있는―즉 대상에 거리 둘 수 있는―주체를 미리 전제하기 때문이다.36 이런 전제는 배움이 경험적 세계에 휩쓸려 있고 얽매여 있는 아무개에게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한다는 (내가 들뢰즈에게서 가져온) 전제와는 어긋난다. 배움은 비자발적으로 발생하지만, 한번 발생한 배움의 선에 충실하면서, 그만두고 싶게 하는 유혹들, 한계들, 지배적인 기준들과의 마찰에 자신의 배움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배움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때 주체는 인격/개인이 아니라 최소한의 일관성(충실성)을 갖는 집단적 배치이며, 앎의 선험적 형식이 아니라 배움의 운동 속에서 파악된다.

p.s. 차후의 과제

우리가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지만, 모든 상처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배움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나는 정동적 배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명문화된 교육보다 그 자체로 ‘진보적’이리라는 보장은 없다(단지 더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여기서 스승의 필요성이 나온다. 즉 스승은 특정한 앎을 전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배움이 삶을 향한 배움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배움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승이 일이 (앎을 통해) 배우는 자의 매혹을 깨뜨리는 것, 즉 계몽하고 탈신비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식한 스승은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을 잘 분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는 자는 매혹과 실망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워야 하고, 이 배움의 과정이 스승의 앎보다 중요하다. 특정한 앎의 기준에 종속되어 있을 때 배움은 아직 앎에 못 미친 것, 지양해야 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움을 더 근본적인 조건으로 두면 앎이야말로 배움의 잠정적 단계들, 수단들이 된다. 가장 큰 틀에서 나의 제안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식론적 질문이지만 후자는 인식·실천·미학의 경계를 무화하는 질문이다. 앎을 통해 배움들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들을 통해 앎을 수정해야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뭍에서 수영하는 올바른 자세를 시연하는 사람은 참된 스승이 아니다. 오직 물결을 함께 해쳐 나가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많은 집회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가 울려 퍼졌는데, 집회 현장에서 듣는 그 노래는 ‘운동’의 감각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내가 중학교 때 많이 들었던―멜로디와 가사의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했다. 나는 작년 923 기후정의 행진에서 그 노래에 맞춰 친구들과 춤을 췄는데, 비록 내가 춤을 너무 못 추는 나뭇가지이긴 해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오늘날 현실 정치가 모종의 팬덤 문화처럼 되어가고 있다면, 반대로 팬덤 문화에서 모종의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특히 북미에서 BTS의 공식 팬클럽 ‘아미’가 정치적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7 최근 아르헨티나의 BTS 팬클럽은 자국의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와 강하게 대립하면서 다른 팬덤이나 야권 정치인과 연대하기도 했는데, 이런 연대를 촉발한 것은 밀레이가 트위터에 올린 BTS 비하(인종차별적 뉘앙스가 담긴) 발언이었다.38

매력의 경제 그리고 배움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문학적 사례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문단에서 많은 비평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소설의 ‘정치성’과 ‘미학성’에 대한 논쟁을 재점화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음의 두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로, 어떤 행위자들의 어떤 말과 행동이 그 작품에 대한 대중적 주목도를 끌어올렸으며, 그 책을 둘러싸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어떤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가? 고(故) 노회찬 의원이 그 책에 대해 남긴 메시지가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레드벨벳의 아이린과 배우 서지혜가 SNS에 그 책을 읽었다고 인증했다가 심한 악플 세례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화화 후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는 ‘#82년생김지영홧팅’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 영화에 대한 응원이 쏟아지기도 했다.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둘째 문제는, 여러 계기로 그 소설을 읽게 된 수많은 독자가―한국의 정치적 지형과 성차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사회 분위기, 비평적 논쟁, 사회적 논란, 반페미니즘적 비난들과 분리할 수 없는―독서 경험 속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이다. 아직 확실히 말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첫 번째 문제는 작품을 접하거나 그것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여러 문화적 자극(홍보, 입소문, 인플루언서의 추천, SNS에서의 논란 등)과 독자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문화기술지적 접근을 허용할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그러한 문화기술지를 수용하면서도, ‘우리가 작품에서 배운 것’에 대한 비평적 탐구의 가능성을 보존할 것이다. 배움의 운동은 매력을 통해 시작되지만, 매력의 경제를 초과한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흥행하지 않았다 해도 매력, 배움, 실망 등의 개념들로 읽어볼 수 있는 많은 작품이 있다. 내가 여러 번 다룬 손보미의 작품들이 그렇고, 예소연이 최근에 쓴 연작소설들39도 그러하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40 같은 작품도 그러하다. 이들을 비롯해 지금 성장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혹은 휘말릴 수 있는) 성장/도야의 방식들을 예증한다. 이런 소설들에서 우리는 니체적이라고 할만한, 약간 광적이고 ‘귀족적’인 가치전도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자기 입법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보편 이성’이 아니라 삶의 시련들―배우는 자를 광기로 몰아가는 시련들―을 통과한 자의 자기 확신이며, 이 확신이 배우는 자에게 지배적인 가치와 도덕을 괄시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들은 배움이 안온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배움의 과정은 동시에 실존적 상처의 치유와 관련된다. 배움들에 대한 다시 쓰기를 통해 인물을 짓누르던 지배적 가치들은 무의미해지고, 무가치한 시간, 유예된 젊음, 허송세월, 외롭고 비참한 순간들, 자신을 상처 입힌 진실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치유는 고통을 억압하고 적대를 숨기는 ‘치유 이데올로기’와 반대되는 것이다. 성장소설들은 우리 자신의 실존적 상처가 얼마나 많은 타자와 연루되어있는지, 얼마나 많은 폭력과 연루되어있는지 드러내는데, 이 드러냄의 과정이 곧 치유이다. 이러한 연루됨 없이는―특정한 앎의 축적은 있을 수 있어도―배움은 있을 수 없다.

잠깐 곁길로 새자면 내가 통계적으로 속한 세대(소위 MZ)의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애매한 위로가 아니라 진정한 치유이다. 즉 죄책감-원한과 수치심-혐오의 구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남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사세요’라는 위로의 말은 이미 상처받고 분열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이중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나는 왜 남의 시선을 자꾸 신경 쓸까? 나는 왜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할까?’ 이런 죄의식은 쉽게 냉소나 원한으로 전치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성인식 의례(등용, 결혼, 취업, 육아, 정치활동, 공적인 발화 기회 등)는 점점 뒤로 늦춰지거나 불가능해지고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 어른으로 정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적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상태로 유예되고, 이중화된 형상으로―한편으로는 조숙하고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로, 한편으로는 다른 이를 보살피거나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로―재현된다. 역사적으로 성장소설은 이렇게 어른도 아이도 아닌 ‘미성년 상태’41를 배움의 주체적 가능성으로 취해왔으며, 우리가 방황하거나 허송세월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정말로 중요한 배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배움이 있었음을 증언해왔다. 배움의 이론은 이러한 증언을 집단적·시대적 수준에서 보호하고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주어진 배움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게 되느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단지 재현되는 대상, 통계적 분류의 대상일 것이다. 이러한 재현/대표, 통계적 분류들―이를테면 ‘이찍남’ ‘일찍녀’―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러한 재현을 통해서는 기성 권력의 재현적 틀을 공고히 하는 갈등과 반목, 분열이 끝없이 깊어질 뿐이다.

‘세대와 배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내가 다시 다뤄보고 싶은 주제는 나 자신을 비롯해 젊은 남성들의 페미니즘적 배움에 대한 것이다.42 이미 많은 사람이 다룬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논할 수 없었는데, 매력과 배움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 선행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후에 그 문제를 별개의 글로 다루겠다.

마지막으로, 실망은 매력만큼 중요하게 이야기될 가치가 있다. (그런 이론을 정말로 구성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배움의 이론의 윤리성과 정직성을 담보하는 것은 매혹보다는 실망의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실망의 공동체’가 우리를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고, 모든 갈등이나 적대가 사라진 유토피아라는 환상을 품게 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강한 정치적 조직화를 허용하는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력에 대한 충분한 고찰을 한 다음에야 실망을 논할 수 있다는, 그렇게 차례를 지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매혹되기도 전에 실망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배우는 자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이다. 매력은 우리를 휘어잡는다. 매력의 경제는 우리를 예속한다. 그러나 매력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매혹이 실망으로 끝날지라도, 매혹과 실망을 통해 우리가 얻은 배움은 허상이 아니다. 하지만 배움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쓰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지 못한다.

  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219. ↩︎
  2.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관하여』, 문학과지성사, 2005. p. 198. ‘파토스적’이라고 번역된 pathologique를 ‘병적인’으로 수정했. ↩︎
  3.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문장웹진》, 2022년 2월호. ↩︎
  4. 안희제, 『망설이는 사랑―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오월의봄, 2023, pp. 38~40 참조. 이 책은 ‘덕질’의 경험 속에서 아이돌 팬들이 어떤 매혹과 실망을 경험하고, 윤리적 고민과 자기 배려를 하는지 알려준다. 이 책은 ‘매혹의 네트워크’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조사이기도 하다. ↩︎
  5.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
  6. 칸트, 『판단력비판』, pp. 218~19. ↩︎
  7.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년 하반기호, pp. 102~09. ↩︎
  8.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pp. 191~92. ↩︎
  9.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p. 47~50 참조. ↩︎
  10. 한편으로 이 주장이 모든 비판적 가르침/교육법pedagogy을 ‘배타적’으로 거부하면서 배움의 다양성과 수평성을 상찬하는, 듣기 좋은(기만적인) 소리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듣기 좋은 주장은 또한 비평에 어떤 급진적인 변화와 그에 따르는 대가에 대한 엄격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배움과 비판 사이에 ‘배타적 이분법’을 설정하지 않았다. 일전의 글(「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에서 나의 진단은 단순히 비판이 너무 약해져서 강해져야 한다거나, 너무 지나치므로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진단은 “‘비판이야말로 정당하고 엄정한 방법’이라는 식의 전제가 많이 약화됨에 따라 그것 자체가 비판받을 수 있게”(p. 92)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 배움을 말하는 것은, 누차 강조했듯 어떤 의미에서든 비판을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침체되고 관습화되어 힘을 잃거나, 왜곡되어 범람하는 비판이 배움을 통해 적실성을 얻고 활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판은 비판을 통해 긍정될 수 없고 배움을 통해 긍정될 수 있다”(p. 107). 다만 나는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근거로 배움을 내세웠으므로 어떤 비판적 문법이 관습화되어 배움을 경색시키는 경우라면 그 비판적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
  11. 손보미, 『작은 동네』, 문학과지성사, 2020, pp. 115~16, pp. 116~17. ↩︎
  12. John Terrizzi Jr, NAtalie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Does Shame Emerge From an Evolved Disease-Avoidance Architecture?” Front. Behav. Neurosci, 14, 2020 참조. ↩︎
  13.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참조. ↩︎
  14. Simone Schnall, Jonathan Haidt, Gerald Clore and Alexander Jordan, “Disgust as embodied moral judgment”, Pers Soc Psychol Bull. 34(8), pp. 1096–1109 참조. ↩︎
  15. J. Terrizzi Jr, N. Shook, “On the Origin of Shame”, p. 2에서 인용한 폴 길버트Paul Gilbert의 주장. 물론 매력적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진화된 ‘본능’일지라도, 무엇이 매력적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다. ↩︎
  16. 따라서 소수자는 특히 수치심에 취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인상적인 글로는 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퀴어 부정성과 시각문화』, SeMA, 2023의 「들어가며: ‘젠더 문제’」(pp. 7~15)와 「슬픈 퀴어 초상」(pp. 17~43) 참조. ↩︎
  17. 이 문제에 대한 생각에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가 많은 도움을 줬다. 아마 매력의 경제는 ‘생명 정치’와 다르면서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 같다. 푸코에게 생명 정치는 국가가 보건과 건강을 이유로―발전한 근대 의학과 촘촘한 사회 기반 네트워크,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인구’ 전체를 통치 대상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심세광·전혜리 옮김, 난장, 2012 참조). 매력의 경제는 그러한 안정적 관리를 넘어―특히 발전한 인터넷망과 SNS를 통해―어떤 존재/콘텐츠가 문화에 더 많이, 더 쉽게 재현되는지를 관장하고, 그러한 기준에 맞는 기호들의 가속화된 소비와 생산, 변덕스러운 투자를 부추긴다. 이러한 경향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전시하는 알고리즘과 그것을 활용하는 플랫폼들, 신체와 관련된 산업 복합체(성형, 피트니스, 콘텐츠, 식품 산업 등)과 체계적으로 관련된다. ↩︎
  18. 이희우,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 『문학동네』 2023 겨울호, pp. 120~38 참조. ↩︎
  19. 질 들뢰즈, 「작품으로서의 삶」, 『대담』, 신지영 옮김, 갈무리, 2023, p. 185. ↩︎
  20.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매력을 둘로 나눈다는 이 과제가 번역상의 모호함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가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미셸 페어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금융적 매력도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다.
    한국에서 “매력 자본”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이다(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이런 개념들이 지금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기묘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여러 자극과 관심이 분화되지 않은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개념 자체에 체계화될 수 없는 모호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21. 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서창현 옮김,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pp. 21~35 참조. ↩︎
  22. 하지만 두 매력 사이의 번역이 항상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젊은 화가는 당장 감각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회화 작품을 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매력적인 투자 상품이 되려면―예술가 자신의 자기 홍보, 다른 예술가나 기관들과의 네트워크 형성, 평론가들의 평가, 전시와 경매 이력, 구매자들의 입소문 등을 거쳐야 하기에―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반드시 그렇게 번역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
  23. 미셸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p. 88. 페어의 논지와 ‘피투자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피투자자의 시간』의 역자이자 사회학 연구자인 조민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페어의 주장은 명쾌하고 유익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음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할지라도, 무엇이 그러한 저항을 ‘욕망’하게 하는지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우리에게 단지 투자나 자기 홍보를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게 하는가? 무엇이 매력의 지배적인 기준을 갈급하게 좇기보다 그 기준에 저항하기를 욕망하게 하는가? 한마디로 어떤 과정, 어떤 사건, 어떤 마주침이 우리에게 그러한 저항적 주체성을 부여하는가? ↩︎
  24. 미셸 페어,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욕망」, 조민서 옮김, 『문학과사회』, 2023년 봄호, pp. 358-81. ↩︎
  25.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p.56. ↩︎
  26.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장르’는 리오타르가 이야기했던 ‘담론들의 규칙’과 밀접하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한 담론의 장르 안에서는 재생산·호환·유통·소통이 쉽게 일어나지만 상이한 장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쟁론’이 벌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장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대서사, 즉 최상위의 메타장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참조). 그런데 사실 장르의 문법들을 결정하는 상위의 메타장르는 존재한다. 그것은 금융자본주의이고, 나는 매력의 경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다. ↩︎
  27.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저항이 쉽게 ‘콘텐츠’가 된다(혹은 상품화된다)는 식의 비판이야말로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콘텐츠화’ ‘상품화’, ‘식민화’, ‘포섭’ 따위를 말하려면 그 전에 그런 것들에 의해 침해되지 않았던, 순수한 지성이나 실천의 영역, 혹은 미적 영역이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공부하고, 말하고, 저항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조건에는 애초에 그런 순수성이나 영토적 경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매력의 경제는 지적이기 이전에 정동적인데, 이런 정동적 차원을 배움·교양의 동시대적 조건으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지식인에게는 그런 감정에 휩쓸린 사람들이 ‘반지성주의’에 빠진 바보들이나 괴물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바로 그 ‘야만적’인 차원 속에서 다른 배움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느냐이다. ↩︎
  28. 『판단력비판』, 백종현의 56번 역주(p. 218) 참조. ↩︎
  29. 임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재준 옮김, 책세상, 2019, p. 16. ↩︎
  30. 같은 책, p. 66, p. 67. ↩︎
  31. 알렌카 주판치치, 『왓 이즈 섹스?』, 김남이 옮김, 여이연, 2021, 특히 3장(pp. 72~143) 참조. ↩︎
  32.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73. ↩︎
  33. 질 들뢰즈,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2021, pp. 14-15. ↩︎
  34. 들뢰즈, 『차이와 반복』, p. 72. ↩︎
  35.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3, p. 50. ↩︎
  36. 칸트, 『판단력비판』, pp. 275~77 참조. ↩︎
  37. 김영화 기자, 「전 세계 풀뿌리 운동 에너지원 BTS 팬덤 ‘아미 액티비즘’」, 시사IN, 2022.08.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128 ↩︎
  38. 조성호 기자, 「BTS·테일러 스위프트 팬, ‘아르헨의 트럼프’ 집중포화」, 조선일보, 2023.10.31.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mideast-africa-latin/2023/10/31/TDUXWIPG2BCPDJMOMZ3RHK4OZ4/ ↩︎
  39. 예소연, 「아주 사소한 시절」, 『현대문학』 2023년 6월호, pp. 54~80; 「우리는 계절마다」,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pp. 308~28. ↩︎
  40.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pp. 273~312. ↩︎
  41.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 대립시켰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 28 참조. ↩︎
  42. 나는 지금으로부터 칠여 년 전에「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의 진단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모순(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에서 기인한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성의 특정한 환상―즉 여성혐오―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불거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젊은 남성들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을 대안으로 주장했다. 그 글은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법을 과장되게 모방하고 있는데, 현재 나는 그런 이데올로기적·구조적 분석보다 집단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배움들에 더 관심이 있다. 이휘웅,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 《월간 틀》, 2017년 11월호. ↩︎

장르와 수동성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한 노트

*웹진 《믿미》에 발표한 「수동성과 장르의 폭발」(2022. 9)을 소폭 수정하여 옮김.
https://artsoonhwanro.com/?p=3190

1.

인도 출신의 작가이자 저술가인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근대 소설의 역사 전체를 ‘인류세’ 혹은 ‘홀로세(Holocene)’와 관련해 매우 대범하게 분석한다. 고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규범이나 개연성(있을 법함, probable)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홀로세의 기후 안정성, 자연을 예측·계량·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서구 근대적 사고방식을 전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 소설은 “인간 문명을 꽃피우게 한 시기―즉 홀로세―에 누린 기후 안정성을 토대로 구축”되었으며 “부르주아적 질서의 현실 안주와 자신감”을 동력으로 발전했고, “자연을 온건하고 질서 정연한 것으로 가정”하는 “‘근대적’ 세계관”을 전제하는 것이었다.1

고시의 글쓰기는 다채로운 맥락들을 흥미진진하게 누비면서 이리저리 비약하기도 하지만, 그 책의 1부를 꼼꼼하게 읽은 독자는 선명하게 나뉜 두 개의 계열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적이고 근대적인 ‘순수 소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비인간적이고 비주류적인 ‘장르 소설’이 있다. 즉 ‘근대 소설-순수 소설-개연성-인간 중심주의-서구 중심주의-부르주아적 질서-연속성-유한성’의 계열이 있고, 반대편에 ‘장르 소설-비주류 영역-비인간-비서구-불연속성-언캐니(uncanny)의 계열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이렇게 이분화된 계열이 전제되어 있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비인간을 다룬 글이 쓰이고는 있지만, 그것은 순수 소설이라는 대저택 내에서가 아니라 추방당한 공상과학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등이 기거하는 비주류 영역에서다.”2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비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외적인 작품들은 근대 소설의 대저택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물론 고시가 옹호하는 것은 후자의 계열이다.

서구 근대 소설의 역사와 인류세, 인간 중심주의를 연관 지어 사고하는 고시의 도발적인 주장은 시사점이 많다. 하지만 위의 단순한 이분법에 여러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의문은 이 구분으로 포착할 수 없는 문학작품이 많다는 데서 온다.

이를테면 이시구로의 소설은 위의 이분법적 구분을 가로지르는 예다. 이시구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라는 근대 소설의 전통적인 규범에 충실한 작가다. 고시의 말마따나 그것은 연속성과 유한성, 예측 가능성을 전제하는 서구 근대 소설의 보수적인 규범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에서 과도한 사실성, 개연성,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는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들, 복제 인간이나 인공 친구(artificial friend, AF)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가장 외부자적인 인물들, 예외적인 존재들, 비인간들이 친숙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존재들이 괴이하고 신비로워서가 아니라, 너무 친숙하고 평범해서 ‘언캐니’하다.

‘언캐니’는 하이데거나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영어로 옮긴 것으로, 한국어로는 ‘친밀한 낯섦’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 기이한 감각은 너무 낯설기만 하거나 익숙하기만 한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문득 낯설게 행동할 때, 혹은 낯선 존재가 갑자기 너무 익숙하게 다가올 때 느껴지는 소름 돋는 감각이 ‘언캐니’다.

따라서 ‘언캐니’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익숙한 것이 너무 낯설어지는 방향이다. 예를 들어 인간인 화자가 벌레가 되는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방향이다. 둘째는 낯선 것이 과도하게 친밀해지는 방향으로, 『나를 보내지 마』가 복제 인간을 그리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은 비인간 존재를 인간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 자체가 폭발하는 것 같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특질과 관념 전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시구로의 소설은 장르적 요소와 설정을 ‘순수 소설’의 문법 속으로 너무 깊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순수 소설의 관념이 폭발하는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근대 소설’, ‘순수 소설’ 자체가 순수 혈통이 기거하고 높은 벽으로 담을 지은 대저택이 아니라 이미 장르들의 복합체와 혼종체(hybrid)로 가득한 오래된 숲이라는 것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온갖 장르적 성분들로 직조한 얼룩덜룩한 직물이다. 이 직물 속에서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의 경계는 전혀 뚜렷하지 않다. 사실 ‘순수 소설’과 ‘장르 소설’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동적으로 교류하고, 경쟁하고, 명멸하는 장르들의 생태계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프레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고시의 주장에 대해 드는 두 번째 의문은 ‘근대 소설’이라는 범주 자체가 따져 보면 일관성이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가령 카프카는 서구 근대 소설사에서 기념비적인 중요성을 부여받은 작가이지만, 그의 소설은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성을 보여주고, 비약적이며, 『프랑켄슈타인』 못지않게 ‘언캐니’하다. 동시에 카프카의 스타일은 차용·모방·패러디 가능한 문법화된 장르로 자리 잡았다(이시구로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카프카적 스타일도 차용·모방·오마주 가능한 문법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복제 인간의 클리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르적 성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를 따라 말하자면, 카프카의 작품이 갖는 생성(becoming)의 힘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재현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역사적 재현은 항상 어떤 작품에 고정된 위상, 가치, 범주, 스타일을 부여하려 하지만 작품이 갖는 생성의 힘은 가능한 한 그러한 고정성을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도 그것의 위상과 이름과 역사적 분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문학 텍스트가 갖는 생성의 힘, 지금 우리에게 생생하게 말을 거는 그 힘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은 ‘근대 소설’이나 ‘주류 소설’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장르 소설’이나 ‘비주류 소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전복적 읽기가 둘 사이의 낡은 위계적 이분법을 역설적으로 보존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재현적 범주를 뒤집기는 해도 그 낡은 범주의 경계를 해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낡은 이분법은 동시대 독자들의 독서 경험과 이미 얼마간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장르 소설, 웹 소설, ‘순수 문학’을 가리지 않는 잡다한 독서 경험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끌리는 것을 선택해서 읽고, 작품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주류 문학과 비주류 문학을 나누는 구조적 차이들, 이데올로기들, 장치들이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을 없는 셈 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한 구분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우리의 독서 경험에 좀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표면적으로 보면 이시구로 소설의 궤적은 주인공들을 점점 더 철저하게 ‘고아’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 『우리가 고아였을 때』,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초·중기 소설에서는 평생 지켜온 가치관이 붕괴하고, 삶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는 인물들이 나온다. 어쨌든 그들은 인간이고, 인간인 만큼 부모가 존재한다. 초·중기 소설에서는 ‘부모’로 상징되는 법, 의미, 기억, 가치 등이 있었지만 산산조각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부모가 없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은 인간에게 장기 기증을 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할 운명이다.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아이를 돌보는 AF로서 한 아이를 위해 헌신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운명으로부터 불쑥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전 소설들의 주인공이 실존적으로 고아가 되어간다면,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이미 고아다.3 초·중기 소설의 목적지였던 곳이 최근 소설에서는 출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초·중기 소설에서 인간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충실했으나 자신의 신념에 배반당하고, 자신의 삶이 부정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파괴되고 공허해진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초·중기 소설에는 패턴처럼 반복되는 인식의 변화가 있다. 처음에 인물들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상황에 수동적으로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사실을 뼈아프게 알게 된다. 그런데 『나를 보내지 마』와 『클라라와 태양』의 주인공들은 수동성을 기본값처럼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궤적을 염두에 두면 이시구로의 소설이 점점 더 소수적인 존재 혹은 체제의 외부자(outsider)에 주목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시구로는 자기 소설의 인물들이 외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수(major)’에 속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제 소설의 인물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외부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 두 번째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은 그 사회와 그 세대에서 다수에 속하는 인물이고, 이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비극입니다. 그는 전쟁 중의 그 세대와 시기에서 외부에 서 있을 만큼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조류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다소 이상한 공동체에 속해 있긴 하지만, 그 공동체의 대다수에 속하고, 공동체의 외부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주어진 일에 매우 수동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상황의 외부에 서 있지 못합니다.”4 여기서 우리는 소수와 다수에 대한 전도된 이해를 본다. 대다수 사람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자신의 계급과 처지를 받아들이고, 체제와 규범에 맞추어 살아간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극소수다. 그렇기에 극도로 수동적인 존재를 그림으로써 우리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 예외 상태가 곧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 “헐벗은 생명”(아감벤)이 모든 생명의 보편적 상태가 되는 전도가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중요한 점은 그들이 반항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기[기증] 때문에 도살되는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우리 대부분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원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은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사람들이 필멸적인 존재라는 것,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죽는다는 것,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5

이시구로의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우뚝 서서 세계와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그러한 근대적 주체의 삶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평범한 삶은 ‘세계-속의-삶’, 세계의 온갖 법칙과 변화에 수동적으로 영향받는 삶이다. 그래서 이시구로의 인물들을 놓고 누군가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기도 한다.6 그러나 이시구로의 소설들이 그려온 궤적을 보면, 소설이 일관되게 천착하는 것은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조건―혹은 생명 일반의 조건―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그 가혹한 조건의 메타포가 되는 것이 ‘고아’이다. 부모 없는 존재들, 타자의 처분에 수동적으로 내맡겨진 존재들,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들, 즉 복제 인간이나 AF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보여주는 형상으로 그려지면서 인간과 비인간, 장르 소설과 순수 소설의 경계가 폭파되고 익숙한 관념들이 낯설어진다. 가장 약하고, 비인간적이고, 장르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3.

사실 ‘수동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시구로의 소설은 정치적 무기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고, 주체적으로 체계를 변형시키고, 체제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그러한 태도 자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로 읽힐 수 있다. 이 수동성을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적 모순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한층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생태사회주의자인 제이슨 W. 무어는 근대의 자본주의 체제가 자연, 생명, 돌봄, 노동 등을 저렴하게 착취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7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인간 문명의 저변에서 생명과 돌봄에 드는 노동력을 순순히 착취당하듯이 근대 자본주의는 ‘자연(그리고 근대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동일시한 것들: 가령 여성, 유색인종, 동식물)’을 수동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으로 외부화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동적인 존재들, 즉 ‘자연’과 동일시된 존재들은 오랫동안 역사나 담론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수백 년간 밀어붙인 ‘발전’과 ‘성장’의 폐해를 마주하고 있다. 기후재난, 환경 오염, 에너지 고갈 등의 문제 말이다. 그런데 문제의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이시구로의 말처럼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오늘날 인간 존재는, 능동적으로 상황을 개척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당황하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을 닮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한편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존재와 상태를 깊이 사고해야 함이 마땅하다. 또 우리 자신이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 즉 생명의 그물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지구적인 문제에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개입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가로지르고 해체해야 하는 것은 ‘능동성’과 ‘수동성’의 이분법 자체인지 모른다. 우리는 ‘자연’과 ‘세계’를 대립적으로 마주하는 단독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인, 사물, 자연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체이자 혼성체이며,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페이션시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의 주목할만한 논문을 읽었다.8 그 논문은 주체, 행위자, 능동성이 아니라 ‘페이션시(patiency)’, ‘감수자(感受者, patient)’, 수동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감수자’는 ‘행위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영향을 끼치기보다 영향을 받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논문의 저자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이론은 지나치게 ‘행위자 중심적’이었다. 행위자만큼이나 중요한 감수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행위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의 영향을 받는 존재도 반드시 있다는 점에서, 이 편향된 이론적 관심은 잘못된 것이다. 존재의 절반에만 이론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능동적 행위자를 주인공으로 여겨왔다. 사실 이 점은 ‘순수 소설’에서나 ‘장르 소설’에서나 거의 매한가지다. 보통 SF나 디스토피아 소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통쾌하게 성공하건, 비극적으로 실패하건, 적당히 타협하건 어쨌든 저항하려고 한다. 우리는 디스토피아적 배경에서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거나 주요한 인물로 나오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대를 배반하려는 듯이 이시구로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즉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인물들,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 인물들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인물들이 디스토피아 장르의 주인공이었던 경우가 많이 없었던 만큼 이시구로 소설의 주인공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수동성’을 무기력이나 패배주의로 읽는 것은 너무 단순한 독해일 테다. 그런 독해를 피하기 위해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타나는 ‘수동성의 주체성’을 간략히 짚어보려 한다.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이 말하듯이 수동성은 어떤 종류의 전도된 힘일 수 있다. 감수성도 하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감수성이야말로 ‘생성’과 ‘배움’, ‘접속’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고 열이 날 때 피부가 예민해지는 것처럼, 바람과 온도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는 약해질 때 동시에 강해지기도 한다. 이시구로 소설의 모든 인물은 상황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만, 그렇다고 그 인물들이 다 같은 의미를 띠는 인물들인 것은 아니다. 운명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듯, 수동성에도 여러 결이 있다. 특히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는 전적으로 순응적이지만, 이시구로의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보다 강해 보이기도 한다. 클라라는 환경을 예민하게 감응하고, 세계를 관찰하고 배운다. 자연 속에서 터전을 꾸리는 동물들처럼 목표를 설계하고, 끈질기고 기민하게 수행한다. 클라라가 세계를 배우는 방식은 세계를 ‘감수(感受)’하는 과정 그 자체다.

4.

“클라라,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매니저는 로사나 다른 에이에프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네.” 매니저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걸 알아야 해. 우리 매장은 아주 특별한 곳이야. 세상엔 너나 로사나 여기 다른 누구를 친구로 갖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이 아주 많아. 그 아이들은 너를 가질 수가 없어. 그래서 창으로 다가와서 너를 가졌으면 하는 꿈을 꾸는 거야. 그러다 보면 슬퍼지지.”
[……]
“그런 아이는, 에이에프가 없으니 틀림없이 외로울 거예요.”9

세계를 ‘배우는’ 클라라의 감수성 덕분에 소설 속 세계의 부조리한 전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독자는 초반부에서 극심한 빈부격차와 나빠진 날씨가 소설의 배경으로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는 현재보다 더욱 완고해진 불평등이 그려진다. 아이들은 ‘향상’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로 나뉜다. 정확하게 그 과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향상’은 엄청난 비용과 부작용의 가능성을 무릅쓰는 것으로, 상류층 아이들에게만 가능한 과정인 것 같다. 또 대체로 명문대나 좋은 직장은 ‘향상’된 사람들만을 받아주고 있는 것 같다. 클라라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조시의 AF가 되어 조시와 ‘향상’되지 않은 옆집 아이 릭의 관계를 관찰한다. 릭은 향상되지 않은 상태로 대학에 진학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인다. 소꿉친구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한 조시와 릭은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 세계에 레지스탕스처럼 저항하는 세력이 있음이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암시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은 먼 배경으로 물러나―특이한 소수의 행위처럼―흐릿하게 암시될 뿐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가 사는 세계만큼이나 암울하고 냉정하다.

이렇게 암울한 세계를 클라라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기이하게도, 조시의 어머니는 클라라에게 조시를 모방하라고 명령한다. 클라라는 명령에 따라 조시를 따라한다. 이때 클라라가 지닌 뛰어난 감수성은 모방의 능력으로 변모한다.

“잘한다. 정말 잘해. 그러면 이제 움직여 보렴. 뭔가 해. 계속 조시인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 좀 보여 줘.”
나는 조시처럼 웃으며 구부정하고 편안한 자세를 했다.
“잘한다. 이제 무슨 말을 해 봐. 말 좀 들어 보자.”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아니. 그건 클라라잖아. 조시처럼.”
“안녕, 엄마. 나 조시야.”
“좋아. 더 해 봐. 어서.”
“안녕, 엄마.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맞지? 나 여기 왔는데 괜찮잖아.”10

‘어머니’가 조시를 따라 하라고 시키는 이유는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유는 나중에야 밝혀지는데, 어머니는 ‘향상’의 부작용으로 병든 조시가 죽으면 클라라를 조시와 똑같이 생긴 장치에 옮겨 담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 조시 없이 살아갈 자신(조시를 애도할 자신)이 없기에 아이의 복제물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클라라는 조시를 훌륭하게 모방한다(이 얼마나 ‘언캐니’한 모습인가). 그러나 동시에 클라라는 이러한 수행이 결국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라라는 조시가 완쾌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시가 완쾌할 거라는 클라라의 확신은 맹신이나 광신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인다. AF는 햇빛을 양분 삼아 기동하는데, 클라라는 햇빛이 자신을 강하게 해주는 것처럼 조시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이 조시를 마음에 들어 하면 조시에게 기적을 베풀어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태양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클라라는 공해를 생산하는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태양의 마음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할 법한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태양에 말을 거는 클라라의 엉뚱한 수행 덕분인지 조시는 정말로 건강해진다.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AF의 ‘초지능’이 인간이 원리를 알지 못하는 기적 같은 일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클라라를 제외한 소설 속 인간들이 날씨가 생명과 건강에 미치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비인간 클라라만이 인간이 얼마나 주변 환경에 ‘영향받는’ 존재인지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 인과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므로, 클라라가 수행한 희생이 실질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실질적인 보상이 없는,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클라라의 헌신을 보여준다.

클라라가 조시의 건강을 위해 바치는 헌신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만큼 인과관계를 벗어난 주체적 행위처럼도 보인다. 인물들은 상황의 인과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클라라는 인과관계를 벗어나 정말로 무언가를 ‘한다’. 클라라는 조시를 위한다는 자신의 정해진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인간적인 정도의 순응성이 오히려 이상하게도 클라라를 주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클라라와 태양』은 수동과 능동의 구분 자체가 와해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클라라의 수행은 어머니와의 계약관계 속에서 수립되는 것이 아니다. AF에게 주입된,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는 원칙을 자의식 없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AF가 인간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고, 또 클라라가 매우 독특한 AF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클라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명령은 따르지 않고 거부하기도 한다. 게다가 클라라는 자신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아이 중 조시를 스스로 선택했다.

조시의 어머니가 클라라를 구매하면서 원했던 것은 클라라가 조시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조시가 죽은 후 클라라가 조시의 대리물로서 자기 옆에 있기를 바랐다. 자기 보존 욕망을 따른다면, 어머니의 바람대로 되는 편이 클라라에게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조시가 낫기를 바라고, 나을 거라고 확신하며, 조시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한다. 자신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헌신한다는 점에서 클라라의 생각과 행동은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에게 낯설다. 클라라가 수행하는 것은 누군가 알아주고 보상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희생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합리적인’ 인간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클라라와 태양』의 온갖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과 말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클라라의 확신과 희생뿐이다. 나머지 인간의 말과 행동은 상황의 인과관계 속에 붙잡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클라라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p. 442). 그러나 이것은 클라라의 겸손한 표현인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아주 특별한 무언가’로 만드는 것은 인간들―특히 부모자식 간의―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클라라 자신의 확신과 희생이다.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비인간 클라라의 삶 속에 특별함이 있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 인간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친밀한 낯섦을 지닌다면, 클라라는 인간과 비인간, 수동성과 능동성, 지혜와 어리석음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숭고함을 지닌다. 이 ‘숭고함’은 인간적인 것일까 비인간적인 것일까? 알 수 없다. 그것은 ‘숭고(sublime)’라는 말 그대로 낯설고 절대적이어서 상대적인 구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p. 35. ↩︎
  2. 같은 책, p. 95. ↩︎
  3. 박선주는 철저한 외부성인 동시에 인간의 근본 조건이기도 한 ‘고아’의 개념을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과 연결지어 자세히 분석한다. 다음 논문에서 박선주는 “인조인간이야말로 ‘고아’라는 정체성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온전히 전유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박선주, 「인조인간, “헐벗은 생명,” 포스트/휴머니즘: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카즈오 이시구로의 『날 보내지 말아줘』에 나타난 고아와 인간」, 《역사와 문화》, 24, 2012, pp. 129-152. ↩︎
  4. Sean Matthews “’I’m Sorry I Can’t Say More’: An Interview with Kazuo Ishiguro” Kazuo Ishiguro: Contemporary Critical Perspectives. Continuum: London and New York, 2009, p. 115. ↩︎
  5. lbid, p. 124. ↩︎
  6. 김남주 해설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2010, p. 306 참조. ↩︎
  7.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자본의 축적과 세계생태론』,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참조. ↩︎
  8. 김홍중·조민서, 「페이션시의 재발견―고프만과 부르디외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5(3), 2021, pp. 35-65. ↩︎
  9.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홍한별 옮김, 민음사, 2021, pp. 22-23. ↩︎
  10. 같은 책, pp. 159-160. ↩︎

거대한 바람과 접이식 지도

사회학 연구자 조민서와의 대화 1부

1부: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피투자자라는 형상/매력의 경제학/『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2부: 기후-금융?/기후위기의 재현/기후정의 행진/기후우울증

희우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지요?

민서
네. 연초에는 독감 때문에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한결 낫네요. 우리가 평소에 얘기를 많이 하니까 이런 자리가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희우
예, 좀 낯설고 두근두근거리는 자리네요.
민서 씨는 작년 화제의(?) 책인 『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하기도 했고 여러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 중이시지요. 제가 사회자처럼 민서 씨 경력이나 이력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도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서
이런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 희우 씨는 제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분이고, 또 우리가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재밌는 얘기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런 대화가 좀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아직 학위 과정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소개하려면 뭔가 고정되어있어야 하는데, 저는 지금도 계속 흔들리면서 바뀌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라고 소개하는 게 아직 좀 어색한 것 같아요.

희우
그럼 이 얘기부터 해주세요. 어떤 걸 공부해오셨고 어떤 연구들을 하셨는지, 하고 있는지……

민서
네. 저는 학부 때부터 사회학을 전공해왔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사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전개되면서 이 모순이 위기로 표출되는 과정, 특히 이 과정에서 인간·비인간 존재들의 안정(security)이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정치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사회보장을 둘러싼 복지정치, 그리고 생태위기 시대 기후정치 쪽에 관심이 있어요. 둘 다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어떤 ‘보장’의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치와 관련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구요. 그 교차점에서 작년에 리시올 출판사에서 미셸 페어(Michel Feher)의『피투자자의 시간』을 번역했어요.

희우
먼저 석사 논문에서의 연구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해주실래요? 복지정치 관련해서…

민서
복지정치랑 관련해서는 서울시 청년수당,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어요. 소위 국가 경제에 기여해야 하는 주체로서의 청년이, 국가로부터 어떤 ‘돈’을 받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과정을 본 건데요. 이런 정책들을 형성하고 집행하는 정치인, 공무원 같은 사람들, 당사자인 청년들, 운동가들,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이 ‘돈’의 도덕적·문화적인 의미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고 논쟁되는지 봐왔습니다.

희우
한 사안에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오신 것 같아요. 기후 관련 연구도 금융 쪽을 주로 보시지만 작년 기후정의행진에서 관계자로 일을 하시기도 했지요.

민서
네. 작년 923 기후정의행진의 경우에는, 행진 참가자들, 참가 단체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기획팀에서 담당했고요. 이것도 나중에 얘기를 더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923 기후정의행진은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기후 정치와 관련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 참여했던 사람들이 행진이라는 집합행동을 어떻게 경험하고 결산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데이터를 정리한 것이죠.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해

희우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들어보기로 하고, 일단 번역하신 책에 대한 얘기부터 해봐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책을 번역하게 되셨는지,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어떠셨는지 얘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서
사실 제가 번역은 완전 처음 해봐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깨달은 것도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번역이 아니었다면 알기 힘들었을 것 같은 출판의 단계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식의 유통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충만한 경험이었어요.
책을 옮기게 된 계기는… 이 책에 재밌는 포인트들이 워낙 많지만, 저한테 가장 중요했던 지점은 이 책이 동시대 자본주의의 지형을, 금융화 이전의 자본주의와 대비하면서, 그 역사적 차이를 포착하는 개념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제공해준다는 점이었어요. 책의 목차를 보면 챕터별 소제목이 전부 A & B 식으로 짜여져있는데요.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A는 산업자본주의와 여기에 대한 정치에서 중요했거나 혹은 이걸 소묘하기 위한 개념들의 계열이고, B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에 대응합니다. 저자의 진단에 당연히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A와 B를 이렇게 각각 일관된 그림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읽어낸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A가 무효화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왜 B라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한지. 특히 제가 관심이 있었던 복지국가, 복지정치처럼, 누군가는 ‘진보’와 동일시하는 어떤 정치적 유산―구체적인 제도, 정치적 상상, 전제들―에 B라는 새로운 현실 인식이 어떤 과제들을 제기하는지를 사고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희우
저도 그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에게 재미있게 읽힐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왜냐면 책이 좀 어렵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제 주변에서 재밌게 읽었다고 하고 관심을 표하는 분들도 꽤 있었어요. 그 책을 2023년 ‘올해의 책’으로 꼽는 분들도 있었고……

민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말 너무너무 기뻤어요(웃음). 희우 씨 본인이나 주변 분들은 어떤 포인트를 좀 재미있게 읽으셨던 걸까요?

희우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꼼꼼히 읽을수록 논의가 정치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어요. 특히 제가 흥미로웠던 건 ‘인적자본’에 대해서 그 책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거예요. 국가가 생산하려 하는 인적자본의 형상이 유순하고 성실한 노동자였다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가로 변했다는 게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인데, 페어는 금융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주체성이 ‘기업가’보다는 ‘자산관리사’ 혹은 ‘피투자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좋은 점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어떤 개탄이나 푸념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어떤 전망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책의 내용에 대해 좀 얘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먼저 책이 어렵기도 하고, 여러 가지 논의가 다층적으로 돼 있으니까 번역자로서 책 요지를 간단히 안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민서
간단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먼저 책 제목에서부터 출발해 보자면요.
제목에서 “피투자자(investee)”라는 건 투자를 당하는 자, 그러니까 투자를 받는 존재죠. 이 ‘피투자자’라는 형상을 이해하기에 앞서 부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국어 부제를 ‘금융자본주의 시대 새로운 주체성과 대항 투기’라고 옮겼어요. 금융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시대에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 주체성에 근거해서 금융자본주의에 맞서는 어떤 식의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항 투기’라 불리는 전략을 제안하는 거죠. 한국어 부제는 제가 이렇게 달았습니다만, 여기 차마 넣지 못한 프랑스어 부제도 중요합니다. 프랑스어 부제(“Essai sur la nouvelle question sociale”)는 직역하면 “새로운 사회 문제에 대한 에세이”인데요. 여기서 ‘사회 문제’라는 말을 조금 설명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사회 문제라고 생각하면 빈곤, 범죄, 고령화, 환경 문제 같이 사회적으로 problematic한 문제들, 해결을 요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이 말하는 사회 문제는 social problem이 아니라 ‘social question’이에요. question도, problem도 우리말로 ‘문제’로 옮겨질 때가 많은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게 다소 차이가 있어요. question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뚜렷한 답은 없지만 계속해서 잠정적인 해답(answer)만이 조금씩 나올 수 있을 뿐인 ‘질문’이고, problem은 1+1은 뭐냐, x+1 = 2에서 x는 뭐냐는 것처럼, 구체적인 해(solution), 어떤 ‘솔루션’을 통해 해소,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과제’에 가까운 것이죠. social question이라고 했을 때 서구권에서 많이 얘기하는 맥락은, 자본주의가 모종의 문제/질문(question)을 낸다는 거예요.
그 질문이 뭐냐면,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상정하지만, 우리는 모두 현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평등과 자유’의 의미가 얼마나 굴절되어 협애하게 나타나는지 알고 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는 결국 우리의 노동력을 거래할 자유이고, 우리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고요. 헌법이나 인권 선언 같은 텍스트에서 이야기하는 이 자유의 이념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양극화니 ‘~계급론’ 같은 말들에 담겨있듯이, 극단적인 불평등 앞에서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지지요. 곧 이런 형식적인 평등과 내용적인 불평등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게 social question, 사회 문제인 것이죠.

희우
그렇군요. 요지를 정리해보자면 ‘사회 문제’란 일종의 자유주의의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런 괴리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이죠.

민서
그렇죠. 그게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회 문제’의 통상적인 용법이에요.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오는 과정,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고, 이 과정에서 착취가 발생하고… 그런데 페어는 이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던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바라보았던 틀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회 문제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제기된다고 보는 거죠.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적대는 자본과 노동, 페어의 표현대로라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적대였어요. 그렇다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적대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했을 때, 투자자랑 피투자자라는 것이죠.
피투자자가 누군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거는 투자를 받기 위해 자기를 어필해야 하는 존재들, 가령 스타트업 창업자를 떠올릴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스타트업 창업자만 그런 게 아니고, 따지고 보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우리 둘도 그렇고, 예술가와 연구자들도 끊임없이 자기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유망하고 의미가 있는지 증명해서 그걸 잠재적인 후원자들(국가가 될 수도 있고 문화재단이 될 수도 있고 학술진흥재단이 될 수도 있는)에게서 크레딧을 확보해서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과 동반되는 어떤 매력도와 평판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들인 거죠.
그래서 ‘매력도’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 신용의 흐름을 끌어당겨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도 피투자자고, 예술가와 연구자뿐만 아니라 플랫폼에서 뭘 파는 사람들, 당근마켓이건 에어비앤비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해서 자금의 흐름과 주목의 흐름을 유인해야 하는 사람들도 피투자자죠. 투자를 받기 위해 주가를 관리하는 기업, 채권을 발행해서 재정을 운용하기 위해 국가 신용도를 관리하는 국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페어는 등급 평가를 당하고 투자를 당하는 존재 일반, 즉 개인과 국가, 가계, 기업을 모두 아우르는 어떤 주체성이 ‘피투자자’라는 거죠. 그게 이제 새로운 사회 문제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겠죠.

희우
네. 정리 감사합니다.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논지가 과거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있었던 사회 문제의 전선이 이제 투자자와 피투자자 사이로 옮겨온다는 것이고, 그래서 페어는 그런 과거와 현재의 ‘유비 관계’ 속에서 계속 논의를 진행하잖아요. 이 유비 관계가 좀 흥미롭습니다.
과거의 노동운동에서, 피고용인들도 자신을 ‘자유로운 노동자’로 정체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위치를 투쟁을 위해서 전유했다는 것이죠. 이중의 전략이 있었다는 거죠. 그와 똑같은 형식으로, 사실 우리가 자유롭게 투자를 하거나 받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이렇게 주어진(소여所與된) 피투자자의 조건을 저항을 위해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이 페어의 전제인 것 같습니다.

민서
네. 이걸 책에 수록된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문학과사회』작년 봄호에 페어 글에 대한 해설로 수록한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짚었는데요. 사실 그 전략, 소여 혹은 주어진 것을 전유해서 정치에 활용한다는 발상은 미셸 페어 자신의 발상이라기보다는 페어가 참조하는 미셸 푸코의 권력론에서 온다고 볼 수 있어요. 푸코에게 권력은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하고, 억압하고 금지하는 권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게끔, 주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면서 작동되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억압적인 권력의 전범으로 생각하는 게 감옥, 군대, 학교 이런 곳일 텐데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감옥, 군대, 학교 같은 권력의 장치들이 그 장치에 입장한 주체들에게 어떤 역능을 함양한다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는 제식을 훈련시키고,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는 40분 동안, 중학교 때는 45분, 고등학교 때는 50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게 훈련시키는 등.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집중하게끔 만드는 그 훈련이 억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써 우리는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특정한 과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역능을 배양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체제에 입장한 신민들이 권력에 예속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자유와 의지를―비록 권력에 의해서 내면화되는 거긴 하지만―행사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 그게 푸코가 말하는 주체론이지요. 그 함의는, 주체가 되기 위해 내면화했던 권력의 작동 양식이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의 대전제를 어떤 식으로 전유하고 활용한다는 것.
페어는 이걸 통치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인간학(moral anthropology)’이라고 표현합니다(책 본문에는 없고 제가 했던 인터뷰 부분에 나와요). 그 도덕적 인간학이 산업 자본주의하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죠. 그 자유는 물론 아주 기만적인 자유죠. 자본의 착취를 가능케 하는 어떤 형식적 전제니까요. 즉 판매할 것이 노동력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 자유란 그 자유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굶어 죽을 자유이기도 하니까요. 가진 게 노동력밖에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대면할 때 한 가지 가능한 선택지는 이런 거죠. ‘너희가 말하는 자유는 기만이고 허구야! 말도 안 되는 거고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교설이고 협잡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노동운동가들은 그런 ‘자유’의 위선을 비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일정하게 활용했다는 거예요.
고용주들이 처음에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적게 주려고 카르텔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노동력 상품에 대한 가격을 집단적으로 내려치기를 하죠. 거기에 맞서 노동자들은 개인의 노동을 노동력 상품으로 성립시키고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하는 어떤 인간의 조건, 즉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통치의 조건을 거부하기보다는 이게 ‘맞다고 치고’ 파업이라는 집합적 행동을 통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교섭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했다는 거지요. 우리 노동력 상품을 개별적으로 거래할 ‘자유’를 가진 모든 개인이 연합해서 특정 임금, 특정 노동 조건을 보장하지 않는 작업장에 가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집단적인 협상을 벌였죠. 여기서 이제 복지국가도 나오고, 노동계급 정당도 나오고, 일련의 ‘진보 정치’라고 부르는 세력들이 성취했던 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페어가 던지는 물음은, 이렇게 통치의 전제가 되는 인간학, 즉 ‘인간이란 이러한 존재다’라는 조건을 전유하는 전략을 지금 시대에 해본다면 어떨까, 하는 거죠. 왜냐면 이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연합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걸 기반으로 협상했던 전략이 이른바 금융화 그리고 신자유주의화 이후에는 굉장히 불안정하게 돼버렸거든요.
첫 번째로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자본이 언제든지 노동력 가격이 싼 데로 옮겨갈 수 있게 됐죠. 그리고 두 번째는 (산업자본주의 같은 경우에는 제조업 기업들이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고 그걸 팔아서 어떤 산업적인 수익을 거둔 후 다시 재투자하고 이런 식의 모델이었다면) 지금은 단기적인 측면에서 주가 관리가 굉장히 중요해져 버렸고, 이걸 위해서는 소위 노무비용 절감이라 불리는, 임금으로 나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임금 수준도 조절하고, 고용 규모도 ‘유연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거든요.

희우
그러니까 경제가 금융화·세계화되면서 주주가치를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경영 관행에 맞서서, 노동자들이 ‘전유’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고 협상력이 약해졌다는 것이지요?

민서
그렇죠. 이 모든 과정에서 결국 노동조합들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빠르게 자금 투자와 투자 철회를 통해 작동하는 금융의 권력에 대적하기 힘들어졌다는 거예요. 과거엔 고용인-피고용인이라는 양자 관계였는데, 외부에서 주주(shareholder)라는 존재, 회사의 내부자가 아니지만 몫(share)의 담지자(holder)로 여겨지는 주주의 입맛에 맞게 경영이 돌아가게 됨으로써 피고용인이 고용인에게, 노동이 자본 측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에요.
즉 이때까지 진보 정치가 상정하고 활용하고 전유했던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조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돼버렸고, 그게 아니면 뭘까, 그 답이 페어가 볼 때는 ‘피투자자라는 조건을 활용할 수 있다’ 이게 책 1장의 논지라고 할 수 있겠어요. 1장이 기업 내부의 정치, 즉 기업 거버넌스가 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권력에 의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2장은 일국적 차원의 경제 조절과 사회보장을 성취했던 국가적 수준의 복지자본주의와 같은 기획이 어떻게 채권자와 투자자라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행위자들에 의해 제약되는지를 다루고 있구요.

피투자자라는 형상

민서
희우 씨는 ‘피투자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어떤 형상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우리 주변에서 이 개념을 가지고 조명할 수 있는 대상들이 있다면……

희우
실제로 페어도 그런 예를 들지만, 제 주변에 지원금을 받기 위해 지원서를 쓰는 젊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많아서요, 저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나네요.

민서
그렇지요. 펀딩을 끌어오려는 존재들, 그러기 위해서 포트폴리오를 짜고 관리하는 사람들. 자기 작업한 것부터 세계관, 취향, 네트워크 등 자신을 구성하는 넓은 의미의 포트폴리오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사람들 말이지요. 책 3장에서는 이걸 하이퍼페이지라고 부르는데, 홈페이지일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 같은 걸 수도 있고. 특히 모종의 ‘작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웹페이지에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올리잖아요. 그러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미학적 능력, 취향, 세계관, 성과 등을 전시해서 주목을 끌고, 관심이 되었건 화폐가 되었건 모종의 자원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걸 어필하잖아요. 희우씨가 주요하게 밀고 있는 어휘로는 ‘매력’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거죠. 우리 말 ‘매력’에 대응하는 영단어는 charm, attraction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제가 “매력도”라고 옮긴 “attractiveness”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구요. 기업이든 예술가든 자금과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의 척도랄까요. 페어가 이 책을 쓰기 10년 전에 쓴 글이자 제가 《문학과 사회》에 번역했던 글(「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 혹은 인적 자본의 열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영어로는 이걸 “self-appreciation”이라고 부르고 한국어로는 제가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킨다’고 번역을 했어요.

희우
맞아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민서
재밌게 읽었다니 다행이네요. appreciation의 명사형이 appreciate인데 이게 고마워하다, 가치를 인정하다, 알아보다, 평가하다, 그리고 자동사로 쓰이면 ‘가치가 상승하다’라는 뜻도 있어요. 주가 상승을 stock appreciation이라고 하거든요. 여기 앞에 “self”가 붙으면 ‘자화자찬’ 이렇게 많이 번역되는데요. 이게 그러니까 우리가 SNS에서 내 작품이 이번에 나왔다, 하고 올릴 때 그것은 단순히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알리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수행적으로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 평가하는 거고 사람들이 내 걸 감상하게끔 주목을 집중시키고 관심과 반응을 이끌 수 있도록 게시물을 올리는 거잖아요. 플랫폼에서 자기를 마케팅하고, 자기가 맨션될 기회를 높이고 좋아요와 팔로워와 하트를 유인하는 존재들…… 책에서는 이런 존재들이 ‘평판 자본’을 축적하려 하고 그걸 축적한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획득하려고 한다고 분석하는데요. 작년에 나왔던 아이브의 <키치>라는 노래 가사가 이런 주체를 전범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SNS에 뭔가를 올리고 상대방의 알고리즘에 노출되고 평판이 올라가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전시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해서 그걸 통해 더 많은 자본과 주목을 수행적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식의 주체성을 표상하고 있는 것 같아요.

희우
네. 저도 점점 그…… 광의의 ‘평판 자본’을 많이 신경 쓰게 되는 거 같은데요. 안 그러기가 힘든 것 같아요. 어쨌든 그건 확실히 제 관심사와도 연결되는 문제네요. 제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죠.
또 이 문제는, 아까 얘기했던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가 전제하는 ‘도덕적 인간학’과도 관련이 되는 듯해요. 페어 책에도 그런 내용이 있잖아요. 원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념적인 수준에서 목표로 했던 것은, ‘복지로 인해서 왜곡된 계몽주의의 혁명적 이상을 되살리는 것’이었다고요. 계몽은, 칸트의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타인에게 의존하는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잖아요. 칸트는 자신이 직접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의존하는 상태를 ‘미성년 상태’라고 하고 계몽을 거기에 대립시키죠. 또 칸트는 어른이 되고도 그런 미성년 상태에 안주하는 것에 개개인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신자유주의도, 적어도 이념적 수준에서는 어딘가에 의존하지 않는―권위에 의존하지 않지만 사회 부조에도 의존하지 않는―자유로운 주체들을 전제하고, 만약 우리가 계속 어딘가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나약하고 게으른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말하잖아요.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는, 이념적/이상적으로는 계몽주의의 이상과 비슷하게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자기 입법자’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자유는, 자유를 허용하는 합리적 체제에 대한 복종과 같은 의미죠. 한편으로 아이돌 가사에서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전시되는 주체는, 어떻게 보면 그런 계몽의 이상이 전도된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의존할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주체들인 것이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높게 평가하는 어떤 경제적 장에는 매여 있는……

민서
그렇죠. 자기 행동을 조직할 주권이 본인한테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결국 그 실천의 준칙은 주어진 매력의 경제라는 장 내에서 매력 상승을 담보해준다고 여겨지는 테크닉들로 국한되는 것이죠.

매력의 경제학

민서
여기서 희우 씨의 글 「매력의 경제학」과 좀 엮어서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이 책에서도 ‘매력도’ 얘기를 많이 하지만 매력은 남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잖아요.
희우 씨가 매력(魅力)의 ‘매(魅)’가 도깨비를 뜻한다고 하셨는데요. 매혹시키다, 내지는 매료시키다 할 때 그 ‘매’는 모종의 신비한 어떤 힘, 역능처럼도 보여져요.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끌려갈 때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거잖아요. 물리학에서도 attraction이 ‘끌개’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저는 이 매력이란 개념 자체가 굉장히 어떤…… 비표상적/비재현적 이론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힘, 소위 ‘정동적 전환’ 이후에 중요시되는 어떤 힘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희우 씨가 「매력의 경제학」에서 해석한 걸 보면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교실이라는 곳에서, 거의 처음으로 모종의 사회를 경험하는 주체들이 거기 입장했을 때 본능적으로 어떤 매력의 문법을 학습해 나가면서 그 학습을 바탕으로 매력의 기호를 학습하는 과정을 겪죠. 근데 그런 일이 교실이라는 어떤 원형적인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문인들과 예술가들도, 스타트업 창업주도, 기업들도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사실 요새 SNS에 자기의 매력을 전시하는 모든 존재가 그런 힘을 따라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비교질”이라고 사람들이 자조하는 어떤 등급 평가(rating) 문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고요. 저는 그 “매력의 경제학”에 ‘매력의 물리학’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어요. 매력은 상징적이거나 표상적이기만 한 힘이 아니니까요.

희우
맞아요. 근데 좀 부끄럽지만, 그 미숙한 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그 글을 쓰고 약 이 년이 지나는 동안 제 생각이 좀 더 정교화되고 바뀐 면이 있어요.
일단 매력을 중요한 개념으로 고찰해보려면 근대미학을 좀 들여다봐야 해요. 칸트도 ‘매력Reiz’을 언급하는데, 매력은 대상이 우리한테 미치는 효과이고, 우리가 어떤 매력을 느낀다는 건 대상의 감각적 특징에 휘둘리고 좌우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칸트한테 매력은 야만적인, 미성숙한 관심인데요.1 칸트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매력(charme)이 대상에 노예처럼 종속된 ‘파토스적인/병적인(pathologique)’ 관심이라고 말한 바 있어요.2
칸트 미학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의 능력들 사이의 조화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그건 대상의 역량이 아니라 순전히 주체의 역량이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 미학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칸트는 순수한 아름다움(주체의 역량)을 매력(대상의 역량)으로부터 정화시키고 분리하거든요. 칸트의 관심사는 인간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그리고 능력들 간의 관계니까요. 이게 결국 주체와 대상의 근대적 분리와 관련이 되는 문제죠.
아무튼 제 진단은, 동시대 문화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같은 거는 너무 낯설고 희귀하고, 심지어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매력이 너무나 일상적이면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 상황을 칸트의 미학이나 계몽관, 교육학에 대입시켜 보면, 매력을 중요시하고 매력에 좌우되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근대적 감상자 혹은 계몽된 주체보다는 훨씬 ‘야만적’인……

민서
칸트 입장에서 보면 매력의 세계로 ‘퇴행’했다고 볼 수 있는……

희우
그렇죠. 그러니까 ‘계몽’을 미성년 상태에서 이성의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주체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칸트의 문법에 비추어보면, 동시대 문화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의 비근대적인 문화가 된다는 것이죠. 물론 저는 이 문화적 경향을 새로운 감성적 배움의 조건으로 경험하고 사고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근대 미학과 다른 미학을 써야 한다는 거죠.
문학작품의 사례로 얘기해 보자면,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교양소설 중 하나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계몽의 모순, 계몽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손보미를 포함해 최근의 젊은 작가들이 쓰고 있는 성장소설/교양소설은 ‘배움의 다면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6학년 담임은 아이들을 매질하면서 ‘너희들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촉구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불합리한 엄석대 체제에서 좀더 합리적인 선생의 체제로 옮겨가기 위해) 아이들은 일단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선생의 매질에 복종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손보미의 소설을 포함한 최근의 한국 성장소설들에서는 선생의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혹은 선생이 한 명의 어른이 아니라 수십 명의 어른아이들과 애늙은이들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 소설들에서 배움은 또래 집단 속의 수치심, 매혹, 실망, 상처, 분노 등의 정동적 경험을 거쳐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죠.
소설의 교실에서 아이들이 무엇이 매력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떤 아이가 영향력을 갖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못한가를 감지하는 어떤 논리(제가 ‘매력의 경제’라 부르는 것)가 SNS에서의 전시나 피투자자로서의 가치 상승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경향을 그냥 비판하거나 분석하는 걸 넘어서 그 문화적 경향에서 어떤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보려면, 매력에 두 종류가 있음을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이게 제가 최근에 연구 중인 문제에요. 말하자면 표상적, 재현적 매력과 감각적, 정동적 매력이 있다고 할까요?
이게 또 한편으로는 번역의 모호성이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이를테면 칸트가 ‘Reiz’라고 불렀던 것, 리오타르나 들뢰즈 같은 사람이 언급한 ‘charme’, 영어로는 charm이라고 번역되는 그것도 한국어로는 ‘매력’이고, 페어가 말하는 ‘financial attractiveness’가 그렇듯 attraction도 매력으로 번역되고 있어요. 또 한국에서 『매력 자본』3이라고 번역된 캐서린 하킴의 원래 표현은 “Erotic Capital”인데요. 그 책의 논지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의 성적 매력 역시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지금 한국어에서 다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고 있어요. 근데 또 이게, 어떻게 보면,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매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모호하고 이상한 것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앞서 얘기했듯 매력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달리 감각적 자극, 성적 끌림, 도덕적 관심, 지적 관심, 미적 관심, 경제적 이해관심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경험적 차원의 인력이잖아요.

민서
Erotic Capital이 “매력 자본”으로 옮겨진 건 ‘매력’의 원형적인 이미지가 성적인 범주로 이해되서 그런 걸까요? 여러모로 ‘매력’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생산적인 모호성이 있는 것 같네요.

희우
맞아요. 경험적 세계의, 지저분하게 얽혀 있는, 분화되지 않은 그런 힘인 거죠. 저는 매력의 경제가 정치적 관심, 지적 관심, 미학적 관심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의 문화적 논리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아마도 이게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 계몽, 교양이 무력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매력을 두 종류로 나눠 보면 좀더 재밌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이 조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어요. 먼저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SNS에서의 자기 전시나, 아니면 투자자들 사이의 평판 등으로 평가되는 매력은 이미 전달 가능하고 유통 가능한 방식으로 재현된 매력이지요. 그렇게, 어떤 추상적인 기호들로 전시될 수 있고 평가될 수 있는 매력이 있는 한편으로, 아까 민서 씨가 ‘매력의 물리학’이라고 말씀했듯 훨씬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의 매력이 또 있죠.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면 저는 전자는 투자를 유인하는 힘이고 후자는 배움을 유인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자가 ‘우리는 사용가치보다 기호가치를 소비한다’고 했던 그 보드리야르적 의미의 기호와 관련된다면 후자는 들뢰즈적 의미의 기호랑 관련이 있어요.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는 언어처럼 추상화된 기호뿐만 아니라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것까지 포함하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목재를 만질 때 느끼는 까칠까칠함이나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같은 것. 들뢰즈는 그런 것들도 나무가 내뿜는 기호라고 하는데요. 조각가나 목수가 되려면 그런 기호들을 해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잖아요.

민서
비언어적이고 비표상적인 그런 것들……

희우
그렇죠. 어떤 예술 작품, 특히 회화 작품 같은 것이 그 두 종류의 매력의 모호한 중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매력적인 회화의 표면은 한편으로는, 가령 화가 지망생들한테는 배움을 유인하는 강렬한 기호들로 가득한 것이죠. 화가 지망생은 표면에 겹겹이 쌓인 물감들의 층이라든지 뒤섞임이라든지 갈라짐 같은 것들을 지적으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해독하면서 배우죠. 그런데 그렇게 매력적인 회화 작품은 많은 경우 투기 상품이 되잖아요.

민서
그렇죠. 이 그림은 뜰 거야, 하는 투기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게 매력에 대한 모종의 해석인 건지…

희우
하지만 그런 번역이 생각보다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젊은 화가는 당장 매력적인 회화를 생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값비싼 투기 상품이 되는 것은 작가의 자기 홍보(페어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 상승), 작가의 명성, 작가에 대한 평판, 경매된 이력, 비평가와 구매자, 투자자 들의 평가가 축적이 되고 난 이후니까요. 그래서 매력의 두 측면이 현실에서는 상호작용하고 변환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론적으로는 분리할 수 있고 분리하는 게 좋다는 거예요. 매력이 주체성에 미치는 효과를 사고하기 위해서 분리할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제가 「매력의 경제학」이라는 글을 쓸 때는 이런 생각들이 아직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매력이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논리, 재현 논리가 되었다는 비판과 매력이 어떤 비재현적인, 감각적인 배움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그 두 가지 논지가 섞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던 것 같아요.

민서
그렇네요.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중핵에 있는 매력과 거기서 우리가 되짚어 볼 수 있는 배움의 계기 내지는 배움의 절차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매력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느냐, 이 두 가지 문제가 섞여 있다는 얘기죠.
음, 저는 그 charm과 attractiveness의 구분이, 매력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와는 별개로 유용한 구분이라고 여겨지네요. 도식적으로 정리해보자면 attractiveness는 평판이나 어떤 고도의 상징적 기호들, 그리고 이제 그 기호들이 번역되고 유통되는 기호가치, 어떤 경제적인 재화로의 교환 가능성과 연결되는 매력이고, 또 다른 한편에는 비표상적이고 비언어적인 매력으로서 charm이 있다는 거네요. 마우리치오 랏자라또가 쓴 『기호와 기계』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보셨나요? 거기서도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를 구분하는데…

희우
맞아요! 읽어 봤습니다.

민서
그러니까 들뢰즈적 의미의 비표상적인, 상징화되기 이전에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육박해 오는, 그렇기 때문에 신비화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매력이 있는 거겠네요.

희우
그렇죠. 근데 그거를 어떻게 한국어로 나눠 부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칸트도 숭고를 얘기할 때 수학적 숭고랑 역학적 승고를 구분했어요. 매력에도 어떤 수식을 달아서 구분할 수 있을까요? 랏자라또처럼 기표적 매력과 비기표적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어떤 매력이든 평가되고, 소통 가능해지고, 수치화 가능하려면 기표적인 것으로 재현이 돼야만 하는 것이긴 하죠. 그렇지만 우리 삶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변화시키거나 하는 게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민서
말씀하신 예를 들어서 비표상적인 무언가가 떠오르더라도, 그걸 결국 시장에서 유통시키고 카탈로그를 만들고 비평을 하고, 또 콘텐츠를 큐레이션하고 이런 과정에서 그게 계속 상징화되고 기표가 될 텐데, 그거는 일종의 사후적인 프로세스인 거고 그 이전에 애초에 비기표적인 어떤 것이 왜 우리의 주목을 끄는가를 해명하려면 어떡해야 할지는 좀 생각해봐야 하겠네요. 표상 이전에 존재하는, 날 것의 힘들이 경합하는 세계…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힘의 시험(trial of strength) 같은 것도 떠오르구요. 저로서는, 희우 씨가 비평했던 손보미 작가의 소설에서는 교실이라는 현장으로 표현됐고 우리 얘기에서는 SNS와 같이 거의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학습의 장이자 동시에 자기를 전시하는 전시장, 그런 세계를 분석할 때 이런 개념의 구분이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희우
정확히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매력이 중요한 자기계발의 요소이자 산업적 논리가 되고 SNS 같은 것도 ‘자연스러운’ 소여로 느껴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한편으로는 전시장이나 투기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넓은 교실, 한 명의 ‘어른 선생’이 사라진 교실이기도 한 것이죠. 우리는 자신의 가치평가를 높이려고 애쓰는 피투자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야만적’인,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상태’에 유예된 사춘기 학생들이기도 하다는 거죠.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것이 동시대 문화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지금은 모호한 가설 수준인 것이고, 이제 좀 연구를 해야겠지요. 그러면서 다른 분과들, 사회학이라든지 경제학 등으로 많이 확장하고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피투자자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민서
『피투자자의 시간』을 우리 논제에 맞게 좀 과감하게 재해석을 해보자면(여기서부터는 옮긴이보다는 독자로서 말해보려 하는데), 그걸 ‘투자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업 경영, 국가 정책, 사회운동까지 자금의 흐름 그리고 자금의 흐름을 좌우하는 평판의 흐름, 주목의 흐름, 무엇이 윤리적·미학적으로 우월하다는 거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 ESG 투자도 마찬가지고… ‘이 시대에 이럴 수는 없어’, ‘저건 정말 아니야’라는 판단을 사람들이 다 갖고 살아가잖아요. 무언가를 접할 때 어떤 윤리적·미학적기준에 따른 생래적인 거부감 같은 게 발생하고, 그걸 통해 특정한 집단, 혹은 투자 대상의 매력도는 낮아지는, 이런 식의 동학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폐어가 말하는 것은, 결국 그게 기업의 투자를 넘어서는 자금, 시간, 노력, 평판, 매력, 감정 이런 것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 흐름들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재구성할 건지가 『피투자자의 시간』이 제기하는 과제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금융에 대한, 그리고 금융과 얽혀있는 이 비금융적인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된 투자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을 번역하고 필드워크를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가치, 대의, 정치인, 집단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고 그 대상에게 돈이든 시간이든 관심이든 내가 가진 자원의 일부를 ‘투자(invest)한다는 것. 나의 일부를 그만큼 던져넣는다는 건, 그 비율에 비례해서 그 대상의 운명과 내 운명이 일정하게 묶이는 것이기도 하고, 거기서 그만큼의 유대(bond)가 발생한다는 것.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세계를 이런 방향으로 만들어나가는 흐름에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서있고 싶다. 나도 그 일부가 되어, 오롯이 함께하진 못해도 그 에너지의 흐름에 뭔가를 보태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시간이나 에너지를 쏟게 되는 것 같거든요. 어떤 단체나 개인을 후원할 때도 이런 맥락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 같구요. ‘투자(投資)’의 ‘자(資)’는 일차적으로는 자본, 재물이나 금전을 의미하지만 – 어떤 내러티브를 가지고 사회를 ‘혁신’하겠다고 천명하는 스타트업이나, 테슬라 같은 기업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 시간을 투자한다, 관심을 쏟는다는 것도 사실 같은 맥락인 것 같구요. 사회이론적으로는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의 경제학도 이런 ‘투자’의 대상이 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비경제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용례에 해당하구요.
이걸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얘기와 엮어보면, 매력의 정치경제라는 거랑 닿는 거 같아요. 무엇이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지를 둘러싼 사람들의 경합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희우
그렇죠. 실제로 페어 책에도 그런 얘기가 있죠. 대안 투자 혹은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목표는 매력도가 평가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이라는.

민서
매력도라는 게,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모종의 에너지들의 흐름을 조건 짓는 것일 텐데, 그 매력의 평가 기준은 미학적일 수도 있고 윤리적일 수도 있고요. 책에서도 언급하는 노스다코타 파이프라인 투자 철회(#DefundDAPL) 운동처럼 미국의 화석 연료 석유를 운송하는 송유관에 대한 투자가 왜 매력적이지 않은지를 그 운동가들이 끊임없이 알리는 방식으로 운동이 이루어지잖아요.
결국 그것도 매력이 평가받는 매력도에 평가 기준을 바꾸고 그걸 통해 매력 평가에 근거한 신용 할당 기준을 바꾸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신용 역시 매력이랑 마찬가지로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어떤 비경제적인, 일종의 정동적인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희우
예, 근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의문이 한 가지 있는데, 이른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입장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거예요. 페어는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를 언급하는데요.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페어의 부정적인 평가가 의문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말했듯 ‘정동의 흐름’ 같은 것과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좌파 포퓰리즘과 페어의 주장에는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거든요.
저도 무페의 작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무페의 기본적인 전제는 제도적·법적·물리적으로 현행화된 ‘정치(politics)’와 그것의 사라지지 않는 구성적 외부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다르다는 것이고, 정치를 끊임없이 탈구축하고 재구축하는 ‘정치적인 것’―어떤 적대라든지 불만, 분노 같은 것들―이 해소될 수는 없다는 거지요. 그것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는 어떻게 적대나 갈등을 ‘해소’할 것인가가 아니라 적대와 갈등의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어디에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가 되지요. 그런 흐름의 형성이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면, 페어가 말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효과적으로 되기 위해 그런 정동적 흐름들을 조직하고 흐름들에 개입하는 문제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왜냐면 결국 사람들이 투자를 통해서 그냥 부자가 되고 자산을 증식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거를 욕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잖아요. 사람들이 뭔가 다른 걸 욕망한다는 것은 현 상황에 대한, 처지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분노가 있다는 뜻이고요. 욕망의 흐름을 그렇게 조직할 수 있을 때 금융자본주의 조건을 전유해서 어떤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겠다는 전략도 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지……

민서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첫째가 좌파 포퓰리즘이 이야기하는 정치적 적대라는 게 피투자자 액티비즘에서는 무엇이냐, 아니 있기는 있냐. 이건 투자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기획 자체를 의문시하기보다는 금융시장 내부로 들어가버리는 게 아닌가. 사실 이건 꼭 좌파 포퓰리즘의 시각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둘째 측면은, 희우씨가 욕망과 정동의 문제라고 말한 부분인 것 같아요.
첫 번째 지점에 대해서는 제가 북토크를 하면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기도 한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이런 식으로 이해가 많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특정 기업이 비윤리적인 관행을 보이니 동일 업종의 다른 회사 주식을 사는 게 대항 투기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를 많이 하시는데요. 하지만 일단 페어가 말하는 대항 투기는 사회운동의 레퍼토리지, 돈을 벌 목적으로 개인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투자를 어디다가 하자, 이런 건 아니에요. 범박하게 말해 민주주의 정치는 1인 1표인 것과 다르게 금융시장의 정치는 1원 1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선각자적인 개인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금을 끌어서(상대적으로) 대안적인 기업에 투자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명확하잖아요. 페어가 얘기하는 거는 그래서 어떤 기준으로든 윤리적이고 좋은 기업, 혹은 대안적인 기업에 우리의 자금을 할당하여 돈도 많이 벌고, 이렇게 꿩 먹고 알 먹고 하자는 게 아니에요. 거대한 자산 시장의 흐름을 움직이는 잣대들과 가치들이 있잖아요. ESG처럼 ‘바람직한’ 자산 할당의 기준을 변경시키는 걸 목표로 삼자는 거죠.
어쨌든 그 오해를 해명하고 나서도 남는 두 번째 쟁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가령 트럼프 같은 우파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왜 떴을까를 이해하려면 사람들의 정서적·정동적인 흐름과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거죠. 적대의 선이 지금은 외국인 타자, 이주민 타자, 여성 타자, 장애인 타자 대(對) 우리라는 식으로 그어지고 있지만, 그 전선을 정말 이런 문제를 몰고 온 주범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했던 엘리트 세력에게로 돌리자, 이게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일 텐데요. 아까 하신 질문은 페어에게는 이런 정동의 어떤 재배치 내지는 그 흐름이 다르게 흘러갈 물길을 어떻게 터줄 거냐, 이런 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안 보인다는 말씀인 것 같아요.
저도 타당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페어의 독자로서 우리가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 고민을 전개시켜볼 수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우리 대화랑 계속 연결되는 지점인데 매력이라는 개념이 기표적이면서도 비기표적인 측면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죠. 기후금융에 관련된 필드워크를 하다보면 어떤 특정한 이미지들의 질서 같은 게 있어요. 이건 지금 제가 하는 연구와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지금 인류세 시대의 어떤 파격적인 재해의 스펙터클, 이제 그것 때문에 멸종되어가는 생물종들의 얼굴, 그런 이미지들이 뿜어내는 어떤 정동적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절망적이거나 희망적인 미래상을 담은 풍경들. 이건 정말 아니다, 아니면 저렇게 가야 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 펀드매니저들도 사회운동가들도 그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모종의 추적을 강화시켜 나가는 그런 이미지 유통과 인용의 질서 같은 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여기에 어떻게 비판적으로 관여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있으면 어떨까요? 페어가 제시하는 투자의 정치경제학을, 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력도 혹은 매력이라는 키워드를 매개해서, 정동적 차원에 대한 고려와 함께 가져갈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지 않을까요?

희우
예. 그런 것들이 같이 이야기됐을 때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최근에 다시 샹탈 무페를 읽고 있는데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아주 동시대적인 저술들인 것 같아요. 저도 무페(혹은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비판하는 저술들만 많이 읽어서 사실 ‘한물 간 이론’ 정도의 막연한 상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직접 읽어보니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경우 많잖아요. 어떤 저자가 많이 비판 받을 때, 막상 직접 읽어보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는 경우. 제가 오래전부터 고민했던 것도 비슷한 문제인데, 민서 씨도 아시겠지만, 제가 한 7년 전에, 비평가로 등단하기 한참 전에 발표했던 「여성성이라는 환상, 남성성이라는 증상―한국 군대와 페미니즘」(2017)이라는 어설픈 글이 있어요. 전역한 이듬해에 썼던 글인데, 엉망인 글이지만…… 그 글에서 제 진단은,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사이의 모순을 경험하는 한국의 젊은 남성들이, 그 분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한 여성성의 ‘환상’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런 환상에 고착된 남성들이 점점 더 심각한 사회적 ‘증상’으로 대두될 거라는 것이었죠. 한국 군대에서 어떤 여성혐오적인 감정이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봉합’하는 것으로서 활용이 되고 구조적으로 생산이 되고 있어요. 그런 진단 위에서, 그렇다면 그 불만이나 고통, 분노, 억울함 등의 정동을 어떻게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가 아닌, 군대 체제나 부조리, 군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었고요. 그런데 이 문제는, 제가 그 글을 썼던 때보다 지금 더, 훨씬 더 절망적으로 나빠졌잖아요.

민서
그렇죠. 그 글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 때 짚으셨던 경향이 확실히 더 짙어진 것 같아요.

희우
왜 이 지경이 된 걸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다가 무페를 다시 읽게 됐어요.
그리고 앞의 문제랑 좀 연결되는 것일 수 있는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말하자면 다소 엘리트들의, 혹은 최소한 ‘프레카리아트’라고 하는, 가난하지만 고학력이고 도시에 거주하는……
저 역시 프레카리아트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아무튼 페어의 대안은 그런 존재들이 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페어는 과거의 노동운동과의 유비 속에서 액티비즘을 얘기하는데, 페어는 아니라고 하지만,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과거의 운동을 대체하는 것인가 하는 느낌도 들죠. 어쨌든 이 유비 안에서 생각해 봤을 때, 노동자라는 경제적 조건을 통해서 단합할 수 있었던 노동운동에 비해서 피투자자 운동이 그 정도의 대중성이나 조직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부분도 좀 궁금하네요.

민서
두 가지 쟁점이네요. 하나는 피투자자 액티비즘이라는 것의 주인공인 피투자자들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춘 사람들에 한정되는 게 아니냐 이런 쟁점이고, 두 번째는 이거랑 연결된 질문으로서 이 운동이 노동운동만큼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냐는 질문인데요. 이건 노동운동과의 관계 맺음이라는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두 번째 것부터 답변을 해볼게요.
이 책에 굉장히 여러 논지들이 있지만 사실 책의 구조 자체는 굉장히 간명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책의 소제목들이 A&B 식인데, A에 해당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의 정치와 운동을 설명하는 어휘들이고, B에 해당하는 것은 금융화 이후의 사회 문제, 새로운 사회 문제, 이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필요한 어휘들이지요. 근데 이 A와 B의 관계가, 제가 볼 때는 경우에 따라 어떤 거는 대체에 가깝고 어떤 건 대체라기보다 병존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근데 확실한 건 저자도 얘기하고 있지만 산업자본주의적 착취만으로 설명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지, 과거의 문제가 사라졌다거나 비중이 적어졌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금융자본의 위세에 주목한다 할지라도,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문제, 곧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고 여기에 대한 노동운동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요.
작년에 진행했던 북토크 중에, 플랫폼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라이더유니온에서 활동하셨던 분이 토론해주셨던 내용이 기억이 남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을 경유한다고 해서 노동운동의 레퍼토리를 배제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기성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레퍼토리를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는데요. 저는 이런 고민을 통해 피투자자 액티비즘도 지금은 낯설지만 더욱 대중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 3장에서 다루는 플랫폼 자본주의 관련 투쟁 현장은 물론이고 금융적·비금융적 가치평가가 중요한 다른 전선에서도요. 여기까지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요.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저자도 3장에서 희우 씨가 말씀하셨던 비판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3장에서 얘기하는 게 플랫폼 라이더들 혹은 배달 플랫폼에 혹은 그런 뭔가 별점 평가를 주고받고…… 페어가 플랫폼 협동조합 이런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은 디지털 리터러시가 있고, 대안적인 플랫폼을 만들 수 있고, 그걸 통해 자기를 이렇게 전시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존재들인데요. 그러면 이게 과연 ‘보편화’될 수 있는 전략이냐 이런 의구심이 당연히 저는 나올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페어가 얘기하는 것 중 하나는,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자유로운 상품 거래자라는 자유주의적 인간의 조건을 전유했던 주인공들이 당시로서는 극소수였다는 거죠. 그렇지만 사후적으로 볼 때 그건 일종의 부상하는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고, 앞으로 점점 커져갈, 전범적인 존재들이었던 거죠. 지금 프레카리아트-피투자자 액티비스트들도 수적으로는 작을 수 있어도 앞으로 점점 중요해질 흐름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어요. 여기까지가 옮긴이로서 할 말이라면, 독자로서 덧붙이자면 저는 앞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운동에 대한 예측이 한 사람의 이론가의 몫이라기보다는 운동과 이론이 주고받으면서 만들어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희우
그렇군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책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이 질문은 민서 씨가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오래 고민했을 문제일 거예요. 어찌 보면 너무 거창하면서도 여러모로 괴로운 질문인데요.
기후 문제의 광범위한 시급성에 비추어봤을 때, 페어의 전략이 너무 소극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지요? 사실 한국어판 뒤에 민서 씨랑 페어 인터뷰가 있잖아요. 굉장히 인상적이고 엄청난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도 페어가 이런 문제를 스스로도 좀 의식을 하는 것 같았어요.

민서
감사합니다(웃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인터뷰를) 하기 잘한 것 같아요. 그런데 희우씨는 기후 문제가 시급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시급한 것 같나요?

희우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민서 씨보다 훨씬 모를 것 같아서 자신은 없지만요, 예를 들면 ‘생태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곤 하는 입장의 책들을 봤을 때, 이를테면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저자들의 책을 읽었을 때는 지금 당장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중단되고 새로운 체제가 나타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건 그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기후 생태 문제의 전문가인 과학자들도 그렇게 얘기를 많이 하고 있잖아요.

민서
그렇죠.

희우
그런데 페어의 전략은, 이건 이 책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푸코식 ‘비판적 전유’의 일반적 문제일 수도 있는데, 지금 현존하는 체제, 이 체제에서 유용한 것으로 식별되고 재현되는 조건들 ‘내부’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이런 방식으로 세계적으로 고착화되어 있고, 어떤 투자자들과 거대 기업들이 행성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런 상황이 우리의 주체성을 조직하고 있는, 이런 조건들 내부에서 약간씩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방법인 거죠. 그러니까 어떤 엄청난 속도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러 저술에서 제기되는 대안들이, 어떤 거는 너무 급진적이어서 그게 옳다는 건 납득이 가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고, 한편으로 페어의 책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실천이나 저항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는 좀 구체적인 상을 주지만, 이것만으로 괜찮을까 하는 의심이 남습니다……

민서
말름이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4에서서 얘기하는 게 그런 거죠. 기후위기의 시급성,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파국적 재난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속하고 급격한 단절이다. 그리고 그걸 이루어낼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주체의 형성이 시급하다. 말름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그 혁명적 시도의 합리적 핵심을 기후위기 시대에 되살려야 된다는 거고요. 그걸 ‘생태적 레닌주의’라고 표현하죠. 거기서 두드러지는 건, 지금 당장 무언가 시급히 일어나야 한다는 호소죠.
말름이 인용하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이 전개되던 와중에 동지들한테 썼던 글 중에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기다리는 건 범죄다.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의회를 기다릴 권리가 없다… 기다리는 건 형식적인 걸 따지는 유치하고 불명예스러운 게임이고, 혁명에 대한 배반이다” 등등. 지금 기다리는 와중에도 온갖 모순이 폭발하고 있고,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인페이션트(impatient)의 감정이 가득한 글입니다.
반면 페어는 지금 존재하는 통치 질서를 우리가 끝까지 한번 잘 활용해 보자는 식의 주장인데, 말씀하신 대로 그게 현실성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현실로 여기는 것들이 붕괴하고 있는 시점이라면 그 ‘현실적’인 선택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기성 체제 내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건 기성 체제가 권장하는 어떤 비판을 통한 변화의 게임에 일정한 정당성과 가치가 있다는 걸 승인하는 거기도 하구요. 맞아요. 말름과 페어의 논의는 맥락상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이걸 좀 큰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페어가 계속 갖고 가는 유비, 즉 노동조합 운동과 피투자자 액티비즘의 유비가 한계에 봉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노동조합들이 임금 단체 협상을 하고, 복지국가를 만들어내고, 좀 더 인간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를 위해서 노력해 온 건 맞지만, 그 목적이 과연 정말 ‘인간적인 자본주의’ 자체였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해석도 많단 말이죠. 이건 페어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그렇게 저항해서 끊임없이 자본의 효율을 낮추고,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이른바 ‘이윤율의 경항적 저하’를 앞당겨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격화시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그러니까 이 체제 자체를 ‘지양’한다는 계기가 노동운동에 있었다는 거죠. 체제 자체를 좀더 인간적으로 개량하는 것을 넘어서요. 페어가 기후 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지금 기후 파국을 초래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전망이 피투자자 액티비즘에 있는가? 여기에 확실하게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렵죠.
다만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가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책에서 나오는 화석 연료에 대한 투자 철회 운동이나 ESG를 활용해서 일정한 제도의 변화를 도모하는 일군의 집단들, 이전이라면 함께하기 힘들었을 집단들(투자자, 컨설턴트, 노조, 씽크탱크 연구원 등등)이 모이고 새로운 운동의 형식을 창안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걸 조명하는 데 페어의 논의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페어 논의와는 별도로, 제가 말름의 그 책을 읽고 든 생각은… 레닌주의의 ‘지금 당장 단절하고 넘어가자’는 식의 주장이, 당위적으로는 공감이 되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이게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에 대한 전망이 잘 안 보인다는 거예요. 필요성과 가능성 간에 괴리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기후금융 연구를 추동하는 물음도 이런 괴리감과 무관하지 않구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1.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p. 218-19. ↩︎
  2.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 뤽 낭시 외, 『숭고에 대하여』, 김예령 옮김, 2005, pp. 198~99. ↩︎
  3.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2013. ↩︎
  4. 안드레아스 말름,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우석영·장석준 옮김, 마농지, 2021. ↩︎